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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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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    수필을 위한 수필 댓글:  조회:106  추천:0  2018-09-21
수필   수필을 위한 수필   장학규     조선족이 쌀에 뉘만큼도 아니되는 청도에서 있은 일이다.   하루는 회사의 몇몇 친구들과 함께 술집에서 늘어지게 술을 퍼먹고 왁작 고아대며 밖으로 나오는데 저만치에서 길 가던 웬 청년이 불시에 백미터 속도로 달려오는 것이었다.  “싸우자는 건가?”   “누가 원쑤를 졌게?”   타관땅이라 언제나 원시적인 본능을 앞세우는 우리였다.   발걸음을 멈추고 전투태세로 기다리는데 헐레벌떡 달려온 그치가 뜻밖에도 “조선사람들이구만. 어디서들 왔소? “하고 우리말로 묻는 것이었다.   초면에 ‘하오’를 들이대는 것이 좀 방자하고 덜돼먹어 보였지만 같은 민족이라는 동질성때문에 서로 반갑게 “나는 아무 곳의 아무개요”하는 식으로 인사수작들을 나누었다.   그 차례가 나한테로 돌아와 막무가내로 ‘나는 해림의 장학규란 사람이요”라고 하니깐 글쎄 이치가 대번에 다른 친구들은 싹 젖혀놓고 나한테만 살갑게 대하는 것이었다.   “나도 문학을 하오. 어 반갑소.”   자신의 능력을 검열해볼겸 생활체험도 할겸해서 객지에 나온 나로 보아도 외딴 청도땅에서 문학동료를 만나는 것이 역시 싫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 그후로 사나흘에 한번씩 전화 연계를 가지고 또 서로 자주 찾아다니며 문학을 담론했다.   하루는 이치가 수필 명색을 써가지고 찾아왔다. 손톱만큼한 의견이라도 제기해달라는 겸손한 목적에서였다. 그런데 그 글을 거퍼 두페이지도 읽어내지 못하고 막 하품이 나가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인생이 이렇고 생활이 저렇고 사랑이 어쩌구 행복이 저쩌구... 여하튼 그러루한 설화가 절편에 관통되어 있었다. 종래로 체면치례를 잘하던 나도 그만 참을 줄이 끊어진 것이다.   “아, 뒤가 무거워 오는군. 치질인가?”   그렇게 화장실에 한번 갔다가 돌아와서는 아예 그 글을 다시 집어들념을 않고 자질구레한 일화들을 꺼내기 시작하였는데 둬마디 안짝에 다시 볼 것을 성화같이 재촉해와서 나는 울며 겨자 먹기로 또 그것을 집어들었으나 한페지도 채 보지 않고 화장실 출입을 거듭했다.   “미안하지만… 이것 참 실례인데…”   이번에는 그 친구도 나의 회피술에 어쩌지를 못했다.   나에게는 ‘성경전서’가 있지만 8년이 되도록 그것을 다 읽어내지 못했다. 그러한 나더러 선견지명을 가진 건교사마냥 따분한 설교만을 일삼는 그따위 글을 읽으라니 어처구나 없는 일이 아니고 뭔가?   우리의 수필이 모두가 이런 것은 아니다. 그러나 상당수의 수필들이 이런 유인 것만은 사실이다. 남들이 다 알고 있는 간단한 도리를 미사려구로 지루하게 내뿜는 것이 바로 우리 수필문학의 주류이다. 편집들이 모름지기 그런 입맛에 굳어져버렸고 그에 덩달아 작가들도 알량한 문자놀이에 재미 들이고 있다. 어찌나 비비고 꼬았는지 도무지 무슨 소리를 하려고 했는지 분간할 수 조차 없다. 옛날 선비나부랭이들처럼 사회와 시대의 아픔을 외면하고 풍월 읊기에만 열을 올린다. 글은 확실히 글로 되었으되 읽고난 후에는 별로 남는 것이 없다. 장학규 같이 까다로운 사람을 만난다면 비단 남는 것이 꼬물도 없을뿐만 아니라 도리어 하품을 하고 치질을 앓는 몹쓸 병이 도지게 될뿐이다.   문학은 종교책이 아니다. 철학책도 아니다. 수필도 문학이지 이론문장이 아니다. 인생이나 무엇이나 그 본체적 뜻은 한두마디면 해석이 되는 것이다. 지지콜콜 캐고들 필요가 없는 것이다. 슴슴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니까. 그런 책임은 철학가나 종교가나 혼인전문가에게 맡겨버리는 것이 현명한 처사일 것이다.   나는 절대적인 부정주의자가 아니다. 내가 즐기지 않는다고 다른 사람도 보지 말라는 이유와 억지는 없다. 이 세상에서 예수교의 묘리를 터득한 사람들이 많은 것처럼 선교사적수필에서 참된 인생수업을 받는 독자도 드물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의 수필애호가들을 한사코 그 한곬으로만 몰아가려는 것은 백가쟁명, 백화만발의 원칙에 부합되지 않는다.   그 어떤 한정된 틀을 세우지 않고 술술 써내려 갈 수 있다고 해서 수필이라 하지 않았는가 싶다. 다른 문체보다 상대적으로 자유롭다고 수필이라 하지 않았을까? 생각나는대로 적고 말하고 싶은대로 써서 하나의 이치나 자세를 보여주었다면 곧바로 훌륭한 수필이 아닐까. 여기서 한조목 끌어오고 저기서 한단락 베껴오는 것보다 사소한 인물이나 사건속에서 보편적인 진리를 더듬어내는 것이 퍽 실용적이라고 나는 인정한다.   이 점에서 ‘천지(지금의 연변문학 전신)’ 잡지 1994년 4월호는 선두자적 역할을 보여주었다. 김양금 선생의 두편의 수필은 똑같이 설교가 없다. 그중 ‘인생의 초불’은 천자도 안되는 간단한 체험이었다. 이상각 선생의 ‘윁남에서의 하루’는 그대로 기행문에 접근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수필됨에 손색되는 것도 아니었다. 물론 “이따위는 신문사의 종합면에나 보낼게지”따위로 이해하면 곧바로 쓰레기통에 들어가기 십상이기도 하다.   모름지기 수필문학의 번영발전은 우리의 존경하는 편집들의 혜안에 기대를 걸어야 할 것 같다.                                                                                                                                           1994년 4월
123    불여우를 키우고 있습니다 댓글:  조회:159  추천:0  2018-09-19
수필 불여우를 키우고 있습니다 장학규   금요일 오후이다. 딸애가 학교에서 돌아오는 날이다.   이번 학기부터 딸애는 학교 기숙사에 들어갔다. 반급 애들 태반이 학교에서 주숙한다면서 한사코 우겨 마지못해 동의했지만 솔직히 우리 부부는 별로 마음에 내키지는 않았다. 늦자식으로 키워서 처음으로 애를 집밖에 내놓기 때문이었다.   이 한주일을 어떻게 이겨냈는지 모른다. 마누라는 언제든 내놓을 자식인데 지금부터 단련시키는 것도 좋다면서 대범한체 했지만 가끔 창밖을 넋잃고 내다보기가 일쑤였다. 나는 나대로 말동무가 없어서 서운했다. 부부가 오래 같이 살면 할 말도 거의 없다. 몸으로도 눈길로도 상대가 할 말을 알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나는 딸애가 옆에서 재잘거리면서 나와 싱갱이질해주기를 더 바라는지 모른다. 그만큼 나는 딸애와 토크쇼삼아 입씨름하는게 마냥 즐겁기만 하다.   학교 기숙사에 들어가는 개학날도 그랬다. 아내가 새벽부터 일어나 땀을 벌벌 흘리면서 딸애가 한주일간 갈아입을 옷들과 생활필수품을 트렁크에 챙겨넣는데 딸애는 거기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듯 애완견과 영문 모를 대화를 하고 있었다.   “나 없으면 아빠한테 많이 맞을 거야. 그래도 누나가 올 때까지 참아야 한다. 알겠지?”   애완견은 마치도 알아들은 듯 우리안을 부지런히 오가면서 불안하게 캐갱거렸다. 그넘은 포메라니안으로 딸애의 성화에 못이겨 반년전에 사온 것이다.   “나를 보고싶으면 어쩔 거지? 응, 그렇게 울면 돼. 내 들을 수 있어.”     나는 듣다 못해 한마디 시까슬렀다.   “엄마 아빠가 너를 그렇게 귀하게 키웠어도 이제 보니 강아지만 못하구나.”   “아빠 지금 베이베이랑 질투하는 거지?”   “그게 질투랑 다른 문제야. 사실 우린 서운하거든.”   “그럼 아빠 엄마도 잘 있어.”   “성의 꼬물도 없구나. 그런 인사 어디 있어? 이제 니가 집에 다시 돌아올 즈음에는 베이베이가 집에 없을 줄 알아. 남한테 줘버리고 말테다.”   우리 부녀간은 심심하면 이런 식의 대화를 한다.     솔직히 나는 강아지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동북 고향에서 살때 곱게곱게 키우던 토종개를 어느 술군들이 한밤중에 가만히 훔쳐가서 술추렴을 한 다음부터 거의 강아지에 정을 끊고 살았다.   청도에 와서도 마찬가지였다. 아파트 생활때문에 불편한 원인도 있었지만 왠지 자꾸 예전의 일이 조건반사적으로 생각나 강아지란 동물에 알레르기식 반응이 생겨나군 했다.   그런데 딸애는 아니였다. 길을 가다가도 강아지만 보이면 무서운 줄도 모르고 무작정 다가가 안군 했었다.   한번은 기업하는 친구가 놀러오면서 애완견 한마리를 안고 왔었다. 보숭숭한 하얀 털이 온몸을 감싸고 있는 귀여운 놈이었다. 회사에서 키우던 놈인데 경비가 갑자기 사직하면서 돌볼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난 친구가 딸애를 배려해서 가져온 것이란 걸 잘 알고 있었다. 물론 딸애는 하늘이 낮다고 퐁퐁 뛰면서 기뻐 야단이었다. 말릴 수도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그날부터 딸애는 눈만 뜨면 애완견을 안고 못살게 굴었다. 좋다는게, 곱다는게 강아지를 정신 잃게 휘둘러놓거나 아니면 숨막힐 정도로 힘주어 끌어안는 것이었다. 그바람에 발악하는 애완견한테 허비어 광견병 백신을 두번이나 맞기도 했다.   물론 나에게는 생각밖의 일들이 많이 생겨났다. 애완견 식량 마련은 물론 똥오줌을 청소하고 목욕 시키고 발톱을 깍아주고 모든 일이 고스란히 강아지를 제일 싫어하는 나한테 차려졌다. 좀만 청소가 늦어지면 온 바닥에 흰 서리같은 털이 한층 쭉 깔리군 했다. 거기에 애가 백신을 두번이나 맞으면서 나의 인내심은 한계에 다달았고 마침내 그렇게 아내의 회사로 쫓겨나간 강아지를 어느날 누군가 안아가버렸다.   그뒤로 딸애는 시도때도 없이 나때문에 애완견이 잃어졌다며 똑같은 걸로 사내라고 조르군 했다. 2년이란 질긴 마라톤식의 줄다리기를 하다가 결국 내가 져서 정말로 똑같은 포메라니안을 다시 사온게 이제 반년정도 된 것이다.   딸애는 학교에 가면서도 그넘을 잊지 못해했고 나는 나대로 딸애가 강아지에 너무 많은 마음을 주고 있다고 서운해했다.   아닌게 아니라 첫주일의 기숙사생활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딸애가 첫마디에 애완견을 찾았다.   “아빠, 베이베이가 잘 있어?”   “남한테 줘버린다고 했잖아. 벌써 남집에 갔어.”   “거짓말!”   그래도 혹시나 해서 성급하게 집안으로 뛰어들어간 딸애는 자기를 반갑게 맞아주는 베이베이를 보더니 그대로 끌어안고 좀체로 놓아줄념을 하지 않았다. 키스를 하고 등에 업기도 하면서 야단법석을 떨었다.   한옆에서 지켜보는 우리부부는 그저 착찹한 심정이었다. 자식이라고 애지중지 키워봤자 뭐하냐싶었다고 할까. 아무튼 마음이 텅 비어지는 느낌이었다.   하긴 양로원에 있는 어머니를 보러 갔다가 강아지 밥 줘야 한다면서 얼굴 보기 바쁘게 급히 집으로 돌아간 어느 후레자식의 뉴스도 듣긴 했었다. 사람을 물려는 강아지를 때렸다고 주인과 길손이 칼들고 피박나게 싸웠다는 레전드도 화제를 모으긴 했었다. 그리고 파트너 대신 강이지와 의지해 살아간다는 이야기도 이슈가 되긴 했었다.   그래도 이건 아닌 듯 싶었다. 아직은 부모한테 의지해서 자라야 할 어린 자식한테 부모가 개밖의 관심사로 윤락해서는 아니된다는 절박함이 앞섰다.   저녁식사 후 나는 조용히 딸애를 불러앉혔다. 철부지는 분명하더라도 열두살이면 분별능력은 어느 정도 가질법 했다. 나는 아주 가벼운 톤으로 부모자식 간의 인연을 얘기했고 자식의 도리를 설명했다. 아닌게 아니라 딸애의 눈에 금세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나는 딸애가 충분히 자신을 반성하고 있다고 믿었다. 딸애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첫날밤 침실애 셋이 모두 울었어. 엄마 아빠가 너무 생각나서말이야. 엄마가 제일 보고싶었고 그다음 아빠였어. 베이베이는 머리에 떠오르지도 않았어.”   “그건 속심말이 아니잖아? 그런 니가 오자마자 베이베이부터 안고 난시쳤어? 우리가 얼마 낙담했는지 알아?”    “부모랑 베이베이랑 어떻게 같은 레벨이야? 베이베이는 즐겁게 가지고 노는 물건일뿐이잖아. 그러나 부모는 생각하면 지금처럼 눈물이 나오는 존재란 말이야.”   너무 어른스러운 말에 나는 한동안 질식할 듯한 침묵속에서 허덕여야 했다. 말을 기가 막히게 조리있게 하는 애이다. 장편소설을 쓴다고 납뜨는 애고보면 철리적인 말이 나오는 것도 이상할 건 없다.   눈물이 나오는 존재인 부모를 눈물이 나올까봐 의식적으로 외면했다는 그 말은 그대로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어쩌면 그렇게 내색 한번 없이 천연덕스럽게 태연한 퍼포먼스를 할 수 있을까싶기도 하다.   그러고보니 먼저번 애완견이 잃어졌을 때 딸애는 징징거리기는 했어도 지금처럼 울지는 않았었다.   벌써 애가 이렇게 커버렸다. 자기를 억제할 줄도 감출 줄도 아는 불여우같은 요사함을 지닌 진정한 사람으로 성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암, 그렇구말구. 그게 사람이지. 겉과 속이 같다고 떠벌이는 건 절대 사람이 아니야. 사람일 수 없어. 사람은 객관에서 쉽게 판단할 수 없는 다변성과 다중성을 가졌어. 어차피 불여우같아야 해. 불여우는 오명을 뒤집어쓴게 분명하거든. 자신을 보호하려는 본능과 미지의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를 소유했을뿐이야. 사람도 그런 삶을 살아가게 디자인되어있단다. 그게 또한 진실한 인성이야. 그래야 인간세상이 다채롭고 다양하고 비로서 다분하게 살멋과 살맛이 나는 거야.   불여우같은 딸애를 키우고있는 아빠는 선택된 아빠일 것이다.                                                                                                                 2017년 2월 18일
122    개미 투 댓글:  조회:147  추천:0  2018-09-10
단편소설   개미 투   장학규    “교육국 장처장이랑 미팅을 잡았어. 어렵게 만든 자리니까 다섯시까지 꼭 와야 해.”   문걸이가 전화를 걸어왔을 때 창학이는 마누라와 함께 한창 이사짐을 정리하고 있었다. 점심 시간을 한참 지난 시점이였지만 그들 부부는 먼지를 뒤집어쓴채 배를 촐촐 굶으면서 일에 열중하고 있는 중이였다. “?”     창학이는 퀭해진 눈으로 안해를 바라보았다. 스마트폰 스피커를 열어둔 상태로 통화했기에 안해도 통화 내역을 다 들은 것이다. 안해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였다. “알았어. 제시간에 도착할게.”   그들은 달포전에 살던 집을 팔아버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시골동네에서 경이를 공부시킬 자신이 없어서였다. 아파트가 속한 학교에 헛일삼아 가보았다가 창학이는 그만 초풍할 지경으로 놀라고 말았다. 단층집 십수채가 촘촘히 들어앉은 가운데 반급마다 6~70명씩 꽉 들어차서 벌집처럼 왕왕거렸었다. 주변에 하루가 멀다하게 일어서는 고층빌딩만 아니였어도 이게 정말 청도라는 동네에 있는 학교가 맞는지 의심할 정도였다.   그날로 창학이는 조금도 주저없이 아파트를 복덕방에 내걸었다. 그리고 롱담같이 며칠도 안되여 팔려나갔다. “벌써 그 집을 기다린 사람이 있어요. 조손 삼대가 사는 가정인데 방이 세개이상인 큰집을 내놓으라고 해서 애먹었어요.” 태평양이라는 굉장한 이름의 복덕방 주인은 희미한 웃음을 지으면서 요새는 둘쨰를 마음대로 낳게 하는 바람에 큰집이 대세라고 주절주절거렸다. 그리고 사나흘도 되지 않아 주인이 나졌으니 빨리 복덕방으로 나오라고 재촉했다.   진씨 성을 가진 구매자도 외지인이였다. 애가 둘이 딸린 젊은 부부였는데 자기네는 시내에서 집 사서 애들을 공부시킬 게제가 못된다면서 마치도 집 파는 창학이에게 큰 잘못을 저지른듯 두손을 애매하게 비벼대기도 했다. 그러는 그들을 보면서 창학이는 까닭없이 우월감같은 것이 생겨나기도 했다.   그런데 그때까지도 창학이는 자기 주변에서 대형 쓰나미가 형성되고 있다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처음부터 좀 심상치 않긴 했었다. 아파트 매매 계약에 따라 선불금 30프로를 받은 창학이는 닷새만에 이번에는 마야라는 다른 이름의 복덕방을 통해 중점중학교가 위치한 부근의 한 작은 아파트를 계약했다. 원래 살던 집보다 면적이 절반밖에 되지 않았고 지은지도 근 20년이 되는 낡은 아파트였으나 학교를 끼고 있다는 리유로 값은 엄청나게 비쌌다. 그나마 큰 아파트를 판 덕분에 위치 좋은 작은 아파트의 선불금은 그런대로 맞출 수 있었다.    문제는 재래시장에서 배추를 사고파는 것도 아닌데 복덕방에 사람이 개미처럼 바글바글거린다는 점이였다. 이게 웬 시추에이션이지 하면서도 세상사에 많이 무감각해진 창학이는 심드렁하게 자기 할 수속에만 전념했다. 집 판 잔금을 받기로 한 시간대를 맞추어 좀 더 여유를 가지고 한달반내에 새집 대금을 일시불하기로 약속했다.   새집에서 남은 대출을 상환하기를 기다리는 사이에 어느덧 두주일이란 시간이 훌쩍 지났다. 그로부터 다시 이틀이 더 지나 앞선 태평양복덕방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정월 대보름 휴가때문에 진씨의 새 신분증이 며칠 늦게 나오게 된다는 것이였다. 진씨의 신분증이 유효기를 넘겨 새로 만들어야 한다는 건 창학이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였다. 예상보다 열흘쯤 늦어질 거 같다고 했다. 신분증이 도착하면 바로 은행대출을 신청하면 보름내에 돈이 나올 거라고 아주 은행이 자기가 꾸린 것처럼 수헐하게 내뱉었다. “아주 꼴깝을 떠세요.” 전화를 닫고 창학이가 중얼거리는데 어느새 그 소리를 들은 안해가 오래간만에 얼굴을 풀고 맞장구를 쳤다. “글쎄요. 지랄도 잔치처럼 하네요 호호” 딸애의 진학이 큰 골치거리였던 안해는 학군내에 집을 샀다는 것만으로도 만시름을 풀 놓는 눈치였다.   얼마후면 무난하다던 진씨의 신분증이 아직 나오지 않은 대신 새집의 대출이 먼저 풀렸다. 일이 이대로 진행된다면 자칫 량쪽의 수속이 동시에 마무리될듯 싶었다. 앞뒤로 뛰여다니기 귀찮겠다고 투덜대고 있는데 마침 새집을 맡은 마야복덕방에서 다급히 호출했다. “지금 당장 모든 서류를 빠짐없이 챙겨가지고 오세요.”   초봄인지라 오후 다섯시가 넘기 바쁘게 날이 어두워졌다. 퇴근을 서두를 때에 사람을 부르는 것은 무언가 심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징조였다. 창학이네 부부는 서류봉투를 가지고 황황히 집문을 나섰다. “내부소식인데요. 새로운 아파트 구매제한정책이 내일 저녁 열두시부터 발효한다고 합니다. 외래인은 어떤 경우에도 집 두채를 구매할 수 없게 됩니다.” 덜 밉게 생긴 복덕방 매니저 아가씨가 불안한 목소리로 급촉하게 말했다. “저희들은 집이 한채인데요.” “아니, 저쪽 집 아직 명의 이전이 되지 않았잖아요?” “그건 그렇죠.” “그러니까 결국 이 집이 두번쨰 집이 되는 셈이예요. 내일이 지나면 이 집을 살 수가 없게 된단 말입니다.” 그러고보니 늦은 시간대임에도 불구하고 복덕방에는 서류봉투를 들고 달려오는 고객들이 그치지 않았다. 창학이네 부부는 불안한 마음에 뭐가 뭔지도 모르면서 매니저가 시키는대로 여기저기에 손도장을 찍고 싸인했다.   흔치는 않지만 창학이는 문뜩문뜩 자신이 거리바닥에 내몰린 개미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다. 여기 치이고 저기 밀리면서 간신히 생존해나가는 미물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특히 안해의 상태가 더 말이 아니였다. 지난해부터 반쪽이 된 얼굴이 어느새 시꺼멓게 죽어있었다. 창학이는 조이면 당장 부러질 거 같은 안해의 처량한 어깨를 가볍게 쓸며 어르듯 말했다. “여보, 우리 우유 먹고 좀만 버티자.” 힘내자는 말이였지만 스스로 듣기에도 맥빠진 소리였다.   