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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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기행 련재 (5)
2017년 10월 23일 07시 21분  조회:1243  추천:0  작성자: 최상운
                                            10. 설날의 려행
 
 
   2006년 병술년 첫날, 나는 가방을 들러메고 옛 신라의 땅을 밟아보려고 려로에 올랐다. 아침 6시20분에 서울역을 떠난 부산행 KTX열차는 3시간  달리여 부산역에 도착하였다.
    나는 근 일년간의 시간을 들여 조선왕조의 왕궁과 왕릉을 돌아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 조선력사를 다시 한번 배운 셈이였다. 이제는 력사를 거슬러 올라가 옛적의 신라, 백제, 고려의 력사를 알아보고 싶었다. 먼저 옛 신라국의 도성이었던 경주를 찾아가 보기로 하였다.
   옛 신라, 백제의 수도는 한국에 있어 찾아갈수 있는데 고구려와 고려의 력사를 잘 알려면 조선으로 가 보아야 한다. 조선에 대한 방문을 뒷일로 밀우고 먼저 옛 신라 땅을 찾아가기로 하였다. 옛 신라의 고도였던 경주로 가면서 겸하여 부산에 들려 보기로 하였다.
    부산은 한국의 두 번째 큰 도시이며 항구의 도시였다. 부산역에 내리니 첫눈에 보이는 것이 부산항 부두의 일각이였다. 대형 기중기들이 큼직한 콘테이너를 넙적넙적 들어서 배에 싣고 부리우고있었다. 부산 거리를 둘러보니 부두 뒤쪽 산기슭까지 집들이 촘촘히 들어앉아 있었다.
   부산에는 여러곳의 명소가 있었다. 하지만 나는 여러 곳 중에서 제일 볼거리가 많다는 해운대를 보기로 하고 해운대로 가는 240호 뻐스에 올랐다. 뻐스가 20분 달리여 해운대역에 도착하였다. 해운대란 부산시의 한 개 구였다.
   이전에는 유명한 해운대가 있어 이름을 날리던 유람지였지만 지금은 범위가 넓어져 해운대구로 되였다. 해운대역에서 약 100m가량 남쪽으로 가면 해운대 해수욕장이 있다. 영화나 텔레비죤에서 볼때 그토록 아름답고 랑만적이며 신기하게 보이던 해운대 해수욕장 이였다. 
   오늘은 설날이라 해운대 해수욕장에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나와 같은 심정으로 해운대 해수욕장을 구경할려 온 사람들이였다. 시원한 바다 바람은 청신한 바다 공기를 싣고 와 해운대 모래톱에 뿌려준다. 바다의 공기를 마시니 몸이 거뿐해 지는감이 들었다.
   내가 이곳으로 왔다고 반겨주는 사람은 없지만 갈매기들이 내 주위를 선회하면서 끼욱끼욱 소리내여 나를 반겨주었다. 갈매기는 흰갈매기와 재빛갈매기가 있었다. 갈매기는 비둘기보다 몸체가 크고 부리가 길었다. 이곳 사람들은 수시로 갈매기 먹이를 모래톱에 던져 주었다. 갈매기들은 먹이를 따라 다니였다. 어떤 사람은 갈배기 먹이를 손바닥에 올려놓는다. 갈매기들은 날렵하게 먹이를 물어갔다.     그렇게 재주를 피우는 갈매기 모습이 보기 좋았다. 나는 갈매기를 보는것도 좋았지만 바다를 보는것이 더 멋이 있었다. 저 멀리 푸른 바다와 그 바다위를 오가는 작은 고기배들, 산같이 웅장한 륜선들, 바다위를 자유로이 날아예는 갈매기가 조화를 이룬것이 그야말로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을 보는듯하였다.
   해수욕장에서 앞바다를 바라보면 멀리 바다물 우에 불쑥불쑥 솟은 바위섬이 보인다. 그 섬을 “오륙도”라고 하였다. 해운대로 오가는 배들은 모두 오륙도를 거친다고 하였다.
