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张学奎文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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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여인상의 항주인 댓글:  조회:409  추천:0  2014-09-01
여인상의 항주인 장학규   항주에 발을 붙인지도 어언간 5년,그간 관광지만 돌아다니다보니 당지인과 교류할 시간을 거의 가지지 못했다.그러다가 문득 어느날 많은 항주인들과 상대하게 되는 계기가 마련 되였다."세종식품"이란 가게를 내면서부터였다.우리와 너무 다른 그들만의 사유모식,성격기질을 발견하게 되여 무척 당혹스러웠다.     충돌은 가게방을 찾는데서부터 생겼다.면적이나 지리위치같은것은 차제이고 우선 주인의 태도부터 문제거리였다.옷가게면 된다 서점이면 더욱 좋고 이런 식으로 집주인이라는 사람들이 장사거리를 만들어주는 고약한 버릇들이 있었다.세상에 이런 법이 어딧냐고 펄쩍 뛰며 나와도 다시 상론하자며 말리지도 않았다.환장하겠네를 수십번 곱씹던 끝에 겨우 그런 규제를 하지 않는 집주인을 만나 계약을 맺기에 이르렀는데 전형적인 강남사나이인 이 양반에게는 더 희한한 메뉴가 있었다.신분증은 물론 회사 주소 ,집 전화 등을 상세히 적어둘 뿐만 아니라 호적부,결혼증 같은 것도 카피를 떠서 달라는 것이였다.     "이 자식 까께베 아니야?"   내가 우리 말로 투털대는데 옆에 있던 안해가 한술 더 뜬다.   "까께베보담 시에미가 제격이예요."   양도비에 보증금에 내라는 돈은 다 내고도 "까께베"내지 "시에미"가 내놓은 요구를 만족시키느라고 보름이란 시간을 훌쩍 흘러보냈다.하느님 맙소서!     그러나 이 정도는 약과였다.가게를 정식 운영하면서 매일 매일 짜증스러운 일에 부딪쳐야 했다.가게를 들르는 사람들은 거개가 흔히 일컽는 그런 짠돌들이였다.분명 세트로 된것들도 개수로 팔라는 사람들이였다.한국 커피가 좋다는 말은 들었다.그러나 만에 하나 맛이 없으면 세트로 샀다가 어쩔건가? 먼저 터뜨려 하나만 달라. 맛 있으면 또 오는거다.한둘도 아니구 거개가 이런 식이니 나중엔 열이 받쳐 터쳐버렸고 평균치보다 곱으로 되는 가격으로 팔았다.그러나 거기서 끝이다.다음에 와서는 다른 물건을 그렇게 팔라는 요구를 제기해왔다.절강사람들의 경제머리가 뛰여나다는 말은 많이 들어왔지만 이 정도로 심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어느 이벤트행사에서 무료 선물이 있다는 소문만 돌면 새벽 2시부터 비오는 밖에서 줄을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이였다.무더운 여름철엔 전기세가 나간다고 서점 상가 또는 싸구려 식당에서 빵 하나에 음료 한병을 주문해놓고 하루 종일 보내는 사람들이다.아이구 기가 질려!     항주인들은 이렇게 계산적이다.마치도 자로 잰듯이 치밀한 계산을 앞세우기에 실수가 거의 없고 손해를 자초하지도 않는다.     항주의 거리에서는 북방에서 흔히 보게 되는 칼부림의 장면을 거의 볼수 없다.깡패무리들도 없는상 싶다.우리 주변 가게들은 거개가 외지인들이 경영하지만 소위 보호비 명색을 가지고 다니는 놈팽이들을 전혀 볼수 없다.집법자들도 뗑뗑거리는 법이 없고 점잖고 문명한 편이다. 그렇다고 싸우는 사람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실제로 싸움을 질기게 하는 편이다.모순이 생긴 두 사람이 오히려 관객이 열을 낼 지경으로 몇시간씩 허비하면서 입싸움을 벌리는 것이 보통이다.싸우는 상대보다 구경군을 더 의식하면서 서로 약자인체 피해자인체 가장하는것을 보면 막 기가 질린다. 나같이 세부에 둔하고 해석에 약한 사람은 그저 입만 하 벌리고 있어야 한다.     항주인들은 스스로 "북방에서는 남편을 섬기고 남방에서는 안해를 섬긴다"는 말을 꺼리낌없이 하고 있다.그만큼 항주는 많이 여성화된 도시이다.앞에서 구구히 말한 것을 내놓고도 우선 생김생김부터 그랬다.미인의 도시답게 눈을 주는 곳이면 버들가지처럼 늘씬한 여인들이 보인다.몸매가 호리호리하여도 납작하지는 않다.튀여나올데는 다 튀여나왔다는 얘기이다.북방에서 흔히 보게 되는 웅장하고 거쿨진 사내보다 왜소하고 아리한 남자가 대부분이다.그래서인지 가지런히 다니는 남녀를 보면 남자쪽이 많이 기운다는 느낌을 진하게 받게 된다.이런 외모상의 차이때문에 남자들이 많이 움츠러든다는 말을 당지인들을 통해 직접 확인한바 있다.