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균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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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언수상록 97) 언간생심 권위를 긁어보다
2018년 08월 08일 07시 46분  조회:72  추천:0  작성자: 최균선
                                                     언간생심 권위를 긁어보다
 
                                                             진 언
 
    권위자란 어떻게 정의되는지 잘 모르겠지만 일언구정(一言九鼎)으로 사람들을 탄복시켜 한결같이 받들어 모시는 사람이라 할것이다. 권위에는 인간의 권위, 직위의 권위, 법과 규정의 권위, 국가와 공동체의 권위 등등이 있다고 한다. 무릇 권위는 인간의 불평등과 부자유의 근원으로서18세기 계몽주의 시대에는 권위가 맹목적이고 비합리적인 복종의 소산이며 권위와 리성이 대립하는것이라고 인정하였다.
    권위에는 실질적권위가 있고 형식적권위, 또한 신뢰적권위와 공포적권위가 있다. 사회질서와 통합에 도움이 되는것은 실질적권위, 신뢰적권위이다. 형식적권위를 례를 들어 설명한다면 마음으로는 상급에 맹종하려 하지 않지만 자기 자리를 잃지 않기 위해서 지엄한 지시에 우선 응하는체 하는것이다. 공포적권위는 공포의 대상이 힘을 잃으면 붕괴하므로 안정된 권위가 아니다. 억압을 통해서는 공포적권위밖에 안되며 선전이나 세뇌교육을 통해서는 형식적권위밖에 형성되지 않는다.
    진정 권위자란? 실적과 언행일치에 있지 허명을 쓰고 말만 번지르한 거짓말쟁이가 아니라 실적으로 말하고 실천해야 명실상부 권위자이다. 학자의 권위는 지식의 확실성의 권위이고 기술자의 권위는 기술의 효능의 권위이며 법의 권위는 누구나 꼭 지켜야 한다는 약속의 권위라고 보면 비교적 잘 리해될것이다. 권위의 근거는 사람들의 신뢰, 인정(认定)에 있다. 학교로 말하면 교원은 학생들에게서 인정받아야 하고 위정자로 말하면 백성들에게서 인정을 받아야 한다. 전문지식을 갖추어야 할뿐만 아니라 인간으로서 최저의 도덕성도 지녀야 한다.
     학술권위ㅡ하면 우선 과학원원사를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원사의 칭호는 근근히  해당된 학술성과에 대한 인정일뿐이다. 과학탐색과 창조가 무지경이라할 때 절대적인 학술권위란 없다. 그만큼 최고학술칭호와 최고학술수준 사이에 등호가 성립되지 않는다. 이미 작고한 중국과학원원사 왕선(王选)선생의 말이 론거로 될수 있다.
    “원사를 당전 령역에 학술권위라고 보는것은 착오적이다. 나는 늘 시태(时态)를 혼동하였는데 과거식, 현재식, 장래식을 똑똑히 분별하지 못하였다.” 라고 하면서 자 기의 경력으로 설파하였다. “나는 38세에 연구령역의 최전선에 나섰지만 무명소졸이였고 58 세에 량원원사(两院院士)로 되였지만 2년전에 설계방면의 제일선에서 물러났다. 지금 68세로서 또 국가의 최고과학기술상을 받았지만 이미 학술연구의 전초에서 멀리 물러나와 허명으로 살아가고있다…”
    과학에는 “최고”가 없고 오직 “더욱 높은것”이 있을뿐이라는 말이 있다. 창신은 권위를 미신하지 않는다. 부단히 권위를 타파하는것은 권위자들이 좋아하지 않는 불문률이다. 권위가 좋아하건말건 익숙한것으로부터 진정 아는데로 나가려면 의문을 가지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 즉 “권위성” 에 도전해야 한다. 권위에 대한 맹종은 노예적이며 허영이며 리기적이며 체념이며 음울한 광기이며 사상을 버리는 자아상실이다.
    인류는 마치 영원히 암흑속을 걸어가는 나그네와 같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것은 무궁무진한 미지의 세계이다. “모든것을 의심하라!”는 탐구의 횃불을 추겨들고 자신의 길을 밝혀야 거듭날수 있다. 학술권위속에 “물없는 저수지”, 명리에만 목을 맨 학술부패분자들은 허울좋은 허상들이라 할것이다.
