륙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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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 9
2019년 12월 10일 23시 25분  조회:1753  추천:0  작성자: 륙도하

거대한 식탁

   반연희

 
저것은 회전판이 있는 식탁이다

바퀴 달린 접시들이 돌고 있는

휘어진 도로

닭을 가득 실은 트럭이 달려간다

아이들을 실은 버스가 달려간다

접시 위의 닭들이 질주한다

아이들의 혀 위에서

닭을 실은 트럭이 질주한다

트럭이 달려간다

버스가 입을 벌리며 뒤를 쫓는다

트럭이 꼬리부터 먹힌다

버스가 익지 않은 트럭을 뱉어낸다

반쯤 씹혀진

회전판이 멈춰지고

깨진 접시들이 옮겨지고 있다

거대한 식탁의

먹어치워진 오늘이 내일로 대체되고 있다

―계간 《시와 정신》 2006년 봄호


 

안개의 나라 / 김광규

언제나 안개가 짙은
안개의 나라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안개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므로
안개 속에 사노라면
안개에 익숙해져
아무것도 보려고 하지 않는다
안개의 나라에서는 그러므로
보려고 하지 말고
들어야 한다
듣지 않으면 살 수 없으므로
귀는 자꾸 커진다
하얀 안개의 귀를 가진
토끼 같은 사람들이
안개의 나라에 산다


 

생각의 사이 / 김광규

시인은 오로지 시만을 생각하고
정치가는 오로지 정치만을 생각하고
경제인은 오로지 경제만을 생각하고
근로자는 오로지 노동만을 생각하고
법관은 오로지 법만을 생각하고
군인은 오로지 전쟁만을 생각하고
기사는 오로지 공장만을 생각하고
농민은 오로지 농사만을 생각하고
관리는 오로지 관청만을 생각하고
학자는 오로지 학문만을 생각한다면

이 세상이 낙원이 될 것 같지만

시와 정치의 사이
정치와 경제의 사이
경제와 노동의 사이
노동과 법의 사이
법과 전쟁의 사이
전쟁과 공장의 사이
공장과 농사의 사이
농사와 관청의 사이
관청과 학문의 사이를

생각하는 사람이 없으면 다만

휴지와
권력과
돈과
착취와
형무소와
폐허와
공해와
농약과
억압과
통계가

남을 뿐이다.



 

세 시에서 다섯 시 사이

도종환


산벚나무 잎 한쪽이 고추잠자리보다 더 빨갛게 물들고 있다 지금 우주의 계절은 가을을 지나가고 있고, 내 인생의 시간은 오후 세 시에서 다섯 시 사이에 와 있다
내 생의 열두 시에서 한 시 사이는 치열하였으나 그 뒤편은 벌레 먹은 자국이 많았다

이미 나는 중심의 시간에서 멀어져 있지만 어두워지기 전까지 아직 몇 시간이 남아 있다는 것이 고맙고, 해가
다 저물기 전 구름을 물들이는 찬란한 노을과 황홀을 한번은 허락하시리라는 생각만으로도 기쁘다

머지않아 겨울이 올 것이다 그때는 지구 북쪽 끝의 얼음이 녹아 가까운 바닷가 마을까지 얼음조각을 흘려보내는 날이 오리라 한다 그때도 숲은 내 저문 육신과
그림자를 내치지 않을 것을 믿는다 지난 봄과 여름 내가 굴참나무와 다람쥐와 아이들과 제비꽃을 얼마나 좋아하였는지, 그것들을 지키기 위해 보낸 시간이 얼마나
험했는지 꽃과 나무들이 알고 있으므로 대지가 고요한 손을 들어 증거해 줄 것이다

아직도 내게는 몇 시간이 남아 있다
지금은 세 시에서 다섯 시 사이


·시집 「세시에서 다섯 시 사이」」(창비, 2011)


 

별이 좋은 것은


                          이돈권


별이 좋은 것은
멀리 있기 때문이다
멀리 있어
달려갈 수 없기 때문이다
상처 총총 다 여미고
빛나는 모습만 보여 주기 때문이다
어둠이 누를수록
더욱 찬란해지기 때문이다
수억만 리에서 달려와
벅찬 꿈꾸게 하는 영롱함 때문이다

별이 안타깝도록 좋은 것은
가까이 갈 순 없어도
바라만 봐도 좋은
너를 닮았기 때문이다


-시집『희망을 사다』(천넌의시작,2019)




흰 바람벽이 있어


        백석(1912~1996)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十五燭)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 글은 다 낡은 무명샤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 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늬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주 앉아 대구국을 끓여 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여 어늬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굴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ㅡ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아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 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하눌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쓰 쨈'과 도연명(陶淵明)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흰 바람벽이 있어


        백석(1912~1996)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十五燭)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 글은 다 낡은 무명샤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 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늬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주 앉아 대구국을 끓여 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여 어늬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굴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ㅡ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아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 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하눌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쓰 쨈'과 도연명(陶淵明)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묵상

고정희(1948~1991)


잔설이 분분한 겨울 아침에
출근버스에 기대앉아
그대 계신 쪽이거니 시선을 보내면
언제나 거기
적막한 산천이 놓여 있습니다
고향처럼 머나먼 곳을 향하여
차는 달리고 또 달립니다
나와 엇갈리는 수십 개의 길들이
무심하라 무심하라 고함치기도 하고
차와 엇갈리는 수만 가닥 바람이
떠나라 떠나거라 떠나거라....
차창에 하얀 성애를 피웁니다
나는 가까스로 성애를 긁어내고 다시
당신 오늘 쪽이거니 가슴을 열면
언제나 거기
끝 모를 쓸쓸함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운무에 가린 나지막한 야산들이
희미한 햇빛에 습기 말리는 아침
무망한 슬픔으로 비어있는
저 들판이
내게 오는 당신 마음 같아서
나는 왠지 눈물이 납니다.