   나는 해운대 해수욕장을 구경하고 나서 발길을 돌려 해운대 지하철역으로 갔다. 거기에서 전철을 타고 노포동으로 갔다. 노포동역에 도착한 후 인츰  노포동 뻐스역에서 경주로 가는 뻐스에 올랐다.
    경주행 뻐스는 2시간 달리여 경주시에 들어서기 시작하였다. 차창밖으로 경주시 일각이 안겨왔다. 한국의 다른 곳에서 볼수 없는 고전풍이 다분한 옛 가옥들이 보이여 내 시선을 끌었다. 경주시는 서라벌의 한복판에 자리 잡은 도시로서 30만 인구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경주시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눈길을 끄는것은 우람진 릉이다. 경주시 외곽과 시내 안 곳곳에  릉들이 보이였다. 이 릉의 임자는 대부분 신라시대의 왕과 왕비, 대신들이 릉이였다. 나는 앞에서 조선왕조의 릉에 대해 언급한 바가 있다. 오늘 경주에 와보니 자연 리조조선의 왕릉과 신라의 릉을 대비해 보게 되였다. 조선의 왕릉은 산에다 안치하고 협소하지만 신라의 릉은 벌판에 있었다. 나는 경주의 릉을 보면서 중국 북경의 13 릉을 본다는 감이 들었다. 물론 경주의 릉이 북경의 13릉에 비길봐는 못되지만 그형태가 비슷하였다.
   나는 신라의 릉을 보면서 그처럼 엄청나게 큰 릉을 수축하느라 작은나라인 신라의 백성들이 얼마나 많은 노고를 겪었을가? 생각 했다.
   나는 경주 뻐스역에 도착한후  경주 유람 코스를 어디로 부터 시작할까? 생각하였다. 경주에 온바 하고는 유명한 불국사와 석굴암을 먼저 보는 것이 좋겧다고 생각했다. 경주뻐스역에서 불구사와 석굴암으로 가는 전용뻐스가 있었다.  나는 먼저 석굴암을 본후 돌아오던길에 불국사를 보기로하고 뻐스에 올랐다. 뻐스가 40분을 달리자 석굴암역에 도착하였다.
   석굴암은 동해를 바라보는 높이가 해발 750m가 되는 토함산 중턱에 있었다. 석굴암역에서 도보로 굽이굽이 닦은 산길을 따라 한참 올리 걸으면 산골짜기가 막힌 곳에 석굴암이 있었다.
   나는 석굴암으로 가기전에 석굴암은 천연동굴인줄로 알았다. 집적 와보니 석굴암은 천연 동굴이 아니라 인공적으로 30년 동안 쌓아 만든 인공 석굴이였다. 이 석굴은 751년, 즉 신라 경덕왕 10년에 재상 김대성 (金大成)이 전생의 부모를 위하여 건축하기 시작하여 30년 만에 완성한 석굴 사원(寺院) 이다.
   석굴암은 불교계의 이상과 과학기술, 그리고 뛰어난 조각예술이 어울려진 걸작이다. 석굴암 입구는 직각형의 입구, 직실과 원형인 주실과 전복 주복이 복도 역활을 하는 통로로 련결되어 있었다. 360개의 적암돌로 아치형의 둥근 형태의 주실 천장을 교묘하게 축제하였다. 이 건축기법은 세계에 유래가 드믄 건축기술이라 한다. 하여 사람들은 “돌로서 비단을 짜는 것과 같이 감실을 조성하였다.”라고 평가하였다.
   석굴암 주실에는 부처님 상이 모서져 있었다. 그 부처님 상을 보면 부드럽고 자애로운 부처님의 모습을 보는듯하였다. 보면 볼수록 마치 부처님이 살아서 숨을 쉬고 있는 것만 같아 보였다. 거친 화강암으로 우아하고 아름다운 석굴을 축조하고 또 그처럼 부드럽고 자애로운 부처님의 형상을 조각해 놓은 신라의 석공들의 섬세한 조각 기술과 조각 예술에 대해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석굴암은 그야말로 허물 하나 잡을곳 없이 섬세하고 주밀하며 과학적 력기수치로 꾸려진 모습이여서 관람객들은 신라장공들의 높은 기술에 대하여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석굴암은 신라 시대의 조각예술의 대표작이고 불교예술의 대표작이기도 하였다. 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였으며 한국의 문화재 국보 제24호로 규정되였다.
