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张学奎文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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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타파와 재구성으로부터 보는 민족언론의 변신 댓글:  조회:619  추천:1  2017-10-24
타파와 재구성으로부터 보는 민족언론의 변신 흑룡강신문사 산동 데뷔 20주년에 부쳐         프레임(框架)은 인간사회의 질서와 발전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지만 또한 영구불변한 것은 아니다. 프레임은 수시로 타파되고 재구성되면서 시대의 변혁을 이끌어왔다.    흑룡강신문사도 아마 이런 변혁의 과정을 거쳐온듯 싶다. 1996년 말 남일주, 박영만 두명 기자를 연해지역으로 파견할 때부터 이미 지역이란 계선을 타파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듬해 4월 흑룡강성위 선전부와 산동성위 선전부의 비준을 거쳐 산동지사를 설립한 것은 프레임은 연장도 할 수 있다는 증명이였다. 누구도 가보지 못한 길을 흑룡강신문이 시도하고 실험한 것이다.    그러나 타파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흑룡강신문은 산동에 진출한 후 고향에서의 전통을 그대로 물려받아 준정부 기능을 발휘하면서 청도조선족기업협회 등 많은 단체와 모임의 설립에 참여하여 민족사회 형성을 주도한 외 고향에서는 없었던 외자유치 역할도 분담하게 되면서 언론매체의 또다른 가능성을 실험해왔다.    1998년 8월 처음으로 산동성 청주시와 재청도한국기업인과의 친목모임을 주선한 후 해마다 1~2차례 덕주시, 유방시, 고밀시, 린이시, 강소성 련운항시, 절강성 온주상회 등 지역의 외자유치간담회 및 연변, 해림, 녕안, 화천, 연길 등 고향 정부의 청도투자설명회를 주최, 주관, 협력하는 활약상을 보여주어 좋은 평판을 받아왔다.    물론 우선 언론 매체로서의 책임을 다하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흑룡강신문은 당보로서 당과 정부의 정책, 방침을 제때에 전달하고 현지의 법률, 법규를 즉시적으로 소개했으며 민족사회의 동태를 가장 빠른 시간내에 보도했다. 20년간 산동지사는 발로 뛰는 모습을 보이면서 해마다 350여 편에 달하는 취재고를 발표하였다. 5명 인원임을 감안하면 평균 매년 매인당 70편씩 기사를 쓴 셈이 된다.  한편 그간 특별기획과 시리즈보도를 30여 번 조직하여 좋은 사회적 반향을 얻었다. 타이틀도 “연해진출 조선족”, “산동에서 창업하기”, “불황을 딛고 성장하는 우리기업”, “산동에 뿌리내린 한국기업”, “홀로서기에 도전한 사람들”, “맛따라 향기따라”, “우리 사는 이야기”, “산동에 뿌리 내리다” 등 다양하여 거의 모든 분야와 인간그룹을 섭렵함으로써 산동에 온 조선족은 누구나 한번쯤은 신문에 이름을 올렸을 것이란 소리를 들을 지경이였다.    이 점때문에 흑룡강신문은 새로운 탈피를 시도했다는 자부심도 가진다. 과학기술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전통매체는 점점 생존공간이 줄어들고 있다. 뉴미디어시대에 종이매체의 틈새는 어디에 있을가를 고민하던 중 자기도 모르게 “커뮤니티 신문(社区报)”화로 나간 것이다. 조선족이 있는 곳이면 흑룡강신문이 있다는 슬로건을 내세우고 구석구석을 누비면서 뉴스거리를 찾았다. 산동은 물론 멀리 해남성, 광동성, 절강성, 상해시까지 발길이 닿았고 한국, 일본에서 벌어지는 행사도 지면에 올렸으며, 기업인과 대형행사는 물론 작게는 생일잔치, 가족모임 같은 것도 놓치지 않으면서 독자들의 관심분야에 눈길을 돌려왔다. 모든 구성원이 직접 주인공이 되여 참여했다는 것은 흑룡강신문만의 자랑거리인 동시에 치렬한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은 노하우라고 평가해도 절대 과분하지 않다. 덕분에 무료배포로부터 주문 발행으로 과도할 수 있는 계기가 되였으며 독자들의 관심도도 점점 높아지고 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뉴미디어의 제한성으로 말미암아 종이매체의 재부활이 이루어지고 그 형식이 자칫 커뮤니티화일 것이라고 한다. 이런 의미에서 흑룡강신문은 나름대로 시대의 앞장에서 달리고 있다는 사실에 안도한다.    물론 흑룡강신문은 언제나 사회의 흐름을 거역하지 않고 순응해왔다. 그 일례로 위쳇 계정의 개설을 들 수 있다. 산동지사는 위쳇 출현과 더불어 2014년에 계정을 개설했으며, 2016년에는 위쳇채팅방 “신문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을 가동하기도 했다. 2016년 1월에 “백혈병에 걸린 4살짜리 김미나 어린이에 대한 구조활동 개시”란 글을 위쳇 기사로 띄운 후 거퍼 일주일도 안되는 사이에 치료 비용 20만원과 생계에 필요한 10여 만 위안을 모금하는 장거를 이루면서 위쳇의 위력을 확인했으며, 같은 해 9월에는 역시 백혈병에 걸린 유승리 학생 구조홍보활동을 위쳇으로 적극 벌려 총 50여만원을 모급하는 기적을 창조하였다. 현재 흑룡강신문사 산동지사의 위쳇 계정을 팔로워한 독자는 5000여명에 달하며 기사 평균 조회률도 1천회를 넘기는 등 호황기를 맞으면서 산동지사는 광고수익도 올리면서 20년만에 처음으로 수지 평형을 이루고 있다.    흑룡강신문의 변신은 이로써 끝난 것이 아니다. 산동지역이 민족문화의 불모지인 점을 감안하여 진출 초기부터 문학지의 배역도 맡으면서 특별히 “푸른섬”이란 문학면을 개설해 정기적으로 조선족작가들의 작품을 발표했고 해마다 정양학교, 서원장학교, 재청도조선족대학생 작문특집을 묶기도 했으며 2000년 1월에 설립한 연변작가협회 산동창작위원회 설립식도 산동지사에서 진행되는 등 민족문학의 온실로 자리매김해왔다.    지나온 20년을 돌아보면 생존을 위해 치렬하게 경쟁해온 20년인 동시에 더 높이 부상하기 위해 부단히 자신을 타파하면서 변신을 거듭해온 20년이기도 하다. 따라서 앞으로 20년은 성공을 구가하는 20년이 될 것이 틀림없다.    /장학규   
10    뉴스가 있는 곳엔 흑룡강신문이 있다 댓글:  조회:502  추천:1  2017-10-24
  뉴스가 있는 곳엔 흑룡강신문이 있다 흑룡강신문사 산둥지사 설립 20주년 경축행사 칭다오서         흑룡강신문사 산둥지사 설립 20주년 경축행사가 21일 칭다오시 청양구에 위치한 70스포츠센터에서 성대히 진행되었다.    흑룡강신문사는 1997년 4월에 흑룡강성과 산둥성 관련 부처의 동의를 거쳐 정식으로 산둥지사를 설립했다.    당시 개혁개방의 진일보 확대와 중한 외교관계의 건립에 따른 한국기업의 대거 중국진출에 힘입어 많은 조선족들이 전통 거주지를 떠나 연해지역으로 이주해 삶의 터전을 잡았다. 거기에 한국을 위주로 해외진출붐이 가세하면서 고향은 공동현상이 엄중해진 반면에 연해지역은 문화고갈로 심한 갈증을 느끼고 있었다. 특히 민족언론지의 부재로 말미암아 민족사회의 정보가 두절되고 동포간의 교류가 활성화될수 없었다.    산둥지사는 설립과 더불어 칭다오, 옌타이, 웨이하이시를 중심으로 산둥성 전역을 아우르면서 민족엘리트를 찾고 민족의 뉴스거리를 발굴하는데 주력했다. 취재와 발행으로 한달에 신 네컬레를 버렸다는 박영만 현임 지사장의 일화가 유명하다.    특히 1997년 11월부터 지역 전문지인 ‘연해뉴스’를 발간하기 시작하면서 산둥지사는 현지 민족사회의 구축과 발전에 일익을 담당해왔으며 ‘연해’라는 타이틀에 어울리게 산둥을 떠나 멀리 상하이, 광둥, 저장 등 동부연해지역과 해외 조선족 뉴스에도 주목했다. 뉴스가 있는 곳엔 흑룡강신문사 기자가 있었고 민족이벤트가 있는 곳엔 흑룡강신문이 참여했다. 어떤 민족행사에는 신문사 기자 신분이 아닌 심부름군 또는 잔일을 도맡아하는 역할도 놀았다. 덕분에 흑룡강신문은 산둥을 비롯한 연해 민족사회 형성의 견증인과 기록인이 되었고 거의 모든 지역 민족단체의 형성에 참여한 주체가 되기도 했다.   산둥지사 직원들은 출퇴근 시간이 따로 없이 밤을 지새우기가 일쑤였으며 휴일을 반납하고 무보수 특근을 밥먹듯 해왔다. 6명 인원이 취재, 편집, 교정, 조판, 광고 업무를 겸하면서 1년에 3~4백 편의 기사를 써냈다는 것은 가히 기적이라 일컬을만 한 일이다.    이날 경축행사에서 박영만 지사장은 인사말을 통해 “산둥지사 기자들은 마치 훨훨 타오르는 횃불과도 같이 우리 민족이 수요하는 곳이라면 발벗고 달려갔으며 자신의 신근한 땀방울로 조화로운 한민족사회의 융합에 중대한 기여를 하였다”면서 “민족언론이라는 숭고한 사명감과 민족사업에 대한 끓어넘치는 열정이 없으면 20년 동안 견지해온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고 자평했다.    내빈 대표로 칭다오조선족기업가협회 전동근 회장이 축사를 올렸고 독자 대표로 해안선잡지사 김재룡 총편이 발연했으며 일본 상장회사 이지반화장품그룹 중국총대료인 이광춘 사장이 축하인사말을 했다.    대회에서는 20년간 지사의 발전에 큰 경제적 지원을 준 김창호, 박성진, 이광춘, 김옥, 정도진 등 5명에게 감사패를 전달했으며 김영숙, 김철웅, 한검파, 김광춘, 박영권, 김준영, 권창순, 강상일, 최광식, 이계화, 한춘화, 한정호 등 12명 광고주에 감사장을 수여했다. 아울러 지사에 도움를 주고 지사와 호흡을 맞추어 민족의 화합과 발전에 기여한 기업협회, 여성협회, 노인협회, 대원학교, 70스포츠센터, 연변상회, 작가협회, 월드옥타, 향우회를 비롯한 칭다오, 옌타이, 웨이하이 지역 각 단체장들에 공로장을 전달했다. 동시에 최재문, 장순진, 림동호를 비롯한 12명 통신원에 격려장을 수상하고 신문사 직원들에 공로상 및 우수직원상을 표창했다.    이날 행사에는 주칭다오 대한민국총영사관 정윤식 영사를 비롯하여 산둥성 각 지역 조선족단체 대표 및 베이징, 상하이, 하얼빈 등 곳에서 온 내빈 400여 명이 참가하여 성황을 이루었다.    한편 칭다오조선족교사친목회, 칭다오아리랑민속예술단의 축하공연이 있었으며 황지희, 황금희, 남혜금씨 등 가수들이 무대에 올라 열창했다. 공연 사이사이에 추첨행사도 진행. 추점 1등상에는 아시아나항공 옌타이지점에서 옌타이-일본 왕복항공권 1매를 내놓아 축제분위기를 더해주었다.    경축행사에는 산둥에 있는 대부분 한겨레 단체 대표와 유수의 지명 인사들이 참가 및 협찬했으며 멀리 베이징민족출판사, 저장성 사오싱기업협회, 중국砖瓦工业协会 부회장, 상하이한교상무유한회사 대표외 한국 광신대학교를 비롯한 해외에서도 참석 또는 축하를 보내왔다.    /장학규 기자  
