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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    우리네 '효': 그 실천과 부모-자식관계의 인류학 (리화) 댓글:  조회:851  추천:1  2022-08-18
  내 나이 인생중반을 훌쩍 넘기고 보니 1943년생 친정어머니 역시 어느새 여든을 바라보는 백발의 할머니가 되여계신다. 최근 몇주일 동안 병원치료에 동행하면서 유난히 서글프게 다가오는 어머니의 늙음. 몇년전까지만 해도 팔을 휘∼휘∼ 내저으면서 자식들의 도움을 마다하던 그 옛날 의사선생님의 호기로움과 쿨함은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고 어쩌다 누려보는 딸의 그야말로 손톱눈 만큼이나 자잘한 ‘효도'에도 "내 절로 뻐스를 타고 가도 되는데, 덕분에 호강했소. 머 먹고 싶은 게 없소? 세치네탕 해줄가…"라고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피하고 싶지만, 그럼에도 누구 하나 비껴갈 수 없는 늙음으로 가득한 팔순의 어머니 모습에 문뜩 내리쳐오는 "이제부터가 효도의 본방, 그 전의껀 아무것도 아니야" 라는 매서운 채찍과 그 계시. 진정한 효도란 어떤 것일가. 그러면서 또 드는 생각 하나—효도는 자식만의 책임일가.   요즘 세월 보기 드문 효부 친구가 있다. 구순에 가까운 시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그녀는 끊임없이 계속되는 옛날 얘기가 가장 견디기 힘들다고 한다. 하기야 혹독한 시집살이에, 시댁으로부터 입은 깊은 상처 때문에, 그래서 수십년이 지나도록 그 사건사고들을 두고두고 되새기는 우리네 어머니와 할머니가 어디 한둘뿐이랴. 하다면 그네들의 원망과 미움으로 얼룩진 젊은 날들이 한낱 '효도'라는 한마디 '칭찬'으로 보상받을 수 있을 만큼 별 게 아닌 것이였으며 그것 또한 진심에서 우러나온 '참 효도'였다고 할 수 있을가.   여기저기 아픈 데가 많아오고 잊음도 헤퍼지고 사고력도 흐릿해지고 마음도 한없이 약해져서 서러움만 늘어나는 로년, 어쩌면 앞으로 나의 칠십대, 팔십대도 이러할 것인데 과연 늙는다는 것은 무엇이며 나는 어떻게 ‘곱게' 늙어가야 내 마음이 편하고 내 자식이 진정한 ‘효자효녀'가 되는, 그래서 서로에게 아름다운 인생의 마지막 그림을 그려낼 수 있을가.   우리는 흔히 가족을 생물학적이고 자연적이며 본능적인 존재로 간주해왔다. 하여 오늘까지도 우리네 가족은 겹겹의 ‘신화'들로 둘러싸여있으며 그 대표적인 것으로 과도하게 포장된 사랑과 조화 그리고 똘똘 뭉치는 결속력 등을 들 수 있다. 반대로 가족 성원들간의 권력구조와 위계질서로 인한 긴장과 갈등, 증오와 리기심 따위는 무시되여버려진 채. "가족이기 때문에…","가족이니까…" 그 어떤 리타적인 희생도 감내해야 하고 또 감내할 만한 것이라고 착각해왔다.   따라서 부모와 자식 관계 역시 이와 같은 론리의 틀에 맞춰 규정되여왔으며 부모에게 무조건 복종하고 봉사하는 무수한 ‘효'의 표상들을 만들어왔다. 설령 우리가 마주한 가족의 현실이 결코 세간의 기대와 절대적으로 일치하는 것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동화와 같이 조화로운 가족의 형상들이 끊임없이 서사해왔으며 심지어 세대를 뛰여넘어 이어왔다. 마치 우리네 어머니, 할머니들이 자신이 겪어왔던 고된 시집살이를 ‘효'라는 이름으로 그 며느리에게 대물림하듯이 말이다.   그러나 요즘은 시대가 변했고 관념이 변했다. 부모와 자식 세대의 성장환경이 확연히 달라진 탓에 가치관의 차이 역시 점점 좁히기 어렵게 되였으며 "귀머거리 3년, 벙어리 3년, 소경 3년" 석삼년을 참아가면서 시집살이 할 며느리도 이제 없다.   그러고보니 우리는 오랜 세월 동안 자식의 부모에 대한 ‘효'만 일방적으로 강조했을 뿐 그 ‘효'를 누리는 부모로서의 바람직한 자세와 책임 운운에 대해서는 거의 담론해본 적이 없다. 왜냐하면 그러한 화두를 던지는 행위 자체가 대단히 불손한 것이고 우리의 전통미덕에 크게 어긋나는 '발칙한'것 이기 때문에.   하지만 우리가 아무리 외면한다 해도 결코 부정할 수 없는 게 부모와 자식 사이에 존재하는 호혜적 관계성이다. 다시 말해서 부모와 자식 역시 인격체로서의 상호성을 띤 교환관계인 것이지 "원래부터 그런 것이기 때문에", "무조건 그래야만 하는" 고착된 관계가 아니라는 말이다. 따라서 진정 서로를 배려하고 리해하고 부단히 맞춰가는 노력이 밑받침될 때야만이 우리는 비로소 ‘효'를 살아 숨 쉬는 현실적 개념으로 만들어갈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모도 변해야 하고 ‘곱게' 늙어가야 한다.   "품안의 자식"이라는 말이 있다. ‘고집스럽고 주책없는 늙은이', ‘꼰대'로 괄시받지 않으려면 성인이 된 자식을 내 품에서 떠나보내는 결단력이 필요하다. 특히 이미 성가한 자식과 그 배우자에 대해서는 설사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라도 필요 이상의 간섭과 조언은 잔소리일 뿐. 상대를 긍정적으로 만드는 게 아니라 그저 피곤하고 힘들게 한다. 이제 적당히 고집도 줄이고 자식에게 지는 척 묻어가는 여유로움도 필요할 때다. 그리고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지나간 세월이나 사람에 대한 끝없는 원망과 되풀이 역시 굉장한 부정적 에너지를 발산함으로써 부모자식 관계에 큰 영향을 미치는 요소의 하나이므로 될수록 지양하는 게 좋다.   자식의 배우자에 대한 배려와 진정 어린 애정표현 및 신뢰관계 역시 ‘효'의 실천에 중요한 변수로 작동한다. 자기 자식이 귀한 만큼 들어오는 사람도 소중하다. 처음부터 탐탁치 않았고 긴 시간 동안 긴장과 갈등관계에 있었던 며느리나 사위가 ‘효'의 실천에 적극적일 리가 만무하며 여차하면 자식의 결혼생활에까지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 일명 가족 위챗그룹에 남편과 시부모, 시누이만 가입시켜서 "지들끼리 쑥떡쑥떡 한다"며 무척이나 서운해하고 분노하던 어떤 친구가 생각난다. 부모자식관계에 갈등이 적고 기쁨과 보람을 느낄수록 ‘효'에 대한 자식의 적극성이 높아진다고 한다. 결혼한 자식과의 친밀성을 강화하는 비결의 하나가 그 배우자와의 끈끈한 애정전선에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자식의 배우자와 유쾌한 관계를 맺을 줄 아는 로년의 지혜가 필요하다.   백세시대, 예전에 비해 퍽이나 길어진 로년에 대비하는 확실한 로후대책 또한 절실하다. "우리가 너희를 어떻게 키웠는데", "남의 자식들은 부모한테 이렇게 저렇게 잘하는데", 부모로서의 권위와 욕심만 잔뜩 내세우고 고마움의 표현 한마디 린색한 로인들도 종종 보이는 현실이다. 한창 치열한 삶의 현장을 살아나가느라 고달픈 우리 자식들이다. 이런저런 리유로 경제적인 여견을 마련하지 못했거나 자식의 돌봄을 필요로 하는 부득이한 상황이 닥쳤을 때 고마움과 미안함이라는 정서적 자원으로 부모자식 관계의 호혜성을 보완하고 자식의 진정성 있는 효심을 불러일으키는 게 맞지 않을가.   그런가 하면 로년의 초중반 건강할 때까지 경제적인 후원 혹은 손자녀돌봄 등을 통하여 자식의 든든한 울타리가 되는 경우가 많으며 부모자식 관계 또한 비교적 원만하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너네 신세는 안 진다", "우리 걱정은 하지도 말라"고 제법 호기로운 선언을 툭툭 내던지기도 한다. 자식 역시 "우리 부모라면 얼마든지 효도할 수 있어"라고 장담. 하지만 정작 부모가 더 로쇠해지고 자식의 도움을 필요로 할 때가 오면 그 때에서야 비로소 부모자식 모두의 ‘효'에 대한 실질적인 고민과 갈등이 시작된다. 그리고 우리가 막연히 리상화하고 환상해왔던 ‘효', 그 실천이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님을 실감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태여나고 성장하고 늙어가고 죽는다. 그리고 늙어서 추하게 되는 게 아니고 추한 사람이 추하게 늙어간다. ‘곱게' 늙어가는 예행연습이 필요하다.   "로인이 되기보다 어르신이 되라"는 말이 있다. "웃물이 맑아야 아래물이 맑다"는 말도 있다.   우리네 ‘효', 그리고 늙음에 대해서 고민이 깊어지는 시점이다.   래원: 인민넷-조문판
기업 구조조정과 혁신형 경제에서의 시장메커니즘의 활용: 일본 관민펀드를 중심으로 남경대학교 정부관리학원 박룡 패전이후 일본은40여년의 고성장으로 세계경제강국이 되였다. 그러나 정부주도 산업정책이 한계에 봉착하면서 1990년 주식시장과 부동산시장의 련이은 버블붕괴로, 일본경제가 장기 침체에 들어서기 시작하였다. 버블경제가 붕괴되면서 부실기업에 대한 대규모 구조조정이 진행되였는데 당시는 구조조정 시장 및 관련 법제도 등이 미비한 상태이다보니 정부중심으로 기업의 과잉채무와 은행의 부실분제를 해결하게 되였다. 시행초기 일본의 구조조정은 더딘 상황판단과 미진한 대응으로 문제를 되려 악화시켰다는 비판을 받았으며, 부실기업 처리과정에서 공적자금 투입에 대한 비판이 높아지게 되였다. 특히 1997년에 야마이치증권, 다쿠쇼쿠은행, 일본채권신용은행 등이 련이어 도산되면서 산업 구조조정과 금융재생에 관한 새로운 해결책이 시급해졌다. 일본정부는 2002년에 ‘금융재생프로그람’을 발표하여 부실채권처리를 가속화하였으며, 2003년 4월에 처음으로 정부계 관민펀드인 산업재생기구를 설립하였다. 해당 기구는 산업혁신기구의 전신으로 예금보험기구를 주요 주주로 하는 한시적인 주식회사이다. 일본 산업재생기구는 시장메커니즘을 활용한 관민펀드로 기존 정부주도 구조조정과는 다른 아래와 같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 임원진의 객관성과 전문성을 강화하고, 자금을 각출한 은행과의 리해상충문제를 회피한다. 이를 위해 리사회 구성원들은 주요 주주인 은행에서의 파견을 받지 않고 투자은행, 법률사무소, 회계사무소, 민간 연구소 등에서 공개 채용한다. 둘째, 부실기업에 대한 공적 정리나 파산을 목적으로 하는 구조조정보다 기업재생에 초점을 둔다. 산업재생기구는 민간의 전문성과 경험을 활용하여 부실기업에 사업재생을 위한 자문을 제공하고 필요한 자금조달을 승인한다. 셋째, 정부는 산업재성기구의 공공성과 지속성을 위하여 담보 및 감독 역할을 한다. 특히 임원의 선임과 승인, 예산 및 자금조달의 인가를 담당하고 있으며, 산업재생기구의 차입에 대한 10조엔 한도의 보증인증에 한정하여 업부를 수행한다. 산업재생기구 설립 이후 2005년 3월말까지 실시한 지원대상기업수는 총 41개이며, 지원대상기업의 차입금총액은 4조엔을 초과하였다. 산업재생기구 설립 당시 2003년 전국은행의 부실채권규모는 35조 3,000억엔으로 부실채권 전체의 약 10% 정도가 산업재생기구의 지원대상이 되었다. 이는 기업 구조조정과 산업재생에 있어 시장의 메커님증을 활용한 선례가 되였으며 최근 일본의 다양한 관민펀드의 출현과 성장에 좋은 정책적 시범이 되였다. 정부계 관민펀드의 엄격한 정의는 없지만 시장실패가 존재하는 령역의 사업에 출자나 융자하기 위하여 법률에 근거하여 정부와 민간기업이 공동출자하여 설립한 주식회사라고 할 수 있다. 산업재생기구는 기업구조조정과 기업재생에 초점을 두었다고 하면, 신형 관민펀드는 산업 경쟁력과 기술혁신에 있어 중소기업과 중견기업의 역할을 중요시하고 민간의 자본과 노하우를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시스템이다. 현재까지 일본정부는 산업혁신기구, 중소기업기반 정비기구, 지역경제 활성화기구 등 14개의 정부계 관민펀드를 설립하여 벤처기업에 대한 투자를 확대하고 있으며, 4차산업 이후 급변하는 산업구조와 대외적인 불확실성에 대비하고 있다. 특히 2009년 7월, 경제산업성 주관으로 혁신기업에 대한 지원을 목적으로 설립된 산업혁신기구는 현재까지 114개의 기업을 지원하였으며, 5,249억엔의 민간자본 투자를 유발하였다. 산업혁신기구는 주로 전자설비, IT서비스와 지적재산, 건강의료, 신생에너지 등에 대한 투자를 확대하고 있다. 산업혁신기구의 사업운영은 전적으로 시장메커니즘을 활용하여 민간에 의해 이루어지며, 10억엔 이하의 지원안건에 대해서는 정부의 심사와 허락 없이 자체적으로 진행할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한편 정부는 KPI(key performance indicators)을 제정하여 관민펀드기구에 대한 정기검증을 실행하고 있다. 시장메커니즘을 활용한 기업재생정책은 과거 정부중심의 기업 구조조정에 새로운 해결책을 제시해주고 있다. 지난 동아시아의 정부주도 모방형 경제는 이미 그 한계를 보이고 있다. 경제의 지속적인 성장을 도모함에 있어서 공정한 시장경제 질서와 혁신 가능한 환경이 마련되여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일본형 정부계 관민펀드는 벤처형 중소기업에 대한 지원을 확대하여 혁신형 경제로의 이행과 불확실성에 대한 유효한 대안으로 작동하고 있다.   인민넷 조문판
160    인공지능과 미래 3대 리스크 댓글:  조회:770  추천:0  2022-02-23
인공지능과 미래 3대 리스크 임호 2010년 이후 컴퓨터기술, 인터넷기술 그리고 알고리즘 관련 연구의 신속한 발전과 더불어 인공지능사회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감도 날로 향상되고 있다. 알고리즘이 인공지능의 ‘심장’이라면 빅데터는 인공지능의 지식’식량’이며, 원활한 인터넷은 인공지능의 ‘혈관’이고, 충분한 전력공급은 인공지능의 ‘혈액’이다. 그러나 아름다운 미래생활에 대한 기대감과 더불어 인공지능을 탑재한 자률운행자동차의 끊임없는 교통사고 소식 그리고 마이크로소프트회사의 인공지능인 테이의 히틀러를 지지하는 발언 등등은 또한 인공지능에 대한 불안감을 키워가고 있다. 그러므로 인공지능의 리스크 및 그 방지에 대한 연구는 세계 각국 그리고 학계의 주요 연구대상이 되고 있다. 2017년 7월 8일, 국무원에서 반포한 에서는 인공지능의 발전이 불확정적인 새로운 도전을 수반하므로 그 안전리스크에 대하여 반드시 중시해야 한다고 강조했으며, 그 리스크를 최대한 줄임으로써 인공지능의 안전하고 확정적이고 통제 가능한 발전을 추진하여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면 인공지능의 미래 리스크에는 어떤 것이 있을가? 자률운행중의 교통사고 그리고 인종차별에 대한 언론과 같은 리스크도 있겠지만 목표설정, 데터취득 그리고 운행체제 등 핵심적인 분야에 있어서 인공지능의 미래 3대 리스크에 대한 우려가 근본적이라고 보여진다. 첫째, 인공지능의 목표와 인류 목표의 합치성 여부 인공지능은 인류의 마지막 발명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에 따르면 인공지능기술의 발전은 인공지능기술을 통한 공공서비스의 수준 그리고 인민의 생활품질 전격적 향상을 목표로 하고 있다. 즉 인공지능을 연구개발하는 인류의 목표는 컴퓨터 및 알고리즘 기술을 리용하여 인류지능에 준하는 수준을 실현함으로써 육체적 로동에서 인류를 해방하고 인류의 생활복지를 향상하고저 함이다. 그러나 인공지능의 자체적인 목표는 어떠할가? 지능진화의 차원에서 볼 경우 인류의 지능은 학습과 실천 과정에서 끊임없이 지식을 축적하고 갱신하고 진보하는 과정으로서 지식이 지식을 생산하는 점진적 발전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비하여 인공지능은 1과 0이라는 코드로부터 시작하여 현단계의 ‘지능’수준에 이르기까지 ‘입력’이라는 프로세스를 통하여 단시일내에 완성할 수 있다. 만약 인공지능의 연구개발수준이 인류지능과 동일한 학습, 식별, 추리 및 자아선택과 판단의 자주능력을 가진 인공지능수준에 이를 경우 인공지능 개발코드의 수정이 과연 가능할가? 자주능력을 가진 인공지능은 인류의 예측이 불가능한 방식으로 운영될 것이며 인류의 인공지능 개발코드 수정시도를 주동적으로 저지할 가능성이 커질 것이다. 그렇다면 인공지능은 인류의 복지를 위하여 만들어진 것일가, 아니면 우리의 하느님이 될 것일가?( Artificial Intelligence: From good for us to God for us?) 둘째, 빅데터의 선택적 취득과 보편적 취득 인공지능기술의 발전에 있어서 빅데터는 인공지능의 지식’식량’이며 인터넷 전송기술은 인공지능의 ‘혈관’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빅데터는 인공지능의 ‘심장’인 알고리즘의 형성, 훈련 그리고 결과도출에 기본적인 요소인 지식’식량’을 제공하는 원천이다. 그러나 빅데터의 취득과 해독은 알고리즘설계자의 개인적인 지식체계, 흥취 그리고 도덕수양 등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는바 마이크로소프트회사의 인공지능 테이의 “히틀러는 잘못 없다”라는 부당언론도 알고리즘설계자의 지식경계와 밀접한 련관이 있다. 또한 인터넷의 리용보편화도 빅데터의 취득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바 어떠한 데터의 취합과정중 단전으로 인하여 데터취합 지역중 한 지역이 빠지게 되면 그 데터의 보편성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다. 그와 반대로 만약 인공지능사회가 실현되여 인공지능 상호간에 빅데터 그리고 알고리즘을 공유하게 될 경우 어떠한 리스크가 있을가? 인공지능의 판단기준인 빅데터와 알고리즘을 상호 공유할 경우 인공지능이 도출하여낸 결과는 거의 일치하게 되며, 인공지능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인류는 ‘사상’의 대일통시대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 결과 인류사회는 국경 없는 글로벌 사회를 실현하거나 아니면 인공지능을 가진 자가 천하를 다스리는 소수자통치의 사회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즉 빅데터의 선택적 취득인지 아니면 보편적 취득인지 여부에 따라 미래 인류사회의 궁극적인 형태가 바뀔 수도 있다. 셋째, 심판원과 운동선수의 이중성격 인공지능은 이미 우리의 생활과 융합되여있으며 일상생활중의 사고, 판단 그리고 결정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다. 례를 들면 알고리즘을 통한 소비자취향파악은 기본일 뿐만 아니라 자동차운전 핸들을 잡으면 아는 길도 요즘은 네비게이션을 사용하게 된다. 우리말에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라고 했지만 요즘에는 두자리수자 가감도 핸드폰에 의존할 정도로 자신의 지능보다 인공지능을 더욱 믿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물론 복잡한 수학계산이나 과학적 검증 과정에서 인공지능의 정확성 또는 효률성은 이미 검증된 바 있다. BAIDU의 검색엔진이나 위챗플랫폼을 통하여 소비자의 취향에 맞는 상품 또는 서비스 정보를 제공하는 것은 상업적 리익에 따른 알고리즘설계자의 공헌이 크다. 그러나 검색엔진이나 위챗플랫폼이나 할 것 없이 모두 사용자가 필요한 조건을 기입하고 설정된 알고리즘에 따라 결과를 도출하는 형식으로 인공지능에 대한 우리 삶의 의존성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인공지능사회에서 인공지능 자체가 학습, 사고 그리고 판단의 자주능력을 통하여 알고리즘을 개진하고 승화할 경우 인공지능은 그 자체가 알고리즘이라는 ‘규칙’의 제정자일 뿐만 아니라 그 ‘규칙’을 검증하는 자, 즉 ‘심판원’과 ‘운동선수’의 이중적 신분을 갖게 된다. 그럴 경우, 인공지능이 설정한 ‘규칙’에 따라 조건을 기입하고, 그 ‘규칙’에 따라 취득한 결과에 대하여 도대체 어느정도 신뢰를 하여야 할 것인가? 인공지능 알고리즘 규칙 및 검증절차의 불가분성은 인공지능 운행체제의 관건적인 리스크이다. 인공지능이 갖고 있는 상술한 3대 리스크는 인류사회의 평화로운 발전의 거대한 걸림돌이 될 것이므로 기술적 차원 그리고 법적 차원에서 사전대책이 시급하다. 특히 법적 차원에서 인공지능의 본질에 대한 정확한 파악을 통하여 사회의 흐름에 부합하는 미래사회 법제도를 사전에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 (임호, 화동리공대학교 법학원 부교수, 법학박사, 변호사 및 중재인) 인민넷 조문판 
