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张学奎文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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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글을 쓸수 있어 인생은 살맛이 난다 댓글:  조회:517  추천:1  2017-10-27
작가의 말   글을 쓸수 있어 인생은 살맛이 난다 네번째 단행본 "연장된 아빠"에 부쳐     글 많이 썼네요 이런 칭찬 아닌 칭찬을 나는 많이 듣는다. 그런데 세상에 버젓하게 내놓을만한 작품이 없는것도 사실이다.    2003년에 첫 수필집을 출간하고 꼬박 14년만에 이 수필집을 묶었다. 글인생 30여년치고는 참 미안할 일이다. 다작이라고 말하기엔 더욱 많이 부끄러운 현실이다.    솔직히 나는 글을 량으로 쓰는 타입이 못된다. 여느 친구들은 필만 들면 술술 글이 잘도 나오지만 나는 전혀 그렇지 못하다. 가슴에 딱 맞혀올때가 아니면 거의 필을 대지 못한다.    물론 나는 굳이 글쓰기 위해서 글을 쓰는건 장난에 다름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아무리 수사가 화려하고 론리가 정연하고 문장이 매끈할지라도 결국 가슴을 시원하게 후벼주는 짜릿한 맛이 없으면 그저 소일거리에 불과하다고 믿는 사람이다. 이런 리유로 나는 락서하듯 글을 마구 뽑아내는 행위에 별로 동의하지 않는다.    최근 10년을 거의 글 한편 쓰지 못한것에 대한 변명이나 방패는 절대 아니다. 나 스스로도 왜 쓰지 못했을가고 자주 반문한다. 물론 핑계는 더러 있었을거 같다. 먹고 살기니즘에 빠져서 시간이 없었다 또는 인생에 절망했다 뭐 그런 식의 리유를 댈만도 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글은 그런 경우에 나오는게 참글이 아닐가싶다. 글쟁이는 고통을 이겨내는 과정이 필요하고 피가 뜨겁게 끓어올라야 할것이다. 인간의 아픔을 아파하고 세상의 부조리와 다툴수 있어야 할것이다. 서늘한 구석에 올방자 틀고 앉아 지호자야를 주절대며 도고한체 청고한체 하는건 못난 문인의 짓거리임에 분명하다.    결국 나도 참문인은 아니였던거 같다. 남을 손가락질하기에 앞서 우선 자신부터 돌아봐야 할 시점이 분명하다. 뛰여난 명작은 아니더라도 하다못해 내 가슴에 잉태되고 응어리지고 그래서 옆사람들에게 일깨움이 되고 참고가 되는 그런 글이라도 더러 썼어야 했다는 자책감은 항상 따라다니기는 했다.    그래도 다행스러운것은 문학은 평생의 직업이란것이다. 퇴직시기란것이 따로 없이 눈이 꺼벅 닫혀지는 순간까지 할수 있는 일이 문학이다.    내 나이 이제 50대 초반이다. 아직 글 쓸 시간이 꽤나 남아있는거 같다. 그래서 여직 못했던 부분을 보완하고 완성할수 있다는 생각이다.    글을 쓸수 있어 고맙고 글이 있어 인생은 그나마 살맛이 난다.     2017년 2월 청도 자택에서 
8    리포터는 덤으로 받은 행운 댓글:  조회:518  추천:0  2017-10-27
  작가의 말   리포터는 덤으로 받은 행운       가끔 내가 어떻게 글을 쓰게 되였을가 저절로도 궁금해진다. 마을에 우리말 학교가 없어서 앞동네로 유학 다니다가 소학교를 졸업할 무렵에 영문 모르게 되쫓겨와 초중까지 동네한족학교를 쭉 다녔었다. 가정이 가난해 그 초중도 끝내 마치지 못하고 그만 사회청년이 되고말았다. 내 가방끈은 대개 여기까지이다.    후에 글이란 것에 반하게 되면서 어찌어찌하다가 연변대학 공부를 하게 된 것은 순전히 운수가 좋아서였다. 넘어진게 용케 떡함지에 엎어지거나 지나가는 미인의 품에 덜컥 안겨진 형국이라 형용해도 크게 과하지는 않다. 로또 당첨같은 기적이였다. 정말이지 내딴것이 어떻게.   그만큼 내가 글을 쓰게 되였다는게 꿈만 같고 신기하다. 그리고 글을 쓸 수 있다는게 얼마나 다행이고 행복한지 모르겠다. 따분한 농촌생활이, 지긋지긋한 가난이 나를 글쟁이로 변신시켜준 것이 분명하다.   어쩌면 신문기사는 내 글의 기반이고 모태가 틀림 없다. 시골의 통신원으로부터 시작해 료녕신문사,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흑룡강신문사까지 두루 전전하면서 36년동안 내가 쓴 리포트는 어림잡아 1천편은 넘어된다. 문학작품의 배가 넘는 수치이다. 작가이기전에 먼저 기자의 타이틀을 달아야 맞겠지만 그러나 나는 이 세상에 절대적인 공평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숙명으로 믿는 사람이다.   그렇지만 나는 천만다행스럽게도 또한 사람을 잘 만난 행운을 지니고 있다. 골목마다 구비마다 도움의 손길을 보내준 감사한 분들이 있었다. 그들이 아니였다면 아마 나는 오늘날까지 뻗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우선 흑룡강신문사의 리장수 선생을 꼽아야겠다. 나에게 나아갈 길을 제시해준 스승이다. 그다음은 료녕조선문보의 김광명 선생님이다. 내가 전문인의 길을 걷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신 멘토같은 분이다. 그리고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의 김두필 선생이다. 더 넓은 길로 나아가게 곬을 만들어준 고마운 은인이다. 끝으로 청도에서 만난 박백림, 박영만 두분 선생이다. 이분들은 나에게 운신의 플랫폼을 만들어준 지인들이다.    더불어 이날이때까지 경제적인 후원을 해주면서도 이름을 밝히지 못하게 하는 모 지성인에게 고마운 마음을 다시 한번 전한다.    아마 문학작품집은 앞으로도 계속 나오겠지만 리포트는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아닐가 한다.                                                                                     청도에서                                      2017년 5월 1일  
7    디아스포라와 노스텔지어의 또다른 해석법 댓글:  조회:362  추천:1  2017-07-23
디아스포라와 노스탤지어의 또다른 해석법 -소설집 “청도로그인”(장학규 저)을 다운해본다 한영남   새삼스러울것도 없이! 중국조선족들의 민족대이동은 벌써 시작되였고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처음에는 조선이나 러시아로 보따리장사를 나서더니 1992년 중한수교이후 물꼬가 트면서 급물살을 탄 한국나들이는 코리안드림으로 이어졌다. 겸하여 중국 대도시나 연해도시로의 진출 역시 만만찮은 흐름이더니 이제 청도 조선족인구가 10만명을 웃돈다는 집계다.  물론 그에 따른 부작용으로 연변 내지 동북3성 조선족 집거지역의 조선족학교 페교현상과 편부모현상 및 가짜리혼과 국제결혼 등으로 말미암은 가정파탄 역시 간과할수 없는 작금의 이야기들이다. 그러나 변방오지에서 부자꿈은 꿀수 있을지 몰라도 그 꿈을 현실화하는데는 어디까지나 제한성이 있었고 그래서 너나없이 외국이나 연해도시진출을 꿈꾸는것이다. 그에 따라 그런 우리 민족들의 삶의 생생현장을 리얼하게 파헤친 문학작품들 역시 신문지상이나 잡지지면에서 심심찮게 오르내리고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문학작품들을 통해 이역에 진출한 조선족들의 삶을 편린적으로나마 살펴볼수 있었고 이제 그런 작품들은 당당하게 일석을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북경, 소주, 광주, 심수, 항주, 청도, 위해, 연태, 조선, 러시아, 한국 등을 배경으로 한 많은 작품들이 그것이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소설가이며 평론가인 장학규 중국조선족 중견작가의 단편소설집 “청도로그인”과 만나게 되였다. 고백하거니와 나는 장학규형을 잘 모른다. 