9    럭키 서울 댓글:  조회:381  추천:1  2017-09-15
  리포트 럭키 서울 장학규       2010년 9월 3일 한국시간 12시 10분.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한 시간이다. 이제부터 서울관광마켓팅(주)이 주도하는 “2010한국방문의 해 – 서울과 함께” 프로젝트에 따라 3박 4일간의 서울 취재 일정에 들어가게 된다. 나에게 서울은 완전히 생소한 도시는 아니다. 7년전인 2003년 8월에 4박 5일 일정으로 한국 관광을 와서 잠간 서울을 말 타고 꽃 구경하듯 스쳐지난 적이 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한결같은 느낌은 세관인원들의 너무 딱딱하고 사무적인 인상이다. 한 나라의 관문이 지나치게 경직된것이 아니냐는 위구심은 여전했다. 하긴 매일같이 수천수만의 이국인을 대해야 하는 그들에게 아니 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웃게 하는건 과분한 요구일수도 있고 또한 격에도 어울리지 않을지 모른다. 아무튼 1시간 30분남짓한 동안 려객기에서 대한한공 스튜디어스들의 밝은 모습과 친철한 서비스를 목격하면서 무척이나 들떴던 가슴이 차분히 가라앉는 순간이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무엇보다 기분을 상쾌하게 만든건 화청한 가을날씨였다. 며칠전부터 내려진 태풍주의보때문에 은근히 걱정했었는데 괜한 노파심이였다. 높이 들린 하늘에 흰 구름이 유유히 떠돌고 하느작 불어스치는 바람은 퍼그나 시원했다. 역시 서울은 친환경적인 도시라는 감각이 들었다. 그것보다 더 반전적인 기분 전환은 공항 교통안내카운터에서였다. 이번 걸음은 짧은 시간내에 많은 코스를 소화해야 했기에 오후 4시의 서울관광마켓팅(주)과의 미팅전에 꼭 들러야 하는 코스가 있었다. 경복궁이였다. 영욕의 5백년 조선을 주도했던 그 현장은 한겨레 피를 이어받은 모든 이들이 꼭 가봐야 하는 곳이기도 했다.  공항버스터미널에 가서 리무진 로선을 확인해도 될걸 왜 굳이 교통안내카운터에 찾아갔던지 모르나 내가 화들짝 놀라 당황할 정도로 따뜻한 배려가 돌아왔다. 내가 중국동포임을 확인한 예쁘장한 안내아가씨는 메모지에 몇선 타고 어디서 내려 어떻게 무엇을 갈아타고를 깨알같이 박아써주고는 그것도 미심쩍었는지 한사코 괜찮다는 나를 공항밖으로 안내하여 승차역까지 가리켜주었다. 코마루가 쩡해나는 순간이였다. 례절 바른 내 민족의 나라가 다르긴 다르구나 하는 진한 감동을 받았다.  이렇게 한국에서의 첫 시작은 희비가 엇갈렸다. 리무진을 타고 경복궁으로 가는 시간은 내내 태조와 정도전, 그리고 무학대사간에 엉키고 설킨 고사가 머리속에 떠올랐다. 정도전의 로련함과 그 라이벌이였던 무학대사의 능청함이 착시적으로 눈앞에 펼쳐졌다. 사진이나 뉴스에서 가끔 보아왔던 경복궁은 생각처럼 그렇게 작은것도 아니였다. 대수 반시간이면 넉넉할거라고 어림잡았던 자신의 유치함을 비웃으면서 나는 자칫 미팅 약속을 어길가봐 분주히 뛰여다니지 않을수 없었다. 궁궐의 크기는 아무래도 중국 북경의 고궁에 비기기에는 너무 무리인듯 싶었다. 그러나 그 기세와 당당함은 절대 그에 손색이 가지 않았다. 특히 단청이 기막히게 화려하고 사치하고 정교했다. 중국 어디에서도 보아온적이 없는 그 섬세함과 조화로움에 한동안 대뇌는 정지상태에 놓이기도 했다.   마침 한무리의 중국관광객이 지나치고있었다. 어디서 왔냐고 물으니 산동성 성소재지 제남시에서 배낭려행을 왔다고 했다. 나는 청도에서 왔다고 하니 한동네 사람 여기서 만났다며 반갑게 손들을 내밀었다. 산동성의 면적은 남한의 1.5배, 인구는 1억명에 가깝다. 그걸 한동네로 아는 중국인들이다.  경복궁이 한국 관광의 첫코스라고 한다. 인상이 어떠냐고 물으니 자신을 공무원이라고 소개한 왕씨 성의 30대 녀성이 앞질러 “대장금 드라마에 들어온 느낌이예요.”하고 엉뚱한 대답을 했다. 중국 대륙을 휩쓴 “대장금”의 저력을 확인하는 마당이였다. “대장금” 세트장이 따로 있다고 알려주는데 기업을 한다는 진씨 남성이 “그런데가 있어요? 코스를 변경해서라도 한번 가봐야겠네요.” 하고 역시 주제를 떠났으나 별로 기분 나쁘지 않은 말을 했다.  별수 없이 내가 기억을 더듬어 자료에서 본대로 경복궁은 조선 왕조의 법궁(法宮)으로 1395년에 창건하였으며 “경복(景福)”은 시경에 나오는 말로 왕과 그 자손, 온 백성들이 태평성대의 큰 복을 누리기를 축원한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두 나라가 공유하고 있는 문화에 대해 그들은 신기해마지 않았다. 그렇게 그들과 어울려 국립민속박물관까지 함께 가면서 나는 생각지도 않게 서툰 가이드 역할을 맡게 되였다. 반만년 력사를 단 10여 분에 설명한다는것은 어림도 없는 일이였다. 모형과 자료를 살펴보면서 수박 겉핥기로 멘트하면서 진땀을 뺐다. 옆에 붙어서서 진지하게 듣던 진씨는 언어불통때문에 출국전에 인터넷으로 가이드를 수배하였는데 그저 길안내 수준이라고 가만히 속삭였다. 다음에 또 올거냐고 물으니 한국이 참 마음에 든다면서 비즈니스거리가 생길거 같은 예감도 있어 꼭 다시 올거라고, 그것도 자주 올거 같다고 대답했다. 아는대로 하나투어, 모두투어 등 한국 유명 려행사를 알려주면서 무의식적으로 대방의 팔목을 건너다보던 나는 아차 뒤통수를 쳤다. 서울관광마켓팅(주)과의 미팅시간이 눈앞에 다가온것이다.   택시를 잡아타고 호텔에 무거운 짐을 풀고 부랴부랴 미팅 장소인 프레스센터로 달려갔지만 약정 시간을 20분이나 넘겨버렸다. 서울마케팅의 문연미씨가 예쁜 모습만큼 반갑게 맞아주었다. 얼마나 미안하고 송구스럽던지. 서울시청측으로부터 "서울관광리포터" 위촉장을 받으면서 이제는 나도 서울 시민이 되여진듯 뿌듯했다. 고국에서의 첫날밤은 불면의 밤이였다. 잠자리가 바뀐 원인도 있겠지만 그보다 영문모를 흥분과 격동이 모질게도 나를 잠들지 못하게 하였다. 취재 계획대로라면 이틑날은 서울의 옛거리를 활보하는 코스였다.  우선 명동을 가보기로 하였다. 친구 하나가 청도에서 “명동”이란 보신탕집을 운영하는데 그야말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요리 솜씨도 물론 중요하겠지만 가게명이 좋았지 않았냐고 항상 생각하고있었다.  명동은 자자한 명성과는 달리 그렇게 요란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무엇이라 짚이지 않으면서도 자꾸 어딘가 다르다는 느낌을 털어버릴수 없었다. 여의도나 청량리처럼 번화하지만 세계 어느 큰 도시에서나 쉽게 볼수 있는 그런 동네가 아니였다. 꼭 한국만이 가지고있는 그런 마을이여서 명동은 다분하게 이색적인 분위기였다. 기분 좋게 이곳저곳 기울이다가 아무 가게나 무작정 들어갔다. 복장가게였다. 전에 제주 이마트에서 디자인 멋진 옷견지 여러벌 사갖고 집에 가서 보니 일매지게 “메이드인 차이나”였던 기억이 되살아나 제작사부터 살펴보니 온통 알아보지 못할 외국글 아니면 한글로 되여있어도 외래어여서 알아볼수 없었다. 가격도 만만치 않았다. 고개를 갸우뚱하고있는데 주인아저씨인듯한 후더운 인상의 50대 남성분이 다가왔다.  “중국 동포 아니십니까?” “아, 네…” 눈썰미 하나 기막히다고 감탄하며 외마디 대답을 하다가 내친김에 되물었다. “여기 중국 사람 많이 옵니까?” “아니,별로요. 일본손님은 많이 오는 편인데 중국 사람은 흔치 않아요.” 그렇게 마주한 자리에서 주인아저씨로부터 패션 유행을 선도했던 명동의 자랑찬 력사를 살짝 얻어듣는 행운을 가졌다. 현재도 일당 백만명의 인구가 드나드는 곳이기는 하지만 밤에는 인구공동화 현상이 심하다는 얘기도 숨기지 않았다.  허탈한 감정이 엄습해왔다. 솔직히 나는 와자자하고 삐까번쩍하는 대형 타운보다는 인정미 있고 고풍적인 전통 터전을 더 선호하는 편이다. 세계화 추세와 더불어 이젠 이런 옛거리도 흔치 않을것인데 중국처럼 아예 전통거리 또는 테마거리로 개조하여 관광프로그램에 합류시키면 좋지 않을가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주인집아저씨는 그대로 빈손으로 나오는 나에게 환한 모습으로 근처에 남대문시장이 있으니 그리로 가면 싸고 좋은 선물을 마련할수 있을거라는 충고를 아끼지 않는 센스도 보여주었다.  서울시민의 성숙한 모습에 굿소리가 저절로 나갔다. 벌써 여러번 그런 감탄을 했었다. 리무진을 가리켜주던 공항 아가씨부터 택시기사 아저씨의 자상한 서비스, 그리고 끝없이 이어지는 차량들의 질서정연한 질주와 거의 완벽에 가까운 지하철 시스템  등은 그대로 선진적인 서울의 참모습이였다.  엎딘 김에 절이라 했던가? 단김에 쇠뿔 뽑는다 했던가? 아무튼 다음 행선지를 남대문시장으로 돌렸다. 아예 계획 자체를 접고 그때그때 사정을 보아서 다음 코스를 잡는게 좋겠다는 생각이 앞섰다. 남대문시장은 한번 다녀간적이 있는 곳이였다. 7년만에 다시 만나는 남대문시장은 그때와 별로 달라진거 같지 않았다. 쿵닥쿵닥 음악소리가 사처에서 울리고 호객소리도 다투듯 들려왔다. 재래시장은 어디나 거의 비슷한 모양이였다. 숭례문을 기점으로 눈뿌리 모자라게 끝없이 이어진 상가에는 이름을 부를수 있는 물건이면 모두 있는듯 싶었다.  잠시나마 내 사명을 잊었다. 와이프와 귀여운 딸, 그리고 회사 직원과 이웃들에게 줄 선물을 마련하다보니 두시간 넘어 소진한거 같았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서야 점심시간을 한참이나 넘겼다는 사실을 알게 되였다.   두리번거리는데 저 멀리에 아주 익숙한 간판이 보였다. "해흠루"라는 중국간판을 내건 식당이였다.  주인은 40대 장년이었는데 중국 흑룡강에서 왔다고 했다. 가끔 아르바이트로 중국에서 오는 손님들을 안내하기도 한다면서 앞으로 한중을 오가면서 보따리 장수도 겸해볼 타산이라고 했다. 이젠 보따리 장수도 컨테이너로 한다고 산동에서 취재한 정보를 얘기하자 깜짝 놀라기도 했다. “아, 벌써 그렇게 변했어요. 전에는 집채같은 짐가방을 끌고 밀고 숱한 사람들이 오갔는데…” 인천과 산동성 위해를 오가는 위동페리가 승선 가격이 오른데다 한국정부에서 기준 초과부분에 세금을 징수하면서 보따리가 수지 맞지 않아 많이 한산해졌다고 얘기하자 별로 맥빠진 모습이였다. 시장을 업고있는 이점을 리용하여 중국계 관광객을 전문 접대하는 식당으로 업그레이드하는게 좋지 않냐고 제의하자 똑같이 김빠진 공이 된 표정이였다. 관광 단체가 가끔 오기는 하는거 같지만 머무는 시간이 길지 않고 식사까지 하는 경우는 거의 제로라는것이였다. 려행부문를 오래동안 전담해왔던 경력때문인지 서울의 관광시스템에 많이 아쉬운 느낌이였다. 