신종코로나페염 전염병상황 장기화와 청년실업문제에 대한 소고 한국 건국대학교 김욱 2022년 새해를 맞이하면서도 전세계는 오미크론변이바이러스의 확산에 따른 신종코로나페염 전염병상황으로 인하여 계속 고통을 겪고 있다. 지난 2년 동안 세계인들은 지긋지긋한 전염병상황의 장기화가 이토록 지속될 것이라고는 아마 그 누구도 잘 예견하기 어려웠을 것 같다. 또한 앞으로도 이러한 고통이 계속 끝날 기미가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것도 우리들을 가끔씩 걱정에 빠지게 만들고 있다. 하지만 희망과 미래를 절대 포기하지 말고 ‘적과의 동침(与狼共舞)’ 속에서 새로운 생존활로를 찾는 것도 인류사회의 또 하나의 숙명으로 대두된 것 같기도 하다. 전염병상황 장기화시대에 교육문제는 그중에서 가장 심각한 타격을 많이 받아온 분야의 하나이다. 한국의 경우 신종코로나페염 전염병상황초기에 유치원에서부터 중/고등학교, 대학교에 이르기까지 오프라인교육이 잘 이뤄지지 않아 뒤죽박죽이 되다보니 그 피해는 고스란히 학생들과 부모님들이 떠안게 되였다. 물론 이로 인하여 이후에는 온라인교육시장도 급속하게 발전을 거듭하게 되였지만 어린 학생들이 공부의 효과성과 학력이 저해된 점은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현실로 립증되고 있다. 한국의 대학교상황도 마찬가지이다. 저자가 몸 담고 있는 대학교는 지난 2년 동안 교육이 거의 대부분 온라인으로 이루어졌다. 비록 대학생과 대학원생이기에 중고등학생들보다는 자기주도 학습능력이 있어서 유리할 지도 모르지만, 학생들의 공부집중도가 떨어져도 책망을 하기 어려웠던 점이 있어서 그저 속수무책으로 많이 안타까웠던 적이 있다. 그리고 가장 우려되는 점은 캠퍼스의 신입생환영회의 개최는 고사하고 이러다가 어처구니없이 4년 동안 대학교 캠퍼스도 제대로 밟아보지 못하고 졸업을 하게 되는 학생들이 속출하지 하지 않을가 가장 걱정되였다. 이러한 리스크를 간과하여 백신 3차접종 보급률과 더불어 2022년에 우리 대학교에서는 가급적 단계적으로 오프라인교육을 확대해나갈 계획이고 학생들의 수요에 맞춘 교육의 질향상에 전력을 가하고 있어서 많은 교직원들도 중압감과 사명감이 또한 막강하게 느껴지기도 했었다. 대학교교육과 더불어 현재 가장 많이 거론되고 있는 이슈는 청년취업활성화이다. 여기서 특히 글로벌적으로 ‘락다운세대’ (Lockdown)’라는 용어가 등장한 것이 주목된다. 즉 세계적으로 청년들이 신종코로나페염으로 인한 공공방역조치로 인해 국가와 지역끼리 고립되고 멀어지는 현상이 발생하여 교육이 중단되고 고용시장이 얼어붙으면서 사실상 사회에 설 기회가 봉쇄된 세대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많은 청년들은 취업을 위해 피나는 노력을 기울였으나 사회에서 설 자리를 찾지 못함으로써 여러가지로 애로를 겪고 있다. 이는 개인책임으로만 보는 데 분명히 한계가 있고 정부와 학교 및 전체 사회적인 협조가 절실해보인다. 현재 전염병상황, 고령화, 청년실업 3중고를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 하는 점은 중한 량국을 포함한 대부분 나라들이 직면한 난제이기도 하다. 량질의 일자리를 찾고자 청년들은 부득이 치열한 경쟁을 거처야만 승부를 걸 수 있는 상황이다. 최근 통계에서 보면, 2021년 한국의 청년실업률은 5.7%로서 약 24만명의 청년들이 실업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의 경우, 례컨대, 최근 2022년 공인회계사 1차 시험에 1만 5000명이 넘게 지원하면서 20년 만에 가장 많은 지원자가 몰렸고 7:1이라는 높은 경쟁률을 기록하였다. 공인회계사의 몸값이 높아진 것은 신종코로나페염 전염병상황의 장기화로 청년취업이 어려워진 영향으로 풀이된다. 중국 국가통계국의 공식통계에 따르면 2021년 6월말에 중국 도시청년실업률은 15.4%라는 높은 수자를 기록한 것으로 발표되였다. 그리고 료해에 따르면 중국의 경우 2021년 국가공무원시험에 전국적으로 150만명이나 되는 응시생이 몰렸고 경쟁률은 61: 1인 것으로 나타났다. 가장 뜨거운 일부 공무원직종의 경우, 무려 3000:1이상이라는 경이로운 경쟁률을 기록한 것으로 나타났다. 여기서도 우리는 중한량국 모두가 량질의 청년일자리 량극화 문제에서 심각한 격차현상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향후에 중한 량국 모두 다양한 청년일자리를 많이 만들어 청년들의 여러가지 취업선택, 및 진로향상에 도움을 주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본다. 이에 다음과 같은 일부 소견을 제시하고 싶다. 첫째, 공공부문의 일자리확충이다. 이는 정부가 직접 관여할 수 있는 사항이기에 효과성이 빨리 나타날 수 있다. 둘째, 기업체들의 신규채용, 실습, 유망직종 직업훈련 등에 대한 확충이다. 여기에 대, 중, 소 기업이 모두 포함되는데 정부의 세제혜택 등 다양한 격려정책의 유인정책과 잘 결부되여야 한다고 본다. 셋째. 현장중심의 인력양성과 인력수급의 미스매치해소를 위해 정부와 기업체들은 교육․ 훈련 분야의 개혁노력 및 산학협력 강화해야 한다고 본다. 넷째. 보다 희망적이고 긍정적인 마인드와 메세지를 청년들에게 심어주어 신종코로나페염 전염병상황 장기화로 인한 청년들의 피로감에 따른 정신건강도 잘 살펴주고 배려해주고 격려해줄 필요성이 제기된다. 따라서 산업현장에서 더욱 많은 청년들이 다양한 분야에서 일할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한다고 본다. (2022년 1월 25일 서울에서)   인민넷 조문판 
158    중한경제협력의 현주소 댓글:  조회:758  추천:0  2022-01-27
중한경제협력의 현주소   리민(중국국제문제연구원 아시아태평양연구소) 중국과 한국이 랭전의 력사를 딛고 수교한지도 어느덧 30년이 되여가고 있다. 량국관계는 정치, 경제, 문화 등 거의 모든 방면에서 거족적인 발전을 이룩하였는데, 그중에서도 경제협력이 유난히 돋보인다. 중국 외교부에서 제공한 수치에 따르면, 중한 량국의 무역액은 신종코로나페염의 영향이 컸던 2020년에도 2856.6억딸라에 달하였다. 한국무역투자진흥공사(KOTRA)의 수치는 2450억딸라로 약간 낮기는 하지만 그래도 1992년의 63억딸라와 비교할 때 무려 38배 증가하였다. 그리고 최근 한국 련합뉴스에서 제공한 수치에 따르면 2021년 한국의 대중국 수출은 무려 22.9% 증가하여 사상 최고치를 기록하였다. 현재 중국은 한국의 최대무역대상국이고 최대수출시장과 최대수입원천국이다. 한국 또한 중국에게는 세번째에 꼽히는 무역대상국이다. 투자분야에서도 중한 량국은 긴밀한 련계를 맺고 있다. 2020년말까지 한국의 중국에 대한 실제투자액수는 루계로 861.9억딸라에 달하고 중국의 한국에 대한 투자는 본격화된지 얼마 안되지만 역시 98.5억딸라에 달한다. 현재 한국은 중국의 제2의 외래투자원천국이고 중국은 한국의 제2의 투자대상국이다. 중한자유무역협정과 이 효력을 발생함과 더불어 중한경제협력도 한층 더 추진력을 얻을 전망이다. 중한자유무역협정은 2012년 5월부터 담판을 시작하여 2015년 12월에 공식적으로 효력을 발생하였다. 현재 쌍방은 제2단계 자유무역협정 담판을 진행하고 있으며 더 높은 수준의 상호개방을 위하여 힘쓰고 있다. RCEP는 이미 중국에서 비준절차를 완성하였고 한국도 2022년 2월 1일부터 합류하게 된다. 무역활성화부터 투자촉진까지 중한협력뿐만 아니라 전반 아시아태평양지역의 경제발전에 밝은 전망이 비춰지는 부분이다. 하지만 중한경제협력이 더한층 성장하기 위한 도전도 만만치 않다. 첫째로, 예전에 중한경제협력의 중요한 ‘동력’으로 작용하였던 ‘가격요소’가 점차 역할을 잃어가고 있다. 값싼 원가, 특히 저렴한 인건비는 한국기업이 중국에 투자하고 무역을 발전시키는 중요한 원인중의 하나이다. 가격요소는 아직도 상당한 중요성을 가지고 있는데, 한국대외경제정책연구원에서 2020년 부품과 장비분야에 대해 진행한 조사에 따르면 77.2%의 한국기업이 중국제품을 선택한 리유로 ‘가격경쟁력’을 꼽았다. 이는 일본 제품을 선택한 리유로 86.5%가 ‘기술력부족, 국내 미생산과 좋은 품질’을 꼽은것과 대조적이다. 하지만 중국의 경제성장과 생활수준향상과 더불어 생산원가 또한 지속적으로 올라가고 있다. 따라서 가격의존도가 높고 기술력이 탄탄하지 못한 일부 한국 기업, 특히 중소기업은 결국 중국에서 살아남기 힘들게 되였다. 근년에 한국기업의 중국사업철수와 동남아시아로의 전이 현상이 많아진 것도 가격우세의 약화와 무관하지 않다. 둘째로, 중국의 산업구조가 개선되고 기술경쟁력이 향상됨에 따라 중한사이의 경제관계가 과거의 수직적 분업 위주로부터 수평적 경쟁 위주로 바뀌고 있다. 그 결과로 많은 분야에서 중국기업과 한국기업이 협력을 하는 동시에 치렬하게 경쟁도 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이러한 추세와 우에서 이미 지적했던 ‘가격요소’의 변화가 겹치면서 한국기업은 갈수록 중국시장에서 돈을 벌기 힘들어지고 있다. 2016년부터 2019년 사이 한국기업 중국법인의 매출과 리윤은 모두 줄어들었는데 특히 리윤률이 4.6%에서 2.1%로 가파르게 하락하여 한국기업계의 우려를 자아내고 있다. 셋째로, 미국이 중국을 상대로 압박정책을 펴면서 한국의 립지가 곤난해지고 있다. 첨단산업분야에서 미국은 중국의 성장잠재력을 억제하기 위해 경제효률성을 희생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고 있는데 글로벌 가치사슬 재편이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조치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소위 ‘신뢰’할 수 있는 국가들로 새로운 공급망을 만들어 기술적으로 중국을 고립시키는 전략인데 미국은 특히 한국의 역할을 중요시하고 있다. 실제로 미국은 중국이 한국으로부터 첨단기술과 장비를 획득하는 것을 막기 위해 공공연한 간섭도 서슴치 않고 있고 특히 반도체분야에서 더욱 그러하다. 또한 소위 ‘미중경쟁’이 한국 언론들에 의해 부각되면서 경제면에서 중국에 대한 의존도를 줄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끊임없이 나오고 있다. 즉 ‘미중경쟁’이라는 배경하에서 한국의 중국에 대한 수입의존도가 50% 이상인 품목이 2천개, 90% 이상인 품목이 5백개에 달하는 현상태가 국가안전차원에서 한국에 위협이 된다는 론리이다. 이러한 도전들은 미래 중한경제협력이 한층 더 발전하는 데 걸림돌로 작용할 수 있다. 과거에 큰 성공을 거두었던 기존 협력모식에 얽매이기보다는 적극적으로 새로운 분야, 새로운 형식을 탐색해야 되는 시점이 온 것이다. 특히 과거 중국의 ‘가격경쟁력’을 토대로 한 협력보다 기술과 시장을 더욱 많이 활용하여 중한경제협력에 새로운 동력을 불어넣는 것이 필요하다고 볼 수 있다. 인민넷 조문판 
157    조선족음식문화의 발전과 변화 댓글:  조회:762  추천:1  2022-01-06
조선족음식문화의 발전과 변화 최선향(장강사범학원) 오늘이 동지(冬至)라고 고등학교 동창들이 위챗그룹에서 오늘 만두를 먹었느니, 동지팥죽을 해 먹었느니 하면서 사진도 올리고 명절을 즐기는 분위기다. 광주에 사는 동창은 교자를 먹었다고 하고, 북경에 사는 친구는 아침 일찍 팥죽을 끓이며 펄펄 끓고 있는 팥죽을 동영상으로 찍어 올렸다. 사는 곳은 달라도 모두 동지날에 맛있는 음식을 먹어 기분이 좋다. 그중에는 조선족음식도 있고 한족음식도 있다. 이제 우리는 조선족음식과 한족음식 등에 구애 없이 모두 다 ‘우리’의 음식으로 맛있게 먹는 데 습관되여있다. 내가 중경에 와 살면서 느끼는 게 바로 너무나 다른 지리환경과 기후환경으로 이곳의 음식습관이 북방과 많이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나 또 어떻게 보면 조선족의 음식습관과 비슷한 점도 있다. 례를 들면 가지를 쪄서 양념에 무쳐 먹는 것이 그렇다. 물론 산초기름(花椒油)을 두어 그 맛이 많이 다르지만 랭채로 버무려 먹는다는 게 비슷하다. 그리고 도마도를 썰어 설탕을 뿌려 먹는 것도, 찰떡[여기서는 츠바(糍粑)라고 부름]을 쳐서 먹는 것도 또 찰떡을 기름에 튀겨 홍탕이나 콩가루에 찍어먹는 것도 비슷하다. 설에도 여러가지 맛있는 료리를 많이 만들어먹지만 북방에서처럼 만두(饺子)를 빛어 먹지는 않는다고 한다. 이렇게 보면 한 민족 내부에도 지역적 차이가 뚜렷하고 다른 민족들 사이에도 어딘가 비슷한 음식문화가 있는 것 같다. 한 민족의 음식문화는 그 민족이 처한 자연지리적 조건과 지역적 특성, 사회경제적 여건 등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다. 이렇게 형성된 음식문화는 사회경제의 발전과 더불어 발전, 변화한다. 특히 타민족과의 교류, 과학기술의 발전, 대내외 경제문화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많은 변화를 겪게 된다. 음식은 끼니마다 일상적으로 먹는 일상음식과 의례 때나 명절날 그리고 계절에 따라 특별히 만들어먹는 특별음식, 지역 특산물에 기초해 발전해온 지역음식 등 여러가지로 나눌 수 있다. 조선족은 대부분이 조선반도의 함경도, 평안도, 경상도로부터 중국의 동북지역으로 이주해온 이들의 후손이다. 중국에 정착해 산 지 한세기가 훌쩍 넘었다. 초기 함경도사람들은 두만강연안의 연변과 흑룡강성 동부지역에, 평안도사람들은 압록강연안의 료녕성 동부와 길림성의 집안현, 통화현 등 지역에, 경상도사람들은 길림성의 장춘, 길림 지역과 흑룡강성 할빈시 등으로 많이 이주했다. 이에 따라 조선족의 음식습관은 크게 세가지로 나눌 수 있다. 연변지역과 목단강 등 흑룡강성 동부지역에는 함경도음식습관, 단동과 심양을 비롯한 료녕성 동부지역과 길림성의 집안, 통화 등 지역에는 평안도음식습관, 길림성의 장춘과 길림지역, 흑룡강성 할빈시 등 지역에는 주로 경상도음식습관이 많이 남아있다. 조선반도의 팔도음식중에 함경도음식은 밭작물을 재료로 만든 음식, 특히 감자료리가 발달하였으며 해산물, 산나물로 만든 음식이 많았다. 평안도음식은 국수, 랭면, 녹두지짐, 숭어국, 잉어찜, 참나물국, 백김치, 동치미 등이 유명하엿다. 평안도음식은 너무 짜지도 싱겁지도 않고 맵지도 않은 게 특징이였다. 경상도는 동해와 남해를 끼고 있으므로 해산물이 많아 해산물로 만든 음식이 많았다. 경상도음식은 대개 간이 세고 고추가루를 많이 쓰므로 맵고 짠 게 특징이였다. 경상도음식중에 추어탕이 독특한데 길림지역 조선족들은 지금까지도 추어탕을 즐겨 먹는다. 연변의 조선족음식은 함경도음식의 전통을 많이 보유하고 있다. 함경도는 동해안의 해안지대와 대부분 산세가 험한 산간지대로 이루어져 산간지대와 바다가의 자연지리적 환경에 맞게 조, 콩, 감자 등 밭작물; 고비, 취나물 등 산나물과 명태 등 해산물로 만든 음식이 많았다. 특히 감자음식이 발전하여 감자밥, 감자국수, 감자찰떡, 언감자떡 등을 만들었는데 감자음식은 함경도에서 일상음식이였을 뿐만 아니라 잔치나 제사에도 많이 쓰였다고 한다. 함경도사람들은 식재료로 될 수 있는 것이라면 모두 가공하여 음식을 만드는 알뜰한 생활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명태를 머리, 내장 할 것 없이 하나도 버리지 않고 가공하여 명태순대, 창란젓, 명란젓 등 맛있는 음식을 만들었으며, 얼거나 썩은 감자도 버리지 않고 언감자떡, 감자엿을 만들었다. 함경도음식으로는 명태국, 명태식혜, 갓김치, 영채김치, 세치네탕 등이 유명했다고 한다. 연변의 조선족음식을 보면 함경도음식의 특징이 많이 보인다. 길림성의 잡거지역에서 태여나 자란 필자는 1990년대 초반에 처음으로 연길에 간 적이 있다. 그 때 서시장에서 창란젓, 명란젓과 명태, 까나리, 조갯살 등 말린 해산물들을 사서 집에 가져갔던 기억이 난다. 그게 연변에서만 살 수 있는 조선족음식이였기 때문이다. 지금은 물류가 발전해 여기 중경에서도 인터넷으로 조선족음식을 쉽게 살 수 있게 되였지만 그 때는 연변에 가야만 살 수 있는 특별한 음식이였다. 