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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음문화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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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포스트코로나시대, 디지털격차에 류의하라! 댓글:  조회:364  추천:0  2021-04-26
포스트코로나시대, 디지털격차에 류의하라!  인천대학교 김부용   완연한 봄날씨에 뜨거운 볕이 느껴지는 걸 보니 봄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 원래 기다린 것은 잡으면 가고 오면 짧다고 했던가. 봄이 짧게 느껴지는 건 너무 기다렸기 때문이리라. 얼마나 기다렸게 손에 닿자 가는가. 문득 리홍주 시인의 시구가 떠오른다. 신종코로나페염으로 많은 것이 바뀌였지만 올해도 봄은 어김없이 우리 곁을 찾아와주었다. 돌이켜보니 지난해부터 신종코로나페염으로 일상이 참 많이도 바뀌였다. 이젠 마스크를 안 쓰면 허전할 정도로 마스크를 쓰는 것이 더 익숙한 일이 되였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며 인간관계를 중요시하더니, 이제는 옷깃 스치는 인연이 무서워 서로 에돌아가는 시대가 되였다. 입을 막고 말을 숨기고, 코를 막고 눈을 피하는 시대, 혼밥이 편한 시대, 태여나서 처음 겪는 상황이다. 교내 풍경도 많이 바뀌였다. 개강으로 활기차야 할 봄학기, 웃고 떠드는 학생들의 모습은 보기 드문 풍경이 되였다. 새내기들은 OT도 MT도 못가 대학생활이 실감이 안난다고 한다. 마지막 학기를 다니는 재학생들도 안쓰럽긴 마찬가지다. 마지막 학기인데 교내에서 좋은 추억도 많이 남기지 못하고, 졸업식에도 대표들 외엔 참석하지 못하니 말이다. 그래도 학생들의 적응력이 나보다는 월등히 좋은 것 같아 다행이다. 나야말로 코로나 블루(코로나우울증)에서 아직까지도 허우적대고 있는데 학생들은 공부도 운동도 열심히 하고, 취미생활을 찾아 스트레스도 잘 해소하는 듯하다. 지난해 학부의 전통인 ‘동북아 통상인의 밤’ 행사도 못하는 게 아닌가 싶었는데, ‘온라인 통상인의 밤’이라는 새로운 모습으로 단장했다. 콘텐츠도 브이로그, 보이스 드라마, 복면가왕 등으로 흥미롭고 알차다. 그렇다. 이제는 언택트시대를 넘어 온택트시대다. 온라인강의, 온라인세미나, 온라인재택근무… 수많은 온라인활동은 이제 신종코로나페염이 설령 종식된다 해도 새로운 문화와 트렌드로 자리매김할 것이다. 환경이 급격하게 바뀌는 시대에 사는 현대인은 신종코로나페염이 가도 새로운 바이러스에 몇년에 한 번씩 로출된다고 한다. 이래저래 포스트코로나시대는 기존의 판이 완전히 바뀌는 게임이라 볼 수 있으며 그래서 누구에게는 기회로, 누구에게는 위협으로 다가오게 될 것이다. 포스트코로나시대는 규모보다는 디지털로 승부하는 시대다. 의류매장이나 화장품매장을 례로 들어보자. 과거에는 의류와 화장품을 사기 위해 주로 직접 매장을 방문했으며 규모가 큰 매장이 경쟁력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스태프들이 많고 손님도 바글바글한 매장은 사람들이 신종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불안해할 수 있다. 이에 반해 매장의 규모가 작아도, 심지어 매장이 없어도 라이브방송을 통해 제품을 잘 어필하고 고객들과 잘 소통하는 업체가 성공할 수 있는 시대가 온 것이다. 다시 말해 앞으로는 새로운 법칙에 의한 새로운 비즈니스방식, 나아가 새로운 직업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이 같은 포스트코로나디지털시대에 우리는 디지털격차에 류의해야 한다. 디지털격차란 디지털이 보편화되면서 이를 제대로 활용하는 계층은 지식이 늘어나고 소득도 증가하는 반면, 디지털을 제대로 리용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발전이 더뎌 계층간 격차가 커지는 것을 의미한다. 새로운 기술의 발전은 일반적으로 인간의 삶을 풍요롭고 편리하게 하지만, 새로운 기술은 대체로 가격이 비싸거나 다루기가 복잡하기 때문에 지식과 재산을 가진 계층이 보다 접근하기 쉽다. 나아가 디지털격차는 단순히 정보의 격차에만 한정되지 않고 인식과 생각의 격차, 문화의 격차로 확대될 수 있다.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디지털격차는 나이와 세대, 재산에 따른 격차라고만 볼 수 없으며, 같은 세대와 같은 재산층 사이에서도 충분히 벌어질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포스트코로나디지털시대에 나는 어떻게 적응해야 할가? 변화를 마주하는 것, 용기가 필요한 일이고 오로지 내 스스로의 몫이 아닌가 싶다. 인민넷 조문판
5    근대천진과 조선인 항일운동(전월매) 댓글:  조회:726  추천:0  2019-04-08