   나는 석굴암을 보면서 이 방대하고 정밀한 석굴암을 어떻게 건축하였을가? 궁금하였다. 가이드의 해석을 듣고서 그 의문을 풀었다. 이 석굴암을 건축할때 먼저 돌로 내실을 만든 후 그 위에 흙을 덮어 인조 석굴을 만들었다고 한다.
   나는 석굴암을 상세히 본후 뻐스를 타고 불국사(佛国寺)로 돌아왔다. 불국사는 불국사역 동북쪽 산 언덕바지에 자리 잡고 있었다. 불국사는 신라 경덕왕 10년에 김대성이 발원하고 개창하고 혜공왕(惠恭王) 10년에 완성하였다. 조선 선조(宣祖) 26년인 1593년 임진왜란 때 의병이 이곳을 주둔지로 사용했던 탓으로 일본군대는 목조건물을 몽땅 다 태워 버렸다. 그 후 대웅전 등 일부를 다시 세우고 1969ㅡ1973년에 처음으로 당시의 건물터를 발굴 조사하고 대대적으로 복원하여 지금의 모습을 이루게 되었다.
    불국사는 동서 길이가 90m가 된다. 불국사에는 석축과 청운교(青云桥)  백운교외 자전문이 있고 대웅전이 남북으로 놓여 있으며 또 석가탑과 다보탑이 있다. 서쪽에는 연화교, 칠보교와 안양문이 있고 또 여래좌상, 금동, 아미타불을 모신 극락전이 있었다. (여기서 극락이란 착한 이가 죽으면 간다는 서방극락 정토를 상징하는 곳이다.)
   불국사는 화려하고 장엄한 부처의 나라로 이 땅에 세워져 신자들이 찬미하며 불도를 닦던 곳이였다. 풍부한 상상력과 예술적인 기량이 어울려진 불국사는 석굴암과 더불어 유미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되였다.
   오늘 석굴암과 불국사를 찾은 유람객은 수천 명에 달하였다. 불국사 뻐스역에서 여러명의 비구니(녀성중)를 보았는데 저마다 밝은 얼굴이였다.
   나는 불국사를 돌아본후 경주 뻐스역으로 돌아왔다. 뻐스역에서 빵으로 대충 늦은 점심을 때우고 내일의 려행을 위해 숙박할 곳을 찾았다. 힘들게 려관을 찾았다. 려관에 든 후 한참 동안 눈을 붙이고 휴식을 하고 나니 저녁때가 되였다.  배가 출출 하여 음식점을 찾았다. 여기저기를 다니면서 음식점을 찾았지만 설날이여서 식당들은 다 문을 닫았다. 하는 수 없이 려관집 할머니에게 음식점이 어디에 있습니까? 물었더니 려관 뒷 골목을 가리키며 그곳에 문을여는 식당이 있다고 알려 주었다. 할머니가 가르킨대로 그곳으로 갔더니 “노서동홍선감자탕집”이라는 간판이 보이였다. 나는 기쁜 심정으로 그곳으로 갔다. 식당에 들어서니 손님은 없고 주인아주머니가 혼자서 텔레비죤 앞에서 텔레비죤을 보고 있었다. 내가 음식 메뉴를 보고 돼지고기 갈비탕을 요구하자 주인은 나더러 잠깐 기다려 달라 하고는 인츰 끓여 주었다. 배가 고팠던 차라 김이 몰 몰 나는 감자갈비탕과 밥을 감칠맛 나게 먹고 나니 배가 부르고 힘이 났다. 사실 아침도 점심도 제대로 먹지 못한 채 차에 10시간도 넘게 치우다나니 배가 촐촐하고 맥이 다 빠졌던 것이다.