더러 선배문인들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어서 실루엣으로 알아모셨고 중국연해조선족문인회가 발족되면서 그무렵 대련에 있었던 나는 그 초기멤버로 청도행을 하게 되였다. 그날 술상에서 정식 인사를 틀면서 술 몇잔 마신 기억은 지금도 새롭다. 그리고 우리는 메신저로 문학에 대해, 인생에 대해, 인간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재작년이던가 학규형의 부탁을 받고 어쭙잖게도 청도조선족작가협회 작품집에 서평을 쓰기도 했고 청도조선족문인회 문학상 심사를 맡아 청도행을 하기도 했다.  아직도 문학을 생명처럼 여기는 몇 안되는 문인들가운데 학규형이 있다. 그리고 문학은 철자, 띄여쓰기부터가 기본이라고 고집하는 학규형과는 의기상투한데가 없지 않았고 그것은 기어이 우리의 인연을 깊게 만드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다시 부연하거니와 나는 학규형을 잘 모른다. 잘 모르면서 술과 담배와 문학을 좋아한다는 공통점을 턱대고 감히 형이라 불러댔고 평소 이런저런 투정질도 곧잘 하군 했다. 그런데 정작 이 글을 쓰려고 보니 잘 모르는것(잘 모른다기보다 많이 접촉하지 못한것)이 오히려 순수 작품만으로 몰입할수 있지 않나 싶어 약간은 헷갈리기도 한다. 어쨌거나 이제 작품을 하나씩 읽어내려가노라면 작가 장학규는 인간 장학규로 다가오지 않을가 싶어 용기를 내여 소설집파일을 열고 열심히 읽기 시작했다.     스토리로의 접근 일단 이번 소설집에는 순수 청도진출 조선족들의 삶의 현장에 앵글을 맞추고있다. 그 스토리들을 대충 살펴볼것 같으면- “하늘엔 울바자가 없다”에서 주인공 봉은 회사를 말아먹고 현실도피를 꾀하면서 등산길에 오른다. 절경은 아니더라도 부르면 선녀라도 나올것 같은 산행길에서 봉은 어느 순간 환각을 느끼며 폭포아래로 추락하고만다. 그런 봉을 곁에서 지켜본 조씨는 봉의 행장을 챙겨가지고 도관에 오고 도인들에 의해 구원된 봉을 꼬드겨 어느 동굴로 향한다. 그 동굴속에서 봉은 동반자살을 앞두고 집에 전화를 했다가 기사회생의 소식을 접하게 된다. 죽기 위해 쓰는 힘으로 살면 살아내지 못할리 없다고 했던가. 거의 파묻힐번한 동굴에서 봉과 조씨는 죽기내기로 탈출을 강행하고 진작에 조씨와 동반자살이 약속된 취의 합류로 탈출을 완성한다. 소설은 봉의 육체적구원으로부터 시작되여 봉의 정신적구원(동굴에서의 탈출은 봉의 새로운 탄생을 의미)으로 승화되면서 시종 탕개를 늦출수 없도록 독자들을 깊숙이 소설속에 빨아들이는 강한 인력을 보여주고있다. “갈대의 뿌리는 얼마나 깊을가”에서 한국인 맹사장은 빚더미만 남긴채 어느날 잠적해버린다. 결국 통역을 해온 준호는 어쩔수없이 볼모로 잡히게 되고 쇼량과 쇼밍네 형제에 의해 컨테이너에 연금된다. 거기서 준호는 쇼량의 녀동생 링링을 만나게 되고 인적이 없는 그곳에서 준호와 링링은 사랑에 불을 붙인다. 지극히 피동적으로 연금되였던 준호는 갓 잡아올린 물고기마냥 싱싱한 링링한테서 삶의 희망을 발견하고 자신이 해야 할 일과 나아갈 길을 알아차린다. 맹사장이 남겨둔 낡은 기계를 다시 작동시켜 밀린 로임도 주고 새로운 사업을 개척할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한 소설은 해피엔딩으로 끝나면서 한국인에만 의존하던 중국인 내지 중국조선족들이 스스로 삶의 길을 찾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던져주고있다. 특히 소설은 홍합에 대한 연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성실한 노력만이 살길이라는 소박한 진리를 조곤조곤 까발리고있는것이다. “가장자리”에는 청년 하나가 등장한다. 청년에 대한 일체 정보는 깡그리 삭제된채이지만 그것은 소설에서 그리 중요한것이 아니다. 요는 란희가 그 청년을 대하는 태도변화에서 비록 돈만 주무르는 장사군이라 하지만 마음속 깊이에 남아있는 우리 민족들의 순수하고 질박한 미덕이 부활하고있다는것이다. 타향에서 이방인으로 삶의 터전을 닦는다는것은 전쟁에 다름아니다. 그런 삶의 소용돌이속에 란희라는 연약한 조선족녀성은 그래도 살아보려고 아득바득한다. 그런 란희네 상점으로 어느날 예고도 없이 문득 뛰여든 청년은 그러나 란희의 눈에 미운 사람이 아니다. 단지 조선말을 한다는 그 리유만으로도 충분히 이웃집 청년을 떠올리게 하고 그래서 란희는 라면을 끓여주고 남편앞에서 슬기롭게(?) 그 청년한테 돈 백원을 줄수가 있었다. 아리랑으로 같이 울수 있는 민족임을 다시한번 재확인할수 있는 대목이다. “바람의 옵션”에서는 약간 다른 이야기가 펼쳐진다. 중국진출 한국인 준호는 조선족녀성인 춘심이한테 련정을 느끼고 모든것을 훌훌 털어버린채 둘만의 삶을 시작한다. 그러나 현실은 처처에서 송곳이며 망치며를 내들고 찌르고 두드리며 못살게 군다. 돈만 부족되는 실정이라면 혹시 그들은 운명이라 체념한채 죽치고 살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집주인 진씨는 춘심이의 녀자를 넘보고있었고 위기일발의 시각에 준호가 등장한다. 욕심을 채우지 못한 진씨는 세상 소인배가 다 그러하듯 경찰에 신고했고 준호는 불법체류에 걸려 구치소에 갇힌다. 이 소설은 새로운 시각에서 조선족들의 삶의 현장을 투영시키고있어서 이채롭다. 그런가하면 연해진출 조선족들은 “129번” 버스를 타기도 한다. 이 소설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129번 버스에 승차한 주인공의 현실과 생각 사이를 넘나들면서 조선족들의 삶의 모습에 각광을 떨구고있는 점이 특이하다. 서두와 결말에서 “아, 미치겠네!”를 반복하면서 현실생활의 고달픔과 팍팍한 삶의 모습을 클로즈업시키고있다. 묘한 구성이라 해야겠다. 누구라도 한번쯤 시도해보았을법한 “일탈”에 이른다. 일상에 찌들고 지친 동이는 일탈을 꿈꾸면서 바다낚시에 나선다. 그는 바다낚시를 하다가 바지락을 줏는 녀인과 조우하게 되고 그 녀인을 보는 순간 언뜻 고향집 쌍가매를 떠올린다. 그리고 어쩔수없이 밀물에 포위된 두사람. 그들은 살기 위해 같이 불을 지펴야 했고 그들은 살기 위해 음식을 나눠먹어야 했으며 그들은 생존을 확인하기 위해 서로를 탐해야 했다. 썰물이 가고 녀인은 사라져간다. 그 녀인을 바라보는 동이의 눈에는 기어이 쌍가매가 다시 떠오르고있었다. “일탈”은 자연속에서 인간의 본모습을 적라라하게 보여주었다는데서, 또 그것이야말로 우리 본연의 모습임을 환기시켜주었다는데서 점수를 획득하고있다. “인저리타임”도 재밌게 읽은 소설이다. 주인공 조씨는 밥집의 남주인이다. 그의 유일한 락이라면 바다서리를 하는것이다. 그러나 어느날인가 흰얼굴의 등장으로 그의 바다서리는 서리를 맞게 된다. 그렇게 등장한 흰얼굴은 “주인장, 여기 술 한잔 주시오”를 네번 정도 웨치면서 각각의 꿈과 모습으로 조씨앞에 나타난다. 한국행을 해야만 돈을 벌수 있다고 여기는, 그리고 일확천금만이 유일한 길이라고 여기는 우리 민족의 못난 모습을 아프게 보여준 작품이다. 특히 인상적인것은 매번 같은 말로 나타나지만 매번 다른 옷차림인 흰얼굴은 그대로 그의 부침을 극명하게 보여주고있으며 그런 흰얼굴의 부침으로 우리들의 일그러진 모습을 투영시켜주었다는데서 이 소설은 성공하고있는것이다. 소설집의 타이틀로 된 “청도로그인”은 조선족들의 삶의 현장의 축영이라 해도 대과는 없을것이다. 주인공 위동의 눈에 얼비친 신우, 범철, 남수, 찐따거, 장박사 등은 각각의 위치에서 각각의 우리 신변 인물들을 대변하고있다. 특히 이 소설은 재미나는 에피소드들을 소스로 얹어주어 재미있게 읽히면서 진한 사색을 던져주고있다. 타향에서의 조선족들의 삶, 그들의 삶은 현재진행형이다. 아니다. 살아가는 소리들의 하모니이다. 아니다. 살아있는 목숨들의 히질긴 아우성이다. 그것을 “청도로그인”은 한 사람(위동)의 스케줄에 따라 주욱 우리앞에 펼쳐보이고있다.  “사거리”는 특이한 스토리를 가지고있다. 이 소설은 같은 서두를 가지고 시작된 여섯개의 이야기가 각각의 다른 결말에 이르면서 소설의 묘미를 더해주고있다. 