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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리포트]訪日 본지 몽골 특파원, 후쿠오카(福岡)에 서다
2014년 08월 09일 20시 18분  조회:4937  추천:0  작성자: 몽골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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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리포트]訪日 본지 몽골 특파원, 후쿠오카(福岡)에 서다
 
강외산 몽골인문대학교(UHM) 교수, 일본 후쿠오카(Fukuoka) 구치소 찾아 고(故) 윤동주 시인의 넋 기려
 
알렉스 강 몽골 특파원 기사입력  2014/08/07 [18:47]
 
 

【Fukuoka(Japan)=Break News GW】
몽골 캠퍼스 방학을 이용해 짧은 고국 방문에 나선 강외산 몽골인문대학교(UHM) 교수(본지 몽골 특파원 겸 KBS 몽골 주재 해외 통신원)가 8월 7일 목요일 오전 일본 후쿠오카(Fukuoka=福岡) 시를 전격 방문했다.

강외산 몽골인문대학교(UHM) 교수는 일본 후쿠오카(Fukuoka=福岡) 시에 도착해 지하철 후지사키에키(藤崎駅) 근처로 이동, 사와라(早良) 구(區) 소재
일본 후쿠오카(Fukuoka) 구치소(福岡拘置所⇐후쿠오카 형무소)를 찾아, 한민족 직계 조상인 고(故) 윤동주 시인의 애국애족 정신을 기렸다.

8월 7일 목요일 오전에 전격적으로 이뤄진 강외산 몽골인문대학교(UHM) 교수의 일본 후쿠오카(Fukuoka=福岡) 시 방문은 지난 7월 29일의 백범 김구 기념관(白凡 金九 紀念館=Kim Koo Museum & Library, 관장 김신)을 방문, 브리핑을 청취하고 김구 선생의 애국애족 정신을 기렸던 애족애족 정신 고취 및 함양을 위한 거룩한 순례의 연장선 상에 있다.

 

 

▲강외산 몽골인문대학교(UHM) 교수, 일본 후쿠오카(Fukuoka)에서 고(故) 윤동주 시인의 넋 기리다.     ©알렉스 강 몽골 특파원

 


우리나라 절기로 말복(末伏)이었던 2014년 8월 7일 목요일 후쿠오카는, 2014년 제11호 태풍 할롱(Halong)이 일본 열도를 강타한다는 예보가 있긴 했으나, 웬일인지 그야말로 찌는 듯한 무더위로 헐떡이고 있었다. 

본 기자는 후쿠오카 지하철 후지사키에키(藤崎駅) 근처의 버스 터미널과 아파트 단지를 돌고 도는 발품을 판 끝에 일본 후쿠오카(Fukuoka) 구치소(福岡拘置所⇐후쿠오카 형무소) 정문을 드디어 홀로 마주섰다.

 


▲강외산 몽골인문대학교(UHM) 교수, 일본 후쿠오카(Fukuoka)에서 고(故) 윤동주 시인의 넋 기리다. 후쿠오카(Fukuoka) 구치소(福岡拘置所⇐후쿠오카 형무소) 정문 전경.    ©알렉스 강 몽골 특파원

그야말로 만감이 교차했다.

일제강점기 시절, 우리나라 독립 운동가들의 열화와 같은 독립운동을 막기 위해 독립 운동가들을 탄압, 수감하였던 대표적인 장소가 바로 이 일제 형무소 아니었던가? 일제강점기 시절, 수많은 우리나라 독립 운동가들이 수감되어 고통 받았던 곳으로, 일제의 식민 지배에 맞서 옥중에서 항거하거나 끝내 순국하신 선열의 민족혼이 깃든 독립 운동의 현장이 바로 이 일제 형무소이다. 당시 일제 형무소에 수감된 독립 운동가들은 체포와 판결 과정에서 잔혹한 취조와 고문, 그리고 복역 과정에서의 혹독한 처우와 고된 노동으로 목숨을 잃거나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를 갖고 살아야만 했다.

본 기자의 그 당시 심정이란 한참 전, 유치환 시인이 썼던 "그 열렬(烈烈)한 고독 가운데 / 옷자락을 나부끼고 호올로 서면 / 운명처럼 반드시 <나>와 대면(對面)케 될지니 / 하여 <나>란, 나의 생명이란 / 그 원시의 본연(本然)한 자태를 다시 배우지 못하거든 / 차라리 나는 어느 사구(沙丘)에 회한없는 백골을 쪼이리라."라는 '생명의 서(書)'의 주인공이, 아라비아 사막이 아닌, 일본 후쿠오카 현지에서 비로소 된 기분이었다.


 

 

▲강외산 몽골인문대학교(UHM) 교수, 일본 후쿠오카(Fukuoka)에서 고(故) 윤동주 시인의 넋 기리다. 후쿠오카(Fukuoka) 구치소(福岡拘置所⇐후쿠오카 형무소) 정문 전경.    ©알렉스 강 몽골 특파원

 


일본 후쿠오카(Fukuoka) 구치소(福岡拘置所⇐후쿠오카 형무소) 정문에서 디지털 카메라 셔터를 열심히 누르고 있는데 갑자기 일본 경비원(인지 교도관인지)이 튀어나왔다.

