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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해연: 리상각, 그는 누구인가(평론)
2019년 07월 15일 09시 50분  조회:477  추천:0  작성자: 문학닷컴

리상각, 그는 누구인가

리해연

 

 

들어가는 말

리상각(李相珏 1936-2018)은 해방 후 중국조선족사회의 전개와 변화과정을 온몸으로 체험하고 그것을 작품으로 승화시키면서 각고의 노력으로 끊임없이 창작활동을 진행한 시인으로서 중국 조선족 시문학 발전에 큰 기여를 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30여년간 문학잡지 편집사업에 종사하면서 민족문학의 발전을 위해 청춘을 불태웠고 동시에 후대양성을 위한 사업에도 열정적으로 참여하였다. 근 반세기 동안 시인으로서, 문학잡지 편집일군으로서 많은 업적을 쌓아온 리상각시인은 2018년 8월 17일 생을 마감하였다. 

본고는 리상각시인이 걸어왔던 발자취에 따라 그의 삶을 돌아보고 그 속에 내포된 시인의 인생과 문학에 대한 태도를 두루 살펴보는 데 목적을 두었다. 

 

1. 후대양성과 민족문학의 

발전을 위한 발걸음

 

리상각은 1936년 조선 강원도 양구 해안면 만대리(조선전쟁 전에는 북에 속했고 전쟁 후에는 분계선의 변동으로 남에 속하게 됨)에서 태여났다. 그의 아명은 리상봉으로 리백설이라는 필명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1938년, 세살 된 리상각은 부모님의 등에 업혀 두만강을 건넜고 중국 길림성 도문图们을 거쳐 흑룡강성 목단강 마도석磨刀石에 정착하였다. “만주에 가서 3년 동안 농사를 지어 부자가 되여 고향으로 돌아가자”던 리상각 일가의 꿈은 년년이 흉년이고 재난의 련속이라 환향은커녕 목숨을 부지하기도 어려웠다. 극심한 생활고로 리상각의 부모는 중쏘中苏변경인 부금현富锦县 대면성촌으로 거처를 옮겨야만 했고 친척 할머니들과 고모는 다시 강원도로 돌아갔다. 1945년 고향땅은 광복을 맞이하였으나 리상각 일가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했고 혈육들과 영원히 생리별을 하였다. 

리상각은 1943년 1월, 흑룡강성 부금현 대면성소학교에, 1949년 1월, 밀산密山중학교에 입학을 하였고 그 곳에서 스승 한창립선생님을 만나게 되였다.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슬하에서 문학에 흥취를 가졌던 그는 스승의 지도하에 문학창작 능력을 제고할 수 있었는데 1950년 3월에는 그가 창작한 서사시 〈백설〉과 우화 〈메기와 붕어〉가 중학교 작문 1등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1951년 흑룡강성 상지尚志에 있는 사범학교에 입학한 그는 교내의 등사본 잡지인 《동학》의 주필을 담당하면서 잡지를 3기까지 출간했다. 어린 나이에 부모가 그립고 고향마을이 그리웠던 리상각은 편지를 써서 고향 친구들에게 띄우기도 했고 방학이면 집으로 돌아갈 차비가 없어 학교에 남아있으면서 도서관에서 문학서적을 빌려보기도 했다. 겨울방학 동안 50권의 문학서적을 읽을 정도로 문학에 흥취를 갖고 있던 그는 오래전부터 시인이 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졸업 후인 1954년 8월 리상각은 벌리현勃利县조선족중학교에서 교편을 잡기 시작했고 교육사업에 종사하면서도 창작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1956년에는 처녀작 시 〈아침〉을 《연변문예》에 발표하였고 1957년 7월에는 시 〈수수밭에서〉를 사천성의 《별星星诗刊》 잡지에 한문으로 발표하였다. 같은 해 8월 연변대학교 조문학부에 입학한 리상각은 시문학단체인 ‘시와 랑송’이라는 써클을 조직하였고 등사본 잡지인 《대학생》의 주필을 담당하면서 잡지를 출간했다. 