 

배꼽 
노향림

꽃에도 배꼽이 있는가
흔적없이 죽음을 수납하는 꽃들에게는
배꼽이 자란다
열매 꼭대기에 오똑하니 올라 앉아서
방금 떨어진 제 배꼽이
향기로운 전생이었다는 것을
태를 태워 묻은 아득히 먼
고향이었다는 것을
터질 듯한 온 몸으로 보여준다
상처 아문 자리에 봄이 돋고
은빛 금빛 장신구에
보랏빛 티셔츠를 입는
제비꽃들이 일제히 만개한 배꼽들을 열고
깔깔거리는 동안
지상엔 웃음소리들이 수북이 쌓인다
봄이 쌓인다


봉성장날

권달웅


닷새마다 찾아오는 봉성장날은
북적거리는 장꾼들만큼
왁자한 소고기국밥 냄새가
는개처럼 자욱했다.

마지막 수업시간이 끝나자마자
침 묻혀 쓰던 몽당연필 달각거리는
책 보퉁이를 둘러메고
까불대는 비비새처럼 날아갔다.

농기구 좌판 거쳐 건어물 전 거쳐
엿장수 가이 소리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있던 어머니는 나에게
엿 한 가락을 내밀었다.

콩 서 말을 팔아서 산
간고등어 한 손은 내가 들고
호미 세 자루 미역 한 오리 양미리 네 두릅은
어머니가 이고

남은 돈이 맞는지 다시 셈해 보면서
돌아오는 길에는
떼 찔레꽃이 어머니 환한 웃음소리처럼
하얗게 피어나고 있었다.


 


가물가물 불빛

최정례(1955~)


당신과 이젠 끝이다 생각하고 갔어
가물가물 땅속으로 꺼져갔어

왕릉의 문 닫히고
석실 선반 위에 그 불빛
얼마 동안 펄럭였을까
왕이 죽고 왕비가 죽고
나란히 누운 그들
칼을 차고 금신발을 신고
저승 벌판을 헤맬 동안
그 불꽃 혼자 어떻게 떨었을까

당신 나 끝이야
이젠 우리 죽은 거야

가물가물 마지막 불빛 사윈 다음
또 몇 세기를 캄캄히 떠내려갈까
금관도 옥대도 비스듬히 쓰러졌지
다 무너지고 무너져서
왕비 어금니 하나 반짝 눈떴지

얼마를 헤매게 될까
당신이 있는 세상 거기
그래도 봄이면 새풀 돋겠지
삐죽삐죽 솟고 무성해지다
냇물은 소리치며 돌아 내려가겠지
당신 나 잊고 나도 당신 잊고

 산그늘 


박규리(1960~)


먼산바라기만 하던 스님도
바람난 강아지며 늙은 산고양이도
달포째 돌아오지 않는다
자기 누울 묏자리밖에 모르는 늙은 보살 따라
죄 없는 돌소나무밭 돌멩이를 일궜다
문득,
호미 끝에 찍히는 얼굴들
절집 생활 몇 년이면 나도
그만 이 산그늘에 마음 부릴 만도 하건만,
속세 떠난 절 있기나 한가
미움도 고이면 맛난 정이 든다더니
결코 용서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사람들이
하필 그리워져서
눈물 찔끔 떨구는 참 맑은 겨울날


 

산그늘 


박규리(1960~)


먼산바라기만 하던 스님도
바람난 강아지며 늙은 산고양이도
달포째 돌아오지 않는다
자기 누울 묏자리밖에 모르는 늙은 보살 따라
죄 없는 돌소나무밭 돌멩이를 일궜다
문득,
호미 끝에 찍히는 얼굴들
절집 생활 몇 년이면 나도
그만 이 산그늘에 마음 부릴 만도 하건만,
속세 떠난 절 있기나 한가
미움도 고이면 맛난 정이 든다더니
결코 용서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사람들이
하필 그리워져서
눈물 찔끔 떨구는 참 맑은 겨울날


이사

    김나영
 
 
이 남자다 싶어서
나 이 남자 안에 깃들어 살
방 한 칸만 있으면 됐지 싶어서
당신 안에 아내 되어 살았는데
이십 년 전 나는
당신밖에 없었는데
지금은 나 당신 밖에 있네
옛 맹세는 헌 런닝구처럼 바래어져 가고
사랑도 맹세도 뱀허물처럼 쏙 빠져나간 자리
25평도 아니야
32평도 아니야
사네
못 사네
내 마음의 공허가
하루에도 수십 번 이삿짐을 쌌다 풀었다 하네

 

절정(絶頂)

 이육사


매운 계절(季節)의 채쭉에 갈겨
마츰내 북방(北方)으로 휩쓸려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高原)
서리빨 칼날진 그우에서다

어데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발 재겨 디딜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와인의 체위를 아세요
 
이향란
 
 
햇빛 아래 싱글싱글 맺히는 과일의 본명은 포도이고요
촛불 앞에서 머뭇머뭇, 그러나 
군침 도는 고백의 가명은 와인이에요.
 
