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룡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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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문학 특별기획 리덕수의 고향사랑(6)
2019년 02월 14일 16시 37분  조회:1071  추천:0  작성자: 강룡운
연변문학 특별기획(6)
 
 
 
리덕수의 고향사랑
 
김숙련 서진청 류석춘
 
 
 
 
 
 
 
                             연변 로인절
 
 
로인을 공경하고 어린이를 사랑하는 것은 중화민족의 전통적 미덕이다. 많은 외지인들도 연변에는 로인 명절과 어린이 명절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로인들의 명절이란 연변조선족자치주에서 법적으로 규정한 8월 15일 연변로인절을 말하고 어린이들의 명절이란 6.1국제아동절을 가리킨다. 6.1국제아동절이면 집집마다 아이들을 곱게 차려입히고 온 집안 남녀로소가 아이들과 함께 공원이나 교외 혹은 기타 놀이터에 가서 아이들과 더불어 노래하고 춤을 추고 유희놀이도 하면서 아이들의 명절을 축하해준다. 그리고는 교외나 공원의 잔디밭 우에 비닐천을 펴놓고 한집식구가 빙 둘러앉아 야외식사를 시작하는데 이것은 연변에서 이미 하나의 전통으로, 연변문화의 하나의 구성부분으로 되였다.
연변에는 자기의 로인절이 있으며 연변에서는 각급 행정급별로 로인협회를 세웠다. 전국에서 맨처음이라고 할 수 있다. 나중에 국무원에서 전국로년사업회의를 소집할 때 경험을 소개하도록 특별히 연변을 초청한 적 있었다. 기실 로인을 공경하고 어린이를 사랑하는 연변의 량호한 사회적 풍토는 연변의 력사적 전통, 연변의 사회문화,  민심에 순응한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오늘날 사회에서 로인을 공경하고 어린이를 사랑하는 이런 우수한 오랜 전통을 계속 발양하여 사회생활의 주류, 일종의 사회풍토와 사회문화로 정착시킬 문제를 두고 연변 주당위와 주정부에서는 그야말로 막대한 노력을 기울였다. 일찍 1982년에 연길현(나중에 룡정시로 개칭) 동성용공사 ‘로인독보조’(‘로인협회’의 전신)는 공사당위의 직접적인 령도하에 전 공사 각 대대의 ‘로인독보조’를 ‘로인협회’로 개칭함과 동시에 ‘공사로인협회’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토론을 거쳐 매년 양력 8월 15일을 전 공사 ‘로인절’로 결정하였다. 동성용향 당위와 정부에서는 전 향 ‘로인절’ 1주년 경축활동을  준비하느라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동성용향 당위와 정부에서는 이 일을 그 당시 부임하여온 지 얼마 안되는 신임 현당위 서기 리덕수한테 회보하였다. 리덕수는 그들의 이 장거를 전폭적으로 지지해 나섰다. 리덕수는 이 일을 갖고 특별히 현당위 상무위원회를 소집하고 전 현 각 향진, 각 가두에서 모두 동성용공사를 따라배워 전 현 각 향진과 부락의 ‘로인독보조’를 ‘로인협회’로 고치도록 포치함과 아울러 8월 15일, 전 현 로인절 경축행사와 동성용향 경축활동을 통일적으로 동성용향에서 치르기로 결정하였다. 이리하여 전대미문의 ‘로인절’ 경축활동이 동성용향에서 성대하고도 장중하게 치러지게 되였다. 리덕수 등 룡정 현위, 정부의 주요 책임자들이 모두 이 활동에 참석했다.
동성용향의 이번 경축활동은 전 주적으로 처음으로 치러진 대형 로인절활동이였고 나아가 전국을 들썽해놓았다. 전국 각지에서 많은 손님들이 이 날 모임에 찾아왔다. 리덕수는 친히 문화부 부장 주목지((朱穆之), 부부장 정교(丁峤), 국가민족사무위원회 부주임 임영(任英)그리고 전국 각 분야의 전문가, 학자와 기자 등 100여명을 배동하여 이 경축활동에 참가하였다.
경축대회가 끝난 후 리덕수는 동성용향 당위와 책임자를 보고 주당위에 매년 8월 15일을 전 주 ‘로인절’로 정해달라는 편지를 보내라고 건의했다.
    그 때까지도 1983년 11월에 주에 와서 주당위 서기 겸 주장을 담임하게 될 줄은 리덕수로서는 어디까지나 예상 밖이였다. 이 같은 인사변동이 있으면서 흥미롭게도  1983년 8월에 그가 주당위에 써보내라고 건의했던 그 편지를 나중에 그 자신이 주당위에 올라와서 친히 처리하게 되였다. 리덕수는 이렇게 말했다. 
    “기실 연변 로인들이 각종 문화활동을 전개한 것은 광범위한 군중적 토대가 있었기에 가능합니다. 신중국이 설립된 후 연변에는 어느새 ‘로인독보조’가 나지게 되였고  줄곧 이 활동을 이어나가 이미 일상적인 형태로 굳어지게 되였습니다. 독보조는 독보에만 국한되지 않고 다양한 다른 활동들도 조직하면서 연변에서 이미 하나의 문화로 자리잡게 되였습니다. 그러므로 연변에서 ‘로인절’은 그 력사적 전승으로 이뤄지고 대중적, 사회적 토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누가 연변에서 주당위 서기를 담당하든지 조만간 다 이 ‘로인절’ 테마를 탐색, 연구하게끔 객관적 환경이 마련되여있었습니다. 저는 그저 형세의 흐름, 사회의 발전과 군중의 수요에 순응하였을 뿐입니다.”
     로인절을 망라하여 로인공대와 로인사업에 리덕수는 다함없는 감정을 품고 있었다. 그의 말을 그냥 들어보자. 
