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张学奎文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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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역사문화도시 소흥 댓글:  조회:407  추천:0  2014-09-01
역사문화도시 소흥 장학규   소흥하면 노신선생의 글이 떠오른다.독특한 흙기와 지붕밑으로 집집을 이어주는 장랑(대줄기 비가 쏟아져도 옷자락 하나 적시지 않고 이웃 마실을 다닐수 있는 장랑) ,길거리를 따라 얼기설기 이어진 운하,그 운하를 따라 지금은 고기잡이가 아닌 순수 관광용인 오봉선(乌篷船)이 시름 없이 떠다닌다.오봉선 하면 글만 본 사람들은 잘 모를것이다.배 양옆에 우리 미닫이 홈 같은 금이 있다.거기에 대나무로 된 "미닫이" 서너개를 활자처럼 휘여 가지런히 세운다.평시엔 그것들을 가운데 모아두었다가 일단 비가 오면 일직자로 쭉 당겨놓으면 비를 피할수 있는 요새가 된다.물론 배의 앞쪽과 뒤쪽은 막지 않는다.사공이 방향을 잡아야 하고 관광객이 주위 경치를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소흥에 네번 갔었지만 옆에 사람이 딸려있다보니 함형술집에서 술을 먹지 못한 것이 지금도 유감이다. 한번은 저녁 아홉시에 택시 타고 달려갔으나 술집이 문을 닫아버려 어쩔 수 없이 그 옆 가게에서 회향두 사놓고 선술을 마셨었다.그런데도 다리 병신된 공을기가 간신히 매대에 엽전을 올려놓으면서 술달란 화면이 떠올라 귀신이 달라붙었는가 했었다. 소흥 가면 꼭 들러야 하는 코스 두개가 있다. 하나는 대우릉이다. 대우는  황제,염제를 이은 요 순 우중의 한사람을 가리킨다.그런데 먼저 이의가 있다.우임금 시절의 중국은 중원지역에 한한다.우가 다스린 것도 황하인데 어떻게 되여 그의 릉이 양자강 하류지방인 소흥에 모셔진건가? 중국 관광문화의 아이러니라면 과한 평가인가? 그래도 우임금은 존경할만한 분이다.아버지 곤이 막는 방법으로 홍수를 다스리다가 실패하여 순임금한데 목이 잘리운 후 후임을 맡게 된 우는 막는 방법으로는 아니 된다는 것을 자각하고 소통하는 방법으로 치수에 성공한다.그 치수 방법보다 더 우리를 깨우치는건 10년간 치수과정에서 세번 집문앞을 지나지만 들르지 않았다는 "3과 가문 이불입(三过家门而不入)"이란 고사이다.요즘 관료들이 귀담아 들어야 할 미담이다. 비록 작은 것이지만 대우릉에서 수확 하나가 또 있다.바로 중국 혼인문화에 자주 등장하는 "문당호대(门当户对)"란 성구의 유래이다.대우상이 든 대전으로 들어가는 대문 양옆으로 사자 대신 돌로 된 2미터 미만의 북 같은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신분을 상징하는것으로  "문당"이라 하는데 신분이 높을수록 문당도 높아 혼인할적에 그 높이를 맞추어서 짝을 찾게 된다는 것이였다. 대우릉에서 30분 정도 차로 달리면 난정(兰亭)이란 곳에 이른다.먹물 먹은 사람이면 누구나 동경하게 되는 서예성지 난정,바로 동진때 서성 왕희지가 "난정집서"를 집필했던 고장이다.여느 관광지와 달리 드물게 주위에 집이나 가게들이 많지 않은 아늑하고 조용한 산골짜기이다. 정문에 들어서서 얼마쯤 걷다보면 첫 눈에 "아지"라는 비석이 보이는데 거위 "아(鹅)"자와 못 "지(池)"자가 틀림을 대뜸 알아볼 수 있다.왕희지와 그 아들 왕헌지가 한자씩 썼기 때문이다.왕희지가 "아"자를 금방 썼는데 마침 임금의 성지가 도착했고 사자를 맞이하려 간 서성대신 아들 왕헌지가 "지"자를 마감하였다 하여 부자비라고도 하는데 서예사상의 미담으로 전해진다.  왕씨 부자간에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많이 남겼다.헌지가 어렸을 적엔 큰 재목감이 아니였던가 본다.그래서 10여년간 글공부를 했지만 시종 애비의 승인을 받지 못했다.한번은 나름대로 괜찮게 썼다는 글을 가지고 애비를 찾아간다.이번에도 아니라면 글공부고 뭐고 다 팽개칠 생각이었다.아닌게 아니라 그 글씨를 본 서성은 천둥같이 화를 내면서 들었던 붓을 종이우에 탁 팽개치고 나가버리는것이였다.억울해난 헌지가 어머니를 찾아가 하소연 하는데 그 글들을 찬찬히 보던 어머니가 왈  "왜? 여기 글 같은게 있구먼은..." 그래서 그 어머니가 가리키는 글을 보니 바로 왕희지가 화를 내면서 던져버린 붓 자리라 이 말이다.  왕희지의 글 공력을 알아볼수 있는 대목이다.그만큼 서성은 서예에 혼신을 다 받쳤던 것이다.거위 늪엔 진짜로 거위(게사니)도 보이고 ...왕희지는 거위를 아주 좋아했고 그 움직이면서 변하는 모습을 관찰하면서 글을 썼다고 한다. 거기서 뒤로 나가면 중국에서 유일하게 강희제와 건륭제 두 조손이 함께 쓴 "어비"가 있다.물론 서성과는 비기지 못하겠지만 두 임금 모두 한다하는 서예가인것만은 틀림없다.건륭제가 이 곳에 들렀을적엔 강희제가 이미 다녀가면서 글을 남겨놓은지 몇십년이 흐른 뒤였고 할아버지가 남긴 "어비"옆에 자기도 남긴다는건 너무 무엄한 노릇이라고 인정,그래서 임금으로서는 도무지 상상할수도 없고 또 전례도 찾아볼수 없게 "어비" 뒤면에 자기 글을 남긴것이다.아, 건륭의 흉금과 효심이여...강희는 세파를 겪은 두둑한 뱃심만큼 글이 힘 있고 패기를 보여주었다면 건륭은 태평성대를 구사한만큼 유연하고 막힘이 없는 달필을 이루었다. 서예가들의 추앙의 성서인 "난정집서"는 사라진지 오래다.전하는데 의하면 서성의 어느 직계 후손이 그 책을 소장하고 있었는데 역대 통치배들이 아무리 얼리구 닥쳐도 내놓지 않았다고 한다.당태종 리세민대에 이르러 강압으로 아니됨을 알아채고 스파이를 파견,몇년간 그 후예와 사귄 스파이는 어느 한번 술좌석끝의 실수로 책의 행방을 알게 되여 훔쳐서 리세민한테 바쳤고 미칠것처럼 그 책에 반한 리세민이 죽을 때 "난정집서"를 무덤으로 가져갔다고 한다.실말인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실마리가 생겼으니 그걸 따라가 본다? 물론 그걸 손에 넣으면 대뜸 부자가 되겠지만 그 생각 보담 서성의 글이 확실히 그렇게 대단한가 한번 자기 눈으로 직접 확인해보고 싶다.  
35    지장보살의 도장 - 구화산 댓글:  조회:529  추천:0  2014-09-01
  지장보살의 도장 – 구화산 장학규   중국에는 4대 불교 명산이란 말이 있는데 이를테면 지혜의 보살(대지,大智) 문수의 도장인 오대산(五台山),행동의 보살(대행,大行) 보현의 도장인 아미산(峨眉山),자비의 보살(대비,大悲) 관세음의 도장인 보타산(普陀山),그리고 구화산(九华山)이다. 구화산은 소원의 보살(대원,大愿) 지장보살을 모시는 산이어서 특별히 적는다. 구화산은 안휘성 청양현(青阳) 경내에 위치,북으로 양자강에 의지하고 남으로는 태평호(太平湖)를 사이 두고 황산풍경구와 마주하고 있다.구화산 99봉우리중 해발 1342미터인 십왕봉(十王峰)이 가장 높다.구화산에는 99봉 외에 신광령 천향령 등 16령(岭),관음암 쌍석암 등 14암(岩),22석(石),금광동 어용동 등 12동(洞),삼각천 금사천 등 18천(泉),황석계 용계 등 10계(溪)로 유명하다.  구화산의 영기와 아름다운 산수는 일찍 많은 수련자들을 흡인했는바 진정 구화산이 이름을 내기는 신라 왕자 김교각 스님이 오셔서 부터였다. 당현종 개원(713-741) 말년,신라 스님 김교각이 바다를 건너 중국에 도착했으며 그 길로 곧장 구화산으로 찾아 왔다.당시 구화산은 많이 한적한 편이었고 김교각스님은 남릉인(南陵人) 유탕(俞荡) 등 사람들의 도움으로 4부의 불경을 완성하여 산에 공양토록 했다.그 후 김교각 스님은 몇 십년간 산에서 한발작도 나오지 않았고 어쩌면 인간 세상에서 증발한 듯 했다.실지로 동굴에서 밤낮 없이 단좌하여 수련에 들어간 것이다.배가 고프면 백토와 쌀을 섞어 먹었다. 지덕(至德,756년)초에 청양 사람 제갈절(诸葛节) 등 몇 사람이 구화산에 왔다가 김교각 스님의 고행을 보고 심히 감동되어 은자를 내어 땅을 마련,사찰을 지어 들게 하였다.건중(建中,780-783)초에 군수 장엄(张严)이 김교각 스님의 인격에 감복되어 중히 시주를 올린 한편 조정에 사찰의 편액을 내려 줄 것을 청구하여 "화성사"란 이름을 얻게 되었다.그후로 구화산은 번영 일로를 걷게 되었는바 국내는 물론 멀리 김교각 스님의 고향인 신라국에서까지 많은 신도들이 찾아와 수련할 것을 요구하였다.화성사가 일대 명찰로 자리 매김해 가고 있었지만 김교각 스님은 여전히 낡은 승복에 간단한 소식을 하는 고행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정원(贞元)10년(794) 여름 김교각 스님은 화성사에서 원적했는바 연세는 99세였다. 김교각 스님이 열반한 후 당지 승려와 백성들은 김교각 스님의 생전 소행과 열반후 자상한 모습을 보고 지장 보살의 화신으로 인정하였다.당 헌종(宪宗) 원화연간(元和,806-820)에 구화산은 정식으로 지장 보살의 도장으로 자리를 굳혀가게 된다.구화산은 그때로부터 송,원,명,청 등 조대의 보수와 중수를 거치면서 불교 문화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고 특히 명,청 시기에는 사찰만 300 여개,승려가 4,5천명이 될 때도 있었다.특히 지장 보살의 탄생일과 전도일인 음력 7월 15일과 30일이면 구화산은 그대로 향연으로 휩싸였다. 지장 보살로 추앙된 김교각 스님은 신라 33대 임금 성덕왕의 아들로 불교에 심취하여 당나라에 건너 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당시 삽살개와 차씨를 가져 왔다고 하며 당지의 "구화불차"가 바로 그거라 한다.지장은  항아리에 앉아서 열반했다고 하는데 그 육신이 등신불이 되어 오늘날까지 구화산 육신전에 모셔져 있다.그로하여 구화산은 속칭 "불국선경"이라 한다. 구화산엔 지금도 사찰이 99개가 있는데 그중 중요한 사찰 몇개 소개한다. 화성사(化城寺) 구화산이 지장 보살의 도장으로 되도록 승화시켜준 선사이다.구화산 중심의 곡지에 위치해 있는데 당나라 지덕 2년(757년)에 세워졌다. 만년선사(万年禅寺) 만년선사는 구화산의 "4대종림"에 속하는데 명나라 만력연간(1573-1620)에 해옥이라는 스님이 오대산으로 부터 와서 이 곳에 오막살이를 짓고 살면서 수련하다가 백세가 되어 원적했다고 해서 백세궁이라고도 불린다.이 곳엔 해옥 스님의 도금되어진 등신불이 모셔져 있다. 육신탑전(肉身塔殿) 구화산 신광령(神光岭)에 위치하고 있는데 지장 보살의 등신불이 모셔진 곳이다.지장 보살이 열반한 후 제자들이 이 곳에 육신탑을 세웠으며 탑앞엔 유리 장명등이 높이 걸려 있다.이 곳은 화성사와 함께 지장 보살 도장의 주요한 행사장으로 되고 있다.해마다 지장 보살의 출생일과 전도일이면 이 곳에서 법사가 진행된다.    
34    천년의 고도 경주 댓글:  조회:473  추천:0  2014-09-01
천년의 고도 경주 장학규   한국 땅을 많이 밟아본 것은 아니나 아름다운 추억은 많이 남겼다.그중에서 항상 가슴 언저리에서 숨쉬고 격정을 불러일으키는 고장이 경주이다. 천년의 고도 경주 중국에는 옛 수도가 수 백개가 된다.우리는 경주부터 해서 부여,공주,서울 ,개성,평양,졸본,국내성 등 이렇게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지만 중국의 옛 수도를 손가락으로 꼽자면 숨이 넘어간다.그래도 경주같은 천년고도는 없다.장안이 천년을 이어왔다고는 하나 딱히 계산 할 방법이 없고 그나마 북경이 정확한 계산이 나오는데 말갈족의 요나라,여진족의 금나라,몽골족의 원나라,한족의 명나라,만족의 청나라 해서 북경이 800여년이다.그러나 경주는 신라 한개 조대만도 쳔년을 유지해왔다. 아...신라의 밤이여 불국사의 종소리 들리어온다 ........  신라하면 경주부터 떠올리는 것처럼 경주하면 먼저 찾게 되는 것이 불국사이다.신앙으로 믿는 건 아니지만 불교를 많이 좋아한다.그래도 불교에 밝은 분들이 많기에 섣뿔리 불교를 설교하려는 생각이 없다.단 중국 불교와 틀리는 부분만 언급한다면 우선 일주문의 특이함이다.사찰의 간판(편액)이 걸리기도 한 일주문은 기둥 네개에 지붕을 얹는 일반적인 주택 형태가 아니고 일직선상의 두 기둥에 지붕이 얹어진 독특한 모습이였다.날듯이 하늘을 향해 고개를 쳐든 처마,상대적으로 약해 보이는 기둥 두개가 그것을 받치고 있었다.센바람이 불어치면 넘어지지 않을가 남몰래 걱정도 했었다. 일주문 지나면 천왕문이 보인다.중국에서는 흔히 천왕전으로 되어 있는데 문이라니 이상한 생각이 들어 다시 찬찬히 들여다보니 확실히 틀린 데가 있었다.대전이 아니구 말 그대로 문이다 보니 그저 지나치면서 보게 되는데 양옆으로 두 분씩 사천왕이 모셔졌는데 중국과는 달리 나무 난간으로 막아 놓고 있었다.지품도 남방 증장천왕과 동방 지국천왕은 같았으나 북방 다문천왕은 중국처럼 우산 든게 아니라 왼손에 창을 잡고 오른 손에 불탑이 들려 있었으며 서방 광목천왕은 지향대로 룡을 잡고 다른 한손에는 여의주를 든 형상으로 중국처럼 비단으로 용을 상징한것이 아니였다.곁가닥 얘기지만 불국사는 물론 해인사 통도사 할 것 없이 모두 사천왕이 잡귀를 밟고 있는 모습인데 반해 중국에서는 사찰의  취지에 따라 밟고 있는 것도 다리를 들고 있는 것도 있다.흔히 중국 사찰의 천왕전은 정면에 미륵불,뒤면에 위태불을 모시는 것이 통례인데 불국사는 그대로 문이기에 이런 절차가 있을 수가 없었다. 그곳을 지난후 또 오리무중에 빠진 것은 연화교 칠보교와 백운교 청운교에서였다.일반적으로 다리 교가 붙으면 호형의 다리여야 하는데 계단에 가까운 것이였다.아니,아예 계단이 분명했다.전에 그 밑에 연못이 있었다고는 하나 어딘가 궤변같은 생각이 들었다.그 옆 자하문을 들어서면 불국세계가 이어진다는 설명을 듣고 어쩌면 중국 사찰의 해탈교와 비슷한 역할을 노는게 아닐가 싶기도 했다. 그 다음 내용물은 거의 비슷했다.다르다면 불국사의 단청이 기 막히게 화려하고 사치하고 정교했다는 것이다.중국 사찰이 거의 비교가 안될 정도의 섬세와 조화로움에 한동안 대뇌는 정지상태에 놓이기도 했다. 불국사를 떠나서 갔던 곳이 국립경주박물관이다.책에서 감명깊게 있었던 에밀레종이 나의 마음을 사로잡았다.높이 3.75메터,입지름 2.27메터,두께가 11-25센치인 에밀레종이 한때 신라의 황페를 몰아왔다고 생각하니 그저 눈물겹기만 하다.아무리 10만근의 놋쇠로 만들었다고 해도 종 하나에 나라의 기강이 흔들렸다는 건 자원의 결핍을 되돌아 보게 하는 역사의 경종이 아니라 할 수 없다. 일명 성덕대왕신종이라 하는 에밀레종은 효성을 자처하고 나선 신라 34대 임금 효성왕이 봉덕사를 지으면서 구상되었고 35대 임금 경덕왕을 거쳐 36대인 혜공왕이 서기 771년에 완공한것이다.엄마를 찾는 어린애의 에밀레 소리가 지금도 가슴을 저민다. 에밀레종을 만들게 한 성덕왕은 불교적인 입장에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는 인물이다.중국에서 거의 신화적인 인물로 전해지는 김지장왕 보살인 김교각스님을 낳은 이가 바로 성덕대왕이기 때문이다,고국인들은 거의 모르고 있는 사실이다.지장보살이 지옥을 관장하는 보살쯤으로 알고 있어 민망할 때가 많다.중국 구화산에 와서 높이 득도한 김교각스님은 드디어 김지장왕보살로 높이 받들리게 되는데 세상뜰 때 년세가 99세였다.일반적으로 불교 스님들은 세상 뜨면 화장하는 것이 법이다.허나 지장은 화장하지 않고 항아리에 앉아서 열반하셨다.3년이 지나서 항아리 뚜겅을 뜯었는데 육신이 그대로 있더라고 한다.사람은 죽어서 3일후부터 육신이 썩기 시작한다.3년이 지나도록 썩지 않았다는 것은 영원히 썩지 않는다는 얘기이다.불교에서는 이런 현상을 두고 "등신불"이라고 한다.미이라와 혼동하지 말라,미이라는 사람이 죽은 다음 내장을 모두 걷고 방부제 처리를 한다.그러나 등신불은 오장육부를 모두 가지고 있을뿐만 아니라 방부제를 사용하지 않는다.그럼에도 왜 썩지 않을가?항아리 밑바닥으로 두툼하게 숯을 깔고 숨이 넘어가기 전에 항아리에 밀봉된다.몸 속의 수분이 생명과 함께 서서히 사라지고 습기가 숯에 막혀 육신을 침습하지 못한다.그래도 누구나 될수 있는 일이 아니기에 불교 역사에서 등신불이 되려고 노력한 사람은 수천이 되어도 진정 성공한 사람은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는데 그중 가장 먼저 성공하였고 신분도 가장 높은 분이 바로 지장보살 즉 김교각 스님이다.성덕대왕의 아드님인 김지장왕보살의 육신보살은 지금도 중국 안휘성 구화산에 모셔져 있다.   동양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천문대라는 첨성대,우리는 봉화대인줄로만 알았다.아니면 적의 동향을 살피는 보초막쯤으로 보였다.천문대라고는 실감이 오지 않았다. 그러나 저러나 천마총에서 또 한번 힘을 얻었다.역사를 읽으면서 항상 비해같은 걸 느꼈던 것 같다.우리가 우물가의 알 속에서 나왔소 니무 궤짝에서  태어났소 또는 닭의 자식이오 따위로 선조들의 출생 연대를 밝힐 그때 중국은 이미 백가쟁명의 춘추 전국시대와 한초전쟁시기를  넘어 오늘 중국의 판도를 만든 한나라의 전성기도 마무리되고 오늘날 우리가 즐겨읽는 삼국지연의의 그 시기가 바야흐로 다가오던 시기였다.문자가 없었고 문물이 적었던 이유가 아닐가.다행히 천마총에서만도 1만 1500여 점의 문물이 출토되었다고 하니 그보다 더 다행이 없다고 하겠다.고신라의 유일한 미술품 유물인 천마도장니는 또한 우리의 예술 역사를 더 멀리로 끌어간 유력한 증명이 되고 있다.자작나무 껍데기를 여러겹으로 겹쳐 누빈우에 하늘을 나는 천마- 그날 술을 억수로 마셨다.그리고 단란주점에 가서 목청 터지게 노래 불렀다.  ... 고요한 달밫어린 금옥산 기슭위에서 노래를 불러보자 신라의 밤노래를 경주의 밤하늘엔 아직도 나의 노래소리가 남아있다.  
