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张学奎文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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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26년 댓글:  조회:844  추천:1  2016-10-21
단편소설    26년         1. 발치에 책 한권이 널부러져 있다. 겉표지는 어느새 떨어져나가고 하아얀 속지가 부끄러움을 잃고 척 드러누워 있다.  친구집에서 저 책을 호주머니에 쑤셔넣을 때까지만 해도 분명 책가위는 있었다. 검은 색이 주바탕이 되어진 어눌한 디자인의 책이었다. “26년”이란 제목의 책이었는데 소설책인지 시집인지 아니면 사회교양책인지 회억록인지 또는 어떤 다른 유형의 책인지 전혀 알바 없었다. 그런 분류 같은 건 알지도 못했고 또 알고싶은 마음 자체도 없었다.    책이라는 물건에 관심을 가져보기는 어제가 처음이었다. 무료해서 막 미칠 것 같은 경우를 여러번 당하고나서 그럴 때 혹시 책이라도 몇장 뒤적거리면 하다못해 숨이나마 고르게 내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집어들었을뿐이었다.   친구는 책이 아까와서 그저 죽어가는 상통을 지어보였다. 책이 할아비도 아니고 돈덩이도 아닌데 뭐가 그렇게 가슴 아플까 싶었다. 하기사 책보다는 밉상인 손님이 싫어서 눈쌀을 더 많이 찌프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먼저 떠올리기는 했었다. 술 한잔 얻어먹는 게 그렇게 고역인줄을 처음 알게 되었다.    진이는 베개를 등밑에 받치고 누운채로 발을 이불밖으로 내밀어 책을 당겼다. 고시원 방은 난방이 되어있지 않아 발을 꺼내놓기 바쁘게 오싹해났다. 칼로 에이는듯한 추위가 발등을 통해 금세 대뇌로 전달되어왔다. 진이는 미처 책을 다 끌어오지 못하고 급히 발을 이불속으로 다시 숨겼다. 이불속은 노가다판에서 친한 손씨 아저씨가 창고 구석에서 뒤져냈다는 손바닥만한 전기담요 덕분에 그나마 따스했다.    책은 무릎 부근까지 올아와 있었다. 손을 내밀어봤지만 한뺌 차이 정도로 잡혀지지 않는다. 다시 한번 발을 내밀어 걷어올리면 바로 잡을 수 있을 듯도 싶지만 진이는 그러고싶지는 않았다.  올해는 왕년에 비해 별로 춥지 않고 따스한 편이라고 매스컴들이 맨날 아양을 떨고 있지만 정작 난방이 안된 집에서 살아들 보시라고, 그러면 추위가 무엇이란 걸 금방 알게 되실 거라고 진이는 괜히 속으로 심술을 쓰고 있었다. 사실 진이도 크게 추위를 타는 사람은 아니었다. 한창 젊은 시절 고향에서 뛰놀때는 영하 30도 추위에도 솜옷 따위를 입어본 적이 없었다.    지난 번 청도로 날아갔을 때도 홑바지에 팬티 바람으로 온동네가 먼지 나도록 뛰어다녔었다. 그게 옆사람들 보기에는 크게 놀랄 일이었던 모양이었다. 아득한 옛날에 유행했던 국방색의 군용솜외투를 온몸을 감싼 그 자식이 얼굴을 뒤덮은 구레나릇을 만지면서 뭐랬던가? “타마디, 이넘이 아무래도 정상이 아니여.” 분명 첫마디가 그랬었다.  “이 날씨에 온전한 정신을 가지고 이런 차림새로 나올리 없어. 암, 그렇구말구. 거시기 얼어떨어져 개 주워먹게 멀리 던져버리고 말아. ”   고작 영하 2도에 엄살을 떠는 놈팽이가 진이에게는 더 이상한 넘으로 보였다. 그렇게 놈팽이들을 우습게 본 덕분에 진이는 팬티 한장 달랑 남겨진채로 어느 생소한 바다가에 버려졌다. 주위에 개미새끼 하나 보이지 않는 산자락이었다. 차디찬 바다바람이 막힘 하나 없이 그대로 불어와 훌 온몸을 한번 감아돌고 달아나군 할 때마다 전율이나 하듯 후두둘 떨려났다. 고향의 겨울날씨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떠나올 때의 서울과도 많이 달랐다. 다행히 30여년 다져놓은 몸이 그런대로 쓸만 했다. 그리고 산등성이를 돌아나오면서 뜻밖에도 떠돌이군들이 지어놓은 움막 비슷한 집 한채를 발견하였고 집앞의 나뭇가지에 남루하기는 해도 대수 몸에 걸칠 수 있는 옷견지들이 걸려있었다.  (자식들이 아직 독하지는 못하군. 흐흐흐)   진이는 기억에도 가물가물한 옛날 일을 떠올리고 있었다. 현성은 산에 둘러싸여 있었고 산에는 싸리나무들이 무리져 자라고 있었다. 해마다 가을이 되면 사람들은 겨울 불쏘시개로 싸리나무를 베어가군 했다. 싸리를 베어간 자리에는 뽀죽뽀죽한 그루터기들이 서슬 푸르게 남아있다. 그속에 맨발로 서있다면 어떤 느낌일까?  진이는 씨물씨물 웃음이 나왔다.            2. “광이가 왔다.” 엄마가 전화로 이런 말을 걸어왔을 때 진이는 이상야릇한 전율을 느꼈었다. 그렇지 않아도 이 며칠째 광이가 시도때도 없이 머리속에 떠올랐었다. 참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호랑이도 제 소리 듣는 귀는 열두자란 말이 그른데 없는 모양이었다.    단풍이 든 산야에 싸리그루터기가 송곳처럼 촘촘히 서있다. 가을바람이 스산하게 불어치는 가운데 맨발의 소년이 막무가내로 발밑을 내려다보고 있다. 그루터기를 밟지 않고 이 싸리밭을 벗어날 방법이 전혀 생각나지 않는다. 소년의 눈에서는 눈물이 방울져 흘러내린다.    “너한테 여러번 전화했는데 자꾸 핸드폰을 끈 상태더란다. 그래서 우리한테 연락왔더라.” “요새 밧데리 다 나간줄 모르고 있었소. 그런데 광이는 왜 왔다우?” 엄마는 미처 대답도 없이 전화를 끊어버렸다. 아마 광이가 옆에 있어서 뭐라고 말하기 난처했을 것이다. 엄마는 광이 이름만 나와도 별로 기죽은 목소리다. 광이는 공무원 출신이다. 옛날 같으면 떵떵 소리치면서 살 넘이다. 그런데 1년전부터 심심하면 전화를 걸어와 한국에서의 일자리를 묻군 했다.    진이는 이불속에서 기어나와 잽싸게 옷을 주어입었다. 그리고 오른발을 쳐들어 양말을 꿰다가 그만 중심을 잃고 휘청이면서 절반쯤 양말이 꿰진 발로 꽝하고 무엇인가 밟았다. 인츰 심한 통증이 발바닥으로부터 엄습해왔다. 발을 들어보니 벌써 일주일째 발치에서 나딩굴던 책이었다. ‘26년’인가 하는 제목의 그 책은 진이가 여러날 째 발로 끌어왔지만 결국 손에 잡지 못한 그 책이었다.  부랴부랴 7호선 지하철을 타고 조선족들이 줄레줄게 모여사는 대림으로 가면서 진이는 그냥 싸리밭으로 가는 기분이었다.    진이도 어떻게 그곳까지 갔는지는 기억에 없다. 광이가 약속대로 돈을 가져오지 못하면 싸리밭에 세워둘거라고 엄포를 벌써 놓았었다. 진이네는 그 경고대로 실행했을뿐이었다.  광이도 사실 좀 그랬었다. 전처럼 곱다랗게 돈을 가져와 진상했더라면 아무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면 진이네는 그 돈으로 학교 부근의 소매점에서 담배랑 먹을 거랑 사서 뒷산에 가 하루종일 즐기면 될 일이었다. 정 돈을 구할 수 없으면 아예 종적을 감추어도 될 일이었다. 그런데 광이는 고지식하게 자기 발로 학교에 걸어와 돈을 더이상 구할 수 없다고 말했고 그래서 진이네는 광이를 우격다짐으로 뒷산으로 끌고 갔다.    뒷산은 진이네의 아지트와 같았다. 그곳은 일년사시절이 모두 경치였다. 봄에는 민들레꽃이 샛노랗게 덮혔고 여름에는 함박꽃이 활짝 피어났다. 가을에는 개암을 까먹기 좋았고 겨울에는 산토끼가 뛰어놀군 했었다. 이맘때는 동네방네에서 싸리나무 가을을 하고난 뒤여서 그루터기들이 부채살처럼 쫙 뻗어나간 계절이었다.    진이네는 단짝이 넷이었다. 진이를 포함해 둘은 부모가 한국에 가있고 하나는 고아였고 다른 하나는 아버지가 감옥에 수감되어있었다. 모이다보니 어떻게 끼리끼리 그렇게 모여졌다. 솔직히 진이는 돈이 별로 그립지 않다. 할머니한테 입만 벌리면 매일 백원 하나씩은 타내올 수 있었다.  “가져가라. 먹고싶은 걸 다 사먹어. 네 에미애비 다 니를 위해서 그 고생이지.”  할머니는 초중에 올라온 진이를 따라 현성에 세집을 잡은 후로부터 손자가 남한테 업수임당할가봐 매일이다싶이 용돈을 주머니에 질러주군 했다. “아끼지 말고 팍팍 써라. 그리구 혼자 먹지 말고 옆에 애들 더러 나눠줘. 그래야 친구들이 많이 생긴다.”   아닌게 아니라 욱이가 먼저 접근해왔다. 고아원에서 자란 욱이는 먹을 것만 보면 밸까지 다 꺼내주는 인간이었다. 다음 철이가 자기네 패거리에 끼어들라고 제의해왔다. 감옥에 갇힌 깡패 아버지를 닮아 성격이 거친 철이는 패거리 두목노릇을 하고 있었다. 후에 안 일이지만 민이는 처음에 철이랑한테 돈을 뜯기다가 나중 그들과 섭쓸리게 된 것이었다. 아무튼 초중 3학년에 올라가면서부터 다른 애들은 대부분 떨어져나가고 그들 넷이 단짝이 되어 매일 붙어다니군 했었다.    “여기가 좋겠지?” 시다바리나 다름없는 민이가 철이에게 잘 보이려는듯 물었다.  “니 보기에는 어떻니?” 철이가 진이를 돌아보며 물었다. 우왕좌왕하는 철이도 진이한테만은 가끔 양보하군 했었다. 언젠가 욱이를 때리는 철이를 말리다가 진이와 철이가 오히려 대판 싸운적이 있었다. 물론 주먹바닥에서 뼈마디를 굳혀온 철이한테 얻어맞긴 했지만 진이의 강기에 철이도 얼마간 주눅이 든 것은 사실이었다. 그후부터 철이는 진이한테만은 함부로 하지 못했다.   “글쎄, 벌 주는 거니까 비슷하면 되겠지.” “애들아, 동창끼리 이러지 말자. 나중 생기면 또 줄게.” 광이가 아무리 손을 비비며 사정해도 그때는 이미 소용이 없었다. 넷은 한사코 발버둥치면서 뻗치는 광이를 싸리그루터기들이 촘촘히 박힌 속으로 끌고 들어갔다. 약살바른 욱이가 광이의 구두를 벗겨서 저만치 던져버렸다.    그 일로 인해 진이와 철이는 퇴학처분을 받았다. 욱이는 오갈데 없는 고아라고 학교에서 특별히 처분을 보류했고 민이네는 교장한테 많은 돈을 썼다고 한다. 한국에 있는 진이의 엄마도 그 소리를 어디서 얻어듣고 자기도 돈을 쓰겠다며 얼리고 닥쳤다. 불법체류 신세인 엄마는 그저 전화로 애걸복걸할 수밖에 없었다.    “진이야. 제발 학교에 가서 교장선생님한테 잘못했다고 빌어. 응? 앞으로는 대학 나오지 못하면 사람 취급도 못받아. 우리가 왜 이 고생을 하는지 알잖아. 모두 너를 위해서잖아.”   그러건말건 진이는 다시 학교에 가지 않았다. 그렇게 20여 년을 이곳저곳 떠돌아다녔다. 그리고 진이의 엄마, 아버지는 규제 조건이 완화되면서 자진신고로 귀국했다가 2년 후 다시 한국으로 떠났다.  “니 결혼할 돈도 벌고 아파트도 사줘야지.” 엄마는 떠나면서 진이에게 그렇게 말했었다.   원래 공부를 잘한 광이는 그후 고중을 거쳐 대학까지 나왔고 배운 전업에 따라 현성 공상국에 배치받았다. 국가적인 직업 배치가 없어진 마당에 쉽지 않게 좋은 운이 따라준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그렇게 잘 나가는 거 같던 광이가 몇년 후의 어느날 갑자기 직업을 때려치우고 청도로 진이를 찾아왔었다. “처음에는 돌멩이를 주워 들고 싸리그루를 하나씩 짓이기면서 한걸음씩 나왔어. 그런데 그게 너무 힘들더라. 나중에는 옷을 벗어 오른 발 감고 바지를 벗어 왼발 감고 막 걸어나왔지. 여러번 찔려 피도 나구. 약 오르니까 아픈줄도 모르겠더라. 그렇게라도 나오지 않으면 그대로 서서 죽겠니?” 오래전 시절의 일이라 광이는 대수롭지 않게 술을 마시면서 마실삼아 얘기했지만 진이는 속이 질려서 말이 아니었다.   (그때 왜 산동넘들처럼 옷까지 벗겨버릴 생각을 못했을까? 쿡쿡. 그랬으면 우리가 살인죄라도 먹었을까?) 결국 보면 옷을 벗기고 신발을 남겨준 산동넘들이나 신발을 벗겨놓고 옷견지는 고스란히 놔둔 자기들이나 아둔함의 극치랄까 전형이랄까 아무튼 피차일반에 피장파장이란 생각이 들었다.  진이는 실성한 사람처럼 전철속에서 혼자서 키들거리고 있었다.        3.   광이는 사흘만에 학원에 취직이 되었다. 중국어를 배워주는 학원이었는데 숙사도 있어 광이는 출근하자 바람으로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너도 아무 일이나 찾아해. 노가다 뭐라니? 남들 다 하는 건데.” 광이는 떠나면서 이렇게 뇌까렸다.    (자식이, 누군 그런 도리 몰라서 이러고 있는줄 알아? 배 부른 사람이 굶은 넘의 배고픔을 모른다더니 체…) 진이는 괜스레 발치에 널부러진 “26년”을 흘겨보았다. 광이가 이틀간 와서 묵으면서 어느새 다시 발치까지 밀려나간 책이었다. 진이는 별생각 없이 본능적으로 발을 내밀어 책을 끌어오려고 허우적거리다가 결국 또 무릎 근처에서 포기하고 말았다.    벌써 한달째 진이는 이러고 있었다. 우연한 계기로 청도를 한번 다녀온 후부터 만사가 귀찮아졌고 무슨 일이나 손에 잡히지 않았다. 몇년을 굴러온 노가다판이 몸서리가 나도록 거부감이 생겼다. 막돼먹은 오야지의 거친 욕지거리가 점점 역겨웠고 먼지와 땀범벅인 현장이 더욱더 싫어졌다. 그래서인지 평소 현장에서 남달리 진이를 잘 챙겨주던 손씨 아저씨가 전화를 걸어왔을 때도 진이는 진한 감동보다 먼저 스트레스 비슷한 짜증부터 앞섰다.    “아우야, 왜 안나오는겨? 어디 아픈겨?” “아니, 그저요. 이만 끊어요.” “글라므 안된다 아이가. 돈 벌어 아들내미 대학 보낸다믄서?” “글쎄요…” “그게 무슨 대답이가? 교포들 통병이더라꼬. 개주머이에 은자 몇푼 들면 정신 싹 이자뿌리는 거…” 손씨 아저씨는 안타까운듯 높은 톤으로 질책했지만 진이는 오히려 심드렁했다.    정말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싶어진다. 그런데 다른 곳에는 취직이 잘 되어지지 않는다. 가방끈이 짧아서 어디에 이력서를 마구 들이밀 게제가 못된다. 이럴 때면 자기도 모르게 광이가 못내 부러워진다. “야야, 걷어치워. 그따위 공부해서 뭐해? 대학 물 먹은 넘이 초중도 못나온 나를 찾아왔잖아?” 허여멀쑥한 광이가 반듯한 양복 차림새로 청도에 왔을 때 진이는 비단에 싼 개똥이라고 속으로 비웃었었다.     그런데 그 광이가 진이의 소개로 한국기업의 현장 관리로 들어간지 반년도 되지 않아 사무실로 불려 올라가더니 인츰 계장 뱃지를 궤찼다. 회사근무 10년 경력에 얼마전 겨우 계장이랍시고 나돌기 시작한 진이에게는 얼굴이 띠끔한 일이었다. 다시는 광이앞에서 으시대지 못했고 곧 초등학교에 진학할 아들애에게 공부왈을 훈학하기 시작했다.   “우리 명이는 꼭 공부 잘 해야 해. 알겠어? 우리집에서도 대학생이 나와서 이 더러운 운명을 좀 개변시켜야 해.”   그 명이를 위해 진이는 결연히 10년 회사 노하우를 박차고 엄마가 있는 서울로 떠났다. 엄마네는 선후 20여 년을 그곳에서 힘들게 일하고 있었다. 진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부터였다. 처음에는 진이를 잘 먹이려고 아득바득했고 지금은 진이의 아들 명이를 위해 목돈을 모으고 있다고 했다.    아내와 장모가 돌보는 명이는 공부도 잘했었다. 3학년이 되도록 해마다 3호학생을 따왔고 계속 학년에서 1등을 했다. 민영학교이지만 그래도 조선족학교여서 우리말을 또박또박 잘도 했다. 그런 걸 마누라가 중국에서 살자면 한족들 무리에 들어가야 한다면서 기어코 2만원이나 퍼주고 좀 괜찮다는 한족학교로 전학시켰다. 탈은 그때로부터 생겼다.    “자네 아무래도 한번 들어왔다 가야겠어.” 장모의 전화를 받은 진이는 느닷없이 하늘이 무너져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마누라가 아닌 장모가 전화올 때는 호소식인 경우가 거의 없다. 자기 마음대로 명이를 한족학교로 돌려놓고 아내는 성질이 불같은 남편앞에서 언제나 숨 죽이고 지냈다. 명이가 반간부도 못하고 성적이 중등에 머물고 3호학생도 되지 못했다는 등등 소식은 모두 장모가 전해주고 있었다. 그런 소식을 들을 때마다 진이는 화가 동했고 그러면서도 지금은 저 세상으로 가신 할머니는 그때 어떻게 아버지 엄마에게 자기의 소식을 전했을까 궁금하기도 했다.     “한번 학교까지 따라가봐. 무슨 일이 꼭 있을 건데.” 장모의 부탁대로 진이는 명이의 뒤를 멀찌감치 따라갔다. 4학년 애답지 않게 걸음이 무거웠다. 집에서 거리 두개를 사이둔 학교까지 가는데 명이는 꼬박 반시간이 걸리고 있었다. 가다가는 주춤 멈춰서서 거리를 멀거니 바라보는가 하면 그 자리에 주저앉아 무슨 생각인지 골똘히 하군 했다.    학교 정문앞에는 머슴애들이 한무리 뭉쳐있다가 명이를 발견하고 다가오더니 빙 둘러섰다. 그중 명이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자식이 다짜고짜 명이의 책가방을 들추는 것이 보였다. (오, 지금은 소학교때부터 이런 일을 하는군. 많이 진화했네.” 진이는 광이의 아버지가 떠올랐다. 광이의 아버지는 그들이 광이의 호주머니를 들추는 것을 발견할 때면 “이넘들 그러면 못써” 하고 훈계하지 않으면 곧추 담임선생님께 일러바치군 했다. 그런 방법으로는 절대 애들의 버릇을 고쳐주지 못한다는 것을 진이는 잘 알고 있었다.   진이는 큰 기침을 둬번 한 후 애들을 헤집고 들어갔다. 아버지를 발견한 명이의 하얗게 질린 얼굴에 혈색이 돌기 시작했다.  “내 이 애의 아버지인데 어디 너 한번 보자.” 진이가 꽁무니를 빼려는 우두머리의 팔목을 틀어잡기 무섭게 그넘의 입에서 비명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이야마야, 사람 죽어요. 아저씨 잘못했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눈물콧물 흘리면서 용서를 빌었지만 진이는 사정없이 애를 담장 밑으로 끌고가 귓쌈을 연속 서너대 후려갈겼다. 야들야들한 뺭에 금세 굵은 손가락자국이 새겨졌다.  “이제 한번만 더 그러면 발목대기를 분질러버릴테다. 알았어?” “네, 제발 용서해주세요.”   이틑날은 보란듯이 명이와 함께 가지런히 걸어서 학교에 갔다. 그런데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어제 버릇들이 덜 떨어진 모양으로 학교 정문에는 여전히 한무리의 애들이 몰려있었고 그 속에는 어른도 둬사람 섞여있는 거 같았다. 진이는 별 생각 없이 그들 옆을 스쳐지나 명이를 학교내로 들여보내고 돌아섰다. 그때 온 얼굴에 구레나릇이 덮힌 웬 사나이가 앞을 가로막았다. 국방색 군용외투는 때가 번지르했고 수염에는 눈물인지 콧물인지 잔뜩 게발려있었다. 어느새 진이의 전후좌우에 시커먼 장정들이 빙 둘러서있었고 허리에는 딱딱한 물건이 대여왔다.  “어이 친구, 우리랑 어디 좀 가자구.” “저 애가 당신 아들인가? 몇달째 우리애한테서 돈을 빼앗아냈다구.” “이 자식이 사람 때려놓고 지금 나하고 도리 따지고 있네.” 날아오는 주먹을 냉큼 한손으로 받는데 홀옷을 입은 허리춤이 또다시 섬뜩해왔다.  “친구야. 양아치처럼 비겁하게 이게 뭐야? 자신 있으면 우리 단둘이 한번 붙어보자.” 구레나릇은 의외인듯 놀라는 표정이 되어있었다.  “이 자식이 어딘가 돌았어. 그렇지 않구서야 이 날씨에 이런 차림새로 다닐 수 있을라구. 바다가에 던져 얼군 새우 만들어버려. 거시기 떨어지면 강아지들 좋아하겠네 흐흐흐”   놈팽이들이 너털 웃음을 남기고 돌아서는 그 뒤에 대고 진이가 한마디 박았다.  “이걸로 끝내는 거다. 아니면 니들 모두 내 손에 죽을 줄 알어.”   이틑날 진이는 여전히 명이를 앞세우고 학교로 갔다. 애들 우두머리인듯한 그 자식이 먼저 와서 우물쭈물하더니 무슨 보따리를 말없이 내밀었다. 진이가 헤쳐보니 전날 벗기운 자신의 옷가지들이었다.  다음날도 명이와 함께 학교로 갔다. 그날은 아무 사람도 정문에 서있지 않았다. 하학하여 집에 돌아온 명이도 이 며칠은 자기를 괴롭히는 애들이 없다고 말했다.        4. “저녁에 뭘해?” 광이가 이런 전화를 걸어왔을 때 진이는 또다시 “26년”을 무릎 근처까지 거의 끌어오는 중이었다.  “내사 뭐 할 일 있나?” 진이는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손으로 책을 잡으려고 했지만 역시 한뺌 정도 거리가 모자랐다. “그럼 곱창에다 한잔 빨자. 내 쏠게.” “그래, 알았어.”   불현듯 찬바람이 불어치는 바닷가가 머리속에 떠오른다. 그리고 나무가지에 걸린 헌 옷가지들을 벗겨내어 벌거벗은 몸을 감싸던 자신의 모습이 방불히 보인다. 고향의 뒷산도 환영인듯 나타난다. 그속에서 광이가 옷과 바지를 벗어 발을 동여매고 있다. 아득하게 검푸른 색으로 펼쳐진 바다와 새노랗게 물결쳐간 산자락은 칼라만 달랐을뿐이지 그 기세나 웅장함이나 멋스러움은 별로 다를바 없었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뽑는다고 될법도 한 일인가? 주제넘은 자식같으니라고. 타마디.” 구레나릇은 분명 그 한마디를 내뱉고 시다바리들을 이끌고 바람처럼 사라졌었다. 낯설고 황량한 바닷가에는 파도소리만 요란했다. “저 넘을 저렇게 놔두고 가도 괜찮을까?” 광이를 홀로 야산에 세워두고 나오면서 마음 약한 민이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었다.    그러나 진이나 광이나 둘 다 살아남았다. 죽지 않고 용케도 살아남았다. 그리고 서울의 한 거리에서 마주 앉아있다. “어서 마셔라. 술 식겠다.” “한잔 달리자.” “응, 한잔 댕겨라.” 둘은 승부 내기나 하듯 연거푸 술잔을 기우렸다. 인차 술 기운이 오르고 얼굴들이 붉어졌다.  광이는 난생 처음 많은 말을 했다. 어느날 문뜩 술을 먹자고보니 주변에 온통 노인들이 포진해있었고 유일한 학교가 폐교되면서 몇 안되는 어린이마저 사라져갔다고 사직한 원인을 말했다. “그대로 뒀다간 아들애를 망치겠더라고. 안 그래도 만날 중국말만 해요. 우리 다닐 때는 한 학급에 세개 반씩 애들이 와글와글했었는데…” 진이는 또한번 가슴이 질리는 느낌이 들었다. 싸리나무는 곧게 자라는 것보다 비스듬히 자라는 경우가 더 많다. 게다가 가을할 때도 낫을 사선으로 세워가지고 베기에 그루터기가 대개는 칼날처럼 날카롭게 생기게 된다.    광이는 고향을 떠나기 전날 뒷산에 올라갔다고 한다. 마침 그때가 가을철이어서 옛날처럼 싸리밭에 다시 서보았다. 물론 신은 신은채로였다. 이제는 누구도 그의 신을 벗겨버릴 수 없었다. 돌을 들어 싸리그루터기를 짓이겨보았다. 쉽지 않았다. 돌이 빗나가면서 싸리그루에 손이 찔리기도 했다. 살짝 스친 거 같은데도 핏방울이 줄레줄레 흘러나왔다. 광이는 그 상처를 처치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루터기 한개를 짓이기는데 몇분이 걸린 거 같았다. 열서너살 나이때 어떻게 그것들을 짓이기면서 나왔던지 스스로도 놀랍고 장했다. 그런 골기와 용기로 세상을 마주하면 못 이겨낼 일이 없을 거 같았다. 청도를 선택한 이유는 조선족이 많이 모여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선족 민영학교도 있어서 애를 바로 입학시켰다. 그런데 입학 당시 두개 반급이던 것이 일년후에 한개 반급으로 줄어들었고 다음해는 스물명 좀 안되게 남았다. 고향의 전례를 답습하는 모양새였다. 주위 사람들이 다시 여기저기 떠나기 시작했고 또 어떤 집들에서는 애를 한족학교로 옮겨갔던 것이다.   광이는 한국을 떠나 다시 청도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아들애가 성장하는데에는 그나마 청도만큼 적합한 고장이 없을 거 같다고 스스로를 위안했다. 남이 모두 포기한다고 하여 자신도 거기에 휩쓸려서 안될 일이라고 모박았다. 바람 맞으면서 퍼포먼스를 하는 격이지만 어쩌면 진이의 생각과도 비슷했다.    “오늘 올나이트(通宵) 가는 거야.” “안돼. 술 여기까지 하고 찢어지자(分手).” 광이를 억지로 떼어놓고 밖으로 나온 진이는 기지개를 켜면서 심호흡을 했다. 차가운 겨울기운이 페부를 시원하게 훑어주었다.    요즘 기온이 뚝 떨어질 것이라고들 한다. 역대 최저 기온을 기록할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추위를 전혀 느낄 수가 없다. 진이네가 자랄 때는 고향의 겨울은 마냥 30도 밑에서 흘러갔다. 그래도 재미있기만 했고 훈훈하기만 했다. 고작 이따위 추위가 다 뭐냐?!   진이는 청도의 그 바닷가에 다시 찾아가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광이가 고향을 떠날 때 뒷산의 싸리밭을 찾은 것처럼 자기도 그 바닷가에서 한번 안면몰수하고 버럭 멋지게 성질 한번 써보는 것도 즐거운 일이 될 거 같았다. 아무튼 개같은 인생에 엿같은 일밖에 더 있을까 싶었다. 하기야 여래불도 물에 빠지면 저절로 헤엄쳐서 나와야 한다고 물에 빠진 생쥐꼴이 발악밖에 남은 게 더 없겠지.    진이는 약간 정신이 가출된 상태로 집에 돌아왔다. 찬공기가 다져진 집안은 냉랭하기만 했다. 전기담요에 전기를 올리고 이불속에 기어들어가려다가 문뜩 여직껏 발치에서만 맴돌던 책이 떠올랐다. “26년”이던가 하는 그 책이 이상하게 보이지 않았다. 광이의 연락을 받고 문을 나설 때까지만 해도 분명 있었던 책이었다. 이불을 발칵 뒤집어도 “26년”은 어디로 기어들어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저절로 발이 달려 달아났을리는 없었다. 도둑이 들어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출입문을 점검해보았으나 문을 뜯은 흔적은 전혀 없었다. 다시 이불을 뒤집었으나 여전히 책은 보이지 않았다.    “26년”이 잃어진 것이다.     진이는 그 “26년”을 꼭 찾아내야겠다는 일념뿐이었다. 여직 한번도 제대로 보지 못한 책이었다. 그 컨텐츠를 확인하고 이해하고 소화해야 하는 시점이라고 믿고 있었다. 
95    랍치인생 댓글:  조회:800  추천:0  2016-09-10
수필 랍치인생     요즘은 핸드폰을 당장 팽개쳐버리고싶은 충동이 하루에도 열두번 넘어 일어난다. 사람이 열불이 나서 도대체 살수가 없다. 한두시간도 아니고 하루 24시간을, 그것도 하루이틀도 아닌 일년내내 핸드폰에 랍치되여 사는 내 인생이 마냥 불쌍하고 억울하다.  내가 핸드폰이란 물건을 처음 접촉하기는 20여년전의 일이다. 1993년 청도에 와서 입사한 한국회사 사장이 벽돌장만한 들고다니는 전화기를 가지고 현장에 가끔 들렸었다. 일명 데코데로 불리운 그 전화기는 우리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성깔이 사나운 사장님은 말을 하다가도 기분이 잡치기만 하면 전화기를 쳐들고 때리려는 시늉을 하군 했었다. 한번은 한국인 부장이 무엇을 어떻게 잘못하여 진짜로 사장이 던진 데코데에 머리를 깬적도 있었다. 그때 나는 전화는 들고 다니면서 통화할수 있고 또 필요하면 사람도 때릴수 있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그로부터 한 5년이 지나니 중국에도 핸드폰이 심심찮게 보였다. 별로 사치한 물건이 아니게 대수 여유돈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들고다닐수 있게 되였다. 물론 소형화가 되였고 지금에 비해 엄청 비싸기는 했다. 거개가 3,4천원이상이였고 비싼 거는 만원도 넘었다. 중국은 다른건 다 늦어도 장사거리 주물럭거리는데는 참말 빨랐다. 하루 아침에 남의 흉내를 도무지 흠집 찾을수 없이 용케 해내군 했다. 여유돈 대신 적자를 주머니에 넣고 다니던 나는 허리춤에 삐삐기(호출기)를 차고 상사가 언제 어디서 부르든 수시로 달려가군 했었다. 그때 나는 전화기는 통화 기능외에도 사람을 아무때나 개처럼 부를수 있다고 한탄했었다.  다시 3년 지나서 나도 용케 핸드폰을 가지게 되였다. 취재하려 일단 밖에 나기만 하면 하루종일 사람을 찾을 방법이 없어서 회사에서 만날 핸드폰을 사라고 독촉하는것을 여러번 들은 어느 기업하는 친구가 덜렁 3천여 원을 주고 하나 사주었던것이다. 그러니까 내 절로 산것이 아니고 말 그대로 가진것이다.  “이 정도면 안돼? 어른이 뭐 게임할 일도 없고, 그저 통화나 하면 되잖아.” 친구가 오히려 미안해하며 이렇게 말하던 모습이 지금도 눈앞에 선하다. 그때는 문자를 주고 받는 기능이 있었던지 기억에 잘 남지 않지만 지뢰를 파는 게임 같은건 있었다. 그래도 나는 친구의 말대로 게임을 놀지 않았다. 핸드폰을 대화하는데만 충실하게 사용했었다.  후에는 자기 돈을 팔면서 여러번 새 핸드폰을 바꾸었었다. 거의 1,2년 꼴로 한번씩 바꾸었지 않았나 싶다. 어떤 경우는 핸드폰을 마사먹거나 잃어버려서, 또 어떤 경우는 광대역을 설치하면서 덤으로 받아서 그간 사용한 핸드폰이 억수로 많았다. 그래도 통화외의 기능에 대해서 별로 관심을 느끼지 못했다. 많은 사람들이 길을 가면서도 핸드폰을 들여다보는 그 시점에도 나는 핸드폰은 통화하는데만 쓰는게 맞다고 생각하고있었다. 그러다가 마누라가 하도 지청구를 해대면서 스마트폰을 안겨줘서야 세상이 많이 변했다는것을 문뜩 알게 되였다.  그 사이 핸드폰에 많은 기능이 추가되였던것이다. 통화외에 고작 계산이나 하고 게임을 놀고 메시지나 받던데로부터 이젠 핸드폰으로 뉴스를 볼수 있게 되였고 핸드폰으로 사진도 찍고 녹화도 할수 있게 되였다. 메일을 주고 받는건 물론 멀리 있는 친구와 화상 채팅도 할수 있다. 20년전에 미국 과학환상영화에서 화상 채팅하는 장면을 보고 저게 가능할가고 의문을 품었던것이 금방 현실로 우리앞에 다가온것이다. 네비게이션도 핸드폰에 들어오고 은행도 핸드폰과 접목되여서 핸드폰 하나만 들고나서면 세상에 못할 일이 없어졌다.  특히 위챗의 등장은 우리의 인생을 더욱 다채롭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위챗 모멘트를 통해 서로의 정보를 공유하고 뜻깊고 즐거운 순간을 함께 나누기도 했다. 흥성거리는 단체 행사나 오붓한 가족모임 장면들은 보기에 그저 좋았고 음식 솜씨 자랑이나 관광체험도 눈을 즐겁게 했다.  그러는 와중에 위챗 계정도 알게 되면서 세상이 이렇게 될수도 있구나 하는 위기감도 들었다. 누구나 기자가 되고 누구나 뉴스를 전달할수 있다는 현실앞에서 전률을 느끼지 않을수 없었다. 공식 사이트에서만 뉴스를 접하던 따분함에서 벗어나 일반 시민 기자들이 전하는 소식은 더욱 우리 현실에 가까왔고 친근하기도 했다. 수십개 계정에서 매일 전하는 뉴스나 정보는 산더미 같았고 하루 스물네시간이 오히려 부족함을 느꼈다. 시간만 나면 핸드폰을 들여다보는 것이 이젠 본능이 되였고 습관이 되였다.  동시에 생겨난 위챗 모임방도 인기리에 출범했다면 틀린 표현이 아닐것이다. 서로 뜻이 맞는 사람들끼리 대화의 공간을 만들어서 찧고 볶는게 꽤나 인기가 있었다.   그런데 어느날부터인가 이 모든 스릴이 점차 가라앉기 시작했다. 둥둥 뜨던 풍선이 하나둘 터지기 시작한것이다.  무엇보다 모멘트에 광고들이 뜨기 시작한것이 눈살을 찌프리게 했다. 전에 티비를 보면서 제일 싫었던게 광고였던거 같다. 그 미열이 핸드폰으로 이어진게 분명했다. 그래도 참을수는 있었다. 어차피 상품시대이니까 광고는 피면할수 없다고 좋게 생각했다. 싫으면 보지 않으면 되니까. 뛰어넘어서 보고싶은것만 골라 보면 되니까.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니였다. 여기저기서 면목있는 사람들이 자기네가 만든 모임방에 초청했다. 대개는 아주 친하고 자주 만나고 또 술도 나누는 사람들이라 체면에 수락하지 않을수도 없었다. 그렇게 억지로 끌려들어간 모임방이 저그만치 스물개가 넘었다. 작은 집이 수십명이고 큰집은 수백명이나 된다. 어떤 집에는 초청한 방장외에는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 그 많은 방에서 그 많은 사람들이 하루에 한마디씩만 말해도 수천마디가 된다. 핸드폰이 시도때도 없이 띵동땡동거려서 도무지 사람이 일할수 없다. 결국 몽땅 소음처리를 해버렸지만 핸드폰을 들기만 하면 새빨간 얼굴들이 다투어 자기를 봐달라고 서로 달려드는데는 짜증이 나지 않을수 없다.  그렇다고 모임방에서 탈퇴할수도 없다. 자칫 초청한 친구나 가까운 방장과 현실에서 사이가 벌어질수도 있기 때문이다. 스마트폰이 스마트하게 탈퇴한 사람을 바로 알려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쩔수 없이 랍치당한 많은 중생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휴면상태 그대로, 개장 휴업 그대로 옴짝달싹 못하고 있을수밖에 없다.   사실 모임방에서 발언하는 내용들은 거의가 전혀 영양가가 없는것들이다. 어느 모임방이나 하릴없는 사람들이 다 있는 모양으로 하루종일 수고도 마다하지 않고 여러가지 아이콘을 퍼올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전문 위챗계정의 뉴스들을 부지런히 날라오기도 한다. 남들한테도 있고 남들도 다 본듯한것들을 자기 혼자만 있는것처럼 무더기로 올려놓고 으시대는 사람들을 보면 막 욕하고싶은 충동마저 일어난다. 이보다 더 억이 막히는것은 모임방마다 찾아다니면서 여러가지 보험을 선전하는 사람들이다. 딱 다단계 판매원 같아보이는 이런 사람들은 비단 모임방에서만 아니라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한테 도킹을 요청해와서는 매일 개인 위챗으로도 보내는것이다. 가히 살인적이라 해야겠다. 물론 교인들의 선교행위도 눈쌀을 찌프리게 하기에 충분하고 별의별 투표장을 끌어와서 투표해달라고 호소하는 사람들은 애교를 벗어나 투정에 가까운 느낌이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행위가 실지는 하나의 민폐라는것을 모르고있다. 숱한 사람들이 그 테두리에 억지로 포박당하여 멋대가리 없는 쇼를 막무가내로 구경해야 하는 이 현실이 참으로 비참하다. 뛰고 나는 재간이 있는 사람도 꼼짝 못하고 그대로 당해야 하는 이 심정들을 누가 안단 말인가.  스마트한 인간이 스마트폰을 만들어서 그속에 스스로를 랍치하는 이 액션은 과연 바람직한것인가? 백세인생 시대에 랍치 인생을 사는것도 고역이다. 
