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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향숲을 찾기 까지
2019년 11월 15일 17시 58분  조회:4780  추천:0  작성자: 선수기
차갑게 페부를 훑는 듯한 선들바람이 나의 머리결을 흩날린다. 가을의 느낌은 마냥 처량하다. 자전거를 타고 일자리를 찾아다니기 시작한 것이 벌써 여러날째다. 거리의 골목골목을 누비면서 하루종일 정신없이 발품을 팔다보니 어느새 하늘은 어두컴컴해지고 있었다. 거리의 가게들은 경쟁이라도 하듯 하나둘씩 불을 밝히기 시작했는데 그중에서 유독 환한 불빛을 뽐내고 있는 한 가게로부터 “복무원 모집”이라고 씌여진 글이 내 시야에 들어왔다.자전거를 비스듬히 세워놓고 한참을 못박힌듯 서있다가 쭈뼛거리면서 식당안으로 들어갔다. 초췌한 얼굴에 퀭한 눈, 주근깨가 다닥다닥한 녀자가 야울야울 웃음을 포개면서 맞이해주었다. 
“어서 오세요. 뭐 드시겠어요?”
“저기요. 이 식당에서 복무원 받아요?”
“식당일은 해봤소?”
“네에.”
“조선족이 돼서 좋은데 어려서 써빙 밖에 못하겠구만. 한달 월급은 80원이고 숙식은 제공해주오. 매출 올려주면 보너스도 있소. 어떻소? 할 의향이 있소?”
“네에,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나는 찬밥 더운 밥을 가릴 신세가 아니였다. 얼마전까지 출근했던 복장공장에서는 몇달동안 급여를 미지급하다가 막무가내로 문을 닫아버려서 그만 락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였기 때문이다. 동생과 합숙하고 있던 세집 집세도 몇달째 밀리고 있는 상태였다. 당장 추위가 들이닥칠 텐데  석탄 살 돈도 없고 이대로라면 설이 되여도 작년처럼 집에 갈 뻐스표 살 돈 20원이 없어서 동생과 둘이 찬 방에서 무우말랭이에 감자국을 끌여놓고 설을 보내야 할지도 몰랐다.

동창들은 교원이요, 사업단위이요 하면서 폼 나게 살고 있는데 나는 몇년을 이렇게 이 식당 저 식당, 이 복장공장 저 복장공장을 전전긍긍하면서 아는 사람들 특히 동창들을 만날가봐 골목길로만 출퇴근하면서 하루살이와 같은 이십대 초반을 보냈다. 갑과 을의 관계, 돈깨나 있다고 인간 대접이란 뭔지도 모르는 주인에게 언제까지 자기 기분은 싹 다 죽이고 깍듯이 굽석거려야 되는지? 그나마 남의 집 가게에서 수모를 당하며 견딜 수 있었던 것은 법인대표가 나 자신인 나의 가게를 오픈하려는 당찬 꿈과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모든 기술이라고 짐작되는것들을 어깨너머로 열심히 배웠다.

옛일들을 떠올리면 초라하던 기억 밖에 없다. 그 때문인지 기억을 상실한 사람처럼 현실은 생생한데 거짓말처럼 옛일들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 동창들이 모여앉아 이런저런 추억을 이야기할 때면 아, 맞어 그땐 그랬었지. 하면서도 그만큼에서 그치면서 더 이상의 추억을 더듬기 싫다. 더 들추면 그냥 울음이 터질 것 같아서… 울며 산 동년, 설음 밖에 없는 나의 20대 추억 중에는 그렇게 잊고 싶지만 결코 잊혀지지 않는 파란만장한 일대기가 있다.

심청이 아버지 젖 동냥하듯 이집 저집에 가서 학비를 꾸어대며, 학기마다 같은 고충을 반복하며 나는 억지로 고중을 마쳤다. 어렵사리 공부를 했으면 어느 책에서처럼 공부나 잘할 것이지 못나게도 대학시험에서 락방되였다. 방학이 되여 집에 돌아갔을 때에는 풍경화 같았던 고향도 백수로 되여 돌아가니 아무런 감흥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하늘이시여! 사면이 산으로 꽉 둘러쌓인 이 산골에서 내가 평생을 살아야 한단 말입니까? 별이 무더기로 쏟아지는 밤 하늘을 쳐다보며 나는 울부짖었다.



