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기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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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5    내가 글 쓰는 리유 댓글:  조회:2034  추천:0  2022-06-01
나는 2006년에 사에서 정년토직하였다. 퇴직전 나는 사 홍길남사장과의 담화에서 로 될것임을 밝혀 홍사장의 호응을 받았다. 그런데 운이 좋기로 내가 퇴직 하자바람으로 에 초빙되여 로 활약하게 되였다. 나는 인생을 2벌농사로,  60을 2벌농사의 시작으로 “후반전에 더 멋진 꼴을 넣기”위해 몸살을 태웠다. 그런데  나의 쉴줄 모르는 글쓰기를 상당수의 사람들이  “돈벌이”라며 부러워하며 글로 돈을 얼마를  버는가고 물었다. 기실 나는 으로 재직때나 지금이나 언제 한번 원고료를 달라거나 재촉한 적이 한번도 없다. 그저 하면서 . 오죽하면 내가 재직때 응당받아야 할 광고원고비(광고수입의 10%) 2만 3천원을 내가 달라는 말을 안(못)하고 (알아서 주겠지 )한데서  그냥 못받고 퇴직을 하였다.  뻔한 큰돈을 받지 못(안)했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된 사우(社友)들마저 이를 믿지 않거나 나를 라고 했다. 또 례하면 정년퇴직을 앞두고 흔히 다른 사람 들은 직함공자를 위해 “직함쟁취”에 신경을 쓰는데 나는  만 중시하고  엔 등한하였다. 지금 사회적으로 사람들이 나를 대기자, 명기자, 고급기자라고 부르는데 기실  나는 고급기자직함도 없고  에 따르는 직함공자도 없다. 그래서 가족이나 친지들게서 는 말을 곧 잘 듣는데  나는 이네들의 말을 탓하지 않는다.  나는 재직때도   해마다 조직에서 안배하는 년휴가를 단 한번도 향수하지 않고 글에만 열중했다.  정년퇴직후에는 며 많은 신문기사와 신문언론을 썼고 책도  6권을 출간하였다.  이에 만약  고 묻는다면 나는 이런 재밋는 이야기로 답할것이다. ㅡ 어느 소년이 다람쥐 한 마리를 잡아서 챗바퀴 속에 가두어 놓았다. 다람쥐는 산으로 돌아가기 위해 챗바퀴 속을 계속 돌아쳤다. 이를 보고 개가 물었다. 다람쥐의 말에 개는 네가  아무리 뛰여도 제자리 뛰길뿐 산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알려 주었다. 그래서 다람쥐는 더 뛰지 않았다. 이에 소년은 화가 나서 다람쥐에게 먹이를 주지 않았다. 다람쥐는 배가 고파 다시  뛰였다. 개가 또 물었다.   이렇게 대답한 다람쥐는 배를 채운 후 또 뛸 필요가 없이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러다 보니 자기가 살아 있다는 사실조차 망각되는 것 같았다. 어떤 의미도 찾을 수 없는 좁은 챗바퀴 안에서 자기가 살아 있음을 확인 시키는 건 뛰는 외 다른  어떤 방법도 없었다. 그래서 다람쥐는 다시 뛰기 시작했다. 그랬다. 다람쥐가 존재의 확인을 위하여 뛰기를 계속 했다면 나는 글을 쓴다. 지나온 한 때에 를 몰랐다면 이로부터 유의미한 삶에 대한 답은 단 한 하나, 임을  자각하게 되였다. 그래서 필자는 비록 문법도, 철자도 변변치 않다는 열등감을 멀리하고  남아 있는  시간이 인생의 에 접했다지만 여생의 삶에 실존적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저 세상에서 나를 부를 때까지 이세상에서 삶의 챗바퀴를  돌릴 것이다. 오기활    2022, 4, 26. 도문서            
414    딸아이와 우리글 공부 댓글:  조회:2046  추천:0  2022-05-31
딸애가 태여나서 유치원에 가기전까지 나는 우리말로 아이와 대화하면서 우리말을 가르쳐 주었다. 내가 제일 잘하는 것이 한어보다 우리말이고, 우리말을 알면 고향의 친척들과 자유롭게 의사소통을 할수 있고 아이의 민족정체성 확립에도 도움이 될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말을 재잘재잘 하는 아이를 바라보면서 나는 조선족 엄마로서 언제나 뿌듯한 자부심을 가지고 살았다. 보통 대도시에서 거주하는 조선족 가정에서는 어릴때부터 아이한테 당시 백수를 외우게 하고 한어로 대화하는 가정들이 많다. 어릴때부터 미리 한어를 가르쳐야 학교에 가서 언어소통에 지장이 없이 어휘력이나 문장 구사능력 또는 사자성어를 잘 익힐 수 있다는 리유에서였다. 그러나 나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우리가 우리의 언어와 문자를 잃어버리면 우리 문화와 민족성을 잃어 버리게 된다고 나는 생각했다. 특히 우리 조선족은 두가지 언어를 동시에 구사할 수 있는 축복받은 민족인데 말이다.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아이들한테 고스란히 전해줘야 하는 책임은 전적으로 부모한테 달렸다. 우리의 아이들은 부모로부터 우리말과 우리글, 그리고 우리문화를 대대손손 후세까지 물려받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아이가 유치원에 붙으면서 하루종일 한족 선생님, 한족 애들과 한어로 대화하니 우리말을 점점 잊기 시작하였고 우리말로 묻는 말에 우리말로 대답하기조차도 어려워했다. 그렇게 소학교 2학년이 되니 우리말 말문이 막혀버리면서 아예 벙어리가 되였다. 내가 그동안 얼마나 로심초사하면서 우리말을 가르쳤는데 … 마음 한구석이 허전해나면서 나는 좀처럼 우리말에 대한 집착을 버릴 수 없었다. 나는 연변의 자그마한 변방도시 도문의 평범한 조선족 가정에서 태어나 어릴때부터 우리말을 배우면서 자랐다. 그때는 장국에 배추김치를 찢어서 먹으면서도 구수한 우리말 “반찬”이 있어서 비록가난했지만 항상 행복했다. 특히 우리의 고유한 전통을 가진 구수하고 감칠맛이 나던 우리말들이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뜨끈뜨끈한 가매목에 날래 앉아서 손가락 과재랑 옥시티개랑 해자블을 까면서 나눠 먹깁소 ”  “이매 피두 채 안마른 선선아 대여섯이 구새통옆에서 담배를 피우메 휘파람 불면서 창개를 하메 놀잼두?”  “공부를 써거지게 답새긴다”  “저 남자애 입은 우티 와늘 죽임다”… 이렇게 사투리까지 섞인 우리말은 어릴때 어머니가 끓여준 슝늉처럼 구수했다. 집에 전화기도 없었던 그 시절, 나는 공중전화박스앞에 가서 청년생활, 연변녀성 등 우리말 간행물들을 사서 읽은 후 친구들한테도 빌려주기도 했었다. 그후 나는 량부모를 잃고 어린 나이에 일찍 대도시에 나와서 부평초처럼 살았다. 고향 을 떠나서 상해 포동에 자리잡고 살면서 처음 길에서 조선족을 만나서 우리말을 할때 그 반가움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나는 그처럼 우리말에 대한 갈증으로 목이 말랐던 것이다. 처음 만난 그녀의 옷자락을 붙잡고 나는 수없이 그동안 못했던 우리말로 그녀한테 내 이야기를 늘어놓군 하였다. 17년전 포동에는 조선족이 그리 많지 않을 때였다. 어려서부터 배운 우리말이 그리워서 처음으로 조선족이 운영하는 무역회사에 가서 면접을 보았다. “안녕하세요. 면접보러 왔습니다.” “ 방갑소 ~ 연변에서 왔구나. 나도 연변사람이요.” 나의 이력서를 훑어보면서 사장님이 정겨운 연변말로 반갑게 맞아주니 가슴에 뜨거운 그 무엇이 울컥했다. 면접에 무사히 통과된 나는 입사후 사무실에서 동료들과 마음껏 우리말을 하면서 세상에 부러운 것이 없이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좋은 상사와 동료들을 만난 것이 나의 복이라면서. 외지에서 한족들을 자주 만나다보니 그들은 내 서툰 한어 말투를 듣고 어디 사람인가 묻군 했다. 그때마다 나는 연변에서 온 조선족이라고 아주 당당하게 말했다. “조선족은 아리랑 노래를 부르고 이쁘고 깨끗하고 특히 조선족 여성은 온화하고 현처량모형이 많습니다 ” 내가 만난 한족들은 조선족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고 높히 평가하면서 가끔 조선족여성을 흠모하기도 했다. 그럴때마다 나는 왜 그리 자랑스러운지 모르겠다. 아이가 소학교 3학년이 되자 나는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하루라도 더 늦어지기전에 우리말과 우리글을 배워야 했다. 어릴때 배우지 않으면 커서는 더 배우기 어렵다. 우리말을 배워주는 학교는 없을가? 내가 한창 고민하고 있을 때 구세주같은 조선족 주말학교가 나타났다. 2010년 10월 16일에 설립한 상해조선족주말학교는 학생들에게 우리글을 가르치고 있었다. 선생님들은 대부분이 한국인이고 선생님들중 서울대석사학위를 받은 조선족선생님들이 여러명이나 계실 정도로 교수진은 탄탄한 실력을 갖추신 분들이었다. 교장선생님과 선생님들은 자신의 모든 시간과 정력과 청춘을 바쳐서 타지에서도 우리 민족의 언어를 지켜가고 있었고 한국어 중국어 영어를 모두 구사할수 있는 조선족 글로벌 인재를 양성하고 있었다. 이렇게 같은 상해에서 우리말을 가르치겠다는데 굳이 싫다면서 한족들처럼 한국에 류학을 보내어 몇십만이라는 비싼 학비를 팔 필요가 있을가? 박형군교장선생님은 “애들이 소학교 6학년만 졸업하면 우리글을 읽고 쓰고 하는데 전혀 문제 없습니다. 아이들은 우리 학교만 졸업하면 어디나가서도 자랑스러운 조선족으로 거듭나갈 것입니다.”라고 하셨다. 우리말은 마치 교장선생님의 몸에서 흐르는 뜨거운 피와 같았다.  딸아이는 매주 토요일마다 늦잠을 자지 못하고 주말학교를 다니면서 하루에 2시간씩 공부를 하였다. 타지에서 아이들을 우리말 공부를 시키려고 온 학부형들이 의외로 많았다. 학교는 민항구 룽바이2 촌의 교실을 빌려서 수업을 했는데 포동, 칭푸, 송강, 곤산에서 온 학생도 있었다. 운전해서 왕복 3시간반이상의 거리였음에도 불구하고 주말마다 아이를 조선족 주말학교에 보내는 부모님들의 열정에 나는 탄복을 했다. 앞으로 조선족의 미래가 보이는 같아서 마냥 설레이기도 했다. 딸애가 다니는 반급에는 학생이 20여명, 20여개 반급이 있었다. 나는 아이를 주말학교에 보내놓고 그제야 시름을 놓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일이 바쁘다는 핑게로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는 시간집중은 잘 하는지, 공부는 잘 하는지, 숙제는 하는지를 한번도 확인한적이 없었고 기계적으로 학교에 보내기만 하였다. 반년이 지난 어느날 나는 아이더러 교과서 과문을 읽어보라고 하였다. 그런데 아이는 한줄도 읽어 내려가지 못하는 것이였다. 반학기동안 배운 공부가 나미아미타불이 되였다. 나는 할수없이 아이를 아래 학년에 내려앉히고 다시 배우게 하였다. 한달 후 다시 아이가 공부를 하는 것을 확인해 보았는데 일정한 시간만 지나면 한줄도 읽어내려가지 못하는 것이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란 말인가? 알고보니 딸아이는 일주일에 2시간만 공부하다 보니까 그동안 배운 내용을 다 잊었던 것이다. 그리고 학교에서 내여준 숙제를 전혀 하지 않고 집에서 복습도 시켜주지 않으니 다음 주 주말학교에 갈 때는 지난 주에 배운 과목을 새까맣게 잊었다. 우리가 자랄 때는 하루종일 학교에서 우리말을 했고 집에서도 동네에서나 티비에서 우리말을 접할 수 있으니 학교에서 배운 말과 글들은 잊어버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타지에서 자란 아이들한테는 주변환경이 허락하지 않아 심지어 우리말을 영어를 배우기보다 더 어려워했다. 한 학기가 지나니 같이 다니던 애들이 차츰 보이지 않았고 반급의 학생 수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길에서 같은 반급 다니던 학생 학부형을 만났다.  “애가 주말학교에 안나오던데...웬일이에요?” “우리말을 배워서 어디에 써먹어요? 요즘 경기가 안좋아서 상해에 한국회사가 절반이상 철수하고 문을 닫았어요. 이젠 조선족들이 한국기업취직이 어려워졌어요. 우리애들 세대에 한국회사에서 어디 취직이나 하겠어요?” “취직을 위해서 우리말을 배우는게 아니잖아요? 조선족으로 태여났으면 우리말도 할줄 알고 우리 글도 알아야 조선족이라고 할수 있지요. 신분증에 조선족이라서 번듯하게 써있어서 조선족이라고 할수 없어요. 우리 애들이 조선말을 할줄 모르면 앞으로 우리민족이 없어져요.” 그는 내 말을 귀등으로 들었는지 웃으면서 “그 시간에 영어학원을 보내는게 더 나아요.”라고 했다. 자기 민족언어도 모르면서 다른 나라 언어를 기를 쓰고 배우는게 나로서는 조금은 리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부모마다 아이를 양육하는 가치관이 다르고 삶의 방식이 다르기에 옆에서 뭐라고 할수 없는 노릇이였다. 그 즈음 같은 반 학부형을 여러명을 만났는데 너무 멀어서, 애가 싫어해서, 영어학원때문에, 애가 재미없어 해서, 아침에 일어나기 힘들어서...등 여러가지 리유때문에 그만 두었다고 한다. 우리말을 배우는 게 어려운 게 아니라 견지를 하는 게 더 어려운 것 같았다. 우리 후대에서 언어가 사라지면 우리의 정체성은, 우리의 민족의 뿌리는, 우리의 문화는...나는 여기서 포기할 수 없었다. 아니, 이대로 멈출 수가 없었다. 아이를 또 다시 아래 학년에 내려앉힐 수 없어서 나는 모든 과외를 다 끊고 편안하게 우리말 공부에 전념할 수 있도록 적극 지원해나섰다. 주말학교에서 배운 숙제를 무조건 시키고 검사를 했고 낮에 배운 과문을 세번씩 읽게 하였고 단어를 5번씩 쓰게 하였다. 그랬더니 딸아이는 과문을 세번을 읽고나서 목이 아프다고 하고 글을 쓰라면 손가락이 끊어질 것 같다면서 트집을 잡기 시작하였다. 학교 숙제가 많아서 부담되는데 왜 주말학교 공부까지 해야 되냐면서 내게 빡빡 대들었다. 우리말, 우리말이 도대체 머냐고? 하면서 … 우리말이 기억하기 힘들다고, 하기 싫어서 포기하겠다는 아이를 보면서 나는 내가 아이를 너무 힘들게 닥달한거 같아 미안해지기도 하였다. 교장선생님 말대로 딱 6년만 견지하자, 힘들더라도 포기하지 말자, 언젠가는  엄마가 제일 잘한 것이 내가 엄마한테서 언어를 물려받은 것이라고, 그것은 돈을 주고도 살수 없는 값진 재산이라고 말할 것이라고 스스로 위로하였다. 나는 아이에게 매주 토요일 저녁은 모음과 자음, 받침을 읽고 쓰게 하였다. 슬기로운 사람은 아침을 마치기도전에 깨칠 것이요, 어리석은 이라도 열흘이면 배울수 있다는 훈민정음은 우리글을 간단히 익힐 수 있게끔 만들어진 게 아니었던가. 꽃밭 [ 꼳빧 ] , 시작해요 [ 시자캐요 ] , 특별활동 [ 특뼐활똥 ] , 옷이야 [ 오시야 ] , 잃어버리지 [ 이러버리지 ] , 있겠어 [ 읻께써 ] , 똑같은것 같아요 [ 또가튼거 가타요 ]…이처럼 읽을 때와 쓸 때 다른 글을 받아쓰기 하면 아이는 굉장히 어려워하였다. 과도한 훈련보다는 딸아이와 같은 눈높이에 맞추어 천천히 꾸준히 견지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게 더 중요한 것 같았다. [ 소곤소곤  ] [ 수군수군 ] [ 방글방글 ] [ 뾰족뾰족 ] [ 방실방실 ] [ 조곤조곤 ] [ 울긋불긋 ] [ 아장아장 ]... 아 , 얼마나 표현력이 풍부한 우리말인가. [ 선생님과 문화를 배워요 ] 는 매 과목마다 제일 마지막 부분에 있었고 비교적 길다보니 매번 내가 읽어주고 낱말 뜻풀이를 구체적으로 해주면서 아이와 다시 언어 연습을 하는 기쁨과 흥취를 느꼈다. 그처럼 나는 지칠줄 몰랐다. 2020년 코로나가 터지면서 우리는 학교를 가지 않고 집에서 온라인수업을 하였다. 학교장소의 제한을 받지 않는 온라인 반급 목표는 100개이고 수업의 퀄리티를 보장하기 위하여 반급별 학생수는10명으로 제한했다. 학교는 전국각지 조선족어린이들의 온라인 수업방식으로 우리말 우리글을 배울수 있는 최고의 환경을 마련해주면서 우리말과 우리글을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인터넷만 된다면 북경,강소성, 절강성,심천 등 전국 각지에 거주하고 있는 조선족 어린이들은 수업에 참가할 수 있었다. 온라인 수업의 시간은 1시간이였는데 의외로 집중력이 엄청 높았다. 딱 한달 했는데 한주 ( 1회 모두 4시간) 딸 아이한테서 큰 변화가 오기 시작했다. 어느날 갑자기 딸아이는 교과서 과문을 뜯어서 읽기 시작하더니 줄줄 내리읽었다. “시험 보는 날 미역국을 먹으면 안돼요”가 무슨 뜻이냐고 물으니“미역이 미끄러워 시험에서 떨어진다”고 정확하게 대답하는 것이였다. 글을 먼저 배우니까 말뜻을 이해하고 있었다. 차츰 아이는 학교에서는 친구들과 한어로, 영어선생님과 영어로, 집에 와서는 우리말로 대화하기 시작했다. 다양하고 풍부하고 이쁜 언어를 더 잘 배우는 방법은 없을가? 부모랑 친구랑 더 재미있게 공감하면서 대화하는 방법은 없을가? 