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룡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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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문학 특별기획 (2) 리덕수의 고향사랑
2018년 09월 13일 17시 46분  조회:1143  추천:0  작성자: 강룡운
연변문학 특별기획(2)
 
                    
리덕수의 고향사랑
 
김숙련 서진청 류석춘
 
 
 특수한 접대임무
 
1984년 5월 4일부터 5월 11일까지 그 당시 중공중앙 총서기였던 호요방(胡耀邦)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대한  방문을  매우 성공적으로 진행하였다. 

호요방은 조선에 대한 방문을 마치고 5월 11일 도문교두를 거쳐 귀국하면서 곧바로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사업을 시찰하게 되였다. 호요방 총서기의 래방은 리덕수는 물론 연변조선족자치주로 말하면 그야말로  엄청난  대사였다. 호요방의 귀국 하루 전에 호계립(胡启立)이 맞이하러 연변에 먼저 오게 되였다.  호계립은 당시 중공중앙 정치국위원, 서기처 서기였다.  호계립은  도착하는 날 오전에  곧 연변의 사업회보를 청취했다. 앞서 호계립은 다들 바쁠텐데 자기 때문에 정상적인 사업에 지장을 주어서는 안된다면서 각 부문마다 일일이 회보할 것 없이 리덕수 한사람의 회보만 듣겠다는 의견을 분명하게 내놓았다. 그래서 회보에는 주당위 비서장 김동기 등 몇 사람이 더 자리를 같이 하게 되였다. 리덕수는 연변의 력사개황과 현재의 정황을 비롯한 연변의 기본정황을 소개하고 나서 연변에서 중점적으로 해결해야 할 몇가지 문제를 회보하였다. 그중에서  림업관리권한을  아래에 이양해달라는 문제가 중점중의 중점으로 제기되였다. 회보가 끝나자 호계립은 갑자기 오후 시간을 타서 린근 현시에  내려가볼 수 없겠느냐고 물었다.  리덕수는 오후에 호계립을 배동하여  룡정으로  내려갔다. 사전에 호계립한테서 린근  현시에  내려가 조사연구하겠다는 제의가 없었기에 갑작스레  내려가게 되였고 룡정에서는 사전에 아무런 준비도 갖추지 못하였다.  ’원생태’로 생기를 뿌리는  룡정의 모습을 보게 되여 호계립은 매우 즐거워하였다. 호계립은 룡정시내 거리를 거닐면서  연변 조선족의  일상생활과 생활습관. 특히는 미풍량속에 짙은 흥미를 갖고 이것저것 물었다. 호계립은 룡정현소재지가 매우 깨끗하다고 치하하는가 하면 또 룡정사과배과수원이 너무 커서 끝도 보이지 않는다고 감탄하기도 했다.  이 말을 듣고 리덕수가 

“계립동지께서 가을에 오셨더라면  이 도로 량켠에 사과배들이 가득 쌓여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겠는데요.”라고 아쉬워하였다.  
    호계립은 동감인듯 머리를 끄덕였다. 

“연변은 그야말로  확 끌리는 훌륭한 고장입니다.”

    연길에 돌아와서 호계립은 부르하통하를 일별하더니 이 강바닥에 물이 넘치도록 다단계 물막이땜을 건설하면 어떻겠느냐고 제의했다. 그후부터 연길시에서는 부르하통하 다단계 물막이땜 건설계획과 사전작업에 들어가게 되였다.

호요방이 연변에 도착하기 전에 매사에 세심한 리덕수는 주당위 판공실 관련 책임자한테 이전에 호요방이 연변에 와서 시찰할 때 찍은 사진을 찾아보라고 분부하였다.  ‘문화대혁명’ 이전에 호요방은 연변에 시찰온 적이 있었다. 판공실 책임자는 반나절이나 뒤적여서야 겨우 사진 한장을 찾아냈다. 연변조선족자치주당위 제1임 서기였던 주덕해가 호요방을 배동하여 연변대학을 시찰할 때 찍은 사진이였다. 그 속에는 연변대학의  로교장이자 저명한 중국조선족 교육가인 림민호(林民镐)의 얼굴도 함께 들어있었다.  리덕수는 호요방  및  대표단 일행을 영접하려고 미리 앞당겨 도문에 도착하였다.  이윽고 전용렬차는 조선 남양 쪽으로부터 두만강대교를 경유하여 우리 나라 경내 도문역에 서서히 들어섰다. 

전용렬차가 멈춰서고 차문이 열리기 바쁘게 리덕수는 얼른 전용렬차에 올랐다. 호요방은 리덕수를 보자 대뜸 몸을 일으키더니 멀리서부터 손을 내밀어 뜨겁게 악수를 나누었다. 

리덕수는 정중하게 총서기한테 인사를 올렸다. 

“총서기동지! 안녕하십니까? 저는 연변주당위 서기 리덕수입니다.”

     호요방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환한 미소를 지었다. 

“알고 있습니다. 알구말구요...” 

 리덕수는 총서기한테 연변인민을 대표하여 다시 한번 인사를 올렸다. 

“우리 연변 여러 민족 인민들은 총서기동지를 열렬히 환영합니다!”

     호요방은 가볍게 손으로 의자를 가리켰다. 

     “고맙습니다, 그럼 어서 이리로 건너와 우리 앉아서 좀 이야기를 해볼가요!” 

호요방과 만나면서  리덕수는 총서기께서 대단히 열정적이고 붙임성이 좋으며 조금도 틀거지가 없다는 인상을 받게 되였다. 리덕수는 그전에도 호요방을 뵌 적이 있었지만 이렇게 근거리에서 서로 마주보며 만나뵙기는  이번이 처음이였다. 하긴 아직 젊은 리덕수한테는 애초에 다소 부담스러운 부분이 있었다. 그런데 호요방과 악수를 나누고 몇마디 이야기를 주고받고 나니  대뜸 기분이 가벼워났다.

