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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백산》문학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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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선자: 붉은 달(단편소설)
2019년 07월 18일 10시 13분  조회:699  추천:0  작성자: 문학닷컴

붉은 달

장선자

 

1.

언제부턴가 왼쪽 가슴 쪽으로 두드러기가 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좁쌀알 만한 것이 한개 나더니 그 주위로 빼곡하게 여러개 나서 제법 모양새를 갖췄다. 열꽃마냥 빨갛고 반달 모양 비슷하게 자리잡은 두드러기는 없어지지도 않고 더 크게 번지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동전 크기도 안되는 두드러기를 갖고 병원을 찾으면 다른 사람들의 눈에 한심해보일 것이 걱정되여 병원행은 그만두었지만 그냥 놔두기에는 자꾸만 손이 가게 가려웠다.

낮에는 별일 없다가도 잠이 들 무렵이면 어둠과 함께 가려움이 스멀스멀 시작되였다. 달 밝은 한밤에 집을 염탐하는 도적처럼 아주 슬그머니 찾아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손톱으로 빡빡 긁을 만큼 사무치는 가려움이 아니라 은은하고 간질간질하게 퍼지는 가려움이였다.

가려움이 시작되여서 보름이 지나자 자기 전에 먼저 그 부분을 거울에 비춰보는 것이 의례가 되였다.

그 놈들은 달 모양을 이룬 채 하얀 살갗에 문신처럼 박혀있었다. 붉은 달. 오돌오돌 튀여나온 놈은 짜면 빨간 좁쌀알 같은 것이 튀여나올 것만 같았다. K는 그것들을 짜보려다가 생각을 접었다. 왠지 원래 붙어있던 살을 떼내는 것처럼 아프고 자국이 남을 것만 같았다. 

K는 할 수 없이 약방을 찾았다.

“문신 같네요.”

약방 녀자는 스스럼없이 한껏 보여주는 두드러기를 언뜻 들여다보더니 무심한듯 한마디 던졌다. 그리고는 잠간 망설이다가 습진고약을 떼주면서 며칠 발라보다가 낫지 않으면 병원에 가보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런 피부병은 대개 스트레스가 쌓여 면역력이 떨어져 걸리는 병이라고 덧붙였다.

 

K는 약방을 나와 한겨울 꽁꽁 얼어붙은 눈길을 터벅터벅 걸었다.

K는 거의 석달째 밤잠을 자지 못하고 있었다. 년말이 다가오면서 정부의 회의가 많아지고 또 그 회의자료를 준비하는 데 눈코 뜰 새가 없었다.

K는 하루를 팽이처럼 돌아치면서도 늘 둥둥 구름 우를 걷는 기분이였다. 남들은 밤중에도 달리는 야근이 힘들다, 주말에도 편하게 쉬지 못하는 일이 힘들다고 말이 많았지만 K는 전혀 힘들지 않았다.

K는 항상 반듯하게 다린 셔츠 바람으로 사무청사 이곳 저곳을 가볍게 뛰여다녔다. 다들 뒤에서 일 잘하는 로봇이라고 칭찬처럼 비꼬았지만 본인은 개의치 않았다.

“스트레스가 원인이라∼”

그동안 명령 대로 움직이기만 했던 로봇은 갑자기 신체구조가 와해되는 느낌을 받았다. 대뇌가 스트레스를 의식하자 그동안 꽁꽁 숨어서 별짓을 다하던 스트레스들이 낄낄 웃으며 단번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동안 아무렇지도 않았던 어깨 중심 부위가 갑자기 무수한 침으로 찌르는 것처럼 아파왔고 누가 뒤에서 당기는 것처럼 목덜미가 뻐근했다.

 

K는 갑자기 찾아온 아픔에 뒤목을 부여잡고 한참 서있다가 그 부근에 있는 ‘금새 맹인안마’라고 간판을 건 안마방에 들어갔다. 출퇴근길에 눈에 띄웠던 안마방이였다. 다름이 아니라 가게명 때문이였다. 한자로 보면 ‘금으로 된 새’라는 뜻이였는데 아픈 곳이 ‘금세’ 나을 것 같은 그런 느낌을 주었다. 어쩌면 사장이 이를 꾀하고 일부러 그렇게 단 것일지도 모르겠다.

안은 겉모습처럼 화려하고 촌스러웠다. 천정이며 벽에 주렁주렁 단 장식품들이 너무 반짝반짝거려서 무대에 올라선 것마냥 어수선하고 어리둥절한 느낌을 주었다. 계산대가 문 바로 왼쪽에 있었고 중간에는 접대용 쏘파와 유리탁자가 꽉 끼여있었다. 그리고 쏘바 뒤켠으로 그리 길지 않은 좁은 복도가 있었는데 좌우로 작은 방이 서너개는 있는 것 같았다. 맹인 안마방 치고 내용물이 너무 꽉 차있는 듯한 느낌을 줬다.  

“어서 오세요.”

나가려고 돌아서는데 뒤통수로부터 어떤 녀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약간 애교가 섞인 듯한 듣기 좋은 목소리이다.

돌아서보니 키가 작고 마른 녀자였다. 눈섭을 덮은 가쯘한 앞머리에 작고 갸름한 얼굴, 거기에 커다란 선글라스가 절반 얼굴을 덮고 있었다. 몸에는 회색 와이샤츠에 청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샤츠가 너무 커서 무릎까지 내려와있었다. 흑백사진 같다고 할가 그런 가운데 발그스레한 입술만이 오물오물 귀엽게 움직이며 생기를 뿜고 있었다.

가운으로 바꿔입고 마사지 침대에 엎드렸다. 라벤더향이 나기 시작했다.

“양초를 켰어요. 냄새가 좋죠?”

녀자는 어깨부터 가볍게 주무르기 시작했다. 낯선 녀자의 향기도 같이 풍겨왔다.

“어깨가 많이 뭉쳤네요.”

녀자의 손에 힘이 실리기 시작했다. 작은 손은 피아노 건반을 치는 것처럼 리듬을 타면서 바닥 같이 딴딴한 어깨와 잔등을 눌렀다. 심하게 뭉친 부분은 팔뒤꿈치로 풀어주었다. K는 눈물이 나올 정도로 아팠지만 꾹 참았다.