 

갑자기 상황이 묘(妙)하게 돌아가는 걸 느꼈다. 본 기자의 손에 들린 디지털 카메라를 감지하고 나온 것일까?

 

좌우지간, 이런 상황을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으나 일본 경비원(인지 교도관인지)과 눈이 마주친 상태이고 보면 그냥 모른 척 하고 돌아서기에는 어정쩡한 상황이 돼버렸다.

 

"이거 잘못하면 디지털 카메라 빼앗기는 수모를 당하는 것 아닐까" 이런 생각이 한 순간 본 기자의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사태가 이에 이름에 본 기자는 후쿠오카구치소 정문에 버티고 서 있는 일본 경비원(인지 교도관인지) 앞으로 먼저 다가가 선수를 쳤다.

 

한편으로는, '나는 너따위 말단하고는 상대하지 않겠다'라는 다소 유치(?)한 침묵적 시위이기도 했다.

목소리를 최대한 깔고, 그러나 아주 교양있게(?) 일본어로 질문을 던졌다.

"서울에서 온 대한민국 기자입니다. 당신 상관을 만나 볼 수 있습니까?"

다자고짜 먼저 선방을 먹여서 그랬던 것일까?
"사진 찍으셨죠?"라는 대꾸는 나오지 않았다.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십니까?"

"당신 상관을 만나면 말씀 드리지요."

 

경비실 안에 있던 선임 경비원(인지 교도관인지)이 나왔다.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십니까?"

"서울에서 온 대한민국 기자입니다. 1945년에 이곳 일본 후쿠오카(Fukuoka) 구치소(福岡拘置所⇐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젊은 나이에 돌아가신 대한민국 시인(詩人)을 추모하기 위해 왔습니다. 서울에서 여기 오는 일이 항상 가능하지 않기 때문에 이곳 사진을 몇 장 찍고자 합니다."

"이곳에서는 사진 촬영이 허용되지 않습니다"

이미 사진을 찍은 상태였기에 이런 상황이라면 그냥 되돌아나오면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본 기자도 쉽사리 물러서지 않았다. 아니, 정확하게 묘사하자면, 솔직히 물러서기가 싫었다.

 

"서울에서 여기 오는 일이 항상 가능하지 않기 때문에 이곳 사진을 몇 장 찍고자 합니다. 사진 촬영이 허용되지 않는다면 좀 먼 거리에서 찍으면 아니 되겠습니까?"

"먼 거리에서 찍으신다?"

"그렇습니다. 먼 거리에서 찍겠습니다."

"??????????..........."

선임 경비원(인지 교도관인지)은 망설이고 있는 듯 보였다.

"때는 이때다!" 하고 본 기자는 즉시 국제기자증을 호기있게 들이밀었다.

"반드시, 먼 거리에서 찍겠습니다."

 

국제기자증 효과였을까?
선임 경비원(인지 교도관인지)의 그 다음  발언이 걸작이었다.

"저기.....예! 그러시지요! 먼 거리 촬영이라면야 가능합니다!"

본 기자는 속으로 쓴웃음이 나왔다.
'아이고, 이 답답한 양반아, 멀리서 줌인으로 찍으면 그게 그거 아닌가!"

요컨대, 결과는 본 기자의 판정승(判定勝)인 셈이 되었다.

하지만, "당신이 대한민국 국민이든, 국제 기자이든 우리와는 상관 없다. 우리 후쿠오카구치소 사진 촬영은 금지되어 있으니 당신 스스로 촬영한 사진을 다 지우고 가라! 그렇지 않으면 디지털 카메라를 강제로 빼앗겠다!"라는 식으로 구치소 경비원(인지 교도관인지)들이 만약, 이렇게 나왔다면 어떻게 했을 것인가?

사실, 이런 답변을 준비해 놓고 있기는 했다.

"당신들은 해외 언론이라는 낱말, 국제기자연맹이라는 낱말의 의미를 모르시는가? 내가 일본을 반대하는 행동을 하지 않았고, 이곳에서 죽은 대한민국 출신 시인을 추모하고자 그저 사진 한 장 찍었는데 어찌하여, 바다 건너 서울에서 일본을 힘들게 방문한 국제기자인 내게 이런 나쁜 대우를 하는가? 일본은 국제기자를 그런 식으로 대우하느냐? 당신들의 부당성을 국제기자연맹에 즉시 보고하겠다!


물론, 이런 상황은 본 기자의 기우였을 뿐, 구치소 경비원(인지 교도관인지)들은 그런 말을 감히 본 기자에게 꺼내 놓지 못했다.



