오기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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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2    "21세기의 '리시진' 김수철 전"(련재 45) 댓글:  조회:1399  추천:1  2022-04-03
제 3부                           신문잡지로 읽는 김수철       18,    래일을 생의 마지막날로 삼고 “당신이 얼마나 더 오래살수 있을지, 언제 죽음을 맞이 할지?” 이런 물음에 확답할 사람이 아마도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마치 영원히살 것처럼 해야할 일들을 뒤로 미루는 것이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현실이다. 그런데 연변대학농학원식물학박사 김수철(93세)교수는 침대머리에 ‘죽음체험’이란 글을 큼직이 붙여놓고 ‘영원히 살 것처럼 배우고 래일 죽을 것처럼 일한다’묘 죽음을 맞이한다. 김교수는 정년퇴직후에 식물학연구의 새로운 황금시기를 맞이하며 인생 후반전에 멋진 ‘꼴’을넣고 있다. 김교수는 “이미 출판한 《길림성식물명록》에 빠진 것이 많아서 내가 보충해야지...” 하며 몇 년전부터 자기가 수십년간 수집한2600종의 식물표본으로 《길림성식물독본》을 출판할 타산이다. 90고령에 안해를 딸집에 보내고 영, 한(汉)문설명문에 직접 그린 2300폭의 그림을 배합하고도 더 좋은 책을 만들겠다며 지난해부터 혼자몸으로 성내외를 다니며 사진을 찍으며 고군작전을 하고있다.. 지난 10월 27일에 김교수가 들려준 얘기이다. “지난 겨울 어느날 새벽에 찬바람을 맞고 잠에서 깼지요. 정신은 멀쩡한데 몸이 말을 안들어서 약 15분간 움직일수 없었습니다. 이에 중풍징조라는 예감이 들어 정신을 가듬고 악을 써 끝내 침대에서 굴러 떨어진 다음 기어코 “구급상비상자”가 있는데까지 뒹굴며 가서 발바닥에 뜸을 떴지요. 한참지나니 몸이 정상으로 회복 되더라구요.” “그일이 나한테는 죽음체험이 되였지요, 그래서‘ 죽음체험’ 4자를 영, 한문으로 써서 침대머리에 붙여 놓고 래일을 생의 마지막 날로 생각하며 오늘의 일에 열심하고 있습니다.” 죽음은 삶의 가장 큰 상실이 아니다. 가장 큰 상실은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우리가 어떤 것을 죽여 버리는 것이다. 삶은 기회이고 아름다움이며 놀이이기도 하다. 삶을 붙잡고 감상하고 누리는 것은 자신에게 달린 몫이다. 누구나 죽음을 피할수 없다. 그렇다고 너무 늦을 때까지 기다려서도 안된다. 독일의 노벨상수상자 하우프트만은 “매일을 당신의 최초의 날인 동시에 최후의 날 처럼 살라”고 했다. ‘오늘은 인생의 최초의 날이다.’고 생각한다면 얼마나 많은 희망과 기대를 가질수 있고 “오늘은 인생의 최후의 날이다”고 생각한다면 삶의 희망과 계획을 이루기에 최선을 다 할것이다.. 오기활: 길림신문  2017-11-09 12:  (본문은 길ㄻ신문 2017년 우수칼럼으로 평선 되였음)    
401    나도 너도 행복하고 세상도 행복해지기 위하여 댓글:  조회:2570  추천:0  2022-03-24
동기부여 연설가이며 작가인 찰스 존스는 “두 가지에서 영향을 받지 못한다면 우리의 인생은 5년이 지나도 지금과 똑같을 것이다. 그 두가지란 우리가 만나는 사람과 읽는 책이다.” 고 했다. 필자가 오늘 만난 “감동의 편지”가 생활에서 흔히는 만나지만 행하자면 쉽게 외면 당할 수 있는 “나도 너도 행복하고 세상도 행복해지기 위한” 인생의 지혜가 담긴 “책우”라 하겠다.  그래서 필자는 나만이 아닌 당신의 행복과 세상의 행복을 위하여 모두가 함께 공유하고저 편지의 몇개 단락을 추천한다. *** *** ㅡ 약속시간에 늦는 사람과는 동업하지 말라. (시간 약속을 어기는 사람은 모든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 ㅡ 어려서부터 오빠라고 부르는 녀자아이들을 많이 만들라 (그중에 한 둘은 안 그랬다면 말도 붙이기 어려울 만큼 예쁜 아가씨로 자랄 것이다) ㅡ 식당에 가서 맛있는 식사를 하거든 주방장에게 간단한 메모로 칭찬을 전해라. (주방장은 자기 직업을 행복해 할 것이고 너는 항상 좋은 음식을 먹게 될 것이다.) ㅡ  좋은 글을 만나면 반드시 추천을 하라. (너도 행복하고 세상도 행복해진다) ㅡ 녀자아이들에게 짓굳게 하지 말라. (어린 여자나 나이든 녀자나 다 신사를 좋아한다) ㅡ 양치질을 거르면 안된다. 하지만 빡빡 닦지 말라. (평생 즐거움의 반은 먹는 것에 있다) ㅡ 노래하고 춤추는 것을 부끄러워 말라. (친구가 너를 어려워 하지않을 것이며 안해가 즐거워 한다.) ㅡ 어려운 말을 사용하는 사람과 너무 례의바른 사람을 집에 초대하지 말라. (굳이 일부러 피곤함을 만들 필요는 없다) ㅡ 가까운 친구라도 남의 말을 전하는 사람에게는 절대로 속을 보이지 말라. (그 사람이 바로 내 흉을 보고 다닌 사람이다) ㅡ 나이 들어가는 것도 청춘만큼이나 재미있다. 그러니 겁먹지 말라. (사실 청춘은 청춘 그 자체를 빼고는 다 별것이 아니다) ㅡ 양말은 반드시 펴서 세탁기에 넣어라. (소파 밑에서 찾아낸 도넛이 된 양말을 흔드는 사나운 아내를 만나지 않게 될 것이다.) ㅡ네가 지금 하는 결정이 당장 행복한 것인지 앞으로도 행복할 것인지를 생각하라 (법과 도덕을 지키는 것은 막상 해보면 그게 더 편안하다) ㅡ 돈을 너무 가까이 하지 말라 (돈에 눈이 멀어진다) ㅡ 돈을 너무 멀리 하지 말라. (너의 처자식이 다른 이들에게 천대를 받는다) ㅡ 밥을 먹고 난 후에는 빈 그릇을 설거지통에 넣어라. (엄마는 기분이 좋아지고 여자친구 엄마는 널 사위로 볼 것이며 네 안해는 행복해 할 것이다.) ㅡ 심각한 병에 걸린 것 같으면 최소한 세 명 의사의 진단을 받아라. (생명에 관한 문제에 게으르거나 돈을 절약할 생각을 말라) ㅡ 5년 이상 쓸 물건이라면 너의 경제능력 안에서 가장 좋은것을 사라. (결과적으로 그것이 절약이다.) ㅡ 베개, 침대, 이불은 가장 좋은 것을 사라. (숙면은 숙변과 더불어 건강에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ㅡ 오줌을 눌 때에 바짝 다가서라. (남자가 흘리지 말아야 될 것이 눈물만 있는 것은 아니다) ㅡ연락이 거의없던 이가 찾아와 친한 척하면 돈을 빌리기 위한 것이다. (분명하게 “노”라고 말해라. 돈도 읽고 마음도 상한다) ㅡ친구가 돈이 필요하다면 되돌려 받지 않아도 될 한도 내에서 다해줘라. (그러나 먼저 네 형제나 가족들에게도 그렇게 해줬나 생각하라) ㅡ 네 자녀를 키우면서 효도를 기대하지 말라. (나도 너를 키우면서 너 웃으며 자란 모습으로 벌써 다 받았다.) 끝 오기활
400    “일년에 이런 책을 서너권 읽으면 되오” 댓글:  조회:2573  추천:0  2022-03-08
                 “일년에 이런 책을 서너권 읽으면 되오”   103세 할머니의 인생 스토리    필자는 올 3.8절을 맞아 100세 시대의 실존인물로  103세 고령의 할머니를 독자들에게 소개하고 싶었다. 하여 기획하고 부탁했던 “李南祚 어머님百岁上寿宴”록화테프를 일전에 연변대학 김화림교수를 만나 교대받고  시청한후 3월의 첫날에 연길에 가서 리남조할머니를 방문 하였다. 리남조할머니는 지난 60년대에 도문서 나의 큰 누님(오계옥)과 길을 사이두고 가깝게 지낸 이웃이고  할머니의 둘째 딸과 나는 도문중학교 동반동창이며 또 할머니는 나의 글을 빼놓지 않는다는 독자팬이다..   그런데 어제밤에 만난 동영상에서 백세 할머니가 가슴팍을 쭉 펴고 두손을 높이 쳐들었다가 다시 허리를 굽혀 두손으로 땅을 짚는 운동을 련속하던 씩씩한 할머니가 8개월전에  “락상(落傷)”사고로 다리뼈가 절골되여 대수술을 받았다니 실로 “병이 눈섭에서 떨어진다”는 속담이 맞는 말이였다.     오전 10시경, 나를 만난 할머니는 그렇게도 기뻐하였다. 나의 손을 잡고 “오기자가 온다더니 정말 왔구만...” 을 시작으로  “오계옥이 무사하오?”,  “지금 하는 일은 잘 되오?”,  “올해에 몇살이던가,  이른 여섯이라, 한참 젊은 나이니 얼마 좋소”...며 서로간  무릎말을 련속주고 받으면서.. . 서로간의 수인사를 끝낸후 내가 “ 3.8절 기념으로 103세 리할머니에게 100세 할아버지를 소개합니다”며 연변농학원 김수철교수의 자서전을 드렸더니 책을 받자마자 책장을 펼쳐보며 “일년에 이런책을 서너권만 읽으면 되오” 하며 김교수의 최근의 건강상황을 물으시며 그렇게도 기뻐하셨다.   리남조할머니의 할아버지, 아버지, 언니는 유명한 반일독립투사이다.  연변대학 인문학원 손춘일 교수에 따르면 리남조의 할아버지 리수원은 1874년 12월 30일에 한국경상북도 려천군 무아리에서 리동락의 독자로 태여나 1913년 까지 동네 서당에서 훈장으로 지내면서 반일시(反日诗)를 썼다는 리유로 일본 경찰서의 체포령이 내리자 바로 이튿날에 가족을 데리고 조선으 떠나 당년에 조선인 반일 독립운동의 중심지로 불리는 중국 통화시 삼원포(지금의 류하현)에 정착하였다. 리수원은 1914년부터 1924년까지 사이에 사비를 팔아 길림성류하현, 흑롱강성 녕안현 밀강촌과 동경성진에 각각 학교를 꾸리고 직접 교장직을 맡았다. 그가 꾸린 3개 학교는 중국에 이주온 조선인 자녀들의 문화교육을 목적으로 반일 독립운동 후비인재 양성을 하였다. 리수원은 이 학교를 발판으로 독립군 전문양성기지인 “신흥무관학교”에 많은 우수한 인재들을 추천하였다.   한국 대종교 교주이며 독립운동가인 윤세복이 1911년에 중국에 와서 학교, 교당, 독립단, 포수단을 설립하고 반일 독립운동을 전개할 때 리수원도 그를 협조해 녕안현 동경성의 “협창학교”와 녕안현의 “대종교”를 합병해 중국 반일단체인 “대종학원”을 설립하고 반일 독립운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그때 리남조가 몇년간 대종학원에 다녔다). 그리고 리남조의 아버지 리대성(李大成)은 중국공산당 목단강지역의 지하조직 무장병워원으로 1913년에 부친과 함께 중국에 오자부터 반일 독립운동에 참가했다. 리대성은 중국공산당 지하당조직인 “녕안현 무장병위원”을 맡고 동북항일련군과 함께  항일무장투쟁을 펼치다가 1945년 8월 8일에 동경성 일본헌병대에 체포되여 갖은 고문을 당하고 8월 19일에 총살되였다. 리남조의 언니 리근숙(李根淑)은 어려서부터 혁명가문의 영향으로 혁명에 참가하여 1930년 중국공산당에 가입, 1932년부터 동북항일련군의 선전부장 겸 부녀주임사업을 맡았고  1936년에 쏘련에 파견되여 모스크바대학에서 3년간 공부하고 1939년에 귀국한후 녕안형 동경성에서 지하공작을 하다가 반역자의 밀고로 체포되여 갖은 고문을 당하다가 1941년 4월에 녕안현 사랄진에서 일분군에게 총살되였다. 이렇게 3대가 반일독립혁명렬사가정에서 자란 리남조는  일곱 남자오빠들이 반일운동으로 밖에서 돌다보니 10살부터 어머니를 도와 농사일을 하였다.   결혼후 리남조는 중년에 남편을 잃고 혼자서 2남 6녀자식들의 뒤바라지를 담당하여 슬하에 박사, 석사, 의사, 교수를 5명을 산출한 위대한 어머니며 자랑스러운 할머니이다. 할머니는 기억력이 좋고 한글(汉字)과 한어에 거의 막힘이 없는 “현대식할머니”로  딸집에 놀려 다녀도 당신이 읽을 책과 신문잡지를 꼭 챙긴다고 한다. 지금 그의 가족은 5대에 53명이 중국, 한국, 미국, 오스트랄리아 등 5개 국에서 살고 있다.  이날 할머니와의 2시간 남짓한 무릎마중에서 필자는 103세 고령할머니의 기억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저 지난번에 올렸던 화제를 재문하였는데 화답이 그렇게도 여전하고 확실하였다. 이하는 간추린 인터뷰채록이다.  언제 중국에 왔습두?    증조할아버지가 한국 경상북도 예천군 용궁면 무의리에서 백년 전에 가족을 데리고 압록강을 건너 단동, 심양, 해림에서 살다가 흑룡강성 동경성에 정착했다.  나는 1920년 9월 3일 심양서 출생했다. 문화정도는?  할아버지게서 한글(韓文)과 한자(漢字)를 배우다가 할아버지가 꾸린 6년제학교에서 4년간 공부했다. 결혼은? 혼령이 되자 아버지의 주선으로  당시 목당강 동경성에서  행정대서(行政代书)로 지내는  김석주의 큰아들인 김병훈씨와 결혼하고 2남6녀를 낳았다. 남편은 당년에 심양동문상업학교(奉天同文商业学校)를 졸업하고 목당강 경박호(镜泊湖)발전회사에서 근하였다. 건강비결은? 나는 늘 편안한 마음으로 남을 잘 받아 준다. 40부터 의학서적을 보면서 스스로 건강운동을 만들어  지금까지 견지했다. 이제도 몇년을 자신함두?  운동원마냥 건강하지는 않지만 제대로 먹으니 아직도 몇년은 문제가 없을 것 같다  잘한 일이 있다면?  잘했다고 생각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자녀들을 잘키운 것이 자랑스럽다. 반성되는 일이 있다면? . 늘 “예, 예”하면서 살았기에 마음으로 가책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 아쉬운 일이 있다면?  그렇게도 가난하게 살면서도 없다는 말을 안하고 너무나도 간고하게 산 것이 지금 생각하면 좀 후회된다. 그밖에 내가 글을 쓸만할 때 가장 존경하는 어머니를 소설로 쓰지 못한 것이 정말 아싑다.   자식들게 요구가 있다면? 아무런 요구도 없다. 너희들끼리 잘 살면 된다. ... ... 인터뷰는 할머니의 “아리랑”노래로 마무리를 하였다.  인터뷰시 할머니는 " 나는 어렸을 때 아버지와  언니 (이근숙)가 시키는 대로   어디에 가서 누구에게 글쪽지도 전달했고  또  마을의 소년들을 데리고 일본경찰서 부근에 가서 말이 몇필이 있는가를 알아 보라는 등 여러가지 심부름도 탈없이 잘했다"며 가끔씩 김좌진, 윤세복, 주보중, 김창렬(김좌진의 아들),... 리정문...의 이름을  곁들면서  손시늉까지 하었다. 이밖에도 할머니는  스스로 “백세수연례”사진첩을 찾아내 필자에게 보이면서 “아이들이 돈을 팔았지만 참 잘했다.”며 “돈은 쓸줄을 알아야 한다”며 기뻐 하였다.  이날 자리를 함께한 네째 딸(김설희)의 말참견이다. ㅡ “자식으로 후회되는 일이 너무 많습니다. 우리 집에서 건강이 제일 좋다며 늘 자랑하던 엄마가 사고를 당하니 큰죄를 졌다는 마음입니다.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엄마가 돌아갈가봐 운 것이 아니라 돌이켜 생각할수록 잘못이 많아서 울었습니다. 어머니가 “나를 걷게 해 달라”고 말씀할 때마다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습니다.  2 일 전에 엄마가 종래로 안하시던 말씀을 하는데... 엄마는 나와 사위를 곁들면서 “너희들이 가족을 이끌고 친척간의 화목을 도모했고 또 자식교양을 잘해서 정말 감사하다...”고.  나는 엄마가 돌아가기 전에 남기는 말인가고 두럽고 잡생각이 많았지만 한편으로는 엄마이 이한 말씀에 내가 네째 딸로 아무런 대가도 없이 20 여년을 엄마를 모시며 쌓였던 유감들이 몽땅  풀렸습니다...”  *** 리남조네 가족사는 중국 조선족 100년 이주사의 축소판으로 리남조 할머니는 조선족100년 사의  당당한  견증인으로 손색이 업었다. 오기활