1976년 되던 그 해, 아버지는 15살인 큰 오빠와 11살인 작은 오빠 그리고 7살인 나와 4살짜리 코흘리개인 동생을 엄마에게 유산처럼 남겨놓고 무정하게 하늘나라로 가셨다. 아버지는 떠나면서 애들을 엄마 혼자 다 못 키운다면서 세 아들은 다 남에게 주고 딸인 나만 데리고 재가하라는 유언을 남기셨다. 그때 엄마는 39살로서  예쁘고 생기가 넘치셨다. 처녀시절 엄마는 인물 체격이 좋은 덕분에  항미원조에 나가셨다가 고위간부가 되여 금의환향한 아버지한테 시집가게 되였다. 문화대혁명때 아버지는 자진하여 장백산 아래 광평농장에 하방하셨다가 거기서 박해를 받으시고 세상을 떠나셨다. 누구보다도 멋지고 인자하셨던 아버지는 생전에 외지로 회의하러 갈 때거나 당교에 학습하러 갈때면 늘 딸인 나만 찌프차에 앉혀 데리고 다니군 했다. 나의 어릴때 추억중에 그 추억만 지금까지 제일 달콤한 추억으로 남아있다.



아버지가 세상 뜨고 3년 후, 고위급 간부가 엄마에게 재혼을 요청해 왔다. 이 사람 외에도 조건이 좋은 사람들이 인물 좋은 엄마를 넘 보는 사람이 많다고 한 마을 엄마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귀동냥해 들었다. 하지만 엄마는 중매군들이 아무리 감언리설로 설복을 해도 번번히 제 새끼를 어떻게 남 주냐면서 매몰차게 재가를 거절하였다. 네 자식을 끌어안고 빌어먹을 지언정 굶어죽어도 엄마 품에서 굶겨 죽인다고 엄마는 고집하셨다. 하지만 엄마 혼자 우릴 다 껴안고 있다고 해서 우리가 행복했을가? 이붓아버지 밥을 먹이지 않는다고 우리가 행복했을가? 가난이 숨통을 조여오는데, 잘 먹이지도 잘 입히지도 못하고 공부시킬 돈도 없으면서…가난에서 파생되는 초라함,그게 얼마나 사람을 기죽게 하는지 엄마는 몰랐을가? 주렁주렁 돼지같은 자식 넷이 직업을 얻어야 할 나이에 직업도 없이 좁은 집안에서 부대끼며 지낼 때 나는 세상물정에 어두운 엄마가 못내 원망스러웠다. 국장 이붓아버지한테 재가했더라면 엄마는 어떨지 몰라도 자식들 일자리는 근심걱정이 없을텐데.

고중을 졸업하고 림시직으로 복장공장에 출근하기 시작하면서 나는 내가 못다한 공부 소원을 풀어달라는 부탁과 함께 달마다 나오는 월급 전부를 동생에게 지원해주며 자원해서 소녀가장이 되였다. 나는 동생이 고중을 졸업하자 시집을 갔다. 동생 뒤바라지에 적금 없이 돈을 탈탈 털어쓰다 보니 거의 빈몸으로 시집을 갔다. 그래서 시어머니는 또 얼마나 대놓고 나를 무시했던지… 내가 시집가던 날, 자기 뒤바라지 하느라 고생한 누나에게 록음기 하나 못 사주는게 속에 내려가지 않아서 동생이 그토록 섧게 울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썩 후에 친정에 놀러가니 시골 중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던 동생이 시골학교 학생이 적어서 페교되면서 집에서 빈둥빈둥 놀고 있었다. 그때 엄마가 나에게 말했다. 동생이 집에서 자꾸 이 노래만 부른다고.

