륙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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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좋은 시

공광규 시 묶음
2019년 11월 30일 11시 27분  조회:1769  추천:0  작성자: 륙도하

아름다운 책 / 공광규

어느 해 나는 아름다운 책 한 권을 읽었다
도서관이 아니라 거리에서
책상이 아니라 식당에서 등산로에서 영화관에서 노래방에서 찻집에서
잡지 같은 사람을
소설 같은 사람을
시집 같은 사람을
한 장 한 장 맛있게 넘겼다
아름다운 표지와 내용을 가진 책이었다
체온이 묻어나는 책장을
눈으로 읽고


 

서울역 / 공광규

서울역 4번 플랫홈에서 부산행 고속열차를 기다리다가 발견한
화강암에 새긴 서울발 이정표 조각물
서울역에서 출발하면 닿을 수 있는 거리가 음각되어 있다
내가 오늘 가려는 부산까지 441 킬로미터
목포까지 414 킬로미터
강릉까지 374 킬로미터
그런데 평양까지는 겨우 260 킬로미터로 표시되어 있다
인천까지는 38킬로미터인데
내가 살고 있는 일산에서 개성까지는 더 가까울 것이다
부산보다 조금 더 먼 신의주가 496 킬로미터
나진은 부산 가는 거리보다 두 배 더 먼 943 킬로미터이다
그렇더라도 고속열차로 간다면 6시간이면 닿을 수 있는 거리이다
내가 못 가본 저곳들은 얼른 가보고 싶은 곳들이다
대동강 건너 신의주에서 국경을 넘어 이베리아반도까지
나진을 거쳐 광활한 시베리아를 지나 북해의 어디쯤에 닿고 싶다
어느 날 배낭을 꾸려서 떠났다가
몇날 며칠을 묵으며 깨끗한 술 한 잔 하고 돌아오고 싶은 곳이다

혀로 넘기고
두 발로 밑줄을 그었다

책은 서점이나 도서관에만 있는 게 아닐 것이다
최고의 독서는 경전이나 명작이 아닐 것이다

사람, 참 아름다운 책 한 권


 

아름다운 사이

공광규

 
이쪽 나무와 저쪽 나무가
가지를 뻗어 손을 잡았어요
서로 그늘이 되지 않는 거리에서
잎과 꽃과 열매를
맺는 사이군요

서로 아름다운 거리여서
손톱을 세워 할퀴는
일도 없겠어요
손목을 비틀어
가지를 부러뜨리거나
서로 가두는 감옥이나
무덤이 되는 일도

이쪽에서 바람 불면
저쪽 나무가 버텨주는
거리
저쪽 나무가 쓰러질 때
이쪽 나무가 받쳐주는
사이 말이에요


되돌아보는 저녁/공광규

자동차에서 내려 걷는 시골길
그동안 너무 빨리 오느라 극락을
지나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어디서 읽었던가
인디언들은 말을 타고 가다가
영혼이 뒤따라오지 못할까봐
잠시 쉰다고

발등을 스치는 메뚜기와 개구리들
흔들리는 풀잎과 여린 꽃들
햇볕에 그을린 시골동창생의 사투리
푸짐한 당숙모의 시골밥상
어머니가 나물 뜯던 언덕에
누이가 좋아하던 나리꽃 군락


나비가 되어



   공광규


어젯밤에는
내가 나를
아주 깊이 안아주며 잤어

이렇게 팔을 엇갈려
네가 나를 안아주듯
내가 나를 안아주었어

그리운 너의 체온
감자알처럼
고구마 뿌리처럼 만져지는
내가 나를 만지는 슬픔

그러다 손목을 엇갈려
가슴에 얹고
뻗어가는 슬픔
꾹꾹 누르다 잠들었어

나비가 되어
펄럭펄럭
너에게 다녀오려고

―월간 《시인동네》 2019년 6월호

완행버스를 탔다 / 공광규

오랜만에 광화문에서
일산 가는 완행버스를 탔다
넓고 빠른 길로
몇 군데 정거장을 거쳐
대도시에서 신도시로 직행하는 버스를 보내고
완행버스를 탔다

이 길 저 길 좁은 길을 거쳐
사람이 자주 타고 내리는 버스를 타고 가며
남원추어탕 집도 지나고
파주옥 앞도 지나고
전주비빔밥 집도 지나고
스캔들양주 간판과
희망맥주 앞을 지났다
고등학교 앞에서는 탱글탱글한 학생들이
기분 좋게 담뿍 타는 걸 보고 잠깐 졸았다

