륙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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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좋은 시

좋은시 묶음3
2019년 08월 19일 13시 04분  조회:1350  추천:0  작성자: 륙도하

카드 키드

 

  박성우

 

 
카드가 사준 정장을 입고
카드가 사준 구두를 신은 출근길은 벅차다
어쩌다 카드가 사주는 저녁은 근사하고
카드가 큰맘 먹고 들여준 침대는 푹신하다

카드가 현금서비스 해준 축의금을 들고 다녀오는
직장 동료의 결혼식은 처연하게 찬란하다
입사 삼년차 카드 키드,
야근에 지쳐 귀가하는 밤은
카드가 카드론으로 얻어준 원룸이 있어 아늑하다

카드 키드가 되기 위한 지난날은 아름다웠다
스펙에 내준 대학생활은 교양 없이 품위 있었고
자기소개서 속으로 들어간 스펙은 뻔뻔하게 자랑스러웠다
서류전형에서 번번이 떨어지던 입사시험,
처음으로 면접 통보를 받던 날은
팬파이프 같은 빛이 눈앞으로 쏟아져내리는 것 같았다

카드가 사주는 패스트푸드는 먹을 만하고
카드가 지켜주는 직장생활은 아직 견딜 만하다
정기적금을 해약해 카드에게 이체하고 남은 돈,
지방에 사는 양친께 부쳐드리던 손은 대견하다

월급날 받은 급여는 어김없이 카드에게 옮겨간다
'언제 취직할 거니'를 지나 '언제 결혼할 거니'까지
기적적으로 와 있는 카드 키드, 카드는
희망 복근을 키워보는 건 어떠냐며 헬스클럽을 권유한다




 

시인은 시적으로 지상에 산다 / 천양희

원고료를 주지 않는 잡지사에 시를 주면서
정신이 밥 먹여 주는 세상을 꿈꾸면서
아직도 빛나는 건 별과 시뿐이라고 생각하면서
제 숟가락으로 제 생을 파먹으면서
발 빠른 세상에서 게으름과 느림을 찬양하면서
냉정한 시에게 순정을 바치면서 운명을 걸면서
아무나 말할 수 없는 것들을 말하면서
새소리를 듣다가도 ‘오늘 아침 나는 책을 읽었다’*고 책상을 치면서
시인은 시적으로 지상에 산다

시적인 삶에 대해 쓰고 있는 동안
어느 시인처럼 나도 무지하게 땀이 났다

* 연암 박지원의 글 <답경지(答京之)>에서




최영미 시 ㅡ 너에게로 가는 길 누구도 모른다

그리하여 이 시대 나는 어떤 노래를 불러야 하나
창자를 뒤집어 보여줘야 하나, 나도 너처럼 썩었다고
적당히 시커멓고 적당히 순결하다고
버티어온 세월의 굽이만큼 마디마디 꼬여 있다고
그러나 심장 한귀퉁이는 제법 시퍼렇게 뛰고 있다고
동맥에서 흐르는 피만큼은 세상모르게 깨끗하다고
은근히 힘을 줘서 이야기해야 하나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나도 충분히 부끄러워 할 줄 안다고
그때마다 믿어달라고, 네 손을 내 가슴에 얹어줘야 하나
내게 일어난 그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두 팔과 두 다리는 악마처럼 튼튼하다고
그처럼 여러번 곱씹은 치욕과, 치욕 뒤의 입가심 같은 위로와
자위끝의 허망한 한 모금 니코틴의 깊은 맛을
어떻게 너에게 말해야 하나
양치질할 때마다 곰삭은 가래를 뱉어낸다고
상처가 치통처럼, 코딱지처럼 몸에 붙어 있다고
아예 벗어붙이고 보여줘야 하나
아아 그리하여 이 시대 나는 어떤 노래를 불러야 하나
아직도 새로 시작할 힘이 있는데
성한 두팔로 가끔은 널 안을 수 있는데
너에게로 가는 길을 나는 모른다

-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창비, 1994)





 