쇼핑 천당을 관광단체에 접목시켜 관광, 쇼핑, 음식, 레저 등을 활성화시키는것도 좋은 출로가 아닐까?! 늦은 점심을 치르고 동대문에 다녀왔다. 여흥은 여전하여 다리 아픈줄도 모르고 돌아다녔다. 눈뿌리 모자라게 구경거리가 많았지만 별로 혼자서 감흥을 느끼는거 같아 못내 아쉬웠다. 그러나 인사동에서 꽤나 큰 충격을 느꼈다. 중국 상해의 청황묘(城隍廟)나 항주의 허방가(河坊街)나 청도의 즉믁로(卽墨路)와 아주 흡사한 거리였다. 다르다면 관광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는 중국의 그것과 달리 어딘가 한산한 모습이였다. 다닥다닥 붙어있는 골동품 가게들, 고서, 서예작품, 도자기, 악세사리 등 너무나도 볼거리가 많은 특색의 이 동네가 이렇게 외롭게 방치되여있는 그 리유를 나는 알수가 없었다. 중국의 경우라면 “조작(炒作)”이라고 해서 벌써 가감없이 려행사를 끌어들여 관광객들로 꽉 채워넣었을것이다. 상기 중국 동네들은 그렇게 현실로 되여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그 상술만은 배워도 무방하지 않을가싶다. 인사동에서 그런대로 마음에 드는 골동품 몇가지를 고르고 효자동으로 건너갔다. 여긴 관광코스로 활용해도 좋을거 같았다. 민담과 같은 구수한 옛이야기에 고풍의 구조물이 어울려 하나의 코스가 되여지는것은 세계적인 관례이기도 하다. 인사동을 이곳과 접목시켜 쇼핑코스와 관광코스를 유기적으로 이어놓으면 꽤나 전망이 있을거 같았다. 그런데 여직 접촉한 서울관광코스에는 상기한 시장이나 동들이 한번도 언급된 적이 없었다. 그만큼 한국의 려행사들은 이미 어떤 경로로 국외에 잘 알려진, 이를테면 경복궁이나 한류로 인해 잘 알려진 세트장이나 세계적으로 유일한 분단 현장인 판문점 등을 판매하는데 열성을 보이는 대신 새로운 코스 개발에는 많이 라태하고 회의적인거 같은 인상이다.   저녁을 먹고 호텔에 돌아왔을때는 밤 10시가 넘어가고있었다. 분주하게 돌아친만큼 사흘째는 좀 한가한 편이였다. 중요한 코스는 다 들른 편이고 이제 편하게 서울시민이 되는 순서였다.  래일은 출국해야 하는 날이다. 오후 1시 5분 항공편인데 국제항공편은 2시간전에 도착해야 하는게 룰이다. 서울에서 인천까지 가는 시간을 계산하면 10시엔 호텔에서 떠나야 한다. 그리고 그전에 이번 취재건의 조직측인 서울관광마켓팅(주)과의 미팅도 약정되여있다. 그러니까 마지막날은 나에게 차려지는 시간이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우선 신풍역 1번 출구에 위치한 흑룡강신문사 한국지사를 찾았다. 뒤늦은 신고식이였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신문사 산하의 "다문화협회"에서 모임이 있었다. 김청호 다문화협회장이 협회 설립 한달동안의 활동과 그 취지를 설명했다. 타문화권에서 온 외래인들이 한국사회에 융합되여 밝고 맑은 한국을 만들어가는데 작은 힘이라도 보태자는것이라고 했다. 그러자면 무엇보다 한국에 헌신하는 마인드를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날 모임에는 박진엽 한국지사장과 김명환 편집국장을 위시한 20여 명의 회원이 동참했다.  형제사인 산동지사에서 왔다고 꼭 점심을 대접하겠다는걸 한사코 취재라는 핑계로 물리치고 곧바로 청계천을 찾았다. 고가도로를 헐어내고 청계천을 만들 당시 말썽 많던 일이 눈에 선했다. 그래도 시멘트보다 저렇게 휴식공간이 만들어진게 보기에 더 좋은거 같았다. 소문이 자자한 63빌딩도 올라가보았다. 서울관광상품에 가끔 올라있는 메뉴가 “63빌딩”이다. 오후에는 꽉 닫힌 생활을 영위하던 해외 동포들의 눈을 틔워주고 귀를 열어준 KBS방송국을 찾았다. 남의 눈에 들킬가봐 이불을 뒤집어쓰고 밥곽만한 라디오를 귀에 대고 “보고 싶은 얼굴, 그리운 목소리”를 경청하던 30년전의 일이 불현듯 떠올라 눈시울이 붉어지기도 했다. 그렇게 해외동포들에게 익숙하고 다정하고 고마운 KBS였다. 그 전파를 통해 “럭키 서울”이라는 노래도 배웠었다.   서울의 거리는 태양의 거리 태양의 거리에는 희망이 솟네 타이프 소리로 해가 저무는  빌딩가에서는 웃음이 솟네 너도나도 부르자 희망의 노래 다 같이 부르자 서울의 노래 에스 이 오 유 엘 에스 이 오 유 엘 럭키 서울   아, 정말 그랬다. 서울의 거리는 비전을 향해 달리는 “태양의 거리”임에 틀림없다. 생기로 끓고 활력이 넘치며 지적인 서울은 그대로 영원히 가슴 깊이 남을것이다.  2009-2010년 세계도시경쟁력 보고에 따르면 서울은 종합경쟁력, 경제규모부문, 국제영향력부문 등에서 세계 10위권에 랭킹되여있다. 그만큼 서울의 국제적 지위와 위상은 세인이 공인하는바이다. 아울러 이제 세계인의 눈길은 서울로 쏠리고있다.  어쩌면 이번 걸음에 찬사보다 콕 찌르는 말을 더 많이 한거 같다. 접시 깨지는 소리로 들어주시지 말았으면 하는 바램이다.  행운의, 길운의, 대운의 서울을 축복한다. 럭키 서울!   2010년 9월 5일 밤 12시 서울 M호텔에서   
8    황해의 시련 댓글:  조회:487  추천:1  2017-08-23
황해의 시련 청도에 진출한 겨레들     황해연안의 명주 청도는 중국에서 최초로 국외에다 개방한 항구도시중의 하나이다. 북으로 발해만경제권을 업고 있고 남으로는 최대 국제도시인 상해와 무릎을 맞대고 동으로는 조선반도와 일본을 향하고 서쪽은 광활한 중원땅을 안고 있는 청도는 그 우월한 자연 지리적환경과 따스한 기후(가장 추울 때 령하 10도 정도)로 하여 한국투자인들의 눈길을 모으는 초점으로 되고 있었다. 거의 매일이다싶이 유럽식의 건축물들이 일떠서는가 하면 촌사람들도 제법 변속자전거를 타고 출근길에 나서고 있었다.  그중 정식 생산에 들어간 한국기업이 2백 여개로 외상총수의 70프로를 차지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미 투자가 시작되였거나 허가가 나와있는 기업은 더욱 많았다. 항목으로 보면 옷, 신, 양말, 완구, 피혁 등 봉제제품회사가 대부분이고 체육용품, 전자재부속품 등 일손을 많이 쓰는 가공업체가 그다음이였다. 그곳 조선족들의 말대로 “새비들의 진출”에 불과한 것이다.  그만큼 명성높은 대기업의 투자는 공백이나 다름없고 그대신 인건비 높은 한국에서는 도무지 경쟁해나갈 방법이 없거나 이미 파산되였던 기업들이 주도였으니깐. 그래서 그 설비란 것들을 보면 눈이 감기게 졸렬하거나 형편없이 낡아빠진 것들이였다.  한번은 한국에서 기계설비가 들어와서 기중기차로 작업현장에 “모셔”가게 되였는데 반쯤 가다가 나무무지처럼 와그르르 무너져내리는 것이였다.  이런 현상에서 우리는 우리나라 외자인입의 피동성과 맹목성을 쉽사리 보아낼 수 있지만 그 우렬판단은 정부측에서 할 일이다. 어쨌던 이런 기업들이 중국에서의 재기를 맛보고 있는 것도 사실이며 또 실제적으로 청도에 많은 혜택을 가져다준 것도 사실이였다. 몇만을 헤아리는 여유로력을 해결해주었고 전기, 물, 연료 그리고 여러가지 원자재를 소비해주고 있으며 해관세를 포함한 여러가지 세금을 물어주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여러가지 유흥업소와 봉사업체들이 그들때문에 날따라 활기를 띠고 있었다. 그중 가장 돌출한 것이 가라OK인데 거의 모두가 한국노래들을 갖추어놓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대구시와의 자매결연후 기자회견에서 유정성(俞正声) 청도시장은 흐뭇해서 멀지 않은 장래에 청도에다 한국촌과 한국학교를 건설하겠노라고 선포했다.  한국기업이 있으니 자연 중국조선족도 있게 되였다. 의사소통의 교량이라는 이 점만도 조선족을 필요로 했던 것이다. 당지 인사들의 말에 의하면 대략 7,8년전만 해도 조선족인구는 십단위로 계산되였단다. 하지만 오늘에 이르러서는 그 단위가 천으로 뛰여올라 대략 3천에서 4천 정도로 불어났다. 물론 정부측 통계가 아니고 주먹구구라 하지만 결코 이 수자보다 적지 않다는 것이 대부분 조선족들의 견해였다. 뿐만 아니라 날마다 증가되는 추세였다. 따라서 취업난, 대우의 하강 등 문제도 매우 첨예해졌다.  하다면 청도의 조선족들은 구경 어떻게 보내고 있는가? 그들의 사업 및 생활상태는 어떠하며 그들의 희로애락은 어떤 것들인가? 이러한 것들을 알고저 청도에 있는 8개월간 필자는 청도시 7대구와 그 산하의 즉묵, 교주, 래서 등 3개 시를 두루 밟아보았다. 총적으로 기쁨보다 고통이 더 많았고 자랑보다 서러움이 더 컸다. 필자가 글을 쓸 목적임을 안 후에는 자기들이 보고 겪은 일들을 실례로 들어가며 그 리해득실을 상세히 알려주기도 했다.  “이런 사실들을 꼭 세상에 알려주시오. 지금 고향에서는 청도를 서울인가 압니다. 꼴을 먹어도 알고 오는 것이 좋겠는데 말입니다.” 이것은 한국기업에서 중견으로 일하는 김모씨가 필자의 손을 부여잡고 부탁한 말이다. 그는 어찌어찌하다가 1천원을 담보금으로 잡혀놓고 마지못해 붙어있는 사람이였다.  담보금 말이 나온 김에 해석이 있어야겠다. 어떤 회사에서는 조선족들이 청도에 많이 몰려든 것을 턱대고 입사시 담보금을 낼 것을 강요한다. 리유라면 조선족들이 듬직하지 못하고 자주 자리를 뜨기 때문이란다. 그러나 실제로는 속셈 밝은 한국인들의 리익계산이 주되는 원인이였다. 일단 서약서란 것을 쓰고 담보금을 낸 후에는 그 어떤 정당한 요구도 모두 거절당하고만다. 마땅히 올려줘야 할 봉급도 아니 올려주고 뚱딴지같이 무슨 명목을 내세워 많지 않은 봉급마저 제대로 내주지 않는다. 그런줄도 모르고 처음 청도에 오는 조선족들은 무작정 서약서에 사인한다. 좀 깐깐하게 볼라치면 “돌아가시오.”하는 판이라 그럴수밖에 없는 것도 사실이였다. 문제는 조선족이 너무 많이 몰려들었기때문이였다. 투자를 하려는 사람보다 취업위주가 대부분이였기에 경쟁이 치렬하였고 상대방으로 하여금 배부른 흥정을 하게 하였던 것이다.  가령 조선족이 없다면 어떻게 될가? 당장 생산이 중지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이런 근심은 하지 않아도 되였다. 아직도 청도거리바닥엔 취업을 하지 못한 조선족이 수백을 헤아린다는 것을 한국경영인들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때문이였다.  필자가 몸 담고 있는 회사만 해도 7명의 아가씨가 담보금 천원에 묶이워있었다. 그들의 평균로임은 250원정도이고 모두 고중졸업생이지만 일반직원(대부분 초중생)과 마찬가지로 현장에서 일하고 있었다. 언제 부르면 수시로 일어나 통역을 해야 하고 조금만 늦어도 핀잔당하기가 일쑤였다. 그중 설씨성을 가진 치치할아가씨는 필자가 돌아올무렵 어린애같이 엉엉 우는 것이였다.  “장선생이 가시면 누가 또 바른 말을 해주겠어요. 