아이의 우리말 실력을 조금 더 제고하기 위하여 나는 고민끝에 지난해부터 아이와 함께 세계를 강타한 한국드라마 ”오징어 게임”보기를 시작하다가 “기황후” “ 태양의 후예”“사랑의 불시착” 같은 중국어 자막이 나오는 드라마를 같이 감상하면서 드라마에 나오는 주인공 인물에 대해서 서로 대화를 나누었다. 드라마를 보기 시작하면서 아이는 눈으로, 입으로, 귀로, 머리로, 마음으로 편안하게 즐겁게 한국어를 받아들이면서 우리말을 배우고 있었다. 아이와 함께 드라마를 감상하면서 나는 아이의 순수하고 맑은 내면세계에서 잔잔한 감동을 받기도 하였다. “이정혁동지 세리동무를 좋아하재? 이정혁동지 우추부레 하구나. 와 ~ 여자한데 뽀뽀를 하면서 ”“행복 하시라요”“알갓소” 아이는 가담가담 드라마속 북한 말투를 배워서 나를 웃게 하였다. 드라마를 보면서 아이는 나도 부르지 못하는 한국드라마 주제곡을 외울 정도로 한국음악에 흠뻑 도취되였다. 아이는 한국노래가 중국노래보다 곡이 더 듣기 좋다면서 한국과 중국노래의 구별점을 내게 이야기해주기도 했다. 어느날 아이는 한국노래를 부르다가 가사를 보면서 “엄마, 나 여기 나오는 한국글자를 다 읽을수 있어요. 너무 간단해요.” 라고 방방 뛰면서 신이나했다. “엄마가 가르쳐준 덕분이에요. 엄마는 주말학교 선생님해도 되겠어요.”라고 하면서 나를 잔뜩 칭찬해주기도 한다. 아이는 아이돌중에서 BLACKPINK 를 제일 열광했다. 2016년에 데뷔한 그룹인데 외국에서도 상당한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아이는 그들의 생일이며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무릇 BLACKPINK 가 부른 노래는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밥상에 마주 앉아서 부르기도 하고 밥을 먹으면서도 흥얼거리는 그야말로 못말리는 팬이였다. 그렇게 딸아이는 12살에 접어들기 시작했다. 언젠가 한국어 숙제를 하다가 아이는 이런 질문을 했다. “엄마는 내가 왜 우리말을 배워야 된다고 생각해요? 조선족이라서, 엄마 딸이라서 무조건 배워야 된다고, 그외 또 다른 이유가 있나요? ” “있지 , 있구 말구 ~ ! 엄마는 지영이가 엄마 배속에 있을 때 일기를 썼어. 태여나서 첫돐 쇠기까지… 너의 성장이야기가 적혀있어.”  “그럼 엄마가 읽어주면 되겠네요.”  “니가 우리글을 잘 배워서 너 절로 읽어. 그건 너의 이야기이니깐. 내가 너에게 주는 선물이야. 그리고 엄마는 글도 하나 쓰고 싶어. 지영이가 엄마 첫번째 독자가 되여주렴.”  “우리글을 견지해서 잘 배우고 엄마가 쓴 일기도 읽고 엄마 글의 첫 독자가 되여줄게요.” 아이는 나와 손가락깍지를 걸고 대답을 했다. 우리글을 더 잘 배우려는 동력이 생기자 아이는 우리말 공부에 애착하고 스스로 공부했고 나는 우리말로 된 공식계정에 올라온 영상시를 아이와 같이 들으면서 아이에게 우리말로 지속적으로 훈련할 수 있는 자양분을 제공해주었다.  딸애는 내 생일날에 나한테 생일 카드 한장과 핸드폰 위챗으로 빨간 봉투를 보내주었다.  “엄마, 생일 축하해요. 저를 낳아주고 이쁘게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코로나를 잘 이겨내세요. 엄마, 사랑합니다.” 카드에 우리글로 손글씨로 축하의 메세지를 보내준 딸아이가 너무 대견스러워 꼬옥 안아줬다. 그 순간 너무 행복해서 눈물이 울컥 쏟아졌다.  “고마워 내 딸 ~ 엄마도 우리딸 사랑해 ~아주 많이 ~ ” 그동안 우리글을 가르치면서 함께 했던 기억들이 영화장면처럼 떠올랐다. 딸애의 우리글로 쓴 축하메세지가 내게는 큰 위로가 되였고 코로나 비상시기를 잘 버틸 수 있었다. 얼마전 아이는 우리글 숙제를 하면서 말했다. “엄마, 저는 앞으로 우리글을 열심히 배워서 중한번역관이 되겠어요.”  “니가 그림을 잘 그려서 미술쪽으로 발전한다면서 목표를 바꾸었어?”  “번역관이 돈을 더 버니깐요.” 아이는 신나서 말했다. “돈을 더 잘 버는 일보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 더 행복하단다. 엄마는 우리딸이 건강하고 행복했으면 좋겠어.” 나는 우리말 덕분에 아이와 관계가 좋아졌고 소통이 더 원활해졌고 항상 따뜻한 시선으로 아이를 바라보고 말투도 부드러워진 내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진작 더 어렸을때 우리말을 가르칠 걸 그랬다. 그러면 지금보다 더 많은 지식을 장악하고 언녕 주말학교를 졸업했을텐데 말이다. 나와 아이사이를 더 돈둑해지게 해준 우리말이 고맙다. 3년만 더 공부를 하면 주말학교를 졸업할 수 있다. 이제 곧 사춘기를 맞이할 아이를 인정하고 대견스레 바라보면서 온전히 아이를 잘 키울 자세가 되여있다. 엄마의 성급함을 뒤로 하고 아이앞에서 먼저 달리지 말고 아이의 뒤에 한발 물러서서 잘 커가는 아이 모습을 사랑으로 밀어주고  따뜻한 눈빛으로 바라보면서 말이다… 요즘 딸아이가 유난히 좋아 하는 시가 있다.   서시 윤동주 죽는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이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딸아이가 이 시를 몇번 읽더니 줄줄 외우면서 랑독을 어찌나 잘하는지 너무 대견하고 사랑스럽다. 시인 윤동주는 어려운 환경에서도 우리말과 우리글을 잊지 않고 끝까지 지켜 찬란한 문화유산을 세상에 남겼다. 우리 세대, 우리 후세들도 우리말과 우리글 그리고 우리 조선족 문화를 사랑하 그 소신과 명맥이 세상 어딘가에 고스란히 뿌리 내렸으면 하는 작은 소망을 가져보면서 이 글을 끝낸다. 허해란                    (본작품은 세계조선족 글짓기 대회  (26기)응모작품임)  
413    기자의 기쁨과 보람 댓글:  조회:1926  추천:0  2022-05-14
“신문에는 언론이 있어야 한다.”는 “연변25시”편집부의  사로에 따라 필자가 언론을 쓰기시작한 “경영우언”을 박금룡 주필이 “일사일언"으로 바꿔 고정란으로 독자들과 대면시킨지도 어느덧 15년이 된다. 필자가 단 기자의 사명감과 사회에 대한 책임 하나로 시작한 언론이 “독자들에게 읽혀지는 글이 될가?”는 우려를 했는데 다행히도 독자들에게 읽혀진데서 지금은 나의 짧은 필자의 책임담을 담는 “그릇”이 되여 여론한마당의 가장자리에 자리하고 있다. 그간 북경의 독자는 “일사”를 보내며 “일언”을 부탁했고 많은 독자들이 전화와 댓글로 필자에게 돌격의 "나팔”을 불어 주었다. 도문시의 리인규(78세)옹은 필자의 글을 읽고 “불평대학”을 졸업하고 “깔깔(웃음)대학”에 입학했다고, “나무뿌리 명품으로 후반전에 멋진 꼴을 넣겠다”는 글을 보내고도 만족되지 않았는지 80대 로친더러  토닭곰을 해서 직접 필자네 집까지 가도록 했다. 길림성 구태현의 리수남씨(중학교 교장)는 필자의 글에 감사하다며  안면이 없는 필자에게 “인마하의 물고기가 특별히 맛있다”며 신선한 인마하물고기를 쾌속택배로 두 번이나 부쳐왔다. 연길시의 40대 독자인 리철룡씨는 필자의 기사를 읽고 기사속의 주인공들을 직접 찾아가서 만난다며 필자의 집에까지 찾아와서 방문하던중 필자가 재일본 조선족1세들의 삶의 현장을 책(왜 갔느냐면 일본에, 왜 사느냐면 일본서)으로 출간 한다는 것을 알고 집적 나서서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에 련계를 달아주고도 필자가 일본에 간 사이에 필자몰래 모든 출판비용을 전담하였다. 이에 필자가 귀국한후 만여원의 현금을 준비하고 그에게 줄려니 기어코 받지 않았다. 이 밖에도 국가 “철도부 우수교육사업자”의 영예를 지닌 목단강철도로간부 리헌(86세)옹은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71주년 축하 행사라고 하면서 인터넷에서  필자의 글 20여편을 선택하여 “오기활의 목소리”란 책을 자작하여 길림신문사 홍길남 사장과 필자에게 부쳐왔다.  이시각 필자는   두손모아 허리굽혀 존경하는 모든 독자들에게 감사, 감사 또 감사를 표한다. 필자는  필자에 대한 독자들의 사랑과 무한한 기대에서 한없는 기쁨과 보람, 그리고 자랑을 느낀다.  보람이란 어떤 일을 한 뒤에 얻어지는 결과에 대한 만족감이다. 보람은 실패에서도 느낄수 있고 손해에서도 느낄수 있다. 느끼는 것으로 보람을 얻고 또 보람을 바라는 욕심에서 하는 일에 충성하고  전전긍긍 하게 된다. 하늘이 인간에게 주는 뜻이 누구에게나 고르듯이 누구나 보람의 기회는 다 주어져 있다. 단 개체에 따라 차려진 보람을 느끼는 차이가 다를 뿐. “많이 원하기 때문에 가난하다”는 말이 있다.  더 크고 더 많은 보람만을 원한다면 사소하고 일상적인 일에서 보람의 기쁨을 얻지 못한다.  로자는 “지족자부(知足者富)”라 했다. “지족자부”란 결코  작은 리익을 탐하고 작은 보람에 만족하며 정체부진 하라는 말이 아니다. 보람은 우연이나 운수가 아닌, 자기의 노력과 능력을 발휘했을 때만이 얻어진다.  “녀성은 꽃이라네”는 노래는 남편이 병에 시달리는 안해를 모델로 지은 것이다. 남편은 가정과 사회생활에서 녀성의 필요성을 그토록 절감했기에  남녀로소가 즐겨부르는“장수노래”를 지었다.  남편은 이 노래로 하여 남없는 보람과 기쁨을 느낄 것이다. 보람은 먼데 있거나 쥐기 어려운 것이 아닌, “내 집”, 내 곁에 있는 작지만 값진 “보약”인 것이다.  나에게 값진것이 남에게 보잘것없는 것이 될수 있고 남에게 하찮은 것이 나에게는 값진것으로 될 수 있다. 내가 존경하는 독자, 나를 사랑하는 독자들의 있음으로 하여 나의 짧은 글이 가치가 더해지고 살이 찐다.  보람을 아는 자는 마음이 부유하다.            오기활                                       2022년 4월 20일  
412    "21세기의 '리시진' 김수철전(련재 46) 댓글:  조회:1422  추천:0  2022-05-01
맺는 말   김수철교수는 연변대학농학원의 1기생이고 필자는 지난세기 70년대 김수철교수의 제자이다. 필자는 스승님의 명성이 높음을 한국에서 알았다.. 1999년에 필자는 “세계자연농업전도사” (사단법인) 한국자연농업협회 회장 조한규박사가 실시하는 제113기 자연농업기본연찬과정을7일간 이수하였다. 하루는 조박사가 필자를 데리고 서점에 가더니 “原色白頭山資源植物”이란 두터운 화책을 사서 주었다. “이 비싼 책을 받으려니(책값 5만4000원,한화)과분합니다” 는 필자의 말에 조박사는 “어디가나 책값이 비싸다는 말은 하지 마세요. 이 책은 한국과 중국의 식물전문가들이 2년 동안 백두산유용자원식물을 탐사하고 농학, 식물학, 약학, 림상학, 축산학연구의 지침서로 세상에서 처음 되는 보귀한 책입니다.”며 이 책은연변농학원 김수철교수님이 주필하였다고 하였다. 이에 필자가 김수철교수님의 제자라고 소개하니 “오선생이 훌륭한 스승을 만나 얼마나 행복한가”며 부러워 하였다. 2011년3월28일, 필자는 독자들의 질문에 답하고저 룡정시 조양천진 삼성촌에 게시는 김수철(87세)교수님을 방문하였는데 37년 만에 만난 스승님의 신체가의심할 정도로 건강하셨다. 그래서 수인사로 건강비결을 물었더니 “나는 길옆의 풀을 먹으면서 지금까지 병원을 모르고 건강하게 삽니다”고 하였다. 그후부터 필자는 가끔씩 스승님을 만났는데 매번마다 싱싱한 신문소재가 있었다.어느 하루김교수의 신문기사를 읽던 부인이 이렇게 대단한 분을 그의 생전에 책으로 쓰라고건의 했다. 부인의 건의에서 령감(灵感)을 얻은 필자는 스승님을 만나 자서전을쓰겠다는 의향을 밝혔더니 “감사는 한데 김수철이란 평민에게 무슨 남들에게 읽혀질 글거리가 있겠소이까…”며 보기좋은 웃음으로 거절하였다. 필자는 포기하지 않고 연변농업과학연구소 서규철연구원(87) 등 필자의 독자팬들의 적극적인 합작으로 스승님이 “핍박에 못 이겨 량산에 오른다“고 하였다.. 2016년 10월 5일, 필자는 언녕 준비했던 40여가지 취재 질문제강을 스승님께 드렸고 2017년 5월에는 훈춘서 식물조사를 하는 교수님을 이틀간 동행 하였다. 그간 필자가 제일 놀랍고도 감동된 것은 90대 고령인 스승님이 “오기자가 낸 ‘숙제’를  필답으로 제때에  완성하겠다”는 약속이였다. 2016년 11월 30일에 필자는 스승님의 약속대로 “숙제책”을받아 가지고 12월4일에 일본에 왔다. 스승님의“숙제책”은 페지마다에  자연과 인간에 대한 그의 무한한 사랑,조상과 민족에 대한 효와 충성, 영원히 배우고 영원히 현역으로 열중하는 스승님의 위상을 눈으로 보고 귀에서 들리는듯 하였다. 스승님은 대자연이 낳은 김수철이고 백두산이 배육한 김수철이며 대자연을 거울로 자신을 비추며 평생을 대자연에 보답한 김수철이였다. 스승님이 세상에 태여난 리유와 목적은 다름아닌 가슴이 뛰는 일을 하고 가슴이 뛰는 삶을 하기 위함이였다. 스승님은 “이미 출판한 “길림성식물명록”에 빠진 것이 많아서 내가 보충해야 한다”며 평생 수집한식물표본에 문자, 그림, 사진을 배합으로 도문병무(圖文幷茂)한 “길림성식물도감”을 출판하고저 90고령에 혼자몸으로 내몽골까지 다니며 식물사진을 찍으면서 3년간이나 고군작전을 하였다.  스승님은 식물학연구에서 국가급수상자이고 길림성로동모범이며 연변주우수당원으로  당당한 학자이고 꾸준한 일꾼이며 지식분자의 손색없는 본보기였다. 그러기에 연변대학의 모책임자는  “연변대학당안관에 ‘김수철인물관’을 세우겠다”고 밝혔다. 필자는 이렇게 예상치 못한 비범한 인물의 자서전을 쓴다는 것으로 긴장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자서전이 개인의 명리를 위한 소작이 아닌, 인생철학의 대작으로 쓰라”는 스승님의 부탁에 한동안을 망설이게 되였다. 한동안의 추고 끝에 필자는 “피할 수가 없으면 즐기자” “가장 어려운 일을 가장 값진 일”로 하고 계속하여 필을 들었다. … 필자는 자서전의 편집원칙을 이렇게 정하였다.   첫째, 김교수가 90대에60대의 건뇌(健腦)로완성한 “숙제”의 내용과 편폭을 거의 모두 올린다. 둘째, 독자들에게 교수님의 서화술(書畵術)을 공감유하고저 교수님이 90대고령에 그린 자화상, 삽화, 간력을  原圖와 親筆로 올린다. 선현(先賢)들은 한 사람의 고하평가기준을 “身, 言, 判, 書”(몸가짐,언 변능력, 판단능력,필재간)로 하였다. 이“4자”기준에 비춰 보면 스승님은 조목마다 합격된 대재이다. 그러기에 어느 상당급 박사는 김교수님의 사적을 읽고 나서 “김수철교수는 6개 나라의 언어와 문자를 활용하는 동아급(東亞급)식물학자로 당년의 리시진보다 더 위대하다”며 김수철전기의 제목을 다시 선택하라”며 필자를 압력하였다. 이번 출판에 필자가 더욱 감동을 받은것은 책에 배합할 스승님의 초상을 90대 고령에 그린 자화상을 선택한 것이다.  자화상을 그린다는 것은 자신 안에 있는 무언가를 끄집어내 진실을 드러내는 작업이다.  화가들의 ‘자화상’에는 인생의 희로애락이 담겨있다. 타인에게 쉽게 꺼내지못한 고백을자신의 얼굴에 담아 스스로를 다독이며 스스로를 응시하는 동안 또다른 자신을 ‘발견’하게되고 현재의 겉모습뿐만아니라 지나온 삶의과정을 검색하며 자신을 반성하게 된다. 스승님이 그린 자화상을 보고 딸님이 “아버지 눈섭이 없습니다”며 눈섭을 그려 넣으라는 권고에 스승님은 “눈섭을 그려 넣으면 딴 사람이 된다”고 거부하는 모습에서 스승님은 자기의 “부끄러움”을 감히 밝히고 자신을 미용할줄 모르는 순박하고 진실한 분임을 현장에서 감수하였다. 이 밖에 금상첨화라고 할가. 필자가 본 편집을 거의 마무리할 때 “길림신문”사 홍옥편집선생이 필자가 김교수를 모델로 쓴 칼럼(래일을 생의 마지막 날로 삼고)이 “길림신문”우수칼럼으로 평선되였다는 희소식을 보내주어 “백두대간의 불로송”에 색을 덫칠을 하였다.. 가슴이 뛰는 일을 하고 가슴이 뛰는 삶을 살아온 김수철교수는 우리민족의 자랑이며 중화민족의 재산이다. 민족의 바탕이 민족문화인만큼 민족문화를 지켜야 할 마지막 보루가 바로 민족문화를 기록하고 민족력사를 기록하는 것이다. 영국의 유명한 력사가 에드워드핼릿카(E.H.카)는 “력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이다” “과거는 현재의 빛에 비춰졌을 때만이 비로소 리해될수 있으며 또한 현재도 과거의 조명속에서만이 충분히 리해될수 있다”고 하였다. 이런 의미에서 볼때 근 한 세기를 살아온 김수철의 빛나는 력사를 기록하는 것은 우리민족의 문화와 민족력사를 기록하는 것이다.  필자는 이 기록이 정치나 종교와 관계없이 오늘에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물론 미래에 살아갈 누구의 삶에도 도움이 될 한부의 력사교과서와 인생교양서로 될것이라 확신한다.  끝으로 이 책을 쓰도록 제안한 부인, 필자의 집필을 적극 협력한 서규철 옹, 황영수 옹, 아들 오무송, 그리고 “교두보” 로 연변과 동경을 이어준  최명림씨에게 감사를 표하고 책의 출판을 위하여 애를 쓴  출판사편집선생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한다.                                  2018년 5월,동경에서                                  吳基活    