   밥을 먹으면서 텔레비죤을 보니 텔레비죤 화면에는 한창 한국 축구팀과 유럽의 강팀 세르비아 팀간의 시합이 방영되고 있었다. 한국팀은 용맹한 백두호랑이처럼 용감하고 슬기롭게 싸워 2:0이라는 완벽한 승리로 한국 국민들에게 훌륭한 설날의 선물을 드리고 있었다.
   나는 식당 주인이 건너는 명함장을 보니 식당주인 아주머니의 이름은 서기미자였다. 나는 어떻게 되여 일본식 이름을 가지였나? 물었더니 그분이 하시는 말이 자기는 일본에서 태어나 세 살때 한국에 왔는데 일본식으로 서기미자란 이름을 지었다고 했다. 나는 누님같이 따뜻하게 음식을 갖추어 준 서기미자 주인에게 감사의 인사를 올리고 그 식당을 나왔다.
  이튿날부터 나는 답사와 결합하여 자료정리를 하였다. 경주 관광안내소를 찾아가 경주에 대한 자료들을 수집하였고 그 자료를 보면서 많은 지식을 얻었다.
   경주는 이름난 명승지이다. 력사유적과 유물이 많은 곳이여서 유람하기 좋은 곳이다. 경주 려행 코스에는 1일 관광과 3일 관광이 있었다. 경주 1-3일 려행코스는 이러하였다. 뻐스역_분황사ㅡ보문관광단지ㅡ엑스포스공원ㅡ민속공예원ㅡ불국 사ㅡ석굴암ㅡ통일전ㅡ박물관ㅡ임해진지(안알지)ㅡ계림ㅡ첨성대ㅡ대릉원ㅡ포석정ㅡ오릉ㅡ김유신자군 묘ㅡ대종무열왕릉이다.
   경주에 와선 신라를 알아야 한다. 천년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 경주력사는 곧 신라의 력사로 이어진다. 신라국은 옛날 서라벌에 살던 여섯 부족의 촌장들이 기원 57년에 박혁거세를 왕으로 추대하면서 건국된 나라이다. 그 후 밖으로 세력을 넓히고 령토를 확장하여 주변의 여러 나라들을 통합시킴으로써 점차 정치체제를 발전시켜 나라를 강대하게 만들었다.
   22대 지중왕시기에 이르러 국호를 신라라 확정하고 23대 법흥왕 때에는 불교를 공인해 찬란한 불교문화의 막을 올리였다. 이렇게 국가의 면모를 일신시킨 신라는 그 기세를 몰아 고구려와 백제를 병합하고 676년에는 삼국 통일의 성업을 달성하였다. 통일신라는 평화로움 속에 눈부신 문화적 발전을 이룩하였지만, 내부 부패와 분열로 쇄국의 길을 걷다가 고려태조 왕건에게 무너지고 말았다. (고려태조 18년, 935년에 신라 패망). 패망 후 경주는 수도로부터 경주로 되고 말았다
    민간에서는 우리 조선민족의 기본성은 박, 석, 김씨라는 말이 돌고있다. 알고보면 신라는 56대를 이어왔는데 왕의 성씨는 박씨, 석씨, 김씨였다. 통일신라 이후에 그렇게 부른것으로 여긴다.
나는 경주를 돌아보고나니 다시 조선력사를 읽는감이 들었다.
 
 
                                 11. 제주도 려행
 
 
   6월26일 오후 5시 우리 부부는 제주도 려행을 떠났다. 돈을 절약할겸 려객선을 타 보려고 제주도로 가는길에 비행기를 타지않고 배를 탔다. 인천ㅡ제주행 려객선 오하마나호는 제시간에 서서히 인천항을 떠났다. 800명을 용납할 수 있는 일본제 오하나마호는 3층으로 된 객실과 화물을 실을 수 있는 밑실까지 합쳐 5층으로 되여 있는 큰 려객선이였다. 선장길이는 120m, 넓이는 26m였고 시속은 23해리라고 하였다. 배의 선실 밖에는 바다를 구경할 수 있는 갑판이 있고 필요시에 안전 장소로 사용되는 갑판도 있었다. 큰 배여서 그런지 평온하게 달리여 멀미가 나지 않았다.