▲강외산 몽골인문대학교(UHM) 교수, 일본 후쿠오카(Fukuoka)에서 고(故) 윤동주 시인의 넋 기리다. 후쿠오카(Fukuoka) 구치소(福岡拘置所⇐후쿠오카 형무소) 정문 전경.    ©알렉스 강 몽골 특파원

 

 

참고로, 후쿠오카(Fukuoka) 구치소(福岡拘置所) 이전의 원래 후쿠오카 형무소가 이곳에 위치하게 된 때는 도형장(徒刑場)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1871년부터라고 역사는 전한다. 1881년부터는 감옥소(監獄所), 1903년부터는 감옥(監獄)이라는 명칭으로 불렸고, 1922년부터는 '후쿠오카 형무소(福岡刑務所)'라는 명칭으로  정착되었다고 한다.

1965년 후쿠오카 형무소는 후쿠오카 교외의 다른 장소로 옮아 갔고, 바로 그 자리에 현재의 후쿠오카 구치소(福岡拘置所)가 자리를 잡게 되었다는데, 원래 '후쿠오카 형무소(福岡刑務所)' 터는 상당히 넓었다는 후문이다. 현재의 사와라(早良) 구(區) 버스 터미널, 물론 아파트, 오피스 빌딩 등이  '후쿠오카 형무소(福岡刑務所)' 터에 자리를 잡았고, 현재의 후쿠오카 구치소(福岡拘置所)는 조선 독립 투사 때려 잡던 후쿠오카 형무소와는 달리 그저 일본 미결수를 가두는 구치소 역할만을 할 뿐이라고 한다.

 

일본 후쿠오카(Fukuoka) 구치소(福岡拘置所⇐후쿠오카 형무소) 정문 왼쪽으로 길을 나서니, 구치소 옆쪽에 이름 하여 가나쿠즈가와(金屑川)라는 이름의 개천이 흐르고 있었다.
 

 

▲강외산 몽골인문대학교(UHM) 교수, 일본 후쿠오카(Fukuoka)에서 고(故) 윤동주 시인의 넋 기리다. 일본 후쿠오카(Fukuoka) 구치소(福岡拘置所⇐후쿠오카 형무소) 정문 왼쪽에는 가나쿠즈가와(金屑川)라는 이름의 개천이 흐르고 있었다.    ©알렉스 강 몽골 특파원

 

 

 

▲강외산 몽골인문대학교(UHM) 교수, 일본 후쿠오카(Fukuoka)에서 고(故) 윤동주 시인의 넋 기리다. 가나쿠즈가와(金屑川) 다리는 1960년 3월 31일(쇼와=昭和 35년)에 세워졌다.    ©알렉스 강 몽골 특파원

 

 

역사 기록은, 시인 윤동주가 일본 치안유지법 제5조 위반(독립 운동)이라는 죄명으로 징역 2년을 선고 받고 후쿠오카 형무소로 이송됐다고 전한다.

 

하지만, 후쿠오카 형무소로 이송된 뒤 온갖 악형을 다 견뎠으나, 안타깝게도  불과 8.15 광복 6개월을 남겨둔, 1945년 2월 16일 20대 후반의 나이로 숨을 거두고 말았던, 본 기자가 그토록 찾아 헤맸던, 시인 윤동주의 흔적은 현재의 후쿠오카 구치소(福岡拘置所) 그 어느 곳에서도 남아 있지 않았다. 가슴이 먹먹해졌다. 본 기자의 가슴에 비애(悲哀)가 꽃잎처럼 휘날렸다.

 

 

▲강외산 몽골인문대학교(UHM) 교수, 일본 후쿠오카(Fukuoka)에서 고(故) 윤동주 시인의 넋 기리다. 본 기자가 그토록 찾아 헤맸던, 시인 윤동주의 흔적은 현재의 후쿠오카 구치소(福岡拘置所) 그 어느 곳에서도 남아 있지 않았다. 가슴이 먹먹해졌다. 본 기자의 가슴에 비애(悲哀)가 꽃잎처럼 휘날렸다.    ©알렉스 강 몽골 특파원

 

 

후쿠오카형무소 부근 태생인 니시오카 겐지(西岡健治) 전(前) 후쿠오카현립대 교수가 윤동주 시인의 넋을 기리고자 1995년부터  후쿠오카 구치소(福岡拘置所) 담 밖에서 윤동주 시인의 추도식을 주도해 오고 있다는 소식을 종종 접했다. 그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본 기자는 심기가 상당히 불편했다. 불편한 정도를 넘어 속에서 열불이 났다.

 

윤동주 시인이 강제로 맞았던 주사가 생체 실험으로 악명을 떨친 관동군 산하 속칭 이시이(石井) 부대, 즉 '731 부대'가 실험했던 혈장 대용 생리 식염수였을 것이라는 의혹, 아울러 당시 규슈제국대 의학부 의사들이 연구에 가담해 당시 후쿠오카형무소에 수감됐던 우리나라 독립 운동가들이 생체 실험 대상이 됐을 가능성이 있으리라는 의혹 등이 있는 현 상황에서 추도식은 무슨 놈의 얼어 죽을 추도식인가!