어느새 버스는 뉴욕제과를 지나서
파리양장점 앞에서
천국부동산을 향해 가고 있었다
천국을 빼고는
이미 내가 다 여행 삼아 다녀본 곳인데
완행버스를 타고 가며
남원, 파주, 전주, 파리, 뉴욕을
다시 한 번 다녀온 것만 같다
고등학교도 다시 다녀오고
스캔들도 다시 일으켜보고
희망을 시원한 맥주처럼 마시고 온 것 같다

직행버스를 타고 갈 수 없는 곳을
느릿느릿한 완행버스로 다녀왔다

나쁜 짓들의 목록 / 공광규

길을 가다 개미를 밟은 일
나비가 되려고 나무를 향해 기어가던 애벌레를 밟아 몸을 터지게 한 일
풀잎을 꺾은 일
꽃을 딴 일
돌멩이를 함부로 옮긴 일
도랑을 막아 물길을 틀어버린 일
나뭇가지가 악수를 청하는 것인 줄도 모르고 피해서 다닌 일
날아가는 새의 깃털을 세지 못한 일
그늘을 공짜로 사용한 일
곤충들의 행동을 무시한 일
풀잎 문장을 읽지 못한 일
꽃의 마음을 모른 일
돌과 같이 뒹굴며 놀지 못한 일
나뭇가지에 앉은 눈이 겨울꽃인 줄도 모르고 함부로 털어버린 일
물의 속도와 새의 방향과 그늘의 평수를 계산하지 못한 일
그중에 가장 나쁜 것은
저들의 이름을 시에 함부로 도용한 일
사람의 일에 사용한 일


 

욕심 / 공광규

뒤꼍 대추나무
약한 바람에 허리가 뚝 꺾였다
사람들이 지나며 아깝다고 혀를 찼다

가지에 벌레 먹은 자국이 있었나?
과거에 남 모를 깊은 상처가 있었나?
아니면 바람이 너무 드셌나?

그러나 나무 허리에선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했다

다만 너무 많은 열매를
나무는 달고 있었다.


 

서울역 / 공광규

서울역 4번 플랫홈에서 부산행 고속열차를 기다리다가 발견한
화강암에 새긴 서울발 이정표 조각물
서울역에서 출발하면 닿을 수 있는 거리가 음각되어 있다
내가 오늘 가려는 부산까지 441 킬로미터
목포까지 414 킬로미터
강릉까지 374 킬로미터
그런데 평양까지는 겨우 260 킬로미터로 표시되어 있다
인천까지는 38킬로미터인데
내가 살고 있는 일산에서 개성까지는 더 가까울 것이다
부산보다 조금 더 먼 신의주가 496 킬로미터
나진은 부산 가는 거리보다 두 배 더 먼 943 킬로미터이다
그렇더라도 고속열차로 간다면 6시간이면 닿을 수 있는 거리이다
내가 못 가본 저곳들은 얼른 가보고 싶은 곳들이다
대동강 건너 신의주에서 국경을 넘어 이베리아반도까지
나진을 거쳐 광활한 시베리아를 지나 북해의 어디쯤에 닿고 싶다
어느 날 배낭을 꾸려서 떠났다가
몇날 며칠을 묵으며 깨끗한 술 한 잔 하고 돌아오고 싶은 곳이다




 

헛간을 짓다가 / 공광규

장마에 무너진 시골 헛간을 헐고 다시 짓는데
동네사람들이 지나가며 한 마디씩 한다.
- 어라, 광규 이 사람, 주춧돌을 놓을 줄 모르는구먼.
- 어허, 그 나이 먹도록 기둥 한 번 안 세워봤구먼.
- 어이구, 지금 짓는 게 개집이여 뭐여.
동네사람들 말을 듣고 이렇게 저렇게 해보다가
한나절이면 될 것을 하루 종일 기둥도 못 세웠다.
저녁을 먹고 마루에 나와 별을 보는데
내가 지금껏 이렇게 살아왔다는 생각이 든다.
남의 말만 듣고 살아서
평생 헛간 같은 집 한 채도 못 짓고 있는 것이다.



 

얼굴 반찬

공광규(1960~)


옛날 밥상머리에는
할아버지 할머니 얼굴이 있었고
어머니 아버지 얼굴과
형과 동생과 누나의 얼굴이 맛있게 놓여있었습니다
가끔 이웃집 아저씨와 아주머니
먼 친척들이 와서
밥상머리에 간식처럼 앉아있었습니다
어떤 때는 외지에 나가 사는
고모와 삼촌이 외식처럼 앉아있기도 했습니다
이런 얼굴들이 풀잎 반찬과 잘 어울렸습니다

그러나 지금 내 새벽 밥상머리에는
고기반찬이 가득한 늦은 저녁 밥상머리에는
아들도 딸도 아내도 없습니다
모두 밥을 사료처럼 퍼 넣고
직장으로 학교로 동창회로 나간 것입니다