    나의 누나는 좋았지
    언제나 방긋이 웃어주던 그 얼굴이…

그때 나는 그래도 우리 집에서 제일 많이 바깥세상을 본 내가 일어서야 되겠구나는 사명감 비슷한 것이 생겼다. 순간 어머니와 동생을 데리고 연길에 자그마한 음식점을 차리면 우리 셋의 일자리는 해결할 수 있지 않을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 생각을 말했더니 오빠들이 흔쾌히 동의하면서 여기저기서 돈을 꾸어서 내 장사자금을 마련해주었다.



그렇게 “김삿갓 음식점”이 오픈했다. 료리사와 복무원 각각 한명씩 채용하고, 엄마는 주방 일, 동생은 구입을 맡았다. 다행히 장사가 잘 되였다. 순풍에 돛을 단 배처럼, 바람을 만난 연처럼. 믿을 언덕이라고는 없이 음식점 하나에 매달린 우리 세 식구는 최선을 다했다. “촌빠이” 라고 이마에 써붙인 것처럼 투박하고 순수해서인지, 넉넉한 시골 인심 덕분인지 한번 식당을 찾았던 손님들은 거의 단골로 되였다.

“으흠, 요즘 같은 세월에 맛으로 승부하는 가게도 있네.”

그때 우리 가게를 찾는 손님들의 한결 같은 평가였다.
조건이 우월한 이웃 식당들에는 손님이 없어 직원들이 홀에서 빈둥대는데 우리는 준비한 재료들이 다 팔려서 이웃 식당에 빌리러 다녔다. 그때는 내가 아마도 장사체질인 모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선생님들이 나를 대학생은 만들지 못해도 훌륭한 장사군으로 만들었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 어릴때 고생도 눈물나게 감사하고… 별게 다 감사했다. 하지만 영업은 그야말로 예상치 못했던 변수들의 집합체이다. 그것을 잘 관리하려면 넉넉한 자금이 가장 효과적인 처방전이였다. 거기에 죽어나는건 가족이였다. 마냥 좋을 것만 같던 엄마도 오래동안 돈을 만져보지 못하자 사사건건 나와 시비를 걸기 시작했다.   

“엄마.”
그날도 두사람이 겨우 서서 일할 수 있는 비좁은 주방에서 올망졸망 새로 구입해온 야채며 고기들을 씻을 건 씻고 랭장고에 넣을 건 넣으며 분주히 돌아치다가 문득 밥가마를 열어보니 밥가마가 텅텅 비여있었다. 놀라서 허둥대며 홀에 대고 큰 소리로 엄마를 불렀다. 당장 손님이 쓸어들어올 시간인데 어디에 가 있는 거야? 복무원이 주방에 뛰여오더니 출입문 쪽을 슬쩍 눈치질하며 거기에 있다고 알려주었다. 마음이 급한 나는 앞치마에 두손을 쓱쓱 문지르며 출입구 쪽을 향해 달려나갔다. 식당으로 들어오는 정문 옆에 엄마가 고개를 푹 수그리고 맨 봉당에 스님처럼 올방자를 틀고 앉아있었다. 나는 급히 엄마 팔을 붙잡고 일으키며 퉁명스레 내쏘았다.