33    속설 용정차 댓글:  조회:486  추천:0  2014-09-01
  속설 용정차 장학규     용정차는 3월 중순부터 따기 시작한다.청명 전에 딴 차는 명전차,곡우 전에 딴 차를 우전차라 한다. 옛적엔 숫처녀들만 차를 딸 자격이 있었다고 한다.그것도 공복에 목욕재계를 하고 맨손으로 따야만 했다.임금한테 바쳐지는 황제차는 처녀들의 가슴위에 올려놓고 말려야 한다는 뻥 같은 얘기도 전해지고 있다. 아무튼 지금은 누구나 딸 수 있다.그래도 꼭 지켜야 하는 룰이 있는데 손에 장갑 같은 걸 껴서는 아니 된다.영화에서 보던 장면과 꼭 같은데 대나무로 엮은 모자를 쓴 여인들이 갓 돋아난 애기 싹은 따서는 몸 뒤에 멘 광주리에 담는다. 그렇게 따온 것을 일단 그늘진 데서 건조를 시킨다.다음 남정들이 나와서 전기 가마를 올리고 차기름을 바른다.연후 건조된 차 잎을 가마에 넣는다.가마가 온도가 오르면 120도 되는데도 맨손으로 덖는다.일명 덖음차라고 하는 녹차는 비비고 누르고 헤집고 뒤집는 손동작이 열두가지가 된다고 한다.망석에다 비비는 보성 녹차와는 달리 용정차는 가마에서 볶기만 한다.그래서 차잎도 보성차처럼 배배 탈린 게 아니라 납작납작하다. 차 잎의 우렬을 가리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우선 차잎이 애되고 가느다란가를 보야야 한다.줄기 부분이 갈라지면 더욱 좋고.다음은 색상이 연하고 부드러워야 한다.등급이 틀린 차잎을 가지런히 놓으면 금방 판별이 된다.질 나쁜 차잎은 크고 굵고 거칠고 검다. 차는 다기에 따라서 마셔야 제 맛이 난다.육우의 "다경"에 따르면 당나라때 벌써 차를 끓이고 차를 마시고 하는 다구가 한세트에 29개가 되였다고 한다.다기 또는 다구는 강소성 이흥시에서 나오는 자사호가 가장 유명하다. 용정차는 다도 표현시 흔히 유리컵을 사용한다.컵의 내용물을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용정차의 다도는 세가지로 구분한다. 우선은 문차이다.컴에 차를 넣고 물을 4분의 1정도 따른다.마시라는 것이 아니라 냄새를 맡으라는 뜻이다.구수한 냄새는 물론이고 풀이 데쳐지는 냄새 또는 누룽지 냄새 등 맡는 사람에 따라 냄새가 틀린다. 다음은 관차이다.물을 마실 수 있을 만큼 더 부어주는데 금방 마시면 실례이다.차잎이 서서히 갈아 앉기 시작하며 물의 기운을 받아 차잎이 기지개 켜듯 쭉 펴진다.펴진 잎사귀의 모양새를 보고도 우렬을 판별할 수 있는데 좋은 차잎은 둥글고 탱탱하며 연녹색을 띠게 된다. 나중은 품차이다.채 갈아 앉지 않은 차잎을 훌훌 불어내면서 한모금 한모금씩 마신다.차향이 적어도 한시간 정도 입에 남게 된다. 용정차는 물 온도가 80도 가량이 적합하며 첫번째 우린 차물을 버리지 않는다.농도가 진해서 좀 쓰기는 해도 철관음같은 홍차처럼 첫 차를 꼭 버려야 할 이유는 없다.물론 두번째 우린 차가 가장 향기로운 것은 맞는 말씀이다. 중국에 사실이 웅변보다 낫다는 말이 있다.이론만 구구히 펼치면 너무 따분하다. 생동한 실례를 둬가지 든다면 차의 시조는 신농씨라 해야겠다.고서에 의하면 신농씨는 농업신으로 먹거리의 자연채집으로부너 인공재배로 넘어가던 시기의 사람이였다.산나물 산열매를 자기가 직접 맛보고 그것이 인체에 해롭지 않고 유익하다고 판단되면 곧바로 인공적으로 재배하였다고 한다. 이런 어마어마한 일을 하다보니 매일매일 독성이 있는 산열매나 산나물을 먹고 중독되였는데 최고로 하루에 72번 중독하였다고 한다.그럴 때마다 신농씨는 차잎을 질근질근 씹으며 해독했다고 한다. 차로 재미있는 이야기를 남긴 사람은 그래도 미국 전 국무경 키신져박사이다.1972년 중국과의 관계개선을 위해 암암리에 중국을 방문한 키신져박사는 북경에서 담판을 마치고 주은래의 배동하에 항주를 방문,용정차 두 캔을 선물로 받고 귀국한다.헬기안에서 궁금증이 한껏 동한 그는 가만히 캔을 따보았는데 아뿔사 차향이 삽시에 헬기안에 가득차는게 아니가.아차 했지만 늦었다.향을 맡은 수행인원들이 개미떼처럼 달려들어 한줌씩 쥐여가는 바람에 금시 바닥나고 말았다.서양놈들은 상급이구 어른이구 개떡처럼 알고 있으니...억울했지만 어쩔수도 없었다.후에 닉슨 대통령과 함께 와서 외교관계 건립문서에 싸인하구 다시 항주로 오게 되였는데 이번에 선물 달란 소리는 죽어도 못하겠더라.그래서 주은래더러 이게 전번에 먹던 그 차가 맞냐고 은근슬쩍 물었고 그 눈치를 보아낸 주은래가 다심하게도 또 두캔을 챙겨주었다고 한다. 아무튼 용정차는 음료수인 동시에 양생보강의 역할도 논다.피를 맑고 순하게 할 뿐만 아니라 고혈압 당뇨에도 독특한 효능을 갖고 있으며 항주 여인들은 차를 마시고 남은 찌꺼기를 욕조에 풀어서 목욕도 하는데 미용에 그렇게 좋다고 한다.    
32    천하일품 용정차 댓글:  조회:472  추천:0  2014-09-01
  천하일품 용정차   항주에 온지 얼마 안되어 내 안해가 있고 내 아파트가 있는 청도에 돌아 가게 되었는데 딴에는 인사를 낸다고 만여원 들여 용정차 한아름 사들고 친구들께 선물을 했었다.나름대로 괜찮다는 사람들인데 한번은 술을 먹다가 너 가져온게 이 식사보다 작지 않느냐는 식들로 얘기하는 것이였다.천원도 안되는 식사를 만여원의 값어치와 비기다니 몰상식해도 유분수지.억울하고 원통해도 씩하고 웃고 말았다. 부지자 불괴!(不知者不怪!)라 모르는 사람들을 어떻게 탓한단 말이.. 사실 용정차는 어디나 다 있다.북경에도 상해에도 광주에도...그러나 그게 우리가 흔히는 말하는 서호용정차가 아니라는 건 항주인을 내놓고는 잘 모른다.중국 10대 명차에 속하는 서호 용정차는 첫 차가 500그람에 2천원도 넘어 한다.재배 면적이 500헥타르가 될가..?그게 전국 각지에 널려진다면 틀림 없는 거짓말이다.그것도 첫 차는 나라 규정에 따라 일정 부분을 국가에 바쳐야 한다.용정차가 중국 전역 나아가서 세계 여러 나라에까지 수출된 이유는 아무래도 절강성 내에서 나는 절강 용정,항주광역시 지역에서 나는 항주 용정이 한몫 단단히 했다고 말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중국 10대 명차에서 톱으로 꼽히는 차는 항주 서호주변에서만 나오는 서호용정차이다! 서호용정차는 나라 국자를 쓰는 국차이고 항주는 그때문에 차의   수도로 널리 알려져 있다. 茶为国饮 杭为茶都 라는 말이 성행하고 있다.  모두 잘 아는 얘기지만 차를 크게 종류로 나누면 세가지가 있다.우선은 발효차이다.이 발효차를 세상인들은 8국 연합군이 중국 대문을 연후 차를 유럽으로 반출하면서 시간이 너무 오라 유럽 도착시 차가 떠서 생겨난줄로 알고 있는데 실제로 명나라 중기에 벌써 발효차 즉 홍차가 있었다.홍차중에서 대표적인 것은 운남성에서 나오는 기문 홍차이다.다음은 반발효차인 오룡차이다.대만에서 나오는 것이 유명하다는데...나중은 미발효차인 녹차이다.녹차중 대표적인 것이 용정차인데 이런 세가지 종류중 가장 좋은걸 뽑아 중국 10대 명차라고 하는데 서호 용정차는 그중에서도 톱으로 꼽힌다. 차를 말하면 용정차를 실례로 말하게 되는게 관습이다. 실제로 중국사람들이 차를 먹을수 밖에 없는 지리환경적인 요소가 있다.땅이 너른데다 평지가 많고 예로부터 환경보호도 잘 하지 않아 먼지가 쉽게 일어난다. 밖에 나가 한바퀴 돌고 돌아오면 기관지에 먼지가 앉아 매캐하다.그런데 기관지에 들어앉은 먼지를 청결할 방법이 없다.그래서 중국인들은 기름기와 육류를 즐겨 먹게 된다.장기간 이런 환경에서 살다 보면 그에 대응되는 음식문화,식생활이 생성되기 마련인데 기관지에 앉은 먼지를 씻어내리는 데는 기름기와 육류가 좋다는것을 알게 된 것이다.그런데 이런 음식을 먹으면 먼지는 씻어내리지만 대신 몸에는 지방질이 들어차기에 사람은 어쩔수 없이 비대해지게 된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에 오면 비대한 사람이 상대적으로 적은데 그것은 바로 차를 즐겨 마시기 때문이다.차는 지방질을 분해하는 역할을 논다. 그러나 차가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지기는 서기로 760년의 일이다.뭍 육(陆)자 깃 우(羽)자를 쓰는 육우가 "다경'을 써서 부터이다."다경"은 세계적으로 최초로 차를 재배하는 방법,차를 따는 방법,다도,다예를 상세하게 저술한 책이다.그래서 육우는 다성으로 높이 받들리고 있다.시에는 시선이 있어 이백,시성이 있어 두보,서예에는 서성이 있어 왕희지를 꼽는 것처럼 차의 성인이라 해서 다성이라 하는데 육우가 바로 그 사람이다. 육우의 인생은 기구했다.호북성 천문현 출생인 육우는 어렸을 때 부모한테 버림받은 아이였다.지나가던 스님이 발견하고 사찰에 안아다 키웠는데 지적스님이란 이 스님이 차를 많이 즐겼던 모양이었다.어린애가 귀여우니까 차를 우리게 하고 또 출장갈 때면 육우를 데리고 다니기 즐겼었다.그래서 륙우는 어려서부터 차에 대한 학문을 익히고 또 당시 유명한 인물들과 면목을 익히게 된다.그런데 아무래도 불교와는 연분이 없었는가 본다.육우가 열서너살될 쯤에 지적스님은 세상을 떠나고 그래서 그 이듬해 육우는 사찰을 떠나 정처 없는 나그네 길을 걷게 된다.그때로부터 전에 만났던 유명인사들을 차례로 찾아 다니며 차에 대한 학문을 진일보 넓이게 되고 그래서 절강성에 와서 세계적인 거작인 "다경"을 쓸 때 연세가 고작 스물 여덟이었다.지금도 절강성 호주(湖州)에 육우의 무덤이 있고 도처에 그분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우리 민족이 차를 접한 것은 통일신라때부터라고 한다.지금으로 부터 천이백여년이 되였다는 얘기인데 아이러니하게도 구화산에 갔다가 지장왕보살로 추앙된 김교각스님이 한국에서 차씨를 가져와서 구화불차가 생겼다는 설명을 들었다.김교각스님도 역시 천이백년전의 사람인데 그게 사실이라면 그전에 우리한테 차가 있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아무튼 그런 유구한 음다 역사를 자랑하기에 우리에게도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차 전문 저서가 적지 않다.그중 가장 유명한 것이 조선왕조 말기 초의선사가 쓴 "다신전"이 아닐가 싶다.초의대선사가 말씀한대로 곱씹으면 차는 아홉가지 덕이 있는데 첫째로 머리를 맑히는 두명의 덕이고 다음은 눈을 밝히는 명목의 덕이며 세째로 잠을 몰아내는 소민의 덕이요 네번쨰는 더위를 가시는 피서의 덕이고 다음은 추위를 피하는 거한의 덕이며 여섯번째는 내장을 지켜주는 보내장의 덕이요 일곱번째는 입맛을 돋우는 구미조장의 덕이고 다음은 소화를 돕는 체소의 덕이며 끝으로 마음 놓고 먹을수 있는 안심지음의 덕이라 하여 "차유구덕"이라 이름 한다.그런데 초의선사와 동시대 분이였고 동시에 스승격이였고 우리 민족사에도 아주 유명한 다산 정약용선생이 "차를 오래 마신 사람은 죽을 때 뒤틀거리지 않고 곱게 죽는다."라고 한마디 더 붙혀서 "차유구덕"을 "차유십덕"이라 한다는 설도 있다. 차를 말하면서 청나라 건륭황제를 간과할 수 없다.풍류임금이었던 건륭은 생전에 항주를 여섯번 다녀 갔는데 비행기 없고 기차가 없던 그 시절에 항주 한번 다녀 가자면 거의 1년이란 시간이 걸렸다.임금이란 양반이 자꾸 자리를 비우니 갑갑해난 신하들이 "나라엔 하루도 임금이 없어서는 안됩니다."고 충고를 하게 되었고 언론 길을 넓혀놓은 건륭도 '나라엔 하루도 임금이 없어서는 안되지만 임금은 하루도 용정차가 없어서는 안되느니라."고 억지를 부렸다고 한다. 다도에는 차를 받는 사람이 엄지 중지 식지를 모아서 테이블을 가볍게 두드리는 예절이 있는데 이것도 건륭으로 부터 기원했다고 한다.평복으로 나돌기를 즐겼던 건륭은 다방에 들어가서도 상하 구분을 하지 않고 내키는대로 부하한테 차를 부어주기가 일쑤였다.신하된 사람이 임금이 부어주는 차를 앉은 자세로 받을 순 없고 그렇다고 궁중에서 처럼 무릎 꿇고 받을 수도 없고 급한 김에 세 손가락을 모아 "무릎 꿇고 받나이다."란 뜻을 보였다는 미문이 오늘까지 전해지고 있다.이 양반이 즐겨 먹었다는 열여덟 그루 어차 나무 가 오늘날까지 남아있고 거기서 나온 백여그람 차가 경매에서 18만 인민페에 팔리기도 했다. (계속)    
31    연변거지 댓글:  조회:695  추천:2  2014-09-01
수필 연변거지 장학규 정신 없이 몇시간 줄창 일하고나면 머리가 뗑해지는 경우가 많다. 나의 경험에 의하면 그럴 때 가장 좋은 스트레스 해소 방법은 영화를 보는 것이다. 물론 나는 한국영화를 비교적 선호하는 편이다. 굳이 같은 내 민족이 만들어낸 영화여서 정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통하는 이유도 있지만 그것보다 난 한국연예인들의 헌신적인 정신에 감복하는 사람이다. 의사 배역이라면 사전에 병원에 가서 몇달동안 실습한다는 뉴스 정도는 모두들 알고 있을 것이다. 실제로 영화에서 보면 배우들의 연기가 정말 거짓없이 그대로 진실감을 주고 있다. 돌바닥에 엎어져도 치사한 중국인간들처럼 첫눈에 들통나게 애고대고 흉내만 내는 것이 아니라 아예 무릎이 벗겨져나갈 것처럼 그대로 콱 엎어져서 입은 세도 마음은 어진 나같은 순진한 관중들을 많이 울린다. 그래서 항상 한국 영화는 우선 세부부터 믿음성을 준다는 인상이다. 그렇지만 출중한 배우와 뛰어난 기술력 및 선진적인 몬타쥬수단에 반하여 내용은 언제나 좀은 이상하다는 느낌을 자주 받게 된다. 특히 중국 동포에 관한 이야기는 더욱 그렇다. 방금전에도 그렇고 그런 경우에 그렇고 그렇게  '신세계'라는 한국 영화를 보게 되었다. 일단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력에 힘입어 깡패세계의 비정과 잔혹성이 잘 표현되었기에 높은 점수를 주어야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분이 찝찝한 것은 역시 영화에서 나오는  왜곡된 우리의 군상때문이다. 느닷없이 '짱개'가 운운되는 것도 웃기고 특히 '연변거지'의 등장은 완전히 코미디 수준이다. 욕설이 난무하는 장면, 아무런 여과도 없이 타국인 또는 타민족을 비하하는 무례함, 동방예의지국이란 동네에서 어떻게 공공연하게 저럴 수 있는지 그저 경악할 뿐이다. 중국인들이 영화는 초등처럼 찍어도 "꼬리방즈"운운은 별로 하지 않는다. '연변거지'들은 옷차림부터 코미디다. 그리고 세상 구경을 못해본 우물안 개구리처럼 두리번두리번거리는게 역시 개그수준이다. 영화는 영화로만 보자 이러는 사람들이 많다. 하긴 그렇긴 하다. 재미로 한번 슬쩍 웃고 지나치면 역시 무난하다. 그렇지만 희극을 만들더라도 생활에 기반해야 하는게 상식 아닌가? 아직도 한국인들은 조선족을 시대에 뒤떨어진 '원시인'처럼 알고 있다. 세계 5대주 4대양을 휩쓸면서 중국내 가장 형세변화에 민감한 민족으로 알려진 조선족을 아직도 정글속에서 돌조각에 의지해 살아가는 야만인으로 치부하고 있다. 거의 한심한 수준에 머물러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쩌면 조선족 자체의 문제가 더 큰 거 같다. '연변' 나아가서 '연변인간'을 만들어낸게 바로 조선족 자신들이니까. 지금도 항간에서 '연변사람'하면 스케일이 작고 쪼잔하며,  둘변이 없이 고집이 세고 이익을 위해서는 쉽게 배반하며, 촌티나고 보수적이라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하다.  그런데 이런 인상은 어떤 부류에 얹어놓아도 모두 통한다. 한족들은 안 그런가? 한국인들은 또 안 그런가? 미국인도 일본인도 그렇고 그렇긴 마찬가지이다. 꼭은 어느 한 부류에 그런 묵직한 모자를 들씌워 놓는 것은 솔직히 행패에 다름 아니다. 나의 경상도 친구는 나를 만날 때마다 '연변말투'를 고치라고 야단이다. 마치 연변말투는 촌티나고 한국말 하면 글로벌화되는 것처럼. 굳이 이것도 고집이라면 고집이 맞겠지만 ...그러나 나는 연변사람이 아니다. 그러니까 우리도 고집스럽긴 마찬가지란 얘기가 아닐까. 한국말 얘기가 나왔으니 말이지만 한때 강남에서 여행사 다닐 때 하루아침에 한국말을 배워서 소화하는 사람은 대개 연변출신들이었다. 그만큼 머리 회전이 빠르다는 말이다.  지금도 우리 마누라는 사투리말을 고치지 못한다. 좀 연변여자들처럼 한국말 제대로 번지라고 충고주면 대뜸 요사스럽다고 한다. 이럴 때는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가 된다.  청도거리 나가서 단순 옷차림만 보면 한국인 조선족을 구별해내기 어렵다.오히려 한국사람들이 더 촌스러워보이는 경우도 있다. 역시 30여 년 개혁개방에 조선족들이 많이 컸다는 반증이다.  이제는 편견을 버렸으면 좋겠다. 세계가 한동네로 좁아지는 요즘 같은 세월에 이렇게 저렇게 쪽을 나누는 행실은 현명하지 못하다. 특히 자기 턱밑까지 쫓아오는 사람을 거지취급하는 건 자기가 앞서가기를 포기했다는 증명이 될 것이다.