     “저는 연변에서 자라나면서 어렸을 때 자주 고향 ‘로인독보조’에 가서 신문을 읽어드리고 로인들의 글공부와 문화공부도 도와드렸습니다. 연변에서 로인을 공경하고 어린이를 사랑하는 관념과 감정은 평상시의 축적이지 갑작스레 튀여나온 깜짝 아이디어가 아니였습니다. 어디까지나 자연스러운 과정을 거쳐 형성된 결과였습니다.”
     1984년 7월 19일, 주당위에서는 상무위원회를 소집하고 연변조선족자치주 로인협회를 설립하기로 결정하였다. 사업의 편의를 위해 승용차 한대에다 사무실 두칸을  배치하였다. 그 회의에서는 또 매년 8월 15일을 연변조선족자치주 ‘로인절’로 한다고 정식으로 결정하였다.
     리덕수는 전인영을 주로인협회 초대회장으로 천거하였다. 전인영은 려영준(吕英俊)에게 초대회장직을 내주고 자기는 명예회장직만 맡았다. 1984년 8월 7일, 연변예술극장에서 있은 ‘전 주 로인대표대회’에서 주당위 부서기 장진발이 주당위를 대표하여 연설하였다. 1984년 8월 15일, 연변조선족자치주 첫번째 ‘로인절’ 경축대회는 왕청현 배초구진에서 성대하고도 장중하게 치러졌다. 주당위 비서장 김동기가 전반 경축대회의 총지휘를 맡았다. 리덕수는 성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부주임 최채와 성당위, 성정부 관련 부문의 지도자들을 배동하여 대회에 출석했다. 그 때 마침 연변에서 열린 ‘전국선전리론사업회의’와 ‘전국과학기술사업회의’에 참가하고 있던 전국 각지의 대표  200여 명도 대회에 오게 하였다. 배초구진 16개촌 1,000여명이 출연한 민족집단무용과 400여명 로인이 자리를 같이한 회갑잔치는 대회장의 분위기를 한껏 끌어올렸다.  전국 각지의 래빈들은 저마다 대회의 이채로운 분위기와 연변 여러 민족 인민들의 전통미덕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이 때로부터 매년 8월 15일이 되면 연변 각 부문, 각 단위들에서는 여러가지 형식으로 로인들을 위해 ‘로인절’을 쇠여드렸다. 8월달은 날씨가 좋아 로인들이 활동하기에도 적합한 만큼 공원이며 나무숲속은 가는곳마다에서 노래소리와 웃음소리가 흘러넘치였다. 로인들은 노래하고 춤을 추면서 아름다운 생활을 노래하고 행복한 만년을 즐기였다. 그리고 해마다 전 주 각지에서는 훌륭한 시아버지, 훌륭한 시어머니, 훌륭한 며느리, 훌륭한 아들을 표창하는 활동을 조직하여 ‘로인절’을 충실하면서도 다채롭게 보내였다.
연변 ‘로인절’을 본격 가동하면서 리덕수는 수많은 편지를 받게 되였다. 전국 각지에서는 연변의 장거를 높이 긍정하고 칭찬하면서 그들도 연변을 따라배워 륙속 법률적인 형식으로 자기들의 ‘로인절’을 확정하였다.
 
 
 
 
 
 
겨울철아시안게임 
     
 
제2회 겨울철아시아게임은 1990년 3월 9일, 일본 삿뽀로에서 거행되였다. 중국, 인도, 이란, 몽골, 조선, 한국, 일본, 필리핀, 중국 향항, 중국 대북 등 10개 국가와 지구의 근 1,000 명 운동선수들이 대회에 참석했다. 참가규모는 첫회보다 대폭 늘어났다. 이번 겨울철아시안게임에서는 스케이팅, 스키, 컬링, 아이스하키 등 5대 종목을 내놓았다. 최종적으로 일본이 금메달 18개, 은메달 16개, 동메달 13개를 따내여 1위를 차지하였다. 중국은 금메달 9개, 은메달 9개, 동메달 8개를 따내여 2위에 머물렀고 한국은 금메달 6개, 은메달 7개, 동메달 8개를 획득하여 3위, 조선은 은메달 1개, 동메달 4개로 4위, 몽골은 동메달 4개로 5위를 차지하였다. 
    그 당시 길림성 부성장 겸 연변주당위 서기를 담당하고 있던 리덕수는 그번 겨울철아시안게임 중국대표단 단장을 맡게 되였다.
    우리의 운동선수들은 거의다 동북3성 출신들이였는데 흑룡강이 제일 많았고 그 버금으로는 길림과 료녕이였다. 기타 성, 시와 해방군 출신들도 더러 있었다. 그 때 국가에서 대표단에게 금메달 5개 내지 7개를 따내야 하되 5개는 반드시 보증해야 하고 7개는 쟁취하라는 목표를 정해주었다. 결과적으로 우리 나라는 금메달 9개를 따냄으로써 목표치을 초과완성하였다. 특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남자아이스하키가 따낸 우승이였다. 아시안게임 력사상 중국이 남자아이스하키에서 처음 따낸  우승이였다. 애초에 대표단이 출발할 때 《인민일보》 스포츠면에 경기결과를 예측하여 실린 글에서 아이스하키는 3등만 해도 리상적이라고 내다보고 있었다. 리덕수는 국가겨울철스포츠종목의 경기수준에 대해 잘 료해하고 있지 못하더라도 이 같은 추측이 선수들의 정서에 찬물을 끼얹는다고 보고 있었다. 사기는 북돋우어주어야지 저락시켜서는 안된다는 판단에서였다. 팀이 아직 출정길에도 오르지 않았는데 이처럼 김빠진 말이 흘러나오면 선수들의 정서를 흐릴 수 있었다. 출발에 앞서 리덕수는 북경에서 전체 대표단을 상대로 동원연설을 하였다. 리덕수는 아이스하키팀은 스스로 분발하여 본때를 보여주어야 한다고 격려했다.