드디어 완성됐나요? 그럼 깨지지 않게 조심해서
어둡고 서늘한 침대에 뉘여 주세요.
껍질 속 바람과 햇빛이 마음껏 뒤척일 수 있도록 
약간 기울여서요.
 
왼쪽으로 석 달 오른쪽으로 석 달
탱글탱글 꿈의 석 달 정신없이 와 닿을 입술의 석 달
 
빨간 오토바이를 타고 먼지 날리며 달리던 소년의 
부릉부릉 심장 박동 소리에 비록 짓이겨지고 으깨졌지만 
또르르 동그란 의지와 눈물은 더욱 투명해졌답니다.
 
아무도 모르게 은밀하게 바라보되
향이 새어나오면 윙크해주세요.
 
해 저물녘
 
빙글 돌리고, 
빙글 바라보고, 
빙글 마시고, 
빙글빙글 추는, 
물방울들의 춤
 
너무 크게 움직이지는 않으려고요. 
여태 녹지 않은 햇빛을 천천히 녹이는 중이거든요. 
새하얀 귀를 붉게 붉게 물들이는 중이거든요.
 
무덥고 긴 그해 여름을 쪼르르 잔에 따르면
재즈와 치즈의 얼룩이 묻어나는,

스위트하거나 드라이한 와인의 이 오묘한 체위를 
혹시 아세요?
 
월간 《시인동네》 2018년 10월호



   저녁의 감정

     김행숙


  가장 낮은 몸을 만드는 것이다

  으르렁거리는 개 앞에 엎드려 착하지, 착하지, 하고 울먹이는 것이다

  가장 낮은 계급을 만드는 것이다, 이제 일어서려는데 피가 부족해서 어지러워지는 것이다

  현기증이 감정처럼 울렁여서 흐느낌이 되는 것이다, 파도는 어떻게 돌아오는가

  사람은 사라지고 검은 튜브만 돌아온 모래사장에…… 점점 흘려 쓰는 필기체처럼

  몸을 눕히면, 서서히 등이 축축해지는 것이다

  눈을 감지 않으면, 공중에서 굉음을 내는 것이 오늘의 첫번째 별인 듯이 짐작되는 것이다

  눈을 감으면, 이제 눈을 감았다고 다독이는 것이다

  그리고 2절과 같이 되돌아오는 것이다

 

- 시집 <에코의 초상>  P118~P119


■ 김행숙 시인
 - 1970년 서울 출생
 - 고려대 국어국문학 박사
 - 강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 1999년 <현대문학> 등단
 - 시집 <사춘기> <이별의 능력> <타인의 의미> <에코의 초상> 외 다수'


 

   사람살이와 시 쓰기 ㅡ 이어산

   필자는 몇 년 전 새해 첫 강의를 하면서 ‘당.신.멋.져 운동’을 하자고 주창한바 있다. ‘당: 당차게 시를 쓰고, 신: 신나게 시를 쓰고, 멋: 멋있게 시를 쓰되, 져: 져주는 겸손함으로 시를 쓰자는 첫 글자인데 한 동안 시 모임에서 즐겨쓰는 건배사로 인용하기도 했다.

   시를 쓰는 일은 우리 삶의 집에 창문을 내는 일이고 그 창문에 품위 있는 커튼을 다는 작업 같다고 강조해 왔다. 시를 쓰더니 그 사람의 언어와 삶이 품격 있는 사람으로 변화되었다는 소리를 듣도록 하자는 말이다. 정제되지 않은 말, 자신의 넋두리나 연민, 비탄조는 그런 시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맡겨두고 우리는 좀 더 진취적이고 젊고 밝은 내용의 시를 쓰되 겸손을 잃지 말자고 주장해 왔다.

   모든 시인이 좋은 시를 쓰고 유명하게 된다면 좋겠지만 그럴 수는 없다. 그걸 부러워 할 필요도 없다. 좋은 시라고 신춘문예나 유명 시 전문지에서 내어놓는 많은 시 들은 그것의 해석부터가 쉽지 않은 난해함 때문에 오히려 시가 골치 아픈 것이 되는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 그렇게 되면 시는 전문가들의 전유물이 되고 일반 독자들에게선 멀어지는 부작용이 생기게 된다. 시적 감동이란 이해를 전재로 한 독자를 위한 것인데 소통의 가능성을 차단한 난해함이란 오히려 빈곤과 성취도를 감추기 위한 수단일 수도 있고 그것은 시가 추구하는 근원적 방향과도 맞지 않는 일이다. 물론 난해하거나 실험적, 전위적인 시에도 좋은 시가 많다. 그러나 그것이 주류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시는 마음속의 불꽃이고 강력한 감정이 자연스럽게 흐르는 것, 즉 정(情)을 뿌리로 하고, 언어를 싹으로 하며, 운율(韻律)을 꽃으로 하고, 의미를 열매로 하는 것이다. 또한 시는 영혼의 화가가 그리는 그림이라고도 하는데 자기만의 색깔을 드러낼 수 있을 때 좋은 시가 되는 것이다. 다만 시가 되기 위해선 최소한의 구성 요소에서 벗어나면 안 된다. 즉 중복된 문장이나 주제와는 간접적이거나 의미로 연결되지 않는 말을 늘어놓은 횡설수설한 형태 등이다.
   다음의 시 한 편을 보자.