딴에는 그럴듯하다.그러니까 남자들이 밥을 하고 빨래를 하고 애를 봐야 하겠지.안해를 섬겨야 하니까.주부 아닌 주부가 되여진 항주의 남자들은 그래서인지 목소리마저 가늘고 챙챙하다.     항주를 한번 다녀간 사람들은 깔끔하게 다듬어진 도시의 모습을 보고 감탄을 금치 못한다.섬세한 항주인들은 손바닥만한 공지가 나져도 그대로 놔두는 법이 없고 곧잘 화원 또는 풀밭으로 다듬어낸다.엉뎅이 들이댈 자리도 안될 것 같은 공지에 잔디를 깔고 오솔길 내고 정자를 세우는 것을 보면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다.     재래로 항주는 강소성 소주시와 더불어 정원의 도시로 알려졌다.서호에서 가장 큰 인공섬인 소영주-삼담인월이라고도 함-는 말그대로 정원예술의 극치라고 할 수 있다.호수속에 섬,그속에 또 호수가 4개,그 가운데가 또 섬이다.물과 육지가 4겹으로 이루어져 절경을 자랑한다.팔뚝만한 잉어들이 두려움 모르고 정자밑을 유유히 헤염쳐 다니고 실실히 늘어진 수양버늘이 미풍에 하느작거린다.그속에 몸을 담고 있노라면 여유있고 풍류스럽게 인생을 영위해온 항주인들의 과거가 되새겨진다.     물론 현재도 그들은 다심하다할 정도로 모든 지혜와 재능을 동원하여 고향을 다듬고 있다.서호의 면적은 5.6평방킬로메터,고국인들이 바다로 착각하듯이 가히 작다고 할 수 없다.그럼에도 불구하고 300년전의 모습을 회복한답시고 수천금을 들여 서호 확장공사를 진행,수만평의 땅을 호수로 판 동시에 여기저기 올망졸망한 건물을 지었다.나무를 옮기고 다리를 놓고 갈대를 심었다.그런 세부미앞에서는 할 말을 잃게 된다.     중국 10대 명찰중의 하나인 영은사를 보아도 그렇다.조형이 각이하고 대소가 부동한 비래봉의 470존 석굴 조상,점토로 20메터 높이에 150존 불상을 조각해낸 "53참배" 바다섬 입체칼라군조 등은 항주인들의 섬세와 인내, 끈질긴 미덕을 그대로 반영해주고 있다.     이뿐이 아니다.영은사로 통하는 길도 오솔길을 방불케 하는 2차선이다.그래서 휴일이나 불교명절 때면 차가 몇시간씩 밀리기가 일쑤여서 어지간히 짜증나지 않는다.자가용이 기하급수로 늘고 있는 항주이고 보면 도로개조가,특히 관광지의 도로개조가 시급한 문제로 대두한 듯 싶은데 항주시 정부에서는 소위 왕래 차량을 소통시킨답시고 많은 자금을 허비하면서 주변 산들에 터널을 뚫으면서도 시원하게 대통로를 뽑아 차들을 씽씽 빼내올 궁리는 죽어도 하지 않는다.역사문화도시의 판도를 깨서는 아니되고 더우기 관광지로서의 깊숙하고 아늑하고 고요한 분위기를 망가버려서는 아니된다는 속셈이 숨어있다.     항주인들의 군상은 대개 이렇다.단체나 개인이나 모두 잘 다듬어져 있고 세련되여 있다.틈서리 하나 보이지 않는 것이 쇼핑을 나선 귀부인의 모습과 방불하다.무엇 하나 허투루 대하는 것이 없고 쭉 신경을 모아서 매사에 임한다.깨끗하고 질서정연한 것이 또한 일솜씨가 잰 가정주부의 타입이다.총체적으로 여인상인만큼 소심하고 잘고 다사하고 우유부단한 약점도 가지고 있어 더러 성깔이 나는 구석이 있게 마련이다.      그래도 정부가 이런 스타일이면 백성에겐 그 이상의 복이 없을 것이며 백성이 이런 양상이면 살림살이가 윤택하지 않을 이유가 없을 것이다.실제로 항주인들은 복된 삶을 누리고 있다.  
5    역사문화도시 소흥 댓글:  조회:407  추천:0  2014-09-01
역사문화도시 소흥 장학규   소흥하면 노신선생의 글이 떠오른다.독특한 흙기와 지붕밑으로 집집을 이어주는 장랑(대줄기 비가 쏟아져도 옷자락 하나 적시지 않고 이웃 마실을 다닐수 있는 장랑) ,길거리를 따라 얼기설기 이어진 운하,그 운하를 따라 지금은 고기잡이가 아닌 순수 관광용인 오봉선(乌篷船)이 시름 없이 떠다닌다.오봉선 하면 글만 본 사람들은 잘 모를것이다.배 양옆에 우리 미닫이 홈 같은 금이 있다.거기에 대나무로 된 "미닫이" 서너개를 활자처럼 휘여 가지런히 세운다.평시엔 그것들을 가운데 모아두었다가 일단 비가 오면 일직자로 쭉 당겨놓으면 비를 피할수 있는 요새가 된다.물론 배의 앞쪽과 뒤쪽은 막지 않는다.사공이 방향을 잡아야 하고 관광객이 주위 경치를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소흥에 네번 갔었지만 옆에 사람이 딸려있다보니 함형술집에서 술을 먹지 못한 것이 지금도 유감이다. 한번은 저녁 아홉시에 택시 타고 달려갔으나 술집이 문을 닫아버려 어쩔 수 없이 그 옆 가게에서 회향두 사놓고 선술을 마셨었다.그런데도 다리 병신된 공을기가 간신히 매대에 엽전을 올려놓으면서 술달란 화면이 떠올라 귀신이 달라붙었는가 했었다. 