중국대표단 100여명은 전용기를 타고 갔다. 비행기가 도꾜공항에 착륙한 다음 곧바로 삿뽀로로 방향을 틀기로 예정되여있었다.
일본에 있을 때 리덕수는 중국선수가 참가하는 종목이라면 모두 직접 현장에 가서 지켜보았다. 하나도 례외가 없었다. 리덕수가 정치사상사업을 벌리는 방법은 주로 선수들과 마음을 나누고 친구로 사귀는 것이였다. 리덕수는 그 때 전국스키협회 주석이였다. 선수들이 경기장에서 나오면 성적의 여하, 순위의 여하를 막론하고 리덕수는 모두 잰걸음으로 다가가 위문해주고 축하해주고 고무격려해주었다. 그 몇해동안 리덕수는 체육계의 인사들과 다양하게 사귀였는데 특히 운동선수들과 친구로 사귄 비중이 많았다.
여기서 아무래도 남자아이스하키팀의 이야기를 좀더 상세히 짚고 넘어가야 할것 같다. 우리 아이스하키팀은 무언가 억울하다는 기분을 가지고 출정하게 되였다. 일본에 도착한 후 리덕수는 삿뽀로 주재 중국총령사관 총령사와 상의하고 총령사관의 도움을 받아 일본에서 전문 아이스하키팀을 위해 봉사하는 의사 두 분과 간호사 한분을 배치하였다. 의사 두 분이 모두 중국계 사람이여서 선수들과의 교류가 매우 편리했다. 아이스하키선수들은 저마다 신바람이 나서 기어코 잘해보겠다고 윽벼르고 있었다. 그들은 단장동지가 이처럼 우리를 잘 보살펴주는데 우리는 단장동지를 봐서라도 본때를 보여주어야 하겠다고 다짐했다. 젊은이들은 정말 몸을 내던지고 한국팀과 싸워 한국팀을 이기였고 조선팀도 꺽었다. 아이스하키에서 아시아의 강팀들인 한국이나 조선을 이겨버리자 사기가 충천해져 최종적으로 개최국인 일본팀과 우승을 다투게 되였다. 전반 아시안게임의 제일 마지막 종목이 바로 아이스하키 결승전이였다. 중일대전은 주말 저녁 7시에 시작되였다. 리덕수는 감독과 함께 경기장 밖에 서서 경기를 지켜보며 응원을 하였다. 리덕수는 뽈차기를 좋아 했고 어려서는 스케트도 타보았는데 그 때 그들은 굽은 나무가지를 낫과 도끼로 대충 다듬어가지고 하키를 만들어 아이스하키도 해보았다. 그 날 리덕수는 갑자기 아이스하키도 좀 알 것만 같아 감독과 함께 전략전술도 짜보았다. 그 날 저녁 온 체육관은 빈자리라곤 하나도 없이 꽉 들어찼는데 90%이상은 모두 일본 관객들이였다. 우리 사람이라야 령사관의 남녀로소가 전부였다. 령사관에서는 당직 한사람만 남겨 놓고 전원이 나섰다. 이에 앞서 리덕수는 령사관측에 혹까이도에 와서 류학하는 중국 대학생들을 불러줄 수 없겠는가고 상론했는데  그 날 예상대로 20여명 류학생들이 와서 응원에 동참했다. 리덕수는 기타 선수들도 모두 동원하여 도합 100여명은 푼히 되였다. 고맙게도 한국과 조선선수들도 우리 편이 되여주었다. 일본관객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지만 우리의 응원대도 결코 만만치 않았다. 중국령사관 외교관들이나 그들의 가속과 아이들도 고함을 너무 쳐서 목이 다 쉴 지경이였다. 어떤 사람들은 아이스하키의 규칙을 잘 몰라 우리팀이 공을 갖고 앞으로 달리기만 하면 와----와---- 하고 환호하면서 고함을 질렀다. 우리는 경기가 시작될 때는 좀 피동적이다가 나중에는 경기 주동권을 잡게 되였다. 중국인들의 응원소리를 딛고 아이스하키팀 젊은이들은 싸울수록 용맹해져 당하기 어려운 기세로 밀고나갔다.  이것이 바로 중국인들의 박투정신과 대항정신이였다! 최종적으로 우리는 두꼴 앞서는 성적으로 이겼다. 사람들은 모두 울었다. 령사관 사람들도 모두 울었다. 경기가 끝나자 모든 선수들이 우르르 달려와 리덕수와 악수하고 포옹을 하고 리덕수를 에워싸고 퐁퐁 뛰였다. 웃움과 눈물이 반죽된 그 장면은 정말 평생을 두고 잊을 수 없었다.
그 날 중국대표단 단장의 승용차를 운전한 기사는 일본인이였다. 그는 차에서 텔레비죤 생중계를 보고 나서 리덕수한테 이렇게 감회를 털어놓았다. 
“일본은 아이스하키를 젔기 때문에 모든 게 다 진거나 마찬가지입니다. 당신들은 아이스하키에서 이겼기 때문에 모든 걸 다 이긴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정말 그런 것 같았다. 이스하키는 빙상종목중의 정상으로서 모든 운동종목중 축구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으리 만치 몸값이 높았다.