30    인생삼매 댓글:  조회:485  추천:0  2014-09-01
수필 인생 삼매 장학규   성격 파탄 자료 수집을 하다가 참 재미있는 연구보고를 발견하였다. 거짓말 잘하는 어린이가 총명한 거란다. 그러니까 거짓말 한다고 자꾸 나무리면 애가 도리어 둔하게 된다는 것이다. 곁들여서 성년 남성은 매일 두번 정도, 성년 여성은 매일 세번 정도 거짓말을 한다는 신빙성 높은 사례까지 내놓았다. 어쩌면 진실한 인간이라면 거짓말을 아니 한다고 뻗대지는 못하리라. 하긴 행사장이나 스크린에서 "인민을 위해 복무" 어쩌구 "청렴한 간부" 저쩌구 "인민의 노복" 그쩌구 지랄나발 떠는 넘팽이들일수록 생활속에서는 더 거들먹거리고 더 부패하고 더 사치 부리는 것을 우리는 너무 많이 보아왔다. 그런데 거짓말도 양면의 칼이다. 선의의 거짓말은 이해가 쉬워도 위 사례같은 경우는 참새가 방아간 지나가듯, 눈 감고 아웅하듯 하는 철면피한 거짓말이다. 시커먼 속이 뻔히 들여다 보이는 데도 거짓말로 갑을 만들어 한사코 그속에 숨어드는 그런 불쌍한 인간도 우리 주위에 참 많은 거 같다. 하다면 거짓말을 계속 밥먹듯 하도록 방치해야 하는 걸까? 난 그래도 애한테 거짓말은 좋은 것이 아니라고 가르치고 싶다. 천재의 공부 10여 년전에 목단강 내 침실에서 한춘 선생님과 하루밤을 함께 보낸 적이 있었다. 내가 책을 즐겨 보는 것을 잘 아시는 선생님께서 느닷없이 "너 책 보면서 얼마를 배우냐?"는 아리숭한 질문을 하여왔다. 별 생각없이 "책 한권 보면 한마디 정도 남지 않을까요?!" 희미한 대답을 했더니 선생님이 사정없이 " 너 대단하구나. 한권 보면 한마디를 배우고? 난 몇권 보아야 한글자나 남을까?!" 하고 질타하는 것이었다. 그뒤로 나는 책을 보고 남한테 어떻게 감수가 좋았다는 말을 감히 못한다. 그런데 살다보면 재미있는 일이 많다.  어느날 책 한권이 아니라 한권의 한마디를 보시고 반시간 정도 감수를 표달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참 세상은 요지경이란 생각 아니할 수 없다. 원래 우리 사는 세상은 이렇게 다채롭고 다양하고 다각적이고 다차원적이고 ...다분하게 싱거운 세상인 것인가??? 즐기는 삶 솔직히 내 삶은 참말로 힘들었다. 내 글마디 글마디에 아프고 힘들고 멍들어진 흔적이 그대로 묻어있다. 그런데도 난 인생에 정말 충실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인가? 아플 때 상처를 감싸주는 사람이 나졌었고 힘들 때 옆에서 거들어준 친구가 있었고 멍들면 술 사주는 동료가 있었다. 그게 내 인생을 살면서 가장 값진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누가 그랬던가... 나를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건 내가 경쟁력이 있다는 말이라고... 돌이켜보면 아마 그 경쟁력이 나로 하여금 분발하여 열심히 치렬하게 살도록 한 것이 아닐까 싶다. 그만큼 난 인생을 즐겨왔었다. 너무 못나고 둔한 머리를 가지고 태어났지만 난 노력을 경주해서 살았고 그 노력이 대견하고 즐거웠었다. 지금도 나는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를 진리로 믿는다. 자기 절로 살 궁리 안하는 사람을 하늘이 미쳐서 도울손가. 무슨 일에나 적극적으로 열심히 하는 사람한테는 하늘도 슬그머니 꼬리를 내린다.    
29    우리입은 실험실이다 댓글:  조회:831  추천:0  2014-09-01
수필   우리 입은 실험실이다 장학규   신문을 배우고 꾸리면서 귀에 못 박히도록 들은 말이 있다 개가 사람 무는것은 뉴스가 아니다. 왜냐하면 개는 사람을 물게끔 생리적으로 만들어져있다. 그러나 사람이 개를 물면 그건 곧바로 뉴스가 된다.  희한한 일, 비 정상적인 일, 반서유적인 일 뭐 두루 그런게 오히려 세인의 관심을 받는다는 말인거 같다. 하긴 그럴듯도 하다. 그렇지만 세상에 절대적인 진리라는게 없는것처럼 백수년 묵은 화제를 끝없이 곱씹는것 역시 뉴스감은 아닌거 같다. 뉴스의 정의를 왜, 무엇때문에, 어째서 그 하나의 현상으로만 해석하고 귀결시키려고 하는가? 일전에도 그렇고 그런 어르신이 역시 그렇고 그런 뉴스의 케케 묵은 함의를 뉴스진물이 다 빠진줄도 모르고 장황하게 설명하여 기진맥진한 적이 있었다. 사람이 좀 나이 들면 세상 변화란것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페쇄적이 되는가 보다. 요즘도 그런 사람들을 간혹 만나게 되여 머리가 아프다. 가끔 인간들 모인 장소에 나가면 음식안정성문제가 화제에 자주 오른다. 얼굴 나타내기를 좋아하고 스스로 좀 잘났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일수록 어디서 얻어들은 케케묵은 뉴스를 금방 구워낸 바삭바삭한 뉴스인양 포장해서 떠들기를 좋아한다. 목에 핏대를 세우고 하는 소리를 들어보면 어떤어떤 음식은 이렇구 저래서 절대 먹을수 없다는 감탄들이였다. 음식이란 원래 먹는 물건이니 무엇을 먹을수 있냐를 묻는건 유치하니까 못 먹는걸 꼽아보자는 그런 제의이다. 역시 어느 시대 어느 장소나 내노라 배 내미는 사람은 모두 있기 마련이다.  그렇지만 요즘 세월에는 정말이지 도대체 무엇을 먹을수 있냐를 알아내는게 오히려 큰 관심거리라는 걸 그런 사람들이 알수 있을가? 다른 사람은 잘 모르지만 내가 먹거리 안전에 관심을 돌리기 시작한것은 아무래도 분유에 멜리민이 들어있다는 사실이 세상에 폭로되여서부터이다. 전 중국을 발칵 뒤집었던 사건이였다. 그때 늦둥이 딸애가 아장아장 걸으면서 분유를 즐겨 먹던 시기였다. 등어리에 식은땀이 흘렀다. 다행이 정부가 발표한 블랙리스트에는 우리애가 먹던 분유브랜드가 포함되지 않았다. 간신히 가슴을 어루쓸고 그뒤로 다시는 애한테 우유를 먹이지 않았다. 성장기 어린애한테는 참 불공평하고 억울한 일이였지만 도무지 계속 먹일 자신이 없었다. 애를 뭐 큰 머리 만들어서 병원에 들여보낼 리유가 별도로 있는것도 아니잖은가?! 물론 그 전에도 먹거리로 장난 쓴다는 말은 귀동냥으로 더러 들었었다. 이를테면 두부를 더 보지 좋게 하느라고 서슬을 정량보다 더 친다던가 고추가루에 밀가루를 섞는다던가 하는 소문들이였다. 그래도 사람이 죽어나갔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지금은 전혀 그게 아니다. 고추가루에 밀가루대신 벽돌가루를 섞어넣는 세상이다. 가축에게 먹이는 사료소금이나 공업용 소금이 조리용으로 둔갑한다. 우리가 무엇을 먹을수 있을가 한번 찾아보자. 쌀? 카드뮴 쌀이 대박이다. 기름? 시궁창 기름이 대세이다. 고추? 호르몬 고추가 유행이다. 오이? 밀랍 오이가 소문났다. 포름알데히드 배추도 꽤나 유명하다. 디디브이피를 사용한 생강이 널리 알려졌다. 버섯에 유황 또는 황산동이 들어있다. 두렁허리에 피임약을 먹여서 풍만감을 고양시켰다. 인조계란의 노란자위는 공처럼 탄력성이 강하다. 돼지고기에는 클렌뷰터롤을 가미한다. 소세지를 임파선 돼지고기로 만든다는건 이미 비밀이 아니다. 도무지 재래시장 물건이란게 그저 살인도구같아 무섭다. 그러면 슈퍼 물건을 구입하면 안전하겠지. 천만에. 2011년 8월 W마트에서 가짜 녹색 돼지고기를 판매해 공상국에 의해 처벌을 받았고 2012년 1월 문제갈비의 증서를 위조해 판매한 사실이 폭로되기도 했다. 2011년 11월 C사가 요구르트에 독성이 강한 살충제를 사용해 해당 요구르트를 마신 소비자가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으며 2012년 4월 염소 표준 함량을 초과한 유명 탄산음료가 시장에서 유통된 사실이 보도되였다. 2012년 4월에는 CCTV-2에 의해 변질되고 썩은 호두, 캔디드 등이 대형마트 C사와 W사에서 판매된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나가서 해놓은걸 먹는 경우는 더욱 지옥이다. 꼬치는 쥐고기로도 만든다. 인조 돼지귀가 화제를 모으는 와중에 페기 동물내장, 썩은 두부튀김, 수단홍이 든 훠궈 등이 자기도 뉴스감이라고 앞다투어 나선다. 햄은 클렌뷰터롤을 먹인 돼지고기로 만들고 요구르트, 과일젤리, 캔디 등에는 발암물질 크롬이 든 젤라틴이 함유되여있다. 수단홍은 색을 올리는데 사용되면서 오리알, 고기류에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살충제인 디디브이피는 모든 농작물에 사용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학교 다닐때 난 화학과가 가장 싫었다. 이산화탄소요 나트륨이요 하는게 딱 난해한 우주의 부호같아서 알아듣기 어려웠다. 그런데 나이 마흔이 넘어가면서 화학 명사들이 아주 쉽게 기억되기 시작했다. 무슨 포르말린이요 플라스티사이저요 카드뮴이요 암튼 그렇고 그런것들이 어디에 어떻게 들어있다는것을 바로 말할수 있는것은 아무래도 우리 입이 화학 실험실이 되여지면서다.  사람들이 수만년 먹어온 물건들을 두고 이제 와서 도대체 어느것을 먹을수 있냐를 다시 고민해야 하는 오늘의 현실이 감사하다고 해야 할가! 먹어야 살수 있는 인간에게 무엇을 먹을수 있냐가 뉴스로 부상했다면 좋은 일로 치부해야 할가! 아무튼 오래 살고 볼 판이다.            
28    위기냐 쓰나미냐 댓글:  조회:487  추천:1  2014-09-01
위기냐 쓰나미냐 장학규       구정연휴기간 홍콩에 다녀온 한 지인이 홍콩신문 몇장을 필자한테 갖다주었다. 신문을 꾸리는 사람이라고 가끔 좋은 자료들을 챙겨다주는 고마운 친구였다. 그 신문들을 뒤적이다가 퍼그나 생동하고 형상적인 단어조합을 발견하고 한동안 흥분되었었다. "금융쓰나미!" 역시나 세계 금융중심으로서의 홍콩인들의 사유가 민첩하고 관점이 독특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번의 미국발 서브프라임모기지사태를 두고 우리는 지금껏 "금융위기"란 말로 지칭하고 대처했던 것이다. 아니, 이름은 대수 지어놓고 사태 그 자체만을 주목해온 거 같다. 이렇게 지적하고보니 "위기"와 "쓰나미"는 표현상의 차이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심리에 끼치는 영향은 엄청난 차이를 보인다. "쓰나미"의 사전적 해석은 "지진성 해일로 조석파라고도 하며 주로 해저 지진에 의해 발생하는 갑작스러운 해일파"라고 한다. 그러니까 "쓰나미"는 "갑작스러움"이 돌출되고 "순식간"으로 규정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우리한테 깊은 인상을 심어준 쓰나미 해일로는 2004년 12월 26일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섬에서 발생했던 사건이 아닐가 싶다. 9급 지진으로 인해 발생했던 그번 쓰나미는 눈깜짝할 사이에 20여 만 명의 생명을 앗아갔었다. 사람들은 쓰나미의 위력에 놀랐고 깊은 공포심에 사로잡혔다. 반면에 "위기"는 강도가 상대적으로 좀 약한 느낌이다. "위험한 고비나 시기"라는 뜻풀이만 보아도 마음에 그늘은 지어도 심장이 그대로 멈춰질거 같은 상황은 아니다. 대신 꽤나 지루한 시간이 필요하고 상처도 오래 지속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 대표적 례로 역시 미국으로 인해 발생했던 지난 세기 30년에 발생했던 경제공황을 들 수 있다. 그 전의 잠복기로부터 위기가 해소된 때까지 지꿋게 10년을 이끌어간 그번 위기에 미국 전체 은행수의 3분의 1 되는 9천 여 개 은행이 파산되면서 엄청난 파장을 일으키기도 했었다. 이제 두 사건을 되새겨보니 홍콩인들의 판단에 손을 들어야 할 거 같다. "쓰나미"는 순간적인 충격이 강한만큼 고통도 크지만 회복 역시 빠르다. "위기"는 잉태, 산고, 회복이라는 "타임머신"이 작동하기에 작은 상처가 긴 아픔을 몰아온다. 비유해 말하면 "쓰나미"는 사고를 당해 팔다리가 떨어져나간 거라면 "위기"는 암이나 당뇨에 걸린 형국이라고나 할가. 그러니까 이 글은 현상 그 자체로 말하면 "쓰나미"가 더 가까울 수가 있다는 말이다. 경제는 잘 모르지만 지구상 누구나 느끼는 "추위"를 체감하기는 역시 같은 입장이고 저 앞에서 뜨거운 열기가 서서히 떠오르는 징조를 피부로 느끼기는 너나없이 마찬가지이다. 일전에 "중국경제 바닥을 지났다."란 기사가 떴다. "쓰나미"가 지났다는 얘기일지도 모른다.      
27    선택이 인생 그라프를 좌우한다 댓글:  조회:522  추천:0  2014-09-01
선택이 인생 그라프를 좌우한다 장학규   주식에 재미를 붙힌지도 여러해된다. 주식을 놀면서 인생도 주식처럼 변화무쌍하고 한치의 앞마저 바라보지 못할만큼 도박성이 강하다는 생각을 가끔 해왔다. 이미 개장된 인생은 마냥 상한가를 기록하며 상승랠리를 지속하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언제까지 끝없는 하한가에 주저앉아 뭉개지도 않는다. 인생 그라프 역시 등락을 거듭할수밖에 없다. 널뛰기 장세에서 상승세를 잡으면서 여유로움을 즐기는것도 물론 중요하겠지만 강보합세 정도로 마감하는것도 밑지는 장사는 아니다. 잡주나 저가주만 피해도 역시 아름다운 인생이 될줄로 믿는다. 실적주를 거머쥐었다 해도 강장세가 아니면 추락을 피면할수 없듯이 가끔은 테마주나 주도주가 상위권에 랭킹되는 경우가 흔하다. 그때면 손바꿈은 반드시 필요하다. 인생도 따져보면 그렇다. 솔직히 인간은 필경 성인이 아니기에 살아가면서 주식투자자처럼 시행착오를 자주 번복할수밖에 없다. 주먹을 불끈 쥐고 허겁지겁 정신 없이 달리다가 잠간 스톱하고 돌아보면 인생은 온통 후회와 허무, 그리고 상처로 얼룩져 있는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때 좌클릭하지 말고 직진했을걸, 우클릭보다는 잠시 후퇴가 좋았을걸 이런 아쉬움은 고비마다 가시처럼 박혀있다. 이런 마음의 가시는 육체에 박혀진 가시처럼 뽑아서 바로 치유되는것이 아니다. 어쩌면 평생을 함께 하면서 우리의 육신을 좀먹고 아프게 할수도 있다. 그래서 인생은 매 걸음마다 선택과 판단, 결정이 더없이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그저 기분내키는대로 살아가는 인생은 두더지 이상으로 해괴하지 않다. 그건 자기 자신에게 책임지지 않는 노릇인 동시에 남에게 해를 끼치는 단초일수도 있다. 그라프는 미리 그려지지 않는다. 어떤 마음 자세를 가졌냐에 따라서 그라프는 좋게 또는 나쁘게 그려지게 된다.  
