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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과 마카오기행
2018년 09월 12일 07시 56분  조회:2152  추천:0  작성자: 최상운
                                    홍콩 기행
 
   작년 년말 나는 세계기행의 마지막 행선지를 홍콩(香港)과 마카오{澳門}로 정하고 그리로 려행을 떠났다.
   12월 1일 오전 7시에 연길에서 고속전철을 타서 2시간만에 장춘룡가공항에 도착했다. 공항대합실에 홍콩으로 가는 려행단 단원들이 모이였다. 인솔자 진사명이 인원들을 점검하였다. 단원은 모두 20명이였다.
   10시 30분이되자 장춘-홍콩행 비행기는 장춘룡가공항을 리륙하였다. 네시간 반의 비행을 거처 비행기는 안전하게 홍콩 공항에 도착하였다.
   공항출구를 나오니 작달만한 키에 이마가 벗겨진 40대의 남자가 우리를 친절히 접대하였다. 그 남자가 바로 홍콩려행사에서 파견한 가이드 곽영홍이였다. 곽씨는 홍콩에서 태여난 사람이지만 보통말을 잘하였다. 그는 려행뻐스 안에서 홍콩의 력사와 오늘에 대하여 구수하게 이야기 하였다. 그의 말에 따르면 홍콩은 중국의 동남쪽 주강 하구의 난하이 연안에 위치해있으며 광주로부터 140km떨어져있다고 했다.과거에는 향강, 또는 샹해라 불렀으며 명나라 만력 연간에 동관에서 생산되는 향나무를 중계운송하기 시작하여 향항이라고 불렀다 한다.홍콩이란 향항을 광동어 발음을 영어식으로 표기한것이라 한다. 홍콩은 오늘날 지리적 위치가 아주좋아 세계에서 발전이 제일 빠른 지역이라 했다. 홍콩의 면적은 1,104km2인데 홍콩은 홍콩반도와 구룡반도, 신계 세 부분으로 되여있다고 했다. 홍콩이 인구는 706만명이된다고 한다. 주민의 닷수는 중국 동포들이라 했다.홍콩이 빨리 발전할수 있는것은 홍콩이 지리적 위치도 중요하지만 부지런하고 일 잘하는 300만명이 고학력을 구비한 로동력이 있기 때문이라 했다. 홍콩이 발전할수 있는 기초는 홍콩사람들은 교육을 중시한데 있다고 했다. 홍콩에는 최첨단 교욱시설을 갖춘 학교들과 교육기관들이 있다 했다. 홍콩의 많은 젊은이들이 외국 류학을 가서 전문기술을 배워 가지고 홍콩으로 돌아와 홍콩의 경제 발전에 기여하였다 한다.
   홍콩은 섬도의 땅이여서 식량, 물, 식품을 작업자족 하지 못하여 광동성과 광서성에서 물자를 구입해 온다고 한다.
  150년 전만하여도 홍콩은 척박한 지역이였으나 대륙과 련계되여 있고 바다를 끼고 있으며 수심이 깊은 항구를 가지고 있는 자연 우세를 가지고 제조업을 기둥산업으로, 물류류통을 중심산업으로 삼아왔다 했다.  1990년대 후기부터는 홍콩은 국제금융, 무역과 상업중심으로 발전하였다 한다. 동시에 홍콩으로 찾아오는 세계 각국의 손님들이 많아지자 미식업과 유람업을 병행시키여 홍콩경제가 급속도로 발전하게 되였다 한다.
   3년전에 나는 오스트랄리아 관광을 간적이 있었다. 관광하면서 이런말을 들은적이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해가지지 않는 나라로 강대함을 과시해 오던 영국은 점차 세력범위가 약해지기 시작하였다.영국의 식미지였던 나라들은 분분히 독립하였다. 독립은 하였지만 여전히 영련방에서 탈퇴하지 않고 영련방 체제를 고수하고 있었다. 영련방에 속한 나라들은 자주권을 가지였지만 여전히 영국녀왕을 상징적인 국가 원수로 모신다고 하였다.