집에 와서 더운물에 샤와까지 하니 몸이 훨씬 가뿐해졌다. 저도 모르게 그 녀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까만 선글라스 뒤에 숨어있는 두 눈이 궁금했다.

그 검은 선글라스 안에 가려진 두 눈이 마치 무언가를 가득 담고 있는 동굴처럼 느껴졌다.

 

K는 련속 세날씩 밤잠을 설칠 때면 그 안마방을 찾았다. 신기하게도 녀자의 마사지를 받고 있는 사이에는 잠을 잘 수 있었다.

녀자의 안마방에는 젊고 이쁜 안마사가 셋이나 되였다. 하지만 예약도 없이 무작정 찾아갔던 날에도 녀자는 하던 일을 멈추고 자기가 직접 마사지를 해주었다.

그녀의 작고 여윈 손은 볼품 없었지만 신기한 힘을 갖고 있었다. 

그녀의 손이 닿기만 하면 몸에 굳어있던 혈액이 찌릿한 전률을 느끼다가 깊은 잠에서 깨여난 뱀처럼 스르륵 몸 구석구석을 돌면서 소생의 즐거움을 발산했다.

어떤 때에는 요란하게 구불구불 S자를 쳐대고 어떤 때에는 먹이감을 발견하기라도 한듯이 빠르게 직진했다. 또 갑자기 몸이 나른해진 것마냥 동그랗게 꽈리를 틀고 게으름을 피웠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그것은 즐거운 려정이였다. 푹신푹신하게 쌓인 겨우내 락엽 밑으로 울퉁불퉁한 나무 그루터를 지나 오불고불 인척이 드문 오솔길을 가로지나고 퐁퐁 생명이 솟는 샘물터의 흥건한 흙에서 몸을 적셔보았다. 화들짝 놀라 정신 없이 몸을 숨기는 쥐를 보면서, 눈 깜짝할 새로 나무 중턱까지 올라가 깜장눈을 반짝거리는 청산가리를 보면서, 짹짹 시끄럽게 울어대는 새들을 보면서, 겨우내 허기진 것조차 잊어버린 채 뱀은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면서 익숙한 것과 알은 체를 하고 새로운 것과 인사를 나누었다.

K는 마음속 깊이 고팠던 것이 채워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녀의 손이며, 그녀가 피워주는 양초며, 그녀의 웃음마저 익숙하게 느껴질 정도로 정겹고 고마웠다.

 

은싸락이 화사하게 퍼지는 밤, 술이 거나해진 K는 굳이 안마방 문을 두드렸다.

한참 있다가 녀자가 나와서 문을 열어주고는 가게 불을 켰다.

K는 마사지 침대에 엎뎌있다가 술내를 풍기며 킥 하고 웃었다.

“앞이 안 보이는데 불은 왜 켜?”

내장 깊숙이 파고드는 알콜 때문인지 자꾸만 실없는 소리를 하고 싶었다.

“눈은 왜 그렇게 됐지?”

녀자가 어떤 표정이였을가? 무척이나 궁금했다.

차거운 손이 목에 닿더니 가볍게 주물럭거린다. 힘을 력도 있게 균형적으로 준다.

그러더니 잠결에 녀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릴 때 고향 마을에 쌍둥이가 있었어요. 다들 그 집 할아버지를 백살구집이라고 불렀는데 쌍둥이가 태여난 후로 쌍둥이집이라고 고쳐불렀대요.

그 집 할아버지가 쪽박 차고 두만강을 넘어오면서 백살구 애나무를 갖고 왔는데 그 덕에 연변땅에서도 백살구를 먹게 되였다 그러데요.

아무튼 할아버지는 키가 크고 말랐고 할머니는 키가 작고 통통한 축에 속했어요. 두만강 저쪽 땅에서는 머슴이였는데 이쪽으로 오면서 땅굴을 짓고 부지런히 살림을 가꿔서 남 부럽지 않게 살게 되였지요.

 헌데 슬하에 줄줄이 딸만 여섯을 낳다가 마침내 귀한 아들을 보게 되였는데 그 아들이 장가를 가서 쌍둥이 아들을 덜컥 낳으니 이런 경사가 또 어디 있겠어요.

헌데 그중 하나가 좀 모자란 놈이였죠. 입이 언청인데다 한손에 손가락이 두개 밖에 없었어요.

다들 임신 때 크게 놀라서 그런게 아닌가 하며 말이 분분했죠. 애 엄마가 임신 여섯달 땐가 물동이를 이고 물을 길어오는데 좀 모자란 시집 조카가 그 다리를 훌렁 걸어 넘어뜨렸다고 합디다∼

 

2.

그 곳은 산과 물을 다 갖춘 풍요지였다. 그 옛날 변강을 지키던 장수들이 오래도록 자리를 잡고 싶어했을 만큼 소소리높은 산은 아츨한 자연요새를 이뤘고 산기슭에서 두만강 쪽으로 훤히 펼쳐진 벌은 넉넉하고 비옥했다. 사람들은 칼날 같이 날이 선 산을 검剑산이라고 불렀다. 검산이 지켜선 드넓은 벌은 금방 해산한 아낙네의 젖무덤마냥 푸근하고 도처에서 달큰한 생명줄기가 솟아오른다고 해서 아낙벌이라고 불렀다.

백살구집은 예로 이 고장에서 소문난 목수였다. 이 동네는 물론 옆동네까지 땅 우에서 굴러다니는 수레바퀴란 바퀴는 모두 그 손을 거쳤는데 어찌나 단단하게 만들었는지 몇년이고 바꿔달라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동네 사람들이 처음으로 터를 잡고 든 초가집도 모두 그 손이 만든 작품이였다.

한치 머슴으로 살았던 백살구집한테 이처럼 대단한 손재간이 있을 줄은 누구도 예상치 못했다. 사람들은 백살구집이 땅굴에서 여섯번째 딸을 잃은 후부터 저런 손재간이 갑자기 생긴 게 아닌가고 가당치도 않은 말들을 했다.

백살구집은 확실히 여섯번짼가 다섯번짼가 하는 딸을 잃었다. 하루종일 황무지를 일구고 오니 폴싹 무너앉은 땅굴이 보였고 허겁지겁 손으로 파보니 일곱달 난 딸자식이 어느새 싸늘하게 숨을 거두고 있었다. 그 이후로 백살구집은 무슨 일을 하나 더 빈틈없이 깐깐히 진행했다.