저도 엄마가 보고파요. 여기서 돈도 못 벌면서 개고생하는 것도 모르고. 흑흑…” 돈 천원에 매여서 오도가도 못하는 동포아가씨, 21세 애어린 나이에 어머니가 얼마나 보고싶겠냐만 그 가증한 서약서때문에 2년을 참아야 하는 동포아가씨를 필자는 위로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고향에서 지금 하는 일만큼 힘을 내면 그 곱배의 돈을 벌 수 있는 것도 무릅쓰고 회사에 온 까닭은 무엇일가? 한국회사가 돈을 무더기로 안겨줄줄 알았던가? 그래도 그녀는 행운아인셈이였다. 필자가 여직껏 만나본 사람중에서 취업하지 못한 시일이 가장 오랜 사람은 계서에서 온 23살난 김군이였다. 렴치를 무릅쓰고 사돈집에, 친구들 집에서 1년이나 얹혀 살면서 분주히 뛰여다녔지만 운명의 신은 시종 미소를 지어주지 않았다. 그러나 김군 역시 가장 불행한 사람은 아니였다. 교하에서 온 최씨는 믿을데도 없는 형편에 돈이 뚝 떨어져서 피를 팔아 집으로 돌아갈 로비를 마련했던 것이다. 궁지에 빠진 림구의 박모씨는 같은 려관에 든 손님의 가방을 훔쳤다가 감방신세를 지고. 이러루한 일화는 많고도 많다.  고난의 취업길, 귀숙을 찾은 사람이나 못 찾은 사람이나 똑같이 고통스럽다는 것은 한두가지 실례로 해석이 될 현상이 아니다. 어차피 도시진출은 막을 수 없는 또 막을 필요도 없는 대추세이다. 그러니 잘 되였던 못 되였던 그런 시비는 력사에다 맡겨버리고 우선 먼저 눈앞의 생활상, 인간상부터 진실하게 살펴보기로 하자.  청도의 조선족들은 그가 혼자 왔든 여럿 왔든 3년이 되든 석달이 되든 한결같이 집이란 것이 없다. 혹자는 회사 숙사에, 혹자는 세집을 맡고 생활한다. 그 옛날 땅의 부름을 받고왔던 1세들은 흙집이나마 자기 집이라고 이름을 지어서 살았었는데 오늘날 그 후대들은 땅을 떠났기에 몸을 덥힐 “굴”도 없는걸가. 가방과 보따리들이 여기저기 널려있고 방바닥에는 별 오가잡탕들이 지저분히 쌓여있는 것이 마치도 려관같은 느낌이였다. 수시로 머나먼 려행길로 떠나갈듯한 태세들이였다.  래서의 하씨는 금년에 49세인데 다섯식구의 호주였다. 6급 전공이 어느 정도의 기술소유자인지는 필자로서 알 수 없지만 자격증명서까지 보이며 으쓱해하는 것을 보면 전업수준이 꽤나 높은 모양이였다. 룡강현출신이라니까 그곳에 처가를 두고 있는 필자와는 연고가 있는 사람인셈이였다. 퍼그나 반갑다며 한사코 자기 집으로 끌기에 가보았더니 글쎄 이런 법이라구야. 10평쯤 되는 집안에 두치두께의 스폰지 석장을 펴놓고 구들 겸 침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거기서 밥도 먹고 잠도 잔다는 말인데 남녀성인 5명이 몇달동안 그렇게 살았다는 것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그날 그 “밥상”을 마주하고 쓴지 단지를 모르게 한근 술을 들이켰었다.  “돈을 벌어서 무얼합니까? 침대두 사구 밥상두 사구 좀 사는 것처럼 꾸미면 안됩니까?” 주기를 핑계대며 단도직입적으로 질문을 들이대였더니 그 대답 또한 절승경개였다.  “그 사람들을 어떻게 믿는다구 그따윌 다 갖추겠나. 래일 퇴사하라면 하는 판인데.” 마찬가지로 한국회사에서도 조선족을 크게 믿어주지 않았다. 그도 그럴것이 조선족들이 자주 말썽을 부리기 때문이였다. 쩍하면 싸움질하고 도적질하고 며칠 일하고는 나는 가겠소 하고 나눕는다.  로산구에서는 이런 일이 있었다. 하루 저녁은 조선족  6명(흑룡강 3명, 교하 3명)이 술을 잔뜩 마시고 거리에 나갔다가 길 가는 한족청년이 자기네를 본다고 다짜고짜 접어들어 육장벌레가 되도록 팼다. 중국 옛말에 사나운 룡도 지방뱀을 이기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영문 모를 매를 맞은 한족청년이 가만 있을리 만무했다. 친척, 친구 50여명을 동원하여 회사에 찾아왔는데 단꿈에 빠진 영웅들을 하나 하나 찰떡 쳐준 것은 물론 회사의 쏘나타승용차까지 훌딱 뒤집어놓고 가버렸다. 사장이 정신 잃게 놀란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고 그 경제손실은 또 얼마인가. 즉묵시에서도 이와 류사한 일이 발생했었다. 다르다면 지방애들이 너무 애를 먹여서 조선족 20여명이 집단적으로 대항했던 것이다. 결과 량쪽에서 병원에 입원한 수가 30여명 되였고 조선족은 빠짐없이 퇴사를 당하고말았다. 이런 대규모적인 충돌은 물론 국부적이다. 그러나 조선족을 먹칠하기에는 충족했다. 미꾸라지 한마리가 강물을 흐린다고 하지 않는가. 하물며 회사의 돈이나 물건을 가지고 튀는 사건들이 비일비재인데야. 모 회사에서 무역일을 보던 정아무개는 어벌 크게 단번에 12만원의 거금을 가지고 어디론가 튀여버렸다. 필자가 있던 회사에서도 박아무개란 사람이 소가죽을 가져가다가 들키워서 크게 망신을 당하고 퇴사를 강요받은 일이 있었다.  “보시다싶이 조선족은 우리에게 많은 실망을 주었습니다. 처음에는 동포라는 점에서 되도록이면 중임을 맡겼댔지만 지금은 그것이 꿈같이 무서워지는 실정입니다.” 모 회사의 리부장이 필자의 질문에 정색해서 하는 대답이였다. 그만큼 현재 조선족의 지위란 것은 운운할 나위도 없이 밑바닥이였다. 사무실인원중에서 최하층인 통역 겸 관리인원인 조선족들은 말그대로 하인과 같은 존재였었다. 그러니 현미경으로나 알아낼 수 있는 극히 적은 몇몇을 내놓고는 영원히 진급과는 인연이 없었다. 한국인은 입사하자마자 차간주임 명찰을 차고 다니고 얼마후면 계장, 과장으로 승급하지만 조선족은 재능이 아무리 뛰여나도 그 어떤 명분도 주지 않는다. 관리인원이란 명색뿐이지 실지는 심부름군이나 다름없는 존재였었다. 한국인들이 무엇을 어떻게 하라고 지시를 내리면 그대로 할뿐이지 수하직원들을 지배하고 거느릴 아무런 권리도 없었다. 원래 눈치밥을 잘 먹는 중국직원들이 그 실정을 알아내고는 “네가 뭐기에 이래라 저래라 하느냐?”며 빡빡 대드는데 복통이 아니 터질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한가슴 가득하던 웅심은 차츰 사라지고 따라서 무능하고 적극성이 모자란다는 평판을 받게 된다.  림학원 출신의 허씨는 회사에 다닌지 2년이 되여서 일에 환했다. 원체 총명한데다가 직심이여서 성적이 돌출했지만 겨우 주임의 자리를 차지했을뿐이다. 입사한지 두달이 되여서 계장으로 된 스무나문살 되는 한국총각이 그앞에서 거들먹거리다가 된 코빵을 맞았다며 림씨는 서글프게 웃는것이였다.  “일에 행방이 있나요. 제딴에는 한국인이라고 대단한줄로 알겠지만, 일을 핑계로 마구 시켜먹었지요. 사후에 눈치를 알고 노발대발했지만 회사 규정을 들이대며 따졌더니 말문이 막혀하더라구요.” 그나저나 우선 우리 자신부터 가슴에 손을 얹어야 할 것이다. 무엇무엇해도 독립의식이 강하지 못한 것이 제일 큰 흠집이였다. 한사코 남에게만 의지하려 하고 앉아서 뒤장을 보려한다. 서로 책임을 밀어버린 덕에 응당 받아야 할 대우도 받지 못한다.  어느 회사에서는 전무라는 사람이 채용기에 얼마를 준다고 명확한 표시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돈을 받아본 사람이 없었다. 한국기업에서는 시용기 3개월이라는 규정이 있다. 그 기간이 지나면 채용기에 들어서는데 일반적으로 봉급이 시용기보다 50프로 좌우 늘어난다. 뿐만아니라 일종 “보너스”라는 상금까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받아본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전무가 낯가죽 두껍게 입을 합봉하고 있는데다가 그 권리의 향수자들인 조선족들이 꿀 먹은 벙어리처럼 눈치만 보고 있으니깐. 한편 우리의 문화소질도 확실히 차했다. 모르는 사람은 청도조선족 거개가 대학생으로 오해한다. 실은 대부분이 고중생이고 대학생은 20프로좌우밖에 안된다. 나머지는 초중이나 겨우 다닌 아줌마들과 쉰을 오르내리는 젊은 로인들과 사회부랑배들이였다. 초중생은 물론 고중생들도 남다른 재능을 갖고 있지 못했다. 그런가 하면 전업공부를 했다는 대학생들도 기업에서는 별로 쓸데없는 문과생이 대부분이였고 그나마 거개가 영어를 모르고 있는 형편이였다. 한국회사에서는 기계명칭으로부터 보통 술어에 이르기까지 영어를 통용하고있었다. 그러니까 그 마당에 들어서면 대학생, 고중생, 초중생의 립장이 그만 똑같아지고만다. 다같이 영어를 모르고 다같이 일에 미립이 없는 형편이니깐. 게다가 현장통역이란 것은 조중 두가지 언어를 알고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일이니깐. 그래서 조선족대학생이 한국초중생보다도 못하다는 평가를 들을 때도 있었다. 그 때마다 우리의 학교교육을 다시 검토해보지 않을 수 없다. 연해지구에서 그처럼 활발한 직업교육이 우리 이곳에서는 오히려 저조기에 처해있었다. 청도에서는 새로운 형세에 적응하기 위해 적지 않은 중학교들이 직업학교로 탈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의 중학교들은 아직까지도 좁은 진학선에만 매달리고 있는데 그래서 락방거자가 된 고중생들은 재간은 없고 입만 퍼렇게 살아있는 “기형인재”로 되고말았다. 대학진학도 최종적으로는 직업을 구하기 위해서이다. 그렇다 할때 더 많은 “락방거자”들을 위해서도 직업교육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다음은 외국어선택문제인데 일본어는 시기가 지난 것이라고 본다. 영어야말로 세계적인 언어인 것이다. 한번은 일본회사에 면접을 갔었는데 예상외로 간판부터 상표까지 모두 영어를 쓰고 있었다. 자명한바 영어는 세계인 모두의 필수과목인 것이다. 영어를 모르고서 세계로 진출한다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학교의 외국어가 새롭게 선택되여야 하지 않겠는가고 건의해본다.  보편적으로 말해서 조선족들에게는 많은 흠집이 있었다. 지식구조가 단일하고 성격이 조폭하고 술을 즐기고 자유산만하다. 그러나 일을 할 때는 몸을 내번지고 한다. 천성이 부지런한 민족이니깐. 또 남달리 총명하여 인츰인츰 일을 배워내기도 하여 한국경영인들도 꽤 만족해하는 실정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리용의 목적에 그칠뿐이지 내 사람으로 만들자거나 회사의 기둥으로 배양해 보려는 타산은 꼬물도 없었다. 그렇기때문에 조선족과 한국인의 모순은 날이 감에 따라 더욱 돌출해졌다.  한국인들은 의식적으로 조선족들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상종한다. 식사를 해도 저희들 식탁을 따로 정하고 사무실, 지어는 세면실, 화장실마저 한국인용으로 따로 정해서 쓴다. 