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룡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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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의 첫 하이퍼시집
2014년 02월 26일 04시 50분  조회:1193  추천:0  작성자: 최룡관
연변의 첫 하이퍼시집
 
          -방순애의 [시간은 원이 되여]를 보고
 
                     최흔
 
들어가는 말
 
필자는 흥분된 심정으로 방순애의 시집 [시간은 원이 되여]를 본다. 연변의 첫 하이퍼시집이라는데 그 의미가 크다. 중국조선족시단에서 하이퍼시가 싹이 트기 시작한것은 아마 2006년이라고 생각된다. 그후 려순희 황정인 심예란 허옥진 박장길 김견등 시인들이 하이퍼시를 쓰기 시작하였고 하겠다. 하지만 하이퍼시를 써서 시집을 낸 시인들은 아직 없었다.
하이퍼시, 다선구조로 된 이시는 지금 유령마냥 일부시인들의 시상을 야금야금 잠식하고 있다하겠다. 다시점, 다초점, 다주제를 가지고 있는 하퍼시가 방순애의 머리를 삼키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끼까지 방시인은 간고한 려정을 거쳐 [시간은 원이 되여]를 완성하였다고 하겠다. 시인은 동시 240여수를 썼고 현대시60여수를 썼고 하이퍼시 170여수를 썼다. 오늘 시인은 하퍼시 170여수중에서 88수를 선재하여 시집을 내놓았다. 한수의 시가 그녀의 한방울의 피라고 생각된다. 그러니 88방울의 피가 오늘 독자들과 대면하게 된다.
하이퍼텍스트는 새로운 도전이며 혁신이다. 하이퍼라는 새로운 기법을 도입하여 묶은 [시간은 원이 되여]를 어떻게 읽을것인가에 대하여 필자는 나름대로 말하려고 한다
 
 
도약하는 이미지
 
방순애시인의 하이퍼시는 도약하는 이미지를 창출해낸것이 하나의 특점이라고 할수 있겠다. 도약을 통하여 이미지들은 분렬도 조성하고 집성도 조성하면서 한수의 시를 이룩한다고 하겠다. 시인의 시는 산문적인 필치와 운문적인 필치 두가지 형태로 쓰였는데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우선 산문적인 필치로 쓴 시 한수를 보자
 
 어떤 바위

스님되여 앉아있다 얼굴부터 새겨진 법글이 쭉 내려오고 몸의 구석진 곳들은  전설쪼각이다 마음속에서 지줄대는 이야기는 강을 따라 흘러가고 무성한 이파리 매달려있는 줄거리들 줄줄 타래진다
 구름이 펜을 들고 쉬고있다 눈아래 서있는 사람들을 내려다 보며 입은 닫겨있다  무거운 입술을 열면 하늘중심에서 우는 천둥이 지심까지 들썩인다
작은 귀뿌리는 점점 커진다 열쇠를 가지고 떠나는 사람들 갇히운 마음을 연다 진펄에 빠지는 발걸음은 한결 가볍다
 
이 시는 시집의 첫수이다.  보는바와 같이 1련은 스님에 대하여 쓰고 2련에서는 구름에 대하여 쓰고 3련에서는 귀뿌리에 대하여 쓰고있다. 스님에서 구름에로 도약하고 구름에서 귀뿌리로 도약하면서 시는 마무리를 짓고있다. 련과 련사이가 큰 도약을 이룩하였을뿐만 아니라 한개련에서도 도약이 진행되고 있다. 1련에서 스님은 전설쪼각이 되는가 하면 이야기가 강물처럼 흘러가는가 하면 무성한 이파리와 줄거리가 나온다. 2련에서는 구름이 의인화되면서 여러가지 사실이 나오고 있고 3련에서는 작은 귀뿌리, 열쇠가진 사람들이 나오는가 하면 진펄에서 헤매는 발걸음이 나오고 있다. 어찌보면 시가 대잡탕으로 이루어진 감이 난다.
이미지들이 아래와 같은 특점들을 가지고 있지 않을가 생각된다. 각련의 이미지와 이미지가 련결이 되는것이 아니라 분리되여 있고 이미지들이 각자 존재를 한다. 어느한 이미지가 다른 한 이미지의 결과이거나 원인이 되지 않는다.
이미지들은 중심에 의하여 조직된것이 아니라 중심을 떠나고 있어서 탈중심, 무중심을 이룩하고 있다. 이미지들은 또 현실적인 사실인것이 아니라 픽션으로 되여있는 허구이며 가상현실이라고 말할수 있다.
운문으로 된 시 한수를 더보기로 하자
 