“엄마 안쪽에 들어가 앉으쇼. 손님들이 올 시간인데 문앞에 앉아있으면 남들이 뭐라겠슴까?” 엄마가 고개를 들고 뚫어지게 나를 쏘아보았다.
“너도 내가 업신 보이냐? 직원들 월급은 꼬박꼬박 다 챙겨주면서 왜 나와 니 동생 월급은 안 주니?” 나는 흠칫 놀라 뒤로 한발자국 물러서며 물었다.
“자금이 돌지 않아서 힘들어하는게 엄마 눈에는 안 보임까? ”
“점심, 저녁 손님이 가득 차는데 돌릴 돈이 없다니 그게 말이 되는 소리야??”
    “집세, 세금관리비, 직원들 월급, 그날 쓸 음식재료들을 구입하고 나면 돈이 다 나가는거 모름까? 술과 음료를 다 외상으로 들여왔잼까?”
“언제면 돈이 남아서 우리도 남들처럼 돈이나 만져 보겠니? 난 어째 아무리 해두 그새 장새일 것 같다. 일해봤자 밑굽 빠진 항아리에 물붓기인데 난 집에 갈란다.“
나는 엄마가 가겠다는 소리에 깜짝 놀라서 즉시 톤을 낮추면서 말했다.
“엄마, 좀만 참으쇼. 지금은 림시 바빠서 못 주지만 그 돈 안 떼먹구 아무 때건 꼭 다 주겠슴다.”
엄마는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가게 안에 들어가 종업원과 마주앉아 야채를 다듬는 남동생을 불러냈다.
“철아 우린 그만 집에 가자. 누나 혼자 장사해서 콱 잘 먹구 잘 살라구 해라.”
“엄마 정말 이럴래김까?…”
급해난 내가 엄마 등뒤에 대고 앙칼지게 소리쳤다. 나도 경영경험도 없고 풍족한 자금도 없이 자기 가게라고 꾸려놓고 스트레스가 쌓일 대로 쌓여 폭발 직전이였던 것이다.
“자기 힘으로 악착같이 벌어서 잘 살려고 아글타글하는데  엄마가 해준게 뭐 있슴까? 엄마도  녀자이면서 남존녀비 사상만 머리에 가득차 가지고 오빠나 동생은 공부도 시키고 직업도 근심하면서 하나 뿐인 이 딸은 언제 빈말로라도 공부걱정 직업걱정 해본적 있었슴까? 나도 엄마한테 쌓인게 너무 많슴다.” 
끝내 내 광기가 폭발하였다. 이웃 가게들에서 구경거리가 생겼다고 뛰쳐나와 보고 길 지나던 행인들도 걸음을 멈추고 지켜보았다.
“아들이든 딸이든 다 내 살점인데 누구를 더 고와하구 누구를 더 미워했겠니?”
엄마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식당문어구에 두었던 큰 보따리를 들고 몸을 기우뚱 거리며 걸어갔다.
“엄마 이렇게 가면 난 이제 친정두 없고 부모 형제도 없음다. 이후부터 날 볼 생각 마쇼.”
엄마를 막아서며 내가 기어이 모지락스럽게 퉁바리 놓았다.
“내 자식교육이 실패구나.”
엄마 얼굴이 서서히 무섭고 보기 흉하게 일그러졌다. 얼굴에 한가닥 실망의 빛을 감추지 못했다. 어릴때부터 졸래졸래 내 뒤를 따라다니며 그렇게 나를 잘 따르던 동생도 방 한쪽 구석을 지키던 자기 짐을 넙적 들고 씨엉씨엉 엄마 뒤를 따라갔다. 제 편인 줄로만 알고 있던 소중한 가족으로부터 오는 랭대에 나는 된 몽둥이에 얻어맞은 것처럼 눈앞이 아찔해나 그 자리에 폴싹 주저앉고 말았다. 료리사와 복무원이 뛰쳐나와 나를 부축해 직원 휴식실에  눕히고 얇은 이불을 덮어주며 한잠 자라고 하고는 나갔다.

한바탕 행악을 쓰며 쌓였던 불만을 토하고 나니 속이 후련한것 같기도 했다. 그런데 자꾸 눈물이 났다. 자리에 누운채 팔꿈치로 쓱쓱 눈물을 닦으며 속으로 원망했다. 저들이 나한테 해준 게 뭐가 있다고, 어우 시원섭섭해. 나는 애써 내가 잘했다고 위로했다. 그런데 아니지… 가슴속 깊은 곳에서 터져나올 것 같은 이 홍수 같은 설음은? 사막에 혼자 버려진듯한 이 느낌은?…그게 무슨 감정인지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가족이라도 그 사람들의 사랑을 잃었다는 게 너무 슬펐다. 

얼마나 지났는지? 밖에서 왁작지껄 떠들어대는 소리와 함께 손님들이 시작이라도 부른 듯이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아, 밥가마에 밥도 없었지. 될 대로 되라고 누워있다가 밥이 없던 생각이 불시에 떠올랐다. 이대로 누워 있을 수는 없다. 꾼 돈도 못 갚았는데. 나는 눈물을 닦을 새도 없이 손님들 심부름에 주방일에 홀과 주방을 정신없이 뛰여 다니며 그날 점심고봉기를 넘겼다.

