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국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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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담] 고향을 쓰는 작가
2019년 07월 16일 10시 49분  조회:329  추천:0  작성자: 문학닷컴

고향을 쓰는 작가

최국철&김홍란

 

-편집자의 말-

2017년 1호부터 “작가를 만나다”라는 코너를 신설한다. 대담형식의 이 코너는 그동안 주옥같은 작품으로 우리 문단을 빛내며 창작활동을 활발하게 해온 중견작가는 물론, 문학이 도외시되는 시대에 돈이 안되는 문학을 대담히 선택하여 우리 문학의 대를 잇고있는 젊은 작가, 그리고 창작을 하는 한편 각종 형식으로 조선족문학사업의 발전에 기여를 해온 문학인들을 만나게 될것이다. 쟝르 구분없이, 세대순차별이 아닌, 문학현장에서 열심히 창작의 필을 갈고있는 작가와 또 우리 문학의 발전을 위해 애를 끓이고있는 문학인 한분 한분을 만나 문학을 담론하면서 작가 개인의 창작인생을 조명하는 한편 조선족문단 전반을 되짚어보는것으로 우리 문학의 보다 나은 앞날을 기하는 계기를 만들어보고저 한다. 

 

 

초대작가: 최국철(소설가, 연변작가협회 주석)

진행자: 김홍란(《도라지》잡지사 전임 주필)

 

일시: 2016년 12월 26일

장소: 연변작가협회 사무실

김홍란(이하 김): 안녕하세요? 《장백산》잡지사의 부탁으로 신설 코너 “작가를 만나다”의 진행을 맡게 되였습니다. 첫 초대작가로 그동안 독특한 창작풍격으로 우리 문단의 중견역할을 톡톡히 해온 최국철작가님을 모시게 되여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최국철(이하 최): 《장백산》에서 새롭게 이런 코너를 마련했다니 반갑습니다. 제 기억에 오래전 타잡지에서도 이런 코너를 마련했지만 생명력이 길지 않았던것 같은데 《장백산》에서는 저뿐만 아니라 우리 문단의 유명한 작가들을 재조명하는 좋은 일을 오래동안 견지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김: 네, 그러도록 노력해야겠죠. 소설가 최국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것이 이주문학의 대표적인 작가, 대량의 방언 사용과 민속의 재현으로 굵직한 작품들을 수두룩 써냄으로서 자기만의 독특한 창작개성을 구축한 작가, 뭐 이런것들이 아닐가요? 선생님의 수많은 중단편소설이 그렇고 장편소설이 그렇듯이 우리 민족의 애환과 아픔과 력사가 민속적인것, 전통적인것과 잘 결합된채 소설속에 고스란히 녹아있어 그 연구가치가 더구나 크다고 봐요.

작품에 대한 얘기를 나누기에 앞서 먼저 선생님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선생님은 1962년 두만강변의 남대촌이라는 곳에서 태여나셨다죠?

최: 제 고향은 현재의 도문시 량수진 남대촌이예요. 저의 소설에서 나오는 남대천이 바로 남대촌이죠. 남대촌은 일명 남대동이라고도 부르는데 지난 세기 80년대 초까지 도문이나 훈춘역에서 기차표를 사면 남대동(南大洞)으로 찍혀 있었어요. 

연변의 향진들이 청정부시절부터 중화민국, 간도성시절을 거치면서 행정 소속을 련속부절히 바꾸었는데 그중에서도 저의 고향만큼 다사하게 이름을 변경하고 소속 관계를 변경한 곳은 드물어요. 모얼하전자, 큰골, 남대동, 남대려, 영호촌, 남대촌... 고향 명칭이 바뀐것만큼이나 량수진도 행정관할소속이 수없이 바뀌였는데 훈춘청(厅)- 왕청현- 훈춘현- 그러다가 현재의 도문시 행정관할소속으로 자리잡고있죠. 그래서 저는 여간해서는 도문출신이라는 말을 잘 안해요. 전 훈춘출신입니다.

량수진은 조선의 온성과 마주한 분지로서 석탄과 목재가 풍부하고 농사가 잘되는 고장이예요. 저의 고향 역시 광산마을인데 1934년 일본사람들이 집단부락을 만들 때 억지로 세운 안전부락이죠. 제가 중학교를 다닐 무렵까지 “토창밖(토성바깥)”, “토창안”이라는 낱말이 어른들 입에서 자주 오르내렸고 실제로 허물어진 토성자리에 검스레 퇴색한 황토흔적이 남아있었어요. 이런 실제 풍경들이 제 소설에 많이 나왔죠. 땅밑에 3기 갈탄이 무진장하게 매장되여 광산마을이라 이름지어지기도 했지만 비만 오면 찰진 황토흙으로 도배되군 하여 안해 없인 살아도 장화 없인 못산다는 그런 구차한 동네였어요.

