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넋이 살아 숨쉬는 백두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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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리혼은 최적의 선택인가 댓글:  조회:2213  추천:0  2018-12-23
    조화로움은 자연과 사회의 모든것을 포함한 만물의 시작이다. 조화는 사물이 존재하는 최적의 상태이며 모든 아름다운 사물의 공통한 특점이다. 조화로움을 추구하고 실현하는것은 옛적부터 인류가 실현하고저 하는 아름다운 소망이였다.     가정은 인류사회의 기초적인 구성원이며 수많은 가정들이 모여 사회를 구성한다고 하여 가정은 사회의 세포라고 일컷는다. 땅과 하늘의 조화가 세상만물을 만든 조물주라면 남편과 안해의 조화는 행복이 넘치는 가정이 있게 하고 더 나아가서 사회의 조화와 평안을 이루도록 한다.     통계에 따르면 조선족이나 한국인이나 우리민족의 리혼률은 세상에도 이름있을 정도로 아주 높다고 한다. 리혼을 자연스런 현상으로 받아들일 정도로 우리민족은 리혼에 관대하다. 문명해서일까, 아니면 자신만의 인생을 고집하는 집착에서일까, 아니면 자사자리한 인간의 욕심의 발로여서일까. 애인이 없으면 인생을 헛살았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혼잡한 민족사회의 현실을 과연 우리는 문명으로 해석할수 있을까. 리혼에 따르는 가정파탄과 자녀성장이 입는 타격 등 이루다 말할수 없는 현상들은 어떻게 하구.     맹자는 “인지초성본선”라고 하였다. 인간은 필경 동물이니까 성(性)에 대한 추구는 본능일수밖에 없다. 그러나 인간은 고급동물인만큼 선(善)역시 인간의 속성이다. 인간은 세상에 알몸으로 태여나 성장하면서 형형색색의 인간으로 거듭나게 된다. 사회가 우리를 만들었는지 아니면 우리가 사회를 복잡하게 하고 있는건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언제나 사회의 구성원이 되여 성(性)과 선(善)의 조화를 이루며 힘겨운 생활을 이어나간다. 량자의 조화가 깨질때 사회는 무질서상태에 빠지게 된다. 삭막한 사회에서 힘든 삶을 살아갈때 유일한 안식처는 그래도 가정이다.     논밭은 잡초 때문에 손해를 보고 인간은 탐욕 때문에 손해를 볼때가 많다. 세상의 모든것을 차지하고싶은 욕망에 주어진 시간을 쪼개가며 설쳐보지만 물질적 풍요로움의 뒤에 따르는것은 과연 진정한 행복일까. 도덕성 결핍으로 인한 정신세계의 몰락은 가정파탄과 사회불안, 그리고 자녀들의 불행으로 한걸음한걸음 몰아가고 있다.     코끼리와 소는 풀만 먹어도 몸체는 크다. 세상만사 돌고돌아 물레방아라고 어떻게 받아들이는냐가 중요한것이다. 가정을 버리고 부모처자를 버리고 거창한 인생을 살것 같이 설채보지만 알거지가 되는 사람, 늙고 병든 몸으로 홀로 살아가야 할 독거로인도 부지기수이다. 자신의 인생을 뒤돌아보느라면 그래도 회한의 눈물을 흘릴수도 있겠지만 떠나버린 사랑은 식을대로 식어 되돌이킬수 없는 안타까움만 외로이 남아있다.       산산이 흩어져 눈에서 멀어지면 언젠가는 마음에서도 멀어지게 된다. 가정이 파탄되면서 민족사회가 혼란상태에 빠지고 민족의 정체성과 민족사회의 안정에까지 영향주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보호자없이 홀로 성장기를 거치는 아이들이 범죄의 사각지대에서 갈팡질팡하다가 범죄의 표적이 되거나 범죄자에게 리용당하는 안타까운 일들이 자주 발생할뿐더러 정신장애 위험군으로 될수 있다는것이다. 자신들의 세대에 어울리지 않는 인생을 살아가는 그들을 보면서 어른들은 과연 무엇을 생각해야 할까.     금전욕에 빠진채 아무리 우를 쳐다보아도 무엇도 없는 하늘뿐이다. 넋을 잃고 쳐다보아도 돌아오는건 검은 구름과 비바람뿐이다. 아래를 보느라면 마음의 여유와 함께 계절따라 달라지는 세상만물의 모습에 매혹되여 여유로운 삶을 추구하며 윤택나는 인생을 살아갈수 있는데도 말이다.     부창부수는 부부의 높은 정신적 경지와 품격을 의미한다. 가정의 화목은 건강의 뿌리이고 삶의 질이며 장수의 지름길이다. 행복은 좋아하는 사람과 알콩달콩 지지고 볶으며 모자라면 채우고 넘치면 치우면서 사는것이다. “지족자상락”이라고 주어진 자신의 위치에서 가정의 소중함을 터득하면서 살아가는 삶의 자세, 짜면 어떻고 싱거우면 어떠랴. 여유 넘치고 웃음 넘치는 가정이 바로 지상락원이 아닐까.       조화로운 가정에서만 우리는 비로서 향기 넘치는 봄바람에 아름다운 연을 날릴수 있고 여름의 정열로 행복을 창조할수 있으며 가을의 풍성함을 즐겁게 수확할수 있으며 축적된 겨울의 여유에서 삶의 행복을 만끽할수 있다. 가정을 지켜야 하는 리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17    중년을 말해본다 댓글:  조회:1545  추천:0  2017-07-13
오늘도 어김없이 점심식사후 체육관을 찾았다. 올해 따라 유난히도 무더위가 기승을 부려 사람마다 그늘을 찾아 몸을 식히느라 여념이 없지만 나는 매일 운동으로 더위와 싸우고 있다. 이열치열이라고 땀동이를 쏟고 나면 이렇게 개운할수가 없다. 하지만 인젠 쉽게 체력이 고갈되고 탄력이 떨어지면 스파이크가 뜻대로 안된다. 숨결마저 거칠어질때면 세월의 무정함에 마음이 허전하고 젊은시절이 저절로 그리워진다. 지난 세월, 나에게도 생기넘치고 해빛 넘치는 소년시절이 있었다. 미래에 대한 동경과 희망으로 무대를 주름잡던 시절, 미끈한 체격에 배구면 배구, 춤이면 춤, 노래면 노래, 공부면 공부, 종횡무진하던 소년시절, 대학입시제가 회복되면서 운좋게 또 하늘의 별따기인 대학문에도 발을 들여놓았으니 사람들의 집중조명을 받는것을 당연지사로 받아들일 정도로 가슴뿌듯한 옛시절이였다. 수십년간 환상을 현실로 바꾸기 위한 몸부림을 치면서 자신의 인생에 삶의 의미를 수없이 부여하였지만 언제부터인지 저도 모르게 넘치던 생기가 뜸해지더니 중년세대에 들어섰다. 돌려올수 없는 청춘시절, 안타까움에 청춘시절의 끝자락을 잡고 놓치지 않으려 안간힘을 써본다. 중년세대라는 현실을 받아들이기 싫지만 사람들은 중년은 뿌리깊은 나무라며, 깊은 맛이 나는 묵은 장이라며 의미있는 위안을 해준다. 중년이 되고 보니 내심 두근거리던 가슴도 정적속에 파묻히고 경망스러운 행위를 받아주지 않는다. 마치 사품치며 흐르던 급류가 넚은 강에 흘러들어 소리없이 자취를 감추고 내가 언제 그랬냐싶을 정도로 너무도 고요히 흐르는것처럼 말이다. 혹은 몸에 담은 책임의 무게가 너무 커서 저도 모르게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는게 아닌지 의구심이 든다. 삶의 모양새가 크면 큰대로 작으면 작은대로 살아가는 인생이 더 편해지는것 같다. 이런 하루일상이 쌓여 내 인생이 만들어지고 나의 력사가 만들어지고 있는것이다. 중년이 되고 보니 주변의 사람과 물건들에 시선이 가도 이왕과 그 의미는 다르다. 집착이 아닌 감수의 의미가 크고 여운을 즐기려는것 같다. 젊은시절, 인기스타에 대한 열광도 리성으로 바뀌면서 현실적인 자세로 사람과 물건들을 대하게 된다. 우로는 부모님, 아래로는 처자식을 돌봐야 하는 현실에 더욱 무게를 둔다. 부모와 부부 그리고 자식까지도 운반해야 하는 중년의 화물차는 멈춰설 역이 없어서일까 그저 종점으로 계속 달려갈 뿐이다. 중년이 되고 보니 홀로 있기 좋아하는것 같다. 혼자일때 자신의 기억을 정리하고 다양한 얼굴표정을 가져볼수도 있고 미래를 구상할수도 있다. 어쩔수 없는 현실은 웃음으로 넘겨버리기도 하고 작은 행복과 웃음에서 삶의 정취를 느끼기도 한다. 비록 손바닥이 뒤집어지듯 하루아침에 습관들이 변할수 있는것은 아니지만 걱정도 너무 하면 버릇이 된다고 해결할수 없는 일걱정은 하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 세상에는 알아서 좋은일보다 몰라서 좋은일이 훨씬 많지 않은가. 다행으로 욕심을 멀리 떠나보내고 나니 은퇴없는 행복이 어디선가 찾아와 맴돌며 나의 인생을 즐겁게 해주고 있다. 봄날의 씨앗 뿌리지 않으면 여름날의 푸른전야가 어디 있으랴. 여름의 땀방울이 없이 가을의 수확이 어디 있으랴. 가을날의 수확이 없이 겨울날의 여유가 어디 있으랴. 중년도 인생의 황홀한 한 단계이다. 아침노을이든 저녁노을이든 황홀하기는 마찬가지이다.
16    인생에 하루만 남는다면 댓글:  조회:1367  추천:0  2017-07-05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더니 인젠 자고나면 변하는 세상이 왔다.  뒤꽁무니로 세상을 따라가도 온갖 스트레스로 어느새 육신은 만신창이 되고 후회로 얼룩진 인생을 살게 된다. 만약 생명이 초읽기에 들어섰다면 우리는 래일이 없는 마지막 하루를 어떻게 보내야 할까? 그래, 어머니와 함께 해야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생명을 준 은인이요, 애오라지 자식만 바라보고 자신의 청춘을 고스란히 바치신 어머니다. 30대 꽃나이에 남편을 잃고 자식들을 남들에게 입양시키고 재가를 하라는 주변의 권유도 마다하고 조롱조롱 년년생 아들넷을 떳떳이 키운 어머니를 즐겁게 해드리는것이 무엇보다 최우선이다. 지난 세월 어머니와 함께 했던 희노애락을 추억에 담아 이야기꽃으로 활짝 피우고 싶다. 해도해도 끝없을 우리만의 전설속에 인생의 모든것을 담고 싶다. 어머니의 손을 꼭 잡고 아버지의 산소를 찾아 담소화락을 나누고 싶다. 반백이 넘은 아들, 백발로인 어머니 앞에 36세 열혈청년이였던 아버지가 묘에서 뛰쳐나와 섰으면 얼마나 좋으랴. 이승과 저승에 관계없이 함께만 할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이다. 그래, 안해와 함께 해야지. 산골놈을 만나서, 그것도 가진것 없는 놈에게 시집와준 안해를 고마운 마음으로 황후같은 대우를 해주고 싶다. 먹고 살겠다고 어린 딸 젖을 떼놓고 한달만에 회사에 나갔던 안해, 추운 겨울날 돌돌 떨며 집에 돌아와서는 몸 녹일새도 없이 부엌에 들어서는 안해, 키꼴뿐이지 마른 체격에 살을 붙혀준다고 끼니마다 밥상을 푸짐하게 차려주던 안해였다. 아이 보살피듯 잠자다가도 이불을 당겨주고 헛기침 한번 해도 약을 들고 오던 안해, 세상 여자들 다 그렇게 한다고 해도 나에게는 안해가 어떤때는 누나처럼, 어떤때는 엄마처럼 느껴질때가 많다. 이런 안해가 나는 정말 고맙고 미안하고 목숨 다해 잘해 주고 싶다. 지금도 로임을 거의 다 안해에게 맡기는 나를 두고 리해할수 없다는 사람들이 많지만 나는 그게 더 편하고 즐겁다. 돈을 버느라, 사회활동하랴 눈코뜰새없는 안해와 함께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우리만의 려행을 가고 싶다. 정적이 흐르는 곳에서 아팠던 이야기, 행복했던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나누며 와인속에 후회없는 인생의 마지막 순간을 담고 싶다. 사랑하는 사람을 향해 웃는 모습만큼 아름다운것은 어디 있으랴. 가장 좋은 순간에 맺어진 인연을 가장 아름다운 웃음으로 마무리 하고 싶다. 그래, 딸과 함께 해야지. 언젠가 딸이 무심결에 드라마를 보면서 한마디 하던 기억이 떠오른다. 주말을 맞아 부모의 손을 잡고 유원지에서 행복한 순간들을 보내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왜서 저런 추억이 없지하고 중얼거리는것이였다. 성인으로 성장한 딸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줄이야. 혈기왕성한 젊은 시절, 사업에서 성과를 따내기 위하여 혼신을 다하여 아침일찍 출근하고 저녁늦게 퇴근하면서 딸이 자는 모습만 보아야 했던 지난날들, 일년 365을 헛되이 보낸적 없었지만 가족과 함께 즐긴 시간들은 손꼽을 정도로 얼마되지 않는다. 가장 행복해야 할 동년시절, 추억에 남는것이 없을 정도로 자식을 키워놓고 무슨 자격으로 인생을 담론할수 있을까. 하루만이라도 인생에서 제일 소중한 시간을 내여 딸과 함께 하고 싶다. 부모가 걸어 보지도 않고 걸어갈 생각도 없는 길을 자녀에게 안내한들 자녀들은 그것의 가치를 느낄수 있을까. 자녀가 원하는것이 무엇인지, 무엇이 자녀의 성장에 도움이 되는지를 알고 성장스토리를 쌓아가는것이 얼마나 소중한 추억이 될까. 하루만이라도 인생의 가장 보람있는 순간을 만들어 주고 비여있는 내용들을 채워주고 싶다. 진정을 가지고 차곡차곡 쌓아가느라면 은연중에 색다르고 의미있는 인생추억이 될수 있겠지.  각박한 세상을 살아가노라면 누구나 후회는 다 하게 되여 있다. 그러나 많이 하고 적게 하는것은 자신에게 달려있다. 매일매일을 인생의 마지막 하루로 여기며 살자. 식구들과 함께 하는 시간을 많이 가지고 주변사람들께 관심을 가지고 모자라면 채우고 넘치면 베풀면서 사느라면 하루를 살아도 떳떳이 자신에게 말할수 있지 않을까. 나의 인생은 정말 아름다웠다고, 나의 생명은 정말 보람있었다고, 나는 인젠 떠나도 정말 후회없다고. 