밥상머리에 얼굴 반찬이 없으니
인생에 재미라는 영양가가 없습니다


동사목

김광규(1941~)


유달리 추웠던 지난겨울
영하17도의 혹한을 비껴갈 수 없이
뒷동산 언덕배기에 뿌리박은 채
꼿꼿이 서서 얼어 죽은 나무들
전기톱으로 잘라내는 소리
비명처럼 들린다
산 아래 첫 집 담 너머
우리 마당에도 누렇게 얼어 죽은
낙엽송과 단풍나무
한여름 녹음 속에 처연하게 숨 멎은
동사목 두 그루
살아 있는 나무들만 바람에 수런거리고
마른 잎을 떨어버릴 수 있다는
수목의 유언에 귀 기울이며
말 없는 미라를 보듯
두고두고 바라보기만 할 뿐


 

엄마 걱정

 기형도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어두워
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담장을 허물다

   공광규

고향에 돌아와 오래된 담장을 허물었다

기울어진 담을 무너뜨리고 삐걱거리는 대문을 때어냈다

담장 없는 집이 되었다
눈이 시원해졌다

우선 텃밭 육백평이 정원으로 들어오고

텃밭 아래 사는 백살 된 느티나무가 아래 둥치째 들어왔다

느티나무가 그늘 수십평과 까치집 세채를 가지고 들어왔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벌레와 새 소리가 들어오고

잎사귀들이 사귀는 소리가 어머니 무릎 위해서 듣던 마른 귀지 소리를 내며 들어왔다


하루 낮에는 노루가

이틀 저녁엔 연이어 멧돼지가 마당을 가로질러 갔다

겨울에는 토끼가 먹이를 구하러 내려와 방콩 같은 똥을 싸고 갈 것이다

풍년초 꽃이 하얗게 덮인 언덕의 과수원과 연못도 들어 왔는데

연못에 담긴 연꽃과 구름과 해와 별들이 내 소유라는 생각에 뿌듯하였다


미루나무 수십그루가 줄지어 서 있는 금강으로 흘러가는 냇물과

냇물이 좌우로 거느린 논 수십만마지기와

들판을 가로지르는 외산면 무량사로 가는 국도와

국도를 기어다니는 하루 수백대의 자동차가 들어왔다

사방 푸른빛이 흘러내리는 월산과 청태산까지 나의 소유가 되었다


마루에 올라서면 보령 땅에서 솟아오른 오서산 봉우리가 가물가물 보이는데

나중에 보령의 영주와 막걸리 마시며 소유권을 다투어볼 참이다

오서산을 내놓기 싫으면 딸이라도 내놓으라고 협박할 생각이다

그것도 안 들어주면 하늘에 울타리를 쳐서

보령 쪽으로 흘러가는 구름과 해와 달과 별과 은하수를 멈추게 할 것이다


공시가격 구백만원짜리 기울어가는 시골 흙집 담장을 허물고 나서

나는 큰 고을 영주가 되었다 


- 공광규 시집 『담장을 허물다』 (창비, 2016)


1960년 충남 청양 출생
동국대 국문과와 단국대 대학원 문예창작과 졸업
1986년 ≪동서문학≫ 등단
1987년 《실천문학》에 현장시들을 발표
2009년 제4회 윤동주상 문학부문 대상
2010년 제1회 김만중문학상 시부문 금상
2011년 제16회 현대불교문학상 시부문 
시집 『대학 일기』 『마른 잎 다시 살아나』 『지독한 불륜』
『소주병』『말똥 한덩이』『담장을 허물다』
『신경림 시의 창작방법 연구』『시 쓰기와 읽기의 방법』『이야기가 있는 시 창작 수업』등


 

손가락 염주

공광규 (1960~)


밥상을 차리고 빨래를 주무르고
막힌 변기를 뚫고

아이들과 어머니의 똥오줌을 받아내던
관절염 걸린 손가락 마디

이제는 굵을 대로 굵어져
신혼의 금반지도 다이아몬드 반지도 맞지가 않네

아니, 이건 손가락 마디가 아니고 염주알이네
염주 뭉치 손이네하하허허 하하하호"

내가 모르는 사이에
아내는 손가락에 염주알을 키우고 있었네


 

소주병

공광규

술병은 잔에다
자기를 계속 따라 주면서
속을 비워 간다

빈 병은 아무렇게나 버려져
길거리나
쓰레기장에서 굴러다닌다

바람이 세게 불던 밤 나는
문 밖에서
아버지가 흐느끼는 소리를 들었다

나가보니
마루 끝에 쪼그러져 않은
빈소주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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