후쿠오카에 윤동주 '시비(詩碑)' 하나 못 세우는 일본인들 주제에 추도식은 무슨 얼어 죽을 추도식이란 말이냐 이런 얘기다. '병 주고 약 주자' 는 것인가? 이 무슨 해괴망측한 작태(作態)인가! 

 

물론, 후쿠오카에 공식적인 윤동주 '시비(詩碑)'를 세운 뒤라면 본 기자는 그들에 대한 생각의 틀을 바꿀 용의가 얼마든지 있음을 분명히 밝혀 둔다. 하지만, 독도 문제, 성노예 문제, 역사 왜곡 문제로 한일 관계가 꼬일 대로 꼬인 현 상황에서  후쿠오카에 공식적인 윤동주 '시비(詩碑)'를 세우는 게 가능할까? 글쎄올시다.

 

 

▲강외산 몽골인문대학교(UHM) 교수, 일본 후쿠오카(Fukuoka)에서 고(故) 윤동주 시인의 넋 기리다. 강외산 몽골인문대학교(UHM) 교수가 가나쿠즈가와(金屑川)라는 이름의 개천 옆에 섰다.    ©알렉스 강 몽골 특파원

 


한편, 강외산 몽골인문대학교(UHM) 교수는 일본 후쿠오카(Fukuoka) 구치소(福岡拘置所⇐후쿠오카 형무소)를 찾기 전, 역시 사와라(早良) 구(區)에 위치한 사와라경찰서(早良警察署) 근처에도 들러 한민족 직계 조상인 고(故) 윤동주 시인의 애국애족 정신을 기렸다.
 

 

▲강외산 몽골인문대학교(UHM) 교수, 일본 후쿠오카(Fukuoka)에서 고(故) 윤동주 시인의 넋 기리다. 일본 후쿠오카(Fukuoka) 사와라(早良) 구(區)에 위치한 사와라경찰서(早良警察署) 방향의 지하철 후지사키에키(藤崎駅) 출구.    ©알렉스 강 몽골 특파원

 

 

 

▲강외산 몽골인문대학교(UHM) 교수, 일본 후쿠오카(Fukuoka)에서 고(故) 윤동주 시인의 넋 기리다. 일본 후쿠오카(Fukuoka) 사와라(早良) 구(區)에 위치한 사와라경찰서(早良警察署) 방향의 지하철 후지사키에키(藤崎駅) 출구.    ©알렉스 강 몽골 특파원

 


1910년의 경술 국치 이후, 일본 제국주의는 한반도에서 헌병 경찰 체제로 통칭되는 무단 통치를 시작했다. 1919년의 3.1운동을 계기로 소위 ‘문화’통치기가 되자 헌병경찰은 해체되어 보통경찰로 이름이 바뀌었으나, 헌병의 공백은 경찰 조직의 확대 재정비를 통해 유지됐다.

 

 

▲강외산 몽골인문대학교(UHM) 교수, 일본 후쿠오카(Fukuoka)에서 고(故) 윤동주 시인의 넋 기리다. 일본 후쿠오카(Fukuoka) 사와라(早良) 구(區)에 위치한 사와라경찰서(早良警察署)  전경.    ©알렉스 강 몽골 특파원

1910년대 중반 약 5천 7백 명이었던 일본 경찰은 3.1운동 후인 1921년 약 2만여 명으로 증가했다.

 

 

▲강외산 몽골인문대학교(UHM) 교수, 일본 후쿠오카(Fukuoka)에서 고(故) 윤동주 시인의 넋 기리다. 일본 후쿠오카(Fukuoka) 사와라(早良) 구(區)에 위치한 사와라경찰서(早良警察署)  전경.    ©알렉스 강 몽골 특파원

 

 

1930년대 중반, 전쟁의 확대에 따른 전시 체제 시기에는 경제통제, 노무동원, 수송 등 우리 민족의 생활전반을 통제하면서, 독립운동 세력에 대한 탄압을 더욱 강도 높게 진행했다.
 

 

▲강외산 몽골인문대학교(UHM) 교수, 일본 후쿠오카(Fukuoka)에서 고(故) 윤동주 시인의 넋 기리다. 일본 후쿠오카(Fukuoka) 사와라(早良) 구(區)에 위치한 사와라경찰서(早良警察署)  전경.    ©알렉스 강 몽골 특파원

 

 

특히 이 시기에는 제2차세계대전의 발발로 국방 경제의 문제가 불거지자 경제경찰제도를 신설하여 물자를 통제하고 위반자를 엄격히 처벌했다. 또한 국가총동원체제로의 전환을 위해 사상 탄압과 전향 제도 실시, 신사 참배 강요, 강연회 등을 통한 전쟁 협력 행위를 강제하고 수송, 강제징용, 공출 등의 임무까지 더해, 우리 민족의 생활 전반을 완전히 통제한 바 있다.
 