그런 동네에서 저는 4남매의 맏이로 태여났어요. 석탄을 줏으며 가난을 배웠고 눈 오는 겨울이면 새 착고를 놓고 참새, 메새 떼를 좇으며 소년시절을 보냈죠. 어려서부터 저는 부지런을 떨기 무척 즐겼고 큰아들로서의 종가적인 책임감을 몸으로 배우면서 자랐어요. 저의 문학은 바로 이런 구차한 동네에서 시작되였죠. 

김: 선생님께서 문학지망생이 되는데는 어떤 계기가 있으셨나요? 그리고 작가로 성장하기까지 독학으로 문학을 배우셨다고 들었어요.

최: 독학의 개념이 어떤것인지 개념상에서 정리가 잘 안되지만 만약 김선생님이 말한 독학의 개념이 제가 생각하는 독학과 같은 개념이라면  저는 문학은 독학에서 시작되고 독학에서 끝나는 학문이라고 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문학가는 고독하고 문학은 개인적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가난한 농민의 자식으로 태여났고 구차하게 자랐지만 어렸을 당시는 우리가 구차하다는걸 몰랐어요. 다른 집들도 다 우리와 비슷했으니까. 참조물이 있어야 뭐 구차하다, 가난하다 그런걸 알게 아닌가요. 하지만 못산다는건 배고프다는것과 직결되니까 배고픈 고생 없도록 쌀이 많았으면 하는 바램은 들었고 문학에 미치면서부터는 책을 마음대로 살수 있는 돈이 없다는 현실만은 알았어요. 

소학교 3학년때,  《고옥보》라는 책을 읽고는 장차 나도 이런 글을 써야겠다는 욕심이 생기면서 문학에 빠져들었죠. 지금 보면 격조가 없는 책이였음에도 그 당시엔 그토록 유혹이 컸었어요. 돌이켜보면 어린 나이에 너무도 일찍 자신의 미래를 설계했다는게 조금은 놀랍기도 하고요… 그러면서 할머니의 이갸기를 들으며 문학적인 감성을 가지기 시작했던것 같아요. 책이 저의 첫번째 계몽선생이라면 글 한자 모르시는 할머님은 저의 두번째 계몽선생님인셈이죠. 

김: 《천지》(《연변문학》)월간사의 김창석선생님은 일찍 최선생님 댁에 가보시고 선생님이 대단한 독서가이고 장서가라고 하셨어요. 읽을만한 책이 적었던 시절, 문학공부를 위해 지어 조선에서 문학책을 밀수로 구입하여 읽었다고까지 하는데 재미난 에피소드가 많으실것 같네요.

최: 그 당시 연변의 모든 농촌이 그러하듯 정보가 꽉 막혔고 여간해서는 책을 구할수가 없었죠. 저의 고향이 두만강과 몇리 사이를 두고있다보니 전 두만강 건너에 친구들이 없었어요. 그러다가 사회에 진출한후 량수공사 소재지마을에서 친구들을 사귀면서부터 온성도(사이섬, 혹은 샛섬이라고도 함)에 나가 거기로 일하러 다니는 조선사람들과 접촉하게 되였고 거기서 온성 도서관에 남편이 있다는 녀인과 만나면서 책을 밀수하기 시작했죠. 돈이 없으니까 그 당시 한참 류행하던 분홍색 내의까지 벗어서 책과 밀수한적 있어요. 

그렇게 밀수한 책을 읽으면서 조선문학에 심취되였어요. 하기에 저는 조선문학의 영향을 결정적으로 받았다고 할수 있죠. 지금도 조선의 장편소설들을 보관하고있어요. 조선작가동맹기관지 《조선문학》을 그냥 구독했었는데 그게 지난 세기 80년대 말까지 가능했던거 같아요.

그 시기 저는 친구들과 사귀면서 사회를 알아가기 시작했고 의리에 눈 떴어요. 저의 사회생활에서 가장 돌출한 변곡점(变曲点)을 찍은 시기가 그때라고 봐요. 제가 정부기관으로 출근하게 된 결적적인 계기도 그런 친구들과 접촉했기에 가능했고요. 

저는 친구들이 보여주었던 의리를 가슴으로 배웠어요. 남을 배반하지말고 끝까지 의리를 지켜야 한다는건 나쁜 일이 아니지요. 제가 책에 너무 미쳐있으니까 친구들은 어디 가서든 눈에 책이 보이면 저한테 주겠다고 마구 걷어다 주는 의리를 보였죠. 그들이 책을 얻어다 주면 저는 돈이 없어 술은 못사니까 대신 련애편지 수백장을 써줬는데 방언으로 말하면 와늘 소문 떨쳤지요.(웃음) 

김: 재미난 경력이시네요. 어느 글에선가 선생님께서는 “고향의 풍토와 인정은 나의 가장 큰 자산이다.”라고 하셨죠. 그런 선생님을 보고 어떤 분은 선생님한테는 고향이 “후근기지”나 다름없다고 했습니다. 아마 그래서 선생님은 2006년 연변일보 문화부 주임으로 전근하신 후에야 겨우 고향을 떠나오셨나봐요.