    그 날 저녁 호텔에 돌아오자마자 수많은 축전이 끊임없이 날아왔다. 동북 뿐만 아니라 전국 그 어데라 할 것 없이 다 있었다. 남방에서 온 것도 적지 않았는데 상해, 광주, 심수 등 그 어디라 할 것 없이 몇백통 축전이 날아왔다. 국무원과 국무원 지도자, 흑룡강성정부, 길림성정부에서도 축전을 보내왔다. 그 날 저녁 온 대표단에는 잠든 사람이라고는 거의 없었다. 처음엔 축하전보가 오면 리덕수는 한통한통 일일이 열심히 읽어보았는데 나중에 점점 많아지자 그걸 다 읽어내려가기가 힘들었다. 그 가운데서 리덕수는 한 나라로 말하면 체육이야말로 국민의 적극성을 움직이고 민심을 단합하고 국민의 응집력을 증강시키는 한낱 위대한 사업이란 것을 실감하게 되였다. 그 날 중국 아이스하키팀은 축제의 밤을 이어갔다. 아이스하키팀에서는 리덕수한테 저녁에 맥주를 좀 마시면 안되겠는가고, 보증코 배갈은 절대 마시지 않고 맥주만 마실테니 허락해 달라고 청시하였다. 그 당시 운동회기간에는 누구도 술을 마셔서는 안되거니와 맥주를 마셔도 안된다는 강행적인 규정이 있었는데 누구도 이 규정을 어길 수  없었다. 리덕수는 특수한 정황은 특수하게 처리해야 한다고 하면서 아이스하키팀이 맥주를 마시는 것을 동의했다. 리덕수의 회시가 전달되자 선수들은 너무 좋아서 리단장이 동의했다고, 리단장이 오늘 저녁 우리가 술을 마시는 것을 허락했다고 웨쳐대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선수들은 리덕수를 그들의 련환모임에 참석해 달라고 초청했다. 리덕수는 응당 참가해야 한다고 판단하고 부단장과 비서장을 데리고 함께 찾아갔다. 그들은 맥주를 마시며 온밤을 즐겁게 노래하고 춤을 추면서 밤새도록 조국의 번영을 기원하였다. 그 이튿날은 다들 지쳐서 진종일 조용히 잠만 자다가 잠에서 깨여나자마자 곧 전용기를 타고 귀국하였다.
그 날 리덕수와 하진량 (何振梁) 두 사람이 특등석에 앉게 되였다. 리덕수는 하진량과 초면이였다. 하진량은 년세가 비교적 많은 편이였는데 그가 비행기에 탑승하여 자리를 찾아오자 리덕수는 주동적으로 그와 악수를 나누었다. 하진량은 “이번에 우리 성적이 정말 괜찮았습니다.” 하면서 리덕수가 선수단을 이끌어간 사업방식을 높게 평가하였다. 비행기가 하늘로 날아오르자 리덕수는 특등실이 비여있는 걸 보고 하진량과 의논했다.
“우리의 부단장과 흑룡강성체육위원회 주임도 이리로 건너오라고 할가요?” 
하진량이 “그러는 게 좋겠습니다.”하고 동감을 표하자 리덕수는 아이스하키팀 젊은이들도 다 함께 부르자고 제의했다. 
리덕수는 스튜어디스를 시켜 기장을 불러왔다. 
“중국 아이스하키팀이 우승을 한 걸 알고 있겠지요?”
기장이 머리를 끄덕이자 리덕수는 기장보고 청들었다. 
“이 참에 아이스하키팀 선수들도 건너오게 하여 이 특등석에 있게 하면 좋겠는데요. 아무튼 일본에서 북경까지 시간도 그리 길지 않으니까 말입니다.” 
“그건 문제 없습니다. 그런데 죄석이 좀 모자랄 겁니다.” 
“좌석이 모자라도 괜찮습니다. 여럿이 좀 비좁게 앉지요.” 
그리하여 나중에 흑룡강성체육위원회 주임도 건너왔다. 리덕수가 아이스하키팀 감독을 불러다가 이야기했더니 아이스하키팀 감독은 달려가서 여러 사람들한테 이렇게 소리쳤다. 
“다들 잘 들읍시다. 리단장이 우리 아이스하키팀 전체 대원들을 특등석으로 건너와 리단장과 함께 좌담을 하자고 하셨습니다.” 
젊은이들은 이 말을 듣고 와---- 하고 함성을 지르며 특등석으로 달려왔다. 운동선수들의 성격은 바로 이랬다. 어떤 친구는 춤을 추기도 하였는데 아무튼 우루루 한번에 다 몰려들어왔다. 그들은 들어와서도 자리에 앉지 않고 쏘파에 기대여 서로 앞다투어 리덕수와 이야기를 하고 싸인을 청하기도 했다. 비행도중 선수들은 리덕수와 이야기를 나누고 웃음꽃을 피우며 떠들썩하게 보내다보니 시간이 재빨리 흘러 비행기가  어느덧 북경에 도착한 줄도 몰랐다.
    비행기에서 내려 직접 호텔에 가서 경축대회를 열었다. 지도자들은 연설에서 이번 겨울철아시안게임에서 보여준 중국팀의 완강한 표현에 높은 평가를 내려주었다. 리덕수는 열렬한 박수와 환호성 속에서 연설을 하였다. 스포츠는 이처럼 나라의 형상을 대표하고 국력과 중화민족의 막강한 응집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인격적 매력 
     
 
리덕수는 순박하고 선량하며 친화력을 가지고 있었다. 리덕수의 몸에서 나타나는 이런 친화력은 주로 두개 측면에서 비롯된다. 하나는 정직이다. 그한테서는 올곧은 기운이 흐른다. 다른 하나는 물씬하는 인정미이다. 이런 인정미에 감화되여 많은 사람들은 그를 자신의 형제, 친구, 손우 선배로 받아들이게 된다. 리덕수가 이런 품질을 갖고 있었기에 그는 보다 많은 동지들을 단합하여 함께 일할 수 있었다.