   갯 모래 머금은
   혓바닥 하나 몸을 삼으니
   석화된 입이 무기다
   발바닥 생을 숨긴 집이다
   만입이 다 열려 있어도 적막한

   묵언수행

   어느 전생의 세치 혀가 저지른 죄업인지
   딱딱한 입술 두 쪽에
   혓바닥 하나 숨겨 생애를 건너가는 중이다
   물속에서 내다뵈는 것은
   먼 깜박임
   저건 시리우스 저건 좀생이 별
   저기에도 생을 기댈 짭쪼름한 물이 있을까
   바람 칠수록 명멸하는 찬란을 본다

   머나먼 거기
   뉘 손짓이 저리 반짝이는지
   조개는 날개를 펴듯 움찔 움찔
   패갑을 열었다 닫곤 한다

      - 김추인, <조개의 꿈> 전문


   첫 연의 묘사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조개는 입이 열려 있어도 묵언수행 하고 있는, ‘발바닥 생을 숨긴 집’이란다. 그리곤 물 밖으로 보이는 별 중에서 가장 밝게 보이는 시리우스별과 자잘한 좀생이별을 보고 있다. 그러면서 사람살이와 이미지로 연결하고 있는데 ‘생을 기댈 짭쪼롬한 물이 있을까’라는 다의적 표현을 하고 있다. 그러면서 ‘바람 칠수록 명멸하는 찬란을 본다’면서 사람은 희망을 보고 사는 존재임을 다의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마지막 연에서는 ‘몸이 무거워서 날지 못하는 새가 인간’이라는 신달자 시인의 강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위 시를 쓴 김추인 시인은 한국예술상, 질마재문학상 등 많은 상을 받고 일곱 권의 시집을 낸 중견시인이자 나이에 비해서 시를 아주 잘 쓰는 시인이다. 그의 시들은 위의 예시처럼 시적 대상과의 자리바꿈을 제대로 하고 있다. 벌말이 없다. 읽을수록 맛이 나는 시가 많다. 한번 읽고 나면 뜻이 모두 이해되어서 다시 읽기 싫어지는 내용이 훤히 드러나는 시는 시의 생명이 일회성으로 끝날 위험이 크다.

   시가 예사말이라면 시를 쓰기위해 씨름할 이유가 없을 텐데 시는 특별한 말이다. 비틀어서 말할 때 시(詩)다와지고 줄여서 말하고 시치미를 떼고 돌려서 말했을 때 더 뚜렷해지는 특성을 지닌다. 표피적인 것이 아니라 내면적, 다의적이면서도 사람살이에 긍정적으로 이바지 하는 시를 좋은 시의 기준으로 꼽는 이유도 그래서다. ​



수평선 / 배한봉

저 빨랫줄 참 길게 눈부시다

태양을 널었다가
구름을 널었다가

오징어 떼를 널었다가
달밤이면 은빛으로 날아다니는 갈치 떼를 널었다가
 
옛날에는 귀신고래도 너끈하게 널었다는

그래도 아직 단 한 번 터진 적 없는
저 빨랫줄

한라산과 백두산이
가운데 쯤 독도를 널어놓고
이쪽, 저쪽에서 팽팽하게 당겨주는

참 길게 눈부신
저, 한국의 쪽빛 빨랫줄



 인생

            유자효
늦가을 청량리
할머니 둘
버스를 기다리다 속삭인다

"꼭 신설동에서 청량리 온 것만 하지?"
 

이제는 누군가의 한줄기 햇살이
되고 싶다

허인

얼굴 한번 본적이 없는 사람이 문득 보고싶다
들추면 훤히 상처가 드러 나 서로
어색한 웃음
웃지 않아도 되는 난 누군가에게
매일 새로운
사람이 되고 싶다. 어느 별에선가
우등불옆에
오구구 모여들어 함께 목 놓아
불렀던 옛노래
은하의 풀밭에 금 망아지떼
풀어 놓고
죽 어서야 다시 불러 볼수 있는
익숙했던 사람들의
이름 하나 하나를 살아서 한번쯤
다시 불러보고 싶다
모조리 벗고 알몸뚱이 그대로
그라스며 와인잔에
들어 앉아서야 비로소연분홍
유혹이 되는
묵은 포도주처럼 내 남은 인생도
누군가의
달콤한 추억이 되면 얼마나
좋으랴
죽으러 온 세상 참 열심히 살아
미안하다
이제는 누군가의 맑은 눈동자에 눈물이 찰랑거리는
한줄기 밝은 햇살이 되고 싶다...


 

그림

  이생진

아무 것이나
아무렇게나
그리는 것이 아니다

그림에서
소리가 나야 하고
그림에서
냄새가 나야 하고
그림에서
무지개가 떠야

쓰러진 사람을 일으켜 세워야 하고
가버린 사람을 돌아오게 해야 하고

모두 말없는 고독에서 나온 그림이다


 

어머니의 지붕 / 이준관

어머니는 지붕에
호박과 무를 썰어 말렸다
고추와 콩꼬투리를 널어 말렸다

지붕은
태양과 떠도는 바람이
배불리 먹고 가는 밥상이었다

저녁에 사다리를 타고 올라간
초승달과 서쪽에 뜨는 첫 별이 먹고 나면
어머니는 그것들을 거두어들였다

날씨가 맑은 사나흘
태양과 떠도는 바람
초승달과 첫 별을 다 먹이고 나서

성자의 마른 영혼처럼
알맞게 마르면
어머니는
그것들을 반찬으로 만들었다

우리들 생의 반찬으로!