이날따라 하늘에서는 때아닌 비방울을 흩날리고 있었다. 이제 싹이 돋아나기 시작한 가로수들은 바다바람에 앙상한 가지를 흔들며 애처로운 소리를 내고 있었다. 원래 심성이 예민한 안해는 양꼬치를 먹고 들어가자는 창학이의 제의를 무시하고 한사코 호프집을 찾아들어가더니 맥주 두잔에 그만 녹초가 되여버렸다. “우리 둘… 말이예요. 똥과 설사가 합친… 격이예요. 묽은~ 똥이잖아요.” 집에 돌아와서도 횡설수설하는 안해를 겨우 다독여 눕히고 긴밤을 거의 뜬눈으로 보내다싶이 한 창학이는 날이 밝아오기 바쁘게 진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진씨는 자기가 아직도 고향인 하남성에 있다고 느릿느릿하게 말했다. “그런데 무슨 신분증 수속이 그렇게 오래 걸려? 임시신분증은 이틑날로 나오는데 지금 나를 엿먹이는거요? 당신까지 사람을 업신 여기는 거요?” 막다른 골목에 이르면 나이가 명함이라고 창학이는 나이차가 한돌개는 되는 진씨에게 말이 나가는대로 내뱉었다. 그러자 허우대가 멀쩡한 진씨가 생각밖에 비굴하게 죽어들어갔다. “형님, 미안합니다. 사실은 그 사이 회사에 급한 일이 있어서 급히 출장 다녀오느라고 늦었습니다. 이미 온바하곤 진짜 신분증을 만들어가야잖아요. 곧 나오게 됩니다. 며칠만 기다리십시요.”   이날 오후 느즈막에 관방 뉴스에 새로 제정된 아파트구매제한정책이 공포되였다. 신통력이 어디까지 미칠지 모를 복덕방의 “내부소식”이 현실로 다가온 것이다.  당지 호적을 가진 시민 가정은 두채까지 가능하나 비호적 주민은 1채로 제한했다. 그것도 연속 12개월 개인소득납세증명이나 사회보헙납부증명을 제출해야 했다.   창학이는 속이 철렁했다. 10여년간 줄창 사회보험을 납부해오긴 했으나 털면 먼지가 나지 않는 법이 없다고 또 무슨 건덕지가 잡힐지 알수 없었기 때문이였다. 창학이는 안해가 이 소식을 알면 또다시 쇼크를 받을가봐 입을 함구하고 크게 숨도 내쉬지 않았다.   그러나 안해는 어느새 벌써 알고 있는 눈치였다. 평시의 초조하고 긴장된 모습과 달리 코노래까지 흥얼거리면서 저녁을 짓고 있었다. 창학이는 그만 오리무중에 빠져버렸다. “당신 어제 맥주 둬고뿌하더니 더위까지 먹은겨? 아직 날씨가 이른거 아니오. 삼계탕 사다드릴가?” 안해는 그를 흘끔 돌아보며 가볍게 웃었다. “계속 우려먹는 사골곰탕이잖아요. 금방 풀릴 거예요. 그리고 우리는 조건에도 부합되니 괜한 신경 쓰지 말아요.” “나 그럼 시름놓고 공원 가서 장기나 둘가보다.” 창학이는 그러는 안해가 오히려 고마워 간만에 빈정거리는 어투로 대꾸했다. 따로 국밥이라고 딸애의 중학교 진학문제가 대두해서부터 안해와 한 채널에 들어보지 않기는 이번이 처음이였다. “뭐 그러세요. 사마귀가 수레바퀴에 맞서봤자 짓이겨질 일밖에 있겠어요. 장기 두던 장기 바치던 마음대로 하세요.” 그날 마야복덕방에서는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 이틑날도 역시 꿩구워먹은 자리였다. 사흘이 되여 창학이의 인내심이 한계점에 거의 도달할 무렵 뜻하지 않게 진씨가 새 신분증을 가져왔으니 복덕방에서 만나 명의 이전 수속을 하러 가자고 전화가 왔다. “우리도 일 있다고 며칠 끌자구요.” 안해는 창학이가 진씨라도 되는듯 째려지게 흘겨보며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지금 그 말씀 웃기시려고 하신 겁니까? 당장 5월이면 애 중학교 신청을 해야 하오. 어디 남들처럼 배포유할세 말이지.” “그래도 그렇지, 우리가 여직껏 속을 태운 걸 생각하면 일년정도 속태워줘도 과할 것 같지 않아요.” “그건 넌센스야. 얼른 준비하고 가보기오.” “정말이예요. 우리가 명의 이전을 해주면 이 집은 진씨거가 되잖아요. 그런데 저쪽 집이 지금처럼 계속 풀리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만 한데 나앉아야 하는게 아니예요?”   창학이는 불시에 이마를 탁 쳤다. 옳거니, 맞거니. 왜 그 생각은 못했을가 싶었다. 악수 뒤끝에 비수라고 진씨가 일단 잔금을 내고 명의 이전을 마치면 그날로 집을 내라고 할지도 모를 일이였다. 창학이는 냉큼 핸드폰을 꺼내 새집을 주선한 마야복덕방을 연결했다. 지금껏 그렇게 민첩한 동작을 해본적이 없었다. 그들을 전문 책임진듯 전번날 만났던 덜미운 매니저 아가씨에게로 전화가 이어졌다. 매니저는 창학이의 말을 듣더니 다분히 애교가 섞인 목소리로 서류는 그날로 부동산교역센터에 제출되였지만 관련 정책에 따라 잠시 스톱된 상태라고 설명한 후 다시 사회보험을 납부했냐를 확인하더니 그러면 문제 없을 거 같으니 저쪽 요구대로 진행하라고 말했다. 원래 설겆이 많이 하는 사람이 그릇을 자주 깨는 법이라 매니저의 말을 액면 그대로 다 믿을 수는 없었지만 이미 엎지른 물이니 어떡할 방법이 나지지 않았다. 하늘에 운수를 맡길 수밖에 없었다. 복장공장을 꾸리는 진씨는 납세증명만 한묶음 들고 왔었다. 그것을 본 은행 경리는 입을 딱 벌리더니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면 아무런 문제가 없어요. 열흘 정도면 대출이 내려올 거예요.” 은행 경리는 복덕방 주인과 많이 가까운 듯 서로 눈웃음을 나누었다. 진씨는 히로뽕을 주사 맞은듯 금세 흥분해서 교복만 5년여를 만들어왔다면서 청도에서 학교 다니는 학생들이 자기가 만든 옷을 안 입어본 애가 없을거라고 희떠운 소리를 늘여놓기 시작했다. 대출 수속을 마치고 복덕방 주인이 이참에 부동산교역센터에 가서 명의 이전을 하자는 걸 창학이의 안해가 잔금을 아직 받지 못했는데 어떻게 명의 이전을 하냐고 단마디로 거절해버렸다. 그리고 얼마후 대출이 예정대로 내려왔고 창학이네는 울며 겨자 먹기로 명의 이전 수속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바로 어제 일이였다. 집을 일주일내로 내주기로 했지만 저쪽 집은 여직 소식이 없는 상태였다. 아침에 일어나자바람으로 막무가내로 이사짐부터 짜면서 부부는 오래동안 토론해온 화제를 또다시 꺼내면서 갑론을박했다. “아예 이 동네에서 대수 몇달 살 집을 구할가요?” “그럼 학교는 어떻게 붙이구?”   “당신 지금 운전 배우지 않아요. 면허 따내면 차로 데려다주면 되잖아요.”   “누가 데려다주는 일을 말하는 거요? 여기서 살아도 학교에 붙을 수 있었다면 왜 집을 팔았겠소. 머리만 잔뜩 길어가지고 우우” 창학이는 운전면허 얘기만 나오면 까닭없이 울화가 치밀군 한다. 자가용을 갖춘지는 여러해가 되였다. 시내 변두리에서 살다보니 출퇴근이 문제여서 차를 사기는 했어도 창학이는 사업상 관계로 매일 술상이 생겨 감히 차를 몰 엄두를 내지 못했다. 대신 안해가 면허를 받고 여직껏 몰고 다녔었다. 아마도 새로운 부동산정책이 곧 나올거라는 소식을 들은 이틑날일 것이다. 그랬다. 맥주 두 컵에 만취가 되였던 안해가 아침에 일어나자바람으로 창학이를 끌고 자동차운전학원으로 달려갔다. “이제부터 애를 학교까지 데려가고 데려올지도 모르니 당신 이번에는 아무런 소리도 말고 운전 배워요.” 하는 생각이 언제나 액션수준이여서 그렇겠거니 하고 창학이는 안해가 하는대로 내버려두었다. 학원 비용이 저그만치 5천원이 넘었다. 창학이의 한달 로임에 맞먹었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양씨 성을 가진 코치라는 량반이였다. 생긴 것도 우락부락한데다가 텁기도 말이 아니였다. 마치도 십년 묵은 빚을 갚지 않았다는듯이 언제봐도 소에게 물린 상통을 하고 있었다. 안해의 스승이기도 한 양코치는 첫 며칠은 아주 살뜰하게 창학이를 대해주었다. 후에야 안 일이지만 안해는 떠나면서 창학이 몰래 양코치에게 2백원을 질러주었었다. 그런데 그 약발이 겨우 3일밖에 가지 않았다. 첫 필기시험이 끝나서부터 양코치는 배워주라는 차는 고스란히 세워두고 학원들을 모아놓고 연설을 일삼았다. 항상 포인트를 못잡고 설왕설래하는 특기가 부럽기도 했다. 그러나 모든 얘기를 한데 묶어놓으면 딱 한글자, 즉 돈이였다. 어느 코치네 학원은 2백원 내고 시험장을 두바퀴를 돌면서 연습한 것이 주효하여 시험에 단번에 넘어갔다느니, 어느 친구는 2백원을 옆자리에 앉은 시험관에게 질러준 덕분에 시험내내 그 코치의 암시를 받으면서 겨우 넘어갔다느니 하는 말들이였다. 모두들 그 말뜻을 알아듣고 슬그머니 양코치의 주머니에 마니를 질러주었던 모양이였다. 그러나 창학이만은 아니였다. 안해가 먼저 상납한 것도 있지만 사실 운전에는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였다. 집에 차가 있으면서부터 틈날 때마다 운전해온 터여서 웬간한 주차나 후진에는 5~6년 운전경험을 가진 안해보다도 나았다. 그러자 양코치의 심술이 노골적으로 터지기 시작했다. 차를 연습해도 웬간해서는 창학이를 부르지 않았고 어쩌다 오르게 해도 소태 씹은듯 쓰거운 표정으로 노려보군 했다. 좀만 실수를 하거나 자기의 요구대로 하지 않으면 바로 고성이 터지군 했다. “너 돼지니? 그 미련한 머리 가지고 무슨 차운전을 배운다고? 집 돌아가서 똥바지 벗고 자던가.” 그래도 실기시험을 창학이는 무난하게 넘어갔다. 다섯명이 가서 두명만 합격된 것이다. 양코치는 더욱 야료를 부렸다. “너 잘하잖아. 배울 필요 없어. 절로 가서 시험치라구.” 그날부터 지금까지 창학이는 한번도 운전대를 잡아보지 못했다. 여러가지 일이 한데 겹쳐서 정신없이 돌아친 원인도 있었지만 양코치가 전혀 불러주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자동차운전학원은 그게 률이였다. 코치가 어느날 오라고 해야 가서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동영상을 보면서 배워요 까짓꺼. 기술은 문제 아니잖아요. 주행시험은 세부적인 순서문제이니 인차 배워낼 거예요.” “그럼 학원비는 헛판게 아니요. 어떻게 해서라도 그넘의 양코치인지 양꼬치인지 하는 작자를 이겨야지. 하다못해 본전이라도 뽑아야 해. 이렇게 당하지만은 않을거야.” “됐어요. 탱크앞에서 돌도끼 휘두르는 격이예요. 우리 경이 일에나 신경 써요.” “저녁에 교육국 장처장이랑은 어쩔가? ” 가까운 친구인 문걸이앞에서 경이의 진학문제를 두고 속탄 얘기를 자주 했었다. 문걸이가 그걸 기억해두고 있다가 용케 장처장을 모셨다는 걸 창학이는 잘 알고 있었다. “가요. 애가 여직껏 타온 모든 증서를 다 가지고 가서 우리 경이가 얼마나 훌륭한 애인가를 알립시다.” 부부가 약속 장소인 해란강민속궁에 가니 거기에는 벌써 문걸이와 장처장이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름 먼저 가서 기다린다고 일찍 떠났는데도 늦어서 여간 난감하지 않았다. 미안해 어쩔줄 모르는 창학이에 비해 장처장은 문걸이가 미리 푹 고아놓은때문인지 오히려 제쪽에서 손님을 맞이하듯 일어나 자리를 권했다. “어서 여기 앉아요. 이제보니 알만한 친구네요.” 창학이도 웬지 장처장이 낯익었지만 구경 어디서 보았던지는 아무리해도 생각나지 않았다. “저도 많이 본듯한 모습인데요.” “왜 벌써 잊었어요. 접때 벽산학교 새청사 준공식에서 만났었잖아요. 저녁에 술도 함께 먹고 그랬었는데요. 수록원에 집 있는데 그걸 팔고 시내로 들어오련다고…” “아, 처남이 역시 수록원에 세집 들어있다고 그랬던가요?” “맞아요. 어때요? 집 팔고 샀어요?”   “네, 사긴 샀는데요. “ 창학이는 잘되지 않는 중국말에 손짓발짓까지 해가면서 여의치 못한 일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했다. 장처장은 용케도 말 한마디 삐치지 않고 그대로 다 들어주었다. “그러면 일단 새집주인과 세입계약을 작성하십시오. 지금은 말입니다. 학교 주변에 세집을 얻어 살아도 입학이 가능합니다. 물론 다섯번째 순서로 명액이 남아야 되겠지만 역시 기회는 있습니다.” 그 정도의 정보는 창학이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대체로 외래인이지만 학군내에 자기 집을 가진 네번째 순서의 애들도 겨우 턱걸이할지 말지라고 알려져 있었다. 세집에 사는 다섯번쨰 순서의 애들은 거의 도태되는 운명이란 것은 비밀도 아니였다. 창학이는 대화 와중에도 자꾸 등허리를 지르는 안해의 성화에 못이겨 옆구리에 끼고 있던 봉투를 식탁우에 올려놓았다. 그것은 경이가 소학교 6년간 받은 3호학생 증서 12장과 전국성적인 콩클에서 받은 작문상, 성악상장들이였다. 그런데 창학이가 미처 설명도 하기 전에 장처장은 피끗 곁눈질해보더니 툭 잘라 말했다. “걷어넣으세요. 그런 증서 꼬물도 소용없어요. 학교에서는 호적과 집, 납세와 사회보험 여부 그런것만 본답니다. 우리 술이나 먹어요.” 창학이는 술 먹는 내내 허파에서 바람이 새여나가는 느낌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장처장이 어쩌면 연기를 하는 거 같기도 하고 몽니를 부리는 것 같기도 했다. 슬그머니 문걸이에게 저 자식 돈 좀 질러줘야 하는게 아니야 하고 묻는데 어느새 조선말을 꽤나 익힌 장처장이 귀동냥해 듣고서 대번에 손사래를 치더니 목이 잘려나가는 흉내를 냈다. 더이상 어떻게 말을 붙여볼 수 없었다. 술상은 멋없이 인차 끝났다. 더이상 미룰 수 없었다. 4월에 막 접어들었고 이제 5월부터는 인터넷 신청을 해야 했다. 들리는 소문에는 세입계약도 두달전이여야 유효하다고 한다. 이틑날 창학이네 부부는 아침 일찍 새집으로 향했다. 장처장이 별방법이 없다면 그들로서는 더 속수무책일수밖에 없었다. 길고 짜른 건 대봐야 안다고 우선 장처장의 충고대로 세입계약서라도 만들고 볼 판이였다. 그런데 새집은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응대가 없었다. 전화를 걸었더니 과부로 홀로 사는 녀주인의 잠꼬대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저 새집 사서 나왔어요. 그 집 비워두었으니 급하면 먼저 들어도 돼요.” 창학이는 하마트면 하늘로 솟구칠번 했다. 세상에 어디 이런 떡이 있나 싶었다. 호박이 넝쿨채로 굴러온셈이였다. 창학이는 흥분을 참느라고 무지 애썼다. 녀주인은 한시간 후에 복덕방에서 집열쇠를 넘겨주겠다고 선선히 대답했다. 그들이 복덕방에 도착했을 때는 녀주인은 아직 오지 않았고 그들을 맞아준 것은 여전히 그 덜미운 매니저 아가씨였다. “마침 잘 오셨네요. 그렇지 않아도 전화를 드리려고 했어요.” “웬일이죠?”   “집문제가 해결되였어요. 새정책을 출범하자마자 즉시 발효되다보니 합리성이 없어 많은 문제를 야기했던가봅니다. 그래서 정부에서는 새 정책이 발효되기 전에 이미 부동산교역센터에 교부된 사안들은 원 정책대로 진행하기로 결정하였대요.” 뒤미처 들어온 녀주인도 그 말을 듣더니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창학이는 이 하루를 어떻게 보냈는지 모른다. 멀쩡한 자기 집을 가지고 세입계약을 맺으려 했다가 열쇠를 받으려 복덕방에 가고 다시 거기서 매니저를 따라 부동산교역센터에 가서 일사분란하게 수속을 마쳤다. 나중 은행에 가서 잔금을 녀주인에게 이체하고보니 제법 길어진 봄날도 많이 저물어가고 있었다. 5월에 창학이는 인터넷으로 신청서를 제출했다. 다행히 새로 제작된 부동산권리증을 가진 덕분에 네번쨰 순서에 자리잡게 되여 그나마 마음이 든든해졌다. 이제는 하늘에 운수를 맡길 수밖에 없었다. 주변에 차문해보니 네번째 순서의 아이들까지는 그래도 입학이 문제 없다고 했다. 이달에 창학이에게 또 한가지 호소식이 있었다. 호구포인트제에 창학이가 합격된 것이다. 지난해 1점에 목맸던데 비해 올해는 2점이 넘쳐난 것이다. 나이 점수 1점이 깎인대신 사회보험 1년이 늘어나면서 3점이 가산되였고 거기에 헌혈 1점이 추가되였던 것이다. 여전히 지난해의 그 메주같이 생긴 처녀가 서류를 접수했고 먼저번과 완연히 다른 깎듯한 태도로 묻는 말에 차근차근 대답해주었다. 바로 이 처녀가 기자증, 작가증, 수상증서들을 쓰레기인듯 테이블우에 던지던 그 당사자였다. “이런 건 쓸데 없어요. 다른 자격증은 없어요? 용접공 자격증이라든가 아니면 하다못해 전기수리공 자격증이라든가 하는 거 말이예요.” 그때 느꼈던 모멸감을 창학이는 지금도 잊지 않고 있었다. 하마트면 신문사를 때려치우고 용접기술을 배울러 갈번 했었다. “집이 아무리 커도 중고주택이면 포인트 얼마 챙기지 못해요. 그집 팔고 새아파트 사는 방법도 있어요.” 그렇게 시까스르기도 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주 곰상해져서 아닌 아양까지 떨어주었다. “점수선을 넘었어요. 미리 축하해요.” 그러나 창학이는 심드렁했다. 경이의 중학교 입학이 거의 기정사실화된 마당에 굳이 호적을 올릴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래도 해놓읍시다요. 또 어떤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할지 누가 알아요. 호적때문에 고생한 걸 생각하면 진저리가 나요.” 안해가 창학이보다 더 적극적이였다. 몇년간 호적 없는 서려움을 너무 많이 겪어왔기 때문일 것이다. 여하튼 그렇게 수속이 시작되였고 7월 초순에 희소식 두개가 한꺼번에 날아들었다. 심사를 거쳐 호적을 올리는데 동의한다는 통지와 심사를 거쳐 경이의 중학교 입학이 허락되였음을 알리는 통지였다. 창학이네 부부는 처음으로 퍼런 대낮에 서로 부둥켜 안고 미친듯이 키스를 하고 또 했다. 그런데 호적 등록을 하려고 파출소에 갔다가 창학이는 뜻하지 않게 운전학원의 양코치를 만났다. 알고보니 그도 외래인이였다. 이번에 어렵사리 포인트 적립이 되여 20년만에 청도시민이 되였다면서 너무 반가운 나머지 창학이를 괴롭혔던 자신을 잊고 오랜 친구를 대하듯 창학이를 끌어안기도 했다. “왜 차 배우러 나오지 않지? 새로 실시되는 주행시험이 좀 까다롭긴 해도 당신처럼 운전경력이 있는 사람은 요령만 터득하면 쉽게 넘어갈 수 있어. 다음주부터 나오라구.” 며칠 후의 학교입학신청확인현장에서는 우연하게 진씨와 장처장을 만났다. 그들은 창학이를 발견하지 못하고 저들끼리 웃고 지껄이면서 교무실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떄서야 창학이는 진씨의 큰아들애가 경이와 비슷하게 컸었다는 현실이 돌이켜졌다. “우리 처남이 수록원에 세집을 잡고 있어요.” 처음 만났을 때 창학이가 자기 사는 아파트를 말하니 장처장은 그렇게 말했었다.  “벌써 그 집을 기다린 사람이 있어요…” 태평양 복덕방의 말 많은 매니저의 한 첫마디가 이랬었다. 그렇다면 저 둘이 그 처남매부간이였단 말인가? 세상에 이런 요지경이 어디 있단 말인가? 교무실의 열려진 문으로 학교 책임자인듯한 번대머리 남자가 허리를 굽석이면서 장처장에게 인사를 올리고 있었다. 길게 늘어선 학부모들 뒤를 따라 확인 수속을 하러 교실로 한발작한발작씩 움직이면서 창학이는 지루하고 답답한 느낌만 들었다. 가슴이 무엇엔가 짓눌려 곧 터질 것만 같았다. 아니, 미칠 것만 같았다. 조건에 부합되여 새로 입학하게 되는 학생이 저그만치 850명이나 된다고 한다.  늦게 온 학부형들은 관리인들에 의해 쫓겨나고 있었다. “이 부분까지예요. 나머지 분들은 내일 오세요. “ 한여름 물쿠는 날씨로 인해 복도까지 열기가 뜨거웠다. 차례를 기다리며 손으로 쉴새 없이 흐르는 땀을 훔치던 창학이의 눈에 신문 한장이 비집고 들어왔다. 새로 온 신문인듯 아까 관리인이 앉았던 책상우에 놓여져 있었다. 그건 이 동네에서 발행량이 가장 많은 신문인 반도도시보였다. 관리인은 꾸역꾸역 계속 몰려오는 학부형들을 말리느라고 찌는듯 무더운 밖에 나가 있었다. 창학이는 궁금해서보다 심심해서 그리고 부채삼아 바람이라도 일궈볼려고 신문을 집어들었다. 마침 커다란 톱기사 제목이 유표하게 확 안겨왔다. 테마당답게 표제가 석줄로 되여있었고 신문면 거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다. 새로운 호적 정책 출범! 조건 대폭 완화 간소화 대출, 신구 여부와 관계없이 90평이상 아파트를 구입했을 경우 호적 취득 가능  
121    나발 불지 마 댓글:  조회:251  추천:0  2018-09-01