해방후에 연변은 바다와 그리 멀지 않지만 국경이 가로막혀 해산물을 쉽게 구할 수 없었다. 정부에서는 조선족이 해산물을 즐겨 먹는다고 1954년부터 연변과 함경북도 사이에 명태무역을 추진시켜 1970년대 초반을 제외하고 명태무역은 거의 단절되지 않고 이어져왔다. 그래서 명란젓과 창란젓, 명태순대와 짝태볶음 등은 대표적인 연변 조선족음식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다. 조선족은 중국의 동북지역으로 이주해와 살면서 새로운 자연지리적 환경에 적응해야 했을 뿐만 아니라 다민족국가라는 새로운 사회환경에 적응해야 했다. 그러는 과정에 동북에서 함께 삶을 영위해온 한족과 만족 등 기타 민족들과 교류하며 그들의 음식문화를 받아들여 조선반도의 음식문화와 구별되는 조선족 특유의 음식문화를 발전시켜 가게 되였다. 그래서 조선족음식문화는 다중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즉 조선반도에서 형성된 전통음식을 발전, 변화시켜옴과 동시에 한족, 만족 등 타민족의 음식문화를 수용하면서 새로운 문화전통을 만들어오고 있다. 뿐만 아니라 개혁개방 이후 많은 조선족들이 한국, 일본, 로씨야 등 나라들을 오가며 그들의 음식문화를 수용하고 있다. 요즘은 인터넷을 통해 어지간한 료리는 동영상을 보고 스스로 만들어먹을 수 있다. 지난해 코로나로 고생하며 집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야 했던 그 때, 전국 각지에 살고 있는 고중동창들이 조선족음식 뿐만 아니라 동영상을 보고 만두(包子), 밀가루튀김(油条), 마라탕 등 한족음식을 만들어보기도 하고 스파게티, 피자 등 서양음식을 만들어보기도 했다. 그리고 위챗그룹을 통해 서로 공유하며 함께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보는 재미가 있었다. 조선족음식에는 고사리, 도라지, 더덕, 미나리, 달래, 민들레 등 산나물이 많고 명태, 고등어, 칼치 등 해산물이 적지 않다. 조선족음식은 주로 간장, 된장, 고추장, 소금 등 조미료를 쓴다. 료리할 때 파, 고추, 마늘, 생강을 많이 쓰며 특히 연변음식은 내기를 넣는 게 특징이다. 조선족은 한족의 음식문화를 받아들여 고수(香菜)를 고명으로 잘 쓰며, 쌈을 싸 먹을 때도 마늘, 파와 함께 고수를 넣어 먹기도 한다. 국수나 냉면에도 고수를 넣어 먹는다. 그리고 일부 지역에서는 김치를 담글 때도 양념에 고수씨가루를 넣어 맛을 돋구기도 한다. 이는 조선반도와 달리 변용된 조선족 음식이다. 이젠 조선족가정에서도 한족식 볶음료리(炒菜)를 많이 해먹는다. 례를 들면 달걀도마도볶음, 돼지고기마늘종볶음, 건두부고추볶음 등은 일상적으로 우리의 식단에 오르는 음식이 되였다. 한국학자 주영하는 20 세기 한국음식은 식민주의, 전통주의, 민족주의, 국가주의, 세계체제, 세계화 담론이 혼종된 결과라고 본다. 지구화의 흐름에 맞춰 중국조선족음식 역시 자신만의 것을 고집하지 않고 타민족과 타국의 음식에 배타적이지 않다. 중경에서 가끔식 가까운 한족 동료교수들과 돌아가며 집에서 음식을 만들어먹곤 하는데 우리 집에 오면 김치볶음, 더덕구이, 오징어볶음, 김밥 등 조선족음식을 대접하곤 한다. 그들은 조선족음식에 대해 궁금한 게 많다. 한 동료는 동북에서 대학을 다녀 동북에 각별한 정이 있다. 한가할 때면 틱톡(抖音)으로 연변 조선족음식에 관한 동영상을 많이 봐 조선족음식에 대해 아는 게 많다. 요즘은 조선족학자들과 기업가들을 비롯한 많은 분들이 조선족음식문화의 발전을 위해 여러가지 행사를 조직하기도 하고 앞으로의 발전방향을 모색하기도 한다. 좋은 일이다. 하지만 때로는 이러한 모임이 조선족사회내에서만 많이 알려지고 기타 지역이나 민족과의 련결고리가 미약한 것 같다. 어떻게 보면 조선족은 동북지역이나 조선족내에서만이 아니라 더욱 넓은 의미의 중국이라는 광활한 무대를 활용해볼 필요가 있다. 주류민족인 한족이나 기타 민족을 대상으로 조선족의 음식문화를 홍보하고 민족적 특색을 살리면서 그들의 입맛에도 맞는 음식을 개발해 가는 게 앞으로 더욱 큰 발전과 도약을 기대할 수 있는 길이 아닐가? 그러기 위해서는 한족 등 타민족의 음식문화를 더욱 적극적으로 연구하고 받아들여 우리의 음식문화를 발전시켜가야 할 뿐만 아니라 개방적이고 포용적인 민족문화를 만들어가야 할 것이다. 내 것, 네 것 하는 분별심을 버리고 인류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생태적 위기를 겪으며 건강식품에 관한 관심이 고조되여가고 있는 현시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러한 시대에 걸맞게 조선족음식 가운데서 음식맛이나 식품위생, 품질을 보장할 수 있는 브랜드를 만들어 홍보하고, 아울러 우리의 음식과 유기농 식품, 건강식품, 테블매너 등 문화적 품격을 홍보함으로써 그 영향력을 확대해나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인민넷 조문판 
156    전승과 발전: 중국조선족 비물질문화유산에 나래를! 댓글:  조회:884  추천:0  2021-12-16
전승과 발전: 중국조선족 비물질문화유산에 나래를! 전월매(천진사범대학교 지난 10월 26일, 국무원 학위위원회에서는 천진대학에서 신청한 전국 최초의 비물질문화유산학 융합학과(交叉學科) 석사학위과정의 개설을 허가한다고 발표하였다. 이는 2021년 3월 교육부에서 비물질문화유산보호를 대학교 학부학과목의 새로운 전공목록으로 지정한 후의 구체화 작업이며 또한 4월에 국무원 학위위원회판공실에서 내린 와 8월에 중공중앙 판공청과 국무원 판공청에서 내린 문건 정신과도 맞물린다. 에서는 특히 “대학교의 비물질문화유산학과 체계와 전공 건설을 강화하고 조건이 되는 대학교에서는 자주적으로 석사과정과 박사과정을 개설할 수 있다”라고 명확히 했다. 비물질문화유산학과의 공식적 설립은 우리 나라 비물질문화유산학(非物質文化遺産學)의 인재양성이 고차원적이고 전문적인 새로운 력사적 단계에 진입했음을 설명한다. 비물질문화유산(非物質文化遺産)은 중국에서 쓰는 용어로 간단하게 非遺라고도 한다. 한국, 일본, 대만에서는 인류무형유산(人類無形遺産)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정식이름은 ‘인류구전 및 무형 유산 걸작(Masterpieces of the Oral and Intangible Heritage of Humanity)’으로 이를 줄여서 인류무형문화유산이라 부른다. 비물질문화유산과 인류무형유산은 용어상 차이를 보이고 있지만 모두 형체가 없는 문화유산을 뜻하고 있다. 이 글에서는 이 둘을 혼용하여 쓰되 무형유산에 치중하여 이야기하려고 한다. 인류무형문화유산은2003년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보호협약에 의거하여 문화적 다양성과 창의성이 유지될 수 있도록 대표목록 또는 긴급목록에 각국의 무형유산을 등재하는 제도이다. 2005년까지는 유네스코 프로그람사업이였으나 그 이후로 세계유산과 마찬가지로 국가 정부간 협약으로 발전되였다. 인류무형유산에 대한 연구와 관심은 길어서 20년밖에 되지 않는다. 중국학계에서의 중시도 20세기말 정부에서의 중시가 시작되면서 점차 가열되기 시작하여 21세기초에 진입해서야 이 개념이 실천의 토론에 이르게 되었고 차츰 사회로 진출하여 백성들에게 알려지고 익숙해지게 되였다. 인류무형문화유산이 형체가 없는 유산이라면 세계문화유산은 인류의 보편적이고 뛰여난 가치를 지닌 부동산유산이고 기록유산은 고문서 등 귀중한 기록물을 보존하고 활용하기 위한 동산의 유산이다. 인류무형문화유산은 주로 그 다양성과 창의성에 근간을 두고 있다. 그 사례로 중국의 단오절(端午节), 고금예술(古琴艺术), 중국조선족농악무(中国朝鲜族农乐舞), 중국그림자극(中国皮影戏) 등; 한국의 단오제, 농악무, 아리랑, 김장문화 등; 조선의 아리랑과 김장문화를 들 수 있다. 단오가 5월의 세시풍속을 가리키는 용어이고 단오제가 한국과 중국에 모두 있지만 각자 형성된 문화는 다르다. 2005년에 유네스코에 등재한 한국의 강릉단오제는 신화, 가면극, 제의, 무속 등 강릉단오제의 독창성을 지니고 있으며 신과 함께 인간의 애환을 풀어내고자 하였다면 2009년에 유네스코에 등재한 중국의 단오절은 위령과 치병에 기원을 두고 있다. 강릉문화제는 강릉지방에서 대관령 산길의 안전통행 또는 풍작, 풍어와 같은 청안을 기원하여 거행하는 동제이고 창포를 삶은 창포물에 머리를 감고 단오떡을 먹는 등 풍습이 있다면 중국 단오절은 룡선겨루기를 하고 쭝즈를 먹는다. 이는 인류가 창조한 문화의 다양성과 독창성을 증명하고 있다. 조선반도의 한국과 조선이 유네스코 문화재에 등재한 ‘아리랑’도 그렇다. 한국의 아리랑(2012)은 경기도, 충청도, 강원도,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제주도 지역의 아리랑이라면 조선의 아리랑은 평양, 평안도, 황해도, 강원도, 함경도, 자강도 지역의 아리랑이다. 2009년 국가급 비물질문화유산으로 등재한 조선족의 아리랑타령도 한국, 조선과 다른 력사적, 음악적 정서가 다른 중국조선족아리랑이다. 이는 “아리랑은 꽃씨와 같은 것이다. 꽃씨가 옷깃에 묻어 연변땅에 뿌려지면 연변지형에 맞는 꽃이 피고 로씨야에 떨어지면 로씨야지형에 맞는 꽃이 피듯이 꽃씨는 같지만 꽃은 지형에 따라 다를 수 있다.”는 어느 학자의 말과 같이 근원은 조선반도이지만 조선족의 력사적, 음악적정서에 맞게 창조된 아리랑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2013년에 유네스코에 등재한 한국의 김장문화가 한국의 남부지역을 대표하는 음식이라면 조선의 김장문화는 북부지역을 대표하는 김장이다. 중국조선족의 경우, 성급무형문화유산인, 길림성 도문시에서 신청한 조선족김치담그기(2009), 흑룡강성 녕안시에서 신청한 조선족김치(2016)는 모두 나름대로의 독특성과 다양성을 말해주고 있다. 2009년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된 중국조선족의 농악무는 중국조선족 최초의 세계급 무형문화유산이자 중국의 유일무이한 무용종목의 세계급 무형문화유산이다. 중국조선족의 농악무(2009)는 분명히 뿌리를 조선반도에 두고 있지만 백여년이라는 중국의 력사인문자연환경 속에서 나름대로의 변화양상을 거쳐 조선족농악의 대명사로 각인되여 2014년 유네스코에 등재한 한국농악과 구별된다. 민속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이주초기 조선족의 농악무는 조선반도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고 지역적 특수성이 결여되여있었는데 새 중국이 창건되고 문화대혁명의 단절기를 거친 후에 완전히 바뀌였다는 것이다. 즉 중국의 현실정치를 충실하게 반영하고 타악기가 자취를 감추고 관현악반주가 등장하며 마을단위의 종합놀이에서 상모춤위주의 무대공연으로 바뀌는 등 더이상 놀이가 아닌 순수 예술로 탈변했다는 것이다. 농악무의 상모춤도 조선반도의 원형을 유지하면서 조선족만의 새로운 특징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대상모는 20세기 70년대에 나타났으며 형태와 색상도 검정색으로부터 중국인들이 좋아하는 붉은 색과 연분홍색으로 바뀌었고 기법도 조선족만의 천권기법과 삼채식 띠돌리기 등의 독특한 기법이 가미되였다는 것이다. 조선족농악무는 조선족문화가 지니고 있는 특징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바로 조선반도에서 이주하면서 지니고 온 조선민족의 특성과 오랜 세월 중국이란 환경에서 농경생활하면서 지닌 대륙의 문화와 기질이 융합되여 창조되고 발전한 나름대로의 생산문화적이고 공동체적이며 이중적인 독특하고 다양한 성격이다. 조선족문화는 우리의 선조들이 조선반도에서 중국으로 이주하여 생활하는 150여년이란 정착과정에서 창조해낸 지혜의 결정체이다. 그러나 농경생활이 중심이 되여 형성된 우리의 문화는 현재 도시화로 인한 인구류동으로 조선족집거지의 인구가 급격히 감소하고 시장경제로 인한 상업개발과 현대화한 생산생활방식으로 전통문화의 생태환경이 악화되고 있다. 특히 형체가 없이 가변적 성격을 띤 비물질문화유산은 잘 보호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소실될 우려를 자아내고 있다. 이러한 문제점들을 해결하고 조선족 비물질문화유산을 보호하고 전승하려면 일련의 계획적이고 체계적인 방안의 모색이 필요하다. 우선은 학술적으로 조선족 비물질문화유산을 하나의 학문으로 혹은 학과목으로 지정하고 이에 대한 전면적이고 체계적인 자료정리와 깊이 있는 연구작업이 선행되여야 하고 학회 설립, 학회지 만들기 등의 작업이 필요이다. 다음은 제도적으로 비물질문화유산의 발굴과 경비조달, 인재양성, 저작권보호법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 다음으로 시장경제의 상업적 요소와 현대화의 콘텐츠를 리용한 박물관 설립, 문화축제 활성화, 홈페이지 구축 등 일련의 홍보작업이 선양되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조선족문화의 근원은 조선반도에 뿌리를 두고 있기에 조선족 비물질문화유산의 전승과 발전을 위한 조선반도와의 협력과 련대가 필요하다는 것을 간과할 수 없다. 조선민족문화권 내지는 동아시아 문화권에서의 국제적인 협력을 도모해야 한다. 현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우리의 문화를 어떻게 이끌고 또 후손들에게 어떻게 넘겨줄 것인가를 항상 고민해야 한다. 문화가 없는 민족은 령혼이 없는 민족이다. 문화는 한 민족의 아이덴티티(특징)과 그 시대의 정체성을 대표하는 아이콘이다. 또한 문화는 어느 민족, 어느 국가를 떠나 세계적인 것이다. 중국조선족이 특유의 문화에 나래를 달아 더욱 도약하는 민족으로 거듭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2021년 12월 6일   인민넷 조문판   
155    거목의 탄생과 역할이 기대되는 시대 댓글:  조회:903  추천:0  2021-11-30
  거목의 탄생과 역할이 기대되는 시대 허명철 지난 9월말 로투구 소기촌에서 사과배 선조나무 100돐 기념행사가 열렸다. 사과배에 깃든 이야기는 많은 분들도 익히 알고 있겠지만 100년 세월을 겪어온 세그루 나무가 씨앗이 되여 만무과원을 이루고 연변의 명품을 배출해낼 줄은 아마 사과배 창시인으로 불리우는 최창호어르신께서도 미처 상상 못했을 것이다. 원조나무와 만무과원을 련상시켜볼 때 오늘날 우리들이 민족교육의 진로를 탐구하고 민족문화를 지켜가는 데 있어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보아진다. 최근 들어 국가통용언어문자 보급과 더불어 조선족학교들에서 불가피하게 교과목과 교재변동을 가져오게 되는데 우리가 지나온 경험을 잘 총화하고 민족교육에 대한 인식전환을 전제로, 다양한 교육의 장을 개척하고 풍부한 교육내용을 개발하면서 교육의 장을 학교만이 아닌 가정과 사회로, 교육의 내용을 지식전수만이 아닌 문화교육과 인격교육으로 확장시켜나간다면 활성화한 새로운 민족교육양식을 만들어갈 수도 있다고 보아진다. 물론 어떠한 문화양식도 그 문화가 생존하고 성장할 수 있는 공간과 그 공간에서 생존하는 문화주체를 필수로 한다. 2003년, 필자는 행운스럽게 로씨야고려인 이주 140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한 바 있었는데 그번 행사에서 필자는 회의적인 태도로 고려인문화회관 정초식을 지켜보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회관은 그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고려인들의 문화중심으로 되였다. 회관 홀에 걸려있는 티비에는 고려인이주력사를 그려낸 다큐가 실시간으로 방송되고 어른과 어린이 할 것 없이 회관에 드나들면서 민족음악과 무용을 배우고 민속문화를 체험했다. 뿐만 아니라 회관에서 고려인자녀들의 결혼식과 같은 여러가지 행사도 진행되였기에 진정으로 민족문화의 한 거점으로 성장했다. 시대적 격변기를 맞이하는 오늘날 민족교육을 발전시키고 민족문화를 지켜나가고저 한다면 최창호어르신이 키운 원조나무와 고려인문화회관과 같은 문화공간 구축이 필요하지 않을가. 현재 내지로 진출한 조선족구성원들은 나름대로 단체를 결성하고 네트워크를 구축해가고 있지만 교육의 대상으로 되고 있는 후대들의 공동체형성은 상대적으로 미약하다. 만약 어른들이 형성한 네트워크가 하나의 실체로서의 문화회관, 문화센터를 확보한다면 이 공간이 하나의 구심점이 되고 거목으로 되여 민족문화가 생존하고 번성할 수 있는 생태계를 이룩하게 될 것이며 주변에 있는 조선족구성원들, 나아가 기타 민족구성원들이 우리 문화를 배우고 체험하는 장을 열어가게 될 것이다. 혹자는 글로벌시대에 민족의 경계가 날따라 희미해주고 민족문화도 상호 융합되여가고 있는 현시점에서 우리가 굳이 조선족문화를 지켜가야 할 리유가 없지 않느냐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우리가 우리 문화를 지켜간다는 것은 ‘우리’만을 지켜가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실 최창호어르신이 조선반도에서 가져온 과일나무를 당지에 있는 과일나무에 접목하여 사과배라고 하는 새로운 과일품종을 육성해냈듯이 조선족선민들도 쪽지게에 우리민족의 문화를 담아지고 두만강, 압록강을 건너 중국에서 정착생활을 시작하면서 현지문화와의 문화적 접목을 통해 조선족문화라는 새로운 ‘문화산품’을 창출했다. 사과배가 자기만의 특유의 맛과 향기를 풍기듯이 조선족문화도 나름대로의 문화적 원소와 풍격을 지니고 있으며 대체불가한 새로운 문화의 종으로 자타의 공인을 받고 있다. 오늘날에 이르러서 우리민족이 이 땅에서 창출한 문화는 이미 조선족이라는 민족적 경계를 넘어서 중화문화의 구성부분으로, 나아가서 인류문화유산으로 유네스코에도 등재되여있다. 따라서 조선족문화를 지켜가고 발전시켜가고자 하는 우리들의 노력과 실천은 중화문화의 번영에 동참하고 인류문명의 발전에도 기여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현재 조선족문화는 한편으로 잊혀져가고 있는 전통문화를 발굴, 정리해나가야 하고 한편으로 현대문화의 도전에 대응해나가야 하는 중대한 시대적 격변기에 처해있다. 위기는 항시 위험과 기회를 동반하고 있는바 이러한 격변기를 조선족문화가 한층 업그레이드되는 기회로 잡을 수 있는가는 우리 모두의 지혜와 자세에 달려있다고 보아진다. 조선족사회구성원들의 사랑과 자각과 동참이 밑거름된다면 우리는 능히 조선족문화가 생존하고 발전할 수 있는 생태계를 이룰 수 있다고 보아진다. 오늘날 연변의 자랑으로 되고 있는 만무과원도 바로 세그루의 모수나무가 거목이 되여 이루어진 것이다. 고향에 남아있거나 내지로 진출한 조선족 개개인이 한포기의 풀이 되고 한그루의 나무가 된다면 내지에서도 쉽게 민족교육과 문화의 생태계를 형성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 모두가 각자의 위치에서 자각적으로 거목이 되여 그 역할을 감당해나간다면 도심에서도 능히 조선족문화라는 울창한 숲을 이룰 수 있으며 이런 숲속에서 우리 후대들이 새로운 재목으로 커갈 수 있을 것이다.   인민넷 조문판
