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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민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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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성산에 만든 하늘동네의 이야기 댓글:  조회:986  추천:0  2017-04-13
글 / 김호림 솔직히 그곳의 첫 이주민은 언제부터 살고 있었는지 잘 모른다. 전호산 촌장은 촌락에 앞서 산민(山民)이 벌써 내두산(奶頭山)의 산속에 살고 있었다고 말한다. 내두산은 장백산 천지 폭포의 북쪽에 위치하는데 쌍을 이룬 둥그런 모양 때문에 지은 이름이다.  촌락은 1931년 내두산의 바로 동쪽에 생겼다고 안도현 지명지(地名志)가 전한다. 하늘 중턱에 걸린 이 동네도 부근 산의 이름을 그대로 따서 “내두산촌”이라고 부른다.  그때 마을에서는 땅에 주로 감자와 보리를 심고 있었다. 고원 지대라서 기온이 낮아 소출이 그다지 많지 못했다. 보리고개면 집집마다 곳간이 비여서 사람들은 너나없이 늘 배를 곯았다고 한다. 다들 산에 들어가서 뭔가 먹을 음식을 찾았다.  “마침 산비탈에서 감자를 숨긴 움을 찾았는데요, 진작 녹말이 되여있더라고 합니다.”  전호산씨는 이렇게 그가 전해들은 마을 할머니의 이야기를 전했다. 그 할머니가 아직 현존한다면 약 120세의 고령이니 적어도 지난 세기 20년대 내두산 일대에는 인가가 있었다는것이다.  옛날 누군가 감자를 숨겼다고 하는 움은 마을 남쪽의 “왕더기” 부근에 있었다. “더기”가 높은 지대의 평평한 땅이니 “왕더기”는 그 땅이 아주 크다는 이야기가 되겠다. 근처에는 또 “서울 막” 등 선민(先民)이 살면서 지은 옛 이름도 있었다.  마을 동쪽의 밭에서는 또 마제(磨製) 석기가 발견되여 이 고장에서 인간의 력사는 상고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는것을 알려주고 있다. 밭에서 돌도끼를 주었다고 하는 림씨는 이날 일행이 농가에서 식사하면서 만난 촌민이다. 그는 일행에게 돌도끼를 자랑하면서 아쉬움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도끼의 뒤쪽 모서리가 부러졌는데요, 어디에 떨어졌는지 끝내 찾지 못했습니다.”  사실상 림씨는 내두산 현지의 태생이 아니다. 약 30년 전 내두산에 사냥을 왔다가 결혼하고 이 마을에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조금은 비유가 이상하지만, 정말로 내두산의 “노다지”는 노루가 아닌 처녀로 탈바꿈한것이다.  내두산에는 “노다지”의 천지라고 림씨가 거듭 말하고 있었다. 산에 노루는 물론이요, 곰이며 메돼지, 담비 따위가 수림을 이루고 있다는것. 그가 이곳에 장가를 왔던 지난 세기 80년대 담비의 모피는 벌써 천정부지로 치닫고 있었다.  “이곳의 사람들은 녀인들도 산짐승을 잡을줄 알아요.”  해마다 가을철이면 녀인들은 또 산에 올라 삼을 팠다고 림씨가 말했다. 마을 동쪽 20리 되는 곳의 산에 삼이 많다는것. 그러나 지금은 삼을 캐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한다. 인삼이 너무 많아서 산삼이 오히려 가짜로 간주된다는것.  “그럼 솥에 삶은 닭은 내두산에서 자란 닭인가요? 아니면 마당에서 키운 닭인가요?”  롱담은 두발이 달린 듯 냉큼 밥상에 뛰여오른다. 물론 이날 주인집에서 밥상에 올린 료리는 마당에서 기른 닭이였다.  기실 야생동물 보호조례가 실시되면서 수렵꾼은 거의 다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현성으로 나가는 길목에는 또 전문 야생동물 불법매매를 차단하기 위한 검문소가 생겼다. 그럴지라도 불법 포획자들이 돼지 대가리에 메돼지 몸뚱이를 합체로 만드는 등 야생동물을 집짐승으로 둔갑하여 검문소를 통과하는 일이 종종 생긴다고 한다.  이야기가 그만 다른 데로 흘렀다. 1644년 만족은 중원에 입주한 후 장백산 일대를 선조의 발상지로 삼아 성지(聖地)로 간주하고 봉금(封禁)지역으로 만들었다. 장백산 일대는 인가가 차츰 없어졌으며 고목이 하늘을 찌르고 야수가 출몰했다. 1881년 청나라는 봉금지역을 개방했으며 이에 따라 인적이 늘어나게 되였다.  내두산 기슭의 촌민은 함경북도 갑산 일대의 간민으로 여느 이주민처럼 강이 아니라 두만강 발원지 부근의 마른 땅을 건너고 있었다. 전호산씨는 내두산에서 국경 건너 이국의 촌락까지 1박 2일이면 도착할수 있다고 말한다. 갑산 일대의 간민이 내두산에 진출한게 꼭 언제라고 분명하게 선을 그을수 없다고 하는 설이 나올 법 한다. 그러나 확실한건 1935년 겨울 내두산에 새로운 항일유격대 근거지가 창설되였다는것이다.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의 일부였다. 동북인민혁명군은 1931년 “9.18”사변 후 중국공산당이 동북지역에서 령도한 항일무장이다.  내두산은 일본과 위만주 군경의 거점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으며 또 남만의 무송과의 사이를 울창한 수림으로 가로막고 있었다. 또 그전부터 조선과 안도로 통하는 통로가 있었는데 내두산 촌락은 200리 무인지경을 지나는 로정에 있는 유일한 주민지대였다.  1936년 1월, 일본군은 8백여명의 군사를 인솔하여 내두산 유격구를 진공했다고 중국의 관방 간행물 《당건설(黨建)》이 전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제2군의 창시자인 항일명장 왕덕태(王德泰)가 2개 중대의 병력을 지휘하여 300여명의 적군을 섬멸, 제2군의 전쟁사에서 적은 병력으로 많은 병력을 이긴 전례를 만들었으며 내두산 항일부대 근거지를 보위했다. 그때부터 내두산 마을 동북쪽의 무명의 산은 현지인들에 의해 “왕덕태의 산”이라고 불렸다는것.  