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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백산》문학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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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혁: 늦봄, 계단을 오르다(만필,련재1)
2019년 07월 12일 19시 06분  조회:298  추천:0  작성자: 문학닷컴

늦봄, 계단을 오르다

-2017 《민족문학》 시상식 수감록

김혁

 

중경을 다녀왔다.

2017 《민족문학》 문학상 시상식 참가차 아름다운 산간도시를 다녀온 것이다.  

행차를 앞두고 도춘한倒春寒이런듯 연변에는 아닌 폭설이 내려 비행기가 지연되는 등 소동을 빚었다.

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다달은 3월의 중경에는 봄이 먼저 와있었다.

청도를 경유, 무려 6시간의 긴 비행 끝에 중경에 다달았다. 려객기 탑승용 계단을 내리기 바쁘게 더위가 확 덮쳐왔다. 

떠날 때 뉴스에 귀를 기울이니 올해 중경에는 30여일 앞당겨 봄이 찾아왔다고 했다. 올해 중경은 63년 이래 지속시간이 두번째로 짧은 겨울이였다고 한다. 그 봄도 이제는 막 가려 하고 있었다. 늦봄의 중경이였다. 날씨는 거의 초여름 날씨에 가까웠다. 

무려 20도를 넘나드는 기온의 차이 때문에 공항 터미널에서 입고 갔던 무거운 털세타를 벗어야 했다. 칙칙한 옷가지를 벗어버리고 준비해갔던 봄옷으로 일습을 개비하고 나니 걸음들이 날듯이 가벼웠다. 

연도에서 본 벤자멘나무에도 진하게 봄물이 들어있었다. 

 

달빛 어린 삼협의 물을 차지하고 

구름 밖의 봄을 가만히 훔치네

清占月中三峡水,丽偷云外十洲春

     

당나라 재상 심빈沈彬의 시 한구절을 련상케 하는 풍경이 려로에 지친 마음들에 스며들었다. 

그야말로 추운 변강의 오지에서 온 흥감스러운 나그네가 봄 한자락을 훔쳐가진듯한 향그러운 마음이였다. 

 

‘나루터’의 축제

시상식은 3월 2일, 중경시 강진호텔에서 열렸다.

강진구는 중경시의 맨 서남쪽에 위치해있었는데 옛날부터 장강 웃쪽의 나루터로 이름이 있었다. 

이곳은 지금도 장강의 가장 중요한 항운구역과 물류의 집산지일뿐더러 곡창과 어미지향鱼米之乡으로도 널리 알려진 천혜의 땅이였다. 

민족문학잡지사, 중경시 강진江津구 인민정부, 중경시작가협회의 공동 주최로 된 시상식에 중국작가협회 명예부주석 단증, 중국소수민족 작가학회 상무부회장 엽매, 《민족문학》 주필 석일녕, 중경시작가협회 당조서기 신화 등 귀빈들과 수상작가들, 매체 기자 등 도합 80여명이 참가했다. 

조선족 작가들로는 수상자들인 나와 조광명, 리홍규, 강정숙 그리고 연변작가협회 상무부주석 정봉숙이 참석했다. 

1981년에 창간된 《민족문학》은 56개 민족을 위한 순수 문학지로서 현재 한어, 몽골어, 장어, 위글어, 까자흐어, 조선어 등 6개의 민족 언어로 꾸려지고 있다. 그 와중에 《민족문학》 문학상이 2010년에 발족되여 해마다 시상하고 있으며 올해로 제8회를 맞았다. 

19명 심사위원들의 진지한 심사를 거쳐 23명의 작가들이 창작상과 번역상을 수상했다. 그 가운데 조선족 작품으로는 김혁의 단편소설 〈피에 누아르의 춤〉, 조광명의 수필 〈상처 입은 단풍잎과 길게 키스하리라〉 그리고 리홍규, 강정숙의 번역작품이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몽골족, 장족, 까자흐족, 조선족 작가들이 차례로 시상대에 올라 수상했다. 소수민족 작가들은 무더운 날씨에도 민족복장을 고수하고 있었다. 