399    "21세기의 '리시진' 김수철 전"(련재 44) 댓글:  조회:1406  추천:0  2022-03-01
              제 3부 :    신문잡지로 읽는 김수철 (17) 17, [자랑찬 연대(延大)인1] --연변농학분야의 반짝이는 별 전임 연변대학 농학학부 김수철교수에 대한 이야기 편집자의 말: 연변대학이 올해 학교창립 70돐을 맞이했다.연변지역 최고학부로서의 연변대학은 그동안 수많은 우수한 민족인재들을 양성해 조국건설과 사회번영을 위한 사업에 적극 기여했다. 오늘날 그 인재들을 키운 연변대학의 원로 교수님들은 자랑찬 연대인들의 빛나는 "별"들로서 학교와 사회의 존경과 애대를 받고 있다. 길림신문사는 연변대학 창립 70돐을 맞으면서 연변대학당위 선전부와 함께 연변대학 학과의 "별"들을 선정하여 륙속 보도한다. 1925년생인 김수철교수는 올해 95세이다. 1949년도에 연변농학원 제1기생으로 공부한후 학교에 남아 다년간 농학학부 생물교연실에서 근무해온 김수철교수는 1987년도에 정년퇴직할 때까지 연변농학원에서 식물학, 과수분류학, 수목학, 농학라틴어 등 과목들의 교수와 교수연구에 몰두하였다. 그는 평범한 일터에서 부단한 자기개발과 학습으로 걸출한 교육인재로 되였으며 괄목할만한 성과와 기여로 학교와 사회의 애대와 존경을 받았다. 산에 들어가 식물과 만날 때가 가장 행복 지난 7월 12일, 기자는 룡정에서 만년을 보내고 있는 김수철교수님댁을 찾았다. 이젠 퇴직하신 몸이고 또 95세 고령이지만 김교수님의 집은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책장과 각종 식물표본자료들로 넘쳐 있었다. “식물채집은 식물연구의 가장 기초이다. 그래서 일요일이나 방학간 등 틈만 나면 식물채집통을 둘러메고 산으로 돌아 다녔다. 그렇게 쉴새없이 채집한 식물이 2만 5000장이나 됐고 이를 계기로  길림성로력모범의 영예까지 받아안았다.”고 김수철교수는 과거를 떠올렸다. 바로 연변농학원 재직시절 곧 퇴직을 앞둔 1986년도의 일이였다.     실내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책장과 식물표본자료들. “내가 만나려는 식물마다 저들이 갖고 있는 모든 정보를 나에게 끊임없이 전달해주는 데서 나는 눈고픔과 귀고픔을 말리는 매력에 도취되여 다른 여념을 가질 겨를이 거의 없다.” 김교수의 말이다. 산에 들어가서 식물들을 만나보고 연구할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김수철교수는 말했다. 몇십년래 교수임무를 완수한 기초우에서 김수철교수는 방학이나 주말 같은 휴식시간을 리용하여 연변각지 특히 장백산일대, 심지어 동북3성과 내몽골, 안휘,산동, 운남, 해남도 등 전국의 방방곡곡에도 발자취를 남기면서 고등식물표본 1만5000여종이나 채집했다. 그중 식물표본으로 만든 것만 해도 9000여종이나 되며 각종 진균식물표본 2000여종이나 될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아직 발견하지 못했던 새로운 국화과 식물 3종을 발견하기도했다.     농학원 학생들의 현장실습을 지도하고 있는 김수철교수(왼쪽). 식물이란 것도 참 묘하게도 교통이 편리한 가기 쉬운곳에는 일반적인 식물이 많지만 교통환경이 어려운 곳일수록 희한한 식물이 많이 있다고 김수철교수는 다년간의 식물채집경험을 빌어 이야기했다. 그러한 희한한 식물채집을 위해 전국의 방방곡곡을 누비면서 하루에도 60키로메터씩 산발을 타고 산에서 풍찬로숙하면서 비로서 수많은 결실들을 맺게 된 것이다. 김수철교수님은 1953년부터 론문을 쓰기 시작했다. 연변대학 교내에서 꾸리는 《학습과 연구》라는 간행물을 통해 연변라자식물지 론문을 썼는데 그것은 연변농학원 식물학사상 첫 론문이였다. 화가도 뺨칠 그림솜씨 채집한 식물들을 그림으로 잘 표현하는 것도 식물연구에서 매우 중요하다. 교수효과를 높이기 위해 김수철교수는 60세를 바라보는 년세에 회화강습반에 참가하여 소묘와 수채화기법을 배웠다. 그림재간을 익힌 후 자체로 편집, 제작한 농학, 과수, 림업전문 식물학, 수목학 교수용 환등편 750장을 만들었고 1200장의 식물조직 절편을 만들어 교수에 응용함으로서 식물교학과 그에 따른 과학연구를 위해 튼실한 기초를 마련해주었다. 보다 좋은 회화기법을 익히기 위해 김수철교수는 북경식물연구소에서 그림그리기훈련을 받고 돌아온 연변약물검험소의 박씨성 사업일군을 스승으로 모시고 붓으로 그림을 그리는 재간을 배웠다고 자랑했다. 붓으로 그림을 그리면 철필로 그릴 때보다 더 섬세하고 세밀하게 그릴 수 있어 지금도 그 그림재간을 배운데 대해 흡족해 한다.   그림그리기가 매우 익숙한 김수철교수.     김수철교수가 그린 버섯그림. 김수철교수님이 그린 식물표본그림들은 웬만한 화가도 뺨칠 섬세하면서도 생생한 그림솜씨였다. 김수철교수님이 안경도 안거시고 천남성과의 대표적인 관엽식물인 안투리움을 생생하게 재현하는데는 채 10분도 안 걸렸다.김수철교님이 지금까지 그린 식물도본만 무려 2500장이나 된다. 정년퇴직후에만 17권(편)의 론저 출간 김수철교수는 1981년이래 자체로 편집 제작해서 학생들에게 많은 교재들을 내여 주었는데 《식물학실험지도서》 상, 하권 《길림성전간잡초명록》《식물학교재》(조선문통신학습용)《식물계통학》(일본어 연구생용) 《농학라틴문교재》(자체로 타자)《중국과수분류학간편교재》《연변농학원정원수목종지》《수목학실습지도서》《길림성수목학교재》하권 등 다수가 있다. 정식출판된 저서들로는 《장백산동북파경제식물지》《동북알칼리땅식물도감》《중국장백산채색식물도감》 《연변중초약》《장백산자원식물도감》 등이 있다. 이외에도 길림성국화과식물3개신기록종,중국국화과식물의 1개신기록종,연변야생사료식물명록 룡정현에서 나는 유용 및 유해진균의 조사초기보고 등 13편의 학술론문들이 국내외 학술간행물들에 발표되였으며 여러차 일본, 한국 등 국외의 학술세미나에 요청되여 학술보고를 진행하였다. 교수님은 정년퇴직후에만 17 권(편)이나 되는 귀중한 론저를 출간한 평생교수다. 김수철교수는 45년동안이나 연변농학원 식물학교연실에서 교학과 과학연구사업에 종사하면서 농학, 과수, 축목, 생물화학 등 농학원전업반과 의학원학생, 연구생들에게 식물학, 수목학, 과수분류학, 라틴어 등 교학을 담당하면서 국가 인재양성에 큰 기여를 하였고 한국 서울시립대학 박사연구생들의 장백산원정실습, 연변의학원 한국반생들의 장백산 현지 식물실습 등을 지도하였다.     화룡 청산에서 농학원 목축학부 학생들의 중초약실습을 지도하고 있는 장면.   교수연구에서 거둔 우수한 성과들 때문에 김수철교수는 1958년도에 연변농학원 모범교원 및 연변조선족자치주 사업모범으로 표창받았으며 1960년과 1963년에 농학원의 선진교원, 1978년도에는 연변조선족자치주 우수교원의 영예를 따냄과 동시에 길림성우수교원대표대회 대표로 당선되였다. 1979년도에는 길림성과학기술활동 적극분자로 뽑혔으며 1986년에는 길림성 로력모범, 연변조선족자치주 로력모범 , 연변주 우수공산당원 등 허다한 영예의 꽃다발을 받아 안았다. 학자의 사명감으로 여생을 불태우는 평생교수 김교수는 퇴직 후에도 연변생물학회 리사장, 길림성 식물학회 리사, 길림성 초원학회 고문, 길림성 자연자원(동부 자원식물, 목초, 중초약재등)조사사업 기술고문, 중화인민공화국 동식물검역국(도문) 기술고문등 사회적인 직무를 맡고 로익장을 과시했다. 김수철교수가 정년퇴직 후에도 쉬지 않고 계속되는 식물연구에 몰두하고 있는데는 원인이 있었다. 이미 출판된 《길림성식물명록》에 빠진것이 너무 많고 심양 동북식물연구소의 보고서에도 틀린 것이 많기에 내가 보충해야 한다는 것이 김수철교수님의 생각이였다.   안도현 만보 서북차에서 학생들의 중초약학습 지도장면. “길림성식물지는 반드시 출간해야 하는데 지금 그림을 직접 그리는 식물학자가 나밖에 없으니 내가 해야 한다.” 결국 그냥 지나칠수없는 학자의 량심과 사명감에서 시작한 일이였다. 김교수는  자기가 수십년간 수집한  2500종의 식물표본으로 《길림성식물지》 출판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식물표본그림에 질 좋은 채색사진을 배합하고저 만여원을 투자해 촬영기재를 새로 샀다. 고령의 몸으로 산발을 타고 돌아 다니며 수많은 사진자료들을 찍어왔다. 길림성식물지는 연변대학의 전폭적인 지지하에 도합 6권으로 출판될 예정인데 올해안으로 제1권이 출간된다. 이와 함께 김수철교수는 《길림성식물채색도감》의 출간도 계획중에 있다.     손녀 김영화(오른쪽)가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농학원교수로 재직중이다. 우연의 일치일가? 김수철교수의 손녀인 김영화도 현재 연변농학원에서 원예학과 교수로 근무하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할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아온 김영화교수는 길림농업대학 생물공정학과를 졸업하고 할아버지의 제의로 한국중앙대학교에 가서 원예학 석박사를 전공한후 연변농학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할어버지의 뒤를 이어가고 있다.곧 출간되는 《길림성식물지》 역시 손녀와 할아버지의 공동주필로 만들어진다. “우리 인간이 살아가면서 식물이 없다면 단 하루도 살아가기 어렵습니다. 인간생존에 있어서 그만큼 중요한 생물자원이라는 말이지요. 우리는 식물에 대한 끊임없는 분류와 깊은 연구를 통해 그것들의 재배, 보호, 리용을 통한 유익한 재부를 창조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김수철교수의 바통을 이어받은 손녀 김영화교수의 식물학에 대한 추구이다. 90평생을 한우물만 파온 사람 1949년도에 연변농학원 제1기생으로 공부하고  연변농학원에 남아 오늘 이때까지 줄곧 농학계에 대한 교수와 연구를 진행해왔으니 김수철교수는 90평생을 곁눈 한번 팔지 않고 “한우물”을 파온 사람이라고 말할수 있다. 김수철교수는 “100년도 못사는 인생”인데 공부하고 사업하는 시간을 자기의 생명을 가장 필요한 곳에 쓰는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쓸데없는 일에 정력을 빼앗기지 말고 무슨 일이든 한가지 일에만 전념하면 끝을 볼 수 있다고 말한다. 한국학자들이 김수철교수를 보고 “한 우물은 판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고 했다.     1955년도에 민족화보사 기자가 촬영한 김수철교수의 식물연구모습.   김수철교수는 누구나 한가지만 하라고 하면 쉽게 싫증나서 오래 견지하지 못하는데 사회에서 가장 요구하고 수요하는 것을 전문적으로 공격하고 돌파하면 이것이 바로 성공비결이 될 것이라고 조언했다. 물질위주의 요즘 세태에서 사람들이 재물에 대해 정신을 많이 팔고 있는데 재물은 작은 것이지만 희망을 잃으면 전체를 잃는것이라고 부언하기도 했다. 연변대학은 영원한 나의 모교 김수철교수에 따르면 1949년 연변대학은 창립초창기에 현재 연길시 하남의 인쇄공장부근의 위만주국시기 공업학교자리에 있었다. 건물만 있고 실험실도 없었다. 김수철교수가 공부했던 농학학부도 거기에 함께 있었다. 의학원은 따로 있었다. 후에 연변대학 학생숙사자리에 농학학부가 이사갔다. 일본군 사령부자리가 바로 학교였다. 그때 림민호 부교장이 참 수고가 많았다고 김수철교수는 추억했다.     연변농학원에서 교편을 잡고 있을 때의 모습.   중국공산당의 배려하에 민족대학인 연변대학이 연길에 섰다는 것은 전 세계적으로도 그 류례를 찾아볼 수 없다. 이는 우리 당의 민족교육에 대한 따뜻한 배려와 민족정책의 우수성을 보여준다. 연변대학은 과거의 없던데로부터 하나하나 만들어졌고 건교 70돐을 맞는 지금은 학술적으로도 많이 성장한 우수한 대학으로 떳떳이 성장했다. 식물학면에서도 길림성적으로도 돌출한 인재들이 많이 나왔고 중대한 프로젝트와 식물지작성에서도 연변대학이 돌파를 가져왔다. 특히 연변대학에서 김수철교수의 식물지출간에 적극적으로 나서서 조건을 창조해주고 지지해주니 90고령의 고령에도 용기를 내서 일하고 학교의 관심이 있어 항상 힘을 얻는다고 김수철교수는 감개무량해했다. 김수철교수는 자신의 몸은 부모가 낳아 주셨지만 학문은 연변대학으로부터 얻은 것이기에 그 은혜를 잊어서는 안되며 연변대학은 영원한 모교라고 말했다. 대학으로부터 많은 지식을 전수받았기에 모교를 위해 적극 공헌하고 싶은 생각뿐이다. 모두들 모교의 은혜를 잊지 않고 적극적으로 기여한다면 더욱 많은 우리 민족 우수한 학자들이 용솟음쳐 나올것이라고 김수철교수는 말했다.이것이 바로 70성상 연변대학과 함께 빛뿌려온 연변농학계의 별 김수철교수의 페부지언이기도 했다. /                         안상근 김성걸기자                                                                             길림신문 2019년 7월 24일  
398    한국, 한국언론인들에게 답하노라 댓글:  조회:22815  추천:0  2022-02-10
