륙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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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평론
2019년 07월 19일 17시 31분  조회:1520  추천:0  작성자: 륙도하

#시론

              원관념과 보조관념


지난 시간에 이어서 오늘도 습관에 관한 얘기를 더 해보고자 합니다. 우선 저의 경우로 말씀드렸듯이 첫번째는 같은 단어는 웬만해서 두번 이상 쓰지 말자
두번째는 인칭을 가능하면 사용하지 말자
                꼭 써야 한다면 한번만 어쩔 수 없을 때 두 번

꼭은 아니지만 이렇게 하는 것이 시맛을 내는 데에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세번째로 드리고 싶은 말씀 중복된 단어 조심하자 입니다
초심자들의 경우 무엇을 강조하고자 할 때 이런 실수가 나옵니다. 강조를 하고 싶어 쓰다보면 이 말도 그 말이고
그 말도 이 말인데 자꾸 가져다 붙이게 됩니다 그런데다가
한글이 참 어려워서 단어 자체가 그런 것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 구름이 운집한 이경우도 사실은 한문으로 운이
구름 운이라 중복이 되는 셈입니다 이런 것들 말고도 역전 앞에서도 전이 한문으로는 앞전자라 유의해야 합니다
아무튼 중복되는 단어를 조심해서 사용하자는 말입니다

지난 시간에  심상법에 관한 말씀을 드렸는데 조금 깊이를 더하려 합니다 어쩌면 진짜 시를 쓰는 법이라고  말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바로 원관념과 보조관념인데요

1. 원관념이란.?
내가 전하고자 하는 생각이고

2.보조관념은
내가 생각하는 원관념의 뜻이나 분위기가 잘 살도록 보조 해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나는 (원관념) 나룻배 (보조관념)
                  당신은 (원관념)  행인(보조관념)이 됩니다

 

* 내 마음은 호수처럼 맑다. -------- ------- ☜ 직유법

* 내 마음은 맑은 호수요. ------------------------- ☜ 은유법

예시로 저의 졸시 배롱나무를 보겠습니다


     배롱나무

 

너 없이 피고 지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라

나는
배롱나무가 되었다

중구난방 피는 너를 안고
밑둥이 허예지도록 나는 야위웠는데

시든 날에 여름은 가고
내 모르는 눈물이 동강에 섞이었다

희나리처럼 설운 나는
먹빛 하늘에 살 수 없었으나

명패가 삼문三問인지라
마음만은 겹겹으로 지키었다

사는 것이 한 생만은 아니라서
나는 봄마다 너를 안고 일어나

햇불이 무색하도록
꽃 피게 하리라

이 글에서 너는 원관념 피는 꽃은 보조관념
                 나는 원관념 배롱나무는 보조관념입니다




 

■  '가려뽑은《무한화서》'/ 이성복

1
시는 말할 수 없는 것이에요.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해버리면 그 전제前提를 무시하는 거예요.

3
언어는 때 묻고 상스러운 것이지만, 언어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것도 보고 들을 수 없어요. 언어는 어떤 대상이나 목적에 이르는 수단이 아니에요. 언어 자체가 대상이고 목적이에요. 언어를 수단으로 사용하면 언제나 결핍감을 느껴요. 글쓰기는 언어 자신의 탈주이며 모험이에요.

16
우리는 시를 쓰면서도 언어를 불신해요. 불성실한 하인쯤으로 여기는 거지요. 언어는 우리보다 위대해요. 언어를 믿어야 언어의 인도引導를 받을 수 있어요.

18
우리의 세계는 언어로 된 세계에요. ‘언어 너머’ 또한 언어이고, 지금 이 말조차 언어예요. 시인은 알몸으로 언어와 접촉하는 사람이에요.

20
머리는 의식적이고 사회적이지만, 손은 욕망과 무의식에 가까워요. 시는 머리를 뚫고 나오는 손가락 같은 거예요. 걸으면 벌어지고, 멈추면 닫히는 치파오라는 중국 치마 같은 거지요.

24
턱수염을 아래서 위로 쓸어 올릴 때의 느낌 아시지요. 그처럼 말에 저항이 없으면 바로 산문이에요. 시는 사람을 불편하게 하는 느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에요.

35
말은 작고 가볍게 해야 해요. ‘…임에 틀림없다 must’ 보다는 ‘…일지 모른다 may’가 힘이 있어요. 판단 유보의 어조사 ‘의矣’를 즐겨 쓰는 공자에 비해, 단정적 어조사 ‘야也’를 자주 쓰는 맹자를 ‘아성亞聖’이라 한 대요. ‘성인’에는 좀 못 미친다는 것이지요. ‘삼천년뒤 성인이 다시와도 내 말은 못 바꾼다 百世聖人復起 不易吾言’는 그의 말은 너무 도도해서 힘이 떨어져요.

36
시는 빗나가고 거스르는 데 있어요. 이를테면 ‘서재’와 ‘책’대신 ‘서재’와 ‘팬티’를 연결하는 식이지요.

39
항상 입말에 의지하세요. 가볍고 쉽게 사라지기 때문에, 입말이 소중한 거예요. 우리 누구나의 인생처럼……

65
시는 단도직입單刀直入이고 단도직입短刀直入이에요. 짧은 칼 한 자루 들고 적진으로 뛰어드는 거지요. 시는 백미터 달리기에요. 그 짧은 시간에 무슨 말을 주저리주저리 하겠어요. 말수를 줄여야 실수도 적어요.

67
가야금 탈 때 손으로 ‘지그시’ 눌러주어야, 깊고 부드러운 음이 나오지요. 멋진 이미지로 장식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이 ‘지긋함’이에요.

85
시는 반전反轉의 힘이에요. 행과행, 연과 연사이에 전환이 있어야 해요. 가령 ‘꽃이 피었다 - 새가 울었다’는 연결보다 ‘꽃이 피었다 - 새가 죽었다’는 연결이 힘이 있어요.

86
'아주머니 속에 주머니가 있다’ 이런 식으로 말을 벗겨보세요. 주머니 속에는 또 머니가 있지요. 그러니까 아주머니의 주머니에 돈이 있다는 거잖아요. 이렇게 양파 껍질 벗기듯이 벗기다 보면 나중엔 아무것도 안 남아요. 시는 대상 뒤에 아무것도 없다는 걸 보여주는 거예요.