최: 딱히 그렇다고 할수는 없고, 솔직하게 말해 가난했으니까 도시에 들어와 집을 장만할 형편이 못됐죠.(웃음) 2008년에야 연길로 상경했으니 거의 50년을 시골에서 살은셈이예요. 제가 지속적으로 고향 남대천(남대촌)을 소설무대에 세우고 고향 사람들을 많이 쓰는걸 보고 이젠 고향 사람과 고향 이야기에서 떠나라는 조언도 많이 들었어요. 하지만 제 주견을 굽히지 않았어요. 사실 고향이란 협의적으로 말하면 자기가 태여난 곳이지만 광의적인 의미에서는 우리 민족의 생존현장의 축소판이 아닌가요. 거기에서 사는 사람들, 잘 알고있는 사람들을 그려야 한다고 생각해요. 막언이 “고밀향”을 써서 노벨상을 받은후로는 그런 조언을 하는 분들이 없어졌어요. 글쟁이에게 있어서 고향의 하늘과 땅은 가장 근원적인 령혼의 장소이며 글의 주제적인 발견, 흥분점이 무진장하게 깃들어 있는 곳이죠. 

김: 네, 사실 누구에게나 고향은 정이 가는 곳이고 영원한 정신적 안식처이죠. 그런중에도 선생님의 고향은 그 누구의 고향보다 력사적으로도, 환경적으로도, 위치적으로도 선생님의 창작에 좋은 영양 공급지가 된것 같아요. 그런 고향을 가진건 작가로서의 선생님에겐 행운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선생님에게 작가적 혜안과 사색과 고민이 있었기에 그 소중한 소재들을 작품속 적재적소에 잘 녹여내실수 있었다고 봐요.

우에서도 선생님께서 잠간 말씀하셨지만 선생님의 창작은 또 할머님을 빼놓고 얘기가 안될 정도로 선생님의 작가인생에 할머님이 주신 영향이 아주 크시다고 들었어요.

최: 네. 키가 아주 작은 분이셨고 운신하기 힘들 정도로 몸이 불편한 분이셨지만 이야기를 참으로 잘하셨고 정감이 세심하고 은정이 많은 분이셨죠. 구차했던 그 시절 저에게 돌리셨던 은정이라고 해봐야 가만히 감춰두셨던 사탕 몇알이 고작이고 제가 앓으면 이마를 살뜰하게 짚어주시고 어머니에게 정통편약을 먹이라고 분부하시고 일본화로를 후후 불면서 뜨더국을 끓여주시는 등 사소한것들이지만 그 정을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나요. 장손인 제가 밥을 굶으면 안된다고 늘 당신에게 차려졌던 밥을 가만히 덜어주시군 했죠. 만년에는 저를 련인 기다리듯 하셨어요. 찾아뵐 때마다 용돈을 드렸는데 그 당시 50원짜리가 큰돈이라며 받지 않으셔서 그 돈을 다시 10원짜리로 바꿔서 드려야만 받으시군 했죠. 할머니에게 용돈을 드리던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저는 가슴이 저려납니다. 처음으로 하는 말이지만 저는 뭐가 모성앤지 잘 몰랐는데 이런게 모성애가 아닐가요? 할머니는 저에게 당신이 시집살이를 하시던 그 시절을 수많이 이야기 해주셨는데 그 시기가 바로 지난 세기 30년대쯤이였어요. 그래서 저는 첫 장편소설로 30년대를 그렸던거죠.

저는 두 부모님에 대해서는 글을 쓴 일이 별로 없지만 할머님에 대해서는 정말 많이 썼어요. 그만큼 할머님은 제 인생의 큰 스승이시죠. 지금까지 저는 고향에 관련된 얘기를 많이 썼는데 저의 문학은 결국 할머니와의 공동작업이고 고향과 민족과의 공동적인 작업이라고 생각해요.

김: 네, 선생님 마음안에 계신 할머님이 참 거룩하시다는 생각이 드네요. 선생님은 일찍 문학자서전에서 “고향의 색바랜 사진들이 내 혈관속에서 끊임없이 인화되여 나오고 그 사진들속에는 찬란한 ‘명’보다는 어두운 ‘암’이 더 많으며 나는 울면서 문학을 하고 울기 위해 글을 긁적거린다.”고 하셨어요. 그만큼 선생님은 대중들에게 가까이 다가서있고 특히 최하층 빈곤한 사람들의 아픔을 그려오며 그들의 대변인이 되고자 모지름썼다는 말씀이 되지 않을가요? 그것이 처음부터 작가님의 작품에 여실히 체현되였다고 할수 있죠. 선생님은 1986년 《천지》 12호에 발표한 처녀작 “시골의 빛갈”부터 독자들의 주목을 확 끈걸로 알고있어요. 처녀작 한편을 읽고도 《천지》월간사의 김창석선생님이 “우리 문단의 노다지”를 발견했다며 흥분을 감추지 못하셨을 정도로 선생님은 유망한 작가로서의 가능성을 충분히 보여주신거죠. 