“한복 론난”=“돌을 들어 제 발등을 까다” 필자는 북경동기올림픽개막식을 화제로 한국에서 불어치는 엉뚱한 "한복 론난"을 무감각한듯 방관할 수 없어 끝내 필을 들었다. 필자는 친히 겪은 력사와 지나온 체험을 시간적 순서로 글을 엮었다. 1 필자는 중국 조선족의 3세로 1947년 음력 5월 9일에 왕청현 석현진 수남촌 달라자툰(현 도문시 석현진)에서 태여났다. 달라자는 1911년에 건툰(建屯)한 자연마을이다. 나의 할아버지 오창범은 조선 함경북도 온성군 온성읍 미포면 장덕리 장덕동에서 태여나서 살다가 일제의 가혹한 통치와 련속되는 재황을 못이겨 살길을 찾아 1920년에 큰아들 오광준(1911년생), 둘째아들(1917년생), 세째아들 오형준을 데리고 두만강을 건너 도문 곡수촌에 정착하여 몇년간 살다가 젊은 나이에 부모가 사망하자 1929년에 오광준(필자의 백부)이 오씨네가 모여사는 강건너 달라자로 이사했다.           오광준(백부)   필자는 어린나이에 말을 알아 듣기 시작하여 동네사람들이 백부를 “조선옷”이라 부른다는 것을 알았다.  확실히 그랬다. 필자는 조실부모하고 어려서부터 큰집에 얹혀 살았는데 백부님은 집에서나 동네돌이 할 때 늘 입는 옷이 조선 바지저고리에 조끼를 받쳐 입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달라자의 최년상이며 “달라자 총통”으로 불린 최주해(최중길)도 그냥 “조선옷차림”이였다.  최주해(1891.1.29ㅡ1978.9.15)의 원적은 조선 함경북도 온성군 남양면, 28살인 1920년에 큰 아들(최철산 (1913ㅡ 1969)이 7살 때 두 아들을 데리고 두만강을 건너 왕청현 석현진 하룡성마을에서 살다가 1943년에 달라자로 이사왔다.  최주해의 조선옷은 큰 며느리(최보옥)가 손수 지은 것이다. 그에 따라 할아버지의 옷차림을 보면서 자란 최주해의 손자 최정욱(1938년생)은 대학을 졸업하고  “네가지 낡은 것”(낡은 사상, 낡은 문화, 낡은 전통, 낡은 풍속)을 타파”하는 “문화혁명”의 대반란  때 결혼(1966.1.21.)하였는데 그가 결혼식에 “조선옷차림”을 하겠다고 하기에 어머니가 손바늘질로 아들,며느리의 결혼옷을 마련했다. 그래서 동네서는 “대통령”네를 “조선 고태네”라고 불렀다. 달라자 '대통령' 최주해.     이렇게 달라자의 원주민들의 거의 모두 조선 함경북도의 출신으로 동네의 례복은 “조선옷”이 였다. 그러니까 필자는 어려서부터 들은 말이 조선사람, 조선바지저고리, 조선치마저고리, 조선색동저고리, 조선중의(조선 중들이 입는 승복), “조선옷 매대”...였다. 연변에서 “한복”이란 말이 돌기는 조선족들이 한국나들이 하면서부터다. 특히 연길 성보백화에 “서울 한복”이란 옷매대가 있은 후부터 “조선옷매대”가 “한복매대”로 바뀌기 시작했다. 그런데 한국사람들은 한국이란 나라가 서기 전인 1920년대에 중국에 온 조선인들을 “한국인”이라고 부르고 그들이 입은 조선옷을  “한복”이라고 하니 실로 몰라도 한심하게 모른다. 2 필자는 1986년 4월에 “중국 고국방문단”의 성원으로 조선 평양을 방문하였다. 필자는 지금까지 우리가 귀국하는 환송대회에서 조선 해외동포담당국 책임자가 우리들에게 부탁했던 말이  기억에 생생하다. “... 중국은 다민족 국가입니다. 중국서 조선족들이 제일 선진민족으로 되기 위해 노력하세요.  조선족이 중국서 제일 선진민족이면 중조 두나라의 친선이 앞으로 갈수록 점점 더 두터워질 것입니다.” “한족들의 민족정신을 따라 배우세요. 세계에 널려 사는 조선인들을 살펴보세요. 미국서는 미국사람을 본받고 일본서는 일본사람을 본받고 쏘련서는 쏘련사람을 본받습니다. 그러나 한족들을 보십시요. 한족들은 어느 나라에서 살든지 자기민족의 옷(녀성들의 치포, 남성들의 헝컾단추를 단 당복)을 입습니다.” 그는 또 중국이 타국과 외교관계를 맺는 사례, 중국 해관의 수출입상품문서를 곁들면서 우리에게 “중국의 민족정신을 따라 배우라”고 부탁하였는데 그때 부탁이 필자의 가슴속에  뿌리를 깊이 내렸다. 죄정욱 결혼기념  3  중국에서 “남조선”을 “한국”이라고 부르기는 1990년 9월에 열린 제11차 북경아세아운동회 때 부터다. 그때 필자는 연변일보 특파기자로 파견되여 모든 신문기사에 한국을 “남조선”이라고 밝혔다. 내가 쓴 “한결 돋보이는 조선족녀성”이란 연변일보(1990.9.26.)기사는 9월 2일 11차 북경아세아운동회 개막식날 천안문광장에서 중국에 처음 온 남조선관광객들이 조선옷차림을 한 연변녀성관광팀을 보고 너무나 좋아서 손벽치며 소리치고 찾아가서 함께 아리랑을 부르며 기념사진을 남긴 내용이다.(사진배합) 2일 저녁 개막식현장에서 발생한 일이다. 그때까지 비록 중한이 수교를 하기 전이였지만 남조선에서는 매우많은 관광퇀을 북경에 파견했다. 하여 개막식날 관중석에 남조선사람들이 차지한 구역이 꽤나 많았다. 남조선 사람들은 사전에 미루 준비했는지 아무튼 많은 한국사람들이 저마다 크고 작은  국기를 휘두르며 고성으로 “대한민국...”을 웨치기에 안내 방송에서 “남조선관괙들이 개막식질서를 조용히 지키라”고 몇번 련속 방송했다. 그러자 남조선사람들이 사처에서 높은 소리로 “왜 한국을 남조선이라고 부르는가?”며  항의했다. 이에 안내방송에서 “13억 중국사람들은 한국이라는 나라를 잘 모르기에 남조선이라고 불러야 어느 나라인가를 압니다. 한국이라고 하면 13억 중국국민들이 어느 나라인지 모릅니다...”고 방송하자 떠들어 대던 한국사람들이 조용하기 시작했다. 그때 관중석에서 처음보는 남조선사람들을 취재하던 필자는 그네들을 보기가 정말 어색하였다. 중국서 남조선을 한국이라고 공개적으로 말한데가 겨우 30년이 푼한데 100여년 전에 중국에 온 조선족을 한국인이라고, 조선족 후대들이 입은 “조선옷”을 “한복”이라고 우겨대는 것이 실로 어이가 없다. 오기활 신문기사 3. 다음은 온가보 총리의 한국방문때 일이다. 온가보 총리가 한국을 두번 방문할 때( 2007년.2010년)는 한국에서 중국과 “동북공정”이니 고구려 때 “령토문제”니 하며 떠들 때이다. 필자가 어느 신문에서 본 기사이다.  중한간의 “령토문제”(분쟁)에 관한 어느 신문기자의 질문에 온총리가 “중국과 한국 사이에는 종래로 령토문제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답하자 그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말문이 막혔다고 한다. 한국이란 나라가 건국된지 근70년, 중한 량국이 수교한지가 근 30년밖에 안되는데 말이다. 한국인들에게 묻고 싶다. 가출을 했거나 해외 결혼을 한 조선(한국) 남녀들이 입은 “옷”을 당신들의 말대로 한다면 그들이 부모들의 옷을 “훔쳤갔다”고 해도 된단 말인가?      4 “한복 론난”은“돌을 들어 제 발등을 까는 격이다” 이번 동계올림픽에 조선족녀성을 돋보인 것은 그야말로 조선족의 자랑이고 지구촌의 모든 조선민족이 기뻐해야 할 일이다. 그런데 한국서 “한국 론난“을 이르켜 해내외의 모든 조선족들이 분노로 성토한다. 일례로 이번 “한복 론난”이 터진 후 지난 6일 아세아컵 중한녀자축구경기에서 중국이 역전으로 승리하자 거의 모든 조선족들이 모두가 속이 씨원하다며 대단히 기뻐했다. 만약 “한복 론난”이 없었더라면 어쨌을가? 포용심과 아량이 없이  나무만 보고 숲을 못보는 그들보니, 어찌 답답하지 않겠는가. 이 글을 대한민국 림시정부의 초대 국무총리와 내무총장을 지낸 안창호(1878.11. 9, - 1938. 3. 10.)의 “우리 민족의 정의를 배양하는 데 관한 글”로 마무리 한다 . ㅡ과거나 현재나 우리 동포들은 어디 모인다 하면 으레 싸운다. 남의 결점을 지적하더라도 결코 듣기 싫은 말은 사랑으로써 해야 할 것이다. ㅡ 남의 일에 개의치 말라. 우리는 걸핏하면 남의 일에 간섭하기 좋아하는데 이제는 자기 허물만을 스스로 고치기에 전념하자. ㅡ 개성을 존중하자. 남의 성격이 나와 틀리다고 해서 나무랄 것이 아니다. ㅡ 자유를 침범하지 말자. 남을 내 맘대로 리용하려다가 듣지 않는다고 욕하면 안된다. 오기활 2022년 2월 10일
397    행과 불행의 사이 댓글:  조회:2558  추천:0  2022-02-07
지족(知足)은 만족할 줄 안다는 것이며 부지족(不知足)은 만족할 줄 모른다는 것이다. 동방의 철학가 로자의 말이다 “타인을 인식하는 사람은 지혜롭고 스스로를 인식하는 사람은 공명하고 총명하며 타인을 이기는 사람은 힘이 있고 스스로를 이기는 사람은 강하고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은 부유하다” “만족할 줄 모르는 것보다 더 큰 화는 없고 탐욕보다 더 큰 죄는 없다. 자기 처지에서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은 언제나 여유가 있다” 로자의  생각대로라면 만족할 줄 알면 가난할지라도 즐겁고 행복할 수 있으며 만족할줄 모르면 부유하다 할지라도 행복할 수 없다. 물론 사람에게 욕망이 있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남보다 더 높이 되고, 더 존경받고, 더 많이 갖고 싶고, 더 오래 살고싶어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인지상정이 애부터 산수적으로 비슷하다 할지라도 그것을 이루고 만족하는 정도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왜냐면 대소, 다소, 장단, 상하, 고저, 빈부, 귀천...등의 개념이나 기준은 사람마다 상대적이기 때문이다. 다섯을 가지고 만족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백을 가지고도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으니 말이다. 하여 다섯을 가진 사람이 백을 가진 사람보다 더 즐겁고 행복할 수 있다. 이로보아 만족과 행복, 불만과 행복의 척도는 지족과 부지족에 있는 것이다. 한없이 뻗어가는 욕망의 유혹을 극복하고 아무 것에 집착함이 없는 텅 빈 가슴으로 삶을 살아가면 마음은 언제나 세탈하고 상쾌하며 어느 때 어느 곳에서든지 득의와 여유를 얻게 된다. 공부(중국 진나라 학자)는 “몸소 절제를 취하는 사람은 만족할 줄 안다. 진실로 만족할 줄 알면 어느 무엇도 그의 의지를 구속하지 못한다”고 하였다. 우리가 소학교 때에 배운 만족할 줄 모르는 사람을 대상한 풍자우화이다. 개 한 마리가 고기 덩어리를 물고 강물 위의 다리를 건너는데 그 개는 갑자기 물속에 고기덩어리를 물고 있는  개를 발견하였다. 그 개는 그것이 물에 비친 자신의 그림자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그 고기덩어리를 빼앗고 싶은 충동에서 물속의 개를 향하여 컹컹 짓어댔디. 그 순간 자기가 물고 있던 고기덩이가 물속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이 이야기는 지나친 탐욕은 이미 얻은 욕망마저 상실시킨다는 교훈을 깨우쳐 준다. 자신의 처지와 능력의 한계를 자각함이 없는 끝없는 욕망의 확장은 결국 자신은 물론 주위의 모든 사람들까지고 불행과 고통으로 유인한다는 사실을 력사와 현실속에서 수없이 볼 수 있다. 가진자의 경제적 소유욕, 아는자의 명예욕, 힘이쎈자의 권세욕 등은 얼마나 많은 고통과 파멸을 불러일으켰는가? 인간사화는 즐거움과 행복은 개개인의 차이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그러나 그것을 성취하고 향유할 수 있는 지름길은 자신에 대한 자각에 있다. 스스로에 대한 자각이 없이는 행복이 있을 수 없다. 장자는 즐거움과 행복의 참된 내용을 정신적 자유 해방의 획득으로 보고 이를 유(遊)자 하나로 집약하였다. 유는 곧 무엇에도 집착하거나 의지함이 없이 스스로가 자기 만족과 향복을 획득하는 행위이다. 아무것에도 구애를 받음이 없는 상쾌하고 세탈된 마음일 때만이 여유와 멋이 있어 매화를 보고 새소리를 기대할 수 있게 된다. 한 마디로 “지족과 부지족의 사이가 곧 행과 불행의 사이다”고 하겠다.     오기활
396    21세기의 "리시진" 김수철 전(련재 43) 댓글:  조회:1384  추천:0  2022-02-01
                            신문잡지로 읽는 김수철               16, “한 우물을 파라…그러면 길이 열린다”   김수철 퇴직교수. 나이는 수자에 불과하다. 이는 95세의 고령에도 길림성 식물지 편찬을 위해 짬짬이 산과 들을 넘나들며 조사실증을 하고 이를 바탕으로 식물지를 편찬하여 길림성에 식물지가 부족한 공백을 메워가고 있는 연변대학 농학원 퇴직교수 김수철옹의 삶을 일컫는 듯싶다. ‘21세기의 리시진’이라 불리는 평생 식물학 교수, 식물분류 연구와 희로애락을 함께 해온 그를 지난 12일 룡정시 안민가두 그의 거처에서 어렵사리 만났다. 취재팀이 온다고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김수철옹은 95세 고령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두뇌가 명석하고 기력이 좋았으며 이야기도 곧잘 나누었다. 다리가 불편하고 귀가 약간 들리지 않는 것이 흠이지만 큰 질병이 없는 그는 며칠 전에도 식물지 편찬을 위해 룡정시 용신향 영경촌 산림 속에 들어가 이틀 밤을 지새우고 돌아왔단다. “아흔이 넘은 나이에 혼자서 산속에 들어가는 모습을 보면 걱정이 앞설 따름입니다.” 김수철옹과 함께 살고 있는 딸의 말에 의하면 “부친은 지금 자나깨나 머리속에 식물지 편찬에 관한 일 뿐”이라며 마음 먹은 곳이라면 백사불구하고 달려가는 그를 막을 방법이 없다고 한다. 평생 교육자로서의 그의 일생을 말해주듯이 거실 책장에는 식물학서적과 표본집, 사전 그리고 그가 집필한 저서들이 빼곡이 라렬되여있었다. 농학원 제1기생으로서 1950년부터 농학원 농학학부 생물교연실에서 식물학 교수를 하면서 교수에 필요한 야생식물표본 9000여점을 수집하고  《식물학실습지도서》, 《식물학교재》, 《식물계통학》, 《농학라틴어》 등 교재들을 직접 편집인쇄하고 《연변중초약》, 《장백산야생경제식물 채색도편》 등 10여권의 책을 편집출판하고 《연변야생식물지》 초고를 써서 《연변야생경제식물지》에 중요한 기초자료를 제공한 그는 명실상부 식물학분야의 ‘달인’이였다. 평생 식물분류 연구를 해오면서 그는 손수 2400여가지의 야생식물을 그리고 2만여장의 식물사진을 찍었는가 하면 표본 하나 없던 식물실험실에 2만 5000여종의 식물표본을 수장하여 길림성의 식물교수와 식물분류 연구에 토대를 닦아놓았다. 그러기 위해 장백산만 해도 수십번 오르내리였는가 하면 연변 각지의 산은 물론 내몽골, 흑룡강, 료녕, 해남도 등 길림성 이외의 산림과 초지도 50여곳 다니며 고찰연구를 하고 표본을 채집했다. 그 와중에 밤길에 도마도밭을 지나다가 도적으로 몰려 억울함을 당할 때도 있었고 길을 잃고 헤매다가 승냥이를 만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한가지에 올인한 집념의 사나이를 무너뜨리지 못했다. 결국 그는  식물 채집과 연구를 통해 중국식물지에 기록이 없는 국화과의 새로운 식물종류를 발견하였는가 하면 문헌기록에는 없지만 길림성에 분포한 새 분포기록종을 발견하고 론문발표를 가지기도 했다. “할아버지는 어릴 때부터 저희에게 식물의 가치와 중요성에 대해 일깨워주었습니다.” 연변대학 농학원 원예학과에서 부교수로 일하면서 식물분류와 생태까지 연구하고 있는 손녀 김영화씨는 “어릴 때에는 힘들게 산을 오르내리는 할아버지가 리해되지 않았는데 할아버지의 영향으로 같은 길에 들어선 지금은 그의 마음을 너무나 잘 알게 되였다.”면서 “현재 할아버지와 함께 편찬하고 있는 길림성식물지는 야생식물을 처음으로 전문적으로 기록하는 공구서가 될 것”이라고 피력했다. 독학으로 외국어를 배워 영어, 일어, 라틴어, 로씨야어, 중국어, 조선어 6가지 언어를 장악하고 있다는 김수철옹은 그림실력도 상당했다. 그가 그린 버섯, 식물 형태의 그림들은 하나하나가 마치 보는 듯이 생동했다. 이날 요청에 의해 안경도 쓰지 않고 철필로 식물형태를 순식간에 소묘해내는 그의 모습에서 찬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한 우물을 파세요, 그러면 길이 열릴 것입니다. ” 물욕을 뒤로 하고 오로지 하고 싶은 일, 사회에서 필요하는 일을 꾸준히 해왔기 때문에 오늘의 실력을 쌓았고 ‘길림성과학기술활동 열성인’, ‘길림성 로력모범’, ‘초원자원조사 우수상’ 등 여러가지 영예도 획득하였다는 김수철옹은 “연변대학에서 물심량면으로 많이 관심하고 지원해주기에 현재 길림성식물지 1권이 바야흐로 출범을 앞두고 있다.”면서 “앞으로  길림성 식물지 6권까지의 출범을 위해 있는 힘껏 박차를 가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국제학술론문발표회에서 영어, 일어, 한어, 조선어로 학술론문을 발표하고 장백산자원식물연구로 세계식물학술계의 중시도 받은 김수철옹, 95세의 고령에도 쉴 줄 모르고 달리는 그의 앞으로의 행보가 더욱 기대된다.                                   /글·사진 차순희 기자                                   연변일보 2019년 7월 17일    
395    “자연을 죽이면 자연히 죽는다” 댓글:  조회:1867  추천:0  2022-01-28
