륙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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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좋은 시

한국시(6)
2019년 11월 27일 16시 37분  조회:1570  추천:0  작성자: 륙도하

        폭설

 

                                     윤제림

 

싸락눈으로 속삭여봐야 알아듣지도 못하니까
진눈깨비로 질척여봐야 고샅길도 못 막으니까
저렇게 주먹을 부르쥐고 온몸을 떨며 오는 거다.
국밥에 덤벼봐야 표도 안 나니까
하우스를 덮고, 양조장 트럭을 덮는 거다.
낯모르는 얼굴이나 간지럽혀봐야 대꾸도 없으니까
저렇게 머리채를 흔들며 집집을 때리는 거다.
점, 점......으론 어림도 없으니까 삽시에, 일순에!
떼로 몰려와 그리운 이름 소리쳐 부르는 거다.
어른 아이 모다 눈길에 굴리고 자빠뜨리며
그리운 이의 발목을 잡는 거다.
전화를 끊고 우체국을 파묻는 거다
철길을 끊고 정거장을 파묻는 거다.
다른 세상으론,
비행기 한 대 못 뜨게 하는 거다.

 

치열한 시 쓰기 / 문정영 

 

 

'좋은 시란 운문으로서의 운율적 요소를 바탕으로 독창적인 이미지와 새로운 인식 내용을 보여주는 작품 일 것이다'


1. 말하지 않고 말하는 방법 

 

  시인은 시 속에서 벌써 다 말하고 있지만 겉으로는 이런 사실을  하나도 표현하지 않는다. 좋은 시 속에는 감춰진 그림이 많다. 그래서 읽는 이에게 생각하는 힘을 살찌워 준다. 보통 때 같으면 그냥 지나치던 사물을 찬찬히 살피게 해 준다.

2.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시인은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직접 하지 않는다. 사물을 데려와 사물이 대신 말하게 한다. 즉 시인은 이미지(형상)를 통해서 말한다. 한편의 시를 읽는 것은 바로 이미지 속에 담긴 의미를 찾는 일과 같다.

3. 진짜시와 가짜시 

 

  시인은 눈앞에 보이는 사물을 노래한다. 그런데 그 속에 시인의 마음이 담기지 않으면 아무리 표현이 아름다워도 읽는 사람을 감동시킬 수 없다. 겉꾸밈이 아니라 참된 마음이 깃든 시를 써야한다.

4. 다 보여 주지 않는다

 

  시에서 하나하나 모두 설명하거나 직접 말해 버린다면 그것은 시라고 할 수 없다. 좋은 시는 직접 말하는 대신 읽는 사람이 스스로 깨달을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한다.

5. 사물에서 찾는 여러 가지 의미 

 

  하나의 사물도 보는 방향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사물 속에는 다양한 의미가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좋은 시는 어떤 사물 위에 나만의 의미를 부여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시이다.

6. 사물이 가르쳐 주는 것 

 

  사물 위에 마음 얹는 법을 배워야 한다. 시는 우리에게 사물을 바라보는 방법을 가르쳐 준다. 시인은 사물을 관찰하며 바라보는 태도가 필요하다.

7. 새롭게 바라보기 

 

  좋은 시는 남들이 생각한 대로 생각하지 않았기에 쓰인다. 시인은 사물을 새롭게 태어나게 하는 사람이다. 익숙한 것을 낯설게 만든다. 그래서 사물을 한 번 더 살펴보게 해 준다. 어느 날 그것들을 주의 깊게 살펴 대화를 할 수 있게되면, 사물들은 마음 속에 담아 둔 이야기들을 시인에게 건네 오기 시작한다. 시는 사물이 시인에게 속삭여 주는 이야기를 글로 적은 것이다.
   
8. 미치지 않으면 안된다 

 

  위대한 예술은 자기를 잊는 이런 아름다운 몰두 속에서 탄생하는 것이다. 훌륭한 시인은 독자가 뭐라 하든 자신이 몰두할 때까지 고치고 또 고친다. 우리가 쉽게 읽고 잊어버리는 작품들 뒤에는 이런 보이지 않는 고통과 노력이 담겨 있다.