2019년 올해는 중화인민공화국 창립 70주년을 맞는 해이다. 한국의 경우 올해는 3.1운동 및 대한민국림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는 해이다. 새중국창립 이후 중국은 개혁개방 40년을 거치면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어 세계가 주목하는 G2 강대국으로 급부상하였고 한국은 광복 이후 70년대 산업화를 거치면서 한강의 기적으로 놀랄만한 경제적 성장을 이루었다. 우리는 현시점에서 력사를 거슬러 오늘날의 새중국의 창립과 조선반도의 독립을 위해, 그리고 평화로운 시대를 열어가기 위해 피 흘려 싸워온 투사들을 되새기며 그들의 발자취들을 더듬어볼 필요가 있다.  근대에 들어서면서 조선은 일제의 침략을 받았고 1910년 일제에게 국토와 주권을 강점당하여 식민지지배를 받게 되였다. 그러면서 수많은 조선인들의 중국이주는 독립투쟁을 목적으로 한 정치망명으로 이루어졌다. 동북3성을 비롯하여 상해, 북경, 광주 등 주요도시에 조선의 항일지사들이 모여들고 독립운동단체들이 결성되였는데 천진지역도 독립운동하기 좋은 장소로 지목되였다. 그 원인은 천진이 북방의 중요한 도시로서 동북과 상해의 철도, 도로, 수로교통이 련결되여있어 편리했으며 북경과 거리가 가까워 중국의 고층인사들과 소통하기 편리하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외국 조계지가 많아 일본의 세력이 상대적으로 약했으며 일본세력의 추종을 피하기 용이하였기 때문이다. 우선, 천진지역에는 1919년 불변단(不變團)을 시작으로 여러 조선인 조직단체들이 활발히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이 불변단과 의렬단(義烈團)이다. 불변단은 천진프랑스조계지에서 박룡태(朴龍太)를 중심으로 설립되였으며 대한민국림시정부의 지도하에서 은행을 습격하고 군자금을 조달하는 등 독립운동에 박차를 가하였으나 독립사업이 잘 진행되지 못하였다. 박룡태는 1917년 8월 천진으로 이주해 남개학교 조선인기숙사 사감으로 있으며 불변단, 한민회와 같은 독립운동단체에 가담해 천진지역의 독립운동을 이끌었다. 명제세(明濟世)는 1910년에서 1912년 사이 천진지역으로 이주하여 무역상으로 생활하며 불변단의 결성에 간여하고 조직개편 후에는 부단장을 맡는 등 천진지역의 대표 독립운동가로 활약하였고 중국 항일운동에도 적극 협조하였다. 의렬단은 1911년 11월, 김원봉(金元鳳) 등 조선독립운동지사들이 길림시에서 암살과 파괴를 목적으로 한 반일비밀무장단체였다. 의렬단은 천진이 항일투쟁을 하기 좋은 유리한 지리적 조건임을 파악하고 1921년 활동중심지를 천진으로 옮겼다. 20년대에 많은 항일지사들이 천진의 의렬단에 가입하였는데 대표적으로 류자명(柳子明), 라석주(罗锡铸), 류종현(柳宗铉), 리우민(李愚民), 류석현(柳锡铉) 등 지사들이다.  한국에서 상영한 영화 (2015)과 (2016)은 의렬단의 진실한 력사사실을 소재로 삼은 것이다. 2016년에 상영된 영화 은 세계일보 김동진 기자가 쓴 책 (2010년)을 토대로 '황옥 경부 폭탄 사건'을 중심 모티브로 삼은 것이다. 영화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의거는 천진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으며 천진에서 의렬단에 가입한 류석현은 3인 주인공중의 한 인물이다. '황옥사건(黃鈺事件)'에서 주요인물은 실제로 의렬단 단원 김시현(金始显)이다. 거사를 추진해나가는 과정에 일경경찰 황옥이 참여하게 되면서 '황옥사건'으로 불리게 되였다. 1922년 하반년부터 의렬단은 조선총독부를 포함한 주요통치시설을 파괴하는 계획과 총독 및 기타 요원들을 암살하는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들어갔다. 1923년, 일경신분의 황옥이 서울에서 천진으로 들어와 류석현의 소개로 의렬단 단장 김원봉을 만났다. 김원봉은 천진프랑스조계지 여남리(汝南里) 12호에 거주하고 있었다. 황옥이 천진에 온 목적은 자신의 일경신분을 리용하여 폭탄을 조선으로 가져가기 위함이였는데 그는 일찌기 김시현의 설복으로 의렬단 단원이 되였던 것이다. 김시현, 황옥, 류석현 등 의렬단원들은 김원봉으로부터 받은 36매의 고성능 폭탄과 5대의 권총을 안동(현 단동)을 거쳐 조선으로 운반하였다. 그러나 이 비밀이 일경에게 탄로나 몇개월간 고심한 거사는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었고 3명을 포함한 18명의 의렬단원들은 모두 체포되였다. 황옥사건이 실패한 원인은 아직도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의렬단은 천진에서 '라석주 의거'도 기획하였는데 류자명과 리우민은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참여하였다. 1926년 12월, 천진에서 중국군대 장교로 일하던 라석주는 서울 시내 중심가에 있던 식산은행에 폭탄을 투척하여 일본인들을 죽였고 동양척식주식회사에도 투척하였으나 불발하여 조선철도회사에 가서 일본인들을 저격하였다. 이는 일제 침략기관에 경고를 보내고 독립의지를 다시금 일깨운 의거였다. 다음, 천진에는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여 중국혁명과 항일운동을 한 조선인들이 있었는데 이들로는 리철부, 김산, 주문빈 등이다.  리철부(1901-1937, 李铁夫)는 중공지하천진시위 서기를 력임했던 인물이다. 그는 함경남도 출생으로 조선에서 3.1운동에 참가하여 일제의 체포령이 내려지자 감시를 피해 1919년 4월 로씨야를 거쳐 중국으로 들어왔다 그는 중국에서 조선독립기지를 세우고 싶었으나 쉽지 않음을 깨닫고 일본으로 건너가 류학공부를 하면서 비밀혁명단체인 공산주의연구회를 설립하였다. 1924년 대학졸업 후 조선에 입국하여 동아일보 기자 일을 하면서 1926년 레닌주의동맹에 가입하고 조선공산당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였다. 그러나 조직이 일제에 의해 해체되면서 1928년 다시 중국으로 망명하며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그는 중공중앙 조직에 의해 선후로 중공지하 북경반제동맹당위 서기(1931), 하북성의 선전부부장과 조직부부장(1932), 천진시당위 서기(1936)를 력임하였다. 