    데카르트는 “모든것을 의심하라!”고 납함하였다. 이는 권위에 대한 도전이라 할 수 있다. 그의 론거는 아마도 세상에 절대적인것은 없다는 명제일것이다. 정확성의 대명사인 수학도, 창조상상의 걸작인 과학도. 조리정연하다는 론리학의 기본원리조차 의심할 여지가 있다. 례하여 고대중국의 조충지는 선인들의 과학연구방면의 결론들에 의심을 가지고 고심참담한 관찰과 연구를 거쳐 수정보충하였고 가치있는 수많은 과학 성과를 이루어냈다. 그가 제정한《대명력(大明历)》은 당시 가장 정밀한 력법이였다. 그의 일곱자리소수점까지의 원주률은 당시 세계상에서 가장 우수한 과학성과였다.  
    오직 권위에 과감히 질의를 들이댈줄 아는 사람이 많아야 문명세계건설이 비약 할수 있다. 이를테면 뉴톤의 의혹과 연구,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 없다면 사람들은 지금까지 우매무지속에서 자족할지도 모른다. 과학발전사가 증명하다싶이 질의는 진 리를 감싸고있는 층층의 안개를 헤치고 본질을 투시하게 하는 선도자이다. 우리는 습 관적으로 자명하다고 생각하는것, 자고로 진리라고 여겨온것, 언론이나 학술권위자의 주장, 정의들…이런것들을 의심할 여지없는 진리라고 확신해왔다. 기실 따지고 보면 자기 확신에서의 공조가 아니라 상대의 확고한 의식에 대한 맹신이였을뿐이다.
     례하여 한때 달에서 중국만리장성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는 말이 나돌면서 중국사람들을 무한히 고무추동하였다. 이 말은 미국의 “아폴론12호”의 우주비행원이 기자에게 한 말이다. 마치 50메터밖에서 머리카락을 보아낼수 있다는 말과 같다. 더 비유해 말한다면 384킬로메터 밖에서 한대의 얼음과자를 볼수 있다는 말과 같다. 이런 거짓말이 발붙일수 있은것은 달에 착륙한 “권위자”였기때문이다. 그러나 달과 지구사이의 거리는38만공리이다. 그는 이것을 거짓말의 전제로 삼을수 있었던것이다.
    미국의 인문주의 철학자인 에리히 프롬은 자기의 저서《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권위주의 권력의 힘에 눌려) 자신의 개별적 자아를 포기하고 자동인형이 되는 사람은 주위에 있는 수백만명의 다른 자동인형과 같기때문에 더 이상 고독과 불안을 느낄 필요가 없다. 하지만 그가 치르는 대가는 비싸다. 그것은 자아의 상실이다.”라고 권위 주의의 피해를 지적한다. 인간의 평등을 전제로 하지않고 근거가 없는 불합리한 권위 는 비민주적인 사회를 만든다는것이다.
    만약 스스로 시비를 바르게 가렸다고 확신한다면 무릇 대방이 누구이든 그의 말에 마음의 꼬리를 흔들어댈 필요가 없다. 반대로 모모가 권위라해서 내 개성을 죽일 수는 없다는 정서로 7×3=21일도 반대하는식의 정서는 좋지않다. 반대하기 위해 반대한다면 우를 범하고 그속에 자기를 파묻고만다. 마치 내가 그것에 대하여 확실히 알고있기때문에 흠집을 찾아내는것이 아니라 “나도 모르기는 마찬가지지만 적어도 무조건 확신하는것도 일이 아니지 않는가?”하는 식의 거부는 무모하다.
    살아가면서 자기와 다른 사이에 권위성이라는 보이지 않는 담벽을 쌓을 필요는 없다. 권위를 타파하자고 웨친다면 듣는 사람은 강렬한 피해의식의 발로라고 생각 할것이다. 권위를 타파해야 한다고 생각하거나 주장한다면 먼저 자기 마음속에 하나 의 관념모식이 잡혀있고 땀으로 이룩한 성과로써 권위를 타파하려고 행동해야 한다 자아가 부재하면 권위로 못된 약자의 경이원지에 불과할것이다.
    권력의 권위주의를 아예 접어버리고 인간본연의 모습으로 현연되는 사람은 지극히 적다. 권위주의에 도전하는 평민백성도 드물거니와 권위라는 보검을 손에 쥐고도 함부로 내두리지 않는 고매한 인격을 소유한 권위자는 더구나 희소하다. 권위자는 반드시 있어야 하고 더 빛나야 하지만 권위주의는 타파되여야 한다.
    이른바의 권위주의인격은 환영받지 못할 대상이다. 왜냐하면 권위주의 인격이란 복잡하고 완고하고 각박하며 상대적으로 사람을 들볶는 인격체계이기때문이다. 이에 는 종족편견, 보수성, 맹종, 개인숭배의 전통관념 등 서로 얽힌 반민주주의 정감과 의지가 포괄된다. 권위주의는 일반적인 사실이나 상대의 의견은 무시한채 기존의 권위 에 내흔드는 사고모식으로서 전혀 도움이 안되는 재세만 부리기에 웃기고있다.    

                                                 20013년 5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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