수필 나발 불지 말라 장학규     "나발 불지 마!"   퍼그나 도전적이고 전투적인 이 문구는 나의 발명이 아니다. 중국의 어느 위인의 시구 중의 한 대목이다. 그 해의 인민일보 톱기사로도 실린 시이다. 일생을 치렬하고 피어린 투쟁속에서 지낸 위인은 말을 하거나 글을 쓸 때 속심을 직설적으로 토로하기를 즐겼었다.      "나발 불지 마!"   이 한마디에서도 우리는 위인의 대범하고 솔직하며 두러움 모르는 성격을 보아낼 수 있다. 강유력한 핵무기를 소유한 미국을 종이범에 비유한 것은 위인만의 발상이고 언행이라 하겠다.     "나발 불지 마!"   그러나 필자가 이 말에 현혹된 것은 결코 과격하다거나 유모아적으로 되어 있다는데 있는 것이 아니다. 유머가 결핍하고 소심하기까지 한 필자가 이 말에 흡인되고 매료된데는 나름대로의 이해가 있기 때문이다.       새로 반듯하게 닦아놓은 301국도를 달리다보면 길 양옆에 알락달락한 광고판들을 발견하게 된다.달리는 차에서 쉽사리 보라고 집채만한 철판들로 세운 것들인데 설계가 자유분방하고 색상이 환해서 보는 이들을 즐겁게 해줄 뿐만 아니라 도로 미관에도 큰 도움을 주고 있었다.   그러나 모든 광고들이 다 그런 것도 아니었다.구역질이 나도록 어처구니 없는 광고도 있었다.   그 하나를 실례든다면       *** 병원의 임직원 일동은 손님 여러분들의 여행이 즐겁고 순조롭기를 기원합니다.   주소:***   전화:***      언뜻 보기엔 호의여서 타매하기 어렵다."여행이 즐겁고 순조롭기"를 기원하는데 어디 대고 욕을 한단 말이? 망녕이 들어도 분수가 있지...허나 그 이면을 살펴보면 엉큼한 속마음이 통채로 드러나 무척 기분이 잡친다.       병원은 아픈 사람을 고쳐주는 것으로 살아가는 곳이다. 누구나 다 즐겁고 순조로우면 병원은 곧바로 망하고 말며 중국 땅에 몇백만명의 실업자가 하루새에 불어나게 된다.바꾸어 말하면 (극단적인지는 몰라도) 병원은 아픈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이며 생존의 길이 더 넓어지게 된다. 그러니까 병원의 입장에서는 적극적으로 자기가 어떤 면의 치료에 뛰어나다는 설명으로 자기를 흥보해야 시장법칙에 부합된다는 말이다.      "손님 여러분의 여행이 즐겁고 순조롭기를 기원합니다."    마치도 차사고를 낼 것을 기원하는 것 같아 꺼림직하지 않는가? 도둑눔이 소매치기 당하는 사람더러 "좋은 꿈을 꾸시오"하는 것과 무었이 다른가? 이런 현상을 두고 "나발 불지 마!"해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일본은 자살률이 아주 높은 나라이다.그래서 공익광고도 남달리 많이 해야 하는 나라이다. 이를테면 소위 "자살 방지 광고"도 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우리처럼 "인생은 아름답고 생활은 보람차다"는 식으로 절대 쓰지 않는다. 마치도 여행이 즐겁고 순조로운 사람이 병원 주소 따위를 볼리 만무한 것처럼 아름다운 것을 보고 보람을 느낀 인간은 결코 자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살하기 쉽고 또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자살한 그런 곳들에 일본인들은 "죽음을 결행하기전에 10분만 지나온 인생을 돌이켜보시오"라는 뜻의 피켓을 세워둔다고 한다. 그래서도 죽겠다는 사람은 별수 없다는 말이겠다. 하지만 그 10분 동안에 사신의 유혹에서 벗어난 사람이 많다고 하니 어쨌던 유효적인 방법이랄밖에..      그런데도 우리는 지금까지 눈 감고 아웅 하는 놀음을 놀고 있다. 거리에 나가 프랑카드를 보면 세상 없는 지상낙원이 중국이라는 감각이 든다. 상점에 들어가면 "손님은 하느님"이라는 글발이 맞아주고 사거리에는 "어려움이 있으면 경찰을 찾으라"는 표어가 새겨져 있다. 이외에도 듣기 좋은 말들이 많이 보이지만 그저 듣기 좋고 보기에 좋은 것으로 그쳐야지 그것을 진짜로 믿었다간 큰 코 다치기가 십상이다. 천하없는 호사군이라도 "허, 또 '나발'을 걸어놨군"쯤으로 생각해야지 정식으로 대들어다간 된 욕을 치르기가 보통이다.      일전에 출장 갔다가 그런 봉변을 당했었다. 돌아오기 이틀전에 "인민의 철도는 인민을 위한다"는 간판을 내건 역전의 매표구에 찾아가서 침대권을 사게 되었는데 호박같이 생긴 매표원은 차겁기가 꼭 얼음 같았다. 철도가 인민의 것이 아닌 자기 집 소유인 것처럼 험악한 얼굴을 하고 이 차도 없다, 저 차도 다 팔렸다, 3일 후도 거덜났다, 5일 후도 매진되였다면서 묻는 말에 쏘아붙이더니 불시에 "썩 물러가!" 하고 돼지 멱따는 소리를 내지르는 것이었다. 바로 매표구우에는 "여객에게 최대의 편리를 제공하는 것이 우리의 천직이다"란 새빨간 글이 붙어 있었다. 이거야말로 새빨간 거짓말이 아니고 무엇인가?   함께 동행했던 동료가 "저년이 히스테리가 들렸나?" 하며 혀를 차는데 여기저기서 기커먼 자식들이 어슬렁 어슬렁 기어들면서 "침대권 살려나? 여기 있다구..." 하며 치근덕 거리는 것이었다. 보나마나 매표원과 한통속들이었다. 괘씸해서 모두 방색하고 이틀후에 다시 찾아갔더니 없다던 당날의 침대권이 무더기로 생겨났다.통속이 고가로 팔다가 다 못 판 것을 급급히 처리하느라고 태도도 한결 부드러워졌다.    "저년의 히스테리가 쏙 들어갔나?"   동료가 못내 신기해 하기에 내가 매표구우의 구호를 가리키며    "아니야.이떈 저 '나발'이 구린내를 풍길 수 없기 때문이야."했더니 그제야 깨도가 된듯 머리를 끄덕이는 것이였다.      언행불일치가 중국의 일대 특색이 되어진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일가독처로 시장이 농단되어 있는데다가 든든한 쇠밥통들을 괴춤에 차고 있어 세상 무서울게 없는 것이 중국 공무원들의 팔자이다. 한번 일터란데를 차지하면 죽어서 문드러질때까지 그 자리를 깔아앉아 허세를 부린다. 일을 잘해도 그만, 못 해도 그만, 안해도 그만이니깐.오히려 일을 하지 않고 입방아를 찧는 자들이 더 잘 되어가는 판이니깐.   그래도 민주는 발전시켜야 하고 발전은 도모해야 하기에 모순체들이 충돌되더라도 어차피 울며 겨자 먹기로 사후에 "나발'이 되어질 것들을 제출하고 내걸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철저한 변혁과 개혁을 시도하지 않는 한 텅텅 빈 구호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고 곁과 속이 다른 선전은 반감밖에 살 수 없다는 것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2000년 1월  
120    인생의 길잡이 리묵 선생 댓글:  조회:382  추천:0  2018-05-15
  인생의 길잡이 리묵선생 장학규     1986년 4월, 북방 특유의 맵짠 봄바람이 불어치는 어느날, 마을 확성기에서 느닷없이 나를 찾는 소리가 들려왔다. 신문사에서 온 분이 찾고 있으니 속히 촌사무실로 나오라는것이였다.  (허, 내가 언제 인기인물이 되었나?) 집구석에 처박혀 잘 되어지지 않는 글을 한창 긁적거리던 나는 오리무중에 빠져 문을 나섰다.  웅장한 체구에 풍채 늠름한 분이 나를 반갑게 맞아주는데 세상물정에 눈 어두운 나는 되려 서먹서먹해서 간신히 “누구신지요?” 하는 물음만 겨우 내뱉었다.  “이장수라고 부르오.” 선생은 나의 과문(寡闻)을 별로 탓하는 눈치가 없이 시원스레 대답하며 명함장을 내주는 것이었다. 눈은 있어도 망울이 없는 격이지. 내가 당황하여 관청에 잡혀간 촌닭 같이 어색하게 명함장을 받아서 대강 훑어보고 또 멋없이 되돌려주는데 선생은 빙그레 웃으며 가지라는 것이었다.  (행운의 신이 드디어 추파를 보내는 건가? 간밤에 꿈자리가 좋더니…) 나는 꿀 먹은 벙어리 같이 헤벌쭉해서 누가 그것을 빼앗기라도 하듯 명함장을 바삐 호주머니에 쑤셔넣었다. 땅콩을 공짜로 주어먹는 심정이었다.  이런 재치있는 에피소드를 만들고 선생과 마주 앉은 그 자리에서 나는 톡톡하게 ‘욕’을 얻어먹었다. 눈알이 툭 튀어나오게 ‘욕’을 얻어먹었다.  보아하니 필력은 약간 있는 것 같은데 알맹이가 전혀 없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가? 초중도 졸업하지 못하고 그것도 절반은 한족학교에 다니고서 어떻게 글을 쓴단 말인가? 예리한 분석력, 힘있는 필력을 갖추자면 반드시 대학공부를 해야 하는 거다. 지금 연변대학에서 통신생을 모집하니 대학공부를 하라. 대개 이러루한 ‘욕’이였다. 아니, 충고였다. 위가 아파 시달리고 있는 리묵선생이 ‘욕’할 상대가 없어 시골벽지로 어슬렁 찾아온 것은 결코 아니었다. 초학자에 대한 뜨거운 관심과 사랑이 병중의 몸으로 8리 길을 걸어오고 또 걸어가도록 촉구하였던 것이다.  (그러기에 글이 잘 안되는 것이었구나.) 나는 눈앞이 탁 트이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여러 해를 두고 응어리졌던 마음속 의문이 싹 풀어지는 순간이었다.  불행중 다행이랄까. 나에게 천재일우의 기회가 차례졌다. 바로 그해의 한여름에 우리 집 문앞에 연변대학의 자비반이 세워져서 나는 일면 농사를 지으면서 일면 지식의 바다에서 서툰 자맥질이나마 답습할 수가 있었다.  지금도 문득문득 그날의 그 정경을 돌이켜보면 저도 모르게 한없는 자격지심이 드는 것을 어쩔 수 없다. 점심을 잡숫고 가시라는 말씀도 여쭙지 못하고 자전거로 모셔갈 궁리는 더더욱 하지 못했던 나였으니깐. 몰인정해도 유분수이지. 나는 그렇게 철부지였다. 세상을 통 모르고 살았다. 그래도 리묵선생은 틈틈히 시간을 짜내어 편지를 보내와 나를 고무하고 격려해주었다. 문학뿐만 아니라 여러모로 깨우쳐 주었다. 그리고 여러 장소에서 나를 꽤나 추었던 모양으로 많은 문우들이 나와 선생과의 관계를 문의해오기도 했다. “나의 선생님입니다.” 직접 학문을 전수받은 것도 아니지만 어쩐지 그렇게 대답하고픈 마음이었다. 높은 가지에 매달리자는 약은 수작은 절대 아니다. 나로 하여금 우물안 개구리 신세를 면하게 했다는 의미에서 (엄격히 말해서) 나의 스승임에 틀림없다.  이런 것을 두고 옛사람들이 흔히 말하던 ‘지우지은은 영생불망이라’는 것이 아닐까. 여하튼 내 마음속에 건드릴 수 없는 우상으로 남겨진 선생님이시다. 이름난 평론가 리묵 선생에 앞서 우선 살뜰한 부형과 같은 존재로 나의 마음속에 살아있는 것이다.  그후로 여러번 리묵 선생과 접촉할 기회가 있었다. 그래서 엄숙하지만 유머가 결핍하지 않고 겸손하면서도 칼날 같은 성격을 소유한 선생을 잘 알게 되었다. 그리고 술은 썩 잘하나 담배는 입에 대지 않는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문인치고는 퍼그나 드문 현상이었다.  ‘은하수’잡지 창간 100호 기념모임에 참가했을 때다. 그때 리묵 선생은 신문사 일을 계속 보면서 목단강 모 기업에 잠간 몸을 붙이고 있었다. 회의 기간에 약간의 틈이 생겨서 나는 선생을 따라 그의 사무실에 갔었다. 이심전심이랄지 선생의 뜨거운 사랑에 감사를 드리고픈 마음이 불시에 생겨서 도중에 괜찮다는 담배 한곽을 사서 드렸었다. 딴에는 가장 통크게 논셈이었다.  “여직 몰랐어? 나는 담배를 안하는데.” 그러면서도 나의 마음을 상할까봐 그러는지 받아두는 것이었다. 타인을 어떻게 존중해야 되는가 하는 생동한 교육을 나는 받았다.  그날 선생은 처음으로 많은 말을 했다. 기업에 몸을 묻게 된 연유로부터 문학과 경제의 관계, 그리고 인생에 대한 투철한 이해들을 이야기했다.  어찌보면 그번의 상면이 또 한번 나의 인생에 큰 충격을 준 것이 틀림없었다. 내가 오늘날 거듭되는 실패와 좌절앞에서도 힘을 잃지 않고 또다시 끈질기게 새로운 도전에 맞설 수 있고 또한 얼마간 성숙될 수 있은데는 리묵 선생의 장자답고 지성인다운 가르침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긴 그때문에 선생과의 거래가 중단된 상태이지만도. 내가 바삐 돈다는 실정만으로도,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말씀할 거라는 믿음만으로도 나는 리묵 선생께 부끄럽지 않고 미안하지 않다.  청도에서 리광수 선생을 우연히 만나 리묵 선생께서 부교수급으로 진급된다는 소식과 평론집을 출판하였다는 반가운 소식을 우연히 듣고 오래동안 흥분되었었다. 따라서 너무 멀리 떨어져서 그 책을 구할 방도가 없어 여간만 섭섭하지 않았다.  그만큼 언제, 어디서나 선생의 따스한 가르침을 받고픈 마음이다.   
119    말이 험담으로 변하면 댓글:  조회:399  추천:0  2017-12-07
수필 말이 험담으로 변하면 장학규     이맘때가 되면 각 단체마다 송년회요 신년회요 하면서 야단법석이다.    청도는 다른건 몰라도 이 한가지만은 대단하다. 지연, 학연은 물론 연령별, 흥취별, 직업별, 신분별로 여러 단체와 모임이 만들어져있다. 대수 손꼽아보아도 3~40개는 되는거같다.    정부차원의 주선이 없어도 자기들끼리 알아서 잘들 놀고있다. 어쩌면 조선족의 최대 웃점이 이 점이 아닌가 싶다. 나약한거 같으면서도 모름지기 강하고 흩어진양 보이면서도 결집되여있는 이런 모습에서 조선족만의 특유의 기질이랄까 아니면 조선족들의 생존철학이랄까를 보아낼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때는 또 말썽이 참말로 많은 계절이기도 하다. 이 시기엔 누구나 다 입을 열게 된다. 엄마 모임까지 있는 동네이니 특별히 세상과 담을 쌓고 사는 가정주부는 없어보이고 어린이들을 대동하는 단체도 있어 어린이들의 견해 역시 반영되는 양상이다.    사람이 모이면 자연 말이 많아지기 마련이다. 한해를 총화짓다보면 이런저런 부족점이 있게 되고 그것을 꼭 짚고 넘어가야 직성이 풀려하는 사람은 모임마다 있기 마련이다.    임기란것도 대략 이때에 바뀌게 되니 회장단이나 운영진의 인선을 두고 견해차이도 보이게 된다. 그래서 티격태격하는 것은 가히 자연스럽고 정상적이라 해야겠다.    문제는 호사군들이다. 그렇지 않아도 일년내내 여기저기 쏘다니며 말썽을 만들어 즐겼었는데 이때는 진짜 물 만난 고기처럼 제철 한번 잘 만났노라고 야단을 떤다. 남 잘되는건 죽어도 보아주지 못하겠다는 속셈을 아주 그럴듯하게 멋진 포장까지 해가면서 썰어대는 이런 설치류들은 어느 모임에나 한두사람은 꼭 있는거 같다. 얍삽한 꾀를 부리는데는 조조 량반 저리 가라 하는 이런 인간들때문에 단체들마다 바람 잘 날이 거의 없다.    세치 혀끝이라는 성구처럼 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무기가 바로 일명 말이라는 허울을 쓴 “험담”이란 물건이다. 험담은 형체가 없어도 사람을 쉽게 가볍게 죽일수 있는 날카로움이 있다. 험담은 공기와 같은것으로서 도무지 막아낼 방법이 없다. 험담이라는 주사위는 일단 던지면 그물을 쳐서 잡을수 있는것도 아니고 벽을 쌓아서 저지할수 있는것도 아니다. 그리고 사람의 요해를 찌르는 방식도 각각이다. 바로 덮치는가 싶다가도 어느새 에둘러 공격한다. 험담의 공세는 종래로 예약되여 있지도 고정되여 있지도 않다. 수시로 달려들수 있고 어디서나 조준이 가능하다.    대뇌를 거치지 않고 마음 내키는대로 대수롭지 않게 내뱉는 말 한마디도 사람에게 영원히 아물수 없는 아픈 상처를 주는 경우가 있는데 하물며 자로 재듯이 치밀하게 계산하고 바람처럼 달려드는데야 누가 당해낼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험담을 “업”으로 일삼는 사람들이 공포의 대상이 된다. 정력이 딸리고 배포가 부족한 사람이 운수 사납게 입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그런 사람을 만나게 되였다면 되도록 멀리 피해버리는게 상책이다. 괜히 니전투구로 섞여서 리익될게 하나도 없다. 그런 사람들에게 낚시 미끼처럼 어떤 말미를 던져주는것만큼 아둔한 일은 다시 없다. 상대해주지 않으면 모름지기 저절로 문드러지고 떨어져나가게 되여있다. 자꾸 응수를 해주면 문제는 점점 불어나고 모순도 실타래처럼 엉켜 전혀 풀어지지 않는다.   심은만큼 거둔다는 말이 있다. 심은것만큼 돌아온다고도 한다. 이 말은 결코 신근한 노력이 풍성한 성과를 거두게 된다는 적극적인 의미로만 쓰이는것이 아니다. 콩 심으면 콩이 나고 팥 심으면 팥이 나오게 되는것이 인간세상이라면 좀 더 형상적이 될지도 모르겠다. 어떤 일을 행했으면 그에 상응한 대가를 지불하게 되는것은 천고불변의 진리란 말이다.    험담이란 양면의 칼과 같다. 자칫 남을 찌른것만큼 자기도 다치게 된다. 상대방에게 치명타를 입혔다고 착각하면서 오버액션에 취해있던 사람도 홀로 남은 공간에서는 덕지덕지 딱지가 앉은 마음을 부여잡고 고통속에서 헤매인다. 결국 자기가 입은 상처가 상대보다 가볍지가 않기 때문이다. 험담을 일삼느라고 허구헌날 아무 일도 이루지 못하고 허송세월한 인생 역시 보상받을 방법이 없다.    어쩌면 말은 씨앗과 같은 존재라고 볼수 있다. 악을 심었으면 원망이 발아되고 미움이 줄기쳐서 증오가 맺혀질수밖에 없다. 거기서 선의 과일이 맺어지기를 기다린다면 참말로 어리석은 사람이다.    그래서 옛 성현들은 사람들에게 입을 합부로 놀리지 말라고 가르쳐왔다. "일 하기전에 사람이 먼저 되고, 마음을 다스리기 전에 먼저 입을 다스려라(做事先做人,修身先修口)"고 인격을 접목시켜 잘 다듬어낸 말은 존귀한 귀부인이나 수양있는 젠틀맨 같이 주위에 기쁨과 행복을 가져다준다. 반대로 외곡을 장착한 험담은 세상을 암담하게 만드는 죄악에 다름 아니다.    글로벌시대에도 농경문화의 악습을 답습한다면 꼴불견이다. 이제부터라도 늦지 않으니 좀 스마트하게 인생을 영위하면 아니 좋을가.
118    손바닥으로 문학을 보다 댓글:  조회:432  추천:1  2017-11-19
평론 손바닥으로 문학을 보다 박일 선생의 오백자소설 묶음을 읽고   장학규       올 하반년 들어 흑룡강신문 문학면이 갑자기 볼거리가 더 늘어났다. 박일 선생이 느닷없이 벽소설 묶음을 들고 나타난 것이다.  뭐 별거 아닌 걸 가지고 괜스레 오두방정을 떠냐 그럴 사람들이 많을 거 같다. 하긴 새삼스럽지는 않다. 벽소설 하면 모르는 사람도 없을 거고 또 우리 문단에서는 대접도 잘하지 않는다.    요즘 좀 평론인의 구실을 해보려고 간만에 근간에 출간된 “중국조선족”이란 어마어마한 타이틀을 달고나온 소위 “우수작품선”들을 뒤져보니 례외없이 벽소설은 전혀 취급이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솔직히 놀라지는 않았다. 그럴려니 하고 미리 마음속으로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번은 좀 다른 거 같다. 그저 벽소설이였다면 아마 필자도 대개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자칫 지나쳐버렸을 것이다. 문제는 박일 선생이 “오백자소설”이란 “아이콘”을 들고나온 것이다.    오백자소설?   오백자소설!     벽소설에는 명칭이 엄청 많다. 서양에서는 플래시 픽션이라고 하고 일본에서는 손바닥소설이라고 부른다. 중국에서는 소소설 또는 미형소설이라고 지칭하는 반면 우리는 여직껏 벽소설로 더 익숙한 거 같다. 오백자소설이란 명칭은 그만큼 많이 생경하다.    압축성이 강한 표의문자인 한자에 반해 표음문자인 한글은 서술적으로 길어질수밖에 없는 특성을 가진다. 오백자는 많은 경우 배경을 깔기에도 채 미치기 어려운 분량이다. 거기에 사건의 기승전결과 인물의 심리 갈등을 내포하자면 아무리 언어의 고수라 해도 결코 쉽지 않은 도전이다.    박일 선생은 우리문단에서 널리 알려진 벽소설 대가로 현재까지 200여 편의 작품을 발표했으며 벽소설집만 이미 3권을 출간했다. 다년간 벽소설 창작만 고집해오면서 나름대로 새로운 기법을 시도하며 문단에 벽소설이란 쟝르를 정착시키려고 갖은 노력을 해왔다. 평생 신문업에 종사해오면서 터득한 신문의 특성과 벽소설의 기술을 접목하여 한때 “신문소설”이란 타이틀을 달고 10여 편의 작품을 발표하기도 했었다. 예를 들면 사스가 한창 살판칠 때 “요즘 녀자들”이란 제목으로 사스에 관한 벽소설을 내놓았으며 신문에서 사람들이 물에 빠진 사람을 구경만 하고 구하지 않았다는 기사를 보고 “?”란 신문소설을 발표하기도 하여 작품이 시대와 밀접히 다가섰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번 오백자소설도 우리문단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다. 당연이라는 표현도 생략하는 리유는 박일선생이 우리문단에서 벽소설가로는 유일무이한 존재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5백자도 세계적으로 보면 긴 픽션일지도 모른다. 일례로 여섯 단어로만 이루어진 헤밍웨이의 “아기 신발을 팝니다. 한번도 안 신었어요”가 유명하다. 언어를 통한 재창조가 문학의 속성이라고 할때 이 소설은 많은 상상이 가능하다. 하지만 팩트는 아니다.    그러므로 작자가 독자에게 전달하려는 주제를 완벽하게 소화한것이 이번 오백자소설의 묘미라고 할 수 있다.    우선은 얽음새에서 소설의 프레임을 구성한것이 먼저 돋보인다.    “그때 그 할머니”는 20년이라는 시간과 공간을 오백자내에 담아내고 있어 놀라움을 자아낸다. 딸애의 고중시절 학부형 회의에 참석했다가 주석대에 앉은 할머니의 자식교양담을 듣게 된다. 두 아들을 모두 청화대학을 졸업시키고 박사로 키워 해외로 진출시킨 할머니의 경험담은 “못난 나무가 산을 지킨다고 수수하게 공부를 하는 자식들이 부모곁에서 효도를 한다”였다. 그 소리를 듣고 허탈에 빠진 학부형들이 교장을 찾아 항의하기도 한다. 그런데 20년후 “나”의 딸도 명문대를 나와 독일류학을 떠나 그곳에 정착하면서 외손주가 열살이 되도록 두번밖에 만날수 없는 현실에 그때 그 할머니의 감수를 체험하게 된다.    “어떤 부부”는 가히 최고의 액션이라 부를만 하다. 이 소설은 아라비아수자 1,2,3,4,5까지 동원하여 다섯장으로 단락을 나누어 주식시장에서 거금을 날린 안해가 속이 재가 되여 담배를 입에 붙이게 되는 속사정과 안해의 동창생인 “애금”이와 단둘이 두번이나 술을 마신 남편의 죄의식을 모순의 단초로 만들어 핍진하게 기술했다. 오백자소설로서는 한계에 도전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류형이나 특성의 글은 이외에도 반년간 운남에 출장 갔다가 에이즈에 걸려 돌아와 마침내 심리적인 고통을 이겨내지 못해 속세와 담을 쌓았다는 “출가”, 대학 다닐 때 친구의 밥을 훔쳐 먹기를 일삼던 “진규”가 후에 대성하여 큰 연구단위에서 수석연구원으로 일한다는 “게으른 친구”, 평소 수자도 쓸줄 모르는 네살난 딸애가 인터넷 쇼핑에 빠진 엄마를 지켜보다가 어느날 인터넷으로 우산을 샀다는 아라비안나이트같은 사연을 다룬 “인터넷 쇼핑” 등을 들수 있다. 이 소설들은 하나같이 생활의 편린이나 단면을 카트에 담을수밖에 없겠다는 벽소설에 대한 일반적인 리해 또는 상식을 깨드린 공동성을 가지고 있다.   다음은 묘한 결말로 앞의 서술을 한꺼번에 커버해버린 작품들이다.    “랭동실”은 수산물회사 김과장이 랭동실에 들어갔다가 갇히면서 동사한 사건을 쓰고 있다. 령하 30도에서 꼼꼼한 김과장은 문이 열리지 않아 밖으로 나갈수 없다. 추워서 입술이 떨리고 온몸이 오그라든다. 손가락마저 얼어서 글을 쓸수 없다고 얼어죽는 과정을 상세하게 기록한다. 그런데 사실은 그날 전기 고장으로 랭동실은 작동을 멈추었고 동태상자들이 오히려 녹아버렸고 김과장의 시체도 전혀 얼지 않았다. 이 소설은 인간의 자기 최면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알려주고 있다.    “명약”도 비슷한 루트다. 삼복철에 로인협회에서 잡은 개고기를 방아집 할머니만은 전혀 드시지 못한다. 그런데 며느리가 한번 다녀간 후 방아집 할머니는 갑자기 흥분제를 주사 맞은듯 입맛이 살아나 “국에다 밥을 말아 한사발을 다 잡숫더니 반사발 더 달라”고 한다. 며느리가 틀이를 가져오면서 맛갈스러운 보신탕을 들게 되였다는 시나리오이다.    이와 류사한 소설로 길에서 만난 두 로인이 전혀 동에 닿지 않는 대화를 서로 주고받다가 그중 한 사람이 보청기를 끼지 않았다고 사죄하면서 오해가 풀리는 “두 로인”, 출장 갔던 아들이 어머니를 주려고 사온 목도리를 할머니, 안해, 손녀가 모두 손녀의 선물로 잘못 알면서 서로 다른 감수를 느끼는 “목도리”, 평생 남편에게 10원이상 술을 사준적이 없는 안해가 조카들의 타발에 큰 마음 먹고 100원짜리 술을 사다주지만 언녕 길들여진 남편의 입에는 8원짜리가 더 좋다는 “말자선생” 등이 속한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닌것처럼 상식도 어떤 때는 외곡이 된다는 설명이다.    세번째로는 작가의 의도가 파묻혀 거듭 읽으면서 사색을 하게 만드는 소설들이다.    “돌”은 딸애가 김의사네 진렬대에서 “사랑”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돌을 가만히 가져오는 이야기를 서술하고 있다. 그 돌은 딸애가 김의사의 아들 천식이가 군에 가기전에 선물했던 것이다. 왜서 그 돌을 딸애는 되찾아왔을가? 작가는 설명하지 않았다. 그래서 독자들은 여러가지 해석이 가능해졌다. 젊은 남녀 사이의 관계가 틀어졌을거다. 아니면 처녀가 너무 총각이 그리운 나머지 가슴에 품고 자려고 가져왔다. 또는 소중한 사랑의 상징물이 오가는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는게 싫어서였다. 여러 각도로 읽힐수 있다.    “잘못 온 문자”는 개그맨 친구 흥수한테서 온 위챗 문자로부터 시작된다. “흥수”는 “태수”인 “나”를 “진수”로 잘못 알고 “나”의 흉을 본다. “내”가 돈 오백원을 꾸고 갚지 않았다면서 그런 실속없는 “나”와 사귀는 녀동생을 잘 단속하라고 “진수”에게 주의를 준다. 이 위챗 문자가 정말로 잘못 온것인지 아니면 “흥수”가 묘하게 연출한 극본인지는 작자가 밝히지 않았기에 알바 없다.    이 부류에 속하는 소설로 비행기에서 흑인청년으로부터 성희롱을 당하면서도 잠을 자는지 반항이 없는 서양처녀를 묘사한 “비행기에서”, 한국에서 귀국한 친구를 미국에 있다면서 만나러 오지 않는 사연을 다룬 “전화” 등이 있다.    끝으로 생활 일반사를 그린 소설들로 남의 흠만 잡고 자기 잘못은 모르는 “동료사이”, 다 키워놓았더니 이제는 부모를 외면하고 남자친구 말만 듣는 딸애의 인지상정을 묘사한 “못난 계집애”, 앞으로 의사가 될 딸애더러 하모니카를 계속 불고 춤도 더 배워 환자들에게 기쁨을 가져다주는 천사가 되라는 “의사”, 시골총각들의 지꿋은 장난질을 지혜롭게 막아냈다는 “천식이” 등이 있다.    시험성을 띤 동기치고는 20편에 가까운 분량은 별로 방대해보인다. 내용은 물론 형식도 각각이다. 례사롭지가 않다. 꼭마치 하나의 프레임으로 굳히고싶어하는 눈치이다.   평자가 주목하는 부분도 바로 이 점이다. 평론이니만큼 작품에 대한 조명에 많은 필묵을 들였지만 사실 미안하게도 평자의 관심은 작품의 내용에서 언녕 떠나있었다. 내용에 대한 리해는 적당한 선에서 그치면 그만이다.    솔직히 디지털 시대를 맞으면서 문학의 재편성은 불가피해졌다. 스마트폰의 대중화와 위챗의 부상으로 말미암아 어떤 형식의 작품이 독자들에게 더 빨리 다가가고 접수되냐를 분석해보지 않을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오백자소설이 좋은 표본 역할을 한다고 생각해본다.   생활절주가 빨라지면서 요즘 사람들은 두터운 책을 듬직하게 들여다보기에는 무리까지는 아니더라도 좀 여유가 적은 것은 사실이다. 일을 나가서는 식사도 스낵으로 대체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물론 손님 접대나 쉽지 않게 회식이 차려져 포식에 만취하는 상황도 없지는 않다. 글 읽기도 대체로 비슷하다면 억지는 아닐것이다. 분주히 동서남북을 오가야 하는 현대인에게는 함께 이동하는 스마트폰이 전부일지도 모른다. 거기에 문학을 접목하여 스낵처럼 틈틈의 시간을 타서 소비하고 소화하게 하는것이 요즘 문학의 사명이라면 또다른 궤변이 될가?!   그래서 오백자소설이 하나의 대안이 될거라고 판단해본다. 나중 이불속에 들어가 책을 들거라는 섣부른 믿음보다 일단 먼저 독자들의 핸드 즉 손바닥에 문학을 심어야 할 것이다.    박일선생만이 할수 있는 선구자적 노력에 감사하고 박수를 보낸다. 부록 박일 오백자소설 3편 어떤 부부         1  안해는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2  -왜 피워?  -그저!  안해의 입에서는 대답대신 뽀얀 담배연기만 나왔다.         3  그러다가 안해는 몸져누웠다.  동창생 애금이가 보러 오겠다고 전화오는걸 안해는 “오지 마!”하고 소리를 질렀다.  남편은 속이 꿈틀했다. (정말 귀신같은 녀자네. 내가 애금이와 단 둘이 딱 두번 술을 마셨는데 그걸 어찌 알가?)        4  -담배를 끊어!  -왜요?  -미안해! 잘못했어!   -호- 당신이 미안하다구?  5   안해는 요즘 주식에서 련속 곤두박질 했다. 부부가 아글타글 모은 돈 이십만원을 몽땅 밀어넣고도 동창생 애금이한테서 꾼 십만원마저 허리를 뭉청 날려버렸다. 그래서 속이 타 담배까지 피우고 있는데…     그때 그 할머니    딸애가 고중 다닐 때다.  어느 하루, 나는 학부모회의에 참가하게 되였는데 주석대엔 할머니 한분이 있었다. 교장선생은 십여년전 이 학교를 졸업한 할머니의 두 아들은 모두 청화대학을 나왔고 박사가 되였는데 현재 큰 아들은 미국에, 작은 아들은 캐나다에 있다고 소개를 한후 할머니의 경험담을 경청한다고 했다.  그런데 할머니 말은 엉뚱했다.   -에그, 자식은 공부는 잘 하지 못해야 좋수다!  -제가 제일 후회하는게 뭔지 아세요? 두 자식 공부 너무 시킨겁니다. 제가 부러워 하는 사람은 공부를 잘 못하는 자식을 둔 부모들입니다. 못난 나무 산을 지킨다고 공부를 수수하게 하는 자식들을 보면 거의가 부모곁에있더군요.    -저런 허튼 소릴 들으라고 우리를 불렀나?   그날 나와 여러 학부모들은 교장선생을 찾아가 항의 했다.   20년이 지났다. 그사이 내 딸도 명문대를 나와 독일류학을 갔었고 후에는 그곳에 남아 독일 사람과 결혼을 하였다.  그런데 멀리 있으니 친 딸이 아니라 그저 반가운 “해외동포” 같았다. 이젠 외손주도 열살이나 되는데 그사이 딸네가 한번 놀러왔고 우리 부부가 한번 놀러가니 그만이였다.   언제부턴가 그때 그 할머니가 생각났다...      출가    명수는 갑자기 출가하여 까까머리 중이 되겠다고 했다.   “당신 미쳤어요?”   안해는 하늘 땅이 맞붙는것 같았다. 너무 울어서 목도 쉬였다.  “아빠, 가지 말아요!”   유치원에 다니는 딸애도 엄마따라 울어서 얼굴이 통통 부었다.  회사일로 반년남짓 운남에 가있는 사이도 안해가 외로워 한다며 밤마다 전화 한통씩 걸어오던 살뜰한 남편이 아니던가? 귀여운 딸애가 눈에 밟힌다며 만화책이며 놀이감이며 사흘이 멀다하게 부쳐보내던 자상한 아버지가 아니던가?   “당신 밖에 다른 녀자 생겼어요?”  “아니...”  “그럼 혹시 사람을 죽였거나 무슨 큰 죄를 지었어요?”  “아니...”  “그럼 도대체 왜요?”  “... ...”  명수는 묵묵 부답이였다.  그러던 어느날, 명수는 또박또박 글을 쓴 메모 한장 남겨놓고 끝내 떠나갔다.   -여보, 미안하오! 사랑하는 당신과 딸애 곁에 더러운 에이즈병이 있어서야 되겠소...    
117    문단편견 댓글:  조회:306  추천:0  2017-11-19
잡문 문단편견 장학규   문단의 편견이란 참말로 무서운 것이다. 도무지 어떻게 형용할 방법이 없다. 분명히 능력이 있는 사람도 그 가정출신이 나쁘거나 혹은 그 사람이 좋지 못한 전과가 있거나 또는 든든한 뒤심이 없게 되면 무시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 어떤 한정된 틀이나 테두리를 만들어놓고 그속에서 자작자의하는 것을 보면 나는 막 골머리가 아파서 견딜 수가 없다.   “우리글은 도무지 볼 멋이 없다니까!”   전에 이렇게 흰소리를 치는 문인을 만난 적이 있었다. 세상 사람들이 쓰는 글이 글 같은 것이 없어서 자기의 글밖에는 읽지 않는다는 호기스런 문인이였다.   “나를 따를 사람은 하나도 없어.”   이렇게 편견의 울타리를 세워놓고보니 아닌게 아니라 세계명작은 자기 혼자 써내는 것만 같은 감각인 모양이였다.   “아무렴 그렇겠지. 이거 내가 뭐 레브 똘쓰또이나 되는 것이 아니냐?”   자아감각이 훌륭하니까 이런 망상이 드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그런데(이런 과도구를 쓰고싶지 않지만) 레브 똘쓰또이 역시 “문단편견”의 피해자임을 남의 글을 보지 않는 그런 사람으로서는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다.   한번은 우리의 존경하는 레브 똘쓰또이님께서 늘그막 잔꾀를 부린 적이 있었다. 위대하고도 성스러운 “레브 똘쓰또이”를 들이대니까 글이 너무 수월하게 발표되였었다. 그래서 생소한 이름을 도용할 생각을 하였다. 그래도 발표해줄가? 알수 없는 일이였다.   하여 글 한편을 잘 다듬어서 투고를 했는데 꿩 구워먹은 자리랄가. 물에 던진 돌이랄가. 아무리 기다려도 종시 소식이 없었다. 제딴에는 여느 작품보다 더 잘 다루었던 걸로 믿었던 만큼 곧장 지팡이를 짚고 편집부로 어슬렁어슬렁 찾아갔다.   “아, 그 원고 말씀입니까? 미안합니다만…”   편집은 썩 달가와하지 않는 눈치였다. 이마살을 잔뜩 찌프리고 래방자를 아니꼽게 흘겨보며 도리머리를 저었다.   “이제 글을 써서 될가요? 로인님의 년세면 마땅히 레브 똘쓰또이만큼의 수확이 있어야 하는 겁니다. 전에 더러 습작은 해보셨는가요?”   “네, 더러 해보았습니다만… 이를테면 ‘부활’이라든가 ‘안나 까레니나’라든가 ‘전쟁과 평화’라든가…”   하회는 더 말치 않아도 뻔한 일이다.   편견이 사람을 죽인다는 말도 이래서 생겨난 것이 아닐가. 문학작품은 다른 무엇과 달라서 그 우렬판단은 흔히 편집자의 “정세(定势)에 관계된다. 객관적인 표준이 그만큼 희미하고 몽롱한만큼 주관적인 자세에 많이 치우친다는 말이다.   레브 똘쓰또이의 작품이 아니더라도 훌륭하다면 응당한 대접을 받아야 할 것이지만 (초학자가 쓰면 어느만큼 쓸가?) 이렇게 마음을 가지고보면 전혀 글같이 보이지 않을 때가 드물지 않다. “부활”도 그렇고 “안나 까레니나”도 그렇고 “전쟁과 평화”도 마찬가지이다. 흠집을 찾자면 많고도 많다. 일개인 사유의 산물인만큼 추호의 빈틈도 없다고 여기는 그것 자체가 편견이다. 그렇다고 그것들이 명작으로 되기에 손색이 있다고 여기는 것 역시 편견이다.   이런 례는 적지 않다. 크랜데가 쓴 ‘아프리카사람”은 1967년에 출판되였으나 “창해속의 작은 구슬”로 되였다. 10년이 지나서 약삭바른 알렉스 헤이리가 깜찍하게 “뿌리”라고 제목을 고쳐서 다시 발표하였는데 우습게도 “플리처”문학상을 받았을뿐만 아니라 전 미국의 열가지 거작중의 으뜸으로 되는 책이 되였다.   전에 필자는 소설 명색의 글을 써서 모 잡지에 투고하였다가 당연한 퇴고를 받았다. “당연”이라는 표현이 약간 우습강스럽긴 하지만 그 평가가 그랬다. “장면이 적고 서술이 많다. 미안하지만…”   그래서 봉투만 바꾸어서 그대로 다른 잡지에 보냈는데 뜻밖에도 “장면이 많고 서술이 적다. 미안하지만…”이였다.   사람이 복통이 아니 터진다면 궤변이다. 초학자를 보는 우리의 시각이 그저 이 정도니깐.   후에 “흑룡강신문”에서 나의 그 소설을 발표해주었다. 1년이든지 반년이든지 세월이 흐른 뒤 선후로 상기의 두 잡지 편집을 만나는 영광이 차례졌었는데 분명히 내 작품을 취급했던 당사자임에도 불구하고 한사코 그 작품을 올리춰주는것이였다.   나는 그 누구를 욕하자는 것이 아니다. 어느 글에선가 성명했던것처럼 내 필봉의 초점은 언제나 개인에게 돌리지 않고 현상에 돌린다는 것이다. 세계도 그렇고 중국도 그렇고 중국조선족도 역시 마찬가지로 문단편견이란 근치가 될 수 없다는 얘기이다.   좀 다르다면 우리 문단이 약간 지나칠 지경으로 과열되고 팽창되였을뿐이라는 것이다.   재래로 우리 잡지들은 기성작가들의 놀음판이였다. “흑룡강신문”처럼 초학자들을 포섭할 능력과 흉금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고도 로신이나 모순 같은 작가가 나오지 않는다고 아우성질이다. 문학토양이 경직되고 퇴화했는데 그런 기대를 건다는 자체부터 잘못되여도 한참이나 잘못된 것이 아닐가.   그리고 곰곰히 따져보면 해결책이 없는 것 같기도 하다. 서로 면목이 가려울 지경이니까. 일부 편집들이 서로 내 글을 내주지 않으면 네 글도 아니 내주는 판국이니깐. 그래서 죽어나는 것이 초학자들뿐이다. 보복당할 념려도 없고 글을 보내주지 않는다고 잡지의 품위가 내려가는 것도 아니고 여하튼 세상 좋게 만만한 개살구들이다. 지면을 약간만 드텨주어도 만족하고 상이 차례진다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고 작가협회 같은데 들어간다는 것은 어림도 없는 일이다.   “재야문인”들은 말 그대로 불쌍한 족속들이다. 편집들은 글 둬편만 긁적거리면 곧바로 시인, 소설가, 평론가이지만 야문인(野文人)들이야 어찌 그것을 바랄 수 있으랴. 글을 내주는 것만으로도 하느님의 은혜 같은데 분에 넘친 욕심을랑 아예 걷어치워야지.   나의 한 문우도 이렇게 끝장나버렸다. 삼십미만에 2백여 수의 시를 써낸 천재적인 “화랑”이였지만 작가협회 회원은 물론 시인 소리 한번 제대로 듣지 못하고 곧바로 타락의 길로 들어섰던 것이다. 가령 그에게 응당한 대접이 차례졌더라면 오늘의 참상이 눈앞에 없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보다 더 한심한 일은 문학사를 정리하고 기록해야 할 소위 전문가들마저 학자의 량심과 도덕을 내팽개치고 이런 문단의 못난 폐단에 편승하여 자신의 호불호에 따라, 친소 관계에 따라 마구 락서하는 일이다. 대강 한자리 하거나 글을 내줄 사람이거나 얼굴이 가려운 사람이면 그가 글 몇개 썼든, 어떤 성과를 냈든지를 막론하고 무작정 유명작가 타이틀을 걸어주고 대표주자란 뱃지를 달아준다.     모름지기 사설이 길어진듯싶다. 소정의 3천자가 넘은 것 같다. 아무렴 시장경제시기에 맞다들었으니 문단편견도 따라서 없어지겠지. 누구를, 무엇을 망치자고 그럴수가 있을라구.
116    글을 쓸수 있어 인생은 살맛이 난다 댓글:  조회:368  추천:1  2017-10-27
작가의 말   글을 쓸수 있어 인생은 살맛이 난다 네번째 단행본 "연장된 아빠"에 부쳐     글 많이 썼네요 이런 칭찬 아닌 칭찬을 나는 많이 듣는다. 그런데 세상에 버젓하게 내놓을만한 작품이 없는것도 사실이다.    2003년에 첫 수필집을 출간하고 꼬박 14년만에 이 수필집을 묶었다. 글인생 30여년치고는 참 미안할 일이다. 다작이라고 말하기엔 더욱 많이 부끄러운 현실이다.    솔직히 나는 글을 량으로 쓰는 타입이 못된다. 여느 친구들은 필만 들면 술술 글이 잘도 나오지만 나는 전혀 그렇지 못하다. 가슴에 딱 맞혀올때가 아니면 거의 필을 대지 못한다.    물론 나는 굳이 글쓰기 위해서 글을 쓰는건 장난에 다름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아무리 수사가 화려하고 론리가 정연하고 문장이 매끈할지라도 결국 가슴을 시원하게 후벼주는 짜릿한 맛이 없으면 그저 소일거리에 불과하다고 믿는 사람이다. 이런 리유로 나는 락서하듯 글을 마구 뽑아내는 행위에 별로 동의하지 않는다.    최근 10년을 거의 글 한편 쓰지 못한것에 대한 변명이나 방패는 절대 아니다. 나 스스로도 왜 쓰지 못했을가고 자주 반문한다. 물론 핑계는 더러 있었을거 같다. 먹고 살기니즘에 빠져서 시간이 없었다 또는 인생에 절망했다 뭐 그런 식의 리유를 댈만도 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글은 그런 경우에 나오는게 참글이 아닐가싶다. 글쟁이는 고통을 이겨내는 과정이 필요하고 피가 뜨겁게 끓어올라야 할것이다. 인간의 아픔을 아파하고 세상의 부조리와 다툴수 있어야 할것이다. 서늘한 구석에 올방자 틀고 앉아 지호자야를 주절대며 도고한체 청고한체 하는건 못난 문인의 짓거리임에 분명하다.    결국 나도 참문인은 아니였던거 같다. 남을 손가락질하기에 앞서 우선 자신부터 돌아봐야 할 시점이 분명하다. 뛰여난 명작은 아니더라도 하다못해 내 가슴에 잉태되고 응어리지고 그래서 옆사람들에게 일깨움이 되고 참고가 되는 그런 글이라도 더러 썼어야 했다는 자책감은 항상 따라다니기는 했다.    그래도 다행스러운것은 문학은 평생의 직업이란것이다. 퇴직시기란것이 따로 없이 눈이 꺼벅 닫혀지는 순간까지 할수 있는 일이 문학이다.    내 나이 이제 50대 초반이다. 아직 글 쓸 시간이 꽤나 남아있는거 같다. 그래서 여직 못했던 부분을 보완하고 완성할수 있다는 생각이다.    글을 쓸수 있어 고맙고 글이 있어 인생은 그나마 살맛이 난다.     2017년 2월 청도 자택에서 
115    리포터는 덤으로 받은 행운 댓글:  조회:296  추천:0  2017-10-27