당시 원고지도 아닌 그냥 백지에 원고를 써서 보내온 무명작자의 소설을 읽으며 편집선생님들은 이색적인 감정과 반색의 감정이 교차되여 흥분을 금치 못했다고 들었는데, 그때까지 문단과도 그 어떤 작가와도 아무런 연분 없은 백지와도 같았던 선생님은 그렇게 하얀 백지에 대담히 “시골의 빛갈”을 진하게 색칠해놓으신거죠.

최: 제가 장가간 이듬해였는데 안해가 옆에서 자고있었고 저는 베개를 가슴에 고이고 엎드린채 석현종이라는 누런 백지에 소설이랍시고 긁적거렸어요. 마음에 들지 않아 안보낼가 하다가 안해가 길고 짜른건 대봐야 안다고 하길래 큰 기대없이 투고했죠. 글자수도 7천자밖에 안됐어요. 후에 발표된 글을 보니까 미흡한데가 있어서 그걸 보완하느라고 자매편으로 쓴게 바로 “봄날의 장례”였어요.

김: 선생님은 소설을 읽으면서 생활의 본질을 들여다보는 작가적 안목을 키우셨고 또 그것을 소설로 조리해낼줄 아는 작가적 재능을 키워오셨다죠. 한편 풍부한 인생체험이 없다면 아무리 출중한 문학적재능을 갖추었다고 해도 작품에서 깊은 인생철리를 보여주지 못한다고 봐요. 선생님은 이 량자를 다 갖춘 “준비된 작가”였기에 일단 첫 작품을 터뜨리자 일사천리로 달리며 우리 문단을 놀래우는 수작을 륙속 뽑아내실수 있었던거. 처녀작을 발표하신지 1년만인 1987년  《천지》 12호에 발표한 “봄날의 장례”는 단박에 히트를 치며 《천지》문학상, 연변작가협회 제1회 화림신인문학상, 연변자치주정부 진달래문예상, 전국소수민족문학 신인상을 련이어 수상하면서 초기 창작의 대표작이 되지 않았습니까? 

최: 후날 읽어보니 마음에 썩 들지 않았지만 그 당시 우리 사회의 공간이 그쯤이였고 그 공간을 확장하는 재간이 그쯤이라고 자아위안하죠. 그 소설속 내용은 저의 고향에서 생긴 진실한 모티브였어요. 그 소설을 쓰면서 고향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굳힌것 같아요. 지금 보면.

김: 그후 1997년, “최국철소설연구세미나”를 개최한걸로 알고있어요. 11년이란 짧은 창작경력을 갖춘 작가의 소설세미나를 개최했다는건 전 문단적으로도 이슈가 아닐수 없어요. 그것도 새파랗게 젊은 30대 중반의 작가가 문단의 집중조명을 받은건 지금까지 선생님이 유일하지 않을가싶네요.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건 데뷔해서부터 짧은 11년간 선생님이 “시골의 빛갈”, “봄날의 장례”, “묘자리를 파는 사람들”, “흘러가는 겨울”...등 수많은 인기작을 발표하시면서 독자들과 평론계의 강렬한 반향을 불러일으켰기때문이라고 봐요.

최: 지금 보면 세미나는 창졸하게 진행됐어요. 제가 주인공인데 제때에 소식도 받지 못해서 늦잠을 자다가 아주 창황하게 연길로 달려왔지만 이미 세미나 일정을 절반도 넘게 소화하고있더군요. 그래서 회의 참가자들은 신랑 없는 결혼식을 치렀다는 우스개를 하기도 했죠. 하지만 그 당시의 문단상황에서 보면 30대 중반 작가의 작품세미나를 한다는건 대단한 일이였지요.

김: 그럼요. 그래서 제가 이슈라고 하잖아요. 선생님, 어떻게 말하면 인물형상 부각은 소설의 성공여부를 좌우지한다고 할수 있겠죠? 수많은 소설의 수풀속에서 선생님의 소설이 두드러질수 있었던건 그만큼 선생님이 인물개성화 작업에서 남다른 재기를 보여주며 자기식세계를 구축하셨기때문이라고 봐요. 또한 주인공은 물론 부차적인 인물 모두를 살아움직이도록 그려내면서 끝까지 책임지고 가는데, 결코 쉽지 않은 이 작업을 선생님은 참 잘 완성하셨죠. 그리고 개혁개방의 시기를 맞은 조선족은 그 어느 민족보다 격변기의 앞장에서 달리다보니 의식의 변화, 생활의 양상과 절주의 변화들이 빨랐어요. 그런 좌충우돌속에서 조선족 농민들이 겪었던 아픔과 좌절과 기회와 도전을, 그들의 생생한 삶의 현장을 선생님은 많은 소설속에 담아내면서 과도기적 인물형상을 그려내셨어요. 