 진리의 소재지인 자연은 인간의 경험, 통찰에 의하여 인식되는 것으로 자연은 자기가 지니고 있는  무한한 진리의 보고(宝库)의 문을 인간들이 열어줄 것을 여러모로 기다린다. 일반적으로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첫째는 인간을 자연의 일부로  자연과 인간의 종속관계로, 둘째는 자연을 인간의 지배와 리용의 대상으로 하는 리용관계, 세째는 자연과 인간이 상호 조화를 이루는 조화관계로 분류 한다. 본질적인 대상으로서의 자연이 인간에 의하여 인식되고 규정된다고 할 때 자연을 생기가 충만된 살아 있는 것으로 보는가, 아니면 단지공간만을 차지하고 있는 죽은 것으로  보는가, 또 아니면 량자간을 고립된 개체로 보는가에 따라 상호 관계가 다르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며 자연 그 자체이다. 자연을 라틴어로 “태여남”,  “만들어짐”이라고 하는데 서양에서는 자연을 “생명이 나타나는 것”이라고 풀이 한다. 이는 인간은 자연을 가장 많이 닮은 생명체로서 인간 자체가 바로 자연이라는 것이다 이러하니 인간은 자연과 더불어 자연의 질서에 따라 함께 살아가야 함이 참으로 자연스러운 리치이다.  괴테는 일찍 “자연과 가까울수록 병은 멀어지고 자연과 멀어 질수록 병은 가까워진다”고 하였고  “의학의 아버지”로 불린 희랍의 히포카라테스는 “자연이 아니면 인간의 몸에 지닌 질병을 결코 이겨낼 수 없다”고 했다. 이는 인간의 병치료는 어쨌든 자연의 섭리를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지켜보면 동사를 했거나 산불에 타죽은(아니면 사람이나 맹수에게 죽은)산짐승들의 시체는 볼 수 있지만 병으로 죽은 산짐승들의 시체가 흔지 않은 것을 보아 인간도 산짐승들처럼 자연치유력을 지니고 태여 났다는 것이다. 의성(医聖)들은 자연과 인체는 대단히 류사한 구조로 째여진 것이라면서 바위를 사람의 뼈, 흙을 살, 물을 피, 강줄기를 혈맥, 목초의 뿌리를 모세혈관으로 비유했다. “의학의 아버지” 히포크라데스는 인간의 자연적 체질을 다양하게 분류하고 그의 체질에 따라 그의 품성적 기질이나 직업을 자세히 나누고 부동한 체질과 부동한 병에 따라 부동한 치유법을 제시하였다고 한다. 룡정시의 오정묵 중의는 암병에 걸린후 미국에서 조직한 국제 항암포럼에 참가하여 미국의 학자가 발표한 “산이 못고치면 암을 못 고친다”는 론문에서 참 계시를 받고 돌아온후 병원의 약물치료를 멀리하고 룡정의 명산인 천불지산에 입산하여 자연치유법으로 암병을 치료했고 연길시의 최강호씨도 도문시 장안진의 산골에 자리한 강녕마을에 입주하여 암병을 근치했다며 자랑을 했다. 자연의학에 따르면 몸에 열이 나는 증상은 심신의 균형과 조화를 회복하기 위한 자연치유력의 발작 현상으로서 해열이 아닌 열을 올리는 약초나 음식을 먹이는 “이열치열”료법을 써야 한단다. 중국의 명의 화타가 어느 고관대작이 가슴에 쌓인 분노로 생긴 울화병을 화를 더 내게하는 “화법”으로 치료했다는 기록이 있다. 중의는 “통(痛)” 즉 “불통(不通)이다”고 한다.  말하자면 신체의 어느 부위에 痛이 생기는 것은 그 부위의 신진대사가 不通하는 것으로서 그를 通하게 하면 痛이 완쾌된다는 것이다. 이로보아 림상에서 초기에 나타나는 병상은 신체의 모부위에 이상이 생김을 알려주는 신호등이다. 그러므로 초기부터 병상을 없애려고 함은 발병을 알려주는 신호등을 제거하는 것으로서 자연을 거스르는 잘못된 것이다.  자연은 인간의 교사로 자연의 모든 것이 책이고 스승이다. 자연의 가장 훌륭한 가르침은 정직이다. 례하면 자연과 인간과의 관계가 이뤄진후 수십만년 동안 자연은 아무리 덥고 아무리 춥다해도 어김없이 제철꽃을 피우고 인간에게 먹어서 좋다고 약속한 식물이나 물에 단 한 번도 먹어서는 안되는 해로운 것을 탄 적이 절대 없다.   우리가 말하는 “자연스럽다”는 “꾸밈, 거짓, 억지가 없다는 것”을 말한다. 맑스는 “인간의 자연화와 자연의 인간화”를 강조하였다. 자연은 인간에 의해 변화하고 인간은 또 자연을 통해 자신의 자연성을 조화하는 것이다.  인간이 존재하기 전에 자연이 존재하고 인간이 죽는다고 하여 자연이 죽지 않지만 자연히 죽으면 인간이 자연이 죽는다. 우리가 사람이 죽으면 “돌아갔다”고 하는데 “돌아갔다”란 사람이 죽어서 자연으로 돌아갔다는 뜻이다. 필자는 전 인류의 생명을 위협하고 전 지구촌을 마비시킨 코로나를 현대문명의 “발전”으로 인간이 자연을 죽인데서 자연이 인간에 대한 보복이라고 말한다.  인간의 과도한 개발과 기후의 변화로 때도 없고 지역도 가리지 않는 산불, 홍수, 가뭄, 메뚜기떼, 회오리바람, 모래폭풍 ...이 바로  인간에게 보내는 자연의 보복이고 경고이다.  “어리석은 자는 자연을 섬기고 옅은 자는 자연을 짓부수며 지혜로운 자는 자연에서 배운다.”고 한다.  돌이켜 생각하면 지난세기 70년대에 우리가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 삼고 “与天斗, 与地斗, 人顶胜天”(하늘 땅과 싸워이겨 하늘을 전승하자)을 웨치며 “맹탕지휘”하던 “간부농사”가 얼마나 유치했던가.  인간은 자연과 생명공동체이다. 필자는 “인간을 자연스럽게, 자연을 인간답게”가 우리가 사는 삶의 구호로 되였으면 하는 바람이다.                     오기활    
394    일광산봉우리에 높이 올라 서서 댓글:  조회:1910  추천:0  2022-01-03
   지난해 9월초 어느날,  나는 로간부국 친구분들과 함께 일광산 자연공원으로 놀러갔었다.              구름한점 없는 맑은 하늘을 떠이고 시원한 산속의 공기를 마시며 우리는 상쾌한 기분으로 하루를 보냈다.                 여기저기로 통한 산책길을 따라 일광산자연공원의 아름다운 경치를 구경하며 웃고 떠들며 일광산 꼭대기에 올라섰다. 높이솟은 일광산 산정에 올라서니 가슴은 뻥 뚫린뜻 시원했고 온세상이 한눈에 안겨오는듯, 마음은 날개라도 돋힌듯 훨훨날아 세상구경을 하는듯 싶었다.                           멀리 동쪽을 향해 바라보니 유유히 흐르는 두만강 건너로  조선의 높고낮은 산들이 보였고 조선 남양시내의 전경이 한눈에  안겨왔는데 유달리도 나의 마음이 와닫는 곳이 따로 있었다. 그 곳은 바로 두만강을 가로 질은 중국 - 조선국경 다리였다.                 지난80년대 나는 보따리 조선장사를 하느라 손밀차에 무거운 짐짝을 꽉 박아싣고 저 다리위를 헐떡거리며 오가던 일이 눈앞에 선히 떠오르며 저도몰래 빙그레 웃음이났다. 돈도 짭짜리 벌었는지라 저의기 긍지감도 느꼈다. 그때 장사가 잘 된다는 물건을 많이 가지고 순리롭게 통관을 하느라  해관 검사원들과 웃지도 울지도 못할 희극을 놀던 일을 머리에 떠올리며 추억속의 장사군으로 저 강건너 조선해관청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한참이나 지난후 나는 북쪽을 향해 바라보았다.            도문시내의 전경이 한 눈에 안겨 왔는데 변화된 도문의 모습과 아름다운 도문의 자연경치, 지리적 위치를 보면서 나는 감개가 무량했다.             옛날 도문 북강에는 단 하나 뿐인 팔엽교 (도문-안산)로 사람, 자전거, 자동차들이 서로 붐비며 다녔지만 오늘의 도문 북강에는 지난 90년대에 일떠선 도문 ㅡ 훈춘 북강다리가 둘(공로, 철도)외에 몇년전에 새로 일떠선 훈춘 ㅡ 장춘 고속철도 다리와 곡수 ㅡ 수남 다리 우로 거침없이 오가는 차량들, 새하얀 고속렬차가 번쩍번쩍이며 번개마냥 다리위를 날아 다녔다.                     이는 교통이 사통팔달한 도문의 자랑스러운 정경이였다.          하지만 나는 그리운 고향마을 (달라자)이 자리한 곳을 빨리 찾아 보고싶어 몸을돌려 서북쪽 북강건너를 향해 멀리멀리 바라보았다.                   산과산이 있대이고 산넘어 산이 겹겹히 쌓인 서북쪽 하늘아래 마침내 하늘을 찌를뜻 높이솟은 고향의 범바위산이 눈에 떠올랐다.   아!  달라자 범바위산이구나!   순간  부모니님 계시는 고향집을 찾은듯 설레이는 마음이 달라자를 향해 날았다.                       저 범바위산 아래에는 내가 나서 자란 고향집 8간기와 집이 있었다.  저 범바위산아래에는 우리 부모님들 산소가 모셔져 있다.                      저 범바위산 아래에는 부모님들이 평생 토배기말로 불렀던  산골짜기와 흙빛고운 밭뙈기들이 많고 많았다.                          "굿시고래" (굿을 보던 골짜기),  "왕개고래",  “서풍고래",  "쭈릉키밭",  "쇠니매틀",  "하르가리 터" (한쌍면적),  "메가리터"•••             일자무식인 부모님들이 꾸밈없이 실상그대로 불렀던 고향산천의 토종이름들은 들을수록 정겹고 옛날 고향마을의 아름다운 자연모습이 눈앞에 선히 떠오른다.  만물이 소생하는 봄이면 고향의 저 높은 바위아래에는 진달래꽃이 만발하여 마을동산이 마치 붉은 주단을 펼친듯 아름다웠고 마을 뒤산에 활짝 핀 개살구꽃은 흰구름마냥 뭉게뭉게 나무 가지마다에 매달려 멀리서 보면 마을 뒤산이 온통 흰양떼들로 뒤덮힌듯 하였다.             내가 천지꽃 살구꽃을 꺾어다 유리병에 꽂아 놓으면 아버지께서는 올해 천지꽃 꽃살이 몇이냐고 물어보시군 했는데 꽃살이 많다고 하면 올해도 풍년이 들겠다고 기뻐하시던 아버지의 그모습이 기억에 생생하다. 나는 봄이면 바구니를 들고 달래며 민들레며 나시며... 등 산과 들나물을 캐려 다녔는데 나물을 캐고 집에 들어설 때면 바구니에 담은 나물을 더 많이 보이게 하느라 한포기 한보기씩 털어서 겨우겨우 일쿼세워 부풀게 했다. 나의  이런 천진한 속내를 뻔이 알고있는 할아버지는 " 쬐끄만 손으로 나물을 많이두 캐왔구나"며 머리까지 쓰다듬어 주었는데 그럴때면 나는 어깨가 으쓱하여 다음에 가면 더많이 캐 오겠노라 시뚱거리기도 했다. 그럴때마다 할아버지께서는 단오전에 풀은 독이 없기에 박새풀을 내놓구는 무슨풀이나 다 먹을수있으니 눈에 보이는 풀은 무엇이나 다 캐오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할아버지 그말씀을 되새기며 더없이 할아버지가 그리워진다.                     추억속의 고향마을 동년은 어제 같은데 오늘은 벌써 80세를 바라보는 할매로 되였것만 그래도 마음은 늙을줄 몰라 오늘도 저 범바위산 아래 고향의 산천에서 마음껏 뛰놀고 싶다.                         ......나는 끝없는 추억을 떠올리며 애틋하게 그리운 부모님 생각에 찹찹한 마음을 달래며 한걸음한걸음 산아래로 내려왔다              일광산 자연공원 숲속에서 친구분들과 함께 알락딸락 꼬때옷을  가려 입으면서 랑만의 모습들을 남기느라 저마다의 핸드폰이 찰칵찰칵하는 소리로 이어졌다.  점심때가 되여 시원한 숲속에 둘러 앉아 저마다의 솜씨로 만든 점심밥을 먹으며 제멋에 겨워 노래도 부르고 덩실덩실 춤도 추며 저마다  장끼자랑을 마음껏 하였다.    우리는 즐겁고 행복한 일광산공원놀이를 끝내고 귀로에 올랐다.           우리는 저마다 일광산을 향해 손짓하며 높이높이외쳤다 ㅡ           일광산아!  우리 명년봄에  또다시 놀러 올께! 안녕!              최정금                   
393    '21세기의 '리시진' 김수철 전"(련재 42) 댓글:  조회:1401  추천:0  2022-01-01
                                   제 3부: 신문잡지로 읽는 김수철 15, 렴치없이 산다면 아직도 몇 십년은 문제없소' 두 “100세 로인”의 인생스토리  김수철옹과 리남조 할머니   필자는 100세 시대에 현존하는 100로인들의 인생스토리를 듣고저 일전에 룡정의 김수철(94)옹과 연길의 리남조(99세)할머니를 인터뷰를 하였다. “원래는 두 분을 한자리에 모시려고 했는데 여러가지 불편으로 이틀 건너 이렇게 만났습니다” 필자의 수인사에 두 분이 약속이나 한 듯이 “둘이 만나면 할말이 많아서 더 좋았겠는데…”라고 답하며 무척 아쉬워 했다. 필자는 같은 물음에 “대답을 간단히 하세요"라는 같은 요구와 형식으로   각각 인터뷰를 하었다.  김수철은 연변농학원교수로 1987년에 정년퇴직을 한 후에 여러 권의 책도 출간하고 한국과 일본의 학술무대에서 무게 있는 론문을 수편이나 발표했다. 그리고 “이미 출판된”길림성식물명록”에 빠진 것이 많아 내가 보충해야한다” 며 최근 몇 년간에 고군작전을 하면서 한평생을 채집, 정리한 수천수만점의 식물표본에서 2300종을 선정하여 자기가 그린그림까지 배합하여 “길림성식물도감”편집을 마무리 하였다. 리남조할머니는 할아버지, 아버지, 언니(부양사촌언니)가 반일렬사가정에서 자란7남 1녀 8형제로 10살부터 어머니를 도와 가사와 농사일을 하였다. 결혼후 2남 6녀의 어머니로 남편을 일찍 잃고 혼자서 자식들의 글공부를 섬기면서 슬하에 박사, 석사, 의사, 대학교수 5명을 산출한 존경스러운 어머니이며 자랑스러운 할머니이다. 할머니는 딸집에 놀려 다녀도 그사이에 읽을 책과 신문을 챙기며 기억력도 좋고 한어말도 막힘없는 “현대할머니”이다. 문; 언제 중국에 오셨습니까? 김:  할아버지가 50세에 사망한 아버지의 유골을 등에 업고 1909년 음력 7월에 조선 함경북도명천군에서 가족 10명을 이끌고 600리를 걸어서 조양천백석구에 정착하였다. 나는 백석구에서 출생하였다. 리: 우리의 원적은 한국 경상북도 예천군 용궁면 무의리이다. 백년 전에 증조할아버지가 가족을 데리고 신의주에서 압록강을 건너 단동 ㅡ 심양 ㅡ 해림을 거쳐 두루 살다가 나중에 흑룡강성 동경성에 정책했다. 나는 심양태생이다. 문: 문화정도는요? 김: 7살에 서당을 다니기 시작하여 10살에 소학교를,,, 최후의 학적이 대학 1학년이다. 리: 할아버지한테서 한글(韓文)과 한자(漢字)를 배우다가 할아버지가 “사람이 까막눈이 되여서는 안 된다”며 사비로 6년제 소학교를 세운후 그 소학교에서 4년 공부를 하였다. 문: 결혼은 언제 하였습니까? 김; 백부님의 강권으로 연길국민고등학교 2학년을 다닐 때인 1941년 1월 31일에 결혼하였다 리: 결혼을 말하자니 힘들다. 이때까지 비밀로 지켰다. 내가 18살 때 8남 1녀 형제네 막내아들의 첫 눈에 들어 부모들도 그 남자가 병자인 것을 모르고 우리가 만나본 한 달 후( 10월 24일)에 결혼시켰다. 그런데 결혼을 하자부터 앓는 남편을 보고 의사가 부부생활을 하면 안 된다고 하기에 7년간을 혼자서 지냈다.  25세에 5년 년상인 김병훈이란 남자와 결혼하고 한동안 임신을 못하다가 익모초를 부지런히 달여 먹었더니 1947년부터 시작하여 2년 터울로 6녀 2녀를 출산하였다. 나의 결혼은 “꽃봉오리를 맺고도 꽃을 피우지 못한” 실패결혼이다. 문: 지금의 건강상황은 ? 김: 유전관계인지 허리가 구불고 귀가 슬 들릴 뿐 지금도 안경을 모른다. 나의 몸에는 로인반점이 한개도 없다. 허리는 구불었지만 생활에서 아무런 불편도 없다. 자식들만 안 말리면 산도 마음대로 다니고 달리기경기에도 나갈수 있는 정도다. 리: 지금도 안경이 없이 신문도 보고 바늘귀도 꿴다. 썩 오래 전에 딸집을 가다가 물도랑에 넘어져서 무릅뼈가 탈골했던 후유증으로 무릎이 가끔씩 아픈 외 아무런 이상이 없다. 단 이발이 부실하여 십년 전에 8500원을 팔아 치료를 했는데 요즘에 불편해 한다며 자식들이3000원을 투자해 새로 틀이를 했다. 