26    저 푸른 하늘아래 댓글:  조회:542  추천:0  2014-09-01
창작수기 저 푸른 하늘아래 장학규   . 청도에 와서 거의 아침마다 눈쌀을 찌프리게 하는 일이 꼭 하나 있다. 아파트 8층에서 새날을 맞아 눈을 뜨기 바쁘게 창밖에서 시뿌연 하늘이 마냥 추파를 보내는게 참말로 밉상이다. 안개와 매연으로 범벅이 된 청도의 아침 하늘은 대개 혼탁 그자체이다. 어쩜 재빛으로 이어온 내 인생과 너무나 닮아있다. 그래서 더 싫어지는지도 모르겠다. 여기서 구태여 남들처럼 내 인생을 다시 거슬어 올라가면서 구비를 훑고 고개를 더듬으며 신고스레 아픔을 재생할 필요는 없겠다는 생각이다.알만한 사람은 모두가 잘 알고있는 사실이다.그리고 내 글을 읽고 계시는 모르는 사람에게 내 삶을 알려야 할 마음의 여유도 없다.아니,그런 잔혹한 마음이 나에게는 아예 없다. 나 혼자의 아픔만으로 족하다. 괜히 아픔을 나누어주어서 무고한 마음들이 상처받는것을 나는 원하지 않는다.실지로 내 마음속 깊은 상처는 지금 서서히 아물어가는 과정에 있기도 하다. 여하튼 내 경력은 나로 하여금 흐린 하늘을 질색케 한다. 명랑하고 발랄한 푸른 하늘은 지금까지 내가 동경한 바이다. 어렸을적 고향의 하늘이 기억에 새롭다.티 한점 찾아볼수 없이 맑고 깨끗했던 하늘이 태반이였다.사람의 모습이던것이 급작스레 짐승의 형상으로 변하고 산수가 불시에 수목으로 바뀌는 흰구름의 조화는 신비하기만 했다.봄이면 아지랑이 몰몰 피여오르는 가운데 강남 갔던 제비가 하늘을 오르락 내리며 회귀를 자랑했고 여름에 접어들기 바쁘게 싱그러운 꽃향기에 실려 잠자리들이 너울너울 춤춘다.가을이면 애처로운 울음을 남기며 새로운 서식처로 자리를 옮기는 기러기떼가 줄 이었고 겨울이면 솜같이 가벼운 눈꽃이 하늘하늘 춤추며 내렸었다.그대로 랑만이였고 동화였다. 문학의 꿈도 그런 하늘아래에서 자기도 모르게 심어졌을것이다.추위와 배고픔에 시달리면서도 애모쁜 그 싹을 보듬고 키우는 재미에 마냥 뜻깊은 나날들이였다. 그러나 하늘도 때묻는 날이 있다는것을 비로서 알게 된것은 썩 후날의 일이였다.어느날 문뜩 느꼈을 때는 하늘뿐만이 아니라 내 인생도 뽀얏게 먼지가 내려 앉고 있었다.숙성하는 사유와 넓어지는 안계와 더불어 하늘이나 내가 때 묻는 폭이 정비례했다. 그러나 그 잃어진 동화때문에 내 붓날이 무뎌졌다면 좀 애매한 일이다.오늘까지 10년이 되여오는 결코 짧지 않은 세월동안 나는 저 푸른 하늘의 사랑과 혜택을 한껏 받았었다는 사실을 한시도 잊지 않았었다.따라서 그때의 기쁨과 즐거움을 시종 가슴속에 간직하고있었다.실지로 나는 줄곧 옛날 내가 소유했던 저 푸른 하늘을 찾고 있었다.그 하늘에 나의 새로운 동화와 스토리를 마음껏 쓰고싶다는 욕망을 억지로 묵새겼을 뿐이였다. 이제 충동을 억제 못하고 붓을 들었으나 너무 힘겹다.문제는 하늘이 너무 흐려졌고 오염 또한 심했기 때문이다.여기저기서 시커먼 굴뚝들이 역시 시커먼 연기를 사정없이 내뿜는것을 보고 우리가 가지고있는 지우개로는 절대 닦아낼수 없는 먹칠이 되여있다는 현실을 절감해야 했다.거기에 아무리 아름다운 이야기라도 곱게 씌여질리 만무하다.간신히 한자한자 적느라 많이 지쳤다. 어제 아침,나보다 일찍 일어난 세살난 딸애 혜경이가 창밖을 가리키며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말하는것이였다. “아버지 또 안개 꼈어!” “응, 글쎄말이다.” “나 안개 싫다.하늘 하나 만들어줘 !” “아!” 나는 불시에 튀여일어나며 뒤통수를 탁 쳤다.옳다 옳거니,왜 여직 지울 궁리만 했을가? 새로 만들 궁리는 못하구…어쩜 세살 먹은 애보담 못하단말이! 정말이지 우리의 후대들을 위해서 새로운 하늘을 만들어야 할 시점에 다달은것이다.우리의 생존지형이 새롭게 형성되는 그 우에 티 없이 맑고 깨끗한 푸른 하늘을 만들자.그 하늘아래에서 그에 걸맞는 우리의 삶의 이야기를 새롭게 엮기로 하자.                                              청도 해변가에서                                              2007년 12월 23일 
25    챔피언은 아니더라도 베테랑은 되자 댓글:  조회:601  추천:0  2014-09-01
창작수기 챔피언은 아니더라도 베테랑은 되자 장학규   글을 갓 시작했을 무렵 어느 한 선배문인이 나더러 3류 작가로 머물거면 글쓰기를 아예 포기하는게 좋을거라고 충고했다. 글을 쓸바에는 프로가 되고 챔피언이 되라는 격려의 말이였다. 그로써 어느덧 30년 세월이 흘러 나도 이젠 귀밑머리가 희끗해나는 중년의 나이가 되였다. 그러니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후배들에게 추격당하여 프로나 챔피언의 자리를 접해보지도 못하고 빼앗겨버린 초라하고 찌질한 모습이다. 그만큼 나는 지금도 아주 힘들게 글을 쓰는 반편이다. 남들은 하루 저녁에도 장편을 쓱쓱 갈겨낸다는데 나는 단편 하나도 며칠씩 낑낑거려야 겨우 마무리는 모자람과 부족함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여직껏 단 한번이라도 글쓰기를 포기해야겠다는 생각은 가져보지 못했다. 부정과 의심을 거의 날마다 거듭하면서도 실패를 마음속에 담아두지 못하는 악질이다. 나에게 있어서 글쓰기는 이미 애호나 취미를 훌쩍 넘어 숙명 그 자체이다. 나는 태성적으로 아픔이라는 유전인자를 몸속에 간직하고 태여났다. 반만년의 아픔은 묵직한 십자가가 되여 나를 괴롭힌다. 내 생과 완전히 범벅이 되여 불가분리의 일체가 된 그 아픔은 나더러 평생을 두고 하소연하면서 치유하라고 촉구한다. 그렇게 나는 30년을 붓으로 약을 지었고 끝이 보이지 않는 상처때문에 오늘도 종이장에 나름대로 마구 긁적거린다. 물론 나의 성격엔 그에 알맞는 아둔과 우직이 자리잡고있는것도 사실이다. 주변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고 저 요원한 목표를 향해 달릴수있는 지구력이 있으며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수있는 인내심이 있다. 저승사자와 조우했을때도 첫돐때 쥐었던 필을 버리지 못했고 알라딘의 요술 램프를 두고 갈등을 빚을때도 운명의 신은 그 기회를 남에게 넘겨버리고 나를 책상앞에 앉혀놓았다. 가장 중요한것은 그래도 생명을 사랑하고 인생을 탐구하는 뜨거운 열정이 있기 때문일것이다. 나는 내가 챔피언감은 절대 아니란것을 잘 알고있다. 그렇지만 챔피언이 된 사람들이 밑바탕이 된 나란 이 3류 작가를 부끄럽게 생각하게 해서는 절대 안된다는것도 잘 알고있다. 하기에 나는 짧막한 글 한편을 써도 도정신해 진지하게 쓴다. 나는 리얼리즘 영향을 많이 받은 사람으로서 머리속으로만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재간이 없다. 내 글의 배경은 꼭 현실에 있고 적어도 몇번은 그 배경에 내가 직접 서보기도 한다. 원고료 3백원이 나오는 소설을 위해 나는 입장권이 90원인 로산을 세번 등반하기도 했다. 그리고 단어 하나를 위해 하루종일 인터넷 밭을 뚜지며 다닌적도 있다. 새로운 유행어를 빨리 익히기 위해 내 컴퓨터 앞엔 언제나 노트와 볼펜이 놓여 있다. 그러기에 나는 자신이 챔피언은 아니여도 적어도 베테랑 정도는 될거라고 자평한다. 챔피언에게 항상 위협이 되고 챔피언들로 하여금 언제나 마음의 탕개를 늦추지 못하게 만드는 베테랑은 역시 빛나는 3류가 아닐가 싶다.                                                     2013년 12월 15일                                                       청도 문향재에서  
24    철 한번 들어보았다 댓글:  조회:479  추천:0  2014-09-01
철 한번 들어보았다 장학규   작년 이맘 때 청도는 꽤나 추웠던 거 같았다. 아무래도 영하 10도 정도는 되지 않았을까. 이젠 기억에도 가물가물한 내 고향에서는 이 정도 추위는 "별 걸 아닌 걸 가지구" 정도로 타발할지도 모르나 청도는 그게 아니다. 눈이 쌓여지고 얼음 위로 사람이 걸어다닐 정도면 춥다고 형용할 수 있다. 그래서 지난해에는 딸애한테 썰매를 만들어 주어 놀게 했다. 동네 애들은 물론 어른들까지 희한하게 구경하는 와중에 딸애는 제법 으쓱거리며 신나게 썰매놀이를 했었다. 아열대 족속도 아닌 것들이 괜히 썰매를 비행접시만큼 신기하게 여기는 게 철부지 애한테도 크게 자랑거리가 되었던 게 분명했다. 그래서 올해는 멀리 고향에 있는 친구한테 아예 스케이트를 부탁했다. 그쪽에서도 별로 놀지 않는 물건을 내가 크게 좋아하는 그 친구가 이곳저곳 수소문해서 부쳐왔다. 대개 내 친구들은 이렇다. 나는 언제나 빈 주둥이만 가지고 다니는데 친구들은 항상 이렇다. 그런데 좀 맹랑하게 되었다. 당장 낼모레가 봄을 내다본다는 춘절인데 이넘의 청도가 도무지 추워지지 않는 것이다. 한낮은 항상 영상이고 아침 저녁으로만 영하 3~5도에서 매삼거린다. 집안에는 말 그대로 파리 친구가 시름없이 날으고 있고... 그래서 심보 사납게 만날 추워지기를 속으로 빌고 또 아파트 앞에 쉽지 않게 가로지난 강을 하루에도 서너번 나가 보군 했다. 하다못해 썰매라도 타게끔 해주어야 겠는데 손꺼풀만하게 얼어붙은 강이 금세 녹아내릴 것만 같아 어쩌지 못하고 지내보냈다. 그러다가 어제 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다가 아파트단지내의 경관 물도랑에서 동네애들이 미끄럼을 노는 것을 보게 되었다. 한낮이라 표면의 밀도가 느슨해져 칙칙하긴 해도 미끌기는 했다. 물 깊이가 20센티 정도밖에 안되어 여러번의 한밤중 영하 5도가 통채로 얼궈 놓은 것이다. 밑에는 더 이상 물도 없고 자갈돌뿐이니 꺼져내려갈 이유도 없고 그리고 한번 얼리운 것이 쉽게 녹을 도리도 없었다. 음, 아무렴 그렇지, 이거구나. 그 길로 집에 돌아와 애를 차려입히고 바로 스케이트를 들고 나섰다. 로라스케트를 타는 밑천이 있어서 서너번 흔들거리더니 곧바로 여기저기 설치고 나갔다. 오늘 금방 또 데리고 나갔더니 그제는 완전 선수급이다. 슬슬 나하고 숨박곡질도 하려고 하면서... 크고 넓고 깊은데로만 데리고 나가자던 내 생각이 얼마나 유치한 거라는 걸 바로 증명해주는 대목이었다. 작고 좁고 옅더라도 활동의 공간이 되도록 여건이 만들어지는 게 중요하다는 도리를 나는 이제야 좀이나마 안 듯 싶다. 이렇게 철이 드는 것이겠지 아마....  
23    해피 소의 해 댓글:  조회:511  추천:1  2014-09-01
해피 소의 해 장학규     기축년이 서서히 밝아왔다. 소년시절처럼 그렇게 기다리고 또 기대했던 새해는 아니었던거 같다. 어차피  흐르는 물처럼 줄창 멈춤이 없이 기계적으로 연륜을 그리며 다가오는 새해가 아닐까 싶었다.. 근데 다소 당황했던 점은 예상밖에 새해의 태양은 남달리 밝고 생기가 있었던 것이다.빛바랜 달력같이 흐리터분하고 후줄근할 거라고 짐작했던 것이 보기 좋게 빗나가고 새해의 하늘엔 꿈의 낭만이 질게 깔린 희망찬 햇살이  펼쳐진 것이다. 하긴 관성적인 사유로는 적응이 잘 되지 않는 일이다. 그만큼 지나간 한해는 정말로 돌이키기도 짜증이 나는 다사다난한 한해였던 것만은 틀림없다. 대강 세계적인 이슈가 되었던 것들만 골라도 세상이 그럭저럭 귀찮아질만 하다. 남방의 눈피해가 탄광 사고, 열차탈선사건으로 이어졌고, 사천지진참사가 가라앉지도 않았는데 올림픽성화봉송트러불이 생겨나고, 멜라민사태는 미국발 금융위기로 난장판이 된 경제를 끝모르는 시궁창으로 밀어넣었다. 정말이지 어느 하나도 머리 동이지 않고는 입밖에 내기 어려운 어마어마한 것들이었다. 대사건은 어필하고, 청도의 한겨레 사회도 솔직히 거의 실망의 변두리로  접어드는 느낌이 들었다. 매일이다싶이 파산 소식을 접하고 야반도주를 곱씹어야 하는 현실앞에서 인간의 한계를 새삼스럽게 느꼈었다. 특히 한동안 회자되었던, 홍콩동로의 어느 한식점 사장의 잠적은 가히 메가톤급이었으나 그걸 글로 다루기 어려웠던 속사정은 부끄럽기만 하다. 그러나 민족사회의 기반을 흔들어서는 안된다는 명제는 어디까지나 당위성을 가진다고 변명삼아 말하고 싶다. 내남에 결코 도움이 안되는 그런 엽기사건을 활자화하지 않았던건 지금 생각해도 솔직히 가슴은 아프나 후회는 되지 않는다.그만큼 이제 겨우 규모를 갖추기 시작한 민족사회가 더없이, 한없이 소중하다는 말이겠다. 더우기 사람마다 불황, 위기를 운운하는 이런 아수라장에서 작은 침질이 전반을 붕괴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정말 소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새해 첫날, 가장 많이 받은 축복 메시지가 "해피 소의 해"이다. 해피 뉴이얼의 "뉴"가 한자로 "소"의 발음과 동일하고 마침 금년은 또 소해이기도 하다. 자연스럽기도 하지만 기특하고 기발한 발상이어서 감개무량하기도 하다. 정말이지 우리에겐 소의 우직과 끈기가 있어야겠다고 일침을 가하게 된다. 일이 안된다고 쩍하면 뺑소니치는 건 좋은 습관은 절대 아닌 거 같다. 그리고 소다운 침묵과 감내가 필요할 거라고 충고하고 싶다. 별로 좋은 일도 아닌데 막 떠들고 다니는 것도 꼴불견이 틀림없을 거 같다. 따라서 소의 흉금과 여유를 따라 배워야 할 시점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위기에 굴복하지 않고 떳떳이 맞서 나가는 마인드는 영원히 우리가 추구해야 할 목표일 것이다. 새해는 어두움의 그림자를 털어버리고 환하고 정열적이며 진취적인 이야기를 골라서 엮도록 함께 노력하자. 해피 소의 해!    
22    험한 정말로 그럴까? 댓글:  조회:547  추천:1  2014-09-01
 혐한 정말로 그럴까? 장학규      일전 대한민국 정부 차원의 어느 언론간담회에 참석했다가 남다른 주문을 받게 되었다. 요즘 중국내의 혐한 기류가 심상찮으니 언론에서 신경을 많이 써주었으면 좋겠다는 건의였다. 하긴 메뉴를 내놓은 상대방이나 그 주문을 받은 필자나 대개 입장은 비슷할 거 같다. 모두가 중한 양국의 친선을 도모해야 하는 의무가 있고 현시점에서 어찌보면 긴박한 사안으로 떠오른 이슈인듯 싶기도 하기 때문이다. 요즘 주위 사람들로부터 자주 듣게 되는 말인데 3류 인터넷 사이트의 토론방이나 자유게시판에 들어가보면 정말 가관이라고 한다. 중국이나 한국에 관여되는 화제에는 악플내지 왜곡이 빌 새가 없다고 한다. 서로의 단점이나 열세만 끄집어내어 요리하기에 여념이 없고, 또는 전혀 없는 사실들을 날조하여 때리고 비난하며 말그대로 피 보이지 않는 전쟁에 혈안이 되어 있고 한다. 내가 유일하게 다니는 이곳 자유게이판에서도 매일 그런 싸움을 하고 있지 않는가? 단순히 사이버 공간에만 파묻혀 있으면 정말 일이 나도 큰 일이 난게 분명해 보인다. 이대로 계속 나가면 양국간 수천년간 이루어놓은 친선의 뉴대는 끊어지고 곧장 전쟁발발의 위험수위에까지 이른 것 같다. 정말로 그럴까? 솔직히 실생활에서도 이런 일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한국인의 입장에 대해 왈가왈부할 자격은 없고, 주변 중국인들의 한국인을 바라보는 시각에는 부정적인 면이 없지 않아 좀 있는 거 같다. 저 아래 글에서 누군가 말했다싶이, 우선 한국인들이 돈 냄새를 너무 피우며 다닌다는 뉴앙스가 강하다. 시장경제체제에 들어선지 어언 30년이 되는 중국인들에게 쌀밥을 때마다 먹느냐는 질문 자체가 어이 없다는 태도다. 그것보다는 돈 몇잎을 날리면서 여린 아가씨들을 농낙하고 거래처 사람들을 여지없이 낮잡아 평가하는 경향이 강하다고 한다. 여기에 수년전에 화제를 모았던 사기건들도 한몫 단단히 한것이 틀림없다. 필자가 직접 목격한 일이기도 한데 어느 한국사장은 중국 현지공장을 일임시킨 한족 공장장을 앞에 놓고 "너희 중국인들은 왜 모두 돌대가리냐?!"고 호통치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런 현상은 어디까지나 극소수일뿐이다. 실제로 중국 현지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혐한 분위기를 전혀 감지하지 못하고 있다. 일례로 한국 미다어에서 한때 플레이되었던 중국 TV프로에서의 한국드라마 소실건을 들 수 있다. 지금도 채널을 돌려보면 여기저기서 심심찮게 한국드라마를 볼 수 있다. 그리고 중국의 주류 사이트에서 한국드라마 방영을 촉구하는 네티즌들의 의견도 만만치 않다. 한국 가전제품은 여전히 인기 그 자체이고 한국 의류들은 신세대들이 선호하는 바이다. 지금은 옷차림새만 보고는 그 사람이 한국인인지 중국인인지 도무지 판별할 수 없는 추세이다. 혐한이란 말에 너무 민감할 필요가 없다. 매체에서 혐한 언론 플레이를 지나치게 한 것이 인터넷상의 싸움으로 이어졌다고 평가하면 너무 과할까? 이젠 좀 적극적인 방향으로 사유를 돌려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 물론 언론이 그 앞장에 서야 할 것은 당연한 이치일 것이다.      
21    정직이란 이름에 넋두리한다 댓글:  조회:542  추천:0  2014-09-01
  정직이란 이름에 넉두리한다                                              장학규 솔직히 요새는 신문이나 티비를 볼 마음이 꼬물도 없다.모든 메스컴이 한입이 되여서 동일한 목소리로 사천지진을 웨치고 있기 때문이다. 나도 역시 가슴 아프기는 마찬가지이다. 오늘(5월 23일)까지 희생자가 5만명을 넘어섰다.거기에 실종자가 수만이라니 아무래도 불쌍하게 저 세상으로 간 분이 10만에 육박하지 않을가 싶다.심심한 애도를 드리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원체 큰 사건이고 피해도 막심해 세상의 관심거리인건 틀림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사람 사는 세상에 이슈거리가 어찌 그 한가지뿐이랴.시시각각으로 우리의 관심을 끌고 사람들의 주목을 받아야 할 사건들이 수도 없이 발생하는데 보름이  되도록 지진 사건 하나만 들어야 하니 처참하고 암울한 기분이다. 그래서 요즘은 마냥 불안하다. 행운으로 구원된 사람들에겐 박수를 보내면서, 한편으로 순식간에 페허가 되어버린 건물들에 깔려 악 소리 한번 쳐보지 못하고 운명을 달리한채 관심밖으로 돌려진 무수한 생령들이 떠올라 가슴이 졸린다.우리도 자칫 저런 운명이면 어쩔가 하는  백일몽같고 환영같은 걱정이 앞서 도무지 잠이 오지 않는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이시각도 나는 안절부절 못하고 있다.마주켠 벽이 느닷없이 무너질것 같다.우리 아파트도 부실공사가 아닐가 태산같은 근심이 엄습해온다.아파트 구매계약서를 꺼내놓고 물그러미 들여다 보기도 한다.이게 몇급 지진을 이겨내도록 설계된것인지 요해하고싶다.발밑의 바닥이 내려앉을것 같기도 하다.공장에서 엉터리 재료로 만든것은 아닐가 의혹이 불어만 간다.그걸 알 방법이 없다.계약서에는 그런게 밝혀지지도 않았다. 이게 지금 우리의 현주소이다.우리는 지금 도처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그 중심에 애처롭게 서있는것이다. 이번 사천지진참사에서도 가장 큰 피해가 부실공사로 인해 발생했다는 지적이 나돌고 있다.몇층 되는 학교가 벽 한쪼각 남지 않고 그대로 폴싹 내려앉아 수백명의 어린 생명을 무자비하게 앗아가기도 했다. 도대체 우리의 생명이 돈앞에서 어느만큼 무기력한것인가?! 지금 젊은이들에게는 역사에 검은 글씨로 적혀진 아라비안나이트같은 사건이지만 32년전, 즉 1976년의 당산대지진을 숨쉬는 생명으로 지내온 나에게는 이번의 참사가 인명피해는 그때보다 적을지 모르나 결코 당산대지진보다 아픔이 가볍지 않다.그때는 모르는것이 너무 많았다.날마다 계급투쟁만을 부르짖던 그 시절 지진이란 맹수는 극복의 상대에 불과했었다.이런 노래까지 지어 불려진 기억이 새롭다. 7급지진 대단할게 없노라 (7级地震何所急何所急) 전투의 개선가 만리에 전해지리 (战斗的凯歌传万里传万里) … … 수십만명의 인명이 초불처럼 꺼지는 마당에 전투의 노래로 이겨내려는 그 노력이 어찌 눈물겨웁지 않으랴. 유치가 극에 달해 당산과 수천리 떨어진 우리 동네에서는 마을 확성기에서 밤만 되면 풍막을 치고 밖에서 자라고 나발 불었었다.되도록 건물과 멀리 떨어져 있고 나무밑에 서있지 말라고 교육시켰었다.곁들여 이 기회에 제국주의나 수정주의가 쳐들어올가봐 핵복사 방지로 마스크에 오줌을 누고 그걸 낀채 얼굴을 땅에 박는 비스무레한 연습도 시켰었다.지금 생각하면 어처구니없고 황당무계한 일이지만 그때는 정말 진지하게 배워주고 또 배웠었다. 지금은 어떤가? 그때보다 나아진게 별로 없다.지진이 일어나면 어떻게 해야 한다는 교육을 시켜주는걸 보지 못했다.그리고 이제는 교육 시켜준대도 정말로 믿기가 어렵다. 듣자니 지진발생시 공간이 작은 주방이나 화장실 같은 곳이 상대적으로 안전하다고 한다.벽이나 천정이 폴싹 통채로 내려앉는 확률이 큰방보다 상대적으로 적다는 것이다.그런데 그걸 누가 장담한단 말인가?물리학적이나 기하학적인 원리는 그렇다해도 건축학적으로 그렇게 만들어지지 못했는데 그런 이론을 도대체 믿을수가 있어야 말이지. 당산지진은 하나의 비극이다.무지와 몽매로 숱한 희극을 만들어낸 비극이다. 따라서 사천지진은 하나의 비애이다.자연재해이기전에 돈에 미친 인간들의 도덕의 부재와 정직성의 실추로 얼룩진 참사이다.  