411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댓글:  조회:1925  추천:0  2022-04-19
우리는 심심찮게 “끝없는” 고통이니 “끝없이” 펼져진 사막이니 하는 말들을 하는데 이 말은 사실 뭔가 “끝”이 없다는게 아니라 마치 끝도 없는 것처럼 어떤 힘든 일이 쉽게 잘 풀리지 않는다는 푸념일 것이다. 모든 것에 “끝”이  있는데 기쁘고 즐겁다고 열광하거나 힘들고 고통스럽다고 통탄할 필요가? 독일의 철학자, 자신만만한 염세주의(세계, 인생을 불행과 비참한 것으로 보며 개혁이나 진보는 불가능하다고 보는 태도)자 쇼펜하우는 “우리는 무슨 일이든 결코 지나친 환희나 비탄에 사로잡혀서는 안 된다. 왜냐면 모든 사물은 변화무쌍하므로 언제 어느 때 정반대의 변화가 일어날지 모르며 행, 불행이나 길, 흉에 대한 우리들의 판단이 정확하지않아 일찍 자신이 아픔으로 체험한 일도 나중에는 오히려 가장 큰 경사일 수도 있고 후일에 큰 두통거리가 된 것도 이전에 좋다고 날뛰던 일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하여 우리는 분명히 행복할 때는 불행을, 갠 날에는 흐린 날을, 사랑에는 증오를... 를  상상해보아야 한다.  요컨대 변모하는 상황에 슬기롭게 대처해나가는 것이 지혜로운 것이다. 위기속에 기회가 있고 우연속에 필연이 있다. 그러니 어떻게  “전화위복”을 하는가는 우리, 모두. 또 나 자신이 어떻게 변화와 함께 흘러가면서  온갖 인내심을 배우냐에 달려있다. 변화는 누구에게나 다 일어나는 것이지만 당신이 그것을 어떻게 감당하는 가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는 것이다. 모든 변화도 결국 끝이 찾아오지만, 또 그 끝이 다시금 새로운 변화를 만들어 낸다는 것을 잊지말아야 한다. 영원한 것은 오직 끝없이 변화는 일이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옛적에 어느 마을에 세상의 모든 진리를 다 알고 있다는 로인이 있었다. 하여 많은 사람들이 그를 찾아와 고민을 털어놓았다. 하루는 어떤 젊은이가 그에게 자신의 힘겨운 생활을 털어놓은 후 이런 부탁을 하였다.  “저에게 힘이 될수 있는 글을 주십시오, 비탄에 빠졌을 때 희망을 주고 행복에 겨워 있을 때 교훈을 줄수 있어야 합니다. 제발 저에게 그런 진리를 가르켜 주십시오.”  젊은이의 말을 다 듣고난 그 로인이 한동안의 심사숙고 끝에 이런 글을 주었다.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행복과 불행이 찾아오는 것을 막을 수 없듯 행복과 불행이 지나가버리는 것 또한 막을 수 없다. 세상이 힘겨움과 고단함만을 선물할지라도  기필히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 오늘 지구촌을 위협하는 코로나 ...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   오기활
410    "21세기의 '리시진' 김수철 전"(련재 45) 댓글:  조회:1414  추천:1  2022-04-03
제 3부                           신문잡지로 읽는 김수철       18,    래일을 생의 마지막날로 삼고 “당신이 얼마나 더 오래살수 있을지, 언제 죽음을 맞이 할지?” 이런 물음에 확답할 사람이 아마도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마치 영원히살 것처럼 해야할 일들을 뒤로 미루는 것이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현실이다. 그런데 연변대학농학원식물학박사 김수철(93세)교수는 침대머리에 ‘죽음체험’이란 글을 큼직이 붙여놓고 ‘영원히 살 것처럼 배우고 래일 죽을 것처럼 일한다’묘 죽음을 맞이한다. 김교수는 정년퇴직후에 식물학연구의 새로운 황금시기를 맞이하며 인생 후반전에 멋진 ‘꼴’을넣고 있다. 김교수는 “이미 출판한 《길림성식물명록》에 빠진 것이 많아서 내가 보충해야지...” 하며 몇 년전부터 자기가 수십년간 수집한2600종의 식물표본으로 《길림성식물독본》을 출판할 타산이다. 90고령에 안해를 딸집에 보내고 영, 한(汉)문설명문에 직접 그린 2300폭의 그림을 배합하고도 더 좋은 책을 만들겠다며 지난해부터 혼자몸으로 성내외를 다니며 사진을 찍으며 고군작전을 하고있다.. 지난 10월 27일에 김교수가 들려준 얘기이다. “지난 겨울 어느날 새벽에 찬바람을 맞고 잠에서 깼지요. 정신은 멀쩡한데 몸이 말을 안들어서 약 15분간 움직일수 없었습니다. 이에 중풍징조라는 예감이 들어 정신을 가듬고 악을 써 끝내 침대에서 굴러 떨어진 다음 기어코 “구급상비상자”가 있는데까지 뒹굴며 가서 발바닥에 뜸을 떴지요. 한참지나니 몸이 정상으로 회복 되더라구요.” “그일이 나한테는 죽음체험이 되였지요, 그래서‘ 죽음체험’ 4자를 영, 한문으로 써서 침대머리에 붙여 놓고 래일을 생의 마지막 날로 생각하며 오늘의 일에 열심하고 있습니다.” 죽음은 삶의 가장 큰 상실이 아니다. 가장 큰 상실은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우리가 어떤 것을 죽여 버리는 것이다. 삶은 기회이고 아름다움이며 놀이이기도 하다. 삶을 붙잡고 감상하고 누리는 것은 자신에게 달린 몫이다. 누구나 죽음을 피할수 없다. 그렇다고 너무 늦을 때까지 기다려서도 안된다. 독일의 노벨상수상자 하우프트만은 “매일을 당신의 최초의 날인 동시에 최후의 날 처럼 살라”고 했다. ‘오늘은 인생의 최초의 날이다.’고 생각한다면 얼마나 많은 희망과 기대를 가질수 있고 “오늘은 인생의 최후의 날이다”고 생각한다면 삶의 희망과 계획을 이루기에 최선을 다 할것이다.. 오기활: 길림신문  2017-11-09 12:  (본문은 길ㄻ신문 2017년 우수칼럼으로 평선 되였음)    
409    나도 너도 행복하고 세상도 행복해지기 위하여 댓글:  조회:2613  추천:0  2022-03-24
동기부여 연설가이며 작가인 찰스 존스는 “두 가지에서 영향을 받지 못한다면 우리의 인생은 5년이 지나도 지금과 똑같을 것이다. 그 두가지란 우리가 만나는 사람과 읽는 책이다.” 고 했다. 필자가 오늘 만난 “감동의 편지”가 생활에서 흔히는 만나지만 행하자면 쉽게 외면 당할 수 있는 “나도 너도 행복하고 세상도 행복해지기 위한” 인생의 지혜가 담긴 “책우”라 하겠다.  그래서 필자는 나만이 아닌 당신의 행복과 세상의 행복을 위하여 모두가 함께 공유하고저 편지의 몇개 단락을 추천한다. *** *** ㅡ 약속시간에 늦는 사람과는 동업하지 말라. (시간 약속을 어기는 사람은 모든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 ㅡ 어려서부터 오빠라고 부르는 녀자아이들을 많이 만들라 (그중에 한 둘은 안 그랬다면 말도 붙이기 어려울 만큼 예쁜 아가씨로 자랄 것이다) ㅡ 식당에 가서 맛있는 식사를 하거든 주방장에게 간단한 메모로 칭찬을 전해라. (주방장은 자기 직업을 행복해 할 것이고 너는 항상 좋은 음식을 먹게 될 것이다.) ㅡ  좋은 글을 만나면 반드시 추천을 하라. (너도 행복하고 세상도 행복해진다) ㅡ 녀자아이들에게 짓굳게 하지 말라. (어린 여자나 나이든 녀자나 다 신사를 좋아한다) ㅡ 양치질을 거르면 안된다. 하지만 빡빡 닦지 말라. (평생 즐거움의 반은 먹는 것에 있다) ㅡ 노래하고 춤추는 것을 부끄러워 말라. (친구가 너를 어려워 하지않을 것이며 안해가 즐거워 한다.) ㅡ 어려운 말을 사용하는 사람과 너무 례의바른 사람을 집에 초대하지 말라. (굳이 일부러 피곤함을 만들 필요는 없다) ㅡ 가까운 친구라도 남의 말을 전하는 사람에게는 절대로 속을 보이지 말라. (그 사람이 바로 내 흉을 보고 다닌 사람이다) ㅡ 나이 들어가는 것도 청춘만큼이나 재미있다. 그러니 겁먹지 말라. (사실 청춘은 청춘 그 자체를 빼고는 다 별것이 아니다) ㅡ 양말은 반드시 펴서 세탁기에 넣어라. (소파 밑에서 찾아낸 도넛이 된 양말을 흔드는 사나운 아내를 만나지 않게 될 것이다.) ㅡ네가 지금 하는 결정이 당장 행복한 것인지 앞으로도 행복할 것인지를 생각하라 (법과 도덕을 지키는 것은 막상 해보면 그게 더 편안하다) ㅡ 돈을 너무 가까이 하지 말라 (돈에 눈이 멀어진다) ㅡ 돈을 너무 멀리 하지 말라. (너의 처자식이 다른 이들에게 천대를 받는다) ㅡ 밥을 먹고 난 후에는 빈 그릇을 설거지통에 넣어라. (엄마는 기분이 좋아지고 여자친구 엄마는 널 사위로 볼 것이며 네 안해는 행복해 할 것이다.) ㅡ 심각한 병에 걸린 것 같으면 최소한 세 명 의사의 진단을 받아라. (생명에 관한 문제에 게으르거나 돈을 절약할 생각을 말라) ㅡ 5년 이상 쓸 물건이라면 너의 경제능력 안에서 가장 좋은것을 사라. (결과적으로 그것이 절약이다.) ㅡ 베개, 침대, 이불은 가장 좋은 것을 사라. (숙면은 숙변과 더불어 건강에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ㅡ 오줌을 눌 때에 바짝 다가서라. (남자가 흘리지 말아야 될 것이 눈물만 있는 것은 아니다) ㅡ연락이 거의없던 이가 찾아와 친한 척하면 돈을 빌리기 위한 것이다. (분명하게 “노”라고 말해라. 돈도 읽고 마음도 상한다) ㅡ친구가 돈이 필요하다면 되돌려 받지 않아도 될 한도 내에서 다해줘라. (그러나 먼저 네 형제나 가족들에게도 그렇게 해줬나 생각하라) ㅡ 네 자녀를 키우면서 효도를 기대하지 말라. (나도 너를 키우면서 너 웃으며 자란 모습으로 벌써 다 받았다.) 끝 오기활
408    “일년에 이런 책을 서너권 읽으면 되오” 댓글:  조회:2588  추천:0  2022-03-08
                 “일년에 이런 책을 서너권 읽으면 되오”   103세 할머니의 인생 스토리    필자는 올 3.8절을 맞아 100세 시대의 실존인물로  103세 고령의 할머니를 독자들에게 소개하고 싶었다. 하여 기획하고 부탁했던 “李南祚 어머님百岁上寿宴”록화테프를 일전에 연변대학 김화림교수를 만나 교대받고  시청한후 3월의 첫날에 연길에 가서 리남조할머니를 방문 하였다. 리남조할머니는 지난 60년대에 도문서 나의 큰 누님(오계옥)과 길을 사이두고 가깝게 지낸 이웃이고  할머니의 둘째 딸과 나는 도문중학교 동반동창이며 또 할머니는 나의 글을 빼놓지 않는다는 독자팬이다..   그런데 어제밤에 만난 동영상에서 백세 할머니가 가슴팍을 쭉 펴고 두손을 높이 쳐들었다가 다시 허리를 굽혀 두손으로 땅을 짚는 운동을 련속하던 씩씩한 할머니가 8개월전에  “락상(落傷)”사고로 다리뼈가 절골되여 대수술을 받았다니 실로 “병이 눈섭에서 떨어진다”는 속담이 맞는 말이였다.     오전 10시경, 나를 만난 할머니는 그렇게도 기뻐하였다. 나의 손을 잡고 “오기자가 온다더니 정말 왔구만...” 을 시작으로  “오계옥이 무사하오?”,  “지금 하는 일은 잘 되오?”,  “올해에 몇살이던가,  이른 여섯이라, 한참 젊은 나이니 얼마 좋소”...며 서로간  무릎말을 련속주고 받으면서.. . 서로간의 수인사를 끝낸후 내가 “ 3.8절 기념으로 103세 리할머니에게 100세 할아버지를 소개합니다”며 연변농학원 김수철교수의 자서전을 드렸더니 책을 받자마자 책장을 펼쳐보며 “일년에 이런책을 서너권만 읽으면 되오” 하며 김교수의 최근의 건강상황을 물으시며 그렇게도 기뻐하셨다.   리남조할머니의 할아버지, 아버지, 언니는 유명한 반일독립투사이다.  연변대학 인문학원 손춘일 교수에 따르면 리남조의 할아버지 리수원은 1874년 12월 30일에 한국경상북도 려천군 무아리에서 리동락의 독자로 태여나 1913년 까지 동네 서당에서 훈장으로 지내면서 반일시(反日诗)를 썼다는 리유로 일본 경찰서의 체포령이 내리자 바로 이튿날에 가족을 데리고 조선으 떠나 당년에 조선인 반일 독립운동의 중심지로 불리는 중국 통화시 삼원포(지금의 류하현)에 정착하였다. 리수원은 1914년부터 1924년까지 사이에 사비를 팔아 길림성류하현, 흑롱강성 녕안현 밀강촌과 동경성진에 각각 학교를 꾸리고 직접 교장직을 맡았다. 그가 꾸린 3개 학교는 중국에 이주온 조선인 자녀들의 문화교육을 목적으로 반일 독립운동 후비인재 양성을 하였다. 리수원은 이 학교를 발판으로 독립군 전문양성기지인 “신흥무관학교”에 많은 우수한 인재들을 추천하였다.   한국 대종교 교주이며 독립운동가인 윤세복이 1911년에 중국에 와서 학교, 교당, 독립단, 포수단을 설립하고 반일 독립운동을 전개할 때 리수원도 그를 협조해 녕안현 동경성의 “협창학교”와 녕안현의 “대종교”를 합병해 중국 반일단체인 “대종학원”을 설립하고 반일 독립운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그때 리남조가 몇년간 대종학원에 다녔다). 그리고 리남조의 아버지 리대성(李大成)은 중국공산당 목단강지역의 지하조직 무장병워원으로 1913년에 부친과 함께 중국에 오자부터 반일 독립운동에 참가했다. 리대성은 중국공산당 지하당조직인 “녕안현 무장병위원”을 맡고 동북항일련군과 함께  항일무장투쟁을 펼치다가 1945년 8월 8일에 동경성 일본헌병대에 체포되여 갖은 고문을 당하고 8월 19일에 총살되였다. 리남조의 언니 리근숙(李根淑)은 어려서부터 혁명가문의 영향으로 혁명에 참가하여 1930년 중국공산당에 가입, 1932년부터 동북항일련군의 선전부장 겸 부녀주임사업을 맡았고  1936년에 쏘련에 파견되여 모스크바대학에서 3년간 공부하고 1939년에 귀국한후 녕안형 동경성에서 지하공작을 하다가 반역자의 밀고로 체포되여 갖은 고문을 당하다가 1941년 4월에 녕안현 사랄진에서 일분군에게 총살되였다. 이렇게 3대가 반일독립혁명렬사가정에서 자란 리남조는  일곱 남자오빠들이 반일운동으로 밖에서 돌다보니 10살부터 어머니를 도와 농사일을 하였다.   결혼후 리남조는 중년에 남편을 잃고 혼자서 2남 6녀자식들의 뒤바라지를 담당하여 슬하에 박사, 석사, 의사, 교수를 5명을 산출한 위대한 어머니며 자랑스러운 할머니이다. 할머니는 기억력이 좋고 한글(汉字)과 한어에 거의 막힘이 없는 “현대식할머니”로  딸집에 놀려 다녀도 당신이 읽을 책과 신문잡지를 꼭 챙긴다고 한다. 지금 그의 가족은 5대에 53명이 중국, 한국, 미국, 오스트랄리아 등 5개 국에서 살고 있다.  이날 할머니와의 2시간 남짓한 무릎마중에서 필자는 103세 고령할머니의 기억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저 지난번에 올렸던 화제를 재문하였는데 화답이 그렇게도 여전하고 확실하였다. 이하는 간추린 인터뷰채록이다.  언제 중국에 왔습두?    증조할아버지가 한국 경상북도 예천군 용궁면 무의리에서 백년 전에 가족을 데리고 압록강을 건너 단동, 심양, 해림에서 살다가 흑룡강성 동경성에 정착했다.  나는 1920년 9월 3일 심양서 출생했다. 문화정도는?  할아버지게서 한글(韓文)과 한자(漢字)를 배우다가 할아버지가 꾸린 6년제학교에서 4년간 공부했다. 결혼은? 혼령이 되자 아버지의 주선으로  당시 목당강 동경성에서  행정대서(行政代书)로 지내는  김석주의 큰아들인 김병훈씨와 결혼하고 2남6녀를 낳았다. 남편은 당년에 심양동문상업학교(奉天同文商业学校)를 졸업하고 목당강 경박호(镜泊湖)발전회사에서 근하였다. 건강비결은? 나는 늘 편안한 마음으로 남을 잘 받아 준다. 40부터 의학서적을 보면서 스스로 건강운동을 만들어  지금까지 견지했다. 이제도 몇년을 자신함두?  운동원마냥 건강하지는 않지만 제대로 먹으니 아직도 몇년은 문제가 없을 것 같다  잘한 일이 있다면?  잘했다고 생각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자녀들을 잘키운 것이 자랑스럽다. 반성되는 일이 있다면? . 늘 “예, 예”하면서 살았기에 마음으로 가책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 아쉬운 일이 있다면?  그렇게도 가난하게 살면서도 없다는 말을 안하고 너무나도 간고하게 산 것이 지금 생각하면 좀 후회된다. 그밖에 내가 글을 쓸만할 때 가장 존경하는 어머니를 소설로 쓰지 못한 것이 정말 아싑다.   자식들게 요구가 있다면? 아무런 요구도 없다. 너희들끼리 잘 살면 된다. ... ... 인터뷰는 할머니의 “아리랑”노래로 마무리를 하였다.  인터뷰시 할머니는 " 나는 어렸을 때 아버지와  언니 (이근숙)가 시키는 대로   어디에 가서 누구에게 글쪽지도 전달했고  또  마을의 소년들을 데리고 일본경찰서 부근에 가서 말이 몇필이 있는가를 알아 보라는 등 여러가지 심부름도 탈없이 잘했다"며 가끔씩 김좌진, 윤세복, 주보중, 김창렬(김좌진의 아들),... 리정문...의 이름을  곁들면서  손시늉까지 하었다. 이밖에도 할머니는  스스로 “백세수연례”사진첩을 찾아내 필자에게 보이면서 “아이들이 돈을 팔았지만 참 잘했다.”며 “돈은 쓸줄을 알아야 한다”며 기뻐 하였다.  이날 자리를 함께한 네째 딸(김설희)의 말참견이다. ㅡ “자식으로 후회되는 일이 너무 많습니다. 우리 집에서 건강이 제일 좋다며 늘 자랑하던 엄마가 사고를 당하니 큰죄를 졌다는 마음입니다.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엄마가 돌아갈가봐 운 것이 아니라 돌이켜 생각할수록 잘못이 많아서 울었습니다. 어머니가 “나를 걷게 해 달라”고 말씀할 때마다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습니다.  2 일 전에 엄마가 종래로 안하시던 말씀을 하는데... 엄마는 나와 사위를 곁들면서 “너희들이 가족을 이끌고 친척간의 화목을 도모했고 또 자식교양을 잘해서 정말 감사하다...”고.  나는 엄마가 돌아가기 전에 남기는 말인가고 두럽고 잡생각이 많았지만 한편으로는 엄마이 이한 말씀에 내가 네째 딸로 아무런 대가도 없이 20 여년을 엄마를 모시며 쌓였던 유감들이 몽땅  풀렸습니다...”  *** 리남조네 가족사는 중국 조선족 100년 이주사의 축소판으로 리남조 할머니는 조선족100년 사의  당당한  견증인으로 손색이 업었다. 오기활