    배는 13시간을 운행하여 제주항에 도착할 예정이였는데 안개가 몹시 껴 2시간 해상에서 머문 후 9시 30분에 제주항에 들어섰다.
   우리는 제주항 출구를 나와서 어디로부터 제주도 려행을 시작하여야 할지? 갈피를 잡지못해 우둑커니 서 있었다. 머리를 굴려보니 그래도 제주도에 와선 한라산을 보아야 제주도를 보았다고 할것 같았다. 그리하여 선참으로 한라산을 구경하기로 결정했다.
   한라산으로 간다고 해놓고는 어떻게 가야 할지 방향이 서지않았다. 할수없이 길손에게 한라산으로 가려면 어떻게 가야 하는지를 물었다. 그분은 상세히 알려주었다. 제주항에서 뻐스나 택시를  타고 제주시 뻐스역으로 가면 한라산으로 가는 뻐스가 있다고 했다. 그리고는 한라산 정상까지 올라가려면 뻐스로 한라산  중간에 있는 영실정류소까지 간 다음 거기서 부터 걸어서 한라산 정상에 오르면 된다고 했다. 올리 걸는 시간이 한시간이 걸린다고 했다. 나는 한라산으로 갔다가 돌아 올 시간을 따져보니 시간이 빳빳했다. 우리가 제주도에 체류할 시간은 10시간밖에없다. 오후 7시전에는 인천으로 돌아가는 배를 타야 했다. 어떻게 한담? 망서리고 있는데 우리 앞으로 택시 한 대가 왔다. 인상이 좋은 그 택시 기사는 우리를 보고 어디로 가느냐? 물었다. 우리가 한라산으로 가려고 한다고 하자 그 택시 기사는 자기 차를 타라고 하였다. 우리가 한라산뿐만 아니라 제주도를 한바퀴 돌겠는데 료금이 얼마인가?물었다. 운전기사는 제주도를 한바퀴 돌려면12만 원이든다고 하였다. 우리가 10만원이면 어떻겠는가?고 하자 기사님은 10만원이면 기름값밖에 안된다고 하면서도 10만원으로 하자고 했다.  
   택시기사 김병욱씨는 성격이 서글서글한 분이였다. 그는 차를 몰면서 우리에게 제주도에있는 명승지와 명물, 제주의 특산물, 제주사람들의 생활습관까지 구수하게 이야기 하였다.
   차가 제주항을 떠나 한라산으로 향하여 한참 달리자 운전기사님은 차를 뭠추고 우리를보고 저 앞에 보이는 길이 내리막 길입니까? 아니면 올리막 길입니까? 물었다. 내가 내리막 길이라고 하자. 기사님은 나를 보고 차에서 내려 보라고 했다. 차에서 내리여 보니 올리막 길이였다. 분명 차안에서는 내리막길로 보였는데 밖에서 보니 올리막길이기에 너무도 이상스러워 내가 머리를 젖자 기사는 이 구간을 제주사람들은 “도깨비도로”라 부른다고 했다. 그말을 듣고 차에 앉아 다시 보아도 분명 내리막길로 보였다. 왜서 도깨비도로 구간은 차안에서 보는것과 밖에서 보는것이 다르게 보일까? 이 문제를 가지고 도로 관계 부분과 학자들이 조사하고 연구 분석한 결과 차안에서 보는 시력과 길 주위의 반사물 사이에 시력 오차로 인하여 생긴 현상이라고 판단을 내렸다고 했다. 나는 그말을 들으면서도 반신바의했다.
   한라산으로 가는 길옆에는 제주 말 사양장이 보였다. 제주도에는 소보다 말이 더 많았다. 제주도의 기후와 자연조건이 말을 키우기 적합한 곳이라 한다. 작달만한 제주 말은 당나귀보다 좀 더 컸다. 옛적에 제주도 사람들은 소가 아니라 말로 농사를 지었다고 한다. 또 제주도 사람들은 말고기를 즐겨 먹는다고 한다. 제주 말고기는 부드럽고 만만하여 맛이 좋다고 한다.