94    자투리 에피소드로 엮은 대형 화폭 댓글:  조회:522  추천:0  2016-06-24
  평론   자투리 에피소드로 엮은 대형 화폭 박일 장편소설 “안개 흐르는 태양도”의 엮음의 미학   장편소설을 이렇게도 쓸수 있구나. 조금도 과장된 표현이 아니다. 박일선생의 장편소설 “안개 흐르는 태양도”를 읽으면서 첫 인상이 이러했다. 책을 다 읽고서가 아니라 한쪽으로 읽으면서 줄곧 이런 곤혹에 빠지기는 처음이였다. 글에 흥취를 가지기 시작해서부터 자로 재듯이 네모반듯한 장회소설이나 또는 스케일이 거대한 력사소설이나 아니면 적어도 구체적인 이야기 줄거리를 가지고 얼기설기 실타래가 된 모순들을 풀어나가는 신소설에 익숙해왔었다. 아니, 익숙이라기보다는 장편소설은 의례 그렇게 써야 하는줄로 알고있었다. 그래서 장편소설의 경우 우선 먼저 거대한 주제와 복잡한 구조를 가져야 한다고 리해하고있었다. 물론 편폭의 요구가 우선이기는 하겠지만 책 1권이상의 분량이여야 한다는 특성은 그것이 장편이냐 중편이냐 아니면 단편소설이냐를 구분하는 아주 원시적이고 기초적인 문제이기때문에 요구 사항에 넣지 않는게 오히려 정상적이다. 그러니까 장편소설은 다양한 인물과 복잡한 여러가지 사건을 통해 인간사회를 깊이있고 폭넓게 종합적으로 그리는것이 특징이다. 장편소설은 인생과 사회에 대한 깊은 통찰과 체험을 바탕으로 풍부한 사상과 깊이 있는 인생관을 제시하게 된다. 아울러 체계성, 복잡성은 장편소설의 구조적인 특성이라 해야겠다. 그리고 장편소설이라면 인물의 성격과 내면세계를 섬세하게 그리고 해부해야 하는게 다음 수순이다. 소설의 “플롯(plot)”이란것은 결국 인물이 리드하여 끌고가기 마련이다. 플롯 전개가 다채롭고 인기를 끌려면 무엇보다 그 라인에 서있는 인물의 형상 디자인이 변화무쌍하고 다차원적이여야 한다. 자칫 슈제트가 밋밋하거나 무미건조하게 되는 중요한 원인이 인물이 고루하고 경색되여있기 때문이다. 특히 장편소설의 경우 메마른 인물형상 또는 빈약한 인물성격은 그대로 작품 실패란 결과를 몰아오게 된다. 풍성한 인물의 내면 묘사는 어쩌면 이야기 자체를 릉가하는 요인일지도 모른다. 물론 가장 홀시할수 없는것이 전편 작품을 관통시키는 시대배경이다. 절대적인것은 아니지만 장편은 그 부피만큼이나 아우르는 력사시기가 길고 거대할수밖에 없다. 인물이 아무리 퐁퐁 살아움직인다하여도, 전달하고저 하는 메시지가 얼마나 거창하더라도, 얼기설기 짜임새를 어느정도 정교하게 짜더라도 일단 그것들이 위치해야 할 좌표가 매치되지 않으면 결국 돈 끼호떼식의 랑패상이 되고만다. 하기에 장편소설이라면 한세기를 넘나드는 넓은 무대까지는 몰라도 적어서 한개 시대를 착실하게 반영할수 있는 공간 정도는 되여야 한다고 본다. 그런데 “안개 흐르는 태양도”에는 이런 장치나 시설이 전혀 없다. “전혀”라는 표현이 과장되기는 했으나 우리는 이 소설에서 상기한 요소들을 거의 찾아볼수 없는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독자들에게 널리 읽혀지고있으며 좋은 평판을 받고있다. 전통적이고 또 정통적인 장편소설에 대한 리해를 단번에 뒤집어버린 “안개 흐르는 태양도”는 그래서 새삼스럽게 다시 연구해봐야 하는 가치를 가진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대체 어떤 구조적인 특점들을 가지고 있는것인가?   미니소설의 형식을 빌린 장편소설 이 소설은 비교적 수월하게 읽을수 있는 작품이다. 장편임에도 짤막한 이야기를 읽는 느낌이 든다. 소설은 2박3일간의 동창모임에 대해 쓰고있다. 그 짧은 시간을 가히 장편이란 장자에 부끄럽지 않을36만자로 담아냈다. 소설은 “기차역”, “할빈공항” 등 47개의 소제목을 설정하고있다. 슈제트 전개의 편리성을 위해 시간과 장면 등에 따라 나누는 장절이기에 앞서 47개 소제목 모두가 각각 하나의 이야기로 되여있는 특수한 구조이다. 즉 47개의 서로 다른 이야기들이 유기적으로 조합되여있어 헤쳐놓으면 각자가 하나의 독립된 이야기가 되고 모아놓으면 서로가 상부상조되는 완정한 이야기가 되는것이다. 장기간 벽소설 창작에 전념해온 작가의 경력과 무관하지 않다. 작은 편폭에 스토리를 담아내야 하는 벽소설 창작에서 경험을 루적한 작가는 장편소설에서도 그 장끼를 발휘해 생각밖의 성공을 거두게 된다. 특히 책자로 묶어지기전에 ‘장백산”잡지에 먼저 련재로 발표하면서 모름지기 독자들의 접수력에 많은 신경을 도사린 흔적이 엿보인다. 그리고 조글로에 십수차 다시 연재되면서 드라마같은 소설이라는 평가도 받게 된다. 요즘같이 절주가 빨라진 세월에 장편은 독자들에게 다가가기가 좀 무리이다. 시간에 쫓기는 독자들이 장편이란 몸체에 우선 기가 질리기 때문이다. 슬슬 뒤걸음치는 독자들을 책상앞으로 당겨오자면 일방적인 우격다짐은 절대로 통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사정사정할수도 없는 노릇이다. “사탕”을 맛보이는 회유도 두번이상 더 통하지 않는다. 어떻게 할것인가? 이때 박일 선생만의 남다른 노하우가 빛을 발하게 된것이다. 작가는 도도한 서술을 회피하고 바로 이야기 그 자체로 들어가서 토막토막 이야기를 만들어낸것이다. 독자들은 미니소설을 읽듯이 장편 한부를 다 읽고도 장편을 읽었다는 생각을 전혀 못하는 경지에 포섭된것이다. 이 점은 작가의 창작후기에서도 충분히 엿볼수 있다. 작자는 “남들이 쓰는 소설과 얼굴이 많이 다르게 내식대로 장편소설을 쓰려고 마음 먹은지가 오래된다.”면서 “짧은 미니소설을 많이 써온 자신의 장끼를 장편소설속에 충분히 드러내 하나의 정체속에서 나오는 줄거리마다 깜찍하고 재미나게 엮겠다는 생각이였다.”고 창작전에 미리 그런 계획을 가지고있었다는 고의를 설명했다. 그러니까 일단 이 소설은 얽음새에서 벌집의 모양새다. 꼭꼭 다져진 륙각형의 독립적인 집이 한데 모여서 벌집이라는 완정한 집을 이루듯이 이 소설은 각자가 짤막한 이야기들이 모여서 거대한 장편을 이루어낸것이다.   인물과 사건을 구체화하지 않은 구조 앞에서 필자는 이 소설이 미니소설의 형식을 빌렸다고 주장했다. 형식적인 특점을 규정한것인데 이를테면 벌집처럼 공동분모를 가진 개개의 집들이 얼기설기 얽혀 모름지기 하나의 큰 집이 만들어졌다고 형용했다. 그렇다면 “작은 집”과 “큰 집”의 관계 설정을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철학적으로 해석하면 양자는 물론 종속의 관계이고 대립통일의 관계일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이런 대세적인 흐름말고도 이 소설은 어느 장편소설과 다른 나름대로의 특점을 따로 가지고있다. 일단 항구적인 인물이 없다. 이 소설은 전편 작품을 관통시키는 인물이 단 한명도 없다. “백일호”와 “구금자”가 첫시작에 등업하고 또 마지막으로 커튼콜하는 장면때문에 자칫 이들이 주인공일것이라고 착각할수 있지만 절대 그게 아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필묵을 좀 더 허비하였을뿐 두사람이 꼭 주인공이여야 한다는 주장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행사 장소를 섭외한 당사자이자 학급 반장 출신이라는 신분외에 작품의 주인공으로서 빠질수 없는 인물성격의 형성, 발전, 승화의 과정 등이 모두 결여되고 두사람을 통한 사건의 전개도 유기적으로 질서있게 배치되지 못했다. 그나마 다른 인물들에 비해서 형상이 상대적으로 포만감을 이루었다는 점은 승인해야겠다. 다음 인물의 성격이 유동적인것에 동조하면서 사건도 복합적 구성방식을 선택하여 서로 닿지 않는 많은 에피소드들을 고리로 연결시켰다. 이 특점은 47개의 소제목(이야기)을 들여다보면 더욱 두드러지게 알린다. 소설의 발단은 25년만의 동창모임이다. 자연히 전반 작품을 꿰는 화제는 2박3일간의 활동 스토리이다. 그래서 “별무리호텔”,”출석부”같은 집합행사가 앞서게 되고 “숲속의 비밀”이나 “수영장”, “녀자의 눈물”, “몽야술집”과 같은 레전드가 벌어지게 되고 더불어 “보배찾기”, “야식장”, “태양도에서“, “우등불야회”와 같은 즐거운 장면이 벌어지게 되며 이어 “”잠들수 없는 밤”이나 “”기념사진” 또는 “석별의 정”과 같은 아쉬운 대목도 있게 된다. 이 라인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쭉 이어졌다고 볼수 있다. 물론 25년만에 차례진 동창들의 만남이기에 학창시절에 대한 그리움과 회억도 피면할수 없다. 서로 만나면 자연히 당년에 우리는 어찌하였고 누구누구는 어떻게 했다는 얘기가 오가게 된다. 하여 “뚝배기”, “짝사랑”, “돼지족발”, “칠색박사” 등 학창시절 잊을수 없는 일화들이 등장하게 된다. 필자가 꼼꼼히 손꼽아본 결과 이런 류의 글이 대개 17개 정도가 되였다. 그리고 동창들이 오래간만에 모이면 두말할것없이 졸업후의 생활이 더 궁금하기 마련이다. 그간 무슨 일을 어떻게 해왔고 지금은 무엇을 어느 정도 이루었냐가 가장 큰 관심사일수밖에 없다. 때문에 “수련이”, “철규”, “최윤희”, “좁쌀선생”, “김운재”와 같은 굵직한 이야기들이 이어진다. 두루 따져보면 이런 글은 19개 이상이다. 당연히 별종같은 이야기도 있다. 이를테면 “백청아”. “박화”와 “”젊은 세대” 같은 글들이다. 동창모임이라는 큰 테두리에서 벗어난 이야기들이다. 상기한 이런 이야기들은 제목이 독립적인것만큼이나 등장하는 인물도 수시로 바뀌면서 나름대로의 사연을 말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코 홀로 존재하지 않고 호상 침투되고 호상 교차되면서 실타래같이 얽혀졌다. 그래서 독자들은 다 읽은듯 다시 빠져들고 빠져들었다가 또 다 읽은것같은 기분을 만끽하게 된다. 이 작품은 등장하는 인물들이 경중이 따로 없이 모두가 그대로 주인공이 되여버리고 실타래처럼 한올한올 풀어가야 할 모순도 제시되지 않았으며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주제도 도출하기 어렵다. 한마디로 주인공이 없고 사건이 없고 그리고 주제가 없는 “3무’가 이 소설이 가지고있는 최대 특점이라 해야겠다.   핵심적인 포인트는 “조미료” 이같은 시스템적인 시도가 전반 작품에 미칠 영향은 절대 과소 평가할수 없다. 자칫 흐트러지거나 최종적으로 실패를 불러오기가 십상이다. 그런 도전과 리스크를 감수하면서까지 작가의 구상이 실천으로 옮겨진데는 나름대로 그어떤 자신이 있었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요즘 주식마당에서 떠도는 말처럼 기본면(基本面) 즉 펀더멘털을 탄탄하게 엮을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일것이다. 우선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것이 있다면 작품을 형성한 골격이 흔히 말하는 기승전결의 모델을 벗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완성도에서 별로 짝지지 않는다는것이다. 기존의 인식을 완전히 뒤집어버린 그 파워는 어디에서 오는것일가? 이 소설을 읽으면서 작가가 꼭마치 료리사같다는 생각을 지울수 없었다. 료리는 재료의 종류에 따라 맛이 달라진다. 그리고 조미료나 소스에 의해서 서로 구별되기도 한다. 일단 재료는 서로 다른걸로 선택할수밖에 없다. 어차피 테이블 하나를 똑같은 재료로 채울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니까 나머지는 조미료나 소스의 역할이다. 신맛을 내냐 단맛을 내냐 아니면 쓴맛을 내냐 매운맛을 내냐는 대개 이들의 몫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능숙능란하게 “조미료”를 샤용할줄 아는 사람이여야 한다. 자명한바 여기서 말하는 “조미료’는 무엇보다 우선 언어를 지칭한다. 문학은 언어예술이라는 전제에서 새삼스럽게 언어문제를 내세우는것은 좀 중뿔난 얘기같지만 사실 우리는 오래동안 언어란 요소를 많이 소홀히 해온것도 부인할수 없다. 사건을 꾸미는데 지나치게 집념해오면서 사건이 어느 정도로 굴곡적이고 반전이 크며 스케일이 큰가에만 성공의 추를 매달아왔던것도 현실이다. 그래서 우리의 많은 글들은 아직도 7~80년대의 언어로 장식되여있다. 요컨데 소설가는 먼저 이야기군이여야 하는건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 이야기를 재치있게 엮는건 바로 언어이다. 메마르고 조잡하며 창백한 언어로 구술한 이야기는 비록 그 사건 자체의 렵기와 신비 및 파워로 인해 잠시적으로 감동을 줄지는 몰라도 결코 영원할수는 없다. 결국 문학작품의 승부는 언어에서 나뉘여진다. 언어가 매칠하면 사건이 좀 서툴어도 별로 흠이 되지 않는다. 이야기 꾸미기에만 주력하는 사람치고 오래가는 경우를 거의 보지 못했다. 반면에 언어수련에 게을리하지 않은 사람은 작은 사건에도 방대한 화폭을 담아내면서 성공일로를 걷는것을 많이 보게 된다. “안개 흐르는 태양도”는 언어로 승부수를 던진 전형으로 볼수 있다. 전편 작품은 그대로 언어의 향연이다. 특히 서술어보다 대화어에서 더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위트가 넘치는 대화속에 무르녹은 유머, 익살, 우스개, 육담들은 그대로 반짝이는 구슬과 같은 존재로 이 소설을 한줄에 꿰어놓았다. 작가는 장인답게 공력을 들여서 47개의 이야기에 하늘의 별같이 무수한 구슬을 흩어놓아 장관을 형성한것이다. 작가의 탄탄한 언어수양을 한눈에 엿볼수 있는 대목이다. 가장 많이 사용된것은 우스개소리이다. 거의 갈피마다에 등장하면서 무드를 적당히 조절해주고있다. 어쩌면 익살하고도 통하는 우스개는 일반적으로 단마디 형식으로 나타나 순간적인 웃음을 유도한다. 묵직한 화제를 가볍게 넘기는 수법에 다름 아니다. 우스개와 비슷하지만 상대적으로 약간 더 전개가 되는 유머의 사용도 만만찮다. 얼핏 손으로 꼽아보아도 완정한 형식의 유머가 20개 정도는 된다. 말장난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억울할수밖에 없는 유머의 대량적인 사용은 때와 장소를 다분히 활성화시키기 위한 조처로 볼수 있다. “야식장”이란 장절에 이런 대목이 있다.   … 한 가정에 “사랑해요”와 “안 사랑해요”란 두 쌍둥이 자매가 있었수다. 어느날 아버지가 물었수다. 너희들 두 자매중 하나는 군대를 가야 하고 하나는 대학으로 가야 할것 같은데 누가 어디로 가겠느냐? 아버지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입이 빠른 동생 “ 안 사랑해요”가 제꺽 “저는 군대!”하고 손을 들었대유. 그렇다면 대학으로 가야 할 자매는 누굴가요? 시-작! “대머리”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마치도 약속이나 한듯 녀동창들이 동시에 “사랑해요!”하고 한입처럼 웨친다. “그러면 그렇겠지. 우리반 녀성들이 한결같이 이 ‘대머리’를 사랑한다니까.”   보다싶이 25년만에 만난 동창들의 우애와 절묘하게 매치된다. 사람들을 웃게 만들기 위한 오락의 일종이자 의사소통의 한 형태인 유머의 삽입은 그래서 전반 작품을 살아나게 하는 매력을 가진다.  그리고 이 소설에서 홀시할수 없는것이 육담의 공식적인 등장이다. 옛말같은 구두식 이야기에 가끔 등장하는 육담이 소설에, 그것도 대량으로 등장하기는 아마 이 소설이 처음일것이다. 육담은 주로 성에 관한 소재로 꾸며진 민담이기에 외설담이라고도 한다. 민간에 가장 널리 퍼져있으면서도 남녀간의 색정이나 성생활을 소재로 다루고있다는 리유로 저속하다는 판정을 받아 글에서는 모름지기 기피의 대상으로 여겨져 공개가 껄끄럽다. 그런 육담이 이 소설에 저그만치 20여 컬레가 소개되고있다. 따분함을 넘기기 위한 장치이기에 앞서 말그대로 서로 허물없이 말할수 있는 동창들간의 관계와 그 분위기를 전달하기 위한 수법이 아닐가싶다. 소설의 돈오 구태여 소설을 어떻게 써야 한다는 표준을 세울 필요가 없다는 점을 이 소설은 실례로 잘 표현했다. 본 평론은 이 소설의 형식적인 부분만 살펴보았다. 즉 소설을 어떻게 엮었는가를 집중적으로 조명해보았다. 흔히들 구성은 작품의 주제를 뒤바침하는 부수적인것이라고 말하지만 필자는 오히려 엮음새가 꼭 주제를 위해 봉사할 까닭은 없다고 본다. 건축사는 디자인에만 집중하면 그만이다. 집이 멋들어지게 지어졌으면 그것으로 만족해야 할것이다. 그 집에서 누가 무슨 목적으로 어떻게 살아가느냐는 집 짓는 사람이 신경을 도사릴 사안이 아니다. 이제 우리는 주제선행의 십자가를 벗어던져야 할때가 아닌가싶다.  
93    불감증 댓글:  조회:893  추천:1  2016-05-26
수필 불감증     요즘 세상을 사는 사람들은 아무래도 많이 피곤할것 같다. 안 그래도 잔뜩이나 빨라진 생활템포때문에 스트레스가 쌓일대로 쌓여서 죽을 지경인데 식품 안전이요 뭐요 하면서 신경을 더 도사리게 만드니 사람이 도무지 어떻게 살 방법이 나지지 않는다. 정말이지 먹어야만이 살아갈수 있는 인간이 수백년 수천년동안 꾸준히 걱정없이 먹어온 음식을 눈앞에 두고 이걸 도대체 계속 먹을수 있냐를 고민해야 하는 처지가 되였다면 그대로 지옥이 따로 없을법도 하다.  솔직히 시장에서 먹거리 재료들을 사거나 식당에서 해놓은 음식을 먹거나 우리는 그속에 무슨 나쁜 성분들이 들어있는지 전혀 알수 없다. 그러다가 우리몸에 이상이 생겨 당장 죽게 되여도 웬 영문인지를 모른다. 그저 내 명이 마무리될때가 되여서 그렇겠거니 하고 체념할수밖에 없다.  밖에서 스모그가 기승을 부려도 우리는 우리몸이 침해당하는 속도와 강도를 볼수 없다. 그렇게 페고 호흡기고 고장이 생겨서 병원에 끌려가 치료를 받다가 죽어도 도대체가 환경의 잘못인지 약품의 차실인지 아니면 내몸이 원래부터 부실해서인지를 분간하기 어렵다.  참말로 억울하기는 해도 그러나 이 정도는 약과에 불과하다. 지쳐서 죽으면 그만이다. 먹다가 희생되여도 원은 없다.  어차피 말발이 좀 세게 나갔는지는 모르겠다. 내가 이 세상을 개변시킬수 있는것도 아니니까 체념해서 모름지기 저절로 흘러나간 탄식일지도 알바 없다.  아무튼 숨 꿀꺽 넘어가서 눈이 딱 감기면 모든 시름과 걱정과 공포따위가 더불어 가뭇없이 사라진다는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래서 년세 많은 분들은 감당하기 힘든 일에 부딪치면 흔히 “내가 죽어야지, 내가 죽어야지.” 그렇게 넉두리부터 하는게 아닐가싶다. 목숨이 끊어지면 세상도 따라서 없어지므로 그대로 모든것이 끝나기때문이다.   사람으로 생겨서 가장 힘든것은 뭐니뭐니해도 그래도 분명 내남에 모두 나쁜 일이란것을 뻔히 알면서도 눈을 시퍼렇게 뜨고 지켜볼수밖에 없는 운명일것이다. 그 피해의 폭과 초래되는 엄청난 후과를 얼마든지 감안하고 짐작할수 있는데도 속수무책으로 손을 털고 강건너 불구경할수밖에 없는 립장에 처해지면 인간은 자못 치사해진다. 지금 현재 우리가 그런 딜레마에 빠져있다.  일명 불감증 바로 그것이다.  얼마전 인터넷에서 이슈거리 하나가 뜨겁게 달구어진적이 있었다. 저 유명한 국제대도시 상해의 지하철에서 발생한 일이다. 외국인 남자 하나가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갑자기 쓰러졌다. 뉴스에서는 그 남자가 왜서 쓰러졌는지를 밝히지 않았다. 자칫 다리에 힘이 빠져 넘어졌을지도 모른다. 혹시 몸이 아파서 꼬꾸라졌을 가능성도 있다. 아니면 누구에겐가 밀려 잠간 엎어진데 불과할수도 있다. 중국이 원래 밀고 닥치는데는 장사급이니까. 문제는 원인이 아니라 결과이다. 사람이 자빠졌으면 일으켜세우고 부축해줘야 하는게 당연한 도리이다. 그런데 외국인 남자가 쓰러지기 무섭게 온 차칸에 개미 한마리 남지 않고 텅텅 비여버린것이다. 그 많던 인간들이 어느새 어떻게 피해버렸는지 그저 놀라울 지경이였다.  이 메가톤급 소식은 온라인을 통해 순식간에 전 세계로 퍼졌다. 중국은 톡톡히 망신을 당하였고 뭔가 당장 개변될것처럼 언론매체부터 반성을 촉구하고 나섰다. 그러나 그게 불과 며칠뿐이였다. 사람들은 또다시 무덤덤한 일상으로 돌아와 무감각하게 계속 살아가기 시작한것이다. 그 넘어진 외국인이 후에 어떻게 되였는지도 전혀 뒤소식이 없다.  (아무렴 죽지는 않았겠지.) 이 정도로 기원할수밖에 없다. 하기사 어쩌면 입방정 떠는 사람들이 더욱 나쁠지도 모른다. 사진 찍고 동영상 찍을 시간은 있으면서 사람 구할 생각은 없는 그들이 무슨 자격으로 남을 꾸짖는단 말인가?! 세상을 손가락질할 기사감 하나 멋들어지게 챙겼노라고 웃음집을 흔들거릴때 그들은 이미 인간이기를 포기한 상태가 아니고 뭔가?!  나는 중국인이 오늘 이 지경에까지 타락한데는 매체가 큰 몫을 공헌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언론이 언론 역할을 못하고 진부한 취미에 오르가즘을 느낄때 사회나 개인의 정의감이나 수치심따위는 그대로 따라서 구겨질수밖에 없다.  길가에 쓰러진 노인을 구했다가 법놀음을 하게 된 사연에 대한 기사 제목이 “넘어진 노인을 구한 청년 10만 위안 배상 판결”이였다. 이 기사 내용을 들여다보지 않아도 독자들은 타이틀만으로도 괜히 사람을 구했다가 10만 위안의 손해를 보게 된다는 잘못된 메시지를 전달받게 된다. 이슈감 하나 잘 띄우기는 했어도 그 덕분에 전반 사회가 죽어가는 사람을 무덤덤하게 바라볼수밖에 없는 처지로 륜락하게 되였다. 필경 우리나라에는 10만 위안 뭉치돈을 집안 여기저기 쌓아두고 어화둥둥 춤놀이로 세상을 멋스럽게 살아가는 사람은 몇이 안된다. 거짓말 많이 보태서 가령 정말로 그렇게 사는 사람이 천지사방에 ‘허벌나게’ 많다 하더라도 매일매일 그렇게 배상이나 하면서 사람을 구하다보면 결국 실 한오리 걸치지 못하고 길거리에 나앉는 신세가 될게 뻔하다. 그러니까 어쩔것인가? 팔짱 찌른채로 자기 갈 길을 가야 한다. 뒤에 사람이 싸늘한 시체로 굳어지던 말던.  이런 렵기적인 실례는 적지 않다.  주은 물건을 분실자더러 찾아가라고 했다가 경찰이 들이닥쳐 곤욕을 치뤘다는 일화도 있고 거리에서 돈가방을 주워 주인더러 어디서 만나서 돌려준다고 약정된 장소에 갔다가 사기군으로 몰려 수갑을 차게 되였다는 에피소드도 있다. 두루두루 줄줄이 궤어서 이야기하자면 볼장을 다 보게 되는 이런 사연을 통해 우리는 우리사회의 불신과 랭혹이 어디까지 왔다는것을 어렵지 않게 판단할수 있다.  이런 식의 보도가 초래하는 가장 직접적인 결과는 이렇다. 물건을 줏게 되면 멀리 버려라. 찾아가라다간 경찰이 당신을 훔쳤다고 한다.  돈 주었으면 써버려라. 돌려주다간 공안이 도둑 취급한다.   이런 결과는 사실상  잃은 물건 찾을려면 절반쯤 주은 사람에게 사례품으로 주라. 돈 주워줬으니 몇 퍼센트쯤 감사비로 드리는게 좋겠다 이런 식으로 호도하기만도 못하다. 이런 경우는 적어도 사람 사이를 찬바람 쌩쌩한 골짜기로 만들지는 않을것이기 때문이다.  그보다 지금껏 실례를 보면 공안이나 법원의 판단이 너무 성급하고 초딩스럽다고 말하지 않을수 없다. 살인강도때는 잘도 CCTV를 확인하고 목격자를 찾고 하더니만 이런 일에는 왜 그런 효과적인 방법을 도입할 념을 않고 주관적인 판단을 앞세우는지 모르겠다.  어떤 의미에서 말하면 이런 사소한 일이 오히려 살인강도사건보다 사회에 끼치는 해악이 더 클지도 모른다. 살인강도는 간만에 어쩌다 발생하지만 인간적 도움이 필요한 저런 사연은 매일매일 우리 눈앞에서 무더기로 펼쳐지기 때문이다.   