407    "21세기의 '리시진' 김수철 전"(련재 44) 댓글:  조회:1420  추천:0  2022-03-01
              제 3부 :    신문잡지로 읽는 김수철 (17) 17, [자랑찬 연대(延大)인1] --연변농학분야의 반짝이는 별 전임 연변대학 농학학부 김수철교수에 대한 이야기 편집자의 말: 연변대학이 올해 학교창립 70돐을 맞이했다.연변지역 최고학부로서의 연변대학은 그동안 수많은 우수한 민족인재들을 양성해 조국건설과 사회번영을 위한 사업에 적극 기여했다. 오늘날 그 인재들을 키운 연변대학의 원로 교수님들은 자랑찬 연대인들의 빛나는 "별"들로서 학교와 사회의 존경과 애대를 받고 있다. 길림신문사는 연변대학 창립 70돐을 맞으면서 연변대학당위 선전부와 함께 연변대학 학과의 "별"들을 선정하여 륙속 보도한다. 1925년생인 김수철교수는 올해 95세이다. 1949년도에 연변농학원 제1기생으로 공부한후 학교에 남아 다년간 농학학부 생물교연실에서 근무해온 김수철교수는 1987년도에 정년퇴직할 때까지 연변농학원에서 식물학, 과수분류학, 수목학, 농학라틴어 등 과목들의 교수와 교수연구에 몰두하였다. 그는 평범한 일터에서 부단한 자기개발과 학습으로 걸출한 교육인재로 되였으며 괄목할만한 성과와 기여로 학교와 사회의 애대와 존경을 받았다. 산에 들어가 식물과 만날 때가 가장 행복 지난 7월 12일, 기자는 룡정에서 만년을 보내고 있는 김수철교수님댁을 찾았다. 이젠 퇴직하신 몸이고 또 95세 고령이지만 김교수님의 집은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책장과 각종 식물표본자료들로 넘쳐 있었다. “식물채집은 식물연구의 가장 기초이다. 그래서 일요일이나 방학간 등 틈만 나면 식물채집통을 둘러메고 산으로 돌아 다녔다. 그렇게 쉴새없이 채집한 식물이 2만 5000장이나 됐고 이를 계기로  길림성로력모범의 영예까지 받아안았다.”고 김수철교수는 과거를 떠올렸다. 바로 연변농학원 재직시절 곧 퇴직을 앞둔 1986년도의 일이였다.     실내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책장과 식물표본자료들. “내가 만나려는 식물마다 저들이 갖고 있는 모든 정보를 나에게 끊임없이 전달해주는 데서 나는 눈고픔과 귀고픔을 말리는 매력에 도취되여 다른 여념을 가질 겨를이 거의 없다.” 김교수의 말이다. 산에 들어가서 식물들을 만나보고 연구할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김수철교수는 말했다. 몇십년래 교수임무를 완수한 기초우에서 김수철교수는 방학이나 주말 같은 휴식시간을 리용하여 연변각지 특히 장백산일대, 심지어 동북3성과 내몽골, 안휘,산동, 운남, 해남도 등 전국의 방방곡곡에도 발자취를 남기면서 고등식물표본 1만5000여종이나 채집했다. 그중 식물표본으로 만든 것만 해도 9000여종이나 되며 각종 진균식물표본 2000여종이나 될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아직 발견하지 못했던 새로운 국화과 식물 3종을 발견하기도했다.     농학원 학생들의 현장실습을 지도하고 있는 김수철교수(왼쪽). 식물이란 것도 참 묘하게도 교통이 편리한 가기 쉬운곳에는 일반적인 식물이 많지만 교통환경이 어려운 곳일수록 희한한 식물이 많이 있다고 김수철교수는 다년간의 식물채집경험을 빌어 이야기했다. 그러한 희한한 식물채집을 위해 전국의 방방곡곡을 누비면서 하루에도 60키로메터씩 산발을 타고 산에서 풍찬로숙하면서 비로서 수많은 결실들을 맺게 된 것이다. 김수철교수님은 1953년부터 론문을 쓰기 시작했다. 연변대학 교내에서 꾸리는 《학습과 연구》라는 간행물을 통해 연변라자식물지 론문을 썼는데 그것은 연변농학원 식물학사상 첫 론문이였다. 화가도 뺨칠 그림솜씨 채집한 식물들을 그림으로 잘 표현하는 것도 식물연구에서 매우 중요하다. 교수효과를 높이기 위해 김수철교수는 60세를 바라보는 년세에 회화강습반에 참가하여 소묘와 수채화기법을 배웠다. 그림재간을 익힌 후 자체로 편집, 제작한 농학, 과수, 림업전문 식물학, 수목학 교수용 환등편 750장을 만들었고 1200장의 식물조직 절편을 만들어 교수에 응용함으로서 식물교학과 그에 따른 과학연구를 위해 튼실한 기초를 마련해주었다. 보다 좋은 회화기법을 익히기 위해 김수철교수는 북경식물연구소에서 그림그리기훈련을 받고 돌아온 연변약물검험소의 박씨성 사업일군을 스승으로 모시고 붓으로 그림을 그리는 재간을 배웠다고 자랑했다. 붓으로 그림을 그리면 철필로 그릴 때보다 더 섬세하고 세밀하게 그릴 수 있어 지금도 그 그림재간을 배운데 대해 흡족해 한다.   그림그리기가 매우 익숙한 김수철교수.     김수철교수가 그린 버섯그림. 김수철교수님이 그린 식물표본그림들은 웬만한 화가도 뺨칠 섬세하면서도 생생한 그림솜씨였다. 김수철교수님이 안경도 안거시고 천남성과의 대표적인 관엽식물인 안투리움을 생생하게 재현하는데는 채 10분도 안 걸렸다.김수철교님이 지금까지 그린 식물도본만 무려 2500장이나 된다. 정년퇴직후에만 17권(편)의 론저 출간 김수철교수는 1981년이래 자체로 편집 제작해서 학생들에게 많은 교재들을 내여 주었는데 《식물학실험지도서》 상, 하권 《길림성전간잡초명록》《식물학교재》(조선문통신학습용)《식물계통학》(일본어 연구생용) 《농학라틴문교재》(자체로 타자)《중국과수분류학간편교재》《연변농학원정원수목종지》《수목학실습지도서》《길림성수목학교재》하권 등 다수가 있다. 정식출판된 저서들로는 《장백산동북파경제식물지》《동북알칼리땅식물도감》《중국장백산채색식물도감》 《연변중초약》《장백산자원식물도감》 등이 있다. 이외에도 길림성국화과식물3개신기록종,중국국화과식물의 1개신기록종,연변야생사료식물명록 룡정현에서 나는 유용 및 유해진균의 조사초기보고 등 13편의 학술론문들이 국내외 학술간행물들에 발표되였으며 여러차 일본, 한국 등 국외의 학술세미나에 요청되여 학술보고를 진행하였다. 교수님은 정년퇴직후에만 17 권(편)이나 되는 귀중한 론저를 출간한 평생교수다. 김수철교수는 45년동안이나 연변농학원 식물학교연실에서 교학과 과학연구사업에 종사하면서 농학, 과수, 축목, 생물화학 등 농학원전업반과 의학원학생, 연구생들에게 식물학, 수목학, 과수분류학, 라틴어 등 교학을 담당하면서 국가 인재양성에 큰 기여를 하였고 한국 서울시립대학 박사연구생들의 장백산원정실습, 연변의학원 한국반생들의 장백산 현지 식물실습 등을 지도하였다.     화룡 청산에서 농학원 목축학부 학생들의 중초약실습을 지도하고 있는 장면.   교수연구에서 거둔 우수한 성과들 때문에 김수철교수는 1958년도에 연변농학원 모범교원 및 연변조선족자치주 사업모범으로 표창받았으며 1960년과 1963년에 농학원의 선진교원, 1978년도에는 연변조선족자치주 우수교원의 영예를 따냄과 동시에 길림성우수교원대표대회 대표로 당선되였다. 1979년도에는 길림성과학기술활동 적극분자로 뽑혔으며 1986년에는 길림성 로력모범, 연변조선족자치주 로력모범 , 연변주 우수공산당원 등 허다한 영예의 꽃다발을 받아 안았다. 학자의 사명감으로 여생을 불태우는 평생교수 김교수는 퇴직 후에도 연변생물학회 리사장, 길림성 식물학회 리사, 길림성 초원학회 고문, 길림성 자연자원(동부 자원식물, 목초, 중초약재등)조사사업 기술고문, 중화인민공화국 동식물검역국(도문) 기술고문등 사회적인 직무를 맡고 로익장을 과시했다. 김수철교수가 정년퇴직 후에도 쉬지 않고 계속되는 식물연구에 몰두하고 있는데는 원인이 있었다. 이미 출판된 《길림성식물명록》에 빠진것이 너무 많고 심양 동북식물연구소의 보고서에도 틀린 것이 많기에 내가 보충해야 한다는 것이 김수철교수님의 생각이였다.   안도현 만보 서북차에서 학생들의 중초약학습 지도장면. “길림성식물지는 반드시 출간해야 하는데 지금 그림을 직접 그리는 식물학자가 나밖에 없으니 내가 해야 한다.” 결국 그냥 지나칠수없는 학자의 량심과 사명감에서 시작한 일이였다. 김교수는  자기가 수십년간 수집한  2500종의 식물표본으로 《길림성식물지》 출판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식물표본그림에 질 좋은 채색사진을 배합하고저 만여원을 투자해 촬영기재를 새로 샀다. 고령의 몸으로 산발을 타고 돌아 다니며 수많은 사진자료들을 찍어왔다. 길림성식물지는 연변대학의 전폭적인 지지하에 도합 6권으로 출판될 예정인데 올해안으로 제1권이 출간된다. 이와 함께 김수철교수는 《길림성식물채색도감》의 출간도 계획중에 있다.     손녀 김영화(오른쪽)가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농학원교수로 재직중이다. 우연의 일치일가? 김수철교수의 손녀인 김영화도 현재 연변농학원에서 원예학과 교수로 근무하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할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아온 김영화교수는 길림농업대학 생물공정학과를 졸업하고 할아버지의 제의로 한국중앙대학교에 가서 원예학 석박사를 전공한후 연변농학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할어버지의 뒤를 이어가고 있다.곧 출간되는 《길림성식물지》 역시 손녀와 할아버지의 공동주필로 만들어진다. “우리 인간이 살아가면서 식물이 없다면 단 하루도 살아가기 어렵습니다. 인간생존에 있어서 그만큼 중요한 생물자원이라는 말이지요. 우리는 식물에 대한 끊임없는 분류와 깊은 연구를 통해 그것들의 재배, 보호, 리용을 통한 유익한 재부를 창조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김수철교수의 바통을 이어받은 손녀 김영화교수의 식물학에 대한 추구이다. 90평생을 한우물만 파온 사람 1949년도에 연변농학원 제1기생으로 공부하고  연변농학원에 남아 오늘 이때까지 줄곧 농학계에 대한 교수와 연구를 진행해왔으니 김수철교수는 90평생을 곁눈 한번 팔지 않고 “한우물”을 파온 사람이라고 말할수 있다. 김수철교수는 “100년도 못사는 인생”인데 공부하고 사업하는 시간을 자기의 생명을 가장 필요한 곳에 쓰는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쓸데없는 일에 정력을 빼앗기지 말고 무슨 일이든 한가지 일에만 전념하면 끝을 볼 수 있다고 말한다. 한국학자들이 김수철교수를 보고 “한 우물은 판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고 했다.     1955년도에 민족화보사 기자가 촬영한 김수철교수의 식물연구모습.   김수철교수는 누구나 한가지만 하라고 하면 쉽게 싫증나서 오래 견지하지 못하는데 사회에서 가장 요구하고 수요하는 것을 전문적으로 공격하고 돌파하면 이것이 바로 성공비결이 될 것이라고 조언했다. 물질위주의 요즘 세태에서 사람들이 재물에 대해 정신을 많이 팔고 있는데 재물은 작은 것이지만 희망을 잃으면 전체를 잃는것이라고 부언하기도 했다. 연변대학은 영원한 나의 모교 김수철교수에 따르면 1949년 연변대학은 창립초창기에 현재 연길시 하남의 인쇄공장부근의 위만주국시기 공업학교자리에 있었다. 건물만 있고 실험실도 없었다. 김수철교수가 공부했던 농학학부도 거기에 함께 있었다. 의학원은 따로 있었다. 후에 연변대학 학생숙사자리에 농학학부가 이사갔다. 일본군 사령부자리가 바로 학교였다. 그때 림민호 부교장이 참 수고가 많았다고 김수철교수는 추억했다.     연변농학원에서 교편을 잡고 있을 때의 모습.   중국공산당의 배려하에 민족대학인 연변대학이 연길에 섰다는 것은 전 세계적으로도 그 류례를 찾아볼 수 없다. 이는 우리 당의 민족교육에 대한 따뜻한 배려와 민족정책의 우수성을 보여준다. 연변대학은 과거의 없던데로부터 하나하나 만들어졌고 건교 70돐을 맞는 지금은 학술적으로도 많이 성장한 우수한 대학으로 떳떳이 성장했다. 식물학면에서도 길림성적으로도 돌출한 인재들이 많이 나왔고 중대한 프로젝트와 식물지작성에서도 연변대학이 돌파를 가져왔다. 특히 연변대학에서 김수철교수의 식물지출간에 적극적으로 나서서 조건을 창조해주고 지지해주니 90고령의 고령에도 용기를 내서 일하고 학교의 관심이 있어 항상 힘을 얻는다고 김수철교수는 감개무량해했다. 김수철교수는 자신의 몸은 부모가 낳아 주셨지만 학문은 연변대학으로부터 얻은 것이기에 그 은혜를 잊어서는 안되며 연변대학은 영원한 모교라고 말했다. 대학으로부터 많은 지식을 전수받았기에 모교를 위해 적극 공헌하고 싶은 생각뿐이다. 모두들 모교의 은혜를 잊지 않고 적극적으로 기여한다면 더욱 많은 우리 민족 우수한 학자들이 용솟음쳐 나올것이라고 김수철교수는 말했다.이것이 바로 70성상 연변대학과 함께 빛뿌려온 연변농학계의 별 김수철교수의 페부지언이기도 했다. /                         안상근 김성걸기자                                                                             길림신문 2019년 7월 24일  
406    한국, 한국언론인들에게 답하노라 댓글:  조회:22824  추천:0  2022-02-10
“한복 론난”=“돌을 들어 제 발등을 까다” 필자는 북경동기올림픽개막식을 화제로 한국에서 불어치는 엉뚱한 "한복 론난"을 무감각한듯 방관할 수 없어 끝내 필을 들었다. 필자는 친히 겪은 력사와 지나온 체험을 시간적 순서로 글을 엮었다. 1 필자는 중국 조선족의 3세로 1947년 음력 5월 9일에 왕청현 석현진 수남촌 달라자툰(현 도문시 석현진)에서 태여났다. 달라자는 1911년에 건툰(建屯)한 자연마을이다. 나의 할아버지 오창범은 조선 함경북도 온성군 온성읍 미포면 장덕리 장덕동에서 태여나서 살다가 일제의 가혹한 통치와 련속되는 재황을 못이겨 살길을 찾아 1920년에 큰아들 오광준(1911년생), 둘째아들(1917년생), 세째아들 오형준을 데리고 두만강을 건너 도문 곡수촌에 정착하여 몇년간 살다가 젊은 나이에 부모가 사망하자 1929년에 오광준(필자의 백부)이 오씨네가 모여사는 강건너 달라자로 이사했다.           오광준(백부)   필자는 어린나이에 말을 알아 듣기 시작하여 동네사람들이 백부를 “조선옷”이라 부른다는 것을 알았다.  확실히 그랬다. 필자는 조실부모하고 어려서부터 큰집에 얹혀 살았는데 백부님은 집에서나 동네돌이 할 때 늘 입는 옷이 조선 바지저고리에 조끼를 받쳐 입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달라자의 최년상이며 “달라자 총통”으로 불린 최주해(최중길)도 그냥 “조선옷차림”이였다.  최주해(1891.1.29ㅡ1978.9.15)의 원적은 조선 함경북도 온성군 남양면, 28살인 1920년에 큰 아들(최철산 (1913ㅡ 1969)이 7살 때 두 아들을 데리고 두만강을 건너 왕청현 석현진 하룡성마을에서 살다가 1943년에 달라자로 이사왔다.  최주해의 조선옷은 큰 며느리(최보옥)가 손수 지은 것이다. 그에 따라 할아버지의 옷차림을 보면서 자란 최주해의 손자 최정욱(1938년생)은 대학을 졸업하고  “네가지 낡은 것”(낡은 사상, 낡은 문화, 낡은 전통, 낡은 풍속)을 타파”하는 “문화혁명”의 대반란  때 결혼(1966.1.21.)하였는데 그가 결혼식에 “조선옷차림”을 하겠다고 하기에 어머니가 손바늘질로 아들,며느리의 결혼옷을 마련했다. 그래서 동네서는 “대통령”네를 “조선 고태네”라고 불렀다. 달라자 '대통령' 최주해.     이렇게 달라자의 원주민들의 거의 모두 조선 함경북도의 출신으로 동네의 례복은 “조선옷”이 였다. 그러니까 필자는 어려서부터 들은 말이 조선사람, 조선바지저고리, 조선치마저고리, 조선색동저고리, 조선중의(조선 중들이 입는 승복), “조선옷 매대”...였다. 연변에서 “한복”이란 말이 돌기는 조선족들이 한국나들이 하면서부터다. 특히 연길 성보백화에 “서울 한복”이란 옷매대가 있은 후부터 “조선옷매대”가 “한복매대”로 바뀌기 시작했다. 그런데 한국사람들은 한국이란 나라가 서기 전인 1920년대에 중국에 온 조선인들을 “한국인”이라고 부르고 그들이 입은 조선옷을  “한복”이라고 하니 실로 몰라도 한심하게 모른다. 2 필자는 1986년 4월에 “중국 고국방문단”의 성원으로 조선 평양을 방문하였다. 