한쪽 어깨를 드러낸 장포를 벗지 않았고 머리에 두른 히잡을 벗지 않고 있었다. 그 이색적인 민족복장 차림이 시상식에 풍경을 돋구어주었다.

나는 불과 얼마 전 일껏 맞추어놓은 우리의 민족복장을 입고 오지 않은 것이 못내 후회되기도 했다. 

조선족 작가들을 대표하여 내가 〈빛나는 비단결 같은 우리의 문학灿烂如锦的民族文学〉이라는 제목의 수상소감을 발표했다. 

천애지각에서 모여온 여러 민족, 여러 어종의 소수민족 수상자들과 더불어 시상대에 올라 어눌한 중국어로 감수를 토파하며 나는 저으기 감개에 빠져들었다. 

“한 민족의 문학은 그 민족의 구성원들이 오랜 시간 동안의 탐색과 분투가 만들어낸 결과입니다. 이로써 그 문학은 민족의 휘황한 성과 중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문학은 한 민족이 생존하고 존속해나가는 데서의 령혼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물과 불의 세례를 거친 조선족 문학은 독특한 지연地缘과 문화적 특성으로 말미암아 한국, 조선 그리고 기타 소수민족 문학과는 동질성을 갖고 있으면서도 판다른 자기만의 특성을 갖추었으며 중화문화의 토양 속에 참신한 봉오리를 맺었고 개화기를 맞고 있습니다. 

글로벌 일체화의 현대화된 언어환경 속에서 우리는 새로운 조류, 새로운 사유에 적응해야 하며 우리 민족의 근로함과 견인불발의 정신을 그 속에 투영시켜야 합니다. 하여야만 중화민족 대가정 속의 우수한 일원으로 그리고 나아가 중국문단, 세계문단에서 일석의 자리를 차지하고 그 존재를 빛낼 수 있을 것입니다.” 

 

수상소감에서 나는 고향의 성산-장백산을 떠올렸고 우리의 꽃-진달래를 떠올렸고 우리의 강-두만강을 떠올렸다. 또한 그 산자락 강기슭의 흰옷 입은 사람들을 떠올렸다.   

여러 소수민족 작가들을 향해 우리의 ‘시성’ 윤동주를 알렸고 우리 문단의 거목 김학철을 알렸고 65성상을 기록하고 있는 우리의 문학지 《연변문학》을 알렸다. 

과경해온 백의의 족속으로서 척박한 땅의 개척과 일제와의 항쟁 속에 점차 생성된 우리 문학의 ‘원류源流’에 대해 소개했다. 

 

수상소식을 듣고 나는 수상작가들의 주요 작품들을 다운해놓았고 서재에서, 비행기 우에서, 터미널에서 새삼스럽게 다시 읽어보았다. 

역시 우리 조선족 작가들처럼 민족과 문학의 생존을 위해 고전하고 있는 여러 소수민족 형제작가들의 호흡과 맥박을 작품들에서 더듬어보았다. 

 

84세 고령의 몽골족 작가 나·세시아라투의 수상 평론 〈자치구 설립 초기의 문학사업 회억록〉은 그의 구리빛 피부 만큼이나 중후한 빛을 발하는 작품이였다.

작품은 지난해 자치구 설립 70주년을 맞아 내몽골자치구 문학인들의 문학려정을 총결한 기록문학이였다. 

사료적 가치로 가득한 작품은 역시 지난해 연변조선족자치주 설립 65주년을 맞은 우리에게 커다란 동질감을 불러일으켰다. 

작품은 견증자로서 본인이 피부로 겪은 사실들을 통해 개체의 기억과 문학사의 상호 인증을 도출해냈으며 소수민족 문학의 발전려정에 대해 나름의 정감으로 다듬어내여 묘술하였다. 

 

장족 녀류시인 완머춰의 〈둥근 광환〉은 시의 격률과 생기 있는 절주감 사이의 장력张力으로  미학적 함의를 둥글게 보여준 작품으로 평가받았다. 

완머춰는 장족 가운데 몇명 안되는 녀류시인 중에서 뛰여난 한 시인이라고 한다. 