딸만 줄줄이 낳다가 마지막에 얻은 아들이 장가를 가던 해, 백살구집 로인은 아들딸 자식들을 줄줄이 키운 초가집 앞에 번듯한 기와집을 지었다. 빨간 기와를 얹고 하얀 칠을 한 기와집은 집 뒤에 높지 않은 산을 하얗게 덮은 백살구꽃과 더불어 그림 같은 풍경을 그려냈다. 이듬해 백살구꽃이 또 한번 풍경화를 그려낼 즈음 로인은 쌍둥이 손자를 보았다.

그중 작은 아이는 검산의 기운을 타고났다. 버들잎마냥 길게 째진 봉안丹凤眼은 날이 선 검마냥 매끈하고 차거웠다. 마을 사람들은 아이가 얼굴 뿐만 아니라 성격마저 지 어미를 똑 떼닮은 것 같다고 숙덕거렸다.

아이 엄마는 속이 깊은 녀자였다. 특히 그 기다란 두 눈은 생체가 살지 않는 늪마냥 깊고 아늑했는데 아이를 낳은 다음부터 그 늪에 언뜻언뜻 그림자가 보이기 시작했다.

엄마를 닮은 아이는 나서부터 온순하고 조용했다. 갑자기 잘 빨던 젖꼭지를 빼도 울지도 않고 까맣고 긴 눈으로 엄마를 뚫어져라 쳐다보기만 했다. 금방 먹고도 또 울어번져지는 언청이형에게 젖꼭지가 물리우는 것을 보고도 아이는 이상하리 만치 울지도 보채지도 않고 아버지가 떠주는 암죽을 받아먹었다.

그렇게 차차 엄마는 형의 차지가 되고 아이는 자리에 누워서 아버지가 떠주는 암죽을 받아먹게 되였다. 

나도 젖.

아이는 분명 저도 젖을 달라고 입을 오무리고 죽을 거부해보았다. 해서 엄마가 가엾은 아이를 안아주려고 품안의 것을 내려놓으면 엄마 품에서 한창 흥창망창 젖을 빨아대던 언청이가 고래고래 목청을 뽑으며 용을 써댔다. 언제나 침착하던 엄마는 힘이 다 빠져서 온몸이 땀투성이가 되여버렸다. 그렇게 언청이형은 또 거마리가 되여 엄마 품에 딱 달라붙어있었고 아이는 자리에서 눈을 껌벅이며 엄마만 쳐다보았다.

로인은 돼지를 키워도 된다는 정부의 허가가 있어서부터 주욱 굴암퇘지를 키워 새끼치기를 했다. 몇년을 산 굴암퇘지는 중소를 따라갈 만큼 덩치가 육덕지고 컸다. 여러배 치 새끼를 생산한 굴암퇘지는 큰 벼슬아치나 된 것처럼 날이 갈수록 못되게 굴었다. 돼지죽을 줄라 치면 바가지로 한창 구유를 두드리며 소리를 쳐서야 굴 안쪽에서 뻘건 눈을 희번덕거리면서 느릿느릿 걸어나와서는 삐죽한 코로 돼지죽을 막 휘저어대며 심통을 부렸다.

어느 무더운 여름날, 동생과 숨박곡질을 놀던 언청이는 높다리 지은  돼지굴 바자를 올라타더니 쿵하고 그만 굴 안에 떨어졌다. 이제 금방 말을 배운 아이는 형이 재롱을 피우는 줄로 알고 눈만 멀뚱하니 뜨고 지켜보기만 했고 높은 데서 떨어진 언청이는 놀란 나머지 자지러지게 울어댔다. 

이 때 지푸라기 속에 태평하게 누워있던 굴암퇘지가 뻘건 두 눈을 뜨더니 거친 코숨을 내쉬며 언청이에게 다가왔다. 돼지는 자신의 거대한 몸집에 놀라서 울어대는 언청이를 한참 지켜보다가 갑자기 화가 난듯 코로 들이박고 입으로 물기 시작했다.

언청이의 아찔한 비명소리에 심히 놀란 아이는 황급히 집으로 달려갔다. 

하얗게 질린 아이의 얼굴과 돼지굴 쪽에서 들려오는 언청이의 비명소리에 어른들은 맨발바람으로 쏜살같이 달려나갔다. 아버지가 돼지굴에서 언청이를 건져냈을 때 언청이는 이미 피투성이가 되여있었다.

 그 날 오후 아이는 몇시간이고 혼자 집안에 남아 놀았다. 저녁이 되여서 배가 꼬르륵거리는데도 어른들은 밥을 주지 않았다. 아이는 어정어정 걸어서 늘 새하얀 이밥이 나오던 쇠가마 뚜껑을 힘껏 밀었다. 탕 하고 뚜껑이 가마목에 떨어지면서 안에서 시큼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아무리 봐도 먹을 수 있는 밥이 아니라 돼지굴에서 봤던 돼지죽이였다. 아이는 잠간 서성이다가 다시 찬장을 열었다. 사발에 담겨있는 감자볶음을 보고 손으로 마구 움켜쥐고 입에 넣었다.

“어찌 됐수?”

“살았다오.”

할아버지가 담배를 말며 집안에 들어섰다.

“허이구∼”

온 오후 집안을 들락날락하던 할머니는 그제야 한숨을 내쉬며 가마목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나저나 도투는 어찌하우?”

할아버지는 그제야 정신을 차린듯 씽하니 밖으로 나갔다.

감자볶음만으로 성치 않았던 아이는 종종걸음을 놓는 할머니 뒤를 따라 돼지굴로 향했다.

씩씩거리며 야수마냥 미쳐날뛰던 그 거대한 굴암퇘지가 돼지굴 한가운데 축 늘어져있었고 빨간 피가 그 주위를 흥건하게 적셨다. 피비린내가 진동하고 파리떼가 정신 사납게 날아다녔다.

마침 피빛 석양이 서쪽 하늘을 빨갛게 태우고 있었다. 빨간 석양 아래 빨갛게 물든 돼지굴 안에 목 박힌듯 서있는 로인의 모습은 그렇게 괴이했다. 아이는 손수건을 꺼내 눈굽을 찍는 할머니의 치마폭을 꽉 움켜쥐였다.