99
시적 언어는 치타가 누의 목덜미를 무는 것처럼 대상의 급소를 공격해요. 그 한순간을 위해 '뜨거운 솥을 핥는 개'처럼 자꾸 말을 던져야 해요.

135
멋있는 것, 지적知的인 것, 심오한 것 찾지 마세요. 피상적이고 무의미한 것에서 그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는 게 시예요. 사소한 일상보다 더 잔인한 건 없어요. 죄수를 발가벗겨 대나무밭에 눕혀 놓으면, 나날이 커 올라오는 죽순竹筍에 찔려 서서히 죽어간다고 하지요.

170
시는 천둥벼락이고 집중호우예요. 머뭇거리지 말고 바로 써야 힘이 있어요. 악어가 누의 목덜미를 물고 물속으로 들어가는 것 보셨지요. '저 미안하지만 손 좀 잡으면 안될까요' 이러지 말고 바로 잡아버리세요. 안 그러면 힘들어져요.

171
항상 보여줘야해요. 내가 왜, 어떻게 우울한지 알려고 글을 쓰는 건데, '나 우울해, 건드리지마!' 이러면 되겠어요. 보이게 쓸 형편이 아니라면 말의 꼬임새라도 만들어야 해요. 그래야 '나'도 살고, '우울'도 살아요.

174
시 쓰기는 봉오리가 피어나거나, 풍선이 부풀어 오르는 것과 같아요. 처음에는 어떤 모양이 나올지 짐작하기 어려워요. 또 시는 재즈 연주와 비슷해요. 과정이 목표이고, 멈추는 곳이 끝나는 곳이에요.

217
시는 침술과 같아요. 문제 되는 부위를 정확히 찔러 통증을 진정시키는 것. 투약이나 수술 없이도, 약간의 아픔만으로 고통을 제거할 수 있다는 거. 시는 한의학과 마찬가지로 오랜 전통이에요.

278
다친 새끼발가락, 이것이 시예요.

307
시는 알고 쓰는 게 아니라, 쓰는 가운데 알게 되는 거예요.

331
막막한 바다에서 어부는 어디에다 그물을 쳐야 할지 알아요. 간절함과 안쓰러움, 부질없음과 속절없음이 시의 포인트이고 기술이예요.

423
시하고 연애하고 같다고 하지요. 더 깊이 들어가면 저절로 빠져나올 텐데, 나오려고 하니까 못 빠져나오는 거예요.

425
이유 없이 상대가 함부로 대하더라도 속상해하지 마세요. 그 대신 나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지 살펴보세요. 나한테 잘못이 없으면 그 사람 문제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수신하지 않은 편지는 발신자에게 돌아간다 하잖아요.

430
왜 자기 눈에는 자기가 안 보일까?

470
'당랑거철螳螂拒轍'이란 말이 있지요. 사마귀가 겁 없이 수레 앞에 버티고 서서 한번 해보자고 덤비는 것이지요. 참 말도 안 되는 한심한 짓이지만, 시도 그런 것 아닐까 해요. 아름드리 나무 기둥을 뽑겠다고 부둥켜안고 용써보는 것. 실패할 수밖에 없는 싸움에, 실패 안 할 수밖에 없다는 듯. 이 '올 인'하는 것. 그거라도 안 하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겠어요.

(이성복 시론집《무한화서》에서)







 

그림에 빗대어 말할 때, 시는 풍경화라고 할 수 있다. 시를 읽으며 선명하게 그려지는 어떤 풍경이 없다면 모호한 안개 속을 거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정지용 시인의 향수를 읽으면 유년의 한때가 머릴 스치고 지나간다. 향토적이며 묘사적이며 또한 감각적인 시의 전개는 누구나 읽는 순간부터 자신의 풍경을 그리게 된다. ‘향수’의 전개 방식은 후렴구가 반복되는 병렬식 구조로 되어 있으며
선명한 영상과 동시에 감각적 언어의 붓질로 인하여 화면 가득 고향에 대한 아득한 그리움에 젖어 들게 한다. 연마다 시상을 전개하거나 매듭지어 연결하는
영상미적 집약의 서정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또한, 한 편 속에 시각적, 청각적, 공감각적, 촉각적 시상과 심상들이 자연스럽게 표현된 개연성과 당위성을 내포하고 있어 글이 아닌 그림을 감상한 듯한 느낌을 전달하고 있다. 누구나 아는 작품이지만 ‘시와 풍경’이라는 글제에 가장 적합한 작품이기에 전문을 인용해본다.

향수

정지용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뷔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벼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 빛이 그립어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傳說(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의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안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줏던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
알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집웅,
흐릿한 불빛에 돌아 앉어 도란 도란거리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향수 / 정지용』전문 인용

문학의 장르는 다양하며 시 또한 시 속의 시 장르는 매우 다양하고 그것은 표현의 기법 이전에 심상의 전이와 시상의 표출 방식에 대한 시인 자신의 다양성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같은 풍경을 보고도 얼마든지 다른 그림이 나올 수 있다. 관찰자의 각도, 시간, 마음상태, 풍경의 배경 이 모든 것들이 달리 보이는 그림이 나오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다. 그림과 시의 동질성을 분석해본다면 같으면서 다르다는 것이다. 있는 것을, 보이는 것을 그대로 그린다면 다만, 풍경화일 것이다. 하지만 풍경 뒤에 분명히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풍경을 그린 그림이 웅숭깊듯 시 역시 풍경 너머 보이는 풍경을 그려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독자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은 스스로 먼저 감동해야 한다. 자기 감동이 선행되지 않은 글은 사상누각이며 진정성을 훼손하는 일이다. 좋은 풍경화를 아무리 세밀하게 원본과 흡사하게 그려낸다 해도 복사본에서는 생명의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타인의 글을 답습하거나 타인의 붓을 가져와 내 글에 현란한 채색을 한다 해도 그것은 이미 풍경으로서의 존재가 없다. 내 글에 대한 질감과 색채를 개발하고 연구할 때 그것이 풍경이 가진 배경의 의미를 정확하게 해석하는 일의 기초가 될 것이다.

시와 풍경, 풍경과 배경을 나름의 색으로 채색한 몇 작품을 소개해 본다.