소흥 가면 꼭 들러야 하는 코스 두개가 있다. 하나는 대우릉이다. 대우는  황제,염제를 이은 요 순 우중의 한사람을 가리킨다.그런데 먼저 이의가 있다.우임금 시절의 중국은 중원지역에 한한다.우가 다스린 것도 황하인데 어떻게 되여 그의 릉이 양자강 하류지방인 소흥에 모셔진건가? 중국 관광문화의 아이러니라면 과한 평가인가? 그래도 우임금은 존경할만한 분이다.아버지 곤이 막는 방법으로 홍수를 다스리다가 실패하여 순임금한데 목이 잘리운 후 후임을 맡게 된 우는 막는 방법으로는 아니 된다는 것을 자각하고 소통하는 방법으로 치수에 성공한다.그 치수 방법보다 더 우리를 깨우치는건 10년간 치수과정에서 세번 집문앞을 지나지만 들르지 않았다는 "3과 가문 이불입(三过家门而不入)"이란 고사이다.요즘 관료들이 귀담아 들어야 할 미담이다. 비록 작은 것이지만 대우릉에서 수확 하나가 또 있다.바로 중국 혼인문화에 자주 등장하는 "문당호대(门当户对)"란 성구의 유래이다.대우상이 든 대전으로 들어가는 대문 양옆으로 사자 대신 돌로 된 2미터 미만의 북 같은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신분을 상징하는것으로  "문당"이라 하는데 신분이 높을수록 문당도 높아 혼인할적에 그 높이를 맞추어서 짝을 찾게 된다는 것이였다. 대우릉에서 30분 정도 차로 달리면 난정(兰亭)이란 곳에 이른다.먹물 먹은 사람이면 누구나 동경하게 되는 서예성지 난정,바로 동진때 서성 왕희지가 "난정집서"를 집필했던 고장이다.여느 관광지와 달리 드물게 주위에 집이나 가게들이 많지 않은 아늑하고 조용한 산골짜기이다. 정문에 들어서서 얼마쯤 걷다보면 첫 눈에 "아지"라는 비석이 보이는데 거위 "아(鹅)"자와 못 "지(池)"자가 틀림을 대뜸 알아볼 수 있다.왕희지와 그 아들 왕헌지가 한자씩 썼기 때문이다.왕희지가 "아"자를 금방 썼는데 마침 임금의 성지가 도착했고 사자를 맞이하려 간 서성대신 아들 왕헌지가 "지"자를 마감하였다 하여 부자비라고도 하는데 서예사상의 미담으로 전해진다.  왕씨 부자간에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많이 남겼다.헌지가 어렸을 적엔 큰 재목감이 아니였던가 본다.그래서 10여년간 글공부를 했지만 시종 애비의 승인을 받지 못했다.한번은 나름대로 괜찮게 썼다는 글을 가지고 애비를 찾아간다.이번에도 아니라면 글공부고 뭐고 다 팽개칠 생각이었다.아닌게 아니라 그 글씨를 본 서성은 천둥같이 화를 내면서 들었던 붓을 종이우에 탁 팽개치고 나가버리는것이였다.억울해난 헌지가 어머니를 찾아가 하소연 하는데 그 글들을 찬찬히 보던 어머니가 왈  "왜? 여기 글 같은게 있구먼은..." 그래서 그 어머니가 가리키는 글을 보니 바로 왕희지가 화를 내면서 던져버린 붓 자리라 이 말이다.  왕희지의 글 공력을 알아볼수 있는 대목이다.그만큼 서성은 서예에 혼신을 다 받쳤던 것이다.거위 늪엔 진짜로 거위(게사니)도 보이고 ...왕희지는 거위를 아주 좋아했고 그 움직이면서 변하는 모습을 관찰하면서 글을 썼다고 한다. 거기서 뒤로 나가면 중국에서 유일하게 강희제와 건륭제 두 조손이 함께 쓴 "어비"가 있다.물론 서성과는 비기지 못하겠지만 두 임금 모두 한다하는 서예가인것만은 틀림없다.건륭제가 이 곳에 들렀을적엔 강희제가 이미 다녀가면서 글을 남겨놓은지 몇십년이 흐른 뒤였고 할아버지가 남긴 "어비"옆에 자기도 남긴다는건 너무 무엄한 노릇이라고 인정,그래서 임금으로서는 도무지 상상할수도 없고 또 전례도 찾아볼수 없게 "어비" 뒤면에 자기 글을 남긴것이다.아, 건륭의 흉금과 효심이여...강희는 세파를 겪은 두둑한 뱃심만큼 글이 힘 있고 패기를 보여주었다면 건륭은 태평성대를 구사한만큼 유연하고 막힘이 없는 달필을 이루었다. 서예가들의 추앙의 성서인 "난정집서"는 사라진지 오래다.전하는데 의하면 서성의 어느 직계 후손이 그 책을 소장하고 있었는데 역대 통치배들이 아무리 얼리구 닥쳐도 내놓지 않았다고 한다.당태종 리세민대에 이르러 강압으로 아니됨을 알아채고 스파이를 파견,몇년간 그 후예와 사귄 스파이는 어느 한번 술좌석끝의 실수로 책의 행방을 알게 되여 훔쳐서 리세민한테 바쳤고 미칠것처럼 그 책에 반한 리세민이 죽을 때 "난정집서"를 무덤으로 가져갔다고 한다.실말인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실마리가 생겼으니 그걸 따라가 본다? 물론 그걸 손에 넣으면 대뜸 부자가 되겠지만 그 생각 보담 서성의 글이 확실히 그렇게 대단한가 한번 자기 눈으로 직접 확인해보고 싶다.  