.

낡은 의자

김기택


묵묵히 주인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늦은 저녁, 의자는 내게 늙은 잔등을 내민다.
나는 곤한 다리와 무거운 엉덩이를
털썩, 그 위에 주저앉힌다.
의자의 관절마다 나직한 비명이
삐걱거리며 새어나온다.
가는 다리에 근육과 심줄이 돋고
의자는 간신히 평온해진다.
여러 번 넘어졌지만
한 번도 누워본 적이 없는 의자여,
어쩌다 넘어지면, 뒤집어진 거북이처럼
허공에 다리를 쳐들고
어쩔 줄 몰라 가만히 있는 의자여,
걸을 줄도 모르면서 너는
고집스럽게 네 발로 서고 싶어하는구나.
달릴 줄도 모르면서 너는
주인을 태우고 싶어하는구나.
그러나 오늘은 네 위에 앉는 것이 불안하다.
내 엉덩이 밑에서 떨고 있는 너의 등뼈가
몹시 힘겹게 느껴진다.


1957년 경기도 안양 출생
중앙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졸업
198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김수영문학상, 현대문학상, 이수문학상, 미당문학상 수상
시집 <태아의 잠>, <바늘구멍 속의 폭풍>, <사무원>, <소> 등


<감상노트>


김기택 시인의 시의 특징은 어떤
대상을 끝까지 추적하며 구체적 섬세한 필법으로 인식한 대상과 대화한다는
것이 특징이다
낡은 의자를 의인화시킨 시인의 본문의 시세계는 어쩌면 낡은
시대의 시적 장치를 사용한 한물간
서정의 구시대의 작법이다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의 시는 날카로운 시인의 직관과
통찰을 바탕으로 관찰적 자세에서
시의 본연의 기능에 충실하고 있음을
공감할 수 있다 시가 창조라는 예술의
장르이기 이전에 시는 인간에게 성찰적
기능을 부여하는 거울이라고 가정할 때
시인의 시는 투명하고 맑은 거울로
시대를 비추고 있다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김기택 시인은
큰 나무 같은 시인인 것이다

시 속에 등장하는 낡은 의자는
우리에게 어떤 존재일까
표면적으로 바라보면 의자와 시인의 이야기가 시인의 연민에서 시가 축조
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평자의
관점은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서로간에 종속된 존재론에서
시인이 의자라는 무생물에 생명성을 불어 넣어 연민과 동정만을 표출하는 것은 아니다

지금의 시대는 빈익빈 부익부가 가면
갈수록 심화되어 가고 우리 사회는
부자와 가난한자 노동자와 사주 그리고
계층과 계층간의 갈등  또한 지역과 지역간의 대립이 표면화 되어 이 사회는
분열되고 그 분열된 사회성 속에서
개인의 이기주의는 묻지마의 범죄 유형
으로 날마다 뉴스에서 아픈 우리의
비명들이 쏟아진다
우리사회가 낡은 의자와 주인의 관계
처럼 서로에게 그렇게 따뜻하게
바라보고 스민다면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정말
한번 쯤 신명나게 살아 볼 세상일 것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서로의 의자가 되어 준다면 그 의자에 앉은 우리의 엉덩
이는 이태리 명품 가죽쇼파보다 더, 더,
더 안락할 것이다
오늘 그대 바깥에 나가거든
누구의 엉덩이를 튼실하게 태워주는
의자가 한번 되어보자 [문정완 ]


 

국수행 전철에서

    김기택

 

  한낮에 국수 가는 전철은 한산하다.
  노인은 왜소한 몸으로 7인석 좌석을 다 차지하고 앉아
  신문을 쌓아놓고 보고 있다.
  한쪽 다리를 좌석 위에 턱 얹어놓고
  등을 옆으로 기대고 한껏 편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편할수록 더 결리는 허리.
  최선을 다해 자세를 고쳐 앉아보지만
  삶은 여전히 바뀌지 않는다.
  허리와 어깨는 10초 동안 편안한 척하다가 다시 못 마땅해진다.

  하루 종일 타도 공짜지만 다 탈 수 없는 전동차들.
  텅텅 비어 남아돌아도 다 앉을 수 없는 좌석들.
  아무리 많이 버려져 있어도 다 읽을 수 없는 신문들.
  에어컨이 질 좋은 찬바람을 공짜로 퍼주어도
  짜증만 나는 쾌적함.
  물결치는 숲과 강이 보는 눈도 없이 차창 가득 지나가도
  지긋지긋하기만 한 아름다움.
  보던 신문을 확 던져버리고 의욕적으로 새 신문을 펼쳐든다.
  먼저 본 신문에서 다 본 기사들.
  그놈에 그 사건에 그 인생...... 사이에

  반라의 모델 사진이 있다!
  끊어질 것 같은 수영복 안에서 무엇인가 계속 터지고 있다.
  그의 허리가 민첩하게 진지해지고 성실해진다.
  너무 정성껏 여자를 쓰다듬어 눈알이 지문이 생길 지경이다.
  다시 허리가 아파오자 그것도 금방 시들해진다.
  거의 드러눕듯이 앉아본다.
  여기저기 쏘아보는 눈알들.
  한때는 눈치 보는 것도 스릴이 있었지만
  꽉 찬 지하철에서 여자들 틈에 끼어
  간이 오그라들도록 엉큼하고 도전적인 짓도 해봤지만
  그런 재미조차 싫증난 지 오래다.