 

▲강외산 몽골인문대학교(UHM) 교수, 일본 후쿠오카(Fukuoka)에서 고(故) 윤동주 시인의 넋 기리다. 일본 후쿠오카(Fukuoka) 사와라(早良) 구(區)에 위치한 사와라경찰서(早良警察署)  전경.    ©알렉스 강 몽골 특파원

 

 

바로 이 당시 1943년 7월 14일, 윤동주는 교토 하숙집에서 체포되어 교토 시모가모 경찰서에서 취조를 받았다.

그리고 다음해인 1944년 3월 31일 재판이 열렸다. 역사는 윤동주와 일본 재판관의 대화를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일본 재판관 "그대는 조선인과 일본인의 차별 문제에 대해 원망하고 선동까지 했다는데 그게 사실인가?”

윤동주 “그렇다. 나는 우리 민족이 차별당하고 있는 것에 대해 보고 느낀 사실만 그대로 말했을 뿐이다.”

일본 재판관 “또한 너는 문학조직이라는 이름으로 범죄집단을 만들어 조선의 독립운동을 꾀하였는데 인정하는가?”

윤동주 “조선 사람이 조선의 독립운동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그게 어찌 범죄란 말이냐. 나는 그 사실을 인정할 수 없다. 그리고 나는 내 조국이 독립을 이룰 때까지 계속 투쟁 운동을 할 것이다. 옥에 가둔다면 옥에서 할 것이고, 나를 죽인다면 무덤 속에서도 할 것이다."


아아, 꺾이지 않던 조선의 절개여! 오오, 한없이 넘쳐나던 조선 남아의 기개여!

 

 

▲강외산 몽골인문대학교(UHM) 교수, 일본 후쿠오카(Fukuoka)에서 고(故) 윤동주 시인의 넋 기리다. 강외산 몽골인문대학교(UHM) 교수가 일본 후쿠오카(Fukuoka) 사와라(早良) 구(區)에 위치한 사와라경찰서(早良警察署)를 배경으로 포즈를 취했다.    ©알렉스 강 몽골 특파원

 

 
윤동주의 부친 윤영석과 아저씨 윤영춘의 증언을 그대로 옮긴 송우혜의 '윤동주 평전'은 1945년 2월 16일 새벽 3시 36분에 찾아 온 윤동주 시인의 죽음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후쿠오카 형무소를 찾기는 동주(東柱)가 사망한 지 열흘 뒤였다.....그 길로 시체실로 찾아가 동주를 찾았다. 관 뚜껑을 열자 '세상에 이런 일도 있어요?'라고 동주는 내게 호소하는 듯했다....일본 청년 간수(看守) 한 사람이 따라와서 우리에게 하는 말. "아하, 동주가 죽었어요. 참 얌전한 사람이....죽을 때 무슨 뜻인지 모르나 외마디 비명(悲鳴) 소리를 높게 지르면서 운명했지요."하며 동정하는 표정을 보였다."
 

 

▲강외산 몽골인문대학교(UHM) 교수, 일본 후쿠오카(Fukuoka)에서 고(故) 윤동주 시인의 넋 기리다. 일본 후쿠오카(Fukuoka) 사와라(早良) 구(區)에 위치한 사와라경찰서(早良警察署)  전경.    ©알렉스 강 몽골 특파원

 

 

듣자 하니, 사와라(早良) 구(區)에 위치한 사와라경찰서(早良警察署) 터는 원래 후쿠오카 형무소 터라는 전언이었다. 그러니까, 현재의 후쿠오카(Fukuoka) 구치소(福岡拘置所)에서부터 길 건너 사와라경찰서(早良警察署) 터까지 모조리 원래 후쿠오카 형무소 터라는 얘기였다.  

 

'아니, 원래 후쿠오카 형무소 터가 이렇게 넓었던가? 도대체 얼마나 많은 우리나라 독립 운동가들을 몽둥이로 조져(?)댔을까?' 본 기자는 그저 슬프고 슬펐다.
 

 

▲강외산 몽골인문대학교(UHM) 교수, 일본 후쿠오카(Fukuoka)에서 고(故) 윤동주 시인의 넋 기리다. 일본 후쿠오카(Fukuoka) 사와라(早良) 구(區)에 위치한 사와라경찰서(早良警察署)  옆에는 어린이 놀이터가 자리잡고 있었다.    ©알렉스 강 몽골 특파원

 


윤동주 시인의 죽음이 일본 경찰의 체포에서 시작되었음을 잘 알고 있던 본 기자는 우울한 마음에 사와라(早良) 구(區)에 위치한 사와라경찰서(早良警察署) 근처를 마음 편하게 떠날 수 없었다.

주위를 둘러 보니 일본 후쿠오카(Fukuoka) 사와라(早良) 구(區)에 위치한 사와라경찰서(早良警察署)  옆에 어린이 놀이터가 붙어 있었다.