산기슭에 세운 석비로 일행을 안내했던 림씨는 산 이름을 속명 “포대산(砲臺山)”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포대산이 그에게 남긴 기억은 산마루의 포대나 밀영이였으며 언제인가 출토되였다는 탄알 깍지나 쇠솥 등 기물이였다.  촌장 전호산씨가 입에 올린 옛 이야기는 이목구비를 갖춘 항일부대 대원이였다. “김정숙이 녀성대원들과 함께 마을 학교의 아동 단원을 거느렸다고 하던데요.”  그 무렵 김일성 장군이 일본군의 탄환을 피했던 고목은 바로 마을 동쪽의 산비탈에 있었다고 전호산씨가 말한다. 이 고목은 마을 주변에 있던 원시림과 더불어 지난 세기 80년대에 소실되였다고 한다.  내두산의 이 항일부대는 유격구를 개설한 뒤 동북항일련군 제2군으로 개편하며 1936년 가을 일본군의 “포위숙청”으로 인해 내두산 근거지에서 철수한다. 동만 지역의 제일 마지막 항일유격근거지는 이로써 력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첩첩산중의 유격구에 불안을 느낀 일본군은 미구에 내두산에 무장이민을 파견했다. 전호산씨는 이 자위단이 들어서면서 마을은 또 “백호동(百戶洞)”이라고 불렸다고 말했다. “그들이 총 100자루를 어깨에 메고 들어왔다고 해요.”  일본군은 내두산에 산재한 사람들을 한데 모여 집단부락을 세우고 나무로 2,3m 높이의 목책을 세웠다. 집단부락은 동북 지역에서 일본이 주민을 일정지역에 집결시키고 주민과 항일세력의 련계를 차단하기 위한 수단으로 건설한 촌락이다. 이 정책에 의해 동북지역에서 1933년부터 1939년까지 건설된 집단부락은 1만 3,451개에 달하는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 일행을 내두산까지 안내했던 연변의 소설가 김춘택씨는 그가 살던 고등리(高登里)는 내두산의 목책과 달리 풀이 무성한 저습지의 뗏장으로 성벽을 세웠다고 말했다. 고등리는 1938년 가을 강원도 동명의 마을 이주민들로 인해 지은 이름인데 내두산의 북쪽으로 130리 정도 상거한다.  고등리에도 조선인 항일부대의 일부 흔적이 있었다. 북쪽 대사하(大沙河) 근처의 산기슭에 일명 “김일성의 금점굴”이라고 불리는 웅덩이가 있다는것. 김일성 장군이 금맥을 발견하여 이 웅덩이를 파고 강냉이의 알갱이 크기의 금을 한보자기나 캤다고 한다.  실제로 고등리의 첫 이주민인 할아버지가 김춘택씨에게 전한 이야기이다. “언제인가 조선인 부대가 집단부락의 경찰소를 습격하고 백여마리의 소를 로획한 적 있는데요, 마을 청장년들이 소의 뒤다리를 어깨에 메고 함께 유격구까지 운반했다고 합니다.”  이 유격구가 바로 후날 내두산으로 이전되였던 안도 부근의 화룡현 차창즈(車場子) 근거지이다.  내두산에 있던 집단부락의 목책은 지난 세기 80년대에 전부 사라졌다. 마을에서 저마다 바자를 세우거나 장작으로 목책을 사용했던것이다. 이맘때까지 마을에 흥성했던 소학교와 농촌중학교도 차츰 줄어들더니 미구에 겨끔내기로 가뭇없이 사라졌다. 도시 진출과 해외 로무의 바람은 심산속의 이 마을에도 불어들고 있었다.  보름날의 달밤에 산비탈에서 소발구에 올라 곡식을 실을 때면 멀리 천지의 폭포가 우중충한 달빛 아래 하늘에 걸리던 내두산촌의 그림 같은 옛 풍경은 슬픈 옛 이야기로 어디론가 멀어지고 있었다.  전호산씨는 마을에 호적으로는 120여 가구 되지만 실은 50여 가구라고 알려준다. “1976년에 논을 개간했는데요, 사람이 없어서 다시 밭으로 되여버렸습니다.”  내두산의 원근에 소문이 있던 감자도 마침내 옛말로 되였다. 메돼지가 출몰하면서 땅을 헤집었으며 감자 농사를 할수 없었다. 그래서 밭에 돈이 될 만한 곡식으로 10년 전에는 해바라기, 근년에는 또 호박을 심는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내두산에 현존하는 옛 실상은 상두(喪頭)뿐만 아닐지 한다. 상두는 상여의 속된 말로 상례 때 시신을 운반하는 기구를 말하며 죽음의 전통의례와 상징의 세계이다. 상여라는 이 말은 조선 후기 관혼상제의 《사례편람(四禮便覽)》에서 처음 등장한다.  “이 상두는 우리밖에 없어요, 상두의 맥을 이어오고 있는 유일한 고장이죠.”  전호산씨는 내두산촌의 제일 높은 조직은 기실 그가 촌장으로 있는 촌민회가 아니라 상여회라고 말한다. 상여회는 매년 12월 20일 총화를 하는데 상여회에 가입하지 않으면 상례 비용은 따로 지불해야 한다. 입사를 한 후 또 상례에 참여하지 못하면 촌장이라도 벌금을 내야 한다는것.  “우리 마을을 조선족 장례문화의 표현기지로 만들자고 춘택이가 주장하고 있어요.”  조선족의 장례풍속은 2009년 길림성의 무형문화재로 등록된 대상, 인제 내두촌의 관광품목으로 내세우자는 김춘택씨의 주장은 마을의 동조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허약한 로인들만 잔존한 마을에서 무거운 상두를 메는 상여꾼도 찾기 힘든 현 주소이다. 김춘택씨는 연길에서 행사 때마다 상여꾼을 따로 찾아와야 할것 같다고 혼자말로 일행에게 말했다.  잠깐, 김춘택씨의 이야기를 잇자니 자칫 엉뚱한 물곬에 흘러들것 같다. 작가로서의 김춘택씨가 그리고 있는 큰 그림은 내두산의 상여뿐만이 아니였다. 성산의 기슭에 중국 조선족문인의 창작기지를 만들고 하늘 아래의 첫 동네에서 민족의 하얀 혼을 불러일으키고 싶다고 한다.  “지금 내두산공원 편액을 만들었고 또 일부 소설비와 시비, 노래비를 세웠습니다.”  문뜩 조무래기의 오구작작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마을의 정말 오랜만의 일이라고 누군가 말한다. 이날 마침 제사를 지내기 위해 주인집에 손님이 찾아오면서 부근 현성에서 아들딸을 데리고 왔던것이다. 이윽고 제사상 앞에서 곡을 하듯 망자에게 이야기를 읊조리는 주인집 로인의 목소리가 창밖으로 새여나가고 있었다.  밖에 나서니 마을에는 벌써 어둠이 깊게 깔리고 있었다. 귀가에 간간이 울리는 곡소리는 마치 내두산의 상여가처럼 그 무슨 마지막 작품을 애절하게 연주하고 있는듯 했다.    “간다, 간다, 나는 간다고 하거늘  눈물을 흘려서 뭣하나? 한숨은 쉬여서 뭣하나?  상사듸여! 상사듸여!…”▣ (편집/ 김향덕)  