안개 속 풍경

정끝별

깜깜한 식솔들을 한 짐 가득 등에 지고
아버진 이 안개를 어떻게 건너셨어요?
닿는 순간 모든 것을 녹아내리게 하는
이 굴젓 같은 막막함을 어떻게 견디셨어요?
부푼 개의 혀들이 소리없이 컹컹 거려요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발 앞을
위태로이 달려가는 두 살배기는
무섭니? 하면 아니 안 무서워요 하는데요
아버지 난 어디를 가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바람 속에서는 바다와 별과 나무,
당신의 냄새가 묻어 와요
이 안개 너머에는 당신 등허리처럼 넓은
등나무 한 그루 들보처럼 서 있는 거지요?
깜박 깜박 젖은 잠에서 깨어나면
어느덧 안개와 한몸되어 백내장이 된
우우 당신의 따뜻한 눈이 보여요
덜커덩 덜컹 화물열차가 지나가요
그곳엔 당신의 등꽃 푸르게 피어 있는 거지요?
나무가 있으니 길도 있는 거지요?
무섭니? 물어주시면
아니 안 무서워요! 큰 소리로 대답할게요
이 안개 속엔 아직 이름도 모른 채 심어논
내 어린 나무 한 그루가 짠하게 자라는걸요!
나무는 언제나 나무인걸요!

『안개 속 풍경 / 정끝별』전문 인용

밥통의 계보를 묻다

서동인

부엌에 나뒹구는 파도 빛 얼룩진
밥통 뚜껑을 오랜만에 열었네
세상에, 주인이 먹다 남은 공양미
곰팡이 꽃망울 터뜨리는 텃밭에 나비도 없이
어디선가 검은 구름덩이 내려앉아
엉덩이를 살짝 살짝 내밀고 있었네
속의 것들이 울렁거리는 내 속도
내시경을 들이밀면 저런 풍경일까
하늘까지 뚫린 산동네 골목길을 기어 내려와
살아서도 싸늘한 지하 셋방이 싫어
공중에 매달린 거미집 옥탑방 까지
힘없는 주인을 따라 세간 옮길 때마다
용달차 한구석에 처박힌 불쌍한 녀석,
한강도 서너 번 건너 본 밥통은
현기증 때문인지 제대로 밥 지을 줄도 모르네
어느 해 였던가 유조선 시프린스호 기름띠 보상으로
바닷가 우리 家系에 걸어 들어온 너의 정체,
그 겨울 뚜껑을 연 양식장 굴껍데기
꺼먼 속살에 놀란 아버지 발길에 차여
파도 빛 멍든 너를 새 것으로 바꾸진 못하겠네
문득, 병들고 지친 밥통의 계보를 묻다가
거울 속 네 주인처럼 짠한 생각이 들었네

『밥통의 계보를 묻다 / 서동인』전문 인용

운주사 깊은 잠

이명윤

그들의 꿈에 잠시
스쳐가는 풍경처럼 다녀왔다
눈썹이 지워지고 입술이 지워져가는 석불들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어느 날 눈이 사라졌으니
잠에서 번쩍 눈뜰 염려가 없고
입술이 지워졌으니
또다시 저녁이 와도 끼니 걱정 안하실 일
무심한 얼굴을 더듬어 내려오다
두 손으로 곱게 모은 기도를 보았는데
언젠가 불타는 세월이
기도 앞을 쿵쿵거리며 뛰어다녔을 때도
철없이 눈썹을 쪼던 새가 어느덧 눈이 멀어
발등에 떨어져 죽었을 때도
꿈쩍하지 않았던 것은
분명 기도보다 깊은 잠에 빠진 까닭이다
점점 얼굴이 지워져가는 얼굴들이
착한 아이들처럼 나란히 앉아
세월 좋게 주무시고 있었다
덩그러니 코만 남은 얼굴이
아침도 벗고 저녁도 벗고 훌훌 표정도 벗고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어떤 분은 아예
자리를 깔고 하늘 아래 누워 계셨다
신기한 듯 쳐다보는 사람들을
(허공에 주렁주렁 박힌 창백한 눈과 입들을)
본체만체
저들끼리 야속하게
태초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운주사 깊은 잠 / 이명윤』전문 인용


위 인용한 세 편의 작품의 공통점은 풍경에서 풍경의 배경을 담아냈다는 점이다. 또한, 자신만의 붓을 들어 고유의 색을 채색하여 그 온도를 차별화했다는 점에서 본 글의 주제어인 시, 풍경화에 적합한 작품이라는 생각에 인용했다.

모던 포엠 6월호 글 감상의 주제는 시, 풍경화에 부합하는 작품 세 편을 선별하여 풍경이 담고 있는 시인의 시선을 주목해 본다. 단순하게 풍경을 그려내지 않고 세상을 담는 의미를 부여한 현상을 생각하며 시를 감상해 보자. 첫 작품은 송병호 시인의 [달동네의 손금을 읽는 오후]라는 작품이다.

달동네의 손금을 읽는 오후

송병호

좁은 고샅길

돌아도 돌아도 언제나 제자리인 그 골목에
숙명처럼 상처 안고 똬리 튼 골 깊은 손금들이 있다
명랑이발관의 해맑은 미소를 지나쳐
엇갈린 오복담뱃가게 생명선은 차마 풍년 쌀가게의 재물선과
영영 만날 수 없는 구획이 되었다

그나마 입시학원의 아직은 흐릿한 장래선만 또렷한 선이다

실선들, 흔들릴 때마다 칙칙한 배경의 가끔 끊어졌던
동시상영 두 편의 영화는 오간 데 없고 낡은 영사기 한 대
골목 짓무른 앵글로 바람을 채록하고 있다

한때는 민심을 쥐락펴락했을 선과 선의 공존
바닥이 다른 면 위의 또 다른 점선들
깨진 유리창 밖으로 하루를 점치지 못하는
도시의 손금으로 남아 있다

수면 手面의 수상학은 믿을게 못 된다고
툴툴거리며 다 닳아빠진 지문을 가지런히 포개
혼자 졸고 있는 노파

요즘은 거의 사라진 단어 달동네. 달동네는 도시의 외곽이나 산등성, 산비탈 등 비교적 높은 지대에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동네를 의미한다. 달동네의 연원은 해방 이후 귀국한 해외동포들과 종전 이후 월남한 난민들이 도시의 외곽에 판잣집을 짓고 살기 시작하면서 형성되기 시작했다. 달동네에 대한 의의와 평가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1960년대 이후 약 40년 동안 도시빈민 주거지역의 전형이었던 달동네의 도시빈민촌은 이른바 달동네 문화라고 부를 만큼 능동적이고 건강한 빈민문화를 상징했다. 이농민들이 주로 거주했던 달동네는 값싼 주거지인 동시에 생존의 공동체였다. 농촌의 이웃관계가 지속되는 공동체였으며, 험난한 도시생활에 적응하기 위한 기착지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진행된 재개발사업으로 달동네의 도시빈곤층은 주거비가 싼 곳을 찾아 단독주택지의 지하방, 옥탑방, 비닐하우스, 쪽방 등으로 흩어졌다. 일반인들에게 빈곤층은 눈에 띄지 않는 집단이 되었고, 빈곤층은 고립되면서 이전의 공동체를 통해 얻었던 물질적·정신적 이익을 더 이상 누리지 못하게 되었다.