15    세월의 순리따라 댓글:  조회:2045  추천:0  2017-02-13
겨울의 정상에 올라서보니 겨울의 모든것을 다 몸으로 느낄수 있다. 땅에서는 매서운 칼바람이 인간을 유린하지만 하늘은 그래도 여유있는 모습으로 푸른색이 더욱 짙다. 어쩌다 몰려오던 흰구름은 방향없이 헤매다가 란무하며 흩어진다. 거리의 사람들은 칼바람과 싸우며 꽁꽁 싼 몸을 더욱 움추리며 가던 길을 재촉한다. 솔로로 생활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나는 글로 모든 상처를 어루만지고 그리움으로 외로움을 달래며 반복되는 음악의 선률에 취해 돌아가는데 습관되여 있다. 마음속에는 숨겨둔 이야기를 가지고 있고 지난 세월의 흔적들을 더듬어 가슴에 닿는 이야기를 끄집어내 쓰군 한다. 지난 세월을 들추기 좋아하는것은 늙어가는 징조라더니 안타깝지만 나도 어쩔수 없는 세월의 강세앞에서 순리에 따라 인생을 맞춰가는수밖에 없다. 외로움을 즐겨서가 아니라 외로움에 습관되여 말을 꺼내기가 싫을 따름이다. 매서운 칼바람은 창가에서 맴돌더니 방안의 온기와 호흡을 맞추며 얼음꽃을 수놓고 있다. 해빛에 눈부시게 황홀함을 선사하다가 강한 해빛에 소리없이 사라진다. 하루하루가 소리없이 지나고 매일 찾아오는 밤은 끈질기기도 한다. 새하얀 적삼은 새하얗다 못해 인젠 투명하기까지 하다. 숱많던 머리카락은 빛을 잃어가고 외투소매끝에는 세월의 애환이 담겨있다. 무정한 세월은 한가득 인생을 꽃병마냥 부셔버리고 흩날리는 눈송이는 꿈마냥 순간의 황홀함만 안겨주고 가뭇없이 사라진다. 어느것이 꿈이고 어느것이 진실인지 공중루각으로 느껴질뿐이다. 연분이여서 잡은것을 놓을수 없다. 네가 없으면 나의 세상은 비만 올것 같고 그리움의 아픔은 심장이 알것 같고 밤이 알것 같고 눈물이 알것같다. 머나먼 거리는 발이 알것이고 꿈이 알것이고 시간이 알것이다. 눈송이 날리고 산과들이 백설로 뒤덮힌 날, 친구와 함께 정겨운 술잔을 들고 담소화락하는것도 락이 아닐까. 찰랑대는 술잔은 포근한 마음이고 소리없는 아름다움이다. 은은한 광택이 넘치고 은은한 노래소리가 되여 천리만리 흘러가고 순결한 정감이 되여 사람들의 마음을 다독이며 자연의 아름다움과 함께 인간의 마음도 진화한다. 꽃보라 눈보라 날리는 랑만만을 집착하지 않으며 하늘땅을 삼킬듯 요란하지 않으며 서로 달아오르는 열망의 사랑을 바라지 않으며 다만 진정한 미소, 부드러운 목소리, 뼈아프도록 후회함이 없는 인생을 바랄뿐이다. 세월이 가져다주는 모든것을 받아들이고 알면 어떻고 모르면 어떻고 가질것은 가지고 버릴것은 버리고 담담히 눈이 꽃으로 변신할줄도 아는 그런 인생의 로맨스에 빠져보자. 세월따라 인생따라 마음의 안식처를 찾아가는 인생을 살아보자. 심령은 들볶는것이 아니라 조용히 기다리는것이다.    
14    하얀눈과 함께 하는 삶의 여유 댓글:  조회:1957  추천:0  2016-12-27
하얀눈이 소리없이 내린다. 눈이 어느새 땅우에 많이도 쌓였다. 뿌연 하늘에선 소리없이 눈송이가 날려와 여기저기에 자리를 잡는다. 앙상한 나무가지마다 그래도 눈송이를 붙잡고 고독을 달래느라 바쁘다. 시간이 얼마쯤 흘렀을까 대지는 어느새 새하얀 눈으로 뒤덮힌채 조용하다. 하얗다 못해 눈을 부시게 황홀하다. 은색세계의 매력에 홀려 나는 저도 모르게 옷을 걸치고 눈송이를 맞으며 길에 나섰다. 하얀세계에 우두커니서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니 어쩐지 초라해보인다. 터벅터벅 거리를 거닐며 길가의 오가는 사람들과 네온아래 반짝이는 광고판들을 유심히 새겨보며 걸음을 옮긴다. 우리 말로 주고 받는 소리가 들리면 귀를 쫑긋 세우기도 하고 우리글로 된 간판에 시선을 고정하고 간판의 의미를 되새기기도 한다. 3천리 강산을 옮겨놓은듯한 거리 간판들은 고향을 그리는 우리민족의 사향의 정이 그대로 담겨있다. 언제부터 지어지고 불리여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조선족 하면 백의동포라고 사람들은 일컷는다. 깨끗한 하얀 옷을 즐겨입고 례를 갖춘 민족이라는 의미여서 자부심을 갖게도 한다. 민족의 성산 백두산도 하얀 백설도 뒤덮힌채 민족의 슬기와 용맹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춘향이 옥중에서 랑군을 기다리며 흰색 치마저고리를 입고 절개를 지키던 전설, 심청도 아버지 눈을 뜨게 하려고 흰색옷을 곱게 입고 깨끗한 심신으로 바다에 뛰여들던 전설은 모두가 백의민족만이 할수 있는 효와 선 그리고 절개의 실천일것이다. 나는 하얗다 못해 투명할 정도로 하얀색이 좋다. 시뚝해서 좋고 순결함과 고귀함이 넘쳐서 좋고 허무하지 않아서 좋다. 생명의 전부를 의미하기에 너무도 좋다. 그래서 나는 집도 하얀색으로 꾸몄다. 벽은 말할것도 없고 하얀 침대와 책장 그리고 걸상 책상 그릇 모든것이 하얀색으로 되여 빛과 어울려 황홀경을 연출한다. 신는 양말, 입는 내의도, 적삼도 모두 하얀색이니 참 하얀색은 나와 인연이 깊은가 보다. 매서운 겨울도 새하얀 눈송이 포근한 이불이 되여 얼어드는 육체와 령혼을 감싸주어 감사하다. 삶의 모든것이 고운 눈꽃이 되고 투명한 얼움이 되여 이변을 연출하니 인생이 즐겁고 행복하다. 행복이 이렇게 쉽게 이루어지고 언제나 곁에 있는지 왜 몰랐을까. 행복은 언제나 남들 일이고 고민은 언제나 자신을 괴롭힌다고 생각했던 지난날들이 허무하게만 느껴진다. 여유와 오만함으로 공간을 꽉 채운채 날려오는 눈송이 그리고 눈송이와의 숨박꼭질에 신난 바람은 어쩌면 한쌍의 련인마냥 정답고 행복해 보일까. 함박눈은 기이하고 아름다운 화폭이 되여 황홀함과 무한한 상상에 우리를 빠져들게 한다. 행복이라는 산은 원체 정상이 없다. 그러나 인생의 가장 큰 행복이 산 정상에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가뿐숨을 몰아쉬며 일생을 등산에 맡기고 오르고 오르지만 나중에야 그들은 영원히 오를수 없고 볼수 없는것이라는것을 발견하게 된다. 어떤 사람들은 굳이 지정된 목표를 향해 가는것이 아니라 가다가 쉬면서 주변의 극치에 빠지기도 하고 네온의 오색에 빠지기도 하면서 세소한 자유로움에 마음의 창문을 열고 세상의 즐거움을 만끽한다. 바치 함박눈과 바람사이의 숨박꼭질처럼 여유롭고 신나게. 어떤 사람들은 행복해보이지만 고민의 세월에서 허덕이고 어떤 사람들은 힘든 세월을 사는것 같지만 행복해보이는 도리는 과연 왜서일까. 두리뭉실하게 사는 사람은 쉽게 행복할수 있고 모나게 사는 사람은 쉽게 힘들어진다. 왜냐하면 모난 사람은 너무도 진실하고 완벽한 결과를 바라기 때문에 생활에서 고민투성일수밖에 없다. 반면에 두리뭉실한 사람은 따지는것이 적고 삶과 사고방식이 단순하여 되려 인생의 높은 경지를 차지할수 있다. 때문에 어찌보면 인생의 고민은 인간이 스스로 만드는것으로서 고민이 우리를 떠나지 않는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고민과 번뇌를 떨치지 못하는데 있다. 눈의 세계에 빠져드니 눈의 사심없는 기여가 고맙기만 하다. 이슬로 녹아 물로 녹아 자연과 사회를 생명을 다한다. 창가에 비낀 눈꽃은  화려하지 않지만 정갈하다. 홀로 마지막순간까지 고요함을 지키며 애틋함에 집착한다. 추엽처럼 애절함에 락하하지 않고 어느순간 다가올 변신만을 조용히 기다린다.  사람마다 행복을 찾아 힘든 길을 걸어가기 마련이다. 그러나 남의 행복을 부러워할 필요는 없다. 남들도 그대의 행복을 미친듯이 부러워하고 있다는것을 보지 못했을 뿐이다. 기실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모두가 행복하다. 다만 자신의 행복을 뒤돌아보지 못했고 늘 남들의 눈에만 보이기 때문이다. 이 순간부터 자신의 행복을 찾아 떠나보면 어떨까. 보석보다 황홀한 순간들이 기다릴지 누가 알랴. 세상만물이 겸허하게 마무리하는 계절, 하얀 눈과 함께 하는 여유가 있어 인생이 즐겁다.      
13    친구의 의미 댓글:  조회:1801  추천:0  2016-03-29
우리 속담에 “친구 따라 강남 간다”라는 속담이 있고 중국에도“多一个朋友,多一条路”란 말이 있듯이 친구를 잘 사귀냐에 따라서 우리의 인생목표가 달라지고 친구가 많을수록 인생길이 열린다는 뜻이다. 사회생활에서 인맥이 차지하는 위치가 갈수록 귀중하기 때문에 현대인들은 인맥을 잇기 위한 노력에 필사적이다. 그 인맥은 대부분 친구를 통해 이루어지고 실현된다. 좋은 친구는 인생에서 가장 큰 보배라는것을 누구나  다 알고 있다. 가깝게 오래 사귄 사람, 가슴속 이야기를 털어 놓을 수 있는 사람, 반가움을 채워 줄 수 있는 사람, 나를 웃게 하는 사람, 내 눈물을 닦아주는 사람 등등 모두가 우리가 말하는 친구 아닐까. 절친이라면 기쁨과 슬픔을 같이 나눌 수 있는 친구, 무슨 고민이 있어도 끝까지 들어주는 친구, 마음이 서로 잘 통하는 친구, 싸워도 금방 화해할수 있는 친구, 먼 길을 함께 갈수 있고 손잡으면 희망을 품게 되는 친구여야 한다.  진정 슬리퍼를 신어도 반겨줄 친구, 그리고 김치, 마늘냄새가 나도 반겨줄 친구가 우리의 인생에 도대체 얼마나 될까. 사람들은 흔히 성실한 느낌을 주는 사람에게 매력을 느끼기 마련이다. 자기분야에서 최선을 다하고 본분을 지키는 귀감들에게 사람들은 경의를 표하고 매력을 느낀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다정하게 느낄 때 그 사람에 대하여 호감을 갖는다. 최저한 사람들은 싫어하는 상대에게 친절하게 대하거나 선뜻 도와주려 하지 않는다. 자신을 친절하게 대해주는 상대방에게 호의를 가지고 인맥을 이어가는것이다.  "옷깃을 스쳐도 인연"이라고 친구란 인생에서 필요한 존재인것만은 분명하다. 친구는 우리가 어렵거나 힘들 때 옆에서 힘이 되어주고 기를 돋구어 주는 존재로 될수 있기 때문이다. 인생에 이렇게 저렇게 만나게 되는 사람은 수없이 많다. 우리는 흔히 초면구면 관계없이 친구라 할때가 많다. 하지만 친구들 사이는 천차만별이고 많은 경우에 이름으로 불릴 따름이지 진정한 친구라 하기가 너무도 부족하다. 친구라 부르면서 유독 자기가 수요될때 나타나고 열정을 보이며 손을 내미는 사람을 진정 친구라 할수 있을까. 어떤이는 친구라 하지만 자신의 체면과 허영심을 만족시키기 위한것이고 자신의 교제능력을 보여주기 위한것이고 친구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부각시키기 위한것이다. 어떤이는 끓는 정열로 환경에 따라 입에 침이 마를세라 친구라 부르지만 기실은 안중에도 없는 존재일뿐이고 돌아서고 나면 깨끗이 망각하고 새로운 친구를 부르며 아양을 떤다. 절친이라면 기필코 마음으로 그리고, 어디가든, 만날수 있든없든 깊이 자리를 잡고 있다. 세월이 변해도 천년바위처럼 그는 끄떡하지 않고 천년묵은 술처럼 음미할수록 그윽한 향기만을 발산하는것이 아닌가. 오늘의 만남으로 래일을 기약하고 영원히 잊지않는 사람만이 바로 마음속의 따뜻함과 당당함을 안겨주는 해피한 친구이다. 마음을 나눌수 있는 사람만이 진정한 친구이다. 아무리 가까이에 있어도 마음이 가지 않는  친구가 아니라 동사자일 따름이다. 마음을 나누는 친구가 바로 진정한 나의 친구이다. 친구사이에 목적이 없는것은 아니다. 그래서 세상에는 영원한 친구가 없고 영원한 “리익”이 있을뿐이라는 말이 나온것이 아닐까. 친구가  많다고 우쭐해도 결과적으로 리익관계로 얽힌 합작일 경우가 적지 않다. 다만 “리익”의 내용이 너무도 광활하여 스스로 챙기느라 바쁠뿐이다. 아침출근시에도 술냄새를 물씬물씬 풍기며 흐리터분한 기분으로 하루를 일과하는 사람을 보면서 친구의 소중함이 어느 정도였으면 하는 측은한 생각이 들기도 하고 또 그 어떤 복잡한 리익에 얽힌채 몸까지 망치며 우정을 과시하는 술상에 도대체 어떤 진정한 의미가 담겨있는것인지 의구심이 든다. 하루자고나면 세월이 무섭게 변하는 오늘의 사회이지만 유독 변하지 않는것이 있다면 오늘이 가면 래일이 온다는것이다. 오늘도 래일도 언제나 함께 하고 걱정하여주는 사람 그리고 래일이 오면 문안과 기도를 해주는 그런 사람이 진정한 친구가 아닐까. 그 친구는 멀리에 있는것이 아니라 바로 옆에 있는 인생의 동반자 그대의 안해와 남편임을 잊지 말라. 지구촌 70억 인구를 뚫고 맺어진 부부의 인연은 바로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인연이요, 100세 시대를 맞아 세상 끝까지 함께 가야 할 절친이다.