154    조선족의 학력과 언어적 자원에 따른 취업 및 진로 댓글:  조회:993  추천:1  2021-11-17
조선족의 학력과 언어적 자원에 따른 취업 및 진로 방미화 국내의 새로운 조선족공동체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는 데 반해, 그러한 도시의 새로운 공동체 구성원인 조선족들의 국내 로동시장 진출에 관한 연구는 매우 희소하다. 생산활동을 매개로 하지 않는 공동체 형성은 그 기반이 허약하다는 점에서 조선족들의 취업 및 생계활동에 대한 실태가 잘 파악되여야 한다고 본다. 이에 필자는 산업이 발달하고 조선족이 대거 집단거주하고 있는 지역들인 대련, 청도, 심양 지역을 대상으로 그 지역에 거주하는 조선족들의 로동 및 생활 실태에 대해 고찰한 적이 있다. 1) 학력에 따른 이주의 분화 대련, 청도, 심양 세 도시에 취직한 상황을 살펴보았을 때, 학력별로 조선족청년들의 이주가 분화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본고에서 소개하지는 않지만, 별도 조사에 의하면 연변에 남아 정부기관과 사업단위에 취직한 허다한 조선족들의 학력은 대졸 이상인 석사, 박사이다. 그들은 정부기관과 사업단위에 취직하여 직급을 가지며 앞으로 정부기관과 사업단위에서 승급하는 것으로서 자신의 사회적 위치를 찾고자 한다. 연변의 한국기업에 취직한 조선족청년들은 대부분 대졸 이하인 전문대, 고졸, 초졸 학력이다. 그들 가운데는 학교를 졸업해서부터 연길에 있는 한국기업에 취직하여 몇년간 근무해온 사례도 있고, 또 대도시로 진출했다가 고향으로 돌아와 취직한 경우도 있다. 후자의 경우는 주로 대도시에서의 자신의 진로에 대한 막막함, 타향에서의 고독감, 고향에서의 기회증가 등 원인으로 인해 고향으로 돌아와 취직하게 된다. 이와 같이 대졸 이하의 조선족들이 대도시에 진출했다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는 경향이 강한 데 반해, 중국의 명문대학을 졸업했거나 유럽, 미국, 한국, 일본 등 나라에서 류학하고 돌아온 조선족들이 연변에 돌아오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왜냐하면 그들은 학력, 전공 등 방면의 조건을 구비하였기에 대기업에 취직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였으며, 대기업에 취직하면 또한 그것을 계기로 호구를 해결받을 수 있으므로, 상대적으로 도시정착이 쉽기 때문이다. 대련 글로벌 기업의 한국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조선족들은 대졸 이상인 데 반해, 일본 관련 업무에 종사하는 조선족들은 학력에 관계없이 일어구사능력을 구비한 경우들이다. 청도에 진출한 조선족의 학력은 더욱 다양하다. 그것은 청도에 한국기업이 대련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으므로, 초졸, 고졸 학력으로 한국 중소기업에 취직할 수 있는 여건이 구비되여있기 때문이다. 2) 조선족의 언어적 자원과 취직의 관계 1992년 중한 수교이후 중국의 대도시에 한국기업이 대량으로 진출하게 되며, 따라서 대도시에 진출하여 한국기업에 취직하는 조선족들이 증가하게 된다. 그것은 한국기업이 중국에서 성공적으로 정착하는 데, 중국어와 한국어를 동시에 구사할 줄 아는 조선족의 가교역할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한국기업이 대도시에 진출함에 따라 조선족들이 한국기업에 쉽게 취직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언어적 우위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산재지역에서 한족 초중과 고중을 다닌 조선족이라면, 한국어를 처음부터 배워야 하지만, 연변 조선족의 경우는 대부분 조선족 초중, 고중을 다녔기에 한국어가 능숙하며, 그러한 리유로 한국기업에서의 취직이 대단히 용이하였다. 조선족들의 언어적 우위는 그들의 취직을 뒤받침해주는 요소이다. 하지만 한류 등 영향으로 인해 중국의 많은 대학에서 한국어학과를 설치하고 한국어를 배우는 한족들이 늘어남에 따라, 또 한국에 류학하고 돌아온 한족들이 증가함에 따라 한국기업에서 혹은 중국기업에서 가교역할을 해왔던 조선족의 지위는 상대적으로 약화된다. 또한 글로벌 기업에 취직한 조선족들의 경우, 초중, 고중 때 배운 외국어가 일어였기에 한족에 비해 영어수준이 떨어지므로 승진에 있어 한계가 있다. 때문에 현재 조선족들의 이중언어가 한족들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하는 요소라고 하기는 힘들다. 비록 조선족들이 언어적 자원을 활용하여 한국기업 내지 국내 기업에 취직함으로써, 중한간의 교류에 적극적인 영향을 미쳤다 하더라도, 그것은 더 큰 기업으로 취직자리를 옮겨 사회적 위치를 상승시키기 위한 중간단계는 아닌 것이다. 이와 같은 양상에 반해, 중국어, 한국어, 일어, 영어 등 4개국 언어를 구사할 줄 알고 또 대학에서 전공한 분야가 사회적으로 인재가 필요한 분야이면, 글로벌 기업에 취직할 가능성이 많고 또 기업내 승진이나 이직 이후 더 좋은 기업에서의 취직이 상대적으로 용이하다. 이러한 경우는 보통 대학교에서 제2외국어로 영어를 전공하였고, 또 일본에 류학하여 일어를 습득하게 된 경우이다. 이처럼 언어적 자원을 충분히 갖추고 있고 거기에 사회적으로 유용한 분야를 전공했을 경우는, 한족에 비해 국제화에 대응하는 능력이 훨씬 강하다. 3) 국내 한국기업의 발전과 조선족 취업 및 진로의 관계 조선족들이 대도시로 이주하기 이전의 직장은 주로 도시의 국유, 집체 기업과 기타 정부기관, 사업단위 등이였다. 그리고 농촌지역에서는 주로 농업생산에 의존하였다. 따라서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경제생활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기존의 경제활동에서 벗어나 외국이나 연해지역으로 진출하기 시작하면서, 조선족들이 새로운 도시 혹은 해외에서 갖고 있는 직장은 기존의 직장처럼 안정적이지 못하다. 그것은 저임금을 겨냥하고 중국 연해도시에 투자한 많은 외국기업 특히 한국기업들이 단지 이중언어를 구사할 줄 알기에 채용한 단순로동력에게 많은 보수와 혜택을 줄 수 없으며, 따라서 한국기업에서의 취직은 조선족들에게 안정된 직장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도시 이주 초기부터 조선족청년들의 취업은 불안정한 상황에 놓이게 되였으며 그러한 양상은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다. 청도시 조선족인구감소의 사례를 놓고 보더라도 그러하다. 1980년대 말부터 청도시에 한국기업이 증가함에 따라 거의 20여만명 가까이 되는 조선족들이 청도에 진출하여 한국기업 등에 취직하였으나 현재는 12만명 내지 13여만명으로 줄어들었다. 그것은 국내 인건비의 상승, 외국기업에 대한 정부 혜택의 감소 등 원인으로 인해 한국기업들이 청도에서 철수함에 따라 일자리가 대폭 감소된 것과 무관하지 않다. 물론 청도시 조선족인구의 감소는 2007년 한국의 방문취업제 실시로 인한 무연고 조선족들의 한국이주와 밀접한 련관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건비상승 등 원인으로 말미암아 한국기업들이 중국의 서북지역 및 베트남 등 동남아국가에 진출함에 따라 많은 조선족들이 취직을 위해 그러한 한국기업 진출 도시로 다시 이주하였다는 것은 국내 한국기업의 발전이 조선족의 취직 및 경제생활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4) 도시별 특성 각 도시의 피면담자가 그 도시를 대표한다고 볼 수는 없지만 인터뷰과정에서, 그리고 해당 도시를 방문하여 여러 정황을 파악하는 과정에서 도시별 특성을 일정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대련은 일본과 한국을 비롯한 해외 기업들이 다수 진출한 곳으로서 산업과 무역이 크게 발전한 지역이기 때문에 조선족들의 취업기회도 그 만큼 많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어중간한 기술 수준이나 능력으로 벌 수 있는 소득은 최근의 급속한 집세인상추세를 따라가기에도 벅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건비의 빠른 추세는 다국적기업들이 이곳을 앞으로도 주요한 BPO(Business Process Outsourcing)기지로 삼게 될 것인지에 대한 의구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결국 남는 것은 영어능력 등을 습득하여 다국적기업이나 중국기업의 본류로 진입할 수 있을 것인가가 될 것이다. 이 같은 상황은 청도지역의 경우에도 어느 정도 류사하다고 판단된다. 그러나 청도의 경우 한국기업이 일찌감치 대거 진출하고, 또 그만큼 조선족들이 방대한 규모의 공동체를 건설해놓은 지역이기 때문에 쉽게 허물어질 상황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기에 낮은 인건비를 겨냥하여 진출한 경공업, 중소기업들은 빠른 인건비상승추세를 따라갈 수 없기 때문에 이미 동남아지역으로 진출하였거나 일부는 중국 서부지역으로 이전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과거와 같이 한국기업에 쉽게 취업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한국기업의 탈출 속에서 한국기업에서 업무를 익힌 세대들의 창업이 늘고 있으며, 이들중 일부는 한국에 의존하지 않고 중국 내수시장에서 승부를 걸게 될 것으로 보인다. 심양은 대련이나 청도에 비하여 일찌감치 산업과 무역이 발달한 지역이기 때문에 조선족들이 다시 이 지역으로 돌아올 유인이 강하다. 적어도 외형적으로는 다른 동북지방보다는 조선족들의 회귀가 이 지역의 공동체를 유지시켜주는 힘으로 작용할 것이다. 종합하면, 취직과정에서 조선족의 한국어와 일본어구사능력 등 언어적 우세는 유용한 자원으로 활용되고 있으며 국내 한국기업의 발전은 조선족들의 취직과 진로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다양한 수준의 언어능력을 매개로 한, 그리고 국내 소수민족으로서의 리점을 활용하면서 조선족들은 초국적 련결망을 구축해왔으나, 향후에는 로동시장내 지위에 따라 공동체에 대한 각기 다른 전망에 기초하여 사회적 활동을 전개해나갈 것으로 전망된다.   인민넷 조문판
153    집합적 기억과 타향살이 댓글:  조회:957  추천:0  2021-11-04
위챗에서 중국의 1980년—2020년 40년을 회억하는 사진과 글이 나돌고 있어서 흥미롭게 필자도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기억과 미디어는 매우 큰 련관이 있다고 한다. 미디어는 정보매체로서 문자, 신문, 잡지, 사진, 영화, 텔레비죤, 뉴미디어 등등이 있다. 회억해보면 필자의 전반 기억은 중국에서의 텔레비죤의 보편화 과정과 밀접히 련관되여있었다. 필자가 태여나서 기억이 있을 때 중국은 이미 개혁개방의 시대에 들어서서 사람들의 삶 또한 하루가 다르게 나날이 향상하던 때였다. 그 하나의 표징이 텔레비죤을 소유하는 것이였던 것같다. 향항드라마 이 필자의 어린시절 처음으로 접했던 중국 내지외의 드라마이다. 국유기업단위의 단층주택구역에 살았던 그 때 우리집 주위에는 두집에 텔레비죤이 있었다. 그 당시 집에 텔레비죤이 없었던 필자는 저녁밥을 부랴부랴 먹고는 남동생의 손을 꼭 잡고 옆집 문 두드리는 게 일상이였다. 텔레비죤이 보급되면서 동네에서 모여들어서 텔레비죤을 보던 시대가 지났기에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집을 찾아 문을 두드려야 하는 상황이였다. 어떨 땐 두 집 다 문을 열어주지 않아서 엉엉 우는 동생을 다독이면서 풀이 죽어서 집에 돌아오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드디여 우리집에서도 ‘홍매표’ 텔레비죤을 소유하게 되였다. 어린 나이였지만 그 날 그 14인치 텔레비죤이 우리 가족한테 가져다준 흥분과 기쁨은 평생 가셔지지 않을 것같다. 위쳇에서 돌고 있는 중국의 40년을 회억하는 사진과 글을 보노라면 일본류학전인 2000년초까지는 거의 백프로 공감이 된다. 1981년부터 랑평을 대표로 한 중국녀자배구팀이 국제대회에서 5련승하는 모습을 보면서 환호했던 기억, 배구열풍을 타고 열심히 봤던 일본드라마 의 녀주인공을 따라 칭쿵피리(晴空霹雳)를 웨치며 놀던 소꿉시절. 1985년, 어른도 아이도 푹 빠지게 만든 향항드라마 , 허문강(许文强)의 멋진 양복차림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아빠가 양복을 입은 모습을 처음으로 보았을 때의 신기하던 기억, 그리고 의미도 모르면서 흥얼거렸던 광동어주제가 “로웅빵 로웅롱…”. 텔레비죤에서 봤던 코카콜라를 처음 마셨을 때 상을 찌그리던 남동생의 얼굴, 축구선수 마라도나가 민첩하게 꼴을 넣는 모습에 탄성을 지르던 동네남자애들, 어린 필자의 눈에도 잘 생겨보이던, 1987년 음력설야회에 모습을 드러낸 비상(费翔)아저씨, 뭐가 뭔지 모르고 봤던 미인들이 많이 나오는 국내드라마 , 일본그림영화(애니메이션) , 중국식 록이 뭔지도 모르고 불렀던 최건의 , 엄마가 눈물을 흘리며 보셨던 국내드라마 … 아이돌그룹이 뭔지 알려준 대만의 의 노래를 친구 몇과 함께 열심히 연습하면서 자기들도 그룹을 만들겠노라 떠들었던 초중시절. 1991년, 쏘련의 해체를 텔레비죤에서 보면서 충격을 먹었던 순간. 집에 전화를 처음 놓았을 때의 신기했던 기분, 과도한 전화사용으로 부모한테 혼나면서도 열심히 친구들과 전화놀이를 했던 중학시절. 장애자인 줄도 모르고 그 노래에 감동받아 처음으로 내 돈을 내고 산 대만가수 정지화(郑智化)의 카세트테프, 그의 감화력 있는 보이스와 노래가사를 들으면서 어떻게 인생을 살아야 하는지 살짝 고민하기 시작했던 학창시절. 향항드라마 을 보면서 변호사의 꿈을 꿨던 한때, ‘4대천왕’ 포스터와 앨범노래로 도배되였던 거리, ‘4대천왕’의 머리스타일과 패션을 보며 멋부리기에 눈 뜨기 시작했던 청춘시절. PC방이라는 게 생겨나 인생에서 처음으로 메일주소를 만들고 타자를 배우면서 QQ로 멀리 있는 상해의 생면부지의 친구와 짝궁이 되였던 시절. 향항귀환을 환호했던 1997년. 1999년 유고슬라비아주재 중국대사관 폭격사건의 충격, 항의시위에서 느낀 젊은 청춘들의 열기. 국내배우가 대만과 향항 배우를 릉가할 수 있다는 걸 느끼게 만든 드라마 . 2001년 중국의 올림픽신청성공에 친구들과 함께 환호했던 순간. 세부적인 느낌은 다를 수도 있지만 그 당시를 살았던 중국사람이라면 거의 백프로 공유할 수 있는 기억들이다. 이렇게 크고 작은 공동체(집단)가 공유하는 기억을 집합적 기억이라고 한다. 집합적 기억(Collective Memory, 집단기억이라고도 함)이란 개념은 프랑스의 사회학자 모리스 알박스가 제창한 것이다. 알박스전까지만 해도 기억은 개인적 차원이거나 심리적인 분야에서만 다루어졌다. 알박스는 기억의 사회적 차원을 주장했을 뿐만 아니라 여러 집단(가족, 종교집단, 민족, 국민 등)에도 기억이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무엇이 사회집단을 결속시키는가’에 대한 물음에 답하고저 이 개념을 주장하였다. 우리 중국조선족이 가지고 있는 개인기억과 집합적 기억은 거의다 중국에서 벌어지고 화제가 되였던 것들에 의해 형성되였으니 중국에 친근감과 귀속감을 느끼는것이 응당한 것이고 자연스러운 것이다. 하지만 출국바람이 불면서 필자를 비롯한 일부 중국조선족들의 기억 속에는 중국의 다른 민족들에게는 없는 한국과의 기억들이 있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통하여 본 한국의 발달된 모습에 놀랐던 기억, 브라운관으로 본 첫 한국드라마 를 통해 브르죠아적 패션과 삶을 알게 되고, 중국에 있으면서 한국 최초의 아이돌그룹 ‘소방차’의 의 노래가사 “가슴이 왜 이렇게 뛰는지 나는 잘 몰라요. 얼굴이 빨개지는 리유를 나는 잘 몰라요…”를 흥얼대면서 이성이 뭔지 의식하기 시작했던 청춘시절, 한국드라마 비디오를 대여하는 가게들의 흥성함, 한국가수 김건모의 와 향항가수 장학우(张学友)의 를 좋아해 목놓아불렀던 고중시절의 남자애들. 한국의 아침드라마에 푹 빠진 동네엄마들의 수다, 한국의 녀배우 최진실의 자살뉴스를 듣고 슬픔과 아쉬움을 감치 못하는 사람이 많았고 한국드라마 에 공감을 느끼는 부분도 적지 않았다. 2000년초에 일본에 류학온 필자는2000년 이후의 기억 속에 중국과 한국외에 일본의 것들이 함께 공존해있다. 2002년 겨울 사스(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가 중국에서 발생했을 때 필자는 일본에서의 류학생활에 적응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국제전화카드가 류학생한테는 비쌌기에 어지간하면 집에 전화하지 않고 있다가 오랜만에 걸린 전화에서 일본의 사스상황을 걱정하는 부모님으로부터 알게 된 사스류행소식. 학생신분이면 무료로 최신 카메라기능을 장착한 핸드폰을 소유할 수 있어서 감동 먹었던 일본생활의 스타트. 일본의 야구시합에서 동경 쪽은 교진(巨人)팀, 오사카교토 쪽은 한신(阪神)팀을 응원하는 걸 피부로 느끼면서 어느 순간 한신팀을 응원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던 순간. 중국의 단거리운동선수 류상(刘翔)이 오사카세계육상대회에서 일등하는 중계를 일본어로 들으면서 현장에 가지 않은 걸 후회했던 그 여름. 2008년 중국사천문천대지진 소식을 위챗뉴스에서, 2011년3월11일 동일본대지진 진동을 몸으로 체험하고 쓰나마의 파괴력을 뉴스로 확인하며 자연재해와 인간에 의한 2차재해의 피해성을 침통히 느꼈던 기억. 일본에서의 생활이 길어질수록 필자는 중국 국내의 생활에 대한 생소함이 늘어나고 있음을 직감하고 있다. 그 례로 지금 중국에서 류행하는 노래가 뭔지 잘 모른다. 하지만 다행히도 우리는 위챗같이 현재의 삶을 전세계적으로 리얼하게 공유할 수 있는 뉴미디어시대에 살고 있기에 마음만 있으면 언제라도 앉은 자리에서 중국의 현황을 가상체험할 수 있다. 필자의 일본에서의 체험 또한 위챗을 통해 중국에 있는 지인들과 교류하고 공유함으로써 고향에 있는 지인들한테 필자가 겪은 일본을 가상체험시킬 수 있다. 현재 우리는 마침 신종코로나페염시대라는 전지구적인 집합적 기억을 공유하고 있다. 살고 있는 곳이 서로 다르기에 다지역, 다시점에서의 집합적 기억의 공유를 가능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필자의 집합적기억으로 봤을때 필자는 분명 1980년~2020년 40년간의 중국, 한국, 일본 이 세곳에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귀속감을 갖고 있다고 판단할 수 있다. 물론 다중 귀속감과 필자가 중국사람이라는 정체성은 전혀 모순되지 않는다. 일본에 얼마나 오래 살든지 나는 중국조선족이다. 인민넷 조문판