  오스트랄리아와 홍콩은 영련방에 속하는 국가였다. 영련방 국가들은 상호간에 뉴대적 관계를 유지하면서 상업무역과 문화교류가 활발히 진행하고 있었다. 영국에서 탈퇴하여 독립한 오스트랄리아에서는 한시기 땅이 넓고 인구가 적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많은 이민과 류학생을 받았들이였다. 오스트랄리아 정부에서는 이민과 류학생을 받아들이는데 있어서 우선적으로 영련방에 속하는 나라들에서 이민과 류학생을 받아들이였다고 한다. 오스트랄리아 정부에서는 류학생들에게 본국의 학생들에 못지지 않는 우혜정책을 취하였다 한다.오스트랄리아에는 대학생들이 무료로 대학공부를 하도록 정부에서 지원하였다 한다. 세계 각국에서 오스트랄리아로 온 류학생들중에는 홍콩에서 온 류학생이 기중 많았다고 했다.
   홍콩의 많은 젊은이들은  영국, 카나다, 오스트랄리아로 류학을 가서 고등 교육을 받고 그곳에서 직장을 얻고 생활하게 되였다. 그렇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홍콩으로 돌아와 홍콩건설의 주력군이 되여 홍콩의 번영발전에 기여하였다 한다.
   공항을 떠난 뻐스는 30분만에 홍콩도에 진입하였다. 공항에서 홍콩도로 오면서 보이는 것은 높은산과 바다길, 바닷가에 촘촘히 들어 앉은 고층건물들이였다. 알고 보니 홍콩도는 홍콩에서 제일 인구가 밀집된 도였다. 홍콩의 주민 대부분이 홍콩도에서 사는데 그중에서도 빅토리아항구주변에 집중하여 살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빅토리아항구에 의하여 홍콩이 생겼다는 감이 들었다.
   뻐스가 구비구비 에돌아 우리가 주숙할 곳인 c호텔에 뭠춰섰다. c호텔은 홍콩도의 변두리에 있다고 하였다.  변두리라 하지만 시내중심지와 별반 다름없었다. 나는 호텔 15층에 들었는데 10여평방되는 작은 방이였다. 내가 여러개 나라를 다녀 봤지만 이렇게  작은 방에 주숙해 보기는 처음이였다.비록 작은 방이라 하지만 호텔로서 있어야 할 생활 용품들이 구전히  있었다.
   저녁을 자신후 우리는 홍콩의 야경을 볼려 나섰다. 홍콩의 밤은 그야말로 불야성을 이루고 있었다. 빅토리아항구를 가운데 두고 량쪽에서 일떠선 고층주택에서 내 뿜는 수만개의 불빛이 빅토리아 앞 바다를 환히 빛추는데 마치 하늘이 별무리가 바다에 쏱아져 내려 오는 듯 싶었다. 바다물에 반사되여 반짝이는 아롱진 불빛, 바다물과 불빛이 조화를 이른 황홀한 광경을 보노라니 저도몰래 감탄의 함성을 질렀다. 홍콩이 밤거리는 유명하였다.거리마다에는  오색찬란한 빛을 뿜는 가로등을 설치하여 밤거리를 아름답고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었다. 려행객들은 황홀한 홍콩의 밤 세계를 보고서 찬탄을 금치 못하여 부지런히 사진기 사타를 눌러됐다.    
   홍콩의 밤은 이렇게 아름다웠는데 낯에 보는 홍콩은 어떠할가. 낯에 보는 홍콩은 밤에 보는 홍콩과 완전히 다르다는 감이 들었다. 나는 홍콩으로 오기전에 책이나 영화에서 본 홍콩의 멋진 건축물을 보면서 호기심을 가지였는데 정작 보고나니 멋있고 화려하다는 감이 들지 않았다.그 리유는 땅이 작고 인구가 많은 홍콩에서는 생존을 위하여 작은 부지우에다 고층건물들을 지었다. 촘촘히 들어선 고층건물들을 보니 정말로 홍콩은 땅이 귀한곳이구나 하는 감이 들었다.  홍콩도의 지층은 너무나도 무거운 건층물이 압력을 받아 감당해 날가? 만약 이곳에 지진과 같은 자연재해가 들이 닥치면 어떻게 될가? 하는 부질없는 우려도 했다.