20    인생은 원래 죽을 쓰며 사는것이다 댓글:  조회:544  추천:1  2014-09-01
수필 인생은 원래 죽을 쑤며 사는것이다 장학규 오래동안 련락이 단절되였던 이성 친구와 십수년만에 어떻게 메신저로 통하게 되였다. 우리 신문에서 누군가 내 메일을 보고 자기한테 알려주었다고 한다. 교원직을 때려치우고 한국에 간지 여러해 된다면서 그래도 대수 실목숨을 부지하면서 사니까 이렇게 인연이 다시 이어진다고 반가운 인사를 해왔다. 그렇게 두루 인사수작끝에 아, 이젠 가끔 외롭고 허황해요. 인생을 어떻게 살아왔는지 모르겠어요. 사람 사는게 무슨 멋인지 도무지 감이 안오네요 이런 심각한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그래서 별로 깊은 생각도 없이 한마디 내뱉었다. "인생이란게 원래 그렇게 죽 쑤며 사는거잖아." 원체 서로 허물 없는 사이여서 이런 교훈적인 냄새가 다분한 말이 나갔는지는 몰라도 가끔 나는 상대에게 사정을 두지 않는 말을 한다. 나는 선악이 좀 명확한 축에 속한다. 아프면 아프다고, 미우면 밉다고, 호감이 있으면 호감을 느낀다고 직방 대고 말하는 사람이다. 누구처럼 무엇이나 감추고 사는 노릇은 때려죽여도 못한다. 그런 표현을 하며 사는 사람들을 보면 오히려 많이 괴롭다. 그러면서 두루 포장이 잘된 사람들한테 너무 리얼하다거나 바보같다거나 또는 속에 없는 빈말을 하는 약은 사람같다는 평도 더러 듣는다. 그렇게 내 인생은 계산적으로 운영된게 하나도 없다. 학생 시절에는 갑자기 집에서 학비를 이어대지 못해 초중 3학년에서 사회로 직행했다. 고작 10원에 불과한 학비였다. 그처럼 마음이 한없이 여린 부모님들도 나의 인생길을 설계해주지 못했다. 가정을 념두에 둔 연애도 한번 해보지 못하고 남이 이어주어서 장가란것을 갔다. 연해도시진출 역시 앞으로 무슨 일을 어떻게 하겠다는 타산이 없이 그저 먹고 살기 어려워서 단행했었다. 그래서 지금도 나는 그냥 샐러리맨에 불과하다. 잘만 경영해도 두루 후회가 적은 삶일수도 있지 않겠냐싶지만 매양 허우적거리며 그때그때를 헤쳐왔었다. 몸이 오싹해나는 낭떠러지길도 걸은거 같고 가파른 비탈길도 톺은거 같다. 물에도 빠졌고 바위에도 부딪쳐보았다. 강냉이 나지면 강냉이로 밀이 나지면 밀로 조가 나지면 조로 죽을 쓰며 인생을 영위해왔던게 분명하다. 입쌀을 찾느라고 의식적으로 여기저기 눈길을 돌리지는 못했다. 그만큼 죽에 만족했었다. 그렇지만 시간의 타임머신을 타고 되돌아가면 보리고개마다 고마운 분들이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다. 어쩌면 죽을 쑤는 내가 안쓰럽고 불쌍해서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죽을 쑤면서도 살겠다고 아득바득하는 내가 대견하고 기특해서였을 가능성도 있다. 또 혹시 죽을 쑨것만치 조금이라도 이룬것이 있어 자랑스럽고 멋져서일지도 알바없다. 아무튼 나에게는 참으로 감사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그들의 따뜻한 마음과 배려가 오늘의 내가 죽을 쑬지언정 그나마 배포유하게 살아왔던 배터리로 된것이다. 그중의 한 사람이 지금 나하고 메신저로 통한 친구이다. 내가 인생의 가장 밑바닥에서 허우적거릴때 나에게 구원의 손길을 보내준 친구이다. 하루 아침에 마누라와 다 키워놓은 아들을 사고로 죽이고 나는 거의 패닉상태에 빠져있었었다. 그때 글친구였던 그녀가 예고도 없이 남편을 대동하고 우리집에 나타났다. 이럴때는 술이 제격이라며 나를 곤죽 만들고 자기도 남편한테 업혀 집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그녀는 한달 넘어 나의 말동무가 되여주었고 나더러 고통속에서 헤여나오도록 타일렀다. 후에는 사람 좋은 그녀의 남편과 더 친하게 되여 너나들이로 말을 놓고 다녔다. 물론 사람이 쇠덩이가 아니여서 미열은 10여년간 계속 남아있어 지금도 나를 시도때도 없이 괴롭히지만 내가 훌훌 털고 일어설수 있은데는 그들 부부가 가장 큰 힘이였다. 그리고 내가 고향을 완전히 정리하고 떠날때도 마지막 식사는 그들 부부와 함께 했었다. 산해관을 넘고 황하를 건넜다가 다시 장강을 뛰여넘으면서 그들의 소식을 가끔 전해들었다. 남편이 먼저 한국에 갔고 이어 그녀가 교사 사업을 때려치우고 뒤따라 한국 간다는 소식이 마지막이였다. 그리고 긴긴 십수년을 서로 소식을 모르면서 살았다. 다시 그리고 그녀 역시 죽 한번 잘 쑤면서 살고있다는 사실을 그녀의 입을 통해 듣게 되였다. 그간 남편은 딸애 대학입시때문에 집으로 돌아가고 그녀는 애의 학비를 더 벌어야 하기에 그대로 남아있다고 죽을 쑤지 않으면 안되는 리유를 그녀가 구구히 해석했다. 많이 안타깝기는 해도 솔직히 뼈를 도려내는 아픔같은것은 전혀 없다. 내가 그들보다 차갑고 리성적이기때문은 아닐것이다. 립장을 바꾸어서 그들이였다해도 나처럼 차분했을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마음으로 통한다. 세월은 흘렀어도 그러나 따스한 정은 계속 남아있다. 그녀는 나는 어떻게 사냐고 물어왔다. 시종여일 끊이없이 줄창 죽을 쑤면서 산다고 하니 그녀는 ㅎㅎㅎ 하고 흐물지게 웃는다. 그렇게 웃는걸 보니 그녀는 비록 죽을 쑤긴 해도 인생 막장으로는 직진하지 않을게 분명했다. 그것이면 충분했다. 모름지기 나의 입가에 웃음기가 걸렸던 모양이다. 빨래감을 들고 왔다갔다하던 마누라가 어느결에 들여다보고 물어왔다. “무슨 죽 쑨다는거예요?” “아니, 그저 하는 말이야.” “잘됐네요. 마침 애가 밥맛 없어 하는데 제가 빨래하는 동안 죽이나 끓이세요.” 괜히 덤으로 벌어온 일이다. 그래도 괜찮다는 생각이다. 죽 끓이라면 끓이는거지. 인생도 죽 쑤었을라니 그따위 쌀죽 하나 쑤지 못할가.  
19    天空没有篱笆 댓글:  조회:1066  추천:0  2014-08-31
天空没有篱笆              张学奎(朝鲜族) 作                                      李晶华(朝鲜族) 译 四周死一般的沉静,被笼罩在一片深深的黑暗之中。 突然,眼前一团暗黄的东西慢慢散开,迅速变成得淡粉色,然后渐渐深红如血。同时一阵钻心的剧痛不知从何处袭来,想闭上眼睛逃避,却怎么也闭不上。 “意识好像恢复了。”耳边传来极低的、完全陌生的声音。 “你以为他驾鹤成仙了吗?”这句声音沙哑的问话从鼻尖处飘来,唇齿间的气息轻轻地拂过发丝。 “怎么说呢,不过时间都这么长了,我多少这样想了。” “不会的,他的阳寿还长着呢,要想当神仙还欠很多修炼。” 过了一会儿,话音断了,周围再次陷入沉寂。 时间又过了好久,现在我也感觉到了自己正躺在什么地方。我使劲想睁开眼睛,但就是做不到。所以说,原来我根本就不知道,我的眼睛是闭着的,还是睁开后又闭上的。我现在好像在挥舞胳膊。 “无量千尊,这可不行。一动也别动,再躺一会儿。”沙哑的声音开始了哄劝。 心底响起一个声音轻轻地告诉我,这个话必须要听。于是我立即放松神经,停止了动作。很奇怪,这样一来,整个身体竟产生了腾空飞起的感觉。 俯瞰下去,连绵起伏的山脉俊秀逼人。山势虽然平缓,却覆盖着嶙峋的山石。比起树荫的葱绿,山石的灰色更加显眼,真是名副其实的石山。野生萱草争先恐后地从突兀的巨石缝中伸展出来,竞相绽放着黄色的小花,一切宛若醉人的仙境一般。 这就是那座海上第一名山吗?这里好像就是“北九水”景区。我的记忆有些模糊。 突然,不知何处传来了叮咚的水声,并且顷刻间就汇聚成震耳欲聋的瀑布声。俯视下去,瀑布一波三折凌空而下,坠入一高一低两个池塘。文雅一点可称之为潭,粗俗一点说就是水坑。上面的池塘入口像个坛子,水呈绿色,深不见底,估计有五、六米深。下面的池塘水面相对较宽,清澈见底。旁边的石柱上刻着“潮音瀑”三个大字。据悉,是当代油画家叶恭绰的墨宝。 听旁边人说,这个瀑布从下往上看时,很像密密麻麻层叠的鱼鳞,所以也叫“鱼鳞瀑”。但从上往下看时,就是被岩石劈散的水流。瀑布撞击岩石发出动听的潮声,瀑布下面碧波荡漾的池塘也让人赏心悦目。 偶尔阳光强烈时,池塘上面就有彩虹若隐若现。每到这时,坛状的池塘入口就如同通往瑶池仙境的路口,充满诱惑,仿佛笑靥如花的绿衣仙女在挥手召唤,令人心驰神往。不,是像地球引力一样,有股强大的力量在往里拽,让人很想一步上前,一把拉住仙女的手。或许能寻得见仙女们脱下来让年轻的樵夫照看的羽翼纱衣吧……刚有了这样的念头,我的身体竟然像轻盈的小鸟一样飞向天空。松树随风吟唱,彩虹也在尽情舞蹈。刚才澎湃的水声真正地清晰起来,飞溅的水花变成了五彩斑斓的花环。 然后就是一片黑暗。 仿佛在穿越静寂难耐的隧道。我正在想,自己也许在和世间万物一起疲惫地昏睡,刚才沙哑的声音又打破了沉静 “醒了好一会儿了,现在起床吧。” 我本能地瞪大眼睛一看,原来自己躺在炕上,而不是床上。显然这是某个道观的寮房。逼人的浓香扑鼻而来,洒满阳光的大窗户方向供奉着真武大帝和三官神像。 堂屋站着两个人。那个身穿蓝色长袍,头扎混元巾的年轻人无需多问,一看就知道是这个道观的道士。旁边是位60岁左右的老人,带着与年龄不符的搞笑的表情,不知怎么瞅着有些面熟。 “敢问善福寿大人是来自何方的神圣啊?”面容慈善的道士始终一贯地柔声询问。 “我是山下夏庄的,叫小锋”我慌忙起身,却发现自己没穿内衣,于是赶紧用被捂住身体。 “我是怎么来到这个仙宫的?” “上午的事你一点也不记得吗?” 上午?我只记着爬崂山北九水是从上午八点左右,转悠到第9个水塘时,日头最毒,当时是十点左右。瀑布涛声般的咆哮再次回响在耳边。天宫入口般的深潭也清晰地浮现在眼前。 “贫道去准备斋饭,详细情况请向这位询问吧。”年轻的道士让旁边香客解释,自己静静地退出了房间。一会儿,听见他低声向谁吩咐什么事。估计是到午餐时间了。 我悄悄地向老人看去,他依旧带着滑稽的笑容不说话。日本式的胡须透着残忍的感觉,给人留下了深刻的印象。我感觉这个老人始终像影子一样跟着我。 我立刻环顾了一下室内。床头整齐地放着叠好的衣服,都是些外人不太知道的登山装。我在韩国旅游时,在名品折扣店曾购置叫柯隆的户外品牌,从内衣到外套进行了包装。各制造公司都有自己的主打产品,真正的登山者不会把全套登山用品都统一成一个品牌。但我没有那么多讲究,只要防水舒适就行。有人说,旅游就是从自己呆腻的地方到别人呆腻的地方去。我也是这样,不管别人是否厌倦了这个品牌,我自己没觉得有什么不妥。 我把衣服一件一件地穿好,站在地上,心里念叨着,哦,就差登山鞋不是同一品牌。有人提醒说,登山鞋要选阿迪达斯,所以才做了唯一例外的选择。我的登山装备中,最贵的就是背囊。这个美国品牌格里高利背囊不是我买的,是别人送的礼物。当然这次上山的契机也是这个背囊。 “你去哪儿啊?哪能连个招呼都不打就走啊?”老人略带不满地嘟囔。 我没有做答,径直背起包走出门去。这是个四合院式的院落,四周都是房屋。在院子中间,香客们或是上香,或是向道士占卜问卦。 我悄悄地从左边溜进神庙,然后停止脚步,在香炉和过道间,双手合十,俯身跪拜。我就这样一步一拜地来到了供奉香炉的神坛前。虽然手中无香,但仍作出上香的动作,三拜九叩。 我走出道观,习习的春风沿着那条唯一的、蜿蜒的山路吹来。天空被密布的乌云压得很低,空气中弥漫着湿润的水雾,风一吹就仿佛有唾沫星子粘在脸上。 我想,肯定是要下雨了,便健步走上山路。路两侧可见尖尖的石头,和稀疏低矮的松树。我不知道山路通向哪里,也不想知道。我甚至连自己想去哪里、做什么都不知道。 “等一等,咱们一起走吧” 刚才那个老人肩背背包,踉踉跄跄地跟了上来。他穿着便装,从装束上看就不像登山发烧友。他气喘吁吁地走过来,瞥了一眼我,然后开始频频摇头。 “虽然我再次深切地感受到了,但世间人情可能确实原本就很薄。好容易把你救活了,可你连个谢字都没有就跑了。” “嗯?”我心中打起了问号。 “我是替道士抱不平。可是,你为什么要从瀑布上跳下啊?” 我的眼前再次浮现出通向天宫的入口,耳边响起涛声般的瀑布声。这样看来,这一切也许都是真实的。不,一定是真实的。我早上8点开始登山,10点左右到了潮音瀑。不同之处就是,我并没有跳下,而是站在碧潭入口等待仙女。我想告诉他,纵身跳下和应邀而下有本质上的区别。我分明看到有人打开绿色的门叫我进来。而且,俗人总是按照自己的立场随意解释这个世间的事。 “没必要非得用那种残酷的方式,死也有很多种方式。比如在密闭的汽车或房间内打开煤气阀,一边听音乐一边死去;割断血管后做爱,直至最后一滴血流尽。当然除了这些浪漫和刺激的方式,还有更豪爽的方式……” 这时,天空开始掉下豆大的雨点。罕有人迹的山路突然间风声大作。压至山腰的乌云,不时咣的一声炸开。雨点逐渐变大,并迅速连成了线。 老人不再说话,从背包中拿出雨衣披上,摇摇晃晃地走到前面。我也抹了一把脸上的雨水,不服气似的跟了上去。名牌就是名牌,阿迪达登山鞋抓地力极强,在水中一点也不打滑,非常舒适轻松。鞋垫厚度适中,即使逆风前进,也感觉不到累。 路过柳云亭时,我很想歇息一下,但老人一步也没停就走过去了。我愈发觉得老人身上有什么东西在吸引着我。老人似乎一整天都和我在一起。 “前面的山看起来好像一匹马趴在那里,所以叫作‘卧马峰’。从这里走出五十步,有个小山洞,去那儿避雨怎么样?” 老人也不等我回答,就顾自向山坡走去。老人仿佛对这里的地理情况了如指掌,径直找到了洞窟。 山洞又小又简陋,称其为洞窟有些名不符实。洞口就在山坡上,正上方堆着一堆石头,高可到成人颈部,宽度仅容胖点的人勉强通过,内部仅容三四个人坐,除洞口之外,都是封闭的,没有另外的出口。 “这是氰化钾,舔一下就能立刻毙命。” 老人脱下淌着水的雨衣,扔到角落,从背包中拿出比大拇指稍粗的深色瓶子,上下摇晃后,小心翼翼地放在地上。 然后又在包里翻出两瓶本地特产琅琊台白酒。这是70度的礼品酒,价格不菲。 “把酒大话人生该有多么豪情万丈。度数高就容易醉。把想说的话都说了,不留一丝遗憾,醉到极致时,把氰化钾溶进酒中最后一饮而尽,尽展君子和大家风度,这有多好。这就是我刚才说的豪爽的死法。” 老人像在说别人的事一样表情平淡,并且真的起开瓶盖,将酒倒入事先准备好的纸杯。滑稽的表情不知何时收敛起来,锐利的目光充满了慑人的杀气。 “死是神圣的,所以用轻如鸿毛和重如泰山来形容不同的死。就是说,虽然表面看起来都是死,但实际上本质都是不同的。你说说,为什么选择这种糟糕的死法。” “生意失败,欠了很多债。” 这个格里高利背囊就是罪魁祸首。对刚刚在贸易上施展拳脚的我而言,韩国的闵社长堪称是一位慧星般的恩人。他经常给我一些的订单,结帐也及时。因此,那几个月我过得非常轻松得意。闵社长口才极好,性格也豪爽。他把我带到济州岛,还亲自当导游。当时,闵社长大方地送了我格里高利背囊作礼物。我是铁杆儿驴友,非常清楚这个背包的价格。所以,当时心中涌起的激动和感动至今难忘。 不过,一切到此便戛然而止。我回国后,在没收定金的情况下,就把价值超过背囊数百倍的货发给了闵社长,但闵社长却像突然从人间蒸发了一样。没有关于收到货物的答复,手机也停用了。我急赴韩国,却发现闵社长的办公室和租住的房子也早已人去屋空。海关记录显示,闵社长按时完整地签收了货物。我找遍了所有知道的地方,告遍了所有相关的部门。等我筋疲力尽地回国时,我受骗的消息已在当地传得沸沸扬扬,家里坐满了来要钱的供货企业老板。在艰难的日子里和自己同甘共苦的妻子,脸上刚刚泛起笑容就又爬满愁苦的皱纹。 我先卖了房和车,又凑上不多的流动资金,还了一半的债。这样,做生意时结交的供货企业老板也不再催债了。老板们可能是想,反正也逼不出什么东西了,还不如给我点时间翻身。总之,我经历了人生第一个没有目标和欲望的灰色时期。我在简陋的出租屋里过着行尸走肉般的日子,今天早上突然看到角落里未打包的行李中露出了格里高利背囊,于是想也没想就踏上的登山之旅。 “来,喝一杯” 老人自己先举起纸杯一饮而尽,然后又倒了一杯递给我。 “这也不是什么大事啊。人生不过空手来空手去而已。钱是身外之物,我对它没太上过心。钱积累起来就是个数字,一旦人倒下,就全是尘烟。 我双手接过纸杯,像老人那样一饮而尽。 辣糊糊的东西顺着嗓子流下,瞬间感觉有什么东西要喷涌出来。我赶紧双手捂嘴,迅速起来跑到洞口,但嘴里什么也没吐出来。 “呵呵,烈酒得慢慢喝。” 我重新坐回来,把酒杯递给老人。 “前辈为什么来这里啊?也是有什么事吧?” “叫什么前辈啊,叫大哥就行了。” “大哥?” “是。我吧,是特意来见一位老弟的。” “嗯?” “看来你还是没全记起来啊。你纵身跳下之前,我就坐在你旁边。挺潇洒啊,说实话,虽然看着有点俗,但还挺像一幅画。所以,我就保管了你的东西。当然,救人的是池边洗手的道士。近水楼台先得月嘛。” 我想起来了,在电视中经常能看到他这样侃侃而谈的样子。难怪我感觉与他前世有缘,在什么地方见过。 “我活到现在,一次也没主动伸手要过什么。可是,总有人给我送东西。我没处保管,就装进纸箱,丢在床底。但就在我快退休时,家中突然来了几个人乱翻一通。说那些东西是赃物,全拿走了。然后宣布对我实施双开。原本就不是我的,如今拿走了,我也无话可说。已经活到了现在,就算坠入深渊也没有遗憾了。真的,这座山就像我的家一样,来过不知多少回了。有一次,还在这个洞里和两个嫩雏一样的小姐做了那种事。我受不了的是背叛。陷害、查扣和审判我的人都是曾低声下气地求过我的人。上头一句话,他们就像听到军令一样立马全体向后转了。” 老人好像真动了感情,紧捏着杯子直发抖。看到老人情绪激动,我不安地瞅向洞口。洞外大雨倾盆,昏暗的天空好像凝固了一般,四周只能听见哗哗的雨声。 突然,一个拳头大小的石头“咣”的一声从洞口坠下,随后无数的石块跟着簌簌滑落。我想起来了,进洞的时候,曾看见洞口堆着一堆石头。 “好像发生山体滑坡了。刚才就看见上面施工后的废工地了,当时还想着这很危险来着。” “这不是正合你意吗?” 已恢复平静的老人已经把手中的杯子递到了我面前。坐立不安的我接过杯子,赶紧斟上了酒。 “哦,你现在是在担心我吗?真令人感动。但是,你看,一个人走是不是有些寂寞啊?你要是不反对,我陪你。你叫我老赵吧。” 老赵非常自豪自己的姓是百家姓之首。他的运气似乎也因此而非常地好。他从太行深山里被推荐上大学,一路顺风顺水,从乡村教师一步一步奋斗到了人口数百万城市里举足轻重的人物。所以他一次也没对人生产生过怀疑。 但突然一天早上,眼前的辉煌像海市蜃楼一样消失了。老赵说,权力和金钱都是虚无的,人最痛苦的是不知向哪走。 “你见过海市蜃楼吗?我年轻时在青岛前海见过,非常壮观。” 出事后,老赵大门不出,二门不迈,每天上网消磨时间,无意间闯入了国外某自杀网站。 在那里,老赵结识了20多岁的小瞿。小瞿的网名女里女气的,言语也细腻得体,一开始以为他是个女的。恰巧两人都是青岛人,所以很快熟悉起来。通过视频聊天,才知道他是男性。 小瞿外表有些孱弱,让人情不自禁地心生怜悯。他说,自己精心饲养的宠物狗丢了,所以不想活了。老赵劝他,为这点小事自杀不值,但小瞿态度非常坚决。小瞿还说,高考落榜也是原因之一。他一直批评老赵不坚决,并且一直提议“明天就结伴自杀”。 “那好吧,就这样吧” 老赵欣然接受了提议。时间是这天的上午八点半,地点由老赵定在崂山北九水洞穴。但十点快到了,却始终不见小瞿的影子。老赵不禁苦笑着心里嘀咕,“啊,当然会这样。他这个年龄还会对人生存有很多留恋。” 老赵不怕死,但不想单独赴死。他背起背包下山,下到潮音瀑歇脚时,意外看到了我从岩石上纵身跃入水中。这真是命运的邂逅。 “我看你第一眼就喜欢上了你。