12    오늘을 즐기며 살라 댓글:  조회:1798  추천:0  2015-09-02
도시의 밤빛은 언제봐도 현란하다. 즐비한 고층빌딩들 그리고 오색찬란한 네온에 눈이 부실정도이다. 낮과 밤이 따로 없이 갈수록 밝아지는 도시는 현대문명을 자랑하기에 너무도 충분하다.  그런데 어쩐지 갈수록 흐리터분해지는 몽롱한 의식과 시각으로 도시의 률동과 어울리지 않게 기가 죽어있고 갈팡질팡하는 모습들이 보인다. 영문 모를 슬픔과 애환에 고독스럽기만 하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누구나 불안감을 피할수 없다지만 가슴깊이 파고드는 불안한 그들의 마음 누가 와서 들어줄까. 자신에게 욕도 해보고 때리기도 해보고 물어보기도 한다만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비통과 상처를 멀리할수 있을까. 얼마를 기다려야 봄꽃이 활짝 필라나. 갈수록 고독과 한숨만 쌓여간다. 꽃은 피고 아릿다움을 뽐내다가 지지만 그들은 어떻게 자신을 감싸고 덥혀야 하는지 모른다. 타향에서 걸어가는 길 너무도 멀고 무겁다. 혼신의 힘을 다해 한걸음 한걸음 걸어가야 한다. 그속에서 그들은 외로이 자신과 싸우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힘든 싸움에서 이겨 백전백승의 장군이 될것처럼 말이다. 행복을 찾아 동분서주한지 몇해던가. 보일락 말락 잡힐듯 안잡힐듯 숨박꼭질만 반복되는 인생 누가 행복이 그렇게 쉽다고 했더냐. 행복을 찾아가는길이 인생이라면 슬픔과 함께 하는것은 무엇이라 할까. 살아가는 인생은 어쩌면 이리도 힘들까. 먹을걱정 입을 걱정 없고 세상은 아름답게 변해만 가는데 뭐가 모자라서 마음은 울적이기만 한지. 물질적으로 풍요로움을 자랑하는 오늘, 정서적으로 불안과 초조함에 스트레스가 쌓이고 우울증과 싸우는 사람들은 갈수록 많아진다. 생을 마감하는  순간의 인생선택으로 주변을 가슴 아프게 하는 사건들도 쉽게 접할수 있을 정도로 마음의 건강이 시급한 과제로 우리들 앞에 나서 있다. 생각이 바뀌면 인생이 바뀐다고 한다. 그래서 인생은 마음먹기에 달려있다고 하는것이다. 하루하루가 바쁜 삶을 살면서 지나간 일을 되새기며 가슴 썩일 필요가 있을까. 장담할수 없는 래일의 일로 오늘 정서를 망칠 필요가 있을까. 중요한건 그래도 오늘의 정서와 느낌이다. 오늘의 모든것이 바로 제일 귀중한 존재들이다. 시대때도 없이 몰려오는 마음의 아픔은 어떻게 치유할까. 마음의 아픔은 마음으로 치유하여야 하는데 관건은 자신에게 달려 있다. 자신이 스스로 치유하여야 한다. 원망과 한탄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끝없는 원망은 새로운 고민을 가져다 주고 타인에게 자신의 무능함을 보여주는것이나 다름없다. 원망이 악습으로 된다면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암흑속으로 빠뜨리게 된다. 우리는 남들의 평가를 개변할수 없지만 자신은 개변할수 있다. 엉망진창인 자신의 생활을 개선하는 열쇠는 자신의 손에 달린것으로서 회한과 탄식을 버리면 인생의 즐거움과 행복이 저도모르게 쉽게 찾아올수도 있다. 백년을 넘기기 힘든 인생을 왜서 더 힘들게 하겠는가. 하루하루가 얼마나 아까운 시간들인가. 자신을 너무 탓하지 말라. 자신을 흠상할줄 아는것은 기쁨을 찾는 금열쇠이다. 너무 힘들게 살지 말라. 힘들게 사느라면 정신적인 압박감에 육신마저 힘들어 진다.  욕망의 노예가 되지 말라. 스스로 만족할줄도 알아야 한다. 시비판단에서는 예리한 시선이 필요하겠지만 생활에 대한 자세에서 시선이 너무 날카로우면 주변이 황량해 질수 있다. 물이 너무 맑으면 고기가 없고 사람도 너무 밝히면 친구가 떠나버린다. 사람마다 나쁜인간으로 되는데 누가 가까이 하고 평화공존하겠는가. 부정적 시각으로만 세상을 본다면 세상은 깨진 유리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남들의 장점을 본다면 볼수록 사랑스러움을 느낄것이다. 남에게 너무 잘 보이려고 하지 말라. 자신의 노력이 더 소중하다. 남에게 잘 보이려고 한다면 자신을 잃게 된다. 자신을 충전하는것이 더욱 중요하다. 마음의 고통은 생활을 의미있게 꾸리지 않는데서 온다. 의미있고 내용있고 다양한 생활방식을 추구한다면 쓸데없는 생각을 할새가 없게 된다. 매일매일 재미좋고 보람있게 지내는것보다도 행복한것은 없다. 행복감과 즐거움은 매일 느낄수 있는 좋은 감각에서 온다. 래일걱정을 오늘에 하고 오르지 못할 것을 비하며 이루지 못할 환상을 하구서야 마음의 안정이 있을수 있나. 현실에 맞지 않는 모든것은 생명의 최대 킬러이다. 사는법을 바꾸어봐도 새로운 세계가 펼쳐질수 있다. 사는게 마음이 안들때 환경을 바꾸거나 현실에서 리탈하는것도 좋은 방법이다. 영화를 보거나 음악을 감상하거나 노래를 흥얼거리거나 전화를 치거나 해빛을 쏘이거나 하는것들이다. 이래서 변해야 살아남는다는 말도 나온것이 아닐까 싶다. 자신을 이긴다는것이 정말 간단한 일이 아니다. 그래서 자신과의 싸움은 세상에서 가장 힘든 싸움이라고 하였다. 희열의 뿌리는 자신에게 있다. 행복하다고 느끼면 행복한것이다. 굳이 조건같은것들은 필요없다. 행복하지 않다고 하는 사람은 가장 큰 비애이다. 스스로 만족하라. 만족할줄 모르는 사람은 영원히 행복할수 없다. 
11    소나무와 우리민족 댓글:  조회:1823  추천:0  2015-07-08
장백산 줄기따라 이어진 강토에서 수천년세월 자연과 함께 하면서 우리민족은 자연의 정기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호랑이처럼 용맹하고 소나무처럼 꿋꿋한 성미를 키워왔다. 먹거리가 없어 배를 고를때도 자연은 헌신적으로 우리민족의 허기를 달래주었다. 자연은 우리민족에게 있어서 너무도 해피한 존재가 아닐수 없다.   그래서인지 우리민족은 자연에 잘 적응하며 험난한 일과 좌절이 닥쳐도 강의한 성격으로 힘과 지혜를 모아 이겨낸다.자연을 떠나서 인간은 생존할수 없다하지만 우리민족처럼 자연과 각별한 인연을 쌓고 수천년문명사를 개척한 력사는 드물것이다.  그가운데서 우리민족의 성격을 제일 잘 반영한 자연물을  찾는다면 그래도 소나무가 아닐까 싶다.우리 겨레는 오랜 옛날부터 소나무를 심고 가꾸며 사랑하여왔다. 반만년 민족사에서 우리 겨레와 운명을 함께 하고 정으로 련결되여 있는 나무가 바로 소나무이다.소나무속에서 나서 소나무속에서 죽을 정도로 우리민족과 함께 해온 나무이다. 장백산을 보노라면 줄기줄기 그 어디가나 우리민족의 삶의 터전과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있고 우거진 소나무숲들로 가관을 이루고 있다.  그 어떤 비비람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소나무, 좋은 땅, 굳은 땅 가리지 않고 그 어디서든 줄기와 잎을 뻗치고 지어 날새들도 앉기 힘들어하는 아찔한 벼랑턱에도 억세게 뿌리를 박고 웅건한 자태를 뽐내는 소나무, 찬서리와 눈속에 파묻혔어도 푸름을 잃는 소나무,철따라 잎이 지는 나무와 달리,4계절 한결같은 소나무를 오래전부터 우리 겨레는 민족의 강의한 의지의 상징으로, 민족적기상과 슬기의 상징으로 여겨왔다. 소나무의 고집스럽고 끄떡없는 성격을 닮아서일까 우리민족은 수천년의 세월이 흐르면서도 외세에 동화되지 않고 단일민족으로 자신을 굳건히 지켜 왔다.   천하절경을 자랑하는 백두산에는 하늘높이 치솟은 소나무숲들이 많아 보는이들마다 감탄을 련발한다.웅장한 체구는 용사를 닮았다지만 미풍에는끄떡도 하지 않고 도고한 자태를 뽐내는 모습은 천상 스님이다.문무를 겸비한 소나무여서 나무의 왕이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든다. 소나무는 오래 사는 나무여서 장수를 상징하는 의미로 많이 쓰인다. 병풍에 그려진 소나무의 의미도 바로 오래 살기를 바라는 뜻에서 그려진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소나무는 버리는것이 없이 인류에게 유용하게 쓰이고 있다.건축용재, 가구재, 선박재, 다리재, 동발나무,팔프원료는 물론, 소나무의 송진은 고약이나 반창고의 기초제로 쓰며 송진을 비롯하여 솔잎과 그 우린물은 각종 질병을 치료하는데 다양하게 쓰이고 있다. 료리사들은 솔잎으로 솔잎떡을 할뿐더러 백숙을 포함한 다양한 료리를 지속적으로 개발하고 있다.작가에 의해 시가 되고 그림이 되고 공예품이 되여 우리의 생활에 정취를 더 해준다. 얼마나 기특한 소나무인가.자연에서 소중한 존재로 자리매김할뿐더러 인간에게도 온몸 다바쳐 희생을 한다니 그저 자연에 감사하고 소나무에 고마울 따름이다. 이와같이 소나무가 정서적으로, 물질적으로 우리생활의 구석구석 파고들면서 소나무와 관련된 속담들도 륙속 등장하고 있다.“소나무가 말라 죽으면 잣나무가 슬퍼한다.” “가랑잎이 솔잎더러 바스락거린다고 한다.” “겨울이 다 되여야 솔이 푸르름을 안다.”“못된 소나무에 솔방울만 많다.” “남산골의 소나무를 다 주어도 서캐조롱장사를 하겠다.”등이 그 대표적 실례이다.  그래서 나는 소나무가 좋고 존경스럽다. 뿌리만 내리면 사치 부릴줄도 응석 부릴줄 모르고 소리없이 우리 강토 어디서나 잘 자란다. 산에만 가면 소나무들이 시뚝한 자태를 뽐내고 있어 소나무 숲은 말 그대로 사람들이 즐겨 찾는 들놀이의 좋은 장소가 되여 춤판이 벌어지고 행복의 노래소리가 넘쳐 흐른다.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는 모습, 어찌보면 그 모습에 담겨진 수많은 사연들이 우리민족과 함께  하여 왔고 또 영원히 함께 해야 할 민족사일지도 모른다.  소나무, 오늘도 장백산 그 어디서나 푸르청청 변함없는 일편단심으로 우리민족을 지켜주고 있다.  
