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기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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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7    김학송 시인의 못 말리는 고향애, 민족애 댓글:  조회:1760  추천:0  2021-04-13
     필자는 길림신문이 한창 펼치는 '구술' (문화를 말하다)의 김학송 시인을 읽고 깊은 감수를 받았다.   김학송 시인의 구술에서 필자는 우리 조선족 선배시인들의 명작을 피부로 감수하면서 선배시인님들의 고상한 인격과 고귀한 품격을 머리 속으로 그려보며 흠모하였다.    김학송 시인의 구술에 비춰 필자는 한동안 지켜본 김학송시인의 못 말리는 고향애와 민족애를 반추하면서 뛰는 가슴을 더욱 소리나게 울렸다.    김학송씨는 필자의 고향(딸라자툰)과 강건너 마을(곡수촌)서 1952년에 탄생하였다.   시인은 시로 말한다.   필자보다 5년 년하인 김학송시인은 언녕 시, 수필, 가사 등 문학저서를 30여 권이나 출간하였고 30년 전(1993)에 중국측 대표로 아시아 시인대회에 참석, 작품이 전국 소수민족 '준마상', '해외동포문학상', 주정부 장백산문예상, 단군문학상을 수상, 작품이 《세계시인선집》에 수록되였다.    김학송시인의 《내 사랑 연변》은 중조 대역본으로 출판되여 자치주 창립 65주년 헌례작품으로 선정, 대형음악무용서사시 는 건국 70돐 경축 극본으로 선정되였다.    필자의 시각으로 김학송작품은 우리 민족의 과거, 현재와 미래를 담고 민족의 자부심과 민족의 얼을 노래, 특히는 고향과 민족에 대한 애틋한 사랑이였다   필자는 지난세기 70년대에 도문시 '모택동사상학습활용강연회'에서 처음으로 김학송씨를 알게 되였고(김학송은 생산대 논물관리원, 필자는 생산대 돼지사양원 신분으로 대회서 강연했다) 80년대부터는 그를 '연변일보 통신원', 시인으로 알고 평범히 지내다가 도문시 창시 45주년과 자치주창립 60주년 기념행사와 그가 상기 행사로 두만강수석기념관(홍보철)을 창설한 것을 계기로 좀 더 깊이 알게 되였다.       시인의 고향애   김학송 시인은 탯줄이 묻힌 땅, 혼을 키우고 꿈깃을 펼쳐준 하늘로 연변을 그렇게도 사랑하며 노래하였다.   그의 시 《혼의 노래》다.   -주머니가 조금 비여도 좋다, 내 부모, 내 형제 내 정든 사람들과 늘 함께 할 수 있다면 그것이 진정 혼이 있는 기쁨, 뿌리있는 행복이다.   - 여기는 연변, 세상에 하나뿐인 조선족의 고향! 아리랑 장단에 어얼쑤, 천년만년 우리 노래 불러야 하리, 후손만대 혼의 노래 불러야 하리.   지난 2010년 7월, 도문시 건시 45주년 기념행사와 함께 펼치는 2010년 중국두만강문화관광축제 때다.    김학송 시인은 그 누구의 부탁도 없이 축제행사 개막식을 몇달 앞두고 자기가 완성한 노래를 자기의 돈주머니를 풀어 작곡가와 가수를 선택하여 록음테프로 제작하여 도문시 해당부문에 올리고도 부족하다며 세인들게 도문을 더 널리 홍보하고저 자기가 한동안 뇌즙을 짜며 다듬어 낸 '도문홍보 구호'(10조목)를 보충하여 도문시 해당부문에 올렸다.    한편 김학송은 2010년 두만강문화관광축제의 한획으로 될 (홍보청)을 꾸리기에 연길서 오가며 자기 형제들의 18년간 생사를 무릅스고 땀흘리며 수집한 300여 점의 두만강수석을 형제들의 투자로 을 꾸려 도문창시 45주년 축제행사에 선물하였다.    당년에 을 전문 찾은 주정부 부비서장 마경봉은 "은 연변수석문화에 진지를 마련했다. 이 진지를 선도로 전 주 수석애호가들의 합작과 교류를 추진하라"고 부탁했다.   시인의 민족애    김학송 시인은 자치주환갑을 자기 부모의 환갑처럼 관심하였다.    2012년 6월 20일, 필자는 김학송씨한테서 이런 메일을 받았다.   ㅡ 안녕하십니까?    신문매체에 글들을 보면서 역시 오기활의 글들이 례사롭지 않구나 했습니다.    민중의 후설다운 사변적인 문장들에 박수와 경의를 표합니다.    어제 연변가무단에 갔다가 들은 소식인데 자치주 60주년 경축 주제가가 이미 완성되였답니다 .    그런데 참 좋은 일인데 몇가지 리해하기 어려운 구석이 있습니다.     1, 가사는 리흥국선생이 중문으로 썼다고 합니다.    언어와 문자에는 한 민족의 혼과 온기, 정서와 꿈이 묻어있습니다. 하기에 우리 가요는 우선 우리글로 씌여져야만이 우리의 정서를 가장 잘 담을 수 있게 됩니다. 자치주 60잔치를 경축하는 주제가는 더구나 그렇습니다.   주제가의 제목이 라고 하는데 이 제목은 연변조선족의 본질적인 정사와는 거리가 멀어보입니다.    사실상 해란강이 두만강보다 연변조선족의 력사와 삶과 정서의 복판을 흐르는 강입니다 .    2, 노래의 작곡도 북경의 장천일선생이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장천일선생은 저명한 작곡가이기는 하지만 연변조선족의 삶과 먼 곳 게시는 분이기에 정서적 표현에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레서 저는 연변에서 나서 자란, 연변에 대한 애정이 가장 깊은 연변의 조선족작곡가가 작곡했더면 더 좋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3, 더욱 리해할 수 없는 것은 환갑주제가를 몽골가수가 부른다고 하는데 참으로 답답합니다. 부모의 회갑잔치에 동네집 보다는 자기 자식들이 노래하고 춤추는 게 상식이 아닙니까?   이상 내용 참조하여 오기자님의 좋은 글을 보고 싶습니다.   김학송 시인의 메일을 받은 날 저녁에 필자는 시인의 피타는 민족애와 그에 따른 애달프고 불타는 '걱정'으로 좀처럼 잠을 이룰 수 없었다. 필자는 온 밤을 우뭉자뭉하다가 사회에 대한 기자의 사회에 대한 첵임감으로 새벽 3시에 일어나 는 제목으로 김학송씨의 메일 전문외에도 자치주환갑에 올리는 연변텔레비방송국특집프로 리허설을 보고서 기자를 찾아와 "자치주 환갑에 (에루아 어절씨구 좋구나 좋네,,,연변 조선민족 자치주 세웠네)가 없어 되는가며 질문을 하는 연변의 '독서왕' 송해숙할머니의 '원성'을 보충하여 는 제목의 글을 신문에 발표했더니 독자들의 반향을 컸다.   다음은 몇몇 독자의 댓글이다.   ㅡ"우리의 어른들이 왜 그랩니까? 한때는 주지도자 어른이 연변조선족자치주를 없애고 무슨 시를 만든다고 하더니... 자치주환갑이 지나면 우리 주가 계속 존재하겠는지 걱정됩니다.."(길림신문 2012.6.28)   ㅡ오선생님, 이글의 제목을 로 수정했으면 좋겠습니다(.2012-07-04)   ㅡ차치주 창립 주제가를 한여라는 몽골족이 부른답니다. 기가 막힌 일이지요. 자치주 창립 60돐에 전국 56개 민족대표가 모두 오겠는데 축제주제가를 몽골족이 부른다면 기타 민족대표들이 연변조선족을 뭐라고 하겠습니까?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칩니다. (:2012-07-02)     이 밖에 필자는 김학송 시인이 필자의 사진작품에 배시한 것을 평생의 자랑과 영광으로 간직하고 있다.     [사진과 시]도문 일광산 7 경개     갑옷 입은 장수   오랑캐를 무찌른 용맹한 장수런가? 눈에는 불길, 코등엔 뢰성 철갑을 스치는 옛날의 바람이 따사롭구나.   당승과 저팔계     저오능과 당현장이 영원한 전설로 마주서서 서천길 얘기를 주고받네.     흑인용사     정의를 웨치는 의로운 분노에 흑인용사 손길에 하늘이 배시시 문을 여네.     범진령 호랑이       범진령의 호랑이가 깊은 잠에서 깨여나 세월의 숲속을 어슬렁거리네.       일광산 복강아지      내고향 지키는 복술강아지 컹!-컹! 먼 하늘에 복을 부른다      일광산 사자봉     앉은 듯 일어선 름름한 사자 숨은 듯 드러난 웅훈한 기상 오, 기지개 켜는 동방의 사자.   두만강 굽이굽이   백의겨레 꿈 심고 출렁출렁 일광산 감돌아 구비구비 일천리 먼길엔 사연 또한 많더라.   /사진 오기활, 시 김학송     끝으로 필자는 2015년 3월의 어느 모임에서 연변의 '독서왕' 송해숙할머니의 출연으로 이 글을 맺는다.   ㅡ 나는 김학송시인을 한번 따뜻이 대접하고 싶습니다. ...요즘에 김학송 시인의 시집을 읽으면서 시를 쓰고 싶다는 엉뚱한 생각을 가끔씩 한답니다.  내가 오늘 이 자리에서 여러분께 김학송 시인의 시를 읊어드리겠습니다.   …언덕마다 들판마다 옛말이 숨 쉬는 곳 나무마다 바위마다 전설이 주렁진 곳 골마다 계곡마다 자음과 모음이 돌돌 여울져 흐르는 곳  여기는 연변 – 세상에 하나뿐인 조선족의 고향! 아리랑 장단에 얼씨구- 천만년 우리 노래 불러야 하리 후손만대 혼의 노래 불러야 하리    오기활/     
376    옛이야기로 배우는 삶의 지혜 댓글:  조회:1881  추천:0  2021-04-01
                   아버지의 유서 책을 아무리 많이 읽은 젊은이라고 해도 삶에서 다양한 경험을 체득한 로인의 지혜를 따라가기가 어렵다고 한다.   필자가 이에 체득하기는 60년 전에 고향마을에서 대학생 리모가 낫을 놓고 “ㄱ” 자도 모르는 김인길 로인과 장기를 놀면서 번번히 지고나서 불복하는 하는 것을 목격한 것이 계기로 되였다. 김 옹은 비록 장기쪽의 글을 한 자도  읽고 쓸 줄을 모르는 문맹이지만 장기쪽의 글씨를 그림으로 보고 익히고 장기쪽이 다닐수 있는 길에 능숙하기에 자기만이 쌓아온 장기수로 장기쪽의 글을 읽고 쓰는 대학생을 변변히 이길수 있은 것이다.    책 속에서 배우는 지식은 리론적인 것에 지나지 않지만 인생에서 얻는 경험은 몸과 마음으로 느끼면서 깨달은 지혜이다. 그래서 누구나 몸소 경험하며 배운 지헤를 값지고 중요하다고 한다.   어느 철학자는 “하늘은 사람의 나이에 맞게 지혜를 준다”고 말했다. 즉 젊으면 젊은 사람에게 맞게, 나이 들면 그 나이에 맞는 지혜를 내린다는 것이다. .    이런 이야기가 있다.   한 현명한 유태인이 아들을 에루살렘의 학교에 보냈다. 그런데 아들이 공부하는 동안 병을 얻고 아무래도 아들을 만나보지 못하고 죽을 것 같아서 유서를 썼는데 내용인즉 자기의 전 재산을 자기집 노예에게 물려주고 아들에게는 그가 원하는 한 가지 재산만을 주라는 것이다. 아버지가  병이 나서 얼마후에  세상을 떠나자 노예는 주인의 아들에게 그의 아버지 죽음과 함께 아버지가 남긴 유서를 전달했다.    아들은 몹시 슬픈 마음으로 아버지의 장례를 끝낸 후 랍비를 찾아가 전후 사연을 설명하며 이런 불평을 털어 놓았다. “아버지가 왜 저에게 재산을 한 가지만 물려 주엇을가요? 저는 아버지가 살아계시는 동안   아버지의 뜻을 거역한 일이 한 가지도 없는데 말입니다...”  그러자 랍비가 말했다. “천만에, 자네의 아버지는 매우 현명한 분으로 자네를 진심으로사랑하신 것일세.” 그러나  아들은 계속하여 아버지를 원망하였다. “나의 아버지가 재산을 노예에게 전부 물려주고 내게는 한 가지만 주라는데도 말입니까?”  이에 랍비가 말했다. “자네도 아버지만큼 현명해져야 하네. 자네 아버지가 무엇을 진심으로 바라셨는지 잘 생각해 보게나, 그러면 아버지께서 자네에게 전부의 재산을 물려 주셨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네.”  “자네 아버지는 림종할 무렵 자네가 집에 없기 때문에 노예가 재산을 가로채고 도망쳐 버리거나 아니면 아버지가 죽은 사실조차 자네에게 전하지 않을 것이 걱정되여 재산 전부를 노예에게 준다고 한 걸세.  노예는 재산을 물려받고  기뻐서 자네에게 달려가 그 사실을 확인시키려고 한 것이네. 만약에 아버지의 유산이 실현되면 전부의 집재산이 고스란히 보존될 것이 아닌가?” 그래도 아들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물었다. “그것이 나에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이에 랍비가 답답한 어조로 말했다. “자네는 젊은이라 역시 지혜가 부족하군, 자네는 노예의 재산이 모두 주인에게 속한다는 법을  모르는가?  부친이 자네에게 원하는 재산을 한 가지를 물러 준다고 했으니 자네가 노예만 선택하면 될 것이 아닌가? 그러니  자네의 아버지가 얼마나 현명한가?”   오기활
375    21세기의 "리시진" 김수철(련재 33) 댓글:  조회:1648  추천:0  2021-03-18
제 3부;                                                                신문잡지로 읽는 김수철 6, 그날, 또 다른 젊음을 보다 올해 93세인 “조선족 리시진”, “식물의 왕중왕”으로 불리우는 로학자가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일전에 들뜬 가슴을 달래며 그분을 만나게 되였다. 그분이 바로 연변대학 농학원 퇴직교수 김수철교수님이다. 자애로운 미소로 반겨주던 그분을 흔히 우리 젊은이들이 상상할수 있는 그런 모습으로 지레짐작을 했었는데 놀랍게도 전혀 다른 90세 고령의 모습이였다. 돋보기도 끼지 않은채 책을 보았고 아무런 부축도 없이 이동이 자유로왔다. 하지만 옥에 티라면 교수님은 난청이여서 무등 안타까웠다. “나이는 수자에 불과하다”고 그날 나는 교수님한테서 또 다른 젊음을 보았다. 젊음이란 무엇인가? 탄력 있는 피부, 건장한 체격, 곧은 허리, 튼튼한 두다리면 젊음인가? 하지만 이런것들이 꼭 젊음의 간판은 아니다. 깊고깊은 인생의 샘물속에 간직된 신선미ㅡ 강인한 의지, 시들지 않는 열정과 그에 따른 끈기와 의력이 곧 젊음이다. 또한 어려움을 뚫고 나가는 기백과 거친 땅을 일구어 옥답으로 만드는 힘이야말로 젊음이 아니겠는가. 오늘도 한결같이 김교수님은 오로지 “중국 길림성 식물도감”의 출판을 위하여 초심을 잃지 않고 꿋꿋이 앞만 보고 달린다. 누군가의 말처럼 성공은 자연연소의 결과가 아니다. 먼저 자기 자신에게 불을 지펴야 한다. 성공을 위해서는 자신의 전부를 거는 희생을 감내해야 한다. 온몸을 던진 완전한 희생으로 이루어진 성스러운 결과라 할가, 김교수님은 일생을 통째로 장백산식물 연구사업에 바쳐왔다. 수십년 세월을 식물연구에 온갖 심혈을 기울이고 장백산맥 곳곳을 메주 밟듯 다니다보니 어떤 식물이 어떤 곳에 생장한다는 것을 손금 보듯 환히알고있다. 그리하여 후배 교수들이 어떤 식물이 어디에 생장하는지 몰라 문의해올 때마다 교수님응 “아무 산, 아무 언덕에 가면 있다.”고 가르쳐줄 정도이다. 식물에 대해서는 학자중의 으뜸, “식물의 왕중왕”이 되기에 손색이 없다. 명조시기에는 유명한 의약학자 리시진이 있었다면 오늘날 우리 신변에는 “조선족 리시진”으로 김수철교수가 있다. 과연 김교수한테 있어서 식물(산촌초목)이란 무엇일가? 평생 산천초목과 같이 보냈다니 아마도 산천과 초목은 김교수의 초상화요 명함이요 인생이리라. 교수님은 불타는 사명감으로 93세의 고령에도 여전히 장백산식물연구사업에 투신하고있다. 김교수는 그야말로 자학천재이다. 자학으로 영어, 라틴어, 로씨야어를 익혔다. 교수님의 학구열은 보기 드물게 뜨거웠다. 영어학습장만 해도 교수님 인생의 한 발취로서 인생의 한 갈피에 차곡차곡 쌓여있었다. 