[출처] 치열한 시쓰기 / 문정영 |작성자 마경덕



 

일곱 번, 나는 내 영혼을 경멸하였습니다.

칼릴지브란

 

제일 처음 나의 영혼이 저 높은 곳에 도달하기 위해 비굴해지는 것을 알았을 때입니다.

두 번째는 나의 영혼이 육신의 다리를 저는 사람들 앞에서 절룩거리고 있는 것을 보았을 때입니다.

세 번째는 나의 영혼이 쉬운 것과 어려운 것 사이에서 쉬운 것을 선택하는 것을 보았을 때입니다.

네 번째는 나의 영혼이 잘못을 행하고서도 타인들도 잘못을 행하노라고 스스로 합리화 하였을 때입니다.

다섯 번째는 유약함으로 몸을 사려 놓고는 그것이 용기에서 나온 인내인 양 짐짓 꾸밀 때입니다.

여섯 번째는 어떤 사람의 얼굴이 추하다고 마음속으로 경멸했을 때입니다. 바로 그 얼굴이 내 마음속의 가면들 중 하나라는 것을 모르는 체.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의 영혼이 아부의 노래를 부르고 그것을 덕이라 여길 때입니다.



 

가족의 재구성


                                        김연종


 
세상의 모든 호칭은 이모와
언니 오빠로 재편집 되었다
여보당신은 이미 삭제되었고
한 때 유행하던 자기야도 자취를 감추었다
할아버지 할머닌 고려장 모텔에 장기투숙 중
아빠는 아직까지 귀가하지 않고
엄마는 막장 드라마에 칩거 중이다
 
오랜만에 가족나들이를 간다
이모가 앞장서고 언니 오빠가 뒤따른다
매표소에도 마트에도 이모 투성이다
식당에 들러 맨 먼저 이모를 부른다
아줌마는 자취를 감춘지 오래고
너무 젊은 이모는 슬쩍 언니로 대체된다
뒤처리와 계산은 모두 오빠 몫이다
 
가로등에 가물거리는 식구들을 들여다본다
할아버지 할머닌 유령처럼 토닥거리고
엄마 아빠는 서로의 손톱자국 사이로 슬며시 빠져나간다
언니 오빠는 각기 다른 채널로 재빨리 발길을 돌린다
달빛에 취한 이모마저 슬쩍 酒房으로 사라지고 나면
룰루랄라 모텔의 네온 간판은 나른하거나 불안하다
 
- 웹진『시인광장』 2012년 9월호


 

유병록

 
지나간 고통은 얼마나 순한가
 
인간 하나쯤 아무렇지 않게 태우고 다니는 네 발 짐승 같다
말귀를 알아듣는 가축 같다
 
소리 없이
나를 태우고 밥집에도 가고 상점에도 들른다 달리거나
한곳에 오랫동안 서 있기도 한다
 
한참을 잊고 지내다
네 등을 올라타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린다
 
길들여진 고통은 얼마나 순종적인가
사나운 짐승의 시간은 이미 오래전의 일
네 발이 내 것 같다
 
말을 듣지 않고 날뛰는 시간도 있다
그러나 너를 껴안으면 떨어지지 않을 만큼만 위험한 길
 
참을 만한 시간이 참기 어려운 밤
 
발을 어루만진다
발가락을 하나씩 세어본다
내 발이 네 것 같다
 
너는 나를 태우고 또 어디론가 가려 한다
 
네 등은 따뜻하고
나는 그 커다랗고 우멍한 눈동자와 마주치는 일이 드물다 
 

향수/정지용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어룩배기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빈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게를 돋아
고이시는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란 하늘빛이 그립어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러
풀섶 이슬에 힘초롬 휘적시던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전설 바다에 춤추던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줍던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 거리던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우리나라 짧은시
 
1. 가을 / 함민복

당신 생각을 켜 놓은채 잠이 들었습니다
 
2. 그 꽃 / 고은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3. 섬 / 정현종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4. 너에게 묻는다 / 안도현

