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균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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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칼럼) 문학혼
2018년 09월 20일 11시 28분  조회:3704  추천:0  작성자: 최균선
(문화칼럼)                         문학혼
 
                                           최 균 선          
 
    문학의 령혼이란 무엇인가? 공인하는바 문학의 령혼은 작품의 내용 및 그로부터 체현되는 사상이다. 이런 론단은 문학에서의 불문률로서 시대의 변화에 따라 변화되는것이 아니다. 그런데 현대서방문학리론과 그 경전작품들의 미혹된 이 시대의 선구자들의 눈에는 이 불문률이 가히 던져버릴수 있는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중국의 한 작가는 “어떠한 경전적 의의를 가지고 있는 문학작품에서 령혼은 풍격과 결구에 있다”고 하면서 작품의 도덕적 의의는 왕왕 무료한 설교의 대명사이고 위대한 사상은 한무더기 정확한 쓸데없는 말”로 전락된다고 했다. 그런가? 답은 부정적이다. 왜냐? 일종의 문학으로 소유의 “도덕”, “의미”를 부정하고 “사상”의 가치의의를 부정할 때 그게 무슨 문학이 될것인가?
    로신선생은 일찍 “일체문예는 결국 선전이지만 일체 선전이 모두 문예인것은 아니라”라고 말하였다. 이 말은 기실 문학은 반드시 두개의 기본공능을 구비해야 한다는것을 뜻하는바 첫째는 선전교화의 공능이고 둘째는 그의 예술특징이다. 지금 적지 않은 작가들이 자기의 작품은 정치, 사상류의 선전, 교육작용과 무관하다고 말하기 좋아하는데 자가당착이다.
    무릇 어떤 작가이든 자기의 작품이 독자대중에게 접수되고 즐겨 읽는 문학예술작품이 되기를 바란다. 아닌체 할 작가도 없으려니와 이런 사실을 부인할 방법도 없을 것이다. 뚜렷한바 “사상”  정확한 쓸모없는 말이고 “선전”이 무료한 설교의 대명사라고 말하는 저의를 캔다면 곧 세계의 대문호들의 문학활동은 아무런 의의도 가지지 못하고 아울러 허위적이고 심지어는 반인성적이라는것이다. 참으로 경세지언이라 할것이로되 사람을 놀래우지는 못하는 유감을 안고있다.
    “선전”은 문학예술이 떨쳐버릴수 없는 숙명이다. 이러한 “숙명”을 거부한다면 그들이 주장하는 문학이란 무슨 소용이 있는 물건짝인가? 그래 이 세상에 정녕 “도덕함 의”가 전혀 없고 어떠한 정확한 “사상”을 배제한 “순수”예술을 위한 예술인 문학예술작품들이 있단말인가? 아무런 사상도 없는 작가는 작가도 아니거니와 대중에게 쓸모 있고 유익한 작품을 만들어낼수도 없다.
    여기서 단언할수 있는바 ”문학혼”이란 바로 작가의 정신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시학에서 “시는 가장 위대한 인간의 영혼에 불을 지피는 영원한 생명의 빛”이라고 하였다. 또 시는 인생의 행복을 최고 목적으로 추구함으로써 가장 조화적이며 자연스러운 즐거움의 예술이라고 했다.” 프로이드는 시인을 가리켜 “고달픈 아름다움을 먹으면서 찬란한 은실을 뽑아내기 위해 뼈를 깎는 아픔을 참아내는 려정의 사람”이라고 했다. 그리고 영국의 드킨스는 문학은 가르치는것과 감동시키는 일을 한다고 했다. 이 말은 문학이야우리를 감동시키는 최상의 예술이라는 뜻이다.
    2010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페루출신 소설가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는 “문학이란 처음부터 우리 생각처럼 돌아가지 않는 이 세상에 대항하기 위한 무기였다”고 말했다. 그리고 “나는 불행을 읽어가면서 그것을 향유하고있다. 그런것으로 인간이 위로를 받는다. 그래서 세상을 바꾸기 위한 문학적 활동은 필요하다. 작품을 읽은 이들이 선과 악을 분별하는 법을 배우고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드는데 일조했다는 점은 증명할수 있다”고 말했다. 뮐러는 “문학은 불행을 말할수밖에 없고 그 안에 불행이 반드시 있다. 문학은 위로를 준다. 고통을 말하지만 위로도 덤으로 준다. 문학은 가벼운 주머니로도 만날 수 있는 심리치료사”라고 정의했다. 문학대가들의 론술이 그래 정확한 “사상”,“선전”이 아니며 “무료하게” 설교가 아닌가?