몸에 로인반점도 없다. 건강은 우리 집에서 누구도 나를 못 따른다. 문: 건강비결은 무엇입니까? 김 : 몸에 해가 되는 일을 안 한다. 담배는 배우지 않았고 젊어서는 술상에 앉으면 빼갈을 한 근을 남아 마셨는데 지금은 절제한다. 식약동원(食葯同源)이라 식단은 그저 먹기 위해서나 맛을 위해서가 아니라 건강과 영양을 따져서 배치한다. 나는 쑥, 되꼬리 등 길옆의 풀을 먹고 뜸으로 건강을 지키며 병원을 모르고 살고 있디. 뜸은 살을 태워야 한다. 살을 태우지 않는 뜸은 효과가 거의 없다 리조때 “동의보감”을 쓴 허준도 뜸은 살을 태워야 효과가 있다고 말하였다. 리: 90세에 뇌출혈로 하루간 병원서 혼수상태에 처했다가 6일만에 출원하였다. 나는40세부터 의학서적을 보면서 스스로 여러가지 건강운동을 만들어 가지고 50년을 견지해 왔다. 얼마 전에 아들이 발운동을 어떻게 하면 좋다고 알려주니 나는 그 발운동을 50년간 하루도 빼 놓지 않고 견지했다고 하니 놀라 하였다. 나는 늘 편안한 마음으로 남을 잘 받아 주며 다 좋게 살아간다. 문: 이제 몇 년을 더 살수 있다고 자신합니까? 김: 교통사고만 없다면 렴치없이 몇십년은 더 살 것 같다. 교통사고를 피하기 위하여 길을 걸을 때 다른 생갹을 안 한다. 리:. 먹을 것을 제대로 먹으니 운동원처럼 건강하지는 않지만 지금 생각에 아직도 몇 십년은 문제가 없을 것 같다. 문: 지금까지 잘했다고 하는 일이 있다면? 김: 아버지의 결정에 따라 결혼 한 것이고 조강지처를 만나 사상을 개조한 것이며 우리 민족의 전통을 지겼고 계자로 들어가 백부를 잘 모신 것이다. 한눈도 팔지 않고 끝까지 식물학을 지켰고 한 우물을 판데서 오늘의 일들을 만들어 낸 것이다. 특히 잘한 것은 뜸으로 건강을 지키며 사업을 보증코 완성한 것이다. 일생을 아껴 쓰고 아껴 먹으며 간고분투하며 나의 사업에 모든 경제를 소비한 것이다. 경제가 딸리는 상황에서 일생 동안 배울 공구서적을 준비했기에 지금 내 집에서 자료를 찾을수 있다 내가 수장한 종이책들이 연변대학도서관보더 더 구전한 것 같더라. 리: 잘했다고 생각되는 일이 아무것도 없는데 재혼 때 둘이 털털이로 만난 것이 잘한것 같고 자녀들을 잘키운 것이 자랑스럽다. 문; 아쉬웠던 일이 있다면? 김: 비록 일심정력으로 일을 했다지만 그래도 옛날의 노력이 부족한 것이다. 학술면에서 재간을 나타내자는 욕심이 없었다. 이면에서 기술(대인관계 기교)이 부족했다. 출세를 하자는 생각이 없이 그저 자기의 능력을 믿고 하면 된다고, 잘하면 인정해 주겠지 라고 생각하면서 령도들과의 접근을 멀리한 것이다. 리: 생활이 그렇게 가난하면서도 없다는 말을 안하고 너무 간고히 살아 온 것이다 내가 가장 존경하는 어머니를 소설로 쓰지 못한 것이 아쉽다. 문; 억울한 일이 있다면? 김: 크게는 없다. 내 잘못이 많다. 리: 한때는 내가 가도에서 련조장, 선전워원으로 공작하다가 령도에서 감독원을 하라고 하니 나는 남을 감독할 자격이 없다며 사양을 했다. 그런데 오빠가 일본놈들에게 총살 당한 아버지의 원쑤를 갚겠다며 집을 나갔는데 후에 보니 토비로 되였다. 하여 한때 가도에서 오빠의 문제로 하여 나를 “可疑分子”로 몰며 나의 모든 사업을 박탈하였다. 할아버지, 아버지, 언니가 항일렬사인데 오빠문제로 렬사가족을 묵과하고 “가이분자”로 몰리니 억울 하였다. 문: 반성되는 일은 없는지요? 김: 가정성원에 대한 관심이 부족 했고 만년에 부인의 병조리를 딸에게만 맡긴 것이 미안하고 후회된다. 리: 이때까지 “예, 예”하면서 살아왔기에 반성할 일이 별로 없다. 마음으로 가책되는 일이 한 점도 없다. .문: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김: 가족에 대해 말한다면 자녀들이 결혼하자 자립을 했다고 경제적으로 돕지 못한 것이 미안하다. 사회에 대해 말한다면 사회에 대한 관심이 적고 정치를 불문하고 “마이퉈우 쿠깐”(埋斗苦干)만 한 것이다. 정치에 관심이 없었다. 리: 지금까지 우리가문이 좋은 가문인지 아니면 나쁜 가문인지를 알려줬으면 좋겠다.(뜻인즉 할아버지, 아버지, 언니의 항일력사기록이 없다고 ㅡ편자) 문: 효도란? 김: 효는 “백행지원”(百行之源)이다. 부모에게 효도하지 못하는 사람이 나라에 충성할수 없다. 효는 나의 마음속 기둥으로 사회에 해를 끼치지 않았고 이상분을 존경하고 내가 할수 있는 데까지 노력하며 책임을 지켰다. 리: 효는 부모님이상 조부, 증조부…에 대상해 쓰는 말이다. 녀자가 절개를 지키면 렬녀라 하고 훌륭한 안해를 조강지처라고 하고 훌륭한 어머니를 현처량모라고 한다. 문: 자식들에게 할말이 있다면? 김: 자녀들게 크게 요구하지 않고 아이들과 모순도 없고 기대도 안한다. 나는 나절로 살고 너희들은 너희로 편리대로 살면 된다. 리: 아무런 요구가 없다. 너희들끼리 잘 살면 된다. 문: 그 년세에 이성에 대한 생각이 나는가요? 김: 남자니까 미녀가 나타나면 지금도 마음이 움직인다. 아니라면 거짓말이다. 그러나 나는 사상을 개조하면서 조강지처를 지켰음을 자랑으로 느낀다. 한때는 리혼도 하자고 했다. 부부간에 싸움이 없었다면 거짓이다. 리: 나는 이성을 말하면 듣기도 싫다. 100세에 이성을 론하는 것은 나발이다. 나는 매일 총명한 증손들에게 빠진 재미로 산다. 나는 혼자 7년을 지날 때 대정원에 다니며 공부를 하고 중학교도 대수 다녔다. 인터뷰채록을 정리해보니 김수철교수는 효를 백행지원으로 하고 풀과 책과 동무하며 평생을 식물학을 연찬한 불로송이고 리남조할머니는 긍정적인 사고로 생을 지키는 할머니로 “긍정적인 사람은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를 증명하는 100세 모델이였다.                                 오기활                                 조글로 2018년 12월 21일      
392    가장 인간다운 마음 댓글:  조회:3252  추천:0  2021-12-27
인간이 지니고 있는 여러 가지 속성 가운데서 가장 인간다운 것이 “감사하는 마음”이라 하겠다. 왜냐면  감사해 하는 것이야말로 타인을 리해하는 따뜻한 감정과 사려 깊고 분별있는 리성 작용이 조화되여 나타나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모성애의 위대성을 역설한다. 훌륭한 남편의 뒤에는 현숙한 아내의 내조가 있다고, 비범한 아들의 뒤에는 갸륵한 어머님의 뒷바라지가 있었다...는 등등의 애례가 너무나 많다. 사랑에 의하여 구원을 받고 사랑에 의하여 행복을 창조하고 이성간에 사랑이 목숨을 원하면 기꺼이 목숨을 바칠 정열로 불탄다. 그러나 살펴 보면 이런 모성애, 이성애,  이웃애... 등은 비록 인간의 가장 위대한 정신 작용의 하나이지만 그것이 반드시 인간만이 가진 것이 아니다를 알게된다.     조선 신라 때에 널리 구전되였다는 얘기이다. 어느 사냥군이 활로 꿩을 쏘고 화살에 맞은 꿩이 날아간 쪽을 향해 매를 날려 보냈는데 오래도록 기다려도 매가 꿩을 물고돌아오지 않았다. 하여 사냥군이 찾아가 보았더니 한 우물 속에 피투성이가 된 어미꿩이 새끼 꿩을 안고 있었는데 어미꿩의 흐르는 피에 우물이 붉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이 모습을 보고 꿩의 모성애에 감동되여 눈물을 흘리는데 더욱 놀라운 것은 꿩을 잡으려 간 매마저 우물가 주변의 나무가지 앉아 우물안을 내려다보며 꿩의 슬픈 정경에 눈물을 흘리더라는 것이다. 이로보면 동물의 세계에도 모성애, 이성애, 무리애가 있다. 말하자면 사람을 포함한 모든 동물에게 모성애, 이성애, 이웃애...가 있는데 이런 사랑은 사람을 포함한 모든 동물들의 본능적이고 감정적인 것이였다. 그러나 이에 비춰 인간의 “감사의 마음”은 본능적인 것이 아니이다. “감사의 마음”은 매우 세련된 감정으 절도 있는 판단력의 소신이으로 가장 귀중한 인간다운 마음이다.  위대한 과학자 아인슈타인은 날마다 수백번씩 “고맙습니다”며 자기보다 앞서 길을 걸어간 위대한 과학자들의 공로에 고마음을 표하면서 더 많이 배우고 성취하며 나중에 가장 위대한 과학자가 되였다고 한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하늘에 감사할 일, 땅에 감사할 일. 나라에 감사할 일. 부모에 감사할 일, 이웃에 감사할 일...이 너무나도 많다. 동냥을 청하는 걸인에게 아무것도 줄것을 가지지 못한이가 빈손을 내밀어 걸인의 손을 잡으며 용서를 청하니 걸인은 “손을 잡히였다는 그것으로 물질적인 것의 몇 배의 선물을 받았습니다”며 감사를 드렸다는 이야기, 번마다 이웃돕기에 적선을 할 때 항상 자기가 가진 돈중에서 제일 새것으로만 골라서 주었다는 어느 부인이 너무나 감사하고 감동적이다. 돌아보면 우리가 오래동안 이렇게 소중한 “감사하는 마음”을 잃고 살아오지 않았는지....  걸핏하면 남을 탓만 하고 감사해야할 대신 원망하는 마음으로 서로 맞서지 않았는가를 돌이켜 보면서 늦게나마 반성하게 된다. 기업가는 종업원에게, 종업원은 기업가에게, 위정자는 백성에게, 백성은 위정자에게, 농부는 상인에게, 상인은 농부에게,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피차의 수고를 위로하는 감사의 마음을 가진다면 이 세상은 사람냄새가 풍기는 보다 아릅답고 보다 살기 좋은 세상으로 나갈것이라 확신된다.    오기활
391    "21세기의 '리시진'김수철전"(련재41) 댓글:  조회:1807  추천:0  2021-12-01
                      제 3부 신문잡지로 읽는 김수철 14, 래일을 생의 마지막날로 삼고 “당신이 얼마나 더 오래살수 있을지, 언제 죽음을 맞이 할지?” 이런 물음에 확답할 사람이 아마도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마치 영원히살 것처럼 해야할 일들을 뒤로 미루는 것이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현실이다. 그런데 연변대학농학원식물학박사 김수철(93세)교수는 침대머리에 ‘죽음체험’이란 글을 큼직이 붙여놓고 ‘영원히 살 것처럼 배우고 래일 죽을 것처럼 일한다’묘 죽음을 맞이한다. 김교수는 정년퇴직후에 식물학연구의 새로운 황금시기를 맞이하며 인생 후반전에 멋진 ‘꼴’을넣고 있다. 김교수는 “이미 출판한 《길림성식물명록》에 빠진 것이 많아서 내가 보충해야지...” 하며 몇 년전부터 자기가 수십년간 수집한2600종의 식물표본으로 《길림성식물독본》을 출판할 타산이다. 90고령에 안해를 딸집에 보내고 영, 한(汉)문설명문에 직접 그린 2300폭의 그림을 배합하고도 더 좋은 책을 만들겠다며 지난해부터 혼자몸으로 성내외를 다니며 사진을 찍으며 고군작전을 하고있다.. 지난 10월 27일에 김교수가 들려준 얘기이다. “지난 겨울 어느날 새벽에 찬바람을 맞고 잠에서 깼지요. 정신은 멀쩡한데 몸이 말을 안들어서 약 15분간 움직일수 없었습니다. 이에 중풍징조라는 예감이 들어 정신을 가듬고 악을 써 끝내 침대에서 굴러 떨어진 다음 기어코 “구급상비상자”가 있는데까지 뒹굴며 가서 발바닥에 뜸을 떴지요. 한참지나니 몸이 정상으로 회복 되더라구요.” “그일이 나한테는 죽음체험이 되였지요, 그래서‘ 죽음체험’ 4자를 영, 한문으로 써서 침대머리에 붙여 놓고 래일을 생의 마지막 날로 생각하며 오늘의 일에 열심하고 있습니다.” 죽음은 삶의 가장 큰 상실이 아니다. 가장 큰 상실은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우리가 어떤 것을 죽여 버리는 것이다. 삶은 기회이고 아름다움이며 놀이이기도 하다. 삶을 붙잡고 감상하고 누리는 것은 자신에게 달린 몫이다. 누구나 죽음을 피할수 없다. 그렇다고 너무 늦을 때까지 기다려서도 안된다. 독일의 노벨상수상자 하우프트만은 “매일을 당신의 최초의 날인 동시에 최후의 날 처럼 살라”고 했다. ‘오늘은 인생의 최초의 날이다.’고 생각한다면 얼마나 많은 희망과 기대를 가질수 있고 “오늘은 인생의 최후의 날이다”고 생각한다면 삶의 희망과 계획을 이루기에 최선을 다 할것이다..                                   오기활                                  길림신문  2017-11-09 12      
390    나의 세 어머님 댓글:  조회:1796  추천:0  2021-11-12
나의 세 어머님 오기활 나에게는 생모, 계모, 장모가 있었지만 이들은 나의 입에서 “어머님”이라는 부름을 한번도 들어보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났다.    생모 전정숙 생모는 내가 말을 번지기도 전에 사망하고 계모는 ‘후어머니’라는 신분 때문에 ‘후어머니’이라 불렀고 장모님을 처음 만났을 때 년세가 70대이다 보니 생전 엄마를 불러 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어머님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아 그냥 보이는 대로 ‘로인님’이라 불렀다.   엄마 전정숙(1919ㅡ1948년)은 나를 낳고 15개월 만인 32세에 사망하셨기에 엄마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다. 30대가 돼서야 엄마의 이야기를 듣게 되였다. 나는 외가집이 전씨라는 것만 알았지 엄마의 이름은 몰랐다. 엄마의 이름을 몰라서 난처해보기는 1973년 연변농학원에서 입당할 때였다. 입당 서류에 엄마의 이름을 올려야 하는데 엄마의 이름을 몰라서 난처해하다가 ‘조직에서 간대루야 몇십년전에 사망한 사람을 조사하겠는가’하고 생각하고 아무 생각 없이 나름 대로 전정숙이라고 써넣었다. 그 후 도문시 홍광향 축목수의소 소장으로 있을 때의 1975년의 어느 날 사업차로 홍광향 오공 7대에 갔다. 그 때 몇년전부터 알고 지내던 리창순씨를 만나 그의 집에서 마련한 점심 술상에서 서로 얘기를 나누던중 우연하게도 창순씨의 어머니가 우리 엄마의 사촌 녀동생이라는 것을 알게 되였다. 그래서 엄마의 이름을 물었더니 엄마의 애명이 ‘꽃분이’이라는 것만 알았지 본명은 몰랐다. 1976년에 훈춘에 갔다가 엄마의 큰 언니를 찾게 되고 큰 이모네 집에서 하루 밤을 지내면서 외가집 이야기를 듣게 되였다. “그래도 네 에미는 천명이였다…” 큰 이모는 이렇게 말문을 열며 이왕지사를 말했다. “어느 하루 내가 동네 마실을 갔다오는 데 집 동쪽에 자리한 퇴비장 부근에서 아기의 울음 소리가 나기에 가까이에 가보니 글쎄 그 애기가 바로 몇달전에 낳은 내동생이더라. 나는 너무 놀라 애기를 꼭 안고 정신없이 집에 들어서니 울어서 눈이 둥둥 부은 아버지가 하는 말씀이 ‘여러 식솔에 집이 하도 구차해서 가정형편이 좋은 마음 착한 사람이 가져다 잘 키우라고 아이를 포대기에 꽁꽁 싸서 따뜻한 재무지 우에 놓았다’라고 하더라.” 큰 이모는 생활난으로 둘째 녀동생도 어릴 때 한족집의 시녀로 보냈다고 했다. 70대가 다 된 이모는 기억력도 좋았다. 나는 숨소리까지 죽여가며 눈물겨운 가정사를 듣다가 무심중에 엄마의 이름이 무엇인가고 물었더니 글쎄 전정숙이라고 답하지 않겠는가. “전정숙이라구요?” 내가 너무 놀란 표정으로 반문하니 이모는 제법 ‘全貞淑’이라고 썼다. 세상에 이런 일이? 