    호요방은 리덕수에게 이렇게 물었다. 
    “동무가 보건대 조선 쪽에서 백성들이 살고 있는 살림집과 우리 연변 쪽 백성들이 살고 있는 살림집이 어느 쪽이 더 나은 것 같습니까?”
리덕수는 자기가 이미 알고 있는 정황에 근거하여 이렇게  대답했다. 
“밖에서는 조선 쪽 가옥들이 우리 중국 연변 쪽 가옥들보다 나아 보입니다. 저 쪽에선 벽에다가 회칠을 깔끔하게 해서인지 먼데서는 정말 멋있어보입니다. 그런데 주택 구도나 사용상의 편리 그리고 가구를 장만해 놓은 걸 보면 저쪽이 오히려  우리 쪽보다 못한 편입니다.”
호요방은 수긍이라는듯 머리를 끄덕이였다. 
“조선에서는 위생에 참으로 정성을 쏟는 걸 보았습니다. 그리고 교육도 착실히 틀어쥐고 있습니다. 우리가 본받아야 할 부분들입니다.” 
리덕수는 묵묵히 총서기의 말씀을 머리에 기억해두었다.
이 때 총서기는 리덕수와  이야기를 나누느라 여념이 없었다.  
    리덕수는 너무도 격동되여 이렇게 말했다. 
    “총서기동지께서는  연변행이 이번까지 두번째 아닙니까? 첫번째는 공청단중앙 제1서기로 계실 때 연변을 처음 찾으셨습니다. 이번에 총서기께서 오신다 하기에 저희들은 모처럼 당시 연변에 오셔서 시찰할 때 남긴 사진을 찾아보았습니다.”    
리덕수는 이렇게 말하면서 확대한 그 옛날 흑백 사진을 꺼내보였다. 
“보십시오. 이것은 총서기께서 그 때 연변대학을 시찰할 때 찍은 사진입니다.”
호요방은 못내 기뻐하시면서 사진을 들고 꼼꼼히 눈여겨보면서 입을 열었다.
  “이 분이 주덕해동지 맞지요? 그리고 이 분은 연변대학 교장  림민호동지가 아닙니까?”
     리덕수는 찬탄이 절로 튀여나왔다. 
 “총서기의 기억력은 정말 놀랍습니다.” 
호요방은 사진을 한참이나 뜯어보다가 옆에 있는 양상곤(杨尚昆)한테 넘겨주었다.
“상곤동지도 보십시오!”
     양상곤이 사진을 보고 껄껄 웃으면서 “총서기동지는 그 때 정말 젊으셨습니다!”하고 덕담하는데 호요방이 느닷없이 물었다. 
    “주덕해동지는 그 후에 어떻게 되였습니까?”
 갑자기 화제가 무거워졌다. 리덕수의 기분도  금세 가라앉았다. 그는 총서기한테 사실 대로 말씀드렸다. 
 “주덕해동지는  ’문화대혁명’ 속에서 엄중한 박해에 시달리다가 나중에 남방에서 별세하셨습니다.  ’문화대혁명’이 금방 시작되였을 때 주덕해동지가  연변에서 비판에다 투쟁까지  받게 되자 주은래 총리는 주덕해동지를 보호하려고  남방으로 옮겼습니다.  그는 실은 한을 품고 세상을 뜨게 되였습니다.”
  여기까지 듣고난 호요방은 한참 동안 깊은 사색에 잠기더니 림민호 교장의 신상을 물었다. 
    리덕수는 이렇게 말했다. 
  “림민호 교장도  ’문화대혁명’ 중에 박해를 받고 별세하셨습니다. 모교를 졸업한 학생으로서 저희들은 더구나 로교장님을 떠올리면 마음이 무거워납니다!” 
 리덕수의 말을 듣고 호요방은 또 한참 동안 침묵에 잠겼다.
  계속 앞으로 달리는 전용렬차에서 호요방은 깊은 사색을 이어나갔다. 달리는 차에서 총서기는 주덕해동지한테 높은 평가를 내려주었다. 주덕해에 대한 총서기의 평가는 전면적이고도 공정하였으며 너무도 실사구시적이여서 더구나 마음을 후련히 적셔주었다.
  총서기의 말씀을 들으면서 리덕수의 가슴은 세차게 울렁거렸다. 그는 마음을 가다듬고 귀담아듣는 한편 한마디라도 놓칠세라 열심히  적어놓았다.  나중에 리덕수는 자기의 기록을 정리하면서 총서기의 말씀의 심각한 의미를 보다 더 절실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총서기의 평가의 의미는 너무나도 풍부하고 소중하였다. 나중에 주덕해기념비에 새겨넣은 비문은 호요방의 이 때 평가였다. 
  전용렬차가 도문을 떠나자 총서기는 리덕수한테 이렇게 물었다. 
   “덕수동무, 도문부터 연길까지는 얼마나 걸립니까?”
   “딱  한시간 걸립니다.” 
 호요방은 호쾌하게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그럼  여유 있네요.  나머지 시간은 모두 동무한테 맡길 테니까 동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면 다 털어놓으십시오.”
  그 때 리덕수는 연변의 림업문제를 회보하면서 이 같은 의견을 내놓았다. 
  “연변림업의 관리권한을 상부에서  아래에 이양해주어야 합니다. 림업관리권한을 지방에 내려보내지 않으니 농민들과 자칫하면 갈등이 터지게 됩니다. 농사까지 지어야 하는 삼 림지구의 농민들이 가을철에 산에 들어가 소추수를 하거나 잣나무에서 잣을 좀 따려고  해도  여기저기 막히기에 불평이 대단합니다. 연변에서  림업을 발전시키려면 반드시 림업체제개혁을 가져와야 합니다.” 
    리덕수는 또 자기의 견해를 솔직히 밝혔다. 
    “총서기동지,  좀 외람될 수도 있겠지만 지금 우리의  림업체제는 50년대에 완전히 쏘련에서 그대로 옮겨온 묵은 틀이므로 반드시 개혁하여 림업관리권한을 아래에 이양해주어야 합니다. 연변의 림업체제도 역시 쏘련의  체제를 그대로 본떠온 것입니다.  이런 낡은 체제는 연변의 림업발전을 심각하게 저애하는 걸림돌로 되고 있습니다.” 
     “연변에서는 림엄을 흥성시키고 림업발전을 가져오려면 우선 림업체제를 개혁하여야 합니다.  목전에 림업관리권한을 아래로 이양해주는 게 시급합니다. 현재 상급에서 무엇이나 다 관리하고 있는 듯한 체제로 되여있으나 많은 정황, 특히는  많은 큰 일들에서도 강 거너 불 보기 식입니다. 례를 들면  지금 산에서 홍수가 자주 터지고 해마다 산불이 자주 일어나면서  적잖은 산들이 황페해있어도 관계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리덕수가 여기까지 이야기하자 호요방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차창 밖을 대다 보았다.  
     리덕수의 회보는 계속 이어졌다. 
    “총서기동지도 보시다싶이 도문 이쪽 우리의 산들은 얼핏 보아도 저 건너 조선 쪽 산들보다 엉성합니다.  ’문화대혁명’  10년 동란기간에 우리 이쪽에서는 산의  나무를 모조리 베여버렸습니다.  자손후대에게 죄를 짓게 되였습니다.”
    호요방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 우리 이쪽에는 확실히  민둥산들 뿐이군요. 조선 쪽 산들이 우리 쪽 산들보다  푸릅니다. 덕수동무! 동무의 말에 일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대중들과 농민들의 적극성을 충분히 동원하여 봉산하고 산림을 육성하여 우리의 산을 잘 관리하고 살찌워야 하겠습니다.”
     총서기의 말씀에 리덕수는 힘을 얻게 되였다. 
  “총서기께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희들은 기어코 연변의 산림을 잘 육성하고 잘 보호해 나갈 것입니다!” 
     호요방은 다시 원래의 화제로 돌아와 리덕수한테 물었다. 
  “덕수동무! 림업관리권한을 우에서 아래로 이양해야 한다는 것은 무슨 일입니까? 동무들이 림업관리권한을 우에서 아래로 이양해줄 것을 요구하고 있는데 도대체 어떻게 이양해달라는 말입니까? 좀더 상세하게 이야기해주겠습니까?”
    “현재 전반 림업계통은 현에서 관리하는 림업부문과 국유삼림공업기업을 포함하여 전부 다 국가림업부와 성림업청에서 통일적으로 관리하고 있고 아래에는 아무런 권한도 없습니다. 이런 관리권한을 지방에에 이양해주면 토지를 도급하는 것처럼 림업계통 종업원들이나 농민들한테 층층이 림업생산도급책임제를 실행하자는 것이 저희들의 그림입니다.”
    호요방은 먼저 리덕수의 의견을 지지한다고 명확하게 태도를 밝히고 나서  고개를 돌려 양상곤한테 물었다. 