1933년, 중국 왕명(王明)의 '좌'경 모험주의 착오로선이 살판치던 시기, 그는 잘못된 로선으로 화북당조직이 심각하게 파괴되여 혁명사업에 막중한 피해를 끼치는 것을 지켜보고 1933년 11월부터 1934년 2월초 사이, 《화선(火线)》하북성성위간행물에 10편의 문장과 의견을 발표하여 왕명의 '좌'경 착오로선에 대해 날카롭게 비판하였다. 그의 이러한 주장들은 '철부로선', '취소주의'라는 비판을 받았고 당내로부터 '철부로선'을 반대하는 투쟁이 일어났으며 이로 하여 당조직과의 관계도 단절되였다. 1933년 5월 18일, 그는 국민당에 체포되는데 그해 7월에 보석출옥하였다. 1934년에 공산당 당적이 회복되고 당조직의 지시에 따라 천진 영국조계지에서 비밀리에 지하활동을 시작하였다. 조직에서는 적들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중공지하녀당원 장수암(張秀岩)을 파견하여 위장부부로 동거하도록 하였는데 장수암의 공개신분은 남개중학교 교사였다. 그 이후, 이를 계기로 그들은 혁명적 인생의 동반자가 되였다. 명문가족에서 태여난 장수암은 가족의 십여명을 혁명의 길로 이끌었으며 그의 조카 장결청(张洁清)은 팽진의 안해이다. 1936년 봄, 중공중앙 북방지역 대표를 맡은 류소기는 친히 천진에 와서 당의 와요보(瓦窖堡)회의 정신에 근거하여 좌경로선의 잘못을 지적하고 정확한 로선을 지적하였다. 1937년, 리철부가 세상을 떠난 후, 1941년에 연안정풍을 거치면서 모택동은 "리철부동지는 영웅이고 호기가 있다", "화북당은 림시중앙의 모험로선에 대해 첨예한 반대의견이 있었는데 그 지도자가 리철부이다"라고 왕명 '좌'경로선의 착오를 지적한 그의 주장에 대해 고도의 긍정적 평가를 내렸다.  김산[본명 장지락(張志樂)]은 평북 룡천 출생으로 공산당에 가입하고 중공북경시위 조직부장(1929)을 력임한 바 있다. 그는 천진 남개중학에서 공부를 하였고 북경과 천진을 오가며 지하활동을 하였다. 1929년 봄부터 1931년 말까지 2년여간 북경에서 지하활동을 활발히 진행하던 김산은 새로운 시련을 맞이하게 되였다. 그는 선후로 두 차례 밀정에게 체포되여 천진형무소에 갇혔다. 형무소에서 갖은 혹형을 당하였으나 끝까지 당의 비밀을 고수하였다. 그에게서 무엇도 알아내지 못한 일본경찰은 두번 모두 석방시켰는데 이는 당조직의 의심을 받게 되였다. 석방 후 그는 고향에 잠시 머물다가 중국 연안을 찾아갔으나 당에서는 그의 신분을 믿어주지 않았다. 그는 항일군정학교에서 강의를 하는 도중 1937년 중국 연안에서 님 웨일즈와 만나게 되고 님 웨일즈는 20여차례 인터뷰한 내용을 1941년 미국 뉴욕에서 《아리랑의 노래》로 출간하였다. 1938년, 김산은 강생에 의해 ‘일제간첩’이라는 루명을 쓰고 처형되였다. 1983년, 당에서는 45년만에 김산의 억울한 죽음을 인정하고 명예와 당원 자격을 회복시켰다. 주문빈(1908-1944, 周文彬)은 기동(冀东)지역당위 서기를 력임하였다. 주문빈은 평안북도 의주출생으로 1914년 6세 때 독립운동하는 부모를 따라 중국으로 이주하였다. 그의 집에는 아버지 김기창(金基昌)을 찾아 리철부, 김산 등이 자주 오군 하였는데 주문빈은 그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는 1926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고 항일로동자운동을 지도하고 항일무장근거지를 설립하는 등 일련의 항일투쟁활동을 하였으며 기동지역과 천진의 계현(蓟县), 보저(宝坻), 녕하(宁河), 무청(武清) 지역의 전투에서 희생되였다.  그 다음, 천진에서 학생신분으로 항일의식을 고취한 조선인으로 김염을 들 수 있다.  김염(1910-1983, 金焰)은 중국영화력사상 영화황제로 불린 영화배우이다. 김염은 한국 서울 출생으로 1912년 2세 때에 독립운동가이자 한의학자인 아버지 김필순(金弼順)을 따라 중국 통화로 이주하였다가 흑룡강 치치할로 이주하였다. 치치할에서 한약방을 꾸린 아버지가 일본간첩에게 독살당하면서 온 가족이 뿔뿔이 흩어졌다. 김염은 1919년부터 1927년 사이 8년간 천진 북양대학(현 천진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고모부 김규식에게 맡겨지며 남개중학을 다니게 되였다. 주은래가 다니던 남개중학에서 그보다 5살 우인 김산을 알게 되였고 필수인 연극과목에서 조우(曹禺, 중국극작가), 손유(孙瑜, 영화감독) 등을 만나 함께 항일연극공연을 하군 하였다. 천진에서의 8년은 김염에게 항일의식을 고취하고 항일영화배우가 되기 위한 중요한 기초를 닦는 디딤돌이 되였다.  김염은 1929년 영화 을 통해 데뷔하였으며 1934년 를 출연한 이후로 항일영화 40여편을 찍었다. 그가 주연한 영화중 은 일제가 향항을 점령하였을 때 가장 먼저 필림을 없애버린 작품이였다. 일제가 상해를 점령하고 김염에게 제국주의영화의 촬영을 강요하였을 때 "기관총으로 나를 겨눈다 해도 그런 영화는 찍지 않을 것이다. 예술이 사회에 이바지해야 하며 일본제국주의에 반대하는 투쟁에 힘이 되여야 한다”며 단호히 거절하였다. 영화감독 손유는 "김염의 영화 속에는 나라 잃은 조선인의 심정이, 일제에 저항하는 그 심정이 고스란히 투영되어있다"고 하였다. 마지막으로, 의학계의 항일운동가 김현택과 임숙을 들 수 있다. 김현택(1904-1990, 金显宅)은 중국현대종양의학의 창시인으로 불린다. 그는 한국 서울출생으로 중학시절 1919년 3.1운동에 참가하였다가 신변의 위험을 느끼고 중국에 있는 형을 찾아 1919년에 이주하고 1930년에 중국국적에 가입하였다. 1931년, 미국뉴욕주립대학 의학박사를 졸업하고 중국으로 돌아와서 1933년에 국내최초로 종양학과를 북경협화의학원에 설립하고 중국현대종양학과의 제1연구자가 되였다. 그 당시 종양학과는 세계적으로도 30년대초에 설립하고 있었다. 