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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시론' / 장석주
2019년 08월 19일 10시 35분  조회:781  추천:0  작성자: 륙도하

나의 시론' / 장석주

건강한 시인, 잘 사는 시인, 당당한 시인보다 어쩐지 가난하고 병약해 보이는 시인들의 시에 더 이끌린다. 나는 박용래나 김종삼, 천상병이나 김관식의 시들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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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 예찬의 시들이 순수하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자연 예찬의 시들은 정치성을 배제함으로써 교묘한 방식으로 당대 정치를 암묵적으로 승인한다. 자연 예찬의 시는 두드러지게 탈정치적이다. 탈정치적인 태도는 그 자체로 나쁜 것도 좋은 것도 아니다. 다만 탈정치적인 게 순수하다고 말하는 것은 사실을 왜곡하는 일이다. 자연 예찬의 시는 정치를 배제하는 방식으로 정치에 개입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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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시의 표상으로 꼽는 시인이 말년에 1980년 5월 광주 민중 학살의 원흉인 민정당 소속 국회의원으로 나선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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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정체성은 의인(義人)이 아니다. 어쩌면 시인의 정체성은 거지, 바보, 천치, 쪼다, 못난이에게서 더 많이 발견된다. 한심하고 하염없는 이들! 생물학적 이득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 시에 자기를 던진 이들! 이들에겐 농경 정착민보다 변방인, 외부자, 밀입국자, 난민, 떠돌이 광대가 더 잘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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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난두 페소아는 자기에겐 아무 야망도 욕망도 없다고, 그는 자신이 시인이 된 건 야망이 아니라 ‘내가 홀로 있는 방식’이라고 고백한다. 그는 죽는 날 이런 시를 남겼다. “오른손을 들어, 태양계에 인사한다. /하지만 잘 가라고 말하려고 인사한 건 아니었다. /아직 볼 수 있어서 좋다고 손짓했고, 그게 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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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순 시집 『날개 환상통』(2019)을 읽는다. 김혜순 시는 이 시대 젊은 시인들의 시에서 보이는 낯섦과 그로테스크함의 배후다. 김혜순 시는 ‘시적인 것’에 대한 인습적 이해를 부수고 그 경계를 넓혀왔다. 김혜순 시의 언어는 본질적으로 문법적 단일성에 대한 금지와 위반의 언어다. 김혜순 시의 어떤 구절이 보여주는 정신의 도약과 폭발은 인습적인 사유의 그물로는 포획되지 않는다. 김혜순 시를 읽는 게 불편하다고 말하는 당신은 자기 안에 있는 인습적 사고와 싸우기를 멈춘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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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순은 이번 시집에서 자꾸 새장을 탈출한 새로 변신하려고 시도한다. 몸의 증상은 곧 새의 증상이다. 새가 된 기분을 느껴보려는 걸까? “그 새의 신발끈은 풀어져 땅에 끌리고/그 새의 머리끈은 풀어져 측백나무를 칭칭 감고//하지만 나는 나는 것이 좋아/먼 길 떠나는 것이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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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순의 시가 다 어려운 것은 아니다. 때로는 이렇게 쉽게 다가오는 구절도 쓴다. “자아(自我)라는 이름의 뚱뚱한 소녀를 생각한다/그녀를 오늘 밤 굶겨 죽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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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인 중에도 페르난두 페소아 같이 자기 본명을 감추고 필명이나 이명을 쓴 시인들이 있다. 김정식(金廷湜, 1902~1934)은 ‘김소월’로 더 알려져 있고, 김해경 (金海卿, 1910~1937)은 ‘이상’으로 더 유명하다. 이들에겐 끊임없이 자기 정체성을 부정하려는 무의식의 심리가 숨어 있다. 이들은 자기를 부정함으로써 비로소 자기로 돌아간다. 필명은 이들이 선택한 정신적 망명지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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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는 시를 이루는 기초 성분이다. 시는 언어를 매개로 성립하는 예술이다. 언어-도구는 시라는 물고기를 잡기 위한 통발이다. 고기를 잡은 뒤에는 통발은 더 이상 쓸모가 없다. 좋은 시인은 시를 얻은 뒤 그 언어를 벗어나 그 너머로 나아가고자 한다. 하지만 언어를 벗어나는 순간 그 언어에 기대어 숨 쉬던 시도 사라진다. 그런 뜻에서 언어는 시의 숙명이자 한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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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없어도 우리는 살아남는다. 시 한 편 읽지 않아도 먹고 사는 일에 지장은 없다. 하지만 시를 모른다면 세상의 불확실성에 머리를 쿵 하고 박는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시와 담 쌓고 지내는 사람이라면 세상이 얼마나 캄캄한 은총 속에 있는지를 깨닫지 못하고, 봄철 벚나무 가지마다 만개한 꽃잎 난분분 떨어져 온통 하얗게 만든 길바닥을 자동차가 짓이기고 지나가도 무감각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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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사르 바예호(1892~1938)는 “인간은 슬퍼하고 기침하는 존재”라고, “음습한 포유동물, 빗질할 줄 아는 존재”라고 노래한다. 여기에 무슨 말을 더 보탤 것인가! 인간을 규정하는 말을 늘어놓으면 책 한 권으로도 모자랄 테다. 하지만 시인들은 간략하게 말한다. 축약하고 비약하되 할 말은 다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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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고파 우는 자식들은 어머니가 거두는 거지들이다. 어린 짐승 새끼들은 수시로 어머니에게 먹을 것을 내놓으라고 울며 보챈다. 세사르 바예호는 어린 시절을 어머니를 떠올리며 이렇게 노래한다.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이, 달걀노른자로만/과자를 구워주시던 따스한 제과기, 어머니”라고!