수십년 세월이 흘러 이미 색바래지고 보풀이 일었건만 인쇄한듯이 반듯한 영어 필기책 한장한장에서는 그 노력의 흔적과 구슬땀이 밴 냄새가 물씬 풍겨왔다. 놀랍게도 어느 한 글자도흐트러집이 없이 빼곡히 또박또박 곱게 정연히 씌여져있었다. 어떠한 일을 하든지 마음가짐도 중요하겠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수많은 덕목중 하나가 바로 열정이다. 열정은 아무에게나 생기는 것이 아니다. 비로서 한곳에 치중하여 관심을 갖고 사랑을 갖고 시간을 투자할 때만이 열정이 돋아난다. 과거의 자학학습에서 충분한 분발과 끈기를 보여주었기에 오늘날 그 누구보다 발전하고 성장할수 있었다. 현재 집필중인 “중국 길림성 식물지”출판자료중에 김교수가 직접 그린 2600장의 장백산식세밀화(线條图)가 상자 가듣 담겨있었고 장백산맥 곳곳을 누비며 찍어둔 사진들이 또 다른 한 상자속에 수북히 쌓여있었다. 퇴직해서 32년간 장백산맥을 답사하며 식물표본을 채집하고 일일이 사진을 찍고 직접 하나하나 손으로 그렸다고 한다. 교수님처럼 식물표본을 그림으로 그리는 식물학자는 우리 나라에 거의 없다고 한다. 나도 5년간 가까이 그림을 배워온 사람이지만 교수님이 그린 그름을 보는 순간 그만 “와ㅡ”하고 터져나오는 감탄을 누를수 없었다. 갖가지 식물들의 이름은 잘 모르지만 어찌나 필을 령활하고 섬세하게 다루었는지 그 한장한장의 식물들이 생생히 살아있는듯했다. 그림 그리기는 가느다란 선으로 시작하여 팔목을 360도로 돌려 여러가지 형태로 그려내는거라 가볍게 생각될지라도 실은 어마어마한 정력과 집중력, 관찰, 인내심이 필요된다. 세상에 이런 일에 나올수있는 90세 고령은 흔치 않다. 이런 김교수님을 보니 나는 문득 나뽈레옹의 “내 사전에는 불가능이란 없다”란 명언이 떠 올랐다. 늙어갈수록 “예전에 비해 사는게 락이 없다.”고 신세를 한탄하는 추이다. 하지만 김교수님은 어떤 일이든지 그속에서 행복을 찾아낼수 있는 사람처럼 “내가 하고싶은 일을 마음껏 할수 있어 더 없이 행복하다.”고 얼굴에 담고있다. 인생은 나이로 늙어가는게 아니라 리상의 결여로 늙어가는게 아닐가싶다. 하여 남은 여생도 자기만의 취미로 이루고 저 하는 꿈으로 맛갈스레 제2의 인생을 즐기고있다. 그렇다. 젊음은 20대 소년에게만 있는게 아니라 90대 로년에게도 있다. 김은하 “로인세계” 2017년 제1기 (이달의 인물에서)                
374    남성의 세계는 녀성이 만든다 댓글:  조회:3943  추천:1  2021-03-04
“남자의 그늘에 녀자가 있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그러나 이 표현을 “완전히 옳다고  못한다”는 것이 필자의 주장이다.  가끔 녀성의 영향을 받지 않아도 자기는 얼마든지 남자답게 산다고 뽐내는 남성을 만나게 된다. 그런 남성일수록 오히려 녀성이 없으면 단 하루도 살지 못하는 것이 아닐가 싶다. 즉 자기의 남자다움에 자신이 없기 때문에 그런 결함을 보완해 보이는 심리인지 모르겟다. 남자들의 가장 큰 원동력은 녀자를 기쁘게 해주고 지켜주고 싶다는 마음에서 오는 것이다. 상고시대에 사냥꾼이 곰 두마리를 잡아서 동굴로 끌고 왔는데 옆의 동굴에서는 한마리도 못 잡았거나 겨우 한마리밖에 잡지 못했다면 곰 두마리를 잡은 그 사냥꾼은 가슴을 활짝 펴고 기뻐했음이 틀림이 없다. 다른 남자보다 먹을 것을 많이 얻었다는 사실뿐 아니라 자기 안해에세 보여줄 자랑스러움을 상상해 보면 이쯤을 금방 짐작하게 될것이다.  현대의 사냥꾼은 필수품과 사치품을 사는 수단,  다시  말해서 돈을, 먹고살기 위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가지고 돌아간다. 만일 그가 정직한 남자라면 가슴을 쭉 펴고 내 아내를 위해서 그렇게 한다고 말할 것이다.   이런 말구가 귀맛이 향기롭다.   세상을 움지이는 것은 남자지만 그 남자를 움직이는 것은 녀자이다.   남자는 집을 짓고 녀자는 가정을 짓는다.   안녕“安”자를 파자하면“집안에 녀자가 있다”, "집안에 녀자가 있으니 안녕하다”로 풀이된다. 그래서 “안해”란 집안의 해(태양)이라  뜻한다.    남자는 출생되고 녀자는 창조(안해, 며느리, 어머니로)된다.   1류 안해가 1류 남편을 만들고 1류 남편(세대주)이 1류 가정을 만들며 1류 가정이 1류 국가를 만든다.   오기활
373    21세기의 "리시진" 김수철 전(련재32) 댓글:  조회:1692  추천:1  2021-03-01
                                       제 3  부;  신문잡지로 읽은 김수철               5,   미리 배워야 할 “죽음학” “누구나 생을 다하면 무덤으로 간다. 죽음은 생의 파멸이며 안식과 평화를 얻는 순간이기도 하다. 죽음은 령혼의 일부분이며 무덤저쪽에서 우리에게 말을 건다. 죽음을 미리 준비하라는 유언이나 장례절차, 제사의식 등의 준비가 아니라 그대 령혼이 안식할 수 있는 준비를 하라는 것이다.” “세상에서 죽음만큼 확실한 것이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겨우살이는 준비 하면서도 죽음을 준비하지 않는다.” 이는 로씨아의 대문호 똘스또이의 말이다. 필자가 “죽음학”을 미리 배워야 한다고 인식하기는 다음과 같은 계기와 모델들이 있었다. 첫 계기와 모델은 우리민족의 “로신”으로 김학철선생님이다.  김학철선생님은 2001년 9월, 풍진세월을 외다리로 버티던 몸이 불치병으로 85세에 생의 가망이 없게되자 “작가로 글을 쓰지못하면 운명이 끝이다” “병원, 주사 절대거부, 조용히 떠나 겠다” “사회의 부담을 덜고 가족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더는 련련하지 않고 깨끗이 떠나간다”며 최후의 21일을 단식, 단약했고 사망후 유언대로 추도식이 없이 소규모의 친척과 친지들이 골회를 두만강에 띄워 조선 원산의 고향으로 흘러 보냈다. 둘째 계기와 모델은 조선족의 “리시진” 김수철( 93세) 교수님이다. 교수님은 “죽음을 어떻게 생각합니까?”는 물음에 “죽음은 참외나 도마도가 다익으면 절로 떨어지는 것과 같은 자연사이다. 자연사인생을 받아 들이면 겁이 없게 된다.” “나는 지금 죽을 준비를 한다. 죽기전에 할 일을 해놓고 죽어야 한다. 정판룡교수가 그랬다. 정교수는 암병에 시달리며 죽기전까지 해야 할 일들을 정리 하였다. 지금 나는 합작이 아닌 혼자서, 항목이 아닌 개인적으로 ‘중국길림성식물도감’출판을 위해 2600가지 식물을 그리고 있다. 교수님은 “이미 출판된 《길림성식물명록》에 빠진 것이 많아 “내가 보충해야 한다”며 로친(94세)이 있으면 불편하다고 딸집에 보내고 90고령에 독거생활을 하면서 고군작전 했다. 세 번째 계기와 모델은 한국의 영동농장 김용복회장(84세)이다. 김회장은 사람농사, 흙농사, 사랑농사를 하는 뜨거운 농사군이다. 3살에 어머니를잃고 15살에 월사금을 내지 못해 학교에서 쫓겨난 후 홀로 고향을 떠나 삶을 개척, 40대에 열사막의나라 사우디에서 남새농사를 성공하여 부자로 되여 금의환향한후 버려진 간석지를 사들이고 개척하여 매년1만 2000여석의 량질미를 나라에 바치는 한국 제1농장주로 되였다. 김회장은1982년에 사재 10억원을 출자하여 “용복장학회 (재)”를 설립, 2005년 70세에 “흙농사”로” 130억원을 출자해 “한사랑농촌문화재단”을 설립, 80 세에 제3세계 어린이와 가난한 사람들을 대상해 “사랑농사”로 여생을 불태우고 있다. 지난 4월 20일, 김회장은 인생무대의 마지막 연출로 5천만원을 투자해 “제10회 한사랑농촌문화상시상식” 마무리를 한 뒤를 계속하여 “월정김용복어린이복지재단”에 33억원, “영동농장 신사옥 출범에 55억원, “ (재)용복장학회”에20억원, “아너소사이어티(사랑의 열매)에 1억원, 강진군 로인복지재단출범에 2천만원을기부 하였다. 이날 김회장은 귀빈들에게 자기가 준비한 죽음 준비를 이렇게 소개하였다. “나의 몫의 재산(부인과반반으로나눔)전부와 장기(腸器)를 사회에 바친다”는 유서를 금고에 보관했다.” ㅡ사망이 판단되면 사전에 수액관(輸液管)을 뽑아야 한다. 그리고 운명을 하면 박수로 저승에 보내라고 부탁을 하였다. 만약 어느 누가 울기만 하면 벌떡 일어나서 귀쌈을 칠 것이다. ㅡ장례 때 준비로 유상(遺像)(활짝웃으며찍은채색사진)과 제일 즐겨 부르는 노래 3곡을 선정해 놓았다. ㅡ장기를 모두 기증한 나머지 유체는 화장한후 고향땅에 뿌린다. 필자가 만난 “죽음학”의 “3김”은 모두 값진삶으로 인생을 마무리를 하면서 아무런 미련도 없이 죽음을 당연히 받아 들이는 분들이였다. 프랑스제 5임 대통령 드골장군은 “나중에 죽엄이 언제나 승리 한다”고, 영국의 유명작가 토마스풀러는 “훌륭하게 죽는법을 모르는 사람은 한마디로 살았을 때도 사는 법이 나빴던 사람이다“고 말했다. 죽음이 삶을 받쳐준다. 때문에 그삶이 더욱 빛난다. 그래서 누군가는 “잘 죽는 것이 잘 사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했다. 사람에게는 저마다 고유한 삶의 방식이 있듯이 죽음도 그 사람다운 죽음을 택할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필자는 우리가 일찍부터 삶을 배우듯이 “죽음학”도 미리 배워야 한다는 주장이다.                                    오기활                                 길림신문   2016-06-01 10  
372    “건강주권”을 찾으라 댓글:  조회:2647  추천:0  2021-02-24
2003년 필자는 연변농학원 김수철교수가 “대중과학”잡지에 련재로 발표한 “솔은 건강장수의 묘약이다”를 읽고 그 해부터 지금까지 김교수의 처방에 따른 “솔순주”와 솔즙을 거의 매일 복용한다.   17년 간 꾸준히 견지한 “솔식(松食)료법”은 필자의 몸건강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례하면 머리털이 빠졌던  정수리에  많은 머리가 자라났고 해마다정기적으로 하는 신체검사에서 번마다 혈액이 깨끗한 것으로 나타났고 색갈이 검고 형태가 흉하던 발톱이 희고도 정결하게 되였다.   이 밖에 가끔씩 때를 거려도 무력하거나 배고픈감이 없었다. 그래서 오래 전부터 필자를 알고 지내는 많은 사람들이 이미 70대 중반인 필자를 60대 초반이라면서 “젊어지는 비결이 무엇입니까”고 물어본다.  이런 와중에 필자는 지난해 말에 연길에 “솔박사”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서로간 솔의 효능을 담론해 보고저 지난 12월 초에 연길 환락성(원 신세기호텔)에 자리한 “연변장백산솔잎연구유한회사” 의 조경수사장을 세번이나 만났다. “솔이 어머니를 살렸습니다!”   조경수는 1956년1월 2일에 흑룡강성 화천현에서 출생하였다. 조국해방전쟁, 항미원조전쟁의 참전용사인 그의 아버지(공산당원)가 중년에 불의의 사고로 사망되자 경수씨는 젊은 나이에 어머니와 두 동생들을 책임진 세대주로 중임을 떠멘외 공천단서기, 민병련장 등 직책까지 맡고 삶에 열심하다가 안도에 이사와서 세집살이를 하던 때인1998년에 어머니(최영숙)가 중풍으로 쓰러져 4개월간 현병원에 주원하여 치료를 받았으나 별다른 호전이 없자 출원하였다.   어머니의 중풍병은 경수씨를 의학공부에 전념하게 하였다,  어머니의 중풍치료에만 목적을 두고 동서고금의 의학서적을 탐독하던 경수씨는 리시진의 “본초강목”에서 “중풍 치료에 솔이 백가지 나무의 최고다” 는 등 소나무의 약효능을 읽고 머리속에 가파른 바위에 뿌리를 박고 령하 40도에서도 얼지 않고 여름철 폭염에 데지 않는 사철푸른 소나무가 떠올랐다. 게다가  “중국의 약왕”으로 불리는 손사묘(孙思邈,기원 542ㅡ682)가 “식약동원(食药同源)의 양생법으로  솔식(松食)을 하여 141세까지 살았다”는 의서를 읽고 경수씨가 “솔만이 어머니를 살려 낸다”는 희망을 굳혔다. 그로부터 경수씨는 솔채집에 나서 솔뿌리, 송진, 솔잎, 솔껍질, 솔방울 등 소나무 모두를 알뜰하게 100  여근을  채집하여 큰가마로 밤낮을  달여서 측출한 걸쭉한 솔농축액 7병을  어머니에게 정성껏 대접하였다.  효성이 지극하니 돌우에도 꽃이 폈다. 어머니가 28일 만에 의식을 회복하더니3개월만에는 제법 동네나들이를 하였고 더욱 신기하게도 어머니가 회춘하여 이발이 새로 나고  생리까지 생겼는가 하면 백발머리가 검해진데서 동네서 어머니를 “2층머리 아매”라고 불렀다.   어머니의 병으로 우연하게 솔을 만나 구사일생으로 어머니를 살려낸 경수씨는 “한 생을 솔과 함께 살리라”는 굳운 결심으로 2003년 “연변장백산솔잎연구유한회사”를 설립하고 운영하면서 체계적인의학공부를 공부하고저 2005년에  사평위생학교에 입학하여4년간의 의학전문지식을 배웠다.  지금까지 경수씨가 접대한 만 수천명의 국내외 고객(환자)과 중에 20년간 당뇨병으로 시달리던 박춘산씨가 몸건강을 되찾고 “근로한 인생 휘황한 열매, 백세가 꿈이 아니다”는 글을 박은 금기를 경수씨에게 증송.... 간경화 말기로 죽음만을 기다렸다는 단동시의 김인철(49세, 전화 155 6763 0166)씨는 지난1월 6일에 필자의 전화취재에서 “조사장을 만나 새로운 삶을 살게 되였다”며 조사장게 드리는 새해의 선물로 최근( 12월 26일)에 진찰한 간화험단를 조사장게 부쳐보냈다며 기뻐 하였다. 중국의 “솔왕”으로   2006년 5월 16일 연변일보(한문)는 1면 톱기사에 중국 “솔연구의 제1인자”라는 제목으로 “연변장백산솔잎연구유한회사” 조경수의 사적을 큰 폭으로 소개하였다   경수씨에 따르면 기타 소나무의 잎은 두, 세개이고 모양도 반달형인데 장백산홍송은 잎이 다섯개고 모양이 3각형이다. 장백홍송은 기타 소나무들보다 잎이 많지만 삼격형으로 표면적이 작기에 바람을 이겨내고 빗물을 쉽게 털어내는 우세로 생명력이 강하다. 장백홍송의 잎은 기타 소나무의 잎보다 색갈이 검푸르고 맛이 쓰고, 떮고,  시구며 영양성분이 높고  약효능이 좋 다.  그리고 장백홍송의 열매(잣)와 씨는 독성이 없기에 직접식용할 수 있다.  지금까지  전국에서 “연변장백산솔잎연구유한회사”가 제품품종이 제일 많고 (18종)과 획득한 국가전매특권도 제일 많다(4개).   2006년 전국성신3A진선령맹에서 조직한 회의에서 이 회사가 “3A상”을 수여 받았고 2007년에 중국경제엘리트론단련석회에서 조직한 “제1기중국기획절지정례품”회의에서 이 회사의 제품이 “국가지정례품”으로 선정되였다.   2020년에  이 회사는 중국서 제일 처음으로 “솔잎식품생산허가증”을 획득한 회사로 부상되였다.   그가 하고 싶다는 말    1, 건강의 비결은 “건강할때 건강을 지키는 것”이다.  동,서양 의학을 전공하고 “뇌내혁명” 저서로 국내외에서 이름을 떨친 일본의 의학박사 하루야마 시게오(春山茂雄)는 “척추동물의 수명은 뇌 발육 기간의 5배이다... 인간은 25살까지 뇌가 성장하므로 125살까지 살 수있다.”  “사람은 인체“미병( 未病) 단계에서 건강에 관심을 돌려야 한다.” 고 했다.   이에 비춰 누구나 건강을 챙기려면 무척대고 많이 먹어 건강을 지켜야 한다는 전통 습관과 병이 난후 병원을 찾는 전통관념과 철저히 결렬해야 한다. .   한마디로 건강은 건강할 때 지키고 장수는 무병장수를 해야 한다.  병치료로 우리를 찾지 말고 “미병”단계에 솔식료법으로 141세를 산 “중국약왕”(孙思邈)을 따라 배우라. 2, “장수우물”을 활용하라  우리는 올해에 “다 함께 건강을 챙기자”는 리념으로 마를줄 모르는 “장수우물”을 파놓고 여러분과 “분향경제(分享经?)를 실행한다. “분향경제”(장수우물)란 우리의 제품을 사용하려는 고객들이 먼저 1년어치의 선불금을 내고 제품을 사용한후 년말에 선불금 전액을 되돌려받는 것이다.  여러분들은 지난날 약과 병원(의사)에 의탁하여 건강을 지키려는 “식민건강”(殖民健康)에서 벗어나  “미병” 때 자신의 건강을 챙기는 “건강주권”(健康主权)을 찾기를 바란다. 필자는 “나는 연구원일뿐 사회적인 인간교제에는 거의 빵점이다” 며 솔연구에만 꾸준하다”는 경수씨가 돋보여 보였다. 오기활  