5    문학으로 보는 조선인의 중국 이주와 정착 댓글:  조회:1043  추천:0  2017-04-13
글 / 최학송 알다싶이 조선족은 조선반도로부터 이민한 과경민족이다. 지난 19세기 중후반 2백여년간 지속되여온 동북 일대에 대한 청조의 봉금정책의 완화 및 페지 그리고 조선 북부지방을 강타한 홍수, 가뭄, 충해(蟲害) 등의 자연재해로 하여 조선인의 중국 이주가 시작되였다. 이 시기의 이주민은 모두 생계를 위하여 고국을 등진 사람들이였다. 19세기 중엽으로부터 20세기 초에 이르는 이 시기를  “국경을 넘어 잠입한 시기”(1860~1904)라고 한다. 1905년의 을사보호조약 체결로부터 1931년의 9.18사변에 이르는 기간 조선은 군대해산(1907), 한일합방(1910), 3.1운동(1919) 등 정치적 대격변을 겪었으며 일제의 토지조사사업 때문에 대량의 농민들이 토지를 수탈당했다. 이리하여 수많은 조선인들이 정치적, 경제적 원인으로 중국에 이주하였다.  이 시기를 “자유 이민 시기”(1905~1931)라 한다. 1932년 위만주국 건국 이후, 일제는 동북을 중국 침략의 전략기지로 구축하면서 계획적이고 조직적으로 조선인을 동북에 이주시켰다. 이때 이주한 대부분의 이주민은 동북 개발을 위한 일제의 이민 정책에 속았거나 혹은 강제로 이주된 사람들이였다. 이 시기는 “강제 집단 이민 시기”(1932~1945)로 불린다. 이러한 이주 결과 1920년 중국의 조선인은 46만명으로 증가하였고 1930년에는 61만명, 1940년에는 140만명, 1945년 일제 패망 직전에는 216만명에 이르렀으며 이들 대다수는 동북에 거주하였다. 당시의 동북 인구가 3,500만명이였으니 동북 거주인 16명당 1인이 조선인이였던 셈이며 조선 인구가 2,500만명이었으니 조선인 11명당 1인이 동북에 이주한 셈이였다. 해방전 동북지역에서 생활한 조선인들중에는 적지 않은 문인들도 포함되여 동북 조선인들의 삶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하였다. 이는 본격적인 조선족문학의 전사(前史)라고도 할수 있는것으로서 흔히 재만조선인문학 또는 조선족 이민문학으로 불린다. 조선인의 중국 “이주” 원인과 “정착” 과정은 이 시기 문학의 단골 소재의 하나라고 할수 있다. 최서해, 강경애, 안수길 등 대표적인 작가들은 모두 상기 내용을 소재로 작품을 창작하였다.  최서해는 동북으로 이주한 조선인의 삶에 주목하고 그것을 처음으로 소설의 세계에 끌어들인 사람이다. 1918년부터 1923년까지 6년간 연변에서 생활한 경험이 있는 최서해는 대표작 “홍염”(1927)을 비롯하여 도합 11편의 소설을 연변체험을 소재로 하여 썼다. 장백산 아래 백하(白河)라는 시골마을을 배경으로 하는 “홍염”은 중국인 지주 인(殷)과 조선 이주민 문서방 사이의 갈등을 다루고 있다. 경기도에서 소작인생활을 하던 문서방은 좀 더 나은 삶을 찾아 연변으로 왔지만 이곳에서도 소작인이라는 신분에는 변함이 없다. 조선이나 연변이나 모두 지주 대 소작인이라는 계급적 관계가 존재했으며 문서방은 늘 소작인이라는 피착취의 지위에 처해있었다. 연변에서 빚을 제때에 갚지 못한 문서방은 딸을 지주의 첩으로 빼앗긴다. 문서방은 죽어가는 안해가 딸의 얼굴을 한번만 볼수 있도록 해달라고 네번이나 인가를 찾아가 애걸하였지만 거절당한다. 딸을 보지 못한 문서방의 안해는 정신혼란 증세를 보이더니 끝내는 숨지고 만다. 그리고 이런 안해의 죽음을 목도한 문서방은 지주 인가의 집에 불을 질러 지주를 죽이고 딸을 도로 찾아내온다.  강경애는 동북항일무장투쟁을 가장 생생하게 그려낸 작가이다. 10여년을 동북에서 생활한 강경애는 발표 작품의 절반 이상인 12편을 연변체험을 소재로 하여 썼다. “소금”(1934)은 이중의 대표작이다.  “소금”은 주인공 봉염 어머니의 수난사인 동시에 각성사(覺醒史)이기도 하다. “소금”은 우선 봉염 어머니의 회억을 통하여 봉염이네 가족의 연변 이주 원인과 연변에서의 생활을 그려낸다. 대다수의 농민이 그렇듯이 봉염이네 가족의 연변 이주도 경제적인 원인에 의한것이였다. 고향에서 부치던 밭을 떼이고 연변에 흘러들어 다시 중국인 지주의 땅을 얻어 농사를 하며 살아온 지난 10여년을 봉염 어머니는 “오늘까지 목숨이 붙어 있는것이 기적같다”고 말한다.  조선에서나 연변에서나 모두 소작인이라는 신분을 벗어날수 없다는 점에서 “소금”의 봉염이네는 “홍염”의 문서방네와 일치하다. 연변에서 봉염이네 가족의 생활에 가장 큰 위협이 되는것은 수시로 마을에 들이닥치는 각종 무장세력과 불합리한 사회적 구조이다. 작품의 서두에서 이런 무장세력의 침입에 의한 가정의 파괴를 보여주었다면 이어지는 본문에서는 봉염 어머니의 수난을 통하여 불합리한 사회적 구조를 그려낸다. 봉염 어머니는 믿고 찾아들어간 지주의 집에서 성적 착취를 당하며 생계를 위하여 자신의 친자식을 떼여두고 남의 자식에 젖을 먹이러 유모로 들어가나 이 자리도 얼마를 견디지 못하고 잃게 된다. 이 사회의 법에 따라 법이 정해준 대로 열심히 살려고 하였지만 사회가 봉염 어머니에게 가져다 준것은 아들의 가출 및 남편과 두 딸의 죽음뿐이였다. 생존을 위하여 봉염 어머니가 최후로 선택한것은 법이 금지하는 소금 밀수이다. 어렵게 소금을 집까지 가져왔으나 그를 기다린것은 집사대였다. 일련의 수난을 통하여 봉염 어머니는 끝내 자신과 같은 가난한 사람의 편에 선것은 공산당이라는것을 알게 되면서 계급적으로 각성한다.  1930년대 중반에 이르러 중국에 조선이주민 자신의 현지문단이 형성되기 시작하는데 대표적 작가가 안수길이다. 중국에서 16년간 생활한 안수길에게 있어서 중국은 말 그대로 “제2의 고향”이였으며 이곳에서의 삶은 일상 그 자체였다.  “새벽”(1935)은 안수길의 첫 발표작품이다. 함경도에서 간도의 M골로 이주해온 창봉이네는 창봉이의 누이를 담보로 조선인 마름 박치만으로부터 빚을 내여 소작인 생활을 시작했다. 아버지는 제시간에 빚을 갚기 위하여 소금밀수를 하며 이를 안 박치만은 집사대(緝私隊)와 짜고 들어 창봉이네 집에 벌금을 안긴다. 제시간에 빚을 갚지 못하도록 하여 담보로 내세운 누이를 첩으로 삼기 위함이였다. 