4    지장보살의 도장 - 구화산 댓글:  조회:529  추천:0  2014-09-01
  지장보살의 도장 – 구화산 장학규   중국에는 4대 불교 명산이란 말이 있는데 이를테면 지혜의 보살(대지,大智) 문수의 도장인 오대산(五台山),행동의 보살(대행,大行) 보현의 도장인 아미산(峨眉山),자비의 보살(대비,大悲) 관세음의 도장인 보타산(普陀山),그리고 구화산(九华山)이다. 구화산은 소원의 보살(대원,大愿) 지장보살을 모시는 산이어서 특별히 적는다. 구화산은 안휘성 청양현(青阳) 경내에 위치,북으로 양자강에 의지하고 남으로는 태평호(太平湖)를 사이 두고 황산풍경구와 마주하고 있다.구화산 99봉우리중 해발 1342미터인 십왕봉(十王峰)이 가장 높다.구화산에는 99봉 외에 신광령 천향령 등 16령(岭),관음암 쌍석암 등 14암(岩),22석(石),금광동 어용동 등 12동(洞),삼각천 금사천 등 18천(泉),황석계 용계 등 10계(溪)로 유명하다.  구화산의 영기와 아름다운 산수는 일찍 많은 수련자들을 흡인했는바 진정 구화산이 이름을 내기는 신라 왕자 김교각 스님이 오셔서 부터였다. 당현종 개원(713-741) 말년,신라 스님 김교각이 바다를 건너 중국에 도착했으며 그 길로 곧장 구화산으로 찾아 왔다.당시 구화산은 많이 한적한 편이었고 김교각스님은 남릉인(南陵人) 유탕(俞荡) 등 사람들의 도움으로 4부의 불경을 완성하여 산에 공양토록 했다.그 후 김교각 스님은 몇 십년간 산에서 한발작도 나오지 않았고 어쩌면 인간 세상에서 증발한 듯 했다.실지로 동굴에서 밤낮 없이 단좌하여 수련에 들어간 것이다.배가 고프면 백토와 쌀을 섞어 먹었다. 지덕(至德,756년)초에 청양 사람 제갈절(诸葛节) 등 몇 사람이 구화산에 왔다가 김교각 스님의 고행을 보고 심히 감동되어 은자를 내어 땅을 마련,사찰을 지어 들게 하였다.건중(建中,780-783)초에 군수 장엄(张严)이 김교각 스님의 인격에 감복되어 중히 시주를 올린 한편 조정에 사찰의 편액을 내려 줄 것을 청구하여 "화성사"란 이름을 얻게 되었다.그후로 구화산은 번영 일로를 걷게 되었는바 국내는 물론 멀리 김교각 스님의 고향인 신라국에서까지 많은 신도들이 찾아와 수련할 것을 요구하였다.화성사가 일대 명찰로 자리 매김해 가고 있었지만 김교각 스님은 여전히 낡은 승복에 간단한 소식을 하는 고행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정원(贞元)10년(794) 여름 김교각 스님은 화성사에서 원적했는바 연세는 99세였다. 김교각 스님이 열반한 후 당지 승려와 백성들은 김교각 스님의 생전 소행과 열반후 자상한 모습을 보고 지장 보살의 화신으로 인정하였다.당 헌종(宪宗) 원화연간(元和,806-820)에 구화산은 정식으로 지장 보살의 도장으로 자리를 굳혀가게 된다.구화산은 그때로부터 송,원,명,청 등 조대의 보수와 중수를 거치면서 불교 문화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고 특히 명,청 시기에는 사찰만 300 여개,승려가 4,5천명이 될 때도 있었다.특히 지장 보살의 탄생일과 전도일인 음력 7월 15일과 30일이면 구화산은 그대로 향연으로 휩싸였다. 지장 보살로 추앙된 김교각 스님은 신라 33대 임금 성덕왕의 아들로 불교에 심취하여 당나라에 건너 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당시 삽살개와 차씨를 가져 왔다고 하며 당지의 "구화불차"가 바로 그거라 한다.지장은  항아리에 앉아서 열반했다고 하는데 그 육신이 등신불이 되어 오늘날까지 구화산 육신전에 모셔져 있다.그로하여 구화산은 속칭 "불국선경"이라 한다. 구화산엔 지금도 사찰이 99개가 있는데 그중 중요한 사찰 몇개 소개한다. 화성사(化城寺) 구화산이 지장 보살의 도장으로 되도록 승화시켜준 선사이다.구화산 중심의 곡지에 위치해 있는데 당나라 지덕 2년(757년)에 세워졌다. 만년선사(万年禅寺) 만년선사는 구화산의 "4대종림"에 속하는데 명나라 만력연간(1573-1620)에 해옥이라는 스님이 오대산으로 부터 와서 이 곳에 오막살이를 짓고 살면서 수련하다가 백세가 되어 원적했다고 해서 백세궁이라고도 불린다.이 곳엔 해옥 스님의 도금되어진 등신불이 모셔져 있다. 육신탑전(肉身塔殿) 구화산 신광령(神光岭)에 위치하고 있는데 지장 보살의 등신불이 모셔진 곳이다.지장 보살이 열반한 후 제자들이 이 곳에 육신탑을 세웠으며 탑앞엔 유리 장명등이 높이 걸려 있다.이 곳은 화성사와 함께 지장 보살 도장의 주요한 행사장으로 되고 있다.해마다 지장 보살의 출생일과 전도일이면 이 곳에서 법사가 진행된다.    