사업의 수요로 1942년부터 천진에서 근무하게 되며 1990년까지 48년간 체류하였다. 1945년, 김현택은 일본군이 진황도에 퇴각하면서 군의사가 모자라 자신을 데려가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서주로 피난간 적이 있다. 학생시절 1919년 3.1운동에 참가한 그는 나라를 빼앗긴 일제를 위해 일할 수 없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임숙[1922-2011,任叔, 본명 김보배(金宝培)]은 천진시 간호학교 교장직을 력임하였는데 김현택의 조카이다. 1943년, 하북 보정의 팔로군에 가입하여 혁명활동을 하였고 1945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임숙은 국민당통치하의 간호사학교를 인수받아 재빨리 학교질서를 회복시키고 학교를 확대시키는 등 천진의 간호사교육사업 발전을 위해 공헌을 하였다. 식민지백성이라는 멍에를 쓰고 조선반도에서 중국 땅으로 건너와 중국혁명과 조선독립을 위해 천진지역에서 싸워온 조선인들의 이야기를 적어보았다. 그들의 혁명이야기는 처절하고 씩씩하며 슬프고 비장하기까지 하다. 드높은 신념으로 밝은 미래를 확신하며 장기적인 항일혁명투쟁을 하여온 그들의 일생은 보람차고 휘황한 일생이였다.  해방과 광복이 찾아왔음에도 리철부, 김산, 주문빈, 라석주는 젊은 나이에 아스라이 이슬로 사라져 그 희열을 만끽할 수 없었다. 조선반도의 광복을 맞아 박룡태, 명제세, 김원봉은 조선반도로 귀환하였고 김현택, 김염, 임숙, 유자명은 중국 땅에 남아 중국조선족이 되여 새 중국 건설사업에 공헌하였다.  현재까지 라석주, 명제세, 김원봉, 유자명, 김염, 김산, 박용태에 대한 연구와 평가는 어느 정도 이루어져왔지만 지역학적 의미로서의 더욱 깊이 있는 연구가 요구된다. 그리고 리철부, 주문빈 등에 대한 연구는 미진한 편인데 중국에서 아직 발굴이 되지 않은 조선인 혁명운동가들에 대한 기초작업으로서의 자료발굴과 더불어 폭넓은 연구가 과제로 떠오른다. 이는 중한 학자와 정부 차원에서의 공동의 작업과 노력이 필요하다. 오늘날 디지털 네트워크가 발달한 문화산업의 시대, 핵심적인 경쟁력은 콘텐츠에 있다. 이미 연구된 영웅들의 이야기는 홍보를 위한 문화콘텐츠 개발과 작업이 필요하다. 한국독립운동사에서 의렬단의 실제 력사사실들이 소설화되고 영화화되여 홍보되듯이 이미 력사적으로 규명된 조선인 항일투쟁 력사이야기는 체계적인 문화기획과 콘텐츠 작업이 이루어져 립체화된 형상과 사건들로 재현되고 복원되여야 한다. 중국이 새중국 창립 70주년을 맞이하고 한국이 림시정부수립 100주년을 맞이하는 시점에서 량국이 할 일은 많다. 력사는 흘러간 과거이지만 오늘에 비춰진 모습이고 우리들이 나아가야 할 미래를 제시하는 라침판이고 희망이기도 하다. 우리는 기록을 통해 력사를 재현하고 그 속에서 불멸의 공훈을 세운 선렬들을 기념하고 기억해야 하며 치렬한 혁명정신을 널리 알려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천진시조선족련의회편, 《천진조선족력사자료집》, 내부발행, 2018.12 양지선, 《천진한인사회연구(1910-1946)》, 복단대학교 박사학위론문, 2012 2019.4.3 인민넷 조문판 
4    조선족녀성들의 모임이 “힘”이 되는 사회(김화선) 댓글:  조회:722  추천:0  2017-07-25
모임이란 어떤 목적아래 사람들이 모이는 일이다. 사람들은 흔히 회의, 잔치, 동창회, 동호회, 연회 등 여러 류형의 모임에 참가한다. 조선족녀성들에게 3.8부녀절 모임과 동창생모임은 당연하고 익숙한 전통 모임이라고 할수 있다. 나는 최근 몇년간 딸애 소학교 반급의 학부형모임, 사회조직인 연변녀성평생교육협회, 연변조선족녀성발전촉진회, 연변대학녀교수협회 등 크고 작은 녀자들의 모임터로 많이 돌아다녔다. 스무살에서 여든에 걸쳐 삶의 부피가 저마다 다른 녀성들을 만났다. “녀자 셋이 모이면 접시가 깨진다”, “녀자 셋이 모이면 가마쇠도 녹인다”라는 옛말이 있다. 녀자들은 수다스럽고 말이 많음은 물론 속에 담아두는 비밀이 없다는 뜻으로 녀자들의 수다를 두고 좋지 않게 말을 한것이라고 할수 있다. 그러나 남성중심의 대가족제도아래에서 고추보다 더 매운 시집살이의 고통을 겪어야 했던 녀성들에게 수다는 고통과 고뇌와 념원을 이야기로 승화시켜내는 보약같은것이였다고 할수 있다. 우리는 우리 사회에서 녀자들이 모여 즐겁게 감성과 생각을 나누면 시너지효과를 일으켜 오히려 “힘”이 된다는 많은 사례를 접하고있다. 《연변녀성》잡지사 제3대 총편으로 녀성사업에 입문했던 현 연변가정연구소 박민자소장은 1990년대부터 지금까지 20년 동안 “중덕장학”사업을 이끌어오셨다. 장학프로그람이 가동된 20년 사이에 그는 800명 학생들의 학업을 장려하고 지원하였다. 또한 2007년 박민자소장이 설립한 조선족녀성들로 구성된 문화봉사자팀은 10년간 활동을 견지해오면서 회지 《한알의 씨앗》을 발간해오고있다. 중덕장학회에서 지원한 인재들의 성장은 글로벌시대를 살아가는 조선족사회의 이미지구축에 나름의 힘을 이바지해 갈것이다. “북경애심녀성네트워크”는 올해로 창립 10주년을 맞이했다. 그들이 련속 7년째 조직한 “희망의 꿈나무 심기”북경탐방프로그람은 동북3성 각지에서 온 중학생들에게 4박5일 동안 대학생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북경을 경험하도록 해준다. 북경조선족애심 녀성들의 로고가 우리 사회에 따사로운 기운을 불어넣고있는것이다. 또한 이 프로그람을 계기로 각 지역의 조선족녀성단체와 협력관계를 맺고 서로 지원하고 서로 고무격려하고 서로 감사해하고 고마워하는 소통의 문화를 확산시켜나가고있다. “연변애심어머니협회”는 단체에서 지원하는 장학생들의 여름캠프를 조직하여 학생들이 새로운 력사지식을 습득하고 그 지식들이 미덕으로 전환되도록 도와주고있다. 