152    젠더평등과 세 자녀 정책의 효과 댓글:  조회:1055  추천:0  2021-09-27
젠더평등과 세 자녀 정책의 효과 김화선 지난 5월 31일 중공중앙 정치국에서는 회의를 열어 생육정책을 진일보 조절하고 한쌍의 부부가 세 자녀를 생육할 수 있으며 그에 따른 지지조치를 취할 데 관한 중대한 결정을 심의, 통과시켰다.   기혼녀성이 직면하고 있는 생육의 어려움에는 크게 육아환경문제와 사업과 가정의 평형을 유지시키기 어렵다는 두가지 문제를 지적할 수 있다. 그 해결책의 하나로, 젠더평등(性别平等)을 촉진하는 방법으로 세 자녀 정책의 실시를 전면적으로 지지할 것이 요구된다.   첫째, 훌륭한 육아환경이 만들어지지 못했다는 인식은 녀성들이 아이를 낳고 싶어도 낳지 못하는 하나의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육아환경에는 육아정책, 육아서비스, 육아문화 등이 포함된다.   육아정책의 경우, 아직 부족한 부분이 존재한다. 인구정책의 조절은 다른 수많은 정책들이 함께 조절되여갈 것을 요구한다. 세 자녀 정책 역시 기타 정책들의 협조와 지지를 필요로 한다. 목전, 우리 나라 육아정책은 완전하지 못하고 정책지지체계도 아직 형성되지 못했다. 때문에 우리 가정들은 육아면에서 육아시간원가가 높고, 육아 경제원가도 높으며 육아기회원가도 높다는 세가지 문제를 안고 있다. 우리 나라 산후휴가제도는 유연성이 부족하고 배우자의 산후 휴가제도 집행이 잘 안되고 있다. 공공재정에서 3세 이하의 영유아에 대한 투자는 아주 적다고 할 수 있으며 가정돌봄에 대한 국가의 지지가 부족하여 자녀양육의 경제부담을 전부 가정에서 담당하게 되여있다. 또 녀성의 취업보장정책체계가 파편화되여있고 집행이 어려우며 일과 가정의 모순이 두드러지며 양육원가가 지속적으로 솟기만 하여 많은 녀성들은 첫 아이를 낳고 나서 둘째아이를 낳으려 하지 않으며 셋째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육아서비스도 대단히 부족한 현실이다. 국가에서 추진하는 새 시대의 영유아탁아양육서비스체계는 금방 시작을 했고 아직도 공급과 수요가 균형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2019년 전국 조사에 의하면 40% 이상의 가정에서 영유아탁아서비스 수요가 있지만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영유아는 5%밖에 안된다.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공급과 수요의 구조가 균형을 잃고 수요에 따른 공급을 하지 못하고 서비스주체가 단일한 점 때문에 서로 다른 가정의 탁아서비스수요를 만족시키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서비스내용도 단일하여 가정의 돌봄압력을 해소시키지 못하고 있다. 또한 공급과 수요의 체제가 균형을 잃어 영유아돌봄을 보장하기 어렵다. 영육아시장서비스의 질도 천차만별이고 유치원의 환경, 위생안전, 서비스표준, 교사자질, 보육교육 등 여러 면에서 규범화할 것이 요구된다. 연구에 의하면 육아를 위해 취업하지 않은 녀성이 미취업녀성인구에서 차지하는 비률이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이는 녀성의 직장에서의 발전을 엄중히 방해하고 있으며 녀성들이 감히 아이를 낳지 못하게 하고 있다.   육아문화가 아주 초조하고 불안하다고 할 수 있다. 결혼, 임신, 분만, 수유, 양육, 교육 등은 가정의 정상적인 과정이고 기본기능이다. 그러나 공공서비스공급이 부족하고 사회적 지지가 부족하여 가정생활과 직장생활의 조화를 이루기 힘든 모순이 존재하고 있다. 임신과 출산은 10개월만 필요하지만 양육은 평생의 일이다. 녀성들은 자녀를 출산한 이후의 수십년 동안 남성들보다 더 많은 시간과 정력을 투자하여 자녀를 돌보고 함께 있어주어야 한다. ‘수보다 질’을 추구하는 저출산시대에 한명의 자녀는 너무나 소중한 존재이며 자녀에 대한 기대가 큰 만큼 사회적으로 엄중한 육아초조증세가 형성되여있다. 그리하여 임신준비에서부터 태아보호, 산후조리 등 행위에서 이런 초조증세가 나타날 뿐만 아니라 각종 어린이교육반, 취미반, 학원 등이 ‘번창’하는 데서도 초조증세가 크게 보여진다. 정밀육아, 과도육아가 이미 일상생활의 일부분으로 되여있어 많이 사람들이 아이가 세 명이면 “키우기 힘들다”라고 말한다.   둘째, 직장의 성차별은 녀성들이 승진과 출산 사이에서 선택의 어려움을 겪게 만든다.   구직의 문턱이 날로 높아가고 있어 녀성들의 취직이 어려워지고 있다. 현재, 우리 나라 로동영역에서 명확한 성차별 전문 립법이 부족하여 비록 법률정책면에서 어떠한 단위든지 결혼, 임신, 육아휴직, 젖먹이기 등 상황에서 일방적으로 로동계약을 해제하면 안된다고 강조하고 있지만 녀성직원을 해고하거나 월급을 적게 주는 현상이 존재하고 있다. 회사가 이런 일로 벌금당하나 그 금액이 적어 법률의 유효성이 떨어지고 있다. 국가에 녀성의 생육권익과 로동권익을 보호하는 정책이 있으나 로동력시장에서 녀성취업을 배제하는 현상을 없애지 못하고 있다. 대학졸업 녀성의 비률이 남성을 초과하고 있는 배경에서 녀성이 로동력시장에서 조건이 비슷한 남성과 경쟁해야 할 뿐만 아니라 우수한 녀성과도 경쟁해야 한다. 이중경쟁구조에서 많은 녀성들은 남성과 똑같은 대우를 받지 못하게 되며 특히 녀성로동력이 집중된 직장에서 남성은 여러 방면의 조건이 부족해도 여전히 더 큰 우선권을 가지게 된다.   녀성의 직장승진기회가 더욱 적다. 취직한 후에도 녀성은 아이를 낳을 것인가 아니면 승진할 것인가의 선택에 직면하게 된다. 생육의 황금나이는 또한 직업발전의 최적기이기도 하다. 직업녀성은 가정책임도 담당해야 하고 사회책임도 담당해야 한다. 직장일과 가사일중에서 균형점을 찾아야 한다. 그렇지 못할 경우, 출산 때문에 직업승진의 기회를 놓쳐버릴 수도 있고 직업발전에 대한 추구 때문에 재출산의 가능성을 잃을 수도 있다.   평생발전의 기회가 더 좁아진다. 생육은 우리의 인생려정에서 많은 생명사건을 만들어내게 되며 도미노효과를 일으켜 평생발전을 저애할 수 있다. 아이를 한명 더 낳는다는 것은 먹을거리를 더 사고, 침대 하나 더 사고, 책가방 하나 더 사는 것처럼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 녀성의 시간원가, 경제원가, 기회원가를 대폭 늘이게 된다. 이로써 축적된 전면적인 부정적 효과를 나타낼 수도 있다. 이를테면 녀성은 직업이미지, 소득수준, 정치지위, 로년보장 등 면에서 장기적으로 렬세에 처하게 될 수 있다. 연구에 의하면 차별성이 있는 직장환경에서 아이를 더 낳으면 녀성소득이 7% 줄어들고, 도시의 남성은 녀성보다 월급이 평균 28% 많으며, 비국영단위에서 기혼녀성의 월급은 미혼녀성의 월급보다 30% 좌우 낮다고 한다.   남녀평등 기본국책을 관철하는 것은 세 자녀 정책을 시달하는 필요한 보장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제도건설을 강화하여 출산과 육아에 대한 지지를 대폭 강화하고 ‘낳기 싫어’하는 생각을 ‘낳고 싶어’하는 생각으로 바꾸게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또한 가정의 인구재생산과 직장의 생산, 두가지 생산 사이의 모순을 줄여서 ‘낳고 싶다’는 생각이 ‘과감히 낳겠다’는 생각으로 실행되게끔 지지해야 한다. 출산과 양육문화를 낳은 데만 만족하지 말고 ‘잘 키우는’ 데로 확산되여야 할 것이다. 육아부담에서 오는 육아초조심리를 없애고 건강하고 행복한 양육리념을 만들어가야 할 것이다.   총적으로, 세 자녀 정책은 억명이 넘는 가임기 녀성들에게 아이를 낳을 것인가 안 낳을 것인가, 출산과 승진 사이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등의 선택문제를 던져주었다. 가족 성원들은 녀성의 생육선택을 존중해주어야 하며, 전통적인 가사로동 역할분공 방식을 고쳐나가야 하며, 남편은 무보수의 가사로동을 전방위적으로 분담해야 하고, 자녀양육이 안해의 직장발전에 주는 소극적인 영향을 줄이도록 함께 노력해야 한다. 정부, 기업, 사회와 가정이 공동으로 노력하여 가정의 생육전담이 사회의 공공책임으로 되여가야, 세 자녀 정책은 현실에서 꽃을 피울 것이다. 인민넷 조문판
151    메타버스와 사과배로드 댓글:  조회:1058  추천:0  2021-09-16
메타버스와 사과배로드 예동근 조선족의 길은 어디에? 질문이 좀 이상하지 않은가? 길은 방향이다. 일반적으로 ‘어디로?’가 더 정확할 수 있다. 방향이 없는 길이 있는가? 있다. 우리가 길 우에 살면 그 장소가 길이고, 우리 삶의 터전이다. 메타버스의 시대에 길은 방향성보다 위치성이 더 중요하다. ‘일대일로’는 진주목걸이처럼 명확한 방향과 이미지가 있다. 그래서 모든 지역들은 이 진주목걸이의 길목과 련결시키려 한다. 그것이 물류이고, 그 곳에 자본이 흘러가며, 그 곳에 정책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쉽게 우리 조선족들의 주요 삶의 터전은 이 진주목걸이의 핵심위치와 좀 거리가 있다. 괜찮다. 길이 없으면 만들면 된다고 했다. 지금은 길이 없으면 길 우로 이사를 가면 된다. 조금도 방해가 되지 않는 삶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길이 사과배로드이다. 사과배를 재배하는 곳은 장소이다. 사과배의 고향이 연변이다. 그런데 이것이 과연 길일가? 맞다. 이것이 길이다. 메타버스의 시대에 이것이 길이다. 사전을 찾아보면 메타버스란 가상과 초월을 의미하는 `메타(meta)`와 세계·우주를 뜻하는 `유니버스(universe)`의 합성어로 가상현실보다 한단계 더 나아가 사회·경제적 활동까지 이뤄지는 온라인공간이다. 중국에서는 원우주(元宇宙)라고 한다. 가상과 현실이 함께 평행하는 세계, 새로운 세상인식이 시작된다. 메타버스를 모르면 이제 시대에 뒤쳐지게 된다. 코로나펜데믹이 오래가면서 세계의 MZ세대를 열광시킨 한국 BTS의 메타버스공연이 있었고 미국 바이든 대통령도 ‘동물의 숲’에서 대통령선거캠퍼를 만들고 연설도 했었다. 이제는 졸업식도 메타버스로 진행하고 있다. 이처럼 메타버스가 신속히 확장한 증거로 2억명의 회원이 가입된 네이버 제페토는 AR기반의 메타버스플랫폼이라는 것이다. 해외리용자가 90%, 10대가 80%가 가입한 거대한 플랫폼이다. 이제 누구나 메타버스에 쉽게 접근할 수 있으며, 이것이 일상이 된다는 의미이다. 자, 연변의 사과배농장으로 가자. 사과배농장은 중국의 동복지역 변두리에 있다. 그러나 조선족/연변인들의 마음속의 중심에 있다. 메타버스 사과배농장에서 우리는 사과배농사를 지을 수 있고, 가을철에 집앞에 사과배박스가 놓인다. 너의 집이 일본에 있든, 한국에 있든, 미국에 있든, 아프리카에 있든… 우리가 세계 어디에 있든 사과배로 이어진 거대하고 복잡한 련결망을 형성한다. 이것이 우리의 자원이고, 희망이고, 미래가 될 수 있으며, 우리의 정체성이 될 수 있다. 우리는 가상과 현실이 결합된 사과배농장에서 농사만 지을 뿐 만이라 조선족민속공연도 하고, 민속축제도 하며, 과거에 즐겼든 널뛰기, 줄당기기, 그네타기, 씨름으로 과거를 즐길 수 있다. 오늘날 10대들이 다양한 게임도구로 게임을 만들고 게임대회를 하면서 조선족정서를 느낄 수 있는 소통을 할 수 있다. 사과배 농장에서 미술, 음악, 교육 다양한 프로그람을 만들고 즐기면서 메타버스 사과배촌락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길은 방향이 아니라 공간이며, 장소인 것이다. 우리는 메타버스공간에서 결혼식을 할 수 있으며, 소개팅도 하고, 련애도 하면서 자신의 새로운 모습을 찾을 수 있다. 메타버스, 아직은 게임중심의 가상공간이지만 비게임의 가상공간도 확장되고 있다. 다양한 소통이 필요하고, 편안하고 즐거운 여가, 고향이 눈앞에 펼쳐지는 경관, 고향의 맛을 즐길 수 있는 음식들… 이제 빠르게 현실의 밥상에 나타날 것이며, 심지어 빵을 먹어도 연길랭면을 먹었다고 느낄 수 있는 시대가 곧 나타날 수도 있다.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다. 메터버스란 디지털지구가 새롭게 출현되고 있다. 우리는 거대한 변화의 흐름 속에서 우리의 정체성을 지킬 수 있는 디지털 사과배로드를 만들어내야 한다. 사과배로드는 우리 조선족 마음의 길이다   인민넷 조문판
150    항주조선족련합회 사례로 본 민족단체와 민족사회의 발전 댓글:  조회:978  추천:0  2021-08-17
항주조선족련합회 사례로 본 민족단체와 민족사회의 발전 안성호 2020년 절대적 빈곤을 박멸함에 따라 중국은 초요사회를 전면적으로 실현하고 지역, 도농, 수입의 차이를 없애고 공동부유를 실현하는 새로운 시대로 진입하는 입구에 서있다. 지난기 박광성교수가 칼럼에서 지적하였듯이 그동안 조선족사회는 천지개벽의 커다란 사회변화를 겪어왔으며 지금은 새로운 시대 민족사회의 발전을 고심하여야 할 중요한 시기이다. 도시화의 실현으로 절대다수 인구가 도시에 거주하게 되었고 산업구도도 농업중심으로부터 2차, 3차 산업 중심으로 이전하였다. 아직도 류동성 특징이 강하여 여러 지역으로의 류동과 인구이동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연해지역을 중심으로 점차 정착되고 있고 보다 안정적인 지역커뮤니티가 형성, 발전되고 있다. 과거의 민족사회는 농촌을 중심으로 상대적으로 집중거주하고 민족문화, 교육, 상업 등이 체계적으로 형성되여있었다. 도시화에 따른 현저한 변화는 분산화 거주와 민족문화 련결고리의 약화이다. 민족사회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하여 각 지역에서 여러 민족단체들이 형성되였으며 민족단체들이 민족사회 발전의 버팀목이 되고 있다. 필자가 있는 항주시는 관광명승지로 이름난 지방이며 절강성소재지이지만 천만명 인구규모에서 조선족이 차지하는 인구비률은 극히 적은 편이다. 십여만명에 달하는 상해에 비기지 못할 뿐만 아니라 절강성내에서도 이우, 소흥 등 지방도시들보다 조선족인구가 적다. 구체적인 통계가 없어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항주시조선족련합회 위챗그룹에 가입한 인원수는 현재 431명이며 가입하지 않은 분들과 가족 등으로부터 추측하여 보면 약 3천명 좌우의 규모가 되지 않을가 생각한다. 비록 인구가 많은 편은 아니지만 기타 도시 민족사회와 마찬가지로 민족단체들이 조직되고 항주시조선족련합회를 중심으로 많은 행사들이 조직되고 있다. 정식 설립된 단체로 가장 일찍 설립된 것은 2017년에 설립된 축구협회와 바드민톤협회이다. 같은 해 12월에 항주시조선족련합회가 출범되였고 2018년 1월에 발족식을 가졌다. 항주시조선족련합회의 인솔하에 현재 항주시에는 축구협회, 고우클럽(바드민톤), 배구협회, 골프협회, 로인협회, 청년협회, 녀성협회 등 협회와 주말학교가 설립되어 활발한 행사들을 진행하고 있으며 금년 하반년에 조선족기업가협회 설립을 추진하고 있다. 여러 협회들은 같은 흥취에 따라 정기적으로 다양한 행사들을 진행하고 있다. 주말마다 경기 등 행사를 진행하는 외에 부녀절, 아동절, 로인절, 여름휴가, 송년회 등 시기에 따라 특색 있는 행사들을 조직하고 있다. 항주시조선족련합회는 산하에 사무부, 생활부, 기업부, 체육부, 부녀부, 청년련합회, 주말학교, 재무부, 감사부 등 9개 부서를 두어 물심량면으로 여러 단체들의 행사들을 지원하고 있다. 고우클럽, 축구협회, 배구협회 등 단체들이 화동지역 시합에 참가할 때 협찬금과 함께 응원하여줌으로써 든든한 뒤심이 되고 있다. 금년 5월 9일에 설립된 항주시 조선족주말학교는 차세대 문화전승을 위하여 련합회의 전력적인 추진하에 개교할 수 있었고 개교식에 리사회 성원들이 대거 참석함으로써 주말학교를 관심하고 지지하였다. 여러 협회들이 주축이 되여 흥취에 따라 일상적인 련의행사를 진행하고 련합회가 민족사회의 중심이 되여 송년회 등 행사들을 조직함으로써 항주시 민족사회의 기반을 형성하고 있다. 인구가 상대적으로 적고 큰 민족기업도 없는 항주시에서 다양한 민족단체들이 활발히 행사를 진행하기에는 운영에 상당한 어려움이 따른다. 항주시 조선족사회의 발전에는 조선족련합회 1기, 2기 회장을 비롯한 련합회 리사진의 사심없는 노력과 물심량면의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현재 2기 련합회의 경우 총 29명의 리사진과 6명의 고문단 성원으로 구성되었으며 회비, 행사 협찬 등 다양한 형식으로 련합회 행사들을 추진하고 있다. 리사회성원만 참가하는 리사회의 등 행사의 경우, 장소 회원무료제공, 행사비용 AA형식을 취함으로써 회비로 이루어진 련합회 경비를 조선족사회 단체행사에만 사용하고 있다. 리사진규모 확대를 통하여 안정적인 재원의 확보와 보다 다양하고 특색 있는 행사를 조직할 수 있도록 여러모로 지혜를 모으고 있다. 세계화 시대의 흐름에 맞추어 련합회 행사는 항주시에 국한되여있는 것이 아니라 장강삼각주 주변 여러 조선족단체들, 절강성길림상회, 한상회 등 단체들과 밀접히 련락을 취하고 상호간의 큰 행사들을 지원해주고 있다. 화동지역 조선족 배구시합, 바드민톤시합, 조선족주말학교 등 화동지역의 조선족네트워크가 민족단체들의 공동한 목표들을 중심으로 이어져나가고 있다. 항주조선족련합회는 아직도 초창기에 불과하다. 인구규모가 작은 항주시에서 여러가지 행사를 진행하기 위한 안정적인 재원마련이 시급한 문제로 되고 있으며 행사장소 마련, 지역사회 조선족성원들의 보다 광범위한 참여 등 많은 난제들에 봉착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항주뿐만 아닌 도시화 시대 여러 지역 조선족사회 민족단체들의 공동한 난제가 아닐가 싶다. 도시의 산지사방에 산재하여 뿔뿔이 흩어져있는 조선족들을 같은 민족이라는 년대감과 여가 흥취애호를 바탕으로 똘똘히 뭉치게 한 것이 바로 여러가지 민족단체들이다. 이러한 민족단체들을 유기적으로 련결시키고 지역 민족사회의 발전과 전승을 도모하는 것이 련합회의 커다란 역할이라고 할 수 있다. 여러가지 목적으로 설립된 민족단체들은 이미 도시화 시대 여러 지역 조선족사회의 구심점이 되고 민족문화의 전승과 발전을 위한 기반을 마련하고 있다. 항주시는 조선족단체가 발달되여있는 대표적인 지역도 아니고 규모적으로도 상당히 작은 지역이다. 많은 경험들은 이미 타지역 조선족단체들이 실천하고 있고 활성화되고 있는 부분들이다. 하지만 항주시조선족련합회의 노력이 있음으로 하여 항주시 조선족사회가 보다 활발히 발전하고 있는것도 사실이다. 서로간의 경험 소개와 교류를 통하여 새로운 시대 특점에 맞는 민족단체 발전을 모색하고 보다 안정적인 운영이 가능하도록 지혜와 힘을 모아야 할 시기인 것 같다. 지역을 중심으로 튼튼한 민족기반을 형성하고 주변 타지역, 동북지역 등 보다 광범위한 민족네트워크를 구축함으로써 이러한 네트워크들이 탄탄한 대로가 되여 인적, 물적, 정보 교류를 활발히 진행하여야만이 새 시대 민족사회의 발전의 버팀목이 될 수 있고 조선족으로서의 민족정체성을 유지하고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인민넷 조문판