   홍콩이 거리는 넓지 않았다. 넓지 않은 도로에서 2층 뻐스들이 달리고 있었다. 달리는 뻐스를 보니 마치 이곳이 영국 런던의 거리가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었다.
   나는 높은 빌딩들이 숲을 이룬 홍콩거리를 보면서 어쩐지 가슴이 탁 트이지 않고 갑갑한 감이 들었다. 심하게 말하면 숨이 막힐것 같은 감이들면서 널직한 터전을 가지고 자연의 혜택을 받으며 여유롭게 사는 대륙의 사람들이 얼마나 행복한가를 알게 되였다.
   홍콩의 건물들을 보니 오랜건물이 적게 보이고 근래에 건축한 건물들이 많이 보이였다. 새 건물이 많다는 것은 홍콩이 근래에 발전테프가 빨랐다는 것을 의미했다.  년도를 따져보니 홍콩이 급속도로 발전하게 된것은 대륙의 개혁개방과 련관 되여 있었다. 대륙의 개혁개방을 통하여 닫쳐있던 문이 활짝 열리여 내지와 홍콩 사람들이 래왕이 빈번해 지면서 상업무역과 수출이 활발히 진행되여 경제발전 속도가 가속화 되였다.  홍콩의 발전을 보면서 홍콩은 대륙과 분리될수 없는 하나의 결정체임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이튼날 우리는 태평산으로 갔다. 태평산은 홍콩도 서부에 위치해 있는데 해발 554m이다. 태평산은 홍콩에서 제일 높은 산으로서 홍콩이 상징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청나라 가정 년간에 해적 장보자가 일찍 산위에 관망대를 설치하고 해상정황을 관찰하고 깃발을 올렸다 내렸다 하면서 산 아래에 신호를 알리였다 한다. 그래서 홍콩사람들은 태평산을 차기산이라고도 부르기도 한다.지금은 산정에 공원을 건설하고 산 아래에 산위로 올를수 있는 도로를 건설하여 산을 에돌며 올라 갈 수 있게끔 되였다. 또 케불카를 안장하여 신기슭에서 케이불카를 타고 집적 산위로 올라갈 수도 있도록 하였다. 태평산 위에는 가토진사도공원이있다.
   태평산 주위는 산비탈이 대부분이여서 보잘것 없어보이지만 공기가 좋고 소음이 없어 홍콩에서 부지값이 제일 높은 지역이라 한다. 태평산 아래에는 세계적으로 이름이 있는 경마장이 있었다. 시간의 촉박을 받아 경마구경을 하지 못하여 아쉬웠다. 태평산 기슭을 돌다보면 경치가 수려한 수림속 여기저기에 멋있게 지은 홍콩의 재벌들이 안식처인 호화형 별장들이  보이였다.
   우리는 태평산을 돌아본 후 고추 해양공원으로 갔다. 해양공원은 동남아시아에서 유명한 해양동물 센터로서 홍콩 항도 남안의  남랑산 위에 있었다.이 공원은 3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는데 부지면적은 87만평방킬로메터이다. 이 공원은 1977년1월에 건설하여 개방하였으며 후에 확건하였다.
   해양공원은 저원과 고원 두 부분으로 되여있다. 두 공원 사이에  케불카를 안장하여 아주 편리하였다.이 케불카로 시간당 5000명을 수송할수 있었다.
   우리는 차에서 내린후 먼저 해양공원 입구에서 멀지않은 곳에 있는 예술극장으로 갔다. 극장안에서 연예인들과 서커스 연기자들이 예술표현이 있었다. 개시 시간을 알리는 웅장한 북소리가 울리자 무대우에서 이름난 가수와 무용가들이 신나게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었다. 그들은 동 서양의 노래와 춤을 접목하여 연기하였는데 관람객들의 호응을 받았다. 인상이 깊었던 것은 서커스 곡예 연기자들이 표현한 고난도 곡예 동작이였다. 그들은 인간의 한계를 넘는 듯한 재주를 보여 관람객들이 갈채를 받았다. 나는 그들이 표현한 고난도 곡예 동작을 보면서 저도몰래 손에 땀을 쥐였다.