    실사구시적으로 말하면 사업상에서 부동한 의견으로 말미암아 론쟁이 발생하는 것도 어쩌면 불가피한 일이라고 볼 수 있고 나아가 론쟁을 부정적으로만 본다면 틀린 시각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실제 사업 가운데서 이로 인해 지도부 내부에 불화가 야기되고 심지어 사업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그런 사례와 교훈들도 력사적으로 볼 수 있었다.
30년이 지난 후 그 당시 주당위 상무위원이며 선전부장이였던 리정문은 이렇게 회고했다.
“그 당시 주당위와 주정부 지도부에는 꽤나 개성이 뚜렷한 구성원도 있었다. 지도부 성원마다 그 사상방법과 사업방법이 서로 같지 않았기에 한가지 사업, 특히는 새롭게 가동하려는 대상을 둘러싸고 부동한 의견이 종종 엇갈리거나 론쟁이 매우 격렬할 때도 있었다. 쌍방의 의견이 서로 팽팽히 맞설 때면 리덕수는 늘 제일 먼저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혔다. 다같이 여러 사람이 랭정해지기를 기다려 쌍방으로 하여금 다시한번 자기 자신들의 관점을 명석하게 재천명하도록 하였고 깊이 있게 검토해보도록 여유를 주었다. 이렇게 쌍방이 자신들의 의견을 분명하게 재천명하는 과정에서 홀연 쌍방의 의견이 기실 대동소이하다는 것을 발견할 수도 있었다. 만약 쌍방의 의견이 완전히 상반되는 경우라면 리덕수는 이런 론쟁이 그냥 이어지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런 론쟁을 더해봐도 아무런 의의가 없을 뿐더러 자칫하면 오히려 동지들사이의 감정까지 다칠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리정문은 또 이렇게 말했다. “이런 론쟁이 발생할 때마다 리덕수의 인격적 매력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부드러움과 너그러움, 차근차근한 타이름, 부드러운 심성, 깊이를 잴 수 없는 겸허한 마음, 언제나 사업을 첫자리에 내세우고 큰 국면에서 출발하는 그의 사업풍격…이 모든 것들이 여러 사람들로 하여금 마음속으로부터 그에게 감복하게 하였으며 종당에는 다들 마음속으로 그의 의견을 받아들이게 되였다. 그는 각종 부동한 의견을 참답게 경청하면서 부동한 의견이라도 자르지 않고 거듭되는 토론을 거쳐 여러 사람이 공통점을 찾도록 공간을 열어주었다. 설득력이 없고 말발이 서지 않는 부동한 의견이더라도 리덕수는 회의에서 직접 허물을 지적하는 게 아니라 회의가 끝난 뒤에 부동한 의견을 갖고 있는 동지들을 찾아 소통하면서 매듭을 풀어나갔다. 이런 면에서 리덕수는 매우 까근하고 층차가 분명한 데다 인정미까지 갖추었기에 감화된 그들이 스스로 차분한 마음으로 자기의 의견을 거둬들이게 하고 마음속으로는 다른 사람의 의견을 받아들이게 하는 결과로 이어지게 되였다. 리덕수는 그 자리에서 즉각 태도를 보여달라고 난처하게 굴지 않았다. 상대방이 스스로 인식상의 편차를 느끼고 있다는 판단이 서면 이야기를 서둘러 마무리하거나 우정 화제를 돌렸다. 그것이 동료와 동지를 지극히 존중하는 그의 특이한 사업 예술이자 풍격이였다. 리덕수의 이와 같은 남다른 사업작풍은 동지들의 인정을 받게 되였다. 그러므로 매번 론쟁이 끝난 다음 지도부는 새로운 단합을 이루어내여 다음 사업에 힘을 몰부을 수 있었다. 
손홍상은 그 당시의 정경을 회고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 시기에 연변은 시국이 잘 돌아가고 민심이 부드러워져 생기발랄한 새로운 기상이 나타나게 되였습니다. 이것은 ‘문화대혁명’ 이후 연변 여러 민족 인민들이 오래 동안 갈망해오던 아주 좋은 형세였습니다. 그리하여 이 시기에 주당위의 사업은 여러 차례나 성당위 지도자들의 긍정을 받게 되였습니다.”
리덕수는 비록 지도부에서 제1책임자이고 “반장”역할을 맡고 있었음에도 자기보다 년세가 많은 동지들을 언제나 마음속으로부터 각별히 공경하고 존중하였다. 리덕수가 1983년에 연변에 돌아와 연변의 각항 사업을 주관하면서부터 1990년에 연변을 떠날 때까지 리덕수와 함게 옹근 8년 동안이나 같이 사업하게 되면서 리덕수의 일거일동을 근거리에서 지켜본 손홍상은 다음과 같이 감회를 털었다.
“리덕수 서기한테서는 무엇보다도 인품이 돋보였습니다. 그 당시 리덕수 서기는 매우 젊은  ’반장’이였고 상무위원중에서 그의 년령은 꺼꾸로 세면 두번째였습니다. 그는 겸손하고 신중하였으며 오랜 동지들을 존중하고 수하 동지들과 평등하게 지내면서  종래로 ‘제1책임자’의 틀을 차리지 않았습니다. 리덕수는 지도부의 가타 성원들에 대해 늘 정치상에서 신임하고 생활상에서 보살펴주면서 맏형님 같이 까근히 챙겨주었습니다.” 
한번은 손홍상이 병에 걸리게 되였다. 차음엔 그저 감기려니 했는데 나중엔 웬 일인지 페까지 감몀되면서 련일 고열이 내리지 않아 걸음걸이마저 비틀거릴 만큼 심각해졌다. 그런데도 손홍상은 페가 감염된 줄도 모르고 계속 출근하였다. 리덕수는 그를 보자 깜짝 놀라며 다급히 물었다. 