    사실 모든 문학은 저자가 의도했든 아니했든간에 교훈적으로 해석할 개연성을 가지고있다. 훌륭한 문학은 인간적호소력 즉 보편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결국은 사 람의 정신개조작업이 아닐수 없다. 이런 정신적작품은 작가와 독자의 묵결속에 재창조된다. 문학은 보여주는데서 한걸음 더 나아가 감동을 수반한 비판적기능을 가지고 래일을 이야기하는데까지 나가야 한다. 괴테는 위대한 작품은 우리를 가르치지 않고 변화시킬뿐이라고 했다. 우리를 변화시키는 힘이 바로 문학의 혼에서 나오는것이다.
    이처럼 많은 경우에 문학은 작가의 명백한 교훈적목적을 추구함에도 불구하고 보편적 인간성에 호소하는 자유로운 상상의 질을 구현하고 있는 까닭에 그런 작품들은 당시에만 효과가 있는것이 아니라 ‘고전(古典)’이라는 이름으로 시간공을 초월하여 독자들을 확보한다. 이로써 교훈문학은 하나의 전문적 구분일뿐 그 작품의 가치를 폄하 하는 배타적용어가 아니라는것을 알수 있다.  
    인간의 삶의 현장에서 벌어지는 그 모든 사건, 사실들의 변증법적관계를 가장  형상적이고 생동하게 보여줄수 있는 예술로는 문학밖에 없다. 그래서 문학은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라고 하는것이다. 그래서 문학은 글의 예술이 된다. 참다운 문학은 옛말과 경험을 따르는데 있지 않고 자신의 시대와 경험에 충실해야 한다. 그것이 문학정신이다. 작가가 모순된 사회를 고발, 비판하는 자기반성과 함께 비정한 사회를 해학적으로 풍자, 비판하는 글은 음풍영월보다 독자들을 못견디게 감동시킨다. 민초들의 모순된 삶의 현장을 사실주의 기법으로 조명하는 작업은 그래서 필요하다.
    글을 쓴다는것은 세계를 조명함과 더불어 그것을 독자의 정감세계에 투사하는 작업이다. 작가와 독자의 묵결이 있기에 문학, 작가가 존재리유를 확보한다. 사회인으로서 독자와 함께 숨쉬는 작가는 사람 사는 세상이야기를 독자와 공유함으로써 자아를 실현하고 독자는 자아완성 진일보 다가서게 된다. 그래서 문학이 인간의 생명의 빛이 되고 가장 깊은 마음에서 피여나는 생명의 꽃이 되는게다.
    물론 문학이 인류구원의 유력한 수단, 도구일수는 없다. 그러나 구원의 길을 제시하고 안내할수는 있다. 문학의 화원에서 독자들이 말로 형언할길 없는 위로와 힘을 얻는것은 부인할수 없다. 전통적 관념에서는 문학의 제일 기능을 쾌락보다 교훈에 두고 문학의 가치를 사회적효용성(현실적효용성)에서 찾는다. 교훈주의적 문학관이라고 힐난받을수 있는 현시대이지만 문학의 교훈성을 영원히 배제할수도 없는 일이다. 
    회고해보면 지난세기 80년대,90년대의 서구문학사조의 격류에 어덩덩해서 휘감겨들 때 의식, 무의식간에 문학이 가벼워지고 창작이 문자유희로 되여지면서 독자대 중들에게 소외당하게 된 인과관계를 우리는 자성해야 마땅하다. 본격적문학은 문학성, 예술성이 도외시하고 상업성을 내세운 책들에 의해 뒤로 밀리게 되였다. 시대를, 누 구를 원망할것도 없다. 자승자박에서 이미 예견된 자업자득이다.
    루마니아태생의 작가 게오르규는 “문인이란 시대를 증언하고 어둠속에서 횃불을 밝히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그만큼 문학의 길은 어렵고 위험천만한 길이다. 그러나 문인은 이 길을 가야 할 사명을 버리려하지 않는다. 배는 바다위에 떠야 제구실하듯 작가는 오직 문학의 길에서만 자기의 존재리유를 확보할수 있다.
    아무런 사상도 없이 무엇을 쓰고 싶으면 무엇을 쓰면서 인류가 몇천년의 문명건설에서 쌓아온 인류의 도덕, 륜리, 습속, 인성, 론리 등을  “무료한 설교”혹은 “정확한 쓸데없는 말” 로 치부하고 내버리는 이른바 현대파작가들의 작품은 무엇을 전달하고 있는가? 두서없이 횡설수설 내키는대로 엮어놓은 “령혼”이 부재한 작품들의 범람은 실로 문학의 비애일뿐이다.
                            
                                             2018년 2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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