    극장을 나와 남쪽을 향하여 가면 앞에 바다가 보이는 산 중턱에 새파란 물이 출렁이는 인공호수가 보이였다. 이 호수는 해양동물들이 놀이터이자 련습장이기도 하였다. 호수를 내려다 볼수있는 경사면에 관람석을 만들어 놓았다. 관람객들이 편히 앉아 호수를 내려다 볼수 있었다.
   관람 시간을 알리는 북소리가 울리자 령리한 돌고래들이 선참 질서있게 호수로 들어와 자유로이 혜염을 치는 것이였다.마치 운동선수들이 운동시합전에 몸풀기 운동을 하듯이 돌고래도 예비운동을 하고는 음악에 맞추어 장끼 자랑을 하는것이였다. 돌고래는 령리한 동물이였다. 교련사이 지시대로 고난도 동작을 하는것이였다. 돌고래들이 동작을 할때마다 교련사들은 먹이를 주면서 고무해 주는것이였다. 돌고래 표현이 한단락 끝나면 바다표범들의 표현이  있었다. 바다표범들은 평시에는 느릿느릿 하지만 표현시간이 되면 물에서 뭍에서 매우빨리 달리며 고난도 동작을 하는것이였다. 바다 표범들도 매우 령리한 동물이였다. 그들은 교련사의 지시를 알아듣고 음악에 마추어 춤을 추는것이였다. 돌고래와 바다표범들은 자기들의 표현동작이 끝나면 고추 질서있게 우리로 들어가는 것이였다.
   해양공원에는 예술극장, 해양동물들이 놀이터 외 여러곳에 놀이기구가 설취되여 있었다. 놀이기구는 자극성이 강하여 늙은 이들이 타기는 불편했다. 하지만한 어린이들과 젊은이들은 흥이나서 놀이기구를  타고 있었다.
   홍콩에 가서 사흘되던날 우리는 홍콩총독부 옛터를 찾아갔다.홍콩총독부는 향도 중환상 이리핀도에 있었다. 홍콩총독부는 전형적인 유럽식 건축으로서 력대의 홍콩총독들이 거주하던 곳이다. 예전에는 총독부를 들어가자면 삼엄한 경비초소를 지나야 하지만 지금은 개방하여 마음대로 들어갈수 있었다. 총독부 내에는 총독부부가 거주하는 방 외에 또 강당, 응접실, 댄스 홀, 귀빈방, 수영장 등이 있다. 1997년 6월 30일 마지막 홍콩총독이 영국 국기를 내려 갖고 영원히 이곳을 떠난 후 이 건물은 력사유물로 보존되고 있다. 력사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홍콩은 100년동안 영국의 통치를 받어왔다. 1997년7월1일에 정식으로 중국에 반환되여 중화인민공화국의 한 특별행정구가 되였다. 홍콩이 중국으로 반환된 후 경제, 법률, 사회제도는 1997년부터 50년동안 불변하기로 하였다.
   나의 한 친구는 홍콩이 중화인민공하국으로 반환된것을 보고“중국이 만만디가 성공했다”고 말하였다. 그말 뜻은 중국이 자기의 살점이나 다름없는 홍콩과 마카오를 외국침략자에게 떼여주고 피눈물을 흘리면서 그 살점을 찾기위해 내심히 인내력있게 백년을 참아내며 기다려 합법적으로 끝내 번영발전한 홍콩과 마카오를 되 찾고야 만 그 정신이 바로 “만만디”라고 표현한 것이다.