 

번역작 〈초원에 부는 바람〉으로 수상한 나이만 싸판은 까자흐족의 유명한 번역가, 언어학가라고 했다. 그는 《까자흐어 한어대사전》의 편역에도 참가했고 중외 문학명작도 까자흐어로 여러권 번역해냈다고 한다. 그는 “창조적인 언어 그리고 적절한 언어로 원작의 예술풍모를 살려냈다”는 평을 들었다. 

 

조선족 작가 김혁의 단편소설 〈피에 누아르의 춤〉은 그가 다년래 현실 속에 살아있는 ‘민족적 기억’의 재현에 주력하고 있는 작품 중의 한편이다. 그는 출국, 리산가족에 관한 계렬소설을 잇달아 발표, 글로벌화, 도시화의 진척과정에서 엇갈린 삶과 운명을 화려한 문체, 강한 울림으로 보여주었다. 

금번 수상작은 이 계렬 중의 한부로서 독특한 시각과 철학적인 사고로 이채로운 수작을 펼쳐보이고 있다.

 

조광명의 수상 수필 〈상처 입은 단풍잎과 길게 키스하리라〉는 감각적인 체험과 정감체험에 머물지 않고 이를 심미체험으로 승화시켜 수필을 ‘정감과 상처’를 다룬 일반적인 미문에서 탈바꿈시켰고 신선한 느낌을 안겨주었다. 

  수상작들을 살펴보면 우리의 소수민족 작가들이 이채롭고 다원화된 서술시각으로 약속이나 한듯이 력사와 시대의 소용돌이 속 소수민족의 운명이라는 공통된 주제를 작품 속에 아우르고 있음을 보아낼 수 있었다. 

또한 변혁기 속에 맞닥뜨린 가지가지 현실의 시련들을 헤쳐나가는 현시대 소수민족 인물들의 독특한 형상들을 부각해내고 있었다. 

 

여러 소수민족 작가들의 수작을 읽으면서 한낱 자신감에도 불과하고 날로 부박함의 한계를 보이고 있는 우리의 문학창작에서 새로운 글쓰기 전략이 필요함을 절감하였다. 

여타 소수민족 작가들의 작품을 보면 그들이 착복한 복장 만큼이나 자신만의 특색을 오롯이 간주하고 있었다. 그들의 작품에서는 말젖냄새, 쑤유차酥油茶냄새를 강렬하게 체취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 특색의 문학에 대한 고민을 거듭해야 한다. 

이른바 우리 특색의 문학이란 곧 지역문학사의 특수성과 독자성을 어떻게 간직할 것인가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그 지역특수성과 독자성을 밝혀내지 못하게 되면 변별성을 잃게 되고 반복적인 소재로 말미암아 우리의 문학은 매력과 탄력성을 잃게 될 수 밖에 없다. 그러면 주류문단과의 접목이며 세계로의 진출은 지상담론에 그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 문학의 특수성과 독자성을 통해서 조선족 문학의 본연의 모습을 우리의 공동체를 바탕으로 이야기해낼 수 있어야 하며 그로써 자가自家의 독특한 경지를 새로 개척해야 한다.

 따라서 우리 말 작품 번역의 진부함에 관해 감히 말해보고저 한다. 

글로벌화 시대, 번역의 중요성은 더 운운할 나위가 없이 중요하다. 우리 문학이 “중국 문단과 접목하고 세계로 나가자”고 호소를 거듭한 지도 수십년째 잘된다. ‘쌍수리개 전략’이요 하고 거창한 이름을 달고 진척해보았지만 그 효과는 미비하기 짝이 없다.

우리의 훌륭한 작가들과 그들의 작품이 전면적으로, 체계적으로 번역 소개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여러해째 번역이 몇몇 같은 사람에만 국한적으로 그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어 우리 문학의 최고봉인 윤동주나 김학철 같은 별과 거목들의 보귀한 유산인 주옥 같은 작품들에 대한 번역조차 빈약하다. 타민족은 이들이 누군지조차 잘 모른다.   

번역인재는 타지로 대도시로 빠지고 있고 번역의 후배양성도 미흡하다. 

번역가들은 생계 때문에 한국의 작품 그리고 상업성에 치우친 작품을 번역하는 데 많은 필봉을 바친다. 