92    뉴미디어시대, 위챗의 파워는? 댓글:  조회:594  추천:0  2016-05-18
뉴미디어시대, 위챗의 파워는? 위챗채팅방 '신사모' 설립대회 칭다오서     흑룡강신문사 산둥지사의 위챗채팅방 '신문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이하 '신사모'로 약칭)'이 온라인에서 오프라인으로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4월 29일, 1,300여 명 방대한 회원을 가지고 있는 '신사모' 설립행사가 칭다오시 산하 현급시인 핑두에서 성대하게 진행되었다.  이날 행사는 칭다오농일식품유한회사 김철웅 사장이 후원,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100여 명 회원이 모처럼 신청해 성황을 이루었다.  아침 8시 30분 청양구 세기공원 동문에서 농일식품에서 제공한 버스 두대에 갈라 타고 핑두로 이동한 회원들은 우선 농일식품 공장을 참관했다. 회원들은 김철웅 사장 부부의 안내하에 선후 고추가루 가공공장과 김치가공공장을 참관, 연후 핑두 위안중팡(圆中方)대주점으로 이동하여 ‘신사모’설립대회를 정식 가졌다.   흑룡강신문사 산둥지사는 1997년에 칭다오에 자리잡았다. 내년에 지사 설립 20주년을 맞이하게 되는 산둥지사는 그간 산해관 이남 유일한 합법적인 민족언론매체로서 현지 민족사회의 동태를 즉시적으로 전달하고 당과 정부의 관련 정책을 제때에 소개해왔다. 뿐만 아니라 민족단체의 설립을 주도하고 외자기업 유치를 돕는 등 매체 기능을 훨씬 초월하는 여러가지 많은 일들을 해오면서 민족사회로부터 높은 긍정과 지지를 받아왔다.    그러나 IT산업의 비약적인 발전과 더불어 뉴미디어시대가 도래하면서 전통적인 종이매체는 엄중한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다. 모바일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티비도 이젠 한물 건너간 시점이니만큼 종이매체는 더 엄중한 생존위협에 맞닥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  산둥지사는 진퇴 양난의 기로에 들어섰다. 인쇄비를 체불해가면서 몇년 버텼지만 점점 커가는 흑자 구덩이는 보기만 해도 두려웠다.    어떻게 할 것인가? 이대로 손을 씼고 나앉으면 마음도 편하겠지만 유일한 언론지를 잃게 되는 민족사회는 어쩔 것인가? 그렇지 않아도 문화관, 예술관, 공립학교, 잡지 등 문화 관련 기관이 전무한 이곳에서 신문마저 사라지면 그 문화갈증을 어떻게 해소한단 말인가?   이런 고민의 와중에 “우리도 한번 위챗공공계정을 개설해보자”는 건의가 나왔다. 2014년 3월 드디어 산둥지사의 위챗공공계정인 '해안선문화예술전파'가 고고성을 울렸고, 이 계정은 말그대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해 말에 이르러 ‘해안선문화예술전파’를 팔로우한 팔로워가 1천명 선에 육박했으며 기사 조회수도 500회를 넘기기가 일쑤였다. 그만큼 산둥지사만이 가지고 있는 정보의 우세가 빛을 발했고 따라서 위챗의 파워를 다시 한번 실감하게 했다.    2015년 6월 24일에 발표한 '칭다오 강둥숯불구이 해변휴가촌을 찾아서'는 등재한 당날로 조회수 1천회를 돌파, 이후 며칠 동안 신문사의 전화는 휴가촌의 여러모를 문의하는 사람들로 인해 불날 지경이었다. 외딴 지역에 자리잡아 많이 한산했던 휴가촌에서도 갑자기 찾아드는 손님들에게 길 안내하느라고 일손이 딸려 야단법석이었다. 이 기사는 현재까지 조회수 5975회를 기록하고 있다.    산둥지사가 위챗에 올인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2016년 1월 19일 '백혈병에 걸린 4살짜리 김미나어린이를 도와주세요!'란 글을 발표하면서다. 최다 조회수인 6000회를 기록한 이 기사는 겉잡을 수 없이 일파만파로 퍼져나갔고 열흘도 되지 않은 사이에 근 10만 위안이란 거금이 모아졌다. 그것도 지사가 위치한 산둥지역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 지어 한국, 미국, 일본 등지에서 후원금이 쇄도했다. 환자의 부모에 의하면 미나가 입원해서부터 5개월이 채 되지 않은 사이에 총 2500여 명으로부터 30여 만 위안의 후원금이 전달되었는데 대부분 위챗을 통해 소식을 접하고 송금되었다고 한다.    바로 이거였다. 전통 매체는 전달에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위챗은 무한한 가능성을 예고하고 있었다.  2015년 산둥지사는 수년간의 연속적인 적자를 극복하고 쉽지 않게 흑자로 돌아섰다. 몇백 위안의 흑자가 대견한 것이 아니었다. 시대를 빨리 읽고 위챗의 파워를 존중하는 마인드가 더 중요한 것이었다.    위챗공공계정이 정상적인 궤도에 들어서면서 팔로워들을 중심으로 위챗 채팅방 개설을 주문하는 목소리가 증폭했다. 산둥지사에서는 독자들의 수요가 곧 지사의 생존의 길이라는 마음가짐으로 2015년 3월 지사 위챗 채팅방인 ‘신사모’를 개설, 기사를 싣는 공공계정과 독자와의 소통을 위주로 하는 채팅방을 병행하는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이다. 그간 ‘신사모’는 회원수가 1500명에 육박하면서 소통외에 취재 주문, 친목모임 주선, 공동구매 등 커뮤니티 역할도 해왔다.    이날 ‘신사모’ 설립대회는 칭다오진달래예술단(단장 엄정숙)의 무용 ‘장백의 진달래’와 ‘천년의 장고소리’로 막을 열었다.  흑룡강신문사 한광천 사장은 모두발언을 통해 “흑룡강신문사는 신문을 사랑하는 여러분을 주주로 모신다.”면서 “우리는 마름노릇을 잘 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말해 박수갈채를 받았다.  박영만 산둥지사장은 ‘신사모’ 설립 취지에 대해 ‘자유성, 민족성, 공익성, 수익성’으로 귀납하면서 ‘신사모’는 회원들이 만든 집으로서 회원 자신들이 경영해야 한다고 보충했다.    설립식에서는 ‘신사모’운영위원을 임명, 회원수가 많아 채팅방이 3개인 점을 감안해 1그룹에 김광일, 임동호, 이길룡, 박위동, 남비, 김태송씨를, 2그룹에 김성일, 김일, 이성무, 김철, 조남호씨를, 3그룹에 김재룡, 최재문, 김봉웅, 배태남, 황동룡, 김행복씨를 임명했다.   농일식품에서는 이날 설립식의 관명권을 취득, 대형 버스 2대와 점심식사 대접, 그리고 매인당 김치세트 1박스를 후원했다. 이에 앞서 농일식품은 3년전부터 해마다 흑룡강신문에 5만 위안에 달하는 광고를 게재해오고 있다.  농일식품 김철웅 사장(1967년생)은 길림성 영길현 출신으로 1990년대 초 대학을 졸업한 후 칭다오에 진출, 칭다오다원식품의 초창기 주요 멤버로 활약하다가 1996년부터 독립적으로 고추, 마늘, 생강 등 농산물을 한국으로 수출하기 시작했으며, 2000년 7월에 1백만 달러를 투자하여 남새재배, 생산가공판매를 일체화한 '농일식품유한회사'를 설립하면서 '농일'표 김치를 본격적으로 출시했다. 농일김치는 한국의 CL , 종가집, 농심 등 대표적인 명가에 진출하면서 선풍적인 인기를 몰아왔고 짧은 사이에 연간 수출액이 1억위안을 넘는 쾌거를 이루어냈다. 한때 금융위기의 영향으로 휘청거리기도 했으나 빈사상태에서도 바이어와의 계약을 끝까지 이행한 보람으로 더불 신임을 얻어내며 기사회생했다. 농일식품의 제품은 10여 개 국가로 수출되고 있으며 직원은 260여 명을 두고 있다. 부동의 업계 1위 자리를 고수하고 있는 농일은 현재  제2차 창업으로 중국 최고의 김치공장 건설 완공을 눈앞에 두고 있다. 농일식품 신공장이 오픈되면 김채생산능력이 일당 80톤에 달하는 업계 굴지의 기업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농일식품 신공장 오픈식은 다가오는 5월말에 거행될 예정이다.한편 다가오는 5월 18일에 온, 오프를 일체화한 ‘농일슈퍼’를 오픈하게 된다.    설립식을 마치고 청양으로 돌아온 후 운영위원들은 별도의 모임을 갖고 ‘신사모’의 앞으로의 운영에 관해 열렬한 토론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영양가 없는 펌글의 제약, 기업과 제품의 소개 등재, 오프라인에서의 친목 활동, 공익이벤트 조직 등 다양한 화제가 언급되었다.   이날 설립식에는 농일식품외에도 부산항공에서 칭다오-부산 간 왕복 티켓 2장, 칭다오조선족골프협회 윤동범 회장이 5천 위안, 칭다오 오성골프협회 이춘범 회장이 5천 위안, 칭다오 지은공업무역회사 허헌 이사장이 2천 위안, 칭다오 미시광피부관라센터에서 2천 위안, 칭다오지원화장품회사에서 고급 화장품 2세트와 마스크팩 10통, 하이라이활게 식당에서 200위안 짜리 식권 10매, 동일모자에서 모자 120개, 맥천산장에서 50위안짜리 식권 50장, 김철룡 사장이 고급 호텔방 4칸, 이우시 화잉무역(华英贸易) 장연화 여사가 지능컵 24개, 칭다오 연변상회 전치국 회장이 광천수 200병, 신한은행 이해화씨 비타500을 10박스, 153카센터에서 30위안 짜리 할인권 100장을 협찬했다. 흑룡강신문사 산둥지사에서는 천연소재 라쉬반 팬티 6장과 고급 쿨토시 110개를 선물로 내놓았다.
91    문학은 나의 분신이고 평론은 나의 사명이다 댓글:  조회:539  추천:0  2016-05-06
문학은 나의 분신이고 평론은 나의 사명이다 내 문학 그라프는 들쭉날쭉 갈래가 여럿이다. 소설로 시작한 문학공부가 중간에서 어떻게 음차양차로 평론계로 들어서게 되였고 단행본은 오히려 수필집을 먼저 출간하게 되였다. 그렇게 여러 해가 지나서 두번째로 나온 책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 소설집이였고 이제 겨우 내 문학의 사명인 평론집을 내게 되였다. 돌이켜보면 생활난에 부대끼면서 짬짬히 쓴 평론글이 50여 편은 좋이 된다. 그런데 황하를 건너고 장강을 뛰여넘으면서 십수차 이사를 하다보니 원본 대부분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육필이 대부분이였던만큼 타이핑을 한 파일이 보존되여있을리 만무했다. 손칼로 오려서 스크랩을 해둔것이 어느사이 분실된지도 모르고 분주히 떠돌다가 어느날 갑자기 생각나서 찾아보니 종적없이 사라져있었다. 울며 겨자먹기로 다인작품집에 오른것과 가까운 지인들이 찾아서 보내준것을 가까스로 모아보니 고작 10여편이다. 이제 더 이상 방치해둘수 없다는 생각이 든것이 바로 그 시점이다. 글은 내 흔적이고 내 력사고 내 얼굴이다. 용케 한번 왔다가는 인생에 나 스스로 내 분신같은것을 지우거나 가리거나 무시하거나 외면할수는 없다. 평론의 경우라면 더욱 그렇다. 여직껏 평론집을 적잖이 보아왔지만 문학사류형이 대부분이였던거 같고 학술론문이 그다음을 따른거 같다. 그리고 특별조명 형식으로 여러 사람이 어느 한 작가를 집중적으로 다룬것을 묶어낸 책이 주를 이루었던거 같다. 하지만 나는 문학 일선에서 창작실천과 더불어 평론을 해왔기에 모두가 구체적인 작품에 대한 평이다. 그것도 같은 시간대에 함께 활약했던 작가들의 창작작품을 현장감있게 평론해왔다. 북방문단을 이끌어왔던 한춘선생님의 의도적인 추동과 갈라놓고 운운할수 없는 대목이다. 그리고 그 덕분인지 내 작품도 몇번은 평론을 담게 되였다. 이제 내가 한 평론과 남이 나를 평한 글을 함께 책으로 묶는다. 내용과 형식 모두가 색달라서 제목을 붙이는데도 좀 어려움을 겪었다. 좋은 제목 하나 골라서 책제목으로 할수 있는 소설집이나 시집 또는 수필집과는 달리 평론집은 그게 기어가 잘 안맞물려 돌어가는게 사실인데다가 내 평론만이 아니고 남이 나를 저울질한 글도 있기 때문이였다. 이 평론집 추진과정에 여러모로 도움을 준 원 흑룡강조선족창작위원회 박일 주임과 동년배 문학친구 한영남씨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그리고 전번 소설집에 이어 이번 평론집 출판비용을 마련해주신 얼굴 숨긴 기업가님께 허리 굽혀 고마움을 전한다. 2015년 10월
90    빈하로 레전드 댓글:  조회:862  추천:1  2016-04-08
    단편소설   빈하로 레전드     그해 나는 스물두살난 애숭이 남자애였다. 코밑에 달린 수염 몇대를 치켜세우면서 남자인체 허세를 부리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나는 어쩌다가 청도의 어느 거리바닥에 내팽개져 있었다. 그 거리는 빈하로라고 불리웠으며 이름에 걸맞게 이촌하가 바로 옆에서 흐르고 있었다.  90년대도 반나마 훌쩍 지나가면서 세기말의 어수선한 분위기가 진하게 사람들을 내리누르던 무렵이었다. 행운스럽게 두 세기를 살게 된 사람들이었지만 얼굴들은 그렇게 밝지도 흥분되어 있지도 않았다. 사람들은 여전히 하나같이 생계에 시달린 축 처진 모습들이었다.  특히 빈하로에 기생하는 사람들은 “새로운 세기”라는 테마에 별로 큰 의미를 두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빈하로 바로 남쪽에는 이촌하 재래시장이 자리잡고 있었다. 홀쪽하게 말라버린 강바닥에 알록달록한 천막들이 길다랗게 펼쳐진 노천시장이었다.  청도의 아침은 대개 여기서부터 열린다. 날이 어스푸레 밝아지기 바쁘게 여기저기서 딩강댕강하는 소리들이 들린다. 그러면 빈하로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상가들이 따라서 하나둘씩 문을 열기 시작한다.  길이가 2킬로도 되나마나한 빈하로에 한글간판을 내다 건 상가만 저그만치 80개가 넘었다. 흔하게 볼 수 있는 식당이나 상점을 내놓고도 여관, 노래방, 커피숍, 헤어샵 등이 촘촘히 들어서있었다.  나는 이 거리에 들어설 때마다 저도모르게 이상야릇한 감정에 휘말리게 된다. 무엇이 어떻게 되어진지도 모르고 흐리멍텅하게 22년을 고스란히 지켜온 동정을 잃어버린 곳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빼았겼다고 형용해야 맞을 것이다. 그리고 그즈음에서 여자란 물건을 바로 알아버렸다. 마치 헤어샵이 무엇일가 갸우뚱하다가 그대로 끌려들어가 머리를 깎고 나온 것과 같은 버전이었다.  내가 이 거리를 이틀만에 다시 찾은 것은 그럴만한 사정이 있어서였다.   저앞 서울헤어샵 바로 길 마주켠으로 사람 둘이 비스듬히 스쳐지나갈 수 있는 좁은 골목길이 보인다. 그 길을 따라 20여 미터 들어가면 창문에 “대박소개소”라고 쓴 나무패쪽이 보인다. 고향에서는 생소하지만 청도에서는 흔하디 흔하게 볼 수 있는 소개소이다. 주로 직업소개를 해주지만 수요에 따라 이런저런 엉뚱하고 치사한 주선도 해주는 그런 곳이었다. 책상 하나에 의자 하나, 그리고 전화기 한대로 마른 땅에서 헤딩하는 식으로 쉬운 장사를 하고 있었다.  이 소개소를 통해 나는 청도에서의 첫 직장을 찾았다. 그리고 취직한지 일주일만에 그 직장의 부장이란 사람의 성화에 못이겨 이 소개소에 전화를 했었다.  “이봐, 미스터 장, 어디 근사한 아가씨 없어?” 휴식시간에 밖에서 담배를 피고 있는데 마부장이 어슬렁 다가와 이렇게 말을 걸어왔을 때 나는 어리둥절했었다.  우리 회사는 슬리퍼를 만들어 일본으로 전량 수출했는데 300여명 여직원들이 다닥다닥 미싱기에 매달려있는 그런 제조업 회사였다. 뽄딩 접착도 봉제와 한 라인으로 이어져 있어 냄새는 물론 실내 온도도 살인적이었다.  회사에 한국인이라고는 사장외에 생산을 책임진 마부장과 무역을 관장하는 조부장 이렇게 세명뿐이었다. 나는 남보다 늦게 입사하여 무역이나 총무쪽의 좋은 일자리는 벌써 남들이 차지하여 현장관리로 들어갔다.  입사 첫날 쉰고개인 마부장은 다른 두 조선족 현장관리와 나를 데리고 식당으로 갔다.  “미스터 장” 그때 마부장은 이렇게 나를 불렀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나를 부르는 말인줄을 몰랐다. 처음 듣는 말이어서 나름대로 강아지한테 이름을 붙여서 부르는 것처럼 한국인들은 사람한테도 그렇게 제마음대로 별호를 붙이는 것으로 지레 짐작했다.  “우리 이젠 한가족이야 한가족, 알갔어? 한가족이면 어떻게 해야 한다는 걸 알지?” “네에” 나는 알둥말둥 했지만 무작정 고개부터 개어올렸다.  이틑날부터 마부장은 정말로 한가족처럼 나를 대했다.  “임마, 여기 와.” 이틑날 현장에 나온 나에게 마부장은 손가락을 까댁대면서 이렇게 소리쳤다. 그는 그것을 “말을 깐다”고 해석했다. “미스터 장”이란 강아지 부르는듯한 호칭도 첫날 후 종적없이 사라지고 대신 “임마”가 내 새로운 호칭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이번이 두번째로 불리는 “미스터 장”이었다.  “왜 없어?” 마부장은 가족처럼 무랍없이 나의 호주머니를 들추어 담배 한가치를 피워물고 깊게 연기를 토해냈다.  “뭐가요?” “뭐긴 뭐야? 임마! 아가씨 말이지. 너 아가씨 모르는 건 아니겠지?” 내 호칭은 다시 “임마”로 돌아갔다.  마부장은 도둑처럼 현장 안을 슬그머니 들여다보더니 목소리를 죽여서 말을 이었다.  “돈 주고 한번 할 수 있는 아가씨말야. 이 동네에 많다고 들었는데…” “그런 건 난 정말 몰라요.” “임마, 거 소개소에 한번 전화해봐. 그 사람들은 잘 알거잖아. 저녁 퇴근후에 갈 거라고 전해.” 나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는 것을 무시하고 마부장은 나더러 전화하라면서 자기 사무실로 떠밀었다. 덕분에 나는 에어컨이 돌아가는 시원한 사무실에서 잠시나마 호사하게 되었지만 구경 어떻게 전화를 해야 할지 몰라 한동안 서성이다가 마부장이 다시 찾아와 재촉해서야 겨우 소개소 전화 번호를 눌렀다.  “여보세요.” 애교가 다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의 눈앞에는 불현듯 소개소 여 사장의 해반주그레한 얼굴이 떠올랐다. 30대 후반의 덜 미운 여자였다. 목소리만 들으면 애어린 처녀같은 묘한 매력을 풍기는 여자였다.  “저…미스터 장인데요. 거 있잖아요. 며칠전에 끌신 만드는 공장에 취직시켜줬잖아요.” “끌신이라? 아, 슬리퍼 회사 그러네요. 기억나네요. 무슨 일이죠?” 나는 꺽꺽거리면서 마부장의 요구사항을 겨우 전달했다. 무슨 말인지 나절로도 두서가 잘 잡히지 않는데 생각밖에 상대방은 곧바로 알아듣고 있었다.  “오늘 저녁이요? 언제든 수시로 오시라고 그러세요. 절대 뒷일이 없으니까 안심하시구요.” 저녁에 마부장은 식사를 마치기 바쁘게 시내에 볼 일이 있다는 핑계를 대고 나를 데리고 회사를 나섰다. 난생 처음 하이야를 타보는 나는 마부장의 뒤에 붙어섰다가 그가 운전석 문을 열기 바쁘게 따라서 뒷좌석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런데 운전석으로 발 한짝을 들여다놓던 마부장이 금세 얼굴이 붉어지면서 와락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못 나와 임마! 거기 어디라고 감히 앉어. 얼른 앞좌석에 가 앉아. 건방진 녀석!” 나는 영문도 모르면서 뿌옇게 욕을 얻어먹고 황급히 앞좌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가는 길에 마부장은 성낼 때와는 달리 퍼그나 온화한 어조로 운전석 바로 뒤는 귀빈석으로 운전자가 모셔야 하는 사람이고 그 옆자리는 다음으로 중요한 손님이 앉게 된다고 승차 매너를 알려주었다. 더불어 나처럼 상급을 모시고 다니고 길을 안내해야 할 가이드 역을 맡은 사람은 운전석 옆자리에 앉아야 한다고 이론과 실례를 들어가면서 반시간 좋이 얘기했다.  소개소 여사장을 따라 10여 분 걸어서 향양2지로의 어둑시그레한 골목에 들어서니 2층 단독주택이 나타났다. 여 사장은 그 집이 자기네 “아지트”라고 소개했다. 내가 아지트란게 도대체 무엇일가고 궁금해하고 있는데 마부장은 한시가 급하다는 듯 여 사장이 가리키는 2층으로 한달음에 달려올라갔다. 그 와중에도 나를 잊지 않았는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소리쳤다.  “저 우리 미스터 장도 한칸 마련해줘요.” “마음 놓으세요. 사~장~님~” 여 사장은 길게 말꼬리를 늘여붙히며 대꾸한 후 나를 향해 왼쪽 눈을 끔벅거렸다. 나이에 비해 주책없는 동작이었으나 웬일인지 싫지 않았다. 오히려 묘한 호감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솔직히 나는 여 사장을 처음으로 만났을 때부터 참으로 여자답게 생겼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생김새도 그렇고 목소리도 그렇고 하는 행동 역시 너무 여성스러워보였다.   “미스터 장, 여기요.” 여 사장은 웃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초점없이 올려다보다가 나한테로 다가와 손을 뻗쳐 나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뭉클한 앞가슴이 간단없이 팔에 맞혀왔다.  “저기로 가요. 미스터 장을 위해 특별히 따로 준비해두었어요.” 10평쯤 되어 보이는 방이었는데 침대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나를 침대에 눌러앉힌 여 사장은 왠지 어색한 웃음을 떠올렸다. 얼굴에 홍조를 띠운 채 한동안 말없이 서성이기만 하던 여 사장은 아무래도 안되겠다는 듯 허리를 굽혀 아까처럼 나의 어깨를 서슴없이 안았다. 모름지기 힘을 주어 나의 팔로 가슴을 실었던 것이 분명했다. 팔이 그녀의 가슴으로 빨려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나의 심장이 느닷없이 세차게 쿵쾅 튀기 시작했다. 엄마 젖을 떠나서 처음으로 그런 부드러움을 체험하고 있었다. 코속으로 여자의 향기가 스멀스멀 밀려들어왔다. 이윽고 여 사장의 취한 듯한 목소리가 귀밑을 간지럽혔다.  “좀 기다려요. 탱탱한 아가씨 보내줄게요.” 상황 파악을 제대로 할 수 없었던 내가 혼잡해진 머리를 털며 어리둥절해있을 무렵, 문이 소리없이 열리며 웬 처녀애가 조용히 들어섰다. 초봄의 날씨에는 좀 추워보이는 흰색의 원피스를 호리호리한 몸에 착 붙게 차려입은 그녀는 허리까지 오는 긴 머리를 뒤로 묶어매고 있었다. 둥글스럼한 여 사장과 달리 그녀는 갸름한 얼굴을 가지고 있었는데 수줍음때문인지 얼굴은 피빛처럼 물들어있었다. 내 또래가 분명한 그녀도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한 이해가 모자랐던지 들어선채로 주춤 멈춰선 후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때 밖에서 여 사장의 날선 목소리가 날아왔다.  “뭐하고 있어?” 처녀애는 화들짝 놀라는가 싶더니 냉큼 나의 옆에 와서 앉았다.  “저는 청이라고 불러요.“ “나는 학.” 나는 하지 않아도 될 대답을 해놓고 제풀에 멋적어 고개를 숙였다. 청이라고 부른다는 여자애도 뒷말을 찾을 수 없다는 듯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인사 나누었으면 얼른 물 들고 들어가야지.” 문밖에서 여 사장의 차거운 목소리가 또다시 들려왔다. 심술이 마디마다 덕지덕지 묻어났다. 나는 내가 어디서부터 여 사장한테 잘못 보였던가를 되새겨보았다. 그건 아닌 것 같았다. 나갈 때 무의식적인 것처럼 나의 손을 잡아 자기 배쪽으로 갖다 대주기까지 했던 여 사장이었다. 혹시 청이가 무엇을 잘못한 것인가? 아닌게 아니라 청이는 죄지은 사람처럼 후다닥 뛰쳐나갔다.  청이가 다시 방으로 들어온 건 그로부터 10분이 채 되지 않아서였다. 그 사이 몸의 곡선이 환히 들여다보이는 원피스대신 잠옷 같은 훌렁한 꽃옷을 바꿔입은 청이는 언제 수줍었냐는듯 뜨거운 김이 물물 피어오르는 소래를 들고 들어오더니 들뜬 목소리로 재촉했다.  “얼른 옷을 벗어요. 제기 씻어드릴게요.” 내가 어정쩡해있는 사이 청이는 나의 웃옷을 벗어 침대에 아무렇게나 던져놓았다. 연후 바지 벨트로 손이 가던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는가 싶더니 그대로 바지마저 벗겨내렸다. 팬티 한장 달랑 남을 때까지 나는 마네킹처럼 청이가 하는대로 몸을 맡기고 있었다. 그러나 청이가 팬티를 잡는 순간 나는 기절초풍할 지경으로 놀라면서 침대위로 훌쩍 뛰어올라갔다. “이러지 마! 이러면 안돼!” “처음인가 보네요…” “난…부장님을 모시고… 왔을뿐이야…” 청이는 한사코 이불을 몸에 감싸고 숨어드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막무가내인 듯 호 한숨을 가볍게 내쉬더니 부시시 이불속으로 기어들어왔다.  “이러면 전 사장님께 혼나요. 사장님이 꼭 먼저 씻어줘야 한다고 당부했는데…” 입속 말로 종알거리던 청이가 그대로 몸을 밀착해왔다. 구석까지 밀린 나는 더이상 피할데가 없었다. 쌕쌕거리는 숨소리가 당장 귀구멍에 꽉 들어찼다. 참새 같은 심장이 툭툭 튀는 것이 팔뚝을 통해 전달되었다. 아까 여 사장의 그것과는 많이 달랐다. 뭉클하지도 않았고 포근하지도 않았다. 빨려들어갈 거 같은 느낌도 없었다. 단단하게 다져진 살덩이가 다소곳이 솟아나 대어온 거 뿐이였다.   우리는 그렇게 가지런히 붙어서 누운채로 한동안 잠자코 있었다.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내가 여자랑 같이 누워있기는 10년만의 일이었다. 그때 소학교 졸업을 앞둔 나는 이웃집의 한살 어린 희자란 여자애를 얼려서 우리집 웃방에 이불을 덮고 같이 누웠다가 아버지에게 발각되어 된통을 당한 적이 있었다. 여자가 많이 궁금했고 그렇게 여자랑 누워있으면 애가 생기는 거라고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었다. 아버지에게 반나절 쫓겨서 도망 다닌 후부터 다시는 여자들 옆에도 가지 못했다.  지금은 가끔 몽정도 하고 수음도 하지만 여자를 구경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지는 아직도 잘 알지 못했다. 그래도 기어코 잠자는 남성을 깨우치고 있었다.  청이가 몸을 꼼지락거리면서 손이 왔다갔다 하더니 어떻게 나의 거시기를 다쳐놓은 모양이었다. 갑자기 그 물건이 성난 듯 용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도무지 그것을 주체할 방법이 없었다. 나는 낑 신음을 토해내면서 허둥지둥 청이의 몸위로 올라갔다. 팬티를 내리고 다시 청이를 발가벗기는데 꽤나 오랜 시간이 흐른듯 싶었다. 막 입구가 보이는 그때 머얼건 액체가 허무하게 물총처럼 쑥쑥 뿜어져나갔다. 청이의 그곳엔 순식간에 어지럽게 젖어버렸다. “이걸 어쩌지? 이걸 어째?” 청이가 아우성을 지르며 후다닥 뛰어내리더니 부끄러움도 잊은듯 하얀 엉덩이를 드러낸채로 물로 씻어내기 시작했다. 한참을 정신없이 물을 끼얹던 청이가 무슨 감촉을 느꼈던지 멍하니 자기를 내려다보는 나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둘은 거의 동시에 피씩 웃어버렸다.  “내려와요. 제가 씻어줄게요.” 청이의 손짓에 이끌려 나는 나체인채로 대범하게 바당에 내려섰다. 그때까지 대야에 능청스레 앉아있던 청이는 어디서 생긴 용기인지 불쑥 손을 내밀어 내 물건을 잡고 아래로 당겼다.  “이렇게 앉아요. 그래야 씻기 좋지요.” 청이는 앉은 자세로 뒷걸음치면서 물을 끼얹어 씻어주기 시작했다. 처음 하는 일이어서 신기했던지 씻다가는 들여다보고 다시 물을 끼얹으면서 장난기가 발동한 듯 톡톡 쳐주기도 했다. 나는 그러는 청이를 내버려두다가 불시에 손을 뻗쳐 아직 입은채로인 그녀의 웃옷속을 뒤졌다. 청이는 거절하지 않았다. 겉옷외에는 가슴띠가 전부였다. 나에게 딴딴한 감촉을 주었던 것은 바로 그 갑옷 같은 가슴띠때문이였다. 보라색 가슴띠를 겨우 젖히고 말랑말랑한 속살을 더듬을 때까지 청이는 쉴새없이 종알거렸다.  “사장님은 씻어주는 게 제일 먼저 순서라고 했는데 왜 남자란 게 도망가구 그랬어요? 사실 저도 처음이라 잘 몰라요. 이렇게 씻으면 되는 거죠? 아, 그런데 이거 왜 이렇게 힘쓰고 그러죠?” 그때 윗층에서 퉁탕퉁탕 계단을 뛰어내리는 소리가 들려왔고 이어 “미스터 장, 미스터 장”하는 마부장의 부름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본능적으로 “예” 하고 대답하며 부지런히 옷을 찾아입었다. 문을 열고 나가보니 울안에서 마부장과 소개소 여 사장이 무슨 얘기인가 열심히 하고 있었다. 여 사장의 손에는 돈뭉치가 쥐여있었다. “짜아식이, 총각때를 벗었구나 후훗” 마부장이 나와 청이를 돌아보며 한 말이었다.  회사로 돌아오는 길에 마부장은 일찍 돌아가게 된 연유를 얘기했다. 급한 불을 먼저 끈 후 담배 한대 피워 물고 2차 준비를 하는데 왠지 퀴퀴한 냄새가 나더란다. 중국집들이 대개 냄새가 나는 터라 의례 그럴려니 했는데 다시 코를 끙끙거려보니 분명 옆에 누운 여자의 몸에서 나는 냄새였다. 머리에 기름이 번져 엉켜붙었는가 하면 목 아래로 검게 때가 번져있었다. 땀이 아직도 배여있는 여자의 배에 손을 올려서 살짝 긁어보니 손톱밑이 금세 때가 들어찼다.   “구역질 나서 죽는 줄 알았어. 안되겠어. 이게 방법이 아니야. 아무래도 파트너를 찾아야 할 것 같아. 소개소 사장한테 교포 여자를 부탁했으니 내일쯤은 소식이 있을 거야.” 정확히 이틑날 저녁무렵에 소개소에서 전화가 왔다. 파트너를 찾아놓았으니 내일 와서 면접을 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성사되면 파트너에게 한달에 3천원을 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만 입이 딱 벌어졌다. 매일 연장작업을 적어도 세시간씩 해야 하는 내 월급이 고작 5백원이였기 때문이었다.  그전에 나는 마부장의 설명을 통해 파트너란 보모 겸 애인이란 뜻이란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밥도 해주고 집안 거두매도 하고 빨래도 하고 더불어 잠자리까지 함께 해주는 그런 역할이었다.  그래도 그렇지. 나는 갑자기 자신의 값어치가 기생보다도 형편없이 작다는 것을 뻬저리게 체감했다.  마침 다음날에 일본 바이어가 오게 되어있어 마부장은 몸을 뺄 수 없었다. 개미 채바퀴 돌듯 하던 마부장이 큰 결심이나 한듯 나에게 말했다.  “내일 말미를 줄테니 니가 대신 가봐. 젊고 이쁘고 깨끗하면 되는겨. 괜찮다 싶으면 며칠후 내가 직접 볼러 갈 거라고 전해줘.” 나는 이렇게 뜻하지 않게 빈하로에 다시 찾아오게 되었다. 이틀만에 들르는 빈하로였지만 모든게 새롭고 생기 있어 보였다. 전에도 빈하로가 격정이 넘치는 거리라는 생각은 자주 했지만 솔직히 신선한 충격을 주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나는 그것이 청이때문에 오는 환각 비슷한 감정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날 이후로 단 한시각도 청이를 잊은 적이 없었다. 몽정 비슷하게 빼앗긴 동정, 나는 그것을 빼앗겼다고 형용할 수 밖에 없었다. 내 22년 순정이 그 한번으로 그만 오염되고 만 것이다. 비록 동물학적으로 성립되지 않을지는 몰라도 나는 이미 나의 총각을 청이에게 주었다고 믿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청이의 딱딱한 가슴을 잊을 수 없었고 나를 씻어주던 그 부드러운 손길을 잊을 수 없었다. 눈만 감으면 “아, 그런데 이거 왜 이렇게 힘쓰고 그러죠?” 하던 청이의 귀여운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와 저도모르게 온몸이 힘으로 굳어지군 했다.  나는 청이가 많이 보고싶어졌다. 한 여자가 그렇게 그리워지기는 난생처음이었다. 한번밖에 보지 못한 처녀를 나는 사랑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떻게 하면 소개소 여 사장이 청이를 다시 불러주게 할 수 있을까에 골몰하다보니 나는 어느덧 골목길 끝머리까지 갔다가 길이 막혀 되돌아오는 역사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소개소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나는 저도모르게 하늘이 하는 일을 인간이 어떻게 알소냐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청이였다. 청이가 쇼파에 단정히 앉아있었다. 불륨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흰색의 원피스를 입고 다소곳이 고개를 수그리고 있던 청이가 문을 떼고 들어서는 나를 발견하고 얼굴에 홍조를 띠고 벌떡 일어섰다.  “이제 보니 둘이 아는 사이였군요.” 여 사장이 빈정대는듯한 어조로 인사를 대신했다.  “그럼 파트너란 사람…” “네, 맞아요.” “안돼요!” 놀란 쪽은 시까스르는듯한 여 사장이 아니라 오히려 내쪽이었다. 내 목소리가 그렇게 높아지리라고는 나 자신도 미처 생각지 못했다. 유리창문이 드르릉 떨리는 것을 직감하며 나는 애써 침착하려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우리 부장은 쉰이 넘은 사람이예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아버지벌 되는 사람이잖아요.” “그래서 그날 청이를 미스터 장한테 보낸 거예요. 청이가 숫처녀인 건 아시죠? 첫 경험이 아름다운 추억이 되게끔 배려했던 거예요. 아니면 그때 벌써 마부장한테 차려졌을 거예요.” “사장님 고마웠습니다. 사장님, 그런데 이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청이는 아직 어려요. 사장님…” 나는 입에서 무슨 말이 나가는줄도 모르고 쉴새 없이 손을 비볐다. 여 사장은 난처한 듯 어깨를 으쓱하면서 도리머리를 저었다. 이마살이 깊게 찌프러진 걸 보면 그녀가 많이 짜증나고 귀찮아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우리 둘에 비해 정작 당사자인 청이는 되려 태연하고 침착한 표정이었다. 말 없이 지켜만 보고 있던 청이가 늘쩡늘쩡 입을 열었다.  “사장님, 저 미스터 장과 잠깐 얘기하고 올게요. 오후에 전화 드릴테니 그때까지는 마부장과의 일은 없던 걸로 해주세요.” 여 사장이 괘씸하다는 듯 입을 실룩거리는 것을 무시하고 청이는 나의 손을 잡아끌고 거리에 나섰다.  빈하로는 여전히 분주하고 흥성했다. 여기저기서 사구려 소리가 구수하게 들려왔고 음식들이 익는 냄새가 풍겨왔다. 느끗하게 구경하며 흥정하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간만에 따스해진 봄날의 화사함이 묻어있었다.  “왜 그랬어요?” “뭐가?” “아까 사장님하고 막 다투다싶이 했잖아요. 미스터 장과 무슨 상관인데요?” “몰라. 나도 왜 그랬는지 몰라.” 청이는 피씩 웃었다.  “저를 좋아해요?” “응” “한번밖에 보지 못했는데두?” “매일 보는 사람만 좋아하란 법은 없잖아.” 청이는 더이상 말이 없이 앞장서 허영허영 걸어갔다. 어느새 그제 왔던 향양2지로에 들어서고 있었다.  “저 여기에 집을 잡고 몇달 째 직업을 찾았지만 결국 취직이 되지 않았어요. 겨우 초중을 졸업했거던요. 돈이 다 떨어져 집세도 밀리고 아는 친구 하나 없는 신세예요.” 청이는 자기 밑천을 다 들어내기로 작정한듯 나를 자신의 세집으로 안내하고 있었다. 단칸방이었는데 허술한 나무침대 옆으로 취사도구들이 질서없이 쌓여있었고 한쪽 구석에는 청이의 모든 재산인듯한 트렁크 하나가 놓여있을 뿐이었다.  “저라고 왜 이런 일을 하고 싶겠어요. 그러나 살아야 하니 별다른 방법이 없잖아요. 저 번화한 빈하로는 저와 아무런 상관도 없어요. 저는 벌써 일주일째 채소는 없이 맨국수만 먹고 있어요.” 침대에 걸터 앉은 청이는 어깨를 달싹이며 흐느꼈다. 어깨가 오르내릴 때마다 나무침대는 악기 반주하듯 삐꺽삐꺽 낮다란 아픈 소리를 냈다. 그게 더 마음이 미여졌다. 나약하게 무너져버런 아련한 청이의 몸매를 차마 그저 눈 뜨고 볼 수가 없었다. 나는 조용히 다가가 청이의 손을 더듬어잡았다. 그렇게라도 그녀의 아픔을 덜어주고 싶었고 그렇게라도 그녀에게 용기를 북돋아주고 싶었다. 그녀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경련을 일으키듯 떨리는가 싶더니 불시에 힘이 들어가면서 나의 손을 꽉 틀어잡아왔다. 동시에 몸을 나의 가슴에 기대왔다. 향기롭고 부드러운 여체가 한가슴 가득 안겨들어왔을 때 그 달콤한 행복감은 이루다 말로 형용할 수 없었다. 그녀의 길다란 머리채에서 풍기는 싱그러운 냄새는 사람을 질식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인차 청이는 한숨을 깊게 내쉬면서 손을 풀고 나의 품에서 떨어져나갔다.  “전 어려서부터 고생을 많이 했어요. 집안이 가난하여 공부를 못한 만큼 못해본 일이 없어요. 걱정 말고 저의 일에 더이상 삐치지 마세요. 이겨나갈 수 있어요.” “그게 고생하고 같은 뜻이 아니야. 그 사람은 오십이 넘은 사람이란 말야. 아버지 벌도 될 수 있다고.” “그래서 미스터 장을 여기까지 데리고 온 거예요.” 청이는 침대로 올라가 반듯하게 드러누워 쭉 기지개를 켰다. 몸이 키질하는 순간 젖무덤이 불쑥 솟아오르면서 눈을 자극했다.  “소개소 사장님의 말을 들어보니 정말 그렇긴 하더라고요. 저의 첫번이 악몽처럼 평생 따라다니면 그보다 더 불행한 일이 어디 있겠어요. 그날 기회를 놓친 대신 오늘 미스터 장과 소중한 기억을 만들고 싶어요.” 청이는 내가 미처 무어라고 말하기도 전에 누운채로 옷을 와락와락 벗기 시작했다. 전번에 보았던 보라색 가슴띠에 이어 그날에는 미처 보지 못했던 흰색의 망사 팬티가 드러났다. 반나체로 침대에 길다랗게 누워있는 청이는 마음의 승화를 얻었는지 한결 평온했다. 요염한 모습으로 높이 솟은 젖무덤은 나를 향해 손짓하고 있었고 들여다보일듯말듯한 팬티는 나의 마음을 마귀같이 유혹하고 있었다.  “얼른 올라오세요. 저도 그날 후로 미스터 장을 많이 생각했었어요. 참 순진한 사람이구나 그렇게 말이예요.” 이틀만에 다시 보는 청이는 갑자기 어른이 되어진 느낌이었다. 얼굴도 붉어지지 않았고 허둥대지도 않았다. 차분한 어조에는 성숙된 여인의 매력이 진하게 묻어있었다.  나는 귀신에게 홀린 것처럼 허겁지겁 침대로 기어올라갔다. 누군가 형체 없는 것이 안돼 하고 소리치고 있었지만 나의 손은 어느새 청이의 가슴띠 속에 들어가 있었다. 전날의 경험때문에 나는 쉽시라 청이의 젖가슴을 한줌 가득히 틀어잡을 수 있었다.  “어머, 벌써 힘쓰고 그러네요.” 청이도 어느새 노련한 선수가 되었는지 나의 그것을 툭툭 건드렸다.  “어서 오세요. 저의 첫번을 남김없이 미스터 장에게 다 줄게요. 그러면 저는 아무 유감도 없이 어려운 발걸음을 내디딜 것 같아요.”  바로 청이의 그 한마디가 나의 거친 움직임을 멈추게 했다. 나는 그만 오리무중에 빠진 것이다. 그렇다면 내 동정이 청이에게 빼앗긴 것이 아니란 말인가? 그러니까 나는 여직 청이를 가진 것이 아니었단 말인가? 나는 그 머얼건 액체가 나의 동정이었다고 한시각도 의심치 않았으며 청이에게 나의 동정을 전달했다고 철같이 믿었었다. 하다면 나와 청이는 아직도 동남동녀가 틀림없단 말인가? 나는 청이를 일으켜 세운 후 성스러운 의식을 치르듯 정중하게 원피스를 입혔다. 역시 원피스에 감겨진 청이의 몸매는 눈부시게 이뻤다. 그리고 사람이 빨려들어가도록 깊고 그윽한 눈동자에는 티하나 없는 순수함이 들어있었다.  청이는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어있었다. 그러건 말건 나는 청이의 손을 끌고 빈하로에로 나갔다.  점심 시간이 아득바득 다가오고 있었다. 빈하로에는 어느새 발 디딜 틈도 없이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호객하는 조선말이 튕겨나왔다. 그중에서도 “창원밥집”이란 간판을 건 식당의 호객 행위는 그대로 괴짜에 버금갔다.  “식사하려는 게 맞지예. 이 동네서 우리집 밥이 제일 맛있어유,”  나이 쉰은 되었을법한 뚱뚱한 아주머니가 미처 반응할 사이도 없이 냉큼 다가와 나와 청이의 손을 한줌에 몰아쥐고 실내로 끌었다.  나는 마지못해 끌려가는 것처럼 하면서도 슬슬 청이를 식당안으로 떠밀었다. 그리고 얼리고 닥치면서 겨우 청이가 죽고싶도록 먹고프다는 된장국과 소고기 볶음을 청한 후 주인집 전화를 빌려 소개소에 전화했다. “아, 네, 미스터 장인데요. 청이가 거기 안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다른 사람 소개해보시죠.” 저쪽에서 해반주그레한 여 사장이 뭐라고 종알대고 있었지만 나는 그대로 전화를 일방적으로 끊어버리고 멀뚱하니 나를 쳐다보는 청이앞에 마주 앉았다.  “나 청도로 올 때 뭔가 해보려고 돈을 좀 가져왔어. 고향에서 양고기 뀀을 구워봤으니 빈하로에서 그걸 해볼 생각이야. 청이는 김치 만들어서 팔던가. 둘이 손 맞들고 벌면 배 곯을리는 없잖아.” 청이는 대답 대신 고개를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다. 쉴새 없이 오가는 인파속에서 무슨 답안을 얻으려는듯 청이는 눈 한번 깜박이지 않았다.  그 청이가 결국 내 마누라가 되었다. 그리고 아들 딸을 낳아 키우면서 20년을 줄창 “브래지어”를 “가슴띠”라고 부르는 촌넘이라고 나를 놀려주고 있다.  “그리고 이젠 제발 조선말이라고 하지 말고 한국말이라고 그렇게 말해요. 우, 미스터 장인지 뭔지 아무튼 고집불통이야.” 마누라는 시도때도 없이 이렇게 나를 시까스르고 있다.   