371    옛이야기속의 인생조언 댓글:  조회:2587  추천:3  2021-02-10
                에디손의 욕심    사람들 마다 너무 많은 욕심을 부리면 안된다. 무리한 욕심은 발전보다는 오히려 화를 불러들인다. 그러니깐 어떤 일이든지 모자라지도 앟고 넘치지도 않을 만큼이 적당해야 할것이다.  고무풍선을 크게, 더 크게 부풀리려고 무리하게 공기를 주입하느라면 당연히 “펑”하고 터져 버린다. 음식도 포만감의 정도를 벗어나 많이 먹게 되면 탈이 나게 되니까 아무리 맛있이 있더라도 조금 더 먹고 싶을 때 수저를 내려 놓는것이 건강에 리롭다. 모두가 세상에 무리로 하여 리로운것이 거의 없다는 것을 잊지 말하야 한다.   다.  우리는  욕심을 버릴 줄을 알아야 한다. 욕심은 짧게는 인격을, 길게는 인생을 망가 뜨리는 암적인 존재와도 같다. 만물의 령장인 인간에게 욕심에 따르는 “과식병”이 있지만  산짐승들은 “과식병” 이 없단다.       에디손의 욕심 이야기다.   축음기, 영사기, 전구... ... 등 무려 1300여 건이 되는 발명을 세상에 내놓은 에디손은 생의 만년에 특유한 고집(욕심)으로 실패를 거듭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에디손은 평소에 “몸은 머리를 여기 저기 옮겨주는 데만 필요하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며 하는 일에만 미치였다. 그는 70세가 넘어서도 잠자는 시간이 고작 하루에 4시간좌우밖에 안 되였다.  그는 자신의 축음기 회사에 과도한 애착을 느낀 나머지 라지오방송이나 전기식 레코트플레이어의 시장성을 무시한 것이 그의 실수였다. 에디손은 불가능하다는 사람들에게 이런 억지를 부렸다. “사람들은 라지오방송국이 일방적으로 내보내는 프로그램에 곧 싫증을 내고 우리 회사의 축음기로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듣고 싶어할 것입니다.”  아무리 설득해도 아버지가 끝내 고집을 꺽지않의니 세 아들은 아버지 몰래 전기식 레코드플레이어 제조에 나섰다가 에디손을 분노하게 하였다. 그는 70대 후반이 되여서야 주변의 충고를 받아들여 축음기 생산을 그만두고 라지오 제조에 나섰지만 2년 후 2백만 딸러의 손해를 보고 공장을 페쇄하고 말았다. 80세에 에디손은 고무 제조에 호기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미국 내에 자생하는 식물들에서 고무 성분을 추출하는 일이였다. 에디손부인의 회고이다.   “그는 고무 생각과 고무 이야기, 고무 꿈만 꾸었습니다. 그리고 미국은 5년 내에 고무생산국이 된다고 자신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만든 고무는 천연 고무에 비해 제조과정이 복잡하고 무엇보다도 품질이 떨어졌다. 에디손은 만년에 무엇 하나 제대로 풀리는 일이 없이 로년을 보내다가 결국 84세에 눈을 감았다.    사자성어의 “과유불급”은  지나칠 과( 過), 도리여 유 (猶). 아니 불(不) 미칠 급(及)으로 이는 과한 것은 모자람보다 못한것으로 항상 정도와 균형을 따지라는 뜻이다.  오기활                                                                
370    21세기의 "리시진" 김수철 전 (련재 31) 댓글:  조회:1594  추천:0  2021-02-01
                                                제 3부; 신문잡지로 읽는 김수철            4, 조선족 125살은 산다고 필자는 연변농학원 최고령교수인 김수철(88세, 부인 맹영자,89세)교수가 100세를 내다보며 올해에 90여평방짜리 집을 짓고 지난 9일에 새집에 입주했다는 소식을 듣고 지난16일, 연길시 조양천진 삼성촌에 자리한 교수님댁을 찾았다. 김교수는 중한수교후 한국과 손잡고 연변서 중초약기지를 마련하던중 삼성촌의 풍수지리에 매혹되여 헐망한 집과 토지 10여헥타르를 임대 맡고 정년퇴직 후에  아예 이곳에 삶터를 옮겨 왔다. 오전 11시경에 도착하니 딸 김혜란(57)씨가 반갑게 우리를 맞아주며 아버지는 우리가 오후에 온다는 것으로 전달받고 텔레비죤을 사러 연길에 갔고 어머니는 록두가을을 하느라 밭에 나갔다고 하였다. 세상물정이 밝은 90대 할머니 우리가 한창 혜란씨의 얘기를 재미나게 듣는데 키꼴이 큰 할머니가 어깨에 메고오던 묵직한 마대짐를 혜란씨에게 넘겨주면서 저 뒤에 할머니가 온다고 하였다. 이윽하여 할머니가 도착했다. 《감사하기도, 그 로친도 70인데…》 할머니는 딸이 받은 마대짐을 펼치면서 당신을 도와 준 키큰 할머니를 감사하다고 하였다 우리를 본 할머니는 반갑게 인사하며 이런 골안을 어떻게 왔는가고 물었다. 우리가 조양천에서 30원을 내고 택시를 타고 왔다니 낮은 소리로 넉두리를 하였다. 《나쁜놈들, 외지 사람이라고 비싸게 받았구나. 우리는 20원이면 되는데…》 《그런데 비싼차비를 팔고와서 아바이를 못 보고가면 어떻게 하오? …》 우리를걱정하는 할머니다 우리가 이틀전에 오겠다고 두번 전화를 하니 모두 할머니가 전화를 받더라고 하니 할머니는 그런줄을 모르고 그저 평상시에 제자들에게서 오는 문안전화거니 생각하고 아바이에게 전달을 안했다는 둥, 먼발에서 키가 훤칠한 손님들을 보고 오늘 신카포(싱가포르)에 간 손녀가 온다더니 벌써 왔는가 했다는 둥, 올해에 집질을 하느라고 아바이가 폴싹했다는 등 여러가지 사설을 많이 하셨다.                                                       아기자기한 모녀간   딸의 소개에 따르면 할머니의 기억력이 상당히 좋고 세상물정에 무척밝단다. 하기에 혜란이는 《엄마가 뻑하면 나의 따거다에 전화를 걸어서 자심해 죽겠다》며  “불만”으 로 엄마를 자랑했다.    할머니는 단을 지어 벽에 걸어 말리우는 푸른보리를 가르키며 《우리 며느리들의 병을 아바이가 거반 떼오》라며 이 푸른보리는 큰며느리가 간이 좋지 않아서 달여먹는 약인데 요즘에 크게 나아졌다며 기뻐하셨다. 《언젠가 내눈에 고기가 살아나서 수술을 했습꾸마, 사람들은 내가 눈을 떴는데도 눈 을 감았다며 내눈이 작다고 놀려 주꾸마.》 유모아적인 할머니의 말씀에 우리는 나오는 웃음을 참을수 없었다. 12시가 퍽 넘어서야 김교수가 돌아왔다. 《땐스를 샀음두? 몇촌짜리를 샀음두?》 《40촌짜리를 삿소…》 《그리 크게스리, 새집을 영화관을 꾸리겠습둥?》 《명년에는 농사를 적게 지읍소, 사람만 바쁘게 굴면서…》 로부간의 아기자기한 대화다. 그런데 한동안 할머니가 보이지 않아 찾았더니 손님들에게 토종닭알을 대접하려고 동네돌이를 하였단다. 《세집이나 다녀 보았는데 모두 없습데. 요행 한족집에 물어 봤더니 다섯개밖에 없다고 합데. 그것이라도 팔라니 기어코 돈을 안받고 그저 줍데.》 할머니는 세상물쩡이 너무 빤해서 90고령이라고 믿기 어려웠다.   늙으막 사랑투정 교수님량주는 정말 유모아적이였다. 부모들의 본을 땄다고 할가, 그 부모에 그 딸로 혜란씨도 퍼그나 유모아적인녀자였다. 교수님은 자식이 4남 1녀다. 막둥이 혜란(57)이는 부모와 오빠들의 사랑속에서 너무나행복하게 자랐단다. 《저 딸이 없었더라면 어쨌을가?》 《… … 》 막내로 딸이 있으니 얼마나 좋냐며 딸 자랑을 하는 늙은량주의 두눈이 실눈으로 웃음꽃을 피웠다. 《우리의 혼사는 두 집부모들이 내가 낳기도전에 정했다오.》 《로친은 문맹인데다가 나보다 년상이여서 처음에는곡절도 많았구,,,》 《지금보면 정말 다행이오. 로친에게 농촌녀성의 매력이 있고 거기에 문맹이다 보니 리론적으로 나의 학술을 반박할 일이 없으니 얼마나 편안하고 화목한지 모르겠소. 》《나는 한생 채집을 하는 직업이라 무엇이나 버릴줄을 모르는 병이 있어도 로친이 평생 타발을 안 하니 얼마나 편안하오…》 교수님의 유머적인 말씀에 딸이 보충한다. 《문화차이가 많다보니 전에는 곡절이 많았답니다. 어머니는 19살에 시집을 와서 아버지를 공부 시켰다는데 그것두 모르고 아버지가 엄마를 싫다고 리혼을 하겠다고 야단을 쳤답니다.》 《우리 아버지는 따거다를 세개나 팽개쳤습다. 령감이 어디에다 전화를 치면 어느 녀자 친구한테 전화를 치는가구 어머니가 하도 밝혀서…》 《더럽다, 따거따(大哥大)를 가지고 어디다 전화를 치겠으면 치라지, 차라리 그때만큼 젊었으면 좋겠다. 다른 로친을 만날 능력이 있었으면 좋겠다.》 다른 로인들은 핸드폰을 《쑈지》라고 하는데 할머니는 학자의 부인답게 제법 따거따 라며 반론한다. 《과거에는 아버지가 리혼을 하자고 야단 쳤는데 지금은 어머니가 리혼을 제기합니다. 령감이 옷을 잘못 입었다거니, 양말이 어지럽다거니 잔소리를 하면서…》 《젊어서 구속을 받던 녀자들이 늙으면 보복을 한다더니 지금도 아버지가 성격이 강한데도 어머니는 늘 먼저 도전합니다.》 《나는 80년대 문명에 오염되였지만 우리 로친은 현대문명에 오염이 안된 록색로친이지요, …》 《록색로친》이라는 교수님의 신조어에 모두가 배꼽이 빠지도록 웃음보를 터뜨렸다. 점심술상에서 교수님은 인생에서 술이 없어서는 안된다면서 한 때는 60도 빼갈을 한근 반은 마셨단다. 《술은 정말 좋은 음식인데 술의 좋고 나쁨은 마시는 사람에게 달렸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교수님은 원래의 희망이 문학가였다며 름름한 언보(言步)로 명시두수를 읊조려 술상을 고조에로 이끌었다.   조선족《리시진》 125살은 산다고   김교수가 없는 사이에 필자는 교수님의 일기책을 펼쳐놓고 교수님의 하루하루를 읽었다. 두툼한 일기책은 달력으로 자작한 것으로 큼직하여 사용에 편리했다. 책에는 명언, 명시, 치료처방, 집설계도, 인체부위별로 표시된 속사, 손님접대,.. 아무튼 하루를 빠짐없이, 그것도 신문, 잡지독후감, 텔레비시청후감까지 기록한 백과일지였다. 필자가 교수님의 일기책을 《평론》 했더니 《그건 이기에 누구도 보면 안되는데…》하면서 너털웃음으로 《항의》를 표했다.   김교수는 중약은 무철에, 서약은 단발총에 비유하며 중초약의 약효를 설명한다. 《병원에서 쉽게 뗄수 없는 병을 민간초약 처방으로 쉽게 떼는 병들이 너무 많습니다》 《리시진의 본초강목에 인삼과 되꼬리를소개한 문장의 편폭이 똑 같습니다. 많은 약값은 약상들이 돈벌이를 위해 약효 과대선전으로 잔뜩 올린 것입니다.》 《내가 1994년에 한국서 모진 감기에 걸렸는데 되꼬리(蒼耳子)란 단방 처방으로 감기를 뗐다면 믿을 사람이 있을가요?》 이밖에도 김교수는 자기의 체험으로 병치료는 뜸이 최고란다. 《암치료에는 뜸입니다. 나는 골질증생도 뜸으로 치료합니다.》 《불이야! 하면 도 펄떡 일어서 도망친다고 하지않습니까? 병들도 불을 만나면  쩔쩔 매지요,》 《선생님들이 이번 걸음에 우리아버지한테서 몇가지 뜸치료법만 배워가도 큰 수확입니다.》 교수님의 말씀에 따른 혜란씨가 부언이 필자의 귀맛을 당겼다. 김교수는 젊어서 한쪽 신장이 병으로 공능을 거의 상실해 한때는 농학원의 《절름발이》라는 별명이 뒤를 따랐다면서 자기의 신장치료, 둘째 며느리의 림파암, 딸의 유선종양도 모두 뜸으로 뗐단다. 지금 많은손님들이 김교수를 찾아서 중초약을포함한 여러가지민간료법을 배우는데 김교수는 아무런싫증도없이 그렇게도자세하게 설명해준다. 지금까지 교수님의 신체는 아주 멀쩡하다. 량주간의 몸에는 로년반점이 하나도 없다. 단 선친들이 허리가구 불다보니 그것도 내력인지 김교수의 허리도 좀 구불기는 하지만 아픈데는 없고 행동에는 아무런 불편이 없단다. 그래서 자식들이 아버지가 100세는 문제없다는 말에 김교수는 《생리학리론대로 산다면 125세까지 산다》면서 앞날을 그리며 새 집을 지었단다. 제자는 평생 스승이신 김수철교수량주의 건강장수를 기대한다. 오기활기자                                               길림신문  2012-09-24             
369    옛 이야속의 인생조언 댓글:  조회:2040  추천:0  2021-01-27
                   수상을 벌금시킨 경찰관 어떠한 순간에도 흔들림 없이 자신의 일을 실천는 사람들이 있다. 아무리 힘든 일이라고 할지라도 자신의 책임과 신념을 바꾸지 않는다. 이런 사람들은 대방의 직책이 높다해서 굽실거리지 않고 또한 자신보다 낮은 신분의 사람들도 무시하지 앟는다.  이들은 늘 자신에게 주어진 일들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이다. 허나 주위를 살펴보면 상황에 따라 생각과 행동을 바꾸는 기회주의자들이 많다. 자신에게 리익이 된다고 싶은 사람에게는 온갖 아첨을 떨고 자신에게 그다지 리익이 없는 평범한 사람이라면 관심조차 가지지 않는다. 언제부터 우리가 이렇게 되였는지 모르겠지만 모든 사람들에게 친절할 뿐만 아니라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 이런 사람이 세상에 많았으면 이 세상이 더욱 살맛이 나겠는데 말이다. 이런 옛 이야기가 있다.   어느 날 처칠(영국의 정치가로 두번 총리에 취임, 1953년 노벨문학상 수상)이 시간에 쫓겨 운전기사에게 차속력을 내라고 했다. 운전기사는 보통 차들보다 훨신 빠른 속도로 내 달렸다. 그런데 교통 경찰관이 수상을 태운 자동차가 과속으로 달리는 것을 보고 재빨리차를 세우도록 했다. 그리고 면허증 제시를 요구하는데 운전기사가 경찰관에게 말했다. “수상께서 타셨소.” “알고 있소. 그러나 과속은 과속이요. 딱지를 떼겠으니 벌금을 물도록 하시오.”   운전기사의 말에 경찰관이 끄떡도 하지 않고 벌금을 재촉하자 이번에는 처칠이 특유의 여송연을 입에 물고 언성을 높혔다. “이봐, 내가 누군 줄 알아?”  “예, 얼굴은 우리 수상 각하와 비슷합니다. 그런데 법을 지키는 것은 비슷하지 않습니다.”  경찰관이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결국 처칠은 벌금을 내야만 했다. 처칠은 의회에서 업무를 마치고 올라와 경찰총감을 불렀다. 그때 만난 경찰관을 격려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자초지종을 설명한 후 그 경찰을 찾아 특진시킬것을 명했다. 그러나 경찰총감은 과속차를 적발했다고 특진시키는 규정은 없다고 거절했다.   엄격한 자기 관리, 사회에 대한 책임, 출중한 자신감, 벼슬을 싫어하는 “생리”로 자신를 지키며 평생분투하는 이런 사람들로 세상이 하루하루가 가꾸어 진다.     오기활