“림업관리권한을 아래에 이양하는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저도 총서기의 의견에 찬성입니다.”
양상곤의 답복이였다. 
호요방은 또 고개를 돌려 길림성당위 서기 강효초한테 물었다.
“효초동지!   길림성의 의견은 어떻습니까?” 
“림업관리권한을 아래에 이양하는 문제에 대해 성에서는 연변주의 의견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강효초의 대답을 듣고 호요방은 뭔가 좀 리해가 안된다는듯 의아해하며 물었다.
     “성에서도 모두 동의한다고 하는데 그럼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 관리권한을 아래로 이양하지 못한단 말입니까? 도대체 매듭이  어디에 걸려있단 말입니까?” 
    리덕수는 솔직히 말씀드렸다. 
 “문제가 바로 북경에 걸려있습니다. ” 
    호요방은 이 말을 듣고 껄껄 웃었다. 
    “아, 이제야 좀 알 것 같습니다. 바로 우리 코앞에 있는 북경에 걸려있다는 말이군요.”
    그리고는 리덕수한테 또 이렇게 물었다. 
 “이  일을 호계립동지한테 회보했습니까?” 
    리덕수가 회보했다고 대답하자 호요방은 “호계립동지는 어떤 의견이였습니까?”하고 되물었다.  
 “호계립동지는 림업관리권한을 아래에 이양하고 림업도급제를 실시하는데 대단히 긍정적이였습니다.” 
 그 말에 호요방은 이렇게 말했다. 
    “그럼 됐습니다. 래일 동무가 정식으로 회보할 때 이 문제는 그저 슬쩍 짚고 넘어가고  더 상세하게 회보하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그저 요점만 말해주십시오. 이 일은 북경에 돌아간 후 계립동지가 잘 협상하고 조률해서 제대로 실행할 수 있게끔 맡기겠습니다.”
 리덕수는 림업관리권한을 우에서 아래로 이양해야 한다는 이 문제의 핵심를 면바로 포착하고 호요방에게 실사구시적으로 회보함으로써 연변의 광범한 간부와 대중들의 절박한 요구를 제때에 반영하였다. 호요방은 회보를 다 듣고 나서 이 문제를 매우 중시하면서 림업관리권한을 우에서 아래로 이양해 주는 것을 지지한다고 명확한 태도를 내놓았다. 호요방동지를 총서기로 하는 당중앙이 연변 여러 민족 인민들에 대한 따뜻한  배려와 지지였다.  그 후 중앙 각 부서에서는  모두 푸른등을 켜주면서 림업관리권한을 연변에 이양되게 되였다. 지금은 주림업관리국에서 연변의 림업을 포괄적으로 관리하고 있다. 연변에서는 삼림공업기업과  림업기업을 잘  관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일련의  림업간부들도 배양해냈다.  력사는 그번 이양이 연변 림업발전에서 하나의 중요한 전환점이자 연변 림업발전의 하나의 중요한 리정표였다는 것을 확인해주었다.
     호요방은 전용렬차에서 리덕수의 회보를 진지하게 들으면서 리덕수의 말허리를 거의 자르지 않았고 그저 리덕수가 이야기를 하다가 숨을 고르는 틈을 타서 자기가 묻고 싶은 문제들을 문의하였다. 한시간이란 시간은 이럴듯 눈깜박할 사이에 지나가고  전용렬차는 서서히 연길에 들어섰다. 
    호계립과 중앙의 기타 지도자들이 연길역 플래트홈에 줄지어 서서 박수를 치면서 조선방문을 마친 호요방 총서기 일행의 귀국을 뜨겁게 맞아주었다.
    호요방 총서기는 전용렬차에서 내린 뒤 곧 호계립 등 지도일군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플래트홈을 걸어 나왔다. 리덕수는 줄곧 그들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역에서 나온 리덕수는 그만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온 연길역 광장은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들끓고 있었다. 이게 도대체 어찌된 일인가? 리덕수는 일순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보안사업에는 허점이 있을 리 없겠는데 도대체 어디서 탈이  생겼단 말인가? 
    나중에 돌이켜보니 세가지 인소에서 이 같은 현상이 나진 까닭을 풀어볼 수 있었다. 하나는 호요방의 전용렬차가 오기 전에 철도부문에서 다른 렬차를 일률로 연길역에 정차시켰기에 려객들의 호기심이 더구나 부풀어지게 되였다. 다른 한가지는 많은 사람들이 뉴스를 통해 호요방의 조선방문소식을 알고 있었기에 호요방이 방문을 마치고 도문교두를 거쳐 돌아올 수도 있다고 대체적으로 추정하고 있었다.  아닌게아니라 호계립 등 중앙지도자들이 마중을 나온 걸 보게되자 그들은 자기들의 추측이 맞다고 확신하고 좀더 기다렸다가 총서기를 보려고 몰려들었던 것이다. 세번째는 그 때 연길역에 도착한 렬차에는 연길 려객들이 많았는데 그들이 개찰구를 통과한 후 이 소식을 연길시에 알리면서 수많은 연길 시민들이 삼삼오오 연길역 광장으로 몰려오게 되였다.
     호요방과 호계립 등 중앙지도자들이 역으로부터 역전광장에 나와보니 온통  인산인해였다. 호요방은 손을 흔들어 광장에 모인 시민들에게 인사를  보냈다. 사람들은 호요방 총서기를 보려고 한사코 앞으로 밀고 나왔고 그럴수록 경호울타리는 점점 더 조여들어 호요방 총서기는 움직이기조차 힘들게 되였다. 더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리덕수는 뒤에서 밀고 나와 총서기를  곧바로  차에 모시려고 다가갔다.
    원래 배치 대로라면 호요방을 승용차에 모시기로 하였는데 상황이 급변하여 모든 승용차들이 죄다 군중들한테 에워쌓여 있었으므로 원래의 계획은 더는 집행할 수 없었다.  리덕수는 그 자리에서 즉각 결단을 내리고 기자들이 타고 있던 짚차를  돌려세운  다음  호요방을 금세 그 차에 오르게 하였다. 어느새 리덕수는 현장 총지휘로 되였다. 호요방 신변의 경호원이나  비서,   성에서 내려온 경호원들도 모두 리덕수가 연변조선족자치주당위 서기이고 주장인 것을 알고 있기에 그가 림기응변하여 과감하게 지휘하자 총서기가 그 짚차에 오를 수 있게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호요방이 차에 오르자 리덕수도 곧바로 총서기를 따라 짚차에 올라 탔다. 호요방은 운전기사 옆자리에 앉고 성당위 서기 강효초가 뒤좌석 오른쪽,  중간에 호요방의 신변 경호원, 왼쪽에 리덕수가  앉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미처 시동을 걸기도 전에 사면팔방에서 밀려드는 시민들이 겹겹이  에워싸는 바람에 짚차는 좀체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다금해서 가슴을 조이고 있던 리덕수의 눈앞에  갑자기 장지붕이 나타났다. 그 당시 주정법위원회 서기였던 장지붕은 경호사업을 책임지고 있었다. 리덕수는 차창을 열고 “동무! 장지붕동무!” 하고 불렀다. 장지붕은 그 소리를 듣고  제꺽 사람들을 비집고  건너왔다. 리덕수는 차창으로 머리를 내밀고 장지붕한테 소리쳤다. 
  “동무가  지금 공안간부와 경찰들을 조직하여 손을 잡고 인간울타리를 만들어 군중들을 좀 뒤로 물러서도록 해주시오!” 
  장지붕은 재빨리 공안간부와 결찰들을 조직하여 어느새 인간울타리를 만들었다.공안전사들이 서로 두팔을 걸고 “하나, 둘, 셋! 하나, 둘, 셋!”을 웨치며 뒤로 밀자  군중들은 조금씩 뒤로 물러 서게 되였다.
     군중들이 힘들게 뒤로 물러나면서 마침내 좁다란 통로가 이루어졌다. 이젠 움직일 수 있었다. 그런데 짚차가 움직이려 하자 호요방이 차창을 열고 길 량켠에  있는 군중들을 향해 손을 저을 줄이야. 경호원은 대뜸 말렸다. 