89    리화 수필에서 드러나는 작가적 스찔 댓글:  조회:765  추천:0  2016-03-18
평론 리화 수필에서 드러나는 작가적 스찔     작품은 작가의 손을 벗어나면 객관적인 존재가 된다. 작품 한편을 두고 부동한 해독이 나오게 되는 리유이다. 또한 그래서 대부분 평론이 먼저 작품해석에 치중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필자는 평론이 단순한 문장 해부의 기능만 수행한다면 자격미달이라고 생각한다. 그만큼 많은 평자들은 글의 내용에 집착한 나머지 작가의 개성이나 스찔은 지나쳐버리는 경향이 심하다. 우리의 평론이 독자들이 대부분 인지하고있는 내용에 대한 장황한 설명에 그치고있다고 비판받고있는 대목이다. 특히 나름대로 글은 이렇게 저렇게 써야 한다고 도도하게 지적하는 고약한 버릇이 있는 사람들을 보면 머리가 아프다.  어쩌면 일련의 작품을 통하여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작가의 창작 개성을 살펴보는것이 더 보람찬 평론이 될지도 모른다. 이런 출발점에서 필자는 근년에 문단에서 조용히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리화의 수필에 주목했다.  남달리 시조에 애착을 보이고있는 리화는 시창작에 천부적인 재능을 보여주고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량적으로 수필을 더 많이 창작하였고 성과도 수필에서 거두고있다.  리화의 수필을 읽다보면 금세 리화의 글일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을 앞세우게 된디. 쉬운 말로 풀이하면 작자의 이름을 밝히지 않는 전제하에서도 이건 리화의 글이겠구나 먼저 짐작하게 된다. 그만큼 리화의 수필은 리화만의 모습과 냄새와 색갈이 진하게 묻어있다.    제목으로부터 보는 작가의 스찔 작가의 스찔은 어느 한편의 글이나 어느 한시기의 작품에 국한되는것이 아니라 전반적인 창작활동에 관통되는 특성을 가진다. 때문에 작가가 어느 정도로 성숙했냐를 가늠하는 척도는 그 작가가 자체의 스찔을 얼마나 형성하고있냐에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작가의 스찔은 여러면에서 표현된다. 심리학에 정세(定势)라는 말이 있다. 일종 마음의 준비상태를 지칭하는 말인데 “정세”는 앞으로의 행위활동에 정향 또는 반향적인 추동역할을 놀게 된다.  문학창작에도 모름지기 “정세”란것이 있다. 작가가 어떤 준비과정을 거쳤냐에 따라서 그에 어울리는 형식의 작품이 형성되는데 작가의 스찔은 바로 그렇게 저도모르게 작품속에 녹아버리게 되며 내용과 형식의 제요소에 구체적으로 표현된다.  그 일례로 창작의 첫 순서가 되는 제목을 살펴볼수 있다. 형상적으로 표현하면 제목은 작품에서 출입문과 같은 역할을 가진다. 글 잘 쓰는 사람은 제목부터 특색이 있다. 일단 제목이 독자들의 눈길을 사로잡았을때 그 작품은 이미 절반은 성공했다고 볼수 있다.  그럼 리화 수필의 제목에서 어떤 작가적인 스찔이 엿보이는가 살펴보자. 앞에서 필자는 리화가 시적 재능을 갖추고있다고 지적한바 있다. 그래서인지 리화는 수필 제목도 시적인 정서가 다분한걸로 선택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솨~솨~’ 카드고개 넘어가네(흑룡강신문)”는 시 같은데 많이 쓰이면서 감탄의 뜻도 함께 나타내는 종결토 “네”가 들어갔는데다 의성의태어 “솨~솨~”가 가미되여 제법 운률이 전달된다. 제목 자체가 시어로 되여진 케이스이다.  “도라지” 잡지 “장락주문학상” 우수상 수상작인 “선녀야, 계곡물에 막걸리 부어라”는 그대로 풍월을 읊는 격이다. “선녀”를 불러놓고 “계곡물에 막걸리 부어라”고 명령하는 언어구사는 시인다운 배짱이 아니고서는 상상해내기 어렵다. 더불어 작가가 전달하고저 하는 이미지를 한결 형상화하는 효과를 거두고있다.  “내 머리에 꽃핀 하나 달아줄수 있나요(흑룡강신문)”에서는 수줍은 녀자의 아름다운 소원 하나가 간절하게 호소되고있다. 수십년후 파파 백발로인이 되여서도 “꽃핀”을 달고싶은 녀자의 본성을 이보다 더 정서적으로 표달할수 있을까?! “사쿠라야, 톡톡 터져라, 꽃비 내려라(장백산)”는 2행 시구가 그대로 글의 제목이 되여진 구조이다. 제목이 두마디로 이루어져 특이하고 생경한것만큼이나 호기심을 부쩍 당겨준다. 읽지 않으면 밥맛이 잃어질 지경이다. 여기서도 의성의태어 “톡톡”이 사용된 경우로 작가의 스찔이 한결 드러나는 대목이다.  흑룡강신문 랑시문학상 우수상 수상작인 “겨울 수채화에는 그리움이 물들고”는 정서적인 색채를 매개물에 접목시켜 상상의 폭을 한층 넓혀주고있으며 대구법을 활용한 “날아라 양말, 달려라 맨발(도라지)”은 향음자음의 분포에서도 가사적인 특색을 먼저 보아낼수 있다.  이외에도 시적 표현을 시도한 제목으로 “취미(료녕신문)”, “새벽, 소리를 듣다(송화강)”, “주방이여, 나의 천국이여(장백산)” 등이 있다.  리화 수필 제목의 또다른 특색으로 서사성을 꼽을수 있다. 일반적으로 제목은 글의 내용을 고도로 함축하는 언어를 선택하는게 주류적인 흐름이라 해야겠다.  그러나 리화는 제목을 풀어쓰기를 즐긴다. 그것을 굳이 “서사성”이라고 해석하는건 짤막한 제목일망정 대개 하나의 사연을 담아내고있기때문이다.  “도반은 지금 수련중입니다(도라지)”는 인생을 살면서 겪는 풍파와 그것을 이겨나가는 과정을 수련이라고 직설적으로 말하고있다. 그런데 그 수련의 주인공이 “나”가 아니고 “도반”이다. “도반”은 불교용어로 함께 불도를 수행하는 벗을 가리킨다. 자칫 지인의 인생수업 과정을 말하는것처럼 보이나 실은 작가 자신의 체험을 스스로에게 전하고있는것이다.  “내 DNA는 어디로 흘러가는가(흑룡강신문)”는 반문구를 사용한 그대로 아주 단순하게 자신의 DNA 기원을 더듬고 현재 상황을 검토하고 미래의 불활실성에 대해 탐구하고있다.  “게임, 그 세상에도 희노애락은 있었다(송화강)”는 말하려는 주제가 일목료연하다. 어쩌면 내용을 더 읽을 필요가 없어져보인다.  “이제 일년, 상큼한 인연(송화강)”도 누군가와 엮은 1년간의 연분을 얘기하려는 목적성이 확연히 드러난다.  이런 류형의 작품은 “그런 꼬리 하나 필요했다(도라지)”, “계절의 옥상에서 락원을 만나다(도라지)”, “네모난 내가 동그란 꿈을 꾸다(장백산)” 등이 더 있다.  제목이 주제를 담아내는건 당연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리화의 제목에서 색다른 점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수 있다. 특히 “다, 가”와 같은 종결토를 많이 사용함으로써 제목 자체가 하나의 문장으로 완성된다. 따라서 전달하려는 이미지가 한결 또렷하고 명확하다.    예술적표현방식으로부터 보는 작가의 스찔 작가의 스찔은 제재, 주제를 포함한 작품 전반에 나타난다. 그렇지만 필자는 그래도 작가의 스찔은 예술적표현방식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고 고집하고싶다. 언어를 유일재료로 하고 언어의 파악을 통해야만 형상재창조가 가능하다는 문학의 특성상 어떠한 류형의 언어를 자주 선택하고 어떠한 문체를 구성하기를 즐기냐에 따라서 작가들은 서로 구별된다. 김학철선생의 글에서 풍자적이고 비판적인 냄새를 직접 맡을수 있었다면 림원춘선생의 작품에서는 향토적이고 구수한 정서를 바로 접할수 있었다.  여기서 한마디 짚고넘어가야 할 일이 하나 있다. 우리문단에서는 작가의 문체연구에는 많이 등한한거 같다. 장기간 작품의 내용에만 집념하는 경향이 강하고 가끔 문체에 눈길을 돌렸더라도 미문(美文)에만 필묵을 할애할뿐 다른데는 신경을 도사릴 궁리 자체를 하지 않는다. 천편일률적인 문장구성과 문장 다듬에 구미가 굳어진 느낌이다. 작가는 언어를 나름대로 조합하는 특성이 있고 그러다보면 그것이 하나의 스찔로 굳어져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가장 뚜렷한 특색이 된다. 이런 의미에서 표현방법에서의 특수성을 찾아내는것은 그 작가의 스찔을 료해하는 하나의 도경이 되기도 한다.  리화의 수필은 우선 산문이라는 그 자체에 충실하여 짜임새가 느슨하고 긴박감보다 넉넉함을 선사한다. 작가의 여유로운 성격과 많이 담아있다. 특히 작품 갈피에 자작시를 한두개 끼여넣는것이 거의 습관이 되고있다. 리화 수필 작품의 절반이상에 시작품이 삽입되여있다는것을 감안할때 그것이 이미 작가의 하나의 “고질”로 고착되였다고 결론내려도 무리는 아닐것이다.  그중 “바다를 듣다(장백산)”에는 4수의 시가 들어있다. 여기서 작가의 자유분방함과 느끗함을 엿볼수 있다. 한편 대자연과 인간사회에 대한 작가의 락관적인 정서와 진취적인 태도를 반영한다.  리화 문체의 또 하나 잘 드러나는 특징은 남성적인 추세와 취향이다.  “취미(료녕신문)”는 첫머리에 “수퍼에 가면 술 코너에서 한참씩 서성대군 하는 나는 애주가이다. 가끔은 맛있게 보이는 술 몇병 골라와서 맛보기도 하지. 나한테 작은 소원이 하나 있어. 널직한 집에서 살게 되면 술창고 하나 따로 마련하는거야. 세계 각국의 미주들을 갖춰놓고 그 술을 따라 마실수 있는 다양한 술잔들을 쭉~ 진렬해놓고 방문하는 사람에게마다 한잔씩 권하는거야.”라고 적고있다. 연후 술에 취해 된장국을 찾는 장면, 술을 보면 그속에 뛰여들고싶은 심정, 술과 박치기하려는 충동 등을 핍진하게 그리고있다. 작가의 이름을 밝히지 않는다면 녀성의 글이라고 판단하기 쉽지 않다. 그만큼 작품의 파워가 강세적이고 스케일이 확장적이다.  “선녀야, 계곡물에 막걸리 부어라(도라지)”에서는 서두에 “막걸리 담은 호리병을 옆구리에 찬” 주인공이 등장한다. 아직 술을 마시기전인데도 “청담(清潭)”을 보고 선녀가 되고싶어지고 “내가 선녀라면 먼저 나무군 꼬셔야지. 내가 일부러 놓은 사랑의 투명한 날개옷 덫에 걸린 사냥군과 한평생 살아보고싶다.”고 통 큰 상상부터 앞세운다. 이어 “오솔길로 흰 수염을 내리쓰는 신선들이 나타남직도 하다”면서 “그러면 선주(仙酒)는 아니지만 내 컬컬한 막걸리 한잔 권해보고싶을텐테”라고 소원한다. 끝내 “계곡이 시작되는 정상에 이르러 막걸리 호리병을 꺼내여 퐁퐁 솟는 샘물에 담근다…샘물처럼 시원해진 막걸리가 그대로 시원한 감로수가 되여 혀끝을 적시고 목구멍을 적신다. “. 작가는 이쯤에서 “선녀인들 나에 비기랴, 신선인들 나에 비기랴.”면서 “취하지 않는체 하는것은 인간의 몫이지만 지레 취해서 흥겨워지는건 자연의 몫일지라…나도 취해보고 너도 취해보자”고 격정 높이 부르짖는다.  황진이와 같은 도고함과 대범함 그리고 일필휘지로 내달리는 기세가 돋보인다. 그보다 웅성미에 대한 고양을 통해 자연의 기적과 화려한 경치앞에서는 누구나 자신의 정체성을 무시하고 한번쯤은 일탈할수 있다는 주장이 동감된다.  “바다를 듣다(장백산)”에서도 어김없이 남성의 점유물같은 “술”이 등장한다.  “술을 마셨다. 정확히 맥주 한병을 아주 잠간사이에 비워버렸다. 컵의 필요함도 못 느끼고 병 그대로 꿀꺽꿀꺽 마셨다.” 서두의 말마디들이다. 세마디가 3개 단락으로 나뉘여져 있다. 빠른 절주와 동시에 패기가 넘쳐난다. 바다를 듣기 위한 전주치고는 나름 요란하다. 바다의 지름과 깊이에 전률해서인가 아니면 바다의 속도와 기세와 사나움에 두려움을 느껴서일까. 작가는 바다에 앞서 먼저 취해있다.  상기 류형의 수필들을 분석해보면 언어 선택에서 격앙적이고 즉흥적이며 밝고 생동한 언어가 주를 이루고있다. 하나의 창작흐름을 형성하기 위해 단어 하나라도 의식적으로 다듬고 또 다듬은 흔적이 진하다.    수사법으로부터 보는 작가의 스찔 작가라면 물론 다양한 수사법을 능숙능란하게 다룰줄 알아야 한다. 장기간의 창작실천과정에서 수사법은 작가의 필속에 이미 녹아들어 특별히 신경을 도사리지 않아도 저절로 흘러나오게 된다. 머리속에 생각이 돌기에 앞서 필이 먼저 알아서 달려나가는 경우도 자주 있다.  그래도 여러가지 수사법중에서도 작가가 자신의 애호에 따라 특별히 선호하고 손에 익고 또 자주 쓰는 수사법들이 있기 마련이다. 모름지기 그것이 작가간의 직관적인 구별이 된다.  리화는 창작에서 중단법과 생략법을 유달리 많이 쓴다. 거의 모든 작품에서 사용하고있다고 말할수 있는데 말마디가 끝을 맺지 못하고 갑자기 중단되거나 느닷없이 생략되고있다.  “적어도 나한테서는.” (“취미”에서) “강제적인 의념을 주면서.” (“내 머리에 꽃핀 하나 달아줄수 있나요”에서) “력사는 굳어지고 문명은 흐르고 바뀌고…” (“내 DNA는 어디로 흘러가는가”에서) “저렇게 나한테로 동그스름한 해평선으로 휘우듬 항하며 달려오는것이.” (“바다를 듣다”에서) “서른이 넘어서부터는 많이 좋아져서 지금은 거의 확인을 안하지만.” (“도반은 지금 수련중입니다”에서) “풀과 꽃과 나무와 곤충과 새와 강아지와 그리고 이 땅과 교감하고 하나가 될수 있는 그런 꼬리 하나.” (“그런 꼬리 하나 필요했다”에서) “계절은 흐르고 풍경은 바뀌는것.” (“선녀야, 계곡물에 막걸리 부어라”에서) “마치도 기운 양말이 가난의 상징인것처럼.” (“날아라 양말, 달려라 맨발”에서) “이룩하고싶은게 너무 많고 이룩해드리고싶은게 너무 많은데 벌써 죽음을 생각하고 죽음이 다가왔다면…” (“계절의 옥상에서 락원을 만나다”에서) “어쩌면 다이아몬드의 변치 않는 강력한 힘보다 강한건 변하기전에 지켜내는 힘인지도…” (“옥반지”에서) 우의 례문들에서 볼수 있는바 리화한테는 어떠한 토도 한개 단락을 마무리짓는데 방해가 되지 않는다. 접속토, 규정토는 물론이고 주어를 보좌하는 격토나 도움토도 미안한줄 모르고 문장을 종결해버린다. 그것도 대부분 경우 생략부호가 인용되지 않고 그대로 마침표가 되여있다. 시가 아니고서는, 그리고 리화가 아니고서는 두번 다시 볼수 없는 진한 풍경이다. 리화가 리화일수밖에 없고 리화의 글이 금방 눈에 들어오는 남다른 특별한 특징중의 하나라고 말할수 있다.  리화가 즐겨 쓰는 수사법으로 또 렬거법을 들수 있다.  “풀과 꽃과 나무와 곤충과 새와 강아지와 그리고 이 땅과 교감하고 하나가 될수 있는 그런 꼬리 하나.” (“그런 꼬리 하나 필요했다”에서) “나, 이 시대의 사내가 되여, 나, 이 시대의 한량이 되여” (“바다를 듣다”에서) “술이야, 풍경아, 그리고 사람아, 이 세상아, 취한 나를 아름답게 봐주렴. 취한 나도 아름다우니께.” (“취미”에서) “종교는 없어도 수련은 있었던거 같다. 참다운 나를 더 크게 키우고 거짓의 나를 더 작게 하기 위해 부단히 갈등하고 발버둥치면서 살아온 그 하루하루가 모두 수련이였던것 같다. 많이 아프고 두려움 많고 나약했던 자신을 더 건강하고 더 굳세고 더 강하게 만들기 위해 자기 내면과 싸우고 나를 둘러싼 환경과 싸워온 시간들이 모두 수련이였던것 같다.” (“도반은 지금 수련중입니다”에서) 실례를 들자면 너무 많아 여기서 그치고저 한다. 단 작가가 렬거법을 자주 사용하는 리유는 자신의 감수와 주장을 독자에게 주입하는 효과를 노린 원인도 있겠지만 어순의 율동을 지향하고 절주미와 세련미를 추구하는 작가의 본능적인 욕구가 그 원동력이 되였다고 볼수 있다. 특히 단순 단어의 렬거보다 단일문들의 렬거, 나아가서 복합문 형식의 렬거 조합은 혀를 내두를 지경이다. 리화의 수필을 조금이라도 유의해 살펴본 독자라면 리화는 심리묘사나 정서적인 느낌에서만 렬거법을 활용하는것이 아니라 행동 또는 동선같은 대목에서도 점진식 렬거법을 씀으로써 독자들을 자기가 목적한바로 끌고간다는것을 발견할수 있을것이다. 
88    샌드위치의 값어치 댓글:  조회:704  추천:0  2016-03-10
수필 샌드위치의 값어치 장학규   사람들은 흔히 가운데 끼운 경우를 샌드위치 신세라고 한다. 이를테면 직장에서 상급과 하급 사이에 있는 중층 간부, 가정에서 늙으신 부모와 어린 자식 사이에 있는 세대주, 생활에서는 모순 쌍방을 중화해야 하는 매개인 등의 처지가 바로 그거다.  굳이 나이도 거기에 적용한다면 나 같은 중년의 나이가 샌드위치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인생 경륜을 많이 쌓아 가히 도사급이 되어서 여유작작 만년을 즐기는 노년층과 아직은 세상의 본연의 모습을 파악할 수 없어 마냥 보라색 희망에 즐겁기만 한 청소유년층에 비해 중년의 나이는 괴롭기만 하다. 지나온 길이 아픔으로 점철되었는가 하면 앞날은 불확실성으로 매양 오리무중이다. 몸이 마음을 제대로 따라주지 않는 곤혹속에 빠지기도 하고 백일몽 같은 환각속에서 지옥 사자와 조우할 때도 드문 있다.  이 무렵부터 죽음이라는 물건이 근접 거리에서 서성이는 것을 감지할 수 있다.  그래서 샌드위치 신세가 참말로 피곤하다고 한다. 전후좌우로 밀리고 치우치고 뭉개지고 짓이겨지면서 스트레스가 만만치 않다고 한다.  실지 이런 이해는 사람들의 편견일뿐이다. ‘샌드위치’라는 음식의 형상에 대한 오해이고 모독이다.  샌드위치는 게으른 자의 얍삽한 욕구로부터 발명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영국의 샌드위치 백작 4세인 존 몬테규가 카드 도박에 깊이 심취한 나머지 어떻게 하면 카드 게임을 멈추지 않고도 허기와 식욕을 충분히 만족시킬 수 있을가고 고민하던 중 생겨난 음식이라고 한다. 시종들이 배를 촐촐 굶으면서 카드에 집념하는 주인이 안쓰러워 고안해낸 음식이 같이 어울려 놀던 카드 친구들의 공감을 얻어내면서 널리 퍼져나가는 계기가 되었다고도 한다.  특별한 기술이 필요없이 누구나 쉽게 만들 수 있는 샌드위치, 얇게 썬 두 조각의 빵으로 상에 오른 아무 요리를, 이를테면 채소류, 고기, 달걀, 치즈 등을 감싸면 바로 샌드위치가 된다. 우리의 김밥과 공예적으로 비슷한 모양새다.  샌드위치는 만드는 이에 따라 종류도 다양하지만 어쨌던 쉽게 수시로 만들어 먹을 수 있다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전 세계 어디에서나 접할 수 있는 음식이 되어있고 대부분 사람들이 선호하고 있는 음식으로 자리매김해왔다.  한낱 간식에 불과했던 샌드위치가 세계인이 열광하는 음식으로 부상한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일단 무엇무엇해도 빵과 여러가지 재료의 궁합이다. 맨 빵만으로는 슴슴하기 짝이 없고 그렇다고 다른 부자재만 먹기에는 너무 게걸스러워 보이고 또 배를 불리기가 조련치 않다. 두가지가 누이 좋고 매부 좋게 알콩달콩 어울려서 인간의 식욕을 충족시켜준다.  그러나 관건적인 포인트는 그래도 두 빵조각 사이에 든 식자재들임이 분명하다. 다양한 재료들로 이루어져 있어 맛을 내고 또 영양가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빵은 신경을 쓰지 않아도 누군가 구워서 팔고 있지만 그 안의 식자재는 사오더라도 꼭 다듬고 새롭게 만들어야 하는 번거로움이 뒤따른다. 공력이 들어가는 만큼이나 그것이 샌드위치의 맛을 최종 결정한다고 할 때 재료의 중심적 역할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샌드위치로 형용되는 인간그룹도 이와 유사하지 않을까 싶다. 입장과 위치와 경우가 다소 차이를 보이기는 하지만 가운데에 있다는 점만은 공통성을 가진다. 세상은 이들을 둘러싸고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들에게는 위아래를 소통시키고 전후좌우를 터쳐주어야 할 소임이 맡겨져 있다. 이 역할이 구실을 못하면 혈관이 막혀 뇌손상이 오거나 사족을 쓰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인간세상이 마비가 된다는 얘기가 되겠다.  경제상의 중산층도 샌드위치에 어울린다면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요즘 세계는 중산층의 두터움 여부에 따라 선진국, 개도국, 후진국으로 나뉜다. 중산층이 차지하는 비율이 높을수록 선진국으로 분류되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래서 경제학자들은 중산층의 몰락은 사회의 비극이라고까지 형용하고 있다.  가운데 있다는 것은 결코 갇혀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심장이 사처로 혈액을 공급하여 동물에 생기를 불어넣고 엔진이 가동되어 기계의 역할이 이루어지듯이 가운데는 조화와 발전을 이끌어내는 존재이다.   그러니까 사람이 남에게 감싸져 있다는 것은 그만큼 가치가 있다는 말이다. 쓸모 없으면 누가 가운데 끼워준단 말인가. 책임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거들떠 볼리 만무한 일이다. 내남에 두루 필요하고 도움이 되고 그러면서 억수로 편하고 쉬운 사람들이 바로 샌드위치형 사람들이 아닌가.  샌드위치를 호도하거나 먹칠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더우기 스스로 샌드위치임을 자임하면서 염세적인 인간으로 굴러떨어져서는 아니된다. 그것은 사회의 중추적인 역할을 포기하겠다는 의미이며 모름지기 가치 없는 사람으로 추락하겠다는 선언에 다름 아니다.  샌드위치여도 당당해질 때, 샌드위치가 되어 보람이 느껴질 때, 샌드위치가 행복으로 다가올 때 우리의 인생은 값어치를 보상받았다고 할 수 있다. 