368    21세기의' 리시진' 김추철 전(련재 30) 댓글:  조회:1458  추천:0  2021-01-26
                                            제 3부 ; 신문잡지료 읽는 김수철 3, 경영인을 찾으라 지난 3월28일 기자는 독자들이 민간약초에 관한 질문에 정답을 주고저 연변농학원 농학부 식물학교연실 정년퇴직교수 김수철 옹을 만났다. 교수님과 필자는 지난세기 70년대 사제간이다. 오후 4시경, 우리를 마중나온 교수님은 생각보다도 더 건강하셨다. 자애로운 실눈길로 두손을 힘껏 잡아주는 교수님이 아주 건강하다는 필자의 경탄에 며 너털웃음을 앞세웠다. 올해 87세인 교수님은 연변농학원 제1기생으로 1950년부터 1987년에 정년퇴직할 때까지 연변농학원 농학부 식물학교연실의 강사, 교수로 식물형태, 식물해부, 식물분류, 식물라틴어 등 과문의 교학과 식물연구에 전념하였다. 지금 교수님은 연변생물학회 명예회장, 길림성초원학회 고문, 대한민국자원식물학회 고문, 연변동광ALOE연구소 소장 등 직무를 맡고 석양을 빛내고있다. 교수님은 식물퀴즈이다. 1973년 김교수님이 우리를 이끌고 백두산아래 청산림장에서 15일간 중초약을 교학할 때 아무튼 어떤 풀이나 물어보면 학명, 별명, 생육지, 리용, 채집계절, 분포를 빠짐없이 알려줬다.  필자는 교수님의 높은명망을 한국에서 실증했다. 1999년 필자가 세계자연농업의선도사로 호칭받는 조한규박사님(한국)의 자연농업특강을 일주일간 수강했다. 어느 날 조박사가 필자를 데리고 서점에 가더니 이란 투터운책을(값 45,000원)을 사서 선물했다. 은 한,중두나라전문가들이 팀을무어 2년간 백두산의 유용자원식물을 탐사한 기초상에서 농학, 식물학, 약학, 림상학, 축산학 등 자연과학연구지침서로 세상에서 처음 출판을 했다. 그때 필자가 책값이 너무 비싸다니 조박사는며 특히 이 책은 김수철교수님이 집필한 값진 책이라고 하였다. 필자가 바로 김수철교수의  제자라고 하니 조박사는 오선생이 훌륭한 스승님을 만났다고 부언하였다. 교수님은 정년퇴직후14 권(편)의 귀중한 론저를 출간한 평생현역형교수였다. 교수님의 저택은 책으로 장식되였다. 심지어 광주리며 눈에 쉽게 띄우는 그릇에 마저 책으로 넘쳐났다. 교수님은 지금까지 안경을 모르며 2007년 일본 동경대학에서 주체한 국제학술대회에서 영문,일문발언고를  친히 컴퓨터로 타자 했단다.  건강비결을 얘기 하는 교수님은 주변에 개발할 중초약과 민간료법이 정말 많다면서. 값이비싸야 좋은 약이라는 편견을 청산해야 한다며 생당쑥, 익모초, 삽주, 골담초의 특별한 효능을 렬거 하면서 솔잎 한 가지로만으로도 많은 성인병을 막아낸다고 한다. 이렇게 말하는 교수님은 을 쓴 리시진은 장사군이 아니고 나와 같은 학자입니다. 학자들은 경영의식이 없지만 의식주가 해결되였기 때문에 돈욕심이 없습니다.>> 겸허에 유머까지 우리의 만남은 37년만이다. 교수님은 연변일보와 길림신문의 애독자라며 기자들의 이름도 곧잘 외웠다. 교수님은 우리와의 만남을 대단한 영광이라며 우리더러 교수님이 스크랩한 신문기사에 친필싸인을 해 달라고 하였다. 교수님의 겸허함은 자기을 멀리함에 집합되였다. 교수님은 필자가 요구하는 자료에서 수상편만은제공하지 않았다. 교수님은 인생에서 술이 없어서는 안된다며 이 좋은 만남에 술이 없으면 안된다며 손수 술상을 차리고 젊은에게 를 대접하였다. 한때는 60도 배갈을 한 근반은 마셨다는 교수님은 술은 정말 좋은 음식인데 술의 좋고 나쁨은 마시는 사람에게 달렸단다 ., 김수철교수님은 백두산의 정기를 받으며 책무지와 길가의 풀을 안주로 술과 동무하면서 평생을 식물과 함께 하는 건강장수학자라 하겠다. 긍정적 사고로 사는 인간에게  나이는 수자에 불과하다. 필요한 사람은 늙지 않는다. 제자는 김교수님의 백세장수에 따르는 그의 불타는 여열을 기대해본다. 오기활                   ( 길림신문ㅡ 2011-04-01)    
367    옛 이야기 속의 인생조언 댓글:  조회:1939  추천:0  2021-01-18
                                        노벨수상자의 유언    많은 사람들이 인생을 살아 가면서 여러가지 고품을 추구하려고 얘를 쓴다. 아름답게 세공된 보석, 고급 승용차, 궁궐 같은 집... ...등을, 그런데 사람들마다의 그런 추구가 진정 누구를 위함인지를 생각해 본 적이 있는지는 모를 일이다.   두루 살펴보면 물론 모두가 그렇지는 않겠지만은 상당수의 사람들의 추구가  자신을 위한 화려함이나 사치에 신경을 쓰는 것이 상당수이다.   세상에는  우리의 마음을 기쁘고 행복하게 해주는 것들이 많다. 그런데  눈에 보기에 멋이 있고 화려한 것에 사람들의 기쁨과 행복한 감정이  "견물생심"으로 얼마 못가   또 다른 것을 추구하기에   마음이 항상 공허함이 문제로 나선다.  .행복은 외부에서가 아닌 저마다의 마음속에서 찾아야 한 있다. 마음속에서  찾은 행복이야 말로   진정으로 느낄 수 있는 행복이다. 아래는 노벨수상자의 부탁(유언)이다 미국의 흑인 목사 마틴 루터 킹(1929. 1. 15ㅡ 1968. 4. 4.)이 암살 되기 바로 두달 전에 이렇게 설교했다. ㅡ 저는 가끔 저의 죽음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저의 장례식을 그려봅니다. 만약에 여러분 중에 어느분이 저의 장례식에 참가한다면 부디 장례식을 길게 하지 말라고 전해 주세요. 또 장례식 조사도 짧게 하라고 말씀해 주세요. 그리고 조사를 하는 사람에게 제가 노벨 평화상을 탄 사람이라는 것, 내가 3백 여차의 표창과 상을 받았다는 것을 말하지 않게 해 주세요. 왜냐면 그런 것들이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만, 내가 다른사람들을 섬기는 일에 삶을 바치려고 노력했다고 말해 준다면 감사하겠습니다. 사람들을 사랑하려고 노력했고 굶주린 사람을 먹이려고 했으며 그리고 헐벗은 사람에게 옷을 입혀 주려고 애썼고 감옥에 있는 사람들을 방문하려고 노력했고 사람을 사랑하고 인류에 봉사하려고 했썼던 사람이라고 말해 주시면 저는 행복하고 감사하겠습니다. 그리고 다음을 부언했다. “저는 남기고 갈 재물도 없습니다. 다만 헌신된 생애를 남기기를 원합니다”   오기활
366    연변서 “이웃절”을 법정(조례) 명절로 정할데 관한 제의 댓글:  조회:702  추천:0  2021-01-13
습근평동지는 2021년 신년사를 “지금 이 시각, 거리에 등불이 휘황하고 집집마다 단란이 모여 앉았습니다. 새해를 앞두고 강산이 아름답고 국가가 창성하며 인민이 평안하기를 기원합니다! 조화롭고 순조롭고 행복이 가득하기를 바랍니다.”로 마감하였다.   이웃의 화목은 중화민족의 우량한 전통이고 미풍량속이다. 한 민족의 미풍량속은 시대의 발전에 이어지고 발전되여야 한다. 그런데 도시 거주문화의 변천과 사회생활 절주가 빨라짐에 따라 같은 아빠트에서 한 지붕을 쓰고사는 이웃사이가 래왕이 없고 심지어 벽사이를 두고  이웃에 상사가 있어도 모르는 척 무감각할 정도로 랭담해지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농촌 역시 호도거리농사를 실시한후 지난 날의 “이웃사촌”관계가 동네간의 관계로 랭담한 실정이다. 이런 실정에 비춰 필자가  2005년 10월에 연변 “이웃절”을 발기한후  2006년 4월 11일, 연길시 북산가로부터 시작한 “이웃절”활동이 10여 년간 사이에  연길, 왕청, 룡정, 훈춘, 도문, 돈화 등 주내는 물론 장춘에까지 파급되여  우리성의 조화사회건설에 막강한 역할을 발휘하였다. “이웃절”의 사회적 반응을 정리하면; 1, 연변예술학원 남희철교수가 창작한 “이웃절노래”(함께하는 우리세상, 조, 한어로)가 주민(州民)들 즐겨부르는 노래로 되였다.  2, “이웃절”활동이 2006년 주당위 선전부의 주요사업과 주직속기관 최우수실사로 선정되였다. 3, 2010년말 인민일보 취재팀이 연길시의 “이웃절”을 취재한 후  “수십년간 민족보도를 하면서도 오늘처럼 깊은 감명을 받기는 이번이 연변서 처음이다”며 연변의”이웃절”을 특필하였다.  4, 중앙텔레비방송국에서 “개혁개방40주년을 경축”해 특집프로 연변의 “이웃절”을 생방송하였다.   5, 2011년2월, 인민일보 “새봄맞이 취재팀”이 연변의 “이웃절”을 심층보도를 하였다. 6,   중앙 1, 15채널에서 2019년 10월 5일부터 몇 차례나  건국 70주년특집프로(“새시대”, “금빛”)로 연길과 훈춘방천의 “이웃절”을 대폭으로 방송했다.   상술한 과정에 비추에 필자는 연변에서 지난 20세기에  전국에서 제일 먼저“로인절”을  법정(조례)명절로 제정하여  연변의 전통풍습문화건설 사업이  전국의 전범이 되였다면  21세기에 연변서 “이웃절”을 법정명절로 제정하여 습근평총서기가 령도하는  새세대의 조화사회건설에 전국적으로 앞선 행보(行步)로  또 한번 새로운 공을 세울것을  올해의  연변 “량회”에 간절히 제의한다. 2021년 1월 10일, 오기활   부록:                                                              을 내오자 가정은 사회의 기본세포단위이다. 가정과 가정, 이웃과 이웃사이의 화목은 사회주의 조화로운사회를 건설함에 있어서 홀시할수 없는 기본적인 사회조성부분건설의 하나로 마땅히 온 사회의 중시를 불러일으켜야 한다. 또한 이웃사이에 서로 돕고 관심하며 화목하게 지내는 것은 중화민족의 전통이며 미풍량속이다. 미풍량속은 시대가 발전한 오늘에도 계속 발양하고 발전해야 한다. 허나 도시의 거주문화가 변천을 가져오고 사람들의 생활절주가 빨라짐에 따라 한아빠트, 한지붕을 쓰고사는 이웃사이가 서로 래왕이 없고 지어 상사가 있어도 관계하지 않고 무감각할 정도로 이웃관계가 랭대해지는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농촌에서도 호도거리농사의 실시로 한개농호가 하나의 생산단위로 된후 이웃관계, 마을관계가 이던 전에 비해 많이 랭담하고 약화된것이 사실이다. 이는 인간들의 단결, 우애, 협조의 공동책임의식과 정신을 약화시키고 있다. 이런 실정에서 이웃관계를 개선하는 것은 조화사회건설에서 마땅히 온사회의 중시를 불러일으켜야 한다. 이에 필자는 법적으로 을 제정하고 전 사회적으로 조화로운사회 건설에 유익한 활동을 벌려 단결, 우애적인 이웃관계를 새롭게 확립할것을 창의하는 바이다. 법적으로 이웃절을 정하면 특히 다음과 같은 몇가지가 리롭다고 본다. 1, 사회공덕을 지킴에 리롭다. 이웃절이 있게 되면 법규의 약속성이 있게 되며 이를 발판으로 일종의 사회적책임감을 지키려는데서 이웃간에 서로 거래하고 호조호애하면서 새로운 인간관게를 이룩하게되여 이 , 으로 발전하여 사회가 부단히 정화되고 문명해지기에 사회주의 조화로운 사회건설의 바탕이 마련되게 된다. 2, 후대교양에 리롭다. 이웃절이 있게 되면 학교부터 가정에 이르기까지 존로애유, 호경호애, 호방호조의 교양을 앞세우게 되여 중화민족의 미풍량속이 천추만대로 이어지게 될것이다. 3, 민족단결에 리롭다. 우리 나라는 다민족국가이다. 이웃절이 있게 되면 이웃간의 여러가지 유익환 활동으로 하여 다민족이웃간의 우정이 돈독해지여 민족단결진보를 더욱 강화하게 된다., 4, 부모나 자식이 외롭지 않다. 지금은 세대마다 자식을 거의 하나만을 낳는 현실에서 이 맺어지면 외자식이 외롭지 않고 부모도 부모로 외롭지 않게 된다. 특히 지금 은 핵가족으로 되여가는 실정에서 이웃자식들간에 서로가 다정해지고 로인들이 고독하지 않으며 자식들의 뒤근심을 덜수 있다. 5, 간부와 백성간의 관계가 밀접해질수 있다. 이웃사이가 밀접하면 주변의 간부들이 백성들의 질고를 료해하는데 리롭고 백성들이 주변의 간부를 찾아서 여러가지 문제를 구속이 없이 실사사구적으로 반영할수 있어 당과 대중과의 거리차이를 줄이는데서 혈연적 련계를 강화할수 있다 6, 빈부차이를 줄임에 리롭다. 이웃간에는 빈부차이가 있기 마련이다. 이웃간에 화목하면 서로간에 어려운 일을 함께 풀려는데서 이웃간에 선각자가 후각자를 이끌며 비기고 배우고 따라잡고 릉가하면서 더불어 살아가는 조화사회형성에 리롭게 된다. 발족인 오기활 2005년 10월 10일 (지부생활 2005년 제 11호)    
365    “나는 오늘 또 놀랐습니다.” 댓글:  조회:2708  추천:0  2021-01-13
                           김수철 옹 “인생은 매일 놀라야 한다”고     다사다난의 경자년 쥐띠해를 보내고“수례멍에의 압력에 책임적인 노력이 없이는 성공을 기대할수 없다”는 신축년 소띠해를 마중해 필자는1925년 4월 생 소띠인 김수철 옹을 방문하였다. 김수철교수(연변농학원)는  90대 고령에 수년간을 연길시 조양천진 삼성촌 5대에 독거하면서 길림성 식물연구사업의 최고봉인“길림성식물지”(총3권)출판을 위해 열과 성을 다하는 평생현역교수이다.  12월 29일 오전 열시 이십분경,  우리일행(4명)을 만난 김 옹은“방금 연변대학 어른들이 이 늙은이를 위문하고 돌아 가자 오선생이 이 산골을 찾아왔구만,,,”하면서 힘찬 악수로 반겨주셨다.  열한시경, 김 옹이 전기열풍기로 금방 방을 덥혔다는 거실에서 인사르 나누던중 우리와 동행한 마동석 (马东锡, 66)씨가 20 여년 북경에서 화가로 활약했다는 소개와 지금 연변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연변 제 1 회 예술품박람회” 에 마화백의 작품이 전시되였다는 소개를 듣던 김 옹의 딸 혜란(63)씨가 말참견을 했다. “우리 아버지는 그림이라면 쌕ㅡ 합니다.  손님들이 오늘 점심을  좀 늦게 들더라도 아버지를 박람회에 모실 수 없을 가요? 아버지는 퇴직후에도 신문광고를 보고 만여 원을 팔면서  목단강미술강습반에 참가하였고 팔십고령에도 석달간이나 룡정 ㅡ 연길을 오가며 연길미술강습반에 참가 하였답니다...”   이에 김 옹은 묵직한 사진기를 챙겨가지고 지금 당장 떠자자며 우리를 재촉하였다.   연길로 가는 도중에 김 옹이 하는 말씀이다. “오늘이 진정 기쁨날이다...그림은 번역이 필요 없는 세계공통어이다,” “화가는 독자적인 안목으로 세상을 보며 자기나름에 따라 세상옛날을 재생기키고 래일의 세계를 창조한다. 나는 잘그린 그림을 볼때마다 새로운 세상을 내다 본다”, 이 날은 토요일이라  마화백이 전화로 주 미술관장에게 김교옹의 행차를 미루 알렸더니 회장문어구에서 서화(徐华)관장이 몇몇 직원들과 함께 우리를 대기하고 있었다.    회장에는 마화백의 미술작품이 1번, 석희만의 작품이 2번으로 배치되였는데 안내서에 마화백은 중국유화창작연구원 원사, 고 석희만은 연변대학 미술학부 창시인으로 소개되였다.  김 옹은 1,2번의 작품을 한점도 빠짐없이  렌즈에 담았다.   거의 열두시가 되자 김 옹이 하는 말씀이다. “내가 열두시전에 돌아 온다고 딸과 약속했으니 오늘은 이만 돌아갑시다. 내 욕심은 끝이 없으니 며칠후에 다시 와서 관람하게씁니다. ”      ㅡ나는 석화백과 몇번 술자리도 함께 했고 지금까지 석화백의 작품집을 소장하고 있소.  ㅡ석화백은 참 편안한 분이였소. 석화백은 룡정 동흥중학교에 다녔고 1935년(?) 쯤에 일본 도쿄미술학교에서 고학을 하고 다시 룡정에 돌아와 중학교 미술교사로 지냈소. 석화백의 아내는 일본인으로 말년에 석화백이 아내와 함께 일본에 가서 살다가 세상을 떠났소.” 돌아가는 길에서 김 옹이 하는 말씀이다. ...   ...   ... 김교수가 점심상에서 하는 말씀이다. ㅡ 나는 두 화백의“어머니”작품을 모두 롄즈에 담았다. 나는 세상의 모든 어머니를 사랑하고 존경하며 나의 안해도 사랑하고 존경했다. 우리는 언제나 부인을 동지섣달에 꽃본듯이 대해야 한다. 마원사가 저 사진(벽에 걸려 있는 부부사진)을 그려서 나에게 선물하겠다니 부탁한다. 사진과 그림은 다르니까 나는 좀 수수하게 그리고 부인은 사진보다 더 이쁘게 그려달라.   ㅡ 내가 가장 존경하는 스승님은 모든 것에 놀라라고 하였다. 사람들이 보통이라고 하는 일에도 놀라라고 하였다.우리는 매일 매일 평범한 속에서 기적을 발견하며 놀라야 한다. ㅡ 끝도 시작도 없는 광범한 대우주에서 우리의 오늘 만남이 얼마나 기적적인가! 나는 오늘도 놀랐고 행복하였다.     필자는 21세기의 “리시진”의 래일의 놀람이 궁굼하다. “길림성식물지”2, 3권 출판을 위해(1권은 지난해에 출판)  “일일신 우일신(日日新,又日新)”의 기백으로 매일매일 그려내는 식물표본을 즐감하면서 놀랄는지, 아니면...   오기활    