마치도 조선족들이 더러운 거지여서 코를 막고 피하려는듯한 인상을 준다. 어찌보면 한심한 인격무시였다. 자존심을 자극받은 조선족들이 일을 제대로 해줄리 만무했다. 따라서 동족의 우애란 찾아볼 자리가 없고 오히려 한족로동자들과 같은 나라 국민이라는 강한 련대성을 보여주고 있었다.  어떤 회사에서는 더욱 한심한 규정들을 내세웠는데 이를테면 근무시간이외에도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는 것이였다. 그 리유는 물론 아주 훌륭했다. 안전을 위해서라는 것이다. 꼭 나가야 할 일이 있으면 청시해야 하는데 그날의 관계자에 따라 그 기분에 따라 허락여부가 결정된다. “오늘은 안돼.” 하면 못나가는 것이다. 주관자의 싸인이 없으면 경비가 내보내지 않으니깐. 이런 규정은 휴일에도 례외가 아니였다. 그래서 회사를 생감옥이라고 형용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저희들은 하루가 멀다하게 술집에 나가면서도 조선족더러 술을 먹지 못한다는 엄명이다. 몇푼 안되는 봉급으로 술집에 갈 주제들이 못되고 하니 숙소에서 짭짤한 채소에 술 한모금 마시며 피로라도 풀었으면 좋으련만 그것도 허용하지 않으니 젊은 나이들이 불이 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번은 모 회사의 몇몇 젊은이들이 한국인들이 밖에 나간 틈을 타서 도적술을 마신 적이 있었다. 오래간만에 마시는 술들이여서 그만 재미가 들어 시간개념을 잊어버리고말았다. 한밤중이 되여 사장님이 거나해서 돌아오는데 숙소들이 환하고 떠들썩했다. 문을 활 열고 들여다보니 술놀이가 한창이였다. 단통 욕사발이다.  “이 개놈들아. 술을 처먹구 있어? 그게 무슨 물인지나 알고나 먹어?!” 이쯤이면 세상은 끝난 거다. 억눌렸던 분노의 총폭발이랄가. 혈기의 젊은이들이 약속없이 후다닥 뛰여일어났고 사장님을 비롯해서 5명의 한국인이 잠간새에 땅바닥에 나누웠다. 할아버지를 부르며 잘못을 비는 것도 사정없이 주먹으로 치고 발로 짓밟았다. 그러고는 보따리들을 둘쳐메고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사장님도 술김에 그랬겠지. 너무하지 않아. 년세도 있고 한데. 사후의 평론이다. 그러나 전후인과를 따져보면 그런 것도 아니였다. 석자 얼음이 하루에 얼구어진 것이 아닌 것처럼 욕설이란 것도 단번에 생기고 늘어나는 것이 아니다. “이 정신병자들아. 왜 아직도 전등을 끄지 않았어?” 장부결산을 하다가 이런 소리에 후다닥 놀라 현장에 뛰여내려가 보면 규정대로 행여나를 념두에 두고 밝혀놓는 전등 하나가 고스란히 켜져 있을뿐이다. 그래도 “녜, 죄송합니다.” 한다.  “상넘들아, 창문도 걸지 않구 뭘해.” 그래서 달려가보면 창문고리가 마사진 것이다. 그래도 “예, 미안합니다.” 한다. 위촉과 타협이 한국인의 오만을 키워주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선족은 아침 일찍 일어나 작업준비를 해야 하고 저녁 늦게까지 현장정리를 해야 한다. 연장작업을 해도 연장비라는 것이 따로 없다. 그래도 즉살날 욕은 항시 떠날 줄 모르고. 고생이란 것을 모르고 곱게 자라난 조선족청년들이 그 고된 로동과 심리적고통때문에 신체가 때이르게 허약해졌다. 서란에서 온 양씨는 반년남짓한 사이에 코피만 해도 서른번은 터졌다고 한다. 연변태생의 최씨는 얄편한 몸으로 남성 두사람몫의 일을 하고 있었는데 한번 드러눕기만 하면 크게 앓을 징조가 뚜렷했다.  아무렴 그렇게 해주어도 봉급만은 변동이 잘 되지 않는다. 돈에 그렇게 짠 사람들이였다. 금방 입사한 한국인에게는 하루 몇십원씩 하는 고급 호텔에 주숙시키면서도 조선족에게 10원을 더 줄 것이냐 하는 문제를 가지고 열삼일을 연구한다. 지난해초만 해도 일반 회사의 시용기 봉급이 보통 3백원이였는데 후에는 260원까지 내려간 회사도 있었다. 그래도 취직자는 줄을 서고. 어떤 도경으로 어떻게 왔든지를 불문하고 어쨌든 외가닥나무에 목매죽을 민족이라는 인상이 진하다.  여하튼 청도는 우리의 의지를 단련하고 능력을 검열하는 훌륭한 고장이였다. 거기에는 눈물도 있고 흔들림도 있지만 동시에 획득과 성공도 있었다. 4년간의 고심참담한 노력끝에 드디여 무역과장으로 날랜 활력을 보이는 김성수씨, 일반 회사 직원으로부터 서비스회사 사장으로 된 한룡태씨, 그리고 한국직원들의 헌신적인 사업정신은 우리에게 산 본보기로 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필자는 청도진출을 정주영옹의 말씀대로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고 평가하고싶다.                                                                                                                                                                                                   1994년 2월                                         
7    항일 로전사 리화림을 찾아서 댓글:  조회:373  추천:0  2017-08-21
겨레의 딸 민족의 넋 항일로전사 리화림을 찾아서      얼마전 기자는 금방 92돐 생일을 지낸 로항일투사 리화림녀사를 방문하였다. 고령임에도 그이의 정신과 담소는 그처럼 정력적이였다.  기자는 첫대면이였지만 그이가 얼마전 써낸 장편회억록 “원정(征途)”의 내용을 그의 얼굴에서 읽을 수 있었다.    1 리화림 녀사는 1905년 1월 6일에 조선 평양시 경창리의 한 빈한한 시민가정에서 4남매중 막내로 태여났다. 본명은 리춘실, 아시아패권을 쟁탈하기 위한 일로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매듭지어 조선의 외교권이 송두리채 뽑힌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된 다사다난한 시대에 태여나서 자란 리화림 녀사는 망국노의 설음을 한껏 맛보았었다. 다행한 것은 인자한 어머니 김인봉씨와 어려운 살림때문에 배움을 빼앗긴 민족독립활동가인 큰오빠 리춘성씨의 적극적인 추진하에 미국인전도사가 꾸린 사립학교 숭현소학교에 입학하여 초기계몽교육을 받았다. 동시에 조선인 선생님들로부터 리순신, 안중근 등 민족영웅들의 사적을 상세히 알게 되여 애국주의사상을 무르익혀갔다.  그무렵 충실한 기독교신자인 어머니는 아들 춘성씨의 반일활동을 몰래 도와주고 있었다. 어느 하루, 리화림녀사는 어머니의 불품을 정리하다가 깊히 숨겨둔 태극기를 발견하였다. 여직껏 단군신화나 춘향전 같은 고전적인 이야기만 해오던 어머니에게 이렇게 큰 비밀이 있을줄은 몰랐다. 그것이 계기가 되여 그들 모녀간의 거리는 한결 가까와졌을 뿐만아니라 어머니를 통해 민비피살사건도 료해하였으며 망국의 진정한 원흉이 어떤자들이란 것도 알게 됐다. 일제에 대한 원한의 씨앗은 어린 가슴속에 그렇게 심어졌던것이다.  그때로부터 리화림 녀사는 오빠 리춘성씨의 비밀 련락원이 되였다. 어머니는 “군자금”조달에 나섰고 그녀는 오빠네가 찍어낸 삐라를 숨겨두고 비밀문건을 전달하는 일을 맡았다.  한번은 오빠가 금방 새로 찍은 삐라를 집에 가지고 왔는데 왜놈의 끄나불이 어느새 낌새를 맡고 뒤를 쫓아왔다. 위급한 그 시각에 불쑥 꾀가 떠오른 리화림 녀사는 재빨리 삐라를 어린 조카애가 덮고 있는 이불속에 밀어넣는 동시에 조카애를 힘주어 꼬집어놓았다. 철부지 조카애가 자리러지게 울어대자 그녀는 달래는척하면서 삐라를 조카와 함께 이불에 감싸서 밖으로 나가버렸다. 한차례의 위험은 그녀의 민첩한 반응과 자연스러운 행동으로 하여 모면되였다.  어머니는 물론 로련한 혁명가인 리춘성씨마저 그녀에게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고종황제의 갑작스런 죽음이 도화선이 되여 1919년에 “3.1운동”이 터지자 열다섯살난 리화림 녀사는 동학들과 함께 거리에 뛰쳐나가 시위행진을 단행하였다. 일제군경과의 직접적인 투쟁을 통하여 리화림 녀사는 의지를 련마했고 조선독립을 위하여 헌신하려는 결심을 더욱 굳히게 되였다.  1920년 리화림 녀사는 숭의녀자중학 유아사범반에 입학하였다. 재학기간 평양고등학교 학생을 대상으로 조직된 “력사문학연구회”에 참가함으로써 처음으로 공산주의 리론과 접촉할 수 있었으며 학습을 거쳐 공산주의 사회란 구경 어떠한 것인가를 알게 되였고 공산주의를 실현하여야 비로서 인민의 행복한 생활이 보장된다는 도리를 초보적으로나마 인식하게 되였다.  유아사범반을 졸업한 후 전라도, 함경도를 전전하면서 고험을 겪은 리화림 녀사는 1927년 11월에 조선공산당에 가입하여 조선독립운동의 최전렬에서 맹활약하였다. 그러나 이듬해에 조선공산당이 여러가지 원인으로 해산되자 방황과 고뇌속에서 모대기던 리화림 녀사는 특무와 경찰의 검문까지 받게 되여 부득불 30년도초에 조국을 떠나지 않으면 안되였다.    2 1930년 3월, 리화림 녀사는 목적지인 상해에 도착하였다. “모험가의 락원”으로 유명한 상해는 당시 여러 제국주의 렬강들이 제각기 한구역씩 뜯어가지고 있는 형편이였다.  국내의 소개인이 가리킨대로 리화림 녀사가 찾은 이는 유명한 애국자인 김두봉선생이였다. 비록 조선공산당은 해체되였으나 공산주의에 대한 신앙과 추구를 그때까지도 고이 간직한 리화림 녀사는 고려공산당출신인 김두봉선생을 통해 상해의 조선공산당인들과 접촉할 것을 갈망했으나 그 내부의 파벌투쟁이 심하다는 소개를 듣고는 저도모르게 전신에 소름이 쫙 끼치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국외에 나와서까지 집안다툼을 벌리는 것이 민망스럽기도 했다. 원쑤에 대한 불 타는 적개심을 한가슴 가득 안은 리화림 녀사는 무모한 파벌투쟁에 휘말려들기도 싫었거니와 직접 일제와의 혈전장에 나사고싶어 김두봉선생의 소개를 거쳐 오래전부터 숭배해오던 저명한 독립운동가 김구선생이 친히 령도하는 “한인애국단”에 가입하였다. 그때가 바로 세계를 놀래운 “9.18사변”이 일어난 1931년 가을이였다.  “한인애국단”은 상해림시정부의 소속하에 있었는데 김구선생이 대장직을 겸임하고 할빈역두에서 조선총독 이또 히로부미를 쏴죽인 안중근의사의 동생인 안공근선생이 참모직을 맡고 있었다. 이 조직의 임무는 주로 일제의 요인들과 조선의 간첩과 변절자를 암살하는 행동으로 전 세계에 조선민족이 살아있음을 알리고 따라서 조선민족을 항일성전에로 불러일으키는 것이였다. 원체 성격이 테러형식이였던만큼 이 조직은 성립초기부터 녀성 성원을 받아들이지 않았었다. 