“홍상동무, 이게 웬 일입니까?” 
손홍상이 “감기에 걸렸는지 열이 좀 나는 것 같습니다.”하고 맥없이 대답하자 리덕수는 다가와 손홍상의 이마에 손을 얹어보더니 놀라서 다그쳤다. 
“열이 나는구만. 안되겠습니다. 지금 당장 병원으로 가야 하겠습니다. 더 지체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차실인듯 사과했다. 
“너무 지쳐서 난 병입니다. 다 내 탓입니다.”
손홍상이 “괜찮습니다. 약을 좀 먹으면 낫겠지요. 안 그러면 주사라도 한대 맞으면 됩니다.” 하고 말하자  리덕수는 단호하게 대방의 말을 잘랐다. 
“홍상동무, 동무는 반드시 쉬여야 하고 입원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일을 더는 해서는 안됩니다.”
그 때는 모두 드높은 열정으로 일을 하고 있었다. 손홍상이라고 병원에 가서 입원할리 없었다. 그는 치료를 받으면서 일을 그냥 이어나갔다. 이를 알게 된 리덕수는  손홍상을 연변병원에 “압송”해가라고 주위생국 국장을 불렀다. 병원에 가서 검사를 해보니 페결핵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그 때 그래도 제때에 검사를 하고 치료를 받았기에 3개월도 채 되지 않아 치유할 수 있었다. 나중에 손홍상은 이렇게 말했다. 
   “애초에 덕수 서기가 억지로 나를 병원으로 떠밀어보냈으니 망정이지 조금만  더 지체했더라도 아주 큰 우환거리를 남길 번했습니다!”
    리덕수는 소박하면서도 공정하고 정파다운 작풍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항상 겸허하고 부드러운 성품을 간직하고 있었다. 자치주의 지도자든지 일반사업일군이든지를 막론하고 늘 평등하게 매 한명의 동지들과 어울렸다. 여기에서 그의 몸에 축적된 두터운 수양을 볼 수 있었다. 리덕수의 이런 인격과 품격은 지도부 성원들을 잘 단합하여 힘을 합칠 수 있는 하나의 중요한 요인으로 되였다.
    리덕수가 주당위 서기 겸 주장으로 있을 때 기관간부들은 “올라간다”와 “내려간다”는 말을 무척 신나게 입에 올렸다. 이른바 “올라간다”는 건 기관으로 돌아간다는 것이였고 “내려간다”는 건 기층으로 내려간다는 것이였다. 그 때 주당위 서기 겸 주장인 리덕수가 갑작스레 밭머리에 찾아가는가 하면 공장의 직장에도 찾아가고 농가나 로동자 가정으로 들어가보는 것은 너무나 자주 보는 풍경이여서 그 누구든지 편안하게 받아들였다.
    1984년 가을, 박호만(朴浩万)이 룡정현 동성용향당위 서기를 담당하게 된 지 얼마 안되였을 때였다. 하루는 리덕수가 동성용향  농민 김시룡을 방문하였다. 사전에 현에서 향에 알리지 않았기에 박호만은 리덕수가 와서야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그리로 찾아갔다. 
    알다싶이 김시룡은 그저 평범한 농민이 아니였다. 저명한 전국로력모범인 그는 새 중국의 농업발전을 위해 뛰여난 기여를 한 전설적인 인물이였다. 일찍 전국이 해방되기 전인 1946년에 김시룡은 연길현 영성촌에서 농업생산호조조를 꾸리였다. 김시룡은 호조조에서 정액관리로 농업생산발전을 촉진하여 한때 전국을 들썽해놓았다. 김시룡은 1948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1951년에는 또 농업생산합작사를 세웠다. 그는 호조조 조장, 농업사 주임, 동성용인민공사 사장, 길림성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위원을 력임했다. 또한 제1기로부터 제3기의 전국인민대표대회 대표, 제5기 전국정치협상회의 위원이였다. 신중국이 창건되던 1949년에 김시룡은 영예롭게도 길림성 특등로력모범칭호를 수여받았으며 1950년과 1957년에 또 영예롭게 전국로력모범과 전국 농업로력모범의 칭호를 받아안았다. 1958년에 김시룡은 동성용인민공사에서 우리 나라에서 제일 첫번째로 되는 반농반독(半农半读) 농민대학을 세웠다. 1960년에는 전국 문화교육계통군영회(群英会)에 참석하였다. 이 농민대학은1980년에 려명농민대학으로 이름을 바꾸게 되였고 김시룡은 명예교장을 담당하게 되였다. 김시룡은 생전에 20여차나 모주석의 접견을 받았으므로 그의 이름은 룡정현에서 현장이나 현당위 서기보다도 어쩌면 오히려 더 맵짜고 현장, 현당위 서기보다도 더 알려져있었다. 
    이윽고 동성용향당위 서기 박호만은 리덕수를 배동하여 김시룡의 집으로 찾아갔다. 김시룡은 새로 부임된 지 얼마 안되는 신임 주당위 서기가 이렇게 찾아온 게 이례적이여서 무척 반가워했다. 그는 나젊은 리덕수를 마주하니 자연히 지나온 자신의 경력을 이야기하게 되였다. 기실 김시룡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리덕수도 퍼그나 알고 있었다. 그러더라도 그냥 귀를 가다듬고 들으면서 말참견을 하지 않았다. 김시룡의 이야기가 다 끝나서야 리덕수는 그한테 해방초기와 ‘문화대혁명’ 이전의 농업생산과 농민생활 화제를 꺼냈다. 리덕수는 매우 까근하게 물어보았고 김시룡도 아주 진지하게 이야기해주었다. 리덕수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작은 수첩을 꺼내들고 열심히 기록하였다.  마치도 공손하고 례의 바른 소학생 같았다. 리덕수는 김시룡과 일상적인 이야기도 많이 나누었다. 이를테면 농업생산을 어떻게 틀어쥐어야 하는가, 토지도급문제도 이야기하면서 오랜 로력모범으로서 토지도급문제를 어떻게 보느냐 등등 화제가 다양했다.