『다음 백과 사전』인용

달동네와 손금. 얼핏 아무 관계도 없는 것 같지만 시인은 폐가처럼 변한 달동네의 스산한 풍경 속에서 그 배경을 읽고 있다. 시의 전반을 흐르는 기조는 관찰이 아닌 관조를 바탕으로 시인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오래된 기억의 골목과 병치하여 손금이라는 占 행위와 절묘하게 묘사하고 있다.

돌아도 돌아도 언제나 제자리인 그 골목에
숙명처럼 상처 안고 똬리 튼 골 깊은 손금들이 있다
명랑이발관의 해맑은 미소를 지나쳐
엇갈린 오복담뱃가게 생명선은 차마 풍년 쌀가게의 재물선과
영영 만날 수 없는 구획이 되었다

시인이 채록한 달동네에 대한 온도는 2연 첫 행에 기록하고 있다. 달동네의 골목은 돌아도 돌아도 언제나 제자리인 골목에서 가난의 대물림이라는 단어를 연상하게 된다. 그 골목의 이리저리 난삽하게 이어진 골목과 골목의 입구와 출구는 입구라는 개념도 출구라는 개념도 없다. 들어오는 곳이 나가는 곳이며 나가는 곳이 들어오는 곳이라는 것은 나갈 곳이 없다는 말과 일맥상통하는 느낌이다. 명랑이발관, 오복담뱃가게, 풍년 쌀가게가 의미하는 삶의 고단한 무게를 시인을 달동네라는 손바닥에서 보고 있다. 하지만 3행에서 시인은 달동네의 희망을 보여준다.

그나마 입시학원의 아직은 흐릿한 장래선만 또렷한 선이다

다른 모든 손금의 선들은 희미하고 퇴락하고 지워져 더 볼 것이 없지만 흐릿한 장래선은 또렷하다는 표현에서 시인이 던진 메시지는 경쾌하고 밝은 모습을 독자에게 던진다.

선과 선의 공존
바닥이 다른 면 위의 또 다른 점선들

도시의 손금으로 남아 있다

손바닥 위의 손금은 서로 공존하고 있다. 혹은 운명을 혹은 재물을 혹은 생명을 하지만 달동네가 만든 손금은 ‘도시’라는 새로운 사업화 시대를 건설하는 또 다른 점선의 기초가 된다. 도시의 손금이며 도시를 이루는 손금 일부가 되었다는 달동네 풍경의 배경, 시인이 읽는 달동네의 채색이 어떤 색인지는 시를 읽는 독자 누구라도 같은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결구 6행의 전체가 달동네와 현재와 과거, 미래의 모습을 담담한 어조로 조망하고 있는 것, 생의 막바지에 와있는 노파의 눈꺼풀에서 산업화 시대의 단면과 그 속에서 잃어버린 삶의 한 단면을 그리워하게 만드는 이중성을 갖게 된다.







 

 '관념적인 한자어를 척결하라'


어떤 말이 시가 될 수 있고 어떤 말이 시가 될 수 없을까? 일상어와 시어는 따로 존재하는 것일까?
이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들이 분분하지만, 대체로
모든 일상어가 시어로 쓰일 수 있다는 데에는
동의하고 있는 듯하다.

문장과 대화에서 쓰이는 모든 말은 시어가 될 수 있다. 우리 현대시에는 표준어뿐만 아니라 꽤 오래 전부터 방언과 비속어까지 심심찮게 시어로 등장했다. 김용택은 “환장하것네 환장하것어/ 아, 농사는
우리가 쌔빠지게 짓고/ 쌀금은 저그들이 앉아
올리고 내리면서/(…)/ 풍년 잔치는 저그들이 먼저 지랄”()이라며 전라도 사투리를 통해 노골적으로 농민들의 편을 든다. 김진경은 “복어새끼처럼 왜 그런대유/ 배에다 바람을 잔뜩 집어넣구/ 가시를 있는 대루 세우믄 누가 무서워헐 줄 아남유”()하고 충청도 말로 능청을 부린다. 안상학은 “보래요. 삼시세끼 빵만 묵고 살라믄 살니껴? 대한민국 워델 가도 그런 사람 없을께시더”()라면서 경북 안동 말을 시에 적극적으로 끌어들인다.

김수영이 일찍이 “그년하고 하듯이 혓바닥이 떨어져나가게/ 물어제끼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어지간히 다부지게 해줬는데도/ 여편네가 만족하지 않는다”()며 너스레를 떨자, 한참 후에 이에 화답하듯 황지우도 풍자의 대열에 합류한다. “간밤에도 그는
외국 바이어들을 만났고, “그년”들을 대주고 그도 “그년들 중의 한 년”의 그것을 주물럭거리고 집으로 와서 또 아내의 그것을 더욱 힘차게, 더욱 전투적이고 더욱 야만적으로, 주물러주었다.”() 이에 질세라 박남철은 한 발 앞서간다. “내 시에 대하여 의아해하는 구시대의 독자놈들에게→차렷, 열중쉬엇, 차렷,”()
하고 호통을 친다.