因酒而醉会幸福一天,因人而醉会幸福一生。让我们今天尽情享受我们剩下的生命吧。来,干杯!” 老赵已经微醉了,虽然舌头还没乱,但身体已经打晃了。 石块不断地落下,并堆积在洞口,现在堵得只留下人头大小的孔隙。原本黑暗的洞穴更黑了。我从背囊中取出手电打开,瞬间洞穴变得明亮起来。 我俩一边推杯换盏,一边聊天。我讲述了创业的艰难,被逼债逼得几次想死。老赵说,那些老板自己都很熟悉,问我当时为什么没找他。我说:“当时我也不认识你”。老赵说,他哪怕现在出去,这帮家伙也得对他点头哈腰。老赵接着滔滔不绝地讲起了赵氏家族的轶事。 我们现在已经没有退路了。我们约定,在洞口全堵上之前,绝对不去碰氰化钾。我不知是因为这个约定,还是出于本能,总是向洞口看。不知为什么,洞口不再变小,细窄的孔隙总能透出一块天空。 雨好像要停了,轰隆隆的雷声和刺眼的闪电也消失不见了。 我突然想到,应该把自己赴死的事告诉妻子。因为妻子一直对我一心一意,如果给她留下一屁股债,还无声无息地离开,那真是太不男人了。起码应该告诉她,自己选择绝路的原因。另外,我也想对即将高考的女儿说点什么。我本能的翻起了衣袋,却发现手机放在家里没拿出来。 于是,我跟老赵借了手机给家里打电话,但洞内根本没有信号。于是我缓慢地站起来,摇摇晃晃向仅透一点光的洞口走去,再次拨打了家里的电话。电话勉强接通,刚喊了声你好二字,电话那边就响起了妻子那微变苍老而焦急的声音。 “你一整天都死到哪里去了?现在赶紧回家。” “出什么事了吗?这么急。” “上午领事馆来电话了,让你赶紧去韩国。韩国警方抓到了闵社长,还说钱能追回来。” “这有什么大惊小怪的?我已心灰意冷…” 我喃喃的自言自语,目光呆呆地注视着洞外那巴掌大的一片天,似乎隐隐地看到了天堂门前的篱笆。 “死东西,本来不想说的。我这是在医院。” 妻子的声音好像略带颤抖。 “是吗?” 我敷衍着,现在能让我的神经绷紧的东西已不多。心里头盘算的还是如何与妻女委婉的交代我不能不听从远在天那边祖先召唤的事情。 “没听到吗?我们的女儿下午突然头晕呕吐不止,医生说是神经衰弱和营养不良造成的。她心里承受的创伤和压力看来很大,现正在医院治疗…” 语速渐渐升高加快,音色也变的寒蝉凄切。 “是我们的错,是我们做错了啊!为什么让孩子来承担这份痛苦,为什么…” 我顿时惊得目瞪口呆。 是啊!孩子有什么过错?都是我的错啊。难道我还要一错再错,非要家败人亡不成? 多亏洞口没全堵上,这是多么幸运的事,上帝保祐。 刚才一直沉默不语、呆立原地的老赵急忙走过来。不知是察觉到了什么,老赵一边摇头,一边从我手中抢过手机,放入口袋,并自言自语地说:“还是活着好吧。道士也说了,你的寿命长着呢。” 嘴上说不想活,可留恋的东西实在太多。 “看来今天是不行了,从一开始就是。天空本没有篱笆,硬要画天为牢迈进去,当然行不通。” 老赵开始动手往下扒堆在洞口的石头。这可不是件容易的事,或许是这个动作引起了连锁震动,上面滚下来一堆大泥块。如果泥土继续滚落,洞口真如约定那样全部堵死了怎么办?这个念想刚一闪而过,突然洞外伸进一只纤细的手往外扒土。 “赵叔叔,您在里面吗?” 是小瞿,老赵看似孱弱的自杀伙伴。 “哦,小瞿,是我。你什么时候来的?” 老赵用手指头拼命地扒土。 “一直在山里转悠。本想放弃后下山,突然听见了说话的声音。赵叔叔,您和谁在一起呢?您不是约好和我一起走的吗?” “是啊,可事情变成了这样。《道德经》说,善为士者,不武;善战者,不怒;善胜敌者,不与。我们别整天把自杀挂在嘴边了,好吗?” “好的。” 两人一里一外拼命地用手扒石头,指尖流血也没停止。我也加入了他们。 洞口逐渐变大,虽然足以爬出去了,但我们还在忘情地扒着……  
18    하늘엔 울바자가 없다 댓글:  조회:1222  추천:0  2014-08-31
단편소설 하늘엔 울바자가 없다 장학규 사방이 쥐죽은듯 괴괴하다. 칙칙한 어둠이 깊고 무겁게 드리워있다. 문득 눈앞에 암황색 비슷한것이 서서히 펼쳐지더니 인차 연분홍색으로 변한후 또다시 피빛같은 붉은색으로 천천히 번져갔다. 그와 더불어 어딘가 못 견디게 강렬한 아픔이 침습해왔다. 피할려고 눈을 감은것 같은데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혼령이 돌아온 모양이네요.” 귀가에서 전혀 생소한 말소리가 모기소리처럼 낮다랗게 들려왔다. “선유했는줄로 아셨습니까?” 석쉼한 목소리가 바로 코앞에서 지나가는 말투로 물었다. 날숨이 머리카락을 조용히 스쳐갔다. “글쎄요. 시간이 시간인만큼 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럴리가요. 이분의 양수는 아직 길고도 깁니다.신선이 되자면 아직 수련을 많이 닦아야 합니다.” 이윽고 말소리가 뚝 끊기고 또다시 어두운 침묵이 흘렀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제는 스스로도 지금 어딘가 누워있다는 감각이 잡혀왔다. 눈을 떠볼려고 무지 애를 썼으나 웬일이지 전혀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러고보니까 원래 눈을 감고있었던건지 아니면 떴던 눈을 다시 감았던건지 전혀 판단이 안되게 헷갈렸다. 아마 팔까지 허우적거렸던 모양이다. “무량천존, 이러면 안돼요. 좀만 더 꼼짝 말고 누워있으세요.” 석쉼한 목소리가 달래듯 말해왔다. 마음 한구석에서 저 말씀은 꼭 들어야 할것이라고 속삭여왔다. 곧바로 신경을 느슨히 풀고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러니까 이상하게 온몸이 그대로 둥둥 떠서 훨훨 공중으로 날아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저아래 밑으로 쭉 펼쳐진 산이 기막히게 예뻤다. 산세는 부드럽지만 겉은 거칠게 울퉁불퉁한 바위들로 덮혀있었다. 나무의 초록색보다 바위의 회색빛이 더 많이 보일 정도로 순도높은 바위산이다. 굵은 바위덩치들이 곳곳에서 힘자랑을 한다. 거기에 노란색의 야생 원추리꽃이 돌틈사이를 이악스레 비집고 피여나와 한폭의 선경같이 매혹적이였다. 이 산이 해상제일명산이랬던가? 이곳이 북구수라는 동네였던거 같다.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느닷없이 어디선가 물소리가 똘랑똘랑 들리는가싶더니 순식간에 폭포가 되여 요란한 잡음을 만들어냈다. 우에서 내려다보니 폭포는 세단계로 꺾어져서 흘러내리면서 못 두개를 이루고있었다. 우아하게 말하면 담이고 대수 형용하면 구덩이였다. 우에 위치한 못은 입구가 항아리 모양을 하고있었는데 물속이 파아란 색을 형성하여 그 깊이가 얼마인지 전혀 알수 없었다. 5~6메터는 쉽게 될거 같았다. 아래 못은 상대적으로 넓은대신 투명하게 밑바닥을 들여다볼수 있었다. 그 옆으로 커다란 석주정이 있었는데 거기에 “조음폭포(潮音瀑)’라는 글자가 새겨져있었다. 그 글자는 특별히 당대 서화대가 엽공작(叶恭绰)이 쓴것임을 밝히고있었다. 옆사람들이 두런두런 말하는걸 들어보니 이 폭포는 밑에서 올려다보면 흩날리는 물보라가 고기비늘처럼 보인다고 하여 “어린폭포(鱼鳞瀑)”로도 불린다고 한다. 그러나 우에서 내려다보니 벼랑을 만나면서 어쩔수 없이 떨어지는 물도랑에 다름아니였다. 바위돌에 부딪치면서 생기는 조수같이 사나운 물소리는 역시 듣기에 좋았다. 그리고 그 아래 파아랗게 누워있는 못도 시원함을 풍겨주고있었다. 가끔 강렬한 태양빛에 의해 못에 채색무지개가 걸렸다 사라지군 했다. 그때마다 항아리처럼 생긴 못의 입구는 저 옥황상제가 계시는 신선세계로 통하는 길목처럼 유혹을 질질 흘려놓아 사람을 한없이 설레이게 하였다. 푸른 옷을 입은 선녀가 환한 웃음을 머금고 손짓해 부르는상 싶었다. 아니, 정말로 지구인력처럼 강하게 끌어당기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한걸음 다가가 선녀의 손을 엉거주춤 부여잡고싶었다. 혹시나 나무군더러 챙기라고 벗어놓은 날개옷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리번거리는 사이에 몸이 어느새 가벼운 새처럼 허공에 날았다. 솔나무들이 바람에 맞추어 노래를 불렀고 무지개도 사뭇 기쁜양 하늘하늘 춤을 추었다. 금방 풍덩하는 요란한 물소리가 제법 귀청을 때려왔다. 순간이기는 해도 날리는 물방울이 오색찬란한 화환으로 멋지게 변하는 모습을 볼수 있었다. 그리고 어둠이였다. 지지리도 참기 어려운 기나긴 정적의 터널을 지나온거 같았다. 어쩌면 삼라만상과 더불어 혼곤히 잠들어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다듬는데 아까 그 석쉼한 목소리가 다시 침묵을 사정없이 깨버렸다. “깨여난지 한참 된것 같은데 이젠 일어나시지요?” 본능적으로 눈을 번쩍 뜨고보니 침대가 아니고 구들에 누워있었다. 일견에도 어느 도관의 료방(寮房)이 틀림없었다. 숨을 들이쉬기 무섭게 진한 향내가 코속을 비집고 들어왔다. 밝은 해살이 비쳐드는 넓은 창문쪽에는 진무대제(真武大帝)와 삼관신상(三官神像)이 모셔져있었다. 봉당에는 두사람이 서있었다. 람색의 홑두루마기를 입고 혼원건(混元巾)을 머리에 두른 나이 젊은 사람은 묻지 않아도 이곳 도관의 도사가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옆에는 어딘가 낯익어보이는 예순쯤되여 보이는 로인이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장난꾸러기 표정을 짓고 서있었다. “선복수(善福寿)님은 어디서 오신 뉘십니까?” 인자한 얼굴의 도사는 한결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어왔다. “저 산아래 하장에서 사는 봉입니다.” 봉은 황망히 기여일어나다가 속옷 바람인것을 발견하고 급히 이불을 다시 둘렀다. “제가 어떻게 이곳 선궁에 오게 되였습니까?” “오전 일 하나도 기억나시지 않습니까?” 오전이라? 노산 북구수를 등반한것은 오전 8시무렵부터였고 아홉번째 물구비를 돌았을무렵은 해빛이 가장 따가운 10시쯤이였던 기억이 났다. 파도소리 같았던 폭포의 울부짖음이 귀가에 다시금 메아리쳤다. 그리고 천상의 입구같던 깊은 웅덩이가 선히 떠올랐다.  “빈도는 재밥을 준비해오겠습니다. 상세한건 이분한테 물어보십시오.” 젊은 도사는 설명을 옆에 선 늙은 향객한테 미루고 조용히 방을 나갔다. 이윽고 누군가에게 나지막하게 무엇을 분부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림짐작으로 점심시간이구나 싶었다. 넌짓이 로인을 건너다보니 여전히 익살꾸러기처럼 가는 미소를 입가에 띄운채 말이 없었다. 일본인같은 코밑수염이 인상적이였다. 좀 잔인해보이는 인상이였다. 어쩌면 시종 그림자처럼 따라다녔을것 같은 늙다리였다.  봉은 재빨리 집안을 둘러보았다. 머리맡에 그의 옷가지가 차곡차곡 개여있었다. 별로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등산용의류들이였다. 한국 관광을 갔을때 아울렛에서 코오롱이란 브랜드로 내의부터 자켓까지 통일하여 등산용품을 구입했다. 흔히 제조사마다 주력제품이 따로 있어 진정한 산꾼들은 등산제품을 같은 회사거로 구입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봉은 방수만 되면 되고 편하면 된다는 대수간단팬이다. 자기가 싫증난 곳에서 남이 싫증난 고장으로 이동하는것이 관광이란것처럼 봉이는 남이 싫증낼지도 모르는 브랜드를 들고 오면서도 별로 미안하거나 부끄러운 느낌은 없었다. 옷을 주섬주섬 주어입고 바닥에 내려서면서 오 그렇지 등산화만은 례외군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렸다. 누군가 등산화만은 트랙스타로 고르라고 해서 별도로 선택했던것이 유일한 례외였다. 그의 등산 장비중에서 그래도 제일 값진 것은 배낭이였다. 그것은 봉이 산것이 아니다. 미국제 그레고리 배낭은 선물로 받은것이다. 물론 그 배낭이 계기가 되여 이번 산행을 떠난것이다. “어딜 가시우? 인사 한마디 없이 그렇게 떠나는 법이 어디 있소?” 로인이 싱겁게 중얼거렸다. 봉은 그러건말건 아무 대꾸도 없이 배낭을 메고 문을 나섰다. 사합원처럼 사방이 집으로 둘러쌓인 그 가운데 향객들이 혹자는 향을 올리고 혹자는 도사님께 점괘를 묻고있는것이 보였다. 봉은 조용히 왼손편으로 따라 신묘에 들어선후 잠간 멈춰섰다가 향로와 삼보거리에서 두손을 마주잡고 허리굽혀 절을 올렸다. 연후 한발짝 걷고 또 큰 절 올리고 다시 한발짝 걸으면서 큰 절을 올리니 바로 향로가 모셔진 보단앞이였다. 손에는 미처 향을 준비하지 못했지만 향을 향로에 꽂는 흉내까지 내고 삼배구두의 례를 올렸다.  도관을 나서니 구불구불한 왼딴 산길을 따라 쌀쌀한 봄바람이 어슬렁 불어왔다. 어느새 하늘이 낮아졌고 구름이 검게 무거워왔다. 공기속에 습한 립자가 뿌려지는것 같더니 인차 바람에 딸려 침방울같은것이 얼굴에 스쳐왔다. 봉은 아무래도 비오려나보다고 생각하며 씨엉씨엉 산길을 걸어올라갔다. 량옆으로 돌부리가 들숭날숭 보였고 낮다란 솔나무가 듬성듬성 자라고있었다. 산길이 도대체 어디로 통하는건지 봉이는 알지 못했다. 알고싶은 마음도 없었다. 그리고 지금  어디로 무얼하려 가는지 그 자신도 모르고있었다. “좀 기다리시우. 같이 갑시다.” 아까 늙은이가 어깨에 멜가방을 하나 메고 허둥지둥 뒤쫓아왔다. 평복을 한 차림새만 보면 별로 산행에 익숙한 사람은 아닌것 같았다. 헐레벌떡 다가온 늙은이는 한번 피뜩 봉을 쳐다보고는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다시 한번 심심히 느낀것이지만 세상인심이란게 원래 그렇게 야박한건가보오. 기껏 살려주어도 감사하다는 말 한마디 없이 달아나고 말이오.” “…?” “내사 도사님 대신 불평하는거잖소. 근데 폭포서 왜 뛰여내리셨소?” 눈앞에 다시 한번 천궁을 향한 입구가 나타났고 파도소리같던 폭포소리가 귀가에 울렸다. 그러고보니 그게 실제로 있었던 일이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실제로 발생했던 일이 틀림없었다. 아침 8시에 등산을 시작해서 10시쯤에 조음폭포에 다달은것이다. 다르다면 봉은 뛰여내리지 않았다. 푸른 못에 입구가 있었고 거기에서 선녀들이 대기하고있었다. 뛰여내린것과 요청되여 내려간것은 본질적으로 구별이 된다고 알려주고싶었다. 분명 봉은 누군가 파아란 문을 열고 들어오라고 초청하는것을 보았었다. 그리고 울긋불긋 꽃보라가 맞이해주는것도 목격했었다. 그걸 어떻게 뛰여내렸다고 표현을 할수 있는지 리해되지 않았다. 속된 인간들은 마냥 자기 립장에 서서 자기식으로 세상을 아무렇게나 해석하는것이다. “꼭 그렇게 망가지는 방식이 아니여도 죽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소. 자동차나 방같은 밀폐된 공간에서 가스 밸브를 틀어놓고 음악을 감상하다가 가는 로맨틱한 방법도 있고 또는 혈관을 베여놓고 마지막 피 한방울 남을때까지 섹스를 하는 장렬한 방법도 있다네. 더 호방한 방법은…” 이때 하늘에서 후둑후둑 비방울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인적이 끊긴 산길에 급기야 바람소리가 요란하게 가득찼다. 산허리까지 내리드리운 검은 구름이 브르릉 떠는가싶더니 불시에 쾅하고 화려하게 폭발했다. 비방울이 굵어지면서 인차 쉴새없이 줄줄 흘러내렸다. 로인은 더이상 말이 없이 멜가방에서 비옷을 꺼내 걸치고 휘청이며 앞서 걸어나갔다. 봉도 얼굴의 비물을 훔치며 승벽하듯 뒤따랐다. 역시 명품은 명품이였다. 접지력이 좋은 트랙스타 등산화는 비물속에서도 전혀 미끌지 않고 발이 편했다. 창의 두께도 알맞춤해 바람을 안고 걷는데도 피로감이 별로 들지 않았다. 류운정이라는 정자에서 한숨 쉬고싶었지만 로인이 아무런 말이 없어 그대로 지나쳤다. 점점 로인에게 끌리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어쩌면 로인이 온하루 그와 더불어 함께 했던것 같았다.  “저 앞산이 말이 엎디여있는 모습같다고 와마봉이라고 하네. 여기서 한 오십보 나가면 자그마한 동굴이 나지는데 거기서 비를 피하는게 어떤가?” 로인은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추적추적 산비탈쪽으로 걸어갔다. 로인은 이 동네 지리를 환히 꿰뚫고있다는듯 곧추 동굴로 찾아갔다. 그것은 동굴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작고 하찮았다. 입구는 산비탈을 등지고 나졌는데 바로 우쪽으로 돌무지가 쌓여있었다. 높이는 성인 목부위 정도 높았고 비대한 사람 하나가 겨우 비집고 들어갈수 있는 넓이였다. 안에는 겨우 서너명이 앉을만큼의 공간이였고 입구외에 따로 출구도 없이 모두 막혀있었다. “이건 청산가리네. 입에 대면 즉사하지.” 로인은 비물이 줄줄 흘러내리는 비옷을 벗어 구석쪽으로 아무렇게나 던져놓고 멜가방에서 엄지손가락보다 조금 더 굵은 진한 색의 병을 꺼내 아래우로 한번 흔들어보인후 땅바닥에 조심히 내려놓았다. 연후 다시 가방을 뒤지더니 이 동네 특산인 랑아대백주 두병을 끄집어내였다. 그것은 원액 70도인 선물용 술로서 값이 만만치 않은 물건이였다. “술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진하게 삶을 론쟁하면 어찌 풍류스럽다하지 않겠소. 도수가 높은만큼 쉽게 취하기도 하겠지. 더이상 유감없이 할 말 다하고 취할대로 취한다음 마지막으로 청산가리를 타서 쭈욱하는게 대범하기도 하고 군자스럽기도 하고 얼마 좋소?! 이 방법이 아까 말하자던 호방한 죽음이오.” 로인은 남의 말을 하듯 무표정하게 지껄이더니 정말로 병마개를 따서 미리 준비해온 종이컵에 따랐다. 