  처치할 곳이 없어 전철에다 잔뜩 부려놓은 시간.
  전동차가 아무리 빨리 달려도 느려터지기만 한 시간.
  아까 팔당역이었는데 어째서 아직도 팔당역이란 말인가.
  전철이 달리면 잠깐 흐르는 듯하다가 멈추면 함께 정지하는 시간.
  죽어라 밀쳐도 안 가는 시간.
  고집스럽게 한자리에만 앉아 늙기만 하고 죽지는 않는 시간.

    김기택 시집 『갈라진다 갈라진다』(문지)에서.


  감상;

   김기택 시인의 지하철 묘사다, 이렇게 끝낸다면 이 시는 평범하다. 김기택 시인이 정치적으로 지하철을 타고 있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다시 읽게 된다. 물론 사회적이고, 참여적이고, 의식적인 언어들이 일상의 관찰인 양, 묘사되고 있다, 그러나 그곳에 시인이 내려놓은 그림자 문자는 사실 다른 말을 하는 듯하다. 그는 지하철을 타고 어딘가로 흘러가고 있지만, 그의 눈은, 그의 감각은, 그의 정서는 못을 박듯 한곳에 머물러 있다. 그곳에서 그는 사회를 보고, 세상을 읽고, 타성화되고 고령화된 의식과 동작을 읽는다. 타자들과 섞여 있으면서도 자신에게 침몰해 있는 인간 군상을, 자기중심적으로 발달한 인간 유형을 관찰한다. 그것이 우리가 몰아가는 전동차 같은 사회다. 젊은 세대에게 미래에게 염치도 체면도 필요 없고, 과거를 존중하는 의례적 칸으로 모셔진 지정석에 앉아, 일견 자유롭지만, 불편하다. 어쩌면 그가 달려온 생이 마치 한 곳에 갇혀 있는 듯한 인상이다. 독점적으로 지배하는 그의 행동 양상은 사회에서 고립된 섬에서 다 부서진 몸으로, 다 망가진 의식으로 앉아 있는 우리의 사회를 반영하고 있다. 도시에서 도시로 궤도를 놓은, 그곳을 왕래하는 사람의 고립을 묘사하고 있다.
   김기택 시인은 사물에 대한 개입과 감정을 내색하는 편이 아니지만, 사실 문자만 그렇지 그의 시는 강력한 주제를 내비치는 것이 특장이다. 그는 그림만 그리는 듯하지만, 독자는 증폭된 내재한 에너지를 읽어야 하는 부담이 있다. 아주 친근한 평서문인데도, 그는 탑재한 감정과 의식들을 읽어낼 것을 독자의 몫으로 둔다. 누구의 손을 들어주며 옹호하지도, 찬양하지도 않지만, 그는 이미 현실에 대한 냉철한 비판자이고, 그가 담겨 있는 사회에서 무의식적으로 무의지적으로 소모되는 인간을 반대한다. 그는 아름다운 언어보다는 적확한 언어로 시를 쓰고, 시를 쓰는 목적이 분명하다. 시는 고통을 읽는 일이고 고통을 이완하는 일이다. 그의 시를 여러 번 읽으면 내가 왜 이 사회에 덩그러니 떨어져 수많은 기계의 조립된 동작에 얹혀 무심히 흘러가는 인간인가를 반성하게 된다. 국수행 전철은 작은 공간을 통해, 사회를, 국가를, 세계를, 그리고 우리가 잃어버린 인간 군체가 꾸려갈 미래를 진단하고 암전된 예시로 보여주고 있는 시이다. 그는 승객이나, 큰 함선을 몰아가는 함장으로도 보인다. 시의 힘일 것이다.

                  
                       

 

비의 목록

김희업


손바닥에 닿으면 부러지는 연약한 비
비가 거리의 목록에서 노점을 지웠다 오늘은
가난하게 보이지 않을 것이다
우산을 펴자 비가 우산 위로 사납게 달려들었다
우산은 우산 크기만큼만 비를 가려주었다
온다는 소리 없이 집집마다 비가 다녀갔다
섭섭하지만 비를 뒤쫓아갈 필요가 없었다
훗날을 기약하며 보내주기로 했다
비를 모금함 속에 모아두는 엉뚱한 사람은 없을 테니까
사람을 불러 모으는 재주를 가진 노점이 사라진 사이
얼마나 많은 사람이 비에 스며들었는지
한산한 거리가 비로 시끌벅적했다
비에 쫓겨난 봄꽃은 어디서 보상받을는지
생계가 막막해진 봄꽃이
뿔뿔이 자취를 감추었다
손바닥에 닿으면 부러지는 연약한 비에도
바퀴의 노동은 멈추지 않고, 내일도 모르고 앞만 향해 자꾸
달려간다 이런 날, 바퀴도 없이 미끄러지는 사람이 꼭 있더라
저만치 자신을 내팽개치는 사람을 보고 있으면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비가 거리의 목록에서 이제 웃음조차 지우려 한다
오늘은 비의 목록에 따뜻한 위로가 추가되어야 할 것 같다

