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균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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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방울의 맑은 물처럼
2017년 09월 11일 13시 27분  조회:2273  추천:0  작성자: 문학닷컴

수필

                    한방울의 맑은 물처럼

                                     최균선


    한방울의 물, 그 것은 지극히 보잘 것 없다. 하지만 그런 하잘 것 없는 물방울이 모이고 모여 시내물을 이루고 대하를 이루고 마침내 망망한 큰바다를 이룬다고 할 때 한방울, 한방울의 물은 의미가 달라진다. 나무가지 이파리에서 떨어지는 이슬방울이나 내둑에 이름없는 풀잎에 맺힌 이슬도, 주루륵 흘러내리는 눈물이나 다 한방울이다.
   
억수로 쏟아붓는 창대 같은 비줄기도, 바위를 뚫는다는 락수물도, 태산준령을 휘감아버리는 안개도 따지고 보면 작디 작은 물방울이다. 늘 보아서 일상으로 된 물이지만 그 조화를 생각하면 찬탄이 아니 나올 수 없다. 흉용팽배하는 홍수를 이루어 새로 물길을 낼 때는 맹수같이 포효하지만 어느 한 위치에서는 스스로를 가다듬고 넓게 펼치여 잔잔히 흐르며 거추장스러운 진흙이며 모래며 오가잡탕들을 가라앉히거나 뒤에 떨궈버리고 다시 맑음을 찾아 고요히 흐르면 곧 명경지수가 되여지는 물! 물 속에 구름이 떠가고 청산이 거꾸로 비끼 듯 삼라만상을 포용하니 과시 해인삼매라 하리라.
   사람들은 자고로 물을 찬미해왔는데 무엇보다 무변광대한 흉금이다. 구정물도 받아주는 포용력, 어떤 모양의 그릇에나 담기는 융통성, 낮은 곳을 찾아서 흐르는 겸손, 막히면 돌아갈 줄을 아는 지혜, 큰바위도 뚫는 끈기와 인내, 장엄한 폭포처럼 투신하는 용기, 유유히 흘러가서 바다를 이루는 대의 등이 바로 그러하다.
    청산리 벽계수나 호한한 대하의 흐름소리는 대자연의 주선률이다. 물은 만물에 생명을 불어넣어주며 순리를 따른다. 물은 흘러온만큼 흘려보내고 흘러간만큼 받아들인다. 물은 빨리 간다 우쭐대지 않고 늦게 간다 조바심치지 않는다. 물은 네 자리, 내 자리를 금 그어놓지 않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청류와 탁류라도 더불어 함께 흐른다.
   그 낱낱이 각색 혼돈이 되고 어느 자리에서는 한덩어리 동색이기도 되기도 한다. 인간들처럼 잘나고 못남, 높고 낮음, 크고 작음, 도고함과 비굴함, 착하고 순하고 악하고 못됨 따위의 구별도 놓지 않고 네 먼저 내 먼저 너무 잘 어우러져서 맑아지려는 물, 흐르는 물이나 가두어놓은 물이나 그릇에 담아놓은 물이나 물은 시종 맑아지려는 지향이 얼마나 올곧고 대바르고 초심을 지키니 거룩할사 물이로다!
   온갖 것에 스며있어서 눈에 보이지도 않는 물은 또 어떠하다고 말해야 하는지? 큰비가 온 뒤 온통 탁류가 된 강물을 두 손으로 퍼서 방울방울 흘려보면 전체로 볼 때보다는 그리 혼탁하지 않다. 어지러운 빨래물이나 땅바닥을 닦아낸 걸레를 쥐여짤 때 방울방울은 상대적으로 맑다. 광선이 투사하여서인가? 타자를 깨끗이 씻어주고 자신은 더없이 더러워졌지만 방울방울은 맑음을 잃지 않고 있으니 이 무슨 조화인가!
    사람들은 우물이 맑아야 아래물도 맑다는 속담을 만들어 자녀교육에서 본보기가 중요하다는 철리를 시사하려 하였는데 백번도 더 지당하다. 그러나 자연계, 생태환경의 경우 우물이 맑다해서 아래물도 꼭 맑으라는 법은 없다. 연길에서 탁류로, 오수로 이름있는 연집강(옛날에는 강의 모양새를 갖추었을테지만)을 거슬러 한 십리쯤 가 연하촌 2대 부근에 이르면 가히 미역이라도 감을만하게 맑은 흐름을 보게 된다. 하지만 내려오면서 인간들의 이런저런 역사질에 그 맑음은 대번에 흐려짐을 볼 수도 있다.
    대지의 혈맥이요, 젖줄기인 물은 항상 자기가 있어야 할 곳에 존재하면서 만물을 리롭게 하고 다른 것을 깨끗하게 씻어 자신이 더러워지나 전혀 자랑하지 않는다. 그냥 낮은데를 따라 아래로, 더 아래로 향할 뿐 다투지 않고 교만하지 않으며 소유하지 않는다. 그 유연함으로 자기를 규정하지 않기에 그 무엇이든 불평없이 다 받아들이며 그래서 물은 낮은 곳이면 도달하지 못하는 곳이 없다.