연길 “푸름이독서사”, “코끼리클럽” 등 자녀교육을 주목적으로 열리는 어머니모임은 꾸준히 선진적인 지적, 인적 자원을 활용하여 지속적으로 모임의 효과를 높이고있다. 조선족녀성들의 경제활동령역이 제3산업에로 몰리면서 위챗을 통한 상업활동을 하는 경제활동모임이 눈에 띄게 확장되여가고있다. 그들은 “나눔경제”라는 새로운 리념을 경제활동을 통해 확인하고 확립해가고있으며 지속적인 연수활동을 통해 전문지식을 쌓아가고있으며 어린 자녀 양육때문에 직장생활을 그만두었던 젊은 녀성들을 포섭해가면서 가정과 직장의 량립이라는 새로운 녀성경제활동 문화를 만들어가고있다. 2011년부터 한국에서는 조선족출신 안순화씨가 결혼이주녀성들의 자조모임인 생각나무 BB쎈터를 설립하여 한국에서 결혼이주녀성들의 교류와 협력을 촉진하고있다. 녀성들의 교육수준이 높아지면서 녀성제자, 녀성후배를 두는것이 가능한 현대사회에서 나이든 녀성들의 삶의 경험이 젊은 녀성들에게 지혜나 지식으로 전환되고있는 각종 모임이 견지되고있다. 그리하여 현대사회의 조선족녀성들의 력사를 만들어가고있다. 활발하게 조직되고 오랜 기간 지속되고있는 조선족녀성들의 크고 작은 모임들이 녀성이 자신의 욕구와 일에 대해 선택할수 있는 강한 자아를 만들어가는데 디딤돌이 되고 녀성들의 모임문화를 사회에 심음으로써 남녀평등의 사회를 향한 변화를 이루어가게 될것이다. 인민넷 2017-7-24
3    코리안드림, 차이나드림 그리고 조선족차세대 가정교육 댓글:  조회:864  추천:1  2016-12-29
코리안드림, 차이나드림 그리고 조선족차세대 가정교육 김철룡 조선족의 코리안드림은 중한수교이후 90년대 중반으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코리안드림으로 인해 초반에는 큰 재부를 이룬 가정들도 있지만 당시만 해도 쉽지 않았던 한국행을 위해 편법수속을 하다 사기를 당해 파산의 궁지에 몰리고 자식공부를 그르친 가정들도 적지 않다. 한국에서 돈을 모은 집안들도 고향에 두고간 자식교육에 소홀히 하여 자식공부를 망친 일이 비일비재이다. 필자의 부모님도 90년대 후반에 돈 벌어 자식 공부시킨다고 한국 출국수속에 나섰다가 사기를 당하여 하루아침에 집안이 망하는 봉변을 당했다. 대학 갈 희망을 잃고 필자도 한때는 방황도 했지만 나중에 등록금이 없는 대학, 전공을 찾다보니 중앙민족대학 조문학부로 입학하게 되였다. 대학 졸업후 아이러니하게 하마트면 내 인생을 망칠번했던 한국이 석박사 장학금을 지원해주어 한국류학을 마치고 우리말 연구자가 되는 인생 탈변을 가져오게 되였다. 초반의 코리안드림은 조선족들에게 경제적으로 희망을 가져다줬지만 당시의 자식세대인 70후, 80후의 학업에는 큰 피해를 끼쳤다. 2000년대 이후로 한국문이 대폭 열리면서 더많은 조선족들이 한국행을 택하였다. 현재 재한조선족 인구가 70만이라는 통계도 나오고있다. 예전보다 수월해진 한국진출은 조선족가정에 여유로운 경제조건을 마련해주었지만 부모와 떨어져 할머니손에서 자라거나 친척집에 얹혀사는 아이들도 대폭 늘어났다. 오늘의 조선족 대학생이나 사회초년생들을 보면 지식보다 상식이 결핍하다는 평가를 많이 받는다. 즉 다시말하면 눈치가 없다는것이다. 지식교육은 학교교육에 의거하지만 상식교육은 주로 가정교육에 의거하는것이다. 일례로 우리는 정월대보름에 온가족이 오손도손 모여앉아 아침부터 명절을 즐기면서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귀밝이술을 한잔씩 돌린다. 오늘의 과학지식으로 그 술 한잔이 진정 귀를 밝게 한다고 믿을 사람은 없지만 그것이 바로 가정에서의 전통문화, 전통예절을 가르치는 교육현장이였던것이다. 옛말에 술은 어른한테서 배우라고 하였다. 명절분위기를 빌어 아이들에게 어릴 때부터 술 따르는법, 술 마시는법, 술 마신후의 옳바른 행동거지, 그리고 인사법 등 상식교육을 진행하였던것이다. 그러나 부모가 곁에 없이 혼자 커온 우리의 90후, 00후 세대들은 코리안드림에 의한 가정교육이 결핍했던 피해를 받아왔다. 재한조선족중 30대, 40대 초반인 부모들은 아이를 한국에서 낳고 본인들이 직접 키워온 경우가 많다. 그러나 중국경제의 부상과 차이나드림의 부활로 아이가 교육 받을 나이가 되면 중국으로 다시 돌려보내는 사례가 점점 많아진다. 올해 할빈시조선족소학교 1학년 신입생이 40여명으로서 요몇년사이 인원수가 가장 많은 해로 되였는데 이는 축하할 일이다. 그런데 그중 9명이 한국에서 태여나 부모님이 중국으로 다시 돌려보내 교육받도록 하는 아이라고 한다. 목단강시조선족중학교 고중부에는 류학생부가 따로 설치되여있는데 그 학생들은 모두가 조선족 결혼이민자들의 자녀로서 한국류학생 신분으로 부모님 고향에 돌아와 공부하고있다. 역시 차이나드림에 대한 동경으로 부모를 떠나 중국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이다. 어린 나이에 부모 보살핌을 못받고 혼자 떨어져 살면 아이의 심리 및 인격 성장에 부정적 영향이 미칠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다. 재한조선족 10후 세대들의 가정교육 역시 차이나드림에 의해 큰 피해를 받을것으로 예상된다. 코리안드림, 차이나드림도 좋지만 조선족의 진정한 꿈은 차세대교육에 있다. [김청룡 략력] 소속: 중앙민족대학 조선언어문학부 전공: 언어학, 조선어 학력: 한국 경희대학 국어국문과 언어학 박사 한국 서울대학 국문학과 언어학 석사 중앙민족대학 조선언어문학부 언어학 석사 중앙민족대학 조선언어문학부 언어학 학사 경력: 중앙민족대학 조선언어문학부 부교수(2012.9 – 현재) 한국 고려대학 민족문화연구원 연구원(2011.8 - 2012.8) 한국 대진대학 교양학부 외국인 전임교수(2011.3 – 2012.8) 한국 호원대학 국제교육원 강사(2010.3 – 2010.7) 중앙민족어문번역국 조리번역(2002.8 – 2005.3) 주요 론저: 저서로는《韩中待遇词汇对比研究》(2014, 한국, 박문사)、역저로는 《韩国风俗画》(2015, 商务印书馆)등. 《浅析韩餐菜名的结构类型-以显性要素与隐性要素为例》(2015)、《韩中待遇词汇语域关系对比分析》(2014)、《基于语料库翻译学的韩汉有标识被动句的翻译研究小议》(2014)、《韩国语自我待遇词汇语义类型分析》(2014)、《韩国语汉字词与汉语的人称词缀对比分析》(2012)、《刍议中国国内韩国语教育改善方案》(2010)등 10 여편 론문을 국내외 학술지에 발표. 출처 인민넷(조문판)