3    천년의 고도 경주 댓글:  조회:475  추천:0  2014-09-01
천년의 고도 경주 장학규   한국 땅을 많이 밟아본 것은 아니나 아름다운 추억은 많이 남겼다.그중에서 항상 가슴 언저리에서 숨쉬고 격정을 불러일으키는 고장이 경주이다. 천년의 고도 경주 중국에는 옛 수도가 수 백개가 된다.우리는 경주부터 해서 부여,공주,서울 ,개성,평양,졸본,국내성 등 이렇게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지만 중국의 옛 수도를 손가락으로 꼽자면 숨이 넘어간다.그래도 경주같은 천년고도는 없다.장안이 천년을 이어왔다고는 하나 딱히 계산 할 방법이 없고 그나마 북경이 정확한 계산이 나오는데 말갈족의 요나라,여진족의 금나라,몽골족의 원나라,한족의 명나라,만족의 청나라 해서 북경이 800여년이다.그러나 경주는 신라 한개 조대만도 쳔년을 유지해왔다. 아...신라의 밤이여 불국사의 종소리 들리어온다 ........  신라하면 경주부터 떠올리는 것처럼 경주하면 먼저 찾게 되는 것이 불국사이다.신앙으로 믿는 건 아니지만 불교를 많이 좋아한다.그래도 불교에 밝은 분들이 많기에 섣뿔리 불교를 설교하려는 생각이 없다.단 중국 불교와 틀리는 부분만 언급한다면 우선 일주문의 특이함이다.사찰의 간판(편액)이 걸리기도 한 일주문은 기둥 네개에 지붕을 얹는 일반적인 주택 형태가 아니고 일직선상의 두 기둥에 지붕이 얹어진 독특한 모습이였다.날듯이 하늘을 향해 고개를 쳐든 처마,상대적으로 약해 보이는 기둥 두개가 그것을 받치고 있었다.센바람이 불어치면 넘어지지 않을가 남몰래 걱정도 했었다. 일주문 지나면 천왕문이 보인다.중국에서는 흔히 천왕전으로 되어 있는데 문이라니 이상한 생각이 들어 다시 찬찬히 들여다보니 확실히 틀린 데가 있었다.대전이 아니구 말 그대로 문이다 보니 그저 지나치면서 보게 되는데 양옆으로 두 분씩 사천왕이 모셔졌는데 중국과는 달리 나무 난간으로 막아 놓고 있었다.지품도 남방 증장천왕과 동방 지국천왕은 같았으나 북방 다문천왕은 중국처럼 우산 든게 아니라 왼손에 창을 잡고 오른 손에 불탑이 들려 있었으며 서방 광목천왕은 지향대로 룡을 잡고 다른 한손에는 여의주를 든 형상으로 중국처럼 비단으로 용을 상징한것이 아니였다.곁가닥 얘기지만 불국사는 물론 해인사 통도사 할 것 없이 모두 사천왕이 잡귀를 밟고 있는 모습인데 반해 중국에서는 사찰의  취지에 따라 밟고 있는 것도 다리를 들고 있는 것도 있다.흔히 중국 사찰의 천왕전은 정면에 미륵불,뒤면에 위태불을 모시는 것이 통례인데 불국사는 그대로 문이기에 이런 절차가 있을 수가 없었다. 그곳을 지난후 또 오리무중에 빠진 것은 연화교 칠보교와 백운교 청운교에서였다.일반적으로 다리 교가 붙으면 호형의 다리여야 하는데 계단에 가까운 것이였다.아니,아예 계단이 분명했다.전에 그 밑에 연못이 있었다고는 하나 어딘가 궤변같은 생각이 들었다.그 옆 자하문을 들어서면 불국세계가 이어진다는 설명을 듣고 어쩌면 중국 사찰의 해탈교와 비슷한 역할을 노는게 아닐가 싶기도 했다. 그 다음 내용물은 거의 비슷했다.다르다면 불국사의 단청이 기 막히게 화려하고 사치하고 정교했다는 것이다.중국 사찰이 거의 비교가 안될 정도의 섬세와 조화로움에 한동안 대뇌는 정지상태에 놓이기도 했다. 불국사를 떠나서 갔던 곳이 국립경주박물관이다.책에서 감명깊게 있었던 에밀레종이 나의 마음을 사로잡았다.높이 3.75메터,입지름 2.27메터,두께가 11-25센치인 에밀레종이 한때 신라의 황페를 몰아왔다고 생각하니 그저 눈물겹기만 하다.아무리 10만근의 놋쇠로 만들었다고 해도 종 하나에 나라의 기강이 흔들렸다는 건 자원의 결핍을 되돌아 보게 하는 역사의 경종이 아니라 할 수 없다. 일명 성덕대왕신종이라 하는 에밀레종은 효성을 자처하고 나선 신라 34대 임금 효성왕이 봉덕사를 지으면서 구상되었고 35대 임금 경덕왕을 거쳐 36대인 혜공왕이 서기 771년에 완공한것이다.엄마를 찾는 어린애의 에밀레 소리가 지금도 가슴을 저민다. 에밀레종을 만들게 한 성덕왕은 불교적인 입장에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는 인물이다.중국에서 거의 신화적인 인물로 전해지는 김지장왕 보살인 김교각스님을 낳은 이가 바로 성덕대왕이기 때문이다,고국인들은 거의 모르고 있는 사실이다.지장보살이 지옥을 관장하는 보살쯤으로 알고 있어 민망할 때가 많다.중국 구화산에 와서 높이 득도한 김교각스님은 드디어 김지장왕보살로 높이 받들리게 되는데 세상뜰 때 년세가 99세였다.일반적으로 불교 스님들은 세상 뜨면 화장하는 것이 법이다.허나 지장은 화장하지 않고 항아리에 앉아서 열반하셨다.3년이 지나서 항아리 뚜겅을 뜯었는데 육신이 그대로 있더라고 한다.사람은 죽어서 3일후부터 육신이 썩기 시작한다.3년이 지나도록 썩지 않았다는 것은 영원히 썩지 않는다는 얘기이다.