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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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천영화와 함께한 나날들
2022년 01월 17일 19시 33분  조회:883  추천:1  작성자: 한영철
우리 마을에서 로천영화가 흥행한 시기는 아마 지난세기 70년대 중반이였을 것이다.당시 대대지도부에서는 촌민들의 문화생활을 풍부하게 하기 위하여 영사기 한대를 구입했고 또 전문으로 방영원과 번역원를 배양하였다.문화생활이  극빈했던 그 시절에 로천영화를 방영하는 날은 온동네의 잔치날이나 다름  없었다.
   하학하고 귀가 하던 길 저녁에 마을에서 영화를 돌린다는 소식을 입수하면  그보다  기쁜 일이 따로 없었다.하긴 저녁녘이 될때면 의례 대대에서는  유선방송을 통하여  영화소식을  홍보했지만 몇시간 앞서  소식을 알고 있었다는 것으로도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른다.
   그시절 가장  많이 방영한 영화로는《지뢰전 》,《갱도전》이 아닌가  생각된다.그때만 해도  "4인무리"가 문화전선에서 살판치던 때라 많은 영화는 본보기극이였다.많은 본보기극 영화는 문화대혁명전에 출품되였던 예술영화를  재창작한 것들 인데 례를 들자면 《홍색랑자군 》《 홍호적위대》《평원유격대》등이다.조선족 소학교를 다니던 우리 또래 친구들에 게는  알아듣기 힘든 경극가사와 대사 그리고 과장된 표달방식이 리해하기 힘들었 다.하지만 그 시절 문화대혁명전에 출품된 많은 우수한 영화들은 독초라는 판명을 받고  방영이 금지된 상태라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었다.
   경극영화건 예술영화건  그저 영화를 볼수있다는 사실만 으로도 우리는 좋았다.결국 영화는 영화대로 잔치는 잔치대로 치러지는 판이였다.영화하는 날에는 일찌감치 저녁을 먹고 우리 또래 친구들은 쪽걸상이나 비닐방막 그것도 없으면 하도 못해 벼짚단이라도 챙겨가지고 대대마을로 뛰여갔다.한것은 일찍가야 좋은 자리를 차지 할수 있었기 때문이였다.그때는 마을에 애들도 많고 어른들도 많았다.매번 영화하는 날은 진짜 잔치날같은 분위기였는데 어른 아이 할것없이 빼곡히 모여 앉아 목을 빼들고  영화막을 지켜보았다. 어떤 사람들은 닦은 해바라기며 옥수수 같은 먹거리를 가지고 갔는데 그 고소한 냄새가 사람들로 하여금 코를 벌름거리게 하였다.어떤 사람들은 아예 영화에는 관심이 별로 없고 코를 구르는가 하면 어떤 애들은 영화구경왔다는것이 아예  부모무릅을 베고 자고 있었다.
   한번은 고개 넘어 광흥촌에서 《정찰병》이란 영화를 한다고 하여 나는 기어이 큰형님뒤를 따라 갔다.캄캄한 밤에 꼬박 한시간을 걸어 갔던 것이다.그 영화는 혁명적본보기극과는 완전히 다른판 이였는데 이름난 영화배우 왕심강이 주역을 맡고 있었다.왕심강을 어떻게 알아 보았냐 하면 우리 외삼촌집에 문화대혁명전에 발매했던  10대명배우 사진에서 본적이 있기 때문이였다.영화는 우선 이야기 자체부터가 남자애들의 호기심을 잡는 정찰소재였고  배우들의 연기 또한 너무도 진실하여 관객이 막  영화속에 끌려 들어가는것 같았다.지혜와 담략으로 적들과 싸우는 우리 정찰병들의 이야기는 어린 내마음을 쥐었다 놓았다기 충분하였다.영화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너무 피곤하고  자부럼이 몰려와  몇번이고 번저질번 하였다.
   어릴때는 영화를 보고는 그 시늉도 잘 따라 하였다.우리 웃동네 아이들은 《10월의 레닌》에 나오는 장면들을 모방하여 쩍하면 전투놀이를 조직 하였다.웃학년의 큰 애들이 와씰리역을 맡고 우리 또래 애들은 홍군과 백군으로 편을 나누어 전쟁판을 벌리는것이다.군관역을 맡은 애는 나무권총을 꼬나들고 "동지들 나를 따라 돌격"하며 고함도 지르는데 제법 진짜 영화에서 나오는 전쟁판을 떠올리게 했다.홍군과 백군은 나무 꼬챙이를 휘두르며 박투를 하는데 전혀 사정을 두지 않았다.군관역을 맡은 애들은 새끼줄끝에 나무토막을 비끌어 매여 놓고 시시로 전화로 지시하는 시늉을 하는가 하면 또 병사역을 맡은 애들은 사령부로 달려가 시시각각 전투상황을 회보 하기도 하였다.연출도 없고 씨나리오도 없이 벌어지는 전투놀이 였지만 우리는 너무도 진지하게 맡은바 역을 잘 해나갔다.
   봄 여름 가을철에는 로천에서 영화를 방영했으나 추운 겨울에는 그렇게 할수 없었다.하여 방영원은   경운기에 영사기와 영화막을 싣고 낮에 각 소대로 다니며 혹은 집체호에서 혹은 창고같은데서 영화를 돌리였다.그런 덕분에 같은 영화를 여러번 관람할수 있게 되였다.《도강정찰기》란 영화를 나는 하루에 세번본적도 있었다.형님친구의 알선으로 영화 《도강정찰기》번역대본을 얻어  보게 되였는데 너무도 재미있어  두번이나 베끼여 두었다.그러니 보니 대사를 줄줄 외울수도 있게 되였다.
  촌에서 상영되는 영화는 일반적으로 오래된 영화가 대부분이 였다.그러니 새로 출품된 영화는 영화관에 가서야 볼수 있었다.내가 셈이 들어서 처음으로 시내 영화관에가 관람한 영화는 조선예술영화 《금이와 은이의 운명》였다.영화관람 하는 내내 은이의 기구한 운명때문에 눈물이 끊이지 않았다.
   몇해전 연해도시에서 사는 친구와 함께 그의 고향마을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동네 구경을 끝내고 나니 친구 말이 이동네에 삼촌으로 모시는 분이 계시는데  인사하고 가자고 하였다.주인되분은 우리를 열정적으로 맞이했다.집에 들어서자 나의 눈길을 바로잡은 것은 탁자위에 진렬해놓은 골동품에 가까운 영사기였다.
   아.그렇게도 나의 호기심을 끌었고 우리에게 기쁨을 선물하던 영사기가 아닌가.그처럼 숭배에 가깝던 영사기를 40여년 세월이 지난 이때에 이처럼 가까이에서 보게 된것이다.보매 주인장도 당년 로천영화의 충실한 관중인가 보다.얼마나 로천영화를 못잊었으면  집에다 까지 영사기를 진렬해 놓았을가.
  로천영화와 함께한 사람들은 공동의 언어가 있고 공동의 회억을 가지고 있다.그것은 바로 비록 가진것이 적어도 영화로 세상을 내다보고 영화로  꿈을 꾸고  영화로 생활을 꾸며 간 것이라 생각한다.
  아.잊지 못할 70년대 로천영화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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