조선족 번역가가 고향을 떠나 대도시로 나가서 타민족의 민족영웅을 소재로 한 대형 프로젝트의 기획자로 활약하는 것을 보면서 큰 충격을 받은 적 있다. 

또 《민족문학》과 같은 소수민족 작가들을 전문 소개하는 권위 문학지를 받아들고 목록을 펼치면 조선족 작가가 가장 적고 때론 지어 작품 한편도 수록돼있지 않을 때면 그야말로 얼굴이 붉어진다.

 

우리 작가들 중에 한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이 몇명 안된다. 

근년래 우리 문학사에서는 한어로 전문 창작하고 있는 김인순, 전용선, 김창국 등을 문학사에 보충해넣음으로써 이 면에서의 공백의 유감을 무마하려 하고 있다. 

하지만 중국 문단에서는 활약상을 보이고 있다지만 이들의 작품 중 민족제재는 거의 비여있으며 설령 한두편 써낸 작품이라도 우리 민족의 호흡과 결이 보이지 않는다. 

이로써 번역에 대한 중시도를 다시금 더 강도 있게 호소하고 관련 작업에 착수해야 한다고 본다.

소수민족 문학 치고는 비교적 많은 문학상을 갖고 있는 우리의 허다한 작품상 중에 번역상은 없다. 우리의 문학지들은 더불어 코너를 신설하여 조선족  번역작품도 중국어로, 외래어로 싣고 소개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좋은 작가, 좋은 작품을 선정, 기획하는 프로젝트를 만들어 상급과 기업가들의 호응과 찬조를 얻어내야 한다. 이 면에서 연변의 가무와 축구는 좋은 본을 보여주고 있다.

 

어느 작가는 “번역은 나를 국경 밖으로 데리고 가는 우방과도 같다”고 했다. 번역이 없다면 한 어종의 문학이 다른 어종의 나라로 뻗어나갈 방법이 없다. 우리 작가들의 작품이 주류문단과 접목하고 세계로 나가는 지름길은 좋은 번역가를 만나고 그에 따른 마케팅법을 기획하는 것이다.

일전 FTA, 즉 자유무역협정에서는 “수출입 장벽을 낮춰 경제령토를 넓힌다”는 것을 슬로건처럼 내걸었다.  

이 슬로건처럼 외국과 타민족과의 문학이 우리에게 많이 소개될뿐더러 우리의 좋은 작품이 더 많이 더 수준 높게 번역되여 널리 읽힐수록 우리 작가들에게는 높기만 한 언어 간의 장벽이 낮아지며 문학, 문화의 령토가 더욱더 넓어질 것이다.

시상식 기간 그리고 외성의 문학행사들에서 시종 느끼는 바이지만 여러 소수민족 작가들의 한어 구사수준이 조선족 작가들보다는 거개가 월등했다. 

우리는 중국의 최변방에서 일제식민지의 지배와 민족분단의 경험을 지닌 과경민족으로서 소수언어 사용자라는 사실을 랭정하게 의식하지 않고서는 주류문단과의 접목과 세계문학에로의 진출 가능성을 검토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민족적 독자성을 지니면서 주류문단과 세계문학이라는 지평으로 시야를 확장해야만 우리 문학의 살길이 있다.

거대한 주류문단의 중심과 질서를 정시하고 그 중심부에 우리의 문학을 진입시키는 노력을 가하면서 중심부와 주변부 간의 격차와 차별을 극복하는 노력을 장기적으로 기울여야 우리 문학이 진정 구태를 벗고 더 넓은 세상에 선보일 수 있을 것이다.

어눌하게나마 한어로 여러 작가들과 소통을 가지며 나는 좁은 울타리에서의 일탈을 꾀하며 주류문단과의 접목과 개화를 꿈꾸는 우리 작가와 번역가들의 선전善战을 빌어보았다.

 

돌에 새긴 사랑의 판타지

시상식이 끝난 뒤의 여가에 여러 작가들은 강진구의 풍경구들을 찾아떠났다. 