2017 세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빅풋/석민재

 

군함처럼 큰 발을 끌고
아버지가 낭떠러지까지
오두막집을 밀고 갔다가
밀고 왔다가
왼발 오른발 왼발 오른발 스텝을 맞추며
말기 암, 엄마를 재우고 있다
죽음을 데리고 놀고 있다
죽을까 말까 죽어줄까 말까
엄마는 아빠를 놀리고 있다
아기처럼 엄마처럼
절벽 끝에서 놀고 있다

 

< 2017 한라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

점등 / 오경


가슴에서 플러그를 뺐다 젖이 멈췄다 벽등의 스위치를 켰다 나는 밤이 들킨 것 처럼 호들갑을 떤다 떨다가 아슬아슬하게 걸친 검은 브래지어를 떨어뜨린다 어둠이 활처럼 휘어진다 순간 배고프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허기를 달래려고 더 진한 화장을 하고 더 긴 속눈썹을 붙이고 스타킹을 벗는다

갑작스런 빛이 사방을 삐거덕거리게 한다
아기 유령들이 셔플 댄스를 추다가 천장에서 추락했을지도 모른다
길 잃은 시조새 한 마리 비상하다가 태양의 모서리에 부딪쳐
날개가 부러졌을지도 모른다

나는 문을 나서고 싶지 않았다 아니 불을 켜고 싶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것의 아주 작은 세포를 만지며 느껴 보고 싶었을 뿐
식탁 위엔 주인 없는 고통이 가열하지 않은 채 날것으로 있다

함성에 금이 간 어둠이여 다시는 변명에 목을 걸지 말 것
목숨 걸어야 할 곳이 어디 한 두 곳인가
식탁 아래 한때 눈부셨던 대낮의 그림자가 꽁무니를 빼느라 허둥지둥이다
지금은 어둠을 수습하기 위해 차단이 필요한 순간이다


<심사평>
찰나를 포착한 순발력

매년 일간지 신춘문예로 등단하는 시인이 30명 이상이다. 이 중에서 과연 몇 명이나 살아남아 계속 활동할까. 이러한 질문은 열정적이고 패기 넘치는 응모작들을 접하는 동안 우려보다는 새로운 기대로 바뀌었다.

 올해 한라일보 신춘문예의 시 부문 예심을 거친 응모자는 10명이었다. 이를 다시 검토한 결과 김려원의 '애월의 얼룩', 김미경의 '먹돌쌔기', 이도훈의 '중절모', 오경의 '점등' 등 4편이 최종까지 남았다.

 이 네 사람의 작품은 비슷한 수준이지만 서로 다른 작품 경향을 보여주었다. 김려원은 언어를 구사하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을뿐더러 어떤 소재도 시적 대상으로 수용해내는 역량이 돋보였다. 그러나 호흡이 다소 산만하고 불안하였다. 김미경의 시는 긴 호흡의 내용도 거침없이 소화해 내는 능력을 높이 살만했지만, 익숙한 자신의 틀에 갇혀 개성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 아쉬웠다. 이도훈의 시는 서툰 듯 낯선 표현이 되레 참신하게 느껴졌다. 특히 전봇대에 지은 새집을 중절모로 비유한 표현은 눈길을 오래 붙잡았다. 그렇지만 응모작 간 격차가 드러난다는 사실이 선택을 망설이게 했다. 반면 오경의 시는 식상하거나 미흡한 표현들이 더러 눈에 띄었음에도 불구하고, 작품들 수준이 대체적으로 고르며 응모자 자신의 목소리를 갖고 있다는데 심사위원들의 견해가 일치했다. 미숙한 점이 노정된다는 것은 그것을 극복해나가야 하는 숙제가 주어진다는 의미이다. 심사위원들은 그 긍정적인 가능성을 인식하고, 논의 끝에 '점등'을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당선작 '점등'은 주방의 벽등을 켜는 순간을 개성적으로 묘사하면서 사색한다. 빛이 들어와 어둠이 사라지는 찰나는 거의 동시에 이루어지지만, 이때 존재하는 소재와 상상들을 순발력 있게 포착해 역동적으로 제시하는 대목에서 당선자의 기량을 엿볼 수 있었다.