 
  
상아의 노래
 
재빛나는 바다의 아침
상아는 검은색 옷을 입고
호화로운 요트에 앉아
입술에 노래를 담고있다
 
멍청한 후렴은 고해의 값을
벌거벗은 자연에 치르고
현기증나는 우수를
넓은 가슴에 대고 바순다
 
천개의 북이
물의 정적을 깨뜨리고
하늘속의 기류
바다의 조류를
률동키안에 주어담는다
 
[상아의 노래]전문이다. 의인화된 상아가 검은 옷을 입고 요트놀이를 한다[1련] 2련은 일년과는 관계없는 멍청한 후렴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3련은 천개의 북에 대하여 노래하고 있다. 한이미지에서 다른 이미지로 가는것을 가히 도약이라고 하거나 뜀질이라고 할수 있다. 이러한 이미지들은 우리가 수백년동안 써오던 시의 구성이랄가 구조랄가 하는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우리가 수백년동안 써온 시는 단선구조이다. 단선구조는 하나의 사실을 중심으로 썼다. 하지만 이시에서는 상아, 멍청한 후렴 그리고 천개의 북이 나오고 있다. 이 세가지 이미지는 종적구성을 이를수 없는 서로 대등한 자격으로 등장하는 횡적구성을 이루면서 병렬적으로 배렬되고 있다. 시인의 시적사유가 자유롭게 날아다니고 있다고 하겠다. 이렇게 함으로써 사유의 공간이 확장된다고 하겠다. 이것은 어느한 초점에 매여있는 시인것이 아니라 시인의 절대적인 자유로운 상상의 산물의 태여남이며 움짐임으로써 시적상상의 자유분방과 무관하지 않다고 말할수 없을것이다. 하이퍼시가 다시점 다초점으로 된다는것을 이러한 수법으로 쓴 시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닐가 하고 짚어보게 된다.
시인은 이미지와 이미지사이에 공간 혹은 간격을 주어서 이미지를 창출하고 있는데 <<이와 같은 텍스트 다형태성은 텍스트가 새로운 방식으로 살아있으며, 변화하고 역동적이며, 열린 형태를 갖게 된다는것을 이미한다,>>(<하이퍼텍스트 3.0>. 167쪽)는 조지p.란도의 말이 떠오르게 되는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겠다.
 
 
대가리도 꼬리도 없는 시
 
재래로 시를 쓴다면 시적계기요 서두요 발전이요 결말이요 조응이요 하는 말들을 잘 살펴보아야 했던것이다. 오늘 시의 현주소도 그런 시가 무더기로 쏟아지고 있다. 그런데 방순애시인이 쓴 시는 이런 언어들에 대한 기억을 지워버리고있다. 또 기, 승, 전, 결이라는 언어로 방순애시의 시를 살펴본다는것은 아마 통하지 않을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방시인의 시는 이런 용어들과는 무관하다. 방시인의 시는 어떤 시인가? 방시인의 시는 대가리도 꼬리도 없는 시라고 함이 타당할것 같다. [시간은 원이 되여]하는 시집의 시들은  이미지 토막과 토막의 배렬로서 그토막과 토막들은 시작이자 결말이고 결말이자 시작이라고 하겠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말한것처럼 <<시작과 끝이 없고 항상 중간뿐이다. 그들은 이곳에서 시작하고 넘친다>>(동상 96쪽)
 
 
원이 되여 굴러간다 원에 붙어 달리는 다리 그리고 원을 꺼꾸로 돌리는 개미들 보송보송한 구름이 땅에 내려올 때 갈고리를 바닥에 질질 끌며 걷는 방랑자들 모래위에 집을 짓고 텅빈 갑옷만 입고 너덜거린다 한치도 안되는 삶의 공간은 무대위에서 졸고있다
어두운 밤 잠자는 눈을 움직여본다 문자 없는 필기장에 글을 갈겨본다 환히 밝아진 벽빛을 남의 눈에 주지 말고 나에게 비춰보라 그러면 찌그러졌던 얼굴이 보름달로 변해간다 들끊는 대기는 게으른 손을 잡아준다 활기찬 발걸음은 앞을 재촉한다
                               -<시간>전문
 