현대어뿐만 아니라 중세국어, 영어, 화살표 같은 기호까지 시어의 영역에 들어와 있다. 그리고 문장에 쓰이는 마침표·쉼표·물음표·따옴표·줄표와 같은 부호가 시에 끼치는 영향은 지대하다 못해 절대적이다. 심지어 옥타비오 파스는 침묵도 말이라고 한다. “침묵조차도 무언가를 말하는데, 침묵은 무(無)가 아니라 여전히 기호들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어는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강철 조각이 아니다. 적어도 용접공이 강철과 강철을 이을 때 일어나는 불꽃이거나 그 불꽃의 뜨거움이거나 불꽃이 내장하고 있는 위험한 미래여야 한다. 그래서 때로 시어는 한글맞춤법이나 국어순화운동에 딴청을 부리기도 한다. 나는 자장면보다 ‘짜장면’이, 메리야스보다 ‘런닝구’가, 브래지어보다는 ‘브라자’가, 펑크보다는 ‘빵꾸’가, 머큐로크롬보다 ‘빨간약’이나 ‘아까징끼’가 더 시적인 말이라고 생각한다. 옥타비오 파스도 시적인 언어는 일상으로부터 일탈할 때 태어난다고 말하고 있다.

“시적 창조는 언어에 대한 위반으로 시작한다. 이러한 작용의 첫 번째 행동은 말들을 지탱하고 있는 뿌리를 뒤흔드는 일이다. 시인은 일상적인 일들, 그리고 그것들과 맺고 있는 연관 관계에서 말들을 뿌리째 뽑아내어 일상적 언어의 획일적인 세계와 결별시킨다. 이때 단어들은 이제 막 태어난 것처럼 생생한 것이 된다.”

동아시아의 한자문화권 전통 속에 말을 하고 글을 쓰는 우리는 한자 혹은 한자어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우리 시인들은 한자의 형상이 드러내고 있는 시각적 이미지에 끌릴 수밖에 없었다. 한자가 시인들을 자극하고 고민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기호의 의미는 같지만 ‘산’이라고 쓸 때와 ‘山’이라고 쓸 때 그 함의는 적지 않은 차이를 보인다.(우스운 이야기 하나. 어릴 적에 나는 음식점 간판에 적힌 ‘산낙지’를 보고 한동안 산에 사는 낙지인 줄 알았다. 가재처럼 심산유곡의 돌덩이 밑 어디쯤 사는……)

그런데 뜻글자라고 해서 그 뜻과 형상이 다 미학적으로 완전한 것은 아니다. 관념적인 한자어는 시에서 척결해야 할 대표적인 낡은 언어다. 시적 언어의 성취 목표를 한 50년 이전쯤에 두고 있는 사람일수록 관념적인 한자어를 쉽게 지워버리지 못하는 습성이 있다. 유치환이 에서 “哀愁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라고 노래한 것은 1930년대 말이었고, 박인환이 “사랑의 진리마저 愛憎의 그림자를 버릴 때”라며 절망스러워한 것은 1950년대 한국전쟁 직후였다. 김현승이 ‘堅固한 고독’을 발표한 때는 60년대 중반이었다. 이 시인들이 ‘애수’와 ‘애증’과 ‘견고한 고독’을 노래할 즈음에 그 시어들은 ‘막 태어난 것처럼 생생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지금 그 시어들은 시간의 무덤에서 하얗게 풍화된 죽은 말들이다.

무엇보다 관념적인 한자어를 써야만 그럴 듯한 시가 된다는 착각이 문제다. 정진규는 시에서 관념이 ‘화자의 우월적 포즈’()라고 꼭 집어 말한 바 있다. 당신은 관념적인 한자어가 시에 우아한 품위를 부여한다고 착각하지 마라. 품위는커녕 한자어 어휘 하나가 한 편의 시를 누르는 중압감은 개미의 허리에 돌멩이를 얹는 일과 같다. 신중하고 특별한 어떤 의도 없이 아래의 시어가 시에 들어가 박혀 있으면 그 시는 읽어 보나마나 낙제 수준이다.

갈등 갈망 갈증 감사 감정 개성 격정 결실 고독 고백 고별 고통 고해 공간 공허 관념 관망 광명 광휘 군림 굴욕 귀가 귀향 긍정 기도 기억 기원 긴장 낭만 내공 내면 도취 독백 독선 동심 명멸 모욕 문명 미명 반역 반추 배반 번뇌 본연 부재 부정 부활 분노 불면 비분 비원 삭막 산화 상실 상징 생명 소유 순정 시간 신뢰 심판 아집 아첨 암담 암흑 애련 애수 애정 애증 양식 여운 역류 연소 열애 열정 영겁 영광 영원 영혼 예감 예지 오만 오욕 오한 오해 욕망 용서 운명 원망 원시 위선 위안 위협 의식 의지 이국 이념 이별 이역 인생 인식 인연 일상 임종 잉태 자비 자유 자학 잔영 저주 전설 절망 절정 정신 정의 존재 존중 종교 증오 진실 질서 질식 질투 차별 참혹 처절 청춘 추억 축복 침묵 쾌락 탄생 태만 태초 퇴화 패망 편견 폐허 평화 품격 풍자 피폐 필연 해석 행복 향수 허락 허세 허위 현실 혼령 혼령 화려 화해 환송 황폐 회상 회억 회의 회한 후회 휴식 희망

“진부한 말이란 보통 사람들이 일상에서 쓰는 말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모든 경서와 옛사람들이 이미 언급한 말의 대부분이 이른바 진부한 말이다.”(김창협,  외편) 시는 이런 진부한 시어의 무게를 감당할 수가 없다. 사유라는 것은 원래 그 속성상 관념적인 것이고 추상적인 법이다. 하지만 관념을 말하기 위해 관념어를 사용하는 것은 언어에 대한 학대행위다. 관념어는 구체적인 실재를 개념화한 언어이기 때문이다.

관념어가 시만 좀먹고 있는 게 아니다. 예식장에도 있다. 흔해빠진 주례사가 그것이다. 행복과 공경과 우애와 사랑이라는 말이 들어간 주례사가 귀에 들리면 한시바삐 밥을 먹으러 가고 싶어진다. 진정한 사랑은 개념으로 말하는 순간 지겨워진다. 황지우의 시처럼 “그대 옷깃의 솔밥이 뜯어주고 싶게 유난히 커 보이는”( 것, 그게 사랑의 표현방식인 것이다.