창복이의 아버지는 박치만에게 딸을 빼앗기게 되는 상황에서 중국인 지주 호씨에게 청원하는것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그러나 1차 청원에서 만족스러운 결과를 가져오지 못한 아버지가 2차 청원을 계획하고 있을 때 창복이의 누이가 자살을 하는것으로 갈등이 사라지며 작품도 끝난다. 최서해의  “홍염”(1927), 강경애의 “소금”(1934), 안수길의 “새벽”(1935)은 모두 연변을 배경으로 하며 여러모로 류사점을 갖고 있다. “새벽”에는 이주민이 겪은 고난사의 거의 모든 요소들이 등장한다. 경제적 원인으로 인한 중국 이주, 안해와 딸을 담보로 한 소작문제, 중국인 지주와의 관계문제, 당지 무장세력의 횡포, 소금밀수 등이 그것이다. 이중에서 쪽박 차고 살길을 찾아 간도에 이주 오는 모습, 중국인 지주와의 관계와 소작문제, 딸을 볼모로 중국인 지주에게서 빚을 냄으로써 겪는 불행 등 모티프는 최서해의 “홍염”에도 등장한것이며 쪽박 차고 살길을 찾아 간도에 이주 오는 모습, 중국인 지주와의 관계와 소작문제, 당지 무장세력의 횡포, 소금밀수 등 모티프는 강경애의 “소금”에도 나타난것이다. 물론 조선인의 중국 이주와 정착 과정에 봉착한 문제는 이외에도 많을것이다. 하지만 이 시기를 살아온 대표 작가들의 대표작이 공동으로 다룬 문제라는 점에서 이것이 어느 정도의 대표성을 갖고 있음은 부인할수 없겠다. 세 작품의 공간적 배경이 모두 연변이라면 시간적 배경은 대체로 “자유 이민 시기”(1905~1931)에 해당된다. 세 작품은 20세기 초반 생계형 조선이주민의 중국 정착 과정을 그리고 있다. 또한 이런 힘겹고 눈물겨운 과정을 통하여 정착하였기에 더욱 이 땅을 아끼고 사랑하지 않았나 싶다. 일제의 패망과 함께 조선반도가 광복을 맞이하면서 조선(한국)으로 귀환한 사람이 근 100만이였으며 절반 이상인 130만명 좌우의 조선인들이 중국에 남았다는 사실도 이를 반증하고 있다.  이렇게 중국에 남은 사람과 그 사람들의 후손이 곧 조선족인것이다. 지난 백여년간,참으로 많은 인물과 사건들이 모여 “조선족”이라는 개념을 형성하였다. 이제 우리는 “조선족”이라는 개념이 내포하고 있는 이 인물과 사건들을 돌이켜보고 핵심적인 내용들은 다시 정리하여 널리 선전함으로써 조선족으로서의 자긍심을 높이고 사명감을 투철히 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것은 조선인의 중국 이주와 정착 과정에 겪은 일련의 아픔에 대한 리해로부터 시작된다고도 할수 있겠다.▣(책임편집/김향덕)   
4    경희대학교 교환기 댓글:  조회:1294  추천:0  2016-08-05
 글/한동준  청와대 앞에서 저자     2014년2월27일, 나는 순리롭게 인천으로 행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이제 4개월간의 경희대학교 교환생활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인천공항에 대기하고 있던 학교뻐스에 앉은 나는 생소한 환경에 저으기 긴장되는 마음을 쓸어 내리며 학교로 향하였다. 한국은 나를 포함하여 우리 조선족과 끈끈하게 련결되여 있는 곳이다. 많은 초중, 고중 친구들이 현재 여기서 일을 하거나 학업을 이어가고 있고 부모세대들은 일찍 내가 어릴적에 이곳에서 몸을 숨기며 돈을 번 적이 있다. 주위친구들과 비교해보면 나의 한국행이 시간적으로 늦은 느낌도 주겠지만 그래도 자신의 발로 이곳을 누비며 나만의 인상을 만들수 있다는 생각에 다소 들뜬 심정이였다.   조선족과 한국어       2012년부터 산동대학교에서 한국문학 석사공부를 시작한 나는 경희대학교에서도 관련 수업을 신청하였다. 한국의 본토 연구생들과 함께 수업을 듣고 발표를 한다는것은 나에게 하나의 도전이였다. 그것은 내가 줄곧 경상도 방언을 사용해오면서 표준 한국어인 서울말은 석사공부를 시작해서야 배웠고 또 순 한국어로 된 수업에는 참여해본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걱정은 수업이 시작되면서 점차 소실되였다. 동일한 언어, 동일한 전공이란 점이 나로 하여금 빠른 시일내에 새로운 수업환경에 적응하고 류창히 발언을 할수 있게 하였다.     그러나 모든 한국에 있는 조선족이 나처럼  “안일한” 환경에서 한국문학 관련 수업을 들으며 한국어를 배울수 있는 여건이 주어진것은 아니였다. 다수의 조선족들이 한국어를 제대로 구사하지 못한다는 이미지가 한국인들에게 각인된것이 현실이였다.     경희대에서의 생활이 2개월을 맞이하는 시점이라 기억된다. 중국어를 꽤 잘하는 고려대학교의 한 녀대생이 나와 같은 학과의 친구들을 지하철역에서 우연히 알게된 인연으로 우리들을 교회에서 주최한 자선모임에 요청하였다. 특별히 가고픈 생각은 없었으나 중국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모임이란 얘기에 체험삼아 참석하였다. 종교에 크게 관심이 없는 나는 덤덤히 앉아 있다가 곁에 있는 한국인 목사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여러가지 주제가 오가던 중에 그는 무엇인가 생각이 난듯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물어보는 것이였다. 그리고 대답을 들은 그는 고개를 숙이고 잠간 침묵하다가 말을 꺼내였다. “제가 그동안 중국인들을 대상으로 많은 활동을 하였는데 선생님처럼 한국어를 잘하는 중국동포는 처음이네요.”     목사의 평가에 나는 약간 당황하였으나 이내 평온을 찾았다. 사실 연구생 1학년부터 짬짬이 한국인을 대상으로 통역 아르바이트를 해온 나는 이와같은 평가를 들은적이 한두번이 아니였다. 그러나 한국에 와서 직접 듣고보니 재한 조선족의 이미지가 “한국어가 서툴다”로부터 시작돼서 이에 그치지 않고 있다는것이 심심히 느껴졌다.     중한수교를 기점으로 조선족사회의 주된 이야기거리는 줄곧 한국행이였다. 우리의 부모세대들은 큰돈을 벌 목적으로 이웃나라로 넘어갔고 재한 조선족의 이미지는 이때로부터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한국에 정착한 부모세대들은 다수가 문화수준이 낮았고 돈을 벌수 있는 가장 직접적인 수단이 두발로 뛰는것이였다. 