364    21세기의 "리시진" 김수철 전 (련재 29) 댓글:  조회:1681  추천:0  2021-01-11
                                  제 3부 ; 신문잡지로 읽는 김수철        2, 자연의 대문을 열어가는 사람                                                                                 (3) 당중앙에서 마련해주신 과학의 새봄은 여기 변강에도 찾아 왔다. 아, 얼마나 고대하던 새봄인가. 김선생의 가슴속에는 설음의 얼음장이 녹아 내리고 봄물결이 출렁인다 이근년에 늘 박해와 압제속에서 억울한 모자를 쓰고 피눈물을 삼키면서 해오던 사업이 아니였던가. 좋구나. 인젠 마음도 통쾌하고 몸을 내번지고 일할 때 로다. 버섯분류는 식물학에서 일종 난제로 제기되고 있다. 연변은 물론 국내 각 지와 조선에서도 버섯분류는 공백으로 되고 있다. 때문에 이 산마루를 점령하는 것은 과학령역, 대외무역, 인민생활 등 각 방면에 커다란 의의를 갖고 있다. 전인들이 올라보지 못한 산마루, 거기로 오르는 길이 험난한 줄 알면서도 만난을 물리치고 기어코 오르는 여기에 과학공자자들의 긍지와 사명이 있는 것이다. 김선생은 결연히 이 길을 선택하였다. 진균의 일종인 버섯은 참 까다라운 식물이다.  적지않는 버섯들이 해가 지면 돋아나기 시작하여 이?z날 해가 뜨면 늙어서 죽는다. 또 아주 섬세하고 연하게 생긴 이 식물은 어떤 것은 손을 대거나 뜯자 마자 원형체를 읽고 스르르 쓰러져 버리고 만다. 때문에 버섯을 정확하게 분류하고 그들의 특성을 잘 알아내기 위해서는 제때에 채색원형도를 정밀하고도 생동하게 그려야 한다. 날마다 푸름푸름 먼동이 터오면 어깨에 채집통을 멘 한 사람이 마을주변을 샅샅이 훑으며 하루일을 시작한다. 어떤 때는 날 밝기전에 마을 뒤에 자리잡은 모아산에 오른다. 그가 바로 식물연구를 위해집까지 농촌에 이사 온 김선생이다. 버섯원형을 보존하기위해 어떤 버섯은 따지않고 그자리에 세워둔 채로 두 세시간씩 공력을 들여 그린다. 어떤 버섯은 따자마자 가지고 집으로 달려와 분초를 다투며 그린다. 또 매 버섯의 특성을 정확히 밝히기 위해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버섯마다 먹어본다. 하여 남녀로소 할 것 없이 마을사람들은 모두 그를 존경하여“제일 부지런한 분”“버섯박사”라고 부른다. 국경절 전날 밤, 외지에서 공작하는 다섯 남매는 부모와 함께 명절을 쇠려고 모두 한자리에 단련히 모였다. 은하수도 서천가에 기울고 이야기꽃을 피우던 가족식솔들도 잠자리에 들었건만 저녁상을 물리기 바쁘게 소박하게 꾸민 연구실에 들어간 김선생은 아직도 공작에 여념이 없다. 맏아들 상술이는 이리저리 망설이던 끝에 조용히 연구실문을 열고 들어섰다. 벽에 빈틈없이 붙여놓은 각종 버섯의 채색원형도, 천정주변을 돌아가며 빼곡히 박은 못에 줄지어 걸어놓은 버섯표본들, 창턱에 줄줄이 놓은 유리병버섯표본들… 그 어디를 보나 아버님의 탐구적 열정과 피타는 노력이 력력히 알린다. “아버님, 밤이 퍽 깊었습니다.” “엉?” 확대경으로 버섯을 비추며 원형도를 그리던 김선생은 머리를 돌린다. 아들을 보는 순간 그의 눈에는 자애로운 빛이 흐른다. “자지, 곧자지.” 그리곤 다시 필을 놀린다. 흰서리가 내리기 시작한 머리, 수척한 얼굴에 부채살처럼 퍼진 굵은 주름살, 아, 30년을 하루같이 식물연구에 온갖 정력을 몰부어 온 아버님! 연구실을 나서는 아들의 눈에는 맑은 이슬이 맺혔다. “이 버섯이름을 어떻게 단다?” 송이버섯 원형도를 다 그리고 그 옆에놓여 있는 흰색갈에 털이 보송보송한 버섯을 조심스레 쥐는 김선생의 입가에는 잔잔한 미소가 흐른다. “너 때문에 걸음도 적잖게 걸었지.” 이렇게 입속말로 되뇌이는 그의 머리속엔 그저께 베개봉에서 있은 일들이 생생하게 되살아 난다. 그가 청산대대에서 20리 떨어진 베개봉밑에 도착한 것은 아침 9시경이 였다.  양지바른 산밑에 양봉장이 산뜻하게 자리잡았는데 집앞에서 한 로인이 버섯을 말리우고 있었다. 부쩍 호기심이 든 그는 로인에게 다가가서 공손히 인사를 올리였다. “어디서 오시는 손님이시우?” “룡정에서 옵니다.” “사냥을 오시우?” 로인은 그를 아래우로 쭉 ?f어보더니 채집통에 눈을 박으며 묻는다. “아닙니다. 버섯을 채집하려구요.” 그는 소탈하게 웃으며 채집통을 열고 용처를 알려드리니 로인은 그제야 오해를 풀며 호탕하게 웃었다. 로인이 말리우는 버섯을 살펴보는 순간 그는 깜짝 놀랐다. “이게 무슨 버섯인가? 난생 처음 보는데.” 버섯을 들고 유심히 뜯어보는 그의 심사를 알아 차린 로인은“이 산꼭대기루 해서 구새먹은 나무통안에 서너잎 돋은 걸 뜯어 왔수다.”라고 알려주는 것이다. “로인님, 이 버섯이 저에겐 참 쓸모 있습니다. 그는 용기를 내서 말했다. “가져 가시우, 버섯을 구하려 불원천리하고 산에 오신분인데 무얼 아끼겠수” 로인은 참 시원시원한 분이였다. “로인님, 정말 감사합니다.” 그는 버섯이 손상받지않기 위해 베개봉에 올라갔다가 내려올 때 가지고 가겠다고 말씀을 드리였다. “아니, 혼자몸으로 말이우? 이 산에 올라갔다가 길을 잃구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두 적지 않은데…”로인의 얼굴에 근심의 빛이 짙게어렸다. “로인님, 안심하십시오. 그전에도 세번올라 갔댔습니다.” 그는 로인께 인사하고 산기슭에 붙었다. 백두산과 어깨를 겨루는 베개봉. 산기슭에 선 오미자덩굴, 머루덩굴이 밉살스럽다. 한걸음 두걸음 덩굴을 헤치며 오르노라니 어애와 잔태미가 살 때를 많났다고 옷에 착착 달라붙는다. 낯을 가리운 면사포에 붙은 놈들은 살에 들어 붙겠다고 바글바글 끓으며 악을 쓴다. 이를 악물고 첫 방선을 뚫으며 중턱에 이르렀다. 절묘한 기암들이 둬길되게 깎아지른 절벽이였다. 절벽틈 사이엔 바줄같이 굵은 넝쿨이 주렁주렁 드리워 있다. 넝쿨을 몇번 힘주어 당겨본후 꽉 틀어잡고 몸을 우로 솟구며 한번 또 한번, 발톱을 틈사이에 박으며 한번 또 한번… 온 몸엔 바늘 같은 신경이 돋고 옷은 땀에 물자루가 된다… 산마루다. 그 어떤 태풍에도 끄떡않는 왕사스레나무와 석송이 꽉 박아섰다. 산마루에 오르고 나니 온 몸이 햇솜처럼나른해 진다. 강대나무에 기대니 소르르 잠이 몰려든다. “쿵!” 진대나무가 넘어가는 굉장한 소리에 벌떡 놀라깨여 난 그는 지궂게 달라붙는 졸음을 쫓아버리며 몸을 털고 일어났다. 그가 갓 넘어진 진대나무 부근으로 다가갔을 때 였다. 그 옆에 서 있는 중둥이 부러진 강대나무에 인삼처럼 귀하다는 령지버섯이 달려 있지 않는가. 그는 날듯이 기뻤다. 그는 잽싸게 령지버섯을 뜯어 소료에 싸서 품속에 간직하고는 바삐바삐산을 내리기 시작했다. 백두산을 닮아 베개봉의 날씨도 변덕이 많았다. 난데없는 먹장구름이 꾸역꾸역 멍석말이로 밀려들더니 삽시에 구름 한점 없던 하늘을 삼켜버린다. 잇달아 허공에 불빛칼질을 하며 번개가 일고 꽈르릉ㅡ하늘이 무너지둣 우뢰가 운다. 쏴ㅡ일진강풍이 지나가고 창살 같은 소낙비가 억수로 쏟아진다. 회초리 같은 비살이 그의 몸을 마구 후려 갈긴다. “허참, 설상가상이로군.” 그는 입속으로 중얼거리며 발걸음을 다그친다. 쭈르르 미끄려 넘어지면 일어나고 나무에 걸려 뒹굴다가는 다시 일어서며 뽀얀 물보라를 헤쳐 나간다. 그가 산기슭에 이르렀을 때는 땅거미가 질 무렵이였다. 헌데 이게 웬일인가? 양봉장은 어디에 있는가? 주위를 한참 살펴보고서야 방향을 잃었다는 것을 알았다. 마음을 다잡은 그는 지남침을 꺼내들고 방향을 가렸다. 여기서 동쪽으로 한 10리 가면 림업마을이 있다. 몇 년전에 거기에 들린적이 있다. 그는 허리띠를 졸라매고 지팽이에 몸을 지탱하며 마을을 향해 걸었다. 마을부근에서 한 청년을 만났다. 청년은 몹시 놀라면서 사연을 묻는다. 자초지종을 들은 청년은 심히 감동되여 기어코 자기집에 주무시라고 한다. 허나 그는 청산초대소에서 지금 사고난 줄로 알고 몹시 걱정한다며 꼭 떠나야한다고 했다 청년은 만류하다 못해 길동무로 나섰다. 그가 청년과 함께 청산초대소에 도착했을 때는 밤 9시경이였다. 대대에서 한창 인원을 동원하여 그를 찾으려 떠난다고 법석이는 판이였다. 이 광경을 목격한 그는 눈귀가 축축히 젖어듬을 금할수 없었다. 잠자리에 누운 그는 이리뒤척저리뒤척하며 종시잠을 이를수 없었다.  래일 룡정에 도착해야 모례예 전대로 교학을 할수 있다. 헌데 양봉장의 이름모를 버섯은 꼭 가져가야 한다. 어떻게 할 것인가. 룡정방면으로 가는 뻐스가 래일 아침 8시에 있으니 그 전에 양봉장에 갔다와야 한다. 이튿날 새벽 3시, 그는 전날의 피로도 말끔히 잊은듯 다리에 휘휘감기는 젖빛안개를 헤치며 베게봉으로 뻗은 오솔길로 씨엉씨엉 걸어간다. 이른 새벽에 꿈같이 나타난 그를 바라보는 양봉장로인은 반가워 어쩔줄 모른다. 어둡도록 기다려도 산에서 내려오지  않으니 밤 늦게까지 홰불을 해 들고 산에서 그를 찾았다는 실로 고마운 로인이다. 소료에 싼 버섯을 그에게 주는 로인의 눈엔 물기가 흥건히 고이였다. “근 70년을 산에서 살면서 버섯을 이렇게 귀히 여기는 분을 처음 만났수다!” …… “청산ㅡ베개봉, 청ㅡ봉, 그렇지! 청봉버섯이라 달자!” 그는 무릎을 탁치며 벌떡 일어섰다. 100여가지의 버섯표본을 만들고 100여장의 버섯채색원형도를 그려 3년 계획을 금년 1년에 완성한 그 기쁨! 이 속도대로 해 나간다면 후년에 문제없이 버섯분류의 산마루에 오를수 있다! 새날이 밝아온다. 붉게 타는 아침노을을 거느리고 시월의 첫 태양이 온누리에 금빛주단을 펼친다.그는 창문을 활짝 열어 젖혔다. 얼마나 상쾌한 10월의 아침이냐. 당중앙에서 우리에게 두번째 생명을 주시고 과학연구의 광활한 천지를 마련해 주시니 일할수록 새힘이 솟구치고 일할수록 젋어만 진다. 아, 이한 몸을 깡그리 바쳐 과학기술현대화의 봉우리에 오르는 디딤돌로 되리라! 과학에는 평탄한 큰 길이 없다. 전인들이 걸어보지 못한 생소한 초행길. 이 길을 뚫고 헤치며 겪는 말못할 고생을 아무도 모르건만 실천과 노력의 열쇠로 자연의 대문을 하나 또 하나 열며 과학의 높은 봉우리에로 한걸음 또 한 걸음 톱아오르는 무명영웅들! 동지들이여, 우리 모두 그들에게 숭고한 경의를 드리자! 과학의 첨병들에게 영광이있으라! 김웅 (김호근) 연변문예 1979년제 3기
363    "21세기의 '리시진' 김수철 전"(련재 28) 댓글:  조회:1690  추천:0  2021-01-01
                            제 3부 ; 신문잡지로 읽는 김수철   2, 자연의 대문을 열어가는 사람                                      (2) 장검인양 창공을 뚫고 우뚝솟은 백두산. 끝간데 없이 눈뿌리 아득히 뻗어간 천리림해에 동이튼다. 산중턱에 아담히 자리잡은 백두산보호국벽돌집은 안개 이불속에 묻혔다. “엊저녁에 폭우가 내렸는데 묘칠후에 떠나 보시죠.” 국장동무가 길 떠날 차비에 여념이 없는 두 사람에게 권고하는 말이다. “아니,‘천마’는 이런 날씨를 더 좋아 하지요.” 김선생은 국장에게 사의를 표하며 신들메를 꽁꽁조인다. ”김선생은 그 수수께끼를 꼭 플어야 발편잠을 쉬겠답니다.” 동행하는 주 의약공사 김동무가 쾌활하게 웃으며 김선생을 두둔해 나선다. 며칠전에 있은 일이 였다. “연변중초약”책을 편찬하던 김선생은 한 가지 문제에 봉착하였다. 즉 연변에 반신불수와 고혈압에 쓰는 진귀한 약재인“천마”가 나는가 안나는가. 난다면 출생지는 어디인가. 종시 답안을 찾지 못해 모대기던 그는 어느 하루 김동무한테서 자기가 5.6년전에 백두산으로부터 몇십리 떨어진 무송쪽수림에서 “천마”를 보았다는 말을 들었다. 김선생은 날듯이 기뻤다. 헌데 김동무는 빙그레 웃음“하, 김선생님. 천마가 있다는 것이 확실한데 책에 적어넣으면 안됩니까?”하고 물었다. 이 말을 들은 김선생은 즉시 정색해지는 것이였다. “김동무, 과학이란 로실한 학문인 것 만큼 우리는 어디까지나 실사구시 해야 하오. 실물표본과 출산지등을 똑똑히 얻지 못하고 책에 기입하는건 과학에 대해 책임지지못하는 표현이요. 그리고 또 후대에 대해서도 책임지지 못하는 태도지.” 이리하여 그들은 부랴부랴 급한 길을 떠났던 것이다. 밖을 나서니 새벽안개가 천지림해에 이불을 쭉펴서 몇발자국 앞도 잘 보이지 않는다. 간밤에 쏟아진 폭우에 물벼락을 맞은 나무들은 스쳐지나가는 바람에 콩알 같은 물방울을 뚝뚝 떨군다. 물방울이 목덜미에 떨어 질 때 마다소름이 쭉 끼친다. 한참 걸으니 사품치는 백하가 길을 막았다. 강우에 무지개처럼 걸린 외나무다리, 두 사람은 손을 꼭 잡고 다리우에 천천히 올라선다. 얼음판처럼 미끌미끌하다. 그들은 온 몸의 신경을 발끝에 모아 바레무무용수처럼 한치한치 내디디며 다리를 건넌다. 전신에 땀이 빠직빠직 돋는다.…. 다리를 건넌 그들의 얼굴에는 안도의 빛이 흐른다. 한 20리 실히걷자 꼭 들어선 버드나무숲이 앞을 막는다. “엉?” 김동무는 무망간에 소리친다. “왜 그러오?” “길이 없어졌습니다.” 두 사람은 한창 돌아 보았으나 끝내 길을 찾지 못했다. “이상한데? 분명 5,6년전엔 길이 있었댔는데…” “허허, 길이 없으면 길을 내면서 가지. 이 길잡이가 있으니 념려 없소>” 김선생은 지남침을 꺼내들며 소탈하게 말한다. 길 없는 길을 찾아 가시덤불을 헤치며 앞으로만 나아가는 그들의 강행군. 몸집이 건장하고 힘꼴이 센 김동무가 저만큼 앞서서 간다.” “work harder! work harder!” (위오ㅡ크하ㅡ더! 위오ㅡ크하ㅡ더!)(힘을  냅시다! 힘을 냅시다!) 등뒤에서 들려오는 김선생의 힘찬 목소리에 김동무는“예?”하며 돌아섰다. 자기를 부르는 줄로 알았던 것이다. 김동무의 의혹에 찬 얼굴 표정을 보던 김선생은 저도모르게 허허 웃었다. “나의 학습이 동무에게 착각을 주었구만.” 김선생은 그를 바싹 따라서며 손에 쥔 단어카드를 넘겨준다. “아니? 영어단어카드?” 김동무의 눈은 화등잔이 되였다. 