그러나 김구선생과 면대한 자리에서 리화림 녀사가 어찌도 절절하게 자신의 경력과 애국심을 호소하였던지 김구선생은 감동된 나머지 파격적으로 그녀를 받아들였던 것이다. 사업의 편리를 위하여 리화림 녀사는 리춘실이라는 이름을 리동해로 고쳤다.  처음 리화림 녀사의 임무는 상해에 온 조선교민, 특히는 녀성들을 고찰하고 감시하는 것이였다. 이기간 리화림 녀사는 남다른 지혜와 총명으로 조직에서 맡겨준 임무를 훌륭하게 완수하여 김구선생의 칭찬까지 받았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차 일선활동에도 참가하였다.  한번은 김구선생의 애인 신분으로 변장하고 김구선생과 함께 조선에서 온 특무를 유인하여 깜쪽같이 해치운적도 있었다.  이 조직은 우리 민족의 항일사에 두고두고 전해질 두가지 거사를 해내였다. 그것은 리봉창의사의 일본천황암살사건과 윤봉길의사의 홍구공원폭발사건이였다. 이 두 사건의 획책자는 김구선생, 리화림 녀사는 두 사건에 직접 참여한 력사의 견증자로 오늘날 건강하게 생존해있다.  1931년 7월초에 일제의 도발하에 발생된 “만보산사건”은 중조인민간에 불신과 반목정서를 일으켰다. 두 나라 인민을 깨우쳐 공동한 원쑤를 대적하기 위해 김구선생은 리봉창의사와 함께 일본 천황을 암살할 계획을 세웠다.  1901년 수원의 중산가정에서 태여난 리봉창의사는 일어를 류창하게 구사할 뿐만아니라 어느 한 일본귀족처녀의 사랑을 받고 있었다.  리봉창의사는 이 점을 리용하여 일본에 잠입한 후 천황이 열병식에 나오는 기회에 암살하려고 타산하였다. 그때 김구선생의 비서격이였던 리화림녀사는 김구선생의 부탁을 받고 리봉창의사에게 작탄 두개를 감출 수 있는 내의를 밤도와 지어주었다. 비록 1932년 1월 8일의 암살행동은 천황을 놀라게 하는 것으로 실패를 선고했지만 세상에 조선인의 기개를 널리 전했던 것이다.  1932년 4월 29일, 상해의 일본침략자들은 천황의 생일을 계기로 홍구공원에서 성대한 기념대회를 가졌다. 리화림녀사는 윤봉길의사와 부부명의로 홍구공원에 잠복하여 그번 모임을 타격하라는 상급의 지시를 받고 사전에 두사람은 지형을 고찰한 후 알맞는 자리까지 잡아놓았다. 후에 리화림녀사가 일어를 잘 모르는데다가 두사람이 행동하면 목표물이 커서 불편하다는 점을 감안하여 윤봉길의사가 혼자서 거사하기로 결정되였다. 그러나 리화림 녀사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이 활동에 직접 개입함으로써 1932년 4월 29일의 민족사에 당당한 한자리를 굳히게 되였던 것이다.    3 1932년 늦여름, 리화림녀사는 마침내 김구선생의 투쟁방법이 썩 타당하지 못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결연히 혁명의 발상지인 광주로 떠났다. 그곳에서 조선민족당에 가입, 이름을 리화림으로 고치고 중산대학 의학원 부속병원에서 견습간호원으로 일하면서 학습과 투쟁을 결부하는 공식혁명가의 길로 들어섰다.  이듬해에 중산대학 법률학부에 다니는 김창국씨와 결혼, 아들 우성(雨星)을 낳고 갈라졌다. 자식을 사랑하는 세상 부모들의 마음은 매한가지지만 위기에 빠진 조국을 구하는데 미소한 힘이나마 보태려고 안온한 가정을 버리고 선뜻 투쟁의 한길을 선택했던 것이다.  1936년 1월, 조선민족당의 파견을 받고 광주를 떠나 남경에 도착한 리화림녀사는 조선민족혁명당총부(개칭됨) 부녀국에서 위원사업을 하였다. 부녀의 지위와 권리를 제고시키는 선전활동에 몸담았고 결국 그것이 가정 모순을 초래하여 짤막한 제2차 혼인생활을 결속지었다.  이듬해 겨울, 일본군이 남경에 대한 공격을 다그치자 로약병자를 이끌고 중경으로 전이, 여기서 김구선생과 희극적인 재상봉을 하였다. “한인애국단”시절에 의식적으로 숨겼던 공산당원의 신분을 이번엔 자랑스럽고도 솔직하게 김구선생에게 고백하였다.  “그럼 이후 다시 만나지 맙시다.” 김구선생의 이 한마디 말로 그들은 지척에 있으면서도(림시정부도 중경으로 옮겼다.) 한번도 만나지 않았다. 비록 김구선생을 그렇게 흠모하고 존경하였지만 리념의 차이는 거래의 장벽이 되였던 것이다.  그만큼 리화림 녀사는 이미 사상적인 전변과 성숙을 마무리지었던 것이다. 광대한 근로대중을 압박과 착취속에서 진정으로 해방시키려면 오직 공산주의 한길로 나갈수밖에 없다는 확고한 신념을 굳혔던 것이다. 1938년 10월 10일에 성립된 조선의용대(총대장 김약산)는 리화림녀사를 부녀대 부대장으로 임명, 무한보위전에서 그녀는 광주견습간호원시절에 익혀둔 의술로 적지 않은 부상병을 구해주었다.  그후 국민당정부의 소극항전정책에 불만을 느낀 조선의용대는 41년도에 항전의 봉화가 세차게 타오르는 태항산에로 진입하여 팽덕회, 라서경 등 팔로군지도자의 접견을 받았으며 조선의용대는 조선의용군(사령원 무정)으로 개칭되였다. 리화림 녀사는 부녀대 대장으로 임명되여 가렬처절한 전투속에서 더없는 용감성을 보여주었다. 1945년 무정 사령원의 파견으로 연안중국의과대학에 20기 학원으로 들어갔으며 연안에서 일제의 무조건투항을 영접하였다.    4 일본이 투항한 후 조선의용군은 국민당의 간섭과 교란으로 하여 제때에 조선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이런 정황하에서 조선의용군은 중국공산당과 손잡고 중국해방전쟁에 떨쳐나섰다.  1946년 리화림녀사는 조선공산당 당원으로부터 중국공산당 당원으로  전적했으며 중국의과대학을 졸업한 후 그 산하 제1분교(연변의학원 전신)에 배치받았다. 1948년에 사업의 수요로 조선인민군 제6독립군단 전선의무소 소장으로 전근하였다.  “6.25”조선전쟁이 폭발된 후 어느 한차례의 상병원 호송길에서 리화림 녀사는 미국비행기가 던진 폭탄에 다리부상을 입고 후방병원으로 이송되였다.  1952년 여름에 2등 을급잔폐증을 발급받고 선후로 료녕와방점 강복(康復)병원 기술과 과장, 심양의사학교 부교장, 교통부 위생처 기술과 과장, 연변위생국 부국장, 국장 등 직을 력임하였다.  문화대혁명시기에는 “한인애국단”에 참가한 경력으로 하여 3년간 옥살이도 하였으며 1978년에 대련시칠실 시찰원으로 조동하였다.  현재 리화림 녀사의 생활은 혁명전쟁년대처럼 소박하고 근검하다. 기자를 영접한 리화림 녀사는 곤색데트론 옷에 헝겁신을 신고 있었다. 리화림녀사는 그렇게 아낀 2만원 돈을 당비로 바쳤으며 1986년에는 연변아동문화기금회에 1.2만원을 기증하기도 했다.  기자를 마주한 자리에서 리화림 녀사는 대련시정부 판공청 로간부처에서 그의 일상 생활을 관리하고 있는데 별 불편함이나 부족점을 느끼지 못한다고 말했다. 지난 1월 6일 92세 생일때 정부와 사회 각계에서 찾아와 축하해주었으며 특히 시부련회에서 병치료 귀걸이를 선물로 가져왔다면서 자신은 큰 공로도 없지만 당과 정부 및 인민은 크나큰 영예를 안겨주었을뿐만 아니라 어렸을 때 그렇게 하고싶었던 대학공부까지 시켜줬으며 오늘은 또 즐거운 만년을 보내라고 이처럼 관심해준다고 감개무량해서 말하였다.                                                                     1996년 2월 
6    뉴미디어시대, 위챗의 파워는? 댓글:  조회:594  추천:0  2016-05-18
뉴미디어시대, 위챗의 파워는? 위챗채팅방 '신사모' 설립대회 칭다오서     흑룡강신문사 산둥지사의 위챗채팅방 '신문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이하 '신사모'로 약칭)'이 온라인에서 오프라인으로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4월 29일, 1,300여 명 방대한 회원을 가지고 있는 '신사모' 설립행사가 칭다오시 산하 현급시인 핑두에서 성대하게 진행되었다.  이날 행사는 칭다오농일식품유한회사 김철웅 사장이 후원,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100여 명 회원이 모처럼 신청해 성황을 이루었다.  아침 8시 30분 청양구 세기공원 동문에서 농일식품에서 제공한 버스 두대에 갈라 타고 핑두로 이동한 회원들은 우선 농일식품 공장을 참관했다. 회원들은 김철웅 사장 부부의 안내하에 선후 고추가루 가공공장과 김치가공공장을 참관, 연후 핑두 위안중팡(圆中方)대주점으로 이동하여 ‘신사모’설립대회를 정식 가졌다.   흑룡강신문사 산둥지사는 1997년에 칭다오에 자리잡았다. 내년에 지사 설립 20주년을 맞이하게 되는 산둥지사는 그간 산해관 이남 유일한 합법적인 민족언론매체로서 현지 민족사회의 동태를 즉시적으로 전달하고 당과 정부의 관련 정책을 제때에 소개해왔다. 뿐만 아니라 민족단체의 설립을 주도하고 외자기업 유치를 돕는 등 매체 기능을 훨씬 초월하는 여러가지 많은 일들을 해오면서 민족사회로부터 높은 긍정과 지지를 받아왔다.    그러나 IT산업의 비약적인 발전과 더불어 뉴미디어시대가 도래하면서 전통적인 종이매체는 엄중한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다. 모바일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티비도 이젠 한물 건너간 시점이니만큼 종이매체는 더 엄중한 생존위협에 맞닥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  산둥지사는 진퇴 양난의 기로에 들어섰다. 인쇄비를 체불해가면서 몇년 버텼지만 점점 커가는 흑자 구덩이는 보기만 해도 두려웠다.    어떻게 할 것인가? 이대로 손을 씼고 나앉으면 마음도 편하겠지만 유일한 언론지를 잃게 되는 민족사회는 어쩔 것인가? 그렇지 않아도 문화관, 예술관, 공립학교, 잡지 등 문화 관련 기관이 전무한 이곳에서 신문마저 사라지면 그 문화갈증을 어떻게 해소한단 말인가?   이런 고민의 와중에 “우리도 한번 위챗공공계정을 개설해보자”는 건의가 나왔다. 2014년 3월 드디어 산둥지사의 위챗공공계정인 '해안선문화예술전파'가 고고성을 울렸고, 이 계정은 말그대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해 말에 이르러 ‘해안선문화예술전파’를 팔로우한 팔로워가 1천명 선에 육박했으며 기사 조회수도 500회를 넘기기가 일쑤였다. 그만큼 산둥지사만이 가지고 있는 정보의 우세가 빛을 발했고 따라서 위챗의 파워를 다시 한번 실감하게 했다.    2015년 6월 24일에 발표한 '칭다오 강둥숯불구이 해변휴가촌을 찾아서'는 등재한 당날로 조회수 1천회를 돌파, 이후 며칠 동안 신문사의 전화는 휴가촌의 여러모를 문의하는 사람들로 인해 불날 지경이었다. 외딴 지역에 자리잡아 많이 한산했던 휴가촌에서도 갑자기 찾아드는 손님들에게 길 안내하느라고 일손이 딸려 야단법석이었다. 이 기사는 현재까지 조회수 5975회를 기록하고 있다.    