87    김경화는 누구인가? 댓글:  조회:993  추천:1  2016-03-01
평론   김경화는 누구인가? 김경화 소설세계에 내재된 자아형상     지극히 개인적인 주장이지만 문학작품은 작가 자신의 은폐된 인격이 상상의 세계에서 활약하는 생활상이라고 말하고 싶다.  인간 개체는 이 세상의 대부분 령역을 알수 없다는 한계성을 가졌다. 비록 수천수만년의 인류의 경험이 큰 보탬이 된다고 하더라도 일개의 인간은 온통 미지의 세계에서 허덕일수밖에 없다.  물론 작가는 자신의 제한된 생활체험으로부터 출발하여 작품을 창작하게 된다. 그러니까 작품에 내재된 견해나 주장은 작가의 경력과 지식바탕 그리고 주변 환경이란 테두리내에 한정되고 기반한다는 말이 되겠다. 그것을 뛰여넘는다는건, 다시 말해 초월이란 사실 너무 사치한 표현이 아닐까 싶다.  결국 문학작품에서 작가는 나름대로 익숙한 분야를 펼쳐놓고 그속에 대리인을 내세워 자신의 정체를 얘기하게 되여있는것이다. 미화가 되든 투정이 되든 발뺌이 되든 그 주인공의 몸에는 틀림없이 작가의 흔적이 묻어있게 마련이다. 그리고 사건의 당사자가 아니더라도 목격자가 아니면 최소한 귀동냥이라도 한 사람이라야 독자를 설복할만한 이야기를 만들어낼수 있다. 머리속에서 저절로 인물과 사건이 달려나올리 만무하고 그 단초나 모델은 꼭 현실에 존재한다는것이다.  그래서 일단 작가를 료해하면 그 작품 해명도 상대적으로 쉽다고 본다. 필자의 경우라면 한걸음 더 나아가 작품론과 작가론이 함께 곁들여져야 비로서 완전한 평론이 된다고 인정하는 사람이다. 작가의 기본 데이터도 가지고있지 않는 사람이 평론을 하게 된다면 오독의 확률이 배이상 높다고 확신한다.  김경화는 신세대 녀성작가중에서 비교적 삐여진 인물이다. 2007년에 첫 소설을 발표해서부터 몇년 안되는 사이에 수십편의 단편소설과 중편소설을 펼쳐낸 재간군이다. 그러나 쉽게 성공한 케이스라고 가볍게 넘기기에는 김경화의 신상정보들이 결코 평범하지만은 않다.  이제 김경화가 소설작품을 통해 독자들에게 전달한 자신의 이미지와 메시지와 부호들을 한번 파보도록 하자.    그녀는 현장의 견증인이다 김경화의 고향은 청산리이다. 청산리는 항일독립투사 김좌진장군으로 인해 유명해진 고장이다. 그만큼 시시비비도 많았던 지역이다.  백과사전에는 “화룡현 청산리는 조선인 교민이 모여사는 북간도의 연길과 룡정에서 백두산으로 가는 길목에 있으며 사방을 에워싸듯 둘러싼 주위의 산은 산세가 험하고 복잡하다.“고 적혀있다. 험준한 지형과 버스도 잘 통하지 않던 단절된 환경여건으로 청산리는 사건사고들이 곧잘 생기군 했다고 한다.  이웃 림장마을까지 5,60호 정도밖에 안되지만 우리민족 력사에 길이 남을 청산리대첩이란 어마어마한 사건을 겪었었다. 일본군을 전멸했던 직소라는 곳도 바로 청산리에 위치해있다.  우리는 김경화의 소설들에서 자주 “청산마을”이나 “림장”이란 동네 이름을 접하게 된다. 소설 “적마, 여름을 지나가다”의 배경은 “청산마을”로 부정을 저지른 엄마와 그 불륜의 결과물인 “나”, 그리고 오쟁이를 짊어진 “아버지”의 행패와 “엄마”의 외도사실을 토설한 “언니”의 운명을 교차적으로 그리고있다. 그러면서 엄마의 전철을 밟고있는 자신에 대한 인생궤도 수정을 설파하고있다. 인연의 덫에 걸려든 서로 다른 인간상을 통해 사랑의 함의를 부동한 각도에서 해부한 성공작이다. 그러나 일단 그런 결과를 도출한 그 원인에 대한 리해나 해석은 뒤로 미루고 우선 그 사건 자체가 참혹하고 리얼하다는 느낌이 앞선다.  “암연”은 살인사건을 다룬 작품으로 시내에서 살다가 부모가 리혼하는 바람에 동네 토호로 군림하고있는 할아버지네 집으로 온 “홍남”이가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피를 속이지 못해 “영이”를 겁탈하려다가 살해하는 이야기를 쓰고있다. 이 소설에서는 “림장”이란 고장이 등장한다.  “흐르는 소리”도 살인사건을 다루고있다. 약혼까지 했던 “홍이”가 한동네에서 사는 “산호”의 애를 배면서 “산호”가 약혼남이 데려온 친구들한테 죽임을 당한다는 스토리이다. 여기서도 “림장마을”이 나타난다.  대표작이라 할수 있는 “도라지”잡지 수상작인 “적마, 산을 내려오다”에서는 불륜과 폭행과 배신 등 인간의 어두운 구석을 다루고있는바 “청산”,”림장” 두 곳이 모두 언급된다. 이 두 곳은 현실에서 이웃인것처럼 소설속에서도 원 형태 그대로 적라라하게 아래우 마을로 모습을 보인다.  자명한바 그곳은 이야기가 많은 동네인것이 분명하다. 물론 모든 사건의 원형이 그대로 실재했다고 보기는 무리이나 적어도 그곳은 창작의 동력이고 끊임없이 소재를 제공해주는 원천이라는것을 알수 있다.    그녀는 아픈 사람이다 김경화는 “상처가 있어 우리는 위로받는다. 나의 소설은 상처가 있는 한 그냥 씌여질것이다.”고 말했다.  하다면 김경화의 상처란 어떤것일가? 그것이 알고싶지 않을수 없다. 어쩌면 그것이 김경화의 작품을 더 깊이 파고들수 있는 관건고리일수도 있지 않을가. 김경화의 작품들을 읽다보면 바로바로 맞혀오는것들이 있다. 모든 작품들이 얼기설기 얽혀있어 마치도 장편소설을 헤쳐놓은듯한 느낌이 든다.   “적마, 여름을 지나가다”에서 나오는 관상쟁이가 “적마, 산을 내려오다”에서도 나온다. 그것도 묘하게 모두 기차역에서 만난다. 이 두 작품에서 나오는 “엄마”는 모두 불륜의 당사자이다. 계렬작품이라고 보면 무리는 없겠다. 그런데 다른 작품에서도 유사한 현상이 계속 나타난다. “원점”에서의 “언니”가 “베거아리랑”에도 버젓하게 등장한다. 내 집에서 공부하는 “조카”도 여러 소설에 얼굴을 내민다. “개구리는 없다”에서의 “엄마”는 틀림없이 “베거아리랑”의 “언니”의 변형이다. 여러 작품에서 나오는 “오빠”는 두가지 부류이다. 하나는 가정 타격에 의한 폭군이고 다른 하나는 친구가 많고 의리가 강한 형상이다. 그런데 둘다 묘하게 마흔을 올려다보면서도 장가를 여직 들지 못한 로총각이다.  김경화의 작품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대체로 “엄마”, “언니”, “오빠”가 위주이고 슈제트는 기본상 “가난”.”불륜”, “살인”이 주선률이다. 배경은 콩이나 강냉이를 심는 이밥 없는 동네이고 기름개구리와 송이버섯이 특산인 산골마을이다.  그래서 김경화의 아픔을 추리해본다.  먼저는 가슴에 한이 맺힌 가난이 아닌가 싶다. 겨우 배나 불릴가말가한 한전 뙤기밭에 의지해 살아가야 하는, 그래서 먹을것 입을것 배울것 어느 하나도 제대로 할수 없었던, 그나마 돈이 될만한 기름개구리와 송이버섯은 주먹세계에 의해 착취당해야 하는 억울함이 항상 앙금으로 남아있는듯 하다. 대부분 작품에서 살아남기 위해 또는 더 잘 살아가기 위해 발버둥치는 인물형상을 그리고있다는 점에서 이 부분은 거의 의심할 여지가 없는듯 하다. 그리고 기름개구리를 떠올린 글이 “개구리는 없다”, “흐르는 소리”, “내가 살던 고향은”, “적마, 산을 내려오다” 등이 있고 송이버섯을 다소 비친 글도 “암연”, “흐르는 소리”,”내가 살던 고향은” 등이 있는걸 보면 작가의 남다른 가슴 앓이를 넘겨볼수 있다.  그래도 작가를 가장 가슴 아프게 한것은 몰락하는 농촌공동체와 타락하는 도덕관념 그리고 후대 교육이 피페해지는 현실일것이다.  “개구리는 없다”에서는 가난했지만 그래도 조금은 행복했던 한 가정이 금전만능주의 세레를 받고 풍비박산나고 후대가 벼랑끝에 몰리는 과정을 묘사하고있다. “아이”의 엄마는 “머리를 노랗게 물들인” 친구의 말을 들은 후부터 남편과 티각태각하더니 끝내는 리혼하고 한국으로 시집가는 길을 택한다. 한국남자한테 얹혀 살다가 거기서 도망나와서 같은 교포남자와 붙어사는 파렴치한 행실도 마다하지 않는다. 국내에 남겨진 아들의 공부에는 전혀 관심이 없이 자기 인생만 즐기는 동물본능적인 삶에 안주하고 아들애가 사라져도 전혀 찾을념을 않는 윤리상실증에 빠져있다. 결국 “아이”는 절망한 나머지 이 세상과 맞서는 길을 선택하고만다. 작가는 이 글을 다룸에 있어서 쇼크료법을 사용, 온몸에 소름이 쭉 끼치게 한다.  “내가 살던 고향은”은 나날이 황폐화되는 농촌현실을 말하고있다. 13년만에 찾아오는 고모네 집은 “이불장유리가 떨어져 대신 천을 쳐놓은것까지” 이전과 똑같았다. 밭이 개발범위에 들어 우에서 보상이 내려오고 공장이 들어서서 돈도 타먹었지만 그 덕분에 “고기새끼두 없고” “학교도 마사지고” “풀도 다 노랗게 말라버리고” “개구리가 변종이 된” 고장이 되여버렸다.  “원점”은 남편이 펀펀하게 살아있는 “언니”가 탈가하여 어느 총각과 붙어살다가 그 총각이 머리 수술하면서 다시 귀가하는 사실을 쓰고있다.  모두가 현재 우리 주변에서 계속 벌어지고있는 생생한 일들이다. 말하자면 우리민족 모두의 아픔이고 우리 시대의 과제이기도 하다. 이 아픔은 아직도 장시간에 걸쳐서 치료해야 할 고름이고 또 어쩌면 상처가 너무 커 영원히 치료불가일지도 모른다. 바꾸어 말해서 김경화는 계속 소설을 쓸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그녀는 실천파이다 살기 위해서, 글 쓰기 위해서 김경화는 조선족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빠졌을법한 코리안드림에 편승한다. 사랑하는 남편과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다섯살난 아들을 떠나 출국길에 오른다. 분명 사실이고 현실이다.  그리고 단편소설 “떼떼떼”에 이 대목이 그대로 나온다. “베거아리랑”에도 이런 설명이 나온다.  물론 김경화가 간 곳은 한국의 “청주”이다. 그리고 종사하는 업종은 식당이다. 이 점도 글을 써야만 하는 김경화의 소설에 숨김없이 드러난다.  “청주” 관련 소설은 지금까지 필자가 본것은 4편이다. 그중 중편소설 “베거아리랑’이 기존의 어려운 가정 소재를 한국까지 연장하여 다룬 반면 나머지 3편은 청주 현지에서 살아가면서 겪은 사연을 적고있다.  인상이 깊게 남는것은 단편소설 “잠이 들다”이다. 스토리는 별로 새롭지가 않아 보인다. 줄거리가 조금씩 다르긴 해도 장안의 화제에 자주 오르는 케이스이다. 아버지의 도박으로 엄마는 떠나고 형제들은 뿔뿔히 흩어진 한국 총각이 자기보다 두살 이상이고 일곱살난 딸까지 있는 조선족 녀인을 만나 꿈에도 그리던 가족을 동경하다가 현실의 벽에 막혀 실패한다는 이야기이다. 이 소설에서 눈길을 끄는것은 소설의 성숙도보다는 작가적인 발견이다. 한국인과 조선족이 얼굴을 맞대고 부딪쳐온지도 20여년이 되여온다. 그간 조선족은 일방적으로 당하면서 살아온 존재였고 한국인은 항상 도고하게 우에 군림해온 주체였다. 그런데 “잠이 들다”는 이 량자를 평등한 위치에 놓고 이야기를 전개한다. “순이”가 일방적으로 인공류산을 했어도 “그”는 치미는 화를 간신히 참고 산후 조리까지 알뜰히 해준후 유유히 떠나버린다. 특히 “그”의 마지막 행위인 “잠이 들다”가 소설의 제목이 되여진게 흥미롭다. 조선족이냐 한국인이냐는 론쟁을 이젠 잠재울때가 되지 않았냐는 뜻 같기도 하고 서로 신경을 끄고 살자는 말 같기도 하다. 아니면 지나간건 다 잊어버리고 새롭게 출발하자는 의미같기도 하다.  “날개를 접는 시간”은 색다른 류형의 소설이다. 조선족의 눈으로 한국사회의 실태를 반영하고있었다. 순수하게 한국인의 생활상만을 보여준 작품이 별로 많지 않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시사하는바가 적지 않다. 우선 바른 한국 젊은이의 형상을 보여주었다. 민영이는 아버지가 다리가 불편한데다가 치매에 걸리고 누나는 지력장애가 있지만 항상 적극적인 삶의 자세를 취하고있었다. 미끈한 외모에 깨끗한 옷차림의 반듯한 청년이였다. 다음은 잃어졌던 민영이의 신 한짝을 되찾는 장면을 통해 진취적인 사람은 재기의 기회가 꼭 찾아온다는 진리를 호소하고있었다. 역시 제목을 “날개를 접는 시간”으로 단것이 돋보인다. 새가 날개를 접는것은 새로이 날개를 크게 펼치기 위한 전주가 아닌가?!  “여름감기”는 한국에서 8년간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던 조선족이 자신을 돕기 위해 여러모로 노력하고있는 주변 사람들의 마음을 저버리고 악덕사장과 사사로이 합의를 해버렸다는 에피소드이다. 조선족의 자질 제고를 호소하는 따금한 글이라 하겠다.  모름지기 이 글들은 작가가 직접 체험한것이 분명해보인다. 특히 “날개를 접는 시간”에는 작가의 아들인 “은비”가 거론되면서 실생활과 중첩되는 감도 없지 않다.   그녀는 이야기군이다 김경화는 담담하게 이야기를 풀어가는 재간군이다. 가슴 아픈 사연에도 흐트러짐이 없이 차분하게 대처한다. 좀체로 격정이 끓어넘치는 경우가 없다. 자칫 랭담하고 무감각적일거라는 느낌이 진하다.  소설을 다룰줄 아는 고수이다.  작가가 독자가 되여 희로애락에 허우적거리면 그건 연기이지 창작이 아니다. 글쓰는 사람이 배우가 되여지는 경우면 꾸민 흔적이 진할수밖에 없고 따라서 독자들에게는 코미디 같은 인상을 주게 된다.  그래서 김경화의 소설은 지극히 간단하다. 소설적인 장치가 있는지 거의 의식하지 못할만큼 스케치적이다.  “환자들”은 연변병원에서 여러 계층과 년령대의 녀자들이 링겔을 맞으면서 주고받는 대화가 주를 이루고있다. 많이 싱거워보인다. 그런데도 사람냄새가 억수로 난다. 흩어진듯 모아지고 중축을 잃은듯 다시 탄력을 받는 여기에서 작가적인 재능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테테테”도 녀자들의 동네 마실놀이같은 소설이다. 오빠의 친구 “성주”의 부탁을 받고 사람 찾는 광고를 써주고 다시 “성주”의 삼촌이 젊었을때의 에피소드를 돌아보고나서 아들과 조카를 챙기는 일상을 보내다가 죽은 사람의 장례에 참가하는 등 거의 한줄로 꿰기 어려운 사실을 얘기하고있다. 읽기에 편하고 참으로 재미나다는 감각이다.    그녀는 적마이다 김경화는 적마 계렬 소설을 3편이나 썼다. 구경 적마란 무엇을 의미하고 왜서 적마에 집념하냐는 아무래도 작품 분석을 통해 살펴보아야 할것이다.  “적마, 여름을 지나가다”에서 김경화는 작중 화자를 통해 “나는 어찌해야 할지 답을 찾지 못하고 길 잃은 한마리의 적마처럼 무작정 헤매고 방황했었다.”면서 “속에서부터 끓어번지는 이 엄청난 불을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고 절규한다. 그러면서 “아, 적마여서 불행할수밖에 없는 녀자”라고 스스로를 규정한다.  “적마, 산을 내려오다”에서는 “적마”에 대한 설명이 한결 구체적이다. 관상쟁이의 말을 빌어 “역마살이 끼였소. 앞으로 보통 사람으로서는 상상도 못할 엄청난 일들을 수도 없이 겪으며 살아야겠군.”라며 다소 관념적인 운명론을 펼치더니 주인공이 “이제 적마, 적마가 되리라. 삶을 향해 용감히 돌진하는 적마, 그 무엇에도 물러서지 않고 저돌적으로 앞만을 보고 달리는 적마가”라고 다짐한다.  적마 계렬의 다른 한 작품인 “암연”에서는 “적마”에 대한 암시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 작품을 통해 “적마”는 역시 기구한 운명과 그 운명에 과감히 도전하는 형상에 다름 아니다.  아무튼 김경화의 전반 작품을 살펴보면 “김경화는 적마이다”가 최종 결론이 아닐가싶다. 많은 사건을 경험하고 많은 아픔을 겪고 많이 부딪치면서 싸우고 극복하고 이겨나가는 적마의 형상이 되여야 하는것이 김경화의 팔자이며 그리고 그것을 세상에 알리지 않으면 안되는것이 김경화의 사명이다. 
86    비정상 죽음으로부터 보는 비인간적 사회속성 댓글:  조회:780  추천:2  2016-02-20
    평론   비정상 죽음으로부터 보는 비인간적 사회속성   현춘산 장편소설 “호란강반의 비가”에서 나타나는 비판의식   장학규     현춘산선생은 지금까지 수필집 3권과 장편소설 1부를 출간했다. 다산이라고는 할수 없겠지만 문학을 생명처럼 여기고 거기에 혼신의 정열을 쏟아붓는 많지 않는 작가중의 한사람인것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현재 60대 중반인 현춘산선생은 70세전까지 두번째 장편소설 '검은 땅의 전설'을 마무리기 위해 아픈 몸을 이끌고 한창 집필에 전념하고 있으며 여생에 단편소설집 한권과 에세이집 한권 그리고 장편소설 '호란강반의 비가'를 한문으로 출판하는것이 목표라고 한다.  현춘산선생의 대표작품은 장편소설 “호란강반의 비가”이다. 이 소설은 “흑룡강신문” 제13회 신춘문예당선작으로 신문에 련재될때부터 많은 쟁론과 화제를 불러왔던 작품이다. 논란거리였던 이 소설이 2010년말에 단행본으로 출간되면서 쟁명은 일단 물밑으로 갈아앉았으나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지속적으로 발효를 거듭하고있다. 어차피 언젠가는 한번 다시 끄집어내여 헤치고 뒤번지고 긁지 않으면 안될 문제작이라는걸 먼저 밝혀야겠다.  소설은 1958년 5월 중국공산당 제8기전국대표대회 제2차회의의 정신에 따라 성세호대하게 일어난 대약진 및 그와 동시에 출현한 인민공사화 운동을 그 사회력사적 배경으로 하고있다. 시간적으로는 대략 1958년 겨울부터 1959년 10월까지 채 1년이 좀 안되는 기간에 벌어진 사건을 다루고있다. 이 시기는 “반모진(反冒进)”에 대한 비판이 이어지면서 전민적강철제련과 무엇에나 “공(公)”자만 내세우던 좌경로선이 살판치던 민감한 시기이기도 하다.  소설의 스토리는 두갈래로 병행되여 전개된다. 우선 조선족마을인 강남대대에서 원래의 농업생산합작사로부터 인민공사로 과도하는 과정에 림기호를 필두로 한 강남대대와 공사당위원회 서기 진장해를 대표로 하는 착오로선간의 아슬아슬한 모순 투쟁과 그 착오로선의 구체적인 형태인 공산풍과 평균주의 및 허풍치기사조로 인해 기아선상에서 헤매는 농민들의 비참한 현실을 그리고있다. 다른 한갈래는 농촌의 지식계층을 대변하는 호재덕교장과 교사들사이의 의식형태상의 차이를 통해 상부구조의 부조리실태를 고발하고있다. 필자는 “호랑강반의 비가”의 본연의 모습에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현춘산선생의 단행본들은 물론 여기저기 널려있는 산재적인 작품들도 가급적 모두 찾아 읽어보았다. 현춘산선생이 이 장편소설을 창작하게 된 동기와 의거 그리고 합리성여부를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아울러 그런 자료들을 이 평론에 활용하였음을 밝힌다.    비판과 반성의식이 주선률 “호란강반의 비가”는 정치적색채가 농후한 작품이다. 중국이라는 특수한 정치체제속에서 자칫 엄중한 후과를 몰아올수 있다는 점에서 우선 먼저 손에 땀을 쥐게 한다. 정세봉선생의 “볼쉐위크의 이미지”로 인해 문단지진을 겪었던 우리로서는 사뭇 두려운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력사적진실에 어느정도로 접근하고 그 반성의 폭이 얼마나 클지 관심이 쏠리지 않을수 없다.  현춘산선생은 1950년도 태생이다. 대약진시기에 그는 만 8~10세였다. 사맥을 확연히 파악하기는 어려우나 적어도 기억은 가지고있을수 있는 나이인것만은 틀림없다. 그리고 토지개혁이나 농업생산합작사와 같은 사연들을 근거리에서 동냥해 들었을법도 하다. 동시대인으로서의 생물학적 시계는 필경 타임머신을 타고 반세기나마 뒤로 달려와서 듣는 사람들보다 또렷하고 정확할수밖에 없다.  그래서인가 그의 많은 글들에 기아로 인한 에피소드들이 덕지덕지 묻어있다. 특히 호조조 조장으로서의 아버지가 토지재분배때 상등논의 제비를 뽑고도 “간부”라는 신분때문에 그 논을 다른 집에 양보하고 대신 척박한 알카리성땅인 갈대밭 7무에 씨를 뿌렸으나 3년동안 피낟알도 거두지 못하고 배고픔에 허덕였다는 사연이 수필 “가난은 영광도 수치도 아니다”를 포함하여 적어도 다섯편의 글에 기록되여있다. “가난뱅이 현가”라는 뜻인 “츙센”이란 별호를 달고 다니는 아버지에 대한 아쉬움같은 감정을 쉽게 보아낼수 있는 대목이다.  작가는 이 아버지의 형상을 “호랑강반의 비가”에도 재현하고있다. 작가 스스로는 순박한 농민인 “조덕보”가 아버지의 모델이라고 밝히고있다. 어리무던하고 말수가 적으며 위병으로 앓다가 세상을 떠나는 점까지는 거의 일치해보인다. 그러나 신분적인 면으로 보나 작품의 형상화측면에서 보나 “조덕보”보다는 “림기호”가 더 “아버지”를 닮아보인다.  “림기호”는 강남촌 개척자의 한사람인 “림치수’의 아들로서 토지개혁때 부친을 설복하여 토지와 역축을 내놓게 한후 강남촌의 리더로 부상한다. 철저한 공산주의자였지만 대약진운동의 발발과 더불어 급속하게 악화된 식량난과 자연법칙에 어긋나는 무리한 생산활동을 눈앞에 보면서 심각한 갈등을 겪는다. 결국 농민의 아들인 “림기호”는 상급의 지시를 무시하고 농민들이 탈곡하면서 낟알을 쭉정이에 섞어넣고 못 먹게 하는 종곡을 찧어 먹고 또 한밤중에 논밭에 나가 벼이삭을 잘라오는 행위들을 묵인한다.  소극적인 반항이기는 하나 시사하는바가 작지 않다. 역시 공산당원인 작가는 조직과 인민대중의 리익이라는 명제를 두고 많은 고민을 해온게 분명하다. 인민의 질고를 외면하고 당의 결정이라면 무조건 복종하고 집행하는 무뇌아적인 조직관념이 과연 바람직한가 하는 질문을 던져보았을것이다. 고지식한 아버지라면 어떤 립장을 취했을가도 한번쯤 생각해보았을것이다.  결국 “림기호”는 공사서기가 파견한 민병들의 총구를 가슴으로 막아나서는 구체적인 행동에 나선다.  “더는 모든 고통을 묵묵히 감내하는 온순한 양으로 살수 없었다. 생존의 권리와 인간의 존엄을 위하여 더 이상 강포와 탄압에 숙어들수 없었다.” 작가는 “림기호”의 행위를 이런 강도높은 지문으로 변호하고있다. 많이 민감해보이고 위태위태해보인다. 그러나 거꾸로 풀이해보면 인민의 편에 선다는것은 결국 공산당이 시행착오를 겪다가 자신의 원 위치로 회귀한다는 의미가 아니고 뭔가?! 이런 정치적인 반성은 현위 부서기인 조광한테서도 반영된다. 로선투쟁의 확대화를 두고 공사서기 진장해와 론쟁하면서 “중국에 무슨 자본주의가 있소? 소 한마리가 자본주의요? 수레 한대가 자본주의요?”하고 질책한다. 따라서 “백성이 기아선에서 헤매고있는 참혹한 현실앞에서 이른바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두가지 사상, 두갈래 로선 투쟁으로 세뇌가 된 당의 기층간부들이 군중의 질고를 도외시한채 이렇게 빈 말공부만 하고있는것이다.”고 의론을 펼친다. 조광은 또 농민들의 적극성을 북돋구기 위해 생산대를 나누는것을 지지하고 종곡대신 콩을 심어 보리고개를 넘길것을 권고하기도 한다. 그 년대에도 정책착오를 시정하려고 애쓰는 간부들이 적지 않았다는 암시이기도 하다.  그러나 착오로선에 대한 비판이나 반성은 오히려 학교라인에서 더 격렬하고 직설적이다. 체육교원 “최민수”를 위시한 엘리트들은 “대약진은 부실공사고 인민공사는 유토피아”라고 열변을 토하고있으며 강호석 같은 사람은 아예 우경분자가 좋은 사람이라고 공공연히 날을 세우고있는것이다. 물론 그 대가로 “최민수”는 우경분자로 락인 찍혀 학교에서 쫓겨난다.   반면인물로 공략하는 허위명제 이 소설은 3명의 반면인물을 등장시키고있다. 솔직히 그 세월을 겪어보지 못한 필자와 같은 후생들에게 공산당 내부의 이색분자들은 다소 충격적이다. 그 격정의 년대에 살았던 사람들은 흔히 맹신적이여서 사회와 민중에 많은 피해를 주기는 했을망정 머리속은 항상 붉었고 또 자신들의 행위가 인민을 위하는 일이라고 철같이 믿었던 사람들이라고 의례 추측하고있었기때문이다. 문화대혁명때처럼 투기적이고 카멜레온적인 사람들도 있었으리라고 생각하기 어렵다.  역시 어느 세월에나 나쁜 사람들은 틀림없이 있다는 천고불변의 진리를 다시 한번 확인시켜주고있다.  이 소설의 첫번째 반면인물은 공사서기 진장해이다. 부자집 말먹이군 출신으로 그 밑천때문에 해방군 기병부대의 하층 지휘관으로 있다가 영안진 진장으로 전업한 진장해는 그때까지도 말을 타고 다녔으며 “타마디”를 노상 입에 달고 다녔다. 그는 당시 정책로선의 아이콘으로 등장하고있는 코미딕한 인물로 한겨울 추위에 우사를 개조하여 공공식당을 꾸리라고 강요하거나 얼어붙은 흙덩이를 까서 늪을 메워 논으로 만들것을 명령하는 등 동 끼호데식 존재이다. 한편 탈곡을 앞당기라고 련합탈곡기를 보내주고 흙을 폭파하라고 뢰관을 제공하는 등 더러 귀여운 면도 있다. 그러면서도 세번이나 기아에 허덕이는 농민들의 입에서 쌀을 빼앗아가면서 총까지 동원하는 악행을 서슴지 않는다. 피도 눈물도 없는 진장해의 소행에서 우리는 그 시대의 비인간적인 한 단면을 엿볼수 있다.  진장해의 비리나 부패는 의외적이다. 인민공사화로 인해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게 된 진장해는 공사식당의 작은 칸에서 기름에 튀긴 두부와 밀가루지짐을 먹는가 하면 배맞아 돌아가는 젊은 과부에게 밀가루와 좁쌀을 보내주기도 한다. 그 비상세월에 새집을 짓는다며 집재목을 공짜로 챙기고 끌끌한 로력을 무료로 사용하기도 한다.  다음으로 두드러진 반면인물로 호재덕을 꼽을수 있다. 호재덕은 시골량반 가정에서 태여나 고등학교까지 마쳤다. 조선전쟁에 참가했던 호재덕은 어느 전투에서 겁을 먹고 부상병들을 데리고 후퇴하라는 최장진 중대장의 명령을 거역하고 홀로 살아남아 귀국후 시골학교의 교장으로 출세한다. 한편 리상주의자인 그는 학교에다도 식당과 기숙사를 만들었고 전혀 신빙성이 없는 과수원을 계획하기도 한다. 의사를 속여 알콜을 타내와서 물을 타서 마시는가 하면 취해서는 안해가 아들을 낳지 못한다고 욕하고 때린다. 우파를 잡아낸다고 애매한 정종구선생을 물어먹는가 하면 입으로는 로동대중 어떻구 떠벌리면서도 농민들이 진짜 락후하다고 깔보기도 한다. 나중에 자신의 수치스러운 과거가 들통날가봐 최장진 중대장의 아들인 “최민수”를 우파로 몰아 쫓아버린다. 성격이 모순투성이인 호재덕은 인간본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인물로 평가할수 있다. 자기의 생명을 구해준 나젊은 “최민수”의 죽음에 추호의 가책도 느끼지 못하는데서 그의 잔인함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이 인물도 례외적인 결과를 맞이한다. 안해한테서마저 “하루종일 남을 해칠 궁리만 하는 사람이지 교육자가 아니”라고 점찍혀진 호재덕은 항미원조시기의 불미한 행실이 적발되였음에도 불구하고 “공사문교조리”로 승진한다.  세번째 반면인물은 마을의 치보주임인 김종팔이다. 양아치 격에 해당하는 김종팔은 어머니 윤씨가 처녀시절에 항일군과 김치굴에서 벌인 한번의 정사로 생겨난 인간이다. 외모마저 추악하게 생긴 김종팔은 치보주임이라는 권세를 믿고 약자들한테 행패를 부리고 고자질을 일삼는 망나니 행실을 일삼는다. 아직 철부지인 어린애를 부농분자의 손자라면서 혼줄내주는가 하면 식량통제권으로 자기배만 채운다. 나중에 홀로난 과부 리봉숙을 겁탈하다가 실수로 죽이고 자기도 그만 사형을 받는다.  작가는 이 세 반면인물을 통해 그당시의 진실한 시대상을 보여주고있으며 아름다운 념원이 꼭 만족할만한 결과를 가져오는것은 아니라는 점을 분명하게 알려주었다. 한편 어느 시대에나 체제에 기생하면서 악행과 비리를 저지르는 사람이 꼭 있다는 명제를 새롭게 제시했다.     진실한 력사의 축도 및 거울 서두에서 이미 언급했지만 “호란강반의 비가”는 1958년 겨울부터 이듬해 10월까지 1년이 좀 안되는 시간을 다루고있다. 그리고 50여호 250여명 인구밖에 안되는 강남대대를 취급하고있다.  그러나 유심히 이 소설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화들짝 놀라게 될것이다. 즉 250여명밖에 안되는 작은 마을에서 1년간 15명이나 죽어나갔고 3명이 정신이상에 걸렸다는 사실이다. 그중 자연사는 딱 3건뿐이고 나머지는 모두 비정상적인 죽음이였다. 전대미문이라는 단어를 시용해도 결코 과하지 않은 기막힌 기록이다. 석도길은 남포에 맞아죽었고 미순이는 변질된 두병을 먹고 죽었다. 동호는 끓는 죽가마에 빠져 죽었고 그때문에 윤씨는 뇌출혈로 횡사하고 남편과 아들을 다 잃은 리봉숙은 그만 실신해버린다. 마을의 좌상인 강덕칠령감은 비녀뿔소를 지키려고 장마철에 강을 건너다가 빠져죽고 유망한 지식인인 최민수는 자기를 해친 호재덕을 구하다가 홍수에 밀려간다. 옥점이와 영순이는 흔들개늪에서 먹을것을 찾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처자식의 투쟁장면을 목격한 오재식은 흐릿한 정신속에서도 충격을 받고 기절해죽는다. 리봉순은 강간당하다가 질식해 죽고 김종팔은 그 대가로 충살형을 받으며 가정과 사업, 직위를 몽땅 잃은 림기호는 사품치는 호란강에 몸을 던지고만다. 김분숙, 조덕보, 울산댁 등 자연사까지 포함해 어느 한 죽음도 가볍게 넘길수 없다.   필자는 이 사건들이 대개는 실재했던거라고 생각한다. 현춘산선생의 많은 글들에 그런 흔적들이 남아있기때문이다.  현춘산선생은 자신의 문학생애를 돌이키는 글에서 “조선전쟁의 총포소리속에서 태여나 농업합작화, 대약진, 인민공사화, 문화대혁명, 개혁개방 등 세월을 살아오면서 나는 어려서부터 성인이 될때가지 어려움을 수없이 겪었다. 비교적 특수한 나의 경력은 몇권의 장편으로 기록할만 한것이다. 더구나 대약진, 문화대혁명처럼 전대미문의 민족과 나라의 대재난을 겪어오고서도 그것을 글로 남기지 못한다면 후대에 얼마나 미안하랴 싶다.”고 토로한바 있다.  한때는 농촌기층간부였고 공산당원이며 교원인 현춘산선생이 피와 생명으로 점철된 력사화폭을 독자들에게 펼쳐보인것은 결코 무엇을 폭로하자는 타산은 아닐것이다. 아직도 그 시절에 대한 미련을 가지고있는 사람들에게 적나라한 실례로 그 불가함을 해석해준거라면 정곡을 찔렀다고 할수 있겠다. 세상의 그 어떤 이념과 주의도 무수한 생명을 짓밟는 대가로 이루어져서는 안된다는 호소이며 진정 인민을 위하는 정당은 자신의 잘못을 시정할수 있는 도량과 흉금을 가지고있다는 위안이며 오늘의 풍요로운 삶이 절대 쉽게 온것이 아니라는 경종이기도 하다.  력사의 진실은 덮을수도 덮어서도 아니된다는 도리를 이 소설은 예술적진실로 서술하고있다.    맺는 말 지금까지는 이 소설의 줄거리와 인물들의 사회적속성 및 표현하고저 하는 주제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았다. 작품의 구조적인 특성이나 인물이나 사건의 전형화 문제 등 아직도 토론해야 할 과제들이 적지 않으나 이 평론의 취지와는 별개의 문제여서 다른 기회에 언급하도록 하기로 한다.   