김동무의 표정에서 그의 내심을 낱낱이 들여다 본 김선생은“요기도할?Y 좀 쉴가?” 하더니 옆에 넘어진 진대나무우에 소료(비닐박막)를 펴는 것이였다. 붉은해가 아득하게 높이솟은 나무우듬지들 사이로부채살 같은 해살을 펴칠다. 김선생은 허리춤에 둘러찼던 밥보자기를 풀어 헤친다. 밥한줴기를 김동무에게 주고 다른 한 줴기를 자기가 쥐더니 맛나게 한입 뚝 뗀다. “실로 별미로군.” 산속에선 휴식의 한 때 이 멋이 좋다. “김선생님, 지금이 어느 땝니까? 지식이 많을수록 더 반동이란 고함소리가 판을 치는데… 그리고 또 몇 년전의 교훈도…” “뭐? 몇 년전의 교훈?” 미소가 흐르던 김선생의 얼굴엔 삽시에 도고한 기상이 비꼈다. 과학을 탐구한 것이 죄로 되여“자산계급전문가”란 모자를 쓰고 일어, 영어, 로어를 학습한 것이 죄로 되여“양노”란 감투를 쓰고 반년동안이나 인신자유를 박탈당한채 비판받고 투쟁받던 억울한 일. 허나 그 따위 압제와 박해는 도리여 그의 결심과 의지를 더 굳게 했을뿐이였다. “김동무, 작년에 열린 4기 인대에서 주총리께서는 모주석께서 구상하신 네가지현대화의 웅위로운 전망을 우리 앞에 펼쳐줬소. 그날을 앞당기기 위해 배움과 탐구의 길에서 티끌만한 동요도 있어서는 안된다고 보오.” “그런데 왜‘고린내 나는 아홉째’라는 모자가 지금도 날아 다닙니까?” “고린내 나는 아홉째?” 이렇게 되뇌이는 김선생의 입가에 경멸의 빛이 스쳐 지나간다. “그자들더러 지껄일대로 지껄이라하지요. 이 아홉째가 사회주의 락원의 꽃동산에 자신의 심혈로 아름다운 꽃, 향기로운 꽃들을 가꿔준다는 것을 력사는 증명할 것이니깐!” 그들은 다시 길을 떠났다. 앞에서서 인적 없는 태고연한 원시림에 길을 개척하며 앞으로만 나가는 김선생, 오늘 따라 그가 한결 더 돋보인다. 심산의 해는 노루꼬리처럼 짧기도 하다. 오후 3시에 접어들자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고 망망한 천리림해에 황혼이 천천히 꿈자리를 편다. “김동무” 한 마장 앞에서 김선생의 부르는 소리에 김동무는 급히 달려갔다. 옆에 다가선 자취도 모르고 언제 불렀느냐 싶게 한자리에 뿌리내린 듯 정숙히 서서 앞을 응시하는 김선생. 이윽고 김동무의 시선도 그의 시선을 따라 한곳에 멎었다. 창공을 치뚫고 아득하게 솟은 분비나무. 세월의 풍상에 씻기고 또 씻겨도 힘 있게 씌여진 력력한 글발! “인민들이여, 한결 같이 항일의 성전에 떨쳐 나서자!” 그들의 가슴속엔 숭엄한 감정의 격량이 굽이친다. “우리도 여기서 하루밤을 묵지.” 이윽고 김선생은 격동된 음성으로 침묵을 깨뜨리더니 도끼로 주위의 잔나무들을 찍는다. 얼마후 간편하게 꾸린 막 앞에 우등불이 타오른다. 40년전에 항일의 봉화가 타올랐던 유서깊은 이 전적지에 오늘은 천추에 길이 빛날 항일영웅들의 영령을 지키며 우등불이 활활 밤하늘을 태운다. “선렬들이피와생명으로바꾸어온이강산, 우리에게물려준이강산, 여기에 숨어 있는 교묘한 대자연의 미지수들을 하나하나 풀어 인민에게 복을주고 강산을 굳게 다져가는 우리 과학일군들의 사명은 얼마나 중대한 것인가! “ 이렇게 사색을 무르익혀가는 김선생은 자기 어깨우에 놓인 짐이 얼마나 무겁다는 것을 심장으로 깊이깊이 느끼였다. 스산한 산바람에 랭기와 습기가 온몸에 스며들어도 엄동설한에서 밤을 지샜을 항일영웅들을 생각하는 그들의 마음은 한없이 후더워 났다. … 얼굴에 선뜩선뜩 떨어지는 물방울에 놀라 깨여나니 김동무의 몸엔 김선생의 소료가 덮어져 있을뿐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새날이 밝아오는 심산밀림속에서 그는 어디로 갔을가? “선생님ㅡ!” 그는 손나팔을 입에 대고 연거퍼 몇번 목청껏 불렀다. 그 소리는 메아리고 천리 림해에 울려간다. “여기요ㅡ!” 귀를강구니 남쪽 방향에서 화답하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온다. 김선생은 자기 한테로 급히오는 김동무를 향해 황옥색꽃이 피고 대꼭지 같은 뿌리에 탐스런 열매가 달린 식물을 쳐들어 보이며 환희에 넘쳐 높이 웨쳤다. “‘천마’요! 연변의‘천마’요!” 련연히 굽이쳐 간 장백산발도 메아리로 화답한다. “‘천마’요! 연변‘천마’요!” 여러 번 오르내린 백두산으로부터 내두산, 소골령, 대골령, 베개봉, 소팔령, 대팔령, 오랑캐령, 하발령…연변의 산과 들 마다에 별처럼 찍혀진 김선생의 발자국, 그 발자국마다에 풍만한 열매로 아롱진 과학탐구의 성과! 독자들이여, 400여가지 중초약을 생동한 그림과 상세한 설명으로 소개한 1130페지에 달하는“연변중초약”책을 펼칠 때 그대들은 이책의 매 한장의 그림. 매 한페지의 글자속에 속속들이 슴배인 김선생의 수십년간 피타는 노력과 심혈을 잊지 마시라.  
362    "21 세기의 '리수진' 김수철 전"(련재 27) 댓글:  조회:1636  추천:0  2020-12-30
                제 3 부 ; 신문잡지로 읽는 김수철 2, 자연의 대문을 열어가는 사람(1) 첫눈이 내린다. 목화송이 같은 소담한 함박눈이 너울너울 춤추며 수줍은듯 살며시 대지에 안긴다. 허나 여기ㅡ춘성의 전등불 눈부신 한 회장에는 철 아닌 따사라운 봄빛이 무르 녹는다. 당중앙에서 마련하여 주신 과학의 새봄을 맞아 길림성식물학회학술론문발표회에 참가한 과학공작자들의 얼굴마다에는 웃음꽃이 활짝 피였다. 아. 그얼마나 애타게 바라던 학술론문발표회인가, 사회자의 소개에 이어 60고개를 바라보는 한 조선족과학공작자가 뭇사람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으며 온건한 걸음으로 연단에 오른다. 머리에 흰서리가 내리기 시작하고 얼굴엔 굵은 주름살이 잡혔으나 중등키에 균형잡힌 강단있는 몸매, 탐구적 예지로 빛나는 두 눈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준다. 그는“마가목의 현미경 감별 연구” 등 세편의 론문을 한조목 한조목 천천히 읽다가는 높은 정밀도로 그려진 쾌도를 짚어가며 조리 있고도 투철하게 해석한다. 식물연구에서의 그의 독창적인 견해와 투철한 분석은 장내가 떠나 갈듯한 한차례 또 한차례 박수를 받는다. 론문발표가 끝나기 바쁘게 과학공작자들은 서로 앞을 다투어 연단 앞에 모여든다. 그들은 찬사를 아끼지 않으며 그의 성공적인 론문발표를 진심으로 축하 한다. 그가 바로 길림성식물학회의 유일한 조선족리사이며 연변농학원 농학계식물학교연실주임인 김수철선생이다. 변강의 이름없던 한 보통교원이 어떻게 이런 파문을 일으키게 되였겠는가, 그 비결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 독자들이여! 우리 함께 그가 걸어온 근 30년간 비범한 로정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자.   1 연변산촌의 그윽한 청취를 자아 내는 7월의 용신감자골. 명주필 같은 아침 안개가 꿈자리를 툭툭 털고 기염기염 일어나더니 아담하게 자리잡은 마을을 어루만지며 버들방천을 야산으로 고요히 헤염쳐 간다. 수탉이 홰치는 소리에 잇달아 통나무굴뚝들에선 흰연기가 련이어 머리를 풀며 하늘로 타래쳐 오른다. 이윽고 마을 웃 쪽에 자리잡은 오통집 정지문이 열리다. “오늘만이라도 좀 쉬여요, 온 밤 앓음소리로 날을 밝히시고도…” 녀인의 애원에 가까운 말소리다. “괜찮소. 새벽에 뜬 뜸이 효과를 보는 것 같소” 김선생은 신끈을 단단히 졸리고 나서 채집통을 둘려멘다. “말씀이 휴양이지…” 안해의 목소리는 푹 젖었다. “허허, 여보 엊저녁 서쪽골집 아바이 말씀을 못 들었소? 양목산꼭대기에서 화태닥나무를 본적이 있다고. 그럼 내 오늘만 갔다오지.” 김선생은 화기 있게 말하며 어느새 성큼 사립문을 나섰다. “아버지, 밥!” 둘째 아들녀석이 깡충깡충 뛰여오며 고사리손으로 밥보자기를 내민다. 김선생은 그의 머리를 정답게 쓰다듬으며 사람좋은 웃음을 머금고 안해에게 고개를 끄떡해 보였다. 들에 나서니 간밤의 고통이 씻은듯 가셔지고 정신이 한결 말쑥해 진다. 길가에서 방긋방긋 웃는 각 가지 들꽃, 록음방초 우거진 버들방천밑으로 자갈을 굴리며 돌돌 흐르는 맑은 내물, 아름다운 목소리로 서로 내기하며 노래부르는 산새들… 아, 대자연은 그얼마나 청신하고 황홀한가. 한식경이나 걸어 양목산기슭에 이른 그는 왕모래알을 굴리며 퐁퐁용솟는 샘터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목이나 추겨야지.” 그는 채집통을 옆에놓고 무릎을 끓은 다음 두손으로 바가지를 만들어 샘물을 떠선 꿀꺽꿀꺽 마셨다. 뼈속까지 찡 저려들게 시원하다. 채집통을 다시 메려고 멜끈을 들자 시야에 확 안겨드는 끈에 씌여진“1950”년이란 글발! “허허, 너도 나를 따라 벌써 10년을 일했구나.” 이렇게 입속말로 되뇌이는 그의 머리속으로 지나온 일들이 조수처럼 밀려 든다.  20여세의 혈기 왕성한 청년으로서 그가 식물학계에 들어선 것은 1950년도였다. 식민지반식민지반봉건의치욕스런 모자를 벗어 동댕이친 새중국은 갓 돌이 지났다. 그 당시 중국에는 계통적인 식물학 교재가 없었고 연변의 식물학분야는 거의 공백이였다. 비록 대학을 일년간 다니다가 생활난으로 중퇴하여 기초가 박약한 그였으나 이런 현실에 직면한 청춘의 가슴속에서는 애국의 열정과 민족적자존심이 불길처럼 타올랐다. “4천 년의 찬란한 문화로 빛나온 조국이다. 근로용감, 슬기와 지혜로 세상에 이름 떨친 중화민족이다. 근 백년래 뒤떨어진 조국의 과학사업을 위해 내가 맡은 식물분야에 이 자그마한 존재나마 깡그리 바쳐 가리라.” 사람들의 사회적실천만이 외계에 대한 인식의 준확성을 검증하는 기준이다. 그렇다. 지식을 얻으려면 현실을 변혁시키는 실천에 참가 해야 한다. 이때로부터 그는 채집통을 메고 나섰다. 교학후의 여가에 일요일과 명절날에 그리고 여름방학에 들로 야산으로 심산속으로 식물을 찾아 부지런히 다녔다. 도대체 연변에는 어떤 분류의 식물들이 어디에 분포되여 있는가. 발견되지 않은 식물들은 어떤 것들인가. 쉼 없는 노력은 헛되지 않아 정성들여 채집하고 자체로 만든 식물표본들은 점점 가지수가 늘어갔다. 텅비였떤 식물표본실은 날이가고 해가감에 따라 점점 이채를 돋히였다. 인간은 모든 것을 일일이 직접 체험할수 없다. 사실상 많은 지식은 간접적경험에서 오는바 그것은 옛날부터 내려온지식과 외국에서 온 지식이다. 하여 그는 외국어학습에 검질기게 달라붙었다. 푸름한 새벽에, 출근길에, 퇴근길에, 식물채집의 길에 꼭꼭 단어와 문법카드를 가지고 다니며 잠시적 지구전을 벌리였다. 몇 년간의 고심한 노력으로 마침내 일어와 로어를 능숙하게 장악하였다. 시야갸 넓어지고 지식면도 넓어졌다. 하지만 그의 신체는 철로 빚어진 것이 아니였다.  밤에 낮을 이어가며 과학에로 돌진하는 그에게 의학은 신결핵이란 치명적인 언도를 내렸다. 조직에서는 그를 관심하여 여기 산촌으로 반년간 휴양을 보냈던 것이다. 허나 병마는 한 공산당원의 굳센 의지와 드팀없는 신념을 꺽을수 없었다. 식물학연구에 종사하는 사람에게 산촌이란 얼마 나넓고 풍부한 실험실을 펼쳐주는 것인가, 이 얼마나 얻기힘든 훌륭한 기회인가, 이 반년간 그는 하루의 휴식도 없이 성한사람처럼 용신의 산과 들을 메주밟듯 넘나들며 1000여가지의 식물을 정성들여 채집해선 표본을 만들었다. “푸르르릉ㅡ“ 멀지않은 숲속에서 장꿩 한 마리가 하늘로 날아 오른다.. 회억에서 깨여난 그는 지팽이 하나를 꺽어쥐고 왼손으로 해빛을 가리우며 해발 천 여메터나 되는 산꼭대기를 쳐다보았다. 어떻게하나 기어코 올라가야 할 봉우리. 그의 두 눈에는 굴할수 없는 의지의 빛이 번뜩이였다. 산은 기슭부터 순순히 길을 내 주지 않는다. 노박덩굴, 다래덩굴이 그물처럼 꽉 늘어서 여간 성가시게 굴지 않는다. 낫으로 덩굴을 끊이며 손으로 덩굴을 헤치며 한걸음 한걸음 톱아오른다. 한참 올라가노라니 또 가시나무숲이 앞을 막으며 낯이고 손이고 사정없이 찌른다. 간신히 숲을 헤치고 중턱에 오르니 가둑나무가 삼대처럼 꽉 박아들어 섰다. 난생청음 사람을 만났는지 등에 떼가 왕왕기를쓰며 달려든다. 예리한 침을 몸에 들이박고는 생사결단 하며 피를 빨아 먹는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를 악물고 앞의 나무를 틀어 쥐고는 몸을 앞으로 썩 주며 오르고 또 오른다. 병든 몸은 악렬한 자연환경에 점점 적응되지 않는다. 허리가 끊어지는 것 처럼 아프고 목에는 불이 펄펄이는 것 같다. 아름드리 가문비나무에 몸을 기대고 앉아 한참 숨을 돌린다. 온몸은 점점 땅속에 잦아드는 것 같다. 안된다. 계속 이렇게 있는다면 영영 일어나지 못한다. 지팽이에 의해 모지름을 쓰며 욱 일어난 그는 채집통을 우로 추스리고 한 발자국 또 한 발자국 봉우리로 톱아 오른다… 흰구름을 허리에 두른 산봉우리에 올랐을 때 불덩이 같은 해가 중천에서 그를 향해 환히 웃고 있었다. 운동장처럼 휘넓은 산마루다. 동쪽에서 서쪽에로 남쪽에서 북쪽에로 침엽림의 매 한치의 땅, 매 하나의 초목이라도 스쳐지나 갈세라 눈을 꼭꼭 박아가며 찾고 또 찾는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가. 아, 순간 그의 두눈은 유난히 빛났다. 눈앞에 안겨오는 빨간열매, 미풍에 하늘하늘 춤을 추는 푸른잎사귀ㅡ화태닥나무다! 쓰러질듯 비칠거리며 다가가서 조심스레 쓰다듬는 떨리는 손, 그의 얼굴엔 기쁨의 물결이 넘실 거린다. … 불타는 락조가 산천가에 비꼈다. 동구밖 길옆에 뿌리박 은아름드리 백양나무에도 저녁노을은 곱게 물들었다. 그는 병마와 피로에 시달릴대로 시달린 몸을 백양나무에 맡긴채 잠시 눈을 붙인다. “아버지!” 어디선가 웅석섞인 목소리가 귀전에 날아든다. 눈을 뜨는 순간 둘째아들녀석이 품에 확 안겨들며 채집동을 달라고 조른다. “응, 그래 고운열매보여 줄가.” 하며 그는 채집통을 벗는다. “얼마나 고생…” 어느새 마중왔는지 뒤에 섰던 안해가 채집통을 받아메며 일굴을 외로 돌리더니 옷고름을 눈굽에 가져간다. “고생한 보람이 있소.” 희열이 어린 얼굴로 안해를 보며 아들의 손목을 잡은 그는 허리를 지그시 누르며 집으로 향한다. 식물을 채집하기도 힘들거니와 표본을 만들기도 여간 조심해야 한다. 잎사귀 하나라도 떨어질세라 뿌리 한 오리라도 상할세라 종이와 종이사이에 잘 끼워서는 구들에 차례로 펴 놓는다. 다음 이불을 덮고 조심조심 밟아서 압착 시킨후 10일 가량 잘 말리운다. 그리고는 표본지 우에 펴놓고 반창고오리들로 잘 고정시킨다. 식물의 유산으로 세세대대물려 줄 표본이니 말이다. 비좁은 외통 집안이다. 정성들여 말리우는 식물표본들이 구들에 편 이불속에서 혼곤히 잠을 잔다. 안해는 그것을 조심스레 하나하나 옆에 쌓아 놓으며 밥상을 차린다. “어서 식사하세요.” 그는 안해의 말을 듣는둥 마는둥 화태닥나무를 종이사이에 잘 끼우고는 이불을 덮어준다. “자, 둘째야 살랑살랑 밟아보지.” 둘째아들녀석은 죄꼬만 발로 이불을 자근자근 잘도 밟는다. “식사하세요.” 안해는 눈을 곱게 흘기며 채촉한다. “그래그래.” 그제야 그는 앉은걸음으로 밥상에 마주 않는다. 벽에 빈틈없이 걸려있는 식물표본들, 구들에 두툼히 쌓인 식물표본들, 시렁우에 빼곡이 자리잡은 유리병식물표본들을 둘러보며 밥술을 드는 그의 얼굴에는 병색과 피로가 가뭇없이 사라지고 밝은 미소가피여 난다.  