오후 재료를 구입하러 나갔다 늦게 돌아오니 홀에서 료리사와 복무원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냥 이렇게 바쁘면 다른 가게로 옮길 예산이라고 했다. 나는 직원들을 찾아 마음을 안정시켰다. 빠른 시일 내에 엄마가 돌아오게 하던지 아님 직원을 더 쓰던지 대책을 마련하겠다고… 하지만 이는 장구지책이 아니였다. 무슨 돈으로 또 직원을 쓴단 말인가?
나는 슬프게 웃었다.
갑갑한 마음에 식당을 나가 점심에 엄마가 앉았던 것처럼 맨 땅에 올방자 틀고 앉아 하늘을 쳐다보았다. 내가 뭘 위해 이렇게 아글타글하지? 엄마도 나와 같은 이런 느낌이였을가? 너덜너덜 혼백은 바람을 타고 어디론가 사라지고 허무가 쓰나미처럼 몰려왔다.

불소나기처럼 볕을 쏟아붓던 태양이 하루 일과를 마치고 퇴근하는 사람들과 함께 서서히 어둠의 장막으로 사라진다. 저 사람들도 나처럼 힘든 삶의 이야기가 있을가?
상처입은 내 마음을 누가 토닥여주지?
어느새 나를 괴롭히는 트라우마들이 슬로우모션으로 내 시야에 하나 둘 안겨온다.

엄마가 집으로 간 뒤부터 가슴이 답답해나며 시도 때도 없이 한숨이 폴폴 나갔다. 창업해서 제일 힘든 일년을 엄마와 우직한 동생이 나를 믿고 따라주던 일들이 줄줄이 생각나면서 내 고요한 마음에 거센 파문을 일으켰다. 장사 잘 된 날은 입이 귀에 걸려 세상을 다 가진듯 행복하게 웃으며 표정관리를 하기 어려웠는데 지금은 돈 한묶음 쥐고도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손님이 많을 때는 앉을 자리가 없이 몰리다가도 어떤 날은  어느 신선을 노엽혔는지 들어오는 손님은 없고 파리만 기세차게 날아다닐 때가 있었다.

돈 고생이 끝나는가 하면 또 다른 생각지도 않던 문제가 생겨서 골머리를 앓아야 했다. 그때마다 엄마와 동생이 든든한 버팀목이 되여주어서 나는 용케도 하나하나 이겨나갔다. 가게를 시작해서부터 지금까지 자기 몫의 돈이라고는 쥐여보지도 못하면서도 영업시간이 다가올 때마다 “오늘도 장사 잘될거야.” 라고 밝게 웃으며 좋은 마음으로 주문을 걸어주던 엄마, 방안 그 어디에서나 웃어주던 엄마, 해바라기처럼 나만 바라보던 엄마, 엄마의 무조건적인 사랑이 그리워 나는 어느새 입을  피쭉거리며 울고 있었다.
 

내가 얼마나 더 잘 살겠다고 내 인생에 비타민이 돼주고 디딤돌이 돼주고 반석처럼 지켜주던 내 엄마한테 그렇게 퍼붓고 그것도 모자라서 제 부모형제와 인연을 끊는다는 말까지 매몰차게 했는지? 그땐 내 마음속에 악마가 들어앉아있었나봐. 아홉번 잘하다 한번 돈 좀 달랬다고 내가 어떻게 제 친엄마를 그렇게 모지락스럽게 괄시 할수 있단 말인가? 할 말 안 할말 다 했으니 내가 봐도 나는 참 못돼먹었지. 내가 미쳤나봐. 그렇게 엄마 기를 채워주는 딸이 하늘 아래 몇이나 될가?
그리고 그리고….
후회가 폭풍처럼 몰려오기 시작했다. 전화도 흔하지 않던 시대라 나는 내 진심을 담아 엄마에게 편지를 썼다.