필자는 지금까지 우리가 귀국하는 환송대회에서 조선 해외동포담당국 책임자가 우리들에게 부탁했던 말이  기억에 생생하다. “... 중국은 다민족 국가입니다. 중국서 조선족들이 제일 선진민족으로 되기 위해 노력하세요.  조선족이 중국서 제일 선진민족이면 중조 두나라의 친선이 앞으로 갈수록 점점 더 두터워질 것입니다.” “한족들의 민족정신을 따라 배우세요. 세계에 널려 사는 조선인들을 살펴보세요. 미국서는 미국사람을 본받고 일본서는 일본사람을 본받고 쏘련서는 쏘련사람을 본받습니다. 그러나 한족들을 보십시요. 한족들은 어느 나라에서 살든지 자기민족의 옷(녀성들의 치포, 남성들의 헝컾단추를 단 당복)을 입습니다.” 그는 또 중국이 타국과 외교관계를 맺는 사례, 중국 해관의 수출입상품문서를 곁들면서 우리에게 “중국의 민족정신을 따라 배우라”고 부탁하였는데 그때 부탁이 필자의 가슴속에  뿌리를 깊이 내렸다. 죄정욱 결혼기념  3  중국에서 “남조선”을 “한국”이라고 부르기는 1990년 9월에 열린 제11차 북경아세아운동회 때 부터다. 그때 필자는 연변일보 특파기자로 파견되여 모든 신문기사에 한국을 “남조선”이라고 밝혔다. 내가 쓴 “한결 돋보이는 조선족녀성”이란 연변일보(1990.9.26.)기사는 9월 2일 11차 북경아세아운동회 개막식날 천안문광장에서 중국에 처음 온 남조선관광객들이 조선옷차림을 한 연변녀성관광팀을 보고 너무나 좋아서 손벽치며 소리치고 찾아가서 함께 아리랑을 부르며 기념사진을 남긴 내용이다.(사진배합) 2일 저녁 개막식현장에서 발생한 일이다. 그때까지 비록 중한이 수교를 하기 전이였지만 남조선에서는 매우많은 관광퇀을 북경에 파견했다. 하여 개막식날 관중석에 남조선사람들이 차지한 구역이 꽤나 많았다. 남조선 사람들은 사전에 미루 준비했는지 아무튼 많은 한국사람들이 저마다 크고 작은  국기를 휘두르며 고성으로 “대한민국...”을 웨치기에 안내 방송에서 “남조선관괙들이 개막식질서를 조용히 지키라”고 몇번 련속 방송했다. 그러자 남조선사람들이 사처에서 높은 소리로 “왜 한국을 남조선이라고 부르는가?”며  항의했다. 이에 안내방송에서 “13억 중국사람들은 한국이라는 나라를 잘 모르기에 남조선이라고 불러야 어느 나라인가를 압니다. 한국이라고 하면 13억 중국국민들이 어느 나라인지 모릅니다...”고 방송하자 떠들어 대던 한국사람들이 조용하기 시작했다. 그때 관중석에서 처음보는 남조선사람들을 취재하던 필자는 그네들을 보기가 정말 어색하였다. 중국서 남조선을 한국이라고 공개적으로 말한데가 겨우 30년이 푼한데 100여년 전에 중국에 온 조선족을 한국인이라고, 조선족 후대들이 입은 “조선옷”을 “한복”이라고 우겨대는 것이 실로 어이가 없다. 오기활 신문기사 3. 다음은 온가보 총리의 한국방문때 일이다. 온가보 총리가 한국을 두번 방문할 때( 2007년.2010년)는 한국에서 중국과 “동북공정”이니 고구려 때 “령토문제”니 하며 떠들 때이다. 필자가 어느 신문에서 본 기사이다.  중한간의 “령토문제”(분쟁)에 관한 어느 신문기자의 질문에 온총리가 “중국과 한국 사이에는 종래로 령토문제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답하자 그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말문이 막혔다고 한다. 한국이란 나라가 건국된지 근70년, 중한 량국이 수교한지가 근 30년밖에 안되는데 말이다. 한국인들에게 묻고 싶다. 가출을 했거나 해외 결혼을 한 조선(한국) 남녀들이 입은 “옷”을 당신들의 말대로 한다면 그들이 부모들의 옷을 “훔쳤갔다”고 해도 된단 말인가?      4 “한복 론난”은“돌을 들어 제 발등을 까는 격이다” 이번 동계올림픽에 조선족녀성을 돋보인 것은 그야말로 조선족의 자랑이고 지구촌의 모든 조선민족이 기뻐해야 할 일이다. 그런데 한국서 “한국 론난“을 이르켜 해내외의 모든 조선족들이 분노로 성토한다. 일례로 이번 “한복 론난”이 터진 후 지난 6일 아세아컵 중한녀자축구경기에서 중국이 역전으로 승리하자 거의 모든 조선족들이 모두가 속이 씨원하다며 대단히 기뻐했다. 만약 “한복 론난”이 없었더라면 어쨌을가? 포용심과 아량이 없이  나무만 보고 숲을 못보는 그들보니, 어찌 답답하지 않겠는가. 이 글을 대한민국 림시정부의 초대 국무총리와 내무총장을 지낸 안창호(1878.11. 9, - 1938. 3. 10.)의 “우리 민족의 정의를 배양하는 데 관한 글”로 마무리 한다 . ㅡ과거나 현재나 우리 동포들은 어디 모인다 하면 으레 싸운다. 남의 결점을 지적하더라도 결코 듣기 싫은 말은 사랑으로써 해야 할 것이다. ㅡ 남의 일에 개의치 말라. 우리는 걸핏하면 남의 일에 간섭하기 좋아하는데 이제는 자기 허물만을 스스로 고치기에 전념하자. ㅡ 개성을 존중하자. 남의 성격이 나와 틀리다고 해서 나무랄 것이 아니다. ㅡ 자유를 침범하지 말자. 남을 내 맘대로 리용하려다가 듣지 않는다고 욕하면 안된다. 오기활 2022년 2월 10일
405    행과 불행의 사이 댓글:  조회:2567  추천:0  2022-02-07
지족(知足)은 만족할 줄 안다는 것이며 부지족(不知足)은 만족할 줄 모른다는 것이다. 동방의 철학가 로자의 말이다 “타인을 인식하는 사람은 지혜롭고 스스로를 인식하는 사람은 공명하고 총명하며 타인을 이기는 사람은 힘이 있고 스스로를 이기는 사람은 강하고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은 부유하다” “만족할 줄 모르는 것보다 더 큰 화는 없고 탐욕보다 더 큰 죄는 없다. 자기 처지에서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은 언제나 여유가 있다” 로자의  생각대로라면 만족할 줄 알면 가난할지라도 즐겁고 행복할 수 있으며 만족할줄 모르면 부유하다 할지라도 행복할 수 없다. 물론 사람에게 욕망이 있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남보다 더 높이 되고, 더 존경받고, 더 많이 갖고 싶고, 더 오래 살고싶어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인지상정이 애부터 산수적으로 비슷하다 할지라도 그것을 이루고 만족하는 정도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왜냐면 대소, 다소, 장단, 상하, 고저, 빈부, 귀천...등의 개념이나 기준은 사람마다 상대적이기 때문이다. 다섯을 가지고 만족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백을 가지고도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으니 말이다. 하여 다섯을 가진 사람이 백을 가진 사람보다 더 즐겁고 행복할 수 있다. 이로보아 만족과 행복, 불만과 행복의 척도는 지족과 부지족에 있는 것이다. 한없이 뻗어가는 욕망의 유혹을 극복하고 아무 것에 집착함이 없는 텅 빈 가슴으로 삶을 살아가면 마음은 언제나 세탈하고 상쾌하며 어느 때 어느 곳에서든지 득의와 여유를 얻게 된다. 공부(중국 진나라 학자)는 “몸소 절제를 취하는 사람은 만족할 줄 안다. 진실로 만족할 줄 알면 어느 무엇도 그의 의지를 구속하지 못한다”고 하였다. 우리가 소학교 때에 배운 만족할 줄 모르는 사람을 대상한 풍자우화이다. 개 한 마리가 고기 덩어리를 물고 강물 위의 다리를 건너는데 그 개는 갑자기 물속에 고기덩어리를 물고 있는  개를 발견하였다. 그 개는 그것이 물에 비친 자신의 그림자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그 고기덩어리를 빼앗고 싶은 충동에서 물속의 개를 향하여 컹컹 짓어댔디. 그 순간 자기가 물고 있던 고기덩이가 물속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이 이야기는 지나친 탐욕은 이미 얻은 욕망마저 상실시킨다는 교훈을 깨우쳐 준다. 자신의 처지와 능력의 한계를 자각함이 없는 끝없는 욕망의 확장은 결국 자신은 물론 주위의 모든 사람들까지고 불행과 고통으로 유인한다는 사실을 력사와 현실속에서 수없이 볼 수 있다. 가진자의 경제적 소유욕, 아는자의 명예욕, 힘이쎈자의 권세욕 등은 얼마나 많은 고통과 파멸을 불러일으켰는가? 인간사화는 즐거움과 행복은 개개인의 차이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그러나 그것을 성취하고 향유할 수 있는 지름길은 자신에 대한 자각에 있다. 스스로에 대한 자각이 없이는 행복이 있을 수 없다. 장자는 즐거움과 행복의 참된 내용을 정신적 자유 해방의 획득으로 보고 이를 유(遊)자 하나로 집약하였다. 유는 곧 무엇에도 집착하거나 의지함이 없이 스스로가 자기 만족과 향복을 획득하는 행위이다. 아무것에도 구애를 받음이 없는 상쾌하고 세탈된 마음일 때만이 여유와 멋이 있어 매화를 보고 새소리를 기대할 수 있게 된다. 한 마디로 “지족과 부지족의 사이가 곧 행과 불행의 사이다”고 하겠다.     오기활
404    21세기의 "리시진" 김수철 전(련재 43) 댓글:  조회:1408  추천:0  2022-02-01
                            신문잡지로 읽는 김수철               16, “한 우물을 파라…그러면 길이 열린다”   김수철 퇴직교수. 나이는 수자에 불과하다. 이는 95세의 고령에도 길림성 식물지 편찬을 위해 짬짬이 산과 들을 넘나들며 조사실증을 하고 이를 바탕으로 식물지를 편찬하여 길림성에 식물지가 부족한 공백을 메워가고 있는 연변대학 농학원 퇴직교수 김수철옹의 삶을 일컫는 듯싶다. ‘21세기의 리시진’이라 불리는 평생 식물학 교수, 식물분류 연구와 희로애락을 함께 해온 그를 지난 12일 룡정시 안민가두 그의 거처에서 어렵사리 만났다. 취재팀이 온다고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김수철옹은 95세 고령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두뇌가 명석하고 기력이 좋았으며 이야기도 곧잘 나누었다. 다리가 불편하고 귀가 약간 들리지 않는 것이 흠이지만 큰 질병이 없는 그는 며칠 전에도 식물지 편찬을 위해 룡정시 용신향 영경촌 산림 속에 들어가 이틀 밤을 지새우고 돌아왔단다. “아흔이 넘은 나이에 혼자서 산속에 들어가는 모습을 보면 걱정이 앞설 따름입니다.” 김수철옹과 함께 살고 있는 딸의 말에 의하면 “부친은 지금 자나깨나 머리속에 식물지 편찬에 관한 일 뿐”이라며 마음 먹은 곳이라면 백사불구하고 달려가는 그를 막을 방법이 없다고 한다. 평생 교육자로서의 그의 일생을 말해주듯이 거실 책장에는 식물학서적과 표본집, 사전 그리고 그가 집필한 저서들이 빼곡이 라렬되여있었다. 농학원 제1기생으로서 1950년부터 농학원 농학학부 생물교연실에서 식물학 교수를 하면서 교수에 필요한 야생식물표본 9000여점을 수집하고  《식물학실습지도서》, 《식물학교재》, 《식물계통학》, 《농학라틴어》 등 교재들을 직접 편집인쇄하고 《연변중초약》, 《장백산야생경제식물 채색도편》 등 10여권의 책을 편집출판하고 《연변야생식물지》 초고를 써서 《연변야생경제식물지》에 중요한 기초자료를 제공한 그는 명실상부 식물학분야의 ‘달인’이였다. 평생 식물분류 연구를 해오면서 그는 손수 2400여가지의 야생식물을 그리고 2만여장의 식물사진을 찍었는가 하면 표본 하나 없던 식물실험실에 2만 5000여종의 식물표본을 수장하여 길림성의 식물교수와 식물분류 연구에 토대를 닦아놓았다. 그러기 위해 장백산만 해도 수십번 오르내리였는가 하면 연변 각지의 산은 물론 내몽골, 흑룡강, 료녕, 해남도 등 길림성 이외의 산림과 초지도 50여곳 다니며 고찰연구를 하고 표본을 채집했다. 그 와중에 밤길에 도마도밭을 지나다가 도적으로 몰려 억울함을 당할 때도 있었고 길을 잃고 헤매다가 승냥이를 만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한가지에 올인한 집념의 사나이를 무너뜨리지 못했다. 결국 그는  식물 채집과 연구를 통해 중국식물지에 기록이 없는 국화과의 새로운 식물종류를 발견하였는가 하면 문헌기록에는 없지만 길림성에 분포한 새 분포기록종을 발견하고 론문발표를 가지기도 했다. “할아버지는 어릴 때부터 저희에게 식물의 가치와 중요성에 대해 일깨워주었습니다.” 연변대학 농학원 원예학과에서 부교수로 일하면서 식물분류와 생태까지 연구하고 있는 손녀 김영화씨는 “어릴 때에는 힘들게 산을 오르내리는 할아버지가 리해되지 않았는데 할아버지의 영향으로 같은 길에 들어선 지금은 그의 마음을 너무나 잘 알게 되였다.”면서 “현재 할아버지와 함께 편찬하고 있는 길림성식물지는 야생식물을 처음으로 전문적으로 기록하는 공구서가 될 것”이라고 피력했다. 독학으로 외국어를 배워 영어, 일어, 라틴어, 로씨야어, 중국어, 조선어 6가지 언어를 장악하고 있다는 김수철옹은 그림실력도 상당했다. 그가 그린 버섯, 식물 형태의 그림들은 하나하나가 마치 보는 듯이 생동했다. 이날 요청에 의해 안경도 쓰지 않고 철필로 식물형태를 순식간에 소묘해내는 그의 모습에서 찬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한 우물을 파세요, 그러면 길이 열릴 것입니다. ” 물욕을 뒤로 하고 오로지 하고 싶은 일, 사회에서 필요하는 일을 꾸준히 해왔기 때문에 오늘의 실력을 쌓았고 ‘길림성과학기술활동 열성인’, ‘길림성 로력모범’, ‘초원자원조사 우수상’ 등 여러가지 영예도 획득하였다는 김수철옹은 “연변대학에서 물심량면으로 많이 관심하고 지원해주기에 현재 길림성식물지 1권이 바야흐로 출범을 앞두고 있다.”면서 “앞으로  길림성 식물지 6권까지의 출범을 위해 있는 힘껏 박차를 가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국제학술론문발표회에서 영어, 일어, 한어, 조선어로 학술론문을 발표하고 장백산자원식물연구로 세계식물학술계의 중시도 받은 김수철옹, 95세의 고령에도 쉴 줄 모르고 달리는 그의 앞으로의 행보가 더욱 기대된다.                                   /글·사진 차순희 기자                                   연변일보 2019년 7월 17일    
403    “자연을 죽이면 자연히 죽는다” 댓글:  조회:1876  추천:0  2022-01-28
 진리의 소재지인 자연은 인간의 경험, 통찰에 의하여 인식되는 것으로 자연은 자기가 지니고 있는  무한한 진리의 보고(宝库)의 문을 인간들이 열어줄 것을 여러모로 기다린다. 일반적으로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첫째는 인간을 자연의 일부로  자연과 인간의 종속관계로, 둘째는 자연을 인간의 지배와 리용의 대상으로 하는 리용관계, 세째는 자연과 인간이 상호 조화를 이루는 조화관계로 분류 한다. 본질적인 대상으로서의 자연이 인간에 의하여 인식되고 규정된다고 할 때 자연을 생기가 충만된 살아 있는 것으로 보는가, 아니면 단지공간만을 차지하고 있는 죽은 것으로  보는가, 또 아니면 량자간을 고립된 개체로 보는가에 따라 상호 관계가 다르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며 자연 그 자체이다. 자연을 라틴어로 “태여남”,  “만들어짐”이라고 하는데 서양에서는 자연을 “생명이 나타나는 것”이라고 풀이 한다. 이는 인간은 자연을 가장 많이 닮은 생명체로서 인간 자체가 바로 자연이라는 것이다 이러하니 인간은 자연과 더불어 자연의 질서에 따라 함께 살아가야 함이 참으로 자연스러운 리치이다.  괴테는 일찍 “자연과 가까울수록 병은 멀어지고 자연과 멀어 질수록 병은 가까워진다”고 하였고  “의학의 아버지”로 불린 희랍의 히포카라테스는 “자연이 아니면 인간의 몸에 지닌 질병을 결코 이겨낼 수 없다”고 했다. 이는 인간의 병치료는 어쨌든 자연의 섭리를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지켜보면 동사를 했거나 산불에 타죽은(아니면 사람이나 맹수에게 죽은)산짐승들의 시체는 볼 수 있지만 병으로 죽은 산짐승들의 시체가 흔지 않은 것을 보아 인간도 산짐승들처럼 자연치유력을 지니고 태여 났다는 것이다. 의성(医聖)들은 자연과 인체는 대단히 류사한 구조로 째여진 것이라면서 바위를 사람의 뼈, 흙을 살, 물을 피, 강줄기를 혈맥, 목초의 뿌리를 모세혈관으로 비유했다. “의학의 아버지” 히포크라데스는 인간의 자연적 체질을 다양하게 분류하고 그의 체질에 따라 그의 품성적 기질이나 직업을 자세히 나누고 부동한 체질과 부동한 병에 따라 부동한 치유법을 제시하였다고 한다. 룡정시의 오정묵 중의는 암병에 걸린후 미국에서 조직한 국제 항암포럼에 참가하여 미국의 학자가 발표한 “산이 못고치면 암을 못 고친다”는 론문에서 참 계시를 받고 돌아온후 병원의 약물치료를 멀리하고 룡정의 명산인 천불지산에 입산하여 자연치유법으로 암병을 치료했고 연길시의 최강호씨도 도문시 장안진의 산골에 자리한 강녕마을에 입주하여 암병을 근치했다며 자랑을 했다. 자연의학에 따르면 몸에 열이 나는 증상은 심신의 균형과 조화를 회복하기 위한 자연치유력의 발작 현상으로서 해열이 아닌 열을 올리는 약초나 음식을 먹이는 “이열치열”료법을 써야 한단다. 중국의 명의 화타가 어느 고관대작이 가슴에 쌓인 분노로 생긴 울화병을 화를 더 내게하는 “화법”으로 치료했다는 기록이 있다. 중의는 “통(痛)” 즉 “불통(不通)이다”고 한다.  말하자면 신체의 어느 부위에 痛이 생기는 것은 그 부위의 신진대사가 不通하는 것으로서 그를 通하게 하면 痛이 완쾌된다는 것이다. 이로보아 림상에서 초기에 나타나는 병상은 신체의 모부위에 이상이 생김을 알려주는 신호등이다. 그러므로 초기부터 병상을 없애려고 함은 발병을 알려주는 신호등을 제거하는 것으로서 자연을 거스르는 잘못된 것이다.  자연은 인간의 교사로 자연의 모든 것이 책이고 스승이다. 자연의 가장 훌륭한 가르침은 정직이다. 례하면 자연과 인간과의 관계가 이뤄진후 수십만년 동안 자연은 아무리 덥고 아무리 춥다해도 어김없이 제철꽃을 피우고 인간에게 먹어서 좋다고 약속한 식물이나 물에 단 한 번도 먹어서는 안되는 해로운 것을 탄 적이 절대 없다.   우리가 말하는 “자연스럽다”는 “꾸밈, 거짓, 억지가 없다는 것”을 말한다. 맑스는 “인간의 자연화와 자연의 인간화”를 강조하였다. 자연은 인간에 의해 변화하고 인간은 또 자연을 통해 자신의 자연성을 조화하는 것이다.  인간이 존재하기 전에 자연이 존재하고 인간이 죽는다고 하여 자연이 죽지 않지만 자연히 죽으면 인간이 자연이 죽는다. 우리가 사람이 죽으면 “돌아갔다”고 하는데 “돌아갔다”란 사람이 죽어서 자연으로 돌아갔다는 뜻이다. 필자는 전 인류의 생명을 위협하고 전 지구촌을 마비시킨 코로나를 현대문명의 “발전”으로 인간이 자연을 죽인데서 자연이 인간에 대한 보복이라고 말한다.  인간의 과도한 개발과 기후의 변화로 때도 없고 지역도 가리지 않는 산불, 홍수, 가뭄, 메뚜기떼, 회오리바람, 모래폭풍 ...이 바로  인간에게 보내는 자연의 보복이고 경고이다.  “어리석은 자는 자연을 섬기고 옅은 자는 자연을 짓부수며 지혜로운 자는 자연에서 배운다.”고 한다.  돌이켜 생각하면 지난세기 70년대에 우리가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 삼고 “与天斗, 与地斗, 人顶胜天”(하늘 땅과 싸워이겨 하늘을 전승하자)을 웨치며 “맹탕지휘”하던 “간부농사”가 얼마나 유치했던가.  인간은 자연과 생명공동체이다. 필자는 “인간을 자연스럽게, 자연을 인간답게”가 우리가 사는 삶의 구호로 되였으면 하는 바람이다.                     오기활    