361    옛 이야기속의 인생조언 댓글:  조회:1797  추천:0  2020-12-21
                                   알렉산더 대왕의 유언   2015년 01월 06일 필자는  주영강, 소영, 서재후 등“호랑이”들이 염낭에 챙긴 검은 돈으로1000여척의 미국항공모함을 살수 있다는 기사를 읽고 분노에 앞서 '그네들이 그 돈을 제 돈이라고 생각했을가?'는 천진한 의문이 앞섰다. 아니면 많은 자영업자들이 하는 말이 “재산이 날따라 커지니까 그 재산이 내 재산이라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대신해 그 재산(돈)을 관리할뿐입니다.”고 하니 말이다.  그런데 오늘(12월 19일) 필자는  도문시 당위서기(부서기), 시장, 주인대주임, 부주임을 지낸 민광도와 조룡호가 거액의 자금을 수뢰한 죄로 민광도에게 유기도형 12년, 조룡호에게 유기도형 7년을 언도 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당년에 많은 시(市)민과 주(州)민들 앞에서 두손을 내저의며 “이렇게 해야 한다, 저렇게 해야 한다”를 외쳐대던 그들에 비춰 그제날에 읽었던 이 글을 다시 찾아 읽었다.    ㅡ알렉산더 대왕(위대한 영웅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란 알렉산더는 세계를 하나의 제국으로 통일하려는 원대한 꿈을 꾸며 20세에 왕위에 올라 13년만에 그리스, 페르시아, 인도에 이르는 3개의 대륙을 정복해 대제국을 건설하고. 33세에 생을 마감) 의 병세가 날이 갈수록 심해지자 왕실은 깊은 시름에 빠졌다. 대왕의 병을 고치기 위하여 이름난 명의들이 하루에도 수없이 다녀 갔지만 아무런 차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슬픔에 빠진 주변 사람들과는 달리 대왕은 오히려 침착했다. 그는 타고난 강한 정신력으로 조금씩 자신의 주변을 정리하면서 죽음을 준비했다. 신하들이 대왕더러 자리에 누워 휴식할 것을 권하니 대왕이 이렇게 답했다. “내 걱정은 하지 말게, 사람이란 죽으면 잠을 자게 되는 법, 살아 눈뜨고  있는 이 순간 어찌 잠을 잘수 있겠는가. 얼마 남지 않은 귀중한 시간을 가장 충실하게 보내리라.”   날이 갈수록 대왕은 병이 점점 깊어져 자리에 앉아 있기 조차 힘들었다. 왕실에서는 병색이 짙은 그를 거의 포기한 상태로 ‘그의 마지막 유언이 무엇일가?’에 궁금했다.   하지만  알렉산더 대왕은 사경을 헤매면서도 좀처럼 유언을 말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마침내 대왕은 궁궐의 사람들을 불러놓고 힘겹게 입을 열며 천천히 말했다. “내가 죽거든 묻을 때 두손을 밖에 내놓아 남들이 볼 수 있도록 하시오.”  이에 대왕의 유언을 초조히 기다리던 신하들이 놀랐다. 부와 권력을 한 손에 쥐였던 대왕의 유언으로 적절하지 않기 때문에.  놀라하는 신하들을 보며 계속하여 대왕이 이렇게 부언했다. “나는 단지 세상 사람들에게 천하를 쥐였던 알렉산더도 떠날 때는 빈손으로 간다는 것을 보여 주고자 하는 것 뿐이요” 알렉산더 대왕은 인간은 "공수래 공수거"(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는 생과 사의 도리를   후대들에게 대왕의  유산으로  남겼다. .  이 지구상에서 가장 욕심 많은 존재를 혹자는 짐승(동물)이라고 한다. 그런데 짐승들은 배고플 때만 사냥을 하고 절대로 과식을 하지 않는다.   명심보감에 “견물생심 정심응물(見物生心 定心應物)”이란 경구가 있다.물건을 보면 마음(물욕)이 생기므로 마음을 바로 잡고 응하라는 것이다.   물건을 보면 집착하는것은 욕심이고 마음이 흔들리는것은 마음에 동요심이 꼬리치기 때문이다.부동심이면 물질에 흔들리지 않고 련꽃처럼 진흙속에서도 오염되지 않는다. 부동심은 현실을 피해 외부 세계와 단절하는 것이 아닌, 수련을 통해 욕망과 집착을 자제하고 정심(正心)을 찾는다. 부동심은 물리적용기(血氣)가 아닌, 비도덕을 배격하고 정의를 실천하는 도덕적 용기이며 물욕을 치료하는 으뜸 비방이다. 남북조시대의 학자 안지추(顔之推)는 “고금천지는 끝이 있지만 사람의 필요는 끝이 없다. 욕망을 줄이고 만족할 줄 알면 자신의 한계를 정할수 있다.”를 “안씨가훈(顔氏家訓)”으로 하였다.   욕심은 풍선과 같다. 풍선에 공기를 적당히 불어 넣으면 터지지 않지만 물욕에 빠진 민광도와 조룡호는 자기의 몰렴치한 풍선에 공기를 더 불어넣다가 끝내 터져버리는 무정한 심판을 면치 못했다. 혹시 이 두 "어른"에게 알렉산더 대왕의 유언을 들려주면 무어라고 할가? 절대로 믿어지지 않는다고?  아니면 언녕 들려 줄게지...라며 투성을 부릴가? 옛날 로인들이 전하던 명언이다. “바람이 들어오지 않고 비가 스며들지 않을 정도로 스스로 자제할 줄 아는 부동심(不動心)을 가지면 귀가 조용하고 영혼이 평혼하니라.”  오기활 2020.12.19
360    [수기 62]잊을 수 없는 할아버지의 사랑 댓글:  조회:1555  추천:0  2020-12-10
[수기 62]잊을 수 없는 할아버지의 사랑 편집/기자: [ 홍옥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20-12-09 11:23:38 ] 클릭: [ ] 우리 할아버지는 (1892―1978) 훤칠하게 큰 키에 름름한 체격이셨는데 얼굴에는 수염까지 멋지게 드리워 제법 풍채가 름름한 분이시였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일찍 할머니를 저세상에 보내고 젊은 홀아비로 어린 두 아들과 젖먹이 딸을 키웠다. 어린 것들이 새 엄마와 살기 싫다고 하여 재혼했던 할머니까지 돌려보내고 할아버지는 혼자서 자식 셋을 키우고 시집장가까지 보냈다.                                                                       필자의 할아버지 하늘의 뜻이였는지 장가 보낸 두 아들집에서는 귀여운 손자손녀들이 줄줄이 태여나 고생하시던 할아버지는 세상에 부럼 없듯이 손군들을 금지옥엽으로 보듬으며 정성을 몰부었기에 손군들은 할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랐다. 세월이 흘러 할아버지께서는 저세상에 가셨고 손군들도 70~80세를 바라보는 로인으로 되였다. 하지만 따뜻했던 할아버지의 사랑은 잊혀질 줄 모르고 손군들 가슴마다에는 할아버지의 사랑이 깊이 새겨져 애틋한 그리움을 자아낸다. 우리 사촌 형제자매들은 명절 때나 집안 군일이 있어 모여 앉으면 저마다 할아버지의 사랑을 더 많이 받았노라 자랑하며 웃고 떠들며 행복한 추억속에서 할아버지를 그려보 군 한다. 어린 시절 우리 집과 삼촌네 집은 몇 발자국도 안되는 아래웃집이였는데 두 집 손군들은 문턱에 불이 날 지경으로 들락거리며 뛰놀았다. 엄마들은 분주스럽고 구들 까래가 다 판난다고 귀찮아 했지만 할아버지는 천진하게 뛰노는 손군들이 마냥 귀엽고 대견스러워 만면에는 언제나 웃음끼가 돌았다. 때로는 어린 것들이 마구 뛰놀며 다칠가 걱정되여 개구쟁이들의 잔등을 뚝뚝 두드려 주저 앉히군 하였다. 그럴 때면 어린 것들은 할어버지 앞에 둘러앉아 히히닥닥 재롱도 피웠고 응얼응얼 응석도 많이 부렸다. 사촌동생 순금이와 나는 어렸을 때 할아버지 잔등에 쌍둥이마냥 같이 업혀 다녔다고 자랑하면 두집 막둥이들인 신숙이와 송욱이도 할아버지 잔등에 같이 업혀 다녔다고 자랑한다. 어릴 때 두집 손군들은 옷단추가 떨어 졌거나 양말에 구멍이 나면 엄마에게 청들지 않고 할아버지 앞에 내놓았기에 할아버지는 제때에 꿰매주고 살뜰히 보살펴 주었다. 사탕과자가 흔치 않던 시절이라 우리는 콩이나 옥수수를 닦아서 간식으로 즐겨 먹었는데 엄마는 식량이 랑비되고 집에 먼지 난다고 해주지 않았다. 하여 우리는 엄마가 군일 집에 가거나 장마당에 가는 날이면 엄마가 문밖에 나서기 바쁘게 할아버지와 콩, 옥수수를 볶아 달라고 졸라대며 응석부렸다. 그럴 때마다 할아버지는 빙그레 웃으시며 부엌에 내려가 불을 지펴놓고 가마에 넣은 콩, 옥수수를 솔비로 슬슬 저었다. 가마에서 콩이랑, 옥수수랑 탁탁 튀며 구수한 냄새를 풍길 때면 우리는 한없이 즐겁고 행복했다. 이 세상에서 우리 할아버지가 제일 좋다고 짝짜꿍을 쳤고 할아버지께서 큼직한 바가지에 떠주는 볶은 콩과 옥수수를 꿀맛으로 실컷 주어 먹고는 호주머니에 불룩이 넣고 동네돌이 하며 으시대기도 했다. 어릴 때 우리는 할아버지 밥상에서 밥 먹겠다고 서로 투정질도 많이 했다. 어머니는 맛난 음식과 색다른 음식이 있으면 언제나 할아버지 밥상에 먼저 올렸는데 할아버지는 한입 맛 보시고는 일부러 입맛에 맞지 않는다며 손군들에게 넘겨 주었기에 우리는 볼이 메지게 먹었다. 그럴 때마다 할아버지는 “그래그래, 너네들이 많이 먹고 어서어서 쑥쑥 크거라”라고 하시며 즐거워하셨다. 나는 어릴 때 집에서 멀리 떨어진 수남소학교에 다녔는데 눈보라치는 겨울 아침이면 할아버지는 나를 붙잡아 앉혀놓고 낡은 천으로 감발싸개를 하여 신을 신겨 주었고 할아버지가 만든 각반으로 발목까지 꽁꽁 감싸 주었기에 추운 줄 모르고 학교에 다녔다. 그 때 철부지였던 나는 할아버지가 나를 앉혀놓고 매무시하는 것이 귀찮고 투박스럽다고 투정부리며 울상을 했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나를 달래며 발목에 눈이 들어가면 온몸이 얼어들고 추워서 병이 난다고 하시며 기어코 붙잡고 매무시해 내놓았다. 지금 할머니로 된 나는 그 때 할아버지의 따뜻했던 사랑이 가슴으로 느껴지며 할아버지가 점점 더 그리워 진다. 우리는 어릴 때 할아버지가 세상에서 제일 좋고 제일 미더운 분이라고 생각해서인지 서럽고 바쁜 일이 있을 때면 엄마를 찾는 것이 아니라 할아버지를 찾았고 울어도 유별나게 “아바예! 아바예!” 하면서 울었다. 그래서였던지 내가 16살 쯤 되던 어느 여름날에 도문에서 혼자 걸어서 집에 오는데 (그 때는 모두 걸어 다녔다) 길옆 산기슭에서 책을 보던 청년남자가 갑자기 같이 놀자고 하며 나의 앞을 가로 막았다. 당황했던 나는 엉겁결에 “아바예! 아바예!” 소리치며 “저 앞에서 우리 아바이가 나를 가다리는데…” 하면서 정신없이 앞을 향해 뛰였다. 그 위기일발의 시각에 마치 신화 속 이야기마냥 진짜 할아버지 한분이 멜대에 짐을 메고 나를 향해 우줄우줄 걸어오고 있었다(옛날 홀롱재라고 불렀다). 그 분이 우리 할아버지인 줄 알았던지 그 청년은 어디로 사라지고 나는 무사히 집까지 달려왔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말 못하고 가슴만 벌렁벌렁하며 몇날 며칠 밤잠을 설치였다. 60여년전 그 아슬아슬했던 순간에 나의 앞에 나타났던 그 ‘홀롱재’할아버지는 영원히 잊을 수 없는 나의 은인이였고 그 할아버지는 정녕 우리 할아버지의 뜻을 알고 나를 마중하러 온 ‘신선’할아버지였다고 믿고 싶다. 나는 고중을 다닐 때 왕청에서 기차 타고 곡수역, 도문역에 와서 몇리길을 걸어 집까지 갔다. 우리 할아버지는 겨울방학이면 곡수역에서, 여름방학이면 도문역에서 나를 마중했다. 1962년 겨울방학 때라고 기억된다. 나는 방학 날자를 미리 편지로 집에 알렸는데 예상 외로 학교에서 열흘이나 더 늦게 방학하게 되여 할아버지는 열흘 내내 곡수역에서 나를 기다렸다. 열흘 지나 끝내 나를 마중한 할아버지는 마치 잃어 버렸던 손녀를 다시 찾은듯 기뻐하시며 나를 안아 주었다. 1965년 내가 연변사범학교에 갈 때에도 할아버지는 녀자애들이 침대에서 차게 자면 랭병이 생겨 큰일 난다고 하시며 할아버지 잠자리에 깔았던 노루가죽을 나에게 내주셨다. 그 때 철없고 매정했던 나는 별란 거 다 가져가라고 한다며 짜증내며 두덜거렸다. 그러나 나의 속내를 알고 있던 할아버지는 노루가죽에 천을 씌워 곱게 다듬어서 끝내 나의 이불 짐에 넣어 주었다. 효자였던 아버지께서 차가운 웃방에서 쉬는 할아버지에게 랭기 들지 않게 깔아드렸던 노루가죽이였는데 그것을 나에게 내주시고 할아버지는 차가운 방에서 얼마나 춥게 겨울을 지냈을가?! 지금 할머니로 된 나는 생각할수록 가슴 아프고 목이 멘다. 그래서인지 할아버지는 만년에 잠자리에 오줌을 자주 흘렸고 바지춤에도 오줌이 흘러 자주 빨래하는 며느리에게 민망해하시던 모습이 눈앞에 선히 떠오른다. 그 때 할아버지께서 노루가죽을 나에게 내주시고 차가운 잠자리에서 주무셔서 그런 병에 걸린 것 같아 나는 너무 죄송스럽고 가슴 쓰려 눈굽이 적셔진다. 할아버지는 손군들이 귀여워 애지중지하였지만 례의범절을 지키지 않거나 함부로 말썽 부리며 싸움 질 하면 추호의 용서도 없이 불호령을 내리시며 엄벌을 주었다.                                         달라자로인협회 활동에 참가할 때 기념사진을 남긴 필자(중간) ) 사촌인 태욱이와 영욱이는 어릴 때 마당에서 딱지치기를 하다가 싸움이 붙어 서로 밀고 닥치고 했는데 터밭에서 일하시던 할아버지는 손에 들었던 삽을 메고 당장 찍을 듯한 기세로 달려와 그 놈들의 목덜미를 잡아끌고 삽으로 엉덩이를 두들겨 팼다. “세상에서 제 종자끼리 싸우는 놈이 어디 있다더냐!” , “제 종자끼리 싸우는 놈은 개보다 못한 놈이다.” “ 다시 이렇게 싸우면 네놈들은 집에 들어올 생각도 말아라”고 하시며 노여워 야단치셨다. 난생처음 당한 봉변에 태욱이와 영욱이는 엉엉 울면서 다시는 싸우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이와 같은 할아버지의 대바른 교육과 사랑이 있었기에 손군들은 례절을 지키며 정직한 마음가짐으로 잘 자랐다. 우리 할아버지는 어린 손군들에게 사랑과 정성을 몰부었을 뿐만 아니라 성인으로 자란 손군들에게도 아낌없는 관심과 사랑을 주었다. 부지런한 할아버지는 매년 집 뜰안에 담배농사를 하였는데 겨울이면 아버지, 어머니는 담배 묶음을 이고 지고 장마당에 가서 팔아 푼돈을 만들어 할아버지에게 드렸다. 할아버지는 한푼도 쓰지 않고 차곡차곡 모아서는 60년대초에 대학생이였던 큰 손자에게 쏘련제 손목시계를 사줬다. 그 후 차례로 둘째 손자에게도 똑 같은 쏘련제 손목시계를 사줘서 사업하는 직장인들도 시계를 찬 사람이 별로 없던 그 시절에 할아버지 손자들은 팔목에 시계를 차고 시뚝해했다. 뿐만 아니라 1967년도에 처음 사업에 참가한 나에게까지 국방패 자전거를 사주셔서 나는 씽씽 자전거를 타고 출근하면서 뭇사람들의 부러움을 자아내기도 하였다. 우리 할아버지는 이렇게 손군들을 보배마냥 쓰다듬고 아끼고 사랑하며 건실하게 성장하도록 했다. 손군들이 출세하는 모습을 지켜 보시며 평생의 락으로 삶고 살아오신 그이였다. 하기에 할아버지의 사랑 속에서 자란 우리 손군들은 저마다 건강한 신체와 건전한 정신력으로 사회활동에 참가했고 고향마을 동년배들중에서도 우리 형제들은 비교적 건강하고 장수하는 편이다. 나는 사람들에게 우리 할아버지를 마음껏 자랑하고 싶다. 우리 할아버지는 세상에서 제일 존경스러운 분이라고, 우리 할아버지는 세상에서 제일 자랑스러운 분이라고. 하늘나라에 계시는 우리 할아버지는 영원히 우리 마음속에 살아 계신다. 할아버지 사랑합니다! 하늘나라에서는 할머니를 만나 못다한 사랑을 나누며 행복하세요! / 최정금