관념어는 진부할 뿐 아니라 삶을 왜곡시키고 과장할 수도 있다. 또한 삶의 알맹이를 찾도록 하는 게 아니라 삶의 껍데기를 어루만지게 한다. 당신의 습작노트를 수색해 관념어를 색출하라. 그것을 발견하는 즉시 체포하여 처단하라. 암세포 같은 관념어를 죽이지 않으면 시가 병들어 죽는다. 상상력을 옥죄고 언어의 잔칫상이어야 할 시를 난장판으로 만드는 관념어를 척결하지 않고 시를 쓴다네, 하고 떠벌이지 마라.

관념어를 떠나보내고 나면 그 휑하니 빈자리가 몹시 쓸쓸하게 보일 것이다. 당신은 그 빈자리를 오래 응시하라. 당신의 상상력이 가동하기 시작할 것이고, 상상력은 이미지라는 처녀를 데리고 올 것이다. 말로 그림을 그릴 줄 아는 그 처녀를 꽉 붙잡고 놓지 마라. 관념어를 떠나보낸 자리에 그 처녀를 정실부인으로 들어앉혀라. 그래도 관념어의 옛정이 그리워져 못 견디게 쓰고 싶거든 그 말을 처음 쓴 지 30년 후쯤에나 써라.

당신에게 시 한 편을 읽어주겠다. 이시영의  전문이다. 나는 이 시에서 ‘고독’이라는 말을 발견하고 온몸이 찌릿찌릿해졌다. 이쯤은 되어야 고독을 말할 자격이 있다.


고독을 모르는 문학이 있다면 그건 사기리
밤새도록 앞뜰에 폭풍우 쓸고 지나간 뒤
뿌리가 허옇게 드러난 잔바람 속에서 나무 한 그루가
위태로이 위태로이 자신의 전존재를 다해
사운거리고 있다

(안도현/ 시인·우석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시창작 강의] (22)

<해체시(解體詩)란?>


오늘은 현대시의 난해성을 가져온 '해체시'와 '무의미시' 중에서,  해체시에 관해 얘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어느 시대거나 모든 분야에 있어서 전통적인 것을 소중히 여기고 이를 계승하고자 하는 온건한 경향이 있는 반면, 이와는 달리 낡은 것보다는 새로운 것을 지향하고자 하는 진취적인 경향이 공존합니다.
전자를 보수파, 후자를 개혁 내지는 혁신파라고 부릅니다.
역사는 이 두 상반된 대립들이 빚어낸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저 유명한 변증법의 이론이기도 합니다.

시에 있어서도 예외는 아닙니다.
평시조에 대한 사설시조, 시조에 대한 신체시, 신체시에 대한 자유시 등의 대립들을 통해 현대시로 발전해 오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1930년대에 이르게 되면 이상(李箱)에 의해 소위 과격한 모더니즘의 혁신적인 실험시가 나타납니다.
이상(李箱)의 이러한 실험적인 시풍(詩風)은 한때 잠잠하다가 1980년대에 다시 기승을 부리며 일어납니다. 이것이 이른바 해체시(解體詩)라는 것입니다.
젊은 시인들에 의해 시도된 바 있는 이 해체적 경향은 이제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새로운 서구적 풍조의 그늘 밑에 서식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 시단에서 시도된 해체적 경향을 몇 가지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장르의 경계를 무너뜨림

시를 산문화(散文化)한다든지, 시에 희곡이나 시나리오 기법을 도입하기도 하고, 시 속에 회화나 도형을 삽입하기도 합니다.

둘째, 표현 매체의 개방

시는 언어 예술이지만 표현 매체를 언어만으로 한정하지 않고 그림, 사진, 도형, 기호 등을 동원하여 표현하기도 합니다.

셋째, 기존의 규범 문법에 구속되지 않음

사회적인 약속인 기존 문법에 구애되지 않고 비문(非文)이나 논리적 타당성이 없는 문장을 구사하기도 합니다.

넷째, 시적 주체의 소멸

독특한 개인의 생각이나 감정이 담긴 개성적인 글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고, 타인의 글들을 여기저기서 무작위로 끌어다 자신의 글처럼 쓴다든지[pastiche], 광고나 기사(記事), 사진 같은 것들을 오려 붙인다든지[collage] 하는 행위입니다.

다섯째, 탈이념(脫理念) 현상

어떤 주의(主義)나 사상(思想)에 예속되지 않고 자유를 추구합니다. 나아가서는 도덕과 윤리의 속박으로부터도 벗어나고자 합니다.

여섯째, 예술의 저속화[kitsch] 현상

일상의 저속한 것들 속에서 소재를 구한다든지, 속어나 욕설 등의 비어(卑語)들을 의도적으로 사용하는 경향으로 이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중요한 특징으로도 지적되고 있기도 합니다.

이러한 해체시의 특징들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기존의 것들 곧 전통적인 것들에 대한 거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해체 사상이 80년대에 유행하게 된 것은 당시 인기를 얻고 있었던 프랑스의 사상가 데리다(J. Derrida)의 영향 때문으로 보입니다.
데리다의 해체 이론은 기존의 것을 왜 바꾸어 놓아야 하는가 하는 그 이유를 논리적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데리다의 사상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불확정성(不確定性)’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의 사물은 그것을 바라다보는 위치와 각도에 따라서 천태만상의 다른 모습들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사물의 양태를 하나로 확정지어 설명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사물의 시간적 존재 양태는 끊임없이 변해 가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런데,서구의 합리주의는 사물을 우열의 관계로 잘못 확정짓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이성>감성, 남성>여성, 백인>유색인, 기독교>다른 종교 등으로 앞의 것을 우월한 것으로 확정하고 있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들의 우열의 관계는 바른손과 왼손의 관계처럼 기회가 많이 주어지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따라 결정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는 자리를 뒤바꾸어 후자에게도 기회를 주자는 것입니다.
기존의 제도, 전통, 관습 이러한 모든 것들이 잘못 굳어져 있으니 이를 해체(deconstruction)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해체는 결코 파괴(destruction)가 아니라고 합니다.