149    세멘트도 따뜻하다 댓글:  조회:1032  추천:1  2021-07-01
  [정음문화칼럼172] 세멘트도 따뜻하다   권진홍 과학기술도 놀라운 속도로 발전하고, 온갖 뉴스와 정보도 폭발적으로 범람하는 가운데 신종코로나페염 전염병으로 2년 째 시달리고 있다. 잘 돌아가지 않는 머리로 복잡하고 심오한 내용들을 자꾸 접하려니 머리는 지끈거리고 삐걱거리기만 한다. 그래서 오늘은 좀 가볍고 즐거운 우리의 일상을 한번 돌아보면서 따스함이 밀려오는 장면들을 한번 담고 싶어졌다. 지난 정음글들을 총화하는 자리에서 많은 분들이 각 지역 사람들의 생활세태를 반영하는 글들도 좀 많았으면 좋겠다는 말씀들을 하셨다. 그 때는, 그리고 그후에도 내가 있는 지역 사람들은 다들 어떻게 살고 있을가 많이 다니면서 이야기해보고 들으면서 적어보는 일을 좀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나에게는 워낙 한 곳에 조용하게 앉아있는 것만이 최고의 즐거움인지라 생각은 그냥 생각으로 그쳤다. 가끔 위챗 모멘트에서 어떤 힌트를 받을 수 있지 않을가 하는 생각으로 펼쳐보기도 했었다. 그런데 모멘트를 열어보면 제일 먼저 상품광고, 그 다음은 려행사진이나 음식사진들로 도배되여있다. 더 시간을 들여 자세히 보면 뭔가라도 있으련만 또 그러한 인내심은 갖지 못하고 있다. 이 궁리 저 궁리 하던 어느 날 문득 뇌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다. 굳이 잘 모르는 다른 사람들의 생활을 들여다보느니 내가 가장 잘 알고 늘 같이 하는 우리 가족의 일상을 써보는 것이 좋지 않을가 하는 것이였다. 옛말에 “사람 사는 게 다 거기서 거기”라고 하였다. 그러니 내 일상을 들여다보는 것이 현재 우리 이 시대의 생활과 어느 정도는 비슷하지 않을가 생각한다. 물론 우리 할머니도, 어머니도 자주 “사람 사는 건 천층 만층 구만층”이라면서 각각이 다르다는 말씀들도 하셨지만 그래도 둥지이동으로부터 다시 정착에 이르는 시대적 궤적은 대동소이하리라 믿는다. 여느 가족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시골에 살았었다. 두메산골까지는 아니였다고 생각한다. 우리보다 더 골짜기에 사는 사람들도 꽤 봤으니 말이다. 봄이 시작되면 철에 맞추어 파종하고 밭에 갖가지 채소를 심었으며, 무더운 한여름에는 땡볕에 김을 매고 가을이면 가을걷이를 하고 방아를 찧어 창고를 채우며, 겨울이면 새끼도 꼬고 가마니도 짰었다. 날이 빨리 어두워지는 겨울날에는 저녁을 일찌감치 먹고 방에 앉아있거나 또는 엎드려 책을 읽곤 했는데 그 때는 저녁 7시만 되면 전기가 끊어지곤 했다. 그러면 우리는 빈 병에 초 한대를 높이 꽂아서 불을 켜고 그 주위에 오구구 모여있었다. 처음엔 서로 초불 가까이로 가려고 했지만 실제 체험으로 등잔 밑이 더 어둡다는 걸 체득한 후부터는 다들 둥그렇게 모여앉았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시절 어떻게 살았나 싶지만 사실 어려서였던지 힘들었다는 기억은 없고 매번 머리에 떠올릴 때마다 입꼬리가 올라가는 추억들이다. 물론 지금 떠올려도 가슴이 아리는 장면들이 있다. 모내기철이나 가을철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거의 온 몸이 부어있었다. 다리를 꾹 누르면 살이 깊숙이 들어갔고, 얼굴도 눈도 다 퉁퉁 부었다. 몸이 말할 수 없으리만치 괴롭고 피곤하셨을 테지만 늘 묵묵히 일하러 나가셨다. 워낙 많이 보아온 터라 지금도 눈앞에 생생하다. 가끔 눈앞으로 스쳐지날 때마다 뜨거운 것이 올라온다. 오빠가 고중에 입학하던 해의 어느 날이였다. 아버지께서는 식사를 하시면서 온 집 식구들에게 중대한 결심을 말씀하셨다. “난 너희들이 공부를 잘하기만 하면 넷 다 끝까지 공부시키기로 결심했다. 내가 우리 집안의 **대 손인데 한 세대를 20여년으로 계산해보면 우리 집안은 600년은 넘게 땅을 파먹고 살았다. 나는 내 아래세대부터는 땅을 뚜지면서 몸이 부서지도록 일해야 하는 농민으로 살지 않게 하련다. 너희들이 공부를 못하면 어쩔 수 없겠지만 잘하기만 하면 학비는 어떻게 해서라도 대줄것이다. 다만 그 뒤의 시집장가까지는 책임질 여력이 없을 것 같구나. 그건 너희들이 알아서 하거라.” 그 때는 오빠가 고중 입학, 언니는 초중 입학, 나와 동생은 아직 소학생일 때였다. 아버지의 말씀이 곧 법도인 우리 집이였기에 겨우 소학생이였지만 그 말씀은 우뢰 만큼이나 크게 다가왔고 아버지께서 꼭 그렇게 해주실 거라고 믿었으며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하는구나가 머리에 콕 박혔다. 후에 자라면서 그 시절에 농사일만 하면서 두 로동력으로 할머니를 봉양하고 자식들 넷 다 공부시킨다는 것은 참으로 하늘의 별따기 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였다는 것을 느꼈다. 더구나 아직 교육에 대해 별로 중시를 하지 않던 시기였고 주위 사람들은 다들 잘 돈 많이 벌겠다고 전국 각지로 김치장사를 나가던 시기였다. 그리고 좀 더 지나서는 중한수교가 이루어지면서 온 동네가 한국붐에 몸을 싣느라 들썩들썩할 때였다. 그래서 그 시절 우리 네 자매와 비슷한 또래의 많은 사람들은 자의 또는 타의에 의해 초중, 고중을 다녀야 할 나이에 학업이 요절당하였다. 하지만 들떠있는 세상에도, 경제적 곤궁에도 요지부동하셨던 아버지, 어머니 덕분에 우리는 정말로 시골을 벗어날 수 있었다. 시대가 격변기를 거쳐 새로운 발전단계에 들어서는 것처럼 우리 가족도 수년 동안 변화와 발전을 거듭하여왔던 것 같다. 물론 짧지 않은 세월 속에서 제각기 큰 장벽에 부딪쳐보기도 하고 시행착오를 겪기도 하면서 성장했다. 그러면서 제가끔의 터전이 생겼고 새로운 모임의 장소도 생겼다. 2012년 즈음 아버지와 어머니는 반평생 동안 땀 흘리고 정을 쏟은 고향 생활을 정리하고 아들이 있는 심천으로 가셨다. 첫 1, 2년은 생소한 생활방식에 적응하시느라, 그리고 고향에서처럼 집문만 나서면 서로 인사하고 이야기할 수 있는 말벗이 없어서 좀 힘드셨지만 이젠 심천이 세상에서 제일 살기 좋은 곳이라고 하신다. 젊은 사람들도 대도시로 이동한 후 가장 이야기 많이 하는 것이 고향에서 가족이나 친구들이 따끈따끈한 구들에 모여앉아 뜨끈뜨끈한 국물을 후루룩후루룩 마시면서 즐겁게 지내던 그 분위기가 그립다고들 한다. 아마도 시골이 그립다고 하는 데는 고향 자체보다는 그만큼 사람냄새가 그리운 것인지도 모른다. 로인들은 더더구나 그러할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 부모님께서 굳이 고향타령을 하지 않으심은 새 둥지가 진정 마음의 안식처로 자리잡혔기 때문이리라. 생활현장이 바뀌였을 뿐 그 분위기는 고향에서 현대 도시로 그대로 옮겨왔다. ‘Ctrl + X → Ctrl + V’인 셈이다. 아니 그냥 복제, 붙여넣기가 아니라 업그레이드된 복제, 붙여넣기라고 할 수 있겠다. 현대 시설들의 편리함과 생체리듬에 더 적합한 기후가 가미되였으니 말이다. 부모님이 심천에 계시니 이젠 모임의 장소가 자연 심천으로 되였다. 설명절 때마다 가능한 한 다 모여서 같이 설을 쇤다. 고향에 있을 때처럼 할아버지, 할머니 차례도 지내는데 차례 음식은 옛날보다는 간편하게 한다. 워낙 오래 유지해오던 전통이라 개구쟁이 조카들도 추석이나 설날 차례 지낼 때 만큼은 일찍 일어나고 옷도 단정하게 입고 나와서 식을 갖춘다. 어릴 때 차례 전날 아버지께서 늘 지방을 쓰시던 기억 한조각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시대가 시대인지라 지금은 절차를 많이 간소화하셨지만 그래도 아버지께서는 아주 젊은 시절부터 모셔오던 조상님을 모시는 전통을 계속 이어가고 있다. 그리고 번마다 아버지는 말씀하신다. “내 죽을 때까지만 모시고 우리가 죽으면 니들은 하지 마라…” 그래서일가… 손자손녀들도 할아버지, 할머니에 대한 존경심, 효심이 자별하다. 특히 할아버지, 할머니 사랑을 흠뻑 먹고 자란 큰 조카는 언제 어디에서나 먼저 할아버지, 할머니를 챙긴다.(우리가 자랄 때는 가장의 무게에 지지리 눌려 엄한 모습만 보이셨던 아버지께서 손자에게 만큼은 오직 할아버지로서의 사랑을 그대로 쏟으셨던 것이다.) 지난 해 년말에도 설 같이 쇠려고 우린 다 같이 모였었다. 모일 때마다 가족끼리 한잔씩 하는 게 상례였는데 고중생이 된 큰 조카놈도 가끔 맥주 한잔으로 어른들한테 끼이군 한다. 그 날도 고기구이에 한잔 기울이면서 즐거운 시간들 만긱하고 있는데 조카놈이 맥주잔을 들고 일어서더니 어른들 뺨칠 말을 한다. “할아버지, 할머니 새해에도 건강하시고 오래오래 장수하십시오. 저는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건강하게 오래 사셨으면 좋겠습니다(물론 중국어로)”. 너무도 진심에서 우러러나오는 말이었는데 언제 애가 저런 속깊은 생각을 했을가 다들 눈이 둥그래질 정도였다. 아버지, 어머니는 당연히 좋아서 입도 못 다무셨다. 그러면서도 아버지께서 한 수 뜨신다. “그래, 말만 들어도 고맙구나. 늙은이들 잔소리만 하는데 뭐가 좋겠노…” 하시면서. 그랬더니 조카가 하는 말: “아니예요. 진심이예요. 저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저의 아들을 보셨으면 좋겠습니다.”라고 하면서 4대가 같이 살기를 바란다고 한다. 예전부터 그렇게 생각해왔단다. 아직 애라고만 생각했는데 언제 저런 철이 났지 하면서 절로 엄지가 척 나갔다. 옆에서 듣는 내가 가슴이 뭉클해왔으니 우리 아버지, 어머니는 더 말해 뭐하랴. 그 날 손자의 진심 어린 말에 아버지는 몸이 좀 편찮으셔서 한동안 안 마시던 술을 몇잔 더 하셨다. 기분 좋게 마신 그 술은 아마도 해롭지 않고 오히려 보약이 되였으리라…. 그 날은 조카도 살짝 과음했는지 집에 들어서면서 “할머니, 술 마이~ 마셨어요.”를 연거푸 반복했다. 이 말은 우리말로 했다. 천천히 이야기하면 꽤 알아듣고 말도 조금씩 할 수 있고 글자도 좀 읽는다. 발음은 정확한데 어딘가 좀 어눌한 어조였다. 그런데 내 조카여서인지 그 어눌함마저도 우리의 유쾌함을 극대화시켜주는 것 같았다. 발달한 교통수단 덕분에 우린 이렇게 꽤 자주 모인다. 그러다보니 요즘은 가족들이 모이는 날이 명절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가족이란 건 참으로 이상하다. 그리고 우린 다 건망증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모일 때마다 한잔 하면서 이야기들을 나누는데 지나고 보면 거의 매번 같은 말들을 반복할 때가 많다. 그런데도 번마다 지루하지 않고 즐겁기만 하다. 술이 한순배 돌아가면 시작하는 말들이 대개는 “우리 옛날에 어릴 때 서로 강냉이 한자루 더 먹으려고 끌떡끌떡했는데…”, “오빠 형님 결혼식 때 눈은 왜 그리도 많이 내려서…”, 그 다음은 또 조카놈 이야기를 하면서 “얘는 어릴 때 침은 얼마나 질질 흘리던지…” 대개 이러루한 이야기들로 시작하면 그 뒤로는 이야기고가 터져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온다. 그러다가 주체할 수 없는 흥이 터지면 남비가 조난당하기도 한다. 아버지는 흐뭇하게 들으시다가 “아이고~~ 늙은이들은 눈치 있게 빠져줘야 젊은 사람들이 편하게 마시지~~~” 하시면서 산책을 나가시고 어머니는 옆에서 이야기를 거들기도 하고 또 “아이고, 얘들아, 술은 좀 그만들 마셔, 몸 다 상한다…” 하시면서 우리들의 건강 념려도 하신다. 우리는 현대 도시에서, 첨단과학기술과 경제발전속도를 세계적으로 과시하는 여기에서 가끔 또는 종종 현대인들을 억압하는 수자와 속도를 뒤로한 채 구들에 올방자를 틀고 앉아 마음껏 웃는다. 그리고 때로는 외로이 혼자 명절을 보내야 하는 지인이 있으면 단기 가족이 되여 같이 명절을 보내기도 한다. 그러니 이젠 도시는 시골 만큼 인정미가 없다는 말도 썩 와닿지 않는다. 생각해보면 우리 가족이 지리적 위치와 상관없이 수시로 한자리에 모이고 부빌 수 있는 것은 전에도 그러했고 지금도 그러하듯이 분명한 구심점이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고향에 있을 때는 가문의 장자이신 아버지를 중심으로 작은할아버지댁, 고모할머니댁 그리고 우리 삼촌, 고모 등 가족들이 자주 모여 웃음꽃을 피울 수 있었다. 현대 도시로 이주한 지금은 또 장자인 오빠가 바통을 이어받아 우리 네 자매가 모이고 사촌 형제들이 모이고, 진짜로 사돈에 팔촌까지 그리고 생면부지의 사람도 가끔 함께 가족이 되여 지낸다. 하나의 구심점에 원심력과 이심력이 적절성을 유지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니 구수한 흙냄새가 없는 세멘트로 둘러싸인 도심에서도 사람냄새는 여전히 전달이 되고 우리는 조카가 얘기한 것처럼 고향에서는 상상해보지 않았던 《사세동당(四世同堂)》을 감히 꿈꾸어본다. 많은 사람들이 고향이 그립다는 말을 달고 살았던 것은 고향에서 느꼈던 사람냄새, 가족적인 분위기가 그리운 것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이동초기여서 아직 새로운 곳에서의 가족적 인프라가 만들어지지 않아서가 아닐가 싶다. 원래의 고향을 떠나 새로운 곳에 보금자리를 튼 모든 사람들이 다 비슷한 생각들을 하며 비슷비슷하게 살아가는 것이라 생각한다.   인민넷 조문판 
148    한국 재벌의 경제력집중문제에 대한 론의 댓글:  조회:1010  추천:0  2021-06-07