“수장동지! 차창을 닫아야 하겠습니다!” 
    강효초가 뒤에서 손을 내밀어 차창을 닫아버렸다. 연길시 시민들한테는 소중한 문명의식이 있었다.  그들은 스스로 나서서 자칫 막혀 버릴 수 있는 이 통로를 가까스로 지켜주었다. 호요방이 탑승한 이 짚차는 천천히 앞으로 미끄러져 나갔다. 드디어  역전광장을 빠져나오자 확 뚫린 길이 나타났다.
     이 때 큰길 량켠에는 어느새 연길시의 남녀로소들이  빼곡히 줄지어 있었다. 민족복장차림을 하고 있는 사람들도, 손에 생화묶음을 들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 분위기는 매우 뜨거우면서도 질서정연하였다. 호요방 총서기의 이번  시찰은 원래 기밀사항으로 다뤄졌는데 이제는 더 숨길 수 없이 드러나게 되였다.  전 시 인민들이 총서기께서 연변에 오신 사실을 알게 되였다. 길거리는 명절처럼 환희로 들끓었고 길 량쪽에 줄지어선 환영 인파는 연변호텔까지 길게 이어졌다. 그 때 연길에는 호텔이라고는 하나 밖에 없었기 때문에 군중들도 총서기가 오시면 연변호텔에 머무르게 되리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리덕수는 차창 밖으로 이처럼 뜨거운 환영장면을 목격하면서 마음속으로는 기쁜 심정을 감출 수 없었다. 군중들은  이렇게 자발적으로 떨쳐나와 총서기를 반기고 있었다. 분명 마음속으로부터 우러나오는 환대였다. 
    예정 대로라면 역에서 나온 후 곧바로 연변대학에 가서 시찰하고 그 뒤에 연변호텔에 가서 휴식을 하기로 되여있었다. 그런데 이런 환영열기 속에서 곧추 연변대학으로 가기는 어려웠다. 환영나온 군중들이 오래동안 길가에 서서 총서기가 오시기를 기다리게  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호요방이 탑승한 짚차는 직접 연변호텔로 핸들을 돌렸다.  길에서  호요방은 매우 기뻐하시면서 자주 차창을 열고 큰길 량켠에 서서 환영하는 군중들에게 손을 흔들어 답례하였다. 그럴수록 환영장면은 한결 더 뜨거웟고 감동적이였다. 리덕수는 호요방에게 이렇게 말했다. 
“총서기동지, 군중들이 모두 자발적으로 총서기를 환영하러 나온 겁니다. 주에서는 포치하지도 않았는데 말입니다.” 
    호요방은 격동되여있었다.
 “연변 인민들에게 감사드립니다!”
     호텔에 도착하니 호요방이 투숙할 방은 이미 마련되여있었다.  
  “오시느라  길에서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총서기동지께서는 먼저 좀 휴식을 하셔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10여분이 지나서 호요방은 곧 비서를 보내 리덕수를 찾았다. 리덕수가  들어서니 호요방은 첫마디로 “기차역에서 군중들이 혹 상하지는 않았습니까?” 하고 물었다. 
리덕수는 이미 장지붕을 통해 기차역 광장에서는 군중들이 상하는 일이 발생하지 않았다는 정황을 알고 있었다.. 
    “상한 군중은 전혀 없습니다.”
  “한사람도 상하지 않았다니  마음이 놓입니다.” 
  그제야 한시름을 놓은듯 군중들의 열띤 분위기를 다시금 상기하였다. 
    “연변 군중들은 너무도 열정적이였습니다. 정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호요방이 도착한 그 날 오후에 공청단중앙 제1서기 호금도(胡锦涛)도 연변에 와있었다.  호금도는 공청단길림성위서기 두청림(杜青林)이 배동하고 있었다. 그 때 리덕수는 호요방 총서기 배동에 보내느라 호금도를 자주 동무할 수 없었다.  리덕수는 호금도에게 사업을 회보하려 하자 호금도는 시원스레 막았다. 
    “저는 괜찮으니 급한 일부터 보십시오.”
리덕수가 호금도를 알게 된 건 이 때부터였다.
   5월 12일 오전 9시, 연변호텔 회의실에서 회보회가 있었다. 이번 회보에서는  리덕수에게 비교적 깊은 인상을 남긴 몇가지 사안이 있었다. 회의가 시작되기에 앞서 리덕수는 회보회의에 참가하는 인원을 주 직속부문 주요 책임자를 포함한 각 현시 당위서기로 늘이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의했다. 처음에 관련 부서에서는 “그렇게 되면 회의에 참가하는 폭이 너무 넓어지고  인원이 너무 많아진다”고 하면서 시원히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리덕수는 호계립을 찾아갔다. 
 “우리 자치주로 말하면 이들 기층 간부들이 일년 내내 자기 일터에서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이번에 총서기께서 마침 오셨는지라 다들 친히 총시기를 만나뵙고 친히 총서기의 지시를 경청하고 싶어합니다. 호계립동지께서 기층간부들의 이 같은 심정을 리해하리라 믿습니다.” 
  리덕수의 청을 호계립은 시원히 받아주었다. 
    “그럼 덕수동무 생각대로 하십시오.” 
    이리하여 결국 회보회에 참가한 인원은 주의 다섯개 지도부, 현시 당위서기와 주 직속부문의 주요 책임자로 확대되였다. 그 때 회보회에는 성당위 서기, 성장, 성당위 부서기, 성군구 사령원, 연변군분구 사령원과 정위 등도 있었다.
 회의가 시작되기 전에 호요방은 성에서 온 지도일군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고 뒤이어 주급 지도일군들을 일일이 만나주었다. 호요방은 장홍규, 마서정, 조봉명을 접견할 때 그들의 년령을 일일이 물었다.  세 사람이 같은 57세라고 대답하자 호요방은 약간 롱담을 건네면서 분위기를 띠웠다. 
    “아, 세분이 모두 57세라, 그럼 ‘57 간부학교’라고 해야 하겠군요!” 
    이 말에  모두들 와그르르 웃었다. 호요방은 정세창의 정황을 듣고 나서 정중한 미소를 보냈다. 
    “조선족이 군분구 사령원을 맡고 있다니 조련찮은 일입니다.” 
 뒤이어 리덕수는 호요방동지의 희망에 따라 8개 현시 당위서기를 일일이 소개했다. 호요방은 8개 현시 당위서기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었다. 매개인을 소개할 때마다 호요방은 당신네 현은 인구가 얼마이며 그중 한족은 얼마이고 조선족은 또 얼마냐고 까근히 물어보았다. 훈춘현당위 목청림(穆青林) 서기를 소개할 때 “이 분이 훈춘현당위 목청림동지입니다.”라고 소개하자 호요방은 이렇게 물었다. 
    “훈춘현의 한족과 조선족의 비례가 어떻게 됩니까?” 
    목청림은 훈춘의 정황을 소개했다. 그 때에는 훈춘의 조선족인구는 60%에 가까웠고 한족인구는 40%였다. 호요방은 목청림에게 한걸음 더 나아가 물었다. 
  “동무는 한족입니까 조선족입니까?” 
  목청림이  “저는 한족입니다.”라고 대답하자 총서기는 훈춘에는 조선족인구가 더 많다는데 어째서 한족이 서기를 맡게 되었느냐고 빙그레 웃으면서 물었다. 그러자 리덕수는 인츰 호요방한테 목청림은 비록 한족이지만 조선어를 잘하거니와 알아들을 수도 있다고 소개했다. 이 말을 듣고 나서 총서기는 별다른 말을 더하지 않았다.
호요방이 떠나간 후 주당위 상무위원회에서 호요방 총서기의 연설정신을 어떻게시달할 것인가를 연구하게 되였는데 장홍규는 아주 상론할 여지도 없이 훈춘현당위 서기를 조선족간부로 바꾸자는 건의를 내놓았다. 장홍규는 그 당시 직접 호요방의 연설을 들었던 주당위 서기이면서 연변의 제2책임자였다. 회의에서는 토의 끝에 그의 건의를 받아들이고 그 당시 훈춘현 현장 류순철한테 현당위 서기를 맡겼다. 원래의 현당위 서기 목청림은 주림업관리국에 전근되여 당위서기를 담당하게 되였다. 얼마  후 그는 주인민대표대회상무위원회 부주임으로 배치되였다.