1961년 대학교를 졸업한 뒤 리상각은 《연변문학》 월간지의 편집부에 취직하였고 1981년부터 16년 동안 《연변문학》의 총편집 직무를 맡게 되였으며 1996년에는 36년간의 근무생활을 끝마치고 정년퇴직을 하였다. 격변하는 시대 속에서도 문학에 대한 애착과 열정으로 들끓었던 리상각은 30여년을 하루와 같이 후대양성과 민족문학 발전을 위해 청춘을 불태웠다.  

열정의 사나이였던 리상각은 깊은 산골과 농촌에서 농사일을 하면서 문학창작을 진행하던 작가들을 발굴하기 위해서 동분서주했다. 1962년 이른봄, 그는 시공부를 착실하게 하던 허흥식을 찾아 동불사향 영승촌으로 갔고 1963년에는 동요창작과 구전민요를 정리하던 나젊은 리룡득을 찾아 차조구로 갔으며 같은 해 겨울에는 한수동편집과 함께 몇십리의 눈길을 걷고 달려 숭선골안에 있는 차룡순을 찾아갔다. 그 외 연길현 태양공사 횡도대대에 살던 서광억, 연길현 팔도구 쌍봉촌의 김재권, 화룡 룡호촌의 정세봉 등 ‘숨어있는 별’들을 찾아 연변주 내 곳곳을 이리저리 뛰여다녔다. 그는 또 문학을 배우고저 하는 후대들을 위해 배움의 터전을 만들어주기도 했다. 1984년 5월, 《천지》 월간사에서 꾸린 문학창작 통신학부가 정식으로 개학을 맞이하였는데 리상각은 통신생들의 작품들을 《천지》와 《개간지》에 실어줄 것을 약속하면서 학생들의 문학열과 창작열을 북돋아주었다. 뿐만 아니라 중한 수교 이후 그는 한국의 학자, 시인들과 부지런히 교류하면서 중국 조선족 시문학의 발전을 위한 일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는 한국의 저명한 문학평론가이며 마광수의 지도교수인 연세대학교 신동욱교수와 한국의 저명한 시인 황송문선생을 연변대학교에 초청하여 특강을 조직하는 등 문학도들에게 학술적 시야와 사유체계를 넓힐 수 있는 기회를 창조해주기도 했다. 

리상각은 문학잡지사에 편집으로 배치를 받으면서부터 민간문학 수집 활동에 나섰다. 그는 조선족 민간문예 수집조 성원으로 있으면서 9개월 동안 발품을 팔아 민족민간문예 자료들을 수집, 정리하였다. 그는1980년에 《중국조선족구전민요집》을 출간(1995년에는 한국에서 재판)하였고 2000년에는 《북간도유머집》을 출간했으며 2007년에는 《조선족문단리면록》을 《연변문학》에 련재하였다. 뿐만 아니라 ‘민생단사건’에 대한 자료를 수집, 정리한 기초에서 그것을 작품화하여 2011년부터 2013년까지 잡지 《문학사계》(한국, 제38호부터 48호)에 《동만혈전비사东满血战秘史》를 련재하기도 했다. 력사적 사실로 인정된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작가와 시인들이 과감히 언급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리상각은 오랜 시간 동안 끈질긴 노력과 용기로 그것을 작품으로 승화시켰다.  

리상각은 또 전통시조의 창작기법을 준수하는 기초상에서 현대시조를 창작할 것을 고수하면서 시인들을 동원하여 시조 창작에 열을 올렸다. 1989년 8월 15일, 한국 《시조생활》잡지사의 사장과 발행인 류성규박사가 연길을 찾아 《천지》 월간사와 결연을 맺었고 연변에서는 한국의 시조와 론문을 소개하였으며 시조 창작에 궐기하기 위해 몇차례에 걸쳐 시조묶음을 편찬하였다. 1990년부터 《도라지》와 《천지》는 서로 협력하면서 잡지에 시조를 대량적으로 실어내기 시작했다. 시조창작열이 고도로 팽창되면서 리상각은 시조문학단체를 결성하려는 의지가 강해졌고 시조선집을 출간하려는 념원이 갈수록 굳어졌다. 1990년 봄에는 송정환이 연변으로 와서 리상각에게 시조단체를 결성하자고 제의했다. 허룡구, 리해산 두 교수가 준비사업에 착수했고 500수에 달하는 시조를 묶어 《시조선집》을 민족출판사에 교부했다. 1994년에는 민족출판사를 통해 《중국조선족시조선집》을 출판하였으며 1993년 10월에 연변시조시사를 정식으로 설립하였다. 1994년 《천지》는 8월까지 65수의 시조를 발표했고 《료녕일보》에서도 시조와 시조평론을 자주 실었다. 리상각은 이처럼 20여년간 한국의 시조단체 및 시조시인들과 교류하고 중국조선족시인들과 련합하며 동료와 후배들에게 시조를 창작할 것을 제기하면서 중국 조선족 시문학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였다. 