10    자신과의 싸움은 세상에서 가장 힘든 전쟁이다. 댓글:  조회:2610  추천:0  2015-05-20
사람마다 자신만의 꿈세계에서 그 성공을 위하여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누구나 다 자신의 꿈을 이룰수 있는것은 아니다. 성공에는 방법이 있고 실패에는 원인이 있는 만큼 실패를 위해 구실을 찾지 말고 성공을 위해 방법을 찾을 필요가 있다. 필경 실패의 원인보다 성공의 방법이 더 많으니까. 세상을 살아가면서 힘든 일들이 많겠지만 그 앞에서 어떤이는 과감히 직시하고 어떤이는 도피를 선택한다. 물론 힘든 사람들은 꼭 성공할수는 없지만 회피하는자는 기필코 실패한다. 세상에는 해결하지 못할 곤난이 없고 곤난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을따름이다. 곤난에 봉착했을때 적극적인 자세로 임하고 부지런히 사고하고 사고방식을 댜양화한다면 모든 곤난들이 해소될수 있다. 천만의 곤난이 있다면 분명 천만보다 많은 해결책이 있다.  살다보면 할말 안할말 분간하지 못하고 입을 벌렸다가 서로가 상처를 받고 후회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지혜로운 사람은 입을 마음에 담고 있으나 미련한 사람은 마음을 입에 담고 있다. 두뇌는 일상용품이지 장식품이 아니다. 할말 안할말 스스로 구분할줄 알아야 한다. 남을 미워하면 그 고통이 자신에게로 돌아오기 마련이다. 남을 비방하는것은 피를 뿜는것처럼 먼저 자신의 입을 더럽힌다. 그러나 락관적이고 환한 웃음은 자신을 즐겁게 할뿐더러 주변사람들도 편하게 할수 있다. 자신을 낮출줄 아는 사람만이 진정 존귀한 사람이다. 사람은 정말 요사한 동물이다. 돈은 죄악이라면서도 모두 건지려 안간힘을 쓰고 미녀는 화라면서 모두 차지하려 하고 관직은 탐욕자라면서도 모두 오르려고 빠득거리고 천당은 좋다면서 누구도 가려고 않는다. 사유는 텔레비에 맡기고 련락은 핸드폰에 맡기고 두 다리는 자가용에 맡기고 건강은 약에 맡기는 얼씨구 세월에서 살아가지만 불안은 갈수록 커지고 스트레스는 수없이 쌓여만 간다. 성숙된 사람은 과거를 개의치 않으며 총명한 사람은 현실을 개의치 않으며 통쾌한 사람은 미래를 개의치 않으며 하루하루를 보람있고 충실하게 살아가는데 의미를 둔다. 기실 쓰레기를 밟으며 올라선 리상의 경지나 금을 밟으며 올라선 리상의 경지는 똑 같다. 금과 쓰레기가 무슨 구별이 있는가. 사람들은 흔히 남들이 사는 모습을 보면서 언제나 그들의 행복을 극대화하고 그들의 불행과 좌절은 보지 못하며 남들은 언제나 행복한줄로만 안다. 그러나 자신의 생활에 있어서는 행복을 보지 못할뿐더러 고민과 번뇌가 자신만을 따라다니는줄로 알고 불만이 많고 불안해 한다. 자가용을 타고다니고 넓고 환한 아파트에서 살면서 불만뿐인 사람들은 과연 욕망의 끝은 어디일까. 남들이 성공하였을때 우리는 그가 운이 좋다고 하고 남이 실패하였을때 우리는 그가 노력하지 않어서라고 한다. 자신이 성공하였을때는 자신의 노력의 결과라 하고 실패하였을때는 환경을 탓한다. 자신을 스스로 망치는 사람이 남이 자신을 망치는 사람보다 훨씬 더많다. 이런 의미에서 자신을 이길수 있는 사람이 가장 위대한 사람이 아닌가 싶다. 자신을 파악할줄 아는 사람은 아무것도 잃지 않는다. 자신을 잘 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남을 잘 대하는 것이고 남을 잘 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남을 관용하는것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남의 지혜로 자신의 두뇌를 충전하고 미련한 사람은 언제나 남의 지혜로 자신의 정서를 혼란시킨다. 사람들은 흔히 자신이 남에게 상처를 준 일은 쉽게 잊으나 남이 자신에게 입힌 상처는 평생 기억하고 용서를 하지 못한채 자신을 불안의 소용돌이에 가두고 몸소리친다. 관용 하나로 그 어두운 세상에서 나올수 있다는 단순한 도리를 모른채로. 사람들은 흔히 의외의 방식으로 횡재할수 있고 의외의 약효로 병을 치료할수 있으나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서 행복을 얻을수 없다. 관용으로 세상을 얻을수 있고 미움으로 세계를 잃을수도 있다. 귀뚜라미 외로이 우는 밤에 함께 해줄수 있는 친구라면 세상 무엇도 부러울것이 없을것이다. 복잡한 일은 간단하게 하고 간단한 일은 열심히 하고 열심히 해야 할 일은 자주하고 자주 해야 할 일은 창의성 있게 하면서 하루하루를 후회없이 즐겁고 보람있는 인생을 살면 어떨까. 그러느라면 세상에서 가장 힘든 전쟁인 자신과의 싸움에서 진정한 승자가 될수 있을지도 모르지.
9    된장에 담긴 민족의 정서 댓글:  조회:1946  추천:0  2015-05-08
아침이다. 출근하느라면 바쁜 아침이지만 나는 매일매일 아침밥은 챙겨서 에우군 한다. 오늘도 랭장고에 있는 시래기 한덩어리와 호박 한쪼각, 돼지고기 몇점,그리고 파와 두부를 넣고 된장국을 보글보글 끓여 아침상을 차렸다. 매일 먹어도 질리지도 않는 된장국에 밥 한공기를 뚝딱 말아먹고나니 출근길이 이처럼 개운할수가 없다. 우리민족은 수천년세월속에서 발효식품으로 몸을 다져왔다. 그 가운데서도 된장은 헌신적인 정신으로 우리민족을 지켜주었고 끊임없이 영양소를 제공하여 주었다. 된장은 콩을 삶아 메주를 만들어 띄울 때 생성된 미생물 등의 효소작용으로 혈전용해효과와 항암효과가 뛰여난 고단백 발효식품으로 알려져 있다. 된장의 가장 큰 효능은 바로 항암효과라니 가이 놀랄만도 하다. 또한 피를 맑게 도와주고 혈액순환에 도움을 줄 뿐 아니라 고혈압 예방, 노화 방지, 치매 방지, 골다공증 예방 등 다양한 효과가 있어 현대인이 일상에서도 섭취할 수 있는 보약이라고 하니 우리는 그저 조상의 지혜에 감탄할 뿐이다. 우리민족은 다혈질체질이여서 성격이 급하다. 식사시에도 료리를 가공할 사이도 없이 그대로 가져다 장에 뚝 찍으면 밥반찬이요, 술안주가 된다.  된장을 리용한 다양한 음식들은 우리 민족의 매끼 식탁을 풍성하게 만들어 주는 주요 메뉴이다. 된장찌개는 하나만으로도 훌륭한 반찬 역할을 수행하며 한끼 식사를 거뜬히 해결할수 있다. 된장을 찍어 각가지 식재료로 쌈 싸먹으면 그것보다 산해진미일수가 없다. 고칼로리에 현대병에 몸살하는 오늘, 옛식 된장 쌈은 인젠 우리민족의 건강을 지켜주는 건강식으로 탈바꿈하였다. 상다리 부러지게 차려진 술상에서도 눈을 지프리며 뭔가 모자란듯 저가락을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면 대개 느끼함보다 개운하고 시원한 료리를 많이 찾는다. 술잔이 여러바퀴 돌고나서 각가지 야채들을 큼직한 접시에 담아 올리고 나면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듯 서로 집어주느라 야단들이다. 된장에 찍어 입에 놓으면 입안은 온통 명절분위기이다. 이쯤이면 자연의 색상 그대로 살아 숨쉬는 각가지 야채는 산해진미를 물리치고 당당히 인기료리로 올라선다. 우리민족문화의 한구성원으로 자리를 굳힌 된장은 인젠 우리민족 음식문화의 대표로 되여 다양한 메뉴로 변신하고 있다. 된장을 리용하여 고추, 깻잎, 풋마늘 등 채소를 된장에 뭍혀 숙성시키면 장기간 밑반찬으로 이용하는 장아찌가 되고 또 쌈에 곁들이는 소스역할도 충실히 리행한다. 고전적 형태에서 벗어나 염분을 줄이고 자연 발효의 기능성을 강화한 된장과 편의식 수요증가에 발맞춘 다양한 가공제품들이 육속 개발되고 있으며 의약품과 화장품 등의 소재로도 활용되면서 세인들의 각광을 받고 있다. 아무리 우리민족의 전통음식이지만 된장은 이렇게 기타 음식들을 배척하지 않고 배려하고 조화를 이루면서 변신을 거듭하고 있다. 된장은 시간이 흐를수록 깊은 맛을 내고 다른 식품과 어울려져 다양한 식재료로도 쓰이지만 다른 맛과 섞어도 제 맛을 내는 단심, 오랫동안 상하지 않는 항심. 기름진 냄새를 제거하는 불심, 매운맛을 부드럽게 해주는 선심, 어떤 음식과도 조화가 되는 화심 등으로 우리민족의 삶의 정서와 민족적 성격을 잘 보여주고 있다. 메주를 쑤는날이면 온 집안이 아침 일찍부터 난리다. 식구 모두가 자기의 분담역할을 완수하느라 바쁘다. 잘 익은 콩은 이입저입에서 구수한 냄새를 풍기고 짓뭉개진 콩은 재치있는 사람들의 손에서 곱게 메주로 빚어진다. 어머니가 메주를 곱게 빚지 않으면 메주같은 자식을 본다고 하자 만지고 두드리며 곱게 만드느라 경쟁이다. 모두들 제가 빚은 메주가 곱다고 야단들이지만 세상에 고운 메주가 어디에 있냐 싶게 사람들은 한결같이 못난 사람은 메주처럼 생겼다고 한다. 그래도 메주는 그 토록 천대를 받으면서도 우리를 떠나지 않고 소리없이 된장으로 진화하면서 자신의 사명을 다 하면서 우리를 지켜주고 떠나지 않는다. 시간을 알리기나 하는듯 때가 되면 집집이 밥짓는 연기가 굴뚝에서 가물가물 피여나고 부엌가마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뿜어나온다. 향긋한 밥냄새와 된장의 구수한 냄새는 서로 합주를 하듯이 온 집안을 감돌며 행복을 가득 심어준다. 비록 화려하지 않지만 허기진 사람들에게는 산해진미가 되여 밥상우에 당당히 오른다. 수백년 세월이 흘렀어도 한결같이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것도 바로 이때문에 아닐까 싶다. 어릴때 밖에서 실컷 뛰놀다가 집에 들어서서 배고프다고 졸라대는 우리에게 어머니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상을 차려준다. 거의 끼마다 상에 오르는 된장국이지만 사람을 유혹하는 구수한 그 냄새는 질릴때가 없이 주린 배를 언제나 통통 채워주군 하였다. 툭 튀여나온 배를 두드리며 밥상에서 물러서는 자식들을 보면서 어머니의 얼굴에서는 미소가 떠날줄 모른다. 그래서 나는 타향생활에 적응하고 타향음식에 길들여가지만 고향의 된장국맛만은 영원히 잊지 못하고 구석어디라도 그 맛을 찾아 다닐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한류와 함께 한식이 웰빙식품이라는것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한식의 세계화가 가속화 되고 된장국도 인젠 어디서나 쉽게 접할수 있는 글로벌 음식으로 되였다. 그래도 고향의 정이 묻어나는 어머니의 된장국은 언제나 그 무엇으로도 바꿀수 없는 소중한 추억의 대상이 되여 그리워 진다. 기름기 찰찰 도는 이밥에 보글보글 끓는 장국 거기에 깍뚜기김치나 배추김치를 곁들이면 신선밥상이 부럽지 않은 금상첨화가 아니였던가. 된장은 귀와 천, 부와 궁의 구별이 없이 언제나 소박하고 무던하고 친절하고 존경스럽다. 여름에 채소와 곁들여 먹으면 해갈이 되고 가을에 산나물과 곁들여 먹으면 자연의 기를 그대로 옮겨받고 겨울에는 화로불에 부글부글 된장국을 끓이면 온집안에 구수한 된장냄새에 어머니의 사랑이 넘쳐난다. 봄엔 새록새록 금방 돋아난 산나물과 곁들어 먹으면 춘곤을 물리치고 잃어가던 밥맛이 돌아와 원기를 살려준다. 된장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아가면서 우리 민족에게는 된장관련 속담들도 많이 나타났다. “장맛이 변하면 집안이 망한다”, “장맛보고 딸 준다”, “된장과 사람은 묵은것이 좋다” 등 집안의 가풍과 관계있는 중요한 요소로까지 생각한다. 옛날에는 어느집 된장이 맛있으면 안주인의 자랑이요 남편의 자랑이였다. 된장은 우리 식문화의 뿌리이며 우리 민족의 정서와 지혜 그리고 삶의 자세가 고스란히 담겨있는 건강식품이고 효자음식이다. 소박하면서 세월의 뜸을 들여 정성이 듬뿍 담긴 콩에서 된장까지의 변신은 선조의 지혜가 있어서 가능하였고 앞으로 어떻게 진화하는가 하는것은 당연히 현대인 우리들의 몫이다.
