륙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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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좋은 시

한국시 *
2019년 12월 06일 19시 00분  조회:2357  추천:0  작성자: 륙도하

종이비행기

   이선명


종이를 접어 날리는 습관이 생겼다 
보낼 수 없는 편지를 종이 접어 
그대도 바라보고 있을 저 하늘에 
그대를 꿈꾸며 나를 보낸다

그대의 마음 가에 닿지 못하고 
금새 내 그리움 속으로 곤두박질치는 
기운 사랑만을 쫓아 바닥으로 떨어진 종이 눈물 
저 나약한 비행기가 그녀에게 갈 수 없음을 나는 안다

하지만 사랑이란 포기할 수 없는 절망 
오늘도 나는 부치지 못할 편지를 종이 접어 그대에게 날린다 
내가 할 수 있는 사랑은 오직 이것 뿐 
깊어가는 마음만 하늘을 날아간다


 

다시

 이선명


어떻게 불러야 하는지 잊어버렸다
더 크게 부를수록 고요해지는
거짓이 되어버린 말들과
그리움이 되어버린 시간들

불현듯 너는 떠났고
허락도 없이 그리움은 남았다
앉거나 걷거나 혹은 서 있을 때도
내 안에 투명한 방울들이 맺히고 있었다

산다는 것은 죽어가는 것이 되었고
기억하는 것은 떠난 것이 되어 있었다
내 삶에 낙서 되어버린 한 사람의 이름
어디로 가야 다시 도착할 수 있는 걸까

나는 물들기 쉬운 어리석은 사람
한 번의 입맞춤을 위해
힘없이 떠나보낸 시간들을 기억해 본다
쓸쓸히 왔던 길을 돌아서듯 너를 생각한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이 혹 당신이 아니라는 착각
하지만 그래도 후회할 수 없다
뼈가 부서지도록 아픈 이름을 안고
너라는 끝없는 절망을 사랑했다

 

마른 꽃 
 
 이선영 

 
시들고야 말았다 
식었다  
 
그대에게서 오래 전 받은 따뜻한 꽃 한송이  
 
벽에 거꾸로 매달린 채 하세월  
 
사랑은 말라붙은 꽃만 남기고 
기어이 그대를 벽에 꽂아놓진 못했어도  
 
내 마음 깊은 어디쯤에 
딱딱하게 걸려 넘어가지 않는 마른 꽃  
 
속이 다 비고도 
바스라지지 않는


 

세수 / 이선영 

어제의 나를 깨끗이 씻어낸다 
오늘의 얼굴에 묻은 어제의 눈곱 
어제의 잠 
어젯밤 어둠 어젯밤 이부자리 속의 
어지러웠던 꿈 어제가 혈기를 거둬간 
얼굴의 창백함을 
힘있지는 않지만 느리지는 않은 
내 손길로 문질러버린다 
늘 같아 보이지만 늘 새 것인 물이 
얼굴에 흠뻑! 

얼마나 다행스러운가 
오늘엔 오늘 아침 갓 씻어낸 물방울 숭숭 맺힌 나의 얼굴이 있고 
그러나 왠지 가슴 한 구석이 서늘하지 않은가 
어제는 잔주름만 남겨놓았고 
오늘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것


 

짧고도 길어야 할

      이선영


 그대와 내가 늘 처음처럼 사랑하려 애쓰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은
 사랑한다는 말을 지루하도록 되풀이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은
 마침내 낯익어서 낯설어져 버린 서로의 얼굴이 마주치는 순간을 맞이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무엇보다 그대와 내가 거문고의 여러 개 줄 가운데 딱 두 줄처럼
 끝끝내 묵음으로 울려 왔음을 들키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흙 속에 바람 속에 뼛가루로 재로 영영 묻혀 버리면 그만이라는 것은
 이쯤에서 추억이 되었으면 하고 바랄 때
 사랑의 박제를 만들어 가질 수 있다는 것은
 그대 앞에서 내가, 내 앞에서 그대가 늙어가서는 안되겠기에
 사랑과 시는 늙어서는 안되겠기에
 사랑과 시를 위해서는 짧았으면 싶지만
 생활과 핏줄을 위해서는 질기게도 길어야 할,
 당길 수도 늘릴 수도 없는 이
 인생이라는 것

 

 

 花樣年華(화양연화) / 이선영
 
 
가장 불행한 얼굴로
지금이 가장 행복한 때이노라고
리첸 부인은 말했다
 
"정말 많이 보고 싶지만, 먼 후일을 기약하기로 해요"
편지를 써야만 했던 날
 
살아갈 날보다
살아온 날들이 더 많고
 
게임은 거의 끝나가는데
남은 판은 더욱 절박한
 
사십세
 
행복은
불행이라는 돌틈에 숨은 작은 샘구멍
불행은
행복의 부서지기 쉬운 살을 감싼 갑각
 
알겠구나,
평생이
이 뗄 수 없는 연인들과의
부질없는 삼각관계임을!
 