2    민족문화와 력사에 대한 기록 시급히 추진해야 댓글:  조회:849  추천:6  2016-12-13
일전에 모교인 북경대학조선족동문회가 주최하는 북경대학 사생 및 학우 교류좌담회에 참가한적이 있다. 그 자리에는 80세 이상 고령의 교수님들이 세분이나 참석하시여 후학들을 격려하고 모임의 자리를 빛내여주셨을뿐만아니라 또한 그분들을 통하여 이미 아홉분이나 되는 조선족 교수님이 작고하셨다는 소식도 전해들었다. 그분들은 대개 1949년 새중국 창건 이후 50년대에 북경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에 남아서 줄곧 교편을 잡으셨던 분들로서, 북경대학 조선족력사를 개척해온 증인들이였다고 할수 있다. 그러나 이분들의 이야기를 기록해놓지 못했다는것은 참으로 유감스럽고 안타까운 일이 아닐수 없다. 일개 후학으로서 그러한 기록을 보다 일찍 만들지 못했다는 미안함과 자책감을 깊이 느끼게 된다. 나아가 우리 민족사회를 보더라도 많은 활동과 행사들이 단순한 친목모임으로 끝나고 우리들의 후대들에게 전해주어야 하는 가치있는 력사기록으로 남지 못한다는것도 오늘날의 현실임을 부인할수도 없다. 력사를 모르는 민족은 뿌리가 없고 희망이 없다고 하지만, 후대들에게 력사기록을 남기지 못하는 민족의 미래는 더욱 참담하다고 할수 있다.   개혁개방 35년이 넘는 세월이 흐름에 따라 조선족들의 생활거주지도 과거 전통근거지였던 동북3성 뿐만아니라 또한 중국의 연해, 대도시 등 관내지역, 나아가 한국을 대표로 하는 해외 거주지 등 이른바 “3각 구도”를 형성하고있다. 따라서 우리의 력사, 문화 기록도 동북 3성뿐만아니라 북경, 상해, 광동, 청도 등 대도시와 한국, 일본, 미국, 유럽 등 나라와 지역의 조선족들의 생활과 문화도 포함시켜야 할것이다. 비록 거주지와 활동범위는 확산되였지만, 이들 또한 모두 우리 조선족들이고 우리들의 생활이고 문화이며, 나아가 력사이기때문이다.    내가 대학에 다닐 때, 북경조선족청년학회를 중심으로 북경의 조선족 젊은 학자와 대학생들이 1989년 겨울 방학을 리용하여 흑룡강, 길림, 료녕 등 지역의 이민 1세대들을 직접 방문하고 그 취재 구술을 기록하여 만든 《중국조선족이민실록》(연변인민출판사, 1992년 출판)을 접하게 되였는데, 그 충격이 매우 컸었다. 우리 선조들이 무엇때문에 조선반도에서 중국 땅으로 이주하게 되였고 어떻게 되여 중화인민공화국 공민으로 되였는가에 대해서 어렴풋하게나마 알게 되였다. 그 책은 지금 구하기가 어렵게 되였지만, 당시 연변대학 부총장으로 계셨던 정판룡교수님이 머리말을 쓰시고, 국가민족사무위원회 문정일 부주임이 1면에 “우리 민족의 수난의 력사를 잊지 말고 자랑찬 우리 문화를 꽃피워가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라는 친필의 격려사를 직접 써주시였다. 물론 그 당시 취재를 받았던 이민 1세대들이나 격려사를 써주셨던 문정일 부주임, 정판룡교수님 등 원로분들도 모두 우리 곁을 떠나셨다. 이제 가령 동원할수 있는 인원과 넉넉한 경비가 있다고 해도 다시는 이러한 작업과 력사적인 기록을 남길수가 없게 되였다.    물론 많은 조선족 학자들과 젊은이들이 해외로 류학함에 따라 적지 않은 연구성과들이 중국, 한국, 일본에서 출판되였다. 또한 조선족사회 자체뿐만아니라, 한국, 일본에 대한 인식도 많이 넓어지고 깊어지게 되였다. 연변대학 김성호교수님이 편집한 《서울에서 못다한 이야기》(도서출판 말과 창조사, 1997년 출판)는 중한 수교 직후 조선족들의 한국사회에 인식을 그대로 반영한것으로 그때를 돌이켜보고, 오늘날과 비교해본다면 참으로 가치가 있는 기록이라고 할수 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본다면, 박우, 김용선 등이 편저로 된 《우리가 만난 한국–재한 조선족의 구술생애사》(북코리아, 2012년 출판)는 사회학연구방법을 바탕으로 친척초청, 산업연수와 기술연수, 위명려권, 방문취업, 단기상무와 단기종합, 결혼 등 나누어 취재한 생생한 기록으로서 하나의 력사적 문화가치가 있는 획기적인 작업이라고 판단된다. 그러나 한국을 제외한다면, 학술적인 연구성과가 많이 나오고 사회적인 교류는 진행되지만 타지역에서의 력사기록작업은 대부분이 아직 출발하지 못한 상태이다. 중국의 대도시와 연해지역의 조선족사회의 새로운 집거지역에는 이러한 작업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있다.   수년전에 《광동성 조선족사회》(민족출판사)라는 도서가 출판되였지만, 하나의 단순한 활동기록에만 불과하고 주로 기업가나 학자들의 업적을 중심으로 했으며, 1949년 이전, 특히 1927년 광주봉기에 참가한 조선족들의 혁명업적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어 하나의 완정한 력사기록이라고 할수 없다. 이제 시간이 10년만 흘러가면, 중국의 새로운 집거지의 1세대들도 취재하기가 거의 어렵게 될것이다. 따라서 시급한 시간적요인을 고려할 때, 각 지역의 체육, 문화, 친목활동도 매우 중요하지만, 보다 가치가 있고, 우리들의 력사와 문화를 기록하기 위한 노력이 더욱 절실하다.   이제 2019년이면 중화인민화공화국 성립 70주년, 2021년은 중국공산당 창당 100주년이 된다. 