85    왕바두즈 댓글:  조회:1282  추천:4  2016-02-04
  수필 왕바두즈     나이가 점점 들면서 모름지기 몸맵시를 자주 다듬게 된다. 어쩌면 대학공부 시절의 여동창생이 준 여러번의 충고가 큰 효험을 본 것 같다. "의포단장이라 하지 않아요. 옷 입는 것도 알아야 세상을 편하게 살 수 있는 거예요." 그렇겠거니 여기고 흩어졌던 신경을 좀 모아보니 별로 나쁘지는 않았다. 시답지 않게 대해주던 주위 사람들의 표정이 밝아진 것 같았고 잘은 몰라도 낯선 사람과의 거래도 그때문에 좀 더 잘 되어가는듯 싶었다. 그보다도 자신의 기분이 퍼그나 상쾌해진 것 같았다. 이 좋은 노릇을 왜 진작 하지 않았을가고 저으기 후회까지 하게 된다. 전에도 뭐 그만한 돈이 아까와서가 아니었지만 "젠장, 이제 뭐 또 장가들건가. 그 돈이면 술이나 먹지."하고 등한히 지내버린 것이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이 세상을 배포유하게 살아갈 수 있는 하나의 힘이 의포에도 있었던 것이다. 적자생존은 우주의 불변의 원칙이고 철리이다. 인류문명이 고도로 발달된 현시대에서 제공(济公)식의 자만자족은 통하지 않는다. 아무리 바른 마음을 가졌다 해도 헌 누데기를 걸치면 NO,상대도 하지 않는 것이 오늘의 실정이다. 그러니까 나 좋고 남 편한 일을 마다하는 그 자체가 생존력이 미약하다는 표현이 아니고 뭔가? 친구에게서 들은 얘기이지만 이런 우스운 일이 있었다. 한 할머니가 장년이 된 아들과 말다툼을 한 한족사람을 찾아가서 시비한다는 것이 단통 "왕바두즈"부터 퍼부었다고 한다. 중국어를 아는 사람들은 이 욕이 얼마나 큰 욕인줄은 모두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중국 사람들은 오쟁이 진 사람을 "왕바" 즉 "자라"라고 한다. 중국인들이 그 욕을 노상 입에 달고 있는 것을 목격한 할머니는 그것을 머리 속에 꼭 기억해 두었다가 긴하게 한번 써먹은 것인데 구경 어느 정도의 욕인지는 그 할머니도 모르는 일이었다.  욕을 얻어 먹은 한족이 아무리 해도 억울하기만 했다. 세상에 이럴 수가 있느냐 말이다. 아무리 부모의 눈에 자식은 영원한 어린이라 하더라도 사람이 살아가다보면 혹간 주먹도 오갈 수 있는 것인데 입부림 한번에 "왕바두즈"를 먹어야 하는 이유를 찾을 바 없었다. 그래서 수두룩한 울분과 불만을 가지고 젊은 주인과 무릎 맞춤을 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일종 오해로 빚어진 것임을 알고 결국 일소로 끝맺을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이다. "부지자 불괴(不知者不怪)" 이른바 모르는 사람을 탓하지 않는다는 중국 속담이다. 아량이 있는 민족이라 할까. 하긴 도무지 하나밖에 장악하지 못한 중국어  단어를 써먹었는데 어떻게 탓한단 말인가? 대국 언어가 하나라도 먹혀들어간다고 너르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문제는 오히려 우리한테 있는 셈이다. 무엇때문에 우리는 이처럼 피동적인 삶을 영위해가는 것인가? 안 입는 것이 도고할 수 없고 모르는 것이 당당한 이유가 될 수 없다. 의포가 꼭 필요하고 유용하다면 한번 좀 다듬어보고 한어가 반드시 수요된다면 가능한 한 많이 배워둬야 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입각점이고 우리가 다채로운 사회에로 활발하게 진출해가는 바른 길이 아닐까. 물론 소농경제상황에서의 어쩔 수 없는 나태와 위촉, 나아가서 자아 봉페와 둔한 반응은 쉽게 양해가 되고 그래서 타매하기도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시장경제에 진입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목석처럼 굳어져서 선자리 답보를 한다면 아무래도 그저 간과해 넘어갈 일이 아닌 것이다. 남을 찍어 말할 필요가 없이 우선 필자 자신부터 시대 발전에 둔감했고 쉽게 적응되지 않는다.기정모식에서 해탈하기 어렵다보니 수두룩한 웃음거리를 만들어 내어 난처해진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다. 전에 베이징에 진출했을 때다. 한번은 숭문문에서 덕승문까지 택시를 타고 가야 할 일이 생겼다. 너른 귀구멍으로 들어둔대로 손을 들어 택시를 세워놓고 기사가 열어주는 문으로 들어가 의자에 점잖게 기대앉으며 "덕승문" 하고 단창을 뽑고 눈을 지그시 감았다. 베이징의 택시는 ‘사람잡이’를 잘하기로 소문나 있었다. 그러기에 그 곳에서는 노련한 ‘타기족’의 스타일이 필요했다. 그런데 관청에 잡혀간 촌닭은 아무래도 숨길 수 없었던 모양으로 생각밖에 많은 돈이 들어갔다. 그보다도 마감에 생긴 문제가 더 난처했다. 택시가 칙하고 멈춰서고 "다 왔소."하는 기사의 하차 재촉이 나올 때까지도 ‘노련한 신사’는 점잖음을 잃고 도무지 내릴 념을 않은 것이다. 아니, 도무지 내릴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벌써 10여분 전부터 도어의 손잡이를 찾느라고 했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차문유리를 여닫는 손잡이만 돌리고 잡아당기고 했던 것이다. 망신이라도 이런 세상 망신이 더 있을까? 기사가 야릇한 웃음을 지으며 열어주는 차문으로 빠져나오면서 나 (노련한 타기족)는 막 백도로 달아오르는 얼굴을 좀처럼 주체할 수가 없었다. (인간이 어떻게 살았으면 도어도 열줄 몰라? 벌거지 같은 인생이 잘난체 하기는...왕바두즈데!) 기사가 속으로 이렇게 욕했을 거라고 생각하니 등뒤가 막 서늘해왔다. 그저 사발에다 물을 떠놓고 거기에 코를 들이박고 자살하고픈 마음뿐이었다. 처음 칭다오에 왔을 때도 이와 유사한 일을 당했었다. 하루 저녁에는 사장이고 부장이고 할 것 없이 한국인이라는 한국인은 단 한사람도 회사에 남지 않고 모두 외출했었다. 그 기회에 베이징에 있는 동생에게 전화를 하려고 슬그머니 사장실에 들어가 충전상태에 있는 벽돌장 같은 데코데를 집어들었다.그런데 아무리 이것 저것 눌러도 도무지 통화가 되어주지 않았다. 그렇게 한나절 도깨비 기와장 번지듯 잡아두드리다가 맥이 진해 돌아나왔는데 꺼졌던 데코데가 열린 것도 몰랐었다. 그때문에 애매한 동포 제씨들이 집단적으로 사장의 야단을 맞은 것은 물론이었다. 사장님이 중국 말을 몰랐기에 망정이지 아니면 단통 "왕바두즈"를 퍼부었을 것이다. 하긴 한국 같은데서는 초등학교 학생들도 다룰줄 아는 데코데를 소위 대학 공부까지 했다는 사람이 다룰줄 모르니 ‘왕바두즈’를 먹어도 결코 억울한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필자로 놓고 말하면 대도시 진출은 큰 수확이었고 동시에 인생의 전환점이기도 했다. 택시의 도어를 여닫을 줄 알았다거나 데코데의 사용 방법을 익혔다거나 하는 것들은 결코 자랑거리가 못된다. 주요한 것은 세상을 씩씩하게 살아가고 인생을 멋지게 다듬는 비결 같은 것을 다소나마 터득했던 것이다. 우리는 남을 원망하고 탓하기에 앞서 자신부터 검토해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가 남의 승인과 존중을 받기 위해 구경 얼마만한 힘을 길렀는가를 곰곰히 되새겨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 힘을 키워야 하는 것이다. 힘이 없기에 눌리우고 업수임을 당하는 것이 아닌가? 멋진 차림새가 힘이 된다면 잘 입기에 노력해야 할 것이고 잘 사는 것이 힘이라면 부의 축적에 게으름 없어야 할 것이며 많이 아는 것이 힘으로 된다면 구지욕에 불 타야 할 것이다. 말하자면 입방아만 찧지 말고 개인이나 집단의 힘으로 되는 모든 일에 행동부터 앞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우물쭈물하다가 나중에 시대와 역사에 도태되어 진정 '왕바두즈"가 되는 그날에는 후회해도 행차뒤 나발 격일 것이다.                                                                                                                                          1999.3
84    타기붐 댓글:  조회:1029  추천:2  2016-01-22
수필 타기붐   우리집은 버스 출발역과 3리 남짓이 떨어져있는데다 버스 종착역도 직장과 역시 3리 남짓이 사이두고 있어 나는 매번 출퇴근때마다 10여 리 길을 걸어다녀야 했다. 우리동네는 워낙 조선족이 많이 집거해있는 까닭(?)에 택시들이 실북 드나들듯 오가고 있었지만 나는 왼눈 한번 팔지 않고 언제나 걸어다녔다.  하긴 돈주머니가 엷은 관계도 없지 않은 것 같다. 남들은 비행기를 타고 베이징, 상하이를 이웃처럼 나도는데 하다못해 인력거에라도 편안히 앉아가고픈 마음이 나라고 생기지 말라는 법은 없을 것이다. 그만큼 정장을 한 신사 또는 섹시한 차림새를 한 숙녀들을 태운 차들이 스쳐지날 때마다 저도 모르게 부러운 눈길을 보내게 된다. 그러다가 그속에 대부분이 다른 누구 아닌 바로 조선족이란 것을 의식했을 떄 도전적으로 씩씩한 걸음을 걷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생긴 것만큼 좁쌀이네.) 그들이 이런 뜻의 눈총을 보내오면 나는 대뜸 속으로  (타기족같으니라구. 며칠이나 우쭐렁거리는가 어디 두고보자) 따위로 맞선을 올린다.  ‘타기족’ 또는 ‘타기붐’이란 말은 내가 만들어낸 것이다. 사전 찾기에만 습관된 사람들이 골머리가 아플 단어임에 틀림없다.  어느 자료에 의하면 한국에서는 매년 수백수천개의 유행어가 생겨난다고 한다. 그것은 그들의 사유가 개방되고 사회가 진보했다는 것을 설명해준다. 그리고 거침없이 즉시적으로 서면에 올리는 것을 보면 그들 문화의 용량과 포섭력을 알고도 남음이 있겠다. 그런데도 응당 따라배워야 할 것들은 고스란히 놔두고 못된 것만 따온 것이 우리의 실정이 아니고 뭔가? 자가용이 많은 한국의 "타기"를 그대로 옮겨왔으니 개천바닥처럼 훤히 들여다 보이는 돈주머니가 거덜나지 않을 이유가 있을까? 확실히 우리는 ‘타기붐’이란 형용에 부끄럽지 않을 민족이다. 독자제씨들도 잘 알고 있지만 우리의 소위 ‘서울’인 연길시의 도시 인구 평균 택시 소유량이 전국 1위란다. 순 소비업종의 기형적인 발전을 두고 매스컴들이 요란하게 떠들어대는 것을 보고 나는 말 그대로 막 메스꺼웠다. 따라서 자신이 어쩔 수 없이 이 민족의 한 구성성원이 되어 있다는 사실에 저으기 부끄러웠다. 이러한 부끄러움은 일상생활에서 너무 자주 부딪치게 되어 슬펐고 또 죄스러웠다. 일전 출근시에 본 일이다. 교외 버스여서 발차시간이 따로 없이 사람이 차면 곧 떠나게 되어있었다. 한 반시간쯤 기다려서 당금 만원이 될 무렵에 여태껏 두덜대며 죽쳐있던 조선족 세사람이 그만 참을 줄이 끊어져서 벌떡 일어서는 것이었다. 인츰 떠난다고 차장이 한사코 말리는 것도 뿌리치고 택시를 타고 간다며 부득부득 내려갔다. 그런데 방정맞게도 그날따라 지나가는 택시마다 사람이 타고 있어 우리의 버스가 떠날 때까지도 그들 셋은 택시를 잡지 못했다. 급해난 그들이 다시 버스에 오르겠다고 사정하는 것을 차장이 단마디로 퇴박주는데 그 말은 천하 절창이 될만 한 것이었다. "당신네 조선족은 달러가 많지 않아요. 그 돈을 다 쓴 다음 내 차를 타세요!" 시내까지 택시는 30원, 버스는 홑수로 3원이다. 그러니까 10배의 돈을 자꾸 주면서 시내를 오락가락하다보면 언제든지 돈이 바닥날 것이라는 타매인 것이다. 또 한번은 회사의 일로 칭다오에서 옌타이까지 택시를 타게 되었다. 차가 움직이기 바쁘게 잰내비같이 생긴 운전수가 싱겁게 말을 걸어오는 것이었다. "저.... 조선족이지요?" "예? 아, 어떻게 아셨죠?" 그때까지만 해도 칭다오인들은 조선족이란 개념을 잘 알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우리의 어조를 듣고는 대개 남방인으로 넘겨짚는 형편이었다. "절강사람인가요?" "복건에서 오셨죠?" 이런 식으로 물어오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이었다. 우스운 얘기지만 그래서 남방인 행세를 하며 돌아다니는 동포들이 더러 있었다. 그렇지만 첫 대면에 직방 조선족이냐고 물어오기는 나로서는 처음 당하는 일이었다. 어떻게 알았을까? 그게 궁금했다. "왜 뭐 장거리를 택시로 가는 손님은 거개가 한국인이 아니면 조선족이니깐 괜히 해본 소리죠.근년에 이곳 택시업은 그들 덕분에 많이 흥성해졌지요." "..." 나는 황련 먹은 벙어리 모양으로 얼굴이 지지벌개져서 한동안 입을 다물지 못했다. 도무지 뭐라고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한것은 목단강에서도 조선족이 없으면 택시업이 곧 저조기에 들어설 것이라는 말을 택시 운전수한테서 직접 들었기 때문이었다. 장성 내외의 관점이 이토록 일치하다는데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물론 여기에는 장성도 가로 막을 수 없는 우리 조선족의 신통한 "타기" 재주가 큰 몫을 담당한 것은 자명한 일이다. 지금 도시나 농촌이나를 막론하고 조선족이 비교적 집중된 지방이면 각종 차들이 줄지어 서있는 것이 하나의 풍경처럼 되고 있다. 무척 안타깝고 또 안스러운 일이지만 단순히 차타기에만 그친다면 그래도 그렇게 실망할 것까진  없다. 한국 국토의 9배가 넘는 동북땅이 비좁아 우리의 차티기 연습장이 관내로 성세호대하게 승승장구로 진출해도 큰 문제는 아닐 것이다. 어쩌면 시간단축 또는 효율제고라는 화려한 명제로 뜻 풀이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더욱 기막히는 일은 차를 타다 못해 인젠 사람 타기를 일삼고 있는 것이다. 땅거미가 지기 무섭게 동네어구에 기다리는 차를 타고 어슬렁어슬렁 술집이나 노래방에 찾아가서 *** 타기를 일삼는 이것도 우리 사회의 하나의 풍경이 아닐까. 사랑을 위해서라면 무방할걸. 단순히 일종 욕망을 풀기 위해 피땀이 한껏 슴배인 금전을 흥청망청 탕진하는 것은 어리석다기보다 일종 악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망한 우리 동포가 어디 하나 둘 뿐인가?! 현존의 세계는 약육강식의 세계이다. 못살면 자연 주눅이 들고 업수임을 당하기 마련이다. 그런만큼 잘 사는 것이 우리 모두의 목적이고 민족의 위상을 한껏 춰세우는 도경이다. 티끌 모아 태산이라는 말처럼 살림을 윤택하게 꾸미자면 억척스레 일을 하고 아끼며 절약하는 길밖에 없다. 한국에 가서 두더지 대접을 받으며 억지로 끌어온 ‘태산’을 뭉청뭉청 떼어던지는 것은 자멸의 길 이상으로 해괴한 것이 아니다. 최저로 우리에겐 아직까지 그럴만한 여유와 실력이 갖추어져 있지 않다. 그래서 묻게 되는 말 "언제 가야 우리의 못난 '타기붐'이 갈아앉을까?!" 대답이 묘연하다. 아마 내일은 또 다른 무슨 타기를 벌릴지도 모른다. 아이구, 사람이 속이 타서 재가 되겠네! 나도 타기붐.............?
83    변소 견문 댓글:  조회:1292  추천:4  2016-01-16
  수필   변소견문   미국견문이오 일본견문이오 하는 글들은 많아도 못난 나처럼 변소를 보고 잘 알았노라고 으시대는 사람은 아마 이 세상에 다시 없을 것이다.  좀 구차한 소리 같지만 변소의 학문에도 따져보면 재미있는 것들이 더러 있다. 한국에서는 변소를 점잖게 화장실이라고 부른다. 뭐 '변소'라는 낱말이 일본 오랑캐들의 발명이라고 하던가. 사무라이 궁둥이에 뭉개진 36년만을 생각해도 이가 갈리고 밸이 터질 노릇인데 '변소'따위마저 고스란히 남겨두어 괴로움을 덧씌울 수 없다는 것이 반도인들의 사유이다. 영국거나 프랑스거나 어느 나라 것이든 다 되어도 왜놈들 것만은 절대 안된다는 오기이다. 그래서 머리를 쥐어짜서 고안해낸 것이 '화장실', 그런데 여기에도 문제는 적지 않다. 여인들이 얼굴을 멋지게 다듬는 곳도 화장실, 세상 뜬 억울한 인생을 하늘로 보내주는 곳도 화장실인데 변소까지 중뿔나게 '화장실그룹'에 가입한다면 언어혼란이 일어나지 않을까 싶다.  "여보세요. 화장실 어디 있죠?" "이눔아. 여긴 밥 먹는 고장이야. 뒈질려면 썩 나가" 단통 주먹이 날아올지 아니면 "아이구, 쪼글쪼글한 나그네가 화장실은 왜 찾아요?" 식으로 우롱을 당할지도 모른다.  하여튼 촌넘인 필자에겐 아무래도 '변소'가 더 익숙하고 친근하다. '뒷간'이라는 고유어로 환원하지 않을바에는 우리모두에게 이미 보편화된 변소라는 이름을 그대로 두는 것도 괜찮지 않나 하는 생각이다.  그건 그렇고  변소라는 것이 누구에게건 친근과 호감을 안겨줄리 만무하지만 필자의 경우 변소는 일종의 공포를 자아내는 원천이기도 하다.  전에 베이징의 팔달령에 올랐을 때의 일이다. 삼복철이라 숨이 쿡쿡 막히게 무더웠다. 동이로 흘러내리는 땀을 쉴새없이 훔치며 가파른 길을 오르다가 길옆에 한무리의 양키들이 줄지어 서서 아우성을 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성문은 아직 멀었는데 웬 영문일가고 다가가보니 공중변소앞에서 벌어지는 희극이었다. 단체 관광을 온 외국손님들이 단체 배출을 공연하는 중이었다. 곱살하게 생긴 아가씨 하나가 변소 출입구에 두다리를 떡 뻗치고 서서 입소료를 받고 있었는데 양키들에게 잔돈이 없었던 모양으로 사환군 비슷한 '머스마'가 뻔질나게 주위 가게들에 다니며 잔돈으로 바꿔오군 했다. 그래서 자연 출입이 늦어졌는데 뒤에 선 손님들은 배가 터진다고 야단들이었다. 이런 와중에도 네것내것을 딱 가르는 서양넘들의 원칙이 얄밉기도 했지만 그보다도 돈에 눈이 빨개 남의 사정도 봐주지 않는 그 아가씨가 더 민망스러웠다.  "먼저 들여놓고 나중에 돈 받으면 안되우?" 보다못해 싱겁게 한마디 지껼였더니 그 대답은 아주 명언이었다.  "아니라구요. 이것들은 제 좋은 노릇을 끝내면 즉시로 입을 쓱 닫는 족속들이예요." 이 말의 진실성 여부에 대하여 필자는 의논할 자격이 없다. 아무렴 팔달령 같은 어마어마한 유람구에서 매일 외국인들과 접촉하는 그 아가씨의 체험이 퍽 심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처럼 굉장한 드라마를 보여주는 그 현장만은 썩 아름다운 것이 못된다는 것쯤 경험으로 잘 알고 있다. 맨 먼저 구린내가 화살마냥 코를  찌른다. 다음은 지뢰를 피하듯 오물을 살펴야 한다. 이쯤이면 그래도 괜찮은 셈이다. 아무튼 급한 일을 해결하는 것이 급선무이니깐. 보다 희한한 메뉴는 그 뒤에 있는 것이다. 칸막이 문을 열고 들어서면 서든 앉든 두눈과 평행을 이루는 맞은쪽에 이 세상에서 가장 적나라하고 생동한 성문화가 새겨져있는 것이다. 그림과 문자가 상부상조한 그것은 중국인들이 베풀 수 있는 손님에 대한 가장 친근한 서비스가 아닐까 싶다. 하신에 가해졌던 압력이 서서히 물러감과 더불어 단 시각적으로만이라도 성적향수 내지 만족(?)을 받으라는 일종 배려가 아닐까. 이런 식의 관심은 청도에서도 한번 겪었다.  어느날 친구들 넷이서 청도맥주 한상자를 따치운적이 있었다. 게트림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던 나는 불시에 아랫배가 터질듯한 느낌을 받았다. 무작정 문을 막뛰어나갔다. 백미터 속도로 허둥지둥 달리니까 사람들은 머리가 잘못된 놈팽이쯤으로 여기고 걸음을 멈추고 재미있게 구경들 하고 있었다.  "변소, 변소 어디 있소? 아니쿠 나 죽는다." 아무나 붙잡고 물었으나 변소가 어디에 있는지 아는 사람은 단 하나도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는지 알바 없고 응당 있어야 할 변소는 눈에 띄우지를 않았다. 그저 숨이 꼴깍 넘어가는 느낌이었다.  (오늘 이렇게 맥없이 희생되는구나. 아, 불쌍한 이내 신세야.) 눈앞이 가물거림을 의식하며 체념에 빠지고 있을 때 문득 병원간판이 실눈속으로 비집고 들어왔다. 하느님 맙소서, 오줌에 막혀 죽으라는 법이 없다더니 중국속담 그른데 없구나! 솔직한 말이지만 그날의 배설은 내 일생에서 가장 시원하고 통쾌하고 또 행복했던 한차례 배설이었다.  도시 건설 규정에 의하면 큰 거리에서는 5백미터를 사이두고 변소를 세워야 한다. 그러나 규정대로 집행하지 않는 것이 지방 관료들의 관리이고 습성이다. 그들은 무엇에나 극치에 달하고저 한다. 음식에는 맛의 극치, 시달굼에는 고통의 극치, 지어는 배설에도 통쾌의 극치를 부여하려는 것이 아닐가. 독자제씨들도 한번 필자처럼 그런 경우를 당해보시라. 그러면 당신께서 여태껏 본능적이고 물리적으로 진행해왔던 배설도 사실은 하나의 향수라는 것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물론 이것은 우스개소리이다. 아니면 필자의 맥주배가 하루새에 사라질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요즘 볼라니까 변소문화가 점차 사회로 연장되어가는 느낌이 들어 저으기 불안해진다.  지금은 눈만 뜨면 무섭게 돈이 들어가는 세상이다. 명목이 잡다한 비용이 변소의 입소료처럼 주머니가 텅 빈 백성들을 괴롭힌다. 아파트 하나 유지하려 해도 어깨가 휘어지는데 밖에 나가면 이런 저런 비용때문에 사람이 살아갈 의욕이 싹 잃어진다. 이제 겨우 배에 곱이 찬 동네에서 관광지 티켓은 미국보다 더 비싸고 뭐라도 주먹만하게 만들어만 놓으면 돈을 내놓으란다. 내가 겪은 가장 희한한 수금은 기차표을 살 때 에어컨비가  2원 붙은 것과 노래방에서 문턱세를 30원 받은 것이다. 자전거든 뭐든 세워만 놓으면 보관비 받는 사람이 바로 나타나고 열차에서는 식당차에 의자비란 것도 있었다.  이보다 더 한심한 일은 변소에 새겨진 성문화가 점차 세상으로 당당하게 전파되어 나가는 것이다. 오늘날 전국의 골목마다에 성병치료광고가 나붙어있다. 오죽하면 어느 한 문인이 성병치료 광고가 게딱지처럼 들어붙은 전선대를 두고 '성의 유린을 받는 불쌍한 전선대'라고 개탄했겠는가. 여관이든 술집이든 노래방이든 아가씨들이 무더기로 손님들을 유혹하고 인터넷이나 티비에서도 눈뿌리 모자라게 공공연하게 성을 드러내고 있다. 옷을 다 벗으면 섹시하다고 칭찬하고 유표하게 튀어나오면 불륨이 좋다하구 도대체가 말릴 수 없다.  물론 구데기 무서워 장을 못 담그는 법이 없듯이 개혁개방은 계속 끌고 나가야 한다. 문제는 이 나라를 끌고 가는 관리들의 사업자세이다. 업무를 처리하려고 유관인원을 찾자면 거리의 변소 찾기만큼 어렵다. 이러구서야 어찌 나라의 번영강성과 인민들의 행복한 생활을 운운할 수 있겠는가? 문제의 관건고리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82    분노 뒤에 찾아드는 사색 댓글:  조회:681  추천:1  2016-01-07
분노뒤에 찾아드는 사색 리주천선생의 단편소설 "땅땅버버리"를 읽고   “땅땅 버버리”!   너무 너무 생동한 화면이였다. 제목이 립체적이고 작품 전체가 추호의 가미도 없는 스케치였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분노가 터진다.   에익, 망부석같은… 그만한 실패에 뭐 “혼이 언녕 죽”었다고? 그 론리,그 추리대로 하면 이 세상에 송장이 되여 살아가는 인간이 수없이 많을것이다.   삶이라는것이 고행일진대 그것이 달갑게 받아들여지고 거기에 거꾸러지지 않을때에야 인생은 비로서 뜻있고 보람찬것이다. 한국의 정주영옹도 수천만원의 빚더미에 주저앉았더라면 오늘의 현대그룹이 나질수 없는거고 “우선 빚쟁이가 되여봐야 부자가 되는 비결을 알수 있다”는 철학도 펴내지 못했을것이다. 그런 용기와 도량이 없다면 남을 웃기게 작품의 주인공으로 등장하지도 말아야 하는것이다. (안그렇습니까? 김동수형님)   그러나 일단 분노를 터뜨리고보니 인차 심각한 표정이 되지 않을수가 없다. 무엇때문에 이 나라 이 땅덩어리에서는 천시가 주어져도 지리와 인화가 뒤받침되여주지를 않으면 많은 경우 실패의 고배를 마셔야 하는건가? 단지 우리가 “닭무리에 끼인 학”이기때문인가? 아닐건데…”닭”들도 “동수형님”과 꼭같은 봉변을 당하는것을 우리는 너무나도 많이 보아왔던것이다. 무언가 꼭 다른 원인이 있을것이였다.    “땅땅 버버리”는 무언중에 이 점을 착안하고있는것이다.   “동수”의 경우는 행운의 신이 추파를 보냈었다고 말해야 할것이다. 짠지장사를 나왔던 사람이 경기 좋은 음식점을 경영하게 되였으니깐. 개혁개방정책과 공백이라는 천시요소가 갖추어진것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입도 함박만큼 벌어졌던것이다. “…큰 맘 먹고 시작했는데 일이 될것 같구만…” 그만큼 시장경제학적인 안광으로 보면 앞날이 환히 내다보인다는 얘기로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시경은 썩 길지 못했다. 처음에는 쏠쏘리패들이 외상놀음으로 애를 먹이더니 이어서 경쟁 적수가 나타나고 뒤따라 공상국이라는 관청이 생떼를 먹이고 나중에는 진짜 실력파인 깡패가 대두하여 음식점을 망가먹기에까지 이른다.    자명한바 작자가 노린 점도 바로 상기한 소위 중국의 “실정”을 백일하에 폭로하자는데 있는것이다. 필자 자신도 개체호노릇을 1년간 해본적이 있어 잘 알고있지만 중국에서 그 어떤 장사를 하자면 공상, 세무, 공안, 깡패 등 4대 요소를 끼고있어야 비로소 운영이 되여가는것이다. 경영수단이거나 서비스같은것은 물론 차요적인 것이다. 여기엔 “황제가 멀다”는 운운도 성립되지 않는다. “황제”를 가까이 모시고있는 베이징에 가보아도 꼭같은 도리로 돌아가고있었다. 문제는 우리나라의 법제건설이 아직까지 멀었다는것으로밖에 달리 해석할 방법이 없다. 제정한 법은 허다히 많다만 그것을 제대로 집행하는 질서가 보장되여 있지 못하니깐 경제가 기형적으로 운행되어가고 따라서 사람들의 심리도 비틀어져간것이다.   그러니 “동수”의 실패는 필연적이였다. 모난돌 정 맞기로 지리와 인화의 우세가 없이 단지 천시만을 믿었던것은 우둔한 처사였다. 게다가 악성순환으로 형성된 나약한 국민성의 작간으로, 매번 역경에 처할때마다 법에 의거할 념은 못하고 소극적으로 타협하는 방향에로 나아간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부정기풍이 쉽사리 싹 트고 생성할수 있는 하나의 온상을 발견할수 있는것이다.   우에서 우리는 “동수”가 실패할수밖에 없는 사회적요소들을 파보았다. 두말 할것 없이 “동수”가 결과적으로 실패의 운명을 가지게 된것은 그 자신의 심리소질, 문화층차, 사회적응성 등 자체요소와도 밀접한 련관성이 있는것이였다.    무었보다도 땅을 떠나는 “동수”의 최초 동기부터 불행의 근원이 묻어있는것이다. “그 땅이 내 배를 위안할수 있었던들 세상물정에 눈 어두운 내가 이렇게 객지에서 허둥거리겠소.” 하는것처럼 무엇을 어떤 순서로 어떻게 해보겠다는 주밀하고도 장원한 계획이 없이 물덤벙술덤벙으로 고향땅을 등진것이다. 짠지장사를 하다가 음식점을 하면 괜찮겠다는 생각이 미쳐 냉큼 덤벼 들고, 어찌보면 이러한 성격특징이 우리민족의 통병이 아닐가.  한족들은 집 한채를 지어도 몇년간 돈을 벌고 무엇을 우선 사들이고 무엇을 후에 하는가를 면밀히 타산을 한다. 우리민족은 무엇이나 눈앞에 닥쳐서야 응부하고 그것도 심각한 반성과 타산을 할 사이없이 총망히 덤벼드는것이다.    “동수”도 음식점을 차리기전에 그것의 성공여부를 잘 따져보고 관청이나 깡패들이 시끄럽게 굴때 어떻게 대처해야 한다는것을 조금이라도 연구했더라면 그처럼 속수무책이 될수가  없을것이다. 반대로 말할때 “나”란 사람이라도 만나지 못했더라면 “쏠쏘리”패들한테 벌써 망하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맹목성과 주먹구구가 우리에게 되안겨준 가장 훌룡한 례물이라고 말해도 가히 잔인하다고는 말할수 없을것이다.   다음은 “동수”의 성격기질문제인데 남을 너무 믿는것도 그가 최종적으로 빈털터리가 되고만다는 예언이 되는것이다. 장사군은 제 애비도 속인다는 말처럼 복잡한 세상을 살아가자면 필요한 거짓말도 더러 할줄 알아야 하는것이다. 더우기 상인의 경우는 자신의 리익이 침해당하는 일에 손을 대는것은 만성자살이나 다름없다.    “동수”는 “옆집 로반나그네”의 가련한 소리에 속아 그 집에 가서 일을 봐준다. 결과 명성도 손님도 모두 빼앗기고만다. 시장경제속에서 경쟁적수는 윈쑤와 다름이 없다. 내가 너를 죽이지 않으면 네가 나를 먹어치우는 생사관두에 경쟁 적수를 돌봐주는것은-극단적인지는 몰라도-백치의 행위나 다름없다.    하긴 그래서 결국 옆집에서 쳐온 뺨도 맞은거고 파산도 당하고 만것이다. “동수”에게는 더없이 보귀한 경험이 될 일이건만 “혼이 언녕 죽”었으니 더 할 말도 없다. 하물며 “동수가 다 음식점 꾸리다니?.” 하는 의문까지 곁들어 나왔으니 말하면 눈물밖에 될것이 없는것이다.   (제발…이런 사람들은 나오지도 마십시오. 민족의 수치입니다. 그리고 진정 능력있는분들도 세밀한 계획표를 꾸미고 나오십시오. 무정한 현실은 결코 패자를 동정하지 않습니다.)   정감으로 리해하고 받아주기에는 훌룡한 소설이다. 또 흑룡강신문 “진달래”부간에 발표된 적지 않은 소설들과 마찬가지로 민족을 살찌우고 키우기에 없어서는 아니될 정신식량으로서의 소설이다. 그래서 민족천대시하라는 주제와는 어울리지 않는 엉뚱한 냄새가 안받침되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총적으로 긍정하고싶은 마음이다.   * 본 평론은 흑룡강신문 “진달래”부간에 발표되였음.