엄마, 그동안 고향집에서 잘 보내십니까?
엄마와 동생이 없는 식당은 한마디로 범벅입니다. 요즘 혼자 바삐 돌아치면서 구석구석 알아서 틈새없이 모든 일을 잘해주던 엄마의 손길이 무척 그립습니다. 그동안 헌 바자 바람 막는 줄을 모른다고 나 혼자 잘해서 잘 되는 줄 알고 설쳐됐습니다. 내가 일어서야 내 형제 돈도 갚아줄 수 있고 내 가족도 사는 것이라 독하게 마음 먹고 엄마나 동생돈을 먼저 댕겨쓰고 돈이 생기면 곱으로 갚아주리라 마음 먹었는데 엄마가 간 뒤 곰곰히생각해보니 내가 정말 리기적이였습니다.
엄마 도움이 절실하지만 아무리 허물없는 내 엄마라도 오라는 말은 미안해서 못하겠어요. 편지와 함께 돈을 엄마에게 보내드립니다. 식당은 나 혼자 것이 아니라 엄마, 동생, 나 우리 셋의 식당입니다. 그동안 모아뒀던 전부를 세몫으로 나누어서 엄마와 동생몫을 부쳐보냈습니다. 그리고 오빠들이 꿔준 돈도 같이 보냈어요.
우리 지금까지 아무 것도 없이도 화목하게 살지 않았습니까? 돈을 위해서 우리 가족이 다투고 산산조각이 난다면 이 돈을 해서 뭐하겠어요. 돈은 없어도 되지만 가족은 없으면 안됩니다.
그리고 가게를 빠른 시일 내에 임대하겠습니다. 임대비는 가게를 오픈해서부터 지금까지 함께 수고한 엄마와 동생에게도 꼭 같은 몫으로 세 등분해서 보내겠습니다.
꼭 내 힘으로 당당하게 선 모습을 엄마와 우리 가족, 그리고 고향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어요. 일곱살에 아버지를 잃은 최씨네 셋째 딸이 지금은 연길에서 그렇게 잘 살고 있더라고. 믿으세요. 꼭 멋진 딸로 엄마에게 효도 한번 잘 할게요...

필경은 가족이다.
엄마와 동생이 돌아왔다. 그야말로 꿈 같았다.
시골의 맑은 공기와 푸른 초목의 싱긋한 향기를 그대로 가지고 느긋하게 웃으며 갈 때보다 더 큰 보따리를 들고 식당에 나타났다. 동생도 소품배우 조본산처럼 크고 작은 보따리를 이고 지고 나타났다. 나는 너무 반가워서 “와!” 하고 환성을 질렀다. 직원들도 벌떡 일어나며 환호했다. 보따리를 헤치니 전부 농촌의 풋옥수수며 가지며 풋고추, 떡호박과 같은 유기농야채들이였다. 그리고 두만강의 특산인 세치네도 있었다.

“나는 네가 궁리없이 돈을 다 퍼주구 있는 것 같아서 억지로라도 경제권을 빼앗아서 돈관리를 해주자구 그랬다. 그런데 알고 보니 바쁠 때를 예산하고 온천하게 돈 다 모으고 있었더구나. 돈 독이 올라 부모형제를 모르는가 했더니 이번에 일 처리 하는걸 보니 사람냄새두 나구… 이번에 니가 보낸 돈과 집에 좀 있던 돈을 다 가져왔다. 네가 투자하고 싶은데 마음대로 투자해라. 다른 업종으로 바꿀 생각을 하지 말고 우리 힘을 모아 세 식구가 같이 할 수 있는 이 가게를 계속 해보자.”

헤픈 내 눈물이 또 비오듯 쏟아졌다.
시련을 딛고 마음이 합쳐지니 가게가 나날히 흥성했다.
인맥은 없어도 단골들의 입소문을 통해 또 새로운 단골이 생기고 또 그 단골들이 새 단골을 묻혀오고 하면서 손님걱정은 없었다. 하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돈은 늘 딸리였다.
기대이상으로 일들이 잘 풀릴 때도 있고 간절하게 꿈 꾸었는데 이루지 못한 일들도 있는 가운데 나는 야금야금 녀장부로 성장해갔다. 그렇게 몇년동안 경영하다가 가게를 다른 사람에게 임대를 해주고 번 돈을 셋이서 세 몫으로 나눠 가졌다. 동생은 그 돈에 대부금을 내서 집 한채 사고 나는 그 돈을 종자돈으로 옷가게를 차렸다.