 

 

▲강외산 몽골인문대학교(UHM) 교수, 일본 후쿠오카(Fukuoka)에서 고(故) 윤동주 시인의 넋 기리다. 일본 후쿠오카(Fukuoka) 사와라(早良) 구(區)에 위치한 사와라경찰서(早良警察署)  옆 어린이 놀이터에는 수목이 무성했다.    ©알렉스 강 몽골 특파원

 

 

성하(盛夏)의 일본 후쿠오카(Fukuoka) 사와라(早良) 구(區)에 위치한 사와라경찰서(早良警察署)  옆 어린이 놀이터에는 수목이 무성했다.

즉시, 어린이 놀이터로 이동한 본 기자는 
사와라경찰서(早良警察署)  마당에 세위진 경찰 버스를 향해 시선을 고정하고 공원 벤치에 태극기를 내걸었다. 그러고 나서 윤동주 시인의 시(詩) "또 다른 고향"을 나직이 낭송하기 시작했다.

 

 

▲강외산 몽골인문대학교(UHM) 교수, 일본 후쿠오카(Fukuoka)에서 고(故) 윤동주 시인의 넋 기리다. 시인 윤동주의 시(詩)가 일본 후쿠오카(Fukuoka) 사와라(早良) 구(區)에 위치한 사와라경찰서(早良警察署)  옆 어린이 놀이터에서 태극기가 휘날리는 가운데 나직이 낭송됐다.    ©알렉스 강 몽골 특파원

 


"또 다른 고향"


고향에 돌아온 날 밤에
내 백골(白骨)이 따라와 한 방에 누웠다.

 

어둔 방은 우주로 통하고,
하늘에선가 소리처럼 바람이 불어온다.

 

어둠 속에 곱게 풍화 작용하는
백골을 들여다보며
눈물 짓는 것이 내가 우는 것이냐?
백골이 우는 것이냐?
아름다운 혼이 우는 것이냐?


지조(志操) 높은 개는
밤을 새워 어둠을 짖는다.


어둠을 짖는 개는
나를 쫓는 것일 게다.


가자 가자
쫓기우는 사람처럼 가자.
백골 몰래
아름다운 또 다른 고향으로 가자."


중국 동북 지역 조선족 자치구 옌볜의 룽징 뒷동산 마루턱에 묻혀 있는 윤동주 시인의 무덤을 찾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많으나, 정작 윤동주 시인이 눈을 감았던 일본 후쿠오카를 찾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은 현실(일본인들이여! 그대들이 그리 윤동주 시인을 흠모한다면, 즉시 그대들의 힘으로, 그대들의 손으로, 후쿠오카에 공식적인 윤동주 '시비(詩碑)'를 세울지어다!)에서 본다면 본 기자의 후쿠오카 방문은 참으로 의미 있는 순례였다고 자평할 수 있을 것이다.

본 기자는 진심으로 윤동주 시인의 명복을 빌었다. 아울러, 올해 2014년 제16회 재외동포문학상(賞) 국제 공모전 시(詩) 부문 우수상 수상을 계기로 향후 펼쳐질 본 기자의 시인으로서의 활동을  윤동주 시인이 하늘에서 음우(陰佑)하고 외호(外護)해 주기를 간절히 소망했다.
숭실(崇實)고등학교 출신인 본 기자는 학연(學緣)으로는 윤동주 시인의 직계 후배이기도 하다.

 

 

▲강외산 몽골인문대학교(UHM) 교수, 일본 후쿠오카(Fukuoka)에서 고(故) 윤동주 시인의 넋 기리다.     ©알렉스 강 몽골 특파원

 

 


▲강외산 몽골인문대학교(UHM) 교수, 일본 후쿠오카(Fukuoka)에서 고(故) 윤동주 시인의 넋 기리다. 시인 윤동주(尹東柱, 1917년 12월 30일 ~ 1945년 2월 16일).     ©알렉스 강 몽골 특파원

▲강외산 몽골인문대학교(UHM) 교수, 일본 후쿠오카(Fukuoka)에서 고(故) 윤동주 시인의 넋 기리다.     ©알렉스 강 몽골 특파원

 

 

 

▲강외산 몽골인문대학교(UHM) 교수, 일본 후쿠오카(Fukuoka)에서 고(故) 윤동주 시인의 넋 기리다.     ©알렉스 강 몽골 특파원

 

 

 

▲강외산 몽골인문대학교(UHM) 교수, 일본 후쿠오카(Fukuoka)에서 고(故) 윤동주 시인의 넋 기리다.     ©알렉스 강 몽골 특파원

 