산둥지사가 위챗에 올인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2016년 1월 19일 '백혈병에 걸린 4살짜리 김미나어린이를 도와주세요!'란 글을 발표하면서다. 최다 조회수인 6000회를 기록한 이 기사는 겉잡을 수 없이 일파만파로 퍼져나갔고 열흘도 되지 않은 사이에 근 10만 위안이란 거금이 모아졌다. 그것도 지사가 위치한 산둥지역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 지어 한국, 미국, 일본 등지에서 후원금이 쇄도했다. 환자의 부모에 의하면 미나가 입원해서부터 5개월이 채 되지 않은 사이에 총 2500여 명으로부터 30여 만 위안의 후원금이 전달되었는데 대부분 위챗을 통해 소식을 접하고 송금되었다고 한다.    바로 이거였다. 전통 매체는 전달에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위챗은 무한한 가능성을 예고하고 있었다.  2015년 산둥지사는 수년간의 연속적인 적자를 극복하고 쉽지 않게 흑자로 돌아섰다. 몇백 위안의 흑자가 대견한 것이 아니었다. 시대를 빨리 읽고 위챗의 파워를 존중하는 마인드가 더 중요한 것이었다.    위챗공공계정이 정상적인 궤도에 들어서면서 팔로워들을 중심으로 위챗 채팅방 개설을 주문하는 목소리가 증폭했다. 산둥지사에서는 독자들의 수요가 곧 지사의 생존의 길이라는 마음가짐으로 2015년 3월 지사 위챗 채팅방인 ‘신사모’를 개설, 기사를 싣는 공공계정과 독자와의 소통을 위주로 하는 채팅방을 병행하는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이다. 그간 ‘신사모’는 회원수가 1500명에 육박하면서 소통외에 취재 주문, 친목모임 주선, 공동구매 등 커뮤니티 역할도 해왔다.    이날 ‘신사모’ 설립대회는 칭다오진달래예술단(단장 엄정숙)의 무용 ‘장백의 진달래’와 ‘천년의 장고소리’로 막을 열었다.  흑룡강신문사 한광천 사장은 모두발언을 통해 “흑룡강신문사는 신문을 사랑하는 여러분을 주주로 모신다.”면서 “우리는 마름노릇을 잘 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말해 박수갈채를 받았다.  박영만 산둥지사장은 ‘신사모’ 설립 취지에 대해 ‘자유성, 민족성, 공익성, 수익성’으로 귀납하면서 ‘신사모’는 회원들이 만든 집으로서 회원 자신들이 경영해야 한다고 보충했다.    설립식에서는 ‘신사모’운영위원을 임명, 회원수가 많아 채팅방이 3개인 점을 감안해 1그룹에 김광일, 임동호, 이길룡, 박위동, 남비, 김태송씨를, 2그룹에 김성일, 김일, 이성무, 김철, 조남호씨를, 3그룹에 김재룡, 최재문, 김봉웅, 배태남, 황동룡, 김행복씨를 임명했다.   농일식품에서는 이날 설립식의 관명권을 취득, 대형 버스 2대와 점심식사 대접, 그리고 매인당 김치세트 1박스를 후원했다. 이에 앞서 농일식품은 3년전부터 해마다 흑룡강신문에 5만 위안에 달하는 광고를 게재해오고 있다.  농일식품 김철웅 사장(1967년생)은 길림성 영길현 출신으로 1990년대 초 대학을 졸업한 후 칭다오에 진출, 칭다오다원식품의 초창기 주요 멤버로 활약하다가 1996년부터 독립적으로 고추, 마늘, 생강 등 농산물을 한국으로 수출하기 시작했으며, 2000년 7월에 1백만 달러를 투자하여 남새재배, 생산가공판매를 일체화한 '농일식품유한회사'를 설립하면서 '농일'표 김치를 본격적으로 출시했다. 농일김치는 한국의 CL , 종가집, 농심 등 대표적인 명가에 진출하면서 선풍적인 인기를 몰아왔고 짧은 사이에 연간 수출액이 1억위안을 넘는 쾌거를 이루어냈다. 한때 금융위기의 영향으로 휘청거리기도 했으나 빈사상태에서도 바이어와의 계약을 끝까지 이행한 보람으로 더불 신임을 얻어내며 기사회생했다. 농일식품의 제품은 10여 개 국가로 수출되고 있으며 직원은 260여 명을 두고 있다. 부동의 업계 1위 자리를 고수하고 있는 농일은 현재  제2차 창업으로 중국 최고의 김치공장 건설 완공을 눈앞에 두고 있다. 농일식품 신공장이 오픈되면 김채생산능력이 일당 80톤에 달하는 업계 굴지의 기업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농일식품 신공장 오픈식은 다가오는 5월말에 거행될 예정이다.한편 다가오는 5월 18일에 온, 오프를 일체화한 ‘농일슈퍼’를 오픈하게 된다.    설립식을 마치고 청양으로 돌아온 후 운영위원들은 별도의 모임을 갖고 ‘신사모’의 앞으로의 운영에 관해 열렬한 토론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영양가 없는 펌글의 제약, 기업과 제품의 소개 등재, 오프라인에서의 친목 활동, 공익이벤트 조직 등 다양한 화제가 언급되었다.   이날 설립식에는 농일식품외에도 부산항공에서 칭다오-부산 간 왕복 티켓 2장, 칭다오조선족골프협회 윤동범 회장이 5천 위안, 칭다오 오성골프협회 이춘범 회장이 5천 위안, 칭다오 지은공업무역회사 허헌 이사장이 2천 위안, 칭다오 미시광피부관라센터에서 2천 위안, 칭다오지원화장품회사에서 고급 화장품 2세트와 마스크팩 10통, 하이라이활게 식당에서 200위안 짜리 식권 10매, 동일모자에서 모자 120개, 맥천산장에서 50위안짜리 식권 50장, 김철룡 사장이 고급 호텔방 4칸, 이우시 화잉무역(华英贸易) 장연화 여사가 지능컵 24개, 칭다오 연변상회 전치국 회장이 광천수 200병, 신한은행 이해화씨 비타500을 10박스, 153카센터에서 30위안 짜리 할인권 100장을 협찬했다. 흑룡강신문사 산둥지사에서는 천연소재 라쉬반 팬티 6장과 고급 쿨토시 110개를 선물로 내놓았다.
5    칭다오조선족작가협회 대표단 한국 방문 댓글:  조회:789  추천:0  2014-10-18
칭다오조선족작가협회 대표단 한국 방문 중· 한 수교 제22주 기념 문화교류 펼쳐       대전에 본부를 둔 한국해외문화교류협회(공동대표 이동규, 김청호)의 초청으로 칭다오조선족작가협회(회장 이문혁)소속 시인 작가 15명이 지난 10월 9일부터 13일까지 4박5일간 한국을 방문했다. 이번 방문은 지난해 8월 한국해외문화교류회 대표단 21명이 칭다오를 방문한테 따른 답방 형태로 이루어졌다. 대표단 일행은 한국에 도착한 첫째 날인 9일 오후 충남 아산에 도착, 이순신 장군을 모신 현충사와 신정호 유원지를 관람한 후 환영만찬과 더불어 청도조선족작가협회에서 충남신문 아산주재 이강부 국장에게 '청도문학상'을 시상했다. 행사가 끝난 후 일행은 도고온천에서 숙박하며 한국 작가들과 화기애애한 분위기속에서 만남의 첫 여정을 풀었다. 다음날인 10일에는 대전으로 이동하여 대덕연구단지에 위치한 한국원자력안전기술원에서 간단한 연수를 마친 후 경북 경주로 이동, 유네스코에 등재된 양동마을을 돌아보고 이어 경주 인교동에 자리한 삼국사기 문무왕 때 유적지 안압지(雁鴨池)를 탐방하고 숙소 경주 콩코드 호텔에서 숙박하며 이틀째 한국에서의 밤을 지냈다. 세번째 날은 월성원자력발전소를 방문하고 주상절리와 불국사 등 문화재를 구경한 후 오후에 대전으로 이동하여 이번 방한 목적인 중·한 수교 22주년을 맞아 제6회 중· 한 문화교류행사에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중국측 장학규 이홍철, 한국측 임채원 김정에게 한국해외문학상 대상을 수상하고  한국 한진호, 김현중, 김완수씨에게 신인상을 발급했다. 연후 중국측에서는 한국측 전원에게 문학상 및 문화상, 감사장을 전달하고 한국측에서도 중국측 전원에게 문화상과 감사장을 시상했다. 행사 마지막엔 두 단체가 발간한 회원지 '해외문학'과 '갯벌의 하얀 진주'의 공동 출판회를 진행하고 시낭송과 악기 연주 및 노래자랑 등 순서로 이어갔다. 특히 초대가수 허진주씨와 성악가 김명환, 박부도김 및 김애경씨 등이 무대에 올라 분위기를 고조시키기도 했다. 이날 밤은 한국 작가들의 자택에서 홈스테이를 체험했다. 마지막 날인 12일에는 대전의 명소 뿌리공원과 대전 오월드 동물원을 둘러본 후 오후 서울 종로 인사동으로 이동, 시가연(詩歌緣)카페에서 한국해외문화교류협회 서울회원들과 더불어 우정과 친분을 맺는 장이 마련되었다. 이로써 4박5일간 한국방문 일정을 원만히 소화했다. 한국해외문화교류회는 2007년 3월 창립, 대전 광역시 중구에 본부를 둔 비영리 정식 등록 문화단체이다. 한편 청도조선족작가협회는 2008년에 출범, 현재 자체의 카페를 운영중에 있으며 해마다 회원작품집 '갯벌의 하얀 진주'를 발간하고 있다.   / 장학규 기자
4    2014칭다오조선족민속축제 축구예선전 개시 댓글:  조회:609  추천:0  2014-09-16
2014칭다오조선족민속축제 축구 예선전 개시 노래자랑 예선전도 인기몰이 다가오는 10월 1일부터 3일까지 진행되는 “칭다오조선족향우연합회 2014’치치할컵’민속운동회”가 개막 보름이상 남겨두고 벌써 화끈 달아오르고 있다. 지난 9월 14일 칭다오시 청양체육훈련기지에서 운동회 최고인기종목인 축구 예선 경기가 진행되었다. 이날 예선 경기는 1,2,3번 경기장에서 동시에 시작, 도합 10껨의 경기가 치러졌다. 재칭다오조선족향우연합회 산하 21개 향우회중 오상, 해림, 왕청 등 17개 팀이 축구경기에 참가, 4개 조로 나뉘어 리그전을 펼치게 된다. 올해는 외지 선수를 영입하지 않고 순수 칭다오에 거주하는 고향인들의 축제로만 개최하려는 주최측의 의지에 따라 선수 선발에도 엄격한 조건을 제시했다. 매 팀에는 40대 이상 선수가 반드시 2명이상 있어야 하고 20대는 4~6명내로 제한했다. 아울러 참가팀이 많아 축제기간에 소화하기 어려운 점을 감안하여 축제 개막전에 19껨의 예선 경기를 치루기로 결정했다. 이날 예선전 10껨중에서 가장 주목을 받은 경기는 해림팀과 화룡팀의 경기였다. 가목사, 왕청과 함께 ‘죽음의 조’로 알려진 A조에 든 두팀의 경기는 결승경기에 맞먹는다는 평가를 받으며 치렬한 공방전을 펼쳤다. 결국 해림팀의 한 선수가 엘로카드 두장을 누적하여 퇴장당하면서 형세는 기울어져 화룡팀이 3대2로 힘들게 이겼다. 나머지 경기 결과 계서팀이 5대1로 상지팀을, 안도팀이 2대1로 밀산팀을, 왕청팀이 6대5로 가목사팀을, 길림팀이 3대0으로 녕안팀을, 철려팀이 2대1로 상지팀을, 통화팀이 6대1로 철려팀을, 서란팀이 8대1로 치치할팀을, 계서팀이 2대0으로 연수팀을 이겼고 오상팀과 교하팀은 5대5로 빅었다. 다음 예선전은 한주일후인 21일 여전히 체육훈련기지에서 진행된다. 이날은 예선전인데도 불구하고 수천명 관중이 모여들었으며 칭다오한국인병원과 청양병원 국제부에서 전문 의료인원들이 나와서 만일의 상황을 대비했으며 조선족대학생연의회에서 자원봉사에 나서서 찬사를 받았다. 한편 민속축제의 꽃으로 불리우는 노래자랑 예선전도 이보다 하루 앞선 13일에 개시, 중청년은 물론 노인과 어린 학생들도 참가하여 만만치 않은 실력을 과시했다.  