연탄재 함부로 차지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적이 있었느냐
 
5. 낙엽 / 유치환

너의 추억을 나는 이렇게 쓸고 있다
 
6. 호수 / 정지용

얼굴 하나야
손바닥 둘로 폭 가리지만,
보고픈 마음 호수만 하니
눈 감을 수밖에

7. 짤막한 노래 / 박경원

정직하고 부드러운 빵
아름다운 푸른곰팡이를 피어내는군
자신이 썩었음을 알려주는군
 
8. ‘木星’ / 박용하

확실히, 영혼도 중력을 느낀다.
쏟아지는 중력의 대양에서
삶과 죽음을 희롱하는 시를 그대는 썼는가.
삶이 시에 빚지는 그런 시를 말이다
 
9. 지평선 / 쟈콥

그 소녀의 하얀 팔이
내 지평선의 모두였다
 
10. 後記 / 천양희

시는 내 自作나무
네가 내 全集이다.
그러니 시여, 제발 날 좀 덮어다오
 
11. 마른 나뭇잎 / 정현종

마른 나뭇잎을 본다.
살아서, 사람이 어떻게
마른 나뭇잎처럼 깨끗할 수 있으랴
 
12. 그리고 삶 / 이상희

입술을 깨물어도
참을 수 없이 터져나오는
재채기 삼창
 
13. 시멘트 / 윤용주

부드러운 것이 강하다
자신이 가루가 될 때까지 철저하게
부셔져본 사람만이 안다.
 
14. 서시 / 나희덕

단 한 사람의 가슴도
제대로 지피지 못했으면서도
무성한 연기만 내고 있는
내 마음의 군불이여
꺼지려면 아직 멀었느냐
 
15. 사이 / 박덕규

사람들 사이에
사이가 있었다 그
사이에 있고 싶다
 
양편에서 돌이 날아왔다
정신은 한번 깨지면 붙이기 어렵다
 
16. 후회 / 황인숙

깊고 깊어라
행동 뒤 나의생각
내 혀는 마음보다
정직 했느니
 
17. 별 / 곽재구

여기 어이할 수 없는 황홀!
아아 끝끝내 아침이슬 한방울로 돌아가야 할
내 욕망이여
 
18. 빵 / 장석주

누군가 이 육체의 삶,
더 이상 뜯어먹을 것이 없을 때 까지
아귀아귀 뜯어먹고 있다
이스트로 한없이 부풀어 오른 내몸을
뜯어먹고 있다!
 
19. 꿈 / 황인숙

가끔 네 꿈을 꾼다
전에는 꿈이라도 꿈인줄 모르겠더니
이제는 너를 보면
아, 꿈이로구나,
알아챈다
 
20. 저물면서 빛나는 바다 / 황지우

긴 외다리로 서있는 물새가 졸리운 옆눈으로
맹하게 바라보네, 저물면서 빛나는 바다를
 
21. 방(榜) / 함성호

천불 천탑 세우기
내 詩쓰기는 그런 것이다.
 
22. 첫사랑 / 이윤학

그대가 꺽어 준 꽃
시들 때 까지 들여다 보았네
그대가 남기고 간 시든 꽃
다시 필 때 까지
 
23. 일기 / 김형영

잘 익은 똥을 누고 난 다음
너, 가련한 육체여
살 것 같으니 술생각 나냐?
 
24. 사랑 / 정호승

무너지는
폭포 속에
탑 하나 서 있네
그 여자
치마를 걷어 올리고
폭포 속으로 걸어 들어가
탑이 되어
무너지네
 
25. 사랑 / 김명수

바다는 섬을 낳아 제 곁에 두고
파도와 바람에 맡겨 키우네
 
26. 눈물 / 정희성

초식동물 같이 착한 눈을 가진
아침 풀섶 이슬 같은 그녀
눈가에 언뜻 비친
 
27. 不倫 / 윤금초

가을날 몰래 핀 두어 송이 장미
그래도 꽃들은 감옥에 가지 않는다
위험한
이데올로기
저 반역의
開花
 
28. 행복 / 박세현

오늘 뉴스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오늘 뉴스는 없습니다
 
우리나라 국영방송의 초창기 일화다
 
나는 그 시대에 감히
행복이라는 말을 적어 넣는다
 
29. 자화상 / 신현림

울음 끝에서 슬픔은 무너지고 길이 보인다
울음은 사람이 만드는 아주작은 창문일 것
창문 밖에서
한 여자가 삶의 극락을 꿈꾸며
잊을 수 없는 저녁 바다를 낚는다.
 