천년의 오래된 산간마을 중산진中山镇으로 간다고 했다. 그 곳으로 가면 ‘타이타닉호’ 이야기 같은 것은 울고 갈 사랑이야기가 깃들어있는 곳이 있다고 짙은 사천억양으로 구사하는 가이드 아가씨가 알려주었다. 

강진구에서 뻐스를 타고 남으로 30여리 가량 달리고 나니 험준한 산세의 산이 나타났다. 반백파半百破, 해발 1500메터 되는 산이라고 가이드가 알려주었다. 

산중턱의 암바위를 깎아만든 표지석이 멀리서도 한눈에 보였다. 바위에는 ‘사랑의 하늘계단’이라고 새겨져있었다.

산자락에 걸린 구름다리를 건들건들 건느니 강기슭에 세워진 사람 키 높이의 동상이 맨먼저 맞아준다. 

안존한 얼굴의 늙은 량주가 머리에 땀수건을 두르고 죽장竹杖을 짚고 어깨 겯고 서있는 오목빛 동상이였다. 

달콤한 사랑이야기를 기대하고 있는 유람객들 앞에 막상 나타난 가이드는 달콤함과는 거리가 먼 석쉼한 소리를 뿜는 50대의 장년이였다. 가이드 아저씨가 동상을 가리키며 그들이 바로 이곳을 세상에 알린 전설 같은 사랑의 주인공이라고 말했다. 

동상의 뒤편으로 산으로 오르는 돌계단이 뻗어있었다. 

이끼 돋은 돌계단 아래로 그야말로 말간 시내물이 도란도란 흐르고 있었다. 물 속에 잠긴 돌이며 풀, 그 사이를 누비는 물방개까지 오목렌즈처럼 환히 보이는 시내물은 문자 그대로 청정함 그 자체였다.

약수병을 지니고 왔음에도 모두들은 손으로 옴켜서 청정의 물을 마셨다. 물에 손을 담그니 물이 뼈속을 적셨다. 

과즙같이 청량한 산바람이 불어왔다. 시원한 바람에 들뜬 마음들을 식히며 가이드의 뒤를 따라 산길로 올랐다.

이름 모를 산새들의 지저귐 속에 아저씨의 석쉼한 목소리로 자아올리는 사랑이야기에 간간히 귀를 기울이며 허위단심 돌계단을 올랐다. 

 

아저씨의 이야기는 2001년으로 거슬러올라갔다. 

그 해의 늦은 여름 중경의 유백구俞白区의 등산탐험가들이 이 일대의 원시산림으로 탐험을 떠났다. 

산첩첩 물겹겹의 심심산곡이라 이틀 낮 이틀 밤을 강행군해도 사람 하나 만나지 못했다. 

그러다 탐험대는 그만 길을 잃고 말았다. 어떻게 먼길을 돌아가야 하는지 한숨을 쉬며 고민하고 있는데 문뜩 기적과 같은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험준한 산의 내리막길 한켠으로 돌계단이 놓여져있었던 것이다. 

뜻밖에도 그것은 인공의 흔적이 보이는 돌계단이였다. 

돌계단은 일매지게 뻗어있었다. 

한계단 한계단 산정상까지 이어져있었다. 

계단을 타고 산정상까지 오른 탐험대는 인적을 발견했다. 놀라웁게도 산정상에는 초옥이 있었고 그 초옥에 늙은 량주가 살고 있었다.

전문 탐험대조차 오르기 힘들어하는 이 산꼭대기에 사람이 살고 있다니?

탐험대가 량주의 사진을 찍으려 하자 할머니는 깜짝 놀라하며 얼른 할아버지 뒤로 가서 숨었다. 소스라치게 놀라는 표정을 보아 아마 카메라를 처음 보는듯했다. 

이윽고 할아버지가 조심스럽게 탐험대 대원에게 물었다. 

“모주석께서는 옥체건강하신지요? ”

수십년 전에 이미 고인이 된 모택동주석의 안부를 묻다니?

탐험대 대원들은 서로 마주보며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들이 이 산꼭대기에서 숨어산 지가 벌써 50여년이 넘는다고 했다.

할아버지 이름은 류국강刘国江이며 70여세이고 할머니 이름은 서조청徐朝清80세라고 했다. 부부라고 했는데 할머니가 할아버지보다 10년이나 년상이다. 

