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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부활을 위하여
2019년 08월 19일 09시 29분  조회:783  추천:0  작성자: 륙도하

시의 부활을 위하여1/  이재무


왜 시가 읽히지 않을까

시가 읽히지 않는 이유로는 내외적 환경 변화를 들 수 있다.

우선 외적으로는 매체 환경의 변화를 들 수 있다. 첨단 문화 매체에 의해 우리 나날의 일상이 전 방위적으로 포섭되어 있다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기술 매체에 중독되어 하루 한시도 인터넷과 휴대전화에서 떨어져 살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다. 즉, 감수성이 예민한 청년들은 게임에 빠져 지내기 일쑤고 장년층들도 카톡, 페이스북, 트윗 등 SNS에 의존하지 않고는 나날의 무료를 견뎌내기 어려운 형편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른바 전자 사막시대를 살아가는 현대판 유목민들은 홀로 있는 시간을 두려워하며 각종 전자 기술 매체를 통해 타자와의 교감과 소통을 꿈꾸고 기대한다. 하지만 이와 같은 방식으로는, 양말을 신은 채 가려운 발등 부위를 긁는 일처럼 진정한 의미에서 불통과 소외의 가려움을 해소할 수 없다. 요컨대 시가 독자 대중에게서 멀어진 이유는 이처럼 전자 기술 매체에 중독되어 삶의 권태를 일시적으로 배설할 뿐, 진중하게 앉아 책을 읽고 공감하며 사색하는 일의 수고로움을 기피하는 현상과도 맞물려 있다고 볼 수 있다.

내적 원인으로는 시인들의 시작 태도에서 찾을 수 있다. 소통 불능의 자폐적 언어로 자기들만의 성채 안에 들어가 끼리끼리 암호를 주고받듯, 지극히 제한된 범위 내에서만 작동되는 현재의 소통 체계가 독자들의 시에 대한 흥미를 휘발시켜 왔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분재를 취미로 삼는 사람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분재란 엄밀하게 말해서 장애수이기 때문이다. 왜 개인의 취향과 기호 때문에 멀쩡한 나무에 위해를 가해 장애를 만드는지 도통 그 가학 취미를 이해할 수가 없다. 시작에서도 나는 이런 현상을 본다. 언어를 분지르고 비틀고 학대하여 장애어를 만드는 현상이 소통 불능의 시를 낳는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좋은 시란 시상의 자연스러운 유로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난해 시의 효용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난해 시도 궁극적으로는 독자의 이해에 가 닿아야 한다. 해답이 없는 수수께끼는 수수께끼의 자격을 상실할 수밖에 없듯이 끝내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는 시는 시로서 자격을 지녔다고 보기 어렵다. 《시란 무엇인가》의 저자 유종호 선생의 말을 빌리면 아무리 수수께끼의 난도가 높다 하더라도 거기엔 답이 들어 있어야 비로소 수수께끼의 자격이 있듯 난해 시 역시도 궁극적으로는 소통이 이루어져야만 시의 자격이 있다. 난해 시가 양산되는 배경에는 전위적 실험을 추구하기 때문인 경우도 있지만 시인이 언어를 장악하지 못하는 데서 발생하는 경우도 있다. 전자의 경우라면 충분히 납득할 수 있지만 후자의 경우라면 곤란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더불어 시에서 비문이 더러 비평가들의 상찬 대상이 되기도 하는데 이 또한 문제이다. 비문의 남발이 시의 덕목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도 예외는 있을 수 있다. 시의 효과를 위해 우리는 흔히 ‘시적 허용’이라 하여 일부러 문법을 창조적으로 일탈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적 허용이라는 것도 매우 조심스럽게 그리고 창의적으로 사용해야지 이것이 시 진술의 주가 되어서는 안 된다. 오죽하면 시인의 자질을 알려면 그가 쓴 산문을 읽어보라는 말이 나왔겠는가. 그것은 시인의 국어 사용 능력을 불신하기에 나온 말이 아니겠는가. 말이 길어졌지만 이런 내외적 이유로 인해 독자 대중으로부터 시가 멀어졌다고 생각되기에 두서없이 말을 늘어놓게 되었다.

여기에 덧붙여 독자들 또한, 전혀 책임이 없다고 볼 수 없다. 이 대목 역시 유종호 선생의 말을 빌려 필자의 의견을 피력하자면 우리의 현실 독자들은 시와 친해지기 위한 지적 투자에는 인색하면서도 시가 어렵게 느껴지면 무조건 시인을 탓하는 경향들이 있는 것 같다. 가령 물리학이나 고등수학, 추상미술이나 고전음악이 어려운 것에 대해서는 자신들의 무지를 탓한다.

그러나 시가 어려운 것에 대해서는 자신들을 탓하는 대신 시인들을 타매하길 망설이지 않는다. 시도 향수할 수 있으려면 지적 투자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세상에 저절로 얻어지는 것은 없다. 하다못해 우리는 스포츠 관전을 하기 위해서도 스포츠 ‘룰’을 알아야 한다. 룰을 모르면 모른 만큼 관전의 쾌감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아는 만큼 느낀다.’는 말이 있다. 시 역시도 충분히 즐길 수 있으려면 시에 대한 최소한의 ‘룰’ 즉 이미지, 어조, 비유, 상징, 신화, 반어, 역설, 패러디 등등 시의 구성요소에 대한 어느 정도의 숙지는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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