아파트단지를 어슬렁 나서며  천이는 두손으로 아래우 주머니를 더듬었다. 손에 잡혀나온것은10여 년간 꾸준히 피워온 쌍희표 담배이다. 입에 담배를 붙여물고 두손을 바지 주머니에 깊숙히 질러넣고 어깨를 옹송그리며 헐떡헐떡 반달음치는게 천이만의 브랜드 이미지이다.  4월의 청도 아침날씨는 유달리 변덕이 많다. 어제까지도 찬 바다바람이 몰아치던것이 오늘은 금세 얼굴을 바꾸고 사람을 지글지글 볶기 시작했다.  천이는 영문 모를 사람들의 영문 모를 바쁜 행보속에 무작정 합류하면서 일단 오늘은 걸어서 출근하기로 작심한다.  회사까지는 도보로 20분 거리이다. 대체로 비슷한 사이즈의 두갈래 코스가 있었는데 그것도 묘하게 두갈래 모두 사거리 두개씩 지나야 했다.  버스 선로도 여러개 있었으나 전에는 괜히 폼을 잡느라고 매일이다싶이 택시를 잡아타고 출퇴근했었다. 주머니친구가 매일 적자투성이라고 아우성이였지만 회사동료들이 부러운 시선을 보내오는게 그대로 풍선이 되어 둥둥 뜬 기분이였다. 에라이, 인생이 얼마나 길다고? 사람은 좋은 기억을 만들기 위해 산다고 생각하니 날마다 무덤으로 향하는 노정도 즐겁고 대견했었다. 누구처럼 미쳐서 살다가 정신 들어 죽는게다.  그렇게 나사 하나 풀린것처럼 쭉 지내오다가 문뜩 자기가 안방 호랑이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뭐야? 가까운 친구들이 차례차례 집 사고 자가용 갖추고 또 어떤 넘은 느닷없이 사변을 당해 병신이 되기도 하고 아예 꼴기 없이 죽어나가기도 한다. 어제도 숱한 돈을 팔고 아가씨 손 한번 잡아보지 못하고 곤드레만드레 취해서 집에 돌아왔다가 먼 고향에 있는 친구의 비보를 들었다. 술자리에서 그대로 엎어져 죽어버렸단다.  남자 인생 황금기라는 마흔 고개가 어쩌면 시련의 고개인지도 모른다. 망할 넘의 언덕이 어디 정해져서 따로 있나? 그러면서도 속은 텅 비여버린다. 느닷없이 죽음이라는 추상적인 관념이 세부적인 형상이 되여 우렷이 나타난다.  저 앞 태양성이 바라보이는 첫 사거리에 행인과 차량들이 막 범벅이 되여서 멈춰져 있었다. 교통사고가 난게 분명했다.  인용이 장황하지만 이런 서두로 시작된 이야기들은 그러나 각각 다른 흐름으로 번지면서 읽는 이들에게 자못 신선한 의미로 다가온다. 결국 같은 아침을 맞이하지만 서로 다른 이야기를 써나가는 오늘 우리 삶의 모습 그 자체인것이다. “조깅”은 만득이의 아침조깅에서 만나게 되는 현실과 회상의 짬뽕맛이 일품이다.  눈 없는 이곳의 미적지근한 겨울이 다가오면 항상 저멀리 처마밑에 고드름을 만드는 고향의 겨울이 떠올랐고 주변 농군들이 바짝 메마른 누르끼한 땅에 인분을 퍼놓고 종자를 뿌리는 봄날이면 어린시절 늘 보아왔던 시꺼면 흙에 그대로 싱싱하게 곡식이 자라던 고향의 비옥진 들판이 눈앞에 우렷이 나타났다. 어쩌면 청도 조선족들의 노스탤지어를 가장 집약적으로 표현한 구절이 아닐가 싶다. 고향의 하늘이 기억에 새롭다. 티 한점 찾아볼수 없이 맑고 깨끗했던 하늘이 태반이였다. 사람의 모습이던것이 급작스레 짐승의 형상으로 변하고 산수가 불시에 수목으로 바뀌는 흰구름의 조화는 신비하기만 했다. 봄이면 아지랑이 몰몰 피여오르는 가운데 강남 갔던 제비가 하늘을 오르내리며 회귀를 자랑했고 여름에 접어들기 바쁘게 싱그러운 꽃향기에 실려 잠자리들이 너울너울 춤춘다. 가을이면 애처로운 울음을 남기며 새로운 서식처로 자리를 옮기는 기러기떼가 줄을 이었고 겨울이면 솜같이 가벼운 눈꽃이 하늘하늘 춤추며 내렸었다. 고향은 대체로 랑만이였고 동화였다. 고향은 만득이가 남보다 더 일찍 돌아가야 할 인생역이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런 만득이의 고향에는 그가 그토록 잊을수 없어하는 민정이가 있다. 이 소설은 타향살이에 지친 사람들에게 향수를 불러일으키게 하고 저마다의 고향생활을 떠올리면서 먼 고향하늘 우러러 눈물 글썽이게 만드는 매력 아니, 마력이 있다.  “필터링”은 다분히 기봉소설스럽다. 그러나 우연을 필연처럼 만들고 필연을 우연인듯이 받아들여야 하는게 우리들의 삶이 아닌가. 주인공 환은 의지와는 상관없이 어떤 마작판에 끌려들게 되고 그로부터 구레나룻의 끈질긴 추격에 시달린다. 도망치는 환에게는 그러나 생각지도 못했던 이런저런 기회들이 생겨나고 나중에 환은 떳떳이 세상과 마주하게 된다. 소설에서 소품으로 등장한 1원짜리 동전은 스토리전개를 위해서뿐만아니라 주인공의 성격발전변화를 위해서도 꼭 필요한 필수불가결의 요소인셈이다. 이제 “살어리민박”에 들려 이야기를 들어보자. 민대리로 통하는 봉수는 한국사장인 한사장이 회사부도로 경영을 접게 되자 마무리를 도울 양으로 살어리민박에 머문다. 그리고 그의 주변에는 뚱보아줌마, 한국 김씨와 연길 김씨, 심양 신씨와 그의 녀자인 말라꽹이 등이 등장해서 나름대로의 역할에 충실한다. 민박 자체는 별 볼일 없어도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을 다양하게 그려보일수 있는 가장 좋은 장소의 하나가 될것이다.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할수 있는 조건부를 만족시키고 각자 부담없이 자기 편한대로 살아도 아무 문제 없다는 여기에 민박의 재미스러움이 깃들어있는것이다. 살제 소설에서도 삶에 지친 사람들과 꿈에 부푼 사람들이 모여 새로운 재기를 꿈꾸는 무대로 살어리민박은 등장한다. 그리고 소설은 각 지역인들의 성격특점까지도 간과하지 않고 극명하게 그려보이는 세심한 배려까지 하고있다. 황혼사랑을 그려보인 “네모난 하늘”(건국댁과 해방씨라는 작명이 인상적이였음)과 사랑을 대하는 우리들의 자세를 다시 돌아보게 만드는 “석로인의 전설”(재치넘치는 대화가 읽는 내내 독자들의 입귀에 미소가 걸리게 만드는 소설), 인생은 결국 돌고 돌아 원점으로 되돌아온다는 “노오란 동그라미”(사랑놀이에 대한 묘사가 백미였음) 등 소설들도 각각의 스토리로 독특한 맛들을 내면서 우리들의 일상을 돌아보게 해주었다. 모두어보면 학규형의 이번 소설집에 수록된 소설들은 일제히 연해지역진출 조선족들의 삶의 모습에 서치라이트를 켜고 시종 그들의 희노애락을 다루면서 우리 민족들의 또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는데서, 특히 우리 조선족들의 청도 현주소를 짚어보였다는데서 조선족문단의 한 공백을 메우는 장거로 된다고 감히 우기고싶다.   언어로의 접근 학규형은 언어야말로 문학의 기본이라고 힘주어 설파하거니와 소설적인 언어를 주조해내는 마술사적인 힘을 가지고있다고 해야 할것이다. 그의 소설적언어들은 자칫 쉽게 스칠수 있을지 모르나 하나하나 곰곰 따지고 음미해보면 그 생동함과 그 풋풋함과 그 신선함에 놀라지 않을수 없다. 백마디 말하는것보다 그의 소설속에서 쉽게 채집할수 있는 례문들을 같이 감상하는 시간을 가져보는것이 오히려 설레발치기보다 나으리라.   나무의 초록색보다 바위의 회색빛이 더 많이 보일 정도로 순도높은 바위산이다. 굵은 바위덩치들이 곳곳에서 힘자랑을 한다. -”하늘엔 울바자가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옆에 있어봤자 밥축이나 내는외에 아무런 도움도 안되는 남편이란 인간때문에 반나절 남짓 뇌신경에 바이러스가 감겨든게 억울하기도 했다. -”가장자리” 사실 란희도 인젠 모가 다 갈리여 더이상 정 맞을 자리도 없다. 벌써 오래전부터 내릴대로 내려 더이상 내릴 꼬리도 없다. -”가장자리” 조물주가 아무렇게나 되는대로 갖다붙여놓은듯한 벌름코에서 벌렁벌렁 코방울이 나왔다들어갔다할때면 세상은 완전 지옥이였다. -”바람의 옵션” 대신 심술이 온몸에 방울방울 묻어났다. -”바람의 옵션” 남보다 먼저 올라가도 어차피 시루속 콩나물처럼 허리 휠 틈도 없이 꼿꼿이 서서 가야 할 운명이 분명하지만 목숨을 걸듯이 밀고닥치며 버스에 오르는 것을 보면서 그녀는 인생이 참 더럽고 역겹다는 느낌뿐이었다. -”129번” 그녀를 보는 그의 눈빛에는 우울이 그대로 방울져 흐르고 있었다. -”129번” 10월 중순의 청도의 아침 해살은 미안한줄도 모르고 그저 따갑기만 하다. -”일탈” 이제는 수도 없이 돌리고 돌린 레코트판이다. 