402    일광산봉우리에 높이 올라 서서 댓글:  조회:1938  추천:0  2022-01-03
   지난해 9월초 어느날,  나는 로간부국 친구분들과 함께 일광산 자연공원으로 놀러갔었다.              구름한점 없는 맑은 하늘을 떠이고 시원한 산속의 공기를 마시며 우리는 상쾌한 기분으로 하루를 보냈다.                 여기저기로 통한 산책길을 따라 일광산자연공원의 아름다운 경치를 구경하며 웃고 떠들며 일광산 꼭대기에 올라섰다. 높이솟은 일광산 산정에 올라서니 가슴은 뻥 뚫린뜻 시원했고 온세상이 한눈에 안겨오는듯, 마음은 날개라도 돋힌듯 훨훨날아 세상구경을 하는듯 싶었다.                           멀리 동쪽을 향해 바라보니 유유히 흐르는 두만강 건너로  조선의 높고낮은 산들이 보였고 조선 남양시내의 전경이 한눈에  안겨왔는데 유달리도 나의 마음이 와닫는 곳이 따로 있었다. 그 곳은 바로 두만강을 가로 질은 중국 - 조선국경 다리였다.                 지난80년대 나는 보따리 조선장사를 하느라 손밀차에 무거운 짐짝을 꽉 박아싣고 저 다리위를 헐떡거리며 오가던 일이 눈앞에 선히 떠오르며 저도몰래 빙그레 웃음이났다. 돈도 짭짜리 벌었는지라 저의기 긍지감도 느꼈다. 그때 장사가 잘 된다는 물건을 많이 가지고 순리롭게 통관을 하느라  해관 검사원들과 웃지도 울지도 못할 희극을 놀던 일을 머리에 떠올리며 추억속의 장사군으로 저 강건너 조선해관청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한참이나 지난후 나는 북쪽을 향해 바라보았다.            도문시내의 전경이 한 눈에 안겨 왔는데 변화된 도문의 모습과 아름다운 도문의 자연경치, 지리적 위치를 보면서 나는 감개가 무량했다.             옛날 도문 북강에는 단 하나 뿐인 팔엽교 (도문-안산)로 사람, 자전거, 자동차들이 서로 붐비며 다녔지만 오늘의 도문 북강에는 지난 90년대에 일떠선 도문 ㅡ 훈춘 북강다리가 둘(공로, 철도)외에 몇년전에 새로 일떠선 훈춘 ㅡ 장춘 고속철도 다리와 곡수 ㅡ 수남 다리 우로 거침없이 오가는 차량들, 새하얀 고속렬차가 번쩍번쩍이며 번개마냥 다리위를 날아 다녔다.                     이는 교통이 사통팔달한 도문의 자랑스러운 정경이였다.          하지만 나는 그리운 고향마을 (달라자)이 자리한 곳을 빨리 찾아 보고싶어 몸을돌려 서북쪽 북강건너를 향해 멀리멀리 바라보았다.                   산과산이 있대이고 산넘어 산이 겹겹히 쌓인 서북쪽 하늘아래 마침내 하늘을 찌를뜻 높이솟은 고향의 범바위산이 눈에 떠올랐다.   아!  달라자 범바위산이구나!   순간  부모니님 계시는 고향집을 찾은듯 설레이는 마음이 달라자를 향해 날았다.                       저 범바위산 아래에는 내가 나서 자란 고향집 8간기와 집이 있었다.  저 범바위산아래에는 우리 부모님들 산소가 모셔져 있다.                      저 범바위산 아래에는 부모님들이 평생 토배기말로 불렀던  산골짜기와 흙빛고운 밭뙈기들이 많고 많았다.                          "굿시고래" (굿을 보던 골짜기),  "왕개고래",  “서풍고래",  "쭈릉키밭",  "쇠니매틀",  "하르가리 터" (한쌍면적),  "메가리터"•••             일자무식인 부모님들이 꾸밈없이 실상그대로 불렀던 고향산천의 토종이름들은 들을수록 정겹고 옛날 고향마을의 아름다운 자연모습이 눈앞에 선히 떠오른다.  만물이 소생하는 봄이면 고향의 저 높은 바위아래에는 진달래꽃이 만발하여 마을동산이 마치 붉은 주단을 펼친듯 아름다웠고 마을 뒤산에 활짝 핀 개살구꽃은 흰구름마냥 뭉게뭉게 나무 가지마다에 매달려 멀리서 보면 마을 뒤산이 온통 흰양떼들로 뒤덮힌듯 하였다.             내가 천지꽃 살구꽃을 꺾어다 유리병에 꽂아 놓으면 아버지께서는 올해 천지꽃 꽃살이 몇이냐고 물어보시군 했는데 꽃살이 많다고 하면 올해도 풍년이 들겠다고 기뻐하시던 아버지의 그모습이 기억에 생생하다. 나는 봄이면 바구니를 들고 달래며 민들레며 나시며... 등 산과 들나물을 캐려 다녔는데 나물을 캐고 집에 들어설 때면 바구니에 담은 나물을 더 많이 보이게 하느라 한포기 한보기씩 털어서 겨우겨우 일쿼세워 부풀게 했다. 나의  이런 천진한 속내를 뻔이 알고있는 할아버지는 " 쬐끄만 손으로 나물을 많이두 캐왔구나"며 머리까지 쓰다듬어 주었는데 그럴때면 나는 어깨가 으쓱하여 다음에 가면 더많이 캐 오겠노라 시뚱거리기도 했다. 그럴때마다 할아버지께서는 단오전에 풀은 독이 없기에 박새풀을 내놓구는 무슨풀이나 다 먹을수있으니 눈에 보이는 풀은 무엇이나 다 캐오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할아버지 그말씀을 되새기며 더없이 할아버지가 그리워진다.                     추억속의 고향마을 동년은 어제 같은데 오늘은 벌써 80세를 바라보는 할매로 되였것만 그래도 마음은 늙을줄 몰라 오늘도 저 범바위산 아래 고향의 산천에서 마음껏 뛰놀고 싶다.                         ......나는 끝없는 추억을 떠올리며 애틋하게 그리운 부모님 생각에 찹찹한 마음을 달래며 한걸음한걸음 산아래로 내려왔다              일광산 자연공원 숲속에서 친구분들과 함께 알락딸락 꼬때옷을  가려 입으면서 랑만의 모습들을 남기느라 저마다의 핸드폰이 찰칵찰칵하는 소리로 이어졌다.  점심때가 되여 시원한 숲속에 둘러 앉아 저마다의 솜씨로 만든 점심밥을 먹으며 제멋에 겨워 노래도 부르고 덩실덩실 춤도 추며 저마다  장끼자랑을 마음껏 하였다.    우리는 즐겁고 행복한 일광산공원놀이를 끝내고 귀로에 올랐다.           우리는 저마다 일광산을 향해 손짓하며 높이높이외쳤다 ㅡ           일광산아!  우리 명년봄에  또다시 놀러 올께! 안녕!              최정금                   
401    '21세기의 '리시진' 김수철 전"(련재 42) 댓글:  조회:1408  추천:0  2022-01-01
                                   제 3부: 신문잡지로 읽는 김수철 15, 렴치없이 산다면 아직도 몇 십년은 문제없소' 두 “100세 로인”의 인생스토리  김수철옹과 리남조 할머니   필자는 100세 시대에 현존하는 100로인들의 인생스토리를 듣고저 일전에 룡정의 김수철(94)옹과 연길의 리남조(99세)할머니를 인터뷰를 하였다. “원래는 두 분을 한자리에 모시려고 했는데 여러가지 불편으로 이틀 건너 이렇게 만났습니다” 필자의 수인사에 두 분이 약속이나 한 듯이 “둘이 만나면 할말이 많아서 더 좋았겠는데…”라고 답하며 무척 아쉬워 했다. 필자는 같은 물음에 “대답을 간단히 하세요"라는 같은 요구와 형식으로   각각 인터뷰를 하었다.  김수철은 연변농학원교수로 1987년에 정년퇴직을 한 후에 여러 권의 책도 출간하고 한국과 일본의 학술무대에서 무게 있는 론문을 수편이나 발표했다. 그리고 “이미 출판된”길림성식물명록”에 빠진 것이 많아 내가 보충해야한다” 며 최근 몇 년간에 고군작전을 하면서 한평생을 채집, 정리한 수천수만점의 식물표본에서 2300종을 선정하여 자기가 그린그림까지 배합하여 “길림성식물도감”편집을 마무리 하였다. 리남조할머니는 할아버지, 아버지, 언니(부양사촌언니)가 반일렬사가정에서 자란7남 1녀 8형제로 10살부터 어머니를 도와 가사와 농사일을 하였다. 결혼후 2남 6녀의 어머니로 남편을 일찍 잃고 혼자서 자식들의 글공부를 섬기면서 슬하에 박사, 석사, 의사, 대학교수 5명을 산출한 존경스러운 어머니이며 자랑스러운 할머니이다. 할머니는 딸집에 놀려 다녀도 그사이에 읽을 책과 신문을 챙기며 기억력도 좋고 한어말도 막힘없는 “현대할머니”이다. 문; 언제 중국에 오셨습니까? 김:  할아버지가 50세에 사망한 아버지의 유골을 등에 업고 1909년 음력 7월에 조선 함경북도명천군에서 가족 10명을 이끌고 600리를 걸어서 조양천백석구에 정착하였다. 나는 백석구에서 출생하였다. 리: 우리의 원적은 한국 경상북도 예천군 용궁면 무의리이다. 백년 전에 증조할아버지가 가족을 데리고 신의주에서 압록강을 건너 단동 ㅡ 심양 ㅡ 해림을 거쳐 두루 살다가 나중에 흑룡강성 동경성에 정책했다. 나는 심양태생이다. 문: 문화정도는요? 김: 7살에 서당을 다니기 시작하여 10살에 소학교를,,, 최후의 학적이 대학 1학년이다. 리: 할아버지한테서 한글(韓文)과 한자(漢字)를 배우다가 할아버지가 “사람이 까막눈이 되여서는 안 된다”며 사비로 6년제 소학교를 세운후 그 소학교에서 4년 공부를 하였다. 문: 결혼은 언제 하였습니까? 김; 백부님의 강권으로 연길국민고등학교 2학년을 다닐 때인 1941년 1월 31일에 결혼하였다 리: 결혼을 말하자니 힘들다. 이때까지 비밀로 지켰다. 내가 18살 때 8남 1녀 형제네 막내아들의 첫 눈에 들어 부모들도 그 남자가 병자인 것을 모르고 우리가 만나본 한 달 후( 10월 24일)에 결혼시켰다. 그런데 결혼을 하자부터 앓는 남편을 보고 의사가 부부생활을 하면 안 된다고 하기에 7년간을 혼자서 지냈다.  25세에 5년 년상인 김병훈이란 남자와 결혼하고 한동안 임신을 못하다가 익모초를 부지런히 달여 먹었더니 1947년부터 시작하여 2년 터울로 6녀 2녀를 출산하였다. 나의 결혼은 “꽃봉오리를 맺고도 꽃을 피우지 못한” 실패결혼이다. 문: 지금의 건강상황은 ? 김: 유전관계인지 허리가 구불고 귀가 슬 들릴 뿐 지금도 안경을 모른다. 나의 몸에는 로인반점이 한개도 없다. 허리는 구불었지만 생활에서 아무런 불편도 없다. 자식들만 안 말리면 산도 마음대로 다니고 달리기경기에도 나갈수 있는 정도다. 리: 지금도 안경이 없이 신문도 보고 바늘귀도 꿴다. 썩 오래 전에 딸집을 가다가 물도랑에 넘어져서 무릅뼈가 탈골했던 후유증으로 무릎이 가끔씩 아픈 외 아무런 이상이 없다. 단 이발이 부실하여 십년 전에 8500원을 팔아 치료를 했는데 요즘에 불편해 한다며 자식들이3000원을 투자해 새로 틀이를 했다. 몸에 로인반점도 없다. 건강은 우리 집에서 누구도 나를 못 따른다. 문: 건강비결은 무엇입니까? 김 : 몸에 해가 되는 일을 안 한다. 담배는 배우지 않았고 젊어서는 술상에 앉으면 빼갈을 한 근을 남아 마셨는데 지금은 절제한다. 식약동원(食葯同源)이라 식단은 그저 먹기 위해서나 맛을 위해서가 아니라 건강과 영양을 따져서 배치한다. 나는 쑥, 되꼬리 등 길옆의 풀을 먹고 뜸으로 건강을 지키며 병원을 모르고 살고 있디. 뜸은 살을 태워야 한다. 살을 태우지 않는 뜸은 효과가 거의 없다 리조때 “동의보감”을 쓴 허준도 뜸은 살을 태워야 효과가 있다고 말하였다. 리: 90세에 뇌출혈로 하루간 병원서 혼수상태에 처했다가 6일만에 출원하였다. 나는40세부터 의학서적을 보면서 스스로 여러가지 건강운동을 만들어 가지고 50년을 견지해 왔다. 얼마 전에 아들이 발운동을 어떻게 하면 좋다고 알려주니 나는 그 발운동을 50년간 하루도 빼 놓지 않고 견지했다고 하니 놀라 하였다. 나는 늘 편안한 마음으로 남을 잘 받아 주며 다 좋게 살아간다. 문: 이제 몇 년을 더 살수 있다고 자신합니까? 김: 교통사고만 없다면 렴치없이 몇십년은 더 살 것 같다. 교통사고를 피하기 위하여 길을 걸을 때 다른 생갹을 안 한다. 리:. 먹을 것을 제대로 먹으니 운동원처럼 건강하지는 않지만 지금 생각에 아직도 몇 십년은 문제가 없을 것 같다. 문: 지금까지 잘했다고 하는 일이 있다면? 김: 아버지의 결정에 따라 결혼 한 것이고 조강지처를 만나 사상을 개조한 것이며 우리 민족의 전통을 지겼고 계자로 들어가 백부를 잘 모신 것이다. 한눈도 팔지 않고 끝까지 식물학을 지켰고 한 우물을 판데서 오늘의 일들을 만들어 낸 것이다. 특히 잘한 것은 뜸으로 건강을 지키며 사업을 보증코 완성한 것이다. 일생을 아껴 쓰고 아껴 먹으며 간고분투하며 나의 사업에 모든 경제를 소비한 것이다. 경제가 딸리는 상황에서 일생 동안 배울 공구서적을 준비했기에 지금 내 집에서 자료를 찾을수 있다 내가 수장한 종이책들이 연변대학도서관보더 더 구전한 것 같더라. 리: 잘했다고 생각되는 일이 아무것도 없는데 재혼 때 둘이 털털이로 만난 것이 잘한것 같고 자녀들을 잘키운 것이 자랑스럽다. 문; 아쉬웠던 일이 있다면? 김: 비록 일심정력으로 일을 했다지만 그래도 옛날의 노력이 부족한 것이다. 학술면에서 재간을 나타내자는 욕심이 없었다. 이면에서 기술(대인관계 기교)이 부족했다. 출세를 하자는 생각이 없이 그저 자기의 능력을 믿고 하면 된다고, 잘하면 인정해 주겠지 라고 생각하면서 령도들과의 접근을 멀리한 것이다. 리: 생활이 그렇게 가난하면서도 없다는 말을 안하고 너무 간고히 살아 온 것이다 내가 가장 존경하는 어머니를 소설로 쓰지 못한 것이 아쉽다. 문; 억울한 일이 있다면? 김: 크게는 없다. 내 잘못이 많다. 리: 한때는 내가 가도에서 련조장, 선전워원으로 공작하다가 령도에서 감독원을 하라고 하니 나는 남을 감독할 자격이 없다며 사양을 했다. 그런데 오빠가 일본놈들에게 총살 당한 아버지의 원쑤를 갚겠다며 집을 나갔는데 후에 보니 토비로 되였다. 하여 한때 가도에서 오빠의 문제로 하여 나를 “可疑分子”로 몰며 나의 모든 사업을 박탈하였다. 할아버지, 아버지, 언니가 항일렬사인데 오빠문제로 렬사가족을 묵과하고 “가이분자”로 몰리니 억울 하였다. 문: 반성되는 일은 없는지요? 김: 가정성원에 대한 관심이 부족 했고 만년에 부인의 병조리를 딸에게만 맡긴 것이 미안하고 후회된다. 리: 이때까지 “예, 예”하면서 살아왔기에 반성할 일이 별로 없다. 마음으로 가책되는 일이 한 점도 없다. .문: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김: 가족에 대해 말한다면 자녀들이 결혼하자 자립을 했다고 경제적으로 돕지 못한 것이 미안하다. 사회에 대해 말한다면 사회에 대한 관심이 적고 정치를 불문하고 “마이퉈우 쿠깐”(埋斗苦干)만 한 것이다. 정치에 관심이 없었다. 리: 지금까지 우리가문이 좋은 가문인지 아니면 나쁜 가문인지를 알려줬으면 좋겠다.(뜻인즉 할아버지, 아버지, 언니의 항일력사기록이 없다고 ㅡ편자) 문: 효도란? 김: 효는 “백행지원”(百行之源)이다. 부모에게 효도하지 못하는 사람이 나라에 충성할수 없다. 효는 나의 마음속 기둥으로 사회에 해를 끼치지 않았고 이상분을 존경하고 내가 할수 있는 데까지 노력하며 책임을 지켰다. 리: 효는 부모님이상 조부, 증조부…에 대상해 쓰는 말이다. 녀자가 절개를 지키면 렬녀라 하고 훌륭한 안해를 조강지처라고 하고 훌륭한 어머니를 현처량모라고 한다. 문: 자식들에게 할말이 있다면? 김: 자녀들게 크게 요구하지 않고 아이들과 모순도 없고 기대도 안한다. 나는 나절로 살고 너희들은 너희로 편리대로 살면 된다. 리: 아무런 요구가 없다. 너희들끼리 잘 살면 된다. 문: 그 년세에 이성에 대한 생각이 나는가요? 김: 남자니까 미녀가 나타나면 지금도 마음이 움직인다. 아니라면 거짓말이다. 그러나 나는 사상을 개조하면서 조강지처를 지켰음을 자랑으로 느낀다. 한때는 리혼도 하자고 했다. 부부간에 싸움이 없었다면 거짓이다. 리: 나는 이성을 말하면 듣기도 싫다. 100세에 이성을 론하는 것은 나발이다. 나는 매일 총명한 증손들에게 빠진 재미로 산다. 나는 혼자 7년을 지날 때 대정원에 다니며 공부를 하고 중학교도 대수 다녔다. 인터뷰채록을 정리해보니 김수철교수는 효를 백행지원으로 하고 풀과 책과 동무하며 평생을 식물학을 연찬한 불로송이고 리남조할머니는 긍정적인 사고로 생을 지키는 할머니로 “긍정적인 사람은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를 증명하는 100세 모델이였다.                                 오기활                                 조글로 2018년 12월 21일      