불행의 적요한 한낮을
화(花)-아-양(樣)-연(年)-ㄴ-화(華) 라디오에서 노랫소리가 흘러나올 때
 
불행은 자기가 빠져나갈 틈을 알고 있다




 

사람이 선물입니다 

  김민소


하늘이 빛나는 것은 은하수 때문이고
들판이 빛나는 것은 원시림 때문이고
세상이 빛나는 것은 사람 때문입니다.

아픔이 소중한 것은
기쁨과 함께 하기 때문이고
실패가 소중한 것은
성장과 함께 하기 때문이고
세상이 소중한 것은
사람과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자연은 받아들이는 아름다움을 배우게 하고
세상은 나누는 아름다움을 배우게 하고
사람은 존재의 아름다움을 배우게 해줍니다.

살면서 가장 행복한 시간은
가슴 따뜻한 사람과의 만남입니다.

사람이 선물입니다



 

다음 생에 할 일들


   안주철

 

아내가 운다.
나는 아내보다 더 처량해져서 우는 아내를 본다.
다음 생엔 돈 많이 벌어올게.
아내가 빠르게 눈물을 닦는다.
나는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다음 생에는 집을 한 채 살 수 있을 거야.
아내는 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본다.
다음 생에는 힘이 부칠 때
아프리카에 들러 모래를 한줌 만져보자.
아내는 피식 웃는다.
이번 생에 니가 죽을 수 있을 것 같아.
 
나는 재빨리 아이가 되어 말한다. 배고파.
아내는 밥을 차리고
아이는 내가 되어 대신 반찬 투정을 한다.
순간 나는 아내가 되어
아이를 혼내려 하는데 변신이 잘 안 된다.
아이가 벌써 아내가 되어 나를 혼낸다.
억울할 건 하나도 없다.
조금 늦었을 뿐이다.
 
그래도 나는 아내에게 말한다.
다음 생엔 이번 생을 까맣게 잊게 해줄게.
아내는 눈물을 문지른 손등같이 웃으며 말한다.
오늘 급식은 여기까지



 

책 읽는 남자


                                    강기원

 

실직은 질식이다
목을 죄던 것들이
어느 날 툭 끊어졌는데
이번엔 보이지 않는 손이
온종일 그의 목을 조른다
보이지 않는 손은
보이는 손보다 더 집요하다
아침마다
단정히 넥타이를 매고
서류가방을 들고
아내의 배웅을 받으며
그는 집을 나선다
아침 아홉 시 입실
밤 아홉 시 퇴실
매일 밤 늦는
그의 귀가를 기다리며
아내는 야근수당을 기대하리라
도서관 그 자리엔
언제나 그가 있다
책 보다는 창밖에
멍한 시선 자주 보내는
말쑥하고 창백한
높은 도수 너머의 그가
자주 목덜미를 문지르는 그가



 

아내가 옳다

이동재

 
 
아내가 옳다!
젊어선 세상의 정의가 공자나 맹자
예수나 부처의 말씀에 있는 줄 알았다
조금 더 젊었을 땐 마르크스나 프로이트에게 있는 줄 알았고
한창 땐 레닌이나 모택동 체 게바라
루카치 마르쿠제 아드르노 벤야민 라깡이나 지젝
자유주의이니 자본주의, 사회주의니 공산주의
구조주의나 후기구조주의 리얼리즘 혹은 모더니즘
하다못해 신자유주의가 옳은 줄 알았다
독수공방, 아내가 외롭게 지새우는 긴 밤
그래도 세상의 정의는 바깥에 있는 줄 알았다
거리에서 술집에서 책상 앞에서 헤매던 시절
세상의 옳고 그름이 그 어디쯤에 있는 줄 알았다
마지못해 내는 학회지나 창비나 문지 같은 잡지에 숭고한 뭔가가 있다거나
요사스런 사설(私設邪說)로 가득찬 신문지 쪼가리 속에
찾아야 할 진실이 있다고 진정으로 믿은 것은 아니지만
여전히 세상의 진리가 그 어디쯤에 서성이고 있을 줄 알았다
허나 찍히고 짤리고 미끄러지고 터지고 뭉개져
돌아와 식탁 앞에 앉은 어느 저녁
아내는 옳았다
아내가 옳다, 아내가 옳다
아내가 항상 옳다
라고 수없이 되뇌어 보는 중년의 어떤 나,
아내가 역시 옳다, 아내는 여전히 옳다, 무조건 옳다!