최: 과찬입니다. 전 지금도 첫 장편인 《간도전설》을 참괴하게 생각하는데 그중 첫째 원인이 크게 시작했다가 작게 끝난것때문이예요. 처음에 수많은 인물들을 어리둥절하게 불러왔는데 정작 장편 한부라는 작은 공간에서 이 인물들을 다 끌고 다니면서 소화해내는게 너무 부담스러웠어요. 그래서 사건 하나를 만들어놓고 거기에서 등장인물들을 죽게 했죠. 첫 독자인 안해가 왜 죽이는가며 안타까워 하길래 나한테 위신 없으면 다 죽인다고 했어요. 독자들에게 작중인물을 교대해야 한다는 부담감이지요. 저는 소설이란 결국 인물에서 시작하고 인물에서 끝난다고 봐요. 그래서 소설은 인물형상화 작업이고 개성화 작업이라고 말하고싶어요. 

김: 장기간 우리의 문학은 천편일률적으로 사실주의 창작방법만을 고집해왔었죠. 그러다 서방으로부터 여러가지 문학사조를 받아들이면서 우리의 창작방법도 다양한 실험을 시도하게 됐어요. 이에 적지 않은 작가들이 고민하고 방황하고 갈등을 느끼기도 했고요. 선생님의 짧은 글(혹은 락서》)인  “이것이 소설이 옳은가?”를 보면 줄곧 사실주의 창작방법을 견지해오던 선생님도 잠간의 방황을 하신것 같은데 그러한 갈등을 어떻게 이겨내셨는지요?

최: 지난 90년대 초부터 각종 사조의 영향으로 수많은 실험작들이 출시되였고 수많은 쟁론들이 오갔지만 결국 소설은 인물이다로 회귀했다고 봐요. 리론적으로 문학사조란 한 시대의 문학사상의 어떤 흐름이라고 정리하겠지만 쉽게 해석하면 독자들의 구미에 맞는 양식이라고 해석해도 과언이 아닐거예요. 그런데 사실주의 문학창작방법은 수백년 혹은 수천년을 거치면서 이미 검증되였다고 보는 반면 다른 창작방법은 아직까지 흥쾌한 상태가 아니라는거죠. 

저도 창작방법에서 많은 고민을 해봤어요. 소설쓰기 버전을 새롭게 해야 하는가?... 감각과 새로움, 실험적인것 등등 기웃거리다가 결국 이미 배운 “구관이 명관식”이라고 사실주의 창작방법에로의 귀환이 저한테는 알맞는 창작방법이라고 결론내린거죠. 이른바 시류에 편승하지 못하면 주류에서 밀려난다는 “위기”를 나름으로 넘긴겁니다. 

한국작가들이 간혹 우리 문단을 진맥하면서 자기들의 지난 세기 70년대를 재현한다고 해서 우리 작가들이 열을 받는데 저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요. 창작방법에 무슨 새로운게 따로 있고 낡은게 따로 있겠어요. 한시기 저는 한국작품을 많이 읽었는데 이제는 중국작가들의 작품을 많이 읽는쪽이예요. 작품은 우선 재미가 있어야 하거든요. 재미가 없는 작품을 어떻게 읽죠? 이건 대중소설, 혹은 대중문학과는 별개의 개념입니다.

작품창작은 독자들과의 합동호흡을 노리고 “눈높이”를 맞추려는 고민을 해야 해요. 현단계 독자들의 문학작품 리탈현상속에는 문학작품속에 실은 난해성(예술성), 정체성(무게) 같은 독자들을 피곤하게 할수 있는 요소들의 존재가 일정부분 작용하고있는것만은 부정할수 없어요.

김: 네, 맞는 말씀입니다. 한 작가에게 있어서 민족의식 또한 자못 중요한 역할을 하는 부분이 아니겠어요. 선생님은 소설에서 강렬한 향토애와 뚜렷한 민족적기질을 지닌 인물형상을 대량 창조해내셨죠. 그만큼 선생님은 민족의식과 민족애가 누구보다 강하신 작가라고 할수 있겠습니다.

최: 결국 그런 셈이지요. 저는 제가 조선족으로 태여난것을 가장 큰 자랑으로 생각하고 모어로 글을 쓴다는 점에 자긍심을 가지고있어요. 현재 우리 문단에서는 한족 문단을 주류, 우리 문단은 비주류라고 하며 주류문단에 진출하려면 번역이 따라가야 한다고 하는데 그게 틀린 말이 아니여서 다른 주해를 달 필요는 없지만 그러나 주류문단 진출에는 회의적입니다. 현재 한국에서 중국의 유명작가 작품들을 번역해서 출간하는데 가평요의 《페도》 한국어 번역본을 보고 크게 놀랐고 최근에 중국작가협회기관지인 《인민문학》 작품들을 한국어로 번역 출간한 《등불》을 읽으면서 거의 락망했어요. 중국의 유명한 작가 맥가의 작품은 지난 세기 중국농촌의 생산대와 “문혁”이 배경으로 나오는건데 번역작품에서는 그게 잘 드러나지 않고 문학적인 분위기를 찾아볼수 없었어요. 일전 중국작가협회 제9차 전국대표대회에서 맥가를 만나 그 번역작품에 관련해 대화를 좀 나눴는데 그 자신도 이런 점을 더러 알고있더군요. 다시말해서 문화적인, 작가 특유의 감정색채와 문학적인 분위기가 없다는거예요. 그렇다면 조선어를 중국어로 번역할 때도 이런 페단이 없다고 장담할수가 없겠죠. 제가 이런 말을 하면 번역가들이 반발할수도 있겠는데 존재하는 문제에서는 랭정해야 합니다. 중국어로 쓰면 몇만부를 거뜬하게 찍을수 있는것에 비해 모어로 창작한 작품은 겨우 천부 정도라고 자탄하는 현실이지만 저는 이런 현실은 모어로 창작하는 우리 조선족 작가들의 운명이라고 생각해요.