    물은 완전함을 체현한다. 물이 아래로 흐르며 작은 웅뎅이라도 그 것을 완전하게 채우고나서야 흘러가는 것은 결코 만족이 끝없어서가 아니다. 물은 변화다단한 상황에 따라 천태만상으로 변모하는 것은 절개가 없어서가 아니다. 형체가 어찌 변하든 자신의 근본을 잃지 않음을 말해준다. 물처럼 연약한 것은 더 없지만 특이한 힘을 구비한 물을 이기는 것이란 세상에 없다. 물이 더없이 부드러운 것은 결코 연약해서가 아니다. 물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강한 것을 가장 확실하게 이기는 정신의 체현자이다. 물은 바위를 뚫을 수 있는 저력을 가졌지만 어이하여 유유히 에돌아 가는 걸가?
    물은 흐를줄 아는 것만큼 인내성도 가지고 있다. 크고 작은 웅덩이가 넘칠 때까지 기다려주고 다시 흘러 백길계곡에 다달아도 의심치 않고 폭포되여 떨어지니 참용기를 예서 시사한다. 얕은 것은 흘러가도 깊은 것은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으니 이는 바로 지혜의 모습이다. 가늘게 흘러 눈에 보이지 않아도 마침내 강물에 다달으니 목표를 정해놓고 늘 성찰하는 군자의 자태가 여기있다.
   사람도 물처럼 에돌줄 알고 갇히면 나누어주며 가고 앞섰다고 으시대지 말고 받은만큼 나눠주며 나눈만큼 받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는 것이 물처럼 사는 인생이라 할 것이다. 사람이 물처럼 유연함으로 강한 것을 이기는 품성을 지닌다면 인생길에서 일종의 지혜를 터득한 것과 같다. 어떤 난관에 부딪쳤을 때 가장 간단한 방법으로 해결하고 약소함으로 강대한 것을 물리침에서 당면에 강세를 피하여 허점을 찌르며 기지롭게 타승하는 사유는 명철한 자의 특허이다.
    물은 스스로 고이면 섞는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일단 흐름의 길에 오르면 되돌아설줄 모르고 오로지 대해을 향하여 줄기차게 흐를줄 밖에 모른다. 물은 망망 대해에 들어서야 비로소 줄기찬 그 흐름을 멈추고 나름대로 보탬을 준 것에 자족한다. 황진이가 ‘주야로 흐르나니 옛물이 있을소냐’고 읊었 듯이 살아있는 물은 주야장천 흐르기에 언제나 새롭고 새로운만큼 그 깨끗한 지조를 잃지 않는다.
    가장 낮게 가장 낮은 곳으로 흐르는 류수처럼 남과 경쟁하지 않는다는 ‘불쟁’의 원칙은 얼핏 생각하면 약자로 되는 소극적인 삶의 태도를 의미하는 것 같지만 그속에 특별한 의미가 있다. 흐르고 모여서 창해를 이루는 물, 미움도 아픔도 물처럼 그냥 흘려보낸다면 세상을 달관할 것이다.
    격랑을 일구며 흐르는 대하가 모여 창파만리를 이룬 바다에 마주하면 인간이야말로 창해일속이라는 말을 새삼스럽게 절감하면서 실마리를 찾지 못하는 곤혹과 질의도 답안을 찾게 된다. 참으로 물처럼 살아갈 수 있다면 세상은 덜 번거롭게 느껴질 것이고 인생고뇌도 훨씬 줄어들 것이다.
    로자의 《도덕경》에 상선약수(上善若水)라 써놓았다. ‘가장 좋은 것은 물과 같다. 물은 만물을 리롭게 하면서도 다투지 않고 모든 사람이 싫어하는 낮은 곳에 머문다. 물은 만물에 혜택을 주지만 만물과 다투지 않으며 모두가 싫어하는 낮은 곳으로만 흐른다. 고로 도(道)에 가깝다 할 수 있다.…물처럼 겸허해서 다투지 않을 때 비로소 허물이 없을 수 있다.’
    매번 물가에 앉으면 무디여진 나의 시선이 강이 되고 바다를 이루는 줄기찬 흐름 우에 사로잡히면서 물의 미학을 겸허한 마음으로 배우게 되여 늘 고맙다.
    물이여 물! 나는 너를 목청껏 찬미하노라. 바라건대 맑은 하나의 물방울처럼 살고 싶노라. 만리창공에 쪼각구름이 흘러가 듯, 강촌에 물 흐르 듯 그렇게 순리대로 살다가 생이 다하는 날, 방울방울 수증기로 승천하여 다시 구름이 되고 단비가 되여 가뭄 든 논께에 조금이나 보탬이 될 수 있다면 자족할만한 인생이라 하리라.

 

                                                      2017년 9월  15일 (연변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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