.

 

아내의 젖을 보다

이승하

 
  
나이 쉰이 되어 볼품없이 된 
아내의 두 젖가슴이 
아버지 어머니 나란히 모신 무덤 같다 
유방암이란다 

두 아이 모유로 키웠고 
내가 아기인 양 빨기도 했던 
아내의 젖가슴을 이제 
메스로 도려내야 한다 
나이 쉰이 다 되어 그대 
관계를 도려내고 
기억을 도려내고 
그 숱한 인연을 도려내듯이 

암이 찾아왔으니 암담하다 
젖가슴 없이 살아야 할 세월의 길이를 
생명자가 있어 잴 수가 있나 
거듭되는 항암 치료로 입덧할 때처럼 
토하고 또 토하는 아내여 
그대 몇 십 년 동안 내 앞에서 
무덤 보이며 살아왔구나 
두 자식에게 무덤 물리며 살아왔구나 

항암 치료로 대머리가 되니 
저 머리야말로 둥그런 무덤 같다 
벌초할 필요가 없다 
조부 무덤 앞 비석이 
발기된 내 성기 닮았다 

- 계간《서정시학》2008년 봄호


 

나의 아내

                            문정희


나에게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봄날 환한 웃음으로 피어난
꽃 같은 아내
꼭 껴안고 자고 나면
나의 씨를 제 몸 속에 키워
자식을 낳아주는 아내
내가 돈을 벌어다 주면
밥을 지어주고
밖에서 일할 때나 술을 마실 때
내 방을 치워놓고 기다리는 아내
또 시를 쓸 때나
소파에서 신문을 보고 있을 때면
살며시 차 한잔을 끓여다주는 아내
나 바람나지 말라고
매일 나의 거울을 닦아주고
늘 서방님을 동경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내 소유의 식민지
명분은 우리 집안의 해
나를 아버지로 할아버지로 만들어주고
내 성씨와 족보를 이어주는 아내
오래 전 밀림 속에 살았다는 한 동물처럼
이제 멸종되어간다는 소식도 들리지만
아직 절대 유용한 19세기의 발명품 같은
오오, 나에게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아내의 빈자리 

    정연복


아내가 오랜만에
친정 나들이를 갔습니다

한 며칠 엄마랑
함께 지낼 작정이랍니다.

첫날은 아내가 없으니
오히려 마음이 홀가분했습니다

둘째 날도 큰 불편 없이
그럭저럭 견딜 만했습니다

셋째 날부터 아내 생각이 나며  
홀로 자는 밤이 쓸쓸했습니다 

가슴에 구멍이 뻥 뚫린 듯
아내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집니다

하루 세끼 밥도
먹는 둥 마는 둥입니다.

아무래도 나는
아내가 곁에 있어야겠습니다.


 


아내와 나 사이

       이생진
 

아내는 76이고
나는 80입니다
지금은 아침저녁으로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어가지만 속으로 다투기도 많이 다툰 사이입니다
요즘은 망각을 경쟁하듯 합니다
나는 창문을 열러 갔다가
창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고
아내는 냉장고 문을 열고서 우두커니 서 있습니다
누구 기억이 일찍 돌아오나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은 서서히 우리 둘을 떠나고
마지막에는 내가 그의 남편인 줄 모르고
그가 내 아내인 줄 모르는 날도 올 것입니다
서로 모르는 사이가 
서로 알아가며 살다가
다시 모르는 사이로 돌아가는 세월
그것을 무어라고 하겠습니까
인생?
철학?
종교?
우린 너무 먼 데서 살았습니다


 