    리덕수가 주당위를 대표하여 회보를 하게 되였다. 회보제강은 주당위의  진지한  토론과 연구를 거쳤고 성당위의 주요지도자한테 청시한 내용이였다. 성당위에서도  검토를 거쳐 연변의 이 회보제강을 동의하였다. 리덕수가 연변의 기본정황을 회보할 때 호요방은 한마디 께끼였다. 
 “오, 동무네 연변은 6개 현,  2개 시이고 4만 2천 평방킬로메터라고 하니까 면적은 스위스와 비슷하군요. 인구는 189만이라고 하였지요.” 
리덕수가 “거의 서장 인구와 비슷합니다.”라고 말하자 호요방은 의미심장하게 머리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서장은 193만명이니까 동무네보다는 인구가 4만명이 더 많습니다. 그런데 면적은 대만보다도 더 큽니다. 동무네는 4만 2천평방킬로메커로서 대만의 3만 7천 평방킬로메터보다 더 크군요.”
나중에  리덕수는 그 날 회보회가 거의 끝날 무렵  갑자기 바깥에서 아이들 말소리가 들려왔다고 회고했다. 그 때 호요방이 연변에 와서 시찰하는 사이의 모든 접대방안은 모두 리덕수가 친히 심사하였다. 그런데 이 아이들이 도대체 어디서 왔는가? 그리고 이 아이들이 또 어떻게 들어올 수 있었는가? 이 때 마침 호계립이 건너와서 리덕수한테 물었다. 
 “바깥에 유치원아이들이 왔는데 이건 동무들이 들여보낸 것입니까?”
 리덕수는 그만 어리둥절해졌다. 자기가 안배한 게 아니라고 말하자니 아이들이 어떻게 들어왔는지 해석할 수 없고 주에서 안배한 거라고 에둘러댈 수도 없고 자기는 확실히 이 일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리덕수는 주에서 누군가가 배치하였기에  이 아이들이 호텔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그는 림기응변으로 그저 희미하게 조직에서 배치한 것이라고 전했다. 호계립은 리덕수의 말을 듣고 나서 반색했다. 
 “아, 동무들이 배치한 것이였군요. 좋습니다. 그럼 동무의 회보가 끝나게 되면 곧바로 호요방동지더러 아이들을 만나게 하지요!” 
    “좋습니다! 그렇게 하는 게 좋겠습니다!” 
    호계립은 호요방 곁에 다가가 뭐라고 몇마디 말을 건네였다.  호요방이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보아 아이들을 만나는 데 동의하는 것이  분명했다. 아니나다를가 회의가 결속되자 호요방은 곧  아래로 내려가 아이들을 만나주었다.
     호텔 뜨락에서 기다리고 있던 어린이들은 호요방을 보자 너무도 신나서 꽃다발을 흔들거나 퐁퐁 뛰면서 소리높이 환성을 질렀다.
    “환영합니다! 환영합니다! 호할아버지를 환영합니다!” 
    이  어린이들은  61유치원  어린이들이였다.  이들이 어떻게 되여 여기로 왔는지 리덕수는 그 때까지 감감 모르고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담이 여간내기로 크지 않은 유치원 한 선생님의 소행이였다. 호요방이 왔다는 소식에  어린이들을 데리고 호텔로 찾아왔다가 호텔 문어구에서  경호원들에게  막혔았다. 그러자 민족복장을 곱게 차려입은 어린이들은 들어가서 호할아버지를 뵙겠다고 일제히 떠들었다. 그 소리를 들은 주당위 비서장 김동기가 경호원들한테  말해 어린이들을 들여보냈다.  
  호요방과 어린이들의 그 때의 그 만남은 자못 유쾌한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졌다.  워낙 어린이들을 끔찍이 귀해하던 호요방은 민족복장까지 차려입은 조선족어린이들을 보더니 더구나 만면에 웃음꽃을 활짝 피웠다. 호요방이 어린이를 안고 찍은 사진은 그 당시 전국 각지 신문들에서  톱기사로 실었다. 뒤이어 허다한 잡지의 앞표지를 장식하여 조선족의 현주소를 널리 알리게 되였다. 이 일을 겪으면서  리덕수는 이와 류사한 옛일을 떠올리게 되였다.
그것은 1962년 6월 22일이였다. 경애하는 주은래 총리께서 연변에 오시여 사업을 시찰할 때도 이 연변호텔에 투숙하게 되였다. 물론 주에서는 총리와 군중들이 만나는 자리를 배치하지 않았다. 그런데 주당위 서기 주덕해가 한창 방안에서 주은래 총리에게 사업을 회보하고 있는데 갑자기  호텔 밖에서 “경애하는 주총리, 저희들은 당신을 뵙고 싶습니다! 경애하는 주총리, 저희들은 당신을 뵙고 싶습니다!”하고 연길 시민들이 한결같이 웨치면서 연변호텔을 에워쌌다. 주총리는 그 웨침소리에 곧바로 2층 베란다에 나와  아래에 서있는 군중들에게 손을 저어 답례를 보내면서  인사를 전했다. 그러자 군중들의 환호성은 더욱 우렁차게 울려퍼졌다. 주총리는  그  자리에서 주덕해한테서 조선어 인사말을  제꺽  배워가지고 조선말로 아래에 있는 군중들에게 인사를 하자 군중들의 분위기는 더욱 끓어올랐다. 그 때 그 장면을 목격했던 사람들은  그  일을 떠올리기만 해도 저도 모르게 감동에 젖어들군 한다고 심경을 털어놓았다. 
 그 날 리덕수의 사업회보에 이어 호요방의 발언이 있었다. 그는 연설문 원고도 없이 발언을 이어나갔다. 
 “저는 여러분들한테 세가지 큰일, 네가지 작은 일을 놓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는 림업관리체제 문제입니다. 림업문제는 회보를 듣고 난 호계립동지가 이미 방안을 세워두고 있습니다. 즉 주에서 국가로부터 도급을 받아 다시 아래에다 도급을 주는 것입니다. 이 문제는 이렇게 일단락합시다. 나머지 문제는 호계립동지가 동무들에게 다  해결해 드릴 것입니다. 연변의 림업체제를 개혁하지 않으면 연변의 림업은 발전할 수 없거니와 연변인민들도 부유해질 수 없습니다. 이처럼 큰 사안인 만큼 바꾸어야 합니다. 둘째는 대외무역문제입니다. 연변조선족자치주에서 나서서 조선 청진항을 통해 일본과 무역할 수 있는데 련합경영체 혹은 련합경영회사 조직이 가능하다고 봅니다. 해운 뿐만 아니라 철로까지 망라한 련합운송을 조직할 수도  있습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청진항 뿐만 아니라 청진 이북에 있는 라진항도 수심이 깊기에 다 리용할 수 있다고 가능성을 열어주었습니다. 하역량은 1,000만톤에서 1,500만톤으로 헤아릴 수 있습니다. 청진항과 라진항을 통해 대일본 수출, 대쏘련 수출 나아가 대홍콩 수출도 가능합니다. 셋째는 량식문제입니다.” 
    이 때 호계립이  한마디 첨부했다. 
  “량식은 주로 저장, 운수 나아가 수출의 경우를 말합니다. 만약 운수만 해결할 수 있다면  대외무역부를 통해 길림성에서도 대외담판에 나설 수 있습니다. 다만 수출하는 량식은 길림성에서 손익을 자체로 책임져야 할 것입니다.”
호요방은 “그렇게 하는 게 좋겠습니다”라고 하면서 호계립의 의견에 동감을 나타냈다.
그 날 연설에서 호요방은 이렇게 특별히 강조했다. 
   “조사연구를 잘하는 것은 지도자한테는 가장 근본적인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성이나 지구, 그리고 주와 현의 동지들은 경상적으로 내려가 조사연구를 가지면서  문제를 발견하고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중앙의 동지들, 서기처의 동지들과 정치국의 동지들도 친히 부동한 지방에 내려가 고찰하고 문제를 발견하고 그들을 도와 문제를 해결하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세가지 큰 문제를 다  이야기한  다음 호요방은 계속해서 네가지 작은 문제를 언급하였다.  