  한국 재벌의 경제력집중문제에 대한 론의 박룡(남경대학교 정부관리학원 조교수)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로버트 루커스(Robert E. Lucas)는 한국의 경제성장을 기적이라고 평가하였다. 실제로 전쟁 이후 산업기반이 전무한 상황에서 한국은 40여년간의 고도성장으로 선진국의 행렬에 들어섰다. 이는 경제성장 초기, 권위적인 체제하에 정부의 강력한 산업정책으로 제한된 자원을 중화학공업에 투자하면서 수출주도전략으로 경제 성장을 이끌어온 것에 크게 기인한다. 이러한 놀라운 경제성장으로 한국의 모델이 많은 개발도상국의 적용대상으로 선택되였다. 세계은행에 의하면 1960년부터 2000년 사이에 선진국의 일인당 소득은 년평균 2.7% 증가하였고 발전도상국은 2.3% 성장률에 그쳤다. 하지만 한국, 중국 대만, 싱가포르, 태국 등 아시아 국가의 성장률은 년평균 4.4%로 이를 크게 상회하고 있다. 국가의 적극적인 산업정책과 수출주도형의 외향적 경제성장 전략은 모방형 추격 경제에서 아주 유효하다. 특히 한국정부는 외국자본을 들여오기 위해 정부가 직접 담보하게 되였다. 이러한 외국자본을 훌륭한 사업가나 자본가에게 저렴한 가격으로 우선 공급하면서 정부주도 재벌중심의 경제구조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1997년 동아시아 금융위기로 대량의 기업이 부도나면서 한국은 대기업중심으로 새로운 기업 구조조정이 급속하게 이루어졌다. 삼성, 현대, LG, SK 등 대기업들은 자본우위로 점차 비주력산업에 사업을 확대하였고, 기묘한 순환출자구조로 공정거래위원회의 출자제한 규제제도를 피하면서, 편법과 불법으로 기업승계와 경영을 이어왔다. 대표적으로 삼성그룹의 리재용 불법승계와 박근혜 정부와의 비리문제가 있다. 한국 재벌의 경제력집중에 대한 최고의 연구권위자 서울대학교 행장대학원 박상인 교수는 《벌거벗은 재벌님》 등 자신의 여러 대표 저서에서 이러한 문제를 심도 있게 다루었다. 한국의 재벌은 정치, 언론 등을 장악하면서 사업기회를 더 확대하였고, 중소기업의 기술을 탈취하거나 사업기회를 강탈하여 공정한 시장질서를 교란시켰다. 또한 장기간 정부와의 결탁으로 엄청난 경제력집중을 형성하고 있다. 2017년 기준 삼성그룹의 자산규모는 전체 GDP의 22.18%를 차지하며 이를 5대 재벌로 확대했을 때에는 59.59%를, 30대 재벌로 확대했을 때에는 88.01%를 차지하고 있다. 모든 대기업집단이 한국의 재벌특성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미국이나 일본과 같은 선진국에도 대기업집단이 있다. 하지만 가장 큰 차이점은 한국의 재벌은 특정 개인이나 가문이 기업집단 전체를 장악할 수 있고 불법 승계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경제력집중으로 한국의 재벌은 정치와 언론에 거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문재인정부는 정권 초기부터 소득주도형 성장전략을 펼쳤다. 그러나 4년이 지난 오늘 빈곤층의 소득은 상대적으로 더 줄어들었으며 신종코로나페염 전염병상황이 장기화되면서 빈부격차가 더 확대되였다. 오늘의 한국은 열심히 일하는 자가 제대로 성과를 받을 수 없게 되였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의 소득량극화 문제, 최근 가파른 상승세를 보여준 불패신화 부동산에 의한 불로소득 등 문제가 주요 사회현상으로 대두되고 있다. 이는 한국 경제구조에 대한 전면적인 개혁 필요성을 다시 한번 강조해준다. 친재벌정책의 유지는 한국 재벌의 경제력집중을 더욱 강화해, 혁신경제로의 리행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될 수 있다. 혁신은 불활실성하에서 이루어지기에 과거의 모방형 성장전략과 달리 더욱 공정한 시장경제와 안정적인 사회복지망을 필요로 한다. 건전한 시장경제를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사적재산권의 보호이다. 수평적 재산권 보호도 물론 중요하지만 강자가 약자의 성과를 탈취할 수 없는 수직적 재산권 보호가 더욱 중요하다. 다른 하나는 자유로운 사업진출과 퇴출 장치가 있어야 하는데 이는 재벌의 비주력산업 진출을 규제하고 자본우위에 의한 시장지배력 람용을 막아야 한다. 【박룡 략력】 흑룡강성 가목사시출신으로 2012년에 북경대학교 정부관리학원에서 공공정책학 학사학위(와세다대학교 경제학 복수학위)를 취득하였으며 2015년과 2019년에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에서 정책학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2019년부터 남경대학교 정부관리학원에서 조교수로 근무중이며 경제정책, 기업지배구조, 정책평가, 동북아거버넌스 등을 연구하고 있다. 주요 성과로Asian Survey, Public Policy Review 등 해외 저명 학술지에 다수의 론문이 게재 및 예정중에 있다. 인민넷 조문판
147    인구문제에 시달리는 동북아시아 댓글:  조회:1132  추천:0  2021-05-18
인구문제에 시달리는 동북아시아 리민(중국국제문제연구원 아시아태평양연구소) 동북아시아는 국제관계분야에서 자주 등장하는 개념이다. 공인하는 지리학적 개념이 아니다보니 동북아시아의 지리적 범위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정의를 내리기 어렵다. 하지만 동북아시아를 구성하는 핵심부분에 대해서는 보편적인 공감대가 형성되였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중국 동북지역, 로씨야 극동지역, 조선반도와 일본이다. 최근 몇십년 동안 동북아시아의 국제협력은 늘 화제거리가 되고 있다. 그만큼 이 지역의 경제성장 잠재력에 대해 기대치가 큰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실제상황을 보면 동북아시아의 발전을 저애하는 요소도 만만치 않다. 그중에서도 경제사회의 중장기발전에 중대한 영향을 줄 수 있는 인구문제가 특별히 우려를 자아내고 있다. 동북아시아 주요 국가와 지역의 인구상황을 보면 어느 한곳도 락관적이라고 할 수 없다. 저출산, 고령화, 인구류실 및 인구감소 등과 같은 문제가 이 지역에서 정도 부동하게 나타나고 있고 또 날로 두드러지고 있다. 지역별로 보면, 중국 동북지역과 로씨야 극동지역은 이상의 거의 모든 문제를 동시에 안고 있다. 고령화와 출생률 하락은 사실 중국 전반이 직면한 문제이다. 제7차 인구보편조사에 따르면 2020년 11월 기준으로 중국의 65세 이상 고령인구는 이미 전체 인구의 13.5%에 달했고 2020년 출생인구는 1157만명에 그쳐 2016년의 1786만명에 비해 엄청 줄었다. 그중에서도 동북3성의 상황이 특별히 심각한데 전면적인 인구위기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10년부터 2020년 사이 료녕성은 115만명, 길림성은 337만명, 흑룡강성은 무려 646만명이나 인구가 줄었다. 대량의 청장년인구가 경제발달지역으로 떠남에 따라 동북3성의 출생률도 전국적으로 가장 낮은 수준으로 떨어졌는데 2019년의 경우 료녕성은 6.45‰, 길림성은 6.05‰, 흑룡강성은 5.73‰로 전국 평균인 10.48‰에 크게 못 미치고 있다. 로씨야의 극동지역 역시 엄중한 인구위기에서 헤여나오지 못하고 있다. 쏘련해체 이후로 로씨야 역시 인구감소문제에 시달리고 있는데 극동지역의 인구위기는 로씨야 전반의 인구위기보다 훨씬 심각하다. 1991년 이후로 줄곧 줄어들던 로씨야인구는 2009년부터 2017년까지 8년 동안 소폭 증가세를 보이기도 했는데 극동지역의 인구는 한해도 빠짐없이 줄어들어 1991년의 810만명으로부터 2015년의 610만명으로 거의 25%나 줄었다. 2015년 이후 로씨야정부가 극동지역개발을 위해 대대적인 투자를 진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지역의 인구감소세는 지속되고 있다. 그리고 로씨야를 전체적으로 볼 때 해외 로씨야족의 류입으로 국내인구의 자연감소를 미봉하는 형태를 보이고 있지만 극동지역은 자연감소와 인구류실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 례를 들면, 2018년-2020년 로씨야의 전체 인구는 0.5% 정도 감소하여 약 1.462억명에 머물렀는데 인구의 자연감소로 122.81만명 손실보고 해외인구의 류입으로 51.72만명 보충받았다. 같은 기간 극동지역의 핵심 행정구역인 연해변강구(滨海边疆区)의 인구는 1.8%나 줄어 187.8만명에 그쳤는데 그중 자연감소로 2.4만명, 인구류실로는 1.08만명 줄었다. 일본과 한국의 고령화도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는데 급기야는 인구감소로 이어지고 있다. 2019년 10월 기준으로 일본인구는 이미 9년 련속 감소했고 65세 이상의 고령인구는 전체 인구의 28.4%나 차지한다. 한국은 지난해부터 인구가 감소하기 시작했는데 2021년 3월 기준으로 65세 이상의 인구비률이 16.6%에 이르렀다. 그나마 조선은 아직까지 인구의 자연증가를 유지하고 있다. 인구와 경제발전은 불가분적인 관계이다. 인구의 감소는 경제활력의 저하로 이어지고 경제활력이 떨어지면 인구류실과 자연감소가 더욱 심해지기 마련이다. 이는 중국 동북지역과 로씨야 극동지역에서 더욱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즉 이 지역의 경제사회발전의 상대적 락후가 인구류실을 초래하고, 청장년인구의 류실로 인해 경제성장이 더욱 어려워지는 악순환이 생긴 것이다. 이러한 악순환을 타파하려면 결국 경제사회환경의 근본적인 개선밖에 다른 출로가 없다. 동북아시아 자체가 생산요소의 자유로운 류통을 통해 더욱 경제활력이 넘치는 땅으로, 청장년인구의 취업과 육아에 유리한 땅으로 탈변해야만 인구문제가 호전될 희망이 있다. 현재 인구문제는 동북아시아 각국이 함께 대응해야 할 엄중한 사회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따라서 사회적 현안의 해결도 동북아시아 국제협력의 새로운 분야로 될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출산장려정책의 효과적인 실시, 육아에 대한 지원, 고령인구에 대한 사회적 배려 등을 에워싸고 서로 경험을 교류하고 협력을 진행해야 하는 시점이 온 것이다. 고령화, 저출산의 시대에 초점을 맞추어 관련 산업을 육성하고 새로운 국제 분업을 형성함으로써 예전에 없었던 경제성장점을 찾는 시도도 해볼 수 있다. 리민 략력 2013년에 북경대학 로씨야언어문학학부 졸업, 문학석사학위 취득. 2018년 중국사회과학원 졸업, 국제관계전공 박사학위 취득. 같은 해 7월 중국국제문제연구원에 취직해 근무. 현재 아시아태평양연구소 조리연구원. 로씨야국립 모스크바대학과 한국 서울대학 교류학습 경력 있음. 연구분야: 조선반도문제, 동북아지역 국제관계, 로씨야 아시아태평양전략 인민넷 조문판
146    소비자의 권리 보호와 법의 질서 댓글:  조회:1062  추천:0  2021-04-29
  “테슬러의 제동장치 고장났다”를 부르짖는 한 동영상이 최근 매스컴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테슬러 차종을 구매한 두 녀성소비자가 자동차회사와의 보상협상이 진전이 없자 지난 4월 19일 상해모터쇼 개막일에 테슬러전시장에 있는 자동차 우에 올라가 시위하다가 결국엔 모터쇼관리인원에 강제로 련행당하는 영상이다. 삽시간에 각종 매스컴에 전재되면서 온라인 누리군들의 뜨거운 론의와 주목을 받았으며 이에 대한 의견은 천태만상이다. 리성적으로 소비자권리를 구제받아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지만 대부분은 테슬러에 대한 비판과 비난, 심지어 중국시장에서 물러가라는 의견도 심심잖게 보인다. 이 사건과 관련하여 사건 이튿날인 4월 20일, 상해시 청포구 공안분국은 모터쇼에서 벌어진 시위를 공공질서교란으로 판단하여 시위자에게 5일간 행정구류 조치를 부과하였으며, 소비자의 권리는 합법적인 경로를 통하여 구제 받을것을 권고하였다. 사후 테슬러는 소비자들의“불합리한 청구에 대하여 절대 타협하지 않을 것”이라는 보도를 발표하였다. 같은 날 저녁, 중공중앙 정법위원회의 공식 홈페이지인 중국장안망은 론설을 펴내여 테슬러는 반드시 소비자에 대한 오만한 태도를 버리고 성실하게 소비자의 질의에 림해야 한다고 경고하였으며 자동차품질을 향상시키고 소비자의 합법적 권익을 보호할것을 요구하였다. 그 이튿날인 4월 21일, 국가시장감독관리총국은 해당 테슬러사고와 관련하여 하남성 및 상해시 지방 시장감독관리부서에 법에 따라 소비자의 합법적 권익을 보호할 것을 명령하였으며, 해당 사고의 첫 관리기관인 하남성 정주시공상관리국은 사고발생당시 주행정보기록을 공개할 것을 테슬러에 명령하였다. 이에 테슬러는 사회적 여론과 정부부처의 권고와 명령에 따라 일전의 강경한 태도를 바꾸어 소비자가 만족할 수 있는 해결방안을 강구하고 전담팀 구성까지 하였음을 재차 천명하였다. 그러면 소비자를 대하는 테슬러의 조치가 정말 문제일가? 상해모터쇼에서 거세게 항의시위를 한 소비자에 대한 상해 청포공안국의 행정구류조치가 과격했을가? 하남성 정주시공상관리국의 정보공개명령은 시의적절할가?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여러가지 생각, 각이한 립장 그리고 천태만별의 욕구를 가진 사람, 집단 그리고 지역사회로 구성되여있다. 생각, 립장 그리고 욕구의 차이는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가 획일적이지 않고 다양한 문화로 꽃피는 에덴동산으로 꾸며 가게 할 수도 있지만, 역으로 시기와 질투, 심지어 전쟁까지 서슴치 않는 암흑한 지옥사회로 이어지게 할 수도 있다. 천태만상의 사회에 내포되여있는 사람과 집단 그리고 지역사회 등 주체 사이의 관계를 조정하는 수단으로 도덕적 관습, 종교적 교의, 정치적 리념 그리고 법적 질서 등 여러가지가 있는바 복잡다양한 문화적, 종교적 그리고 정치적 사회에서 제일 효과적이고 확고하며 간편한 수단은 법적 질서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법적 질서가 기타 수단에 비하여 실질적으로 존재하는 규범으로써 강제적 성격 뿐만 아니라 보편적 적용 그리고 자치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사회에서 법의 질서는 법률, 법규와 같은 규범 그 자체의 립법 뿐만 아니라 법률규범의 실행, 준수 그리고 분쟁해결 등 네가지 요소를 모두 포함하고 있는바 한마디로 귀결한다면 법치사회의 실현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법의 질서를 구성하는 각 요소가 치륜처럼 맞물려 잘 돌아가야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 그리고 각 구성원들이 안정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다. 적법한 절차를 거쳐 제정된 법률이라면 정부 및 사법기관 뿐만 아니라 이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도 이를 엄격히 집행하여야 하는 것이 법 질서의 원칙인 것이다. 이러한 법질서의 원칙에 따라 테슬러자동차의 제동시스템 오작동사건을 다시 구성하여본다면 해당 사건은 어느 법률범주의 분쟁인지를 우선 확인하여야 하며, 그다음으로 이러한 분쟁을 다루는 법률규범은 무엇이 있는지, 그 법률규범에 따른 관련 주체의 권리와 의무는 무엇인지 그리고 절차적인 규정은 무엇인지를 확인하여야 한다. 테슬러자동차의 오작동사건은 우선 자동차 품질과 관련된 자동차회사와 소비자 사이의 민사분쟁이므로 당사자의 권리, 의무 및 책임 등은 을 총체적으로 적용함과 동시에 품질과 소비자권익보호 관련 법률인 과 등 경제법률의 적용을 받는다. 특히 과 은 제품 생산자 및 판매자의 품질보증책임 뿐만 아니라 소비자권익보호협회와 시장감독관리부서의 소비자권익보호를 위한 감독과 관리 그리고 분쟁해결을 위한 절차적인 규정을 두고 있다. 례를 들면 제39조는 소비자권익과 관련된 분쟁은 경영자와 화해, 소비자협회 또는 기타 조직의 조정신청, 관련 행정부서에 대한 신고, 중재 그리고 소송 등 5가지 경로를 통하여 해결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상술한 5가지 경로는 필수적인 단계별 절차가 아닌 선택적 절차로서 충분한 증거가 있다면 소비자는 직접 소송의 경로를 취할 수 있으나 우리 나라 법률이 보장하고 있는 해결경로는 우의 5가지 밖에 없으며 기타 방법은 법률의 지지를 받지 못한다고 할 수 있다. 테슬러자동차 제동시스템 오작동사건과 관련하여 볼 경우 피해를 주장하는 소비자는 테슬러회사와의 화해를 시도해보았으나 만족스러운 답변을 받지 못하였고 하남성 정주시 소비자협회 및 공상관리국에 신고를 하였으나 역시 이루고자 하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자 상술한 5가지 경로외인 공공장소에서 ‘항의시위’를 벌였으며 또한 전시중의 테슬러자동차에 대하여 가해행위를 한 것이다. 이러한 행위는 제23조 제2항에 규정한 “역전, 항구, 부두, 공항, 쇼핑몰, 공원, 전시관 또는 기타 공공장소의 질서를 교란하는 행위”에 해당하므로 행정구류의 처벌을 받게 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상해시 청포구공안국의 행정처벌조치는 적법하고 적절한 조치로 보여진다. 문제는 해당 사건과 관련된 부문의 조치이다. 피해를 주장하는 소비자의 행위가 위법임을 알면서도 ‘항의시위’를 할 때까지 적극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다가 메스컴에 알려지고 상급 기관에서 명령을 내리자 ‘정보공개명령’과 같이 법적으로 불확실한 행정명령을 취하는 늑장행정조치이다. 그렇다고 테슬러회사의 조치에 완전 수긍하는 것은 아니다. 테슬러회사의 립장에서는 성실하게 소비자와 협상에 림하여야 하나 협상이 결렬될 경우 더 이상 소비자를 위하여 적극적인 조치를 취할 법적 의무는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협상의 결렬은 소비자와 경영자 사이의 분쟁형성을 의미하며, 분쟁형성은 조정, 중재 또는 소송과 같은 법적분쟁해결시스템의 작동을 의미하므로 분쟁당사자인 테슬러회사는 보호적인 조치를 취하는 것이 당사자의 리익에 부합되기 때문이다. 자동차 제동시스템 오작동 관련 사건에 관한 진상은 담당 행정기관 또는 사법기관의 조사에서 해명되여야 하며, 테슬러회사는 이에 적극적으로 림하여야 할 의무가 있다. 문제는 소비자의 정서를 고려하지 않은 외국 경영자의 대응방침이다. 법적인 문제를 IQ라고 본다면 테슬러는 정서적인 문제인 EQ가 극도로 빈약하다고 볼 수 있다. 모쪼록 테슬러자동차 제동시스템 관련 분쟁이 법적으로 원만히 해결되여 소비자와 테슬러회사의 윈윈 뿐만 아니라 법의 질서를 새롭게 정비하는 계기가 되였으면 하는 바람이다. (화동리공대학교 법학원 임호 부교수, 법학박사, 변호사 및 중재인) 인민넷 조문판
145    소띠해, 소의 기상을 말하다 댓글:  조회:1194  추천:0  2021-03-05