네비게이션

  홍종빈
 
 
자동차를 몰고 나서면
어느새 아내가 네비게이션 안에서 말하기 시작한다.
또박또박 하느님처럼 말한다.
전방에 과속방지턱이 있습니다. 안전운전 하십시오.
그녀가 시키는 대로 브레이크를 밟는다.
보이지 않는 아내가 다시 말한다.
전방에 과속단속구간입니다. 과속에 주의하십시오.
나는 언제나 길들여진 의식으로
브레이크를 밟는다.
어디로 갈까 묻지 말고
그림자처럼 오롯이 따라만 오세요.
당신이 한평생 건너온 그 질퍽하고 굴곡진 삶도
거역할 수 없는 내 힘에 이끌려 왔듯이.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현관문을 열면 그녀가 다시 말하기 시작한다.
너무 늦게 들어오지 마세요. 내가 심심합니다.
제발 담배 피우지 마세요. 내 건강에 해롭습니다.
당신은 영원한 내 포로입니다.

 

하동 ㅡ ㅡ 이시영


   하동쯤이면 딱 좋을 것 같아. 화개장터 넘어 악양면 평사리나 아, 거기 우리 착한 남준이가 살지. 어쩌다 전화 걸면 주인은 없고 흘러나오던 목소리. “살구꽃이 환한 봄날입니다. 물결에 한 잎 두 잎…”. 어릴 적 돌아보았던 악양 들이 참 포근했어. 어머니가 살아 계시다면 얼마나 좋아하실까! “배틀재 토지 동방천 화개… 빨리 빨리 타이소!” 하며 엉덩이로 마구 승객들을 들이밀던 차장 아가씨도 생각나네. 아니면 인호 자네가 사는 금성면도 괜찮아. 화력발전소가 있지만 설마 터지겠어? 이웃에 살며 서로 오갈 수만 있다면! 아니 읍내리도 좋고 할리 데이비슨 중고품 몰고 달리는 원규네 좀 높은 산중턱 중기마을이면 또 어떠리. 구례에는 가고 싶지 않아. 마음만 거기 살게 하고 내 몸은 따로 제금을 내고 싶어. 지아는 지가 태어난 간전면으로 가고, 두규도 거기 어디에 아담한 벽돌집을 지었다더군. 설익은 풍수 송기원이 허리를 턱하니 젖혀 지세를 살피더니 ”니가 살 데가 아니다“라고 했다며?
   하여간 그쯤이면 되겠네. 섬진강이 흐르다가 바다를 만나기 전 숨을 고르는 곳. 수량이 많은 철에는 재첩도 많이 잡혔지만 가녘에 반짝이던 은빛 모래 사구들. 김용택이 사는 장산리를 스쳐온 거지. 용택이는 그 마을 앞 도랑을 강이라고 우겼지만 섬진강은 평사리에서 바라볼 때가 제일 좋더라. 그래, 코앞의 바다 앞에서 솔바람 소리도 듣고 복사꽃 매화꽃도 싣고 이젠 죽으러 가는 일만 남은 물의 고요 숙연한 흐름. 하동으로 갈 거야. 죽은 어머니 손목을 꼬옥 붙잡고 천천히, 되도록 천천히. 대숲에서 후다닥 날아오른 참새들이 두 눈 글썽이며 내려앉는 작은 마당으로.


ㅡ이시영 시집 『하동』(창비, 2017)


 

* 분수(喷水)

              이경희

난 첼리스트

다칠세라 당신을
금이 갈세라
가만히 포응하면
매지근한 체온에
튀는 스타키토

내 어께에
당신의 머릿카락은 바닷물결

차츰
잠기우는 몸을 안고
흔드는 파도의 요람

내 기인 손가락은
당신의 허리에서 내려오는
엉뚱한 애무처럼

몸저리는 연소에 타는
쏘나기, 쏘나기 소린
내 그이의 분수


 