    향에다 점심식사를 마련하려던 박호만은 김시룡이 기어코 자기네 집에서 리덕수를 대접하겠다고 고집하기에 들어줄 수 밖에 없었다. 리덕수도 편안하게 받아들였다.  리덕수는 그저 집에 뭐가 있으면 있는 대로 먹으면 되니 사람을 시켜 다른 걸 사오게 해서는 안된다고 딱 막았다. 기실 리덕수가 주인의 청을 받아들인 건 김시룡한테서 듣고싶은 이야기가 너무 많았기에 식사를 하면서 계속 한담을 이어가고 싶은 심정에서였다.
식사를 마치고 박호만은 리덕수를 배동하여 향으로 돌아왔다. 박호만은 신임 주당위 서기가 처음 동성용향에 온 이 기회를  빌어 리덕수한테 사업을 회보하면서 그의 도움을 받아 향의 실제적인 애로사항을 좀 해결해보려는 타산을 가지고 있었다. 리덕수는 그의 속궁리를 알아차리고 이렇게 말했다. 
“무슨 일이 있으면 그저 툭 찍어놓고 말해보시오.” 
원래 동성용중학교 교사건물을 3년째나 짓고 있었는데 향정부에 자금이 없어서  줄곧 콩크리트지붕을 덮지 못하다보니 계속 반쪽 공사로 남아 있었다. .박호만의 회보를 듣던  리덕수는 즉각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먼저 현장에 가서 직접 보면서 이야기합시다!”
박호만은 이렇게 말이 떨어지게 바쁘게 신속하게 대응하는 리덕수의 단호한 사업작풍에 적잖게 충격을 받았다. 그는 곧 리덕수를 모시고 동성용중학교 교사건물 시공현장으로 찾아갔다. 리덕수는 현장을 다 둘러보고 나서 무거운 심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아이들이 이렇게 오래 동안 새로 지은 학교에 이사하여 강의를 들을 수 없었으니 우리 모두에게 다 책임이 있습니다! 내가 돌아가서 현의 동지들과 상의해서 해결책을 찾도록 하겠습니다.” 
나중에 기타 자금에서 뽑아낸 45만원이 동성용향에 내려오게 되였다. 동성용중학교건물 마무리 작업을 마치면서 아이들은 드디어 새로 지은 학교에 이사하여 수업할 수 있게 되였다.
    박호만의 기억 속에는 또 잊을수 없는 사건이 하나 더 있었다. 그것은 1986년 6월 25일, 룡정현 동성용중학교 10여명 아이들이 물에 빠져 숨진 사건이였다. 이것은 하늘땅을 놀래울 사고였다. 사고소식을 접한 리덕수는 즉각 사고현장에 와서 시체를 건져내는 작업을 직접 지휘하였다. 익사한 학생들의 부모님을  만나 일일이 이야기를 나누면서 위문을 하고 일일이 위로를 해주었다. 박호만은 리덕수를 보기 바쁘게 달려가서 머리를 숙였다. 
    “리서기, 저를 처분하십시오! 책임은 어디까지나 향당위 서기인 저한테 있습니다.” 
    리덕수는 박호만을 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지금은 책임을 추궁할 때가 아닙니다. 전력을 다해 가족들을 위로하고 후사를 잘 처리하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리덕수는 제일 먼저 사고현장에 달려가 조난당한 아이들의 부모들을 위로하여 가족들의 정서를 차츰 안정시켰을 뿐더러 그들로 하여금 묵묵히 관련 부문들과 배합하여 후사를 처리하도록 이끌어주었다. 그 당시 현장에서 박호만은 깊은 감촉을 받게 되였다.
    황재림은 1984년 12월 9일부터 연변조선족자치주 대리주장을 담당하게 되였다.  그 때부터 리덕수는 주장직무를 더는 겸임하지 않았다. 황재림은 열정이 있고 패기가 있는 데다 과감히 개혁하는 지도자였다. 그 이듬해 봄에 열린 주인민대표대회에서 황재림은 정식으로 주장에 당선되였다.
    황재림은 공업을 익숙히 아는 데다 경험이 풍부하였고 그 만큼 연변 경제를 신속히 발전시켜려는 강력한 념원을 품고 있었다. 
    리덕수와 황재림은 한 지도부에서 몇해 동안 함께 일했다. 그들은 줄곧 서로 지지하고 긴밀히 배합하면서 친밀한 관계를 이어왔다. 이런 관계는 연변의 개혁과 발전 및 안정단결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 당시 부주장으로 있었던 장지붕은 이렇게 회고했다.
    “저는 리덕수 서기와 서로 알고 지낸지 40여년이 되였습니다. 리덕수 서기는  따뜻하고 순박한 데다 너그럽고 정파다우며 언제나 큰 국면을 능란하게 돌보았습니다.  지도부 성원들에 대해서 책망하거나 흠집을 잡는 일이 없었고 도량이 매우 넓었습니다.”
몇년이 지나서 리덕수가 이미 북경에 전근되여 국가민족사무위원회 당조서기 겸 주임으로 있을 때는 황재림이 진작 정년퇴직한 이후였다. 한번은 황재림이 병으로 북경에 와서 입원하게 되였다. 장지붕이 황재림한테 문병하러 갔다가 병원에서 나오면서 리덕수한테 이 소식을 전했다. 