“이구 어찌오? ”

“못난 자식 같으니, 성질머릴 하곤.”

“그래 제 새끼 잡아먹는데 가만 놔두겠소?”

할아버지는 잘 든 낫날에 단번에 잘리워 쩍 벌어진 돼지의 목 부위를 발로 툭 건드렸다. 한껏 드러난 시뻘건 살에 붙어있던 파리떼가 윙하니 반공중에 날아오르더니 다시 달라붙었다.

“그 놈 공헌이 많소. 애비 장가도 보내고∼”

할머니가 넉두리처럼 울먹거렸다.

“그 잘난 것두 사람새끼라고. 차라리 없기보다 하오?”

할머니를 등지고 서서 얼굴을 볼 수 없는 할아버지가 말했다. 피빛 석양을 마주한 아이에게 들려오는 괴이한 목소리였다.

그 소리에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했다. 후둑후둑 정신없이 뛰는 심장은 아이를 숨가쁘게 만들었다.

아픈 손.

엄마는 언청이형을 ‘아픈 손’이라고 했다. 아이는 아픈 손이 결국 남들이 꺼리는 손이라는 것을 알게 되였다. 

그 일이 있은 후로 엄마는 한시도 언청이의 옆을 떠나지 않았다. 자신의 허물을 감추듯 그 아픈 손을 더욱더 으스러지게 감싸쥐였다.

여덟살을 먹던 해, 머리가 커진 아이는 마침내 온 가족을 위한 결심을 내렸다.

아이는 형을 데리고 마을 중간을 가로지나는 강을 찾았다. 마을 사람들이 논에 물을 대려고 끌어온 두만강 물이였는데 어른의 배꼽 정도 오는 깊지도 얕지도 않은 강이였다.

아이는 소용돌이 치는 수문 쪽을 찾아서 형에게 뛰여내리라고 꼬드겼다. 하지만 뱅뱅 도는 소용돌이에 겁을 먹은 언청이는 선뜻 뛰여내리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자 아이는 뒤걸음을 치는 형을 뒤에서 확 밀었다. 형은 그렇게 물에 빠졌다. 아이는 눈깜짝할 새로 물살에 휘감겨 허우적거리는 형을 보고 의미심장한 미소를 띄웠다.

온 누리로 쫙 퍼지는 해살이 아이의 정수리도 따뜻하게 내리비췄다.

하지만 그 장면을 본 상점집 녀자애가 어른들을 불러 다 죽어가는 언청이를 구했다. 언청이는 또 한번 목숨을 건졌고 사람들은 언청이가 어쩜 팔자에 있는 재를 세고비만 넘기면 귀인贵人이 될지도 모른다고 제멋대로 점을 쳤다.

형을 안고 눈물을 쏟는 엄마를 보면서 아이는 열병을 앓기 시작했다. 물에 빠진 놈은 이튿날로 멀쩡히 뛰여다녔지만 형을 물에 빠뜨린 놈은 고열로 며칠간 크게 앓았다.

고열로 의식을 잃은 사이에 아이는 엄마를 보았다. 곱게 차려입은 엄마가 살구꽃이 하얗게 핀 나무 아래에서 자신의 이름을 부르면서 손짓하더니 갑자기 사라지는 꿈이였다.

견디기 혹독했던 그번 열병은 마침내 아이의 가슴에 작은 불씨를 심었다. 손톱눈 만큼한 작은 불씨는 그날 석양처럼 강렬한 피빛을 보이며 가물가물 타오르기 시작했다. 아이는 자신의 계획을 망가뜨린 사람에게 벌을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걸 지켜본 그 눈알이 가증스러웠다.

 

3.

해가 높다. 한겨울 스모그를 이기고 해가 솟았다. 그리고 온 누리를 비춘다. 아빠트 꼭대기의 적설이 한겨울 바람에 우수수 떨어지면서 창가에 선 사람들의 볼거리가 되였다. 어느 커플이 펼치는 깜짝 이벤트처럼 반짝반짝 은빛 싸락이 창가 풍경을 만들었다.

K는 안마방을 찾아서 어제 미처 못 들은 이야기를 마저 들려달라고 했다.

“저는 쌍둥이와 동갑인지라 늘 붙어 놀았지요.

동생은 엄마를 닮아 잘생긴 아이였어요. 얼굴은 하얗고 갸름했으며 입술은 항상 빨갰어요. 어딘가 사람을 끄는 조용함과 우울함이 있었어요. 못생기고 천방지축인 언청이형에 비해 동생은 그럴듯한 멋과 분위기가 풍기는 아이였어요.”

K는 가슴 한구석이 짠해났다. 목덜미를 누르는 그녀의 손가락이 간지럼을 타는 것마냥 온몸이 근질근질해났다.

“언청이는 덩치가 크다고 다른 아이들을 못살게 굴었어요. 다른 아이가 괴롭힘을 당해서 소리를 지르면 동생이 다가와 형을 조용히 쏘아보았죠. 그러면 언청이는 주밋거리며 괴롭히는 행동을 그만두었어요. 가끔 그만두지 않을 때도 있었는데 그러면 발을 들어 언청이의 배를 걷어찼어요. 언청이는 왝 하고 울음을 터뜨리며 집으로 달려갔지요.

언청이는 동생을 형처럼 따랐어요. 자기가 형인 줄도 모르고 시키는 대로 다하고 혼내도 찍소리 않았어요. 그러나 동생은 애어른으로 소문났기에 형에게 나쁜 일은 절대로 시키지 않았어요. 기껏해 밖에서 놀면서 손이 더러워지면 ‘내가에 가서 손을 씻어라, 얼굴을 씻어라.’하고 어른처럼 챙겨주었을 뿐이였죠.

그렇다고 특별히 아끼는 것도∼ 저도 잘 모르겠어요. 언젠가 언청이가 물에 빠져 죽을 번했는데 사실 그 동생이 뒤에서 밀었거든요. 그 때 제가 봤어요. 어른들에게 말하면 그 애가 야단맞을가봐 말하지는 않았어요.”

K는 심장이 쿵쿵 무섭게 뛰기 시작했다. 그런 자신이 발각될가봐 그는 마음을 조이고 또 몸도 조였다.

녀자가 웃는 것 같았다. 입꼬리가 올라가면서 깨고소하다는듯 비웃음 비슷한 그런 웃음을 말이다.