 


저자 최선숙

옷가게를 운영할 때에도 엄마는 어려서 못해준 사랑을 보상이라도 해주려는듯 묵묵히 다해주었다.
딸애가 태여나자 십년동안 우리 집에 와서 보모 아닌 보모노릇 해주면서 딸애를 봐주었다.
나는 남자들처럼 엄마가 챙겨주는 밥을 먹고 엄마가 빨아주는 옷을 입고 어려운 일에 부딪히면 엄마와 토론하면서 나의 경영의 길을 걸어갔다.
건강한 몸을 주어서 고맙고 트인 사유를 주어서 고맙고 고마움을 알게 해줘서 고마운 엄마 덕분에 나는 전성기에 전성기를 거듭하며 승승장구하였다.
시골에 있는 오빠들도 한국에 나가 돈을 벌수 있게 경제적으로 지원해주었고 앞선 생각으로 형제들 모두 좋은 항목에 투자하여 돈을 벌수 있게 집안의 해결사 역할도 담당하였다.

언제 고향에 살던 동생 친구가 우리 집에 놀러와서 보더니 눈이 휘둥그래졌다.

“누나 언제 이렇게  富婆가 됐소?”

덕지덕지 기운 바지를 입고 코를 풀쩍이며 아버지 없이 자란 우리에게도 옛말하며 살 날 들이 왔다.

때론 강하게 때론 약하게 때론 잔잔하게 들려오는 비소리를 인생 전주곡처럼 들으며 오늘도 나는 82세의 백발이 된 엄마를 조수석에 앉히고 고향으로 향한다.
반평생을 시골에서 산 엄마,나이가 들어서 감성도 예전 같지 않지만 대자연속에만 묻히면 애들처럼 신나 하신다. 나는 즐거워하는 엄마의 그 모습에 홀려 늘 바쁜 일정을 뒤로 미루고 엄마와 함께 산향길을 즐긴다. 조용히 창밖을 주시하다가 어디를 보나 추억인 익숙한 고향길에 접어들기만 하면  엄마의 생방송이 시작된다. 나는 흐뭇하게 웃으며 열번도 더 들었을 엄마의 레퍼토리를 들어준다. 그런 엄마가 오늘은 창밖을 보면서 혼자소리로 자꾸 누군가를 욕한다.

“무저리 같은게 일찍 갈 택이 뭐야? 좋은 날도 못 보고. 무저리 같은게…”
“엄마 누구를 욕함까?”
“누기를 욕하긴 누기를 욕하개? 무저리 같은 네 애비지.”
“갑자기 왜 저 세상 간 아버지를 욕함까?”
“이 좋은 세상에 누릴 것도 못 누리고 넘 일찍 간게 원망스러워서 그런다.”

당신 자식 차에 앉으니 남편 생각이 나나 보다. 39세 꽃나이에 생과부로 홀로 나서 조롱조롱 자식 넷을 키우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가?


창문을 여니 바람에 나무잎이 한들거리는 것이 보여서 마음이 상쾌해졌다.
어디에선가 그윽한 정향향기가 은은하게 풍겨온다.
어디 가까이에 정향숲이 있나보지. 어쩌면 이리도 그윽할가?
아무런 대가도 보상도 없이 한결같이 주기만 하는 엄마의 원초적이 사랑처럼…

나는 비 온 뒤의 청신한 정향숲을 찾아 차머리를 돌린다.
 
2019년 8월 29


 

최선숙 (崔善淑)  
필명:은주(殷朱)

中国 길림성 화룡 출생  
연변대학 조선언어문학학부
연변과학기술대학AMP
제1회 로신문학원 연변창작강습반수료
"내 삶의 보따리"
"자식농사"
"배신 "등 수필 소설 시 20여편발표.
"열혈모녀 축구팬 "   해란강닷콤 우수상. 
“정향숲을  찾기까지”  제5기 중국조선족 효사랑글짓기 공모 우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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