프로필
김희업 : 건국대 국문과, 서울예대 문창과, 현대문학 등단, 시집[비의 목록]외 다수

시 감상

겨울답지 않게 비가 많이 내렸다. 계절마다 내리는 비는 계절의 색을 짙게 하거나 혹은 계절을 탈색시키거나, 당신은 어느 계절의 비를 좋아하는지? 쏟아붓는 여름 비, 우산 속 울음을 감추지 못하게 만드는 가을비, 따뜻한 봄 비? 아니면 왠지 남의 옷을 걸친 듯 겨울 속 봄 비? 비의 목록을 만들어 보자. 얼마나 많은 것들이 비에 스며들었고 얼마나 많은 것들을 비에 씻겨 보냈는지? 보낸 것들의 목록을 만들어 보자. 잠시 비가 되어보자. [글/김부회 시인, 평론가]


 

질투는 나의 힘

기형도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 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 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고독의 깊이 / 기형도(1960~1989)


한 차례 장마가 지났다
푹푹 파인 가슴을 내리쓸며 구름 자욱한 강을 걷는다
바람은 내 외로움만큼의 중량으로
폐부 깊숙한 끝을 부딪는다

상처가 푸르게 부었을 때 바라보는
강은 더욱 깊어지는 법

그 깊은 강을 따라 내 식사를 가만히 띄운다
그 아픔은 잠길 듯 잠길 듯 한 장 파도로 흘러가고
아아, 운무 가득한 가슴이여
내 고통의 비는 어느 날 그칠 것인가

#시소문


2020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인 김은숙의 <골목의 번식> 당선작을 취소합니다. 당선작 발표 이후 이 작품은 2019년 10월 4일 네이버 카페 <은행나무 문학쉼터>에 습작품으로 게재된 김난의 <비닐봉지의 원죄>와 상당 부분에서 동일성이 있다는 문제 제기가 있었습니다. 이에 심사위원단은 두 작품을 면밀히 비교 검토한 결과 타인의 창작물을 이용한 점이 상당 부분 인정되어 당선 취소가 바람직하다는데 의견을 모았습니다. 김은숙 씨는 “카페 게시판에 올라왔던 김난의 작품을 보지 않았고 게시물을 읽을 수 있는 권한도 없다”고 입장을 밝혔으나 응모작품은 미발표 창작품이어야 한다는 규정에 따라 당선 취소를 결정했습니다.
.
.
.

1월 / 오세영

1월이 색깔이라면
아마도 흰색일 게다.
아직 채색되지 않은
신(神)의 캔버스,
산도 희고 강물도 희고
꿈꾸는 짐승 같은
내 영혼의 이마도 희고,

1월이 음악이라면
속삭이는 저음일 게다.
아직 트이지 않은
신(神)의 발성법(發聲法).
가지 끝에서 풀잎 끝에서
내 영혼의 현(絃) 끝에서
바람은 설레고,

1월이 말씀이라면
어머니의 부드러운 육성일 게다.
유년의 꿈길에서
문득 들려오는 그녀의 질책,

아가, 일어나거라,
벌써 해가 떴단다.
아, 1월은
침묵으로 맞이하는
눈부신 함성.


.
.골목의 번식 - 김은숙


발밑을 믿지 마세요 골목의 뒤통수는 백 년이 가도 썩지 않아요
미처 이름을 갖지 못한 태아도 봉지에 버려진 조약돌,
툭툭 발길에 채여요
어둠이 눈감아줬다면 당신은 그것을 바람 빠진 축구공쯤으로 여겼을 거예요
공중화장실에서 태어나자마자 봉지 속으로 꼬깃꼬깃 숨겨진 첫울음,
도심에는 한 방향만 암기한 검은 사각형들이 살아요
정육면체 어둠이 검은 시냇물이 되어 흘러요
밤이면 먹물 같은 골목, 징검다리는 없어요
그 안에 더 이상 비밀을 숨기지 못할 때
종착지는 캄캄한 땅속이거나 고래 뱃속이었어요
뭔가를 산란하기에 더없이 좋은 날, 지난밤 그 골목은 비좁았어요
집안 어디쯤에서 폐품이 되기 좋은 질긴 산책로를 발견했나요? 창문 밖 골목 저 끝말이에요
봐! 저기! 저것 좀 봐! 소리친 게 당신이었나요?
노을을 뚫는 검은 새떼의 비행은 사실상 누군가 목을 비틀어서 유기遺棄한 비닐봉투였죠
은밀함을 목 졸라 죽일 때는 낯선 저녁 역광 뒤쪽이 최고예요
역광을 믿지 않았던 고래는, 죽은 봉투를 해파리로 읽었어요
그것들은 간혹 뱃속에서 심장을 갉아 먹다 고래의 사인死因이 되기도 하죠
검정을 죽이고 돌아와, 비닐봉투가 피살되었다는 뉴스특보를 보더라도 웃음 짓는 것이 중요해요 한잔의 블랙커피를 삽으로 파고서 떨리는 증거들을 감쪽같이 묻어버리세요​
지난밤에는 어둠을 자백하라고 길고양이들이 나를 포위했어요 묻어버린 시간과 폐기한 말들을 뱉어내라고 난리에요 그렇지만 최후의 단서를 들키지는 않았어요
귀소본능이 없는 것은 발명가가 깨트린 새 소리예요
길게 누운 골목, 졸음의 이마 위로 갓 태어난 개똥을 조심하세요
골목 왼쪽, 삐쩍 마른 나뭇가지 꼭대기에 흙을 잔뜩 묻히고 입을 헤- 벌린
깃발처럼 펄럭이는 검은 농담들, 맞아요
어느 아르바이트생이 20원짜리 비닐봉투 도둑으로 몰린 사건 아시죠?
두께도 없고 입구도 없는 혐의는 아메바보다 지루해요
괜찮아요 밀봉된 태아의 캄캄한 몸과 비명도 따지고 보면 고무장갑과 같은 족속
붉어서 아무도 구별 못 해요
매일 밤 태어난 어둠은 막다른 모퉁이에 검은 무덤을 만들고, 아침이면
기지개 켜는 코스모스가 그것들을 화려하게 변호하죠