 당선자에게 축하를, 또한 상세히 언급하진 못했지만 예심을 거친 모든 분께도 응원을 보낸다. 그들 모두 똑같은 출발점에 다시 서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스며드는 것

                      안도현

꽃게가 간장 속에
반쯤 몸을 담그고 엎드려 있다
등판에 간장이 울컥울컥 쏟아질 때
꽃게는 뱃속의 알을 껴안으려고
꿈틀거리다가 더 낮게
더 바닥 쪽으로 웅크렸으리라
버둥거렸으리라 버둥거리다가
어찌할 수 없어서
살 속에 스며드는 것을
한때의 어스름을
꽃게는 천천히 받아들였으리라
껍질이 먹먹해지기 전에
가만히 알들에게 말했으리라

저녁이야
불 끄고 잘 시간이야






 

바깥에 갇히다

정용화


우리 집 현관문에는 번호키가 달려있다 세 번, 비밀번호를 잘못 누르면 가차 없이 문이 나를 거부한다 쓰레기를 버리러 나왔다가 지갑도 휴대폰도 없이 제대로 바깥에 갇히고 말았다

안과 밖이 전도되는 순간
열리지 않는 문은 그대로 벽이 된다

계단에 앉아있는 30분 동안
겨울이 왔다
바람은 골목을 넓히려는 듯 세차게 불고
추위를 모르는 비둘기는
연신 모이를 쪼아댄다

내 것이면서 내가 어쩌지 못하는 것이
어디 문뿐이겠는가
낡을 대로 낡아버린 현수막이
바깥에 갇힌 나를 반성도 없이 흔든다
걸터앉은 계단이
제멋대로 흩어지는 길 위의 낙엽이
새들이 자유롭게 풀어놓은 허공이
나를 구속하고 있는 바깥이라니!

안으로 들어갈 수 없는
나는 지금 바깥이다

프로필
정용화 : 충북 ,동대 대학원 문창과, 대전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바깥에 갇히다]외 다수

시 감상

어느 때 외출했다가 당혹할 때가 있다. 손에 아무것도 쥔 것이 없다. 현금도, 카드도, 전화기도, 차 열쇠도, 밀려드는 공포. 나는 여기에 이렇게 있는데, 세상의 밖에 나 홀로 있는 듯한 느낌. 어쩌면 나는 현금, 카드, 전화기, 열쇠로만 존재했던 것은 아닌지? 아니면 애초부터 나는 없었고 다만, 한 여름 땡볕에 울렁거리는 저 그림자가 진짜 ‘나’인지? 분명한 것은 바깥은 안의 반대가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지금 바깥이라는 것이다. [글/김부회 시인, 평론가]




 

물소의 뒷굽은 거룩하다 라고 / 정태중


시의 설계는 간혹
시어들이 떠나버리기도 해서
부도난 공사장 같기도 하였는데
공사장으로 신의 선물이랄까 하는 물음들이
녹슨 창으로 푸르게는 올라오기도 하였다

하얀 배꽃들이 지난 시간을 입었던 듯
옷들이 누렇게 먼저 바래고는 있는 듯
신문 기자의 탁본이 바래고는 있는 듯
배들이 어떤 문장들로 하여서
배가 불러오기도 한 점심시간이 지나자
부리나케 삐뽀삐뽀로 기선 잡는 불자동차와
헛배에 힘 잔뜩 부린 부도난 공사장 방귀와

상관도 없이 해는 쨍쨍 내리다가
굵은 빗방울 쏟아져 공사장을 내려치는데
부도난 말들이 튕겨 오르는 것이
풀들을 잡고 있는 눈물 같기만 하였는데
불화 가득 늙은 수소 큰 눈이
어리둥절 휘청이다가 눈물을 흘려주다가
음~매 라고 몇 번을 풀을 토악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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