불교에서는 이런 현상을 두고 "등신불"이라고 한다.미이라와 혼동하지 말라,미이라는 사람이 죽은 다음 내장을 모두 걷고 방부제 처리를 한다.그러나 등신불은 오장육부를 모두 가지고 있을뿐만 아니라 방부제를 사용하지 않는다.그럼에도 왜 썩지 않을가?항아리 밑바닥으로 두툼하게 숯을 깔고 숨이 넘어가기 전에 항아리에 밀봉된다.몸 속의 수분이 생명과 함께 서서히 사라지고 습기가 숯에 막혀 육신을 침습하지 못한다.그래도 누구나 될수 있는 일이 아니기에 불교 역사에서 등신불이 되려고 노력한 사람은 수천이 되어도 진정 성공한 사람은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는데 그중 가장 먼저 성공하였고 신분도 가장 높은 분이 바로 지장보살 즉 김교각 스님이다.성덕대왕의 아드님인 김지장왕보살의 육신보살은 지금도 중국 안휘성 구화산에 모셔져 있다.   동양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천문대라는 첨성대,우리는 봉화대인줄로만 알았다.아니면 적의 동향을 살피는 보초막쯤으로 보였다.천문대라고는 실감이 오지 않았다. 그러나 저러나 천마총에서 또 한번 힘을 얻었다.역사를 읽으면서 항상 비해같은 걸 느꼈던 것 같다.우리가 우물가의 알 속에서 나왔소 니무 궤짝에서  태어났소 또는 닭의 자식이오 따위로 선조들의 출생 연대를 밝힐 그때 중국은 이미 백가쟁명의 춘추 전국시대와 한초전쟁시기를  넘어 오늘 중국의 판도를 만든 한나라의 전성기도 마무리되고 오늘날 우리가 즐겨읽는 삼국지연의의 그 시기가 바야흐로 다가오던 시기였다.문자가 없었고 문물이 적었던 이유가 아닐가.다행히 천마총에서만도 1만 1500여 점의 문물이 출토되었다고 하니 그보다 더 다행이 없다고 하겠다.고신라의 유일한 미술품 유물인 천마도장니는 또한 우리의 예술 역사를 더 멀리로 끌어간 유력한 증명이 되고 있다.자작나무 껍데기를 여러겹으로 겹쳐 누빈우에 하늘을 나는 천마- 그날 술을 억수로 마셨다.그리고 단란주점에 가서 목청 터지게 노래 불렀다.  ... 고요한 달밫어린 금옥산 기슭위에서 노래를 불러보자 신라의 밤노래를 경주의 밤하늘엔 아직도 나의 노래소리가 남아있다.  
2    속설 용정차 댓글:  조회:486  추천:0  2014-09-01
  속설 용정차 장학규     용정차는 3월 중순부터 따기 시작한다.청명 전에 딴 차는 명전차,곡우 전에 딴 차를 우전차라 한다. 옛적엔 숫처녀들만 차를 딸 자격이 있었다고 한다.그것도 공복에 목욕재계를 하고 맨손으로 따야만 했다.임금한테 바쳐지는 황제차는 처녀들의 가슴위에 올려놓고 말려야 한다는 뻥 같은 얘기도 전해지고 있다. 아무튼 지금은 누구나 딸 수 있다.그래도 꼭 지켜야 하는 룰이 있는데 손에 장갑 같은 걸 껴서는 아니 된다.영화에서 보던 장면과 꼭 같은데 대나무로 엮은 모자를 쓴 여인들이 갓 돋아난 애기 싹은 따서는 몸 뒤에 멘 광주리에 담는다. 그렇게 따온 것을 일단 그늘진 데서 건조를 시킨다.다음 남정들이 나와서 전기 가마를 올리고 차기름을 바른다.연후 건조된 차 잎을 가마에 넣는다.가마가 온도가 오르면 120도 되는데도 맨손으로 덖는다.일명 덖음차라고 하는 녹차는 비비고 누르고 헤집고 뒤집는 손동작이 열두가지가 된다고 한다.망석에다 비비는 보성 녹차와는 달리 용정차는 가마에서 볶기만 한다.그래서 차잎도 보성차처럼 배배 탈린 게 아니라 납작납작하다. 차 잎의 우렬을 가리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우선 차잎이 애되고 가느다란가를 보야야 한다.줄기 부분이 갈라지면 더욱 좋고.다음은 색상이 연하고 부드러워야 한다.등급이 틀린 차잎을 가지런히 놓으면 금방 판별이 된다.질 나쁜 차잎은 크고 굵고 거칠고 검다. 차는 다기에 따라서 마셔야 제 맛이 난다.육우의 "다경"에 따르면 당나라때 벌써 차를 끓이고 차를 마시고 하는 다구가 한세트에 29개가 되였다고 한다.다기 또는 다구는 강소성 이흥시에서 나오는 자사호가 가장 유명하다. 용정차는 다도 표현시 흔히 유리컵을 사용한다.컵의 내용물을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용정차의 다도는 세가지로 구분한다. 우선은 문차이다.컴에 차를 넣고 물을 4분의 1정도 따른다.마시라는 것이 아니라 냄새를 맡으라는 뜻이다.구수한 냄새는 물론이고 풀이 데쳐지는 냄새 또는 누룽지 냄새 등 맡는 사람에 따라 냄새가 틀린다. 다음은 관차이다.물을 마실 수 있을 만큼 더 부어주는데 금방 마시면 실례이다.차잎이 서서히 갈아 앉기 시작하며 물의 기운을 받아 차잎이 기지개 켜듯 쭉 펴진다.펴진 잎사귀의 모양새를 보고도 우렬을 판별할 수 있는데 좋은 차잎은 둥글고 탱탱하며 연녹색을 띠게 된다. 나중은 품차이다.채 갈아 앉지 않은 차잎을 훌훌 불어내면서 한모금 한모금씩 마신다.