8    고향의 굴뚝연기 댓글:  조회:2019  추천:0  2015-02-10
아파트생활을 한지 수십년 세월이 흘렀다. 그래서인지 기억속에 남아있는 굴뚝연기는 점점 멀어져 가고 희미해 진다. 간혹 연기를 보아도 고향의 굴뚝에서 피여나던 연기와 너무나 달라 련상조차 할수 없을 정도다. 오랜만에 고향을 다녀왔다. 적적한 차안에서 바깥세상을 구경하는것이 유일한 재미다. 산간마을을 지나면서 저녁을 맞아 집집이 밥짓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여나고 있다. 강산이 몇번이나 변할 세월이 흘렀건만  아직도 굴뚝생활을 하는 가정들이 많이 보인다. 오늘따라 새삼스레 굴뚝연기에 혼을 담아 정감을 불러본다. 스치고 지나가는 차창밖 집집의 굴뚝에서는 기억속에서 사라져가던 파란 연기가 여유롭게 나불나불 춤추며 하늘로 솟아오른다. 시합이라도 하는듯 시간 맞추어 하나둘 피여오른다. 바람이 없을때는 서서히 하늘로 솟다가는 미풍이 불어오자 여기저기로 흩어지며 란무도 한다. 그 모습을 쳐다보던 나의 눈앞에는 저도 몰래 동년시절의 행복했던 시절들이 재구성되여 앨범처럼 한장한장 펼쳐진다. 기실 나무를 연료로 하는 연기는 그 냄새가 짙고 독하지 않다. 불이 잘 들지 않아 연기에 눈물을 흘릴때도 있지만 천대하지는 않는다. 그 냄새를 맡으며 일상을 이어간다. 가스가 땔감들을 대체하면서 도시에서는 굴뚝연기가 종적을 감추어 버리고 인젠 농촌의 특유한 자연경관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였다. 부뚜막은 언제나 어머니의 자리다. 두루마기를 걸치고 불을 지피고 구수한 된장국을 끓인다. 누구하나 돕지 않아도 불때고 밥짓는 일은 언제나 어머니 혼자의 몫이다. 어머니의 인생은 부뚜막과 평생을 함께 한 인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굴뚝연기는 어찌보면 소리없는 명령과도 같다. 연기가 나면 터전에서 일하던 어른이든 뛰놀던 아이이든 집에 갈때가 되였다는 신호를 받은것처럼 집으로 꾸벅꾸벅 발길을 옮긴다. 한창 까불대던 나이인 우리형제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아이들과 마을곳곳을 누비며 숨박꼭질에 바쁘다. 시간이 가는줄도 모르고 집에 갈념도 안한다. 누구집 굴뚝에서 연기가 나면 아이들도 너네 집에서 밥을 짓는다고 야단들이다. 식사준비라고 해봤자 옥수수밥이나 옥수수가루떡이 전부였지만 그래도 내심 매일 기대되는 밥상이다. 굴뚝연기가 피여나고 나면 맛갈나는 식사를 할수 있어서 좋았다. 밥상이 차려졌는데도 집에 돌아오지 않으면 어머니가 마을을 누비며 우리들을 불러들인다. 어머니의 사랑을 가슴으로 느끼고 가족의 의미가 묻어나는 순간순간들이다. 굴뚝연기는 우리들의 어린시절에 즐거움을 가져다준 추억으로 되기에 손색이 없다. 굴뚝연기는 식구들의 가슴속에 묻혀있는 따뜻함이다. 해가 아직 떠오르지 않아도 집집이 남정들은 마을밖에 가서 방목하거나 땅을 일군다. 힘이 들고 배가 출출해날때면 마을의 굴뚝에서 연기가 나는지 살펴본다. 담배를 한대 붙이고 나무밑에 앉고나면 식구들이 밥상을 챙겨들고 연기속을 뚫고 찾아온다. 모든 피로가 가뭇없이 사라지고 육신 구석구석까지 따사로움이 느껴진다. 가족의 끈은 밥에서 시작되고 밥상에서 이어가는것 같다. 소박한 밥상이라도 식구들과 한자리에서 싱겁네 짜네 잔소리를 늘여가며 알콩달콩 지지고 볶고 사는데 행복이 숨어 있다. 가장 단순한 생활방식이 가장 행복한 삶을 만들수 있다. 굴뚝연기는 매일 이른 아침이면 빨간 태양을 맞이하고 황혼이면 둥근 달을 맞이한다. 가물가물 피여나는 연기는 구운 고구마처럼 달달한 행복이 집집마다에 넘치게 하고 산간마을의 령혼이 되여 그 맥을 이어가게 한다. 오늘도 어제 같고 래일도 오늘같은 변함없는 향촌의 삶, 하루가 쌓여 인생이 되고 삶이 쌓여 력사가 된다. 다람쥐 채바퀴 돌리듯 변함없는 인생이지만 그속에 인생의 희노애락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오늘도 굴뚝연기는 어머니와 고향의 상징으로 되여 고향의 정감을  담아 파란 비단이 되여 고향의 하늘을 감돌며 매일매일 춤을 춘다.
7    향기 그윽한 전화벨 소리 댓글:  조회:1510  추천:0  2015-01-30
여기저기에서 주고받는 전화소리는 가지가지의 사연을 담고 아름다운 멜로디가 되여 흘러간다. 인젠 사람들의 일상과 사업의 연장이 되여버린 전화소리는 현대인들의 생활을 좌우하면서 때로는 긴급함을 알리는 명령으로, 때로는 웃음꽃을 피워주는 행복의 바이러스로, 때로는 효도를 실천하는 문안이 되여 인심을 꽃피워준다. 매일 울리는 갖가지 전화소리에 습관되여 있는 나지만 유독 흥겨운 우리가락으로 설정한 전화벨 소리만은 언제나 그리움에 지친 나에게, 사랑에 목마른 나에게 감천이 되여 귀맛을 돋구어주고 굳어진 신경을 살리는 활력소와 에너지가 되여  나를 찾군 한다. 식구들이 흩어져 살아간지도 어느덧 10년의 세월이 흘렀다. 강산이 변할만도 한  오랜 세월이지만 지나고 보니 언제였나 싶게 손가락 튕기는 한순간처럼 참 빠르기도 하다. 겨울옷들 한겹한겹 벗어내고 오래동안 깊이 간직되여 있던 속마음을 들어내는 계절이라 조용히 앉어서 그리움의 실마리와 향기 그윽한 기억을 더듬노라니 행복감이 온몸을 감돌며 나를 신나게 하고 무르익은 봄향기가 소복히 쌓이기 시작한다. 은은한 미풍에 오감을 자극하는 좋은 추억들로 너무도 깊은 정 너무도 두터운 사랑이 마음의 집을 꽉 채우고 흩어질줄 모른다. 오늘도 불볕 더위는 인정사정없이 대지를 달구지만 거리는 생기넘치고 산과 들은 짙은 록색으로 자태를 뽐내느라 야단들이다. 움이 트던 나무들 어제 같은데 어느새 파아란 패션으로 변신을 마치고 자연의 극치와 순리를 어김없이 보여준다. 거짓의 허울들을 한겹한겹 벗어내고 오래동안 깊이 간직되여 있던 속마음을 들어내는 계절이라 조용히 앉어서 그리움의 실마리와 향기 그윽한 기억을 더듬노라니 행복감이 온몸을 감돌며 나를 신나게 한다. 은은한 미풍에 오감을 자극하는 좋은 추억들이 새록새록 돋아나 너무도 깊은 정 너무도 두터운 사랑으로 마음의 집을 꽉 채우고 흩어질줄 모른다. 수년의 세월에 홀로의 몸으로 살아가노라면 힘들고 외롭고 그리움에 마음도 갈팡질팡할때도 있을련만 어쩐지 우리 부부는 호언장담도 없고 열렬한 사랑이 없어도 부부의 인연을 끈질기게 잘 이어가고 있다. 남들이 의심하고 질투할 정도로 서로에 대한 믿음과 확신은 요지부동이다. 인젠 저도모르게 50대에 들어서면서  정열의 시절은 소리없이 사라져가고 있지만 서로에 대한 배려와 그리움은 오히려 나날이 짙어가고 있다. 하루멀다하게 수없이 오가는 국제전화는 돈이 얼마들든 상관없이 일상으로 되여 우리의 인연을 이어주고 그리움과 함께 마음을 따뜻이 덥혀주고 비여가는 마음구석을 사랑으로 차곡차곡 채워주는 보약이 되여 준다. 오가는 대화에는 진심어린 정감들이 살아있고 가슴 깊은 곳에 자리를 잡고 떠날줄 모른다. 진심, 방심, 안심들로 너무나 아름다웠던 지나온 세월의 흔적들을 하나하나 감미롭게 음미하고 나면 마음이 한결 상큼해 진다. 그렇다고 우리 부부의 생활은 언제나 노을 비낀 잔잔한 호수마냥 항상 황홀하고 아름다웠던것은 아니다. 남자의 자존심을 주장하는 나와 강한 녀성의 스타일인 안해 사이에는 입장차이로 티격태격 할때가 많았다. 한치의 양보가 보이지 않고 서로의 립장대립이 극한으로 치달을때는 자리를 뜨는것이 상책이라 훌 털고 일어나 버린다. 시간이 얼마간 흐르고 난후 돌아와서는 “아직도 저기압이냐?” 말을 건네면 안해가 큰눈을 부릅뜨고 흘겨보고나면 내전은 끝이다. 동물의 본능이라 할까 아니면 계절의 변화에 따른 환경요인이라 할까 때로는 인생살이가 구불구불하기도 하고 사방의 갖가지 유혹에 갈팡질팡 할때도 있었다. 궁핍한 사색에 빠져  모댁이는 아픔을 겪기도 하였고 가지각색으로 느낄수 있는 행복한 순간들을 소리없이 흘러보낼때도 많았다. 감정은 다치면 터질듯 창문지마냥 미풍에도 애절하게 요동쳤고 령혼을 습격하기도 하였다. 그래도 다행으로 많게적게 잃고나서는 그 소중함을 깨닳았고 시원하고 터프하고 쿨함은 아무런 소용이 없음을 절감하였다. 감성보다 리성으로 인생을 주체한 뿌듯한 결단들이 있었기에 스스로 자랑스럽다. 인젠 한국행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면서 견우직녀신세를 벗어날수 있게 되였다. 휴가때면 서로 오가면서 세식구가 한자리에 모여 세상부럼없는 담소화락에 빠져 가정의 행복을 돈독히 한다. 한국행이 있을적마다 안해는 무작정 나를 끌고 거리를 거닐면서 안면있는 사람에게 인사를 시키느라 바쁘다. 지어는 한사람에게 몇번이나 인사를 시키는 어처구니 없는 일까지 있었다. 이런 신난 안해를 보면서 가슴이 뿌듯해지고 휘여들기 시작한 등에 저도 몰래 힘이 불끈불끈 솟구친다. 사실 리혼한 사람들은 나름대로의 사정이 있겠지만 별로 요란스러운 새로운 삶을 살지 못하면서 감정을 앞세운 순간적인 판단미흡으로 자신을 새로운 궁지로 몰아갈때가 많다. 호박에 줄을 긋는다고 수박이 될수 있을까. 새롭게 시작하는 인생이 자신에게 힘든 날들의 새로운 시작이라는것을 깊이 인식하지 못한채 자녀에게 심적불안감과 정신적스트레스를 가져다 주면서 가정위기와 해체 그리고 사회적불안의 요인을 만든다. 사실 우리민족처럼 리혼률이 높고 성생활이 혼잡한 민족은 드물것이다. 리성을 상실한 감성은 왕왕 동물의 본능으로 밖에 리해할수가 없다. 이런 민족이 과연 우수한 민족이라고 자부할수 있는지 의문이 간다. 살면서 정이 든다더니 너무도 지당한 말이다. 서로 다른 남남이 만나 두 사람의 인생에서 한사람의 인생으로 살아가야 할 인생의 길에서 정은 때가 되면 빠드득 빠드득 움이 트고 땅을 뚫고 세상에 태여나서는 그 존재와 소중함을 보여준다. 그런 정이 있기에 인간세상이 의미있는 진화를 거듭하는것이 아닌가. 70억인구를 뚫고 맺어진 인연은 너무도 소중하지만 책임감이 없고 감성에 매달린다면 소중한 인연도 쉽게 끊어질수 있다. 지나온 세월에 우리의 사랑은 산곡간의 개울처럼 맑고 순수하여 자랑스럽다. 오수가 흘러들어도 자연의 보약으로 상처 가시며 일사천리 앞만 보고 흘러간다. 가슴아픈 상처는 세월의 흐름과 함께 아물어 가고 사랑의 정은 노을마냥 아름답기만 하다. 모든 지난일들을 추억속에서 새롭게 다듬어 믿음과 정으로 가야 할 머나먼 그 길들을 밝혀준다. 아침노을이면 어떻고 저녁노을이면 어떠랴. 태양이 비춰주는 핑크빛 노을은 변함이 없다. 동산의 무지개나 서산의 무지개나 모두 칠색이 아니더냐. 인생을 빗질하고 나니 희망찬 래일에 가슴이 부풀어 오른다. 인생은 아름답고 인생은 이렇게 사는것이 아닐까. 또 전화소리 울린다. 향기 그윽한 그 소리…………………        
6    중년의 의미 댓글:  조회:1593  추천:0  2015-01-30
근간에 료녕조선족신문 열린 마당에 실린 김옥화작 “중년을 이모작하자” 글을 보고 같은 중년으로서 공감이 생기면서 자신을 뒤돌아볼 기회를 가지게 되였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오늘도 귀가에 조용히 내린 하얀 서리에 저도 모르게 한숨이 흘러나오고 가슴에 서리가 앉는 기분이다. 격정시대는 흘러갔고 만물에 대한 신섬함과 욕망이 줄어들고 때때로 무언가의 두려움에 압력이 늘어나면서 자신이 인젠 중년이라는것을 실감하게 한다. 중년의 사회적역할은 무거운 부담으로 된다. 청년들은 미래를 가리킨다면 노인들은 과거를 가리키고 중년들은 현실을 가리킨다. 중년단계는 가정과 사업 등 여러면에서 비교적 안정된 단계라지만 다른 각도에서 따져보면 중년은 또한 인생의 곤혹단계가 아닌가 싶다. 중년들에 대한 요구가 높고 까다롭다. 사업에선 중년은 강자와 성공인 이여야 하고 가정에선 자상한 남편과 아빠로 효자효손으로 되여야 하는데 어깨가 무겁고 책임은 너무 크다. 기실 매개인이 담당해야 할 부하는 한정되여 있다. 더우기 심리적 부하는 한계를 넘었을때 여러가지 문제가 생길수 있고 여러가지 위기가 초래 될수도  있다. 더욱 참담한것은 중년의 위기는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것이 일반화되여 있다는점이다. 아이들에게는 당당한 아빠가 되고 싶고 부모에게는 심리에 불편을 줄가 걱정해서이다. 안정된 생활속에서도 중년들은 또다시 자신과의 싸움을 시작하며 인간의 자연적인 속성에서 벗어난 새로운 사회문화적차원에서의 인생을 시작한다. 인간의 이런 본능에 대하여 중국의 현인들과 고대희랍의 철학가들도 투철한 견해들을 많이 내놓았다. 그저 홀시되여 있는 아쉬운 부분이라면 중년단계에서 중년들의 생활이 상대적으로 안정된 반면 심리적요인들은 가장 불안하다는것이다. 과거의 가치관과 생활질서 그리고 행위방식들에 대한 심각한 반성과 함께 새로운 고민을 시작하게 되며 심리적요소들의 움직임이 아주 활발하게 된다. 물론 청년시기나 중년시기나 로년시기나 풀어야 할 과제들이 공동적인면들이 있겠지만 이런 부분들은 자연현상들이 위주가 되겠고 중년단계에 풀어야 할 과제는 문화적차원에서 리성적으로 대하고 풀어야 할 과제들이 더욱 많다. 청년시기는 생활기반을 닦는 단계이기 때문에 자연을 초월하는 시기로서 많은 정력을 자신을 위한데 투입하며 부모에 대한 부양보다 자신들에 대한 배려를 바라지만 중년들은 부모들에 대한 부양을 하나의 책임과 의무로 생각한다. 