    우리는 홍콩통독부를 돌아 본후 차를 타고 홍콩도 중심에 있는 홍콩이 중국으로 반환한것을 기념하여 세운 기념탑과 전시관을 보았다. 전시관 앞마다에 있는 기념비는 황금을 도금하여 만든것인데 매우 화려하고 견고하게 만들었다.기념비 앞에서 유람객들은 줄을서서 사진을 찍었다. 유람객들은 홍콩 반환중심대청안에서 홍콩의 력사와 근래의 홍콩의 정황을 도편으로 볼수 있었다. 홍콩반환중심에서 멀지않은 곳에 중국인민해방군 홍콩주둔군 사령부가 있었다.
   홍콩에간 4일만에 우리는 홍콩에서 제일 큰 섬인 대서산으로 갔다. 대서산은 원래 대호도라 하였다.홍콩에서는 대서산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대호도라고 부르기도 하였다.대서산은 홍콩경내에서 제일 큰 섬이다. 섬의 면적은 홍콩도의 거의 배나 크다. 대서산은 겨울철과 여름철에 제일 리상적인 관광지이다.
    그날 려행 일정은 온 하루 대호도에서 보내도록 되여 있었다. 식사는 자비로 하도록 되였다. 아침 9시부터 저녘 8시까지 대호도에 있어야 했다. 대호도는 상주 주민구역이 아니고 상업과 유람기지로 조성되였다. 대호도는 하나의 공원으로 조성되여 있다고 말할수 있다.
    대호도공원에는 공원을 한바퀴 돌수있는 작은 기차가 있었다. 공원을 구경할 유람객들은 공원 입구에서 문표를 산후 공원입구에 있는 남쪽역에서 기차를 타면 공원이 반대편인 북쪽역에 내리게 된다 공원안을 돌아본 연후 돌아올때면 북쪽역에서 기차를 타면 원점인 남쪽역으로 오게 된다.
    공원안에는 각종 놀이기구들이 있었고 자극성이 강한 체험관들이 여러곳에 있었다. 그 체험관중에서 가장 아짜아짜한 감을 느끼는 곳은 마귀동굴이였다. 체험관 외에 로천극장이 있었다. 로천극장에서는 이름있는 연예인들이 콘서트가 있었고 말타기 경주도 있었다. 로천극장 안은 관람객들로 꽉찾다.
   홍콩도 4계절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4계절이 뚜렸이 알리지 않았다. 12월이데도 홍콩의 낯 기온은 섭씨26도였다. 홍콩은 비가 자주 내리는 곳이면서도 변덕이 많았다. 내가 대호도공원에 갔을 때였다. 맑은 청청 하늘에 작은 구름떼가 보이더니 얼마 안되여 비가 억수로 퍼붓는것이였다. 비가 끊으면 인츰 맑은 하늘이 되기도 했다.
    대호도공원중심에는 길지 않은 중심거리가 있었다. 길 량켠에는  백화상점, 마트, 음식점들이 촘촘이 있었다.홍콩의 음식은 다양하였다.중국식 료리와 서양식 료리들이 있어 려행객들이 마음대로 골라 자실수 있었다. 12시가되자 우리 일행은 k음식점으로 들어갔다. 나는 백원짜리 소고기를 사서 먹었다. 잘 굽힌 소고기 덩이를 포크로 잘라서 양념에 찍어먹으니 별미였다.고기를 먹으면서 달콤하고 시원한 음료를 마시니 별맛이였다.
   우리가 점심을 먹고 나오니 거리에는 요란한 음악소리가 들리였다.왼 소리인가? 알고 싶어 거리로 갔더니 여러가지 피부색을 가진 건장한 젊은이들이 여러가지 탈을 쓰고 행진을 하면서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는것이였다. 길 량켠에는 수많은 길손들의 줄을서서 그들을 응원하였다. 그들이 연주하는 음악은 절주가 빠른 현대 음악들이였고 춤은 란틴 댄스였다..
  저녘6시가 되자 우리는 로천식당에서 저녘을 먹었다.먹은 음식은 빵과 삶은 옥수수였다. 빵과 옥수수를 먹으며 한편으로 커피를 마이니 별맛이였다. 우리가 음식을 먹고 있는데 참새무리가 우리 한테 접근하여 먹이를 찾고 있었다. 그곳 참새들은 사람을 무서워 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먹던 빵 쪼각과 옥수수를 밥상 주위에 뿌려주었다. 령리한 참새들은 날렵하게 날아 다니며 재치있게 쫗아 먹는것이였다.