장난꾸러기같은 모습은 언제부터인가 사라지고 엄숙한 분위기가 흐들흐들 기름기가 번져진 얼굴에 쭈욱 깔렸다. 사람을 제압하는 살기같은것이 꼿꼿하게 날이 선 눈길속에 흐르고있었다. “죽음이란것은 신성한것이네. 그래서 홍모보다 가볍거니 태산보다 무겁거니 하면서 죽음을 달리 형용하는것이오. 말하자면 외형적으로 같은 죽음인것처럼 보이지만 실지 본질적으로는 모두가 다른것이 죽음의 실체요. 어디 말해보오. 왜 그런 어처구니없는 죽음을 선택했었소?” “장사에 실패해서 큰 빚을 지었습니다.” 그레고리배낭이 화근이였다. 무역업에 갓 올인한 봉에게 한국 민사장은 혜성같이 다가온 은인이였다. 작은 오더를 가끔 뿌려주고 결제도 깔끔하게 제때에 해주었다. 그렇게 몇달간 달콤한 밀월이 이어졌다. 달변인데다 사내답게 시원한 성격인 민사장은 봉을 제주도에 데리고가 직접 가이드역까지 맡아주었다. 그때 민사장은 통크게 그레고리배낭을 선물로 봉에게 주기도 했었다. 봉도 배낭관광족이여서 그게 어느 정도의 가치가 가는 물건이라는것을 잘 알고있었다. 그 순간 가슴 언저리까지 축축히 젖혀주던 짜릿한 감동은 지금까지도 리얼하게 남아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였다. 봉이 귀국후 그 배낭 가치의 수백배가 넘는 물건을 계약금도 없이 후불 약속으로 보낸후 민사장은 불시에 지구상에서 증발해버렸다. 물건을 받았다는 답복도 없었고 핸드폰은 이미 사용중지가 되여버렸다. 급히 한국에 달려갔으나 민사장은 사무실을 이미 물려버린 뒤였다. 전세로 살던 집도 처분한지 여러날이 되였다. 세관기록에도 민사장이 물품을 차실없이 인수했음을 밝혀주고있었다. 알만한데는 다 뒤져보고 또 걸어둘만한데는 다 신고식을 올리고 기진맥진하여 집에 돌아왔을때는 어느새 새여나간 소문을 들은 당지의 하청업체 사장들이 둥지를 틀고 앉아있었다. 째지게 가난했던 시절을 함께 했던 안해의 정말 오래간만에 피여난 얼굴이 그사이에 주름살이 한결 더 깊게 파여갔다. 일단 살던 집과 타고 다니던 차를 팔고 얼마 안되는 류동자금까지 깡그리 털어 빚을 절반나마 갚았다. 그간 거래를 틀면서 정을 쌓아왔던 하청업체 사장들도 더이상 닥달을 하지 않았다. 어차피 나올게 없으니 시간을 주자 그런 셈법 같았다. 아무튼 봉은 난생처음으로 목표도 없고 욕망도 없는 회색기를 맞았다. 세집에서 하루하루 감각도 없는 세월을 보내는중에 오늘 새벽 문득 구석쪽에 그대로 꿍져져있는 이사짐에서 비죽히 얼굴을 내밀고있는 그레고리배낭을 발견하게 되였고 그래서 그 길로 무작정 산행을 나서게 된것이다. “자, 한잔 받으시우.” 로인은 자기 먼저 종이컵을 들어 쭉 들이킨후 다시 한컵 부어 내밀었다. “별게 아니군. 공수래 공수거라 했잖소. 돈은 몸밖의 물건이라 난 거기에 대해 크게 집념해본적이 없수다. 쌓이면 수자같고 허물어지면 먼지같아서…” 봉은 두손으로 종이컵을 받아들고 로인처럼 목을 꺾고 단숨에 넘겼다. 칼같이 날카로운것이 목줄을 타고 내려가더니 순간적으로 욱하고 치밀어올라 두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급히 튕겨 일어나 입구로 달려갔으나 입에서는 아무것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껄껄, 도수가 높은 술은 얼리면서 마셔야 하우.” 봉은 제자리로 돌아와 앉으면서 컵을 돌려주었다. “선배님은 웬일로 이곳에 오게 되였습니까? 역시 사연이 있을법한데요.” “선배는 무슨…형님이라고 부르게.” “형님…?” “그래. 난 말이야. 아우를 만나려 특별히 온걸세.” “…?” “아직도 기억 못하는군. 자네가 뛰여내리기전에 난 바로 자네 옆에 앉아있었어. 멋있었네. 솔직히 속되기는 해도 한폭의 그림같았네. 그래서 자네의 물품들을 챙겼어. 물론 사람은 못가에서 손씻던 도사님이 구했지. 물가에 가까운 루대가 먼저 달을 얻는다했잖은가?!” 저런 달변을 스크린에서 자주 보았던 기억이 났다. 전생의 인연처럼 꼭마치 어디선가 낯익었던것도 그때문이였던 모양이다. “난 살면서 내절로 손을 내밀고 달라고 한적이 거의 없었어. 그런데 사람들이 자꾸 가져와서 떼맡기듯 던져놓고 가는거야. 건사할데 없어 박스에 담아 쓰레기처럼 침대밑에 넣어두기도 했어. 그런데 내일이면 곧 퇴직하는데 갑자기 여럿이 와서 집안을 뒤지는거야. 장물이라면서 싹 빼앗아가고 말이야. 그리고는 쌍개란것을 선포했지. 원래 내것이 아니니까 가져가면 뭐라나? 이날 이때까지 두루 살았으니까 나락으로 떨어진다해도 원이 없어. 정말 이 산을 내집처럼 수도 없이 다녔어. 언젠가 이 동굴에서 햇병아리같은 계집 둘을 끼고 그 노릇한적도 있었어. 내가 참을수 없는건 배신감이야. 물어먹은 넘도 차압한 넘도 판결을 내린 넘도 다 나한테 코밑치성을 했던 사람들이란 말이야. 우에서 한마디 발호하니까 바로 군대처럼 하나같이 뒤로 돌아섯 하더란 말이지.” 로인은 진실로 감정이 동한 모양으로 컵을 움켜잡으며 부르르 떨었다. 기세가 넘치는 로인의 퍼포먼스에 봉은 떨리는 눈길을 동굴밖으로 돌렸다. 창대같은 비줄기가 억수로 퍼붓고있었다. 시뿌연 하늘은 정지된듯 움직이지 않았고 사방은 비소리만 진동하고있었다. 갑자기 주먹만한 돌멩이가 쿵하고 입구로 떨어지더니 이어 가는 돌덩이들이 따라서 주룩주룩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동굴로 들어올때 우쪽에 돌무지가 쌓여있던것을 본 기억이 났다. “산사태가 발생할 모양입니다. 아까 보니 웃쪽에 시공하다 남겨진 잔해들이 불안하게 보이던데...” “그게 자네 뜻과 맞물리지 않는가?” 어느새 평정을 찾은 로인이  이미 비여진 컵을 내밀었다. 봉이 엉거주춤 컵을 받기 바쁘게 맞춤히 술을 부어주었다. “오. 지금 자네가 나를 걱정해주는건가? 감동적인데…그렇지만 여보게, 홀로 가긴 적적하잖은가?! 자네가 마다하지 않는다면 내가 배동해주겠네. 난 조라고 부르네.” 조씨는 백가성 첫글씨가 자기 성이 된것을 아주 자랑스럽게 생각해왔다. 그만큼 그는 운이 좋았다. 태항산 깊은 산골에서 추천을 받아 대학을 가면서 순탄한 인생길을 걷게 되였다. 작은 향진의 교사로부터 시작하여 수백만 인구를 가진 대도시에서 한얼굴 내놓고 다니기까지 사람들이 입에 떠올릴수 있는 공직을 하나하나 모두 겪으면서 한번도 인생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문전성시가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권력이나 금전은 허무했다고 조씨는 설명했다. 무엇보다 사람의 발길이 끊어진것이 괴로웠다고 한다. “자네 신기루를 보았는가? 난 젊었을때 청도 앞바다에서 정말로 보았단 말일세. 장관이였지.” 조씨는 두문불출하고 매일 허황한 인터넷 세계를 헤집고 다녔다. 그러다가 경외의 자살사이트에 심취하게 되였다. 거기서 갓 20대의 취라는 친구를 만났다. 아이디가 녀성화된데다가 화법이나 문장구성이 섬세하고 절제된 형태를 보여 처음에는 녀자인줄로 알았다. 마침 같은 청도 출신이여서 가까이 다가서게 되였고 결국 화상채팅을 이루면서 허무하게 남자인것을 알게 되였다. 취는 외형상으로도 애잔하게 생겨 련민을 자아냈다. 곱게 키워오던 애완견이 잃어져서 살고싶은 마음이 없어졌다고 했다. 그따위 사연으로는 자살 리유가 되지 않는다고 설복했지만 취의 태도는 굽힘이 없이 견결했다. 대학입시에서 락방한것도 원인중의 하나라면서 오히려 조씨의 당당하지 못함을 비판해왔다. 당장 래일 동반자살하자고 제의해왔다. “그래…그럽시다.” 조씨는 한마디로 흔쾌히 제의를 받아들였다. 시간은 오전 여덟시 반, 지점은 조씨가 노산 북구수 동굴로 정했다. 그러나 10시가 가까이 다가오도록 취는 나타날념을 않았다. 조씨는 씨무룩이 웃었다. (암, 그러면 그렇지. 아직은 인생이 미련이 많이 남아있는 나이이지.) 조씨는 죽음이 무섭진 않았지만 외로운 고혼이 되기는 싫었다. 멜가방을 다시 둘러메고 내려오다가 조음폭포에서 잠간 다리쉼을 하는중에 예상외로 바위돌에서 다이빙하는 봉과 운명적으로 만나게 된것이다. “첫눈에 자네가 마음에 들었어. 술에 취하면 하루 행복하고 사람에 취하면 평생 행복하다 했네. 우리 오늘 남은 평생을 즐겨보세. 자 간베이!” 조씨는 벌써 좀 취해있었다. 혀는 그나마 잘 돌아가고있었으나 몸이 휘청이였다. 돌무지는 자꾸 굴러내리면서 점차 입구를 막아올리고있었다. 이제는 얼굴 하나 내밀정도의 구멍만이 남아있었다. 원래 빛이 어두운 동굴이 더 어두워졌다. 봉은 배낭에서 비상용 후레쉬를 꺼내 켰다. 순간 동굴안이 환하게 밝아왔다. 두사람은 잔을 돌려가며 많은 말도 주고받았다. 봉은 창업의 어려움을 많이 호소했고 빚독촉으로 몇번이나 죽으려 했던 일을 돌이켰다. 조씨는 그 로반들을 거개 잘 안다면서  왜 자기를 찾지 않았냐고 타발해왔다. 그땐 당신을 몰랐잖느냐고 하니 조씨는 지금도 자기가 나가면 개자식들이 벌벌 길거라고 호기에 차서 씨벌렸다. 조씨는 조씨대로 관가의 에피소드를 끝없이 이어갔다. 그들에게 이제는 물러설 뒤길이 없었다. 둘은 입구가 다 막히기전에는 절대 청산가리를 먹지 말자고 약속했다. 봉은 그 약속때문인지 본능적으로 자꾸 입구쪽을 돌아보게 되였다. 웬일인지 입구는 더이상 막히지 않고 빠금하게 하늘을 내비치고있었다. 어쩌면 비가 멎은듯 싶었다. 으릉으릉하는 우뢰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번쩍하는 번개치는 모습도 더는 보이지 않았다. 불현듯 봉은 안해에게 자기의 죽음을 알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마음으로 봉만 믿고 살아온 안해였다. 그녀에게 빚만 잔뜩 남겨주고 소리없이 사라진다면 진정 사나이다운 처사가 아니지 않는가. 최소한도로 자기가 왜서 이 길을 택했다는 설명은 해줘야 했다. 그리고 대학입시를 앞둔 딸년에게 한마디 뭔가 말해주고싶었다. 본능적으로 주머니를 더듬었으나 핸드폰은 집에 두고왔는지 없었다.  봉은 조씨에게서 핸드폰을 빌려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동굴속이여서 신호소리가 전혀 없었다. 주춤 일어서서 입구에 남은 구멍쪽으로 비틀비틀 다가가 다시 한번 전화를 걸었다. 겨우 신호가 터져 두번도 울리지 않아 안해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루종일 어디 가 있어요? 지금 속히 집에 오세요.” “무슨 급한 일이 생겼는가?” “급한 일이 아니고 기쁜 일이예요. 오전에 영사관에서 전화 왔는데 당신더러 속히 한국으로 나가라네요. 한국경찰에서 민사장을 붙잡았는데 돈을 찾을수 있을거라네요.” 봉은 그 자리에 멍하니 굳어졌다. 입구가 다 막히지 않은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하느님 맙소서. 말 한마디 못하고 멍청하니 그 자리에 서있는 봉의 옆으로 조씨가 어슬렁 다가왔다. 무슨 낌새를 챘는지 조씨는 머리를 절레절레 저으며 봉의 손에서 핸드폰을 뺏아 주머니에 넣고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그래도 사는게 좋겠지? 도사님께서 자네의 양수가 아직 길다고 했어.” 살고싶은것은 아니라고 부정하기에는 미련이 너무 많았다. “오늘은 아닌 모양이야 처음부터. 하늘이 울바자를 치지도 않는데 억지로 그속에 갇히려고 하는건 무리지.” 조씨는 구멍쪽으로 손을 내밀어 돌을 파내기 시작했다. 쉽게 파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 움직임이 진동이 되였는지 우에서 이번에는 흙이 한무더기 굴러내려왔다. 저렇게 흙이 계속 굴러내려 정말 약정처럼 입구를 완전히 막아버린다면 어째야 하냐고 번개같이 생각을 굴리고있는데 갑자기 밖으로부터 가느다란 손이 쑥 들어와 흙을 그대로 퍼내갔다. “조씨 삼촌, 안에 계셔요?” 취였다. 나약하고 유연해보인다는 조씨의 자살 파트너 취였다! “응. 취, 나 맞아. 너 언제 왔지?” 조씨는 손가락을 부지런히 움직이며 구멍을 파나갔다. “온 하루 산을 헤맸어요. 포기하고 내려가다가 사람의 말소리를 들었어요. 조씨 삼촌, 누구랑 함께 있어요? 저랑 같이 가기로 약속했잖아요.” “글쎄 그렇게 되였구나. 도덕경에 이르기를 전쟁을 잘하는 용장은 무용을 뽐내지 않고 싸움을 잘하는 사람은 분노하지 않으며 적을 잘 이기는 자는 적과 다투지 않는다고 했네라. 우리 자살을 입에 달고 살지 말자.응?” “네에” 두사람은 안팎에서 미친듯이 손으로 돌무지를 팠다. 손끝에 피가 흥건이 흘러내리고있었지만 멈출념을 하지 않았다. 봉도 달려들어 이악스레 구멍을 팠다. 구멍은 점점 넓어졌다. 기어나갈수 있는 넓이가 된줄도 모르고 그들은 계속 파고 또 팠다. 2013년 4월 초순 청도 문향재에서  
17    필터링 댓글:  조회:987  추천:0  2014-08-31
단편소설 필터링 장학규 환은 자기가 왜서 이름마저 알바 없는 이곳으로 허둥지둥 찾아왔는지 모른다. 량쪽으로 클래식한 건물들이 우중충 들어섰고 그 가운데로 넓지도 좁지도 않은 거리가 오불꼬불 뻗어있다. 청기와 또는 회색의 기와장들이 지붕우에 스산하게 얹어져있고 칠이 덕지덕지 묻어나는 붉은색 기둥 사이로 투박한 널판자로 된 대문들이 줄줄히 열려져있다. 그 사이로 연기와 음식냄새와 서로 다른 물건들이 부딪치면서 나는 소리들이 범벅이 되여 한꺼번에 터져나와 거리를 꽉 메우고있다. 게다가 사람들이 왁작지껄 고아대는 소리도 귀가 멍멍해질 정도였다. 거리를 거닐거나 가게앞 쪽걸상에 걸터앉았거나 집안에서 기웃거리는 사람들의 옷차림새 역시 알록달록 가관이였고 몽치같은 팔뚝을 드러냈거나 아예 여러가지 동물을 문신한 알몸뚱이를 그대로 내놓은 사람들도 있었다. 아마도 처음에 환이는 배가 좀 참기 어려울 정도로 고프다는 그런 생각을 했던 거 같다. 뭔가 아무거라도 대충 요기거리가 없을가 그렇게 방안을 구석구석 뒤지다가 아무것도 나오지 않자 결김에 거리로 향한 창문을 열었다. 순간 뭔가 대뇌를 왕 하고 뚫고 지나가는 느낌이였다. 그것은 형체가 전혀 없는 소리라는 물건이였다. 최저 80데시벨이상이였다. 그 현장에 직접 몸 담으면 바로 100데시벨로 업그레이드될게 틀림없었다. 환이는 배 고픈건 잘 참아도 궁금한건 죽어도 참지 못한다. 하물며 정말로 배가 고픈데야 어쩐단말인가. 길 떠난 나그네에게는 배가 시간이고 다리가 방향이다. 환이는 그러나 급할게 없다는듯 늘쩍늘쩍 거리에 들어선다. 언제나 환이는 자신의 일을 남의 일처럼 느껴지기기 십상이다. 진실한 자기가 구경 어떤 모습인지 그 자신도 잘 모른다. 사람들이 삼삼오오 떼를 지어 오가고 여기저기서 사구려소리가 요란하다. 환이가 혹시나 제법 먹을만한 음식이 없을가고 부지런히 난점들을 살피는 와중에 마주 다가오는 웬 아가씨와 가며오며 어깨를 부딪쳤다. “땡~” 환이의 손에서 동전 하나가 대리석 바닥에 떨어지면서 저만치로 딩굴어갔다. 그것은 1원짜리 동전이였다. 환이의 왼손에는 언제나 1원짜리 동전이 쥐여져있었다. 그 동전은 요술장이인듯 가끔은 주먹속에 조용히 들어있다가 슬그머니 엄지검지중지 가운데 끼워지기도 하고 가끔은 손등을 타고 오르기도 한다. 그 동전은 환이의 호신부나 다름 없는 물건이였다. 아니, 환이의 분신처럼 10년은 그의 몸에 붙어서 함께 해온 물건이였다. 흙색이 된 환이는 세상 한번 볼만하다는듯 꼬물도 사죄할 의향이 없이 계속 두리번거리며 나아가는 아가씨를 쏘아볼 겨를도 없이 급히 동전을 뒤쫓아갔다. 다행히 동전은 행인의 발길에 부딪쳐 방향을 바꾸면서 어느 탁자밑으로 기여들어가 주저앉았다. 환이는 한달음에 달려가 탁자밑으로 무작정 기여들어갔다. 그때 누군가 발로 동전을 지려밟았다. “이봐 친구, 그게 몇푼이라고 야단인가?” 목소리가 퉁방울 굴리는 소리였다. 머리를 들어보니 온 얼굴에 구레나릇인 험상궂은 사나이가 한주먹도 안된다는듯 환이를 노려보고 있었다. 다시 탁자밑으로 주위를 둘러보니 다리 네쌍이 더하기 모양으로 마주 앉아있었다. 마작판이였다. 구레나릇이 나무토막같은 다리를 치우고 동전을 집어들어 환이앞에 내밀었다. “마침 잘 됐어. 나 잠간 소피 보고 올테니까 나대신 두판만 놀아줘. 딱 두판.” 환이가 보배인양 동전을 공손히 받아들기 바쁘게 구레나릇은 꺽쇠같이 우직한 손으로 환이의 팔목을 잡아 일으켜 의자에 눌러앉혔다. “난 잘 놀줄 모르는데…” “멱은 볼줄 안다는 말이지? 그치?” “거야 뭐…” 상대 세사람은 모두 예순이 넘어보이는 사람들이였다. 그중 두사람은 령감쟁이였는데 둘 다 겨릅대처럼 강말라있었다. 나머지 한사람은 로친네였는데 두 령감과 정반대로 부쩍 몸이 퍼져있었다. 메주처럼 커다란 젖두덩이 웃옷을 고무풍선처럼 불려놓고있었다. 로친은 입술을 벌겋게 칠하고 거기에 담배를 끼워물고있었다. 구레나릇이 화장실에 다녀오는 사이 요청한 두판보다 한판 더 놀았다. 정확히 한고패가 돌아오는셈이다. 마작은 동네마다 노는 방법이 달라 시작하기전에 관련 규정과 방법들을 묻느라고 시간을 어지간히 랑비해서 그렇지 그렇잖으면 아마 두판은 더 놀았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세판에서 환이가 한판 “후”해서 구레나릇이 내놓고 간 돈이 오히려 불어나서 다행이였다. 환이는 주사위를 손에 들고 아까 구레나릇이 사라지던 쪽으로 바라보았다. 저만치에서 구레나릇이 돌아오다가 어떤 안경쟁이와 악수를 나누며 지껄이는 모습이 보였다. 