  “이 외에도 또 네가지 작은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는 두만강변에 세워진 모주석조각상의 위치를 움직여야 하겠습니다. 동쪽으로 향하나 서쪽으로 향해도 다  무방하지만  특정된 방향으로는 잡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성이나 주에서 과학연구일군이나 기술전문가들과 상론해보기 바랍니다. 선진국에서는 한개 큰 건물도 다  통채로 움직일 수 있다고 하는데  우리가 조각상의 방향을 돌려놀는 건 무리가 아니겠지요? 두번째는 조선족들이 입쌀을 맘대로 먹을 수 없는 문제입니다. 한달에 겨우 2.5킬로그람씩 공급한다고 하지요? 공화국이 창건된 지도 벌써 35주년이 되였는데 여러분들이 국경절에 이밥도 먹을 수 없다면 이건 너무 가슴 아픈 일입니다. 동무들은 꼭 결심을  내리고 조선족들이 입쌀을 먹을 수 있도록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하겠습니다.” 
  이 때 길림성당위 서기 강효초가 “연변에서 바꿔온 입쌀은 조선족들한테는 좀더 공급해줄 수도 있습니다.”라고 가능성을 제시하자 리덕수는 대뜸 자기의 의견을 내놓았다. 
   “한  지방에서  다 함께 살고 있는 만큼 여러 민족 인민들이 마땅히 똑같은 대우를 누려야 할 게 아닙니까?” 
   이 말을 듣고 호요방은 대견하게 좌중을 바라보았다.
    “덕수동지가 큰집 살림살이를 도맡고 식구들을 골고루 보살펴주느라고 마음 조이네요. ”
이어 호요방의 이야기는 계속되였다. 
  “세번째는 농촌주택을 개조하는 작업입니다. 특히는 쏘련변경과 조선변경에 가까운 고장의 주택들을 잘 개조해야 하겠습니다. 농촌주택개조는 좀더 속도를 낼 수 있겠지요? 농촌주택은 보기도 좋아야 하거니와 따스해야 합니다. “ 
네번째로 호요방은 또 특별히 주덕해동지의 문제를 언급하였다.
 호요방이 연변을 떠나간 후 리덕수는 곧바로 주직속기관 간부대회를 열고  대회에서 연설을 하였다. 그는 따로 연설문을 마련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 습관 대로 연설제강을 카드에 써가지고 연설을 하였는데 제강도 스스로 작성했다. 그 때 성에서 내려온  일부 간부들이 아직 돌아가지 않았으므로 그들도 대회에 참가하여 리덕수의 발언을 함께 들을 수 있었다. 리덕수는 발언에서 호요방이 연변에서 가진  전반 시찰활동을 소개하면서  진지하면서도 까근하게 그리고 전면적으로 호요방이 연변에 머무는 기간에 남긴 모든 중요한 연설들을 전달하였다. 아울러 호요방의 연설정신을 참답게 관철시달할 데 관한 사업을  놓고 일일이 포치하였다. 
  연변에서 시찰하는 기간에 호요방은 부동한 시간, 부동한 장소에서 여러번 주덕해를 담론하면서 주덕해에 대해 대단히 높으면서도 아주 적중한 평가를 내려주었다. 물론 총서기의 평가는 연변 여러 인민들한테 더없는 깊은 감동을 안겨주었다. 이런 말씀은 기실 중국 로세대 무산계급혁명가들을 대표하여 주덕해동지에게 내려준 공정한 평가였다. 이는 주덕해동지의 일생에 대한 충분한 긍정이고 고도로 되는 개괄이였다.
연변에 머무르는 기간 호요방은 주 다섯개 지도부 성원들, 각 현시 당위서기, 주당위, 주정부 각 부문 제1 책임자, 그리고 길림성 당위 서기, 성장, 성당위 부서기, 성군구 사령원, 연변군분구 사령원과 정위가 참석한 회의 석상에서 한없이 깊은 감회에 젖어 심경을 자연스레 밝힌 바 있다.
“주덕해동지는 우리 당이 연안시기에 양성한 당의 우수한 조선족간부로서 중국 조선족의 령수입니다. 주덕해동지는 정치립장이 견정하고 사업작풍이 착실하며 대중과 밀접히 련계하고 전면적으로 당의 민족정책을 관철집행하여 연변의 건설과 발전을 위해 거대한 공헌을 하였습니다. 당은 주덕해동지를 잊지 않을 것이며 인민들도 주덕해동지를 잊지 않을 것입니다.”
이어 호요방동지는 저으기 격동된듯 잠간 명상에 잠겼다가 숨을 들이쉬더니 눈길을 리덕수한테로 돌리였다.
“덕수동무, 어디 마땅한 자리를 골라서 주덕해동지에게 기념비를 세워드려야 하겠습니다.”
총서기의 이 제의가 어쩌면 좀 갑작스럽게 와닿았는지 회의장은 삽시에 물뿌린듯 조용했다. 연변 인민에 대한 주덕해동지의 은덕은 한없이 깊고 두터웠고 그만큼 인민들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총서기께서는 친히 주덕해동지에게 기념비를 세워 드려야 한다고 건의하니 너무나도 반가웠다.
리덕수도 마음속으로 저으기 격동되여 몇번이고 총서기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였다.
“방금 주덕해동지에 대한 총서기의 고도로 되는 평가를 듣고 저는 몹시 격동되면서도 한없이 감동을 받게 되였습니다. 주덕해동지에 대한 충서기의 평가는 연변 여러 민족 인민들의 맘속의 말이나 다름 없습니다. 총서기께서는 마음을 놓으십시오. 저희들은 꼭 총서기의 기대 대로 시야가 확 트이고 경치가 아름다운 좋은 곳을 골라 주덕해동지한테 기념비를 세워드리겠습니다.”
호요방은 미더운 눈길로 리덕수를 바라보았다.
“그럼 믿겠습니다. 동무들은 기어코 이 일을 잘 성사시켜야 하겠습니다.”
   이에 리덕수는 다시한번  “총서기께서는 마음을 놓으십시오” 하고 의지를 확인하고 나서 곧바로 “그럼 총서기께서 주덕해기념비의 비명을 써주시겠습니까?.”라고 청들었다.
호요방은 “좋습니다. 그렇게 하죠.”라며 흔쾌히 수락하였다.
회의가 끝나자 사업일군들은 재빠르게 붓과 종이, 먹과 연적을 마련해놓았다. 리덕수가 호요방동지에게 비명을 부탁드리자 호요방은 잠간 생각을 가다듬다가 붓을 날려 “주덕해기념비”라는 몇 글자를 써주었다. 한눈에 확 안겨오는 큼직한 정체의 해서였다.
그 때 호요방은 또 청을 받고 연변대학에 “민족인재의 양성에 힘써야 하겠습니다”라는 제사를 써주었다.
리덕수와 주당위의 주요 지도자들은 다 함께 호요방이 제사를 남기는 전반 과정을 지켜보았다.
  호요방 총서기의 지시에 따라 연변조선족자치주당위 상무위원회는 1984년 8월 8일에 특별히 회의를 열어 주덕해기념비 건립을 둘러싼 구체적인 사항들을 연구하였다. 회의를 마친 후 주당위 상무위원들은 기념비를 세울 지점을 현지답사하였다. 최종적으로 연길시 서북쪽 산비탈에 기념비를 세우기로 합의하였다. 소나무와 잣나무 숲이  우거지고 뉘엿한 릉선을 따라 연길시 전경을 굽어볼 수 있었다. 다들 이 자리를 퍼그나  만족스러워하였다. 주당위에서는 인차 성당위에 보고서를 올려보냈다.  보고서에는 주덕해기념비를 세우게 된 경위에서 호요방동지가 먼저 제기하고 기념비 비명까지 써주신 세부를 상세히 첨부하였다. 성에서는 곧바로 회시와 함께 성재정에서 전문 자금 80만원을 내려보냈다. 연변조선족자치주정부에서 그 나머지 자금을 조달하면서 주덕해기념비는 만민의 기대를 안고 연길 서북쪽 산비탈에 우뚝 솟게 되였다.
  주덕해기념비 건립은 연변 여러 민족 인민들의 오래 된 숙원을 풀어준 경사였다고 할 수 있다. 중국조선족 인민대중들의 마음속에서 주덕해의 령수적 지위는 력사발전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되여왔다. 주덕해가 중국 혁명전쟁시기와 새 중국이 창건된 이후 사회주의 혁명과 건설 시기에 시종일관 견정불이하게 중국공산당을 따라 연변 여러 민족 인민대중들을  이끌고 사회주의 탄탄대로를 따라 세인들이 주목하는  눈부신 성과들을 이룩하는 과정을 보아왔기에 연변인민들은 더구나 주덕해동지를 높이 우러르고 있었다. 전쟁년대나 평화건설시기를 막론하고 주덕해동지는 자각적으로 중국공산당의 령도를 옹호하고 국가의 통일과 민족단결을 단호하게 수호하였다. 연변에서 주덕해동지는 중국공산당의 민족정책을 참답게 관철집행하고 연변 여러 민족 인민들을 한데 굳게 단합시켰으며 그들을 이끌고 간고하게 창업하고 분발노력하여 연변의 각항 사업이 공화국이 전진하는 발걸음과 보조를 맞춰나가도록 궤도를 맞물려놓았으며 연변조선족자치주의 번영발전을 위해 튼튼한 토대를 닦아 놓았다.
 