이 시는 이미지 집성으로  되여있다. 다시 말하면 이미지토막들의 모임이다. 시인은 어떤 고정된 감정으로 시를 쓰고 있는것이 아니라 열린 상상으로 이미지를 편집하고 있다겠다. 시간,원, 다리, 개미, 구름, 갈고리,방랑자, 집, 갑옷, 무대, 구름, 필기장, 벽빛, 얼굴, 손, 발걸음 등등 사물들이 독자적인 이미지로 되여 한시속에서 움직인다
한수의 시라기보다는 한수의 환상곡이라고 할수 있겠다. 이런 이미지들은 다 자기의 독립적인 토막을 이루고 있다. [한국의 문덕수시인은 토막을 단위라고 함] 이 토막들은 또 시인의 배렬처럼 요렇게만 놓이는것이 없다, 누구든 자신의 상상에 의하여 바꾸어놓아도 별문제이다. 어느것이 시작 인지 어느것이 결말인지 분명치가 않다. 사실 제일 마지막행을 앞에 가져다 놓아도 무리가 아니다. 줄글로 된 2련시인데 2련을 1련으로 만들어도 무방하다.어느한 이미지나 다 앞에 있어도 되고 뒤에 있어도 되고 중간에 있어도 된다.우리가 대 사막의 가운데 서있다고 하자. 어디가 사막의 시작이고 어디가 사막이 끝인지 보이지 않을것이다. 마찬가지로 배를 타고 바다속에 서있다고 하자 사면은 수평선이다 어디가 시작 이고  어디가 끝인지 누가 알랴. 하지만 사막은 사막대로 넘치고 바다는 바다대로 넘친다. 사막에 섰다면 선자리가 사막의 끝이고 시작이라고 해도 되고, 바다에 섰다면 선자리가 바다의 끝이고 시작이라고 해도 된다.
우에서 이미 언급되였지만 하이퍼시의 이미지들은 독립적인 각자 존재이면서 한시에 집합되였기 때문이라고 해야 할것 같다. 이러한 시를 이미지덩어리라고 할수 있지 않을가.
이 세상의 어떤 사물이나 련계없이 절대적인 고립으로만 존재하는것이 하나도 없다. 어떠한 사물이나 한가지 성분으로만 구성된 사물도 없다. 하이퍼시구성은 자연과 문화와 우리의 사유에 부합될뿐만 아니라 오늘의 글로벌시대와 컴퓨터시대에 부응하 는것이라고 필자는 말하고싶다.
시문학력사를 소급해보면 1960년도에 노벨문학상을 받은 프랑스 시인 SJ 생종페르스의 시도 이런 수법이였고 2011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은 스웨덴의 토마스 트란스 트뢰메르 시도 이러한 수법이였다. 21세기에 와서 한국의 시인들인 문덕수, 심상운, 오남구, 김규화 등 한국시단을 리드하고 있는 전위적인 많은 시인들의 시들도 이러하다. 그러니까 방순애시인은 <<시간은 원이 되여>>로 우리시와 세계의 시 흐름을  접목시키고 있다겠다. 그렇다고 해서 시가 완전완미하다고 하다는 말은 아니다.  아직도 부족한 점들이 많으리라고 생각된다.
 
폭력적 조합으로 된 이미지의  산재
 
방순애시의 이미지창출은 예측불가능이다. 한이미지로부터 파생되여 나오는 이미지도 그러하거니와 이미지와 이미지 링크도 느닷없이 새롭게도 돌발적으로  기이하고도 괴상하게 산출되고 있다겠다 하이퍼시의 언어로 명명해 본다면 알렉스이다.
 