스팸메일 같은 과거로 무조건 삭제하고프기만 한 아픈 기억이다. -”일탈” 하기사 모기 배꼽마저 빼먹을 요즘 세상에 누구를 믿는다는 자체가 어불성설이였다. -”인저리타임” “아이쿠 얼마나 말을 조리있게 하는지 모르는 사람은 깜짝 속히겠더라구요. 물에 빠지면 입만 동동 뜰 사람이데요.” -”인저리타임” 하품이 줄달음쳐 나왔다. -”청도로그인” 사는건 머슴급인데 포부는 세종대왕급이라고나 할가. -”사거리” 희는 마침 울고싶었는데 때맞추어 뺨을 때렸다는듯 눈가에 실눈물을 떠올렸다. -”사거리” 양부장이랑은 같은 채널에 있지 않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가끔 둘이 묘하게 도킹되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조깅” “이기기 다행인줄 알어. 저 친구 숨쉬는거 내놓고 다 거짓말인데 오늘은 간만에 부처님이 되실 모양이야.” -”필터링” 어쩌면 후둑후둑 튀던 심장이 눈깜짝할 사이에 랍치당한 모양이다. -”필터링” 아무튼 정신이 약간 가출된 상태가 아니고서는 뚱보아줌마와 보조를 같이한다는건 어림 반푼도 없었다. -”살어리민박” 무지막지한걸 가문의 영광으로 아는 모양으로 김씨는 항상 대방의 기분 같은것을 념두에도 두지 않았다. -”살어리민박” 무안해진 뚱보아줌마가 왕벌처럼 왕 고아댔다. -”살어리민박” 그러나 솔직히 건국댁은 그런 자연의 위대함에는 멸치 똥만큼도 관심이 없다. -”네모난 하늘” 개 풀 뜯어먹다가 기침하는 소리하고있네. -”네모난 하늘” 물론 물고기에게 수영 가르치는 격이지만 평생 총을 가지고 논 사람으로서는 쉽지 않게 많은 지식을 가지고있었다. -”네모난 하늘” 번지수 다른 소리 고만해! 나 지금 요상한 쇼를 구경할 여유가 없거든. -”석로인의 전설” 13억 인민 모두 그가 망하기를 바라는 것 같은 느낌이다. -”석로인의 전설” 손가락으로 슬쩍 밀었다가 놓으니 씽하고 용수철처럼 튕겨 일어나는것이 생동하게 알려왔다. -”노오란 동그라미” 작가란 모름지기 언어의 마술사여야 하고 언어의 련금술사여야 할것이다. 언어의 마술사란 언어를 자유자재로 능수능란하게 다루어야 한다는 의미가 될것이고 언어의 련금술사란 자신만의 언어를 만들어내서 작품의 감칠맛을 더해야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도 무방할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학규형의 소설에 등장하는 언어조합들은 그 아니면 아무라도 쉽게 흉내낼수 없는 오로지 그만의 소설적언어로서 이런 언어들을 씹으며 읽는 그의 소설은 그래서 그대로 농익은 감주같은 깊은 맛을 내는것이다. 화석화된 고루한 언어가 아닌, 그렇고 그런 매너리즘적인 사고방식이 아닌, 살아 숨쉬는 싱싱한 소설언어들의 향연은 이 소설집의 품위를 업그레이드시키면서 우리들에게 탈상식적인 서사방법을 제시해주고있다.    테마로의 접근 전반 소설집의 15편 소설들은 일제히 청도를 배경으로 하고있으며 조선족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고있다. 디아스포라라는 낱말이 결코 생경하지 않는 요즘 이들은 정든 고향을 떠나 타향에서 자신들의 삶에 충실하며 살아가는 이야기를 엮어가고있다. 그래서 그들에게 가장 쉽게 얼비치는것은 다름아닌 노스탤지어이다. 살다가 지쳐서 어느날 술 한잔을 하거나 비 내리는 날 창가에 서서 먼 고향하늘켠을 바라보면 어김없이 고향에 대한 향수가 꾸역꾸역 치밀어오르는것은 인지상정이다. 하다면 우리는 왜 이 고향을 떨치지 못하고 살아가는것일가. 인간은 아무라도 모체귀환으로의 본능을 가지고있다. 잠 잘 때 자궁속 모습을 하는것이 가장 편하다는 연구결과가 보여주듯이 인간은 아무래도 그 세포마다에 본능적인것들을 소지하고있는 모양이다. 자궁-엄마-고향으로 이어지는 이런 모체귀환의식은 자궁이 곧 엄마요 엄마는 곧 고향이라는 대용을 가능케해주며 그런 의미에서 고향은 무의식속에서라도 떠올려지는 가장 따스한 품이 되는것이다. 소설집 “청도로그인”은 청도진출 조선족들의 삶의 모습에 각광을 떨구고있다. 확대경을 대든 프리즘을 대든 고향을 떠나 타향살이를 하는 우리 민족의 한 군체를 대변하고있는 청도조선족들은 지극히 상징적이다. 세계 각지에 널려있는 유태인들의 그것과도 변별되는, 세계 각지에서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 민족들의 그것과도 변별되는 오로지 중국조선족들의 현주소인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청도조선족들은 다분히 상징적이고 오늘날 현시점에서 우리 민족의 또다른 양상을 보여주고있는 셈이다. 두고온 고향에는 어릴적 깜장네도 있을것이고 고향의 아무 풀가지나 꺾어보아도 거기에서는 어릴적 추억들이 까르르 웃어줄것이다. 또 어쩌면 사립문 열면 엄마의 고무신 먼저 아버지의 쿨룩거리는 기침소리가 마중나올것 같은 고향, 그래서 고향은 우리의 가장 큰 뒤심이고 그 뒤심이 있어 우리는 타향에서도 씩씩하게 살아낼수 있는지도 모른다. 전반 소설집을 관통하고있는 이런 노스탤지어는 바로 오늘날 디아스포라적인 삶을 살고있는 청도진출 조선족들의 심층 밑바닥에 흥건히 고여있는 민족정서라 해도 과언이 아닐것이다. 그것을 이번 소설집에서는 하나의 올곧은 맥으로 시종 꿰주고있는것이다. 환언하면 청도진출 조선족들의 삶의 모습을 그려보이면서 인간들의 궁극적인 심상을 그려보이고있다는것이다. 이것은 소설집 전반이 텍스트이기에 구태여 례를 드는 번거로움을 겪지 않아도 좋을것이다. 이상 스토리와, 언어와, 테마의 각도에서 소설집 “청도로그인”을 살펴보았다. 요약해보면 학규형의 이번 소설집은 청도진출 조선족들의 삶의 양상에 앵글을 맞추고 그들의 디아스포라적인 삶의 궤적을 가감없이 보여주면서 우리 민족의 오늘날 현주소를 현장감있게 보여주고있다. 매끄러운 소설적언어들에 힘입은 소설들은 또 맛스러운 유머와 번뜩이는 위트까지 동원시켜 독자들의 구독을 부채질하고있으며 장학규형 혼자만의 목소리를 내고있다. 우리는 일단 “청도로그인”이라는 도어스커프를 통해 청도진출 조선족들의 삶을 엿볼수 있다는데서 이 소설의 성공을 미리 축하할수 있는것이다. 학규형의 또다른 작품들과 만날 그날을 기다려본다.   갑오년 사랑의 달에 할빈에서  
6    문학은 나의 분신이고 평론은 나의 사명이다 댓글:  조회:539  추천:0  2016-05-06
문학은 나의 분신이고 평론은 나의 사명이다 내 문학 그라프는 들쭉날쭉 갈래가 여럿이다. 소설로 시작한 문학공부가 중간에서 어떻게 음차양차로 평론계로 들어서게 되였고 단행본은 오히려 수필집을 먼저 출간하게 되였다. 그렇게 여러 해가 지나서 두번째로 나온 책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 소설집이였고 이제 겨우 내 문학의 사명인 평론집을 내게 되였다. 돌이켜보면 생활난에 부대끼면서 짬짬히 쓴 평론글이 50여 편은 좋이 된다. 그런데 황하를 건너고 장강을 뛰여넘으면서 십수차 이사를 하다보니 원본 대부분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육필이 대부분이였던만큼 타이핑을 한 파일이 보존되여있을리 만무했다. 손칼로 오려서 스크랩을 해둔것이 어느사이 분실된지도 모르고 분주히 떠돌다가 어느날 갑자기 생각나서 찾아보니 종적없이 사라져있었다. 울며 겨자먹기로 다인작품집에 오른것과 가까운 지인들이 찾아서 보내준것을 가까스로 모아보니 고작 10여편이다. 이제 더 이상 방치해둘수 없다는 생각이 든것이 바로 그 시점이다. 글은 내 흔적이고 내 력사고 내 얼굴이다. 용케 한번 왔다가는 인생에 나 스스로 내 분신같은것을 지우거나 가리거나 무시하거나 외면할수는 없다. 평론의 경우라면 더욱 그렇다. 여직껏 평론집을 적잖이 보아왔지만 문학사류형이 대부분이였던거 같고 학술론문이 그다음을 따른거 같다. 그리고 특별조명 형식으로 여러 사람이 어느 한 작가를 집중적으로 다룬것을 묶어낸 책이 주를 이루었던거 같다. 하지만 나는 문학 일선에서 창작실천과 더불어 평론을 해왔기에 모두가 구체적인 작품에 대한 평이다. 그것도 같은 시간대에 함께 활약했던 작가들의 창작작품을 현장감있게 평론해왔다. 북방문단을 이끌어왔던 한춘선생님의 의도적인 추동과 갈라놓고 운운할수 없는 대목이다. 그리고 그 덕분인지 내 작품도 몇번은 평론을 담게 되였다. 이제 내가 한 평론과 남이 나를 평한 글을 함께 책으로 묶는다. 내용과 형식 모두가 색달라서 제목을 붙이는데도 좀 어려움을 겪었다. 좋은 제목 하나 골라서 책제목으로 할수 있는 소설집이나 시집 또는 수필집과는 달리 평론집은 그게 기어가 잘 안맞물려 돌어가는게 사실인데다가 내 평론만이 아니고 남이 나를 저울질한 글도 있기 때문이였다. 이 평론집 추진과정에 여러모로 도움을 준 원 흑룡강조선족창작위원회 박일 주임과 동년배 문학친구 한영남씨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그리고 전번 소설집에 이어 이번 평론집 출판비용을 마련해주신 얼굴 숨긴 기업가님께 허리 굽혀 고마움을 전한다. 2015년 10월