 
 
 
 
 
 
 
 
 
사업중심 전이  
  
 
리덕수는 주당위 서기 겸 주장을 담임한 이후 혼란한 국면을 바로 잡는 사업을 단단히 틀어쥐는 한편 적시적으로 사업의 중심을 경제사업에로 옮기고 착실하게 밀고 나갔다. 1983년 8월 13일, 등소평동지께서 날랜 발걸음으로 장백산에 오르시고 연변 여러 민족 인민들에게 “연변조선족자치주를 더 빨리, 더 훌륭하게 건설해야 하겠습니다”라는 제사를 간절한 소망을 담아 써주시면서 연변의 경제사회발전은 더구나 탄력을 받게 되였다.
리덕수는 경제사업을 보다 중요한 위치에 놓고 지도부의 거듭되는 연구를 거쳐 한층 보완하였다.이어 열린 몇개 중요한 회의도 이 같은 경제중심의 맥락에서 풀이 할 수 있었다.
1984년 1월초, 리덕수는 전 주 공업교통사업회의를 주관하여 소집하였다. 그는 회의에서 공업교통분야는 한걸음 앞서 나아가야 한다고 지적하면서 회의총화보고에서 공업교통분야에서는 1984년에 다섯개 드센 전역을 벌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첫째, 전 주 지방공업 총생산액이 7.83억원에 도달해야 하며 성장속도는 ’6%를 담보하고 8%를 쟁취하는 것’으로 잡는다. 둘째, 예산내 기업소 리윤액은 1,200만원을 실현해야 한다. 셋째, 일년내에 전 주에서 결손기업을 없애야 한다. 넷째, 예산내 기업소 정돈사업을 전면적으로 완성해야 한다. 다섯째, 20% 이상의 기업소를 ’6호’의 요구에 끌어올려야 한다.
 그 시기에 주당위와 주정부에서는 주요한 정력을 기업개혁과 기업관리에 쏟았다. 리덕수의 사색은 매우 명확하면서도 단호했다. 즉 개혁과 관리를 드세게 틀어쥐여  경제적 효익을 올리자는 게 핵심이였다. 그 때 연길담배공장은 그 규모가 너무 작아서 기업의 경제적 효익이 수수한 데다가 가동 가능한 일부 생산능력도 잠자고 있는 상황이였다. 조남기가 연변의 사업을 주관한 이래 연변에서 담배공장을 경영하는 것을 지극히 지지하였고 나아가 연길담배공장의 규모를 원래의 3만상자에서 5만상자로 늘여야 한다고 제출했다.
  리덕수가 주당위 서기 겸 주장을 담임하게 되였을 때 길림성에서는 담배공장의 발전중점을 장춘에 두고 있었다. 그 전망에 따르면 연변은 그저 잎담배 생산기지로 눌러앉아야 할 상황이였다.
 당시 성계획경제위원회에서는 어느새 관련 부문과 협상하고 조률하여 <연길담배공장을 성에 귀속시킬 데 관한 보고>를 작성하여 성장에게 보고하였다. 회보를 듣고난 성장도 이 주관부문의 의견에 동의하였다. 성에서 누군가가 리덕수한테 전화를 걸어 이 ’변고’를 알려주었다. 리덕수는 이 소식을 접하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이것은 연변의 재정수입과 연변의 경제발전에 직결되는 대사였기 때문이였다. 그는 곧바로 관련 책임자들을 불러 긴급히 대책을 상의하고 <연길담배공장을 성에 귀속시키는 데 동의하지 않는다>는 보고서를 재빠르게 작성하였다. 리덕수는 주당위 서기 장홍규와 함께 그 날 밤으로 성에 찾아가 직접 성당위 서기 강효초를 찾았다. 
“강서기동지! 저희들 소수민족지구를 위해 다시한번 고려해볼 수 없겠습니까? 저희들이 어렵게 담배공장을 하나 건설해놓았는데 지금 와서 훌쩍 가져가면 연변의 재정은 무엇으로 돌아간단 말입니까?” 
강효초는 리덕수의 회보를 상세히 듣고 나서 짤막한 자기의 립장을 내놓았다. 
“덕수동무! 래일 상무위원회를 여니 동무도 참석하고 장홍규동무도 자리에 오십시오. 이 문제는 회의에서 결정하기로 합시다. 저는 개인적으로 동무들의 의견에 찬동합니다. 소수민족지구의 공업은 뭐니뭐니해도 부축해주는 게 마땅합니다.”
 그 이튿날 열린 성당위 상무위원회에서는 연길담배공장문제가 림시의제로 늘어났다. 리덕수는 장홍규더러 먼저 발언하게 하였다. 장홍규의 설명은 조리정연하고 설득력과 감화력이 있었다. 장홍규의 발언에 이어 리덕수가 보충발언을 하였다. 연변 동지들의 설명을 듣고 나서 성당위 상무위원들은 모두 연변의 의견을 동의한다고 태도를 밝혔다. 물론 성장도 레외일 수 없었다. 맨마지막에 성당위 제1서기 강효초의 발언이 있었다. 
 “연변에서 성에 귀속시키는 것을 동의하지 않으므로 그냥 성에 귀속시키지 않는 걸로 하고 연변 동지들더러 계속 잘 운영해 나가도록 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읍시다.” 
이리하여 연길담배공장을 지켜낼 수 있게 되였다. 나중에 연변에서는 력량을 쏟아 담배공장 2기 기술개조공정을 벌여 생산규모를 원래의 5만상자로부터 32만상자로 확대하였다. 현재 연길담배공장은 중국연초업종에서 중점적으로 부축하는 골간기업으로 육성되였다.
공업교통사업회의에 뒤이어 1월 11일부터 16일까지 주당위에서는 전 주 산간지대경제건설사업회의를 소집하였다. 주당위에서 연변의 자연지리적 특점에 근거하여 기획한 한차례 매우 중요한 회의였다. 
“연변의 우세도 산에 있고 연변의 희망도 산에 있으므로 앞으로는 많은 품을  산에다 쏟아야 하겠습니다.” 
리덕수가 늘 하는 말이였다.
특점을 부각시키고 방향을 제시함과 아울러 우세를 발휘시키려는 게 이번에 특별히 산간지대경제사업회의를 소집하게 된 배경이였다.
이번 회의를 통해 각급 지도간부들의 사상을 한층 더 해방시키고 산간지대에 대한 정책을 좀더 느슨하게 풀어주어 종국적으로 산간지대경제를 활성화하여 산간지대  군중들로 하여금 조속히 부유해지도록 정책적으로 밀어주자는 것이 리덕수가 그린 그림이였다. 이번 회의 참가자가 무려 470여명에 달하여 그 참가인수, 참가범위, 규모, 의제의 전문성으로 보아 모두 연변에서는 전례가 없었다. 어떤 의미에서 말하면 이것은 연변의 산간지대경제발전방식을 전환시키는 미래 청사진과 직결된 한차례 회의로서 연변 경제건설의 발전을 가속화하는 한차례의 동원대회나 다름 없었다.
그 당시 전국의 전반적 형세로부터 보면 1984년에 이르러 중국농촌의 변혁은 이미 새로운 단계에 들어섰다. 즉 자급자족 혹은 반자급자족경제로부터 비교적 큰 규모의 상품생산에로의 전환단계, 전통적 농업으로부터 현대화 농업으로의 전환단계에 있었다.
이번 회의에서는 산간지대의 자원을 보호, 발전, 리용하여 농업, 림업, 목축업, 과수업, 약재업, 어업 생산기지를 개발하고 건설하며 가공업을 힘껏 발전시켜 적극적으로 상품생산을 발전시키는 것을 골자로 하는 산간지대경제건설방침을 확정하였다. 그리고 회의에서는 산간지대경제발전정책에 관한 약간의 정책(잠정규정)을 제정하였다. 
리덕수는 회의총화에서 1984년도 농업생산에서 8개 돌파를 가져올 데 관한 분투목표를 제기하였다. 알곡 총생산량, 림업 총생산액, ’두가지 부류의 농가(전업화농가와 년소득1만원을 달성한 농가)”의 발전, 개발적인 생산, 가공업, 류통경로소통, 인구당소득, 구체적인 조치 등 8개 측면에서 력사최고수준을 돌파해야 한다는 요구와 함께 구체적 지표를 일일이 제시하였다.
산간지대경제사업회의는 전 주 사업중심이 경제사업에로의 전이를 알리는 전주곡이였다. 
 1월 29일, 주당위에서는 <연변조선족자치주당위 1984년도 사업요점에 관한 통지>를 내보내여 경제사업의 중요성을 더욱 두드러지게 부각하였다. 그중 제 1조항부터 경제사업에서 경제효익향상을 중심으로 해야 한다는 내용을 두드러지게 내세웠다. 보다싶이 사업중심이 경제건설에로의 전이를 구현한 대목이였다.
그 시기 리덕수의 사업열정은 더없이 드높았다. 전 주의 사업중심이 아주 짧은 시간내에 경제사업에로 전이되면서 연변 여러 민족 간부와 대중들은 드디여 경제건설을 중심으로 하는 이 시대의 큰 흐름에 합류하게 되였다. 형세가 이렇게 ’상전벽해’로 돌아서자 리덕수는 더없이 기쁘고 고무를 받게 되였다. 그는 모든 시간과 전부의 정력을 죄다 사업에 몰부었다. 당시 리덕수의 비서였던 조현인은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아무튼 제가 비서로 있을 땐 휴일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 땐 련휴라는 개념마저도 없을 때여서 한주일에 일요일 하루가 휴일이였는데 리서기는 일요일이 휴일이라는 인식조차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회의가 없는 일요일을 타서 시골로 내려갈 때가 많았습니다. 양력설이나 음력설이 되면 되려 더 바삐 보내야 했습니다.  리서기는 변방초소에 이어 공장이나 광산으로 위문하러 내려가다 보니 명절이나 휴일을 집에서 보낸 적이라고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운전기사나 비서도 물론 쉴 수가 없었지요.”
리덕수는 연변에서 사업하는 8년 동안 전 주의 모든 향진을 다 누비다싶이 돌아보았고 연변 경내의 변경지대도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으리 만치 찾아보았다. 어디에서 복숭아꽃이 피고 어디에 과수원이 있는지, 인삼양식장, 검정귀버섯양식장, 소사양목장, 양계장, 양어장 등이 어디에 있는지까지 리덕수는 손금 보듯 환히 꿰뚫고 있었다. 
주당위에서는 산간지대사업회의에 잇따라 벌방지대사업회의를 소집하였다. 연변 산간지대에는 한족농민들이, 벌방지대에는 조선족농민들이 비교적 많이 살고 있었다. 이런 특점에 착안하여 산간지대사업회의가 한족농민들이 가난에서 벗어나 부유해지도록 이끌어주는 회의였다면 벌방지대경제사업회의는 조선족농민들이 가난에서 벗어나 부유해지도록 밀어주는 회의라고 해독하는 시각도 있었다. 리덕수는 이 두 회의에서 모두 연설을 하였다. 그 연설정신은 농민들이 자신의 근면한 로동으로 하루빨리 치부의 길로 나갈 것을 고무격려하자는 게 요점이였다. 누가 먼저 자신의 노력으로 부유해진다면 그가 바로 훌륭한 본보기이므로 모두다 그를 따라 배워야 한다고 힘실어주었다.
2월초에 리덕수는 주당위 상무위원들을 거느리고 연길시에 내려와 현지사무회를 열었다. 인민로확장공사, 청년호개조공사, 연동교건설공사, 전진로아스팔트포장공사, 하수도관개조공사 등 5개 공사를 완공하는 이외에 또 시민들이 된장, 맥주, 남새를 사기 힘들고, 뻐스타기, 변소다니기, 아이들 학교다니기 힘든 등 ’”여덟가지 난제’를 일일이 해결할 것을 연길시에 촉구하였다.
지식분자정책을 참답게 시달하여만 지식분자와 과학기술인재들의 적극성을 충분히 동원하여 경제건설을 힘차게 추진할 수 있었다. 주당위에서는 지식분자정책시달지도소조를 내오기로 결정함과 아울러 시기와 형세를 잘 판단하고 적시적으로 지식분자에 관한 정책을 출범하였다. 그 당시 주당위 지식분자정책시달지도소조 부조장이며 주당위 통전부 부장이였던 김영만은 이렇게 회고했다. 