 
여기서
 
돌은 하늘이 버렸을 때 침묵의 깃발을 든다 갈대숲은 겨울의 어둠속에서 하얀불을 지펴 자기를 지킨다
울창한 숲과 새들 그리고 나의 집
창가의 벽이 피를 흘리고 달은 구름속으로 숨어버린다 창백한 손은 이곳에서 떠다니는 거품을 거둬내고 무지개의 현에 맞춰 밤의 찬가를 부른다
날개가 없고 얼굴이 없어도 심연의 사색은 새벽 입김위에 가는 발자취를 한뜸한뜸 수놓는다
 
<<여기서>>는 이 시집의 마지막 시다. <<돌은 하늘이 버렸을 때 침묵의 기발을 든다>>는 마지막 시의 첫구다. 모순되는 언어들의 집합이다. <<돌은 하늘이 버렸을 때>> 의미가 심장하다. 하늘이 언제는 돌을 품고있었는데 버렸다는것이다. 언제 이런 일이 있었다고 증명할 어떠한 과학가도 고대학자도 없을것이다. 시인이 창출한 이미 지는  그로데스크하여 기이하고 괴상한  발상이라고 아니 할수 없다. 이 말을 풀이해 보면 하늘이 돌을 버렸다는것이다. 이 허구는 현실이 아닌 가상현실이라고 할수있 다 .하지만 너무 폭력적으로 조합했다고 하지 않을수 없다. 그아래 시구도 그렇다 갈대숲이 하얀 불을 켜고 겨울이면 자기를 지킨다고 한다. 갈대꽃을 불로 전의시켰음이 확연하다. 그런데 이 불은 불이 아니다. 불이면 갈대가 다 타버릴것이 아닌가. 모순 어법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창가의 벽이 피를 흘리고>>,창백한 손은 <<무지개의 현에 맞춰 밤의 찬가를 부른다>>,<<사색은 입김위에 가는 발자취를 한뜸한뜸 수놓는다>> 등등 이러한 이미지조합들은 의미를 전달하려는 일상적인 사유로서는 맞지도 않는 말들의 조합으로서 폭력적으로 강압적으로 억지로 주어맞춘것 같다. 하지만 이런 이미지의 폭력적조합이야 말로 시구를 새롭게 하고 시를 새롭게 하는 현대시의 데크놀로지 이 다.. 
 
다시는 펴지지 않는 잔디들 자갈이 깔린 울퉁불퉁한 길이 놓여있다 세상 파도는 닫혀진 막을 열고 깊은 곳에 닻을 내린다 새로운 고뇌보따리는 새끼를 꼬고 밤거리 모퉁이를 지나 차도를 넘어 등에 착 달라붙는다
                         <<웨침>>에서
 
심장이 톡톡거리며 멈출줄 모른다 대굴대굴 굴러가며 돌아가는 빛은 시계속으로 들어가고 달빛에 용해된 몸은 도시로 들어간다 가고있는 발길에 말랑말랑한 물방울이 달린다
 
                    <<날리는 모래알>>에서
 
 파란 하늘에 둥둥 달려있는
커다란 바위덩이위에
번화한 도시가 앉아있다
     <<성>>
 
읽혀지는바와 같은 폭력적으로 창조된 이런 이미지들은 방순애시의 도처에 심심찮게 산재해 있다. .<<세상파도는 닫쳐진 막을 열고 깊은 곳에 닻을 내린다>>(<웨침>에서)
<<대굴대굴 굴러가면 돌아가는 빛은 시계속으로 들어가고 달빛에 용해된 몸은 도시로 들어간다>>(<날리는 모래알>에서)<<파란 하늘은 둥둥 달려있는/ 커다란 바위덩어리위에/번화한 도시가 앉아있다>> (<성에서>)
 