허리를 굽히고 얼굴에 비굴한 웃음을 떠올리고있는것을 보니 상대가 꽤나 세력이나 재력이 있는 사람인거 같았다. 그런 대면이라면 오래가지 않는다는것을 환이는 잘 알고있었다. 패쪽을 쌓는 시간이면 맞춤하게 돌아오겠지싶어 느끗하게 담배 한가치 피워무는데 마주켠에 앉은 로친네가 꽥 소리질렀다. “이 자식아, 세월 다 간다. 얼른 안 던져?” 환이는 자기가 왜서 이런 재수없는 자리에 캐스팅되어 이 수모를 당하는지 그저 억울하기만 했다. 주사위를 치고 패쪽을 다 집어올때까지도 구레나릇은 오지 않았다. 다시 눈길을 피뜩 들어 건너다보니 빌어먹을 구레나릇이 그사이 안경쟁이를 놓아보내고 이번에는 거리에서 군밤을 파는 웬 아낙네의 어깨를 끌어안고  히히닥거리고있었다. (배포 하나는 두둑한 넘이네.) 이번에도 환이가 용케 후했다. 그전부터 마주켠 로친네의 신경질이 슬슬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 먼저는 웃집 령감이 동작이 꿈뜨다고 “벌써 손가락에 중풍 온겨?” 하고 야단하더니 다음엔 아래집 령감이 패 잘못 던져서 졌다면서 “머리가 비면 팔다리가 고생해.”하고 고아댔다. 짓는 개는 물지 않는다는것을 잘 아는 환이는 히죽히 웃으면서 “지랄 고만하셔.”하고 시까슬렀다. 길길히 뛸것만 같은 로친네가 꼬리를 내린 대신 어느새 돌아온지도 모르는 구레나릇이 환이의 뒤통수를 손으로 가볍게 쳤다. “과부집 숫캐처럼 함부로 나대면 죽는수가 있어.” 몽타주 하나는 기똥차게 잘 나올거 같은 구레나릇이 자리를 내주려고 일어나는 환이를 그대로 다시 눌러 주저앉혔다. “그만 놀고 밥 먹으러나 갑시다. 내 한턱 낼게요. 친구도 같이 가.” “갑세. 가짜는 있어도 공짜는 없는데 쉽지 않구려.” 머뭇거리며 일어서는 령감들 뒤를 따라 엉거주춤 일어선 로친네가 혼자소리로 중얼거리더니 문뜩 환이를 건너다보며 의미있게 눈을 끔벅이며 희미하게 웃었다. “이기기 다행인줄 알어. 저 친구 숨쉬는거 내놓고 다 거짓말인데 오늘은 간만에 부처님이 되실 모양이야.” 환이는 그따위에 관심이 없었다. 삥 뜯길 주머니도 없었다. 갈비 뜯는 날이 명절이라고 아무렴 먹을것만 있으면 좋았다. 한동안 잠자던 배가 꼬르륵 소리를 다시 냈다. 청룡의 해를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는 텅 비여버린 몽뚱이로 맞이할수는 없다. 어차피 사나이로 태여난바에는 한번 달리는 말처럼 인생을 채찍질하면서 살아야 하는게 아닌가. 그러자면 에너지 보충은 필수적이다. 거리 가운데쯤에 위치한 자그마하고 지저분한 란저우손국수집에서 소고기국수 한사발씩 앞에 놓고 맥주를 청했다. 두 령감쟁이는 시다달다 말없이 맥주에다 소고기국수를 부지런히 먹었다. 대신 뚱보 로친은 마냥 측은한 눈빛으로 환이를 힐끔힐끔 건너다보군 했다. 구레나릇은 술보다는 말에 더 재미가 있는 모양이였다. 그가 침방울 튕기는 동안 두 령감은 먹던걸 깨끗이 비우고 고맙다고 허리를 둬번 굽석이고는 자리를 떠버렸고 나중 남은 로친은 그래도 말 한마디 남겨놓고 나갔다. “하여간 뻥치는데는 챔피언감이야. 고만 지껄이구 저 친구 보내줘.” 그다음 싸구려 맥주 한병을 얻어먹고 기분이 좋아진 환이는 웬 영문인지도 모르고 구레나릇에게 이끌려 한 건물앞에 이르렀다. 클래식한 건물더미속에서 쉽지 않게 야한 현대식 건물이였다. 고급스러운 디자인이 겁나게 위압감을 주었고 알록달록 네온등 빛이 집안에서부터 눈시리게 뿜겨져나왔다. 나이트클럽이였다. 출입문에서부터 긴 복도까지 량옆으로 아가씨들이 쭉 늘어서있었다. 아직은 약간 이른 시간인데도 속옷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밤유니폼을 입은 아가씨들은 뭐가 그리 좋은지 희희닥거리고있었다. 빵 냄새가 유달리 심한 백인아가씨가 여럿이 보였고 석탄에 그을린듯한 흑인아가씨 하나도 유표하게 그속에 끼여있었다. 크고 작고 실하고 야위고 제나름대로 천태만상이였지만 굽 높은 하이힐을 신은것만은 한결같았다. (아차 잘못 걸렸구나!) 환이는 미처 속이 철렁할 사이도 없이 구레나릇에게 끌려들어가 구석쪽으로 개굴처럼 펑 뚫린 룸에 그대로 구겨박혀졌다. 이윽고 맥주가 박스채로 들어오고 곧이어 마담의 손길을 따라 다 벗어버린듯한 아가씨들이 한줄로 쭉 들어섰다. 노래방이 레스토랑이 되여진건 벌써 수년전부터 많이 보아온터였지만 나이트클럽까지 노래방술집 짬봉이 되여진건 처음 이였다. 모름지기 스릴이 발동했다. 환이는 흥분이 지나친듯 겉옷을 훌훌 벗어던졌다. 피할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을 환이는 자주 한다. 자조적이고 자기기편적이기는 하나 그렇게 아큐처럼 생각하면 마음 하나는 참 편했다. 만사를 포기한듯한 환이의 자충수에 구레나릇은 약간은 의아하다는 눈치였다. 그랬건말건 환이는 그중 빵빵해보이는 아가씨 하나를 지목하여 옆에 앉혔다. 구레나릇은 생김새처럼 취향이 유달라서 온몸이 숯같은 흑인계집애를 손저어 불러놓고 그 자리에서 냉큼 통통하게 튀여나온 젖통을 한웅큼 거머쥐고 주물럭거렸다.  술이 둬순배 돌았을무렵 환이는 파트너 아가씨를 끌고 사람들로 붐비는 홀속에 들어가 한바탕 흔들었다. 온몸에 땀이 배여나고 기분이 붕붕 떠올랐다. 파트너 아가씨의 어깨를 부여안고 룸에 다시 돌아와 맥주컵을 거머쥐니 아까부터 환이를 살피듯 주시하던 구레나릇의 경계하는 눈빛이 서서히 풀려가고있었다. 구레나릇은 참 오래동안 참아와 정말 더이상 참기 어렵다는듯 흑인 파트너의 허리를 무작정 끌어안고 춤과 노래로 아우성판인 홀안으로 휘청휘청 나갔다. 환이는 느끗하게 파트너에게 맥주 두고뿌를 연거퍼 권했다. 마침내 파트너가 뇨기를 이겨내지 못하고 화장실로 달려갔다. 환이는 그 기회를 놓칠세라 한옆에 아무렇게나 던져진 웃옷을 잽싸게 주어들고 부랴부랴 나이트클럽을 나와버렸다.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거리는 한결 흥성했다. 그러나 환이는 그런걸 구경할 흥심이 가뭇 사라졌다. 구레나릇이 당장 쫓아나와 뒤덜미를 거머쥘것만 같았다. 환이는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만사불구하고 앞으로 닫기 시작했다.  필터링같은 가로길을 두개 뛰여넘었지만 환이는 여전히 가슴이 세차게 뛰였다. 어떻게 튀여나왔던지 이제는 기억에 가물가물했다. 똑마치 악몽같은 느낌이였다. 악몽도 꿈이라면 꿈이다. 꿈은 자라는 속성이 있다. 악몽이 자란다면, 그리고 그것이 하나의 유산이 되여 평생을 두고 묵직하게 따라다닌다면 진짜 미치고 환장할 노릇일것 같았다. 환이는 그것이 두려웠다. 그리고 될수만 있다면 그 악몽을 기억에서 삭제하고싶었다. 환이는 본능적으로 뒤를 다시 돌아보았다. 분주히 왔다갔다하는 사람들틈에 구레나릇외에도 자신을 노리는 다른 사람들이 또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느닷없이 들었다. 피해망상증이 아니라 자기처럼 의지가 약한 사람은 쉽게 남들의 먹잇감이 될수도 있다는 도리를 문뜩 발견한것이다. 환이는 발걸음을 재촉하여 길옆 가게안으로 쑥 들어갔다. 잠간 숨이라도 돌리고싶었다. 이제는 구레나릇이 뒤쫓아오지 못할것이라고 짐작했다. 가게는 밖에서 보기보다 훨씬 넓었다. 악세사리를 진렬한 매장이였는데 질서정연한 실내처럼 들락거리는 사람도 없어 한결 조용했다. 분위기탓인지 환청이 가뭇없이 걷어지고 마음이 저절로 평온해왔다. 아마도 환이의 할딱이는 숨소리때문인지 아니면 환이가 부시럭거리는 소리를 들었는지 안쪽 문이 말없이 열리면서 늙수그레한 한 로인이 걸어나왔다. “거… 궁민이라는 분 맞아유? 조궁민?” 환이를 보는 눈이 많이 부드러웠다. 그런 자상한 눈길을 환이는 오래간만에 보는 느낌이였다. 로인은 기력이 쇠잔하여 말하는 톤은 낮았으나 어딘가 모르게 끈기가 있어보였다. “전 환이예요.” “사장님이 아까부터 기다리셨수. 이쪽으로 오십소.” 로인은 환이의 대답을 별로 새겨듣지도 않고 바로 환이의 손을 잡고 안쪽으로 안내했다. 환이는 꿀먹은 벙어리마냥 아무런 해석도 못하고 로인이 끄는대로 따라 들어갔다. 뜻밖에도 문을 열고 나가니 안쪽엔 제법 움직일만한 울안이 나졌고 그 뒤로 “흠삼진”이라는 간판을 내건 어마한 공장건물이 있었다. 백여명 녀직원들이 여기저기 널려서 여러가지 악세사리를 조립하고있었다. 사장 집무실은 2층에 있었다. 전씨 성을 가진 사장은 퍼그나 인자하고 온화한 모습이였다. 서류를 보다가 사람이 들어오자 점잖게 일어나 그때까지 꿔온 보리자루처럼 어정쩡 서있는 환이에게로 다가왔다. “반갑습니다. 전입니다.” “전…” “허허허, 전국 전이 아니구 전세계 전입니다.” “그게 아니구요. 사람 잘못 아신 모양입니다. 전 가게에 구경 들어온 사람일뿐입니다.” “아, 그래요? 가끔 왔다가 그런 핑계를 대고 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한번 다시 잘 생각해보십시오. 앞으로 큰 일 하자면 밑바닥부터 잘 다져야 합니다.” 환이는 괜한 오해를 산게 억이 막히기도 했지만 어쩌면 그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문뜩 들었다. 음차양차로 본의 아니게 우연히 끼여들긴 했지만 아예 이대로 후딱 취직해버리는것도 별로 나쁘지는 않을거 같았다. 아장아장 걸음마를 타는 어린애처럼 인생길을 그렇게 타박타박 걷고싶었다. 그러면 마음이 많이 든든해지고 편안해지겠지. “돌아가서 잘 생각해보고 연락드리겠습니다.” 환이는 점잖게 인사를 올리고 돌아섰다. 털면 먼지뿐인 주머니에 손을 깊숙히 질러넣고 진렬장을 거쳐 다시 거리로 나왔다. 그 경황에도 혹시나 해서 두리번거리던 환이의 얼굴이 금세 시꺼멓게 질려갔다. 저 멀리서 천으로 머리를 싸맨 구레나릇이 쇠파이프를 질질 끌며 오는것이 보였던것이다. 고무신짝에 착 달라붙은 껌보다도 더 질긴 넘이였다. 저걸 떼여버린다는게 조련찮다는 심각한 위기감이 앞섰다. (잘못 걸려들었구나.) 이날 두번째로 터져나온 한탄이였다. 다행히 구레나릇은 아직 환이를 발견하지 못하고있었다. 고개를 빳빳하게 올려세우고 앞만 내다보며 오고있었다. 환이는 웃옷을 벗어 머리에 뒤집어쓰고 총총 걸음으로 앞으로 달렸다. 그나마 날씨가 차츰 어두워져오는게 다행이였다. 그래도 방심할수는 없었다. 행여 구레나릇에게 잡히면 뼈다귀도 추리지 못한다는걸 잘 알고있었다. 달리면서 다시 돌려 생각해보니 자신의 노릇이 참 한심했다. 하필이면 꼭 이 한길로만 줄창 달릴 필요가 있냐 말이다. 그것은 결국 궁지에서 탈출하는 방법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구레나릇이 우직하여 이 길로 따라온다고 하여 환이 자기도 티나게 이 길로 계속 달아나야 한다는 법은 없잖은가. 길은 여러갈래가 있었다. 직진하는것이 한 방향이라면 좌우로 커버를 돌면 역시 새로운 길이다.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 그대로 잠자코 있는것도 하나의 선택이 될수도 있잖은가. 옳지, 그게 좋은 방법일수도 있다. 환이는 아까 공예품회사에서 차를 대접 받으면서 여유를 즐겼을걸 그랬다고 괜히 후회를 하면서 아무렇게나 문이 열려진 가게로 빨리듯 들어갔다. 거짓말처럼 진짜로 차를 판매하는 가게였다. 여직껏 대수 익혀온 룡정차, 노산녹차, 기문홍차, 철관음, 대홍포, 벽라춘, 말리화차, 보이차는 물론 이름을 제대로 밝힐수 없는 차들도 많았다. 그러나 손님은 오히려 그 가지수에도 미치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손님을 접대하는 직원은 주인인듯한 사람 달랑 혼자였다. 들어오는 손님에게 차물도 대접하고 또 손님의 요구대로 이것저것 샘플도 보여주고있었다. “여기 와서 차나 한잔 드시우.” 매대앞을 왔다갔다하면서 열심히 구경하는듯한 환이에게 주인이 말을 걸어왔다. 가게 한쪽 구석쪽에 나무뿌리로 멋지게 조각한 큼직한 차탁이 있었고 거기에 앉아 차를 마시던 마지막 손님도 주춤 일어서는중이였다. 환이는 차탁쪽으로 걸어가 밖에서 들여다보기 쉽지 않은 각도를 찾아 점잖게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쪽 환한 쪽으로 앉으시죠.” 주인은 환이의 속내도 모르고 지궂게 요청했다. “괜찮아요. 그런데 왜 이리 한산하죠?” “아, 그러면 물건 가지러 온 분이 아니시네.” 주인은 뜻을 알바 없는 희미한 웃음을 흐들흐들한 얼굴에 떠올렸다. 흥분에 많이 들떠있던 언성도 금방 어눌하게 내려앉았다. 환이는 그만 오리무중에 빠져버렸다. 순간이지만 스파이 영화에서 흔히 나오는 암호접속하는 장면이 떠올랐다. (물건이라?) 전생까지 옹근 두생을 합쳐도 옷스침 한번 없는 사람한테 와서 무슨 물건을 가져간단 말인가? 환이는 여기서 가져갈수 있는 물건이 어떤것인지도 몰랐고 가져가야할 물건도 없었다. 솔직히 환이는 물건 가지러 온것이 아니라 숨으러 온것이다. “뭐 견주지 말고 까짓껏 한번 대담하게 접어들어봐요. 시작이 절반이란 말이 장사에 딱 들어맞아요. 나한테서 차를 도매해간 사람치고 여직껏 밑졌다는 사람을 보지 못했습니다. 지역대리를 달라면 그것도 가능하니까 잘 생각해봐요.” 그제야 환이는 웬영문인지 조금은 알것 같았다. 이런 바보라구야. 차집에 와서 차 내놓고 무엇을 가져간단말인가. 환이는 손을 들어 스스로 자신의 뒤통수를 탁 쳤다. 자기는 모름지기 곤충 컨셉이여서 사람 말을 바로바로 알아듣지 못하는 타입이라는 한심한 생각에 살짝 원망스럽기도 했다. 이렇게 앞뒤가 꽉 막히니 숨통이 졸리지 않을수 없잖은가 말이다. 환이가 대략 난감하여 뭔가 말하려고 고개를 쳐드는데 가게 앞으로 때맞추어 여러 사람이 왁짝 고아대며 지나갔다. 얼결에 건너보니 입에 거품을 문 구레나릇이 앞장서서 걸으며 악에 받쳐 소리치고있었다. “감히 이 어른을 사기치다니? 겁대가리 회쳐 먹었군. 이넘 잡히기만 해봐라.” 환이는 앉은 자세로 시무룩이 웃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두려움이 뺑소니를 쳐버린것이다. 어쩌면 후둑후둑 튀던 심장이 눈깜짝할 사이에 랍치당한 모양이다. 돌아보니 구레나릇에게 죄진 일이 쪼매도 없었다. 마작을 대신 놀아달라고 골골거려서  놀아준것뿐이고 밥 사준다해서 따라가 맥주 한병 얻어먹은데 불과했다. 그리고 나이트클럽은 끌려가다싶이 했었다. 주머니가 땡그라니 비여버린 환이가 환장했다고 아가씨 궁둥이치러 그 비싼 곳으로 찾아간단말인가. 주변에 널려있는 아주 닳아진 아줌마들의 손목이나 한번 잡아보고 그것을 스킨쉽으로 자위하며 즐거웠던 환이였다. 골기있게 살자. 살바에는 사람답게 살자. 이것저것 다 두렵고 여기저기 모두 무서우면 어떻게 산단말인가. 입도 헤프고 몸도 헤프고 마음마저 헤픈 환이지만 태생적으로 뼈마디 하나만은 굵었었다. 원래 세상이란게 그런 법이 아닌가. 쌍코피 터지게 악쓰며 살아야 밥상에 변변한 반찬 한가지라도 더 올라온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달려들면 세상에 무서운게 뭐란 말인가. 환이는 벌떡 일어섰다. 온몸에서 주체할수 없는 힘이 우뚝 솟아오르는게 저절로도 느껴졌다. 가게 주인은 환이의 뜻밖의 모습에 흠칫 놀라며 뒤로 둬걸음 주춤 물러섰다. 우묵하게 꺼져들어간 눈속에 일종의 경악같은것이 자리잡고있었다. 그러건말건 환이는 고개를 약간 숙여 목인사를 가볍게 올리고 활개를 치며 가게를 벗어났다. 구레나릇네들이 한번 훓고 지나간 거리에는 낯설고 생소한 사람들로 다시 꽉 채워져 여전히 흥성거렸다. 량쪽으로 클래식한 건물들은 여전히 우중충 끝없이 이어지고있었고 넓지도 좁지도 않은 거리는 마냥 오불꼬불 길게 누워있었다. 청기와 또는 회색의 기와장들이 지붕우에서 어느새 고요히 잠들었고 칠이 덕지덕지 묻어나는 붉은색 기둥 사이로 열려진 투박한 널판자로 된 대문들로 지칠줄 모르는 사람들이 쉴새없이 들어갔다 나왔다 한다. 그곳에서는 연기와 음식냄새와 서로 다른 물건들이 부딪치면서 나는 소리들이 범벅이 되여 끊임없이  쏟아져나와 거리를 화끈 달구고있었다. 특히 사람들이 불륨을 최대한도로 높혀 왁작지껄 고아대는 소리는 그대로 전쟁터를 방불케했다. 거리를 거닐거나 가게앞 쪽걸상에 걸터앉았거나 집안에서 기웃거리는 사람들의 옷차림새 역시 각양각색으로 천차만별이였고 내노라며 몽치같은 팔뚝을 드러내거나 아예 여러가지 동물을 문신한 알몸뚱이를 그대로 내놓은 사람들도 가끔 보였다. 환이는 이제 허기질 일이 없었다. 궁금증도 말끔히 사라졌다. 발이 방향잡이여서 사거리에서 유턴해서 새길로 접어들었다. 이제는 구레나릇과 오며가며 마주칠 일도 없어졌다. 대신 주먹속에서 슬그머니 나와 엄지검지중지 사이에 조용히 끼워졌다가 손등을 타고 멋지게 오르던 1원짜리 동전이 그만 누군가가 지나가면서 환이의 어깨를 부딪치는 바람에 대리석 바닥에 “땡”하고 떨어지면서 대굴대굴 앞으로 굴러갔다. 환이는 먼저번처럼 황황히 뒤쫓아가지 않았다. 누군가의 발길에 부딪쳐 어딘가에서 멈춰설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환이는 이제 그 동전이 멈춰서는 곳에서 인생에 한판의 승부를 크게 걸리라 다짐하면서 천천히 걸었다. 2014년 1월 초 청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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