  작가의 말   리포터는 덤으로 받은 행운       가끔 내가 어떻게 글을 쓰게 되였을가 저절로도 궁금해진다. 마을에 우리말 학교가 없어서 앞동네로 유학 다니다가 소학교를 졸업할 무렵에 영문 모르게 되쫓겨와 초중까지 동네한족학교를 쭉 다녔었다. 가정이 가난해 그 초중도 끝내 마치지 못하고 그만 사회청년이 되고말았다. 내 가방끈은 대개 여기까지이다.    후에 글이란 것에 반하게 되면서 어찌어찌하다가 연변대학 공부를 하게 된 것은 순전히 운수가 좋아서였다. 넘어진게 용케 떡함지에 엎어지거나 지나가는 미인의 품에 덜컥 안겨진 형국이라 형용해도 크게 과하지는 않다. 로또 당첨같은 기적이였다. 정말이지 내딴것이 어떻게.   그만큼 내가 글을 쓰게 되였다는게 꿈만 같고 신기하다. 그리고 글을 쓸 수 있다는게 얼마나 다행이고 행복한지 모르겠다. 따분한 농촌생활이, 지긋지긋한 가난이 나를 글쟁이로 변신시켜준 것이 분명하다.   어쩌면 신문기사는 내 글의 기반이고 모태가 틀림 없다. 시골의 통신원으로부터 시작해 료녕신문사,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흑룡강신문사까지 두루 전전하면서 36년동안 내가 쓴 리포트는 어림잡아 1천편은 넘어된다. 문학작품의 배가 넘는 수치이다. 작가이기전에 먼저 기자의 타이틀을 달아야 맞겠지만 그러나 나는 이 세상에 절대적인 공평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숙명으로 믿는 사람이다.   그렇지만 나는 천만다행스럽게도 또한 사람을 잘 만난 행운을 지니고 있다. 골목마다 구비마다 도움의 손길을 보내준 감사한 분들이 있었다. 그들이 아니였다면 아마 나는 오늘날까지 뻗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우선 흑룡강신문사의 리장수 선생을 꼽아야겠다. 나에게 나아갈 길을 제시해준 스승이다. 그다음은 료녕조선문보의 김광명 선생님이다. 내가 전문인의 길을 걷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신 멘토같은 분이다. 그리고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의 김두필 선생이다. 더 넓은 길로 나아가게 곬을 만들어준 고마운 은인이다. 끝으로 청도에서 만난 박백림, 박영만 두분 선생이다. 이분들은 나에게 운신의 플랫폼을 만들어준 지인들이다.    더불어 이날이때까지 경제적인 후원을 해주면서도 이름을 밝히지 못하게 하는 모 지성인에게 고마운 마음을 다시 한번 전한다.    아마 문학작품집은 앞으로도 계속 나오겠지만 리포트는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아닐가 한다.                                                                                     청도에서                                      2017년 5월 1일  
114    타파와 재구성으로부터 보는 민족언론의 변신 댓글:  조회:239  추천:1  2017-10-24
타파와 재구성으로부터 보는 민족언론의 변신 흑룡강신문사 산동 데뷔 20주년에 부쳐         프레임(框架)은 인간사회의 질서와 발전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지만 또한 영구불변한 것은 아니다. 프레임은 수시로 타파되고 재구성되면서 시대의 변혁을 이끌어왔다.    흑룡강신문사도 아마 이런 변혁의 과정을 거쳐온듯 싶다. 1996년 말 남일주, 박영만 두명 기자를 연해지역으로 파견할 때부터 이미 지역이란 계선을 타파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듬해 4월 흑룡강성위 선전부와 산동성위 선전부의 비준을 거쳐 산동지사를 설립한 것은 프레임은 연장도 할 수 있다는 증명이였다. 누구도 가보지 못한 길을 흑룡강신문이 시도하고 실험한 것이다.    그러나 타파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흑룡강신문은 산동에 진출한 후 고향에서의 전통을 그대로 물려받아 준정부 기능을 발휘하면서 청도조선족기업협회 등 많은 단체와 모임의 설립에 참여하여 민족사회 형성을 주도한 외 고향에서는 없었던 외자유치 역할도 분담하게 되면서 언론매체의 또다른 가능성을 실험해왔다.    1998년 8월 처음으로 산동성 청주시와 재청도한국기업인과의 친목모임을 주선한 후 해마다 1~2차례 덕주시, 유방시, 고밀시, 린이시, 강소성 련운항시, 절강성 온주상회 등 지역의 외자유치간담회 및 연변, 해림, 녕안, 화천, 연길 등 고향 정부의 청도투자설명회를 주최, 주관, 협력하는 활약상을 보여주어 좋은 평판을 받아왔다.    물론 우선 언론 매체로서의 책임을 다하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흑룡강신문은 당보로서 당과 정부의 정책, 방침을 제때에 전달하고 현지의 법률, 법규를 즉시적으로 소개했으며 민족사회의 동태를 가장 빠른 시간내에 보도했다. 20년간 산동지사는 발로 뛰는 모습을 보이면서 해마다 350여 편에 달하는 취재고를 발표하였다. 5명 인원임을 감안하면 평균 매년 매인당 70편씩 기사를 쓴 셈이 된다.  한편 그간 특별기획과 시리즈보도를 30여 번 조직하여 좋은 사회적 반향을 얻었다. 타이틀도 “연해진출 조선족”, “산동에서 창업하기”, “불황을 딛고 성장하는 우리기업”, “산동에 뿌리내린 한국기업”, “홀로서기에 도전한 사람들”, “맛따라 향기따라”, “우리 사는 이야기”, “산동에 뿌리 내리다” 등 다양하여 거의 모든 분야와 인간그룹을 섭렵함으로써 산동에 온 조선족은 누구나 한번쯤은 신문에 이름을 올렸을 것이란 소리를 들을 지경이였다.    이 점때문에 흑룡강신문은 새로운 탈피를 시도했다는 자부심도 가진다. 과학기술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전통매체는 점점 생존공간이 줄어들고 있다. 뉴미디어시대에 종이매체의 틈새는 어디에 있을가를 고민하던 중 자기도 모르게 “커뮤니티 신문(社区报)”화로 나간 것이다. 조선족이 있는 곳이면 흑룡강신문이 있다는 슬로건을 내세우고 구석구석을 누비면서 뉴스거리를 찾았다. 산동은 물론 멀리 해남성, 광동성, 절강성, 상해시까지 발길이 닿았고 한국, 일본에서 벌어지는 행사도 지면에 올렸으며, 기업인과 대형행사는 물론 작게는 생일잔치, 가족모임 같은 것도 놓치지 않으면서 독자들의 관심분야에 눈길을 돌려왔다. 모든 구성원이 직접 주인공이 되여 참여했다는 것은 흑룡강신문만의 자랑거리인 동시에 치렬한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은 노하우라고 평가해도 절대 과분하지 않다. 덕분에 무료배포로부터 주문 발행으로 과도할 수 있는 계기가 되였으며 독자들의 관심도도 점점 높아지고 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뉴미디어의 제한성으로 말미암아 종이매체의 재부활이 이루어지고 그 형식이 자칫 커뮤니티화일 것이라고 한다. 이런 의미에서 흑룡강신문은 나름대로 시대의 앞장에서 달리고 있다는 사실에 안도한다.    물론 흑룡강신문은 언제나 사회의 흐름을 거역하지 않고 순응해왔다. 그 일례로 위쳇 계정의 개설을 들 수 있다. 산동지사는 위쳇 출현과 더불어 2014년에 계정을 개설했으며, 2016년에는 위쳇채팅방 “신문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을 가동하기도 했다. 2016년 1월에 “백혈병에 걸린 4살짜리 김미나 어린이에 대한 구조활동 개시”란 글을 위쳇 기사로 띄운 후 거퍼 일주일도 안되는 사이에 치료 비용 20만원과 생계에 필요한 10여 만 위안을 모금하는 장거를 이루면서 위쳇의 위력을 확인했으며, 같은 해 9월에는 역시 백혈병에 걸린 유승리 학생 구조홍보활동을 위쳇으로 적극 벌려 총 50여만원을 모급하는 기적을 창조하였다. 현재 흑룡강신문사 산동지사의 위쳇 계정을 팔로워한 독자는 2000여명에 달하며 기사 평균 조회률도 1천회를 넘기는 등 호황기를 맞으면서 산동지사는 광고수익도 올리면서 20년만에 처음으로 수지 평형을 이루고 있다.    흑룡강신문의 변신은 이로써 끝난 것이 아니다. 산동지역이 민족문화의 불모지인 점을 감안하여 진출 초기부터 문학지의 배역도 맡으면서 특별히 “푸른섬”이란 문학면을 개설해 정기적으로 조선족작가들의 작품을 발표했고 해마다 정양학교, 서원장학교, 재청도조선족대학생 작문특집을 묶기도 했으며 2000년 1월에 설립한 연변작가협회 산동창작위원회 설립식도 산동지사에서 진행되는 등 민족문학의 온실로 자리매김해왔다.    지나온 20년을 돌아보면 생존을 위해 치렬하게 경쟁해온 20년인 동시에 더 높이 부상하기 위해 부단히 자신을 타파하면서 변신을 거듭해온 20년이기도 하다. 따라서 앞으로 20년은 성공을 구가하는 20년이 될 것이 틀림없다.    /장학규   
113    뉴스가 있는 곳엔 흑룡강신문이 있다 댓글:  조회:221  추천:1  2017-10-24
  뉴스가 있는 곳엔 흑룡강신문이 있다 흑룡강신문사 산둥지사 설립 20주년 경축행사 칭다오서         흑룡강신문사 산둥지사 설립 20주년 경축행사가 21일 칭다오시 청양구에 위치한 70스포츠센터에서 성대히 진행되었다.    흑룡강신문사는 1997년 4월에 흑룡강성과 산둥성 관련 부처의 동의를 거쳐 정식으로 산둥지사를 설립했다.    당시 개혁개방의 진일보 확대와 중한 외교관계의 건립에 따른 한국기업의 대거 중국진출에 힘입어 많은 조선족들이 전통 거주지를 떠나 연해지역으로 이주해 삶의 터전을 잡았다. 거기에 한국을 위주로 해외진출붐이 가세하면서 고향은 공동현상이 엄중해진 반면에 연해지역은 문화고갈로 심한 갈증을 느끼고 있었다. 특히 민족언론지의 부재로 말미암아 민족사회의 정보가 두절되고 동포간의 교류가 활성화될수 없었다.    산둥지사는 설립과 더불어 칭다오, 옌타이, 웨이하이시를 중심으로 산둥성 전역을 아우르면서 민족엘리트를 찾고 민족의 뉴스거리를 발굴하는데 주력했다. 취재와 발행으로 한달에 신 네컬레를 버렸다는 박영만 현임 지사장의 일화가 유명하다.    특히 1997년 11월부터 지역 전문지인 ‘연해뉴스’를 발간하기 시작하면서 산둥지사는 현지 민족사회의 구축과 발전에 일익을 담당해왔으며 ‘연해’라는 타이틀에 어울리게 산둥을 떠나 멀리 상하이, 광둥, 저장 등 동부연해지역과 해외 조선족 뉴스에도 주목했다. 뉴스가 있는 곳엔 흑룡강신문사 기자가 있었고 민족이벤트가 있는 곳엔 흑룡강신문이 참여했다. 어떤 민족행사에는 신문사 기자 신분이 아닌 심부름군 또는 잔일을 도맡아하는 역할도 놀았다. 덕분에 흑룡강신문은 산둥을 비롯한 연해 민족사회 형성의 견증인과 기록인이 되었고 거의 모든 지역 민족단체의 형성에 참여한 주체가 되기도 했다.   산둥지사 직원들은 출퇴근 시간이 따로 없이 밤을 지새우기가 일쑤였으며 휴일을 반납하고 무보수 특근을 밥먹듯 해왔다. 6명 인원이 취재, 편집, 교정, 조판, 광고 업무를 겸하면서 1년에 3~4백 편의 기사를 써냈다는 것은 가히 기적이라 일컬을만 한 일이다.    이날 경축행사에서 박영만 지사장은 인사말을 통해 “산둥지사 기자들은 마치 훨훨 타오르는 횃불과도 같이 우리 민족이 수요하는 곳이라면 발벗고 달려갔으며 자신의 신근한 땀방울로 조화로운 한민족사회의 융합에 중대한 기여를 하였다”면서 “민족언론이라는 숭고한 사명감과 민족사업에 대한 끓어넘치는 열정이 없으면 20년 동안 견지해온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고 자평했다.    내빈 대표로 칭다오조선족기업가협회 전동근 회장이 축사를 올렸고 독자 대표로 해안선잡지사 김재룡 총편이 발연했으며 일본 상장회사 이지반화장품그룹 중국총대료인 이광춘 사장이 축하인사말을 했다.    대회에서는 20년간 지사의 발전에 큰 경제적 지원을 준 김창호, 박성진, 이광춘, 김옥, 정도진 등 5명에게 감사패를 전달했으며 김영숙, 김철웅, 한검파, 김광춘, 박영권, 김준영, 권창순, 강상일, 최광식, 이계화, 한춘화, 한정호 등 12명 광고주에 감사장을 수여했다. 아울러 지사에 도움를 주고 지사와 호흡을 맞추어 민족의 화합과 발전에 기여한 기업협회, 여성협회, 노인협회, 대원학교, 70스포츠센터, 연변상회, 작가협회, 월드옥타, 향우회를 비롯한 칭다오, 옌타이, 웨이하이 지역 각 단체장들에 공로장을 전달했다. 동시에 최재문, 장순진, 림동호를 비롯한 12명 통신원에 격려장을 수상하고 신문사 직원들에 공로상 및 우수직원상을 표창했다.    이날 행사에는 주칭다오 대한민국총영사관 정윤식 영사를 비롯하여 산둥성 각 지역 조선족단체 대표 및 베이징, 상하이, 하얼빈 등 곳에서 온 내빈 400여 명이 참가하여 성황을 이루었다.    한편 칭다오조선족교사친목회, 칭다오아리랑민속예술단의 축하공연이 있었으며 황지희, 황금희, 남혜금씨 등 가수들이 무대에 올라 열창했다. 공연 사이사이에 추첨행사도 진행. 추점 1등상에는 아시아나항공 옌타이지점에서 옌타이-일본 왕복항공권 1매를 내놓아 축제분위기를 더해주었다.    경축행사에는 산둥에 있는 대부분 한겨레 단체 대표와 유수의 지명 인사들이 참가 및 협찬했으며 멀리 베이징민족출판사, 저장성 사오싱기업협회, 중국砖瓦工业协会 부회장, 상하이한교상무유한회사 대표외 한국 광신대학교를 비롯한 해외에서도 참석 또는 축하를 보내왔다.    /장학규 기자  
112    웅녀를 슬퍼한다 댓글:  조회:289  추천:1  2017-10-03
웅녀를 슬퍼한다     나는 술을 많이 즐기는 편이어서 일반적으로 술을 저장해두는 법이 거의 없다. 일단 어찌어찌하다가 그놈이 생기면 그 자리에서 친구 하나쯤 더부살이로 불러들여 깡치를 내고야 마는 성질이니깐,그래서 우리 집에 손님이 오면 종래로 찬장에서 술병을 끄집어 내며 "이 술 좀 맛보소." 따위로 으시대본 적이 없고 언제나 손님의 주머니를 넘보는 듯한 "술 사오라."는 재촉이 불쌍한 아내를 괴롭히기 일쑤이다.      그런데 일전 이사를 하다가 고방 한구석에서 난데 없는 술 한병을 발견하였다.그것도 다섯근 들이 대짜배기 병이었다. 병에 인삼, 오미자 명색들이 잔뜩 불궈져 있는  것을 보면 의식적으로 그렇게 해놓은 것이 틀림 없는데 언제 그랬는지는 아무리 해도 생각나지 않았다.아무튼 술이 생겨서 좋았다.땅콩을 공짜로 주어 먹는 심정이었다.꿀 본 벙어리처럼 헤벌써해진 나를 발견하고 요즘 들어 잔소리가 갑자기 늘어난 아내가 누룽지 긁는 소리로 짹짹 시까스르는 것이었다.     "왜 술 보지 못했어요?벌써 1년도 넘은 술인데..."   "그랬던가?"   "당신이 직접 불궜지 않구 뭐예요.뭐,곰 사양장 하는 기업가가 웅담분을 주더라며...하긴 잘해요.우리는 곰의 자손이라고 입버릇처럼 중얼대더니..."     아내의 빈정이 갑문이 되었던지 그날 나는 술 한모금도 넘길 수가 없었다. 아프리카의 식인종이면 또 모를가. 괜히 할머니의 담낭을 먹는 듯한 꺼름직한 환각이 얼른거려서 도무지 마음을 가라 앉힐 수가 없었다.      문학을 즐기고 그 중에서도 평론을 편애하는 까닭에 나는 남달리 문학동태에 주의를 돌린다. 아니,민감하다는 편이 나을 것이다.그래서 우리 문단에 남영전이라는 토템시인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또 시를 잘 모르면서도 그 분의 토템시만은 꽤 읽어보았다. 물론 여러 토템가운데서도 곰이 차지하는 비중이 컸었다.단군신화에서도 살펴볼 수 있듯이 곰은 틀림없는 우리의 토템이었던 것이다.       하다면 곰에 대한 우리 민족의 숭배는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단순히 문자기록만 본다면 물론 단군할아버지때부터였을 것이다. 곰이 바로 그 어머니였으니깐.       재미있는 얘기가 되겠지만 조선족 노인들과 얘기를 나눠보면 젊었을 때 모두가 한두번쯤은 범을 때려 잡은 듯한 인상을 받게 되는데 이 점은 어디까지나 그럴듯한 이유가 있다고 본다. 범은 고작 백날을 참지 못해서 우리의 선조가 되지 못했으니깐 맞아죽어도 쌍통이지.동정해줄 사람이 없을 것은 당연한 일이다.그렇게도 인내성이 없고 우쭐거리니 생존력도 미약할 것이 아닌가?      하다면 우리의 선조가 되어진 곰은 대접 받고 행복했을까? 그런것도 아닌 것 같다. 곰쓸개가 건강에 이롭다고 말 그대로 닥치는대로 잡는 것이 다름아닌 바로 우리 민족이다. 범을 잡는 똑같은 방식으로 곰을 대처하는 우리 민족이다. 웅담은 간염에 좋고 무엇은 정력에 좋고 아무튼 우리 눈에는 곰의 모든 것이 보배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돈벌이를 위해 곰사양에 궐기한 우리 민족이 엄청나게 많다.뿐만 아니라 신문,방송,잡지 할 것 없이 웅담분 광고가 비지 않는다.   지난 세기 90년대 초에 한국의 골목마다에 조선족 곰열장사군이 나타나 일대 풍경을 장식했다고 한다. 마치도 중국의 곰은 조선족이 몽땅 잡았다는 인상을 주었다고 한다. 하긴 사는 사람이 있으니 파는 사람도 생기는 것이 아닌가?! 그러니까 누구누구라 할 것 없이 옹근 민족이 일떠나 곰 토벌을 하는 셈이 아니고 뭔가?!      토템이란 하나의 문화이다.   그것의 산생,발전,발달의 과정에 원인이 있고 계기가 있고 지속될 수 있는 도리가 있기 마련이다. 토템에 대한 숭배도 각도를 바꾸어보면 민족성의 구심력과 지구력을 대변한다.그럴진대 토템은 우리의 둘레속에 있고 마음속에 있고 머리위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곰을 잡다 못해  "곰처럼 미련하다."는 비유구까지 애써 만들어내어 자기를 신고스레 세상 보게 해준 선조를 모욕하는 민족은 그래 대체 무슨 민족이란 말인가?     지금도 만족들은 개고기를 먹지 않는다. 그들에게 있어서 개는 신적인 존재이고 세상의 모든 사물을 초월한 마음속의 기둥이기 때문이다. 어렸을 적 만족마을에서 자랐던 나는 만족들이 개가 늙어 죽을 때까지 정성들여 키우는 것을 자주 목격하였다.죽은 후에는 또 깨끗한 땅을 골라 묻는 것이 법처럼 되어있는 것을 보고 혀를 내두른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이처럼 남들과 비교해보면 우리에겐 모자라는 부분이 너무나도 많다. 뿌리가 없고 철학이 없을 뿐만 아니라 까놓고 말해 토템마저도 없는 것이다. '단군신화"는 어떤 사람들이 그 어떤 목적을 가지고 억지로 꾸며낸 것이 아닌가고 의심할 지경이다.      하기에 우리는 웅녀를 슬퍼할 이유밖에 남지 않았다. 그녀의 석달 열흘간의 고행을 동정하고 자식을 갖고 싶었던 그녀의 애끓던 마음을 가엾이 여기고 더구나 그녀의 원 족속들이 오늘날 당하는 고통에 연민을 표할 수밖에 없다.    하다면 구경 누가 웅녀의 응어리진 마음에 만족할만한 답안을 적어줄 수 있을가???
111    황하의 물은 막을 수 없다 댓글:  조회:167  추천:0  2017-10-03
황하의 물은 막을 수 없다     요즘 날씨가 좀 서늘해진다. 저 앞동네 강바닥이 거의 말라갈 무렵 비방울이 드문 날리기 시작한 것이다. 비 오지 않으면 강에 물이 없는 요즘 세상이 하도 수상하다.   그래도 다른 고장에서는 꽤나 많은 비가 내린 모양이다. 특히 황하 류역이 물난리가 더러 난듯 싶다. 같은 하늘아래서도 색다른 세상이 펼쳐치는 것을 보면 요상하기는 하다.   하기사 황하의 범람은 하루이틀 사이의 일도 아니니까 대개 리해할만 하다.   저 머얼리 순임금시절부터 황하는 굴레벗은 망아지처럼 날뛰였다고 한다. 순임금이 동이출신이라고 적혀있다고 해서 우리민족이라고 아득바득 뻐기는 사람도 있기는 하지만 어쨌던 총명이 과인했던 분인 건 틀림없었는 모양이다. 요임금의 선양을 받아 황위를 이어받은 순임금은 황하를 다스리는 사람한테 자리를 물려주기로 했었다.    그래서 나선 사람이 곤, 곤은 갈래 없이 마구 흐르는 황하를 막아 한곳으로 흐르게 함으로써 물난리를 막으려 하였으나 결국 실패하고 목이 날아났다.   그 아들 우가 릴레이를 이어받고 황하를 둘러보니 기가 찰 일이였다. 얼기 설기 뻗어나간 강줄기를 어찌 막을 수 있을손가. 곤이 우둔한 짓거리를 했다는 것을 확인하고 강바닥을 준설하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대성공이였다. 또 결국 그때문에 순의 양도를 받아 보위에 오르게 된다.   물론 이 친구부터 자기 자식에게 임금자리를 물려주는 세습제가 시작되여 오늘날 맑은 하늘아래에서도 세습을 일삼는 국가들이 남아있기는 하다.   여하튼 세상 대세는 소통해야지 막을 수는 없다는 도리를 수천년전 우임금이 우리에게 가르쳤다.   그래도 인간은 날벌레 같은 존재임에 틀림없다. 한번 껌벅 죽어봤으면 교훈을 살려서 다시 오유를 범하지 말아야 하는데 꼭 자기만 잘난 것처럼, 남은 모르는 것처럼 눈 감고 아웅하는 식으로 독단과 독선과 독행을 일삼는 무리들이 아직 있으니 백성을 못난 이로 여기고 마음대로 우롱하는 이런 행실들은 마침내는 그게 독초가 아니 될 수 없을 것이다.   백성의 눈과 귀는 막을 수 없다. 마치도 황하의 흐름을 가로막을 수 없는 것처럼! 감추고 덮고 숨기고 치운다고 있는 것들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란 것을 알아야 한다. 백성을 시녀처럼 여기는 권력은 언제가는 터져나가는 황하의 보에 밀려 력사 뒤안골로 처박혀질 거란 걸 알아야 한다. 