내가 엄마의 이름과 관계되는 이야기를 꺼내자 큰 이모는 “네가 용케도 엄마 이름을 맞게 썼구나!”며 “그래도 무엇이 통하는 게 있는 가 보다”며 희한해하셨다. 2014년 11월 18일, 한창 눈을 치고 있는 데 셋째 누님 오금자(당시 71세)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오라비요? 올해에도 엄마가 하늘에서 눈 이불을 보냈구만!” , “눈 이불이라니?”, “엄마가 세상을 뜬 후 65년간 해마다 제사 날인 음력 10월 15일이면 눈이 내렸소.” 뜻밖의 전화를 받고 방금까지도 부담으로만 생각했던 아름차던 눈 마당이 하늘에서 엄마가 펴주는 흰 이불이라고 생각하니 일손이 잡히지 않아 곧장 셋째 누님네 집으로 향했다. “누님, 나는 엄마 제사 날에 해마다 눈이 내린다는 말을 처음 듣소. 그 눈이 엄마가 우리를 그리며 흘리는 눈물이 아닐가요? ” 우리는 엄마에 대한 그리움으로 서로 우두커니 쳐다보았다. “누님은 엄마 기억이 있소?”   2000년 9월 중순에 찍은 필자의 형제 (앞줄 왼쪽으로부터 필자의 동생 오기용, 큰 누님 오계옥, 필자, 뒤줄 왼쪽으로부터 둘째 누님 오순옥, 셋째 누님 오금자)   “글쎄…다섯살 때 큰길에서 빈 마대를 가지고 놀다가 잃어버렸는데 엄마가 욕할가봐 울던 일이 생각나고, 엄마가 사망할 때 어른들이 엄마의 입을 벌리고 ‘구술’을 넣으면서 ‘자식들이 배불리 먹게 해달라’며 부탁하던 일이 생각나구…” 6살에 엄마를 잃은 셋째 누님의 엄마 이야기가 기껏해야 이뿐이였다. 나는 80세가 다된 큰 누님 오계옥은 치매로 아무 것도 모르기에 왕청에 있는 둘째 누님 오순옥에게 전화를 하니 둘째 누님도 엄마 제사날이면 해마다 눈이 내린다며 엄마 얘기를 했다. “엄마는 결혼 후 10년이나 큰집과 같이 살다가 분가한 후 아버지께서 병으로 일을 못하게 되자 혼자서 농사일로 바삐 돌아치다가 우리 네 형제를 남기고 세상 떴소.” “엄마가 돌아가실 때 큰 언니는 13살, 나는 (둘째 오순옥) 열살, 금자가 여섯 살, 오라비는 두살이였소” 둘째 누님에 따르면 그 때 우리 집이 매우 가난하여 여름에 엄마가 신을 신고 다니는 것을 못 봤다고 한다. 엄마가 사망한 1948년에 동네분들의 도움으로 우리 집에서는 제일 마지막에 탈곡을 끝냈는데 엄마는 그 날에 촉한을 만나 병에 걸려 1주일을 앓다가 사망했다. 림종전에 엄마는 혀가 굳어져 겨우 한마디씩 이런 말을 남겼단다. “물남(곡수)에서 시아버님이 이 둘째 며느리를 빨리 오라고 부른다. 큰 형님이 저 철부지들을 거둘라니 얼마나 고생 하겠슴둥… 기활이를 한번 더 보고 가겠으꾸마!” 둘째 누님은 엄마가 돌아가시자 금자의 ‘울음병’과 나의 병이 거짓처럼 떨어졌다고 했다. 지난 세기 70년대에 동네 전길선아주머니에게서 들은 이야기인데 우리 엄마는 체격이 크고 마음이 한량이 없다 했다. 아버지가 술 끝에 말다툼을 하려면 일에 지친 엄마는 “싸울 맥이 없으니 내가 입안의 밥을 다 삼킨 후에 싸우깁소”라고 하며 고비를 넘겼다 한다. 엄마가 해마다 자식들에게 눈 이불을 내려보낸다는 불가사의한 이야기를 듣고 난 후 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서 엄마가 ‘누구를 닮았다’는 선색을 알고 엄마와 비슷하게 생긴 외가 친척의 원본 사진에 비춰 모 화백으로부터 엄마의 초상을 그려서 고이 모셨다.   계모 김수동 계모 김수동(1927ㅡ2001년)의 이야기는 누님들에게서 들었다.   엄마가 사망한 이듬해에 아버지는 김수동과 재혼하였다. 계모는 10대에 아버지를 잃고 홀어머니의 슬하에서 1녀 2남중 맏이로 중학교를 졸업하고 천보산 동광에서 설계원으로 있었다. 청춘과부로 보내온 계모의 친정 엄마는 “귀한 딸을 나이 든 가난한 남자한테 시집을 보내면 좋다”는 어느 점쟁이의 말을 듣고 나어린 딸을 목단강시 정미소에서 삯일을 하는 리씨 성의 남자한테 시집을 보냈다. 그런데 결혼해서 얼마 안돼 리씨가 1946년 5월에 한국 경기도 안성시에서 10여리 떨어진 고향에 간다기에 계모도 남편을 따라 한국에 갔다. 친정 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서 겨우 한달만에 중국에로 돌아왔다. 아들 돌전에 남편이 와서 아들 이름을 리덕선이라고 짓고 돌생일을 쇠준 후 다시 한국에로 돌아가면서 생리별했다. 1994년, 1996년 아들 리덕선이 부친 리관현을 찾았지만 종무소식이였다. 계모는 친정 엄마, 아들 리덕선과 함께 천보산에서 보내다가 22살에 세살 짜리 아들을 데리고 10년 년상 농민인 우리 아버지와 재혼했다. 1950년 6월 11일에 나와 배다른 동생인 오기용을 낳았다. 그 때 대학생들이 청혼해도 재혼을 안하겠다던 계모는 우리 아버지의 멋진 인물에 남자다운 매력에 반했는지 아니면 소개자를 믿고 재혼했는지 아무튼 손시계까지 차고 자식많은 농민한테 시집을 왔다고 동네서 후론이 있었다 한다. 계모는 23세에 여섯 자식의 어머니로 되였는데 계모와 큰딸 간의 년령 차가 9년 밖에 안되였다. 나는 처음부터 계모를 “후엄마”라고 부른 데서 아버지가 안해 보기가 난처했던지 나더러 “후엄마”라고 부르지 말고 “엄마”라고 부르라고 몇번이나 당부했다. 아버지는 당당한 설계원으로 있던 ‘후어머니’가 20대 초반에 여섯 자식 어머니로 되여 고생하는 것이 측은했던지 재혼하여 2년도 안돼 ‘세 딸을 시집보낸 후 재결합한다’는 조건으로 ‘합의 리혼’을 하였다. 리혼하던 날 아버지는 결혼하듯 안해더러 치마저고리를 입고 술상까지 차리고 동네는 물론 구정부 간부까지 초대했다. 그 후 계모는 리씨 아들을 데리고 살면서 재결합 할 날을 손꼽아 기다리다가 8년 후에 아버지가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그만 생을 포기하고 목에 바를 매고 자결하려다가 동네 분들에게 발견되여 구원되였다. 결국 계모는 고급 공정사로 정년퇴직했고 큰아들이 50대에 차사고로 식물인이 되자 연길의 모 경로원에서 몇년을 보내다가 향년 74세로 2001년에 사망하였다.   장모 김옥녀 장모 김옥녀(1906ㅡ1989년)는 내가 처음 만났을 때 벌써 70대 로인이였다. 안해에 따르면 장모님은 12명의 자식을 낳았는데 8명은 요절되고 남은 2남 2녀중 맏이 큰언니는 해방전에 조선으로 갔고 큰아들은 결혼하자 참군하여 사평해방 전투에서 희생되였다. 그러니 장모님은 아홉 자식을 가슴속에 묻었으니 평생 눈물과 동무하며 살았다.   한번도 “엄마”라는 두 글자를 불러보지 못해 장모님을 만나서 “어머님”이라는 말이 떨어지지 않았고 게다가 70대 로인이라 첫 눈에 보이는 그대로 ‘로인님’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큰사위는 본 적이 없고 기다리고 기다리던 막내 사위마저 “어머님”이라고 부르지 않으니 장모님이 서운해 할 것은 물론 처가 편에서 “저 사람이 부실하지 않는가?”며 후론을 했다고 한다. 나는 장모님의 사위 사랑에서 처음 엄마의 사랑을 피부로 느꼈다. 1975년 10월 1일 우리가 결혼할 때 처가집은 대흥구립업국 청산림장에 자리 잡고 있었다. 청산림장은 대황구에서 6, 7리 떨어진 영벽 마을에서 산길로 60리 길을 더 가야 하는 깊은 산골이였다. 그 때까지도 뻐스가 통하지 않아 60리 길을 도보로 다녔다. 1976년 늦가을의 어느 저녁 무렵, 장모님은 동네에서 개추렴을 했다며 사위를 대접하려고 노란색 비닐통에 개고기국을 들고 오셨다. 청산림장에서 대황구까지 66리, 대황구에서 기차 타고 130리나 떨어져있는 도문까지 개고기국을 들고 온 장모님을 본 나는 너무나도 어처구니 없어서 감사하다는 말 대신 “대흥구에서 도문까지 오는 왕복 차비만도 이 개고기국물보다 더 비싸꾸마...”, “이런 사위 사랑을 두번 다시 하지 맙소”하며 큰소리로 랭대하였다. 지금 생각하면 장모님이 얼마나 서운해 하셨을가?! 또 어느 한번 장모님은 고령에 산을 넘나들며 위병에 좋다는 삽주뿌리를 캐서 알뜰히 말리워 가루까지 내서 들고 오셨다. 초겨월의 어느 날 장모님은 사위에게 털실 옷을 떠 입히겠다고 농촌에서 양털을 사서는 씻고 말리우고 실을 뽑아서 가져오셨다. 장모님은 7년을 사이 두고 출생한 나의 아들딸들도 등에 엎고 키우셨다. 장모님 생전에 제일 마지막으로 우리 집에 다녀 온 날은 1989년 6월 1일이였다. 그 때 우리는 자체로 집을 지으려고 집터를 팠다. 장모님은 새로 판 집터를 보고 기뻐하셨다. 장모님은 “이번 걸음이 마지막 걸음일 것 같다”며 큰 병에 인삼담근 술까지 사가지고 오셨다. 장모님 말 그대로 장모님은 새로 지은 우리 집을 보지 못하고 1989년 8월 26일에 향년 83세로 돌아가셨다. 엄마는 비록 32년이란 짧은 인생을 살아왔지만 8년 만에 하늘 나라에서 사랑하는 남편과 재회하였다. 엄마가 두고 떠난 네 자식은 모두 무탈하게 잘 자라 지난해 큰딸인 나의 큰 누님은 86세에 돌아 가셨고 셋째 딸은 코로나19로 인한 격리로 한국의 모 경로당에서 자식들을 보지 못한 채 뇌출혈로 78세에 돌아가셨다. 엄마는 자식들에게 사진 한장도 남기지 못하고 급급히 떠나가셨지만 당시 두살 밖에 안된 아들의 효도로 본명을 찾고 후세에 전할 수 있게 그림으로나마 초상을 남기게 되였으니 불행중 다행이라 하겠다. 계모는 비록 74세까지 살았지만 재혼 날을 합쳐봐도 부부생활을 2년도 넘기지 못하고 청춘과부로 보냈다. 그가 낳은 두 아들중 리씨는 50대에 차사고로 식물인이 되여 몇년을 시달리다가 60대 초반에 사망하고 오씨는 50대에 중병으로 사망했으니 계모의 삶은 더없이 비참하고 외로운 삶이였다. 장모님은 비록 전반생은 아홉 자식을 가슴에 묻고 말없는 눈물로 보냈지만 후반생은 막내 사위 덕에 외롭고 고독한 산골 마을을 떠나 딸 가까이에 있는 변강 도회지에서 생활하셨다. 장모님의 손끝에서 자란 외손자는 세계 명문대의 교수로 있고 외손녀도 사회의 떳떳한 일원으로 잘 보내고 있다. 한번도 “어머님”이라고 불러보지 못한 나는 이 글에서나마 세 어머님을 불러보련다. “어머님!” 길림신문
389    “만남”이란 말 아시죠? 댓글:  조회:2047  추천:1  2021-11-08
어제(10.31) 다사했던 10월의 달력막장을 넘기고나서 묵은자료를 정리하던 중에 필기첩두껑안에 그젯날 명심해 보관했던 편지한통을 발견하였다. 편지는33년전 도문시문화관 김원필선생이  한국의 조카(김영웅)한테서 받은 편지라며 오기자가 필요하면 갖고가라던 활자로인쇄한편지였다. 필자는 십수년전에 감명깊게  읽어본 편지를 오늘 재독하고서 (혼자만이 보기가 아쉽다)는 생각에서 편지를 여러분들과 공유하고저 한자도가감없이 그대로 올린다   원필 삼촌께!   그동안 별고없이 가족들 모두가 평안하신지요? 이곳은 참으로 다사다산했지만 그래도 지난 ‘98년을 아쉬움속에 보내고 언제나 그랬듯이 또다시 부푼 기대와 설레임으로 새해의 희망을 품고 오는해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도문에서 “참으로 형제와 핏줄의 정이 이런 것이나 “하고 많은 것을 느끼고 왔습니다.  같은 핏줄이며 천척이라해도 초면에 너무나 극진한 대접을 받고 오니 너무나도 송구스럽고 또한 고맙기만합니다.  이제서야 안부를 전하려니 죄송하기만 하군요.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막상 글로 전하려니 솔직히 말씀드려서 별로 쓸 말이 없군요 갑작스런 만남과 초면이기 때문이 아닌가는 생각을합니다마는 죄송스럽기만 합니다.   “만남”이란 말 아시죠? 그리고 “인연”이란 것도 아시겠죠? 이것만큼은 모두가 잊지않고 기억하면서 우리들 가슴속 깊이 간직해야 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불교에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길을 가다 옷 깃을 스쳐도 5백생의 인연이 있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한 평생을 함께 살아가는 부부가 되려면 천생의 인연이 되어야 하며 부모자식간이 되려면 3천생의 인연이 닿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형제, 일가친척이라해도 이 또한 무수한 인연이 없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것입니다. 일생을 50년만 계산하더라도 만남을 위해 얼마나 많은 긴 시간을 약속해야 했습니까? 불교에서는 다른 종교들처럼 모든 것이 우연히 이루어지거나 기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인정을 안합니다. 뼈를 깍는 아픔이 없이 , 땀흘린 노력도 없이 우연히 공짜로 얻어지거나 기적이 생긴다면 그건 불미한것이며 허공에 뜬 구름을 잡으려는 것과 똑 같습니다. 세상사 모든 치는 “자업자덕”(自业自德),즉 스스로 지어서 스스로 받는 인과응보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도문의 삼촌들과 친척들 그리고 한국 인천에 사는 우리들 모두는 우연히 이뤄진 만남이 아니라 무수한 생을 지어 쌓은 인연공덕에 의해 이뤄진 만남이기에 더욱 소중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오해하시지는 마시고 마음 편히 하시기를 바라면서 감히 한가지 부탁을 드려봅니다.  자세히는 모르겟지만 어쩌면 내가 잘 못 느낀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마는 원철분가족들과 사촌들의 관계가 어디가 모르게 서먹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세상에는  잘난 사람, 못난  사람들이 어우러져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못난 사람들은 포기하지 말고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잘난 사람은 못난이들을 위해주고 감싸주고 도와주면서 사는 것이 보람되고 생의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봅니다. 이제부터는 앞으로의 미래를 위해 과거의 집착을 털어버리고 보다 밝게 살았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누구나 과거에 머문다면 진정한 미래를 약속할 수 없다고 봅니다. 오랫동안 머물지 못하고 잠깐씩 여러나라를 다녀봤습니다만 어데를 가나 사람들 사는 곳은 모두 같더군요. 력사는 모두가 만남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비록 짧은 만남이였고 자주 만날 수 없지마는 우리가 생을 다해 사라진 먼훗날에라도 력사가 그치지 않고 이어지기 위해서는 어쩌면 중요한 만남이 아니였는가? 하고 나는 생각합니다.  나를 위해 극진히 대접을 해주신 여러분께 다시한번 감사드리면서 아쉬움 속에 다사다난했던 무인’98년을 보내며 희망가득안 기묘년 새해에는 바라시는 모든 소망들이 꼭 이루어지시기를 이곳 한국에서 간절히 기원합니다. 끝으로 우리 모두 새로운 각오와 변화된 모습으로 힘차게 뛰여 봅시다. 《望 天 天 的 好 日!》                   1999년 1월 1일 새아침 仁天에서 조카 英雄 올립니다.   (독자들의 댓글을 부언합니다.)