5    세번째 눈 댓글:  조회:1201  추천:0  2015-01-17
  세 번째의 눈 장학규의 에세이를 두고 전경업   두 눈이 모두 정면에 있는 동물들은 사냥 물을 추적할 때에 목표물을 더 정확하게 보기 위해서라고 한다. 한쪽 눈을 감고 한쪽 눈으로만 목표물을 보면 입체감이 적은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상식이요, 두 눈이 초점을 집중시킬 때 목표물의 거리와 크기를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은 다른 또 하나의 눈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이 두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아내는 그런 눈인 것이다. 아마 많이는 문화예술인들을 두고 하는 말인가 보다. 장학규의 에세이들에서 우리는 우리들이 감각하지 못했던 것들, 우리들이 눈길을 돌리지 않았던 것들, 우리들이 그저 지나쳤던 것들을 많이 읽게 된다. ‘황관의 배후’에서 우리는 그런 것들을 직감적으로 느끼게 된다. 애틀란타 올림픽에서 중국님이 16금, 22은, 12동의 성적으로 종합 성적 4위에 랭킹되었을 적에 중국은 들끓었다. 개인들이거나 집단이거나 조직이거나 정부 부문들이거나 모두가 격동으로 들끓었고 ‘우리도 인젠 체육강국의 행열에 들어서게 되었다.’고 고아댔다. 그러나 장학규가 느낀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 속의 비해을 보아냈던 것이다. 12억 인구에게 16금, 22은, 12동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이 바로 장학규가 ‘체육강국’이라고 자처하는 우리들의 현상을 뚫고 보아낸 것이다. 바로 남들이 보지 않았거나 보지 못했거나 보려고 하지 않은 것을 보아내고 그것을 가차없이 짚어내어 도마에 올려놓은 것이다. 그러나 장학규의 에세이의 매력은 여기서만 머문 것이 아니라 다시 한 걸음 나아가 독자들에게 역시 제3의 눈을 가져다주는 거기에 있는 것이다. 바로 체육강국이라는 자아만족의 ‘황관’을 여지없이 깨어버리는 동시에 장학규의 에세이는 다시 독자들에게 그러면 ‘우리는?’이라는 물음을 가져다주면서 독자들로 하여금 에세이밖에 있는 무언의 함의를 읽도록 하는 제3의 안목을 가져다주는 것이다. “빈 소리로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명실이 부합되지 않는 ‘황관’을 쓰고 멋없이 자만하지 말고 착실하게 실속을 다지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다.” 이런 결말을 읽었을 적에 우리는 자연히 ‘우리는 어떠한가?’라는 의문을 가지게 된다. “우리 조선족은 문화소질이 제일 높다고 하는데 그것이 결국 졸업장에 그치는 것인가 아니면 민족의 종합 소질인가?’ 하는 물음이다. 그래서 장학규의 에세이를 읽노라면 자연 자기를 반성해보게 되고 또 반성을 하면서 저도 모르게 성장을 하게 되고 새로운 것을 보아내게 되고 제3의 안목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사회의 피페를 찌르는 에세이만이 아니다. 인정을 다룬 에세이 역시 그런 것이다. ‘소중한 연분’을 읽고나면 우리는 자연 ‘연분’에 대해 다시 한 번 느껴보게 되고 인정을 아끼게 되는 것이다. 물방울이 떨어져 바위를 뚫는다는 그 일겁의 세월(세월이라면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는 표현방식이지만) , 그런 세월이 열 번을 흘러야 하나의 연분이 된다는 이야기를 옛말처럼 들어 느끼면서 우리들은 저도 모르게 자기 주위의 인정과 연분들을 돌이켜보게 되고 다시 한번 그 연분과 인연의 소중함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연분을 말할 적에 ‘십년의 공덕을 닦아야 한 배(船)를 타고 강을 건넌다(十年修得共船渡)’라는 말을 사용하기 좋아하지만 개성의 장학규는 그것을 버리고 천문수자로도 다루기 어려운 ‘겁(劫)’이라는 고사와 표현방식을 썼던 것이다. 하여 장학규의 에세이들에서 우리는 이장수, 한춘, 윤림호 등 인정이 철철 넘쳐 흐르는 사람들을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장학규의 에세이는 읽는 재미가 있다. 그러면서도 침처럼 정곡을 콕콕 찔러주는 필체와 칼날 같은 안목은 우리들에게 장학규만의 개성을 강하게 느끼도록 한다. 형식만을 따지고 실속은 텅 비어있는 현상황에 대한 고발(얼씨구 대신 침 한대), 개혁과 개방과 더불어 한국 나들이가 보편화되면서 자기의 입각점을 잃어가고 있는 우리 동포들의 열이 오른 머리에 끼얹어주는 찬물(우리는 분명 중국사람이다), 창조와 노동으로 치부한 사람들에 대한 편견을 바로 잡아주는 호소(개체호 소의), 외래 문화에만 미치면서 자기의 아름다운 전통의 미와 문화를 잃어가는 사람들에 대한 대갈 일성(극단족속) 등 에세이들에서 우리는 장학규의 에누리없이 병집을 잘라내려는 개성적인 수술칼을 느끼게 된다. 어려운 생활고를 겪어오면서 남보다 몇 갑절의 정신적인 고통을 작은 체구로 버텨내면서 자학으로 자기 문학인의 생을 열어가는 장학규는 바로 문학인의 세 번 째 눈을 가진 사람이다. 불교에서는 혜안(慧眼)이라 하고 도교에서는 천안(天眼)이라고 하는 미간 사이에 있는 막강한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 세 번 째 눈, 이 눈을 문학인의 시각에서 말한다면 아마도 발굴의 눈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장학규가 바로 그런 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2002년 10월 낙엽지는 길림의 용담산 아래서
4    정갈한 샘물은 갈한 목을 제때에 추겨준다 댓글:  조회:562  추천:0  2015-01-17