그녀는 갑자기 마사지를 멈추고 한껏 쫄아든   K를 그대로 내버려둔 채 옆에 놓인 쏘파에 털썩 몸을 맡겼다.

한참 정적이 흐르더니 바스락바스락 무언가를 씹는 소리가 들렸다. 녀자는 테이블에 놓여있던 과자 한조각을 먹고 있었다.

“그 날은 날씨가 너무 좋았어요. 날이 너무 좋아서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예감이 들었죠. 애들 몇이서 뒤산에 가 놀려고 쌍둥이 집 앞에서 기다리는데 언청이만 덜렁거리면서 나오는 것이였어요.

우리는 뒤산에 올라가 들국화를 꺾으며 즐겁게 놀았어요.

그 날 기분이 엄청 좋았어요. 하늘은 눈 시리게 파랗고 해살은 눈부시게 따스했죠. 우리는 날다람쥐가 되여 높지도 않은 뒤산을 마구 쏘다녔어요.

한창 코노래를 흥얼거리며 꽃을 꺾는데 언청이가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저를 확 미는 것이였어요. 저는 미처 어찌할 새도 없이 땅에 주저앉았죠. 그러더니 그 놈이 제 얼굴에 손을 뻗치는 것이였어요. 제가 손으로 그 손을 뿌리치려고 하자 그 놈이 저를 깔고 앉아서 한손으로 제 두 손을 꼭 붙잡고 다른 한손으로 제 눈알을 뽑았어요!”

녀자의 가슴이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려왔어요. 예감 좋은 날에 눈알을 빼앗겼던 공포가 온 방안을 삼키고 있었다.

“겨우 한눈은 살렸어요. 다행히 힘줄이 끊기지 않아서 다시 박아넣었거든요. 다른 한눈은 개눈알을 넣었어요.”

K는 죽은듯이 엎드려있었다. 사지는 김 빠진 풍선마냥 축 늘어졌고 머리만 나무판처럼 빳빳했다. 움직이려고 해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왜 그랬∼”

K는 저도 모르게 혼자말을 하고 있었다. 그 기여들어가는 자그마한 소리를 들었는지 녀자는 한쪽 눈에 웃음을 담는 것 같았다.

“내 눈알이 이뻐서.”

킥킥 웃는 웃음소리가 신경을 긁었다.

“늦었어. 뭐라 해도 내 눈알은 돌아오지 않을 거야.”

녀자는 웃는지 우는지 이상한 소리를 꺼억꺼억거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동안 꽁꽁 닫고 있었던 기억들이 단번에 터져나와 머리가 아프고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녀자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내내 녀자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비수가 되여 몸을 찌르고 있었다고, 그래서 자신은 이미 너덜너덜한 시체가 된 것 같다고 말하고 싶었다.

녀자는 그것을 알지 못한 채 눈물만 흘렸다.

 

4.

언청이가 왜 잘 붙어놀던 상점집 녀자애의 눈알을 빼려고 했는지 그 리유에 대해서는 누구도 몰랐다. 누구도 물어보려고 하지 않았다. 정상이 아닌 놈이 정상이 아닌 짓을 하니 다들 당연하게 여기면서 기가 차서 혀를 끌끌댔다.

아이 엄마가 언청이를 붙들고 왜 그랬냐고 다그쳤지만 언청이는 째진 입으로 침을 질질 흘리면서 실실 웃기만 했다.

마을 사람들의 비난은 쌍둥이집 어른들, 특히 아이엄마에게 돌려졌다. 전생에 무슨 죄를 졌기에 저런 끔찍한 놈을 낳았는가고 수군거리면서 제 집 아이들을 단속하기에 바빴다.

상점집 일가친척 한무리가 아이집으로 몰려왔다. 그리고는 살풍경이 벌어졌다. 일방적인 욕설이 란무하더니 마지막에는 주먹이 날아들어왔고 상점집 아낙네가 아이 엄마의 머리채를 잡아뜯었다.

마침내 경찰이 들이닥쳤고 아이 부모는 고개도 들지 못한 채 녀자애 집에서 요구하는 것을 다 들어주겠으니 한번만 용서하라고 빌었다.

상점집 아낙네는 아무 것도 필요없다고 하면서 그 집 언청이 눈알 한개만 빼게 해달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 말을 듣는 엄마의 눈에서는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그러면서 우리 애는 안되고 대신 자기 눈알을 빼가라고 했다.

그 순간 옆에서 모든 것을 지켜보던 아이의 처음으로 어린애다운 앙 하고 울음소리가 났다. 울음소리가 어찌 크고 슬펐는지 어른들은 모두 입을 다물고 아이만 바라보았다.

   

5.

K는 빨간 두드러기가 난 가슴이 유난히 따가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울음소리가 귀에 쟁쟁거리면서 가슴이 빨갛게 빨갛게 타들어갔다.

왜 그 녀자를 그런 곳에서 만났을가?

그 녀자를 만나기 전 K는 어릴 적 기억들과 알게 모르게  담을 쌓고 살고 있었다.

십년 전에 잃어버린 모자란 형과 그 뒤로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뜬 엄마, 그리고 지금은 새 가정을 이룬 아버지, 풍지박산이 난 집처럼  K의 어릴 적 기억은 산산쪼각이 나있었다.

유일하게 가슴에 박혀있던 기억이라면 한가지-백살구꽃이 만발한 그림 같은 언덕에 엄마가 서서 곱게 웃으면서 K를 향해 어서 오라 손짓하는 것이였다. 그게 어느 날 밤의 꿈이였는지, 과거에 있었던 한소절의 추억이였던지 K는 지금도 분간할 수가 없었다.

 

K는 한달간 안마방 쪽으로 눈길도 주지 않았다. 모든 게 운명의 장난인 것 같았다.

인과보응. K는 이 상황에 걸맞는 성구를 생각하고는 허탈하게 웃었다.

언청이형이 갑자기 사라지고 엄마가 앓다 죽고 아버지와 인연을 끊다 싶이 사는 이 모든 리유, 그리고 자신이 텅 빈 집에서 로봇처럼 무의미한 생활을 하는 리유를 알게 되였다.

 

K는 운명을 거스를 수 없었다. K는 며칠이고 밤을 새면서 생각한 끝에 이 일을 리성적으로 대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또 며칠이고 밤을 새면서 고민한 끝에 마음속에 있는 답을 얻었다. 