   차는 계속 올리 달리여 1,100m까지 올라갔다. 그곳에 큰 저수지가 보이였다. 이 저수지는 제주시 시민들의 음료수를 제공하는 저수지였다. 제주도는 한라산을 중심에 두고 있는데 수백개의 산들이 한라산을 에워싸고 있었다. 제주도는 몇 천 년 전에 큰 화산이 폭발하여 한라산을 비롯한 그 주위에 용암이 흘러내려 현무암과 화산재가 제주땅을 덮었다고 한다. 하여 제주도에는 강이 없고 늪이 없으며 물은 지하로 흐르고 있었다. 하기에 제주도는 물이 귀한 곳이다. 제주시에서는 저수지를 건설 하여 물부족 문제를 해결했다. 차는 계속 달리여 1,200m까지 올라가자 멈춰 섰다. 그곳은 영실이라는 곳이였다. 이곳이 한라산으로 오르는 마지막 정차장이였다. 영실로 부터 걸어서 한라산 정상인 백록담까지 올라간다고 하였다. 영실(霊室)이란 산신령이 사는 곳이란 뜻인데 옛적에 사람들은 이곳에서 산신령에게 제를 지낸 다음 백록담으로 올라갔다고 한다. 영실에서 산 주위를 보니 어디라없이 짙은 안개가 끼어 앞을 내다 볼수없었다. 하여 우리는 산 정상까지 오르려던 계획을 포기하고 차를 돌려 산 아래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제주도에서는 짙은 안개를 해무라고 한다.)
  차는 오던 길 반대 방향으로 내리 달리였다. 이번에는 서귀포 방향인 남쪽 길이였다. 한라산을 중심으로 북쪽엔 제주시가 있고 남쪽엔 서귀포시가 있었다. 서귀포로 가는 길가에는 볼거리가 아주 많았다. 커다란 나무로 이루어진 방풍림 속에 키 작은 제주 감귤나무가 보이였다. 작달막한 감귤나무엔 파란 감귤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길옆의 넓은 산등성이에는 말 사양장이 있었다.
  제주에는 물이 귀하므로 논 농사를 못하고 밭 농사를 짖고 있었다. 밭에다 벼를 밀처럼 심고 있었는데 멀리서 보면 벼 밭이라기보다 밀밭으로 보이였다. 물에서 자라는 벼는 수도라 하고 밭에서 자란 벼는 륙도라 한다.
  제주도는 지면이 현무암과 화산재로 덮혀있어 흙이 귀하였다. 당지 사람들은 돌을 주어 밭 주위에 돌담을 쌓아 놓고 그안에 밭을 만들었다. 돌담속의 밭을보면 참 땅이 귀한 곳이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제주도의 묘지 또한 신기하였다. 내가 여짓껏 보아 온 묘지와 달리 제주도에서는 네모나게 돌로 쌓은 묘를 만들었다. 네모나게 돌무덤을 만들고 그안에 시체를 안장하였다. 왜서 돌로 묘를 만들었을가? 내가 의아해 하자 김 기사가 알려주었다. 제주도에는 바람이 세차게 분다. 그 바람을 막기위해 돌로 무덤을 만들었으며, 둘째는 말들이 무덤을 밟을까 봐 돌로 만들었고 세번째는 귀신을 막느라고 돌무덤을 만들었다.고 했다.
   제주도에는 세 가지가 많고 세 가지가 없다고 하였다. 세 가지가 많다고 하는 것은 첫째는 바람이 부는 날이 많고, 둘째는 돌이 많고, 셋째는 녀자가 많다고 하였다. 세 가지가 없는것은 자물쇠가 없고, 도둑이 없고, 비렁뱅이가 없다고 한다.
  자료에 의하면 제주도는 1,847.12Km²이며 인구는 60여 만인데 제주시에 30만 인구가 살고 서귀포시에 10만 인구가 살고  있다고 한다.