388    “달력”은 명실공한 달력구실을 해야.. 댓글:  조회:2187  추천:0  2021-11-02
“달력”은 명실공한 달력구실을 해야... 오기활   필자는 해마다 이때면 새해달력준비로 서두르는데 원인은 한해의 월과 일의 주요행사를 달력에 문자기록을 남기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필자의 기억으로 우리들의 일상생활에 달력문화가 배기게 시작한 근 40년을 살펴보면 필자가 본 중국산달력은 거의 모두가 미인, 명인, 풍경...들로 달력장의 “수림”을 차지했고 “눈에 확띄여야 할” 달력속 일력들이 쇠외 된 “풀포기” 상이였다. 그러니 꼭 문자로 표기해야 할 행사일를 달력에 기록하려해도 글씨를 쓸 자리가 없었다.    그런데 나라의 국문이 열린후 필자가 조선, 로씨야, 한국, 일본 등 나라들을 나들이하면서 만난 달력은 완전히 명실공한 달력으로서 달력장마다에 당월, 전월, 후월까지 알게쉽게 밝혀있고 그외도 국민들이 기억하고 기념해야 할 력사기념일, 국정휴가일, 절기, 량력, 음력, 일기록, 월기록 ....등 정치, 경제, 문화생활에 필요한 거의 모두를 밝혔다.   이런 실정에서 필자는 해마다 년말이면  렴치를 무릅쓰고 해외에 있는 친척들게 “새해의 달력을 보내달라”는 부탁을 명심한다.    이에 필자는 어느 문화용품을 경영하는 업주에게 달력문화에 관한 필자의 주장과 견해를 말했더니 하는 말이 “그때는 단위에서 공가돈으로 관계단위와 관계일군들게 달력쑹리(送礼)를 하기에 비싼 달력장사로 우리가 돈을 잘 벌었는데 지금은 공가에서 “쑹리”를 못하게하여 달력벌이가 안된다”며 헛웃음을 지었다   이 밖에 필자는 지난 10월초에는 오래간 실무로 알고지내는 연길시 모 인쇄공장 공장장에게 상기 현상을 반영하면서 세가지 달력견본까지 보내며 “사용호들의 수요에 따라 달력구실을하는 달력을 출품하면 꼭 전망이 밝을것이다”고 건의했는데 아직까지는 회답이 없다.    필자는 인쇄업경영업주들이 소비자들에게 눈을 돌려 사로를 찾는다면 새로운 시장이 개척될것이라고 믿어진다. .  
387    21세기의 "리시진" 김수철 전(련재 40) 댓글:  조회:1622  추천:0  2021-11-01
                                       제 3 부 신문잡지로 읽는 김수철 13, 90대 고령의 “구멍난 양말” 례찬  “박선생이 지구촌의 ‘해당화대통령’으로 불릴 것이니 지금부터 품위 있는 대통령걸음을 련습하세요… ” 이는 지난 5월 7일 아침 식사 때 조선족의 “리시진” (김수철. 93세, 연변농학원교수, 식물박사)이  40년이나 년하인 제자(박영호, 54)에게 술을 권하며 하는 유모아이다. 훈춘시농업방송학교부교장 박영호(정교수급 농업기술추광연구원)는 연변농학원을 졸업하자 바람으로 훈춘국영농장에 터를 잡고30여 년간을 한눈 팔지 않고 열심히 원예사업에  충성하면서 20여 종의 우수한 과수품종을 육종, 그가 육종한 사과, 복숭아, 해당화는 관상성이 좋은데서 시장전망이  밝고 특히 그가 육종한 “훈춘해당화”의 과일은아주 훌륭한 건강식품으로 독일이나 이딸리아의 해당화(과일)를 초과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박영호연구원과 김수철교수   2003년에 김수철교수는 박영호더러 “경신해당화에 신경을 쓰라”고 건의, 그에 따라 박영호는 “경신해당화”(훈춘해당화)육종사업을 시작, 10여 년간의 알찬육종성과로 그의 해당화육종과업이 국가계획과 성급 과학연구항목으로 선정 되였다. 계속하여 김교수는박영호를 “미츄린”에 비하며(당자는 ‘원예해호자’로 자칭) 박영호의 “구멍난 양발”을 례찬한다. ㅡ 어제 점심식사 때 보니 박선생의 양말에 큰 구멍이 났더군요. 이는 그만큼 박선생이 많이 걸었음을 증명합니다. 박영호는 자기가 신은 양말이 구멍이 난 것을 모를 수도 있고 아니면 알면서도 시간이 없어서 바꿔 신지 못할 수도 있지요. 만약 몰랐다면 박선생이 일상생활에서 데면함을 말하고 만약 알고도 바꿔 신지 못했다면 박선생의 사업이 그만큼이나 분망함을 설명합니다. 박선생이 신은 구멍이 난 양말에서 부인의 넉넉한 심성을 볼수 있습니다. 사시장철 산을 찾고 흙과 싸우는 남편을 부인이 탓하고 바가지를 긁는다면 박선생의 오늘과 같은 업적은 운운도 못하지요. ㅡ 박선생이 돈이 없어 양말을 못 삿을가요? 지금은 10원이면 양말 네 컬을 사는데 어제 점심에 박선생이 우리를 대접한 돈(326원)이면 아마도양말을 130여 컬레를 살수 있지요…허 허 허 ㅡ사람이 명성을 날리면 “관리”로 등용될수 있습니다. 만약에 관리로 된다면 일반적으로 자기의 삶이 아닌 남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자리에서 제자에 대한 바람은 머리를 숙이고 골똘히 생각을 하면서 자기의 삶을 살았으면 합니다. ‘해당화대통령’자리가 박선생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 말에 “과부 사정은 과부가 안다”는 속담이 있듯이 “미츄린”의 사정을 “리시진”이 불 보듯 하였다. 김교수가 읊는 “구멍양말” 례찬이 “리시진”과 “미츄린”이 한 동전잎의 량면임을 말해준다. 일로매진(一路邁進)이란한 가지 뜻을 세우면 온힘을 다해 그 길을 걸어가야 함을 말하는 사자성어이다. 또 정신일도 하사불성(精神一到何事不成)란 한 가지 일에 매달려 온 정성을 쓰면 이루어지지 않는 일이 없다는 경구다. 해빛은 하나의 초점에 모아질 때만 불꽃을 피운다. 김수철교수와 박영호연구원은 “일로매진”정신과  “구멍난양말”로 오늘에 “리시진”과 “미츄린” 이란 별칭을 얻었다.                                 오기활                                  2017년 06월 26일(조글로)        
386    안개속의 고향마을 댓글:  조회:2782  추천:0  2021-10-29
                                               안개속의 고향마을                                                   손홍범 내가 살던 고향인 도문시 량수벌은 좀 특이하게 생겼다. 조선족 부락은 거개가 북쪽으로는 산기슭에 남쪽으로는 강을 두고 있다. 그런데 량수마을은 북쪽은 높이 쳐다보이는 언덕이고 언덕에 올라서면 넓은 벌이다. 멀리 북쪽을 바라보면 그제야 산이 나타난다.     교원사업을 할 때 유람으로 장백산아래 첫 동네란 숭선으로 간적이 있는데 그곳 지형이 량수와 같았다. 그러고 보면 량수지형은 장백산천지 주위의 마을 지형이 아니겠는가고 생각한다.   언덕에 올라서면 량수벌 풍경 한눈에 안겨온다.   동쪽은 살구꽃에 잠겨있는 신흥동 마을인데(지금 영화촌이라고 부른다) 경치로 인기를 끌어 연변의 유명한 화가 임천의 작품에도 많이 오른 곳이다.   남쪽 유유히 흐르는 두만강 위에는 허리가 동강난 커다란 다리가 엎드려 있다.   왜놈들이 동북의 자원을 수탈해가려고 엄청 크고 견고하게 지었다. 2차대전후기 왜놈들은 도망갈 때 쏘련홍군의 추격을 막으려고 폭파해 끊어 버렸는데 그 소리와 진동에 멀리 마을의 돼지굴(돼지우리)의 돼지도 놀라서 한길 솟더란다. 지금은 관광유적지로 돈벌이에 이용되고 있다.   서쪽을 바라보면 만경대벌과 하서마을, 좀 뒤로는 하서4대마을이 있다. 이전엔 술을 빚는 집이 있었다하여 술칸부락이라고 불렀다.   량수마을 풍경은 또 어떠하더냐!   이른 아침 언덕위에 높이 솟은 새하얀 열사기념비 앞에 올라서면 연안보탑산에 오른 심경인데 언덕 아래로는 넘실거리는 흰 안개바다가 펼쳐진다. 량수마을과 마을 앞 푸른 논 어디라 없이 흰 비단 같은 안개에 잠겨 보일 듯 말듯하다.   그 무엇으로 형용하랴. 몽롱미를 자랑하는 그 모습, 너울 쓴 첫날각시마냥 어여쁘기만 하여라!   안개속의 집집마다 울바자엔 나팔꽃이 만발하고 열콩이 주렁졌으리라. 뜨락마다 노란 호박꽃 피고 파란오이 드리웠고 푸른 파 이슬에 젖었으리. 또 밤새 익은 토마토는 포기마다 매달려 빨간 얼굴 자랑하며 코흘리개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으리라.   한집, 두 집 굴뚝엔 파란연기 피어오를 때 마당에서도 풍노불 피기 시작하리라. 강아지는 허리 늘구며 채석에서 내려오고 병아리들은 울바자 밑에서 벌레 찾아 삐약 거리리.   아. 안개 덮은 고향마을아. 너는 기지개 켜며 잠을 깨는 내 사랑의 여인이 아닌가!   고향마을. 안개속의 고향마을아. 너는 어찌하여 이다지도 어여쁘더냐!?   나는 스피노자(구라파 철학가. 엥겔스는 그의 책을 대단히 높이 평가하며 즐겼다고 한다)가 쓴 윤리학이란 책을 읽어 본 적이 있다.   그 책에는 사람의 정감에 관해서도 기하학적공식으로 수십 개 종목으로 나누어 언급 했는데 그 가운데 이런 공식이 있다   ㅡ한 사람이 다른 한사람이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그 사람이 무엇 때문에 자기를 사랑하는지 모를 때에는 반드시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   그렇다. 나에 대한 맘속에 품은 사랑의 이유를 모를 때 사랑하게 된다. 그러니 내 연인의 깊은 맘속이 똑똑히 보일 때 보다 알릴 듯 말듯 희미하게 몽롱히 보이면 상상의 꽃 너울에 감겨 더 아름다워 보이는구나. 안개속의 고향마을도 그와 같으리로다.   그럼. 연애중인 그대가 더 열광적인 사랑을 받고 싶지 않은가? 만일 그렇다면 그대는 사랑하는 사람이 무엇 때문에 자기를 좋아 하는가 묻는다면 내 심정을 안개로 덮어두고 알려주지 말라. 미루면 더 좋으리라   ㅡ결혼식을 올린 후 알려드리겠어요   ㅡ아이를 낳은 후 이야기 하지요   ㅡ아이가 대학간 후 보자요   ㅡ아이가 결혼한 후 말하겠어요   마지막 이별을 앞두고   ㅡ이 못난 나만 믿고 끝까지 살아온 바보같은 사람아. 내가 어디가 좋았어?   라고 물으면 그대는 어떻게 대답하려나.   ㅡ모르겠어요. 그냥 좋았어요. 저 세상 가서도 우리 함께 있자요.   그리고 천천히 눈을 감으면   아. 죽음도 갈라놓지 못하는 사랑을 두고 목석인들 그 어찌 마음이 찢어지지 않겠는가. 어느 누가 말했던가!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라고.   아. 고향마을아. 너는 내 사랑. 내 여인. 부디 길이길이 예뻐다오. 꿈에만 보이지 말고 내 앞에 신기루로 나타나 다오. 그러면 이 내 마음 천방지축 달려가 네 품에 안기리라. 그리고 오래오래 흐느끼리라. 가슴 후련하도록. 