사람을 사랑해도 될까

   손 미


  사람이 죽었는데 사람을 사랑해도 될까. 밤을 두드린다. 나무문이 삐걱댔다. 문을 열면 아무도 없다. 가축을 깨무는 이빨을 자판처럼 박으며 나는 쓰고 있었다. 먹고사는 것에 대해 이 장례가 끝나면 해야 할 일들에 대해 뼛가루를 빗자루로 쓸고 있는데 내가 거기서 나왔는데 식도에 호스를 꽂지 않아 사람이 죽었는데 너와 마주 앉아 밥을 먹어도 될까. 사람은 껍질이 되었다. 헝겊이 되었다. 연기가 되었다. 비명이 되었다 다시 사람이 되는 비극. 다시 사람이 되는 것. 다시 사람이어도 될까. 사람이 죽었는데 사람을 생각하지 않아도 될까. 케이크에 초를 꽂아도 될까. 너를 사랑해도 될까. 외로워서 못 살겠다 말하던 그 사람이 죽었는데 안 울어도 될까. 상복을 입고 너의 침대에 엎드려 있을 때 밤을 두드리는 건 내 손톱을 먹고 자란 짐승. 사람이 죽었는데 변기에 앉고 방을 닦으면서 다시 사람이 될까 무서워. 그런 고백을 해도 될까. 사람이 죽었는데 계속 사람이어도 될까.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라고 묻는 사람이어도 될까. 사람이 죽었는데 사람을 사랑해도 될까. 나무문을 두드리는 울음을 모른 척해도 될까.

 

―손 미 시집 『사람을 사랑해도 될까』(민음사, 2019)에서

 

  모르는 목소리

   김행숙
​​

  모르는 목소리가 아는 사람처럼 내 이름을 부르며 걸어오고 있다
  얼굴은 안개에 감겨 얼굴이 없는 것 같고
  같은 안개를 뚫고 모르는 목소리가 내게 달라붙고 있다
  어떤 앎이 이처럼 끈적이는가. 모든 앎이 이처럼 끈적이는가
  나는 침묵의 계명을 따랐던 교분들을 희뿌연 빛에 비추어 상기하고 있다, 오래전 
  그 중에...... 그는 법정 서기였다
  그는 완벽했다

  이제 말을 해도 되는 거냐고 내가 놀라며 물었더니
  메아리처럼 돌아오는 그의 목소리는 주인을 바꾼 듯이 변해 있었다
  또 다른, 모르는 목소리가 아는 사람처럼 내 이름을 부르며 더 가깝게 걸어오고 있다
  나의 이름이 나를 비껴가고 있다

- 시집 <에코의 초상>


 

용접 / 이석현


온몸으로 젖어 본 사람은 알 수 있지

보안경 너머로
삼천도 불꽃물의 길을 터주면
두툼한 방열복 속으로
후끈 스며들던 고열의 마음들

서로 녹아 넘치도록 혼절해야만
한 몸 되는 힘겨운 접목
뼈와 살을 녹여내는 아픔을
나눈 후 태어난 신생

기억을 가로지르는 고압선에서 나온
수많은 불티들을
온 가슴으로 막아내다가
지나온 길을 더듬어 균열을 살핀다.

마음과 마음을 묶는 일이
얼마나 뜨거운 일인지
시뻘걸게 달아
온 몸으로 젖어 본 사람은 알 수가 있지.


-시집 『둥근 소리의 힘』 (문학만, 2010)



 

갱년기

  안현미

 

국숫집에 와보니 알겠다

호르몬이 울고

호르몬이 그리워하고

호르몬이 미워하고

다 호르몬이 시키는 일이라는 걸

 

매일매일 죽지도 않고 찾아와

죽고 싶다고 말하는

나는 누구인가?

 

국수 가락처럼 긴

사생과 결단의 끝

 

당신,

내가 살자고 하면 죽어버릴 것 같은

내가 죽자고 하면 살아버릴 것 같은

 

국숫집에 와보니 알겠다

크게 잘못 살고 있었다는 걸

크게 춥게 살고 있었다는 걸

그래서 따뜻한 국수가 고팠다는 걸



 

  모르는 목소리

   김행숙
​​

  모르는 목소리가 아는 사람처럼 내 이름을 부르며 걸어오고 있다
  얼굴은 안개에 감겨 얼굴이 없는 것 같고
  같은 안개를 뚫고 모르는 목소리가 내게 달라붙고 있다
  어떤 앎이 이처럼 끈적이는가. 모든 앎이 이처럼 끈적이는가
  나는 침묵의 계명을 따랐던 교분들을 희뿌연 빛에 비추어 상기하고 있다, 오래전 
  그 중에...... 그는 법정 서기였다
  그는 완벽했다

  이제 말을 해도 되는 거냐고 내가 놀라며 물었더니
  메아리처럼 돌아오는 그의 목소리는 주인을 바꾼 듯이 변해 있었다
  또 다른, 모르는 목소리가 아는 사람처럼 내 이름을 부르며 더 가깝게 걸어오고 있다
  나의 이름이 나를 비껴가고 있다

- 시집 <에코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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