보통 남성은 공사장에서, 녀성들은 식당에서 일을 했다. 그들은 한국어를 제대로 배울 시간이 없었고 한국에 온 목적도 여기에 있지 않았다.     서툰 한국어 실력과 다수가 3D업종에 종사하는 현황, 그리고 와중에 언론매체에서 의식적으로 보도되는 조선족과 관련된 불미스러운 기사들, 이 모든것들이 한데 뭉쳐 재한 조선족의 이미지를 형성하고 있었다. 자선모임에서 만난 그 목사의 반응은 분명 기존에 유지해왔던 조선족에 대한 이미지가 나에게는 적용되지 아니함에서 일시적인 혼란이 생겼기 때문이다.     하나의 집단에 대한 이미지가 일단 형성되면 쉽사리 개변되지 않는다. 이는 재한 조선족사회 개개인의 노력과 시간적으로 몇세대의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하다. 여기서 아이러니한것은 근년래 대학교육을 받은 신세대 조선족이 한국에 정착하여 사회의 여러 업종에 종사하면서 재한 조선족사회가 다계층의 구조를 이루어 가고 있지만 이들의 대부분이 한국어, 즉 서울말을 능숙하게 구사하는 원인으로 주위의 한국인들이 같은 국민으로 착각하면서 재한 조선족사회에 일어난 긍정적인 변화들이 한국 서민층으로부터 간과되여버렸다는것이다. 언어에서 시작된 문제는 결국 또 언어에서 말썽이 일어난 셈이다. 그러나 이는 그 누구를 탓할 일이 아니다. 재한 조선족사회가 한국 서민사회와의 융합과 발전은 소통의 원활에서부터 시작되는것이 당연한 행보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족사회는 집단적인 목소리가 절실히 필요하다. 기쁜것은 몇년전부터 재한 조선족사회의 집단적인 움짐임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고 한다. 개개인의 활동이 무의식간의 착각을 일으킬수 있다면 집단이 내는 목소리는 재한 조선족 사회를 한국사회에 정면적으로 알리고 나아가 재한 조선족 사회의 이미지 개선과 응집력 제고에도 크게 도움이 될것이다.     나는 부모세대든 신세대든 한국어를 능숙히 구사하든 못하든 모든이가 힘을 합쳐 함께 움직이면 언젠가는 좋은 결과를 가져올것이라 굳게 믿는다.   경희대 캠퍼스 친척 방문       경희대에서의 교환생활은 편안함으로 가득차 있었다. 숙사를 따로 찾을 필요가 없이 우리는 희소한 학교 기숙사에 배정됐다. 숙사는 통일로 2인실이였고 층마다 면학실이 있어 굳이 도서관에 가서 자습할 필요가 없었다. 기숙사 지하에는 자동 세탁기와 건조기가 설치되여 있었고 세탁실 바로 옆쪽에는 헬스방도 무료로 운영되고 있었다. 국내의 기숙사는 이와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였다. 널찍한 거주공간에 습관된 나는 현실속의 삶의 공간에 대한 감촉이 무디여 있었다. 그리고 이는 한국에 나와 일하는 친척을 만나면서 점차 되살아났다.     이국생활에서 느끼는 생소감이 얼마간 가셔질 때 나는 한국에 나와 일하고 있는 이모집에 초대됐다. 그곳은 조선족이 모여 사는 동네였다. 골목길을 걷는 동안 익숙한 연변 사투리가 곁을 지나가는 아주머니들속에서 들려왔다. 이모는 현재 이모부와 이모할아버지, 이모할머니 이렇게 네 식구가 한집에서 살고 있다고 하였다. 한참을 걸어 우리는 자그만한 4층 주택의 1층과 지하사이에 박혀져 있는 문앞에 멈춰섰다. 계단 세개정도를 내려 나는 문을 열수 있었다. 평소에 말로만 듣던 반지하가 어떤 모습일까하는 의문의 표정으로 나는 집안으로 발을 옮겼다. 그런데 또 세개의 계단을 걸어서야 지면에 도착했다. 이모할머니는 한창 저녁을 준비하고 있었다. 나는 주방이자 거실인 이 좁은 공간을 한눈에 둘러보고 이모할머니께 인사를 올렸다. 실외의 빛은 집문 오른쪽켠에 낸 창문 웃쪽을 통해 가까스로 들어왔다. 주방은 다소 캄캄하였으나 전등을 켤 정도까지는 아닌 애매한 상황이였다. 어두움속에 서서 나는 이모할머니와 잠깐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그들과 눈앞의 정경에 약간의 충격을 먹은 나는 너무나 대조되였다. 이모할머니는 환히 웃으며 나더러 방에 앉으라 하였다. 집안의 유일한 잠자리방은 주방과 방문 하나로 갈라져 있었다. 크기는 주방만큼 하였으나 옷장과 책상, TV 등이 있다 보니 더욱 비좁아 보였다.     방에 앉아 있던 이모부는 반가이 인사를 건네였다. 이모와 이모부는 나와 나이 차이가 별로 없어 관심사가 비슷했다.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이모부는 어딘가 불편한 기색이였다. 알고보니 몇달전에 공사장에서 일하다가 허리를 다쳐 현재 물리치료중이였다. 다행히도 회사에서 모든 비용을 부담하게 되여 있어 이모부는 치료에만 열중하면 되였다. 그러나 이모는 돌연히 현재 이모부와 함께 인터넷을 통해 국내로 화장품을 판매하는 사업을 계획중이라고 하였다. 그 뜻은 이모부가 완치되여도 이후에는 육체로동을 할수 없다는것을 의미하였다. 나의 주변에는 이모부처럼 공사장에서 다치거나 고된 로동에 골병이 든 친척들이 적지 않았다. 이모가 이제부터 가정의 기둥 노릇을 해야 된다는 생각에 나는 가슴 어딘가 찡해났다.     창밖이 네온등의 빛에 아른거릴 무렵 이모할아버지가 돌아왔다. 저녁까지 일을 하였지만 피곤한 기색이 없었다. 이모가 짧게 소개를 하고서야 그는 나를 알아보았다. 이모할아버지는 웃으면서 예전에 걸음마를 금방 뗏을 적의 나를 본적이 있다고 하였다. 저녁식사는 푸짐하게 차려졌다. 이모할아버지와 이모할머니는 나더러 한국에 있는 동안 집밥이 생각나면 꼭 오라고 하였다. 나는 정성스레 만든 반찬을 먹으며 그들과 한집식구가 된 느낌이 들었다.     이모할아버지와 이모할머니는 일흔을 앞두고 있으나 여전히 이국땅에서 온갖 시련을 겪으며 돈을 벌고 있었다. 자식에 대한 사랑이 아니였다면 이는 불가능 했을것이다.     돌아가는 길에 보슬비가 내렸다. 나는 문득 소학교 때 한국에 간 어머니가 걸어온 한통의 전화가 생각났다. 그때 어머니는 한국의 어느 식당에서 카운터 안내원으로 있었다. 전화속에서 그는 요즘 비가 많이 내려 퇴근하고 나면 먼저 바가지로 세집에 고인 비물을 퍼내야 된다고 하였다. 나는 홍수가 졌는가고 걱정스레 물었다. 어머니는 그게 아니라 반지하에 살면 비가 약간만 많이 와도 비물이 흘러든다고 하였다. 그때까지도 반지하란 무엇인지 모른 나는 아는척하며 얼버무려버렸다.     천천히 움직이는 인파속에서 나의 머리속에 어머니가 바지가랑이를 걷고 물을 퍼내는 모습이 잡히였다. 순간 목이 메여 왔다. 이미 10년도 더 지난 과거에 대한 회억이였지만 눈가에 차오르는 뜨거움을 걷잡을수 없었다. 한국에서의 생활은 이름못할 아픔과 어려움으로 가득차 있다. 그러나 이들은 신변에 혹은 바다건너 저편에 기댈수 있는 희망이 있어 끝까지 버티고 있는것이다. ▣