81    변혁기의 인생을 감오하며 댓글:  조회:853  추천:1  2015-12-26
변혁기의 인생을 감오하며 김운룡선생의 단편소설집 "사랑의 그림자"의 인간상 고찰   김운룡선생하면 흔히 력사학자 또는 력사소설가로 우리에게 많이 알려져 있다. 사실상 김운룡선생의 저서와 창작생애를 살펴보아도 이러한 견해 내지 정의는 크게 틀리지 않는다.  그만큼 항일투사의 자손으로서 김운룡선생은 항일을 둘러싼 우리 민족의 이민사, 수난사, 투쟁사에 남달리 집념하고 있으며 따라서 김학철, 리근전, 윤일산, 김송죽, 김길련 등등과 더불어 민족력사 바로 알기와 민족의 뿌리의식을 고양하는데 많은 힘을 이바지해왔다.  그리고 더욱 보귀한 점은 환갑을 넘긴 김운룡선생이 창작관성에 얽매이지 않고 시야를 새로 정비하여 한창 대하 력사소설 "광야의 아리랑"의 창작에 무비의 정력을 몰붓고 있다는 사실이다. 작가는 시대와 사회의 산물이라던가. 특히 작가론의 경우에는 그 작가가 태여나게 되는 시대배경과 사회환경을 무시할수 없다. 독립운동지사의 자손이라는 운명은 김운룡선생으로 하여금 선조의 발자취를 더듬지 않을수 없게 하였고 의식형태에 관여하는 국가공무원이라는 경력은 그로 하여금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작업에 참여하지 않을수 없게 하였다. 1979년,36세의 나이에 처녀작 "한 실련자의 눈물"(한문)로 문단에 데뷔했다는것은 좀 늦은 감도 없진 않으나 그해가 바로 이 땅에서 좌경사조를 점차 청산하기 시작한 해빙기라는 점으로 미루어보면 "력사소설가 김운룡"의 뒤늦은 탄생은 별로 해괴한 일이 아니다. 필경 그 이전의 살벌했던 년대에는 금기도 너무 많았었다. 실제로 "력사"나 "민족"이란 테마는 너무도 민감하고 묵중한것으로 남다른 경력, 견식이나 노력이 없이는 운운하기도 어렵다. 다른 문학쟝르보다 기술적인 문제 시스템이 많을수 밖에 없고 그런만큼 상대적으로 더 길고 어려운 작가적인 고행을 겪게 된다. 하기에 우리는 대한민국림시정부와 조선의용군이 활동한 지역을 샅샅이 답사한 김운룡선생을 만나게 되고 따라서 김운룡선생이 작가수업의 실행으로 굵직한 력사적품 사이사이에 현실주제로 펴낸 단편 편린들을 접하게 된다. 지금 필자의 앞에도 력사무드의 주류에서 삐어진 "편린"들의 묶음인 "사랑의 그림자”가 놓여있다. 물론 이것이 확실히 작가적인 준비작업으로 이루어진 "편린"이냐가 논란의 게제가 될수도 있다. 하지만 김운룡선생의 전반 작품활동에서 현실주제의 작품들이 적은 비중을 분담한다는것은 의논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우리에게 중요한것은 그게 아니다. 김운룡선생에게도 독자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현실주제의 작품들이 적잖게 있다는 사실에서 새로운 흥분점을 발견하게 된다. "사랑의 그림자"는 1983년부터 1989년까지의 작품을 수록하고 있다. 주지하는바 이 시기는 맞춤하게도 중국사회가 변혁기로 막 들어선 시기였다. "전형(转型)"이라는 단어가 난무할 지경으로 정치나 경제계는 물론 문학도 그 소용돌이에 말려들지 않을수 없었다. 여러가지 문학사조가 나타나고 색다른 문학주장들이 제기되었다. 20세기 80년대는 말 그대로 다시 돌이켜보게 되는 획기적인 시기였다. 물론 재래로 시대변천에 둔한 반응을 보여준 민족문학의 고루한 인습때문에 동안을 두고 억지로 따라간 약점도 보아내게 되지만 그러나 우리는 김운룡선생의 작품들에서 다른 곳에서는 대면한 적이 없는 생경한 인물, 특이한 인물, 개성적인 인물들을 많이 만나게 된다.   이상형의 생경한 인물 대체로 이 부류의 인물들을 생경하다고 말하게 되는것은 지금의 시각으로서는 리해가 잘 닿지 않기 때문이다. 그만큼 이러한 주인공들이 모순이나 갈등이 설정되여 있지 않은 상황에서 자기의 주장을 역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은주와 선주"(1984년)의 주인공 은주는 산촌의 교육사업에 헌신할 결의가 되여진 처녀이다. 어려서 장백골에서 자랐던 은주는 학교가 없고 선생님이 없는 시골 어린이들의 설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있다. 하기에 사범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곧바로 멀동학교에 오게 된다. 여기까지는 별 무리가 없다. 문제는 선주가 남자친구를 찾아서부터 생긴다. 로처녀로 늙어가는 선주를 사랑밖에 모른다고 타매하는가 하면 공안국에서 사업하는 애인을 멀동으로 조동시키면 되지 않느냐며 가능성도 없는 충동질에 신경을 몰두한다. 나아가서 "난 멀동산에 사랑을 심을래." 하는 혁명적랑만주의를 펼치기도 한다. 인물형상이 극단화에로 나아간 전형이다. 다행히 결말이 희극적으로 반전이 되면서 최미자선생이 림업부문에서 사업하는 남편과 함께 멀동으로 오는가(합리성 내포) 하면 은주에게 합당할 법한 "박창혁"이란 남자선생도 등장한다. 사실 작가의 설계도에는 이상이 없다. 산재지구의 민족교육은 시종 정부나 민족유지의 골치거리였다. 금방 정치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인민과 사회주의를 위해 복무한다."는 기치를 내건 문학도 당연히 거기에 주목하게 되였고 따라서 관성적인 작법으로 전형이라는것을 수립하게 되였다. 그 시절에 흔히 그랬던것처럼 은주도 전형화가 지나쳐 코미디언같은 별종이 되고있지만 이 인물은 중국 사회가 서서히 변화되여가고있음을 깨닫게 하는데 모름지기 일조하고 있다. 1984년이면 농촌에서 이미 도급제를 실시하고 도시에서는 연해개방도시를 가동한 시기였다. 농민들은 많은 시간을 가지게 되였고 도시는 인구유동의 관제를 늦추어 상대적으로 자유로와지게 되었다. 중국농촌인구의 역성장은 이때로부터 시작되였다고 볼수 있다. 그러니까 이 소설에서 나타난 문제는 어쩌면 현재에도 우리가 안고있는, 또 풀기 어려운 난해한 문제가 아닐가 싶다. "탑"도 그런 쪽으로 논리 가닥을 뻗고 있다. 25년간이나 촌당지부서기 사업을 해온 조성구노인에게는 남에게 말 못할 아픔이 있다. 25년간 룡포동네는 아무런 변화가 없이 계속 쪼들리고 가난한 생활을 이어왔다. 민족학교도 그냥 초가집이다. 그것이 사회체제가 빚어낸 악과라는것을 조성구노인은 젼혀 모르고있었다. (우리 조상들이 대를 이어 쌓아온 탑이 무엇인지 알기나 하나?) 식으로 민족사회라는 좁은 테두리속에서 문제를 찾기 때문에 그는 고향을 떠나는 시각까지도 답안을 얻지 못하고 있다.  어쩌면 사회조직의 말단에 위치한 조성구노인도 책임을 져야 할 일이였다. 허나 "남처럼 이렇게 저렇게 돈을 벌수 없는 처지다. 그저 아껴 먹고 아껴 입는것으로 돈을 모아야 했다."는 조성구노인에 대한 묘사에서 지나온 우리 사회의 비극을 우선 반성케 한다. 그렇지만 조성구는 참회를 할 대신 오로지 민족사회에 불만하는것으로 안주하며 "닭알을 한알 두알 모아서 팔고 돼지를 키워 팔고 그리고 김치장사를 하고 약재를 캐서 한푼두푼 모으는.." 고리오식 구두쇠생활을 영위한다. 그것을 촌학교 재건을 위한 의식적인 행위로 간주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소설에서 우리는 조성구가 꼭 학교재건에 나서야 할 아무런 리유와 계기를 발견할수 없다. 그러니까 조성구는 한낱 범인에 불과하다. 그더러 "민족의 탑" 운운을 시키는것은 어딘가 형이상학이다.  이러한 조성구의 형상은 이 소설이 처했던, 개인주의와 자유화가 고조에 치달았던 1988년 좌우의 사회현실과 상당히 외곡되고 있다. 어쩌면 그렇다는 사실이 이 인물의 존재의 합리성을 다소 잉태하고 나아가서 우리에게 쓸쓸한 충격을 주고있는지도 모른다. 여하튼 그 시절에나 있을 은주나 조성구에게는 많은 의문이 묻어있다. 지나간 력사의 매듭을 헤치는 실마리의 인간상이 아닐가 싶다.   특이한 이야기와 인물의 특이화 평론인의 감각은 이 부류의 작품들을 한마디로 렵기적인 성격을 띠였다는 판단을 내리게 한다. 그전도 아니고 그후도 아닌 바로 20세기 80년대 중기의 문단이 다원화로 진입했던만큼 이런 성격의 소설도 비로서 출현이 가능케 되였던것이다.  그리고 재미있는것은 시간적으로 폭이 많이 벌어진 상기한 "리상형의 생경한 인간상"을 묘사한 작품들과는 달리 이 부류는 1986년과 1987년 2년 사이에 집중되였다는것이 주목된다. 우에서 이미 언급했듯이 80년대 중기의 문단은 활발한 양상을 띠고있었다. 상처문학, 반성문학, 개혁문학이 절대적으로 주류를 이루었던것이 그전의 문단의 상황이였다면 80년대 중반을 분수령으로 문단은 점차 다양화로 매진하였다. 한편 금전의 충격, 의식형태의 분화 등으로 하여 혼란한 국면도 조성되였다.  문학인들은 급변하는 시대를 나름대로 읽고 리해하면서 예술상상과 예술기교를 남김없이 발휘하여 그것을 반영하기에 급급했다. 우리 문단도 물론 주류사회와 주류문단의 충격을 받을수밖에 없었다.  김운룡선생의 경우 이 시기에 정부주관의 무역업에 종사하고 있었기때문에 소설에서도 자연히 경제문제에 눈길을 돌리고 있다. 하여 우리는 이런 소설들에서 변수가 많은 기업가들의 특이한 이야기들과 만나게 되고 금전으로 인한 갈등이나 인간관계를 통해 불쑥불쑥 나타나는 색다른 인간상을 접하게 된다.  "황금세계"의 백기준은 이중성격을 가진 인물이다. 성위서기의 부름까지 받을만큼 부자가 된 그의 눈에 조강지처 봉녀는 행시주육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그만큼 봉녀의 행색도 좀 구차하다. 배운 것이 없어 말을 함부로 하고 몸 거두매를 하지 않는다. 그에 비해 순임이는 청순하기만 하다. 젊고 예쁠뿐만 아니라 공장을 그대로 맡겨주어도 될만큼 경영재능도 갖추고 있다. 백기준의 마음이 순임이쪽으로 쏠리게 되는것은 당연한 일이고 순임이도 그것을 원하고 있다. 그렇지만 백기준은 결국 사랑없는 혼인을 고집하게 된다. "아지 못할 사랑이여"의 강상호는 더 나아가 도인같은 인물로 형상화되였다. 그는 안해 월옥이가 윤칠이와 데이트하는 장면을 목격하고도 참을수 있는 인간이었다. 그리고 군희의 유혹을 물리칠수 있는 심리적 준비가 되여있다. 오직 "모범공장장"답게 사업에만 몰두하는 로보트식 생활만을 탐닉한다. 결과 월옥이의 배반을 당하고 군희마저 잃게 된다. 이 소설은 월옥이라는 인간상을 상당한 깊이로 그리고 있다. "성체육학교 예술체조지도원"이라는 신분은 그녀에게 랑만과 풍류를 즐길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주었다. 하지만 템포를 맞추지 못하는 강상호때문에 월옥이는 단연 월선을 단행한다. 그것도 남편한테 내놓고 론쟁할수 있을만큼 당당하게 단행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안이나 타매같은 흔적은 꼬물도 찾아볼수 없다. 오히려 여러 입을 통한 변명이나 동정이 사처에 널려있다. 분명 질책의 분동을 강상호쪽에 올려놓고있는것이다. 상기 두 소설에서 공통점은 순임이나 군희를 통해 시대변천에 따른 새로운 혼인관, 애정관을 제시했다는것이다. 물론 당시의 실정에서 순임이의 로골적인 유혹이나 군희의 당돌함은 어색한 느낌도 없지 않다. 그러나 문학적인 안광으로 볼때 백기준이 성격기질상 두 선을 긋고있기 때문에 순임이가 끼여들 틈이 생겼고 강상호는 사랑에서 시종 피동적인 지위에 서있기에 군희의 접근을 불러오고 그뒤에 따르는 반감도 재촉했다는 해석 역시 그럴듯 하다고 본다.   "압록강의 넋"은 제3자가 등장하지 않은 유일한 작품이다.  이 소설은 전통적인 소설구조에 많이 치우치는듯한 비환리합의 고루한 사랑이야기를 담고있다. 향숙이는 800원의 빚때문에 백치의 색시가 되고 밤마다 시고모의 감시하에 옷벗는 수모를 당한다. 그리고 "우숙이 오빠"와의 사랑도 상대방 가족의 반대로 실패하는 불행한 녀인이다. 이 작품이 돋보이는것은 향숙이가 이런 운명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짠지장사로부터 시작해 "석동호텔"의 지배인이 된다는 이색적이고 아이러니한 운명그라프때문이다.  지금 보면 별로 놀랄 일도 아니지만 가령 우리가 정말 영화에서처럼 1987년으로 가볼수 있다면 그때 이런 이야기는 전설과 같은 충격을 주게 된다는것을 알수 있다. 역시 향숙이도 하나의 대상물이 되여졌으며 사회중심이 경제에로 전환된 시점에서 그녀의 특이한 형상과 함께 한 시대를 떠미는 역할을 충분히 감당하였을것이다. "구름의 벽"도 혼인등기까지 한 녀자(안해)와 리혼도 하지 않고 다른 녀자를 안해로 데리고 산다는 아라비안나이트와 같은 이야기를 기술하고 있다. 두말할것 없이 얼마 안되여 금전으로 인해 부부간에 감정위기가 닥치게 되고 맞춤하게 전에 버림받은 녀자가 한 인물이 되여 기적같이 나타난다. 이제는 계월이같은 인물의 느닷없는 출현에 크게 놀라지  않아도 될것 같다.   시대와 맥박을 함께 하는 개성화된 인간상 어쩌면 이 부류가 전반 작품집의 주류부분이 아닐가 싶다. 문학이 현실생활의 반영이라고 할때 초랑만주의나 초현실주의보다는 사회와 시대에 밀착된 작품이 그래도 더 큰 감동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그리고 우리가 한 시대를 정확히 료해하는데도 많은 도움이 된다. 그것보다도 당시 문단에서 유행되였던 사조나 주장들이 혹은 원형대로 혹은 창작수법으로 녹아들어 우리 앞에 나타나고있는것이 신기스럽기만 하다.   "인심"은 그 창작년대(1983년)가 귀띔해주고 있는것만큼이나 과시 상처문학의 범주에 들수 있는 작품이다.  전반 줄거리에 꿰여진 아픔들은 단 하나의 상처에서 오게 된다. 27년전 "나"의 아버지가 의외의 사고를 당하면서부터이다. 입원치료를 거치자면 백원은 있어야 했지만 그 돈을 도무지 구할수가 없었다. 대대당지부서기였던 아버지가 고지식하게 무당 만근이란 부당하다고 상급에 사실대로 회보한 보응이였다. 다행히 군관인 외삼촌이 결혼비용으로 부친 돈이 마침 도착해 아버지는 병치료를 할수 있게 되였다. 그러나 그 일이 빌미가 되여 “우리 가정”의 아픔이 곧바로 이어진다. 우선 첫날 이불도 없고 상도 받지 못한 외숙모가 앙탈을 부리며 떠나갔고 뒤이여 외삼촌의 새살림을 보러 갔던 어머니가 쫓겨오고 아버지의 상사와 나의 희사에도 외삼촌의 그림자는 나타나지 않는다. 이뿐이 아니다. 어머니의 회갑상을 마련하려고 "우리 내외"가 시내로 갔던 김에 외삼촌네 집에 들러보니 그날은 마침 외삼촌의 큰딸 용순이의 잔치날이였고 청첩도 받지 못한 불청객들은 거지와 같은 구박과 대접을 받게 된다. 저주 받을 그 년대의 자그마한 사건 하나가 둘도 없는 혈육사이를 20년간이나 벌려놓고있다. 이 소설의 인물들은 하나같이 생동하고 실감이 난다. 맏이인 "나"는 무던하면서도 주대가 있다. 어머니는 우리 민족 녀성상인 외유내강형이고 외삼촌은 우유부단하고 안해한테 쥐여사는 전형이다. 가장 잘 다루어진 인물은 외숙모이다. 퉁명스럽고 실리적이며 솔직한 일면도 가지고 있다. 이런 인물들의 부동한 성격이 등장하고 충돌하면서 가난이 결코 사회주의가 아니라는 주제를 유도해낸다. 따라서 새시대에 들어서면서 새롭게 부활한 "쌀독에서 인심이 니온다"는 천고명을 재확인한다.  "곱사등 황말구"는 새로운 아품을 체감하게 하는 작품이다. 지주의 손자로 태여난 황말구는 천대와 기시를 받을대로 받아온 인간이다. 작가는 그의 과거를 의식적으로 회피하고있지만 사닥다리에서 떨어져 곱사등이 되는 사실에서 그 세월의 반인간성, 반사회성을 얼마든지 상상해낼수 있다.  물론 작가의 치중점은 거기에 있는것이 아니였다. 하기에 우리는 장애인이지만 정부의 배려로 기술을 익혀 부자의 꿈을 이루어가는 황말구를 보게 된다. 황말구의 비극적 근원은 어디까지나 불구라는 그 자체에 있는것이라고 소설은 항소하고있다. 동네 아낙네들의 식후 한담거리가 되고 지어 자기가 도와준 봉수한테서도 "...오성구하고 붙었으면 그래도...그렇지만 말구하고말이야..." 하는 멸시의 평을 듣게 된다. 말구에게는 피리외에 친구가 없고 생활동반자 역시 있을수 없다. 웬 사기군 처녀한테 3,000원을 떼운후부터 그는 녀자들을 더 경계하는듯 하다. 그러나 "나”에게만은 예외었다. 봉사 아버지를 가진 나는 남들처럼 황말구를 대할수가 없었다. 아마도 "나"의 부드러움과 선량함이 황말구의 얼어든 마음을 녹여주었던지 그는 용기를 내여 "나"에게 접근해왔고 여러 기회를 리용하여 "나"를 도와주었다. 그 행위는 결코 여느 사람처럼 음특한 마음에서 생겨난것이 아니였다. 인간사이에 서로 따뜻한 마음을 나누고싶었을 뿐이였다. 그런데 그런 행위들이 결국 화를 불러오고 말았다. 황말구는 두 시형에게 얻어맞아 머리가 터지고 "나"도 남편한테 맞고 동네에서 머리카락을 잘리우는 망신을 당한다. 이어 황말구는 나의 청백과 명예를 되돌리려고 결연히 죽음을 택한다. 비극으로 막을 내리는 황말구의 형상을 통해 우리 사회 장애인들의 어려운 삶을 실감케 한다. 원체 동정을 받고 도움을 받아야 할 장애인들이 오히려 기시 받고 박대당하는 사회현실을 질타한것이다. 이 소설은 "장애자보호법"이 나온 바로 그 전해에 창작된 것으로 선각자적 역할을 충분히 발휘한것으로 된다.   "사랑의 그림자"는 다른 류형의 피해자를 등장시키고있다.  산월이는 부모가 도맡아 정해준 혼인으로 하여  병신이 된 성룡이와 살아가는 불행한 녀인이다. 그녀는 밤마다 이어지는 성룡이의 변태적인 발악과 행패를 초인간적인 의력으로 감내한다. 어차피 그녀도 동정을 자아내는 약자가 분명하지만 련민에 앞서 울분부터 터진다. 그녀의 불행은 스스로 자초했다고 판단해도 무방하다. 팔자 타령만 부르며 체념에 빠져 있는 산월이의 형상은 얄밉기만 하다. "병신인데 불쌍해요", "남이 욕해요.죄 만나요." 따위의 낡은 륜리도덕관념으로 자기 행위의 정당성을 고집하는데는 억이 막힐수밖에 없다. 더우기 성룡이가 병이 위중해 병원에 입원한 사이 박털보와 곽천이의 변을 당하고난 산월이가 말도 안되게 성룡이를 출원시켜 데리고 오는 장면에서는 주먹이 불끈 쥐여지기도 했다. 이것이 그 시대 우리 녀인상일가고 생각하면 그저 서러워지고 소름이 끼친다. 한편 도의적인 멍에를 걸머진 산월이의 정조관이 "나"의 출현으로 하여 조금씩 흔들리고 변화되여가고 있는것이 대견스럽기도 하다. 밝은 생활양식이 기대되기 때문이다. 작품집의 표제로도 되여있는것을 보면 작자가 특별히 만족하고 득의하는 소설임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산월이의 형상을 다각적으로 해부해볼 필요가 있다. 어쩌면 작가의 심미취향 같은것을 유인해낼지도 모른다.  솔직히 말해서 산월이는 성룡이를 사랑하지 않는다. "오직 녀자의 직분을 지키고 정절을 지킬 따름이다.". 그래도 그녀는 소리없이 사라지고 만다. 어디로 갔을가? 물론 "그녀는 불구자남편을 버리고 행복을 찾을 녀인이 아니다.". 하다면 그녀가 성룡의 옆으로 다시 돌아올수도 있다는 제시인가? 누구처럼 기적같이 많은 돈을 벌어가지고 와서 성룡이의 병을 고치고 행복하게 살아갈수도 있다는 얘기인가? 작가는 대답하지 않았다.산월이는 그런 확정성과 불확정성을 동시에 가지고있는 인간상이다. 허울뿐인 남편을 위해 일생을 희생할 각오가 되여있는가 하면 외간남자인 "나"에게 마음을 내여줄 여유도 있다. 모순당착한 산월이의 형상을 통해 우리는 변혁기를 살았던 우리 민족 녀성들의 고민과 몸부림을 느껴받을수 있다. 그러니까 사실 산월이의 거처나 앞날이 별로 중요한것도 아니란 말이다.  "노을이 사라진 곳"은 상기 작품들과는 맥락을 달리하는 소설이다. 녀인의 몸체까지 포함한 모든것이 점차 상품화되여가는 현실에서 울고 웃는 주인공들의 삶을 통해 격변기에 어떤 마음가짐과 자세로 림해야 하는가 하는 보편적인 진리를 도출하고 있다. 형민이의 무능이 숙녀를 사창가의 녀인으로 만들었다면 궤변일가. 적자생존의 시대에 살면서 안일을 자랑하고 수동적인 삶을 살아가는 이런 현상에서 전반 민족의 반성을 촉구하는 사색거리가 아닐가. 종합적으로 김운룡선생님의 작품은 매우 활달한 문제를 보여주고있다. 시대감을 지니면서도 초월의식이 뛰여난다. 자기 탐색의 주제를 이 정도로 구체화할수 있는 작가가 20세기 80년대의 새로운 문학에 나타났다는 사실만으로도 관심을 모을만 하다.  * 이 평론에서 "양귀비꽃"은 별종으로 제외하였음을 특히 밝힌다.    *주: 본 평론은 2005년 7월 김룡운선생 편저로 된 작가론 "김운룡과 그의 소설연구"에 수록되었음.
80    두번째로 맞다든 운명의 시련 댓글:  조회:826  추천:0  2015-12-26
두번째로 맞다든 운명의 시련 박옥남의 단편소설 “썰물”(흑룡강신문 1993.4.17 진달래 부간)을 두고   흠집 많은 글 지나치게 비감적이고 체념적인 글이여서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우선 몇가지 의문을 제기해본다.  첫째, 우리민족의 현상태가 과연 소설에서 반영한것처럼 그렇게 처참한가 하는것이다. “썰물”을 읽으면서 필자는 본세기초의 대이민의 장면과 겹쳐지는듯한 환영이 들었었다. 비록 작자의 발뺌이 여러곳 되지만 그 어수선하고 허탈에 가까운 장면은 아무래도 1세들의 전철이라 해야겠다.  다음은 주인공의 행위가 모순투성이이다. 동서의 편지 한장에 만삭이 된 안해로 하여금 도보로 17리 길을 걷게 하고 쇠울타리를 타고 넘게 하는 역사를 시키는 남편이 어쨌던 정상적이 못되는 축이다.  세번째로는 제목의 내연인데 썰물이라면 해안에 사납게 덮쳐들었다가 물거품만 남겨놓고 꼬리 빳빳이 바다로 내빼는 그것이다. 어찌보면 오늘날 성행되는 류행어 “바다로 나간다(下海)”는 말과 상통된다고 할가. 그렇지만 여기서 결국엔 두가지 함의로 나타나고있는데 “하해”라는 긍정적자세에 앞서 썰물현상자체에 접근하는 피난살이식 삶이 더 핍진하게 그려진것이다.    문제를 시정하는 돌파구 괴변같기도 하지만 필지는 상술한 의문에 스스로의 대답을 주고저 한다. 물론 작품에서 반영한 사실들은 보편성을 띠지 못했다. 필경 오늘날의 대추세는 도시에로의 진출이지 살길이 막혀서 부득불 나서 자란 고향땅을 도망치듯 떠나가는 현상은 국부적인것이다. 국부적이라는 전제가 붙게 되는이상 그것의 존재함을 의미하게 되는것도 무리는 아닐것이다. 존재하는 모든것은 합법칙성을 갖는다는 철학적 명제로부터 볼때 우리는 그런 현상을 외면하거나 무시할수 없는 실정이다.  그러니까 필자의 초점도 여기에 맞춰진것이다. 무엇때문에 근 한세기의 이민사-대규모적인 이민-를 가지고있는 우리가 당초보다 별로 나을데 없는 생활상태를 유지하고 있는것인가? 이번의 도시에로의 “이민”도 어쩌면 핍박에 의해 량산에 오르는 격이 아닐가? 악성순환의 결과가 나타날 우려는 없을가? 이런 물음에 얼마만한 해답을 준다는 의미에서 “썰물”은 우리민족의 현재와 장래를 판단하고 구상하는데 “급시우”로 된다고 필자는 인정하고있다.    우리 비극의 근원은 문화의 폐단 “썰물”은 하나의 비극이다. 그 어설픈 기분과 초라한 행색은 읽는이로 하여금 슬픔과 격분에로 끌려가게 한다. 잘 살려고 땅의 부름대로 고향이고 조상이고 할것없이 팽개치고 몰려왔던 우리민족이 오늘날 역시 같은 목적을 가지고 이미 때를 묻힌 땅을 떠나려는것이다. 그것도 당연과 묘하게도 일치를 이룬 “보따리행차”인것이다. 하다면 우리는 언제가야 종착역을 모르는 이런 떠돌이 인생을 결말짓고 드디여 충실하고 보람찬 삶을 누릴것인가? 이런 현상의 근원을 “썰물”에 맞추면서 풀어보는것도 무익한 일은 아닐것이다.  소설이 제시하다싶이 “근용”이는 생활개선을 위해서라면 고생을 달게 받아낼줄 아는 위인이다. 그래서 어지러운 토목일도 마다하지 않고 수천리 타향길로 만삭이 된 안해를 끌고 떠나는것이다. 오직 “아이들이 어렸을때 벌어야 한다”는 리유때문에 5푼 변리도 두럽지 않았고 고향에서 멀리 나가면 나갈수록 그에게는 유리했던것이다. 자명한바 고향에서는 “근용”이의 리유가 실현될 가망이 없는것이다. 거꾸로 풀이한다면 “근용”이가 “아이들이 어렸을때 벌어야 한다”는 당당한 리유를 세워놓았을때 그의 가슴에는 이미 5푼 변리돈 맡아 멀리 가느냐 아니면 천시, 지리, 인화(天时地利人和)의 3대 우세를 가진 고향에서 알맞는 일감을 찾느냐 하는 천평이 놓여진것이다. 결국 그는 체면 유지에 백기를 들고만것이다. 체면유지, 이것이 바로 우리문화에서 홀시할수 없는 하나의 폐단이라고 지적하지 않을수 없는 대목이다.  우리민족은 결코 게으른 민족이 아니다. 근년에 세게 불어치는 한국바람, 독련체바람에서도 볼수 있는바와 마찬가지로 우리민족은 곳곳에서 상상하기도 어려운 고생을 견뎌내며 부지런히 일들을 하고있다. 문제는 고향이라는 이 괴물에 있다. 왜 꼭 나가야만 하는가. 해종일 빈둥빈둥 놀지언정 “남(본민족)”이 보는데서는 “구차한 노릇”을 안한다는 태도들이다.  “초라해요. 너무너무 초라해요. 부끄럽단말이예요.” “근용”이 딴에는 이만한 리유라면 아주 근사해보였을테이지만 아버지와 딸을 남겨두고 간 그 허름한 초가삼간을 근용이의 집이 아니라고 할 사람이 몇이나 될가. “저것 보지. 근용이가 떠나갔으니 저건 근용이의 집이 아니야. 그러니 근용이는 초라하지 않아. 부끄럽지도 않구.” 이런 멍텅구리는 없을것이다. 그러니 우리의 체면유지라는것도 어찌보면 눈 감고 아웅하는 격이 아닐가. “안불견 심불번(眼不见心不烦)”의 자아모순에 빠져 자신을 망치고 후대를 망친것이 체면유지가 우리에게 가져다준 직접적혜택이라고 하면 과한 빈정거림이 될지도 모르겠다.    행위 충동이 주는 계시 물론 필자는 도시에로의 진출을 비난하려는 생각이 꼬물도 없다. 개혁개방의 대형세하에서 인구류동, 도시진출은 불가피면적이다. 그 폭이 크고 그 규모가 클수록 나가는 사람에게나 나가지 않는 사람에게나 모두 리로운것이다. 문제로 되는것은 우리 행위의 충동성과 맹목성에 있는것이다.  “근용”이는 동서의 편지 한장을 달랑 받고 고향을 떠나가는것이다. 그것의 진위를 가릴 념도 않고 만삭이 된 안해와 어린 아기를 끌고 낯선 타향길에 나서는 그 행위에 우리민족의 못난 형상이 반영되여있다.  “남들이 다 떠나가버리고나니 여기서 살 맥이 안나요.” “근용”이의 대답에서 우리는 그 행위의 천진함과 유치함을 인츰 보아낼수 있는것이다. 그러니 앞날의 타산보다도 “남이 다 갔다.” “여기서 실기 싫다.”는데 그 출발점이 귀결되는것이다.    악성순환의 고배 필자의 근심이나 우려도 그래서 생겨난것이다. 우리가 시장경제의 대추세에 수응하는 본능이 너무나도 미약하고 소극적이기때문이다. 일단 대추세와 본능 이 량자가 충돌을 일으킬때 우리가 산산쪼각난다고 판단을 내리지 않을 아무런 근거도 없다. 반면에 그런 가능성이 아주 크다는것을 “썰물”은 형상적으로 해답해주고있는것이다.  “근용”이의 안해는 집문을 나서기 바쁘게 “진짜 남자라면 녀편네 이런 고생 시키지 말아야 남자지.” “한국 같은데선 녀자 일 시켜먹고 사는 남자 사람값에두 못간대요.” 하면서 돈 벌기전에 호강 부릴 생각부터 다듬는다. 한국형편이 우리같았을적에 그 녀성들도 피타는 노력을 경주했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무턱대고 “횡적비교”를 하는 여기에 우리의 운명은 이미 주어져있다.  한편 우리의 체면유지의 폐단과 행위의 충동성 및 맹목성으로 하여 다시 한번 운명의 우롱과 시련을 받아야 할지 모른다. “남이 다 가니” 나도 가야 하고 그러니 여기 한무리 저리 한부락이 모여사는 현상이 다시 출현될것은 당연한 일이다. 원래부터 응집력이 강한 민족이니깐. 다른 종족과는 배합이 잘 안되는 민족이니깐. 또 부분적으로 이미 실증된 사실이다. 그렇게 한해, 두해 시간이 흐르면 모두가 익숙해지고 그러면 또다시 체면유지가 머리를 쳐들게 될것이라는것을 지나온 력사로부터 짐작할수 있는것이다. 그때 가서 또 한번 서로서로 샘을 쓰고 자비심을 비기다가 월경과 도시진출에 이은 제3차 대추세가 나타나면 다시 산지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질것만 같은 예감이 드는것을 어쩔수 없다. 소위 썰물이 나갔다가 밀물이 들어오는것처럼. 제발 밀물만은 되지 말아줍소서 하고 기원할수밖에 없는 필자다.    맺는 말 “썰물”은 력사의 차원에서 우리민족의 렬근성가운데서 몇가지 흠집을 면바로 짚어내였다. 민족발전 민족부흥을 기하는데 유익한 탐색을 하였다는데서 필자는 그래도 긍정적인 태도를 취하고싶다. 한편 문학작품으로선 너무 산만하고 합법칙성이 기울어졌다는 유감이 드는것을 어쩔수 없다. 
79    사람은 가까이 하지 않는다 댓글:  조회:949  추천:1  2015-12-23
  수필 사람은 가까이 하지 않는다     강아지는 매일 가까이 두되 사람은 되도록 좀 멀리 떨어져야 한다.  이건 속담이 아니고 내가 만들어낸 말이다.  하긴 사람을 강아지와 같은 위치에 놓고 비교한 게 참 미안할 일이다. 그리고 절대 인간이라는 이 만물의 영장을 폄훼할  마음은 꼬물도 없다. 아무렴 사람은 그래도 사람들속에서 뒤엉켜 살아야 사람 대접을 받을 것이지 짐승들 무리속에 섞여들면 그 즉시로 바로 동물 취급을 받기 십상이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여기까지이다. “사람은 사람과 어울려라.” 여기에서 멈추면 지혜로운 사람이 될 것이다. 그렇지 않고 나름 그 어떤 자신이 생겨 그 마지노선을 넘어선다면 그 순간부터 생각밖의 번뇌와 고통속에서 헤매이게 될 것이다.  괜스레 또 동물 하나를 끄집어내어 기분 잡치지만 양이라는 동물은 더울 때일수록 한데 엉켜붙기 좋아한다. 상대의 그늘밑에서 몸을 식히기 위해서이다. 너도나도 그 그늘을 찾고 그러다보니 모두가 엉켜붙어 누구도 시원해지지 않고 더위에 몸부림친다. 반대로 추울 때일수록 흩어진다. 남이 내 그늘에 오는게 딱 질색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긴긴 겨울을 각자가 도생하면서 추위에 떤다.  사람의 경우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주변에 사람이 모이는 것은 “나”한테 “그늘”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의심해볼만 하다. 그것이 아니라면 거지를 기피하거나 가난한 사람을 멸시하는 사회기풍을 해석할 방법이 전혀 없어진다.  물론 우리는 “우정”이 이어주는 뉴대를 외면할 수도 없다. 소굽친구, 학교 동창, 직장 동료, 경제파트너 등등 얽키고 설킨 인간관계가 친분으로 이어져 인간사회를 진정 화기애애한 동네로 만들어준다. 간혹 만나서 넉넉한 마음가짐으로 지나간 세월의 재미있었던 일, 유감스러웠던 일들을 담론하면서 우의를 더욱 돈독하게 한다면 가히 금상첨화라고 할 수 있겠다.  문제는 사람은 팽창성이 강해 그에 만족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가까와진 김에 더 가까이 다가서려는 욕구가 마냥 사람을 못살게 군다. 매일 붙어다녀야 속시원해지고 하고싶은 말이 끝없이 나오는게 이상도 하지 않다.  그러다보면 더러 풀칠 때가 있게 된다. 사람은 성인이 아니다. 긴 세월을 갔다왔다 하다보면 말 한마디 실수할 수 있고 행동 한번 틀리게 나갈 때가 없지 않다. 오랜 친구니까 괜찮겠지, 허물없는 사이니까 넘어가주겠지 생각하면 오산이다. 그것도 한두번때의 일이다. 세번 네번 반복하게 되면 말그대로 반목이 다가오게 된다. 그리고 친한 분동만큼 소원해지는 비례가 높아진다.  우리말에 속 좁은 사람을 가리켜 “담배씨네 외손자”라는 속담 같기도 하고 성구 같기도 한 말이 있다. 실지 절대적으로 속이 넓은 사람은 없다. 바꾸어 말하면 원래 사람속은 무한정 넓지도 못하다. 자신의 자존심과 자기의 상처까지 건드려질 때는 누구도 참지 못하게 되어있다. 사람은 누구나가 독립적인 인격체이기에 번마다 언제나 상대의 입장에 서서 모든 오해와 실수를 이해할 수 없게 장치되어있다.  그래서 수년의 정분이 하루 아침에 물거품이 되는 현상을 우리는 자주 목격하게 된다. 천당과 지옥 사이를 넘나드는 그런 일은 사이가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두터우면 두터울수록 더 강렬하게 재현하게 된다.  “내 너를 어떻게 해주었는데 사람 배반해도 유분수지.” “인간도 아니야.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누구나 한번쯤은 들었을법한 말이고 또 했을법한 말이다.  세상에 가장 믿을 수 있는 것도 사람이지만 가장 무서운 것도 사람이다. 묘지에서 사람을 놀래우는 건 귀신이 아니고 사람이라는 것처럼 사람은 양면의 칼과 같은 존재여서 잘 다스리면 큰 도움이 되지만 반대면 지옥과 같은 상대가 된다.  옛성인은 “군자는 물과 같이 교제한다.”고 말했다. 수천년이 지난 지금도 유효적인 금쪽같은 말씀이다.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교훈적인 말씀이다.  왁자하고 화려한 교제가 오래가는 걸 보지 못했다. 거리를 상실했다는 건 프라이버시까지 공유했다는 의미이며 그건 부부 동체도 지켜내기 어려운 묵직한 숙명이다. 언젠가는 한번 터져야 할 폭발을 잉태하고 있는 셈이다. 그 폭발은 족히 쌍방을 불태워버릴 수 있다.  하지만 한번 된 통을 당했다고 하여 모든 사람을 경계하는 눈초리가 되어서는 아니된다. 따져보면 실수와 실패는 버릴 게 하나도 없다.  사람은 너무 가까이 해서 이익될 게 전혀 없다. 좀 멀리 떨어져서 바라볼 때 가장 아름답다. 간간히 전화를 주고 받고 틈틈히 틈나는대로 만나서 소회를 풀고 가끔 땀 흘려 돕고 도움 받으면 우정은 영원히 보라색을 띠게 된다. 