“통전부는 여러 민족 각계층 지식분자들과 접촉을 비교적 많이 가지고 았었지만 그 당시로 말하면 아직 ’좌’적인 사상이 완전히 숙청되지 않았기 때문에 지식분자정책을 시달하자면 애로가 많았습니다. 저한테서 이런 정황을 회보받은 리덕수동지는 지식분자문제를 반드시 해결해야 할 때라고 명확히 립장을 내놓았습니다. 리덕수동지의 위탁을 받고 저는 주당위와 주정부의 이름으로 <지식분자사업에 관한 주당위, 주정부의 의견>을 작성하였습니다. 이 문건이 주당위와 주정부의 심의를 거쳐 정식으로 발부된 후 많은 지식분자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게 되였습니다. 지식분자들은 주당위 새 지도부의 기용을 받아 네가지 현대화 건설에서 자신의 재능을 펼칠 수 있기를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장백산이란 이 관광명소브랜드를 진일보 개발하기 위해 주당위에서는 상무위원회를 소집하고 전문적으로 장백산 <악화호텔(岳桦宾馆)>을 건설할 데 관한 의제를 연구하였다. 장백산호텔의 설계를 놓고 리덕수는 보기 좋고 시원스럽고 민족특색을 갖춰야 한다는 세가지 요구를 내놓았다. 회의에서는 연구를 거쳐 등소평이 친필로 쓴 ’장백산’이란 세 글자를 석비에 새겨 화평영자 대문 앞에 걸고 등소평의 필체로 된 “천지”란 두 글자를 장백산정상 자연석에 새겨넣기로 결정하였다. 장백산정상으로 올라가는 도로개축사항은 주정부에 일임하여 조속히 성에 보고하기로 하였다. 
상술한 바와 같이 이처럼 긴박하게 이어지는 일련의 조치들을 딛고 연변의 경제건설은 본격적인 가동에 들어갔다.   
그 때 쏘련의 한 당정대표단이 연변에 와서 방문하게 되였다. 쏘련대표단 단장은 빈해변강구의 구당위 서기였다. 호텔에서 상면을 가지고 피로연이 끝나자 그들은 리덕수의 집무실을 보고 싶다고 제의했다. 쏘련사람들은 아마 대방 지도자의 집무실에까지 가보아야 진정한 의미에서의 례방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았다. 당시 리덕수의 집무실은 너무 간소하였다. 그렇더라도 쏘련대표단은 리덕수의 집무실에 와보고 나서 그처럼 즐거워하였다. 리덕수한테서 극진히 손님을 례우하는 진정을 읽을 수 있은 게 그들로서는 제일 반가운 선물이였다. 
담화를 나누는 가운데 쏘련대표단 단장이 리덕수한테 느닷없이 물음을 내놓았다. 
 “중국특색이 있는 사회주의란 무엇을 말하는가요?” 
  리덕수는 중국의 개혁개방과 시장경제를, 나아가 중국특색이 있는 사회주의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자신의 리해수준에 따라 해석해주었다. 쏘련사람들은 귀를 강구하고 귀담아듣다가 나중에 알듯말듯 아리숭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리덕수는 그들한테 연변에서 실제 발생한 사례들을 들어가면서 이야기해주었다. 물론 그들한테는 중국이 선택한 길이 매우 새로울 게 분명하였다. 다만 그들 나라에서는 이 모든 것이 다 금시초문이였기에 그만큼 궁금해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사회주의운동에는 모두 세가지 사회주의방식이 있었습니다. 그중  사회주의원칙을 고집하면서 개혁개방을 외면한 방식의 사회주의는 빈곤한 사회주의이자 위험한 사회주의라 할 수 있고 근본적으로 말해서 과학적 사회주의라 할 수 없습니다. 두번째 방식은 개혁개방만 떠들면서 사회주의 기본원칙을 포기하는 모험적 사회주의, 맹동적 사회주의로서 이 역시 위험한 사회주의이고 자칫하면 멸망을 자처할 수도 있습니다. 세번째 방식은 사회주의 기본원칙을 고수하면서도 전력을 다해 개혁개방을 추진하는 것인데 중국에서 현재 견지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세번째 방식입니다. 다시말하면 중국특색이 있는 사회주의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과학적 사회주의입니다.” 
중국특색이 있는 사회주의, 즉 세번째 방식을 놓고 리덕수는 자기의 많은 관점을 피력하였다. 물론 이런 관점들은 그가 실천 속에서 부단히 총화해낸 정화들이였다.
리덕수는 이렇게 말했다. 
 “개혁개방에도 세가지 방식이 있습니다. 첫번째 방식은 정치체제개혁과 경제체제개혁을 함께 틀어쥐고 이 두가지 개혁을 동시에 진행하는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조건이 주어지지 않는 만큼 리상주의적인 개혁개방이라 할 수 있고 객관적으로 아예 조건이 구비되여있지 않는 만큼 실제적으로는 예기한 개혁의 목적을 이루기 매우 어렵습니다. 두번째 방식은 정치체제개혁만 내밀고 경제체제개혁을 방임하는 것인데 이런 개혁은 그 기반이 없기 때문에 흔들릴 수 있는, 자칫 매우 위험한 개혁으로서 사회적 동란을 부를 수도 있습니다. 세번째 방식은 우선 경제체제개혁을 추진하고 정치체제개혁은 경제체제개혁의 진척에 따라  온당하게 점진적으로 진행하는 것입니다. 중국의 개혁이 바로 이 세번째 방식입니다. 이 세번째 방식은 우선 경제체제개혁을 틀어쥐고 경제건설을 중심으로 잡고 있습니다. 경제체제개혁도 무엇보다도 기반의 기반을 틀어쥐여, 다시말하면 농촌개혁부터 착안해서 점차 도시로 확산해나가는 것입니다.” 
  리덕수는 쏘련대표단 단장과 유머러스하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과거에 혁명을 하여 정권을 탈취할 때 사용한 전략은 농촌으로 도시를 포위하는 것이였지요? 이와 마찬가지로 이번 중국의 개혁개방도 역시 농촌으로 도시를 포위하는 전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선 농촌토지도급제개혁부터 시작하여 농촌개혁으로 전국의 개혁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리덕수는 쏘련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구김없이 자기가 우려하던 문제도 터놓았다.
“정치개혁만 내세우면서 정치개혁이 그 무슨 만병통치약이라도 되는 것처럼 경제개혁을 팽개친다면 그 기반으로 받쳐줘야 하는 경제개혁을 잃기에 예상 못한 후과를 빚을 수도 있습니다.”
쏘련대표단 단장은 이어 리덕수의 배동하에 룡정과수농장으로 가보게 되였다.  그는 과수농장에는 아무런 흥미를 가지지 않고 리덕수가 이야기하는 정치적인 화제에만 잔뜩 빠져있었다. 그는 현재 자기네 나라의 사회주의는 매우 위험하다고 말하면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였고 쏘련의 사회주의에 회의적이였다. 과연 1991년 년말에 쏘련은 해체되고 말았다. 사태의 발전은 쏘련의 한 지방지도자의 걱정이 결코 부질 없는 게 아니였음을 확인해주었다. 쏘련대표단 단장은 일개 변강구역의 구당위 서기였지만 쏘련의 사회주의의 전도에 대해 몹시 고민하고 있었다.
 리덕수가 주당위 서기 겸 주장을 담당한이래 시종일관 당의 민족정책을 관철하고 민족단결을 수호하는 것을 연변에서 가장 으뜸가는 일로 간주하고 틀어쥐였다. 그는 적시적으로 민족립법사업에서 민족자치조례의 제정을 하나의 중요한 기초적인 작업으로 간주하고 의사일정에 올려놓았다.
<연변조선족자치주 자치조례>는 일찍 1981년 1월 1일, 연변조선족자치주 제7기 인민대표대회 제3차 회의에서 이미 제1차 심의를 가진 바 있는데 그 때 대표들은 조례초안을 놓고 수많은 건설적인 수정의견을 제기하였다. 그 후 4년간 주당위와 주정부에서는 전 주 여러 민족 간부와 대중들을 발동하여 적극적으로 토론에 참여하도록 움직여 그들의 의견을 충분히 청취하고 받아들였다. 또한 전문가들의 거듭되는 수정과 보충을 거쳐 보다 완벽하게 보완하면서 자치조례가 날로 성숙되였다. 1985년 4월,  연변조선족자치주 제8기 인민대표대회 제3차 회의가 연길에서 열렸다. 회의에서는  <연변조선족자치주 차치조례(초안)에 관한 설명>을 청취한 기초 우에서 최종적으로 이 자치조례를 심의 채택하였고 길림성 제6기 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제14차회의 심의를 거쳐 반포,실시하게 되였다.
  이것은 연변조선족자치주에서 나온 제일 첫번째 자치법규이자 전국 소수민족자치지방 속에서 가장 일찍 출범한 자치법규의 하나였다. 조례가 반포, 실시되면서 연변의 경제건설과 각항 사회사업은 발전과정에서 법률적 보장을 받게 되였다.
자치조례는 도합 7장 75조로 되여있다. 조례는 자치주의 자치기관, 자치주 인민법원과 인민검찰원, 자치주의 경제건설과 재정관리, 자치주의 교육, 과학, 문화, 위생, 체육 사업, 자치주내 민족관계 등을 연변의 실제정황과 결합하여 측면적으로 모두 명확히 규정해놓았다.
  이 자치조례의 반포와 실시는 연변 법치사회건설로정에서의 한낱 중요한 표징으로 된다. 1984년부터 주당위와 주정부에서는 정력을 집중하여 경제건설을 억세게 틀어쥐였는데 자치조례의 법률적 근거까지 뒤심이 되여주자 각급 간부들은 더욱 시름 놓고 대담하게 경제사업을 틀어쥘 수 있게 되였으며 나아가 여러 민족 대중들의 창업과 치부의 열기가 한결 끓어오르게 되였다.
력사가 이 단계에까지 발전하는 과정에 리덕수는 건전한 법치사회야말로 시장경제발전에서의 가장 근본적인 담보라는 것을 진작 의식하게 되였다. 연변의 많은 간부와 대중들도 만약 량호한 법치환경이 마련되지 않는다면 연변의 경제건설도 교란에 직면하거나 심지어 충격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였다.  
리덕수는 연변의 전반사업을 주관한 이후 <자치조례>의 제정과 반포에 더욱 박차를 가해 법에 따라 연변의 경제건설을 보다 신속하고 온당하게 발전시킬 수 있도록 보장하였다.
                                         
                                      (다음 호에 이음)
 
 
 
                                                    (강룡운 번역)                                
 
 
 
 
 
 
[연변문학 2018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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