정갈한 샘물은 갈한 목을 제때에 추겨준다   스케치로 그려보는 인간 장학규와 작가 장학규의 생활 몬타쥬                                                                                                                            허인      요즘 신문, 잡지를 펼쳐들면 심심찮게 장학규선생의 수필을 접하게 된다. 거의 십오륙년간의 잠수끝에 목표물들을 거의 한방에 명중시키듯이 쾅쾅 터치우는 그 위력은 가히 장관이라고 말하고 싶다. 여기서 잠간 우리 함께 장학규선생의 인생경력인 그의 직업을 상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료녕조선문보 신문사 기자, 흑룡강성조선민족출판사 문예담당편집, 항주국제려행사 가이드, 현재 다시금 흑룡강신문사 청도지사 책임편집 및 책임기자, 그의 말대로 하면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제격인듯 싶다. 지난 1980년대중엽부터 1990년대중엽까지 흑룡강신문, 잡지, 잡지를 펼쳐들면 거의 매기마다 장학규선생의 소설, 수필 평론을 발견할수가 있다. 그만큼 그는 글재주가 뛰여나 이런 저런 문학상도 적잖게 수상한줄로 알고 있다. 왜소한 체구와는 달리 애주가인 그는 성격이 또한 대못같아서 휘거나 부러지는것이 아니라 끝까지 파고들어 어쩌면 웃어르신들을 조금 귀찮게 하는 그런 고약한 버릇도 있는듯 하다.      에피소드로 그가 XX신문사에 있을때 총편이 쓴 톱기사를 무슨 연유에서였던지 새까맣게 연필로 도배해가면서 어휘사용에서의 부적절함, 문장구성에서의 여러가지 착오점, 그리고 바다의 밀물과 썰물현상을 상세히 분석해놓아 결국 그 위대(胃大的)한 총편님은 밀물과 썰물조차 구별 못하는 한심한 총편으로 락인 찍혔던적이 있었던것 같다. 평소 다소 꼬장꼬장하고 거짓말을 전혀 못하는 학규형이지만 술 한잔 들어가면 또한 호인이 되기도 한다. 인생에 15년이 몇이나 되랴? 세월 이기는 장사가 없다고 요즘 머리까지 허연 그의 모습을 보면서 인생은 결국 승자도 패자도 없다는 명언이 떠올라 라는 따뜻한 인사말 한마디라도 먼저 건네고서 평론을 시작하려 한다      일찍 벤은 고 말한적이 있다. 떨림이란 곧 전률이기도 하며 작품에서는 공명감을 일컬으는 말이기도 하다.. 이번에 보내온 장학규선생의 ,, 를 곰곰히 살펴보면 바로 그러한 암시가 있고 떨림도 있으며 반드시 깊숙히 사고하고 사색하여야만 하는 인간본능을 주저없이 흔들어 일깨워주려고 하는 진실과 섭리, 자연순리주의가 항상 그 중심에 튼튼히 자리를 잡고 있어 서민적인 천착과 함께 더욱 큰 애착이 가는듯  하기도 하다. 로 태릭터를 시작한 에서는 로서의 아키데믹한 력설만이 아니라 스릴 있고 진부하게 살아온 자신의 두툼한 경험과 삶의 법칙을 딸애와의 자연스럽고 컬러풀한 소통으로 딱딱하거나 거부적인것이 아니라 다정다감하게 이야기식으로 전개하고 있다 . 에서 찾아 볼수 있는것은 홍익인간이며 또한 인문정신의 력점이기도 하다. 어쩌면 길지도 짧지도 않은 인생을 자연섭리 그대로만 무탈하게 잘 살아주었으면 하는 아버지의 착실한 바램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다음ㅡ       의 경우 여직 식지 않는 한류ㅡ 한국 드라마현상을 두고 비교의 메스를 인성에 과감히 들이대여 선과 악의 본질적인 구별을 인간 모두의 중성적인 면에서 그 해법을 찾으려 한것 같으며 그 실례로 로 어쩌면 자연스럽게 너무나도 어색한 몬따쥬나 슈제트 앞에 오래된 찰떡처럼 꿋꿋하게 말라 비틀어진 인생에 빵점조차 주기 싫지만 때만 되면 이런 저런 리유를 만들어  스스로 똑똑한척 도고한척 해야 하는ㅡ 그래서 로 자기 합리주의를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를 누구에게서나 제일 가까운 인성을 통하여 가차없이 자기성찰하도록 비판의 메스를 한번 또 한번 침착하게 들이대고 있는것 같다.       스페인 사람 R고메스 데라 세르나는 1943년 평론집 를 집필하면서 입수할수 있었던 모든 현대적인 경향들을 주의에 따라 분류, 집합시킨적이 있다. 필자의 경우 장학규선생의 이런 모멘트식 중점발언을 방법주의에 의한 새로운 고찰이라고 말하고 싶다 . 인간해부학적으로 그 인간의 렬근성과 한심한 리기주의적인 행위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의 척도는 에서도 고스란히 이어진다. 에서 볼수 있는것 역시 자기중심과 끝없이 팽배해가는 그 징글한 리기심에 대한 철저한 투시를 작자는 목표로 한다. 에서 살펴 볼수 있는것은  비교적인 상사점(像似点)을 렬거해가면서 인성이나 감성을 벗어내치면 인간 역시 개나 소나 양, 동물과 아무런 차이가 없음을 비교, 력설, 독백, 공간 메우기, 등등 직감적인 으로 풍자와 해학의 령역을 한층 더 업그레이드 시킨듯 하다.       이외에도 , , 등등은 필자로서는 오랜간만에 읽어보는 수필다운 수필, 즉 정갈한 샘물에 갈한 목을 추겨가듯이 속이 개운해지는듯한 느낌이 들며 특히 수필 은 김학철 사망이래 필자로서는 처음으로 읽어보는 잡문형식의 패러독스로 최고의 점수를 주고싶다. 장학규선생의 허다한 수필은 언제나 생활속의 진실한 면을 소재로 철리적인 인습과 사색을 곁들여 놓아 읽고 나면 몇년 묵은 체증이 한꺼번에 내려가듯이 속이 개운해나면서도 또한 알짜지끈하여 누구나 자신을 한번쯤 되돌아보게 하는 그런 매력이 있는것 같다. 또한 누구 하나 감히 흉내조차 낼수가 없는 방법론중의 하나인 직유와 은유ㅡ패러독스ㅡ독설이 일품이기도 하며 그로 인하여 긴장감을 조성해가는것이 아니라 오히려 긴장감을 완화시켜가면서 타협을 평행으로 이루어놓아 성숙해가는 딸애를 부성애로 흐뭇하게 바라보는 그러한 여유도 가끔 느껴지기도 하여 투철하고 명랑한 프로의 솜씨 아직 조금도 녹슬지 않았구나 하는 강렬한 느낌을 주기도 있다.     또 어딘가에는 아직도 꼬장꼬장한 그젯날 성격이 불쑥불쑥 느껴지기도 하여 친근감이 들기도 하며 워이씬에서 번마다 멧시지를 주고 받을때면 어김없이 라는 뒤늦은 회답에 이제는 까마아득한 기억에 혼자 슬며시 기분좋게 웃었던 일도 한두번이 아니다. 장학규선생의 수필의 경우 최대의 장점은 첫째도 개성이고 둘째도 개성이며 셋째도 개성이다.. 이런 개성은 작품에서 작자의 카리스마로 나타나기도 한다 .아무튼 십여년만에 다시 시작한 문학인만큼 새로운 한해 장학규형이 더욱 알찬 수확이 있기를 기원해본다. 학규형 화이팅 ㅡ                                           2014년 12월 13일
3    탈출과 회귀의 언덕에서 댓글:  조회:620  추천:0  2014-12-28
평론   탈출과 회귀의 언덕에서 -장학규 단편소설 "노오란 동그라미"의 윤리탐구를 두고   양정옥         언제부턴가 우리는 허리띠를 풀기 시작한 것 같다.   자기도 모르는 새에 부담도 없이,책임 의식은 더욱 없이 허리띠를 풀기 시작했다.   하다면 우리 족속은 과연 허리띠를 쉽게 푸는 민족인가? 또 그렇다면 우리 족속은 왜 이제야 허리띠를 스스럼 없이 풀기 시작하는걸가? 또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그냥 허리띠를 추스르며 살지 않으면 안되는 그런 현실속에서 생존하고 있는 것인가?   청년작가 장학규는 우리 민족의 윤리현황과 생존 현황에 대한 깊은 사고를 다루면서 오래동안 접어두었던 창작의 스페이스를 서서히 열기 시작,문단에 복귀하고 있다.   단편소설 "노오란 동그라미"는 "성애"라는 이 사람들에게 가장 익숙하면서도 특수한 제재를 가지고 우리 윤리의 현황과 우리 민족의 현실생활을 파고 들면서 새로운 탐구를 시도하고 있다.   "노오란 동그라미"라는 제목부터가 상징적인 색채가 다분하다."노오란"은 "노란"의 늘림말로 한자어로 하면 "황색"으로 된다.퇴페와 색정과 성애와 남녀관계의 대명사로 되고 있는 "황색"은 시사하는바가 적지 않다."동그라미" 역시 너무나도 직감적인 상상과 상징의 여유를 보여주는 단어이기도 하다."여성", "여성의 성기", "원만", "윤회", "순환". "무한한 반복" 등을 상징하는 "동그라미", "노오란 동그라미"는 장학규가 시도하는바를 그대로 심각하게 나타내고 있으며 확실한 상징과 함께 다양한 해석으로 나름대로의 상상에 자유를 주고 있다.     단편소설답게 만 2천자 정도의 짧은 작품의 스토리는 복잡하지 않다.   이름이 세청처럼 지지리도 긴 "영원"이라는 사나이, 그는 사범학교시절 짝사랑을 했던 여인으로부터 진정 사나이답다는 평가를 받는 "남자"였고 인물은 수수하나 하지만 자기의 허리띠를 꼭 졸라맬줄 알아 남자들이 성적인 매력을 느낄 수 있는 여인인 "부산스낵"의 마담 금옥이로부터 "책임지는 남자"로 불리는 "사나이"였고 어리무던한 아내로부터 "승냥이"나 "학대광"으로 치부받는 "남편"이였다.   자기가 출근하는 신문사 지사가 해당부문의 단속을 피해 한쪽 으슥한 곳으로 피해가게 되면서 영원이라는 남자는 아예 이불짐을 지고 사무실에 거취한다.그런데 그 가운데서도 참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성적인 갈증이었다.   