30. 전집 / 최승호

놀라워라, 조개는 오직 조개껍질만을 남긴다.
 
31. 내 청춘의 영원한 / 최승자

이것이 아닌 다른 것을 갖고 싶다
여기가 아닌 다른 곳으로 가고 싶다
괴로움
외로움
그리움
 
내 청춘의 영원한 트라이 앵글
 
32. 세상에서 멀리 가려던 / 최하림

세상에서 멀리 가려던 寒山 같은 시인도
길위에서 비오면걸음을 멈추고 오던
길을 돌아본다지난시간 들이 축축이
젖은 채로 길바닥에 깔려있다
 
33. 꽃 / 조은

오래 울어본 사람은
체념할 때 터저나오는
저 슬픔과도 닿을 수 있다
 
34. 간 봄 / 천상병

너도 견디고 있구나
어차피 우리도 이 세상에 세들어 살고 있음으로
고통을 말하면 월세같은 것인데
사실은 이 세상에 기회주의자들이 더 많이 괴로워하지
사색이 많으니까
빨리 집으로 가야겠다
 
35. 하늘 냄새 / 박희준

사람이 하늘처럼
맑아 보일 때가 있다
그 때 나는 그 사람에게서
하늘 냄새를 맡는다
 
36. 도토리 모자 / 문삼석

도토리모자는
벗기면
안돼
까까머리
까까머리
놀릴테니까
 
37. 풀꽃 / 나태주

자세히 보아야
이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38. 낙엽 한 장 / 오광수

나릿물 떠내려 온 잎 하나 눈에 띄어
살가운 마음으로 살며시 건졌더니
멀리 본 늦가을 산이 손안에서 고와라


39. 서시 / 이정록

마을이 가까울수록 
나무는 흠집이 많다.

내 몸이 너무 성하다.

40. 외투 / 하재일

누구나 살면서
가슴에 대못 하나쯤 박고 살게 마련이다.
그걸 숨기기 위해
사람들은 녹이 슨 못 위에
자신의 화려한 외투 한 벌을 걸어둔다.



 

아내의 남자

  이석현
 
 
연애시절 아내의 지갑을
몰래 훔쳐보았을 땐
은발의 리처드 기어가 있었고

결혼 전후 용모 단정했던
내 모습이 한참을
자리하나 싶었는데
이내 아들 돌 사진으로 바뀌었더군

허둥대며 앞만 보고 달려오느라
한참을 잊고 살다 어쩌다 열어보니
군대 간 작은 아들이 빡빡머리
군기 바짝 든 모습이 자리했다가

얼마 전부터 파마머리 개구쟁이
외손주 녀석을 넣고 다니며
다이아반지 생긴 듯 아내는
은근슬쩍 여기저기 자랑하더군

몇 년 주기로 바뀌는
아내의 지갑 속 남자들
누굴까 그 다음은



돌에 대하여 

 이기철


구르는 것이 일생인 삶도 있다 
구르다가 마침내 가루가 되는 삶도 있다 
가루가 되지 않고는 온몸으로 사랑했다고 말할 수 없으리라 
뜨겁게 살 수 있는 길이야 알몸밖에 더 있느냐 
알몸으로 굴러가서 기어코 핏빛 사랑 한 번 할 수 있는 것이야 
맨살밖에 더 있느냐 
맨살로 굴러가도 아프지 않은 게 
돌멩이밖에 더 있느냐 
이 세상 모든 것, 기다리다 지친다 했는데 
기다려도 기다려도 지치지 않는 게 돌밖에 더 있느냐

빛나는 생이란 높은 데만 있는 것은 아니다 
가장 치열한 삶은 가장 낮은 데 있다고 
깨어져서야 비로소 삶을 완성하는 
돌은 말한다 
구르면서 더욱 단단해지는 삶이, 
작아질수록 더욱 견고해지는 삶이 뿌리 가까이 있다고 
깨어지면서 더욱 뭉쳐지는 돌은 말한다



 