첫째, 이 녀자한테 큰 죄를 졌다.

둘째, 그래서 이 녀자가 싫다.

셋째, 그래서 이 녀자가 없어졌으면 좋겠다.

하지만 K는 자석에 끌린 것처럼 이틀이 멀다 하게 안마방을 찾았다. 아주 리성적인 고민 끝에 K는 이 녀자가 손바닥 만한 이 도시에서 사라질 수 없는 한 그녀와의 신체적 정신적 스킨십을 통해 자극을 받고 싶었다. 어떻게 보면 정면돌파였다.

K는 그녀로부터 꾸준히 마사지를 받았다. 그녀가 다른 손님을 마사지하고 있어도 괜찮다며 두시간 넘게 기다려서 받은 적이 있었다.

그녀의 까실까실하고 작고 여윈 손이 K의 등과 허벅지를 만질 때마다 K는 흠칫흠칫 몸을 떨었다. 마치 칼도마에 오른 물고기마냥 처절하기까지 했다. K는 마사지를 받는 내내 그런 무서움과 처절함을 떨쳐내면서 머리 속으로 방도를 강구했다.

검은 선글라스를 낀 그녀는 그것도 모르고 열심껏 마사지를 해주었다.

그래 저 눈∼

저 눈, 저 눈알, 그녀의 눈알을 내가 빼갔으니 그녀더러 내  눈알을 빼라고 하면 공평하지 않을가? 그 때 그녀의 부모들처럼 간단하고 소박한 방식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지 않을가?

K는 불현듯 떠오른 기발한 생각에 무릎을 탁 치고 싶을 만큼 희열을 느꼈다.

헌데 그러기엔 너무 살벌하지 않을가? 사람 모르는 곳에 가서, 아니, 그 때 그녀가 눈알을 빼앗겼던 고향의 뒤산에 가서 언청이가 그녀에게 했던 것처럼 그녀더러 내 눈알을 뽑게 하면 안될가? ∼ 그래, 좀 살벌하지. 그녀가 그렇게 하자고 할가? 아니 그러면 피도 엄청 흘려야 하는데 얼마나 아플가?

빨간 피가 뒤산의 보라색 꽃을 다 적시는 정경을 떠올리며 K는 피부로 느껴지는 아픔과 끔찍함에 몸을 떨었다.

어느 해살이 유난히도 따스한 봄날,  K는 마침내 완벽한 방법을 생각해냈다.

의학의 힘을 빌자. 수술대에서 내 눈알을 빼서 그녀에게 주자. 그러면 그녀는 복수도 하고 앞도 볼 수 있잖아. 나도 덜 아프고. 내가 빼앗아간 눈알을 돌려주면 그녀는 날 용서할 수 있을 거야.

“저기, 안구이식은 안된대?”

K는 한창 발마사지를 하고 있는 녀자에게 넌지시 말을 던졌다. 녀자는 소뿔편으로 발바닥을 빠악빠악 긋더니 뾰족한 데로 발바닥 혈을 꾹꾹 찔렀다.

“병원에서 그게 안된대?”

대답이 없자 K는 상체를 일으켜 힘겹게 목을 돌려 그녀 쪽을 바라보며 다그치는 조로 또 물었다.

“글쎄∼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요.”

녀자는 마지 못해 대답하는 것 같았다.

“왜 생각해본 적이 없어? 이식하면 앞을 볼 수도 있잖아.”

녀자는 갑자기 K와 눈을 맞추며 이상하리 만큼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왜요? 제가 눈이 보였으면 좋겠어요?”

녀자는 생글생글 웃으며 말을 했다.

“아니∼ 겉이 이렇게 멀쩡한데 눈이 안 보이니 좀 그렇잖아.”

K는 그녀의 눈을 피해 고개를 홱 돌려서 다시 마사지 베드 구멍에 얼굴을 박았다.

“내가 병원에 가서 알아볼가?”

K는 등뒤가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 때문인지 가슴도 뭔가 이름 못하게 따뜻해지고 있었다.

 

6.

K는 끝내 자신이 안구이식을 해주고 싶다는 말은 하지 못했다. 자신의 눈을 줄 거라는 말을 꺼내야 하는데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고 있었다. 하여 괜스레 더욱 빈번하게 안마방을 찾았다. 어떤 날에는 마사지를 받지 않고 그녀를 끌고 나와서 동네 까페에 가서 커피를 마셨다.

어느 폭염이 쏟아지던 날, 그녀가 하얀 발에 하늘색 샌들을 신은 날, K는 그녀와 둘이서 시원한 맥주를 마시면서 원하지 않았던 행복감을 느끼기도 했다.

오렌지색으로 염색한 머리카락은 해빛 아래 붉은색과 노란색이 엇갈리며 반짝반짝 눈이 부셨고 알릴락말락 연한 립스틱을 바른 입술은 청순미가 묻어났으며 핑크빛 매니큐어를 한 손은 유난히 길고 하얬다. 오른쪽 귀에만 건 이어링은 갸날픈 어깨 우에까지 드리워 각별히 눈길을 끌고 있었다. 그녀는 멋스레 선글라스를 낀 채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기분 좋게 웃고 있는데 검은 선글라스 안에 숨은 두 눈도 반달모양이 되여 웃는 것만 같았다.

K는 그런 그녀를 보면서 고향 뒤산에 피여있던 보라색 들국화를 떠올렸다. 더위가 다 물러간 시원한 산과 들에서 이리저리 기꺼이 바람에 몸을 맡기면서 자유를 부르는 그 꽃이 생각났다. 탁 트인 푸른 하늘 아래 유유한 몸짓으로 산과 들에 녹아드는 고향의 령혼이였다.

K는 속이 움찔해났다. 내가 왜 그 꽃이 생각날가?

K는 꽃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 누군가를 보면서 무언가를 떠올려본 적은 더더욱 없었다.

이 이름 모를 감정은 또 뭐란 말인가? 그녀를 보면서 왜 들국화가 떠오르고 고향이 떠오르지?

그는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서 온몸의 전률을 느꼈다. 

 

7.