☞시인 윤동주(尹東柱, 1917년 12월 30일 ~ 1945년 2월 16일)
한국의 독립운동가, 시인, 작가이다. 아명은 윤해환(尹海煥), 본관은 파평(坡平)이다. 중국 지린 성에서 출생,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였으며, 숭실(崇實)중학교 때 처음 시작을 발표하였고, 1939년 연희전문 2학년 재학 중 소년(少年) 지에 시를 발표하며 정식으로 문단에 데뷔했다. 일본 유학 후 도시샤 대학 재학 중, 1943년 항일운동을 했다는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후쿠오카 형무소(福岡刑務所)에 투옥, 100여 편의 시를 남기고 27세의 나이에 옥중에서 요절하였다. 그의 사후 일본군에 의한 마루타, 생체실험설이 제기되었으나 불확실하다. 사후에 그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출간되었다. 일본식 창씨 개명은 히라누마 도쥬(平沼東柱=ひらぬま とうじゅう)이다. 일제 강점기 후반의 양심적 지식인의 한 사람으로 인정 받았으며, 그의 시는 일제와 조선총독부에 대한 비판과 자아 성찰 등을 소재로 하였다. 그의 친구이자 사촌인 송몽규 역시 독립운동에 가담하려다가 체포되어 일제의 생체 실험 대상자로 분류되어 의문의 죽음을 맞는다. 1990년대 후반 이후 그의 창씨 개명 '히라누마'가 알려져 논란이 일기도 했다. 송몽규는 고종 사촌이었고, 가수 윤형주는 6촌 재종형제간이기도 하다.

윤동주(尹東柱, 1917년 12월 30일 ~ 1945년 2월 16일) 약력
1917. 12. 30. 만주 간도성 화룡현 명동촌에서 아버지 윤영석과 어머니 김용의 맏아들로 출생하다. 아명은 해환(海煥).

 

1925. 4. 4. 명동 소학교에 입학. 같은 학년에 고종 사촌 송몽규, 당숙 윤영선, 외사촌 김정우, 문익환 등이 존재하다.

 

1927. 명동소학교 5학년 때에 급우들과 함께 『새 명동』이라는 등사 잡지를 만들다.

 

1931. 3. 15. 명동소학교 졸업. 학교에서 졸업생 14명에게 김동환 시집 『국경의 밤』을 선물하다.
명동소학교 졸업 후 송몽규, 김정우와 함께 명동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중국인 소학교 화룡 현립 제일소학교 고등과에 편입하여 1년간 수학하다.

 

1932. 4. 용정의 기독교 학교인 은진중학교에 송몽규, 문익환과 함께 입학하다.
명동에서 20리 정도 떨어진 이 곳으로 통학하는 윤동주를 위해 가족 모두가 용정으로 이사하다.

 

1934. 12. 24. 『초 한 대』, 『삶과 죽음』, 『내일은 없다』등 3편의 시를 쓰다.
이 시 3편이 오늘날 찾아 볼 수 있는 윤동주의 최초 작품이며, 이 때부터 자기 시 작품에 시작(詩作) 날짜를 기록하기 시작하다.

 

1935. 9. 1. 은진중학교 4학년 1학기를 마치고 평양 숭실중학교 3학년 2학기로 편입하다.

 

1935. 10. 숭실학교YMCA문예부에서 내던 『숭실활천』제15호에 『공상』이 실려 그의 시가 처음으로 활자화하다.

 

1936. 3. 숭실학교에 대한 신사참배 강요에 항의하여 자퇴하고 고향 용정으로 돌아와 5년제인 광명학원 중학부 5학년에 편입하다.

 

1936. 11.-12.간도 연길에서 발행되던『가톨릭 소년』에 동시「병아리(11월호)」와「빗자루(12월호)」를 윤동주(尹東柱)란 이름으로 발표하다.

 

1937. 『카톨릭 소년』에 동시「오줌싸개 지도(1월호)」, 「무얼 먹고 사나(3월호)」를 윤동주(尹東柱)란 이름으로, 「거짓부리(10월호)」를 윤동주(尹東柱)란 이름으로 각기 발표. 동주(童舟)라는 필명이 이 때 처음 사용되다.

 

1937. 8. 100부 한정판으로 발행된『백석 시집 : 사슴』을 구할 길이 없자 필사하여 소장하다.

 

1937. 9. 진로 문제로 문학을 희망하는 윤동주와 의학을 선택하라는 아버지 윤영석이 갈등하나, 할아버지 윤하연의 권유로 아버지가 양보하여 문학으로 진로가 잡히다. 『영랑시집』을 정독하다.

 

1938. 2. 17. 광명중학교 5학년 졸업.

 

1938. 4. 9. 서울 연희전문학교 문과 입학, 기숙사 생활 시작.
같은 해 송몽규도 윤동주와 함께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하다.
외솔 최현배 선생에게 조선어를 배우고 이양하 교수에게서 영시를 배우다.

 

1939. 조선일보 학생란에 산문「달을 쏘다(1.23)」, 시「유언(2.6)」, 「아우의 印象畵(10. 17)」를 윤동주(尹東柱)와 윤주(尹柱)라는 이름으로 발표하다.

 

1939. 3. 동시「산울림」을 『소년』3월호에 윤동주(尹東柱)란 이름으로 발표하다.
새로 연희전문에 입학한 하동 학생 정병욱(1922-1982)을 알게 되어 친해지다.
정병욱과 함께 이화여전 구내 형성교회에 다니며 영어 성서반에 참석하다.
이 무렵 릴케, 발레리, 지드 같은 작가들의 작품을 탐독하며, 프랑스어를 독습하다.