   그날 그 로천음식점에서 말레아시아에서 온 유람객을 알게 되였다.우리가 앉은 상옆으로 이스람전통복장을 입은 모녀로 보이는 두 녀인이 와서 앉았다. 우리가 음식을 먹으며 조선말로 말하자 딸로 되여 보이는 녀인이 나를 보고 한국말로 한국에서 왔냐고 묻는것이였다. 나는 녀인이 한국말을 류창하게 하자 나는 저으기 놀랐다. 나는 한국에서 오지않고 중국에서 왔다고 조선말로 대답했더니 중국에도 한국인이 살있느냐고 되 묻는것이였다. 내가 중국에 한국말을 할줄아는 조선족이 많이 살고 있다고 말했다.그는 내말을 들으면서도 리해가 안가는지 머리를 저었다. 내가 그녀를 보고 어느나라에서 왔으며 어떻게 한국말을 구사 할줄아는가? 물었다. 그녀는 자기는 말레아시아에서 왔는데 한국 드라마를 보면서 한국말을 배웠다고 했다. 나는 그녀를 보고 머리가 좋은 총명한 녀자라고 엄지손가락을 펴 보이였다.
   저녘 7시가 되자 나는 집합장소로 갔다. 나이 많은 사람들은 거진 왔는데 젊은이들은 오지 않았다.  젊은 이들은 12시간이 짭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들은 쇼핑하는데 정신을 팔다보니 저녁8시 반이 되여야 집합 장소로 왔다. 모임속에 5섯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알고보니 그들은 일찌감치 지하철을 타고 호텔로 갔던 것이다. 그말을 듣고 나는  대호도로 지하철이 통하는줄 앓았더라면 그들처럼 일찍감치 호텔로 갔을것 그랬다고 후회했다.
   홍콩에서 3박4일을 체류해 있으면서 많은 것을 보았다. 홍콩의 공항, 부두, 건축물, 놀이터와 유람지를을 보면서 홍콩이 정말로 발전하였다는 감이들었다.
   사람들은 자기가 사는곳을 제일 살기좋다고 생각한다.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홍콩에 와서 내가 살고 있는 연길을 대비해보니 연길은 홍콩보다 못지지 않다는 자부감을 가지였다.  홍콩사람들은 비록 부유하게 산다고 하지만 자원의 결핍으로 주거지가 비좁아 숨막힐 정도로 어려운 생활을 하여야 하고 모든것을 아끼고 모아야 생존할수 있지만, 우리는 풍부한 자연자원의 혜택을 받으며 여유롭게 살고 있지안냐? 생각되면서 가슴이 뿌듯해 났다.
 
 
                                        마카오(澳門) 기행
 
    홍콩에서 체류해 있은 나흘만에 우리는 마카오로 가는 길에 올랐다. 홍콩에서 마카오로 가자면 제일 편리한것이 배를 타고 가는 것이였다. 홍콩에서 배를 타고 마카오로 가는데 한시간이 걸리였다.
   오전 9,30분에 홍콩항을 떠난 려객선은 10시30에 마카오에 도착하였다. 나는 려객선을 타고 마카오로 간다고 하였을 때 려객선의 달리는 속도가 느닐것이라 짐작했다. 그런데 내 상상보다 배는 빠르게 달리였다.우리가 탄 려객선은 시속 40킬로메터로 달리였다.
   마카오에 도착하였으니 마카오에 대하여 알아야 했다. 마카오는 주강삼각주 남단반도에 위치해 있었다.북쪽은 주해시 북안과 인접해 있는데 마카오반도와 타이파, 콜로안 두 섬으로 구성되여 있었다. 마카오는 이전에 광동성 향산현(지금의 중산시)에 속해 있었다. 마카오란 이름은 포르투갈어로 평화스럽게 다녀오라는 말이라 한다.