3    우리 집 설 제사 댓글:  조회:1353  추천:0  2016-08-05
글/한직능       나는 내몽골 우란호트시에서 약 40리 떨어진 뽀다리칸 조선족 마을에서 태여났다. 지난 세기50년대초 인구대이동으로 우리집은 우란호트시에서 약 20리 떨어진 고성촌으로 이사하였고 제3대에 편입되였다. 그리고 몽골족과 한족이 위주인 졸라무촌에서 나는 유년시기를 보내였다. 고성촌은 일년사계절 몽골바람이 기승을 부리고 겨울이 되면 혹한에 폭설이 자주 내리는 대흥안령 끝자락의 한 빈곤한 마을이다. 100여호가량 되는 이 마을은 나름대로 환경과 자연에 잘 적응하면서 민족전통을 개혁개방전까지만 하여도 그대로 유지하며 살아온 민족공동체이다. 해마다 설날, 정월대보름, 오월단오, 추석, 동지가 되면 마을 전체가 한복을 차려 입고 함께 먹고 마시고 춤추며 즐겼다. 그중에서 가장 기억에 많이 남는 일은 바로 설 제사이다.     겨울은 농한기라서 할 일이 없는데다 일년 농사하여 먹을것이 많은 때이다. 집집마다 이맘 때면 설음식과 제사음식을 준비하느라 눈코뜰새 없다. 집집마다 거의 제사를 치르기 때문에 조과, 포(육포,어포), 반(흰쌀밥), 나물무침 등을 만드는것은 기본이다. 제례상에 올리는 떡은 절편, 인절미, 시루떡, 송편, 경단 같은것이 있는데 주로 편류(녹두고물편, 흑임자고물편)를 사용하며 제사식 전날 미리 쌀을 담그고 편에 고물로 얹을 녹두와 팥, 그리고 흑임자를 물에 불려 껍질을 벗겨둔다. 제사 당일 새벽 일찍 담가두었던 쌀을 가루로 빻은 뒤 고물을 얹어 찐다. 정성스럽게 찐 떡은 여러개 포개여 고인다. 그믐날 저녁에는 방마다 호랑불을 환하게 켜고 그 누구도 잠 잘 생각을 못한다. 잠들었다가는 귀신이 와서 이튿날 두 눈섭을 하얗게 만든다고 얼음장을 주어서 설친 잠을 자기 일쑤다.     제사는 사람이 죽어도 혼백은 남아있다는 원리로 살아 있을 때처럼 조상을 모시고 그것이 효도라는 조상 숭배사상이였다. 우리 집은 4대조까지 설날과 추석에 제사를 지냈다. 나는 해마다 제사가 오는 날이 제일 감미로운 때이다. 평소 사과와 배는 구경도 못했지만 제례상을 올릴 때 사과와 배는 겉껍질을 벗겨야 함으로 그것도 버리기 아까워서 모아두었다가 내가 먹어 치우군 했었다. 제사에 올리는 음식은 양식과 진설에서 신위로부터 보아 제1렬에 메(밥)와 갱(국), 제2렬에 적과 전 , 제3렬에 탕, 제4렬에 포(脯,육포,어포)와 나물, 제5렬에 과일과 조과를 놓는다. 각 렬의 진설원칙도 정해져서 “좌포우혜”라 하여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 보았을 때 왼편에 포를, 오른편에 식혜를 놓고 “어동육서”라 하여 어류는 동편, 육류는 서편에 두었다. “두동미서”라 하여 생선의 머리가 동쪽으로, 꼬리가 서편에 향하도록 하고 “생동숙서”라 하여 동쪽에 김치를,서쪽에 익힌 나물을 진설한다. “좌메우갱”이라하여 밥은 왼편에 국은 오른편에 놓는다. “홍동백서”라 하여 동쪽에 붉은 과일을 서쪽에 흰 과일을 놓고 그 가운데 다식이나 산자, 약과 등 조과를 둔다.     해뜨기전에 일어나서 깨끗이 세수를 하고 아버지는 검은색 두루마기를 입는다. 그러나 홀기(의식의 순서)를 읽는다거나 축을 읽는 일은 없었고 지방을 쓰고 신위를 모시는 일도 거의 하지 않았다. 아마 간소화된것 같다. 아버지가 술을 한잔 따라서 피운 향을 중심으로 시계바늘 방향으로 한바뀌 돌린 다음 그릇에 붓고 모두가 정중히 큰 절을 두번 올린다. 이는 토지신을 숭배하여 농사가 잘 되라고 하는 의미로 해석된다. 다음 아버지가 정중히 술 한잔씩 부어서 4대조에게 올리고 큰 절을 두번 한다. 종손의 형제들, 종손의 아들, 손자 등 순위에 따라 각각 술을 붓고 큰 절을 올린다(실은 아버지도 외동이고 나도 외동이여서 이 절차는 금방 끝났다). 밥그릇마다 숟가락 두개를 꽂는다. 여덟모의 저가락은 먼저 어류우에다 얹었다가 절차가 진행되면서 한번 옮겨 찐 통닭우에 둔다. 그리고 종손이 술을 올린다음 일제히 큰 절을 올리고 종손이 헛기침을 할 때까지 엎드려서 소원을 빈다. 그 다음 숟가락에 밥을 조금씩 떠서 국에 넣고 숟가락도 국에 둔다. 술잔에 술을 첨잔하여 부은 후 정중히 큰 절을 두번 한다. 제사 절차는 끝나고 제사술을 한모금씩 마시는데 어린 나이지만 그때부터 나는 술맛을 알았다. 밥 한 그릇은 뚜껑을 닫아 저녁 때까지 찬장에 보관해 둔다. 비닐봉투를 네개 준비하여 각 봉투마다 각종 채소와 고기, 사탕, 술 등을 조금씩 넣고 그 봉투를 집앞의 큰 나무 밑에 버려둔다.     제례상의 음식들은 가족의 아침식사외에 대부분 점심때가 되면 마을 어른들을 청해다가 나누어 먹군 했다. 이 때 제일 신나는 사람들은 어른들보다 아이들이다. 아무리 빈곤해도  설이 되면 거덜거덜한 헌 옷을 버리고 새 목천 옷과 새 양말을 신고서 들까불며 삼삼오오로 떼를 지어 설인사를 한다는 빛깔 좋은 구실하에 좋은 음식 포식할 심산으로 상로인들 집부터 들쑤신다. 신을 벗고 구들에 올라가서 꾸벅 큰 절을 하면 한복을 차려입은 로인들은 만면에 웃는 얼굴로 “장가 갈 꿈 잘 꿨냐?”라는 덕담을 하면서 어느새 쟁반우에 다과나 떡을 내놓으며 먹으라 한다. 내놓을것이 많지 못해 맛이나 보는 정도지만 감칠맛 나서 후딱 해치우고는 또 다른집으로 향한다. 온 종일 쏘다니다 저녁이 되여 집에 올 때는 이미 올챙이 배가 된다.     상로인들은 다른것은 다 잊어도 어느 집 어느 아이가 설 인사를 하지 않음을 잘도 기억하고  “가정교육을 어찌 하였노?”하며 대노한다. 