이상야릇한 감정에 사로잡힌 K는 말을 꺼낼 수 있는 타이밍을 찾다가 려행을 선택했다. 그리고는 몇번을 망설이다가 그녀에게 “려행 같이 가지 않을래?”라고 건의했고 그녀는 이튿날로 “가요.”라고 답장이 왔다.

그들은 서장을 목적지로 정했다.

K일행을 태운 차는 40대 중반을 넘긴 로양이라는 남자가 운전했다. 십년 전에 온 가족이 서장에 려행을 왔다가 아예 서장에 눌러앉았다는 로양, 천로天路의 투박함과 창망함은 그 남자에게 예리한 눈빛과 기분 좋은 웃음소리와 겉늙은 외모를 만들어주었다.  

K는 로양한테 매일 보는 서장의 풍경이 지겹지 않는가고 물었다. 그러자 로양은 허허 웃더니 “매일 봐도 여전히 아름답죠. 필경 기후와 위치가 다르면서 그 아름다움도 다 다르잖아요.” 하고 사람 좋게 대답했다.

그러자 그녀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녀는 앵두색 큰 스카프로 검은 선글라스만 내놓은 채 머리와 온몸을 감고 있었다. “멀고 가깝고 높고 낮은 곳에서 보는 풍경이 다 다를 거예요. 그러니 그런 천만가지의 아름다움을 다 본 사람은 없을 거예요.”

K는 그녀를 보고 씨익 웃었다.

 

K일행을 태운 차는 318국도를 따라 빠른 속도로 달렸다. 해발 5천메터의 미라산 입구에서 동방 스위스로 불리우는 린즈까지, 피곤하긴 하나 더없이 즐거운 려정이였다.

인도양의 따뜻하고 습윤한 기류가 린즈를 침윤하여 서장의 투박한 인상을 걷어주고 대신 풍만과 윤택을 안겨주었다. 남차바르와봉은 하늘 높이 우뚝 솟고 노란색과 자주색의 들꽃이 산비탈을 덮고 있는 가운데 간혹 가다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 덩치 큰 야크가 꽃밭 속을 느릿느릿 걸어다녔다. 

한자리에서만 굽어보고 올리봐도 크고 작은 풍경화가 눈앞에 펼쳐졌다. 수미秀美와 장활壮阔, 신성神圣과 령동灵动, 사람들이 려행을 통해 추구하는 원소가 이 림해중에서 의탁을 찾을 수 있었다.

K일행은 라싸에서 하루 묵고 곧장 남초호로 향했다. 하느님이 인간세상에 하사한 ‘푸른 보석’, 인간이라면 보는 순간 반드시 마음을 빼앗기게 되여있는 매우 아름다운 호수라고 한다.

K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호수 앞에서 그녀에게 눈을 주고 싶다고 고백하고 싶었다. 그런 아름다움 앞에서라면 그녀도 자신을 용서해줄 것 같았기 때문이다.

 

K는 이 깨끗하고 아름다운 호수를 앞에 두고 넋을 잃었다.

너무 아름다워서 모든 게 용서가 될 것만 같았다. 그래, 뭐가 두려운가. 이 아름다운 호수 앞에서 내 마음속의 사랑과 두려움을 말하자.

“내 눈 줄게. 내 눈알을 이식해.”

K는 그녀와 나란히 서서 애써 담담하게 말했다.

그 순간이였다.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안온히 자리잡고 있던 것이 장과 식도를 역류하면서 입안에까지 치밀어올라왔다. 그것은 그녀의 눈알이였다. 검은 동공이 동그랗게 떠있는 피투성이의 눈알이였다. 언청이의 무자비한 손갈퀴에 끊어진 힘줄이 아직도 흔들거리는 그 작은 탁구공 같은 눈알이였다.

K는 갑작스레 들이닥친 상황에 토할 것만 같아서 헛구역질했다. 정말 눈알이 나왔을가? 입안에서 피비린내가 풍겼다.

K는 후둑후둑 세차게 요동치는 가슴을 부여잡고 간신히 서있었다. 그녀는 그런 K를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눈은 여전히 호수를 향하고 있었다.

앵두빛 빨간 스카프는 호수가에 물든 한점의 노을마냥 붉디 붉었다.

“싫어.”

그녀는 조용히 대답했다. 마치 오래전에 예상했던 말을 들은 것처럼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난 당신만 있으면 돼요.”

호수의 쪽빛 물결이 록색 물결로 변했다가 다시 쪽빛으로 변했다.

될 수만 있다면 피비린 눈알이 아니라 아름다운 저 호수를 그녀의 비여있는 한쪽 눈에 박아넣고 싶었다. 

K는 입안에서 풍기는 피비린내를 겨우 참아내며 힘겹게 또 입을 열었다.

“내 눈을 주고 싶어. 내가 뽑아갔으니.”

위가 거세게 요동치더니 또 눈알이 입안으로 치밀어올랐다. 힘 있는 손이 아가리를 쫘악 벌려주었다. 이번에는 하나가 아니라 수천개가 우르르 쏟아져나왔다. 한껏 벌려있는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검은 동공마저 희미해진 눈알들이 폭포처럼 사정없이 쏟아지더니 호수에 퐁당퐁당 떨어졌다. 쪽빛 호수는 순간에 피빛으로 변했다가 다시 쪽빛으로 변하는 것을 반복했다.

K는 아름다운 호수 앞에서 마음속에 있던 공포스러운 눈알들을 쏟아냈다.

 

8.

유별나게 달이 붉은 밤.

검은 파도가 넘실거리는 바다 우로 빨간 점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그 빨간 점은 달모양을 하고 붉게붉게 타올라서 검은 하늘을 태웠다. 검은 연기가 뭉게뭉게 하늘을 더욱 검게 만들었고 그 속에서 붉은 달은 더 강렬하게, 더 요염하게 하늘을 태웠다. 걷잡을 수 없게 맹렬해진 붉은 달은 마침내 화산이 되여 폭발하고 온 대지가 빨갛게, 뜨겁게 변해버렸다.

K는 빨갛고 뜨거운 액체가 몸 구석구석의 빈 곳을 채우고 있음을 느꼈고 순식간에 차오르는 그 물건 때문에 가슴이 답답해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서장에서 돌아온 지 한달이 지났으나 그 사이  K는 감히 그녀를 찾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남호초 앞에서 모든 걸 고백하긴 했어도 그에게 두려움이 여전히 남아있었다.