그런데 엎친데 덮친 격으로 아내가 출근하는 한국회사에서 경기 상황이 악화되면서 직원을 축소하는 바람에 아내는 일자리를 그냥 가지고 사퇴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밤대거리(야간근무)"를 지원한다.   그래서 영원이는 어쩌다 공휴일에나 차례지는 아내와의 짧은 섹스조차도 제대로 향수하지 못한다.   그래서 대충 "빨리빨리"를 노래처럼 부르는 아내와 떨어지고는 집 마주켠의 "부산스낵" 금옥이를 찾아간다.   하지만 금옥이는 "허리띠를 푸는" 여인이 아니었다.   입술도 젖가슴도 허락은 했지만,지어 책임감 있는 "영원"에게 매료되어 그 품에 안겨 울고 불고 오열을 터뜨리고 주동적으로 뜨거운 키스를 나누면서도 허리띠 아래로는 손도 내려가지 못하게 한다.    하지만 이보다 전에 "영원"이는 일찍 사범학교 시절에 짝사랑을 하다가 용기를 내어 사랑을 구걸했지만 무정하게 거절을 받았던 선희와 열렬한 정사를 나눈적도 있었다.첫번째 연인과 몇번 동침을 하고 싫증을 느꼈던 선희의 첫번째 남편은 어리숙한 교원이었다.하지만 어리숙한만큼 능력도 약했고 선희 보기에는 "사나이"답지도 못했다.   그래서 어느 한번 회의에서 "영원"이를 다시 만났을 때 선희는 그냥 주동적으로 영원에게 몸을 맡겼고 지어 임신까지 해도 별일이라고 했다.   그렇게 선희와 영원이는 살을 섞게 되고 살을 섞으면서 그냥 연계를 가지고 선희는 누구의 애인지도 모르는 애를 임신하고 영원에게 쩍하면 지원을 바란다.그러다가 마지막에는 자기가 임신한 애가 영원에게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없다면서 영원이가 주는 2천원을 가지고 영원에게서 아주 떨어지겠다고 한다.마지막으로 하루밤만 함께 있게 해달라는 선희를 뿌리치고 영원이는 방을 나선다."수캐"라는 욕과 함께 책임지는 남자라는 여인의 목소리를 그대로 뒤에 버려둔채로 그리고 집앞에 도착했을 때는 마침 문앞에서 다음에 또 와달라는 금옥이에게 앞으로는 그런 시간이 없을 것이라고 하고는 집에 들어서며 계속 열심히 "승냥이"가 되고 "학대광"이 될 것이라고 속으로 생각을 한다.     장학규는 도덕과 윤리에 따른 "책임"의 회귀를 기대하고 있으며 또 작가의 예리한 안광으로 비록 지금은 혼탁한 것 같지만 앞으로는 우리들의 윤리에 들씌워진 먼지가 가셔지고 맑은 하늘이 피어오를 것을 예언한다.   사실 우리 민족은 윤리적이고 도덕적이고 예의적인 민족이었다.하지만 이민의 기나긴 고통의 터널을 거쳐오면서 여러가지 사회원인으로 그런 것들을 많이 잃어왔고 또 그런 과정에서 이데올로기적인 원인과 사회적인 원인으로 성격 압제를 너무나도 받았고 그래서 거기에 기갈이 들어있었다.그러다가 새로운 사회 환경이 열리면서 저도 모르는 새에 그런 압박감을 풀고 축적되었던 리비도를 폭발시키면서 저도 모르게 무책임하게 허리띠를 풀기 시작했다.많은 사람들이,그래서 그런 것들이 차차 사회문제로 되기 시작했고 여러가지 악성순환을 유발시켰던 것이다.     하지만 문제의 해결방법은 바로 그 문제안에 있다는 말이 있듯이 바로 그 안에 문제의 해결방법과 새로운 희망이 보였던 것이다.   금옥이의 허리띠와 "영원"이의 책임이 바로 그런 것들이다.그런 씨앗이 있는 한 어느땐가는 우리에게 윤리와 도덕이 회귀하고 또 그럼으로써  맑은 세상이 열릴 것이라는 장학규다운 작가의 예리한 안광으로 보아낸 새로운 세상이기도 하다.     탈출과 회귀의 언덕에서 방황하고 있는 우리들,과연 해법은 바로 그안에 있는 것이다.   금옥이의 허리띠는 바로 자기가 자기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다는 중국토속 신앙을 상징하고 있다.허리띠는 풀 수도 있고 풀지 않을 수도 있다.문제는 자기에게 달린 것이다.바로 거기에 희망이 보이는 것이다.   새로운 탐구와 밝은 미래에 대한 안개를 뚫는 안광,장학규에게 한번 더 기대해보고 싶다. 
2    '사거리'에 매달린 궁금증의 미학 댓글:  조회:587  추천:0  2014-12-28
작품조명; ‘사거리’에 매달린 궁금증의 미학 김룡운 ‘궁금증의 미학’이라고 써놓고보니 어딘가 엉뚱하고 생경한 것 같아 잠간 주춤거림도 없진 않았으나 이것도 일종의 ‘신조어()’라고 할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계속 행진하기로 하였다. 장학규의 단편소설 ‘사거리’는 평범한 일상의 편린들을 모아 퍼즐놀이로 둔갑시켜 알쏭달쏭한 궁금증을 낳고있다는데서 다분히 실험적인 몰골을 보이며 궁금증이 곧 이 소설의 특징으로 매력으로 되고있다. 작자는 ‘사거리’의 창작시도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있다. “‘사거리’는 제가 새로운 시도를 보여주고싶어서 쓴 글입니다. 형식상에서 6개 장면의 서두를 똑같이 만들자는 타산은 처음부터 있었습니다. 지루하면서도 숨막히는, 그러면서도 그 뒤에 어떤 사연이 엮어질가를 궁금해하는 그 효과를 노려보았습니다. 한편 같은 스타트로 출발하여 부동한 결과를 도출하면서 인생에서 선택과 결단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시사하려 했습니다.” 작자의 새로운 시도가 곧 궁금증의 창조일것이다. 미궁을 찾아내는 퍼즐-알아맞추기는 원래 수학에서 유래된것이다. 특히 독일 수학자 쌤 로이드가 유명했다. 그는 수많은 상금을 내걸고 무질서계수자 알아맞히기, 한마리 말그림으로 여섯마리 말을 만들기 등의 퍼증놀이를 내놓아 수많은 사람을 현혹시키고 불안감, 당혹감과 함께 사람들을 ‘아름다운 미궁’으로 몰아넣기도 했다. 퍼즐은 시문학에서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불확정성, 모호성에 견줄수 있으며 주제의 해석에 린색한 소설들도 어느 정도 퍼즐적이라고 볼수 있다. 궁금증을 풀이하는 멋, 그것도 아마 소설을 읽는 재미중의 하나일수도 있을것이다. 희로애락으로 엉켜진 사이비한 인간의 삶도 사실은 하나의 퍼즐놀이에 지나지 않는다. ‘사거리’는 우선 숨막히는, 지루할 정도의 반복에 초점이 맞춰지고 있다. 작자의 의도적인 전술일것이다. 이 소설은 모두 6개의 소제목으로 구성되였는데 앞부분이 모두 똑같다. 같은 정도의 분량이 백여자가 아니라 천여자 이상, 전반 소설에서 똑같은 서술이 차지하는 분량이 거의 1/3을 점한다. 우리의 소설사에서 이와 같은 굉장히 긴 반복의 수법은 딱히 장담할순 없으나 가능하게 전무후무할것이다. 이 반복부분에는 반복을 통해 몇가지 상황이 강조되고있다. 첫째,주인공의 신분이 암시된다. 주인공 천이는 월급봉투가 얇은 가난한 부류의 평범한 직원이고 늘쌍 개미처럼 분주히 돌아치는 사람이다. 소설의 표현을 빌면 10여 년간 꾸준히 ‘쌍희표’담배를 피워왔는데 ‘담배를 붙여물고 두손을 바지주머니에 깊숙이 질러넣고 어깨를 옹송그리며 헐떡헐떡 반달음치는게 천이만의 대표적이미지이다.’ 둘째, 주인공의 성격이 제시된다. 성격상 두가지 특징이 있다. 하나는 허영심이다. 전에는 ‘호주머니가 매일 적자투성이지만’ 괸해 멋을 부리며 택시를 타고 출근하던 사람이다. 다란 하나는 량반적인 스찔의 소유자이다. 가난하지만 기가 죽지 않고 제멋에 취해 “에라이, 인생이 얼마나 길다고…” 하면서 호기를 부리고 인생이 무덤으로 가는 로정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것을 즐거운 려행으로 받아들인다. 작자는 지루한 반복의 수법을 통해 ‘변화 없음’의 상황을 암시하고 있다. 소설은 주인공의 엿새동안 아침에 출근을 하는 사실을 쓰고있는데 번마다 ‘10년째 피우는 쌍희표 담배’를 피우고 ‘옹송그리고 헐떡헐떡거리며’ 번마다 ‘에라이, 인생이 얼마나 길다고…’라고 생각하며 번마다 교통사고가 일어난다. 10년동안 행복과 기쁨을 갈구하며 기쁠 희자가 두개 겹친 ‘쌍희표’ 담배를 피우지만 삶의 모양새는 우에서 보다싶이 큰 변화가 없다. 여기서 특히 유심히 보아야 할 구절이 있다. ‘저앞 태양성이 바라보이는 첫 사거리에 행인과 차량들이 막 범벅이 되여서 멈춰있었다. 교통사고가 난게 분명하다.’. ‘태양성’이라면 응당 맑고 밝고 분위기가 따스하여야 할텐데 사정은 그와 반대로 언제나 소란스럽고 북적거리며 교통사고가 끊길새 없다. 