차향이 적어도 한시간 정도 입에 남게 된다. 용정차는 물 온도가 80도 가량이 적합하며 첫번째 우린 차물을 버리지 않는다.농도가 진해서 좀 쓰기는 해도 철관음같은 홍차처럼 첫 차를 꼭 버려야 할 이유는 없다.물론 두번째 우린 차가 가장 향기로운 것은 맞는 말씀이다. 중국에 사실이 웅변보다 낫다는 말이 있다.이론만 구구히 펼치면 너무 따분하다. 생동한 실례를 둬가지 든다면 차의 시조는 신농씨라 해야겠다.고서에 의하면 신농씨는 농업신으로 먹거리의 자연채집으로부너 인공재배로 넘어가던 시기의 사람이였다.산나물 산열매를 자기가 직접 맛보고 그것이 인체에 해롭지 않고 유익하다고 판단되면 곧바로 인공적으로 재배하였다고 한다. 이런 어마어마한 일을 하다보니 매일매일 독성이 있는 산열매나 산나물을 먹고 중독되였는데 최고로 하루에 72번 중독하였다고 한다.그럴 때마다 신농씨는 차잎을 질근질근 씹으며 해독했다고 한다. 차로 재미있는 이야기를 남긴 사람은 그래도 미국 전 국무경 키신져박사이다.1972년 중국과의 관계개선을 위해 암암리에 중국을 방문한 키신져박사는 북경에서 담판을 마치고 주은래의 배동하에 항주를 방문,용정차 두 캔을 선물로 받고 귀국한다.헬기안에서 궁금증이 한껏 동한 그는 가만히 캔을 따보았는데 아뿔사 차향이 삽시에 헬기안에 가득차는게 아니가.아차 했지만 늦었다.향을 맡은 수행인원들이 개미떼처럼 달려들어 한줌씩 쥐여가는 바람에 금시 바닥나고 말았다.서양놈들은 상급이구 어른이구 개떡처럼 알고 있으니...억울했지만 어쩔수도 없었다.후에 닉슨 대통령과 함께 와서 외교관계 건립문서에 싸인하구 다시 항주로 오게 되였는데 이번에 선물 달란 소리는 죽어도 못하겠더라.그래서 주은래더러 이게 전번에 먹던 그 차가 맞냐고 은근슬쩍 물었고 그 눈치를 보아낸 주은래가 다심하게도 또 두캔을 챙겨주었다고 한다. 아무튼 용정차는 음료수인 동시에 양생보강의 역할도 논다.피를 맑고 순하게 할 뿐만 아니라 고혈압 당뇨에도 독특한 효능을 갖고 있으며 항주 여인들은 차를 마시고 남은 찌꺼기를 욕조에 풀어서 목욕도 하는데 미용에 그렇게 좋다고 한다.    
1    천하일품 용정차 댓글:  조회:472  추천:0  2014-09-01
  천하일품 용정차   항주에 온지 얼마 안되어 내 안해가 있고 내 아파트가 있는 청도에 돌아 가게 되었는데 딴에는 인사를 낸다고 만여원 들여 용정차 한아름 사들고 친구들께 선물을 했었다.나름대로 괜찮다는 사람들인데 한번은 술을 먹다가 너 가져온게 이 식사보다 작지 않느냐는 식들로 얘기하는 것이였다.천원도 안되는 식사를 만여원의 값어치와 비기다니 몰상식해도 유분수지.억울하고 원통해도 씩하고 웃고 말았다. 부지자 불괴!(不知者不怪!)라 모르는 사람들을 어떻게 탓한단 말이.. 사실 용정차는 어디나 다 있다.북경에도 상해에도 광주에도...그러나 그게 우리가 흔히는 말하는 서호용정차가 아니라는 건 항주인을 내놓고는 잘 모른다.중국 10대 명차에 속하는 서호 용정차는 첫 차가 500그람에 2천원도 넘어 한다.재배 면적이 500헥타르가 될가..?그게 전국 각지에 널려진다면 틀림 없는 거짓말이다.그것도 첫 차는 나라 규정에 따라 일정 부분을 국가에 바쳐야 한다.용정차가 중국 전역 나아가서 세계 여러 나라에까지 수출된 이유는 아무래도 절강성 내에서 나는 절강 용정,항주광역시 지역에서 나는 항주 용정이 한몫 단단히 했다고 말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중국 10대 명차에서 톱으로 꼽히는 차는 항주 서호주변에서만 나오는 서호용정차이다! 서호용정차는 나라 국자를 쓰는 국차이고 항주는 그때문에 차의   수도로 널리 알려져 있다. 茶为国饮 杭为茶都 라는 말이 성행하고 있다.  모두 잘 아는 얘기지만 차를 크게 종류로 나누면 세가지가 있다.우선은 발효차이다.이 발효차를 세상인들은 8국 연합군이 중국 대문을 연후 차를 유럽으로 반출하면서 시간이 너무 오라 유럽 도착시 차가 떠서 생겨난줄로 알고 있는데 실제로 명나라 중기에 벌써 발효차 즉 홍차가 있었다.홍차중에서 대표적인 것은 운남성에서 나오는 기문 홍차이다.다음은 반발효차인 오룡차이다.대만에서 나오는 것이 유명하다는데...나중은 미발효차인 녹차이다.녹차중 대표적인 것이 용정차인데 이런 세가지 종류중 가장 좋은걸 뽑아 중국 10대 명차라고 하는데 서호 용정차는 그중에서도 톱으로 꼽힌다. 차를 말하면 용정차를 실례로 말하게 되는게 관습이다. 실제로 중국사람들이 차를 먹을수 밖에 없는 지리환경적인 요소가 있다.땅이 너른데다 평지가 많고 예로부터 환경보호도 잘 하지 않아 먼지가 쉽게 일어난다. 밖에 나가 한바퀴 돌고 돌아오면 기관지에 먼지가 앉아 매캐하다.그런데 기관지에 들어앉은 먼지를 청결할 방법이 없다.그래서 중국인들은 기름기와 육류를 즐겨 먹게 된다.장기간 이런 환경에서 살다 보면 그에 대응되는 음식문화,식생활이 생성되기 마련인데 기관지에 앉은 먼지를 씻어내리는 데는 기름기와 육류가 좋다는것을 알게 된 것이다.