  서귀포시로 내려가는 길은 내리막 길이여서 차는 속도를 냈다. 서귀포시 주변은 볼거리가 많았다. 한라산에서 내려와 서귀포시를 가는 길은 해변길이였다. 길을 따라가다보면 길 옆에는 명물이 많았다. 서귀포시로 가기전에 해변에는 해양 유람구가 있었다. 유람구 안에는 여러가지 볼거리가 많았지만 그중에서 제일 인기를 끄는 것은 주상절리였다. 주상절리란? 바닷가의 바위가 파도에 부디치고 부서지고 씻기면서 바위돌이 마치 사람이 다듬어 놓은 것처럼 둥근 돌기둥이 촘촘히 서있었다. 신기한것은 그 돌기둥 웃 부분은 톱으로 잘라낸 듯이 반듯하고 일정하였다. 그 모양이 하도 절묘하여 주상절리라고 하였다고 한다.
   유람구 바다가에는 사자 같은 바위, 봉황새가 나는 듯한 바위, 알을 품고 있는 닭과 같은 바위들이 있어 눈길을 끌었다. 자연이 만든 그  기묘한 바위를 보면서 유람객들마다 야 멋지구나! 소리를 터치고 말았다.
   우리는 해양유람구를 본 연후 천지연 3계단 폭포를 보려고 갔다. 물이 귀한 제주도에 폭포가 있다니? 신기한 소리였다. 천지연 폭포를 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 깊은 협곡 속에 지하로부터 솟아나는 샘들이 모이고 모여 내물을 이루었고 그 냇물이 세 계단 폭포로 떨어지면서 아름다운 절경을 이룬것이 천지연 폭포였다. 천지연 폭포를 보는 사람마다 감탄이 목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천지연 폭포의 물은 골짜기를 따라 바다로 흘러들어갔다.
  천지연 폭포를 만든 깊은 골짜기에다 골짜기를 넘나들게 만든 무지개 다리가 있었다. 이 무지개 다리를 선인교라고 불렀다. 깊은 골짜기에서 선인교를 올리 쳐다 보면 마치도 하늘가에 비온 뒤에 나타나는 무지개와 같았 보였다. 나는 한 번쯤 그 천교를 건너보고 싶어 그 다리위로 올라갔다. 다리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어찌도 곬이 깊은지 단박이라도 떨어질것같은 위험한 생각이 들면서도 등곬이 섬득해 났다. 그 다리를 조심스럽게 건너고 보니 내가 인간세상이 아닌  선간세상에 갔다온것 같은 황홀한 감이들었다.
   우리는 천지연 폭포를 보고나서 점심을 자시기로 하였다. 나는 김기사를 보고 김기사가 좋아 하는 음식점으로 가자고 했다. 김기사가 차를 몰고 해양유람구를 지나 어느한 외형이 멋있는 식당으로 들어갔다. 나는 사장답게 기사님의 좋아하는 음식을 청하라고 하였다. 사실 나는 한국에와서 사장님이란 말을 처음 들어보았다. 김기사는 나를 사장님이라 부르고 안해는 사모님이라 불었다. 우리는 김기사가 청한대로 음식을 맛있게 먹었다. 점심값도 내가 치렸다.
   천지연 폭포를 지나 해변길을 따라 가노라면 종종 제주도에만 있는 이색적인 농촌 마을들을 보게 되였다. 마을 어귀에는  둥그렇게 쌓은 돌탑들이 있었다. 그 돌탑을 방사탑이라 불렀다. 방사탑을 세운 목적은 마을에 들어오는 귀신을 막기위해 쌓은 탑이라 한다.
   제주도의 유적지와 무덤에는 돌사람을 세워 놓은것을 흔히 보게 되였다. 그 돌사람은 그 돌사람의 신분을 밝혀준다. 손 모양을 보고서 문인(文人)인가 무인(武人)인가를 판단한다고 하였다. 오른손을 왼손보다 높게 얹은 사람은 문인이고 왼손을 오른손보다 높게 얹은 사람은 무인이라고 하였다. 그러니 그런 돌사람이 어느무덤 옆에 세워져 있다면 그 사람이 어떤 신분을 가진 사람이였다는 것을 알수있다고 한다.