    명나라 가정32년(1553년)에 포르투갈이 강압적으로 대안에 상륙하여 마카오에서 정박부두를 얻고 무역의 권리를 얻었으며 점차 두섬을 강점하였다.400여년간 포르투갈이 마카오를 점령하고 있었다.1987년 중국과 포르투갈 공동성명에 근거하여 중국정부는 1999년12월 20일에 마카오에 대한 주권행사를 회복하였으며 마카오특별행정구를 설립하였다.
    마카오의 면적은 27.3km2이고 인구는 60만5천명이 된다고 한다. 주민대부분이 중국 동포들로서 광주말을 위주로 쓰고 있었다. 마카오의 대부분 시민들은 마카오반도에 집중해 있고 일부가 타이파,콜로안 두 섬에 살고 있었다. 지금 마카오에는 포르투갈인과 외국인이 5프로를 차지하고 있었다.
    마카오는 환경이 우아하고 기후가 사람의 살기에 적합하다. 마카오의 경제는 경공업과 방직공업, 관광업, 건축업, 부동산업을 기간산업으로 하고 있으며 도박업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마카오는 내륙과 바다와 륙지가 련결되여 있어 수륙교통이 편리하였다. 마카오에서는1995년에 수상비행장을 건설함으로서 마카오의 경제발전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마카오에는 명나라때 건조한 마조각묘와 관음당,봉봉묘등 3대사원이 있다. 이밖에 손중산기념관, 대삼파패방, 송사등대, 서망양 산정교회당 등이 있다.
    우리는 부두에 도착한 후 출구를 나와 차를 타고 마카오 시 중심을 돌아보았다. 마카오 시 중심에는 멋있게 지은  8개의 큰 도박장이 있었다. 사람들은 마카오라 하면 의례 도박을 상기한다. 도박이 마카오에 있어서 주요 경제래원의 중심 이기 때문이다. 마카오에 있는 여러 도박장 중에서 포경주점이 제일 유명하다.이 주점은 현대식의 방대한 건축물로서 3층으로된 원형 구조로 되여있다. 실내 장식이 호화롭고 화려하다.  이 도박장은 1년내내문을 열고 있으며 매일 24시간 영업을 하는데 밤새도록 등불이 대낮 같이 밝게 켜져 있다.당지 주민들은 이 도박장을 “범의 굴”이라 부르고 있으며 오래전부터 많은 비극이 여기에서 일어났다 한다.
    마카오 도박장을 보니 마치 여러개 도박장이 집중되여 있어 도박마을을 이루고 있다는 감이 들었다. 어떻게 보면 마카오는 도박장을 중심으로 도시가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도박장 주위에는 도박장으로 오는 객들이 주숙할 호화로운 호텔과 빌딩이 있었다.이런호텔과 빌딩에서는 최고급의 서비스를 제공한다고 한다.
    마카오를 돌아보니 마카오는 홍콩에 비하여 터전을 너르게 잡고 있어 시원스런 감이 들었다. 하지만 옛 거리들을 보면 거리가 좁고 집들이 촘촘히 있어 갑갑한 감이 들었다. 마카오에는 신 구역과 구 구역으로 구분되여 있었다. 구 구역의 옛 거리에는 많은 문화재들이 있었다.홍콩정부에서는 옛 거리에 있는 문화재들을 보호하면서 신형의 거리를 수축하고 있었다. 아직 개발되지 않은 건축물들을 보면 서양식 건축양식과 중국의 건축양식을 갖춘 건물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새 구역들은 길이 넓었다. 길 량켠에는 여러가지의 양식을 갖춘 고층건물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넓은길, 길과 어울리는 가로수, 고층건물들이 신구역의 면모를 일신시키고 있었다.
   마카오에서 눈에 확 안겨오는 것은  섬과 섬사이를 련계시킨 길다란 다리였다.다리들은 모두 근래에 건축한 다리로서 새치하고 멋이 있었다.