359    "21세기 '리시진' 김수철 전"(련재26) 댓글:  조회:1524  추천:0  2020-12-08
                                제 3 부 ; 신문잡지로 읽는 김수철 1, 청산을 두루 밟아 연벼농학원 농학계식물식생교연실 김수철주임(공산당원)은 20여년간 연변에 있는 식물의 채집, 정리사업을 꾸준히 진행하여 중대한 성과를 이룩했다. 그는20여년간 채집정리한 식물표본으로 “장백산야생식물지”를 편찬해 한창 출판중에 있는 “장백산야생경제식물지”에중요한 기초를 제공하였다. 그는 또 자기가 수집, 정리한 식물로 “연변중초약”을 편찬해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출판하였다. 그는 지금 연변지구의 버섯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는데 멀지 않은 장래에 기꺼운 성과가 알려질 것이다. 김수철선생이 이미 써냈고 또 앞으로 쓰는 책들은 단순한 “식물지”가 아니다. 여기에는 그가 고향의 식물을 연구하여 조국의 사회주의건설에 기여하려는 그의 마음과 리상, 그리고 그 리상을 실현하기 위한 깐지고 드팀없는 의지가 기록되여 있다   1 김수철선생이 연변농학원농학계식물교원을 담임한 것은 1951년부터다. 그때 학교에 식물교수에 필요한 표본이 하나도 없었다. 당의 민족정책의 따스한 해빛 아래 대학교교원의 자랑을 한가슴에 받아안은 그는 자기가 맡은 사업을 어떻게하나 잘 해보려는 굳은 결의를 다지며 크나큰 포부를 품었다.  (우리 연변에는 어떤 식물이 몇가지나 있을가,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을가?  연변은 식물학의 미개발지이다. 이 천지를 개발하여 연변인민들에게 “식물학”을 보급하리라!) 김수철선생은 이런 뜨거운 마음과 탐구의 리상을 품고 산을 찾고 들을 찾아 떠났다. 20여년 동안 두만강하류의 경신수리봉으로부터 장백산 상상봉인 백두산천지에 이르기까지 그는 연변의 높고 낮은 산들을 하나하나씩 거의다 찾아 다녔다. 이 과정에서 그가 겪은 고생은 한두가지가 아니다. 때로는 깊은 산속에서 채찍같이 내리는 작달비를 맞고 때로는 가파른산을 톱다가 허궁미끌어 떨어지기도 하였다. 잠자리는 얼마나 스산했던가! 알맞춤한 데를 가면 인가를 찾을수 있었으나 그렇지 못할 때는 음산한 숲속에서 홀로 밤을 새워야 했다. 언젠가 김선생은 장백산남석에 천마가 난다는 말을 들었다. 새로운 식물이라면 언제나 금은 보화를 얻은 것처럼 기뻐하는 그는 호기심을 못이겨 그 곳을 찾아 갔다. 가도가도 끝없는 산판, 인가는 찾을래야 찾을수 없었다. 그는 숲속에 연추장막을 만들어 놓고 산판에서 지냈다. 한번은 훈춘현 까올령꼭대기에서 돌연한 폭우를 만났다. 그때 그는 비를막을 유포를 가지고 다녔지만 채집한 식물이 비에 후질러 질가봐 유포로 채집상자를 꽁꽁싸고 자기는 고스란히 비를 맞았다…. 그러나 그는 이 모든 것을 고생으로 여기지 않았다. 1959년 그는 장기간을 앓던 신념이 신결핵병으로 이전되여 용신에 있는 자택에서 휴양하게 되였다. 그런데 견물생심이라 산이라고 하면 펄하는 그는 약을 쓰는 몸에 진 병마를 잊은채로 또 산을 찾아 나섰다. 그는 해발 1.000메터나 되는 양목산상상봉까지 오르내리며 식물을 채집하였다. 식물채집에 혼신을 빼앗긴 그는 동무들과의 사귐, 가정식구들과의 단란한 모임도 외면하였다. 김수철선생님의 고명딸인 혜란의 회상이다. ㅡ이전에는 명절이나 구경이 있을 때 남의 애들은 아버지, 어머니의 손목을 잡고 구경을 다녔는데 나만은 그런 기회가 없어 매우 부러웠다. 그러던 어느날 아버지가 식물채집을 떠나자 나도 가겠다고 졸라댔다. 이래서 아버지와 같이 산으로 식물채집을 한번 갔다왔을뿐 구경은 같이 다녀보지 못했다. 고심을 기울이고 지성을 몰부어 채집해 가지고 집에 돌아와도 그는 한시도 쉴사이가 없었다. 채집해 온 식물은 압착을 잘 하고 건기를 잘 들여 표본을 만들어야 하고 게다가 어떤 식물은 원색, 원형을 그려놓아야 하였다. 이러한 뒤일들은 시간을 더 많이 소모하는 로동이였다. 하여 김선생은 한시도 자기의 식물표본실을 떠날수 없었다. 그는 자기가 맡은 교수를 끝내고는 표본실에 들어가면 나올줄을 몰랐다. 저녁에도 표본실로 나갔다. 일이 정 딸릴 때는 아예 집에서 이불을 가지고 가서 표본실에서 밤을 지새운 일도 푸술하였다. 김선생에게는 일요일도 없었다. 산처럼 쌓인일, 엄청난 학습임무는 그를 조금도 쉴수 없게 하였다. 특히 학습은 그의 사업을 진척시킴에서 돌파하지 않으면 안될 중요한 내용이였다. 정리하는 내용의 과학성을 위해서는 외국의 많은 서적을 참고 하여야 했다. 그래서 짬 시간마저 아껴야만 했다. 그가 로어, 영어, 등 외국어를 학습할 때 일이다. 그는 학교로 오가는 행길에서 한 전선대와 한 전선대사이에 암기해야 할 단어량을 정해 놓았다. 한 전선대사이에서 암송해야 할 단어를 다 암송하지 못하면 그 자리에서 서암송을 다 하고서야 다음 전선대사이로 걸어 갔다. 그는 이렇게 금싸락 같이 분초를 아끼며 고심 히학습하여 한어, 영어, 일어, 로어 등 네가지 언어를 능숙하게 장악하였다. 기나긴 나날 그가 이렇듯 긴장히 사업에 몰두하고 연구에 정진한 탓으로 성미마저 변하였다. 그는 말수가 적어지며. 하냥 조용한 것을 좋아했다. 그는 자기집에 쌀, 땔나무와, 애들의 옷 등 가정생활에 뒤전이였다. 남들은 터전에 각 가지 남새를 심었으나 김선생은 그리 많지도 않는 터밭에다 참나리, 함박꽃, 둥글레 등 야생식물 을옮겨다 심었다. 어느날 혜란의 친구가 울타리를 지나다가 식물종류를 헤여 보았더니 50가지도 넘더라고 하였다. 20여성상, 김수철선생은 가정도, 건강도, 행복도 모두 식물채집과 정리에 바쳤다.  20여년간 그가 만든 압착식물표본은 1만여 점이나 되였다. 식물종류는 (초보적인감정을 통과) 1,290여 종이다. 이런 식물중에는 연변지구의 식물종류로 기록되지 않았던 “신기록식물”이 많았는데 그중에는 채집을시작하여 9년만에 훈춘현 큰 따발령동남부에서 발견한 참개별꽃(太子參))과 훈춘현 이도포자대대에서 발견한 중대가리풀과 갈근(칡)이 있다. 이런 기초로 문화대혁명전에 이미 “장백산야생경제식물지”의 초고를 다써 놓았다.   2 김수철선생이 이제 그 순박한 연구의 마음, 소박한 라상을 힘차게 이룩해 나갈 때 무산계급문화대혁명이 일어 났다. 김수철선생은 “走白专主义道路分子”라는 모자를 쓰고 비판을 받았다. 실로 터무니가 없었다. 청춘도 가정도 다 바치며 고심을 기울인 것이 그래 죄란말인가? 그는 자기사업의 정당성을 믿었기 때문에 절대로 굽어들지 않았다.학교에서 일하기 불편하니 “연변중초약”을 편집하기 위하여 자기 집에다 볼품없는 사무실을 꾸렸다. 부엌자리를 방으로 고쳤다는 좁은 방에다 애들이 공부할 때 쓰던 앉은뱅이 네모상 하나를 갖추어 놓고 그 우에다 탁상전등 하나를 갖추어 놓았다. 탁상등은 갓이 없어 종이고깔을 만들어 씌웠다. 그리고 손으로 들고보는 확대경을 준비하였다. 책들은 방이 너무 좁아서 허덕간에 “서재”를 잡았다. 그러나 이런 “사무실”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공구서적을 마련하는 것이였다. “연변중초약”을 편찬하자면 다른 공구서적을 많이 보아야하는데 도서관에도 없고 또 마련해 줄 사람도 없었다. 집일에 뒤전인 그는 또 자기의 로임에서 돈을 잘라 내여 각종 공구서적을 샀다. “중약대사전”, “전국중초약휘편”, “간명중의학”, “중약식별수책”, “중국고 등 식물도감”…30책…60책…. 자력갱생으로 꾸린 초라한 “사무실”에서 그는 편찬사업에 달라 붙었다. 그에게는 실로 밤과 낮이 따로 없었다. 밤이면 밤마다 하늘의 별은 졸아도 김선생의이 “사무실”불빛은 졸줄을 몰랐다. 초저녁을 푹자고 소변보려 나왔던 이웃집할아버지는 그 불빛을 보고 감탄해 마지않았다. “허허, 저선생이 또 장밤을 하는군!” 1973년, 김선생이 꼬박 3년동안 간난신고를 겪으며 편찬한 “연변중초약”이 출간되였다. 이는 연변식물채집정리사업에서 김수철선생이 쌓아올린 또 하나의 성과로 연변조선족의학위생사업에 매우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3 “4인방”을 몰아내고 신주의 땅에 새봄이 왔다. 주, 성우수교원대회에 참가했던 김수철선생은 무등 기뻤다. (한껏 날아보자! 영명한 수령께서 이끌어 주시는 과학의 고봉을 향하여!) 어느덧 52세였지만 그는 매양 장백산고산대의 왕사스레나무와도 같이 검질기고 열정이 비등 했다. 하여 오늘은 모아산, 래일은 삼합령, 다음은 베개봉, 그 다음은 하발령으로 드나 들었다. 이 새로운 장정의 길에서 김수철선생에게는 자기행동을 지도하는 하나의 좌우명이 있는데 그것은 “하루 밀림은 일년 간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하루에 해야 할 일을 오 직앞당겨야 할뿐 한순간도 늦추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김선생이 버섯을 채집하려 해발1.700메타 되는 화룡청산베개봉으로 갔을 때다. 이른 아침에 베개봉마루로 휘적휘적걸어올라가다가 깊숙한 산속의 아담한 곳에 자리잡은 양봉장을 먼발치로 지나가다가 앞마당에 널어 말리는 호함진 버섯이 눈에 띄였다. “아? 소버섯이 아닌가?” 그는 이 산에 소버섯이 있다는 말을 들었던 것이다. (내려올 때 들려서 하나 얻어 가야지…) 그도 그럴것이 버섯이란 쉽게 상하므로 그때 가지고 가면 헛수고를 할수 있기 때문이였다. 그런데 방정맞게도 이날 그는 산에서 길을 오껴 온 저녁 산속에서 헤매다가 날이 저물어서야 청산골로 온다는 것이 왕청같이 허가장골에 가 버렸던 것이다. 그가 청산려관에 왔을 때는 밤이 이미 깊었다. 이?z날 꼭 청산을 떠나야 교수에 지장이 없는 것이였다. (어떻게 하는가? 후날로 미루는가?... 아니다. 기어코 얻어 가야 한다…) 그 이?z날 아침이 였다. 그는 4시에 일어나 끝내 양봉장에 가 그 버섯을 얻어 왔다. 이리하여 버섯 하나를 위하여 새벽부터 세시간이나 급한 길을 걸었던 것이다. 올해 김수철선생은 버섯채집과 연구에서 이미 적지 않는 성적을 거두었다. 그가 이미 그려놓은 버섯그림만해도 150장인데 종류는 적어도 100여 종이나 된다. 연변에는 어떤 버섯이 있을가? 얼마나 있을가? 어떤 용도가 있을가? 김수철선생은 새로운 장정의 길에서 멀지 않는 장래에 우리에게 연변버섯의 실정을 알려 줄 것이다. 윤효식기자 “연변일보”   1978년 10월 17일  
358    옛이야기속의 인생 조언 댓글:  조회:1606  추천:0  2020-12-02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말라”   사람을 외모로만 판단하는 사람은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이다. 사람에게 있어서 외모보다 더 중요한 것음 마음이다. 외모가 아무리 아름답고 매력적이라고 하더라도 마음이 아름답지 못하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마음이 아름다운 사람”은  결코 남을 업신여기거나 무례하게 대하는 법이없다. 사람이란 존재는 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존재이니깐.    간혹 재물에 눈이 어두운 사람이나 교양이 갖추어져 있지 않은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이러한 사람들은 세상에서 가장 값진 것이 보석이나 돈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참으로 어리석은 생각이다. 이런 사람들의 곁에는 그들이 지니고 있는 배경이나 재산을 탐하는 사람들로 득실거린다. 만일 그들이 그런 배경이나 재산을 잃게 되면 어떻게 할가? 아마 그 많던 사람들은 하나 둘 뿔뿔히 흩어지고 대신 그 빈자리에는 외로움이 빗물처럼 고여 있을것이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미국의 어느 돈 많은 재벌 로인 부부가 가지고 있던 전 재산을 교육사업에 헌납할 생각으로 하버드 대학을 방문하려 갔다. 때마침 정문 총장실 앞에는 수위가 있었다. 하지만 수위는 허름한 옷차람의 이들 로부부를 불친절하게 대했다 이들 로부부는 불친절한 수위에게 총장을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총장을 만나려 왔으니 꼭 좀 만나게 해주시오.” 하지만 수위는 용건만 물을 뿐 총장을 만나게 해주지 않았다. 로부부는 이 무례한 수위를 향하여 다시 물었다. “그러면 이런 대학 하나를 설립하려면 얼마나 듭니까?” 수위는 로부부를 더욱 없신여기며 들은 척도 않고 비웃었다 너무나 실망한 로부부는 별수없이 집으로 돌아와 전 재산으로 대학 재단을 세워 학교를 설립했다. 이 대학이 그 유명한 스탠포드대학이다. 이런 사연을 뒤늦게야 알게 된 하버드 대학에서는 아쉬웠지만 이미 때가 늦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 이후부터 하버드 대학은 정문앞에 항상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말라”는 글귀를 써 붙여 놓았다.   오기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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