소띠해, 소의 기상을 말하다 전월매 천진사범대학교 음메~음메~ 올해 2021년은 신축년 소띠해이다. 60년만에 돌아온 신축년은 흰 소띠해라 한다. 중국 동한 때 처음으로 열개의 천간과 12개의 지지를 묶어 년도를 표시했는데 그 기준으로 소띠는 ‘축(丑)’이란 글자를 활용했고 이 때부터 신축년이란 표현에 소띠해로 부르게 되였다 한다. 십이지중 두번째 순위인 동물 소, 력사와 문학 속에서 소가 지니는 의미는 무엇일가? 소는 근면과 순박과 우직한 힘의 상징이다. 고대 농경사회에서 힘이 센 소는 인간의 생산활동에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로동력이였다. 소는 쟁기를 끌어 밭을 갈고 수레를 끌어 짐과 사람을 날랐다… 사람들은 농사일과 일상생활에서 소에 의지하는 부분이 굉장히 많았기에 소를 가족과 같은 소중한 존재로 여겼다. “소는 농가의 조상이다”, “애비 없이는 살아도 소 없이는 못 산다”는 소의 중요성을 나타내는 말들이고 “소 팔아 공부시킨다”, “바늘도둑이 소도둑이 된다”는 당시 전 재산에 해당될 만큼의 소의 가치를 간접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소같이 일해라”, “소같이 벌어서 쥐같이 먹어라”는 비록 느리지만 잔꾀를 부릴 줄 모르고 근면하고 우직하며 꾸준한 소를 따라배우라는 교훈적인 말들이다. 유일한 재산으로서의 소를 둘러싸고 이야기가 전개되는 문학작품으로는 한국의 극작가 유치진의 희곡 (1934)를 들 수 있다. 작품은 1930년대 한국 농촌을 무대로 하고 있다. 소작농 국서(局瑞)의 가족은 소 한마리가 유일한 재산이다. 이것을 몰래 팔아서 한몫 장만하려 드는 둘째아들, 소를 저당잡혀서 서울로 팔려갈 처지에 놓인 이웃집 처녀를 구하고 나아가 그 처녀에게 장가들고 싶어하는 큰아들, 끝내는 밀린 소작료의 대가로 소를 몰아내려 드는 마름과의 옥신각신이 우습강스러운 장면을 연출하고 있다. 그러나 끝내는 이 집안 그리고 마을 전체의 비극으로 끝나는 이 작품은 작가의 현실 고발과 연극적 재치가 균형을 잘 이루고 있다. 유치진은 이 극으로 인하여 일제경찰에 구속당하는 어려움을 겪었다. 소는 평안함과 여유로움, 풍요와 복의 상징이다. 그림에서 소를 타고 자연 속에서 자유롭게 노닐거나 피리 부는 목동을 태우고 한가로이 거니는 모습은 세속을 벗어난 여유로움을 느끼게 한다. 한국 한시 이색의 , 성현의 에서 소를 기르고 소를 타는 이러한 행위들은 시적화자인 시인들이 명예와 리익을 추구하는 것과는 먼 것으로, 그러한 주변의 공간은 평안함과 여유로움의 공간으로, 언젠가는 돌아올 유토피아공간으로 그려져있다. 여기에서 소는 명리의 경계 밖에 있는 구속없는 여유로움의 존재이다. 조선 중기 이후로는 누운 소 그림이 전해지고 있는데 편안히 누운 소 모양의 땅은 풍수지리상 명당으로 여겨질 만큼 복을 상징한다고 한다. 마음의 평안함과 여유로움, 중국작가 위화의 소설 에서도 하이라이트를 장식하는 에필로그에서 늙은 소가 된 주인공 복귀(福貴)를 통해서 이를 말해주고 있다. 주인공 복귀는 격랑의 중국 근현대사의 흐름 속에서 가족을 모두 저 세상으로 떠나보내고 늙은 소와 달랑 남는다. 도살장에 끌려가 인간들에게 고기덩어리가 될 번한 소를, 게다가 농사짓기에는 너무 늙어 별로 쓸모없는 소를 사서 자기와 합일화하는 로인의 자존과 생명 사랑에는 인간의 위대함과 여유로움이 느껴진다. 늙은 소가 된 사나이, 이는 모진 세월의 풍상을 딛고 난 한 인간이 삶을 바라보는 평안함과 여유로움의 자세이다. 마음의 여유로움이야말로 인간이 지향하는 유토피아가 아닐가? 여기에서 복귀, 복이 있고 귀하다는 주인공과 동일한 이름을 가진 소는 그의 분신과 다름없다. 소는 제물과 희생, 상서로움, 깨달음의 상징이다. 소는 전통적인 농경사회에서 로동력의 원천이였을 뿐만 아니라 제사의 주요 제물로 쓰이기도 했다. 조선 왕실 제사에서 소는 특히 귀한 제물로 여겨져 종묘제와 사직제 등 가장 중요한 국가제례에만 사용해왔다. 제기도 소 머리와 발굽 모양으로 만들어 거기에 삶은 소고기를 담아 제례 장소까지 가져갔다. 중국의 에는 “무릇 종묘에 제사 지내는 소를 일원대무(一元大武)라고 불렀다”고 적혀있다. 일원에서 원(元)은 머리를 가리키고 대무(大武)는 소를 지칭한다. 희생(犧牲)이란 한자도 ‘소(牛)’에서 유래한 것이다. 중국어에는 근면하고 인민을 위해 헌신적으로 봉사하는 사람을 비유하여 유자우(孺子牛)라 하고 모든 고난을 딛고 일어서는 사람을 황무지를 개척하는 것에 비유하여 척황우(拓荒牛)라 하며 고생과 괴로움을 참고 견디며 꾸준히 일하는 사람을 비유하여 로황우(老黃牛)라 한다. 이들은 자신의 근면과 희생으로 사회에 밝은 빛을 가져다준 영웅들이다. 제물로서의 소는 신성함을 지녔기에 불교와도 인연이 깊다. 석가모니 부처의 태자 때 이름은 ‘고타마 싯다르다’이다. ‘고타마’의 뜻은 ‘가장 좋은 소’, ‘거룩한 소’란 의미이다. ‘자색 바위가에/ 손에 잡은 암소 놓고/ 나를 아니 부끄러워한다면/ 꽃을 꺾어 바치오리다’. 이는 신라시기 향가로서 견우로옹(牽牛老翁)의 이다. 이 노래에 대한 론쟁은 퍼그나 흥미롭지만 이를 제쳐두고 비약적 해석이라고 할 수 있는 암소에 대한 해석은 이렇다. 로옹이 끌고 가는 암소를 “곡신(谷神)은 죽지 않으니 이를 일러 현빈(玄牝: 검은 암소)이라 한다”고 하는 도덕경의 말을 인용하여 ‘검은 암소’를 다루는 로옹은 예사 늙은이가 아니고 신선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한국 선시(禪詩) 에 등장하는 검은 소, 흑우(黑牛)도 선 수행 정진의 과정에 있는 소로, 고삐가 사람에게 쥐여져있는 아직 길들여지지 않은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와 반면 선시 , 에는 고난의 선(禪) 수행의 과정을 거쳐 오도(悟道)환원의 상징으로서의 흰소, 백우(白牛)를 다루고 있다. 아직 길들여지지 않은 흑우가 점차 길들여져 그 자태를 벗고 백우의 모습으로 환원되는데 이 때의 백우는 이미 수행을 끝내고 묘체를 얻어 자유자재의 경지에 도달함을 보여준다. 십이지 가운데서 근면과 우직함과 상서로움과 깨달음을 상징하는 동물 소, 특히 신성한 기운이 우기충천(牛氣沖天)하는 올해 흰 소띠해에는 우보(牛步)의 느리지만 성실하고 확실한 느린 걸음이라도 깨달음을 얻어 뚜벅뚜벅, 묵묵히 가다보면 코로나시대의 모든 고난과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으리라 믿는다. 2021.2.22 인민넷 조문판
144    중국 첫 《민법전》 실행의 의미 댓글:  조회:1072  추천:0  2021-02-26
중국 첫 《민법전》 실행의 의미 임호(화동리공대학)     2021년 1월 1일부터 실행되는 《중화인민공화국민법전》에 대하여 법조계는 물론 사회 각 계층에서 ‘새로운’ 법률에 대한 학습과 토론의 열기가 뜨겁다. 《민법전》 제정에 참여하였던 전문가뿐만 아니라 민법분야에 일가견이 있다고 자칭하는 민법교수, 그리고 심지어 타분야 법학교수들까지도 《민법전》 강독과 대국민 홍보에 앞장서고 있어서 2020년은 ‘ 의 해(民法之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싶다. 사실 중국 립법기관인 전국인민대표대회가 매년 심의 통과 또는 수정 변경하는 법률수는 십여 건에 달하지만 2020년 5월 28일에 통과된 《민법전》에 부여되는 의미는 우리 나라 언론매체에서 대서특필되고 있다. 수많은 법률중에 하필이면 《민법전》일가 하는 의문이 많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여 《민법전》에 대한 리해차원에서 아래와 같이 필자의 소견을 적어본다.   중국에서 법률은 헌법과 관련법, 민법, 상법, 경제법, 행정법, 형법, 사회법 그리고 소송법과 비소송절차법 등 7가지 분류로 나뉘는바, 민법은 그중 우리의 일상생활과 제일 밀접한 련관이 있는 법률이다. 즉 사회의 일원으로서 자연인의 인신권, 재산권, 인격권 등 권리뿐만 아니라 사회의 기타 주체와 발생한 관계, 즉 의식주행중 필요한 권리와 의무, 그리고 의무 위반에 대한 책임을 규정한 기본 법률규범이다.   그럼 이렇게 우리 생활과 밀접한 《민법전》이 왜 2020년에 이르러서야 제정되였을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사실 《민법전》에 대한 제정작업은 1954년부터 론의되였으나 법제정에 필요한 사회적 환경의 결여로 2014 년 11월에 이르러서야 정식으로 중공중앙 제18기 제4 차 전원회의에서 결의되였다. 그렇다고 중화인민공화국 창건 70년 동안 민법의 공백상태는 아니였다. 특히 개혁개방과 더불어 1980년 《혼인법》을 첫 시작으로 《상속법》, 《민법통칙》, 《입양법》, 《계약법》, 《담보법》, 《물권법》, 《권리침해책임법》 그리고 《민법총칙》 등 법률을 차례로 제정 실행하였는바, 2020년 《민법전》은 이러한 민법의 각 분야의 규정을 하나의 법률로 통합한 결과이다. 물론 사회, 경제, 문화의 발전과 변화의 수요를 추가로 반영하여 리혼전의 30일 랭정기간, 개인프라이버시보호를 규정한 인격권 등 내용을 신설하였지만, 반면 기타의 내용은 기존의 법률을 대다수 수용하였다고 볼 수 있다. 한마디로 귀결한다면 《민법전》은 새로운 법이 아니라 기존에 흩어져있던 민사법률을 하나로 모아놓은 법률의 집합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민법전》의 실행이 가지고 있는 의미는 사뭇 중요한바 크게 국가적 차원 그리고 개인적 차원에서 살펴볼 수 있다.   첫째, 국가적 차원에서 《민법전》은 중국특색사회주의법률체계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1) 《민법전》은 기본법률로서 우리 사회의 근간인 법률제도를 굳건히 할 뿐만 아니라, 예측 가능한 신용사회의 구성의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 (2) 《민법전》의 실행은 법치국가 건설의 보장으로서 법에 근거한 전면적 국가관리, 그리고 사회주의 시장경제 및 기본경제제도의 발전과 추진을 보장한다. (3) 《민법전》의 실행은 중국 인권사업 발전의 강력한 추진제로서 인민의 권리 수호를 중심으로 하는 현대화된 국가 관리체계의 형성과 관리능력의 향상에 중대한 의의가 있다.   둘째, 개인적 차원에서 《민법전》의 실행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1) 국가와 정부로부터 개인이 누려야 할 권리를 보장받게 된다. 례를 들면 주택건설용지 사용권 70년 기한만료후의 부동산권리와 관련하여 《민법전》 제359조는 자동으로 연기된다고 규정하였다. 물론 기간연장 관련 비용의 납부 또는 감면에 대하여서는 추후 법률로 규정한다고 되여있다. (2) 기타 민사행위 주체와의 거래에 있어서 예측 가능한 법률규범을 제시하고 있다. 례를 들면 《민법전》의 ‘계약’부분은 자연인, 개체공상업자, 그리고 회사 등과 같은 법인들이 상호거래과정에서 권리와 의무, 그리고 짊어져야 할 책임의 내용을 제시하고 있는바 《민법전》을 근거로 예측가능하고 안전한 거래를 진행할 수 있는 보장이기도 하다. 례를 들면 《민법전》 제680조 제1항에 따르면 “고리대금을 금지하며, 차관 리자는 국가의 관련 규정을 위반하여서는 아니된다”고 규정함으로써 개인 또는 법인이 불법적인 고리대금 ‘족쇄’로부터 보호를 강조하고 있다. (3) 리행하여야 할 의무, 그리고 의무의 불리행 또는 위반, 그리고 타인의 권리 침해로 인하여 짊어져야 할 책임을 명시하고 있다. 《민법전》은 특히 환경파괴로 인한 책임을 명시하고 있는바 제1232조는 발생한 환경피해에 대한 일반적인 배상책임뿐만 아니라 국가 규정을 위반하여 초래된 심각한 환경피해에 대한 징벌적 배상책임도 규정하고 있으므로 이에 대한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민법전》의 제정 및 실행은 중국법제사에서 한획을 긋는 중대한 사안이며, 민생우선, 인권보호, 그리고 법치주의를 주창하는 국가와 정부의 의지를 재확인하는 중요한 조치이다. 이는 또한 사회주의특색이 있는 정치, 경제, 문화의 발전방향에 대한 중국공산당의 지도리념에 대한 확신이라고 볼 수 있다. 이제 남은 것은 《민법전》의 정확하고 효과적인 실행을 위한 사법제도의 개선과 일반시민의 준법의식의 향상이라고 할 수 있겠는바 물질적 수준의 향상에 따른 시민의 정신적 그리고 문화적 수준의 향상에 대한 기대를 해봐야 할 시점인 것 같다.   저자: 임호(任虎),길림성 룡정시 태생, 법학박사, 현 화동리공대학 법학원 부교수, 변호사 및 중재인.   래원: 인민넷-조문판
143    신시대 조선족향촌문화건설의 키워드 댓글:  조회:1066  추천:0  2021-02-18
신시대 조선족향촌문화건설의 키워드 허명철(연변대학 미래연구소 소장) 2021년 중앙1호문건에서는 사회주의정신문명건설을 강화하고 "문명한 향풍, 량호한 가풍, 순박한 민풍(文明乡风,良好家风,淳朴民风)"의 형성을 추진해야 한다고 지적하였다. 그렇다면 우리는 신시대 조선족향촌문화를 건설함에 있어서 무엇을 핵심키워드로 선정할 것인가. 이는 우리가 국가차원의 향촌문화진흥전략에 보조를 맞춰가면서 조선족향촌문화의 비약적인 발전을 도모하는 데 있어서 자못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된다. 신시대 조선족향촌문화건설에 있어서 우선시되여야 할 키워드는 이 땅에 정착하면서 창조되고 전승되여온 자체민족의 전통문화를 꼽을 수 있다. 마을공동체에 있어서 전통문화는 촌민들의 일상생활과 생산활동을 규범하고 공동체성원을 결속시키며 공동체내부사회 질서를 구축하는 데 있어서 대체불가의 중요한 기능을 발휘하고 있다. 새농촌건설, 아름다운 향촌건설, 향촌진흥전략 등 날로 업그레이드되고 있는 정책적 환경 속에서 현대향촌문화건설에 박차를 가함에 있어서 1차적으로 집단기억을 구축하고 정체성을 각인시키며 문화자신감을 심어주는 민족전통문화를 키워드로 설정하는 것은 나름대로의 합리성을 지니고 있다고 보아진다. 또한 이러한 연고로 현재 조선족사회에서도 잊혀져있고 단절되여있던 민족전통문화를 발굴 정리하고 문화전승기지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 특색마을건설, 그리고 다양한 급별의 무형문화재신청이 하나의 붐을 일으키고 있다. 따라서 민족전통문화를 키워드로 하는 조선족향촌문화건설은 민족공동체를 유지해나가고 민족정체성을 지켜간다는 의미에서 뿐만 아니라 경제적 부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향촌문화산업개발 차원에서 놓고 보아도 나름대로 매우 유익한 작업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도시와 농촌의 련결망 속에서 인구이동과 문화적응 등을 통해 전통과 현대의 단절이라는 곬을 메워가면서 문화적으로 페쇄가 아닌 열림을 지향해가고 있는 조선족향촌의 또 다른 모습에 비추어볼 때 현대성이라는 키워드를 설정하는 것도 바람직한 것 같다. 사실상 오늘날 향촌에 거주하고 있는 조선족촌민들의 일상생활은 도시와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상당히 현대적이다. 부뚜막에 내려가 땔나무를 지펴서 밥을 짓고 구들을 덥히던 과거와는 달리 집집이 전기장판이나 난방보이라를 사용하고 있고 도시인들처럼 주방에 전기밥솥이나 가스레인지가 기본으로 갖춰져있다. 뿐만 아니라 농업현대화의 혜택으로 힘든 육체로동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지어 1년에 평균 10개월은 한가한 여가생활을 보내기도 한다. 반면 일상적인 물질생활에서 현대성을 과시하고 있는 촌민들에게 있어서 가장 심하게 느껴지는 갈증과 소망은 도시인들처럼 현대문화시설을 활용하는 문화생활이 아닌가 싶다. 촌민들의 현대적인 문화생활에 대한 갈증을 해소시켜줄 수 있는 실효적인 경로가 바로 현대성 요소들이 반영되는 신시대 향촌문화건설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향촌문화구축에 있어서 현대성을 키워드로 선정해야만 하는 당위성은 오늘날 조선족농촌마을의 구조변동이 잘 대변해주고 있다. 초기 조선족마을공동체는 대체적으로 혈연(血缘), 인연(姻缘),지연(地缘)으로 맺어진 친인척이나 이웃들로 구성되었고 절대다수 로동인구가 농사일에 종사해오면서 상대적인 안정을 유지해왔다. 그러나 오늘날 조선족마을의 사회구조는 농사일에 종사하는 촌민들, 경작지를 양도하고 양로하는 촌민들, 간부로 임명되여 주재하고 있는 도시인, 그리고 마을의 경작지를 도급 맡고 농사짓는 외래인구, 전자상거래 등 비농업에 종사하는 농민 아닌 농민 등 다양한 신분소유자들에 의해 구축되여있다. 뿐만 아니라 이미 시장경쟁에 물들고 시장의식을 키워온 현대판 조선족농민들은 도시인 못지않게 일상생활에서 현대성을 보여주고 있다. 농촌 하면 우선 떠오르는 것이 순박하고 진정성이 돋보이는 인정, 협동적이고 상부상조하는 공동체문화라고 한다면 시장경제는 공과 사가 분명하고 인정사정 없는 랭혹한 적자생존의 정글법칙을 련상시킨다. 농업을 하나의 경영항목으로 간주하고 토지와 농산물을 자본 또는 상품으로 여기는 농민이라면 자연히 시장경제의 룰(법칙)을 지켜야 할 것이고 이러한 룰이 점차적으로 몸에 배이게 되면서 일상에서 기존과는 다른 생활방식이나 행위방식을 보여주게 된다. 그러므로 현시대 조선족향촌문화건설에 있어서 우리는 변모해가고 있는 향촌사회구조화에 초점을 맞추어 촌민들의 일상생활에서 이미 익숙해지고 습관화되여있는 현대성 요소를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조선족향촌문화건설에 있어서 홍색문화를 또 하나의 키워드로 설정해야 하는 중요성이 제기된다. 우리는 하경지선생이 남긴 "산마다 진달래, 마을마다 기념비"라는 문구를 자주 사용하며 또 이 문구가 전달하는 메시지에 대해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이 땅을 지키기 위해 피 흘린 선조들로 우리는 민족적 긍지와 자호감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한편 달리 생각해보면 마을마다 세워져있는 기념비는 우리들이 지금껏 영위해왔던 향촌문화 내면에 민속을 징표로 하는 민족문화유전자만이 아닌 홍색문화유전자도 있음을 시사해준다. 즉 이주시기와 혁명전쟁 년대를 경유해오면서 우리민족이 구축 및 전승해왔던 향촌공동체문화는 민족문화와 홍색문화라는 두개의 축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아울러 이 두개의 유전자가 조선족문화의 중추를 이루고 있기에 우리는 오늘날까지 민족적인 ‘소전통’과 국가적인 ‘대전통’을 아우르면서 우리만의 문화를 창출해낼 수 있지 않았을가 싶다. 따라서 우리는 신시대 조선족향촌문화를 건설함에 있어서 그동안 망각되여왔던 홍색문화유전자를 되살리고 이를 하나의 키워드로 설정하여 조선족향촌문화뿐만 아니라 나아가 전반 조선족문화를 재조명해볼 필요가 있다. 결론적으로 놓고 본다면 새농촌건설과 향촌문화진흥에 동참하고 신시대 조선족향촌문화를 건설해가려면 민족, 현대, 홍색 이 세개의 키워드를 핵심으로 기본축을 형성해야 한다. 그리고 조선족문화를 재조명함에 있어서도 조선족공동체라는 경계를 넘어서 사회주의문화건설과 중화민족문화부흥, 나아가 인류문명공동체라는 넓은 플랫폼에서 조선족문화의 존재적 가치와 전승의 의의를 해석해야 한다. 이렇게 되여야 만이 현재 무형문화재로 등록되여있는 조선족문화도 그 빛을 발할 수 있고 인류문화재라는 높은 차원에서 전승될 수 있으며 진정으로 중화민족공동체의식구축과 인류문명에 기여할 수 도 있다고 보아진다. 인민넷 조문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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