집에 오면 부모님들은 귀신같이 다 알고서 결례가 있었다고 호되게 꾸지람 하거나 귀한 자식 매 한개 더 때리는 격으로 걸핏하면 회초리로 종아리를 내리친다.     1958년부터 공공식당을 하면서 제례상도 할수 없었고 그후 닥쳐온 “4청운동”이나 “문화대혁명”으로 하여 온 동네의 제례상은 어디론가 모두 증발했다. 개혁개방후 량친부모가 다 돌아가신다음 우리집 제례상은 지금까지 내가 이어가고 있다. 도시에 살면서 조과나 떡을 만드는 일은 없고 제사음식을 거의 시장에서 구입하면 그만이다.      설이 오면 해마다 제례상을 하느라 나는 힘들었다. 집사람은 그래도 잘 따라주었으나 애들이 모두 한족학교에 다니다보니 제사지내는것을 마음속으로는 못마땅하게 여길지도 모른다. 무슨 목적으로 이렇게 견지하며 제사를 지냈는지 나 자신도 좀 모호하지만 가가호호 다 가족문화가 있다는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우리민족의 문화의 핵심은 효문화이고 제사는 효문화의 중요한 일환이며 보귀한 민족전통의 하나라고 나는 생각한다. 사람은 자기의 부모를 선택할수 없고 자기의 민족을 선택할수 없듯이 주어진 운명을 직시해야 한다. 민족도 출생도 전통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남을 진정 사랑할수 있다 하겠는가?     지금은 이주민 2세들마저도 제사를 지내는 집은 극히 드물고 민족문화에 대한 인식도 갈팡질팡하고 있다. 우리집도 그 어느 대에 가서 동화되여 설 제사도 없어지고 청주한씨 세헌공파 장손의 혈맥이 이름없이 사라질수도 있을것이다. 그러나 지금도 설 제사를 고집하는것은 내가 살아있는 기간이라도 조상들의 유훈을 지키고 정성을 다해 모시고 싶음이다. 나의 솔선적인 행동이 자식들에게 무언의 교육이 되여 설 제사가 오래오래 이어가기를 기대할 뿐이다. ▣
2    대림동에서의 사색 댓글:  조회:1197  추천:0  2016-08-05
 글/효문         말로만 자주 듣던 한국 서울의 대림동에서 보름이라는 시간을 체류했다. 백문불여일견이라더니 한족과 조선족들이 많이 집거하여 있는 대림동은 명실공히 서울안의 중국거리나 다름없었다. 그리하여 스스럼없이 들리는 한어, 연변 나그네들의 함경도 말씨, 심양지구 사람들의 평안도 말씨가 한데 뒤섞여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중국음식점, 중국상점, 직업소개소, 환전소 등 한국사람보다는 중국조선족과 한족을 상대로 하는 크고 작은 간판들속에는 사천의 마라탕, 동북타래떡과 만두를 파는 간판도 있었다. 그밖에 노래방 또한 도처에 있는데는 노래를 못부르는 사람을 상대로 노래연습장도 있었다.     대림동은 매우 자유스러운 거리다. 법과 질서를 위반하지 않으면 소신껏 자신을 표현할수 있는 거리다. 그러나 그속에서 우리는 우리대로 살고 있지 않는가? 아무데나 뱉어놓은 가래춤과 되는대로 널린 담배꽁초가 여기저기 자주 눈에 띄였다. 조금은 부끄럽고 유감스러웠다.     대림의 낮은 이렇다하고 밤은 어떠한지 알아보기 위해 토요일과 일요일날 일부러 대림거리를 산책하였다. 지금은 한국행이 아주 편리하여 가족이 모두 나가 함께 생활하는 가정이 많다고 들었는데 가족을 떠난 외로움과 그리움이 아직도 해소된것이 아닌지 휴식날 밤 끼리끼리 활동이 빈번했다. 도처에 남자들이 술마시고 좋은 기분에 큰소리로 떠드는 장면과 부처간이 아닌 남녀들이 한데 몰켜 다니는 장면을 심심찮게 볼수 있었다. 전에 불법체류 단속을 할 때야 어디 이런 풍경이 있을가? 이런 기회에 친구끼리 술을 마시며 직장에서, 회사에서, 노가다판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확 풀어놓는것 같아 좀은 무질서해보였지만 리해가  되였다.     이것은 또한 아무리 같은 민족이라해도 오랜 세월 다른 체제에서, 다른 가치관에서 생활했기에 이질적인 차이로 다년간 한국인들속에서 살아왔지만 그들 세계속에 들어가지 못하는 원인과도 관련된다. 그러니 한국에 살면서도 부득이 같은 문화권에서 오래 생활해 온 조선족들끼리 래왕하게 되는것이다. 이제는 한국에 와 가족이 함께 사는 사람이 날로 많아져 생일이나 잔치, 환갑연, 지어는 아기 돐잔치까지 한국에서 진행한다. 그리고 동창회, 향우회 등 동아리도 수없이 많다. 그렇게 자주 만나 스트레스를 풀면서 우의를 돈독히 하는것은 좋은데 소비돈이 늘어나고 술좌석이 잦다고 한다. 부조돈만도 대국의 기질이 있어 통크게 10만원(인민페 600원), 서로 사이가 좋으면 20만원이다. 한국인은 보통 5만원정도인데 말이다. 서울에서 생활하면서 한국인의 생활페턴을 따르는것이 아니라 점차 중국에서 생활할 때의 그 생활방식대로 살아가는것이다. 돈은 한국사람만큼 벌고 한족사람처럼 절약하여 쓰지 않으면 돈이 모아지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저런 허점이 있는 와중에도 이제 더는 불법체류를 단속하지 않아 사람들이 왕래가 매우 쉬워졌고 길거리를 다니는 사람 역시 자유스러워 그 어떤 불안이나 공포감을 찾아볼수 없다는것이 반가왔다. 이제 한국행은 조선족에게 거의 자유왕래라 해도 되지 않을가. 거의 60만에 가까운 사람들이 가 있다니 세 사람당 한사람 꼴로 한국에 정착하고 있는것이다.     그러니 이제 한국땅은 서울을 중심으로 어디가나 중국조선족이 있는 곳으로 되고 있다. 전에는 월세나 고시원 등에서 거주했다면 이젠 점차 월세도 아니고 전세집, 형편이 좋은 사람들은 아예 살림집을 사고 눌러앉은것이다.     대림동에서 필자가 알아본데 의하면 많은 사람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겠다고 했다. 젊은 계층들이 더욱 그렇다면 조선족의 미래는 어떻게 되는가? 백여년 지켜온 우리의 민족공동체는 어떻게 될것인가?     정녕 우리는 누구인가 하는 물음을 수시로 제기하게 되는 곳이 바로 서울의 중국거리 대림동이다. 우리는 아무리 그 속에 살아도 남인것이다. 말하자면 렴가의 로동력에 불과하다는것이다. 그렇다면 서울에만 가면 되고 돈만 벌면 되는것인가? 사회적 인간으로서 마땅한 대우와 권리를 가져야 인간다운 삶을 사는것이 아닐까? 