어릴 적부터 고집불통이라고 소문이 난 그는 민족문학을 위한 사업이라고 인정되는 일이라면 그 어떤 고난과 역경이 닥쳐도 무조건 밀어붙이고 실시하였다. 그가 발품을 팔아 수집하고 정리했던 민간문학 자료들은 문학적 가치에 대한 평가를 떠나 그 자체가 갖는 사료적 가치를 따져볼 때 리상각은 중국조선족의 민족사와 민족문학사 발전에 큰 기여를 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2. 시적 주장과 창작의 자세

시란 무엇이고 시를 어떻게 써야 하며 시인은 무엇을 써야 하는가? 이는 모든 시인들의 공통된 고민이다. 인간은 자신의 인생에 대한 견해와 세계에 대한 견해를 가지기 마련인데 시인은 보통 이런 인생관과 세계관을 삶의 기본토양으로 하여 울울창창한 시의 숲을 창조해낸다. 

리상각은 시란 ‘언어의 그림’이고 ‘인생의 거울’이라고 했다. 그는 “시인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인생의 고통, 슬픔, 고뇌, 추악한 것을 불사르기 위함이고 인간미를 찬양하기 위함이며 따라서 시인은 반드시 인생을 열렬히 포옹하고 인간미를 찬양하는 일에 자기의 령혼을 불태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리상각은 사랑의 감정과 서정의 미를 보여주는 것을 자신의 시의 천직으로 삼고 이를 통해 자신의 미학관을 표출하였다. 문학창작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로동으로서 로동자로서의 작가와 시인은 창작에서 자기만의 신념이 있어야 한다. 리상각에게 있어서 시란 인생의 희로애락을 그대로 그려주는 예술이지만 그 속에 숨쉬는 인생의 꿈과 환상과 신념을 시를 통해 보여주는 것이였다. 그는 “가령 나에게 청춘이 사라지고 사랑과 인정이 말라버리고 희망이 떠나버리면 시신도 나를 저버리고 말 것”이라고 하면서 희망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시를 쓸 것을 주장했다. 리상각은 인생의 끝자락에서 삶을 돌아보면 행복했던 순간보다 슬펐던 순간들이 더 많게 느껴진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삶의 고독과 절망, 방황과 우울 등으로 시를 비극적으로 다루기보다는 시련과 고통을 딛고 열정과 희망과 신념을 불어넣기를 강조했다. 그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어도 결코 절망하거나 비관하지 않았다. “인생살이가 아무리 지옥 같은 것일지라도 꿈을 잃지 않고 분투하면 나아갈 길이 열린다.”라고 말했던 리상각은 오히려 곤경 속에서 더욱 강해지고 희망적인 미래를 위해 살려고 노력하였으며 그것을 작품을 통해 표출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문학창작을 하면서 민족혼을 기본으로 하고 밝고 긍정적인 마음으로 사실을 있는 그대로 쓰기를 제창하였다. 그는 “시는 언어예술이지 말장난이 아니며 심장으로 뿜어내는 진실한 감정을 감명깊게 그려주는 예술이므르 시인은 언제나 추호의 허풍도 떨어서는 안된다”고 하면서 시를 쓰되 그 속에 시대의 변혁을 쓸 것을 호소했다. 