 

지난 1956년, 중산진 고탄촌高滩村에 살던 20살 청년 류국강은 짝사랑에 빠졌다. 그것도 10살 년상에 아이가 넷이나 딸린 과부 서조청에게 말이다. 

이들의 첫 만남은 류국강이 여섯살이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여섯살 꼬마 류국강의 앞이가 빠진 게 그들 만남의 첫 계기였다. 시골에는 새색시가 이 빠진 자리를 만져주면 새 치아가 잘 나온다는 풍속이 있었다. 

서조청이 이 마을로 시집오던 날, 어린 류국강은 큰엄마의 손에 딸려 신부를 처음 보았다. 

새색시의 꽃가마가 류국강네 집 앞을 지날 때였다. 

큰엄마는 류국강의 손을 잡고 꽃가마를 가로막으며 새색시 서조청더러 아이의 이 빠진 이몸을 한번 쓰다듬어달라고 청을 들었다. 

새댁이 이발 빠진 곳에 손가락을 넣는 순간 류국강은 놀라서 서조청의 손가락을 깨물었다. 새색시도 깜짝 놀라했고 사람들은 재미나게 지켜보며 웃음보를 터뜨렸다. 

그렇게 꼬마는 처음 아름다운 새댁 서조청을 알게 되였다. 

그 후로 류국강은 서조청을 고모라 불렀다.  

그렇게 10년이 흘렀다. 남편은 괴질로 세상을 떠나고 서조청은 홀로 네명이나 되는 아이를 키우는 과부가 되였다. 

동시에 류국강은 어엿한 청년이 되였고 청상과부가 되여 평소 온갖 고초를 겪고 있는 고모를 때때로 돌봐주었다. 그러는 사이 류국강은 자신보다 10살 많은 과부를 짝사랑하기 시작했다.

류국강은 4년 동안 줄곧 그녀네 집 땔나무를 해주고 물을 길어주는 등 가사일을 도우며 자신의 사랑을 고백했고 서조청도 결국 그의 마음에 감복해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하지만 당시의 통념으로는 두 사람의 사랑은 가족, 주변 사람들에게 용인될 수도 허락받을 수도 없었다. 구습과 보수가 뼈골까지 스민 이 작은 마을에서 류국강이 고모와 사랑을 한다는 소문은 그야말로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주민들의 곱지 않은 시선과 갖은 비난을 견디다 못한 두 사람은 사랑의 도피를 마음먹었다. 

드디여 1956년 8월, 20살 류국강刘国江과 30살 서조청은 야밤도주를 하였다. 이후로 중산진 사람들은 더는 두 사람의 소식을 알 수가 없었다.

마을사람들의 쑥덕거리는 소리와 따가운 시선을 피해 두 사람은 마을을 떠나 깊은 산속으로 들어갔고 스스로 세상과 담을 쌓았다. 

부부가 네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정착한 곳은 마을에서 산길로 다섯시간 여를 걸어들어간 심산오지였다. 인적이라곤 도무지 찾아볼 수 없고 한낮에도 산짐승이 돌아다니는 그런 곳이였다.

처음에는 동굴에 들었고 산과 들 이곳저곳에서 산나물들을 캐여 끓여먹었다.

이제 그들의 사랑은 사람을 상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을 상대로 해야 했고 스스로 선택한 시련을 극복해야만 했다. 

야반도주를 할 때, 서조청이 농사를 지을 각종 알곡과 채소 씨앗을 챙겨나왔다. 류국강부부는 조악한 농기구로 땅을 일궈 먹을거리를 마련했다. 

기거할 집도 지었는데 다 짓기까지는 2년이란 품이 들었다.

또 화전을 일구었고 오리와 돼지 그리고 개도 키웠다. 그리고 양봉도 했다.

두 사람이 처음 산으로 올 때는 서조청의 아이들 4명을 데려와 모두 6명이였지만 산에 오고난 뒤 또 류국강의 아이 넷을 낳았다. 그중 아이 하나가 요절했지만 자식이 7명이 되였다. 

이 아이들을 먹여살리기 위해 두 사람은 손톱이 벗겨지고 등골이 휘여지게 밤낮으로 일했다. 