과거 중국의 조선족들은 이민이였지만, 지금은 떳떳한 공민이고 이 사회의 주요한 성원이다. 이제는 이민이라는 사유를 벗어나 중국내에서의 우리들의 당당한 력사와 문화를 기록하고 그것을 출판물로 만들어 사회와 후대들에게 떳떳하게 보여주어야 할것이다.    시간은 항상 우리들을 기다리지 않는다. 아직도 아무런 력사기록도 남기지 않고 화려한 활동이나 형식적인 친목이벤트에만 집착할것이 아니라, 정말 무게가 있고 력사가 있는 문화민족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지금이 바로 기업가나 학자나 관료, 대학생들을 포함하여, 전민족 차원에서 우리 자체의 력사, 문화 기록사업을 본격적으로 진행해야 할 시기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지금 북경대학조선족동문회가 2018년 모교 120주년을 계기로 《북경대학 조선족들의 이야기》(가제) 출판을 기획하는것은 하나의 거창한 시도이며, 나아가 우리 민족사회의 력사기록의 새로운 시점으로도 되기를 기대해보게 된다.    2016년 12월 12일   리성일 략력 소속: 중국사회과학원 아시아태평양&글로벌전략연구원 전공: 동북아국제관계   학력: 일본 게이오대학 법학박사 북경대학 국제관계학원 법학석사 북경대학 정치학&행정관리학부(현 정부관리학원) 법학학사   경력: 중국사회과학원 아시아태평양&글로벌전략연구원 조리연구원(2013.1 – 현재) 한국 동서대학교 국제학부 조교수(2008.9-2012.9) 일본 게이오대학 법학부 방문연구원(2008.3-2008.9)   주요 론저:  저서로는 《중국의 조선반도정책》(2010, 일본, 게이오대학출판사), 공저로는 《조선반도의 질서 변혁》(2013, 일본, 게이오대학출판사), 《조선반도와 국제정치》(2005, 일본, 게이오대학출판사), 《조선족 3세들의 서울이야기》(2011, 서울, 백산서당), 역서로는 《일본의 미들파워외교》(2015, 사회과학문헌출판사) 등.   “中日关系:转型中的博弈与磨合”(2015), "中韩建交与中国—朝鲜半岛关系的结构变革”(2014), "日本解禁集体自卫权的举措与影响”(2014), "朝鲜族研究的现状及课题-中日韩三国为中心”(2014), “东亚地区合作:中国的视角”(2014), “中国朝鲜族在中韩关系发展过程中的作用”(2013) 등 20 여편 론문을 국내외 학술지에 발표. 출처 인민넷 위챗 2016-12-12
1    부모님곁을 지키자, 그게 효도다 댓글:  조회:856  추천:0  2016-10-19
부모님곁을 지키자, 그게 효도다 최유학 통계에 따르면 지난 20년 동안에 조선족의 도시인구 비률은 34.59%에서 65%로 상승하였고 도시화률은 50.2%에서 80%로 상승하였다고 한다. 혹자는 발달국수준이라고 할수 있는 높은 도시화률만을 보고 우리 민족이 경제적인 부를 이룩하고 삶의 질이 향상되였다고 기뻐할수도 있겠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무조건 락관할 일만은 아니다. 시장화, 글로벌화와 이민화에 떠밀려 이룩한 이러한 압축식 도시화는 우리 민족 구성원들에게 인구의 산거(散居)화, 농촌 공동(空洞)화 등 여러가지 문제점들을 안겨주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문제가 되는것은 로인들의 복지문제이다. 다시말하면 현재 인구고령화와 인구이동으로 인해 많은 60세 이상의 1-2세대 조선족의 부모님들이 외롭고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텅빈 농촌에 남아있거나 동북의 도시들에 거주하거나 아니면 동북의 거주지를 떠나 중국내 도시 또는 한국으로 이주해 살거나를 막론하고 그중 상당수 로인들이 가족과 떨어져 외롭게 생활하고있는것으로 나타났다.   그럼 그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바로 너와 나, 우리들의 고생많으신 부모님들이다. 현재 60세 이상인 로인들의 경우 시대적인 원인으로 일반적으로 자식이 여러명이다. 개혁개방을 맞아 자식교육에도 돈이 만만치 않게 들기때문에 그 자식들 뒤바라지를 위해 개혁개방초기 너도나도 김치장사를 떠난 부모님들이며 언 겨울에도 자식손에 쥐여줄 꽈배기나 과자 등을 살 욕심으로 끼니를 거르거나 언 찐빵을 씹으며 타향의 겨울 시가지의 골목길에서 떨고 섰었던 부모님들이다. 농사로만은 자식들의 공부를 뒤바라지 할 수 없고 자식을 장가 또는 시집 보내기 어렵기때문에 농사일이 없는 시간을 리용해 너도나도 김치장사를 떠나는것이 한동안은 어느 조선족마을에서나 흔히 볼수 있는 풍경이였다. 필자도 기억이 난다. 고추가루를 가득 묻혀 김치를 버무리는 발갛게 언 어머니의 손이 눈앞에 선하며 크고 작은 소래기들을 싼 보자기를 머리에 이고 손에다 들고 김치장사를 떠나는 어머니의 뒤모습을 바라보며 울컥 했던 기억이 잊혀지지 않는다. 이럴 때면 아무리 불효인 자식이라도 앞으로 커서 꼭 부모님께 효도해야지 라고 누구나 한번쯤은 굳은 결심을 했을것이다.   그러나 김치장사도 한동안이였고 곧 한국길이 트이여서는 몸에 병이 들거나 늙어 일을 하지 못하는 분들을 빼고는 거의다 한국에 가서 건축현장에서, 식당에서 일을 하면서 갖은 고생을 겪었다. 60세 이상의 부모님들의 경우, 지금도 한국에서 건축현장 또는 식당에서 일하고있는 경우가 많다. 지어 나이가 70세 가까이 되여서도 한국에서 일하는 조선족 부모님들도 심심찮게 볼수 있다. 그들중에 몸에 병이 있어 일을 못하는 부모들의 경우에는 손자, 손녀를 보느라고 정신없이 바삐 보내기도 한다. 손자손녀 보는 재미에 외로움을 별로 못 느끼다가 손자손녀까지 다 키워서 내보내고나니 외로움이 찾아들게 되며 자식들도 치렬한 경쟁사회에서 살아나가느라 부모님과 멀리 떨어져 살게 된다. 지금은 멀리 떨어진 그 자식들에게 아글타글 모은 돈으로 된장, 고추장, 고향의 무말랭이, 시래기, 산나물을 해서 보내는것이 늙으신 부모님들이 외로움을 달래는 일상이며 그들이 느끼는 유일한 락이 되였다.   