그런데 이런 음식을 먹으면 먼지는 씻어내리지만 대신 몸에는 지방질이 들어차기에 사람은 어쩔수 없이 비대해지게 된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에 오면 비대한 사람이 상대적으로 적은데 그것은 바로 차를 즐겨 마시기 때문이다.차는 지방질을 분해하는 역할을 논다. 그러나 차가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지기는 서기로 760년의 일이다.뭍 육(陆)자 깃 우(羽)자를 쓰는 육우가 "다경'을 써서 부터이다."다경"은 세계적으로 최초로 차를 재배하는 방법,차를 따는 방법,다도,다예를 상세하게 저술한 책이다.그래서 육우는 다성으로 높이 받들리고 있다.시에는 시선이 있어 이백,시성이 있어 두보,서예에는 서성이 있어 왕희지를 꼽는 것처럼 차의 성인이라 해서 다성이라 하는데 육우가 바로 그 사람이다. 육우의 인생은 기구했다.호북성 천문현 출생인 육우는 어렸을 때 부모한테 버림받은 아이였다.지나가던 스님이 발견하고 사찰에 안아다 키웠는데 지적스님이란 이 스님이 차를 많이 즐겼던 모양이었다.어린애가 귀여우니까 차를 우리게 하고 또 출장갈 때면 육우를 데리고 다니기 즐겼었다.그래서 륙우는 어려서부터 차에 대한 학문을 익히고 또 당시 유명한 인물들과 면목을 익히게 된다.그런데 아무래도 불교와는 연분이 없었는가 본다.육우가 열서너살될 쯤에 지적스님은 세상을 떠나고 그래서 그 이듬해 육우는 사찰을 떠나 정처 없는 나그네 길을 걷게 된다.그때로부터 전에 만났던 유명인사들을 차례로 찾아 다니며 차에 대한 학문을 진일보 넓이게 되고 그래서 절강성에 와서 세계적인 거작인 "다경"을 쓸 때 연세가 고작 스물 여덟이었다.지금도 절강성 호주(湖州)에 육우의 무덤이 있고 도처에 그분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우리 민족이 차를 접한 것은 통일신라때부터라고 한다.지금으로 부터 천이백여년이 되였다는 얘기인데 아이러니하게도 구화산에 갔다가 지장왕보살로 추앙된 김교각스님이 한국에서 차씨를 가져와서 구화불차가 생겼다는 설명을 들었다.김교각스님도 역시 천이백년전의 사람인데 그게 사실이라면 그전에 우리한테 차가 있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아무튼 그런 유구한 음다 역사를 자랑하기에 우리에게도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차 전문 저서가 적지 않다.그중 가장 유명한 것이 조선왕조 말기 초의선사가 쓴 "다신전"이 아닐가 싶다.초의대선사가 말씀한대로 곱씹으면 차는 아홉가지 덕이 있는데 첫째로 머리를 맑히는 두명의 덕이고 다음은 눈을 밝히는 명목의 덕이며 세째로 잠을 몰아내는 소민의 덕이요 네번쨰는 더위를 가시는 피서의 덕이고 다음은 추위를 피하는 거한의 덕이며 여섯번째는 내장을 지켜주는 보내장의 덕이요 일곱번째는 입맛을 돋우는 구미조장의 덕이고 다음은 소화를 돕는 체소의 덕이며 끝으로 마음 놓고 먹을수 있는 안심지음의 덕이라 하여 "차유구덕"이라 이름 한다.그런데 초의선사와 동시대 분이였고 동시에 스승격이였고 우리 민족사에도 아주 유명한 다산 정약용선생이 "차를 오래 마신 사람은 죽을 때 뒤틀거리지 않고 곱게 죽는다."라고 한마디 더 붙혀서 "차유구덕"을 "차유십덕"이라 한다는 설도 있다. 차를 말하면서 청나라 건륭황제를 간과할 수 없다.풍류임금이었던 건륭은 생전에 항주를 여섯번 다녀 갔는데 비행기 없고 기차가 없던 그 시절에 항주 한번 다녀 가자면 거의 1년이란 시간이 걸렸다.임금이란 양반이 자꾸 자리를 비우니 갑갑해난 신하들이 "나라엔 하루도 임금이 없어서는 안됩니다."고 충고를 하게 되었고 언론 길을 넓혀놓은 건륭도 '나라엔 하루도 임금이 없어서는 안되지만 임금은 하루도 용정차가 없어서는 안되느니라."고 억지를 부렸다고 한다. 다도에는 차를 받는 사람이 엄지 중지 식지를 모아서 테이블을 가볍게 두드리는 예절이 있는데 이것도 건륭으로 부터 기원했다고 한다.평복으로 나돌기를 즐겼던 건륭은 다방에 들어가서도 상하 구분을 하지 않고 내키는대로 부하한테 차를 부어주기가 일쑤였다.신하된 사람이 임금이 부어주는 차를 앉은 자세로 받을 순 없고 그렇다고 궁중에서 처럼 무릎 꿇고 받을 수도 없고 급한 김에 세 손가락을 모아 "무릎 꿇고 받나이다."란 뜻을 보였다는 미문이 오늘까지 전해지고 있다.이 양반이 즐겨 먹었다는 열여덟 그루 어차 나무 가 오늘날까지 남아있고 거기서 나온 백여그람 차가 경매에서 18만 인민페에 팔리기도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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