그러던 류국강에게는 절벽을 타고 오르내리는 길 아닌 산길이 늘 걱정이였다.  안해와 아이들이 이동할 때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그는 산정으로 오르는 계단을 만들기로 마음먹었다.

고된 농사일의 짬을 내여 류씨는 수직에 가까운 바위 절벽에다 망치와 정으로 돌을 쪼아 계단을 만들기 시작했다. 원석을 짐져 날라서는 손에 물집이 지고 손톱이 닳아떨어지게 망치질을 했다. 계단 옆에 작은 구멍까지 따로 내여 손으로 중심을 잡을 수 있도록 세심하게 배려했다.

아이들은 어렸고 서조청도 밭일 하고 밥 짓고 아이들을 돌보느라 시간을 낼 수 없어 계단을 쌓는 작업은 류국강 혼자 할 수 밖에 없었다. 

검은 머리의 젊은이가 백발의 로인이 될 때까지… 그 무슨 신자가 사원을 짓듯이 경건한 마음으로 한계단 한계단 쌓아올렸다.

그동안 20여개의 정, 40여개의 망치가 마모되였다고 한다.

그렇게 50년간 오로지 망치와 정 그리고 곡괭이로 그가 쌓아올린 돌계단이 무려 6000계단이 되였다. 가히 천국의 계단이라 할 만하였다.

가난 뿐인 두 사람에게는 반짝거리는 결혼반지도, 화려한 결혼식도 없었다. 그러나 남편 류씨는 사랑하는 녀인을 위해 ‘사랑의 징표’를 만들어 보였다.  

세상에 둘도 없는 ‘사랑의 하늘계단爱情天梯’을 쌓아올렸다. 

그는 장장 50년에 걸쳐 6000개의 돌계단에 돋을새김으로 새겨 사랑의 힘이란 뭔지를 증명했다.

 

이들 부부의 사연은 당시 언론을 통해 알려지면서 해일과도 같은 큰 여운을 일으켰다. 

두 사람은 ‘2007년 중경을 감동시킨 인물’에 선정되였다. 

이들의 이야기는 싱가포르의 국영방송에 의해 《사랑의 하늘계단》이란 제목의 다큐멘터리 영화로도 제작되였다.   

 

나이가 들면서 두 사람은 모두 상대방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길 바랐다. 남아있는 사람이 너무나 고통스러울 것을 잘 알기 때문에… 그들은 오랜 시간을 가지고 자신들의 사후에 대해 의논했다. 

둘 중의 하나가 먼저 세상을 뜨면 그를 돌계단 옆에 묻어주고 남은 사람은 하산하여 자식들과 같이 생활하다가 그마저 세상을 뜨면 다시 돌계단 옆에 둘을 합장하게 해달라는 유언을 작성했다. 

그러다 지난 2007년 류국강이 로환으로 애정 어린 세상을 먼저 떠나고 말았다.  

류국강은 궤짝 우에 고히 얹어두었던 그림 한폭을 가슴에 꼭 그러안고 세상을 떴다고 한다. 그 그림은 두 사람의 사랑이야기에 감동된 나머지 일본에서 한 유명 화가가 이 산곡에까지 찾아와 그려준 두 사람의 젊은 모습의 초상이였다. 결혼식도 못 치르고 사진도 못 남겼던 그들 부부는 젊은 모습이 재현된 이 그림을 애지중지했다고 한다. 

장례날을 정하고 출빈을 앞두고 서조청은 꼬박 6일간을 남편의 시신을 지켰다고 한다. 

드디여 출빈하던 날, 서조청은 관을 어루쓸며 혼자말처럼 되뇌였다.

“이보시게 ‘총각’.”

‘총각’은 서조청이 자신보다 열살이나 손아래였던 남편에 대한 애칭이였다. 

“당신은 일 밖에 몰랐지요. ‘총각’, 낮에는 돌층계를 만들었고 밤이면 원숭이가 헛간의 쌀을 도적질할가 잠을 못 잤지요. 어느 한번 독수리가 닭알을 물어가자 당신은 그렇게 화를 냈지요. 당신은 그 닭알로 내게 맛있는 찬을 만들어주려 했던 거죠 ‘총각’.”