   우리는 도시 중심을 벗어나 마카오의 명물인 대삼파방을 볼려갔다. 대삼파방이란 마카오반도 중앙 대포산에 있는 세인트 피터성당 앞벽을 말한다. 세인트피터성당은 이전에 삼파사라고 하였다. 삼파사란 포르투갈어로 세인트 피터를 의미한다. 세인트 피터성당은 명나라 만력8년(기원1580년)에 포르투갈 사람들을 위해 건설한 것이였다. 1835년에 큰 화재로 타버리고 앞벽밖에 남지 않았는데 지금까지 그벽이 보존되어 력사 문화재로 되였다.
   대삼파패방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것은 성벽이 높고 길다고 하여 지은 이름이라 한다. 대삼파패방은 그리스 파로크식 건축풍격으로 화강석과 벽돌로 쌓아 만든 4층 첩주식 벽이였다. 3층중앙에는 성모 마리아의 동상이 모셔져 있었다.
   대삼파패방를 돌아보고 대삼파패방에서 멀지않은 곳에 있는 대포대성보(大砲台城堡)를 보려갔다. 대포대성보는 원래 대삼파성당내에 있은 하늘에 제를 지내는 제전대로서 1916년에 포대로 개축하고 대포대라고 하였다.16세기 포르투갈 사람들이 마카오에 와 이곳을 빌어쓴 후 즉시 마카오의 여러 요새들에 여러 개의 포대를 수축하였는데 그중에서 제일 유명한 것이 대포대성보였다 한다.포대의 형상은 정방형으로 유럽의 고대 건축물 풍격을 모방하여 건조한 것이였는데 기세가 웅장하였다.포대내에는 지금도 여러 문의 거형의 철제 대포가 있었다. 대포대는 지금 기상대의 역활을 하고 있었다.대포대는 시중심 산꼭대기에 있기 때문에 이곳에서 시내 전경을 조감할 수있다.
   우리는 대삼패방과 대포성보를 돌아본후 차를 타고 마조각을 보려갔다.마조각은 마조각묘 마라도 한다.마카오반도 서남단에 있는 마카오 삼대 고묘중 첫번째의 고묘이다. 명나라 홍치 원년(기원 1488년)에 건설되였다.묘내의 주요한 건축들로는 홍인전, 대전, 석전과 관음가이다.전 삼전은 모두 마조신상에 제를 지내는 곳이였다.마조각은 명나라 만력연간 (기원 1573년-1620년)에 건설하였다. 승정 2년(기원 1629년)에 크게 확건하여 지금의 규모를 갖추게 되였다.
   마조각묘는 원래 마조각이라 하였으며 또한 아마묘라고도 하였다.마조각묘는 마카오에서 제일 오랜 중국식 사원이였다. 해마다 음력으로 3월23일 아마 탄생일이되면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찾아아 향을 피우며 행운을 빌고  있다.
우리가 마조가묘를 찾아갔을때 평일 인되도 묘를 찾는 사람이 많았다.
    마조각부근에 해사박물관이 있었다. 박물관은 주로 포르투갈인들이 초기에 마카오에 들어올 때 사용한 항해선박들의 모형과 그들이 입던 옷, 중국 고대어선, 조선도구, 어로설비와 오늘 마카오에서 사용하고 있는 각종 수상통수단 등을 소개하고 있었다. 박물관에는 풍부하고도 흥미있는 해사자료들을 수장하였으며 거기에 공예가 정밀한 모형들을 갖추어 놓음으로서 관람자들의 시야를 넓혀주고 있었다.
   1박 2일을 마카오에서 보내였다. 내가 주숙한 호텔은 마카오 교외에 있는 한 호텔이였다. 호텔 방은 넑직하고 설비가 최상급이였다.좋은 호텔에서 하루밤을 자고 이튼날 아침 5섯시에 떠나 부두로왔다. 부두에서 배를 타고 “마카오 안녕”웨치였다.
   홍콩부두에서 홍콩공항 까지 왔다가 다시 차를 타고 홍콩공항에 이르렀다. 홍공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장춘룡가공항으로왔다. 장춘룡가공항에서 고속전철을 타고 연길로 왔다. 연길에 도착하니 저녁 9시가 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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