김: 네. 그럼 계속 선생님의 작품 얘기를 해볼가 해요. 한마디로 선생님의 초기창작의 경우 단편소설의 예술적분위기가 다분히 남성적이고 민속적인것으로 특징지어진다면 중편소설은 작품의 진실성으로 특징지어지며 그래서 단편소설에서는 독특한 서정성을 보여주는 반면 중편소설에서는 문학적으로 짜여진 서술성이 세련된 감을 보여주었다는 평을 받고있죠.

    하지만 뭐니뭐니 해도 선생님의 대표작은 우리 민족의 이주사를 다룬 장편소설 《간도전설》(제1부)과 《광복의 후예들》(제2부)이라고 봐요. 《간도전설》은 흑룡강신문 제5회 신춘문예 수상작으로 1998년도 흑룡강신문에 련재되였으며 그후 2005년 연변자치주정부 제5회 진달래문예상을 수상하는 등 우리 문단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작품이였죠. 선생님이 중단편소설에서 현실세계에 주목하셨다면 장편소설은 력사제재를 발굴하면서 민족의 굴곡 많은 이주사를 돌이켜보는것으로 한결 성숙된 단계에 들어서게 되지요. 

《간도전설》은 1936년 한해를 다룸으로써 수많은 긴박하고 리념적인 력사사건들이 소설속으로 들어오는것을 거부하였고 공산주의를 중심으로 한 수많은 리념과 이데올로기를 원천적으로 봉쇄하였죠. 대신 우리 민족의 전통적인 풍속, 인정세태, 언어를 대량 사용함으로써 계급적시각에서 력사를 바라보던 도식화에서 벗어났어요.

최: 작품에 이데올로기가 개입해서는 안된다고 강변하지 않겠어요. 우리들의 지난 력사는 이데올로기가 개입할수 있는 개연성이 충분합니다. 저는 이런것을 재론하지 않겠어요. 단 한부의 문학작품은 력사의 검증을 받게 되고 세례를 거친다고 봐야 합니다. 모든것은 다 변하게 되여 있어요. 다시 말하면 인간의 사상이나 의지는 단계별로 차이가 있다는거죠. 하지만 인간의 고유한 생존방식이거나 인간의 가장 위대한 창조의식, 사랑 같은건 변하지 않아요. 작가의 시선은 우선 인간에 맞춰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간도전설》은, 조선족작가들은 30대에 장편을 못쓴다는 편견을 깨보겠다고 총망하게 쓴것이기도 합니다.

김: 시장경제의 충격에 의해 문학은 사회생활의 중심에서 점차 변두리로 밀려나고 작가들은 곤혹과 방황을 겪게 되죠. 그러다 90년대 중반기에 이르러 작가들은 다시 차분한 분위기속에서 한층 성숙된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했고 문학 본체로의 접근을 시도하게 되였으며 창작에서 단일성, 단순성, 통일성을 극복하고 복잡성, 다양성, 모순성을 추구하게 되였죠. 영웅의 시대가 사라지고 평민의 시대가 도래됨과 하께 우리 문단의 소설은 “세속화현상”이 그 기본특징을 이루었어요. 그렇다면 선생님의 《간도전설》도 이상과 같은 맥락에서 창작되였다고 봐도 될런지요? 

최: 그런셈이죠.

김: 한마디로 조선이주민들의 삶을 리얼하게 다룬 《간도전설》은 우리 문단의 대표적소설로 되기에 손색 없습니다.

그후 꼭 10년이 지나 선생님은 《간도전설》의 후속작인 장편소설 《광복의 후예들》을 2008년부터 《연변문학》에 2년간 련재하고 2011년 출간하게 됩니다. 《광복의 후예들》은 객관화된 시각으로 해방후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을 다루었으며 토지개혁이라는 특정시기에 계급분화가 진행되는 과정을 통해 인간에 대한 폭력과 인간의 존재적인 비극을 표현했다는 점에서 이민제재소설의 새로운 시각을 열어주었고 이주민들의 해방후 생활의 단면을 객관적으로 표현하여 중국조선족이주사의 문학화를 새로운 단계에로 승화시켰다는 평을 받고있습니다. 