385    21세기의 '리시진' 김수철 전(련재 39) 댓글:  조회:1595  추천:0  2021-10-01
제3부  신문잡지로 읽는 김수철                                                 12, “로인세계” 2017년 1기 특별선정 인물 90대에 넘치는 20대의 싱싱한 기운 ㅡ “중국 길림성 식물도감”출판에 여생을 붙태우는 김수철교수 1925년 4월 1일, 연길현 조양천진 태양향황도촌 향양툰에서 출생한 김수철교수는 연변농학원(지금의 연변대학 농학원) 제1기 졸업생이다. 1950년부터 1987년에 정년퇴직할 때까지 장장 45년동안 농학부 식물학 교연실 강사, 교수로 있으면서 식물형태, 식물해부, 식물분류, 식물라틴어 등 교수 및 과학연구사업에 혼신을 불태웠다.  농학, 과수, 축목, 생물화학 등 농학원 전문반과 의학원 학생, 연구생들을 상대로 식물학, 수목학, 과수분류학, 라틴어 등 교수를 담당하면서 국가인재양성에도 뚜렸한 자국을 남겼다.  또한 한국 서울사립대학 박사연구생들의 장백산원정실습, 연변대학 의학원 한국반 학생들의 장백산 현지식물실습 등을 지도하였다. 김수철교수는 젊은 시절부터 일요일, 명절, 방학 등 휴일은 대부분 식물채집과 표본제작으로 바삐보냈다. “나는 길가의 풀을 먹고 지금까지 병원을 모르고 건강하게 삽니다,” 이는 김교수가 늘쌍 앞세우는 입버릇 자아소개다. 그만큼 그분은 식물에 대해 손금 보듯 환히 알고있었다. 1973년도에 김교수는 장백산아래 청산림장에서 15일간 우리 축목수의전업 학생들을 이끌고 중초약을 가르쳤다. 그때 김교수는 “식물퀴즈(알아맞추기)왕”이였다. 학생들이 어떤 식물을 물어봐도 그 식물의 학명, 별명, 생육지, 용도, 채집계절, 분포를 척척대답했다. 식물조사를 위해 해발 1000메터 되는 산정상을 톱아오르고 야수가 횡행하는 장백산밀림에서 우등불을 지피고 밤을 밝힌적이 얼마인지 모른다. 김교수는 고생을 마다하고 동북3성의 험산준령을 넘나들면서 목숨을 걸고 채집한 식물표본들로 표본실을 설립하였다. 2만 5000점에 달하는 장백산식물표본을 소장한 표본실은 이 방면의 교수 및 과학연구에 견실한 기초를 닦아놓았다. 김수철교수는 연변생물학회 리사장, 길림성식물학회 리사, 길림성초원학회 고문, 길림성자연자원(동부 자원식물, 목초, 중초약재 등)조사사업 기술고문, 중화인민공화국 동식물검역국(도문)기술고문 등 많은 사회적인 직무를 맡았다.  또 “연변중초약”“장백산 동북 경제식물지”등 저서를 편찬, 출판하여 중국축목사, 길림성정부농업위원회 등 부문에서 발급한 성과상과 길림성 로력모범영예를 수상하였다. 그가 “대중과학”에 발표한 “진달래”는 길림성 과학기술협회상을 수상, 그가 그린 사생화(버섯)는(中國長白山經濟植物彩色圖鑑, 延边人民出版社,1996) 한국서 출판한  “백두산버섯도감”에 수록되였다. 김교수는 선후로 “중국 동북 국화과 식물습유(拾遺), “중국 항암식물약리용의 현황과 전망”, “중국 장백산 경제식물” 등 가치가 높은 19편의 론문을 발표(국내 10편, 한국 8편, 일본 1편)했고 “장백산 동북 야생식물지” 등 9편의 저서를 펼쳐냈다. 2011년 3월 28일, 필자가 민간초약성능에 관한 독자들의 여러가지 질문에 답복을 주고저 졸업후 37년만에 김교수를 방문했다. 문밖까지 마중을 나온 교수님은 너무나 정정해보였다. 저으기 놀라는 필자의 모습과 물음에 교수님은 “나는 길가의 풀 덕분에 지금까지는 병원을 모르고 일반사람들보다 건강하게 삽니다.”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이렇게 시작된 사제간의 만남은 계속 이어졌다. 그동안 필자는 “조선족의 리시진”, ”식물학 왕중왕”, “실물학화백”으로 불리우는 김수철(93세)교수와 수차나 무릎을 마주했다. “책무지를 마주하고 길가의풀을 안주 삼고 장백산정기를 만끽”하며 살아온 김교수는 “시중에서 값이 비싸야 좋은 약이라는 편견을 청산해야한다”며 생당쑥, 익모초, 삽주, 골담초의 특별한 효능을 렬거하면서 “솔잎 한가지만으로도 많은 성인병을 막아낼수 있다.”며 자부심에 넘쳐 얘기한다. 1987년에 정년퇴직이후 김수철교수는 식물학연구의 새로운 황금시기를 맞이했다. 중한수교후 한국과 손잡고 연변에서 중초약재배기지를 마련하던중 조양천진 삼성촌의 풍수지리에 매혹되여 헐망한 농촌집과 토지 10여헥타르를 임대 맡았다. 그리고 정년직후에는 아예 이곳에 삶의 터전을 옮기고 25년간 중초약재배에 종사해왔다. 김교수는 다년간의 중초약 연구와 재배에 종사해온 경험에 비추어확신에 차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 주변의 재래약초를 현대적설비로 가공한다면 값 싸고도 효능이 높은 약을 제조할수 있습니다.” “병원에서 쉽게 치료할수 없는 병을 쉽게 치료할 민간중약처방이 너무 나 많습니다.” 김교수는 중약은 무철에, 서약은 단발총에 비유하며 중초약의 무궁무진한 약효를 설명한다. “불이야! 하면 ‘앉은뱅이’도 벌떡 일어나서 도망친다고 하지 않습니까? 병들도 불을 만나면 쩔쩔매지요.” 김교수는 젊어서 병으로 한쪽 신장이 기능을 거의 상실한데서 한때는 농학원의 “절름발이교수”라는 별명이 뒤따르게 되였다. 그는 뜸으로 자기의 신장병을 뗐다고 한다. 2016년에 필자가 김수철교수(93세)를 방문했을 때 여전히 정정한 모습이였다. 허리가 구부정하고 귀를 잘 못 들을뿐 안경을 쓰지 않고도 책을 보고 원고를 집필했다. 그리고 5헥타르 밭에 콩농사를 지었다며 건강을 자랑했다. 아픈데도 없고 운신에 아무런 불편을 모르는 아버지를 곁들며 자식들이 아버지가 100세까지 문제 없다고 하자 김교수는 “생리학 리론대로 산다면 125세까지 산다.”며 장담했다. 그때 김교수님은 “중국 길림성 식물도감”편집출판준비로 사모님마저 딸집에 보내고 혼자서 식사를 챙겨가며 2600가지 식물표본을 그리기에 여념이없었다. “내가 정리하며 그리는 2600가지 식물그림을 화가들이 그리자면 아마 20명은 움직여야 할것이다. 그런데 화가들은 식물을 직접보지 못하고 그리다보니 꽃입이 다섯개인데 엉뚱하게 열개씩 그릴 때가 있다. 그래서 내가 일일이 손으로 이렇게 그리고있는것이다.” “나는 지금 죽을 준비로 자료를 정리한다. 정리해야 할 자료가 너무 많아서 흘러가는 시간이 정말 아깝다.” “이미 출판된 ‘길림성 식물명록’은 루락된 것이 많아서 내가 보충해야 한다.” 한장한장의 식물표본이 교수님의 필끝에서 생생히 살아났다. 교수님은 이 식물표본그림에 천연색사진을 배합하고저 지난여름에 만여원으로 촬영기재를 새로 준비해가지고 몇 달간이나 혼자 몸으로 내몽골 서북지구를 답사하면서 만여장의 사진을 찍었다고 한다. 지난 10월 연변대학 로간부처, 연변대학 로과학기술사업자협회, 연변로교수협회 책임자들과 김수철교수의 학우대표들이 교수님을 방문했다. “여러분들이 고군분전하는 저를 위해 이렇게 집에까지 찾아와서 위문하니 정말 감개무량합니다. 여러분들이 저의 인생저녁(만년)에 아침(새 힘)을 보태주었습니다. 앞으로 더욱 열심히 일을 잘하는것으로 보답하겠습니다.” “미국의 강철대왕이며 최고 자선가인 카네기는 한 사람이 취득한 업적에 사회의 힘과 노력이 85%을 점하고 개인의 노력과 힘이 15%를 점한다고 하였습니다. 오늘 저의 15%노력을 여러분들에게 회보하겠습니다.” 김교수는 이렇게 자세를 낮추며 대표적인 저서와 “중국 길림성 식물도감”을 출판하기 위하여 그린 “길림성 식물세밀화”를 보여주었다. 영원한 진행형교수, “중국 길림성 식물도감”출판을 위해 혼신을 몰붓는 김수철교수님의 여생이 진정 멋지고 자랑스럽다. 김수철교수님은 “길림성로력모범”으로 성과 국가급의 많은 상을 받은 과학자이기도 하다.   (“로년세계”편집부2017년 제1기 “이달의 인물” 특별기고)                                       오기활    
384    살아보고 결혼하라 댓글:  조회:2439  추천:0  2021-09-29
일전에 결혼전 동거를 주제로 연변, 북경, 상해, 천진, 광주, 청도 등 지역과 한국, 일본의 187명 조선족대학생(대학원)을 설문조사 한데 따르면 조사대상들의 86%가  찬성한다고 하였다. 지난 한 때 결혼전 동거가 입에 올라 이러쿵저렇쿵 하던 입씨름이 어제일이 였는 데 오늘에는 다민족국가에서, 평균문화수준이 제일 높다는 우리 조선족들의 대학생들의 설문조사대상의 86%가 결혼전 동거를 찬성을 한다니 실로 전통적인 정조관념과 결혼관념에 대한 도전이라 하겠다. 지금까지 세계적으로 유일무이한 “성공철학(자기계발)”의 “괴짜강사”로 불린 래리 윙켓은 “결혼이 대개는 리혼으로 끝난다는 것이 조금도 신기하거나 놀랍지 않다”며 “당신이 함께 살아보기 전에는 그 사람을 알수 없다” “두 사람이 일년간 함께 살아 보기전에는 결혼을 할수 없다는 법률이 통과되면 리혼률이 절반 이하로 줄어 들것”이라고 장담했다.  “당신이 함께 살아보기 전에는 그 사람을 알수 없다”에 동감이다. 자연계(인체)는 길항(吉抗)작용과 반(反)길항작용의 조화로 이뤄진다고 하지만 자석이 아닌 인간의 부부관계는 상반된 성질을 가진 사람에게 끌려 흡인돼 산다고 말하기 어렵다. 상반된 성질을 가진 부부관계는 오래가지 못한다. 감정 하나로 이뤄진 부부관계는 일단 감정이 파괴되면 “님”이 “남”으로 되니깐.   래리 윙켓이 어느 기회에 “잘못된 결혼을 지속하기보다는 리혼을 하는 편이 더 낫다”고 말하자 그의 곁에 있던 로인분이 무릎을 탁 치면서 “맞는 소리”라고 대 찬성을 하기에 래리 윙켓이 당신의 결혼년령이 얼만가고 물으니 62년이라고 하였다. 그래 당신은 잘못된 결혼을 지속하기보다는 리혼을 하는 편이 낫다면서도 “결혼회갑”이 지낫으니 당신의 영구결혼“비결”이 무엇인가는 반문에 로인은 “상대를 내 방식으로 바꾸려고 할 필요 없이 그냥 그 사람으로 놓아 둔데 있다”고 했다. 그야말로 명답이라 하겠다. 그래서 “결혼은 창문을 닫고는 못잔다는 사람과 창문을 열고는 못잔다는 사람간의 종교적 련합체”라고 한다. 완전한 인간이 없는 한 완전한 결혼도 있을수 없다. 리혼은 잘못된 결혼에 대한 정정이다. 필자는 “먼저 살아보고 결혼하면 리혼률이 줄어든다”는 래리 윙켓의 관점에 찬성이다. 그리고 “상대를 내 방식으로 바꾸려고 하지 말고 그냥 그 사람으로 놓아둔 채 유지하라”는 로인님의 “비결”을 “리혼항체”라 칭하고 싶다. . “먼저 살아보고 결혼”하면 지금의 “번개식” 결혼에 따르는 “뢰우식” 리혼이 줄것이고 “무계획생육”으로 초래되는 부모, 자식 및 사회적인 “후환”이 줄게 될 것이며 결혼식에 참가한 하객들에게 리혼으로 “답”하는 불미한 일들이 줄 것이라고 확신한다 오기활기자                  《길림신문》2009.3.3.)    
383    네번째로 꼬집는다! 댓글:  조회:2221  추천:0  2021-09-12
  어제(9일) 필자는 고향의 친구가 “내가 생전에 제일큰 대접을 받았다”며 보내온 동영상을 받았는데 내용인즉 지난 8일에 지낸 “전 주 가장아름다운 로인 회갑연”을 친구의 가족이 찍은듯한  짧막한 록상이였다.  친구의 기쁨인즉 내 기쁨이라 필자는 십초도 안되는 록상이 너무 아쉬워서 연변텔레비방송국의“연변소식”재방송을  기대했다. . 그런데 10일 아침 6시반에 재방송하는 “연변소식”(한어)을 보니“전 주가장아름다운 로인”들로  국가민위 전임 주임 리덕수를 선두로 거의 모두가 주장, 인대주임....등 직무를 지낸 선임 주1급 지도자들이였다.    그래서 다시 “연변일보”를 찾아 보니 9일자 “연변일보”에 “8.15 로인절을 경축하기 위해 주로년사업위원회는 올해에 ‘가장 아름다운 로인’으로 평의된 전 주 29명의 로인을 위해 먹거리, 볼거리, 즐길거리로 가득한 풍성한 환갑연을 준비했다.”“환갑연은 알록달록한 한복을 차려입은 자녀와 사회 각계 인사들이 “아름다운 로인들”게 축배와 큰절을 올리며  만수무강을 기원,자녀와 손님들의 축복에 로인들이 기쁨을 금치 못해 덩실덩실 춤을 췄다.”고 보도했다.  텔레비에서 방송한“연변소식”에 실망한 필자는 저도 몰래 (또 그 모양이구나!)며 네번째로 꼬집는 직언직필(直言直笔)로 필을 들었다.   첫번째의 직언직필은 2012년의“60명 조선족환잡잔치유감 3”이다.  2012년 8월 15일에  주정부에서 조직한 “60명 조선족환갑잔치”는 연변자치주성립 60돐 경축활동의 하나였다.   당 행사에 필자는“참 잘했다”는 평가와 함께“환갑을 지내고나면 ‘흉갑’이 된다”는 격으로 “잔치유감(遺憾)1,2.3”을  “길림신문”에 발표했다. 2012년 8월 16일자 “길림신문”은 “인생 60을 한 순회로 하는 조선족의 환감잔치는 조선민족의 미풍량속으로서 이미 국가급무형문화재로 등록되있다”고 밝히였다.  그러니까 조선족의 환갑은 인생 60을 단위로 하는 인생단계의 수자적인 개념이다. 비록 시대의 발전에 따라 지금은“60청춘, 70 환갑”이라고 말을 하지만 어째뜬 환갑(回甲)은  61세 생신을 말한다.  60갑자를 다 지내고 낳은 해의 간지가 다시 돌아온다는 의미로 환갑이고 다음해부터 60갑자가 다시 진행된다는 데서 62세의 생신이 진갑(進甲)이다.     수연 (壽宴)은 어른의 생신에 아래사람들이 상을 차리고 술을 올리며 어른들의 장수를 기원하는 의식이다.  전통적인 수연은 육순(六旬, 60 생신), 회갑(回甲,還甲 61 생신), 진갑(陳,進甲 62 생신), 미수(美壽, 66 생신),`칠순(稀壽,七旬, 70 생신),희수(喜壽 ,77 생신), 팔순(八旬,80 생신), 미수(米壽, 88 생신), 졸수(卒壽,九旬, 90 생신), `백수(白壽,99 생신)수연으로 나뉜다. 그런데 2012년“60명 환갑잔치”에 참가한 분들의 년세를 보니 자치주와 동갑(60)은 없고 최하가 64세, 연길시 하남가 백풍사회구역의 김옥금할머니는 87세였다. 그러니까 그번의 잔치는”60명환갑잔치”가 아닌 “60명 수연잔치”로 칭해야 한다.   두번째 직언직필은 2017년의“텔레비화면 유감 1,2,3”이다.   이글에 올린 필자의 유감(遺憾) 첫째는 주 로령사업위원회에서 조직한 “2017년 연변‘가장 아름다운 년장자(最美长者)”표창대회의 텔레비화면에서 본 "아름다운 년장자 "의 주인공의 거의 모두가 주 1 급 책임자를 지낸 지도자들이라는 것과“2017 룡정 제 8 회 중국조선족농부절 축제”의 텔레비화면도 현직 각급지도자와 선임 주 1 급 지도자였다는 것이다.    이하는 어느 스위스 화교가 중국기자와 한 얘기다. “나는 해마다 중국신문과 스위시신문을 함께 주문한다. 어떤 날 중국신문의 1 면은 3/2의 지면이 관리들의 기사였다.”  “스위스신문에는 국왕이나 총리, 부장들의 활동소식이 거의 없다. 있다면 간단한 ‘성냥갑’소식이 아니면 어느 부장이 탈세를 했다, 국비를 랑비했다는 등의 풍자적인 기사이다”  “내가 본데 따르면 중국신문은 관리를 위촌하고 스위스신문은 민생을 다룬다.” 유감의 둘째는 2017년  1월에 열린 주 3회(당대회, 인대회, 정협회)와 10월 11일에 열린 “전주 민족문화사업회의’에서 조선민족복장을 입은 조선족대표와 조선족주인공들이 우리말을 안하는 것이다  그래 자기 민족의 말조차 꺼려하는 지도자나 대표들이 자기 민족을 사랑한다면 어느만큼 사랑하겠는가? 언어문자를 상실하면 민족정체성이 사라지는데 말이다. 유감의 세째는 텔레비화면에서 출연하는 조선족들의 복장이다.  우리 민족의 복장차림은 평시는 평복, 일할 때는 로동복, 조상(弔喪)때는 상복, 명절과 례식에는 민족복장(례복)을 차려 입는것이 전통이다. 그런데 텔리비에서 보면 조선족들이 한복차림을 하고 사과배를 따거나  벼가을을했다.   필자는 상술한 화면을 볼때마다 (타민족들이 저 화면을 보고 조선족들을 어떻게 생각 할가?), (저 것은 아닌데…)라는 반감으로 울컥해 졌다.   세번째의 직언직필은 2017년의 “전 주 가장 아름다운년장자 표창 유감 1,2,3”이다.  필자가 2017년 8월 25일에 조직한 “전 주 가장 아름다운 년장자 표창”대회를 “유감으로 꼬집은 내용인즉 “전 주 가장아름다운 년장자"들에 주 1급 령도자들이 10%나 차지했다는 것, 그리고 텔레비화면에“가장 아름다운 년장자44명”에 주1급 령도들만 올렸다는 것이다.   네번째의 직언직필로  올해의“전 주 가장아름다운로인 회갑연”이다.   꼬집는 첫째는“전 주‘가장아름다운 로인’회갑연”을 환갑연이 아닌“수연례”라 해야 한다(친구의 환갑연이 지난지도 14년)는 것이고 둘째는 텔레비화면의“전 주 가장아름다운 로인”들로 몽땅 주1급 선임령도간부라는 것이다. 이한 현상을 상술한 례로 이미 꼬집었으니 본문에서 더는 전개하지  않겠다. 기자는 사회의 병을 진맥하는 의사이다. 그래서“평생기자”를 추구 하는 필자는 사회와 민족에 대한 기자의 책임감으로 무릇 사회와 민족의 형상에 불미한 “병”을 보기만 하면 .“평생기자”의 사명감으로 드팀없이 당당하게 직언직필을 할 것이다. 물론 어느 령도간부나 어느 해당부문의 눈치를 살필 것 없이. 당당하게 말이다.     오기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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