이처럼 자신만의 확고한 시적 주장을 수립하고 창작활동을 진행해온 리상각은 1956년부터 반세기가 넘는 동안 총 642수에 달하는 시, 442수의 시조, 147수의 가사, 338편의 산문과 실화문학 및 평론, 단편소설과 장편소설 각각 1편을 창작하였다. 그는 1980년 처녀시집 《샘물이 흐른다》를 시작으로 시집 14권, 시조집 6권, 가사집 1권, 수필집 2권, 문집 4권, 시론 1권, 민간자료집 1권 등을 중국과 한국의 출판사를 통해 출판하였다. 이상의 사실들로 알 수 있듯이 리상각은 다산작가로 불리기에 손색이 없다. 

리상각은 일생에 거쳐 향토적 서정시, 랑만주의적 경향의 사랑시와 송가, 현실비판과 자아반성의 풍자시들을 대거 창작함과 동시에 시조 창작과 그 발전을 위한 일에서 그 어느 시인보다도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고 풍자시 창작에서도 선두주자로 나섰다. 일찍 리상각은 올곧은 성격 탓에 늘 ‘바른 소리’를 잘하여 가끔은 타인들의 미움을 받은 적이 있다고 밝힌 적이 있다. 이러한 시인의 올곧은 성격이 바로 그가 사회에 존재하는 문제를 예리하게 직시하는 데 도움을 주었고 깊숙한 곳까지 파고들어 문제의 근원을 찾아내는 받침돌이 되는 것이다. 평생 동안 열정적이고 희망적으로 삶을 대하며 미래지향적 정서를 작품에 담아냈던 리상각은 시대의 변화와 함께 변화되는 인간사회와 민족문단의 상황을 지켜보면서 그 속에 존재하는 문제들을 바로잡아 보다 건전하고 밝은 사회가 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하여 그는 사회의 부조리와 인간의 추한 내면을 작품 속에 담아냈던 것이고 이러한 작품들은 개혁개방 후기의 우리 민족 사회의 한 면을 보아낼 수 있는 좋은 증거가 되였다.

리상각은 해방전 강원도 시골마을에서 태여나 흑룡강성을 거쳐 연변에 정착하기 시작하였으며 제3의 고향인 연변에서 수많은 작품들을 산출하였고 평생을 문학창작과 민족문학 발전과 후대양성을 위해 살아왔다. 반세기가 넘는 동안의 그의 작품들은 중국조선족문학사를 연구함에 있어서 중요한 자료로 된다. 

나가는 말

리상각은 암울한 일제식민시기에 조선에서 태여나 국경을 넘어 중국에 정착하여 평생을 중국조선족으로 살아왔다. 그의 삶에는 식민지시대의 잔상과 격변했던 중국 당대사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있고 따라서 그의 작품에는 해방 후 중국조선족문학의 발전력사, 중국조선족의 정치적, 사회적 특성 및 주체의식이 여실히 반영되였으며 향토적, 민족적 색채가 다분하며 디아스포라로서의 의식형태가 잘 드러나고 있다. 리상각은 현대시와 시조를 대량적으로 창작한 동시에 가사와 수필은 물론 오체르크, 단편소설과 장편소설도 창작하였으며 민간문학 수집 정리에도 열정을 쏟아부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반평생 문학창작과 문학잡지사 편집사업을 병행하면서 후대양성을 위한 사업에도 열정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는 중국조선족문학의 발전을 위해 고뇌하고 사색하면서 방법을 모색하였는바 반평생을 시인으로서, 문학잡지 편집일군으로서의 사명감을 온몸으로 실천하였다.

일찍 “잊어다오 나를 / 나는 민들레 / 무덤가에 조용히 / 피였다 마는 / 못 본듯이 가다오 / 그대 갈길을.”(〈묘비에 쓴 시〉 중에서, 1992.)라고 했던 리상각시인, 그는 잊어달라 했으나 후세인들은 그를 잊지 못할 것이다. 중국조선족문학의 발전을 위해 평생 자신의 정열을 불태우면서 지속적인 노력을 경주하였던 리상각시인, 그는 떠났지만 떠난 것이 아니다. 앞으로 시인과 그의 작품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를 더욱 활발히 진행할 것을 약속하면서 또한 이러한 작업이 많은 연구자들에 의해 진행되기를 기대하며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출처:<장백산>2018 제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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