 

1941. 5. 정병욱과 함께 생활관에서 나와 종로구 누상동 9번지의 소설가 김송의 집에서 하숙하기 시작하다.
하숙생이 되면서 김송과 우연히 알게 되다.

 

1941. 6. 5. 연희전문학교 문과에서 발행하는 『문우(文友)』지에 「우물 속의 自畵像」, 「새로운 길」을 발표하다.

 

1941. 9. 요시찰인 김송과 학생들에 대한 일본 경찰의 주목이 심하여 그곳을 나와 북아현동의 전문적인 하숙집으로 들어가다. 서정주의『화사집』을 즐겨 읽다.

 

1941. 12. 27. 전시 학제 단축으로 3개월 앞당겨 연희전문학교 4학년 졸업하다.
졸업 기념으로 19편의 작품을 모아 자선시집(自選詩集)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를 77부 한정판으로 출간하려 했으나 당시 흉흉한 세상을 걱정한 주변인들의 만류로 뜻을 이루지 못하다.
시집을 3부 작성하여 한 부는 자신이 가지고, 이양하 선생과 정병욱에게 1부씩 증정하다.
본래 이 자선 시집의 제목은 『병원』이었으나「서시(序詩)」를 쓴 후 바꾸다.
"병원"은 병든 사회를 치유한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담다.
윤동주 자신의 유학을 위한 일본 입국 수속을 위해 성씨를 "히라누마(ひらぬま=平沼)"라고 창씨개명하다.

 

1942. 1. 24. 고국에서 쓴 마지막 작품이 된 시 「참회록」을 쓰다.

 

1942. 4. 2. 도쿄 릿쿄(立敎)대학 문학부 영문과 선과에 입학하다. 송몽규는 일본 교토 제국대학 서양사학과에 입학하다.

 

1942. 4~6. 「쉽게 씌어진 詩」등 이 때 쓴 시 5편을 서울의 친구에게 보내다. 이 시 5편은 오늘날 볼 수 있는 윤동주의 마지막 작품이 되다. 여름방학에 마지막으로 고향에 다녀가다. 동생들에게 "우리말 인쇄물이 앞으로 사라질 것이니 무엇이나 악보까지라도 사서 모으라"고 당부하다.

 

1942. 10. 1. 일본 교토 도시샤(同志社)대학 영문학과 선과에 편입하다.

 

1943. 7. 10. 송몽규가 일본 교토 시모가모 경찰서에 독립운동 혐의로 검거되다.

 

1943. 7. 14. 고향에 가려고 준비하던 윤동주도 송몽규와 같은 혐의로 검거되고 많은 책과 작품, 일기가 압수되다. 당숙 윤영춘(가수 윤형주 아버지)이 일본 교토로 윤동주를 면회하러 가서 윤동주가 일본 형사와 대좌하여 우리말 작품과 일기를 본로 번역하고 있는 것을 목격하다.

 

1944. 3. 31. 일본 교토 지방재판소에서 '독립 운동'이라는 죄목으로 2년형을 언도 받다.

 

1944. 4. 13. 송몽규 역시 같은 죄목으로 2년형 언도 받고 윤동주와 송몽규는 이후 일본 큐슈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되다.

 

1945. 2. 16. 일본 큐슈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사망하다. 이어, 3월에 송몽규도 사망하다.

덧붙임 : 우리 한민족 앞에 광복 반세기라는 역사의 장이 펼쳐진 지금, 지금 우리는 어디에 서 있는가?를 생각해 본다. 분명한 것은 우리 선조들의 꿈과 후손들의 소망이 담긴 민족의 꿈을 활짝 펼칠 때가 바야흐로 도래했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조국을 세계의 중심에 우뚝 서는 '일류국가' 로 만드는 민족사적 소명이 이제 우리에게는 남아 있다. 이런 측면에서, 재외 한민족 일원으로서 참으로 모국어의 본향인 대한민국이 건재하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저 목이 멘다.

대한민국의 각 분야가 더욱 선진화하고 세계화 하기를, 대한민국이 진정한 문화국가의 반열에 올라서기를, 인류와 세계의 발전에 더욱 기여하는 한민족이 되기를 이 기회를 빌려 간절히 기원해 본다.

알렉스 강 몽골 특파원
alex1210@epost.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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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tius, Altius, Fortius (Faster, Higher, Stronger)
<편집자주> 국제 회의 동시 통역사인 알렉스 강 기자는 한-몽골 수교 초창기에 몽골에 입국했으며, 현재 몽골인문대학교(UHM) 한국학과 교수로서 몽골 현지 대학 강단에서 한-몽골 관계 증진의 주역이 될 몽골 꿈나무들을 길러내는 한편, KBS 라디오 몽골 주재 해외 통신원으로서 각종 프로그램을 통해 지구촌에 몽골 현지 소식을 전하고 있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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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4/08/07 [18:47]  최종편집: ⓒ 2018break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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