공민권을 갖지 못하고 선거권과 피선거권도 없이 그저 세월가는대로 산다. 돈만 바라보고 사는것이다. 그것이 한국에서의 중국 조선족의 삶이 아닌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이 언제까지 지속될것인가? 우리가 처음 한국땅을 디뎠을 때 이곳이 낯설었듯이 언제가는 중국도 낯설어질것이다. 점차 중국의 정치사회제도에 관심을 갖지 않게되고 중국을 모르는데서 많은 불편이 생길것이다. 특히 가장 걱정되는것은 한창 성장하는 아이들이다. 그들은 한국에서 태여나 한국에서 교육을 받는다. 그러므로 중국인이지만 한어를 모른다. 한어를 모르고 향후 중국에 와서 어떻게 적응하겠는가? 때문에 왔다갔다를 시계추처럼 반복하다보면 우리는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될것이다.     우리는 어찌해도 조선족으로서 중국의 물을 먹고 중국에서 뼈를 자래웠기에 중국문화의 영향을 깊이 받았다. 소수민족에 대한 정책이 좋은 나라에서 자신의 정체성과 동질성을 지키면서 앞서가는 민족으로 사는것이 한국에서 생활하는것보다 훨씬 보람이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1    특색이 곧 우세다 댓글:  조회:910  추천:0  2016-08-05
글/명호   통화시조선족소학교 교정에 세워진 비     언제부터인가 많은 조선족학교에서는 일본어 교육을 자신의 렬세로 여기고 영어 교육의 대세에 합류하였다. 이와 더불어 한동안 조선족학교의 대학입시성적이 떨어지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런 현상은 최근년간 크게 개선되였는데 그 주요원인이 바로 다년간 포기했던 일본어 교육을 다시 제자리로 복귀시킨데 있었다. 일본어 교육의 회복은 많은 조선족 학교와 수험생들이 “특색이 곧 우세”라는 의미를 되새겨 보게 하였다.     올해에도 각 지방의 조선족 고중은 대학시험에서 대풍년을 맞이했다. 길림성 문리과 장원은 물론 료녕성, 흑룡강성의 여러 지역에서도 조선족 학생이 장원을 차지했다. 와중에 상대적으로 약한 리과에서도 조선족 학생이 길림성 장원을 따냈다는것이 특기할 일이다.     아울러 몇년전까지만 해도 내리막길을 걷던 여러 지방의 조선족학교들이 다시 생기를 회복하면서 대학입시에서 실력을 보여주기 시작하였다. 특히 필자의 고향에 있는 화룡시조선족고중을 실례로 들면 올해 79명의 수험생가운데 11명의 리과 수험생 전부와 68명의 문과 수험생가운데의 66명이 대학입학선에 도달하면서 리과생 100%, 문과생 97%가 대학문에 들어서는 쾌거를 이룩했다.     다만 이러한 목표가 일조일석간에 실현된것은 아니다. 개혁개방과 한국 로무수출의 배경하에 조선족사회는 도시화와 인구감소 및 류실의 진통과 더불어 우질교육자원이 연길 등 중점지구로 기울면서 각 지방의 조선족교육이 1990년대 이후로 심한 진통을 겪어왔다. 이런 상황은 최근년간에 많이 개선되고 있으며 여러 조선족 학교들에서는 지속적인 노력을 거쳐 교육질이 날로 향상되고 있다. 례컨데 화룡조선족고중은 2009년의 대학입학률이 11.8%에 불과하던것이 2010년, 2011년에는 각각 29.6%, 30.4%에 도달하였고 2012년에 50%선을 넘어서고 2013년 및 2015년에는 각각 89.5%, 91.1%에 도달하였다. 올해의 입학률은 문리과를 통털어 97.5%에 도달하였다. 이는 거의 모든 수험생이 대학에 붙는다는것을 의미한다.     상기의 상황들을 자세히 살펴본다면 근년래 조선족 학생들의 대학진학률의 제고는 여러 조선족중학교가 자신의 교육특색을 되찾고 부활시킨것과 무관하지 않음을  알수 있다.     조선족교육의 특색을 얘기하자면 첫째로 본 민족의 언어로 대학시험을 치르는것이다. 과거 많은 사람들은 이를 조선족교육의 렬세로 여기고 한어문수업의 비률을 높힌 결과 조선족학생들의 해독능력이 떨어져 대학입시성적에 영향을 주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근년래 조선족학교에서는 한어교육을 지속적으로 진행하는 한편 조선어교육 시간을 늘였다. 이는 학교와 담임교원들이 더욱 많은 정력을 학교수업에 쏟아부어야 함을 의미하였다. 화룡조선족고중의 교원들은 대학시험에 필요한 학습자료들을 모두 조선어로 번역하였다. 비록 품이 많이 드는 작업이나 학생들의 해독능력의 제고와 대학입시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는 결과를 가져왔다.     일본어 공부에서 조선족학생이 우세를 차지하는 리유는 조선어와 일본어가 같은 알타이어계에 속하기 때문이다. 몇년전부터 영어가 대세를 타면서 많은 조선족학교에서도 이에 합류하였고 그동안 견지해오던 외국어수업을 영어로 바꾸었다. 조선족학생들이 영어에서 우세가 없는것은 누가 말하지 않아도 뻔한 일이다. 따라서 외국어 교육에서의 이러한 변화는 조선족학생들의 대학입시 성적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것이다. 이에 화룡시조선족고중과 같은 학교에서는 일본어수업을 다시 전개하였고 짧은 시간내에 좋은 효과를 보았다. 올해 대학입시에서 화룡시조선족고중의 정아학생이 화룡시 문과장원을 따낸데는 132점의 외국어 성적이 한몫을 톡톡히 하였다.     몇년전부터 시작된 영어교육 바람에 조선족학생들은 자신의 특색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오늘날 다양한 세계에서 자신만의 특색을 인식하고 그것을  제대로 장악하고 리용한다면 우세로 전환할수 있다. 특색의 가치는 대학입시뿐만 아니라 학생들에게 더욱 많은 선택의 기회를 부여한다. 화룡시조선족고중의 학생들은 일본어 성적으로 명문대의 문을 두드리는 동시에 향후 일본으로 류학갈수 있는 기회도 주어진다. 그리고 이런 일본어 우세에 근거하여 교육부와 일본교육기구의 더욱 많은 지지와 관심을 모으는 특혜를 누릴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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