울음이 타는 강

박재삼


마음도 한자리 못앉아 있는 마음일 때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가을 햇볕으로나 동무삼아 따라가면
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나고나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강을 보것네

저것 봐, 저것 봐
네보담도 내보담도
그 기쁜 첫사랑 산골 물소리가 사라지고
그 다음 사랑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 와가는
소리죽은 가을 강을 처음 보것네

출전 <사상계> (1959. 2)


 

석류를 보며 / 박재삼


한여름 내내
속으로 속으로만
익어 왔던 석류가
이 가을
하늘이 높고 햇빛이 눈부시고
바람까지 서늘한 때를 택하여
그 가슴을 빠개 놓고
다 익은 속열매를 보여
아름답기만 하구나

그러나 임이여
내 가슴은 보일 것이 없어
더 없이 쓸쓸하구나


 

  아득하면 되리라

     박재삼


해와 달, 별까지의 
거리말인가
어쩌겠나 그냥 그 아득하면 되리라
 
사랑하는 사람과
나의 거리도
자로 재지 못할 바엔
이 또한 아득하면 되리라
 
이것들이 다시
냉수 사발 안에 떠서
어른어른 비쳐오는
그 이상을 나는 볼 수 없어라
 
그리고 나는 이 냉수를
시방 갈증 때문에
마실 밖에는 다른 작정은 없어라




 

천년의 바람

- 박재삼


천년 전에 하던 장난을 
바람은 아직도 하고 있다.
소나무 가지에 쉴새없이 와서는
간지러움을 주고 있는 걸 보아라
아, 보아라 보아라
아직도 천년 전의 되풀이다.

그러므로 지치지 말 일이다.
사람아 사람아
이상한 것에까지 눈을 돌리고
탐을 내는 사람아.


 

적막

안도현

풀숲에 호박이 눌러앉아  살다 간 자리같이
그 자리에 둥그렇게 모여든 물기같이
거기에다 제 얼굴을 가만히 대보는 낮달과도 같이



그리움 - 박재삼

나뭇잎은 햇빛에 싱싱하게 윤이 나고
그와 비슷한 촌수로
물결은 더욱 빛나는 무늬를 끊임없이 빚고
또한 바람은 연방 그리운 것 외에
불 줄밖에 모르는 이것들,
천날 만날 한결같은
오, 이것들을 보아라.
물방울처럼 스러졌다가 이어져
마음은 움직이는 것을 통하여
사랑의 연습만을 부지런히 하고
그것을 영원토록
지치지 않고 하겠다는
그것 말고 나는 볼 수가 없구나.
참으로 환장할 일은 이것이로다


 

희망을 사다 / 이돈권


88세 어르신이
오피스텔을 사셨다
두 달여 동안 사시겠다 안 사시겠다를
반복하시더니 최종 마나님
결재가 났다고 하신다
그동안 안방에만 계시던
할머니가 부축을 받으시며 사무실에 나오셨다
어르신이 80대 중반의 부인 이름으로 사주시는
계약 현장을 보시려고 안방마님이 직접 나오셨다
거동이 불편한 할머니 입가에 연신 웃음이 맺힌다
마님의 미소가 창가에 비치는 유월 햇살을 타고
푸른 매실처럼 퍼져나간다
입속에 맴도는
'그 연세에 오피스텔은 사셔서 뭐 하시려고 하십니까?'
라는 말은 결국 하지 못했다
나는 꿈을 팔고
할머니는 희망을 사셨다

-시집『희망을 사다』(천년의시작,2019)



독작獨酌

문신

두 홉짜리 소주병을 땄다
병과 잔 사이는 한 치가 못 되었다
그 사이에 삼라만상의 근심이 깊었다
주섬거리지 않고 탁, 털어 넣었다
안주는 오래 물색하였다
달이 떴고 밤새 소리도 펼쳐 있었다
강물의 물비늘 두어 장을 쭉 찢었다
질겅거렸다
두 홉짜리 소주병이 비었다
강물의 수위가 한 치쯤 낮아져 있었다
노을에서 시작하였으나 어느덧 여명이었다
내내 독작이었다


문신 시집 『물가죽 북』, 《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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