 

시와 비시(非詩)를 가르는 경계선

   현대시에서의 묘사(描寫)란 시적 대상을 중심에 놓고 스케치 하는 것과 같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묘사에는 시적화자(詩的話者/시 속에서 진술하는 사람)가 없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시에서 자기주장이 없는 약점을 가지게 된다. 그래서 "감정이 드러난 시는 실패한 시지만 자기주장이 없는 시는 죽은 시"라고들 말한다. 시적 화자가 없다는 것은 시에 진술이 없다는 뜻이다. 시의 전개는 진술을 위해 묘사를 하는 것인데, 묘사는 사진과 같은 것이라면 진술은 나의 생각이 담겨있는 것이다.

   쓰고 싶은 것을 다 쓰면 산문이지 시가 아니다. 시는 산문처럼 써놓고 감정을 조절하여 써서는 안 될 말을 골라내는 일이다. 즉 무슨 나무인지를 알 수만 있다면 가지를 다 쳐내어도 된다는 뜻이다. 나무의 보이는 부분을 서술하거나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나무와 의미망으로 연결하여 진술하는 일이 시쓰기다.

   진술에는 자기주장, 즉 자기 철학이 담겨 있어야 한다. 묘사만으로도 시가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많은 평론가는 진술(陳述)이 없는 시는 비시(非詩)라고 한다. 다시 말하자면 묘사는 정물화와 같고, 진술이 들어간 시는 시인의 생각을 곳곳에 숨겨놓은 ‘말로 그린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진술은 우리들의 정서 밑바닥에 잠겨 있는 상투적인 의미 체계에 새로운 충격을 줄 수 있는 깨달음을 동반하는 표현이어야 한다.


    신라 헌강왕 이후
    절이 산을 업고 있다
    갈전 쪽으로 기울거나
    진성 쪽으로 기울거나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는지 아는 사람은 없다
    물지게 지고 가던 남새미 사람
    물이 첨벙거릴 때
    산은 첨벙거리지 않는 것이
    용하다 여겼을 뿐이다

      - 강희근, <절이 산을 업고> 전문


    시 잘 쓰기로 유명한 강희근 시인(경상대학교 명예교수)의 위 시는 짧은 시 속에 많은 내용을 담고 있다. 시의 내용으로 봐선 그 절은 신라 헌강왕 때 지어진 절이겠다. 갈전이 나오고 진성이 나오는 것으로 봐서 천년 고찰인 진주 월아산에 자리잡고 있는 청곡사가 분명하다.

   이 시에선 묘사부터 예사롭지가 않다. ‘절이 산을 업고 있다’니 절창이다. 청곡사에 몇 번 가본 필자는 진주8경의 하나인 ‘월아산 해돋이’를 보면서 무아지경에 빠지곤 했었는데 그 월아산이 온전히 둘러싸고 있는 아름다운 사찰이다. ‘갈전 쪽으로 기울거나/진성 쪽으로 기울거나/언제 그런 일이/있었는지 아는 사람이 없다’고 한다. 몇 번을 바라본 풍광이었지만 필자는 왜 그런 생각을 못했을까. 이런 것이 시인의 진술이다. 산이 이리저리 기울어질리 만무하지만 시인의 심미안(審美眼)은 양쪽 마을 사람들의 정서에 따라서 갈전 쪽으로, 혹은 진성 쪽으로 기울어진 모습으로 산을 업고 있다는 것이다. 남새미 마을 사람들이 길어먹던 우물, 물지게의 ‘물이 첨벙거릴 때/산이 첨벙거리지 않은 것이/용하다 여겼을 뿐이다’
   진성 사람들은 자기네 산이라고 하고 갈전 사람들은 자기네 산이라고 했을, 이해에 따라서 자기네 쪽의 산이라고 우기지만 ‘산은 언제나 그대로다’는 표현인데 직설적이지 않으면서 시적 감동을 불러오는 좋은 시다.

   시는 '정서적 언어의 회고 양식'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리처즈(I.A Richards)는 과학적 언어인 객관적, 개념적, 비개인적, 지시적, 논리적 의미보다는 정서적 언어인 주관적, 간접적, 개인적, 함축적, 비약적 의미를 살리는 시를 써야한다는 입장을 취했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좋은 시와 나쁜 시를 구분하는 기준으로 삼기도 했는데, 비논리적이거나 이질적 경험들을 끌어들여 균형과 조화를 이루거나 결합되도록 한 포괄의 시(poetry of inclusion)가 최고급의 시이며 그것이 시의 특징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시론은 테이트의 텐션(tension/긴장감), 브룩스의 역설(paradox/표면적으로는 모순되거나 부조리한 것 같지만 그 표면적인 것 너머에 감춰진 진실을 드러내는 수사법)과 아이러니(irony/반어법이라고도 하는데 시에서는 겉으로 드러난 것과 실제 사실 사이의 괴리, 또는 그런 표현으로 쓰인다)로 발전하였다.

  서정적 시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강희근 시인의 시 선집 '그 섬을 주고 싶다'를 읽어보기를 권하고 싶다. 묘사와 진술, 통할(포괄하는 시), 텐션, 역설과 아이러니를 공부하기 좋은 교과서가 될 것이다.

    - 이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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