중년단계에는 고독감, 허황과 현실, 영혼과육체, 자신과 자비, 규범과 실수, 물욕과 탈욕, 견강과 나약, 성숙과 민감 등등 특징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는데 이는 중년자체의 제한성과 현실을 초월하려는 무한성사이의 모순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런 모순들은 중년들의 상대적으로 온정된 물질적 획득, 외부세계의 다양한 변화 그리고 중년자신의 의식적인 반성과정과 충돌하면서 심리적으로 불안한 심리적 특점들을 산생하는것이다. 인생을 초월하려는 욕망이 합리한 도경으로 진정으로 이루어지지 못할때 불가피하게 중년들의 인생에 불리한 영향을 가져다주게 된다. 중년들의 심리적불안과 과민반응의 근원은 중년시기의 결속은 자신의 성취감종말을 의미하는데서 기인되는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중년들은 자신과의 비교를 통해 자신을 잘 알 필요가 있다. 매개인들의 올라야 할 산들은 태산이든 아니든, 높든 낮든 얼마나 험난하든 자신의 조건이 부동함에 따라 그 의미도 달라진다. 장애자들이 천신만고끝에 작은 언덕길에 올랐다해도 마찬가지로 사람들의 경탄을 자아낼수 있으며 본인도 스스로 자호감을 느끼고 자신의 가치와 생명의 귀중함을 느낄수 있다. 정상을 향한 휘황도 감동을 주지만 하산의 과정도 보람이 없는것은 아니다. 인생전반기에 겪어불수 없었던 하반생을 무슨 근거로 그 의미를 부정하겠는가? 공리만 매달리던 지난 생애에 비해 문화적 사회적 의미가 더욱 부각될수 있는 새로운 인생일수 있기 때문이다. 많은 중년들 건강상태가 피로루적으로 문제점이 많다. 육체적인 피로뿐 아니라 정신적인 피로도 엄중하며 체력과 심력 모두가 문제이다. 우로는 어른을 잘 모셔야 하고 아래로는 자녀들 잘 키워야 하는 부담을 안고 있지만 중년을 배려해줄 사람은 없다. 스스로 건강을 챙겨야 한다. 사회가 중년에게 안겨주는것은 책임뿐이고 가정이 중년에게 안겨주는것은 의무뿐이다. 사회와 가정은 반드시 중년들의 아픈 마음을 쓰다듬어 주어야 하며 중년스스로가 피흐르는 상처를 핥게 해서는 안된다. 온사회가 청소년들의 성장에 관심을 돌리고 로령화 사회에 접어들면서 로인복지사업에 정력을 돌리고 있는 이때 중년들은 때이른 갖가지 질병과 싸우며 고독한 자신과의 싸움을 소리없이 하고 있다. 현실생활에서 극단적인 음주와 도박 가정폭력 이혼 등 행위는 소수지만 어찌보면 이는 마음속에 쌓여있던 불안정서에 대한 폭발일수도 있다. 나약한 심리적 특징은 중년마다 모두 있다 다만 정도차이일 따름이다. 청년들은 왕왕 불량한 정서와 나약성을 자신들의 일상생활과 사업에서 많이 보여주지만 중년들은 왕왕 내화를 통해 해소하려 하는데 결국 건강이상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래도 씁쓸함에 따르는 여유 그리고 운명에 따르는 태연함이 있어 성숙이라 할까. 일어날 일은 어느때든 일어날거고 바라지 않던 일도 때도 없이 생기는 법이다. 귀중한 무엇인가 곁에 있는것도 모르다가 잃은후에야 뇌리를 치는 순간들도 많다. 아낄건 아끼고 버려야 할것은 인젠 몸에서 훌훌 털어 버려야 한다. 중년은 바로 인생의 절반이다. 걸어온 길은 힘들었고 가야 할 길 또한 아직도 멀다. 그저 고락이 동반된 인생길이 평안하기만 바랄뿐이다.      
5    아버지 고향 그리고 나 댓글:  조회:1569  추천:0  2015-01-30
너무도 어린나이에 아버지을 잃고 다섯식구가 힘겹게 살아가면서 성장기에 많이 위축되여 있어서인지 나는 어릴적부터 모든 장소에서 주동적으로 교류의 말꼬를 터치고 이끌어 나가는 담량과 비위가 없었다. 그런 나에게도 교사사업에 대한 무한한 애착심의 발로인지 세월이 흐르면서 말재주는 나름대로 늘어가더니 주변으로 부터 언변이 좋다는 말들은 많이 듣게 되였고 여러가지 행사도 사회할 만큼 이미지도 급상승하였다. 나는 비밀이 거의 없다싶이 속을 드러내면서 하고싶은 말은 꼭 하고마는 성미다. 해야 할 말은 해야 직성이 풀리고 편한 마음과 자세로 하루생활을 일과할수 있는것이다. 그런 나에게도 입에 쉽게 오르지 않는 말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아버지”라는 말이다. 여섯살에 아버지를 잃고 나서 한참 아버지를 부르며 동년을 즐겨야 했던 나의 인생에서 아버지란 단어는 너무도 일찍 나와 담을 쌓고 수십년세월을 지내왔다. 남들이 행복한 모습으로 아버지와의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줄때면 나는 종종 부러움과 함께 가슴에 닿는 애처로운 처지를 절감하며 아픔에 모댁이기가 일수였다. 반백이 된 오늘 새삼스럽게도 아득히 사라져버린 아버지의 기억을 되살리며 속으로 아버지를 불러본다. “아버지”, 아버지란 도대체 나에겐 어떤 존재일가? 아버지와 함께 한 즐겁던 추억은 이미  사라지고 기억에 남아 있는것은 다만 만취상태로 집에 돌아와서 주정을 부리던 장면뿐이다. 이런 아버지가 나에게는 너무도 무의미한 존재인것 같다. 뜰안의 쓰레기통을 집안에 던지지를 않나 어머니보고 술상을 차리라고 욱박지르지를 않나 어린 우리들에게 기합을 주면서 으르렁거리지를 않나 좋은 추억은 하나없고 그저 그런 존재려니 생각할 따름이다. 이런 기회를 빌어서 단 한건이라도 추억과 함께 감동을 느끼고 싶은데 가정을 위하여 자녀를 위하여 헌신한 아버지 추억은 꼬물만큼도 없으니 한숨만 나온다. 아버지가 무서워 이불속에서 벌벌 떨며 꿈나라에 가야 했던 어린 시절의 아버지에 대한 추억은 아버지의 존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모른채 아버지의 사망과 함께 저멀리로 언녕 가뭇없이 사라져버렸다. 어머니의 헌신적인 보살핌으로 우리 4형제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모성애를 만끽하며 성실하게 성장했을뿐이다. 이런 나의 아버지가 남들의 추억속에서는 멋있고 능력있고 인맥좋고 남을 잘 돕고 인사성이 밝은 훌륭한 존재였다는것을 이입저입을 통해 뒤늦게나마 알수 있었다. 아버지가 문화대혁명시기에 갖은 박해를 받다가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날때 지금의 나보다도 훨씬 젊은 37세 열혈청년이였다. 아버지가 세상을 뜨자 집에 찾아온 손님들이 어찌나 많은지 말그대로 인산인해였다. 아버지의 령구도 손님들이 두어깨에 멘채로 묘지로 모셨다. 이런 아버지가 왜서 우리에게는 훌륭한 존재로 오래오래 함께 할수 없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가슴만 저리고 운명을 탓할수 밖에 없다. 고향을 떠나 수십년세월 타향에서 새로운 둥지를 틀고 살아가는 처지라 해마다 추석 청명이라도 아버지의 산소를 찾아뵐수 있는 여건은 아니다. 조상을 잘모셔야 인생이 잘 풀린다고들 하지만 너무 일찍 서먹해진 아버지의 존재는 거리가 멀고 시간이 허용되지 않는다는 리유로 아버지의 산소로 향한 발길이 거의 끊기다싶이 되였다. 세월이 좋아 청명절도 법정휴가제가 실시되면서 인젠 마음만 먹으면 몸을 털고 길을 떠날수 있는 시간적 경제적 여유가 생기였다. 올해는 큰 맘먹고 아버지산소행을 결심하고 개산툰고향으로 향한 렬차에 몸을 실었다. 원정길이라 마음이 들뜰만도 한데 어쩐지 전혀 다른 착잡한 기분만이 가슴을 때린다. 봄빛이 짙어가면서 날씨는 따뜻하건만 차창밖의 산과 들은 록색이 보이지 않았고 개울에서는 봄날의 따스한 해빛에 녹은 눈과 얼음이 물로 되여 잘잘 흐를뿐이다. 듬성듬성 자리를 잡은 농가에서는 불빛이 가물가물 새여나오고 굴뚝에서 피여나는 연기는 하늘하늘 춤추며 여기저기로 흩어진채 사라진다. 평범한 일상이 이어지고 있는 평화로운 산골의 풍경들이 사람들의 마음을 잡고 있다. 고향은 내가 나서 자란곳이기에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정은 그무엇으로도 바꿀수 없고 끊을수 없다. 고향의 곳곳에 찍혀있는 나의 발자국 그리고 성장의 흔적들은 나를 감동시키기에 충분한 곳이다. 지금의 고향모습은 어떨까 가슴이 설레인다. 고향이 가까워지면서 마음도 한결 설레이기 시작하였다. 멀리서 바라보니 산중턱까지 올망졸망 들어선 민가는 번창했던 고향의 옛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가까이 할수록 고향에 대한 그리움으로 부풀어 있던 마음이 허전함과 허탈감으로 변하기 시작하였다. 고향거리를 거닐면서 유심히 살펴보니 인적이 너무 드물었고 낯익은 얼굴은 하나도 안보였다. 난민촌을 방불케 하는 거리와 강한 산바람에 하늘을 날아예는 쓰레기 그리고 주인 사라진 빈집들마다 여기저기 뜯긴채 페허로 되여가고 있었다. 즐겁던 동년시절의 고향모습을 다시는 찾을수 없을 정도로 적막함과 황량함으로 가슴이 내려 앉았다.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더니 강산이 두번이나 변할 세월이 더 흘렀으니 고향도 변할만도 하건만 이런 모습의 고향의 변화는 근본 바란바는 아니였고 상상이상의 충격일 뿐이다. 국영공장하나만을 믿고 살아가던 고향사람들은 기업의 도산과 함께 외국으로 타향으로 뿔뿔이 흩어져 버렸다. 쓸쓸하고 삭막한 고향의 모습을 하나하나 눈에 새기며 나는 느슨한 비탈길을 따라 아버지의 산소를 찾아 떠났다. 세월과 함께 변한 산의 모습이라곤 다만 수없이 늘어난 묘뿐이다. 묘비에 쓰여있는 익숙한 이름들도 종종 보였는데 하늘과 땅에서 혼으로 우리들의 인연과 만남이 계속되고 있었다. 힘들게 아버지의 묘비를 찾아보니 우거진 마른 잡초에 꺼진 묘지는 오랜 시간 손길이 닿지않았음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아버지, 묘에 누워계시는 분이 진짜 저의 아버지 맞으신가요? 수십년세월 홀로 어떻게 지내오셨습니까? 얼마나 고독하셨습니까? 저의들이 언제오나 많이  기다리셨죠. 비록 아버지는 우리를 위해서 해준것이 없지만 그래도 이 세상에서 가장 보귀한 생명을 주셨잖아요. 못난 아들 늦게나마 아버지앞에서 속죄합니다. 미안합니다 아버지! 상을 차리고 아버지가 가장 좋아하는 술을 붓고 절을 올리고 나니 가슴이 후련해지면서 가슴깊이 숨어있던 아버지란 말이 입으로 튕겨나와 묘지주위를 맹돌았다. 순간 젊은 아버지가 땅을 뚫고 나타나 반백이 된 아들과 상봉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환상을 하면서 나는 오래도록 아버지의 묘앞에서 발을 떼지 못하였다. 머리를 돌려 고향의 모습을 내려다 보니 마음이 서서이 열리기 시작하였다. 고향이 없었다면 고향의 깊은 정이 없었다면 오늘의 나의 행복과 모든것이 있을수 없었을것이다. 고향은 나의 인생에서 영원히 잊을수 없는 마음의 안식처이고 힘의 활력소이고 그리움의 대상이다. 정이 넘치고 동포들로 떠들썩하던 그런 시대가 다시 올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세상 어디선가 새로운 삶을 위해 동분서주하던 고향사람들이 언제라도 한자리에 모여 고향의 새로운 변화를 시도할때가 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져본다. 우리 선인과 위인들은 후세에 너무도 많은 효에 관한 정신적부를 남겨주었다. 맹자가 한 말“孝子之至,莫大乎尊亲”,“惟孝顺父母,可以解忧”의 뜻인즉 훌륭한 효자로 되려면 자신의 부모부터 존경해야 하고 부모님께 효도하면 걱정할 일이 없다는것이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하늘이고 어머니는 땅이거늘 하늘과 땅이 결합되여 만물을 생성하니 무슨 걱정할 필요가 있겠느냐이다. “百善孝为先”이라는 말도 바로 효로부터 선을 실천하라는 참뜻이 담겨있다.  사람들은 흔히 바쁘다는 리유로 인간의 기본도리를 뒤로 한채 살아갈때가 많다. 자신의 친인들을 따뜻이 대하고 배려하는 기본자세가 갖추어지지 못한다면 일생의 유감이요 비극이 아닐수 없다. 친인들이 건강하고 즐겁게 살아가야 자신을 포함한 모두가 편안하고 행복할것이다. 친인들이 떠나고 나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조상을 감사한 마음으로 잘 모시고 부모님께 효를 실천하는것은 결국 자신에게 리롭다는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래도 나의 곁에는 아직 어머니가 살아계셔 우리에게 효도의 기회를 주어서 너무도 감사하다. 아버지께 할수 없었던 효도를 어머니께 배로 해드리는것으로 그 서운함을 달래본다. 부모살아 생전에 자주 들려보고 전화문안이라도 종종 드리는 효도 역시 부모님을 즐겁게 해드리는 좋은 기회가 아닌가. 어머니 부디부디 건강장수하세요. 아버지가 어머니께 해드리지 못한 몪까지 저의들이 행복하게 해드리겠습니다. 아버지 인젠 편히 쉬세요. 어머니는 저의들이 책임지겠습니다. 아버지,어머니 사랑합니다.  