110    럭키 서울 댓글:  조회:176  추천:1  2017-09-15
  리포트 럭키 서울 장학규       2010년 9월 3일 한국시간 12시 10분.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한 시간이다. 이제부터 서울관광마켓팅(주)이 주도하는 “2010한국방문의 해 – 서울과 함께” 프로젝트에 따라 3박 4일간의 서울 취재 일정에 들어가게 된다. 나에게 서울은 완전히 생소한 도시는 아니다. 7년전인 2003년 8월에 4박 5일 일정으로 한국 관광을 와서 잠간 서울을 말 타고 꽃 구경하듯 스쳐지난 적이 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한결같은 느낌은 세관인원들의 너무 딱딱하고 사무적인 인상이다. 한 나라의 관문이 지나치게 경직된것이 아니냐는 위구심은 여전했다. 하긴 매일같이 수천수만의 이국인을 대해야 하는 그들에게 아니 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웃게 하는건 과분한 요구일수도 있고 또한 격에도 어울리지 않을지 모른다. 아무튼 1시간 30분남짓한 동안 려객기에서 대한한공 스튜디어스들의 밝은 모습과 친철한 서비스를 목격하면서 무척이나 들떴던 가슴이 차분히 가라앉는 순간이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무엇보다 기분을 상쾌하게 만든건 화청한 가을날씨였다. 며칠전부터 내려진 태풍주의보때문에 은근히 걱정했었는데 괜한 노파심이였다. 높이 들린 하늘에 흰 구름이 유유히 떠돌고 하느작 불어스치는 바람은 퍼그나 시원했다. 역시 서울은 친환경적인 도시라는 감각이 들었다. 그것보다 더 반전적인 기분 전환은 공항 교통안내카운터에서였다. 이번 걸음은 짧은 시간내에 많은 코스를 소화해야 했기에 오후 4시의 서울관광마켓팅(주)과의 미팅전에 꼭 들러야 하는 코스가 있었다. 경복궁이였다. 영욕의 5백년 조선을 주도했던 그 현장은 한겨레 피를 이어받은 모든 이들이 꼭 가봐야 하는 곳이기도 했다.  공항버스터미널에 가서 리무진 로선을 확인해도 될걸 왜 굳이 교통안내카운터에 찾아갔던지 모르나 내가 화들짝 놀라 당황할 정도로 따뜻한 배려가 돌아왔다. 내가 중국동포임을 확인한 예쁘장한 안내아가씨는 메모지에 몇선 타고 어디서 내려 어떻게 무엇을 갈아타고를 깨알같이 박아써주고는 그것도 미심쩍었는지 한사코 괜찮다는 나를 공항밖으로 안내하여 승차역까지 가리켜주었다. 코마루가 쩡해나는 순간이였다. 례절 바른 내 민족의 나라가 다르긴 다르구나 하는 진한 감동을 받았다.  이렇게 한국에서의 첫 시작은 희비가 엇갈렸다. 리무진을 타고 경복궁으로 가는 시간은 내내 태조와 정도전, 그리고 무학대사간에 엉키고 설킨 고사가 머리속에 떠올랐다. 정도전의 로련함과 그 라이벌이였던 무학대사의 능청함이 착시적으로 눈앞에 펼쳐졌다. 사진이나 뉴스에서 가끔 보아왔던 경복궁은 생각처럼 그렇게 작은것도 아니였다. 대수 반시간이면 넉넉할거라고 어림잡았던 자신의 유치함을 비웃으면서 나는 자칫 미팅 약속을 어길가봐 분주히 뛰여다니지 않을수 없었다. 궁궐의 크기는 아무래도 중국 북경의 고궁에 비기기에는 너무 무리인듯 싶었다. 그러나 그 기세와 당당함은 절대 그에 손색이 가지 않았다. 특히 단청이 기막히게 화려하고 사치하고 정교했다. 중국 어디에서도 보아온적이 없는 그 섬세함과 조화로움에 한동안 대뇌는 정지상태에 놓이기도 했다.   마침 한무리의 중국관광객이 지나치고있었다. 어디서 왔냐고 물으니 산동성 성소재지 제남시에서 배낭려행을 왔다고 했다. 나는 청도에서 왔다고 하니 한동네 사람 여기서 만났다며 반갑게 손들을 내밀었다. 산동성의 면적은 남한의 1.5배, 인구는 1억명에 가깝다. 그걸 한동네로 아는 중국인들이다.  경복궁이 한국 관광의 첫코스라고 한다. 인상이 어떠냐고 물으니 자신을 공무원이라고 소개한 왕씨 성의 30대 녀성이 앞질러 “대장금 드라마에 들어온 느낌이예요.”하고 엉뚱한 대답을 했다. 중국 대륙을 휩쓴 “대장금”의 저력을 확인하는 마당이였다. “대장금” 세트장이 따로 있다고 알려주는데 기업을 한다는 진씨 남성이 “그런데가 있어요? 코스를 변경해서라도 한번 가봐야겠네요.” 하고 역시 주제를 떠났으나 별로 기분 나쁘지 않은 말을 했다.  별수 없이 내가 기억을 더듬어 자료에서 본대로 경복궁은 조선 왕조의 법궁(法宮)으로 1395년에 창건하였으며 “경복(景福)”은 시경에 나오는 말로 왕과 그 자손, 온 백성들이 태평성대의 큰 복을 누리기를 축원한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두 나라가 공유하고 있는 문화에 대해 그들은 신기해마지 않았다. 그렇게 그들과 어울려 국립민속박물관까지 함께 가면서 나는 생각지도 않게 서툰 가이드 역할을 맡게 되였다. 반만년 력사를 단 10여 분에 설명한다는것은 어림도 없는 일이였다. 모형과 자료를 살펴보면서 수박 겉핥기로 멘트하면서 진땀을 뺐다. 옆에 붙어서서 진지하게 듣던 진씨는 언어불통때문에 출국전에 인터넷으로 가이드를 수배하였는데 그저 길안내 수준이라고 가만히 속삭였다. 다음에 또 올거냐고 물으니 한국이 참 마음에 든다면서 비즈니스거리가 생길거 같은 예감도 있어 꼭 다시 올거라고, 그것도 자주 올거 같다고 대답했다. 아는대로 하나투어, 모두투어 등 한국 유명 려행사를 알려주면서 무의식적으로 대방의 팔목을 건너다보던 나는 아차 뒤통수를 쳤다. 서울관광마켓팅(주)과의 미팅시간이 눈앞에 다가온것이다.   택시를 잡아타고 호텔에 무거운 짐을 풀고 부랴부랴 미팅 장소인 프레스센터로 달려갔지만 약정 시간을 20분이나 넘겨버렸다. 서울마케팅의 문연미씨가 예쁜 모습만큼 반갑게 맞아주었다. 얼마나 미안하고 송구스럽던지. 서울시청측으로부터 "서울관광리포터" 위촉장을 받으면서 이제는 나도 서울 시민이 되여진듯 뿌듯했다. 고국에서의 첫날밤은 불면의 밤이였다. 잠자리가 바뀐 원인도 있겠지만 그보다 영문모를 흥분과 격동이 모질게도 나를 잠들지 못하게 하였다. 취재 계획대로라면 이틑날은 서울의 옛거리를 활보하는 코스였다.  우선 명동을 가보기로 하였다. 친구 하나가 청도에서 “명동”이란 보신탕집을 운영하는데 그야말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요리 솜씨도 물론 중요하겠지만 가게명이 좋았지 않았냐고 항상 생각하고있었다.  명동은 자자한 명성과는 달리 그렇게 요란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무엇이라 짚이지 않으면서도 자꾸 어딘가 다르다는 느낌을 털어버릴수 없었다. 여의도나 청량리처럼 번화하지만 세계 어느 큰 도시에서나 쉽게 볼수 있는 그런 동네가 아니였다. 꼭 한국만이 가지고있는 그런 마을이여서 명동은 다분하게 이색적인 분위기였다. 기분 좋게 이곳저곳 기울이다가 아무 가게나 무작정 들어갔다. 복장가게였다. 전에 제주 이마트에서 디자인 멋진 옷견지 여러벌 사갖고 집에 가서 보니 일매지게 “메이드인 차이나”였던 기억이 되살아나 제작사부터 살펴보니 온통 알아보지 못할 외국글 아니면 한글로 되여있어도 외래어여서 알아볼수 없었다. 가격도 만만치 않았다. 고개를 갸우뚱하고있는데 주인아저씨인듯한 후더운 인상의 50대 남성분이 다가왔다.  “중국 동포 아니십니까?” “아, 네…” 눈썰미 하나 기막히다고 감탄하며 외마디 대답을 하다가 내친김에 되물었다. “여기 중국 사람 많이 옵니까?” “아니,별로요. 일본손님은 많이 오는 편인데 중국 사람은 흔치 않아요.” 그렇게 마주한 자리에서 주인아저씨로부터 패션 유행을 선도했던 명동의 자랑찬 력사를 살짝 얻어듣는 행운을 가졌다. 현재도 일당 백만명의 인구가 드나드는 곳이기는 하지만 밤에는 인구공동화 현상이 심하다는 얘기도 숨기지 않았다.  허탈한 감정이 엄습해왔다. 솔직히 나는 와자자하고 삐까번쩍하는 대형 타운보다는 인정미 있고 고풍적인 전통 터전을 더 선호하는 편이다. 세계화 추세와 더불어 이젠 이런 옛거리도 흔치 않을것인데 중국처럼 아예 전통거리 또는 테마거리로 개조하여 관광프로그램에 합류시키면 좋지 않을가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주인집아저씨는 그대로 빈손으로 나오는 나에게 환한 모습으로 근처에 남대문시장이 있으니 그리로 가면 싸고 좋은 선물을 마련할수 있을거라는 충고를 아끼지 않는 센스도 보여주었다.  서울시민의 성숙한 모습에 굿소리가 저절로 나갔다. 벌써 여러번 그런 감탄을 했었다. 리무진을 가리켜주던 공항 아가씨부터 택시기사 아저씨의 자상한 서비스, 그리고 끝없이 이어지는 차량들의 질서정연한 질주와 거의 완벽에 가까운 지하철 시스템  등은 그대로 선진적인 서울의 참모습이였다.  엎딘 김에 절이라 했던가? 단김에 쇠뿔 뽑는다 했던가? 아무튼 다음 행선지를 남대문시장으로 돌렸다. 아예 계획 자체를 접고 그때그때 사정을 보아서 다음 코스를 잡는게 좋겠다는 생각이 앞섰다. 남대문시장은 한번 다녀간적이 있는 곳이였다. 7년만에 다시 만나는 남대문시장은 그때와 별로 달라진거 같지 않았다. 쿵닥쿵닥 음악소리가 사처에서 울리고 호객소리도 다투듯 들려왔다. 재래시장은 어디나 거의 비슷한 모양이였다. 숭례문을 기점으로 눈뿌리 모자라게 끝없이 이어진 상가에는 이름을 부를수 있는 물건이면 모두 있는듯 싶었다.  잠시나마 내 사명을 잊었다. 와이프와 귀여운 딸, 그리고 회사 직원과 이웃들에게 줄 선물을 마련하다보니 두시간 넘어 소진한거 같았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서야 점심시간을 한참이나 넘겼다는 사실을 알게 되였다.   두리번거리는데 저 멀리에 아주 익숙한 간판이 보였다. "해흠루"라는 중국간판을 내건 식당이였다.  주인은 40대 장년이었는데 중국 흑룡강에서 왔다고 했다. 가끔 아르바이트로 중국에서 오는 손님들을 안내하기도 한다면서 앞으로 한중을 오가면서 보따리 장수도 겸해볼 타산이라고 했다. 이젠 보따리 장수도 컨테이너로 한다고 산동에서 취재한 정보를 얘기하자 깜짝 놀라기도 했다. “아, 벌써 그렇게 변했어요. 전에는 집채같은 짐가방을 끌고 밀고 숱한 사람들이 오갔는데…” 인천과 산동성 위해를 오가는 위동페리가 승선 가격이 오른데다 한국정부에서 기준 초과부분에 세금을 징수하면서 보따리가 수지 맞지 않아 많이 한산해졌다고 얘기하자 별로 맥빠진 모습이였다. 시장을 업고있는 이점을 리용하여 중국계 관광객을 전문 접대하는 식당으로 업그레이드하는게 좋지 않냐고 제의하자 똑같이 김빠진 공이 된 표정이였다. 관광 단체가 가끔 오기는 하는거 같지만 머무는 시간이 길지 않고 식사까지 하는 경우는 거의 제로라는것이였다. 려행부문를 오래동안 전담해왔던 경력때문인지 서울의 관광시스템에 많이 아쉬운 느낌이였다. 쇼핑 천당을 관광단체에 접목시켜 관광, 쇼핑, 음식, 레저 등을 활성화시키는것도 좋은 출로가 아닐까?! 늦은 점심을 치르고 동대문에 다녀왔다. 여흥은 여전하여 다리 아픈줄도 모르고 돌아다녔다. 눈뿌리 모자라게 구경거리가 많았지만 별로 혼자서 감흥을 느끼는거 같아 못내 아쉬웠다. 그러나 인사동에서 꽤나 큰 충격을 느꼈다. 중국 상해의 청황묘(城隍廟)나 항주의 허방가(河坊街)나 청도의 즉믁로(卽墨路)와 아주 흡사한 거리였다. 다르다면 관광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는 중국의 그것과 달리 어딘가 한산한 모습이였다. 다닥다닥 붙어있는 골동품 가게들, 고서, 서예작품, 도자기, 악세사리 등 너무나도 볼거리가 많은 특색의 이 동네가 이렇게 외롭게 방치되여있는 그 리유를 나는 알수가 없었다. 중국의 경우라면 “조작(炒作)”이라고 해서 벌써 가감없이 려행사를 끌어들여 관광객들로 꽉 채워넣었을것이다. 상기 중국 동네들은 그렇게 현실로 되여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그 상술만은 배워도 무방하지 않을가싶다. 인사동에서 그런대로 마음에 드는 골동품 몇가지를 고르고 효자동으로 건너갔다. 여긴 관광코스로 활용해도 좋을거 같았다. 민담과 같은 구수한 옛이야기에 고풍의 구조물이 어울려 하나의 코스가 되여지는것은 세계적인 관례이기도 하다. 인사동을 이곳과 접목시켜 쇼핑코스와 관광코스를 유기적으로 이어놓으면 꽤나 전망이 있을거 같았다. 그런데 여직 접촉한 서울관광코스에는 상기한 시장이나 동들이 한번도 언급된 적이 없었다. 그만큼 한국의 려행사들은 이미 어떤 경로로 국외에 잘 알려진, 이를테면 경복궁이나 한류로 인해 잘 알려진 세트장이나 세계적으로 유일한 분단 현장인 판문점 등을 판매하는데 열성을 보이는 대신 새로운 코스 개발에는 많이 라태하고 회의적인거 같은 인상이다.   저녁을 먹고 호텔에 돌아왔을때는 밤 10시가 넘어가고있었다. 분주하게 돌아친만큼 사흘째는 좀 한가한 편이였다. 중요한 코스는 다 들른 편이고 이제 편하게 서울시민이 되는 순서였다.  래일은 출국해야 하는 날이다. 오후 1시 5분 항공편인데 국제항공편은 2시간전에 도착해야 하는게 룰이다. 서울에서 인천까지 가는 시간을 계산하면 10시엔 호텔에서 떠나야 한다. 그리고 그전에 이번 취재건의 조직측인 서울관광마켓팅(주)과의 미팅도 약정되여있다. 그러니까 마지막날은 나에게 차려지는 시간이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우선 신풍역 1번 출구에 위치한 흑룡강신문사 한국지사를 찾았다. 뒤늦은 신고식이였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신문사 산하의 "다문화협회"에서 모임이 있었다. 김청호 다문화협회장이 협회 설립 한달동안의 활동과 그 취지를 설명했다. 타문화권에서 온 외래인들이 한국사회에 융합되여 밝고 맑은 한국을 만들어가는데 작은 힘이라도 보태자는것이라고 했다. 그러자면 무엇보다 한국에 헌신하는 마인드를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날 모임에는 박진엽 한국지사장과 김명환 편집국장을 위시한 20여 명의 회원이 동참했다.  형제사인 산동지사에서 왔다고 꼭 점심을 대접하겠다는걸 한사코 취재라는 핑계로 물리치고 곧바로 청계천을 찾았다. 고가도로를 헐어내고 청계천을 만들 당시 말썽 많던 일이 눈에 선했다. 그래도 시멘트보다 저렇게 휴식공간이 만들어진게 보기에 더 좋은거 같았다. 소문이 자자한 63빌딩도 올라가보았다. 서울관광상품에 가끔 올라있는 메뉴가 “63빌딩”이다. 오후에는 꽉 닫힌 생활을 영위하던 해외 동포들의 눈을 틔워주고 귀를 열어준 KBS방송국을 찾았다. 남의 눈에 들킬가봐 이불을 뒤집어쓰고 밥곽만한 라디오를 귀에 대고 “보고 싶은 얼굴, 그리운 목소리”를 경청하던 30년전의 일이 불현듯 떠올라 눈시울이 붉어지기도 했다. 그렇게 해외동포들에게 익숙하고 다정하고 고마운 KBS였다. 그 전파를 통해 “럭키 서울”이라는 노래도 배웠었다.   서울의 거리는 태양의 거리 태양의 거리에는 희망이 솟네 타이프 소리로 해가 저무는  빌딩가에서는 웃음이 솟네 너도나도 부르자 희망의 노래 다 같이 부르자 서울의 노래 에스 이 오 유 엘 에스 이 오 유 엘 럭키 서울   아, 정말 그랬다. 서울의 거리는 비전을 향해 달리는 “태양의 거리”임에 틀림없다. 생기로 끓고 활력이 넘치며 지적인 서울은 그대로 영원히 가슴 깊이 남을것이다.  2009-2010년 세계도시경쟁력 보고에 따르면 서울은 종합경쟁력, 경제규모부문, 국제영향력부문 등에서 세계 10위권에 랭킹되여있다. 그만큼 서울의 국제적 지위와 위상은 세인이 공인하는바이다. 아울러 이제 세계인의 눈길은 서울로 쏠리고있다.  어쩌면 이번 걸음에 찬사보다 콕 찌르는 말을 더 많이 한거 같다. 접시 깨지는 소리로 들어주시지 말았으면 하는 바램이다.  행운의, 길운의, 대운의 서울을 축복한다. 럭키 서울!   2010년 9월 5일 밤 12시 서울 M호텔에서   
109    어느 하루 댓글:  조회:265  추천:0  2017-09-15
수필 어느 하루 장학규     “안녕하세요” 핸드폰 알람입니다. 옛날에 시간 맞추어서 출근하지 않으면 안될 때 설정해놓았던 모닝콜입니다. 쫓기는 꿈을 꾸다가 그 소리에 눈을 떴습니다. 악몽이 분명한데도 진땀은 없었습니다. 어쩐지 예전같지 않습니다. 꿈도 자극이 없이 그저 심드렁해집니다. 아침 다섯시입니다. 다시 잠들기는 열두번도 틀렸습니다. 늙었다는 징표가 틀림없습니다. 허글픈 웃음이 나갑니다. 그리고 정신을 도사리고 핸드폰을 들여다보기 시작합니다. 마약처럼 중독이 되여진겁니다. 열개가 넘는 위챗방들이 와글바글 끓여넘칩니다. 수십명이 수천마디는 한것 같습니다. 모두 무시해버리고 개인 대화방을 봅니다. 홍철이란 친구가 걸어온 말이 있습니다. 이 친구는 언제나 타이핑하는것이 아니라 음성메시지를 남기기 즐깁니다. 어제 죽이 되도록 술을 같이 먹은 친구가 무슨 정신에 메시지를 다 남겼냐고 궁금해서 들여다보니 혹시나가 역시나로 “잘 자소.”가 고작입니다. 그다음 마누라가 새벽녁에 언제 돌아오냐구 차문한 문자가 보입니다. 내가 그렇게 늦었던가고 끊겨진 필름을 아무리 이어봐도 생각나지 않습니다. 모멘트는 더욱 난시가 아닙니다. 동네방네 아우성소리 없는게 없습니다. 손가락으로 까닥까닥 긁어 올리면서 대수 아는 사람이면 무조건 모두 따봉을 해줍니다. 글까지 읽어줄 흥심은 아무래도 없습니다. 다시 내가 팔로우한 위챗공중계정에 들어갑니다. 할 일 없는 날이면 해종일 세월을 아쉽지 않게 보낼수 있는 수십개의 계정들이 서로 자기를 먼저 읽어달라고 빨간 유혹을 해댑니다. 그속에는 고금중외, 동서남북, 희노애락 없는게 없어 자기도 모르게 깊숙히 빠져듭니다. 밥 안 먹냐구, 출근 안할거냐구 안해가 쉴새없이 바가지를 긁어서야 마지못해 침대에서 궁둥이를 떼고 핸드폰에 그대로 눈을 꽂은채로 식탁으로 옮겨앉습니다. “우우, 핸드폰안에 쑥 들어가 살지 아예” 안해의 잔소리를 귀등으로 흘리며 아침을 먹습니다. 이제는 밥이고 채소고 맛으로 먹는게 아니라 배를 불리기 위해 먹습니다. 밖에서는 한겨울인데도 시어미 구박을 억수로 받는 시집살이 며느리의 하소연같은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습니다. 이넘의 동네는 참말로 말릴수 없습니다. 회사로 나가면서 구멍 뚫린듯한 하늘을 나사 하나 풀린것처럼 제정신 잃고 한동안 올려다봅니다. 저렴하게 생겼으면 단순하게 노는게 제격이리라. 나의 신조이기도 합니다. 미스 리도 나오고 미스 권도 보이고 사무실 직원들은 다 나왔습니다. 언제나 착실하게 열심히 일하는 동료들입니다. 컴퓨터를 켜고 큐큐에 도킹하기 바쁘게 하단에 노란 불이 깜박입니다. 대학동창 근석이가 말 걸어온겁니다. “뭐해? 점심에 술 한잔 빨자.” 이 자식은 입만 열면 술입니다. “안돼, 약속 있어.”. “그럼 저녁에 만나자.”. “저녁도 예정되여있어.”. “씨, 니 리총리보다 더 분망하구나.” 자식은 지지벌거리면서도 순순히 물러납니다. 동창은 이래서 좋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너무 잘 알기에 아무 말 해도 마음에 새겨두지 않습니다. 왈라당 절라당 쌍코피 터지게 회사 업무를 처리하고보니 벌써 열두시가 다가옵니다. 그간 김사장으로부터 정확히 전화 세번, 핸드폰 메시지 네번 왔습니다. 회사 근처에 왔다고 했다가 다시 식당으로 이동했다고 했다가 또 요리 주문이 끝났다고 고리때마다 알려옵니다. 포워딩 회사를 경영하는 사람입니다. 두루 자기 회사를 좀 세상에 홍보해달라는 얘기입니다. 울며 겨자 먹기로 회사를 나서지만 솔직히 나는 술보다 그 술가치만큼 돈을 나한테 주면 더 좋겠습니다. 신체가 점점 말이 아닙니다. 허리가 아프고 어깨가 쑤시고 술 먹지 않은 상태에서도 괜스레 마른 구토질이 나옵니다. 이 나이에는 죽음이란 형체가 어슴프레 보이고 냄새도 조금 맡을수 있습니다. 가끔 이름 모를 두려움이 옆구리를 스치며 지나갑니다. 그래도 이상하게 술상에만 앉으면 기분은 업됩니다. 딱 누가 오르가즘을 주사놓은듯 세상이 밝고 맑고 또 따스해집니다. 사는 꼬라지는 머슴급이여도 기분은 진시황급이라고 해야 할가요. 아무튼 그런대로 크고 싼 ‘외할머니네 떡’에다 소주 두병을 말아먹고 정신이 거의 가출 상태가 되여 식당을 나서는데 맞춤하게 마누라한테서 애한테 줄 방학 선물을 사오라는 전화가 왔습니다. 이젠 벼라별 선물이 다 있습니다. 김사장과 빠이빠이 하고 슈퍼에 들어가 아무거나 직원이 가리켜주는대로 한아름 선물이라고 샀습니다. 그 상태에서도 이대로 회사에 들어가기는 아무래도 무리인거 같아 집에 가려고 택시를 잡는데 회사에서 느닷없이 호출이 들어왔습니다. 무좀발로 고생하며 어슬렁 회사에 갔더니 삶아놓은 숫돼지가 눈을 번쩍 뜰것 같은 깜짝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회사에서 직원들에게 복리를 준다는겁니다. 빈상에 파리만 분주하게 앉았다가는 집안치고 대단히 굉장히 억수로 분에 넘치는 새해의 인사가 아닐수 없습니다. 홍철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시인의 ‘쥐구멍에도 빛이 들 날이 있다’란 시가 떠오릅니다. 기쁜 김에 세상이 새노랗게 보였습니다. 그래서 아직 이른 시간인데도, 아직 술이 깨지지 않았는데도 저녁 미팅을 잡은 글친구들의 모임에서 전화가 오기 바쁘게 지금 당장 간다고 허드레를 떨고 도킹 길에 나섰습니다. 참 내 인생도 대략 난감합니다. 어느 랭장고에 랭장했다가 한 20년 후에 녹여서 세상에 다시 내놓으면 그럭저럭 인재 취급은 받을거 같은데 왜 이 활기찬 시대에 납셔가지고 민페가 되도록 과부집 숫캐처럼 싸다니는지 나도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내 삶은 덤으로 벌어진 느낌입니다. 고스톱 쳐서 따내온 나이입니다. 공짜로 얹어진 삶을 즐겁게 치렬하게 살아주는게 나의 도리이고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어디서부터 취했는지 나는 모릅니다. 이태백을 말한거 같고 요즘 우리문단에서 화제가 되고있는 ‘단군문학상’을 얘기한거 같습니다. 1차에서 2차로 넘어간거까지는 기억에 남습니다. 그리고 누군가 나를 택시에 태우고 한 말이 환청같이 들립니다. “안녕히!”  