400    가장 인간다운 마음 댓글:  조회:3257  추천:0  2021-12-27
인간이 지니고 있는 여러 가지 속성 가운데서 가장 인간다운 것이 “감사하는 마음”이라 하겠다. 왜냐면  감사해 하는 것이야말로 타인을 리해하는 따뜻한 감정과 사려 깊고 분별있는 리성 작용이 조화되여 나타나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모성애의 위대성을 역설한다. 훌륭한 남편의 뒤에는 현숙한 아내의 내조가 있다고, 비범한 아들의 뒤에는 갸륵한 어머님의 뒷바라지가 있었다...는 등등의 애례가 너무나 많다. 사랑에 의하여 구원을 받고 사랑에 의하여 행복을 창조하고 이성간에 사랑이 목숨을 원하면 기꺼이 목숨을 바칠 정열로 불탄다. 그러나 살펴 보면 이런 모성애, 이성애,  이웃애... 등은 비록 인간의 가장 위대한 정신 작용의 하나이지만 그것이 반드시 인간만이 가진 것이 아니다를 알게된다.     조선 신라 때에 널리 구전되였다는 얘기이다. 어느 사냥군이 활로 꿩을 쏘고 화살에 맞은 꿩이 날아간 쪽을 향해 매를 날려 보냈는데 오래도록 기다려도 매가 꿩을 물고돌아오지 않았다. 하여 사냥군이 찾아가 보았더니 한 우물 속에 피투성이가 된 어미꿩이 새끼 꿩을 안고 있었는데 어미꿩의 흐르는 피에 우물이 붉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이 모습을 보고 꿩의 모성애에 감동되여 눈물을 흘리는데 더욱 놀라운 것은 꿩을 잡으려 간 매마저 우물가 주변의 나무가지 앉아 우물안을 내려다보며 꿩의 슬픈 정경에 눈물을 흘리더라는 것이다. 이로보면 동물의 세계에도 모성애, 이성애, 무리애가 있다. 말하자면 사람을 포함한 모든 동물에게 모성애, 이성애, 이웃애...가 있는데 이런 사랑은 사람을 포함한 모든 동물들의 본능적이고 감정적인 것이였다. 그러나 이에 비춰 인간의 “감사의 마음”은 본능적인 것이 아니이다. “감사의 마음”은 매우 세련된 감정으 절도 있는 판단력의 소신이으로 가장 귀중한 인간다운 마음이다.  위대한 과학자 아인슈타인은 날마다 수백번씩 “고맙습니다”며 자기보다 앞서 길을 걸어간 위대한 과학자들의 공로에 고마음을 표하면서 더 많이 배우고 성취하며 나중에 가장 위대한 과학자가 되였다고 한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하늘에 감사할 일, 땅에 감사할 일. 나라에 감사할 일. 부모에 감사할 일, 이웃에 감사할 일...이 너무나도 많다. 동냥을 청하는 걸인에게 아무것도 줄것을 가지지 못한이가 빈손을 내밀어 걸인의 손을 잡으며 용서를 청하니 걸인은 “손을 잡히였다는 그것으로 물질적인 것의 몇 배의 선물을 받았습니다”며 감사를 드렸다는 이야기, 번마다 이웃돕기에 적선을 할 때 항상 자기가 가진 돈중에서 제일 새것으로만 골라서 주었다는 어느 부인이 너무나 감사하고 감동적이다. 돌아보면 우리가 오래동안 이렇게 소중한 “감사하는 마음”을 잃고 살아오지 않았는지....  걸핏하면 남을 탓만 하고 감사해야할 대신 원망하는 마음으로 서로 맞서지 않았는가를 돌이켜 보면서 늦게나마 반성하게 된다. 기업가는 종업원에게, 종업원은 기업가에게, 위정자는 백성에게, 백성은 위정자에게, 농부는 상인에게, 상인은 농부에게,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피차의 수고를 위로하는 감사의 마음을 가진다면 이 세상은 사람냄새가 풍기는 보다 아릅답고 보다 살기 좋은 세상으로 나갈것이라 확신된다.    오기활
399    [97세 김수철 교수] 그의 사전에 "로년은 있어도 로인은 없다” 댓글:  조회:2368  추천:1  2021-12-09
필자는 얼마전에 미국서 97세 할아버지가 두컬레의 신발이 닳도록 주민들을 찾아다니며 시장선거활동을 벌여 젊은 후보자 4명을 꺾고 미국 력사상 최고령 시장이 되였다는 감동적인 소식에 연변농학원의 김수철  교수가 97세에  산골에 새집을 지었다는 놀라운 소식까지 듣고 호기심을 달랠 수 없어  11월 21일, 조양천진 삼성촌  5대에 자리한 김교수댁을 다녀왔다. “모두가 바같나들이를 꺼리는 추위에 도문서 오다니...우리가 건강하니 얼마나 좋소! 기념사진 함께 찍읍시다” 김수철 교수는 필자를 반기며 기념사진을 남기자고 자청했다.               97세 현직교수   1925년 4월 1일 연길현 태양촌 횡도툰에서 출생한 김수철교수는 1949년에 연변농학원에서 1년 공부하다가 농학원 생물학 교연실 실험원으로 취직했으며 독학으로 식물학과 외국어를 공부하여 조교, 강사, 교수로 근 40년간 교원직에 있다가 1987년에 퇴직했다.    김수철은 “정년”이 없는 평생 교수이다. 그는 퇴직을 하자 한국의 모 회사와 손잡고 조양천진 삼성촌에 중초약기지를 건립하고 삶터까지 삼성촌에  옮겼다. 재직때 김교수는 《중국민족약지”(인민출판사)》등 5권의 저서를 출간, 퇴직후  《원색장백산자원식물》《항암본초》 등  여러권의 값진 저서를 출간한 외 십수편의 동아급 론문을 조, 한, 일, 영어로 발표했다. 퇴직후 김교수는 《吉林省植物誌》출간을 길림성식물연구의 위대한 사업으로 삼고 “하늘이 93세로구(老軀)에 정신적 활기를 주입하면서 나더러 이 위업을 끝까지 완성하기를 기대한다.”며 스스로 “나는 자연이 낳은 김수철, 나는 장백산이 키운 김수철”, “나는 조선족으로, 연변대학의 일원으로  아홉번을 넘어지면 열번 일어서는 “오또기”(不倒翁)정신으로 기필코 이 위업을 해낼 것이다.”며 3200여종에 달하는 식물 원시자료, 사진자료를 정리하여 2019년에 4종 문자(한, 조, 영, 일)로 집필한 “길림성식물지(총4집)” 1집을 출판하였다(길림과학기술출판사). 2019년 연변대학에서는 필자(오기활)이 출간한 《21세기 ‘리시진’ 김수철 전》(연변대학출판사)을 “연변대학건교 70주년 헌례작품”으로 선정하고 “金洙哲传”(延边大学出版社)을 번역출판하였다.   97세에 새로운 도전을   김교수는  “오늘을 최초의 날”로 가슴 뛰는 일에 열성하는 生을 살고 “래일을 최후의 날”로 오늘까지 가슴뛰는 活에 분투한다. 그는 올해에 이런 일들을 해냈다. 지난 9월에 페지수가 1200페지, 한, 중, 영, 일 4종 문으로 집필한  《길림성식물지》제2집 출판원고를 출판사에 교부하고 계속하여 제3 집, 제4집 집필에 한창이다. 《길림성식물지》출간은 “아무런 보수(원고비)도 없지만 그래도 내가 지금까지도 보람있는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으로 기쁘다”고 한다. 산골에 “전원문화주택”을 지었다. 김교수 2012년에 지난 90년대에 살던 초가집을 허물고 87세 나이에 그자리에 90평방짜리 벽돌기와집을 새로짓고 년상인 로친까지 딸집에 보내고 새집에서 혼자서 자취하며 “길림성식물지”집필에 정신을 팔던중 어느날 끄지않은 주방의 액화가스가 화재로 번저져 주방 천정까지 다 태웠다. 이로하여 자식들이 아버지의 안전을 걱정하여 아버지를  “강제”로 조양천세집에 모셨다가 또 시름을 놓을 수 없어 아예 룡정딸집에 “인질” 하였다.  김교수는 “딸집에서 생활은 초롱에 갇힌 새마냥 먹고자는데는 걱정이 없지만 팔다리운동을 마음대로 못하여 큰 ‘곤혹’이였다.” 며 그래서 올 년초에 딸의 허락을 받고 삼성촌에  60평방짜리 온돌방에 28평방짜리 서재까지 따로 있는 “전원문화주택”을 지었단다. 농촌에서 “먹고싶은 채소를 마음대로 심어먹고 보고싶은 식물을 때때로 찾아 다니며 “만보걷기 운동”을 하기에 ‘룡정배살’이 도망갔다”고 말하는 김옹은 "지난 7월 1일에 건당100주년 기념메달을 타려 연대에 갔더니 많은 사람들이 내가 병원도 없는 산골에서 산다고 걱정하더라"며 자신이 건강함을 자랑했다. 김교수는 “솔은 건강장수묘약”으로 솔잎을 복용을 견지한다.  삼성촌에 온후 그는 몸에 좋은 중초약의 독약제거연구를 새로 시작하였다. 례하면 “사상자”(蛇床子)는 신장의 양기를 돋구고 남성들의 신장이 약한데 특별히 효과가 좋은 반면에 독성이 있기에 약용에 주의해야 한다. 그리고 “부자”(附子)는 양기를 강하게 하고 특히 신진대사 기능 쇠퇴 회복에 특별히 약효가 좋은 매력적인 중초약인데 역시 독성이 강하다. 그래서 김교수는 올해에 몇가지 중초약을 선정하여 여러가지 발효료법과 단백질(콩제품)료법로 중초약의 독성제거 연구를 새로 시작하였다. 김수철 교수의 건강담   이하는 김수철 교수 인터뷰채록이다. 문: 교수님의 건강은? 답: 지금까지 안경이 필요없고 62세부터 병원문을 모른다. 허리가 구분것은 “부전자전”(父传子传)로 선친게서 물려받은 것이다. 허리가 구불다고 하여 걸음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몇년전엔 혼자서 묵직한 사진설비를 메고 내몽골의 산과 재를 다니며 식물표본사진을 찍었다.   문: 교수님의 건강비법은? 답: 주변의 풀(중초약)과 뜸, 그리고 걸음으로 건강을 지킨다. 첫 꿈은 의사였다. 내가 6살 때 백부가 나를 데리고 주역연구가 깊은 명진사를 찾아가서 나의 사주(四柱)를 봐달라니 “이 아이의 천직은 명의다”며 백부더러 나를 의사의 길로 인도하라고 권장했단다.   문밖까지 나와서 손들어 손님을 전송하는 김수철 교수 1945년 “8.15”후부터 의학공부로 리시진의 “본초강목”, 허준의 “동의보감” 송나라의 명의가 쓴 “편작심서”를 열심히 읽었다.  특히 나에게 “편작심서”가 큰 도움을 주었다. “편작심서”의 리론중심이 ‘중병에는 뜸이다’는 “대병의구”(大病宜灸)다. 지난 50년대에 뜸으로 나의 신장결핵병을 치료했고 아들의 허리디스크와 골증식, 며느리의 갑상선암의 후유증, 딸의 유방종류도 뜸으로 치료했다. 우리 집 식구들은 “뜸맛”을 본데서 누구나 몸이 불편하면 자기로 뜸을 뜬다.  감기는 도꼬마리로 치료하고 소화계통병은 리질풀, 익모초, 쑥으로 치료한다. 자식들은 저보고 100세는 문제 없다는데 비춰 나는 인간의 생리적 나이는  125세라며 교통만 주의하면 렴치없이 살 것 같단다고 부언했다. 문: 건강한 삶이란? 답: 건강은 모든 사람들의 진솔한 소망으로 삶의 정신적 만족을 위해 필요한 것이다.건강한 사람이란 살아서 제가 할 일을 할수있는 사람을 말한다. 건강은 지키며 누리기만 하는 것이 아닌,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그만큼 몸이 동반하는 것이다.항상 미래를 말하는 사람은 늙지도 않고 낡지도 않는다. 문: 김교수 년세에 어느 시대가 제일 좋았습니까? 답:  90대이다.  김수철 교수는 "90대가 제일 좋다."고 말한다. 그는 '로년은 있어도 로인은 없다'를 실천으로 증명했다. 김수철 교수야말로“뉴실버세대의  손색없는 본보기"이다.  실버란 로인이란 단어의 부정적 이미지를 피해 고안된 용어로 ”직장에서 퇴직한 후 년금, 퇴직금, 자녀들이 주는 용돈으로 여생을 보내는 로인들을 일컫는 말”이고 ”뉴실버세대“란 정년퇴직 후에도 활발한 활동으로 사회적, 경제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로년 세대를 말한다. "뉴 실버세대"는 건강하고 활력이 넘치고 살만한 돈이 있고 시간도 많은 세대로 젊은 시절에 가슴이 뛰고 마음이 설레이던 때의 신선한 충격과 감격의 시대를 다시 찾으려고 한다. “뉴 실버세대”를 겨냥해 지난 24일, ‘중공중앙, 국무원에서 “새 시대 고령화사업을 강화할 데 관한 의견'을 발표, 로년교육을 평생교육 시스템에 통합하고 자격을 갖춘 대학 및 전문 대학에서 로년 교육에 관련되는 전업과 학과정을 설치하며 국가에서 개방하는 대학교에 의존하여 국가로인대학교 설립을 준비하고 전국 로인교육 자원 및 공공서비스 공유를 위한 국가 플랫폼을 구축할 것을 명시하였다. 100세 시대의 신주의 땅에 “로년은 있어도 로인은 “없다”가 기대된다.   오기활
398    "21세기의 '리시진'김수철전"(련재41) 댓글:  조회:1817  추천:0  2021-12-01
                      제 3부 신문잡지로 읽는 김수철 14, 래일을 생의 마지막날로 삼고 “당신이 얼마나 더 오래살수 있을지, 언제 죽음을 맞이 할지?” 이런 물음에 확답할 사람이 아마도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마치 영원히살 것처럼 해야할 일들을 뒤로 미루는 것이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현실이다. 그런데 연변대학농학원식물학박사 김수철(93세)교수는 침대머리에 ‘죽음체험’이란 글을 큼직이 붙여놓고 ‘영원히 살 것처럼 배우고 래일 죽을 것처럼 일한다’묘 죽음을 맞이한다. 김교수는 정년퇴직후에 식물학연구의 새로운 황금시기를 맞이하며 인생 후반전에 멋진 ‘꼴’을넣고 있다. 김교수는 “이미 출판한 《길림성식물명록》에 빠진 것이 많아서 내가 보충해야지...” 하며 몇 년전부터 자기가 수십년간 수집한2600종의 식물표본으로 《길림성식물독본》을 출판할 타산이다. 90고령에 안해를 딸집에 보내고 영, 한(汉)문설명문에 직접 그린 2300폭의 그림을 배합하고도 더 좋은 책을 만들겠다며 지난해부터 혼자몸으로 성내외를 다니며 사진을 찍으며 고군작전을 하고있다.. 지난 10월 27일에 김교수가 들려준 얘기이다. “지난 겨울 어느날 새벽에 찬바람을 맞고 잠에서 깼지요. 정신은 멀쩡한데 몸이 말을 안들어서 약 15분간 움직일수 없었습니다. 이에 중풍징조라는 예감이 들어 정신을 가듬고 악을 써 끝내 침대에서 굴러 떨어진 다음 기어코 “구급상비상자”가 있는데까지 뒹굴며 가서 발바닥에 뜸을 떴지요. 한참지나니 몸이 정상으로 회복 되더라구요.” “그일이 나한테는 죽음체험이 되였지요, 그래서‘ 죽음체험’ 4자를 영, 한문으로 써서 침대머리에 붙여 놓고 래일을 생의 마지막 날로 생각하며 오늘의 일에 열심하고 있습니다.” 죽음은 삶의 가장 큰 상실이 아니다. 가장 큰 상실은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우리가 어떤 것을 죽여 버리는 것이다. 삶은 기회이고 아름다움이며 놀이이기도 하다. 삶을 붙잡고 감상하고 누리는 것은 자신에게 달린 몫이다. 누구나 죽음을 피할수 없다. 그렇다고 너무 늦을 때까지 기다려서도 안된다. 독일의 노벨상수상자 하우프트만은 “매일을 당신의 최초의 날인 동시에 최후의 날 처럼 살라”고 했다. ‘오늘은 인생의 최초의 날이다.’고 생각한다면 얼마나 많은 희망과 기대를 가질수 있고 “오늘은 인생의 최후의 날이다”고 생각한다면 삶의 희망과 계획을 이루기에 최선을 다 할것이다..                                   오기활                                  길림신문  2017-11-09 12      
397    나의 세 어머님 댓글:  조회:1813  추천:0  2021-11-12