호수 앞에서 그의 고백을 듣고 말없이 흘리던 그녀의 눈물이 호수에 떨어져 쪽빛 물결로 사라졌다. 그리고 말없이 돌아서던 빨간 뒤모습이 따가운 점이 되여 가슴 속 붉은 달로 떠올랐다.

K는 고통으로 이 모든 고난을 결속짓기로 했다.

그 날 밤, 가슴에 있던 붉은 점은 더욱 붉어졌다. 마치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문신은 빨간 빛을 토했다.

 

며칠 후 <리화로의 한 맹인 안마방, 알고보니 퇴페영업소였다>는 기사가 대문짝처럼 조간지에 실렸다. 조간지 김기자는 년말에 큰 걸 건졌다며 답례로 꽤 고급진 호텔에서 한상을 차렸다.

“눈은 확실히 먼 녀자인 거 같았는데∼”

김기자는 미안한 기색을 보였다.

K는 그런 김기자한테 미소를 지어보였다. 입귀가 천천히 올라가면서 얼굴이 흉물스럽게 쪼그라드는 자신의 얼굴표정을 느낄 수가 있었다.

K는 김기자한테 자신이 서장에 갔다온 이야기를 장황하게 널어놓았다. 김기자는 거기에 가는 사람은 거의 다 마음의 세례를 받기 위해 간다고 하면서 무슨 수확이 있냐고 물었다.

“느낀 게 많지. 사람이란 게 너무 틀에 쪼여있으면 안돼. 자연과 어울려 자연의 일부가 돼야 하거든. 자꾸 자연을 지배하려고 하지 말고 너도 자연의 일부인 동물이란 걸 알아야 돼. 거긴 계급이 없어. 계급장 같은 건 개나 줘라 해. 거기 대소사 앞의 개를 봐. 그리고 야크들도 사람이란 물건을 의식하지 않아. 걔들은 우릴 딱 보고 저희들과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아. 그냥 옷을 걸쳐입은 우습강스러운 개나 소로 생각하지. 거긴 다 평행선이야. 사람이 정해준 질서 대신 자연의 질서에 맞춰 충돌 없이 잘산다니까.”

“그래요? 한번 가봐야겠네.”

김기자가 호기심이 바짝 동한 눈으로 K를 보며 말하자 K는 또 얼굴이 이그러지게 웃었다.

“사람이 지겨워. 난 말이야. 다시 태여나면 대소사 불향을 맡는 개가 될 거야.”

 

9.

술이 거나해진 K는 비틀거리는 다리를 끌고 안마방을 찾았다. ‘금새안마방’ 간판은 온데간데 사라지고 가게 안은 캄캄했다.

K는 문을 탕탕 두드렸다.

까만 집안에서 불이 탁 켜지더니 녀자가 코트를 걸치면서 걸어나왔다.

“그간 별일 없었지?”

녀자는 선글라스를 끼지 않은 맨눈으로 안부를 묻는 K를 쳐다보았다. K는 그 무섭고 공포스러운 눈을 외면한 채 비칠비칠 집안에 들어섰다. 방을 찾아 웃옷을 훌렁 벗고는 침대에 엎뎌 마사지 베드 구멍에 얼굴을 박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가? 늘 그랬듯이 라벤더향이 퍼지면서 조그맣고 힘있는 손이 목 부위부터 주물렀다. 

이 손, 이 손 때문에 내 몸은 곧 시원해지겠지. 내 몸은 더는 아프지 않고 시원해질 거야.

조그마한 손은 금세 쇠고랑이라도 된 듯 힘을 썼다. 목을 꼭 죄인 K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녀는 조그마한 몸으로 K를 타고 앉아서 목을 누르고 있었다.

“미친 놈! 변태새끼! 니 땜에 내 인생이 또 날아갔어. 내가 널 가만둘 거 같아? 니 놈이 내 눈알을 빼가게 놔두어도 이번엔 아니야!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

미친듯이 울부짖던 문죄는 대뜸 하소연처럼 들리다가 마침내 울음소리로 변해버렸다. 그러더니 K의 목을 누르던 손의 힘도 사르르 녹아들었다.

“다 왔는데 왜?”

K는 이대로 모든 것을 끝내고 싶었다. 그녀의 손에서.

“미친 새끼!”

녀자는 주르륵 K의 등에서 내리더니 그 옆에 있는 쏘파에 미끄러지듯 물러앉았다.

K는 죽은듯이 누워서 숨만 헉헉댔다. 코로 숨을 크게 들이쉬여서 코로 한껏 내보냈다. 거대한 악마가 등에 걸쳐앉아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게 했다. K는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커다란 대못으로 박아놓은 것처럼 아무리 발악해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무언가 딴딴한 것이 K의 뒤통수를 세게 강타했다. 머리가 뗑하더니 뜨거운 액체가 흘러 목덜미를 적셨다.

하지만 K는 여전히 얼굴 구멍에 얼굴을 들이민 채 꼼짝할 수가 없었다. 눈물인지 무엇인지 뜨거운 액체가 크게 뚝 하고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미친 새끼! 병신새끼!”

K는 조용히 누워서 기다렸다. 가슴 속에서 아직도 활활 타오르는 그 불을 꺼주기를 기다렸다. 이 불타는 가슴을 잠재워줄 그런 차거운 액체 같은 것을 기다렸다.

그 액체가 홍수가 되여 내 가슴 속 붉게 타오르는 그것을 시원하게 덮칠 때, 스나미가 되여 그 작은 것을 한입에 삼켜버릴 때 그 작지만 빨갛게 독을 쓰던 붉은 점은 강바람 속의 초불마냥 삶에 대한 집착을 깜빡이면서 마지막 숨을 고르리.

그리고는 살아있던 것이 없어진 것처럼 긴 여운과 텅 빈 공백을 남겨 내 가슴 속 달은 다시 노오랗고 따스하게 환생하리.

새해 첫 해돋이마냥 감동과 감탄, 희망과 기쁨을 자아내며 푸른 파도가 넘실거리는 바다 우에서 탁구공처럼 퐁 튀여나오리.

그러면 불타는 지옥에서 벗어나 이제껏 느껴보지 못한 희열과 사랑과 자유에, 내 미소는 환해지고 내 마음은 따뜻해지리.  

출처:<장백산>2017 제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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