최: 과찬인걸 알지만… 제가 읽은 토지개혁관련 소설들은 일색으로 송가와 긍정이 위주였어요. 저는 작가란 지난 력사에 대한 시각이 랭정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다시 말하면 제 3자의 시각이거나 공증성이죠. 중국은 광복후부터 1978년 개혁개방까지 30여년간 무려 50여차례나 되는 운동을 치렀거든요. 이중에서 제일 첫번째 운동이 토지개혁운동이죠. 《광복의 후예들》의 무대가 바로 토지개혁이예요. 아주 어려운 배경을 택한셈이죠. 저는 토지개혁을 객관화해야 한다는 쪽입니다. 토지개혁뿐만 아니라 중국의 모든 지난 운동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예요. 저는 《간도전설》에서도, 그 자매편인 《광복의 후예들》속에서도 그 주인공으로 지주를 등장시켰어요. 광복이라는 거대한 변혁속에서 지주라는 인물의 인생변곡점, 다시 말하면 거대변혁속에서 다른 계급에 속한 한 인간의 비참한 추락사를 그리자고 했고 인간의 도덕이 어떻게 변이되는가를 그리자고 했어요. 전쟁만큼 영웅과 겁쟁이를 빨리 읽어낼수 있는 사회현상은 없죠. 수학에 대입이라는 용어가 있는데 문학에서도 마찬가지로 그 어떤 변혁의 장을 만들고 거기에 인간을 대입시켜보면 인차 알수 있지 않을가요. 말해놓고보니 비유법이 좀 이상하지만…

김: 아니요, 선생님의 뜻을 잘 알겠어요. 《간도전설》과 《광복의 후예들》에서 보여준 사라져가는 민족의 풍속과 방언을 토대로 한 민족어에 대한 천착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만큼 성숙했다는 평을 받고있어요. 선생님의 소설들에는 잡지사나 출판사의 편집인들이 난해와 어려움을 겪을 정도로 우리의 고유한 방언들이 뭇별처럼 깔려있으며 그만큼 선생님은 순수한 우리 언어를 지키는 파수군이 되고저 안간힘을 쓰시면서 자신만의 독특한 언어특점으로 우리 문학에 아름다운 풍경을 그리고있죠.

최: 편집들과 많이 마찰이 있었는데 대부분 문학언어 사용과 련관되죠. 지금껏 많은 문학언어를 수집했는데 무려 십여권에 달해요. 그외에도 장편을 쓰면서 함경도 방언에 대해 농후한 흥취를 가졌죠. 많은 분들은 제가 대화에서 방언을 다량 사용하니까 지문에서도 맘대로 방언이거나 토착어를 사용하는가고 오해하시는데 저는 지문에서는 철저한 문화어를 사용하고 또 꼭 다른 문학작품에서 얻은 단어를 사용하지 나름대로 창조하진 않아요. 문학은 과학이 아니지만 저는 지문에서만은 꼭 “과학적인” 창작방법을 고집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김: 《연변문학》 2016년1호부터 선생님은 또 새로운 장편소설 《공화국의 후예들》을 련재하셨잖아요. 이번의 장편소설이 앞서 발표한 두편의 장편소설과도 어떤 뉴대관계가 있는지요? 이번 장편소설이 그려갈 내용과 작가가 소설을 통해 보여주고저 하는바는 무엇이며 창작상에서는 또 어떤 형식을 취하고있는지요?

최: 《공화국의 후예들》속의 인물들은 대부분 《간도전설》과 《광복의 후예들》 속에 나오는 인물들의 후예들인데 이 소설은 매장마다 각기 다른 인물들이 등장하는게 구별점이예요. 소설의 서두에서도 밝혔지만 창작을 하면서 제가 남대천이란 실명을 밝히고 쓴 소설중 관련인물들의 동선을 다시 그리는 작업이예요. 일종의 련작인셈이지요.

김: 세권의 장편 자매편을 쓰기 위한 자료 수집도 만만치 않았을텐데요. 여기에는 고향에서 들은 이야기와 독서를 통한 력사공부와 수많은 현지답사와 취재과정의 로고가 있었을거라 생각되요. 그만큼 작품자체가 다루고있는 내용이 거창하니까요.

최: 따로 특별히 자료 수집하지는 않았고 두만강을 두번 답사하고 관련서적을 읽고 당안실을 몇번 찾은게 고작이예요. 하지만 소설외 두권의 평전을 쓰면서 자료를 많이 수집했어요. 또 기자시절에 제가 많은 곳을 답사하고 취재를 했는데 그게 또 좋은 자료가 된것 같아요.