정말로 헌신적으로 자식을 위해 모든것을 다 바친 존경스러운 우리 민족 부모님들이시다. 그런데 이렇게 열심히 살아온 그들에게 일을 못하게 될 때가 서서히 다가온다. 더는 일할 기력이 없을 때가 되면 당연히 집에서 로년생활을 즐겨야 하겠지만 번 돈은 자식들 집사는데 다 보태버렸고 로후를 대비한 경제력이 부족한데다가 얼마 안 가서 혼자 밥 지어먹고 옷 씻어 입는 등 가사일에도 몸이 따라주지 않게 된다. 정말 큰일이다. 이쯤 되면 자식들이 옆에서 효도를 할법 한데 고개를 들어 몇번이나 보고 또 보아도 곁에는 시중들어줄 자식 한명 없다. 시중이 아니라 어떤 부모들에게는 옆에서 따뜻한 말이라도 한마디 해줄 자식이 없다.   우로는 부모님을 정성껏 모시고, 아래로는 한명도 아닌 여러명의 자식들을 키우면서 한평생 뼈빠지게 일했건만 늙어서 돌아온건 자식들의 효도가 아닌 병든 몸과 외로운 로년생활뿐이다. 자식들은 저마다 이미 결혼을 하여서 자기 새끼를 기른다고 정신이 팔려 늙은 부모는 돌봐드릴 사이도 없는것 같다.    동북의 농촌에 남아있는 로인들의 경우 공동화된 농촌사회에서 홀로 버려진 외로움과 쓰라림은 더 말할 나위도 없겠지만 국내나 한국의 도시에 살고있는 부모님들의 경우도 별로 더 나은것이 없다. 어떤 부모들은 하는수 없이 자원적으로 또는 자식들의 강박에 의하여 양로원에 가서 로년생활을 쓸쓸히 보내고있다. 여러가지로 조건이 좋은 양로원들이 많이 운영되고있다고는 하나 양로원으로 떠나는 부모님들의 발길은 좀체로 떨어지지 않고있으며 그 심경은 쓸쓸하고 외롭기 짝이 없다. 그들로서는 자신이 늙어 양로원에 가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일이였고 자신을 양로원에 보낸 자식들이 그렇게 서운할수가 없고 자신의 신세가 그렇게 한스러울수가 없다.   옛날에는 농촌거주지에서 소대, 대대 단위로 나름대로의 로인협회 등이 있고 친척과 친구, 이웃들이 많아 외로움을 그렇게 느끼지 못했는데 자식 따라 타향의 도시에 나왔다가 여러가지 원인으로 또 자식들과 떨어져 따로 생활하게 된 로인들에게 갑작스럽게 찾아든 외로움이 산처럼 그들을 누르고있다. 안그래도 이웃사이에 벽을 쌓고 사는 도시생활이라 잔뜩 적응하기에 힘들었던 부모님들은 이제는 언어적인 장벽 또는 문화적인 장벽으로 인해 도시에서 친구 한명 없이 외로운 인생을 보내야 한다.   이런 외로움이 경제적으로 찾아오는 궁핌함과 함께 찾아올 때는 더욱더 치명적이다. 혹 자식들이 경제적으로 부모님께 효도를 제대로 하는 경우에는 자식들이 옆에 없어도 그럭저럭 견딜만 했는데 경제적으로 자식들이 돕지도 못할 경우 부모님의 생활은 그야말로 벼랑끝이라고 할수 있다.    농촌공동체사회시대와 개혁개방시대를 모두 살아오신 우리들의 부모님은 실로 자식들을 위해 한평생을 다바쳤다고 할수 있다. 그런 부모님을 늙으막에 외롭게 그대로 둘 수 없다. 자주 집에 가서 부모님을 즐겁게 해드리라는 노래도 있지 않은가? 현재 40대, 50대가 된 세대들이 잘 생각해봐야 할 문제이다. 외로움에 떨고있는 부모님을 그대로 보고만 있을것인가? 부모님을 곁에 모시고 효도를 해야 하지 않겠는가? 물론 여러가지 어려움이 따를수 있다. 집이 작아서 부모님과 함께 있지 못할테고, 경제력이 안되여서 부모님을 모시지 못할테고, 배우자가 눈치 보여서 가정불화를 막기 위해 부모님을 모시지 못할테고, 부모님이 가정보모와 함께 살겠다고 해서 모시지 못할테고, 부모님이 양로원에 가겠다고 해서 모시지 못할테고, 부모님이 따로 사는게 더 편하다고 해서 모시지 못할테고, 또는 형제가 여럿이어서 누가 모셔야 할지를 쉽게 결정하기 어려워 모시지 못할테고, 생계를 위해 한국에서 또는 외지에서 일을 해야 하므로 부모님을 모시지 못할것이다…. 리유를 찾자면 얼마든지 찾을수 있다. 또 그 리유나 상황들이 개개의 당사자들에게는 얼마나 절박한지도 리해가 간다. 그러나 효도는 이런 리유들로 외면할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이런건 리유가 아니라 구실이다. 효도할 마음이 있다면 당장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홀로 된 부모님이 계신다면 더구나 시급한 문제이다. 농촌에 계시든 도시에 계시든 아니면 한국에 계시든 70, 80이 넘으신 부모님이 따로 살고 계신다면 무조건 집에 모셔와야 한다. “무조건”이란 노래를 부를 때 가사중의 “당신”을 “부모”라고 한번쯤은 바꾸어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아무리 시대탓을 한다고 하더라도 70, 80이 다된 부모님을 따로 생활하게 그대로 둔다는것은 이미 상식을 벗어난 얘기이며 불효다. 오늘이라도 당장 그대 형제자매들과 머리를 맞대고 부모님께 어떻게 효도해야 하는지를 의논해야 한다. 그래서 힘들고 어렵더라도 부모님을 모시며 함께 살아야 마땅하다. “수욕정이풍부지(樹欲靜而風不止, 나무는 고요하게 있고싶어 하나 바람은 그치지 않아 움직이게 하고), 자욕양이친부대(子欲養而親不待, 자식이 어버이를 봉양하고자 하나 어버이는 이미 돌아가 이 세상에 없다)”라는 말이 있다. 후회없는 인생을 위하여 부모님곁을 지키자. 그게 효도이다. 인민넷 2016-10-17 위챗 [최유학 략력] 성명: 최유학(崔有学)  소속: 중앙민족대학교 한국어학과 전공: 한국현대문학 경력:  중앙민족대학교 한국어학과(2007-현재) 중앙민족번역국 조선문번역실(1996-2006) 주요 론저: 저서 《박태원의 문학과 번역》과 역서 《내 여자의 열매(我的植物妻子 )》 등 출간, 국내외학술지에 론문 다수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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