 

 


비닐봉지의 원죄 - 김난


시커먼 어둠 저쪽, 번뜩거리는 누들이 분주하다 착지하는 소리마저 종적을 감춘 낡은 새벽 배고픈 눈동자를 어슬렁거리며 굶주린 입들이 검은 선물을 노린다 어떤 것은 벌서 발 바른 무리에게 뜯긴 채 알록달록한 내장을 쏟아 놓았다 며칠 치의 몸이 뱉은 배설인지 물컹한 냄새가 부랑자처럼 떠돌았다 항상 간단한 일상을 담고서 손에서 달랑거리며 존재를 알렸지만

그러나 늘 일회용이라는 불명예를 떨치지 못했다

어떤 날은 검은 동굴처럼 어두운 입구 저쪽에서 미세하게 갸르릉거리는 소리가 구조를 요청하기도 했다 세상의 출구에서 가느다란 숨을 내뿜으며 미처 이름을 갖지 못한 태아가 발견된 날은 이미 오래전이었다 무언가를 품었다가 빈속인 채 연애편지처럼 꼬깃꼬깃 접어지기를 몇 차례 더 이상 뭘 담지 못할 때의 종착지는 늘 땅속이거나 고래의 뱃속이었다 가볍고 미끈거려 초라한 대신 영생을 보장 받기라도 한 듯 아무도 그것의 질긴 목숨을 끊을 수 없었다

노을을 뚫는 검은 새떼의 비행은 실상 비닐봉지였고 심심할 때면 고래의 뱃속에서 심장을 갉아먹고 사인(死因)의 선봉이 되기도 했다 제 몫을 끝내고 서로가 서로를 보듬어 안은 채 폐기된 소멸은 소멸이 아니었다 그가 죽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없다 귀소본능이 없는 것은 발명가가 실수를 한 원죄였다

마당 한 켠, 삐쩍 마른 나뭇가지 꼭대기에 흙을 잔뜩 묻히고 입을 벌린 채 어느 알바생이 20원 짜리 도둑으로 몰린 사건은 혐의 없는 일회용으로 종결되었다고 웅웅거린다


 

허수아비  .ㅡ. 신달자

혼자 서 있는 허수아비에게
외로우냐고 묻지마라
어떤 풍경도 사랑이 되지 못하는 빈들판
낡고 해진 추억만으로 한세월 견뎌왔느니
혼자 서 있는 허수아비에게
누구를 기다리느냐고도 묻지 마라
일체의 위로도 건네지 마라
세상에 태어나
한 사람을 마음속에 섬기는 일은
어차피 고독한 수행이거니
 
허수아비는
혼자라서 외로운게 아니고
누군가를 사랑하기에 외롭다
사랑하는 그만큼 외롭다


 

국물

신달자

메루치와 다시마와 무와 양파를 달인
국물로 국수를 만듭니다

바다의 쓰라린 소식과 들판의
뼈저린 대결이 서로 몸 섞으며
사람의 혀를 간질이는 맛을 내고 있습니다

바다는 흐르기만 해서 다리가 없고
들판은 뿌리로 버티다가 허리를 다치기도 하지만

피가 졸고 졸고 애가 잦아지고
서로 뒤틀거나 배배 꼬여
증오의 끝을 다 삭인 뒤에야
고요의 맛에 다가옵니다

내 남편이란 인간도
이 국수를 좋아하다가 죽었지요
바다가 되었다가 들판이 되었다가
들판이다가 바다이다가

다 속은 넓었지만 서로 포개지 못하고
포개지 못하는 절망으로 홀로 입술이 짓물러 눈감았지요

상징적으로 메루치와 양파를 섞어 우려낸 국물을 먹으며 살았습니다

바다만큼 들판만큼 사랑하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몸을 우리고 마음을 끓여서 겨우 섞어진 국물을 마주보고 마시는

그는 내 생의 국물이고 나는 그의 국물이었습니다


 

책에 담을 수 없는 여자 / 김관민

미안해요, 당신을 윤리책에 담으려 했어요
당신의 신발을 신발장에만 가두려 했으니
당신은 얼마나 답답했을까요

미안해요, 당신을 수학책에 담으려 했어요
당신의 모든 걸 계산하려고 했으니
당신은 얼마나 지루했을까요

미안해요, 당신을 국어책에 담으려 했어요
당신을 그렇고 그런 이야기 속에 살게 했으니
당신은 얼마나 심심했을까요

미안해요, 당신을 음악책에 담으려 했어요
당신의 눈에 들리지 않는 음표들만 늘어놓았으니
당신은 얼마나 짜증났을까요

정말 미안해요,
당신은 책에 담을 수 없는 여자인데
당신은 책이 아닌 이렇게 내 앞에 서 있는데
나는 그 동안 뭘 하고 있었던 거죠

오, 정말 미안해요
또 다시 당신에게서 답을 구하려 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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