78    두 녀인의 포옹 댓글:  조회:1002  추천:1  2015-12-23
  단편소설   두 녀인의 포옹   기나긴 한여름 해도 뉘엿뉘엿 서산으로 기울고 있었다. 산새들의 다정한 지저귐도 숲속에 잠든지 이윽하고 야수들의 울부짖음이 간단없이 들려왔다.  술주정뱅이같이 익살스레 생긴 검은 바위는 킥킥거리며 그녀를 비웃는듯 했다. 그녀는 그만 우뚝 멈춰섰다. 그녀는 전신에 소름이 쭉 끼치는 것을 어쩔수 없었다. 등의 버섯짐은 급작스레 천근같이 무거워졌다. 그녀는 아래다리가 떨려나 그 자리에 쿡 물러앉았다.  이제 같이 온 사람들을 찾는다는것은 더욱 말이 아니였다. 그녀는 저으기 후회되였다. 버섯무지를 발견한후 그들과 함께 캤더라면 아무 일도 없었을것이였다. 그러나 이것은 뒤늦은 후회였다. 그녀가 버섯을 다 캤을 땐 사람들이 어디론가 사라진 뒤였고 그래서 그녀는 그들을 찾아헤맸던것이다. “간나새끼들…” 그녀는 공연히 그들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이때 멀지 않은 곳에서 승냥이의 울음소리가 무섭게 들려왔다. 그녀의 낯색은 새까맣게 질렸다. 푸들푸들 튀는 가슴을 부여잡고 황황히 자리를 떴다.  한마장이나 되는 가시덤불을 헤치고 나서니 개울물이 나졌다. 그앞에 높지도 낮지도 않은 산이 가로놓여있었다. 그녀는 미처 바지가랭이를 걷어올릴 엄두도 못내고 개울을 건넜다.  원래는 개울을 따라 내려갈가고 생각하였다가 어쩐지 이 산이 익숙해보여 그대로 산을 톺아오르기 시작했다. 이때 와서 천근같이 무겁던 짐도 그녀에게 아무런 중압을 주지 못하고있었다. 그녀는 한시급히 산봉우리를 올라가려는 일념뿐이였다. 그녀의 기억이 틀림없다면 산 저쪽에는 나무집이 있었다.  점심때에 누군가 나무집에 들어가 다리쉽이나 하자고 제의한것을 욕심많은 그녀가 한사코 우겨서 길을 재촉했던것이다.  끝내 산봉우리에 올라섰다. 그녀는 급히 눈을 들어 산아래를 굽어보았다. 아니나 다를가 산언덕에는 나무집이 어슴푸레 보였다.  그녀는 저으기 마음이 놓였다.  (흥, 네년들이 나를 따돌렸지만 나는 죽지 않아. 죽지 않았을뿐만아니라 네년들보다 더 많이 캤어.) 기쁨에 겨워 막 달려내려가던 그녀는 웬 일인지 우뚝 멈춰섰다.  나무집에는 어떤 사람이 있을가? 사냥군이 아니면 삼림지기일것이다. 그녀는 거의 본능적으로 풍만한 젖가슴을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홱 돌아섰다. 똑마치 저 나무집안에서 웬 음충한 눈길이 그녀를 훔쳐보는것만 같았던것이다.  그녀는 기계적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가 또다시 우뚝 멈춰섰다. 가면 어디로 간단말인가? 앞으로 간다는건 죽음을 의미할뿐이다.  옳지. 점심에 밥을 먹으면서 볼라니 주위에는 온통 인삼밭이였다. 틀림없이 인삼장의 집일것이다. 그렇다면 저 집에 녀인이 있을 가능성도 있었다. 인삼이란 한해두해에 다 키울수 있는것이 아니다. 남자주인은 꼭 생활을 보살펴주는 녀인이 수요될것이다. 그런데 어느 녀인이 이 심산벽곡으로 기여들어오려고 하겠는가? 그녀라면 절대 돈을 벌려고 이런 곳에 오지 않을것이다.  승냥이의 울음소리는 점점 더 크게 울려왔다. 그것은 홀쪽한 배를 살고기로 채우려는 야수의 피비린 울부집음이였다.  그녀는 엉겁결에 뒤로 둬걸음 물러섰다. 그녀는 그만 얼굴을 싸쥐고 서럽게 울었다.  “어~엉, 어~엉…” 문득 승냥이의 울음소리가 지척에서 울려왔다.  초풍할 지경으로 놀란 그녀는 저도모르게 산아래로 냅다 뛰기 시작했다.  그녀는 곧장 나무집을 향해 달려갔다.  “왕왕…” 그녀가 금방 나무집을 둘러싼 바자에 다가섰을때 집앞에 쪼그리고 있던 개 세마리가 불시에 그녀한테로 달려오며 사납게 짖어댔다.  “워리, 왜 야단이야!” 나무집 문이 열리며 웬 녀인이 초롱불을 들고 나왔다. 한족저고리를 입은 그 녀인은 바른손에 렵총을 들고 곧추 바자로 다가왔다. 밖의 사람을 발견한 한족녀인은 어지간히 놀라는 눈치였다.  “당신은 누구예요? 귀신인가요? 사람인가요?” “승냥이… 아니, 사람이예요.” 그녀는 부들부들 떨며 대답했다.  “버섯 캐러 왔다가 그만 길을 잃었어요.” 그녀는 절망과 애원에 찬 눈으로 한족녀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족녀인은 드디어 바자문을 열어주었다.  “빨리 들어와요.” 그녀는 비칠거리며 울안을 지나 집안에 들어섰다.  단칸집이였는데 딴 사람은 없었다. 나무벽에는 온통 짐승가죽을 박아놓아 한결 무시무시한 느낌을 주었다. 그래도 그녀는 저도모르게 안도의 숨을 내쉬였다.  “왜 바깥주인은 안보이나요?” “어제 일보러 촌에 내려갔어요. 오입질하느라고 오늘도 안오는가봐요.” 한족녀인은 가는말처럼 중얼거리더니 그녀를 도와 버섯짐을 내려놓았다.  “몽땅 버섯인가요? 많이도 캤네요.” 부러움에 젖은 목소리였다. 그녀의 눈길은 버섯짐을 핥고있었다.  “네. 그런데 혼자서 무섭지도 않나요?” 한족녀인의 속셈을 알아본 그녀는 되도록 말머리를 돌리려고 애썼다.  “뭘요. 돈 벌자면 이런 고생도 해봐야지요. 아이구 버섯이 먹음직도 하네요.” 버섯짐을 풀어보던 한족녀인은 갑자기 환성을 질러댔다. 어쩔새도 없이 한족녀인의 얼굴에는 탐욕의 빛이 더욱 강해졌다.  “저는 여기서 2년나마 보냈지만 종래로 이렇게 먹음직한 버섯을 보지 못했어요.” “그래요? 그럼 인사로 좀 드리지요.” 그녀는 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감사해요.” 한족녀인은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날듯이 부엌으로 가더니 큼직한 소래를 들고 나왔다. 그녀는 그 소래에다 절반쯤 채워주었다. 그랬건만 한족녀인은 크게 기뻐하는 눈치가 아니였다. 금방까지도 다사하던 한족녀인은 급작스레 새침해졌다. 참 맹랑한 일이였다. 바로 그만한 버섯때문에 그녀는 동료들과 헤여졌던것이다. 그런데…. “여직 저녁을 잡숫지 않았겠군요?” 한족녀인은 소래를 원래의 자리에 탕 놓더니 속에 없는 말을 했다.  “아니…” 웬 일인지 그녀는 얼굴이 달아올라 아래말을 잇지 못했다.  한족녀인은 그이상 말이 없이 밥그릇들을 가마에 되는대로 집어넣고는 아궁이에 불을 지피기 시작했다. 그녀도 체면이고 뭐고 지킬새없이 신을 벗고 구들에 올라가 앉았다.  얼마후 밥상이 차려졌다. 그녀는 게눈감추듯 밥 한사발을 제꺾 먹어치웠다. 그녀는 이날처럼 젓가락질을 재치있게 해본적이 없었다.  “몹시 시장했군요.” 한족녀인은 야릇한 웃음을 띄우며 밥 한사발을 떠서 넘겨주었다.  “제가 아주머니라면 언녕 이 집으로 찾아왔을거예요. 여기에 남정들이 10여명이 있더라도말이예요.” “그건 왜요?” 그녀는 밥사발을 받으면서 리해할수 없다는듯 눈을 슴벅이였다.  “왜선가구요? 살아야 하기때문이지요. 남정들한테 시달림을 당하더라도 승냥이 밥으로는 되지 않겠어요.” “그건 또 왜요?” 그녀는 이상하다는듯 한족녀인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이상할게 없어요. 사람은 좋으나 궂으나 사람과 함께 있어야지요. 하물며 생사관두에 고려할것이 무엇이 있겠어요.” 그녀는 새삼스레 밥맛이 없어져 자리에서 물러났다. 한족녀인의 철학이 도무지 리해되지 않았고 따라서 일종 혐오감이 생겼던것이다.  “한가지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줄가요?” 한족녀인은 밥그릇을 거둘념도 않고 그녀앞으로 한걸음 다가앉았다.  “듣고 있어요.” “제가 금방 이곳에 왔을때의 일이였어요. 그날도 남편은 일보러 촌에 내려갔어요. 그런데 말이예요. 남편이 떠나서 얼마 안지나 웬 사나이가 물 얻어먹으러 들어왔어요. 미끈한 사내였어요. 그런데 물 먹고 인츰 간다던 그가 날이 어두워질때까지 갈념을 안했어요. 결국 그를 여기에 묵게 했지요.” “어마나,” 그녀는 저도모르게 이마살을 찡그렸다. “여기에요? 단 둘이서요?” “한밤중이 되니 그 자식이 슬금슬금 기여드는것이 아니겠어요…” “저런, 그래서요?” “저는 발칵 성을 내였어요. 남편 없는 아낙네라고 업신 여기지 말아요. 사내대장부면 황소처럼 일부터 잘해야 해요. 이 ‘할미’가 욕심나면 일솜씨부터 보여줘요 하면서 슬슬 구슬렸지요. 그러니까 그 자식은 저절로 물러나는것이였어요. 이틑날 일어나서는 온종일 김을 맸지요.. 이렇게 이틀이나 김을 매주고는 남편이 돌아오자 꼬리빳빳이 내뺏어요. 호호호…” 이때 밖에서 개짖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한족녀인은 잽싸게 뛰여일어나더니 냉큼 렵총을 거머쥐였다.  “아마도 인삼장에 곰이 뛰여들었나봐요.” “곰이요?” 그녀는 후다닥 놀라며 무작정 한족녀인의 팔소매를 틀어잡았다.  “나가지 말아요. 전…무서워요.” “안돼요. 인삼장은 우리의 생명이예요. 남편이 돌아와서 물으면 저는 어떻게 대답하겠어요. 곰이란놈이 한번 뛰여들면 인삼장이 결딴나요.” “그러면 저는 어째요?” “저 구석에 큰 칼이 있지 않아요. 저것으로 문을 지키고있어요.” 문가로 걸어가던 한족녀인은 무슨 생각이 들었던지 돌아서서 새파랗게 질린 그녀를 이윽토록 바라보았다.  “한가지 부탁할 일이 있어요. 혹시 제가 잘못되면 저의 남편이 돌아올때까지 인삼밭을 지켜줘요. 그는 오입쟁이이니 주의해야 해요.” 비장하게 후사를 부탁한 한족녀인은 밖으로 뛰여나갔다. 개짖는 소리가 더 요란하게 들리는가싶더니 잇달아 땅 하는 총소리와 더불어 캐갱갱하는 개들의 단말마적인 울부짖음도 동시에 들려왔다. 그뒤로 쥐죽은듯 조용해졌다.  그녀는 황급히 창문에 얼굴을 대고 밖을 내다보았다. 희미한 달빛을 빌어 웬 거무스레한 물체가 엉기적거리며 집으로 다가오는것이 보였다. 그녀의 눈길은 어느덧 구석에 있는 큰 칼에 가 멎었다. 그녀는 급히 일어섰다.  급촉한 숨소리가 문가에 다달았다. 그녀는 고도로 긴장되면서 칼을 부여잡았다.  “삐꺽” 문이 맥없이 열렸다. 그녀는 심장의 압축을 느끼며 급히 칼을 쳐들었다. 그러나 인차 허공에서 멈춰졌다.  문가에는 목에 렵총을 건 한족녀인이 맥없이 주저앉아있었다. 오른손으로 왼쪽어깨를 부여잡은채 일어서려고 모지름을 쓰고 있었다.  “곰에게 좀 핥이웠어요. 덕대우의 봉지약을 가져와요.” 그제야 제정신이 벌컥 든 그녀는 부산하게 한족녀인을 부축하여 구들에 앉히고는 약을 찾아들었다.  “손을 치워요.” “이리 줘요.” “왜 이래요. 빨리 치워요!” 한족녀인은 더 고집하지 않고 손을 치웠다. 그녀는 상처자리에다 약을 쏟아놓기 바쁘게 돌아서서 버섯주머니를 쫙 찢었다. 꽁꽁 다져졌던 버섯들이 쏟아져나오면서 봉당에 마구 뒹굴었다. 그랬건만 그녀는 한족녀인의 상처를 싸매주기에 여념이 없었다. 한족녀인은 의혹에 찬 눈으로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볼뿐이였다.  밤은 깊어만 갔다. 그들은 한이불속에 들었다. 이불은 한채밖에 없었던것이다. 한족녀인은 인차 코를 골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녀는 이리뒤척 저리 뒤척 종시 잠들수가 없었다. 이 하루가 그녀에겐 꿈속의 세상에서 헤매는것만 같았다. 그녀가 풋잠에 들었을 때 무엇인가 그녀의 하신을 더듬고있었다. 한족녀인이였다. 아마도 옆사람을 자기 남편으로 여긴듯싶었다. 그녀는 가법게 한족녀인의 손을 밀어버렸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녀를 꼭 껴안는것이였다. 어찌도 억세게 끌어안았던지 도무지 물리칠수 없었다. 그녀는 하는수없이 내버려두었다. 급기야 그녀는 강렬한 충동을 억제할바 없어 한족녀인을 와락 끌어안았다. 그 충동은 이성간의 그런 성적충동과는 다른 일종 미묘하고 아리숭한 충동이였다. 여하튼 그녀는 그 포옹속에서 그 어떤 만족을 얻고있었고 영원히 그렇게 포옹하고싶은 심정이였다.  “날이 밝아오는군요.” 한족녀인은 잠꼬대처럼 중얼거렸다. 그 얼굴에는 알릴듯말듯한 미소가 떠오르고 있었다. “그래요. 응당 밝아야지요.” 어디선가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려오는듯싶었다. 그녀는 그들이 자기를 찾아나선 사람들일것으로 짐작하면서 살풋이 눈을 감아버렸다. 
77    낚시 댓글:  조회:1319  추천:1  2015-06-25
  단편소설   낚   시 장학규   눈앞이 어느새 흐릿흐릿해온다. 그나마 물고기 배처럼 희끄므레하던 서쪽하늘도 기진맥진한듯 검게 손을 들고있었다. 선웅이는 별로 바쁘지 않다는듯 느릿느릿 걸었다. 내리막길인데다가 길에 자잘한 돌멩이들이 여기저기 깔려있어 여러번 발을 접질러 넘어질번 했다. 다행히 눈감고도 다닐수 있는 익숙한 길이기에 어렵지 않게 봉변을 피할수 있었다. 이제 이 내리막을 지나서 50여 메터 정도를 나가면 크지도 작지도 않은 호수가 나진다. 그물치는 매생이 급들이 가끔씩 부담없이 떠다니는 대수 보아줄만한  웅뎅이이다. 옛날에는 저 앞의 백사하와 이어지는 만(湾)이였다고 한다. 그게 막히면서 호수가 이루어진듯 싶지만 분명히 석호는 아니였다. 인공적인 흔적이 도처에 엿보이고있었다. 옆으로는 무성한 나무숲이 산처럼 높이 뻗치고 있어 바로 도심에 린접하고있다는 느낌을 전혀 받을수 없이 한적한 곳이다. 저 앞으로 쉴새없이 헤드라이트를 켠 차량들이 분주히 오가지 않는다면 정말 도심에 이런 낚시터가 있으리라고는 누구도 생각지 못했을것이다. 선웅이는 나무숲을 등지고 자리를 잡고 앉았다. 량옆의 풀들이 깨끗이 베여지고 평퍼짐한 바닥이 닦아진 좋은 낚시터였다. 그곳은 거의 선웅이의 전용 터라고 할수 있을만큼  일년치고 대부분의 시간을 선웅이가 차지하고있는 곳이다. 오늘도 혹시 누가 먼저 자기 자리를 차지하지 않았을가 못내 속을 조였었다. 낚시군들은 대개 익숙한 터를 선호한다. 물깊이도 그렇고 그곳에서 노니는 고기류에 대해서도 잘 알고있기 때문이다. 한번 자리를 빼앗겨 달리 새로운 장소에 적응하기란 말처럼 그렇게 수헐치는 않다. 그래서 베테랑 조사님들은 쉽게 자리를 옮기지 않는다. 그러고보니 아직은 밤낚시가 일찍한 시점이다. 선웅이는 느릿느릿 낚시가방을 열고 일단 낚시대부터 맞추었다. 낚시줄을 고정시키고 찌에 케미컬라이트를 부착하는데 부시럭부시럭 사람이 다가오는 인기척소리가 들려왔다. 이어 석쉼한 목소리가 귀전을 때렸다. “일찍하시오.” 얼핏 건너보니 전혀 생소한 얼굴이였다. 예순쯤 되여보이는 로자였는데 선웅이와 서너발 떨어진 거리에 멈춰서더니 짐을 풀기 시작했다. “아, 네.” 선웅이는 외마디 단창을 뽑은다음 더이상 아는체 하지 않고 곧바로 떡밥을 만들기 시작했다. 선웅이는 이 동네 낚시군들과 거의 면목이 있다. 만나면 서로 굵직한 롱담도 주고받을수 있는 사이이다. 그런데 로인은 처음 보는 사람이였다. 하늘이 점차 어두워오면서 떡밥이 제대로 반죽되는지 감이 도무지 잡혀오지 않았다. 후레쉬를 켜서 보니 생각밖으로 그런대로 대수 쓸수 있는 정도는 되여있었다. 서당개 3년이면 풍월 읊는다고 선웅이도 이젠 웬만해서는 손느낌으로도 떡밥을 만들수 있었다. “이 사람아, 헤드랜턴은 없나? 후레쉬는 빛이 너무 강렬해요.” 그때 아까 그 로인이 저쪽에서 다시 말을 걸어왔다. 얼핏 짜증같아 보이는 말인데도 로인은 온화한 목소리로 상냥하게 말하고있었다. 불과 3~4메터 건너에 있지만 로인은 이젠 점과 각이 모두 없어진 검은 물체로만 보여졌다. “아, 네.” 선웅이는 또다시 짤막하게 중얼거리면서 본능적으로 낚시가방에서 헤드랜턴을 더듬어잡았다. 인츰 파란색 불빛이 호수면을 어지럽게 오갔다. 선웅이는 급히 랜턴을 머리에 고정시키고 낚시에 떡밥을 끼기 시작했다. 어둠과 더불어 오가는 차들이 점차 뜸해지기 시작했다. 저녁 식사를 마친 사람들이 하나둘 저 앞 백사하 강뚝으로 저녁 산보를 나오기 시작했다. 스모그와 소리의 벽이 많이 엷어진 시간대여서인지 가까운 거리의 사람들이 주고받는 말들이 바로 옆에서 소곤거리는것처럼 선명하게 들려왔다. “저 춘양댁네 새 차를 바꾸었당꼬.” “춘양댁이 누꼬?” “거 무지? 말 꽁댕이마다 말이 말이 하는 할무이 있자너.” “오 그 할무이 아들이 돈 잘 번댄다. 갠데 문 차 또 산대지? 지금 굴리는것도 새차 아니가?” “글켔지? 뭐 아오디 에이 8이라나 무나. 80만이라카면서 말이말이 글더라구.” “왜 몇십년만에 생리통이 되돌아온갠가? 별걸 다 배 아파?” “배 아프긴 물? 울도 먹고 살만큼은 살루.” “글카나. 그 집 따래미도 여간 날구뛰는겨. 요즘 상가 두개씩 갖구있는 집 몇개 있을까나. 부러버 마.” “누가 부러바할새나.”     주고받는 말들이 조선말들이여서 선웅이는 귀를 잔뜩 세우고있었다. 낮 말은 새가 듣고 밤 말은 쥐가 듣는다 했던가. 백메터이상 빛을 비추며 줌 기능까지 갖춰 편리한 랜턴을 머리에 걸고있는 선웅이가 고스란히 듣고있는줄도 모르고 귀먹은 동네라고 여기고 스스럼없이 말하고있었다. 아무리 물고기들이 빛을 보고 인지하지 못하는 블루 랜턴이라 해도 사람은 볼수 있는게 아닌가.     (하여간 머리 아퍼!)     선웅이는 잔뜩 골난 사람처럼 신경질적으로 낚시대를 잡아챘다. 먹이감이 깨끗이 털려버린 빈 낚시코가 랜턴 불빛속에서 약 올리듯 하느작거렸다. 잠간 정신을 팔고있으면 그렇게 빈털터리가 되여버리는 낚시때문에 선웅이는 인내심을 많이 잃어가고있었다. 이젠 도정신해야지 그렇게 마음을 다잡고 어신을 감지할수 있는 케미컬라이트만 주시하니 그렇게 생생하던 말소리들이 금방 소음장치가 된듯 가뭇없이 사라졌다. 캄캄한 수면우에 놓여진 케미컬라이트 불빛과 바람소리가 멎어버린 조용한 수면을 은밀히 흔드는 찌울림이 한결 흥분을 자아내기 시작했다. 틀림없이 굵은 씨알의 붕어가 손아귀에 들거라고 확신하면서 찌 솟음과 더불어 낚아챘지만 웬걸 여전히 홀쪽 말라버린 낚시코였다. 그러기를 여러번 반복하면서 선웅이는 차츰 영문없이 마음이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담배 한대 하지 않을라나?” 문득 바로 등뒤에서 사람의 말소리가 들려와 선웅이는 그만 초풍할 지경으로 깜짝 놀랐다. 저쪽에 있던 로인이 아무런 기별도 없이 다가온것이다. 표정을 전혀 읽어낼수 없는 어두움속에서 로인은 어떻게 선웅이의 불만을 감지하였는지 두서없이 뒤말을 이었다. “실은 … 기침 둬번 …오면서…” 그러면서 알뜰하게 불까지 붙인 담배대를 내밀었다. 얼결에 그걸 받아들고 선웅이는 허구픈 웃음이 나오는걸 겨우 참았다. 괜히 손을 들었다가 제뺨 치는 형국이 되고말았다. 사실 선웅이는 담배를 끊은지 벌써 반년이 되여오고있었던것이다. “콜록 콜록 …” “담배 못하나보군. 그런데 먹이집 만들었나?” 로인은 여전히 자상한 어투로 말을 걸어왔다. 금방 있었던 난처함을 완전히 털어버린듯 티가 묻지 않은 목소리였다. (아차!) 선웅이는 그제서야 여직 먹이집도 만들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그거마저 잊어버릴수 있단말인가. 오늘은 꼭 한쪽 뇌를 분실한 느낌이였다. 많이 다치지 않고서야 머리 회로가 이렇게 자꾸 단절될리 없잖은가. 선웅이는 기계적으로 알갱이 고기밥을 서너줌 호수에 던졌다. 사르르 호수물을 가르는 소리가 스릴있게 들려왔다. “아직 대어가 출동하기는 좀 일찍하네. 작은 친구들 두둑히 먹게 내버려두게. 그 작은 배들 금방 채워진다네. 그리고 먹이집을 발견하고 어른들이 어슬렁 찾아오면 저절로 알아서 물러나네. 급해말라구.” 선웅이는 그만 마음이 도적맞힌 느낌이 들면서 얼굴이 뜨뜻하게 달아올랐다. 아무래도 고참 조사님이 분명했다. 공기의 흐름만으로도 선웅이의 현재 기분상태를 파악하고있었고 그래서 다가와 해학적으로 귀띰해주고있는것이다. 선웅이는 로인이 언제 자기 자리로 돌아갔는지 모른다. 사실 선웅이도 밤이나 새벽이 되면 대어들이 활발해진다는것쯤은 상식적으로 알고있었다. 물고기들도 커가면서 본능적인 경험이 많아진다. 경험과 본능이 경계심으로 이어지면서 한낮보다는 고즈넉한 어둠을 틈타 사냥에 과감히 나선다. 그리고 먹이감인 민물새우 등이 물가로 가까이 나오는 시간대가 또 밤시간대인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시간이 흐르면서 작은 찌놀림이 적어졌다. 대신 한번 움직였다싶으면 그대로 물속에 처박히듯 곤두박질쳤다. 눈으로 그걸 확인하고 머리의 빠른 회전을 통해 팔로 전달되는 그 전률은 그저 아찔할 지경이였다. 주먹만한 붕어 한마리는 미처 낚시대를 쳐들기도전에 백메터 속도로 옆의 풀속을 향해 내뺐다. 선웅이가 젖먹던 힘을 다해 붕어의 주둥이를 물밖으로 끌어내지 않았다면 그대로 놓칠번했다.  한뺌 정도의 붕어들이 그물망태에서 퍼덕거리면서 시끄럽게 소리를 낼 즈음에 복부가 느닷없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남들은 대변이 마려우면 홍문이 무거워온다지만 선웅이는 배에 통증이 먼저 찾아온다. 처음에는 그것이 무슨 죽을 병인줄로 알았다. 급하게 볼 일 먼저 보고 그다음 약을 먹으려니까 아픈 배가 금세 탈이 없어졌다. 그런 일을 여러번 반복해 겪고보니 배 아프면 의례 뒤가 나오려니 했고 그게 신통하게도 백프로 맞아떨어졌다. “붕~붕~붕~” 그나마 가스가 뿜겨나가는 경우는 덜 괴로웠다. 솔직히 선웅이는 고기가 한창 앞다투어 물려대는 지금 이 시각에 자리를 뜨고싶지 않았다. 무리채로 몰려다니는 물고기는 한번 물기 시작하면 잇따라 줄줄히 물었다. 그러다가 아니 하고 한번 가버리면 한동안은 다가오지 않는 법이였다. (배속에는 대장균이 적당히 있어야 한다니까.) 그러나 선웅이는 얼마 뻗치지 못하고 곧바로 투항해버렸다. 가스가 다시 나오지 않는대신 붕어를 끌어올리느리고 힘을 쓰기 바쁘게 바지가 끈적거려왔던것이다. (젠장…) 선웅이는 낚시대를 그대로 내던지고 허둥지둥 나무숲속으로 올라갔다. 언덕으로 높이 솟은 나무숲은 올라가는 길이 사선으로 좀 가팔라 미끌었지만 그런대로 기여올라갔다. 나무숲은 반경이 20메터도 되지 않았지만 은근히 울창했고 깊숙했다. 마침 동남풍이 불어 로인한테 냄새가 풍길 념려는 없었다. 궤춤을 내리기 무섭게 부르륵 방귀같기도 하고 아닌것같기도 한 소리가 나면서 액체화된 대변이 줄달음쳐나왔다. (저녁에 뭐 잘못 먹었나?) 선웅이가 주저앉은채로 손으로 배를 주물럭거리는데 나무숲 밑에서 먼저 그 로인의 익숙한 목소리가 바람에 실려 들려왔다. “여보세요.” 아마 누군가와 통화하고있는 모양이였다. 그런데 그 목소리가 틀림없는 조선말이였다. 하느님 맙소서. 아까 로인이 말을 걸어왔을때 별로 억양이 이상하다는 느낌은 받았었다. 대략 남쪽 동네 사람일수도 있겠다는 판단을 했었다. 청도라는 도시가 원래 동서남북 사람들이 모여들고 드나드는 고장이라 판별이 어려운것도 사실이였다. 그렇다면 로인도 아까 호수 건너편에서 들려온 대화를 엿들었음직했다. 아니, 틀림없이 들었을것이였다. “언제 떠난다구?...그렇게 빨리?... 여기서 일 안되면 가야지므… 글쎄 다 망한다구 하더라만…” 로인은 아까처럼 유창한 중국말을 하지 않고 순 조선말로만 대화했다. 아무래도 가까이에 있는 선웅이가 들을가봐 언어를 바꾼게 틀림없었다. 호수 건너편의 사람들도 그런 심태였을것이다. 어쩌면 로인도 그게 참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공감한것이 아닐까. 선웅이는 배속을 깨끗이 비웠지만 자칫 내려가면서 소리라도 만들면 로인의 대화가 중단될거 같아 주저앉은 그대로 넌지시 멈춰있었다. 아직 단풍을 모르는 초가을의 향기로운 꽃냄새가 살살 실바람을 타고 전해왔다. “삼성이 협력업체 100여개 달고 서안에 들어갔다면서?.... 먼저 가서 기회 잡아야지…응. 모르긴 해도 이제 다 서안으로 튈거다. 10년내로 여기 조선족인구 절반 이상 줄어들거다…뭐 해먹을게 있어야 말이지. 그래말이다…모두들 오더 떨어져서 빈털터리야. 빛 좋은 개살구이지…응 그러자. 나 밤낚시 나왔다. 아들 속타하는거 눈앞에 두고 볼수 있어야지. 내일 오후에 만나자. 그래.,,” 전화를 끊었는지 잠잠해졌다. 그렇지만 선웅이는 선뜻 내려가지지 않았다. 한참동안 더 앉아있다가 다리가 막 저려와서야 부시시 일어나 늘쩡늘쩡 벨트를 조였다. 밤은 깊어갔다. 어느 사이 기온도 많이 내려가 몸이 차갑게 떨려왔다. 낮기온이 30도를 치달아도 한밤중에는 쌀쌀한게 이 고장의 기후이다. 선웅이는 기척없이 자리로 내려가 우선 파카를 찾아내여 몸에 걸쳤다. 금세 온몸이 따스해오는게 느껴졌다. 그 파카는 선웅이가 지난해 한국 출장을 갔다가 특별히 시간을 내여 남대문시장에 가서 산것이다. 별로 큰 돈을 준것도 아니지만 품질은 나름대로 일류였다.  바느질이 제법 꼼꼼해 질기고 단단한것은 물론 가볍기도 하고 따스하기도 해 선웅이는 낚시질 나갈때마다 꼭꼭 챙겨다녔다. 선웅이는 급한김에 아무렇게나 한옆에 버렸던 낚시대를 주어들고 다시 낚시질에 집념했다. 한꺼번에 나를 잡아가소 하고 물려들것만 같았던 물고기들이 그러나 오래동안 도무지 물려주지 않았다. 역시 자리를 비워둔게 문제였다. 물고기는 잡힐때 계속 낚아야 하는 법이다. 시간이 얼마 흘렀는지 선웅이도 알수 없었다. 무거운 정막이 두텁게 내리드리우고 한기가 어설렁 침습해오기 시작했다. 모름지기 자정대를 넘긴거 같았다. 팔뚝 같은 붕어가 다시 물리기 시작했고 더불어 추위에 손발이 오징어 타듯이 살살 쪼그라들어왔다. “어, 어…” 선웅이는 저도몰래 외마디 떨리는 소리를 내면서 급히 도구상자를 열었다. 그속에는 물을 끓여먹을수 있게 버너와 코펠이 비치되여있었다. 선웅이는 번마다 낚시질 나오면 코펠에 물고기를 삶아서 술 한잔 마시는것으로 추위를 덜군 했다. 굵은 붕어 두마리를 깨끗이 다듬어서 냄비에 넣고 물이 끓어오기 시작할 무렵 느닷없이 소변이 마려웠다. 어두컴컴한 한밤중이라 보는 사람도 없어 그 자리에 일어선채로 옆으로 방뇨하면서 그 경황에도 머리를 돌려 헤드랜턴으로 찌를 지켜보는데 방정맞게도 그때 찌가 심하게 둥둥 떠올랐다. 선웅이는 소변을 멈추고 후다닥 낚시대를 잡아챘으나 이미 미끼는 략탈당한 뒤였다. 게다가 불시에 속옷으로 되들어간 거시기가 브레이크 작동이 제대로 되지 않아 여뇨를 줄줄 흘리면서 살이 찜찜해왔다. 꿩 잃고 알 깬 형국도 아니고 어쨌던 많이 랑패상이였다. 그나마 그 사이 고기가 잘 익어있어 다행이였다. 고추장을 크게 풀지도 않았는데 주변에는 온통 구수한 고추장냄새가 풍겨왔다. (흐흐흐. 이제는 나도 조선족인줄 알아차렸겠네.) 아무래도 저쪽 로인을 요청하는게 인사인듯 싶었다. 선웅이는 후레쉬를 켜들고 로인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이 사람아, 헤드랜턴으로도 올수 있잖아? 후레쉬는 빛이 너무 강렬해요.” 지청구도 아니고 욕은 더욱 아닌 이런 자상한 타이름이 튀여나올거 같았지만 예상외로 파라솥밑에 의자를 놓고 앉은 로인은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가까이 다가가보니 로인은 어느새 잠들어있었다. 늙은 사람들은 초저녁 잠이 많다더니 맞는 말이였다. 금방까지도 선웅이는 로인이 낚시대를 던지는 소리를 들은듯싶었다. 선웅이는 발뺌발뺌 뒤걸음쳐 물러났다. 선웅이는 홀로 술 두잔에 붕어 두마리를 발라먹고 도구와 그릇들을 거두고 다시 낚시질에 몰입했다. “스르륵 스르륵…” 새벽 이슬이 내리는 소리가 방불히 들려왔다. 시간이 흐르긴 흘렀구나 싶었다. 그러다가 선웅이는 갑자기 전률하듯 몸을 뒤탈았다. 이슬 내리는 소리가 이렇게 선명할리 만무했다. 다시 귀를 도사려보니 아까 자기가 뒤를 보던 수풀속에서 인기척 소리가 들려오고있었다. 그것도 한사람이 아니였다. 선웅이는 머리칼이 쭈볏이 곤두섰다. 본능적으로 랜턴을 끄고 바지주머니에 손을 넣어 잭나이프롤 거머잡았다. 이 시간대에 이 자리에 사람이 나타난다는건 상서로운 징조는 아닐것이다. 잠간이기는 했지만 로인쪽으로 조금 움직일가 생각을 굴렸다가 괜히 애매한 로인에게 불똥이 튈거 같아 선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일단 여기서 싸움이 붙으면 잠귀가 밝은 로인이 금방 깨날것이다. 와서 도우지 않더라도 그사이 경찰에 신고만 해줘도 큰 도움이 될것이 틀림없었다. “스르륵 스르륵…” 풀잎을 밟는 소리가 더 가까이 다가왔다. 이제는 나무가지를 스치는 소리도 들려왔다. 어림짐작으로 인기척이 아까 선웅이가 대변을 보던 자리쯤에 들어선것 같았다. (제발 그 물똥 좀 밟고 한넘 넘어져라.) 백치같은 넘은 천치같은 생각을 굴리는 법인가보다. 선웅이가 막무가내로 온갖 궁리를 펼치는 사이 다가오던 인기척이 문뜩 뚝 멈춰졌다. “집에 가야해. 엄마가 야단한단말이야.” 뜻밖에도 들려오는 목소리는 애리애리한 녀자애의 목소리였다. 순간 선웅이는 긴장이 풀리면서 그 자리에 폴싹 주저앉았다. 그리고 녀자애의 말이 역시 조선말이라는것을 거의 의식하지 못하고있었다. “지금 두시가 넘었어. 우리 집에 돌아가자.” “내일부터 볼수 없는데 좀 더 있으면 안돼?” 징징대는 남자애는 아직 목청도 채 여물지 않은듯 했다. “온 하루야. 식당에서 노래방까지…엄마는 그저 너를 바래주는줄로 안단말이야. 오늘 우리 한 일 알면 난 죽어.” “이미 한바하고 한번 더 하자. 노래방에선 사람이 갑자기 들어올가봐 조마조마해서 혼났다.” 말소리가 뚝 끊기고 대신 애무가 이어지는지 간간히 신음소리가 낮다랗게 들려왔다. 선웅이는 자리를 뜨지도 못하고 그대로 낚시질도 못하고 서성거리기만 했다.  생각같아서는 어린애들의 철딱서니없는 행각을 저지하고싶었지만 딱히 어떻게 마땅한 방법이 없었다. 어쩡쩡해있는 사이에 녀자애가 속삭이는 소리가 나지막하게 다시 들려왔다. “벌써 끝났어?” “급하니까 …이걸 어쩌니.” 남자애는 죄지은 목소리로 떠듬거렸다. 녀자애는 별로 개의치 않는듯 한결 밝은 소리로 말했다. “그럼 이만 집에 돌아가자.” “좀만 더 있으면 안돼.” “너 계속 끝없이 칭얼대면 어쩌니? 오늘 벌써 두번이잖아. 그렇게 싫은거 왜 가? 안 가겠다고 뻗치란 말이야.” “대학 안 갈수 없잖아. 말로는 여기서 시험칠수 있다고 해도 그게 아직은 실행단계에 들어가지 않은 모양이더라.” 락담한 남자애는 주절주절 두서없이 말했다. “너도 명년이면 고향에 돌아가 공부할테지.” “아마 그러겠지.” 두사람의 목소리가 오던 길로 멀어지더니 나중에는 가뭇없이 사라졌다. 시계를 보니 새벽 세시가 가까와오는 시점이였다. 생물체로서의 인체가 가장 취약한 시간대였다. 선웅이는 하품을 길게 하면서 의자에 주저앉았다. 더이상 낚시질할 흥취가 없어졌다. 낚시대를 거두며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면서 선웅이는 개떡같은 인생이라도 찰떡같이 살아야 하는데 하는 아쉬움을 털어버릴수 없었다. 동녘이 바야흐로 희게 기지개를 켜는지 주변 물체들이 흐릿하게나마 어른거렸다. 선웅이는 짐을 지고 일어섰다. 후레쉬를 켜려다가 괜히 단잠을 자는 로인을 깨울가봐 한발짝한발짝 조심스레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미처 다가가기도전에 로인이 서서 어슬렁거리는 모습이 먼저 눈에 띄였다. 어느새 로인도 깨여있었다. 그리고 선웅이가 다가오고있는것도 벌써 눈치채고있었다. “집에 돌아가시오?” 로인은 뒤돌아도 보지 않은채 말을 걸어왔다. 가까이서 보니 로인은 고기망태를 들어 그속에 든 고기를 그대로 호수에 다시 방류하고있었다. “아, 고기를 그대로 놓아주네요.” “암, 손맛을 즐겼으면 그만 족하우. 고기는 고기대로 살아야겠지.” 로인은 여전히 온화한 목소리로 조용히 말했다. 그러는 로인뒤로 선웅이는 지나치면서 아마 이 평생 다시는 낚시질을 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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