4    술과 인생 댓글:  조회:1408  추천:1  2015-01-30
세월이 조용히 흘러가면서 지난 세월의 흔적들이 기억속에서 종적을 감추기 시작하였으나 어쩐지 유아에서 아동에로의 과도시기에 겪었던 술로 인한 기억은 눈앞에 새록새록 자주 나타나군 한다. 신사답고 인맥이 좋아 여기저기에서 벌어진 술상을 자주 드나들던 아버지는 어쩐지 술상에만 앉으면 술의 노예가 되여 늘 만취상태에서 집에 돌아와서 주정을 부리군 히였다. 녹초가 된 심신으로 뜰안의 쓰레기통을 집안에 집어던지지를 않나 꼬부라진 알아듣지못할 말들을 수없이 중얼거리지를 않나 온밤 집안을 부산하게 만들기가 일수였다. 어린 우리형제는 찍소리도 못한채 이불속에 숨어서 언제 어떻게 잠들었는지 몰랐다. 이것이 바로 술이 나에게 남긴 첫 추억이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술로 인해 받은 신체적 심리적 고통은 나에게 술에 대한 긍정적인 해답을 거의 할수 없을 정도로 그리고 지어는 술을 만들어낸 사람이 왜서 이런 괴물을 만들어냈을까 의구심이 들 정도로 나를 괴롭혔다. 누군가가 나보고 “정말 아까운 사람이다. 술만 잘하면 앞길이 창창할 사람인데” 하고 던진 말 한마디가 잊혀지지 않는다. 너무도 술을 회피하고 늘어나지 않는 주량에 주변도 안타까운 마음인가 보다. 그러면서 술을 잘해야 사회생활을 잘할수 있고 사람들의 긍정을 받을수 있는 오늘의 현실에 안타까울뿐이다. 그런다고 술문화가 그 무슨 나 개인의 의사에 의해 변하는것도 아니고 남녀를 불문하고 절대다수의 사람들은 술과 동반자가 되여 살아가면서 단순한 음주라는 사회적행동을 오늘의 문화적현상으로 승화시키고 있는 현실을 무시할수는 없지 않는가. 오늘따라 술이란 존재가 도대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새삼스레 점검하고 싶어졌다. 우리민족이 술에 집착하는 이유는 술에 능한 사람들이 남자답고 술에 약한 사람들은 사회생활에 적응하기 힘들다는 사회적인식과 생존압력이 가중되면서 고도의 긴장상태가 사람들에게 속심을 털어놓고 스트레스를 날려보낼 기회와 장소를 찾도록 하는것이 주된 원인이 아닌가 싶다. 수천년의 발전 과정에서 형성된 술문화는 인젠 우리민족의 생활의 일부분이 되여 인간의 삶에서 없어서는 안될 새로운 의미와 함께 자리을 잡고 있다. 술자리는 인간관계의 교류를 펼치는 장소로 되여 각종 거래가 이루어지기도 하고 리성의 그늘에 가리워졌던 억압된 감정이 분출되기도 한다. 특히 우리민족은 체면, 눈치, 인사치레 등을 중시하는지라 술자리에서 서로 눈치를 보거나 남에게 비치는 자신의 모습에 대해서 강하게 의식하며 술자리 참석에의 강요와 술권유, 그리고 그러한 술자리 규칙을 따르지 않을 경우에 생기는 손익 등에 비교적 민감하다. 때문에 술자리에서 개인이 자신의 의지대로 주량에 맞게 술을 적당히 마시는데 어려움이 많고 술자리는 대부분 2,3차로 이어져 계속되는 술 권유에 취할 때까지 마시기도 한다. 자기만의 기분에 취하여 과음함과 아울러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을 “왕따” 취급하듯 감정을 살려가며 분위기를 엉망으로까지 몰고 가면서 술에 집착한다. 술이 별로인 나도 어쩌다 이길수 없는 유혹에 술잔을 들고 보면 목구멍을 파고드는 매캐한 맛뒤에 피여나는 특이한 향기가 입안을 감돌며 감미로운 술의 진맛을 느낄때가 많다. 문학가들이 술을 즐긴 이유도 여기에 있는것이 아니였을까. 그들은 술을 통해 자유분방을 알았고 자연의 극치를 보아냈고 흔들리는 마음의 의미와 갈구를 깨닳았다. 고대시인 리백은 술애호가로서 음주후에 남긴 시구들이 후세에 널리 알려져 있다. 술뒤에 진심을 보여준다는 말이 있다. 정인군자도 술뒤에는 위장을 벗을줄 알고 진정을 보여준다. 담이 작기로 콩알만 하던 사람도 음주뒤 담대해지면서 욱욱 룡을 쓸줄 알고 가슴깊이 숨어있던 하고싶던 말을 던진다. 아부에 미친 사람도 술기운을 빌어 상사의 어깨를 툭툭 치며 의리가 있네없네 너스레를 떨줄 안다. 이것이 술의 매력이 아닌가? 언젠가 나도 술에 맘껏 취해 하늘땅이 무서운줄도 모르는 슈퍼맨이 되여 보고 싶다. 몽롱한 의식으로 세상을 보고 싶고 전혀 다른 인생의 감각을 느끼고 싶고 만취한 자신의 모습에 대한 타인의 평가도 듣고 싶다. 진정 그런 날이 있을라나. 술을 마실때는 취해야 술의 매력을 진정 느낄수 있다는게 술군들의 공감이다. 건배의 의미는 취하려는 의미가 이미 담겨있고 오늘의 즐거움을 만끽하려는 의미와 취기속에서 나름대로의 공감대를 확인하고 넓혀가려는 의미도 담겨있다. 취중의 몽롱함은 공동체를 찾아가는데 기여하는 바가 확실히 크다. 이렇게 술은 인간에게 떼어 놓을수 없는 반려자이다. 이런 의미에서 볼때 술을 무시한다는것은 사회의 공동의식을 배척하는것이나 다름없으며 술은 인류에게 있어서 위대한 존재가 아닐수 없다. 거기에다 술은 한기를 없애고 소화를 돕고 안정과 진정역할을 하며 혈액순환을 돕고 부패를 방지한다고 하니 술이란 존재가 금상첨화가 아니겠는가? 하지만 이 기회를 빌어 술에 집착하는 민족의 평균수명이 짧다는 엄연한 객관현실을 꼭 짚고 넘어가고 싶다. 평균 술소비량이 세계제일이라고 자랑하는 한국인과 중국조선족 그리고 높은 도수의 술을 선호하는 로씨야인들의 평균수명이 모두 해당된 경제실력국가와 민족과 비해 볼때 많이 짧은걸로 집계되고 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것은 나와 상관없는 우연한 일로만 쉽게 지나치다가 회한의 심리적고통에 모댁일때에야 주해의 엄중성을 절감하며 상상못할 대가를 치른다. 술을 알맞게 마시면 건강에 도움이 되고 정신적으로 좋은 자극제가 되어 큰 효과를 나타내지만 지나치면 건강도 해치고 정신도 황폐해지고 가족까지 파멸로 이끈다. 술로 인해 생명을 잃고 건강을 잃고 가족을 잃은 가련한 사람들이 소수가 아니라는 사실을 누구나 인정할것이다. 술소비는 응당 문화적소비로서 례의를 지키고 분위기를 띄우고 심경을 토로하고 정취를 만끽하는것이여야 한다. 인젠 축복의 장이 되고 건강의 활력소가 되고 공동체를 형성하며 남을 존중하고 배려하면서 즐기는 건전한 술문화가 안착되도록 지혜를 모을때가 왔다고 보아진다. 단순한 개인의 음주애호의 범위를 벗어난 인격과 국격 그리고 민족의 영예와도 밀접한 관계를 가지는 사회적현상으로의 건전한 술문화를 창도하는 계기가 조속히 마련되여야 한다. 어쩌다 방종하고 실수하는 술문화는 그것이 경험이 되겠지만 도를 넘어 지나치게 되면 죄가 되고 해가 되는것이다. 우리생활의 구석구석까지 파고 들며 부정부패의 수단으로 가정파탄과 건강을 해치는 도구로 까지 리용되는 술문화는 청산되고 멀리해야 한다. 그러자면 우리는 술문화 에서의 진화를 가속화하여 술문화에 숨겨진 용속한 습속을 버리는데 모두가 앞장서야 한다. 이 기회를 빌어 음주를 통한 심신건강과 사회적공동체를 진정으로 형성하는 그날이 왔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본다.
3    하얀눈의 축복 댓글:  조회:1370  추천:0  2015-01-30
눈이 어느새 땅우에 많이도 쌓였다. 뿌연 하늘에선 소리없이 눈송이가 날려와 여기저기에 자리를 잡는다.눈에 뒤덮힌 길따라 떠난 그는 한마디 말없이 사라졌다. 크다란 발자국은 어느새 소북히 쌓인 눈 아래로 사라진다.흐려지는 기억을 다독이며 나는 스스로를 기억의 울안에 가두어버렸다. 그가 남긴 모든것을 기억속에서 쓰다듬으며 어디선가 뭘하고 있을 그에게 안부를 묻는다. 앙상한 나무가지마다 그래도 눈송이를 붙잡고 고독을 달래느라 바쁘다. 어쩐지 나는 봉사롱아가 되더라도 인젠 그대의 존재를 감지하고 싶은 욕망만은 영원히 갖고 싶다. 그 시절 아름답던 동요와 함께 세월의 곳곳에 숨겨놓았던 그리움과 련민들이 하나하나 심령에 파고든다. 열혈청춘 작열하는 태양밑에서 뜨거운 정이 오가던 랑만의 순간순간들 너무도 소중한 추억이다.그래서 차가운 겨울도 나는 무섭지 않았고 새하얀 눈송이도 포근한 이불이 되여 얼어드는 육체와 령혼을 감쌀수 있어 너무도 좋았다.언젠가 그는 이렇게 말했었다. 내가 멀리 있어도 절대 슬퍼말라고. 그래, 나도 알고 있단다. 나를 홀로 두고 나의 세계에서 영영 사라질수 없다는거. 언제나 너에 대한 나의 그리움을 안고 고운 눈꽃이 되고 투명한 얼움이 되여 함께 한다는거.살아가면서 잊혀지는 사람들이 그리도 많다지만 그래도 기억의 구석에서 떠나지 않는 네가 있어 행복하고 후회없는 인생을 살아갈수 있다. 시계는 똑딱똑딱 정적을 두드리고 그리움에 지친 시내물은 얼움속에 종적을 감추고 소리없이 흐른다. 추억속에 젖어드는 눈가의 눈물 인젠 지워줄 사람도 없고 한송이 꽃에 담은 애절한 나의 마음도 인젠 짙은 안개속으로 사라져 간다.살아숨쉬는 리성의 신경을 살려 쓰러지는 나를 스스로 부추키고 기억의 문을 열어가느라 기진맥진이다. 그래도 이래야만 너무도 새하얀 우리만의 세계에로 다가설수 있으니 다행이다. 인젠 그리움과 회한에 안타까움이 없다. 아. 새하얀 눈 펑펑 많이도 내리는구나.  