나의 세 어머님 오기활 나에게는 생모, 계모, 장모가 있었지만 이들은 나의 입에서 “어머님”이라는 부름을 한번도 들어보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났다.    생모 전정숙 생모는 내가 말을 번지기도 전에 사망하고 계모는 ‘후어머니’라는 신분 때문에 ‘후어머니’이라 불렀고 장모님을 처음 만났을 때 년세가 70대이다 보니 생전 엄마를 불러 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어머님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아 그냥 보이는 대로 ‘로인님’이라 불렀다.   엄마 전정숙(1919ㅡ1948년)은 나를 낳고 15개월 만인 32세에 사망하셨기에 엄마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다. 30대가 돼서야 엄마의 이야기를 듣게 되였다. 나는 외가집이 전씨라는 것만 알았지 엄마의 이름은 몰랐다. 엄마의 이름을 몰라서 난처해보기는 1973년 연변농학원에서 입당할 때였다. 입당 서류에 엄마의 이름을 올려야 하는데 엄마의 이름을 몰라서 난처해하다가 ‘조직에서 간대루야 몇십년전에 사망한 사람을 조사하겠는가’하고 생각하고 아무 생각 없이 나름 대로 전정숙이라고 써넣었다. 그 후 도문시 홍광향 축목수의소 소장으로 있을 때의 1975년의 어느 날 사업차로 홍광향 오공 7대에 갔다. 그 때 몇년전부터 알고 지내던 리창순씨를 만나 그의 집에서 마련한 점심 술상에서 서로 얘기를 나누던중 우연하게도 창순씨의 어머니가 우리 엄마의 사촌 녀동생이라는 것을 알게 되였다. 그래서 엄마의 이름을 물었더니 엄마의 애명이 ‘꽃분이’이라는 것만 알았지 본명은 몰랐다. 1976년에 훈춘에 갔다가 엄마의 큰 언니를 찾게 되고 큰 이모네 집에서 하루 밤을 지내면서 외가집 이야기를 듣게 되였다. “그래도 네 에미는 천명이였다…” 큰 이모는 이렇게 말문을 열며 이왕지사를 말했다. “어느 하루 내가 동네 마실을 갔다오는 데 집 동쪽에 자리한 퇴비장 부근에서 아기의 울음 소리가 나기에 가까이에 가보니 글쎄 그 애기가 바로 몇달전에 낳은 내동생이더라. 나는 너무 놀라 애기를 꼭 안고 정신없이 집에 들어서니 울어서 눈이 둥둥 부은 아버지가 하는 말씀이 ‘여러 식솔에 집이 하도 구차해서 가정형편이 좋은 마음 착한 사람이 가져다 잘 키우라고 아이를 포대기에 꽁꽁 싸서 따뜻한 재무지 우에 놓았다’라고 하더라.” 큰 이모는 생활난으로 둘째 녀동생도 어릴 때 한족집의 시녀로 보냈다고 했다. 70대가 다 된 이모는 기억력도 좋았다. 나는 숨소리까지 죽여가며 눈물겨운 가정사를 듣다가 무심중에 엄마의 이름이 무엇인가고 물었더니 글쎄 전정숙이라고 답하지 않겠는가. “전정숙이라구요?” 내가 너무 놀란 표정으로 반문하니 이모는 제법 ‘全貞淑’이라고 썼다. 세상에 이런 일이? 내가 엄마의 이름과 관계되는 이야기를 꺼내자 큰 이모는 “네가 용케도 엄마 이름을 맞게 썼구나!”며 “그래도 무엇이 통하는 게 있는 가 보다”며 희한해하셨다. 2014년 11월 18일, 한창 눈을 치고 있는 데 셋째 누님 오금자(당시 71세)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오라비요? 올해에도 엄마가 하늘에서 눈 이불을 보냈구만!” , “눈 이불이라니?”, “엄마가 세상을 뜬 후 65년간 해마다 제사 날인 음력 10월 15일이면 눈이 내렸소.” 뜻밖의 전화를 받고 방금까지도 부담으로만 생각했던 아름차던 눈 마당이 하늘에서 엄마가 펴주는 흰 이불이라고 생각하니 일손이 잡히지 않아 곧장 셋째 누님네 집으로 향했다. “누님, 나는 엄마 제사 날에 해마다 눈이 내린다는 말을 처음 듣소. 그 눈이 엄마가 우리를 그리며 흘리는 눈물이 아닐가요? ” 우리는 엄마에 대한 그리움으로 서로 우두커니 쳐다보았다. “누님은 엄마 기억이 있소?”   2000년 9월 중순에 찍은 필자의 형제 (앞줄 왼쪽으로부터 필자의 동생 오기용, 큰 누님 오계옥, 필자, 뒤줄 왼쪽으로부터 둘째 누님 오순옥, 셋째 누님 오금자)   “글쎄…다섯살 때 큰길에서 빈 마대를 가지고 놀다가 잃어버렸는데 엄마가 욕할가봐 울던 일이 생각나고, 엄마가 사망할 때 어른들이 엄마의 입을 벌리고 ‘구술’을 넣으면서 ‘자식들이 배불리 먹게 해달라’며 부탁하던 일이 생각나구…” 6살에 엄마를 잃은 셋째 누님의 엄마 이야기가 기껏해야 이뿐이였다. 나는 80세가 다된 큰 누님 오계옥은 치매로 아무 것도 모르기에 왕청에 있는 둘째 누님 오순옥에게 전화를 하니 둘째 누님도 엄마 제사날이면 해마다 눈이 내린다며 엄마 얘기를 했다. “엄마는 결혼 후 10년이나 큰집과 같이 살다가 분가한 후 아버지께서 병으로 일을 못하게 되자 혼자서 농사일로 바삐 돌아치다가 우리 네 형제를 남기고 세상 떴소.” “엄마가 돌아가실 때 큰 언니는 13살, 나는 (둘째 오순옥) 열살, 금자가 여섯 살, 오라비는 두살이였소” 둘째 누님에 따르면 그 때 우리 집이 매우 가난하여 여름에 엄마가 신을 신고 다니는 것을 못 봤다고 한다. 엄마가 사망한 1948년에 동네분들의 도움으로 우리 집에서는 제일 마지막에 탈곡을 끝냈는데 엄마는 그 날에 촉한을 만나 병에 걸려 1주일을 앓다가 사망했다. 림종전에 엄마는 혀가 굳어져 겨우 한마디씩 이런 말을 남겼단다. “물남(곡수)에서 시아버님이 이 둘째 며느리를 빨리 오라고 부른다. 큰 형님이 저 철부지들을 거둘라니 얼마나 고생 하겠슴둥… 기활이를 한번 더 보고 가겠으꾸마!” 둘째 누님은 엄마가 돌아가시자 금자의 ‘울음병’과 나의 병이 거짓처럼 떨어졌다고 했다. 지난 세기 70년대에 동네 전길선아주머니에게서 들은 이야기인데 우리 엄마는 체격이 크고 마음이 한량이 없다 했다. 아버지가 술 끝에 말다툼을 하려면 일에 지친 엄마는 “싸울 맥이 없으니 내가 입안의 밥을 다 삼킨 후에 싸우깁소”라고 하며 고비를 넘겼다 한다. 엄마가 해마다 자식들에게 눈 이불을 내려보낸다는 불가사의한 이야기를 듣고 난 후 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서 엄마가 ‘누구를 닮았다’는 선색을 알고 엄마와 비슷하게 생긴 외가 친척의 원본 사진에 비춰 모 화백으로부터 엄마의 초상을 그려서 고이 모셨다.   계모 김수동 계모 김수동(1927ㅡ2001년)의 이야기는 누님들에게서 들었다.   엄마가 사망한 이듬해에 아버지는 김수동과 재혼하였다. 계모는 10대에 아버지를 잃고 홀어머니의 슬하에서 1녀 2남중 맏이로 중학교를 졸업하고 천보산 동광에서 설계원으로 있었다. 청춘과부로 보내온 계모의 친정 엄마는 “귀한 딸을 나이 든 가난한 남자한테 시집을 보내면 좋다”는 어느 점쟁이의 말을 듣고 나어린 딸을 목단강시 정미소에서 삯일을 하는 리씨 성의 남자한테 시집을 보냈다. 그런데 결혼해서 얼마 안돼 리씨가 1946년 5월에 한국 경기도 안성시에서 10여리 떨어진 고향에 간다기에 계모도 남편을 따라 한국에 갔다. 친정 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서 겨우 한달만에 중국에로 돌아왔다. 아들 돌전에 남편이 와서 아들 이름을 리덕선이라고 짓고 돌생일을 쇠준 후 다시 한국에로 돌아가면서 생리별했다. 1994년, 1996년 아들 리덕선이 부친 리관현을 찾았지만 종무소식이였다. 계모는 친정 엄마, 아들 리덕선과 함께 천보산에서 보내다가 22살에 세살 짜리 아들을 데리고 10년 년상 농민인 우리 아버지와 재혼했다. 1950년 6월 11일에 나와 배다른 동생인 오기용을 낳았다. 그 때 대학생들이 청혼해도 재혼을 안하겠다던 계모는 우리 아버지의 멋진 인물에 남자다운 매력에 반했는지 아니면 소개자를 믿고 재혼했는지 아무튼 손시계까지 차고 자식많은 농민한테 시집을 왔다고 동네서 후론이 있었다 한다. 계모는 23세에 여섯 자식의 어머니로 되였는데 계모와 큰딸 간의 년령 차가 9년 밖에 안되였다. 나는 처음부터 계모를 “후엄마”라고 부른 데서 아버지가 안해 보기가 난처했던지 나더러 “후엄마”라고 부르지 말고 “엄마”라고 부르라고 몇번이나 당부했다. 아버지는 당당한 설계원으로 있던 ‘후어머니’가 20대 초반에 여섯 자식 어머니로 되여 고생하는 것이 측은했던지 재혼하여 2년도 안돼 ‘세 딸을 시집보낸 후 재결합한다’는 조건으로 ‘합의 리혼’을 하였다. 리혼하던 날 아버지는 결혼하듯 안해더러 치마저고리를 입고 술상까지 차리고 동네는 물론 구정부 간부까지 초대했다. 그 후 계모는 리씨 아들을 데리고 살면서 재결합 할 날을 손꼽아 기다리다가 8년 후에 아버지가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그만 생을 포기하고 목에 바를 매고 자결하려다가 동네 분들에게 발견되여 구원되였다. 결국 계모는 고급 공정사로 정년퇴직했고 큰아들이 50대에 차사고로 식물인이 되자 연길의 모 경로원에서 몇년을 보내다가 향년 74세로 2001년에 사망하였다.   장모 김옥녀 장모 김옥녀(1906ㅡ1989년)는 내가 처음 만났을 때 벌써 70대 로인이였다. 안해에 따르면 장모님은 12명의 자식을 낳았는데 8명은 요절되고 남은 2남 2녀중 맏이 큰언니는 해방전에 조선으로 갔고 큰아들은 결혼하자 참군하여 사평해방 전투에서 희생되였다. 그러니 장모님은 아홉 자식을 가슴속에 묻었으니 평생 눈물과 동무하며 살았다.   한번도 “엄마”라는 두 글자를 불러보지 못해 장모님을 만나서 “어머님”이라는 말이 떨어지지 않았고 게다가 70대 로인이라 첫 눈에 보이는 그대로 ‘로인님’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큰사위는 본 적이 없고 기다리고 기다리던 막내 사위마저 “어머님”이라고 부르지 않으니 장모님이 서운해 할 것은 물론 처가 편에서 “저 사람이 부실하지 않는가?”며 후론을 했다고 한다. 나는 장모님의 사위 사랑에서 처음 엄마의 사랑을 피부로 느꼈다. 1975년 10월 1일 우리가 결혼할 때 처가집은 대흥구립업국 청산림장에 자리 잡고 있었다. 청산림장은 대황구에서 6, 7리 떨어진 영벽 마을에서 산길로 60리 길을 더 가야 하는 깊은 산골이였다. 그 때까지도 뻐스가 통하지 않아 60리 길을 도보로 다녔다. 1976년 늦가을의 어느 저녁 무렵, 장모님은 동네에서 개추렴을 했다며 사위를 대접하려고 노란색 비닐통에 개고기국을 들고 오셨다. 청산림장에서 대황구까지 66리, 대황구에서 기차 타고 130리나 떨어져있는 도문까지 개고기국을 들고 온 장모님을 본 나는 너무나도 어처구니 없어서 감사하다는 말 대신 “대흥구에서 도문까지 오는 왕복 차비만도 이 개고기국물보다 더 비싸꾸마...”, “이런 사위 사랑을 두번 다시 하지 맙소”하며 큰소리로 랭대하였다. 지금 생각하면 장모님이 얼마나 서운해 하셨을가?! 또 어느 한번 장모님은 고령에 산을 넘나들며 위병에 좋다는 삽주뿌리를 캐서 알뜰히 말리워 가루까지 내서 들고 오셨다. 초겨월의 어느 날 장모님은 사위에게 털실 옷을 떠 입히겠다고 농촌에서 양털을 사서는 씻고 말리우고 실을 뽑아서 가져오셨다. 장모님은 7년을 사이 두고 출생한 나의 아들딸들도 등에 엎고 키우셨다. 장모님 생전에 제일 마지막으로 우리 집에 다녀 온 날은 1989년 6월 1일이였다. 그 때 우리는 자체로 집을 지으려고 집터를 팠다. 장모님은 새로 판 집터를 보고 기뻐하셨다. 장모님은 “이번 걸음이 마지막 걸음일 것 같다”며 큰 병에 인삼담근 술까지 사가지고 오셨다. 장모님 말 그대로 장모님은 새로 지은 우리 집을 보지 못하고 1989년 8월 26일에 향년 83세로 돌아가셨다. 엄마는 비록 32년이란 짧은 인생을 살아왔지만 8년 만에 하늘 나라에서 사랑하는 남편과 재회하였다. 엄마가 두고 떠난 네 자식은 모두 무탈하게 잘 자라 지난해 큰딸인 나의 큰 누님은 86세에 돌아 가셨고 셋째 딸은 코로나19로 인한 격리로 한국의 모 경로당에서 자식들을 보지 못한 채 뇌출혈로 78세에 돌아가셨다. 엄마는 자식들에게 사진 한장도 남기지 못하고 급급히 떠나가셨지만 당시 두살 밖에 안된 아들의 효도로 본명을 찾고 후세에 전할 수 있게 그림으로나마 초상을 남기게 되였으니 불행중 다행이라 하겠다. 계모는 비록 74세까지 살았지만 재혼 날을 합쳐봐도 부부생활을 2년도 넘기지 못하고 청춘과부로 보냈다. 그가 낳은 두 아들중 리씨는 50대에 차사고로 식물인이 되여 몇년을 시달리다가 60대 초반에 사망하고 오씨는 50대에 중병으로 사망했으니 계모의 삶은 더없이 비참하고 외로운 삶이였다. 장모님은 비록 전반생은 아홉 자식을 가슴에 묻고 말없는 눈물로 보냈지만 후반생은 막내 사위 덕에 외롭고 고독한 산골 마을을 떠나 딸 가까이에 있는 변강 도회지에서 생활하셨다. 장모님의 손끝에서 자란 외손자는 세계 명문대의 교수로 있고 외손녀도 사회의 떳떳한 일원으로 잘 보내고 있다. 한번도 “어머님”이라고 불러보지 못한 나는 이 글에서나마 세 어머님을 불러보련다. “어머님!” 길림신문
396    “만남”이란 말 아시죠? 댓글:  조회:2056  추천:1  2021-11-08
어제(10.31) 다사했던 10월의 달력막장을 넘기고나서 묵은자료를 정리하던 중에 필기첩두껑안에 그젯날 명심해 보관했던 편지한통을 발견하였다. 편지는33년전 도문시문화관 김원필선생이  한국의 조카(김영웅)한테서 받은 편지라며 오기자가 필요하면 갖고가라던 활자로인쇄한편지였다. 필자는 십수년전에 감명깊게  읽어본 편지를 오늘 재독하고서 (혼자만이 보기가 아쉽다)는 생각에서 편지를 여러분들과 공유하고저 한자도가감없이 그대로 올린다   원필 삼촌께!   그동안 별고없이 가족들 모두가 평안하신지요? 이곳은 참으로 다사다산했지만 그래도 지난 ‘98년을 아쉬움속에 보내고 언제나 그랬듯이 또다시 부푼 기대와 설레임으로 새해의 희망을 품고 오는해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도문에서 “참으로 형제와 핏줄의 정이 이런 것이나 “하고 많은 것을 느끼고 왔습니다.  같은 핏줄이며 천척이라해도 초면에 너무나 극진한 대접을 받고 오니 너무나도 송구스럽고 또한 고맙기만합니다.  이제서야 안부를 전하려니 죄송하기만 하군요.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막상 글로 전하려니 솔직히 말씀드려서 별로 쓸 말이 없군요 갑작스런 만남과 초면이기 때문이 아닌가는 생각을합니다마는 죄송스럽기만 합니다.   “만남”이란 말 아시죠? 그리고 “인연”이란 것도 아시겠죠? 이것만큼은 모두가 잊지않고 기억하면서 우리들 가슴속 깊이 간직해야 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불교에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길을 가다 옷 깃을 스쳐도 5백생의 인연이 있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한 평생을 함께 살아가는 부부가 되려면 천생의 인연이 되어야 하며 부모자식간이 되려면 3천생의 인연이 닿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형제, 일가친척이라해도 이 또한 무수한 인연이 없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것입니다. 일생을 50년만 계산하더라도 만남을 위해 얼마나 많은 긴 시간을 약속해야 했습니까? 불교에서는 다른 종교들처럼 모든 것이 우연히 이루어지거나 기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인정을 안합니다. 뼈를 깍는 아픔이 없이 , 땀흘린 노력도 없이 우연히 공짜로 얻어지거나 기적이 생긴다면 그건 불미한것이며 허공에 뜬 구름을 잡으려는 것과 똑 같습니다. 세상사 모든 치는 “자업자덕”(自业自德),즉 스스로 지어서 스스로 받는 인과응보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도문의 삼촌들과 친척들 그리고 한국 인천에 사는 우리들 모두는 우연히 이뤄진 만남이 아니라 무수한 생을 지어 쌓은 인연공덕에 의해 이뤄진 만남이기에 더욱 소중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오해하시지는 마시고 마음 편히 하시기를 바라면서 감히 한가지 부탁을 드려봅니다.  자세히는 모르겟지만 어쩌면 내가 잘 못 느낀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마는 원철분가족들과 사촌들의 관계가 어디가 모르게 서먹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세상에는  잘난 사람, 못난  사람들이 어우러져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못난 사람들은 포기하지 말고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잘난 사람은 못난이들을 위해주고 감싸주고 도와주면서 사는 것이 보람되고 생의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봅니다. 이제부터는 앞으로의 미래를 위해 과거의 집착을 털어버리고 보다 밝게 살았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누구나 과거에 머문다면 진정한 미래를 약속할 수 없다고 봅니다. 오랫동안 머물지 못하고 잠깐씩 여러나라를 다녀봤습니다만 어데를 가나 사람들 사는 곳은 모두 같더군요. 력사는 모두가 만남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비록 짧은 만남이였고 자주 만날 수 없지마는 우리가 생을 다해 사라진 먼훗날에라도 력사가 그치지 않고 이어지기 위해서는 어쩌면 중요한 만남이 아니였는가? 하고 나는 생각합니다.  나를 위해 극진히 대접을 해주신 여러분께 다시한번 감사드리면서 아쉬움 속에 다사다난했던 무인’98년을 보내며 희망가득안 기묘년 새해에는 바라시는 모든 소망들이 꼭 이루어지시기를 이곳 한국에서 간절히 기원합니다. 끝으로 우리 모두 새로운 각오와 변화된 모습으로 힘차게 뛰여 봅시다. 《望 天 天 的 好 日!》                   1999년 1월 1일 새아침 仁天에서 조카 英雄 올립니다.   (독자들의 댓글을 부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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