3    칭다오조선족작가협회 야외시낭송대회 개최 댓글:  조회:864  추천:0  2014-09-02
칭다오조선족작가협회 야외시낭송대회 개최   지난 4월 17일 칭다오조선족작가협회에서는 경치가 수려한 청양구 부가부과일품관광원에서 새봄맞이 야외시낭송대회를 개최했다. 칭다오조선족작가협회는 2007년 12월에 설립된 동북삼성외 유일한 조선족작가들의 모임으로 중국조선족문단에 화제를 불러오고 있다. 초기 11명으로 출발한 이들은 현재 칭다오를 중심으로 옌타이, 웨이하이 등 지에 30여 명 회원을 가지고 있으며 300여 명 회원을 가진 자체의 카페(http://cafe.daum.net/yhkorean)도 운영하고 있다. 칭다오조선족작가협회에서는 문학창작을 줄기차게 진행해오는 동시에 국내 형제문학단체 및 한국을 비롯한 해외동포문학단체와의 교류도 활발하게 진행, 동시에 해마다 회원작품집 ‘갯벌의 하얀 진주’를 펴내고 있다. 이날 모임에는 시간과 날씨 관계로 칭다오지역내에서 활동하는 13명 회원이 참가하여 회원 자작시 위주로  중국조선족유명시인의 시작품을 낭송했다. 평심결과 최균필 시인이 자작시 낭송으로 1등상을, 김재룡, 정순금씨가 2등상을, 이문혁, 전향미, 홍걸씨가 3등상을 따안았다. 이문혁 칭다오조선족작가협회 회장은 총화발언에서 “전국 각지에서 기성문인들이 쉬임없이 수혈되어오고 있는 상황에 재칭다오조선족대학생들이 합류하는 좋은 형세가 이루어지고 있다.”면서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여러 가지 문학활동을 활발하게 조직하겠다.”고 밝혔다. / 장학규 기자
2    제12회중국(라이저우)국제석재전람회 9월 중순 개최 댓글:  조회:600  추천:0  2014-09-02
  제12회 중국(라이저우)국제석재전람회 9월 중순 개최 역대 한국 최대 바이어 올해 테마 ‘신제품 신기술 새 설비’     중국국제석재(石材)전람회가9월 19일부터 21일까지 중국석도(石都) 라이저우(莱州)에서 개최된다. 라이저우시 국제컨벤션센터에서 개최하게 되는 제12회중국(라이저우)국제석재전람회는 옌타이시인민정부와 라이저우시인민정부가 주최하고 라이저우 위퉁(宇通)국제물류유한회사에서 주관, 산둥하오앤(豪岩)석재무역주식유한회사에서 후원한다. 산둥성은 중국의 건축자재 대성(省)으로, 특히 ‘중국석도’로 일컬어지는 라이저우시는 전반 중국 북방지역 석재산업의 발전방향을 좌우지하고 있다. 현재 중국 석재 저장량의 2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라이저우의 석재산업은 우월한 지리위치와 편리한 교통 조건에 편승하여 신속한 발전을 가져오고 있다. 2003년에 석재업계 인사들의 한결같은 요구로 라이저우시에서는 전문적으로 석재교류를 진행하는 ‘라이저우국제컨벤션센터’를 건설, 동시에 ‘제1회국제석재전람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했다. 이 전람회는 10여 년간의 발전을 거쳐 이미 유명 브랜드 전람회로 부상했으며 국내는 물론 멀리 한국, 일본, 미국, 유럽까지 교류의 폭을 넓혀왔다. 지난해까지 이미 11회 진행한 이 전람회는 총 거래액이 13억 위안 인민페에 달했다. 그중 한국 석재구매상과 한국 석재관련기업과의 거래액만 5억 위안에 달해 3분의 1이상을 차지, 전람회때마다 한국 제품과 기술이 전시되어 중한 석재산업 교류에 크게 기여했다. 이 전람회는 해마다 한차례씩 진행되는바, 올해의 테마는 ‘신제품, 신기술, 새 설비’이다. 즉 각지 석재산업의 상호 뉴대를 강화하여 특색있는 석재제품이 더 빨리 시장의 인정을 받게 하고, 효율적인 석재광산 개발설비와 석재 가공, 운수, 시공 설비를 선보이며, 석재자원 개발과 가공생산의 선진적인 기술 성과를 전시하는 것이다. 한편 총 부지면적이 25만 제곱미터에 달하는 라이저우 컨벤션센터는 이번 전람회에 2개 부분으로 나뉘어 진행된다. 5만 제곱미터에 달하는 전시관은 상, 하 2층으로 되어있으며 3,000여 개 국제표준부스를 용납할 수 있다. 내부에는 5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다공능청을 포함하여 비즈니스센터, 네트워크센터 및 음식서비스센터 등이 갖추어져 있으며, 선진적인 에스컬레이터, 화물수송엘리베이터는 물론 소방, 모니터링, 안전 시스템, 통신 네트웍 등도 구전하다. 이와 별도로 6.6만 제곱미터에 달하는 광장은 3층 테라스로 구성, 전체 낙차가 18미터에 달하며 전부 천연화강암으로 건설되어 컨벤션센터와 혼연일체를 이루고 있다. 주최측에서는 이번 전람회를 통해 더 많은 국내 및 국제 교류와 합작이 이루어질 것을 희망, 새로운 제품과 새로운 기술은 물론 새로운 벗을 더 많이 사귀어 믿음직하고 장구적인 전략파트너 관계를 맺기를 바란다고 표시했다.    /장학규 기자
칭다오조선족노인총협회 성립 10주년 기념행사 성대히 개최 5개 지회 29개 분회 900여 명 회원으로 발전 민족사회의 선줄군, 자선활동에 앞장서, 청도 유일 종합잡지 운영       칭다오조선족노인총협회가 열돐 생일을 맞았다. 지난 7월 16일, 칭다오시 청양구에 위치한 겔럭시예식장(佳乐喜婚庆)5층 웨딩홀에서 칭다오조선족노인총협회 성립 10주년 기념행사가 성대히 개최되었다. 이날 행사에는 재 칭다오 한겨레단체 대표와 노인협회 회원 도합 800여 명이 모여 명절의 분위기를 한껏 돋구었다. 칭다오조선족노인총협회는 2004년 4월 18일 성립, 당시 이창협회 김재룡 회장을 위시하여 김원, 리영, 조대규 등 멤버들이 모여 각자 도생하던 12개 노인협회를 묶으면서 첫 스타트를 떼게 되었다. 10년간의 발전을 거쳐 현재 이창, 지아오저우, 라이시핑두, 지머, 황다오 등 5개 지회, 29개 분회에 900여 명 회원을 가진, 칭다오에서 가장 큰 민족 단체로 자리매김하였다. 이 단체의 출범에 주도적인 역할을 논 김재룡 제1대 회장은 요녕성 무순시 출신으로 1964년도에 선양중의학원을 졸업하고 의사직에 종사하다가 1995년 칭다오로 이주하여 줄곧 노인협회 일에 전념, 2010년에는 산둥반도조선족노인협회친목회 회장으로, 중국조선족노인협회 부회장으로 추대되기도 하였다. 노인총협회는 성립후 줄곧 솔선수범으로 현지 민족사회의 좌표가 되어왔으며 각종 민족행사에 적극 참여하면서 화합과 협력을 주도하였다. 아울러 당지인들과의 융합에도 많은 심혈을 기울였다. 특히 사천지진때 칭다오조선족노인총협회는 각 분회에 사랑의 마음으로 이재민 돕기에 나설 것을 호소, 10여일간 성금 40,020위안을 모아 각 분회별로 소속 지역의 통전부, 민정국, 연의회, 거주위원회, 촌민위원회 등 부문에 전달했다. 통계에 따르면 이번 자선활동에 651명의 노인이 참가하였다. 칭다오조선족노인총협회의 또 하나의 자랑거리는 산둥지역에서 유일한 비영리성 종합잡지를 자체의 힘으로 꼬박 9년간 운영해왔다는 사실이다. 총협회가 출범한 이듬해인 2005년 4월에 협회 내부간행물로 창간된 “꽃노을’잡지는 그간 27기, 근 3,000부가 발간되어 노인들의 문화생활을 풍부히 하였을뿐만 아니라 상업잡지만 난무하는 칭다오에서 문화기갈을 해소하는 역할도 톡톡히 놀았다. ‘꽃노을’은 타자, 편집, 디자인, 발행까지 노인들 스스로 해왔으며, 인쇄비를 이어댈 수 없어 어떤 해는 단 1기도 내지 못하는 어려움도 겪었지만 회원들이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다행히 명백을 이어왔고 너도나도 원고를 제공하면서 위기를 모면하기도 했다. 단순히 노인들의 생활상만 반영하던데로부터 시, 수필, 실화 등 문학작품과 역사지식, 자연과학, 문화현상 등 다양한 주제를 아우르는 종합성적인 내부간행물로 발전했으며 멀리 베이징, 텐진, 연변 등 지역에까지 발행되고 있다. 이외에도 칭다오조선족노인총협회는 회원 친선과 교류 및 건강을 위해 1995년부터 자체의 운동대회를 개최, 2012년 5월 현재까지 10회 운동대회를 개최했다. 이날 경축행사에서 현임 여덕선 회장은 환영사를 통해 노인총협회가 걸어온 10년 여정을 감회 깊게 돌이키면서 앞으로도 노인총협회는 민족사회의 본보기로, 코기러기로 역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귀빈들의 축사에 이어 김재룡 전임 회장에게 공로패, 리윤근 고문에게 감사패, 김원 등 8명 원로들에게 기념품이 전달되었으며, 모범협회, 모범회원, 화목가정을 표창하였다. 이어 각 지회 및 협회별로 준비한 문예공연이 막을 올렸다. 무용, 독창, 중창, 코미디 등 다양한 절목들이 무대를 장식한 가운데 아리랑예술단과 같은 전업성을 띤 프로팀의 공연과 여성협회에서 특별히 준비한 협찬공연도 있어 장내는 시종 뜨겁게 달아올랐다. 무대 마지막으로 총회 문예공연단에서 ‘농악무’로 클라이막스를 장식, 이 절목은 다가오는 8월에 칭다오원예박람회에 초청되어 공연하기로 되어있어 관중들의 더욱 큰 호응을 불러일으켰다. 이날 행사에는 재칭다오한국인(상)회, 칭다오조선족기업협회(김창호 회장), 흑룡강신문 산둥지사, 기업협회 청양지회, 여성협회, 향우연합회, 교사협회, 작가협회, 백두산양로원, 서원장학교, 해란강민속궁, 밀산향우회, 가목사향우회, 화룡향우회 등 단체와 전동근, 김철, 차철, 태성남, 권혁만, 오진호 등 개인이 축의금을 전달했다. 특히 이날 행사에 겔럭시예식장(佳乐喜婚庆)의 이광동 이사장이 장소와 60여 개 테이블에 달하는 식사(술 포함) 전부를 무료로 제공해주었다. 흑룡강성 계동현 출신인 이광동 이사장은 칭다오피터얼피혁제품유한회사를 운영, 조선족 기업인 3명과 더불어 합자 형식으로 3,000만 인민폐를 투자하여 홀 면적만 4천여 제곱미터에 달하는 칭다오 일류의 예식장을 시운영하면서 장안의 화제가 된 인물이다.    /장학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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