2    봄날에 내리는 하얀눈은 아름답다 댓글:  조회:1432  추천:0  2015-01-30
봄빛이 갈수록 완연하다. 사람들도 겨울내 움츠렸던 몸을 추슬린다. 그런데 웬걸 때아닌 큰눈이 내리기 시작한다. 온 겨울 눈이 그림자도 안보여 서움함이 많았었는데 봄날씨에 봄비가 눈이 되여 펑펑 내리고 있다. 계절을 우롱이나 하듯이 정말 많이도 내린다. 장인의 손놀림이 필요없이 사람들의 주목을 받으며 여기저기서 눈의 변신이 바쁘다. 복설같은 존재라 계절에 관계없이 포근함과 깨끗함을 안고 사람들에게 애교부리며 다가선다. 아지랑을 싣고 여기저기에서 기웃거리던 봄소식은 어느새 종적을 감췄다. 눈은 우아한 자태로 그리움이든 기다림이든 관계없이 제멋에 취해 춤추며 내린다. 창가에서 바깥을 내다보니 빌딩도 가로수도 그리고 힘들게 움직이는 차량과 행인들 모두가  굳어진듯 하다. 앨범의 경물마냥 세상이 고정되여 아름다움을 선물한다. 이런 날씨에는 당나라 시인들의 명시를 읊으며 와인을 한잔하는것도 랑만이 아닐까 싶다. 여유와 오만함으로 공간을 꽉 채운채 날려오는 눈송이 그리고 눈송이와의 숨박꼭질에 신난 바람은 어쩌면 한쌍의 련인마냥 정답고 행복해 보일까. 함박눈은 기이하고 아름다운 화폭이 되여 황홀함과 무한한 상상에 우리를 빠져들게 한다. 눈이 잠시 멈춘듯 하더니 구중천에 떠있는 태양은 혼이 나간듯 뿌연하늘에서 정신을 가다듬느라 바쁘다. 빌딩사이로 어렴풋이 보이는 해빛들은 어쩐지 어색한 모습이다. 자연의 변화는 참말로 신기하다. 멀리 바라보니 광야를 뒤덮은 대설들은 웅위로움에 신나있고 은빛으로 황홀하다. 무거운 눈덩이에 휘여진 길가의 나무들은 작은 바람에도 흔들흔들 그래도 신사마냥 겸허하다. 대설은 사람들의 행보를 느리게 하지만 오가는 사람들의 발길은 끊기지 않는다. 나는 봄날의 피곤함도 없이 기대감을 안고 창가에 서서 춤을 추는 눈송이를 유심히 살펴본다. 눈이 오면 겨울추위가 다가옴을 알려주지만 이번 눈은 의미가 달라진다. 봄날의 정기를 느끼게 하고 봄날의 따사롬을 한결 돋구어준다. 봄날의 눈은 포근하고 겨울처럼 무정하지 않다. 봄날의 눈은 희망을 주고 겨울처럼 삭막하지 않다. 봄날의 눈은 색다른 경관을 보여주며 한수의 시 한폭의 그림 한곡의 감동을 주는 선률과도 같이 찬란한 계절이 되여 우리에게 무한한 동경을 가져다 준다. 눈의 세계에 빠져드니 눈의 사심없는 기여가 고맙기만 하다. 이슬로 녹아 물로 녹아 생명을 다한다 할지라도 짧은 생애에 인간들에게 아름다움을 남겨주고 자신에게는 가장 평범하고 무미한 순간만 남긴다. 백옥같이 눈부신 눈으로 변신하기까지 기나긴 기다림과 모대김을 견디면서 말이다. 그러다가도 자신을 보여주고 자랑할때 복잡한 심경으로 성공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선택을 해야 한다. 선택의 결과는 생애의 전부를 인간과 자연에게 선뜻 바치는것이다. 눈꽃은 요란스럽지 않고 정갈하며 우뢰처럼 떠들썩하지 않고 정적을 지키며 바람처럼 변덕이 많지 않고 집착하며 비처럼 애절함에 좌절하지 않고 기회를 기다리며 소리없이 땅에 내려와 마음의 짐을 벗어내린다. 눈꽃마다 반짝이고 부드럽고 까다롭다. 미미한 기류의 이동과 함께 방향없이 란무하며 뒹굴기도 하는 모습이 무용수의 헌신적인 춤의 세계를 보게 하는듯 하고 힘없이 유리창에 키스하다 내려앉는 모습이 련민과 아쉬움에 지친 모습인듯 하다. 그 아쉬움을 달래려는듯 하늘에서 수많은 눈꽃들이 나타나 우아한 자태를 뽐내며 바람타고 날려온다. 그리고는 나름대로 여기저기에 자리를 잡고 눈덩이를 이루며 새로운 변신을 하고 있다. 어느새 대지는 말그대로 하얀 세계가 되여 동화속의 이야기를 현실로 재연한다. 나는 손을 내밀고 하얀 눈송이를 담아봤다. 나의 따뜻함에 감동을 하였는지 순식간에 손바닥에서 한방울의 눈물이 되여 사라진다. 나는 너무도 눈을 기다렸다. 지어는 꿈에서도 백설같은 겨울의 경치를 보군 하였다. 그렇게도 기다리던 눈이 끝내 나의 세계에 찾아들었고 아직도 펑펑 쏟아지고 있다. 나는 나의 두눈에 천신만고끝에 찾아온 새하얀 눈을 오래오래 담아두련다. 두다리로 천산만수를 지나서라도 내가 기대하던 황홀한 눈을 찾아보련다. 눈이 오고 세월이 가고나면 남는것은 생활과 생명이 남겨준 무한한 감개와 감사의 마음뿐이기 때문이다. 눈이 언제 오는냐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것은 평온한 마음으로 기다려주고 하늘하늘 춤을 추는 눈을 지켜주고 메마른 령혼을 적셔주면 되는것이다. 이런 날씨 맞게 떠오르는 정감을 살리려면 친구들과 모여앉아 술이나 커피를 마시면서 욕심과 스트레스를 떨쳐버리고 눈처럼 순결하고 아름다워지고 눈처럼 집착하고 시인이 되여주는것이다. 래일은 눈이 있을라나. 봄날의 눈물에 나의 꿈이 깨지지나 않을란지. 꿈이 깨지면 류랑이나 보내지. 세월에 남겨진 숙제는 너무도 많으니까 추억이라도 있어서 천만다행이다. 다음 눈은 언제나 올라나. 다음눈은 어깨우에 모시고 함께 춤 추리라.        
1    50대의 인생 넉두리 댓글:  조회:1895  추천:3  2015-01-30
50대의 한해가 또 저물어 가고 60대로 향한 거리가 더욱 가까워진다. 오늘따라 새삼스레 거울에 비낀 자신의 모습을 유심히 들여다 보며 감회에 빠져있다. 50대라면 백을 반으로 나눈 꽤나 많게 살아온 인생이다. 모택동이 30년세월을 손가락 튕기는 한순간이라더니 청춘과 랑만으로 넘쳤던 대학시절의 숨결이 아직도 들리고 있는데 인젠 50대라는 사실이 스스로도 믿겨지지 않는다. 그래도 마음만은 아직 이팔청춘이라 남과 나이를 주고 받을때 언제나 40대 초반 아니면 중반으로 시치미도 뚝 따기도 하지만 거짓없이 얼굴 곳곳에 파고드는 세월의 흔적들은 갈수록 완연하다. 안위따위를 해봤자 인젠 쓸데 없다. 시야가 겹쳐지고 기억력이 쇠퇴되고 힘들게 머리속에 쌓아 놓았던것들도 언젠가 저절로 기억에서 사라지고 몸 여기저기서 켜지는 적신호들로 점점 지쳐가는것은 어쩔수 없다. 때때로 권태와 피로가 느껴질 때 책보기도 싫고 글쓰기도 싫고 일시적인 타락속에 허우적거리기도 한다. 과거의 가치관과 생활질서, 그리고 행위방식들을 되돌아보며 새로운 고민을 시작한다. 감성으로 대할수는 없고 리성으로, 문화적차원에서 풀어야 할 과제들이 50대들 앞에 줄 서 있다. 50대는 새로운 인생의 시작이라는 사람도 있고 게으름과 피로로 인해 타락의 시절이라는 사람도 있지만 그래도 살아온 인생이 있어 남한테 뒤질세라 자신에게 채찍질하는것을 잊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언제나 적극적이고 진취적이고 정직한 삶을 추구하고 젊은이들이 하는 모든 일에 과감히 도전을 한다. 그러나 거센 파도에 밀리는 자연의 순리앞에서 우리는 유물론자일수밖에 없다. 이는 중년자체의 제한성과 현실을 초월하려는 무한성사이의 모순을 잘 보여주고 있다. 커피 한잔을 타고 베란다 창가에 다가서니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는 바깥세상이 한눈에 안겨든다. 사람들은 비좁은 공간에서 자신만의 생존법을 익히고 행복을 찾아 동분서주다. 보일락 말락 잡힐듯 안잡힐듯 숨박꼭질만 반복되는 인생이지만 그래도 행복을 찾아가는길이라 모두들 흔쾌히 받아들인다. 나도 그들속의 한 구성원이라 생각하니 세상이 정겹게 느껴진다. 교사직에 종사한지도 어느덧 30년세월이 흘렀다.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앞만 보고 달려갔지만 돌이킬수 없는 막다른 골목이였을 때도 있었고 노력의 대가로 영예의 꽃다발속에 묻혀 순간의 기쁨을 전률처럼 느낄때도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길어지고 치른 대가가 커갈수록 포기하려 해도 인젠 힘들어진다. 새로운 도전을 하고 싶어도 불가능하며 가던 길을 계속 갈수 밖에 없다. 최종결과가 어떻든 인젠 정말 중요하지 않다. 매일 보람을 느끼고 행복감이 든다면 그걸로 만족이다. 블로그를 개설한지 시간이 꽤나 흘렀다. 오가는 사람이 많지도 적지도 않다. 시간이 가는대로 생각이 가는대로 적는 나만의 공간이다. 정보화시대라 블로그를 개설한 50대들도 많다. 50대들의 블로그를 살펴보면 꾸김새나 글들이 천차만별이다.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인지 어설픈 블로그들도 수두룩하다. 그래도 글마다에는 그들의 삶에 대한 애환과 태도가 담겨있다. 수작이든 졸작이든 모두가 인생기록이고 인생에 대한 터득이고 삶의 의미가 담겨 있다. 인생기록과 함께 자신을 되돌아보는 그들이 자랑스럽다. 거리에 관계없이 블로그를 통해 우정을 쌓아가는것도 블로그의 재미이다. 그래서 시대적 흐름에 자신의 몸을 싣고 블로그를 만들고 글을 쓰고 올리는것이 아닐까. 50대는 인간교제가 가장 왕성한 시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소학에서 대학까지의 동창, 직장동료에 사회친구까지 하면 어마어마한 친구군체가 이루어진다. 민감한 부분은 그래도 이성교제이다. 오가는 말에서 서로를 알게 되고 거기서 흡인력이 생길때 친구가 되고 그 다음 손을 잡게 되고 좀 더 가까이 다가들면서 전률을 전달하게 되는것이다. 매 순간의 한계를 장악하기란 쉬운것은 아니다. 맘에 드는 이성을 마주하게 되면 눈을 크게 뜨고 슬금슬금 눈요기를 하는 것은 누구나 똑 같다. 그러나 넘지 말아야 할 한계가 있다는걸 누구나 명심하고 있는것은 아니다. 여지껏 살아오면서 아직도 생일에 대한 개념이 뚜렷하지 않다. 자신이 태여난것이 뭐가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요란스럽게 축하를 하는지 싶지만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바쁘고 또 그 하루하루에 의미를 두는것이 더욱 보람있지 않나 생각하기 때문이다. 부모님의 생일은 효를 실천하는 선행으로 인지하고 꼭꼭 챙겨드리지만 다른 생일에는 모처럼 기억을 해서 문안과 축복을 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형들한테서 꾸중을 들은적도 한두번이 아니다. 생일을 쇠고 한살 먹고나면 인생이 일년 줄어드는것과 다름없는데 진짜 축하할 일인지 아직도 확답이 안 선다. 지나온 인생을 더듬어보면 인생은 자신과의 싸움이나 다름없다. 적을 이기는것은 하루 혹은 한 순간이면 충분할수 있어도 자신을 이기는것은 평생일수도 있다. 그 싸움이 지루하게 느껴질때 살아있는 매일매일을 생명의 마지막 하루라고 생각하면 더없이 소중한 인생이 될수 있다. 눈물로 어제날을 미워하고 한탄할바에는 땀으로 래일을 위해 오늘 억세게 일하는것이 현명한 선택이다. 남이 나를 긍정하지 않으면 스스로 인가하고 남이 나를 즐기지 않으면 스스로 즐기고 남이 나를 축복하지 않으면 스스로 축복하면 된다. 사람들의 의심과 시선에 스트레스를 받을 필요 없고 타인들의 무지함으로 자신에게 아픔을 줄 필요는 더욱 없다. 내길을 내가 걸어가거늘 남들이 뭘 하든 무슨 상관이랴. 지난 수십년 세월, 어찌보면 생존의 기본을 위해 싸워온 힘든 인생이였으나 나름대로 삶의 의미를 터득하고 사계절의 향기를 골고루 맡으면서 살아온 보람도 있는 인생이다. 하기에 종종 지난 세월의 좋은 추억에 빠져보기도 하고 힘든 세월의 기억들을 찾아 헤매기도 한다. 그것이 바로 인간의 승화와 진화의 과정이 아니겠는가. 정상을 정복하는 휘황도 감동을 주지만 여유있는 마음의 자세로 주변의 경물에 빠져보는 하산 과정도 너무도 보람있다. 명예와 금전에만 얽매여 심신이 고달프던 지난 세월 비해 인젠 문화적, 사회적 의미가 더욱 부각될수 있는 새로운 인생을 살수 있다면 자신의 인생에 금상첨화가 아니겠는가. 집나설 차비를 하는데 또 어머니의 잔소리가 들린다. 날씨가 추우니 옷을 많이 껴입고 나가란다. 인젠 할아버벌로 치닫는 인생이지만 그래도 어머니는 언제나 아이다루듯이 사랑의 잔소리에 신나 있다. 어머니에게는 우리가 나이에 관계없이 영원히 아이로 보이나 보다. 그래서 더욱 행복한 50대이다. 아이면 어떠랴 어머니가 있어서 너무도 행복한 인생인데. 부모님 살아생전 효도의 기회를 주어서 얼마나 고마운 존재인데. 길가에 나서니 몸부림치던 앙상한 나무가지들이 어느새 함박눈을 얼싸안고 련민에 빠져있다. 자연의 한 구성원이 되여 나도 눈송이를 한웅큼 손에 꼭 쥐고 김빠진 공마냥 축 처진 자신에게 잔소리을 늘여놓는다. 그래! 인생은 이제부터 또 새롭게 시작하는거다. 여유있는 삶의 자세로 새록이 움트는 봄날처럼 파아란 인생을, 작열하는 여름날의 해볕처럼 화끈한 인생을, 빠알갛게 젖어가는 가을단풍처럼 황홀한 인생을,  새하얀 겨울의 눈처럼 깨끗한 인생을 살아 가는거다. 자신만의 오색령롱한 인생에 종지부를 찍을 그날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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