   서귀포시 시내에 들어서면 마치 아열대 도시로 온 감이 든다. 길옆의 가로수들은 모두 열대지방에서 자라는 야자수와 파이내풀같은 나무들이였다.
   우리는 서귀포시를 잠간 들러 보고는 방향을 돌려 제주시로 향하였다. 제주시로 가는 도중에 삼방산있었다. 삼방산을 지나면 바다가에 그리 크지않은 부두가 있었다. 그 부두는 과거 군용부두였는데 지금 민간이 사용하는 부두로 되였다. 부두 한쪽켠에서 잠수함을 타고 바다속을 구경할수있었다. 그 부두에서 조금 내려가면 파도 모양으로 된 사암 바위가 있었다. 사암 바위 우에는 고대 생물들의 남긴 발자국이 찍혀 있었다.
  해변길을 따라 가면서 보면 바다가에 해녀들이 사용하는 집이 보이고 해녀들이 바다로 뛰어드는 장면도 어렴푸시 보이였다.
   삼방산을 지나 사암지구를 지나면 송악산이 있다. 송악산아래 평탄한 곳에는 일본침략자들이 만든 오랜 비행장 자리가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에 일본침략자들은 이곳에다 저들의 최후의 방어선을 만들기위해 비행장을 닦았고 음페호와 지하갱도를 파놓았다. 지금은 비행장과 음페호, 지하갱도를 사용하지않고 유람객들에게 보여주고 있었다. 이 비행장은 일본침략자들의 죄행을 보여주는 산교육장으로 되였다.
   우리는 서귀포시로 부터 제주시로 돌아왔다. 먼저 제주시 민속관으로 갔다. 민속관에는 제주도의 력사와 제주도민들이 지나온 생활을 도편과 문물로 전시하였다. 내가 보건대 옛 문물 중에서 제일 눈길이 가는것은 말초리로 엮은 갓이였다. 오랜 전부터 제주도에는 말이 많았다. 제주도사람들은 말초리로 장식품을 만들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서 량반과 상놈을 구분하는데 사용되였던 문물은 갓이였다. 갓이 높이와 크기에 따라 량반들이 품위가 달라졌다. 제주사람들은 말초리로 갓을 만들어 팔았다. 권력가들에게 진상품으로 바치기도 하였다.
  제주도의 원주민의 성씨는 부(夫), 고(高), 량(梁)씨였다고 한다. 제주도에는 삼성혈이라는 곳이 있는데 그곳은 부씨, 고씨, 량씨의 원적지라 한다.
   제주민속관을 지나면 제주도자연박물관이있다. 제주도 자연박물관은 다른 박물관보다 독특한점이있었다. 박물관으로 들어가는 길과 박물관 외벽을  몽땅 현무암으로 건조하였다. 박물관 안은 제주도만이 같고있는 특색을 살려 자연스럽게 잘 꾸미였다. 나는 이 자연박물관안에서 내가 상상도 못할정도로 길이가 4.8m나 되는 거물 칼치와 6.5m 되는 상어, 그리고 8.6m 되는 고래상어와 4.5m폄 폭인 대 가오리가 진열되여 있는것을 보고 깜짝놀랐다. 세상에 어쩜 칼치가 저렇게 클가! 하면서 너무도 신기하여 그칼치가 진품이 옳은가 다시보았다. 다시보아도 진짜였다. 박물관에는 세계 각국에서 증정한 보물과 동물들의 사진이 진렬되여 있었다. 중국정부에서 증정한 반달곰 사진도 있었다.
  제주자연박물관을 돌아 보고나니 오후 5시가 되였다. 우리는 저녁을 자신후 제주항으로 왔다.
  정각 19시가 되자 오하마호는 제주항을 서서히 떠났다. 나는 점점 멀어가는 제주항을 보면서 제주도가 멀지않은 앞날에 싱가포르나 홍콩 못지지않게 발전하리라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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