물론 잘못된 전통이나 편파적인 관습 등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어느 한 사회가 향유하고 있는 문화는 수천 년 동안의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그렇게 형성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따라서 전통으로 자리 잡게 된 것들은 비교적 최선의 것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잘못된 것들보다는 바람직한 것들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새로운 것을 지향하는 태도는  바람직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새로운 것은 기존의 것보다 가치 있는 것으로 검증될 수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한다면 그것은 개혁의 대열에 끼지 못하고 개악과 파괴로 규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해체시가 시도하고 있는 것들은 어떠한가 냉정히 생각해 봐야 합니다.
전통적인 시의 인습을 무너뜨리는 바람직한 혁신들인가.
아니면 기존의 것을 뒤집어 놓겠다는 데리다적인 단순한 거부의 발상인가를 신중히 검토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여러 가지 실험적인 시도도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이 시(詩)로 불리어지려면 언어를 떠나서는 안 되고 또한 예술의 반열에 놓이려면 아름다움을 잃지 말아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새로운 시에 대한 도전은 의미가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아름다운 언어의 구조물’이라는 한계를 넘어서서는 곤란할 것입니다.

건필을 기대하며 다음주 무의미시에 대한 소개로 시창작 강의를 마무리하겠습니다.




 

 

시(詩)와 평론(評論)에 대한 소고(小考)/ 이담 정항석

일상적으로 시에 대한 것과 그 평에 대한 것은 많이 그리고 쉽게 접하곤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접근에 대한 마음가짐과 훈련이 없다면 지난(持難)한 것이 되고 마는 경우를 경험하게 된다. 이 글에서는 위와 같은 내용을 바탕으로 다음과 같은 것을 역설하고자 한다.

‘시(詩 poem)는 짓는 것이고 평론(評論)는 쓰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선적으로 이에 대한 명제적(命題的)이고 선언적(選言的)인 주장을 어떻게 투영시켜야 하는가?

첫째는 그 접근의 마음가짐이다. 얼른 말하자면 이렇다. ‘시(詩)짓기는 절대적으로 글쓰기의 한 종류이다’. 글쓰기에 기본적인 바탕이 없이 ‘아귀가 맞는 글쓰기’가 어느 정도의 훈련이나 능력이 아니 되면 시를 짓는 것은 매우 어려워진다. 시가 다소 짧은 어휘나 단어들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만만해 보이지마는 결코 가벼이 다룰 것은 아니다.

예컨대, 1) 문학 장르로써 시가 만만치 않다는 것은 이렇다. ‘모를 잘 심는 농부’라 하여 벼의 생육 상태를 알 수 있어도 그 생물학적 분석은 하지 못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시인이 되기 위해서는 이 둘을 다 해야 한다. 2) 많은 공부를 해야 한다. 때에 따라서는 연구도 해야 한다. 아울러, 시대를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시인(詩人 poet)의 역할이다. 그래야 가식(假飾)이 없이 선험적 진솔함을 담을 수 있다. 단지 시(詩)를 수백 편 읽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이러할 경우 시의 형식과 문장 등을 외어서 하는 것으로 이는 흉내에 불과하다. 3) 문학 장르에서 가장 짧은 것이지만 시는 시대를 반영하는 것으로 단지 고발이나 비판, 조소, 비아냥 등으로 그칠 것이 아니다(이것이 시라고 생각한다면 단세포적이다). 왜냐하면 ‘누구나 볼멘소리는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볼멘소리는 생산적이고 긍정적이며 교훈적이어야 한다. 이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더 설명한다.

둘째, 평론(評論)은 글쓰기에 대한 훈련과 재능이 없다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평론에서도 자의적이고 주관적인 잣대를 들이미는 것은 금기이다. 특히, 최근에서 포스트 모던(post-modern)적인(? 설명이 더 필요하지만, 이하 각설) 생각에 갇혀서 ‘감성적 위주의 시’를 폄하(貶下)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주목할 것은 그 글과 시가 1) ‘전체적인 글의 틀(frame)’, 2) ‘어법적 문장의 구성’, 그리고 3) ‘동원된 개념이 적절하게 스며있는가’를 면밀하게 고려해야 한다. 더러 신춘문예 심사를 한 이후에 나오는 심사평들은 매우 자의적인 느낌에 의존한 경우가 허다하며 때로는 모호한 경우가 많다. 이는 ‘시를 오랫동안 써 왔다’ 하여 다른 이들의 시를 쉬이 접근하여 자신의 눈짐작이나 눈대중으로 저울질하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시(詩)짓는 것과 평론을 구분하지 못하는 우(愚)를 범하는 것이다. 못하는 것을 억지로 해서도 안 된다.

3. 시는 짧은 것이 결코 아니다. 함축적으로 의미를 담을 수 있다면 최고의 것이라고 이를 수 있지만, 세월을 두고 시(詩)짓기의 견본(見本)이 되며 그 의미에서 감동과 교훈을 주는 시들을 보면 결코 단어나 어휘 몇 개로 이루어진 것은 없다. 하여 시는 언어의 경제성을 감안(勘案)한다 하더라도 한 편의 논문(論文 an article)이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글은 어떻게 써야 하는가? 간략하게 그 틀을 언급하면 다음과 같다.

<글의 구성>

1. 서론(도대체 무엇이 문제(issue)인가?)
현상(자연적 사회적 현상=고발내용)
주장(화자의 느낌를 포함)
선험적 시각(이론과 가설)
주장과 선험적 시각에서 주장을 해야 되는 우선적 설명(說明)(기술(記述)과 서술(敍述)포함)

2. 자기 주장에 대한 개념을 구체화(무엇을 언급하려고 하는가?)
시에서는 관념적 그리고 추상적 언급도 가능하지만. 개념화는 분명하게 해야 한다.
이는 자기 논리적 사고가 접목되어야(embedded) 하기 때문이다.
자기주장에 대한 것을 정의적 개념화(시에서는 예를 들어, ‘누님같은 꽃이여’라는 것도 이에 해당)를 도식화시켜야 한다
자기 주장에 대한 이론화(理論化)를 갖추는 것이며 이는 비판적이고 우회적이지만 보편적 논리를 위반해서는 안 된다.

3. 현상의 구체적 언급(이 이슈가 이슈화가 되어야 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1) ‘무엇이 문제인가’를 구체적으로 언급(=시에서는 묘사에 해당)한다
2) 화자의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어야 한다(=시의 경우, 메타포가 동원될 수 있음)
3) 현상과 대상에 대한 철저한 분석과 관찰이 수반되어야 한다.(꽃의 경우도 언제 피는지, 생육과 그 발달에 대한 것, 그 꽃이 의미하는 보편적 인식을 접목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개념을 구분할 수 있는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되 '왜 그러한지'를 필히 언급해야 하며 그 언급은 논리적이고 이성적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

4. 분석적 접근
결국, 이 부분을 언급하기 위해서 위의 과정을 거친 것으로 보아야 한다.