선형적인 언어에 대한 일탈과 새로운 이미지에 대한 창조로 되는 이러한 이미지들은 언어의 흐름을 새롭게 할뿐만 아니라 현실문법을 파괴하는 빛이 찬란하다고 해야 하리라. 시는 언제나 낡은것을 밀어내고 새것을 떠올리는 언어의 화살을 날림일것 이다. 이런 새로운 언어화살을 날리는것이 없다면 시의 창의성을 무엇으로 말할수 있겠는가. 이러한 언어로 된 이미지 창출이 많을수록 읽어보는 사람에게 새로운 세계 를 보여줄수 있는것이다. 시인만이 창조하는 새로운 세계가 없는 시들은 왕가물속의 풀잎처럼 나부라져 맥을 추지 못할것이다. 이러한것들은 언어의 폭력적조합이나 이미지의 폭력적조합에 의하여 이루어진다고 하겠다. 
언어의 폭력적조합이나 이미지의 폭력적조합은 현대시의 문턱이라고 할수 있다. 이 문턱을 넘어서야 현대시에 입문했다고 할수 있으며 하이퍼시에 도착할 가능성이  있는것이다. 이 문턱은 높다면 높고 낮다면 낮다. 언어연금술을 장악하면 이 문턱은 낮은것이요 언어연금술을 장악 하지 못하면 이 문턱은 높아지는것이다. 이 문턱은 다리가 길어서 넘어가는 문턱이 아니고 키가 커서 넘어가는 문턱도 아니고 시를 오래 썼다하여 절로 넘어가는 문턱도 아니다. 시적예술에 대한 피타는 노력과 새로운 탐구만이 이 문턱을 넘어서게 할것이다.  방순애시인은 이 문턱을 넘은것 같다. 그리하여 그의 시는 창의성이 강하고 다채롭고 상상이 포만되였다고 할수 있겠다. 시인은 언제나 새로운 이미지를 창출하며 자유롭게 풀의 세포속에도 들어가기도 하고 나오기도 하고 우주의 해나 달속으로도 들어가기도 하고 나오기도 하면서 살아가는 그런 행운아일것이다.    
 
 
나오는 말
 
 
우리가 걸어온 시문학의 길은 대개 이러하다고 할수 있겠다. 해방이 되여서부터 문화혁명까지 대아를 내세우는 시를 썼고, 개혁개방후에는 자아를 내세우는 시를 썼다겠다. 20세기를 보내고 21세기를 맞으며 우리의 시인들중 현실시풍에 만족을 느끼지 못하는 시인들이 무아의 시문학을 추구하고 있다. 무아의 시를 추구하는것은 지금은 시내물처럼 조잘대지만 앞으로는 대하로 굽이 칠것이다 시내물처럼 조잘대고 있는 시가 하이퍼시가 아닐가.
방순애의 시집 [시간은 원이 되여]는 하이퍼시로서  우리 시문학의 새로운 장을 열어놓았다.<<시간은 원이 디여>>는 시의 다선구조로 단선구조를 대체하였고, 객관이미지로 시인의 독백을 대체하였고,  사물을 변형 시키고 변현물의 움직임으로 설명과 해설을 대체하였고,  이미지의 편집자 자격으로 시에서의 자아를 축출하였다. 고정된 관념에서 일탈하여 무한한 상상을 펼치는 방순애의 시는 읽고 생각하던 시로부터 감각하고 사유하는 시로의 전의를 꾀한것 같다 애기가 금방 태여나면 눈도 뜨지 못하고 걷지도 못하고 말도 못하지만 나날이 자라고 커가면서 어른으로 되기 마련이다. 하이퍼시도 지금은 갓 태 여난 한 아기에 불과하다고 할수 있다. 하지만 이 아기는 눈눈을 뜰것이며 말을 할것이며 힘차게 달아다닐것이며 싱싱한 어른으로 자라날것이다.
방순애시인에게 아직도 과제가 없는것은 아니다. 시e는 추상성을 버려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때가 간혹 보인다.
시간의 흐름을 령혼에서 맛 보고(나비)
내부에서 일어나는 순간순간을 피부에 입력한다(마음의 그림)
몽상도 좋고 환상도 좋다 (감초의 그림자)
가는 가을날 잡고/가슴에 남은 말을 건네려고 하는데/그리움만 우두커니 세워놓고(서쪽달)
이러한 시구들은 형상성보다 추상성이 짙어서 머리에 영상이 떠오르지 않거나 희미하게 떠오른다. 앞으로 극복할바라고 생각한다. 시구는 사물운동의 세부를 섬세하게 그릴수록 그 힘이 더 강해진다. 추상적언어라렬의 멋진 말은 시에 손색을 주기가 일수이다. 시인은 모름지기 이에 류의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빈퉁재는 소리는 잘 나지만 속에 든것이 없는것과 같다. 쌀이 골독한 퉁재를 두드리면 소리는 잘 나지 않지만 속에는 쌀알이 가득 차있어 좋은것이다. 방순애시인은 또 어떻게 하면 더 다양하고 더 다채롭게 쓰겠는가를 연구하여야 하며 그 연구를 시적으로 표현하여야 한다고 생각된다.
방순애시인의 새로운 정진을 기대하면서.
 
                                  2013년 5월 8일 서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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