이 구절에서 작자는 무질서한, 헝클어진 현실삶의 한 단면을 넌지시 꼬집고있다. 한마디로 이 소설은 6개 소제목의 앞부분에 길게 구축해놓은 지루한 반복을 통해 개인적인 삶의 무변화와 군태, 허탈, 허무의 심리와 세상의 무질서와 혼돈의 양상을 그려내면서 상황변화의 절박함을 제시하고 있다. 이 소설은 또 출근길에서 조우하는 여러가지의 부동한 사건들을 스케치식으로 떠올리면서 인생에서 선택과 결단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주고있다. 소설에서 이야기가 전개되는 장소인 ‘사거리’는 아주 심오한 의미를 안고있다. ‘사거리’는 삼가야 할 장소, 절대 통과하지 말아야 할 구역이다. 그곳은 교통사고가 끊임없는 ‘죽음의 길목’이다. 헌데 주인공 천이는 번마다 ‘사거리’를 통과하며 따라서 번마다 기분 나쁜 일에 봉착한다. 절대로 거치지 말아야 할 그곳을 행로로 선택하였기에 ‘재수에 옴이 붙어’ 첫날에는 택시와 화물차의 충돌사고를 목격하고 늙은 거지를 만난다. 동전 몇잎으로 적선을 하지만 고맙다는 인사는커녕 적선이 적다하여 코푸는 소리의 접대를 받는다. 두번쨰 출근길에서도 첫 사거리에서 행인과 차량들이 혼잡을 이루며 교통사고가 일어난다. 그러잖아도 기분이 썩 좋지 않은 판인데 친구 ‘왈벌’이한테서 자존심을 자극하는 ‘씨발, 출근해봤자 굶어죽지 않을만큼이잖아.’라는 전화를 받자 부지중 가난한 원급쟁이신세가 한탄스러워 ‘대답없이 멍하니 허공만 쳐다보니 초첨잃은 눈으로 뿐\연 하늘이 들어온다.’ 세번째 출근길 역시 류달리 변덕 많은 청도의 4월 아침, 역시 어깨를 옹송그리며 헐떡헐떡 반달음치며 출근하는데 첫 사거리에서 또 교통사고가 나고 이어 별로 반갑지도 않은 고향친구 명이를 만나 본의 아니게 식당으로 끌려가다가 명이가 차에 치여 병원에 입원한다. 또 하나의 불길한 아침이다. 네번째 출근길, 사거리가 또 복새판을 이루고 교통사고가 난게 분명하지만 인젠 인이 박혀 별로 관심없이 사거리를 지나간다. 그러나 이날도 좋은 일은 생기지 않았다. 만나지 말았어야 할 옛 애인을 우연히 만나 살을 도려내는 아픔을 얻는다. 다섯번째 출근길, 태양성이 바라보이는 첫 사거리에 여전히 행인과 차량들이 와글거리고 역시 교통사고가 일어난다. 사고현장을 피해 걷다가 공교롭게도 어떤 할머니와 부딪친다. 할머니가 조금도 다친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찰거마리처럼 따라다니며 앙탈을 부리는 바람에 울며 겨자먹기로 천원을 떼운다. 그때의 억울한 심정을 소설은 이렇게 넉두리한다. ‘할머니는 주름살을 펴고 떠나가고 천이는 망연자실한태 거리를 마주하고 섰다. 세상이 참 살맛이 없구나! 인생은 이렇게 허무하고 지겨운데 인간이 스스로 심각한체 자신을 기만하면서 내숭을 떨며 사는게 아닌가! 소설속의 ‘사거리’는 재앙의 길목이다. 여섯번째날의 출근길 역시 류달리 변덕스러운 청도의 4월의 아침, 역시 ‘쌍희표’ 담배를 피우며 역시 도보로 가다가 역시 교통사고를 본다. 그러나 이젠 무감각하여 별로 호기심도 없고 기분도 별로 잡쳐지도 않는다. 주인공은 반년 홀로 살면서 거의 아침을 거른 자신을 두고 인생이 한없이 억울하다고 한탄하다가 쇠망치를 휘두르는 인부들을 보고 그리고 부자들의 자살을 떠올리고는 스스로 위안을 느낀다. ‘인생이 별건가? 대수대수 살다가 시원시원하게 가면 그뿐이다. 공수래 공수거가 영원한 진리야. 이 세상은 온통 잉여인간일뿐 누구라없이 쓰레기냄새가 진동한뿐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은 한결 느슨해지고 너그러워졌다.’ 이상으로 ‘사거리’에 늘어선 궁금증에 대해 소묘식으로 훑어보았다. 이 소설에는 독자를 사로잡을만한 감동적인 사연이나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렵기적인 장면들도 없다. 다만 지루하게 흘러가는 반복의 물결, 그 갈피갈피에 자질구레한 일상사들이 무질서하게 올라앉아 제멋에 겨워 퍼즐놀이를 하면서 퍼즐노래를 ㅂ르고 있다. 우리는 ‘사거리’를 읽으면서 세상엔 이런 몰골의 소설도 있을수 있다는것을 알게 된다. 소설가들이 하나의 격식에 얽매이지 말고 모험정신을 발휘하여 성공작이든 실패작이든 새로운 시도로 다양한 류형의 작품을 창출하는것이 우리소설이 나아갈 길이라고 생각한다.
1    챔피언은 아니더라도 베테랑은 되자 댓글:  조회:601  추천:0  2014-09-01
창작수기 챔피언은 아니더라도 베테랑은 되자 장학규   글을 갓 시작했을 무렵 어느 한 선배문인이 나더러 3류 작가로 머물거면 글쓰기를 아예 포기하는게 좋을거라고 충고했다. 글을 쓸바에는 프로가 되고 챔피언이 되라는 격려의 말이였다. 그로써 어느덧 30년 세월이 흘러 나도 이젠 귀밑머리가 희끗해나는 중년의 나이가 되였다. 그러니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후배들에게 추격당하여 프로나 챔피언의 자리를 접해보지도 못하고 빼앗겨버린 초라하고 찌질한 모습이다. 그만큼 나는 지금도 아주 힘들게 글을 쓰는 반편이다. 남들은 하루 저녁에도 장편을 쓱쓱 갈겨낸다는데 나는 단편 하나도 며칠씩 낑낑거려야 겨우 마무리는 모자람과 부족함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여직껏 단 한번이라도 글쓰기를 포기해야겠다는 생각은 가져보지 못했다. 부정과 의심을 거의 날마다 거듭하면서도 실패를 마음속에 담아두지 못하는 악질이다. 나에게 있어서 글쓰기는 이미 애호나 취미를 훌쩍 넘어 숙명 그 자체이다. 나는 태성적으로 아픔이라는 유전인자를 몸속에 간직하고 태여났다. 반만년의 아픔은 묵직한 십자가가 되여 나를 괴롭힌다. 내 생과 완전히 범벅이 되여 불가분리의 일체가 된 그 아픔은 나더러 평생을 두고 하소연하면서 치유하라고 촉구한다. 그렇게 나는 30년을 붓으로 약을 지었고 끝이 보이지 않는 상처때문에 오늘도 종이장에 나름대로 마구 긁적거린다. 물론 나의 성격엔 그에 알맞는 아둔과 우직이 자리잡고있는것도 사실이다. 주변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고 저 요원한 목표를 향해 달릴수있는 지구력이 있으며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수있는 인내심이 있다. 저승사자와 조우했을때도 첫돐때 쥐었던 필을 버리지 못했고 알라딘의 요술 램프를 두고 갈등을 빚을때도 운명의 신은 그 기회를 남에게 넘겨버리고 나를 책상앞에 앉혀놓았다. 가장 중요한것은 그래도 생명을 사랑하고 인생을 탐구하는 뜨거운 열정이 있기 때문일것이다. 나는 내가 챔피언감은 절대 아니란것을 잘 알고있다. 그렇지만 챔피언이 된 사람들이 밑바탕이 된 나란 이 3류 작가를 부끄럽게 생각하게 해서는 절대 안된다는것도 잘 알고있다. 하기에 나는 짧막한 글 한편을 써도 도정신해 진지하게 쓴다. 나는 리얼리즘 영향을 많이 받은 사람으로서 머리속으로만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재간이 없다. 내 글의 배경은 꼭 현실에 있고 적어도 몇번은 그 배경에 내가 직접 서보기도 한다. 원고료 3백원이 나오는 소설을 위해 나는 입장권이 90원인 로산을 세번 등반하기도 했다. 그리고 단어 하나를 위해 하루종일 인터넷 밭을 뚜지며 다닌적도 있다. 새로운 유행어를 빨리 익히기 위해 내 컴퓨터 앞엔 언제나 노트와 볼펜이 놓여 있다. 그러기에 나는 자신이 챔피언은 아니여도 적어도 베테랑 정도는 될거라고 자평한다. 챔피언에게 항상 위협이 되고 챔피언들로 하여금 언제나 마음의 탕개를 늦추지 못하게 만드는 베테랑은 역시 빛나는 3류가 아닐가 싶다.                                                     2013년 12월 15일                                                       청도 문향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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