2.와 3.를 대비하여 '대조한다든지' 혹은 '자기주장이 현상에 어떻게 적용되고 있는지'를 언급해야 한다. 이를테면, (1) ‘현상은 이러했고’, (2) 그‘래서 이렇게 주장하는 데는 이러한 까닭이고’, (3) ‘이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것을 제시한다’는 내용이 절대적으로 분석적으로 그리고 구체적으로 언급되어야 한다.

시의 경우에서는 이 부분만을 언급하는 것으로 그치는 경우가 허다하다. 최근에는 카피라이터 식의 글이 이 경우만 언급하고, 그나마 더 자극적이고 호객 행위적인 것으로 종결짓고 마는 경우가 수두룩하다. 집을 짓다가 만 경우와 같다. 정통성이 있는 운문(韻文)을 공부한 이후에 해야 할 것을 하지 않는 채, 디지털적인 사고방식으로 편하게(?) 다가가는 까닭에 전체를 아우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더러 조소적(嘲笑的)이고 냉소적(冷笑的)인 시들이 여기에 해당하다. 앞뒤 자르고 이것만 제시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사회의 어두운 면을 쓰기 위해서 동원되는 단어들을 비틀어 쓰고는 ‘이것으로 할 일을 다했다’는 식의 시들이 그것이다. 문제는 그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가끔 신춘문예에 당선작들이 여기에서 주춤거리다가 호기심을 유발하게 하지만 신춘문예 당선 이후에 글을 쓰지 못하는 경우(당선작에 대한 소감문과 그에 대한 설명을 못 하는 경우가 허다함)가 있다. 그리고는 시를 짓지 못하는 경우가 여기에서 비롯된다.

현대사회의 단면을 보고 고발(비아냥, 조소, 비판 등)하는 시들을 지을 수는 있다. 하지만 이는 마치 어떤 현상을 보고 ‘욕’을 하는 것과 같다. 예를 들어, 누군가 잘못을 했다고 한다면 이에 대해서 접근하는 방법은 크게 네 가지이다. 1) 무관심, 2) 애 둘러서 언급(누구who를 나무라지 않고 그의 편에서 이야기를 들어주거나 하는 경우), 3) 비아냥 혹은 조소, 그리고 4) 비난 등이 그것이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글과 시는 생산적이어야 한다. 따라서 4)는 제외된다. 그리고 주목할 것은 2)와 3)이다. 그동안 감성적 위주의 시들이 1)에 해당하여 나와 나를 이해주기를 바라는 공감적 공유에 초점을 두었다면 ’자신의 일기장이나 자신만 볼 수 있는 작기장에 옮겨야 할 것이다. 문제는 2)와 3), 특히, 최근 포스트모던적인 성향을 가지는 것이 돋보여서 그런 것 같은데 그저 고발만 하고 그것으로 그치고 있다

무책임하다. 생산적인 대안적 제시는 없다.

그러다 보니 ‘아니면 말고 식’의 비난적 무책임의 공공성을 함유하고 있다. 비판과 비난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다. 비판을 생산적인 결과로 도출하기 위해서 ‘쓴소리’를 할 수 있지만, 비난은 그것으로 끝이다. 비난은 댓구의 필요성을 상실하게 만든다. 자기감정을 직접적으로 하지 않았을 뿐이지 ‘하늘에다 욕’을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을 ‘그동안 사용하지 않는 단어들을 써놓고는 이전의 시들과 차별화되는 양 하지만, 그렇게 할 것이 아니다

또한, 시인이지만 평론을 못 하는 경우도 여기에 해당한다. 평론을 함부로 할 일도 아니지만 정작 본인도 알지 못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글쓰기가 기본바탕이 아니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를 짓기 전에 글쓰기를 절대적으로 훈련해야 한다.

5. 결어 혹은 결론: 앞서 했던 것들을 간추려서 요약 정리하면 된다.

결론적으로는 이렇다. ‘시를 짓는다’ 하는 것은 위의 과정에서 꼭 필요한 것들만 언급하기 때문에 마치 헝겊을 기워서 색다른 작품을 창조하는 것이기 때문에 ‘짓는다’고 하는 것이다. 평론 역시 글쓰기의 연장이기 때문에 위의 과정을 반드시 밟아야 한다. 위의 과정이 체화되지 않는 상황에서는 평론다운 평론이 있을 수 없으며, 시를 몇 편 지어봤다고 평론을 자처하는 어리석음에 처하는 경우를 피해야 한다.

**
<시를 짓는 것이다/ 정항석 저서>의 내용 중에서 일부를 간추린 것입니다. 공유는 가능하지만, 저작권이 있으므로 반드시 출처와 저자를 밝히고 함께 옮겨가시기를 바랍니다.






 

바람과 구름 그리고 농담


                                            하린


  
 바람과 구름을 우려먹는 기술이 필요하다 만질 수 없는 것을 갖고 노는 비법이 필요하다 이성적인 혀와 몽롱한 감각이 만들어내는 혼종의 판타지가 필요하다 바람에게는 근사한 취미가 필요하고 구름에게는 우호적인 솜사탕이 필요하다 구름의 심장을 훔치거나 바람의 목덜미를 만지는 자질이 필요하다 구름의 목구멍에 손을 넣어 박힌 가시를 꺼내고 바람의 아래턱과 윗턱 사이에 얼굴을 집어넣는 여유가 필요하다 나에겐 그런 능력이 없으니 나는 구름과 바람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는 시인이다 수시로 바람과 구름을 식재료로 볶고 지지고 삶고 찌는 방식이 필요하다 바람의 소문과 구름의 험담을 구별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구름을 살해하고 바람을 수배하고 바람 속에 무덤을 만들고 구름의 사상을 읽어내는 경지가 필요하다 바람의 초대나 구름의 청혼을 듣는 귀가 필요하다
 
 나는 언제쯤 바람의 시인 구름의 시인이라는 계급을 획득할 수 있을까
 나는 지금 바람 빠진 시에서 머뭇거리고 있다
 구름의 썩어 문드러진 살점을 삼키고 있다
 바람과 구름도 모르는 백만 가지 사용법이 나에겐 필요하다
 
- <리토피아> 2012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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