김: 세월이 흘러 선생님께서 문단에 등단하신지 꼭 30년이 되셨네요. 그동안 선생님은 중단편소설 70여편, 수필 150여편, 신문원고 400여편을 써냈어요. 그리고 소설집 《여름은 더운 계절이 아니다》(1999), 장편소설 《간도전설》(1999)과 《광복의 후예들》(2011), 장편인물평전 《주덕해평전》(2012 조, 한문)과 《석정평전》(2015), 산문집 《중국조선족민속문화기행》(2014) 등 다량의 작품집을 출간했으며 장편소설 《공화국의 후예들》은 이제 련재가 끝나 출판되는 시점에 이르렀어요. 그사이 선생님은 전국소수민족문학 신인상, 길림성정부 장백산문예상, 연변자치주정부 진달래문예상, 연변작가협회 실화문학상, 《민족문학》 소설상 등 굵직굵직한 문학상을 포함한 각종 문학상 수십차례를 수상하는 화려한 문학경력을 쌓아오셨어요. 이제는 자신만의 독특한 풍격으로 우리 문단에서 자기식을 구축했는데 그만큼 성취감도 크시겠지만 책임감도 무거울거라 생각해요. 선생님의 문학관, 문학적주장을 들어보고싶습니다.

최: 저에게는 이런 말을 하는것만치 어려운게 없다고 생각돼요. 현재 저는 창작보다 작가협회 행정직무에 얽매여서 자유로운 몸이 아니지만 그래도 이런 때일수록 창작을 견지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칼럼 같은 청탁이 들어오는데 꼭 잘 써주고 소설창작도 할거예요. 사실 저는 문학창작을 하는 동안 문학관점이거나 주장에 대해서 작가들과 거의 대화를 못했어요. 작가협회에 들어온후 그런 기회가 있긴 하지만 저는 문학창작에 한해서는 모든 류파를 존중해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어요. 자기의 독서취향을 끼워서 타인의 작품을 평하지 말아야 하고 존재하는 류파나 사조에 대해서 잘 알고 소통해야 한다고 봐요. 이건 되고 저건 안된다는 식이면 곤난하죠. 모든것을 포옹하는게 문학관련 단체의 립장이고 그 단체장의 립지라고 인지합니다.

김: 기층 공무원과 신문사 기자 사업을 거쳐 선생님은 현재 연변작가협회 주석직에 몸담고있는데 그냥 작가로 글을 쓸 때와 작가협회 주석이란 중임을 맡고난후의 생각에는 어떤 차이가 있으신가요? 그리고 조선족문단 현황을 어떻게 보시는지 궁금합니다.

최: 문단의 현황에 대한 진맥은 피하겠습니다만 한가지만은 짚고 넘어 가죠. 이제 칼럼에서도 밝히겠지만 문학가는 첫째도 둘째도 장인정신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책 몇권 읽고 강의 몇번 듣는것으로는 절대로 작가라고 할수 없어요. 우리 문단의 가장 취약점은 독서수준입니다. 독서가 뒤따르지 않는한 문단풍경선은 절대로 밝을수가 없어요. 우리들의 선배작가들속에는 장인정신을 투철하게 소화해낸 작가들이 많지만 반대로 아래세대들속에서는 그렇게 명랑하지 않아요. 글을 잘 쓴다는건 많은 글을 읽었다는 반증이죠.

김: 네, 지당한 말씀입니다. 선생님과는 작가와 편집인의 사이로 작품을 통한 교류를 해오다 15년전 어느 우연한 기회에 선생님으로부터 다른 작가에게서는 볼수 없는 강한 리드력을 보아내게 되였으며 그때 받은 인상이 참 깊었댔어요. 선생님은 또 소탈하고 진심으로 사람을 대하며 의리심 또한 강한걸로 잘 알려져 있죠. 

최: 하하, 아닌것 같은데요.

김: 그리고 현재 선생님 삶에서 가장 큰 행복을 느끼는건 쌍둥이 딸애들이라고 하셨다죠. 젖먹이 애기때부터 의지가지 없는 쌍둥이 녀자애들을 데려다 지금까지 12년동안 딸처럼 키우신다고 들었어요.

최: 사실 이 글을 우리 쌍둥이 딸들이 읽으면 안되는데 조심해야겠네요. 지금까지 쌍둥이들은 우리 부부를 친부모로 알고있는데… 제가 고상했다기보다 누구나 이런 일에 접하면 다 할수 있다고 생각해요. 저는 집에서 좋은 아빠역을 하고 집사람은 악역을 맡고있어요. 집사람은 딸애들의 모든것을 챙기니까 잔소리도 자연 많죠. 이젠 딸애들이 집사람보다 저를 더 챙깁니다. 술을 마시지 말라, 담배를 적게 피우라… 매일마다 빨리 퇴근하라는 재촉전화가 와요. 아들과 딸은 이래서 다른가봅니다. 쌍둥이들을 키우면서 저는 낳은 정보다 기른 정이 더 크다는 리치를 알았어요.

김: 네, 덕을 쌓으신만큼 행복을 오래오래 누리시길 바래요. 그럼 선생님께서 앞으로도 작가로서 보다 좋은 작품을 많이 써내시길 기대하며 한편 작가협회 주석으로서도 많은 수고가 있으시리라 믿습니다. 선생님의 문학인생과 작품을 둘러싼 대담은 저에게 좋은 공부의 시간이 되였어요. 감사합니다.

최: 네, 저도 감사합니다.

출처:<장백산>2017 제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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