108    고향을 조립하다 댓글:  조회:425  추천:2  2017-08-23
      수필   고향을 조립하다   장학규     일전 내 고향에서 뜻하지 않은 소식 하나가 날아왔다. 외자녀를 두고 있으면서 부부 쌍방이 모두 일자리가 없는 경우  “외자녀 부모 장례금”을 신청할 수 있다는 것이였다. 그런데 그 소위 장례금 액수를 전해 듣고는 치미는 분노를 도무지 억누를 수 없었다. (멍멍이같은 애기들!) 아이들 장난도 아니고 한달에 5원씩 1년에 고작 60원이란다. 장례금치고는 참 치사하고 낯간지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것도 부부 쌍방이 모두 무직업자여야 한다니 기가 막히고 억이 막히잖은가?! 그래놓고는 관심 어쩌구 배려 저쩌구 매체에 대서특필할 거라고 생각하니 온몸에 막 소름이 끼친다.  5원이면 요즘 시세로 저가쌀도 한근 사면 부스럭 돈이 몇잎 남지 않는 액수다. 일자리가 없는 세 식구가 쌀 한근으로 살면서 감격에 목 메여 만세라도 불러달라는 건가 뭔가?  (멍멍이같은 애기들!) 사람을 바보 취급해도 유분수지. 백성을 거지 취급하는 못난 행실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흥분이 한번 대뇌를 훑어지난 다음 마음을 차분히 눅잦히고보니 그나마 어딘가 모르게 감격스러운데가 좀 있긴 했다. 어쩌면 태생적으로 우리가, 아니 내가 노예 근성을 타고났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이상야릇하게 감사한 마음이 서서히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도 우리를 찾아주는 사람들이 있구나!) 바로 그거였다.  산해관을 넘고 황하를 건너 멀리 장강이남까지 내려갔다가 항주 서호가에서 어렵사리 자식이라고 딸을 낳아서 다시 북상하여 중원의 산동땅에 자리를 잡으면서 나의 가슴에는 시종 응어리같은 것이 있었다.  “아빠, 내 고향이 어디지?” 이제는 다 큰 딸애가 이렇게 물어올 때마다 나는 할 말이 궁해 변이 마른 사람마냥 끙끙대기만 했다.  고향의 사전적의미는 “태여나서 자라고 살아온 곳 혹은 마음속 깊이 간직한 그립고 정든 곳”이다.  그렇다면 딸애의 선차적인 고향은 마땅히 절강성 항주여야 했다. 딸애는 그곳에서 잉태되고 태여나 세살까지 살아왔다. 그러나 딸애에게는 전혀 기억에 없는 고장이다. 고향은 과거가 숨쉬고 정이 살아있는 고장이라고 전제하면 항주는 아무래도 아닌듯 싶다. 지금도 딸애는 가끔 자기는 미인의 도시 항주에서 태여났다고 으시대군 하지만 일방적인 억지에 다름 아니다. 그곳에는 딸애의 연고가 하나도 남아있지 않으며 딸애를 기억해줄 사람도 거의 없다.  어쩌면 지금까지 살아온 청도가 딸애한테는 가장 고향에 가까울듯 싶다. 유치원부터 중학교까지 쭉 살아왔고 친구들도 이곳에만 있다. 거기에다 사는 집도 이곳에 있으니 가히 고향이라 해도 무방하다. 그런데 여기에도 문제는 있다. 딸은 학교에 진학할 때마다 컴퓨터 순차(电脑排位)에 운명을 맡겨야 했다. 그건 딸애가 이 동네 사람이 아니라는 명백한 설명이다. 외지인에 대한 구박이 심한 중국에서 자신의 정체성과 소속감을 가장 잘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니까 청도는 딸애가 고향으로 하고싶어도 할 수 없는 존재이기도 하다.  물론 딸애의 호적이 있는 목단강은 더욱 고향일 수가 없다. 딸애는 딱 두번 목단강에 갔었다. 한번은 엄마 배속에 들어서 출생증 받으러 갔었고 또 한번은 여덟살때인가 나를 따라 려권을 만들러 가서 3일간 머문적이 있었다. 그게 고작이였다. 딸애는 지금도 목단강이 어느 성에 속해있는지를 잘 모르고 있고 목단강이 무슨 급의 도시인줄도 료해하지 못하고 있으며 호적이 올라있는 서장안가란 거리가 있는줄조차 모르고 있다. 물론 그곳에는 딸애를 아는 사람도 없다. 그런 걸 어떻게 고향이라고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그 아무것도 아닌 그 목단강이란 고장에서 아이러니하게 딸애가 외자녀라고 장려금을 줄 수 있다고 나선 것이다. 물론 부모 쌍방이 일자리가 없어야 하고 또 한달에 고작 5원밖에 주지 않는다고는 하지만 이런 은혜는 항주도 청도도 도무지 줄 수 없는 특혜가 아닐 수 없다. 물론 그 특혜를 나는 방귀 한번으로 왕창 거절해버리기는 했지만 말이다.  하다면 딸애의 고향은 어디여야 할가? 우리세대는 엄마 배에서 나와서 만난 동네가 곧 고향이였다. 그때 임산부들은 병원이란데 가보지도 못하고 혹은 산파 혹은 시어머니나 이웃 아주머니의 손을 거쳐 자식을 해산하군 했었다. 그래서 자식들에게는 생물학적 탄생지가 곧바로 지리학적인 고향으로 전변되였고 그때로부터 주변의 사람들과 인연을 맺으면서 기억과 추억을 만들어갔다.  그때의 우리에게는 세상이 쳐다보이는 하늘 정도가 전부였다. 그밖의 세상은 알수도 없었고 다가가기도 두려웠었다. 내 주변 사람들이 제일 편했고 내 동네가 가장 친근했다.  그러나 지금은 글로벌시대이다. 세계를 지구촌이라고 형용할만큼 가고싶은 고장을 마음대로 갈 수 있는 세월이다. 그리고 또 움직이지 않을 수 없는 세상이다. 치렬한 경쟁에서 살아남을려면 분주하게 이곳저곳을 오갈수밖에 없고 이런저런 사람과 만났다 헤여져야 하고 그러다보면 삶의 터전을 자주 옮길 수밖에 없다. 옛날처럼 내 죽었소 하고 한고장에 죽치고 몇십년씩 살아가기에는 요즘 세상이 결코 록록하게 허락치 않는다.  너무 오래동안 리력서나 등록표따위를 써본적이 없어서 지금도 그런 문서에 “고향”이란 코너가 있는지 모르겠다. 력사의 퇴물같은 그런 것이 아직 살아있으리라고 믿을 수 없지만 중국이란 나라는 어차피 상리로 판단 불능이니만큼 있을지도 모른다고 판단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런 하등의 소용도 없는 물건짝을 두고 난감해 갸우뚱할 우리 후대들을 위해 한마디 하고싶은 말이 있다. 즉 기분 내키는대로 적어넣으라 그 말이다.  태여난 항주가 고향일 수 있다. 그곳은 서시가 활동했던 미인의 도시이다. 기분이 상쾌할 것이 아닌가. 청도 역시 고향이래도 무방하다. 다시 멀리 가더라도 언젠가 찾아오면 공부했던 학교와 살았던 마을과 친했던 친구들을 볼 수 있다. 회상이라도 할 수 있잖은가. 호적지인 목단강 역시 고향이라 칭해도 괜찮다. 부모가 그곳 사람이고 더우기 한달에 5원이라 해도 외자녀 장려금을 아끼지 않는다. 정이 붙게 당기는 멋이 있잖은가. 한마디로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고향을 둘러맞추면 된다. 지금은 고향을 마음 내키는대로 조립하는 시대라고 단언하면 틀린 표현이 될가?                                                                                                                        2017년 1월   
107    황해의 시련 댓글:  조회:234  추천:1  2017-08-23
황해의 시련 청도에 진출한 겨레들     황해연안의 명주 청도는 중국에서 최초로 국외에다 개방한 항구도시중의 하나이다. 북으로 발해만경제권을 업고 있고 남으로는 최대 국제도시인 상해와 무릎을 맞대고 동으로는 조선반도와 일본을 향하고 서쪽은 광활한 중원땅을 안고 있는 청도는 그 우월한 자연 지리적환경과 따스한 기후(가장 추울 때 령하 10도 정도)로 하여 한국투자인들의 눈길을 모으는 초점으로 되고 있었다. 거의 매일이다싶이 유럽식의 건축물들이 일떠서는가 하면 촌사람들도 제법 변속자전거를 타고 출근길에 나서고 있었다.  그중 정식 생산에 들어간 한국기업이 2백 여개로 외상총수의 70프로를 차지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미 투자가 시작되였거나 허가가 나와있는 기업은 더욱 많았다. 항목으로 보면 옷, 신, 양말, 완구, 피혁 등 봉제제품회사가 대부분이고 체육용품, 전자재부속품 등 일손을 많이 쓰는 가공업체가 그다음이였다. 그곳 조선족들의 말대로 “새비들의 진출”에 불과한 것이다.  그만큼 명성높은 대기업의 투자는 공백이나 다름없고 그대신 인건비 높은 한국에서는 도무지 경쟁해나갈 방법이 없거나 이미 파산되였던 기업들이 주도였으니깐. 그래서 그 설비란 것들을 보면 눈이 감기게 졸렬하거나 형편없이 낡아빠진 것들이였다.  한번은 한국에서 기계설비가 들어와서 기중기차로 작업현장에 “모셔”가게 되였는데 반쯤 가다가 나무무지처럼 와그르르 무너져내리는 것이였다.  이런 현상에서 우리는 우리나라 외자인입의 피동성과 맹목성을 쉽사리 보아낼 수 있지만 그 우렬판단은 정부측에서 할 일이다. 어쨌던 이런 기업들이 중국에서의 재기를 맛보고 있는 것도 사실이며 또 실제적으로 청도에 많은 혜택을 가져다준 것도 사실이였다. 몇만을 헤아리는 여유로력을 해결해주었고 전기, 물, 연료 그리고 여러가지 원자재를 소비해주고 있으며 해관세를 포함한 여러가지 세금을 물어주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여러가지 유흥업소와 봉사업체들이 그들때문에 날따라 활기를 띠고 있었다. 그중 가장 돌출한 것이 가라OK인데 거의 모두가 한국노래들을 갖추어놓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대구시와의 자매결연후 기자회견에서 유정성(俞正声) 청도시장은 흐뭇해서 멀지 않은 장래에 청도에다 한국촌과 한국학교를 건설하겠노라고 선포했다.  한국기업이 있으니 자연 중국조선족도 있게 되였다. 의사소통의 교량이라는 이 점만도 조선족을 필요로 했던 것이다. 당지 인사들의 말에 의하면 대략 7,8년전만 해도 조선족인구는 십단위로 계산되였단다. 하지만 오늘에 이르러서는 그 단위가 천으로 뛰여올라 대략 3천에서 4천 정도로 불어났다. 물론 정부측 통계가 아니고 주먹구구라 하지만 결코 이 수자보다 적지 않다는 것이 대부분 조선족들의 견해였다. 뿐만 아니라 날마다 증가되는 추세였다. 따라서 취업난, 대우의 하강 등 문제도 매우 첨예해졌다.  하다면 청도의 조선족들은 구경 어떻게 보내고 있는가? 그들의 사업 및 생활상태는 어떠하며 그들의 희로애락은 어떤 것들인가? 이러한 것들을 알고저 청도에 있는 8개월간 필자는 청도시 7대구와 그 산하의 즉묵, 교주, 래서 등 3개 시를 두루 밟아보았다. 총적으로 기쁨보다 고통이 더 많았고 자랑보다 서러움이 더 컸다. 필자가 글을 쓸 목적임을 안 후에는 자기들이 보고 겪은 일들을 실례로 들어가며 그 리해득실을 상세히 알려주기도 했다.  “이런 사실들을 꼭 세상에 알려주시오. 지금 고향에서는 청도를 서울인가 압니다. 꼴을 먹어도 알고 오는 것이 좋겠는데 말입니다.” 이것은 한국기업에서 중견으로 일하는 김모씨가 필자의 손을 부여잡고 부탁한 말이다. 그는 어찌어찌하다가 1천원을 담보금으로 잡혀놓고 마지못해 붙어있는 사람이였다.  담보금 말이 나온 김에 해석이 있어야겠다. 어떤 회사에서는 조선족들이 청도에 많이 몰려든 것을 턱대고 입사시 담보금을 낼 것을 강요한다. 리유라면 조선족들이 듬직하지 못하고 자주 자리를 뜨기 때문이란다. 그러나 실제로는 속셈 밝은 한국인들의 리익계산이 주되는 원인이였다. 일단 서약서란 것을 쓰고 담보금을 낸 후에는 그 어떤 정당한 요구도 모두 거절당하고만다. 마땅히 올려줘야 할 봉급도 아니 올려주고 뚱딴지같이 무슨 명목을 내세워 많지 않은 봉급마저 제대로 내주지 않는다. 그런줄도 모르고 처음 청도에 오는 조선족들은 무작정 서약서에 사인한다. 좀 깐깐하게 볼라치면 “돌아가시오.”하는 판이라 그럴수밖에 없는 것도 사실이였다. 문제는 조선족이 너무 많이 몰려들었기때문이였다. 투자를 하려는 사람보다 취업위주가 대부분이였기에 경쟁이 치렬하였고 상대방으로 하여금 배부른 흥정을 하게 하였던 것이다.  가령 조선족이 없다면 어떻게 될가? 당장 생산이 중지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이런 근심은 하지 않아도 되였다. 아직도 청도거리바닥엔 취업을 하지 못한 조선족이 수백을 헤아린다는 것을 한국경영인들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때문이였다.  필자가 몸 담고 있는 회사만 해도 7명의 아가씨가 담보금 천원에 묶이워있었다. 그들의 평균로임은 250원정도이고 모두 고중졸업생이지만 일반직원(대부분 초중생)과 마찬가지로 현장에서 일하고 있었다. 언제 부르면 수시로 일어나 통역을 해야 하고 조금만 늦어도 핀잔당하기가 일쑤였다. 그중 설씨성을 가진 치치할아가씨는 필자가 돌아올무렵 어린애같이 엉엉 우는 것이였다.  “장선생이 가시면 누가 또 바른 말을 해주겠어요. 저도 엄마가 보고파요. 여기서 돈도 못 벌면서 개고생하는 것도 모르고. 흑흑…” 돈 천원에 매여서 오도가도 못하는 동포아가씨, 21세 애어린 나이에 어머니가 얼마나 보고싶겠냐만 그 가증한 서약서때문에 2년을 참아야 하는 동포아가씨를 필자는 위로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고향에서 지금 하는 일만큼 힘을 내면 그 곱배의 돈을 벌 수 있는 것도 무릅쓰고 회사에 온 까닭은 무엇일가? 한국회사가 돈을 무더기로 안겨줄줄 알았던가? 그래도 그녀는 행운아인셈이였다. 필자가 여직껏 만나본 사람중에서 취업하지 못한 시일이 가장 오랜 사람은 계서에서 온 23살난 김군이였다. 렴치를 무릅쓰고 사돈집에, 친구들 집에서 1년이나 얹혀 살면서 분주히 뛰여다녔지만 운명의 신은 시종 미소를 지어주지 않았다. 그러나 김군 역시 가장 불행한 사람은 아니였다. 교하에서 온 최씨는 믿을데도 없는 형편에 돈이 뚝 떨어져서 피를 팔아 집으로 돌아갈 로비를 마련했던 것이다. 궁지에 빠진 림구의 박모씨는 같은 려관에 든 손님의 가방을 훔쳤다가 감방신세를 지고. 이러루한 일화는 많고도 많다.  고난의 취업길, 귀숙을 찾은 사람이나 못 찾은 사람이나 똑같이 고통스럽다는 것은 한두가지 실례로 해석이 될 현상이 아니다. 어차피 도시진출은 막을 수 없는 또 막을 필요도 없는 대추세이다. 그러니 잘 되였던 못 되였던 그런 시비는 력사에다 맡겨버리고 우선 먼저 눈앞의 생활상, 인간상부터 진실하게 살펴보기로 하자.  청도의 조선족들은 그가 혼자 왔든 여럿 왔든 3년이 되든 석달이 되든 한결같이 집이란 것이 없다. 혹자는 회사 숙사에, 혹자는 세집을 맡고 생활한다. 그 옛날 땅의 부름을 받고왔던 1세들은 흙집이나마 자기 집이라고 이름을 지어서 살았었는데 오늘날 그 후대들은 땅을 떠났기에 몸을 덥힐 “굴”도 없는걸가. 가방과 보따리들이 여기저기 널려있고 방바닥에는 별 오가잡탕들이 지저분히 쌓여있는 것이 마치도 려관같은 느낌이였다. 수시로 머나먼 려행길로 떠나갈듯한 태세들이였다.  래서의 하씨는 금년에 49세인데 다섯식구의 호주였다. 6급 전공이 어느 정도의 기술소유자인지는 필자로서 알 수 없지만 자격증명서까지 보이며 으쓱해하는 것을 보면 전업수준이 꽤나 높은 모양이였다. 룡강현출신이라니까 그곳에 처가를 두고 있는 필자와는 연고가 있는 사람인셈이였다. 퍼그나 반갑다며 한사코 자기 집으로 끌기에 가보았더니 글쎄 이런 법이라구야. 10평쯤 되는 집안에 두치두께의 스폰지 석장을 펴놓고 구들 겸 침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거기서 밥도 먹고 잠도 잔다는 말인데 남녀성인 5명이 몇달동안 그렇게 살았다는 것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그날 그 “밥상”을 마주하고 쓴지 단지를 모르게 한근 술을 들이켰었다.  “돈을 벌어서 무얼합니까? 침대두 사구 밥상두 사구 좀 사는 것처럼 꾸미면 안됩니까?” 주기를 핑계대며 단도직입적으로 질문을 들이대였더니 그 대답 또한 절승경개였다.  “그 사람들을 어떻게 믿는다구 그따윌 다 갖추겠나. 래일 퇴사하라면 하는 판인데.” 마찬가지로 한국회사에서도 조선족을 크게 믿어주지 않았다. 그도 그럴것이 조선족들이 자주 말썽을 부리기 때문이였다. 쩍하면 싸움질하고 도적질하고 며칠 일하고는 나는 가겠소 하고 나눕는다.  로산구에서는 이런 일이 있었다. 하루 저녁은 조선족  6명(흑룡강 3명, 교하 3명)이 술을 잔뜩 마시고 거리에 나갔다가 길 가는 한족청년이 자기네를 본다고 다짜고짜 접어들어 육장벌레가 되도록 팼다. 중국 옛말에 사나운 룡도 지방뱀을 이기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영문 모를 매를 맞은 한족청년이 가만 있을리 만무했다. 친척, 친구 50여명을 동원하여 회사에 찾아왔는데 단꿈에 빠진 영웅들을 하나 하나 찰떡 쳐준 것은 물론 회사의 쏘나타승용차까지 훌딱 뒤집어놓고 가버렸다. 사장이 정신 잃게 놀란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고 그 경제손실은 또 얼마인가. 즉묵시에서도 이와 류사한 일이 발생했었다. 다르다면 지방애들이 너무 애를 먹여서 조선족 20여명이 집단적으로 대항했던 것이다. 결과 량쪽에서 병원에 입원한 수가 30여명 되였고 조선족은 빠짐없이 퇴사를 당하고말았다. 이런 대규모적인 충돌은 물론 국부적이다. 그러나 조선족을 먹칠하기에는 충족했다. 미꾸라지 한마리가 강물을 흐린다고 하지 않는가. 하물며 회사의 돈이나 물건을 가지고 튀는 사건들이 비일비재인데야. 모 회사에서 무역일을 보던 정아무개는 어벌 크게 단번에 12만원의 거금을 가지고 어디론가 튀여버렸다. 필자가 있던 회사에서도 박아무개란 사람이 소가죽을 가져가다가 들키워서 크게 망신을 당하고 퇴사를 강요받은 일이 있었다.  “보시다싶이 조선족은 우리에게 많은 실망을 주었습니다. 처음에는 동포라는 점에서 되도록이면 중임을 맡겼댔지만 지금은 그것이 꿈같이 무서워지는 실정입니다.” 모 회사의 리부장이 필자의 질문에 정색해서 하는 대답이였다. 그만큼 현재 조선족의 지위란 것은 운운할 나위도 없이 밑바닥이였다. 사무실인원중에서 최하층인 통역 겸 관리인원인 조선족들은 말그대로 하인과 같은 존재였었다. 그러니 현미경으로나 알아낼 수 있는 극히 적은 몇몇을 내놓고는 영원히 진급과는 인연이 없었다. 한국인은 입사하자마자 차간주임 명찰을 차고 다니고 얼마후면 계장, 과장으로 승급하지만 조선족은 재능이 아무리 뛰여나도 그 어떤 명분도 주지 않는다. 관리인원이란 명색뿐이지 실지는 심부름군이나 다름없는 존재였었다. 한국인들이 무엇을 어떻게 하라고 지시를 내리면 그대로 할뿐이지 수하직원들을 지배하고 거느릴 아무런 권리도 없었다. 원래 눈치밥을 잘 먹는 중국직원들이 그 실정을 알아내고는 “네가 뭐기에 이래라 저래라 하느냐?”며 빡빡 대드는데 복통이 아니 터질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한가슴 가득하던 웅심은 차츰 사라지고 따라서 무능하고 적극성이 모자란다는 평판을 받게 된다.  림학원 출신의 허씨는 회사에 다닌지 2년이 되여서 일에 환했다. 원체 총명한데다가 직심이여서 성적이 돌출했지만 겨우 주임의 자리를 차지했을뿐이다. 입사한지 두달이 되여서 계장으로 된 스무나문살 되는 한국총각이 그앞에서 거들먹거리다가 된 코빵을 맞았다며 림씨는 서글프게 웃는것이였다.  “일에 행방이 있나요. 제딴에는 한국인이라고 대단한줄로 알겠지만, 일을 핑계로 마구 시켜먹었지요. 사후에 눈치를 알고 노발대발했지만 회사 규정을 들이대며 따졌더니 말문이 막혀하더라구요.” 그나저나 우선 우리 자신부터 가슴에 손을 얹어야 할 것이다. 무엇무엇해도 독립의식이 강하지 못한 것이 제일 큰 흠집이였다. 한사코 남에게만 의지하려 하고 앉아서 뒤장을 보려한다. 서로 책임을 밀어버린 덕에 응당 받아야 할 대우도 받지 못한다.  어느 회사에서는 전무라는 사람이 채용기에 얼마를 준다고 명확한 표시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돈을 받아본 사람이 없었다. 한국기업에서는 시용기 3개월이라는 규정이 있다. 그 기간이 지나면 채용기에 들어서는데 일반적으로 봉급이 시용기보다 50프로 좌우 늘어난다. 뿐만아니라 일종 “보너스”라는 상금까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받아본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전무가 낯가죽 두껍게 입을 합봉하고 있는데다가 그 권리의 향수자들인 조선족들이 꿀 먹은 벙어리처럼 눈치만 보고 있으니깐. 한편 우리의 문화소질도 확실히 차했다. 모르는 사람은 청도조선족 거개가 대학생으로 오해한다. 실은 대부분이 고중생이고 대학생은 20프로좌우밖에 안된다. 나머지는 초중이나 겨우 다닌 아줌마들과 쉰을 오르내리는 젊은 로인들과 사회부랑배들이였다. 초중생은 물론 고중생들도 남다른 재능을 갖고 있지 못했다. 그런가 하면 전업공부를 했다는 대학생들도 기업에서는 별로 쓸데없는 문과생이 대부분이였고 그나마 거개가 영어를 모르고 있는 형편이였다. 한국회사에서는 기계명칭으로부터 보통 술어에 이르기까지 영어를 통용하고있었다. 그러니까 그 마당에 들어서면 대학생, 고중생, 초중생의 립장이 그만 똑같아지고만다. 다같이 영어를 모르고 다같이 일에 미립이 없는 형편이니깐. 게다가 현장통역이란 것은 조중 두가지 언어를 알고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일이니깐. 그래서 조선족대학생이 한국초중생보다도 못하다는 평가를 들을 때도 있었다. 그 때마다 우리의 학교교육을 다시 검토해보지 않을 수 없다. 연해지구에서 그처럼 활발한 직업교육이 우리 이곳에서는 오히려 저조기에 처해있었다. 청도에서는 새로운 형세에 적응하기 위해 적지 않은 중학교들이 직업학교로 탈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의 중학교들은 아직까지도 좁은 진학선에만 매달리고 있는데 그래서 락방거자가 된 고중생들은 재간은 없고 입만 퍼렇게 살아있는 “기형인재”로 되고말았다. 대학진학도 최종적으로는 직업을 구하기 위해서이다. 그렇다 할때 더 많은 “락방거자”들을 위해서도 직업교육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다음은 외국어선택문제인데 일본어는 시기가 지난 것이라고 본다. 영어야말로 세계적인 언어인 것이다. 한번은 일본회사에 면접을 갔었는데 예상외로 간판부터 상표까지 모두 영어를 쓰고 있었다. 자명한바 영어는 세계인 모두의 필수과목인 것이다. 영어를 모르고서 세계로 진출한다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학교의 외국어가 새롭게 선택되여야 하지 않겠는가고 건의해본다.  보편적으로 말해서 조선족들에게는 많은 흠집이 있었다. 지식구조가 단일하고 성격이 조폭하고 술을 즐기고 자유산만하다. 그러나 일을 할 때는 몸을 내번지고 한다. 천성이 부지런한 민족이니깐. 또 남달리 총명하여 인츰인츰 일을 배워내기도 하여 한국경영인들도 꽤 만족해하는 실정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리용의 목적에 그칠뿐이지 내 사람으로 만들자거나 회사의 기둥으로 배양해 보려는 타산은 꼬물도 없었다. 그렇기때문에 조선족과 한국인의 모순은 날이 감에 따라 더욱 돌출해졌다.  한국인들은 의식적으로 조선족들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상종한다. 식사를 해도 저희들 식탁을 따로 정하고 사무실, 지어는 세면실, 화장실마저 한국인용으로 따로 정해서 쓴다. 마치도 조선족들이 더러운 거지여서 코를 막고 피하려는듯한 인상을 준다. 어찌보면 한심한 인격무시였다. 자존심을 자극받은 조선족들이 일을 제대로 해줄리 만무했다. 따라서 동족의 우애란 찾아볼 자리가 없고 오히려 한족로동자들과 같은 나라 국민이라는 강한 련대성을 보여주고 있었다.  어떤 회사에서는 더욱 한심한 규정들을 내세웠는데 이를테면 근무시간이외에도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는 것이였다. 그 리유는 물론 아주 훌륭했다. 안전을 위해서라는 것이다. 