전국 각지에서 모여온 수백명이 그의 장례식에 참가했고 사랑의 계단을 찾아 절절히 애도를 표했다. 

출빈이 시작되였다. 상복을 차려입은 아들딸들이 곡을 하며 앞섰고 상여군들이 관을 지고 뒤따랐고 그 뒤를 악대가 슬픈 주악을 하며 6000개의 돌계단을 내렸다. 

고령 때문에 산을 내릴 수 없었던 서조청은 산꼭대기에 홀로 서서 한걸음 한걸음 멀어져가는 상빈대오를 굽어보며 바랬다. 그러던 서조청이 목메인 소리로 웨쳤다.

“잘 가시게 ‘총각’.”

본인의 유언 대로 류국강은 산자락 돌계단 옆의 수림 속에 안장되였다.

계단을 오르내릴 때마다 자신의 발밑에서 사랑을 느껴왔을 서조청도 남편을 그리워하다가 2012년 11월 4일, ‘천국의 계단’에 올랐다. 돌계단 곁에, 남편 류국강의 묘지 곁에 묻혔다.

두 로인의 작고소식을 들은 네티즌들은 “너무 슬프다”, “저세상에서도 행복하길 바란다”, “당신 덕분에 세상에 진정한 사랑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당신들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였다”, “사랑의 진정한 의미를 알려줘 고맙다”며 그녀의 죽음을 애도했다.

사랑의 주인공들은 갔지만 이 ‘세기의 사랑’이 주는 감동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장장 반세기라는 년륜으로 두 사람의 사랑이 각인된 이곳은 지금 진강구의 중요한 유람경관으로 되였고 전국 각지에서 모여온 련인들은 50여년 전의 러브 스토리에 흠뻑 젖어들고 있다.

 지금 이들의 사랑이야기는 ‘량산백과 축영대’에 비견될 만한 ‘중국 10대 사랑 이야기’의 하나로도 불린다.

 

고금으로부터 해내외에 이르기까지 사랑은 문학의 영원한 주제가 되여왔다. 

그렇게 많은 문인, 명사名士들이 필봉으로 사랑이란 불멸의 탑을 쌓아올렸음에도 우리의 제재 령역에서 사랑의 탑은 무너질 줄 모르고 그냥 솟아오르고 있다.

사랑은 시간과 공간, 문화를 초월하는 인간의 보편적 욕망을 담고 있다. 이렇게 인류 공동의 보편성을 보여주는 사랑은 한편의 아름다운 판타지에 다름 아니다. 

사랑의 계단을 쌓아올린 류국강, 서조청 두 사람의 사랑도 마치 아름다운 고전 동화 속에서나 볼 법한 판타지가 아니인가!

 

하지만 어쩌구려 요즘 세월은 아름다운 사랑이라는 판타지마저 물질에 둔화되여 시시껄렁한 이야기로 전락되거나 상업주의에 기대인 흔하디 흔한 싸구려투성이로 되여버렸다.

사랑이 금전으로 쉽게 환산되고 있는 요즘, 또 일회용 속찬 같이 흔해빠진 사랑이 더는 향기가 아니라 쉬쉬한 냄새를 풍기는 요즘, ‘사랑의 하늘계단’ 이 이야기가 우리의 메마른 감성을 성찰하는 기회가 됐으면 좋을듯하다.

 

어떻게 그 높은 계단을 오르고 내렸던지 나는 몰랐다.

산길에서 들춤질하는 뻐스에서 나는 주먹 만한 갱엿이라도 삼킨듯 목구멍 가득한 감동을 애써 삭이고 있었다. 가실 줄 모르는 여운에 떠밀려 나는 차창으로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안존한 두 얼굴의 동상은 정오의 빛 아래 더더욱 빛나오르고 있었다. 

어깨를 맞대이고 은애의 미소를 머금은 두 사람의 머리 우로 빛은 성수처럼 쏟아져내리고 있었다. 

그 뒤로 돌계단이 전설마냥 멀리 뻗어있었다. 

(계속 이음)

출처:<장백산>2018 제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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