꼭 나가야 할 일이 있으면 청시해야 하는데 그날의 관계자에 따라 그 기분에 따라 허락여부가 결정된다. “오늘은 안돼.” 하면 못나가는 것이다. 주관자의 싸인이 없으면 경비가 내보내지 않으니깐. 이런 규정은 휴일에도 례외가 아니였다. 그래서 회사를 생감옥이라고 형용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저희들은 하루가 멀다하게 술집에 나가면서도 조선족더러 술을 먹지 못한다는 엄명이다. 몇푼 안되는 봉급으로 술집에 갈 주제들이 못되고 하니 숙소에서 짭짤한 채소에 술 한모금 마시며 피로라도 풀었으면 좋으련만 그것도 허용하지 않으니 젊은 나이들이 불이 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번은 모 회사의 몇몇 젊은이들이 한국인들이 밖에 나간 틈을 타서 도적술을 마신 적이 있었다. 오래간만에 마시는 술들이여서 그만 재미가 들어 시간개념을 잊어버리고말았다. 한밤중이 되여 사장님이 거나해서 돌아오는데 숙소들이 환하고 떠들썩했다. 문을 활 열고 들여다보니 술놀이가 한창이였다. 단통 욕사발이다.  “이 개놈들아. 술을 처먹구 있어? 그게 무슨 물인지나 알고나 먹어?!” 이쯤이면 세상은 끝난 거다. 억눌렸던 분노의 총폭발이랄가. 혈기의 젊은이들이 약속없이 후다닥 뛰여일어났고 사장님을 비롯해서 5명의 한국인이 잠간새에 땅바닥에 나누웠다. 할아버지를 부르며 잘못을 비는 것도 사정없이 주먹으로 치고 발로 짓밟았다. 그러고는 보따리들을 둘쳐메고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사장님도 술김에 그랬겠지. 너무하지 않아. 년세도 있고 한데. 사후의 평론이다. 그러나 전후인과를 따져보면 그런 것도 아니였다. 석자 얼음이 하루에 얼구어진 것이 아닌 것처럼 욕설이란 것도 단번에 생기고 늘어나는 것이 아니다. “이 정신병자들아. 왜 아직도 전등을 끄지 않았어?” 장부결산을 하다가 이런 소리에 후다닥 놀라 현장에 뛰여내려가 보면 규정대로 행여나를 념두에 두고 밝혀놓는 전등 하나가 고스란히 켜져 있을뿐이다. 그래도 “녜, 죄송합니다.” 한다.  “상넘들아, 창문도 걸지 않구 뭘해.” 그래서 달려가보면 창문고리가 마사진 것이다. 그래도 “예, 미안합니다.” 한다. 위촉과 타협이 한국인의 오만을 키워주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선족은 아침 일찍 일어나 작업준비를 해야 하고 저녁 늦게까지 현장정리를 해야 한다. 연장작업을 해도 연장비라는 것이 따로 없다. 그래도 즉살날 욕은 항시 떠날 줄 모르고. 고생이란 것을 모르고 곱게 자라난 조선족청년들이 그 고된 로동과 심리적고통때문에 신체가 때이르게 허약해졌다. 서란에서 온 양씨는 반년남짓한 사이에 코피만 해도 서른번은 터졌다고 한다. 연변태생의 최씨는 얄편한 몸으로 남성 두사람몫의 일을 하고 있었는데 한번 드러눕기만 하면 크게 앓을 징조가 뚜렷했다.  아무렴 그렇게 해주어도 봉급만은 변동이 잘 되지 않는다. 돈에 그렇게 짠 사람들이였다. 금방 입사한 한국인에게는 하루 몇십원씩 하는 고급 호텔에 주숙시키면서도 조선족에게 10원을 더 줄 것이냐 하는 문제를 가지고 열삼일을 연구한다. 지난해초만 해도 일반 회사의 시용기 봉급이 보통 3백원이였는데 후에는 260원까지 내려간 회사도 있었다. 그래도 취직자는 줄을 서고. 어떤 도경으로 어떻게 왔든지를 불문하고 어쨌든 외가닥나무에 목매죽을 민족이라는 인상이 진하다.  여하튼 청도는 우리의 의지를 단련하고 능력을 검열하는 훌륭한 고장이였다. 거기에는 눈물도 있고 흔들림도 있지만 동시에 획득과 성공도 있었다. 4년간의 고심참담한 노력끝에 드디여 무역과장으로 날랜 활력을 보이는 김성수씨, 일반 회사 직원으로부터 서비스회사 사장으로 된 한룡태씨, 그리고 한국직원들의 헌신적인 사업정신은 우리에게 산 본보기로 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필자는 청도진출을 정주영옹의 말씀대로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고 평가하고싶다.                                                                                                                                                                                                   1994년 2월                                         
106    별찌와 초불 댓글:  조회:181  추천:1  2017-08-21
    별찌와 초불 장학규      해마다 8,9월이 되면 중국 한겨레 사회는 갑자기 자극을 받은 용암마냥 부글부글 끓어번지기 시작한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한꺼번에 떨쳐나와 알락달락한 새 옷을 차려입고 촌 운동회로부터 향 운동회, 현 운동회, 지구 운동회, 성 운동회, 전국 운동회까지 줄기차게 펼쳐나간다. 거기에 심심찮게 문예 경연이란 것까지 곁들여 퍼그나 활발하고 생기가 넘치는 양상을 나타낸다. "중국에 살고 있는 동포들이 이처럼 멋지게 살아갈 줄 몰랐어요." 몇몇 고국분들의 한마디 칭찬에 모두들 정신이 혼미해져 올리 추슬러진 짧은 바지가 팬티가 되여가는 줄도 모른다. 기실 그 화려한 표피를 벗기고 안속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통채로 "무깍지", 좋게 말하면 빛 좋은 개살구요 속되게 비유하면 그대로 비단보에 개똥이다. 얼씨구 절씨구를 사나흘 하고 집에 돌아가면 여전히 앞이 캄캄하지 않고 뭔가?! 배는 기름기를 재촉하고 아들은 처녀 게걸이 들어서 한숨을 톺고 어린애는 엄마를 내놓으라고 발버둥히지 않는가? 무당 굿하듯 얼씨구 절씨구를 푸닥거려 그러한 문제들이 해결되면 몰라도 이건 순전한 랑비가 아닐 수 없다. 애들이 책 한권 사도 펄쩍 날뛰던 량반들이 그런 곳들엔 잘도 찾아와서 흔전만전 먹고 마시는 것을 보면 이 넘의 민족성이란 것이 해괴하다고 할 수 밖에... 그런 놀음을 한번만 중지하고 그 돈들을 한데 모으면 오상조선족사범학교는 열번도 넘게 하얼빈으로 이사했을 것이다. "여보,그런 모임도 없으면 우리 민족은 아예 죽은게 아니요?" 혹자는 이렇게 변명을 늘여놓을지 모른다. 어쩌면 일리가 있는 말이다. 잠자는 고양이처럼 늘쌍 소리 소문없이 살았으니깐, "야웅"이라도 한번 질러서 살아 있음을 알릴 필요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반론을 하면 그게 바로 문제라는 것이다. 평소에는 모두들 어디 가서 죽어 있다가 한꺼번에 별찌처럼 나타나 반짝하는가 말이다. 어디가 좋다 하면 썰물처럼 와야 밀려나가고 무엇이 어떻다 하면 밀물처럼 후다닥 달려드는 여기에 우리 민족의 큰 약점이 있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우리 민족만큼 시공간 공백을 자꾸 만들어내는 민족은 다시 없을 것이다. 죽었으면 고스란히 죽은 흉내를 줄창 내면서 실속을 굳히던가 아니면 살아있음을 나타낼바엔 하다못해 초불만큼 빛을 내더라도 꾸준히 가물거리는 것이 인간의 도리요 지혜가 아닐가 싶다. 심양에서 있을 때의 일이다. 한번은 주임이라는 량반과 소위 취재를 마치고 돌아서니 마침 점심때가 되였다. '어디 가서 대충 요기하지." "그럽지요." 주임은 많이 까다로운 편이여서 조선족이 만든 음식이 아니면 절대 입에 대지 않는 성미였다. 그래서 그 "대충 요기"가 반시간이 넘도록 할 수가 없었다. 한글 간판을 보고 들어서면 여불 없는 한족 식당이였다. 다섯번째든지 여섯 번째든지 마침내 체념을 하고 척 들어 앉아 랭면 한그릇씩을 받아들었는데 소위 랭면이란 것이 차지는 않고 지독하게 달기만 했다. 주임이 저가락을 던지고 음식 타발을 하는 사이에 나는 심부름하는 아가씨와 이런 대화를 주고 받았다. "랭면도 바로 못하면서 한글간판은 왜 내걸었소?" "원 주인이 조선족이였어요." "그러니까 영업 허가서를 새로 내지 않고 그대로 물려 받았단 말이지?" "그런 셈이지요." "본래 주인은 어디에 갔소?" "듣자니 한국에 갔다더군요." 허참 역시 그런 판국이였구나. 개혁개방 초기에 우리 음식점들이 수풀처럼 왁자하게 일어섰던 진한 풍경을 독자 제씨들은 잊지 않았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지금 대중 도시들에 어지간히 널려 있는 조선족 음식점의 주인들속에 진정 우리 민족이 경영하는 것이 얼마 안된다는 것도 직접 보고 들어서 알고 있을 것이다. 그것도 한곳에서 꾸준히 버티며 일해온 사람은 백에 한사람이나 될가 말가. 모두가 잠간 별찌가 되여 반짝거리다가 어디론가 사라졌다는 말이다. 토끼가 나무에 부딪쳐 죽는 일은 우연중의 우연이라는 것을 우리는 어렸을 때 우화를 통해 이미 배웠었다. 그리고 합리성이 배제된 우연이란 것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도 철학을 통해 벌써 알았었다. 세상에 노력을 들이지 않고 공으로 생기는 덤이 어디 있겠는가? 공짜애기가 나와서 하는 말이지만 어디서 보았던지 들었든지 하는 우스운 이야기 한토막을 적어본다. 려객기 한대가 하프리카 사막지대를 날아지나다가 고장이 생겼다. 락하산은 충분히 갖추어졌던고로 스튜디어스는 손님들더러 급히 뛰여내릴 것을 요구 했다. 그러나 누구 하나 까딱 할 념을 하지 않았다. 비행기는 고도를 떨구기 시작했고 사색이 된 스튜디어스는 헐레벌떡 기장을 찾았다. "아, 글쎄 저것들이 입 아프게 동원해도 도무지 목숨들이 아깝지 않는지 통 움직일 념을 하지 않아요." 수십년 비행 경력을 갖고 있는 기장은 알았다는 듯 시무룩이 웃더니 앞에 나섰다. "여러분, 우리 한번 모험 행동을 해봅시다." 그러자 귀신에게 홀리운 듯 노랑 머리에 파랑 눈을 가진 친구들이 하나 둘 걸어나와 무작정 락하산을 집어들고 뛰여내리는 것이였다. 그들이 다 뛰여내리기를 기다렸다가 기장은 이번엔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 그럼 이번에 경쟁을 벌려봅시다." 그러니깐 작달막한 일본인들이 부랴부랴 뛰여내리는 것이였다. 여태까지 태평무사하게 잠자코 있는 사람들은 말하자면 우리 민족이라는 것이다. 그래도 기장에게는 방법이 있었다. "여러분, 이번에 공짜 놀음 놀아보시죠?" 와! 려객기가 땅에 코를 박기전에 한사람도 빠짐없이 살아났다는 이야기다. 이처럼 우리는 그 공짜를 바라서, 그 우연을 바라서 눈알이 동그래서 살아간다. 일단 그런 것들이 모종의 징조를 나타내면 뭘 본 오리처럼 오구구 모여들었다가 그것이 별찌처럼 사라지면 따라서 돌멩이 습격을 받은 닭무리처럼 활 흩어져 버리는 것이다. 우리에겐 초불과 같은 지구력이 필요하다. 어쩌다 땡 잡았다고 진취심을 잃고 배를 쑥 내밀고 안하무인격으로 놀아대는 사람들이 우리에겐 너무나도 많다. 그리고 남의 나온 배를 손가락질 하며 허송세월 하는 인간들도 부지기수이다. 단 한가지 착실하게 일을 배우고 해나가는 분들이 너무너무 부족하다. 지금은 21세기, 강자생존의 시대이다. 요행은 없다. 사회와 시대의 언덕에 기생하면서 안일을 자랑하던 시절은 지나갔다. 오로지 꾸준히 삶을 개척하고 꾸며가는 길밖에 남지 않았다.
105    항일 로전사 리화림을 찾아서 댓글:  조회:136  추천:0  2017-08-21
겨레의 딸 민족의 넋 항일로전사 리화림을 찾아서      얼마전 기자는 금방 92돐 생일을 지낸 로항일투사 리화림녀사를 방문하였다. 고령임에도 그이의 정신과 담소는 그처럼 정력적이였다.  기자는 첫대면이였지만 그이가 얼마전 써낸 장편회억록 “원정(征途)”의 내용을 그의 얼굴에서 읽을 수 있었다.    1 리화림 녀사는 1905년 1월 6일에 조선 평양시 경창리의 한 빈한한 시민가정에서 4남매중 막내로 태여났다. 본명은 리춘실, 아시아패권을 쟁탈하기 위한 일로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매듭지어 조선의 외교권이 송두리채 뽑힌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된 다사다난한 시대에 태여나서 자란 리화림 녀사는 망국노의 설음을 한껏 맛보았었다. 다행한 것은 인자한 어머니 김인봉씨와 어려운 살림때문에 배움을 빼앗긴 민족독립활동가인 큰오빠 리춘성씨의 적극적인 추진하에 미국인전도사가 꾸린 사립학교 숭현소학교에 입학하여 초기계몽교육을 받았다. 동시에 조선인 선생님들로부터 리순신, 안중근 등 민족영웅들의 사적을 상세히 알게 되여 애국주의사상을 무르익혀갔다.  그무렵 충실한 기독교신자인 어머니는 아들 춘성씨의 반일활동을 몰래 도와주고 있었다. 어느 하루, 리화림녀사는 어머니의 불품을 정리하다가 깊히 숨겨둔 태극기를 발견하였다. 여직껏 단군신화나 춘향전 같은 고전적인 이야기만 해오던 어머니에게 이렇게 큰 비밀이 있을줄은 몰랐다. 그것이 계기가 되여 그들 모녀간의 거리는 한결 가까와졌을 뿐만아니라 어머니를 통해 민비피살사건도 료해하였으며 망국의 진정한 원흉이 어떤자들이란 것도 알게 됐다. 일제에 대한 원한의 씨앗은 어린 가슴속에 그렇게 심어졌던것이다.  그때로부터 리화림 녀사는 오빠 리춘성씨의 비밀 련락원이 되였다. 어머니는 “군자금”조달에 나섰고 그녀는 오빠네가 찍어낸 삐라를 숨겨두고 비밀문건을 전달하는 일을 맡았다.  한번은 오빠가 금방 새로 찍은 삐라를 집에 가지고 왔는데 왜놈의 끄나불이 어느새 낌새를 맡고 뒤를 쫓아왔다. 위급한 그 시각에 불쑥 꾀가 떠오른 리화림 녀사는 재빨리 삐라를 어린 조카애가 덮고 있는 이불속에 밀어넣는 동시에 조카애를 힘주어 꼬집어놓았다. 철부지 조카애가 자리러지게 울어대자 그녀는 달래는척하면서 삐라를 조카와 함께 이불에 감싸서 밖으로 나가버렸다. 한차례의 위험은 그녀의 민첩한 반응과 자연스러운 행동으로 하여 모면되였다.  어머니는 물론 로련한 혁명가인 리춘성씨마저 그녀에게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고종황제의 갑작스런 죽음이 도화선이 되여 1919년에 “3.1운동”이 터지자 열다섯살난 리화림 녀사는 동학들과 함께 거리에 뛰쳐나가 시위행진을 단행하였다. 일제군경과의 직접적인 투쟁을 통하여 리화림 녀사는 의지를 련마했고 조선독립을 위하여 헌신하려는 결심을 더욱 굳히게 되였다.  1920년 리화림 녀사는 숭의녀자중학 유아사범반에 입학하였다. 재학기간 평양고등학교 학생을 대상으로 조직된 “력사문학연구회”에 참가함으로써 처음으로 공산주의 리론과 접촉할 수 있었으며 학습을 거쳐 공산주의 사회란 구경 어떠한 것인가를 알게 되였고 공산주의를 실현하여야 비로서 인민의 행복한 생활이 보장된다는 도리를 초보적으로나마 인식하게 되였다.  유아사범반을 졸업한 후 전라도, 함경도를 전전하면서 고험을 겪은 리화림 녀사는 1927년 11월에 조선공산당에 가입하여 조선독립운동의 최전렬에서 맹활약하였다. 그러나 이듬해에 조선공산당이 여러가지 원인으로 해산되자 방황과 고뇌속에서 모대기던 리화림 녀사는 특무와 경찰의 검문까지 받게 되여 부득불 30년도초에 조국을 떠나지 않으면 안되였다.    2 1930년 3월, 리화림 녀사는 목적지인 상해에 도착하였다. “모험가의 락원”으로 유명한 상해는 당시 여러 제국주의 렬강들이 제각기 한구역씩 뜯어가지고 있는 형편이였다.  국내의 소개인이 가리킨대로 리화림 녀사가 찾은 이는 유명한 애국자인 김두봉선생이였다. 비록 조선공산당은 해체되였으나 공산주의에 대한 신앙과 추구를 그때까지도 고이 간직한 리화림 녀사는 고려공산당출신인 김두봉선생을 통해 상해의 조선공산당인들과 접촉할 것을 갈망했으나 그 내부의 파벌투쟁이 심하다는 소개를 듣고는 저도모르게 전신에 소름이 쫙 끼치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국외에 나와서까지 집안다툼을 벌리는 것이 민망스럽기도 했다. 원쑤에 대한 불 타는 적개심을 한가슴 가득 안은 리화림 녀사는 무모한 파벌투쟁에 휘말려들기도 싫었거니와 직접 일제와의 혈전장에 나사고싶어 김두봉선생의 소개를 거쳐 오래전부터 숭배해오던 저명한 독립운동가 김구선생이 친히 령도하는 “한인애국단”에 가입하였다. 그때가 바로 세계를 놀래운 “9.18사변”이 일어난 1931년 가을이였다.  “한인애국단”은 상해림시정부의 소속하에 있었는데 김구선생이 대장직을 겸임하고 할빈역두에서 조선총독 이또 히로부미를 쏴죽인 안중근의사의 동생인 안공근선생이 참모직을 맡고 있었다. 이 조직의 임무는 주로 일제의 요인들과 조선의 간첩과 변절자를 암살하는 행동으로 전 세계에 조선민족이 살아있음을 알리고 따라서 조선민족을 항일성전에로 불러일으키는 것이였다. 원체 성격이 테러형식이였던만큼 이 조직은 성립초기부터 녀성 성원을 받아들이지 않았었다. 그러나 김구선생과 면대한 자리에서 리화림 녀사가 어찌도 절절하게 자신의 경력과 애국심을 호소하였던지 김구선생은 감동된 나머지 파격적으로 그녀를 받아들였던 것이다. 사업의 편리를 위하여 리화림 녀사는 리춘실이라는 이름을 리동해로 고쳤다.  처음 리화림 녀사의 임무는 상해에 온 조선교민, 특히는 녀성들을 고찰하고 감시하는 것이였다. 이기간 리화림 녀사는 남다른 지혜와 총명으로 조직에서 맡겨준 임무를 훌륭하게 완수하여 김구선생의 칭찬까지 받았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차 일선활동에도 참가하였다.  한번은 김구선생의 애인 신분으로 변장하고 김구선생과 함께 조선에서 온 특무를 유인하여 깜쪽같이 해치운적도 있었다.  이 조직은 우리 민족의 항일사에 두고두고 전해질 두가지 거사를 해내였다. 그것은 리봉창의사의 일본천황암살사건과 윤봉길의사의 홍구공원폭발사건이였다. 이 두 사건의 획책자는 김구선생, 리화림 녀사는 두 사건에 직접 참여한 력사의 견증자로 오늘날 건강하게 생존해있다.  1931년 7월초에 일제의 도발하에 발생된 “만보산사건”은 중조인민간에 불신과 반목정서를 일으켰다. 두 나라 인민을 깨우쳐 공동한 원쑤를 대적하기 위해 김구선생은 리봉창의사와 함께 일본 천황을 암살할 계획을 세웠다.  1901년 수원의 중산가정에서 태여난 리봉창의사는 일어를 류창하게 구사할 뿐만아니라 어느 한 일본귀족처녀의 사랑을 받고 있었다.  리봉창의사는 이 점을 리용하여 일본에 잠입한 후 천황이 열병식에 나오는 기회에 암살하려고 타산하였다. 그때 김구선생의 비서격이였던 리화림녀사는 김구선생의 부탁을 받고 리봉창의사에게 작탄 두개를 감출 수 있는 내의를 밤도와 지어주었다. 비록 1932년 1월 8일의 암살행동은 천황을 놀라게 하는 것으로 실패를 선고했지만 세상에 조선인의 기개를 널리 전했던 것이다.  1932년 4월 29일, 상해의 일본침략자들은 천황의 생일을 계기로 홍구공원에서 성대한 기념대회를 가졌다. 리화림녀사는 윤봉길의사와 부부명의로 홍구공원에 잠복하여 그번 모임을 타격하라는 상급의 지시를 받고 사전에 두사람은 지형을 고찰한 후 알맞는 자리까지 잡아놓았다. 후에 리화림녀사가 일어를 잘 모르는데다가 두사람이 행동하면 목표물이 커서 불편하다는 점을 감안하여 윤봉길의사가 혼자서 거사하기로 결정되였다. 그러나 리화림 녀사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이 활동에 직접 개입함으로써 1932년 4월 29일의 민족사에 당당한 한자리를 굳히게 되였던 것이다.    3 1932년 늦여름, 리화림녀사는 마침내 김구선생의 투쟁방법이 썩 타당하지 못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결연히 혁명의 발상지인 광주로 떠났다. 그곳에서 조선민족당에 가입, 이름을 리화림으로 고치고 중산대학 의학원 부속병원에서 견습간호원으로 일하면서 학습과 투쟁을 결부하는 공식혁명가의 길로 들어섰다.  이듬해에 중산대학 법률학부에 다니는 김창국씨와 결혼, 아들 우성(雨星)을 낳고 갈라졌다. 자식을 사랑하는 세상 부모들의 마음은 매한가지지만 위기에 빠진 조국을 구하는데 미소한 힘이나마 보태려고 안온한 가정을 버리고 선뜻 투쟁의 한길을 선택했던 것이다.  1936년 1월, 조선민족당의 파견을 받고 광주를 떠나 남경에 도착한 리화림녀사는 조선민족혁명당총부(개칭됨) 부녀국에서 위원사업을 하였다. 부녀의 지위와 권리를 제고시키는 선전활동에 몸담았고 결국 그것이 가정 모순을 초래하여 짤막한 제2차 혼인생활을 결속지었다.  이듬해 겨울, 일본군이 남경에 대한 공격을 다그치자 로약병자를 이끌고 중경으로 전이, 여기서 김구선생과 희극적인 재상봉을 하였다. “한인애국단”시절에 의식적으로 숨겼던 공산당원의 신분을 이번엔 자랑스럽고도 솔직하게 김구선생에게 고백하였다.  “그럼 이후 다시 만나지 맙시다.” 김구선생의 이 한마디 말로 그들은 지척에 있으면서도(림시정부도 중경으로 옮겼다.) 한번도 만나지 않았다. 비록 김구선생을 그렇게 흠모하고 존경하였지만 리념의 차이는 거래의 장벽이 되였던 것이다.  그만큼 리화림 녀사는 이미 사상적인 전변과 성숙을 마무리지었던 것이다. 광대한 근로대중을 압박과 착취속에서 진정으로 해방시키려면 오직 공산주의 한길로 나갈수밖에 없다는 확고한 신념을 굳혔던 것이다. 1938년 10월 10일에 성립된 조선의용대(총대장 김약산)는 리화림녀사를 부녀대 부대장으로 임명, 무한보위전에서 그녀는 광주견습간호원시절에 익혀둔 의술로 적지 않은 부상병을 구해주었다.  그후 국민당정부의 소극항전정책에 불만을 느낀 조선의용대는 41년도에 항전의 봉화가 세차게 타오르는 태항산에로 진입하여 팽덕회, 라서경 등 팔로군지도자의 접견을 받았으며 조선의용대는 조선의용군(사령원 무정)으로 개칭되였다. 리화림 녀사는 부녀대 대장으로 임명되여 가렬처절한 전투속에서 더없는 용감성을 보여주었다. 1945년 무정 사령원의 파견으로 연안중국의과대학에 20기 학원으로 들어갔으며 연안에서 일제의 무조건투항을 영접하였다.    4 일본이 투항한 후 조선의용군은 국민당의 간섭과 교란으로 하여 제때에 조선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이런 정황하에서 조선의용군은 중국공산당과 손잡고 중국해방전쟁에 떨쳐나섰다.  1946년 리화림녀사는 조선공산당 당원으로부터 중국공산당 당원으로  전적했으며 중국의과대학을 졸업한 후 그 산하 제1분교(연변의학원 전신)에 배치받았다. 1948년에 사업의 수요로 조선인민군 제6독립군단 전선의무소 소장으로 전근하였다.  “6.25”조선전쟁이 폭발된 후 어느 한차례의 상병원 호송길에서 리화림 녀사는 미국비행기가 던진 폭탄에 다리부상을 입고 후방병원으로 이송되였다.  1952년 여름에 2등 을급잔폐증을 발급받고 선후로 료녕와방점 강복(康復)병원 기술과 과장, 심양의사학교 부교장, 교통부 위생처 기술과 과장, 연변위생국 부국장, 국장 등 직을 력임하였다.  문화대혁명시기에는 “한인애국단”에 참가한 경력으로 하여 3년간 옥살이도 하였으며 1978년에 대련시칠실 시찰원으로 조동하였다.  현재 리화림 녀사의 생활은 혁명전쟁년대처럼 소박하고 근검하다. 기자를 영접한 리화림 녀사는 곤색데트론 옷에 헝겁신을 신고 있었다. 리화림녀사는 그렇게 아낀 2만원 돈을 당비로 바쳤으며 1986년에는 연변아동문화기금회에 1.2만원을 기증하기도 했다.  기자를 마주한 자리에서 리화림 녀사는 대련시정부 판공청 로간부처에서 그의 일상 생활을 관리하고 있는데 별 불편함이나 부족점을 느끼지 못한다고 말했다. 지난 1월 6일 92세 생일때 정부와 사회 각계에서 찾아와 축하해주었으며 특히 시부련회에서 병치료 귀걸이를 선물로 가져왔다면서 자신은 큰 공로도 없지만 당과 정부 및 인민은 크나큰 영예를 안겨주었을뿐만 아니라 어렸을 때 그렇게 하고싶었던 대학공부까지 시켜줬으며 오늘은 또 즐거운 만년을 보내라고 이처럼 관심해준다고 감개무량해서 말하였다.                                                                     199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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