“황재림 주장이 지금 병환으로 북경에 와 입원하고 있는데 알고 계십니까?”
이 말을 듣고 리덕수는 “전 전혀 몰랐습니다. 그럼 지금 당장 가보아야 하겠습니다.” 하면서 하던 일도 제쳐놓고 곧바로 병원으로 찾아갔다.
    나중에 장지붕은 리덕수가 두번이나 병원에 가서 황재림을 문병했다는 것을 알게  되였다. 그중 한번은 박석산(전임 연변 주정부 부비서장, 주토지국 국장)이 그 자리에 함께 있으면서 리덕수가 황재림한테 하는 말을 듣게 되였다.
“황주장은 나중에 비록 길림으로 자리를 옮겨갔더라도 연변에서 주장으로 있었기 때문에 아무래도 연변에 돌아가 치료하고 료양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나서 리덕수는 박석산한테 또 이렇게 분부했다.
“돌아가게 되면 주의 지도자들한테 이건 리덕수----나의 의견이라고 전하면서 황주장께서 연변에서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잘 조처했으면 합니다.”
     박석산은 그 때의 분위기를 려과없이 회고하였다. 
    “그 때 황재림 주장은 너무도 감동되여 리덕수의 손을 꼭 잡은 채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리덕수의 일거일동에서 우리는 그의 흉금, 그의 덕성, 그의 지조, 그의 품덕을 엿볼 수 있었다. 한마디로 추려내면 바로 인격의 집합체라고 할 수 있었다. 이런 인격은 다름 아닌 리덕수가 세상을 헤쳐가는 하나의 강력한 카드였다.
장지붕은 그가 성공안청 청장으로 있을 때 있었던 잊을 수 없는 이야기를 떠올렸다. 
    “리덕수 서기는 인정이 깊고 의리가 있는 데다 감정이 풍부하고 감정에 충실했습니다.”
1995년 1월, 제8기 전국겨울철운동회가 길림성 길림시에서 치러지게 되였다. 직업적 수요로 장지붕은 겨울철운동회에 참가하는 당정요인 명단을 훑어보았다. 그중 경호급별에 속하는 사람은 두 사람 뿐이였다. 한분은 중공중앙정치국 상무위원이며 전국정치협상회의 주석인 리서환(李瑞环)이였고 다른 한분은 제9기 전국정치협상회의 부주석이며 중국민주촉진회 명예주석, 중국불교협회 회장인 조박초(((赵朴初)였다. 운동회 개막식은 저녁에 치러지게 되였다. 리서환은 “제8기 전국겨울철운동회 개막”을 선포한 뒤 그 날 저녁에 곧바로 북경으로 돌아가게 되였고 중점경호대상은 오로지 조박초 한사람만 남게 되였다. 문학과 예술을 남달리 애호해온 장지붕은 서화에 특별히 조예를 가지고 있었다. 조박초의 글씨는 천하가 다 알아주는 일품이므로 장지붕은 은근히 이 기회에 조박초한테 글씨를 좀 써달라고 청을 들어볼가말가 망설이게 되였다. 경기 첫날 장지붕은 먼저 일찌감치 길림시 북대호스키장에 가서 조박초를 기다렸다. 조박초가 탑승한 승용차가 도착하자 장지붕은 다가가 맞으면서 차에서 내리는 조박초를 부축해드렸다. 그가 조박초를 부축하고 산으로 올라가는데 길에서 조박초가 느닷없이 그한테 물었다. 
“자네는 뭘 하는 사람인가?” 
이 물음에 장지붕은 “저는 길림성공안청 청장 장지붕입니다. 이번에 제가 어른의  경호를 책임지게 되였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이렇게 조박초를 배동하면서 이삼일이 지났다. 장지붕은 가슴 속에서 가까스로 참고 있던 말을 할 때가 되였다 싶어 기회를 타서 이렇게 입을 열었다. 
“어른께서 어쩌다가 저희들 길림으로 오시게 되였는데 저는 어르신의 글씨를 경모한 지 퍽 오래되였습니다. 어른께서 이번에 저한테 어르신의 묵보를 남겨주실 수 없겠습니까?”
이 말을 듣고 조박초가 물었다. 
“자네한테 무슨 글자를 써주면 좋겠는가?” 
장지붕이 “딱 한 글자, 불(佛)자를 써 주십시오.”하고 말하자 조박초는 또 이렇게 물었다.
“자네 같은 공안청 청장도 부처님을 믿는단 말인가?”
이 물음에 장지붕은 이렇게 대답했다. 
    “어르신, 저는 부처님을 믿지 않습니다. 저는 그저 불교를 하나의 학문으로 연구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 말을 듣고 조박초는 그저 묵묵히 앞으로 걷기만 하였다. 장지붕은 그저 이렇게 물러설 수 없기에 다시금 다가갔다. 
“어르신, 저는 1960년대부터 줄곧 어르신을 숭배하여왔습니다.”
이 말을 듣고 조박초는 이렇게 되물었다. 
“자네는 나의 무엇을 숭배했단 말인가?” 
장지붕을 제꺽 이렇게 대답했다. 
“중, 쏘 두 나라가 한창 론쟁을 벌이고 있을 때 어르신께서는 <어떤 이는 세번이나 울었다네>라는 시를 쓰지 않으셨습니까? 저는 다 암기해두고 있습니다.” 
장지붕은 얼른 조박초한테 그중의 한련을 읊어드렸다. 조박초는 그제야 무언가 흥미를 느끼는듯 이렇게 말했다. 
“자네는 여태까지도 그 시대의 시를 기억하고 있단 말인가?” 
장지붕은 아예 시의 전문을 조박초 앞에서 읊었다. 기실 장지붕은 그 전날에 벌써 미리 보아두었기에 랑송을 할 때 감정까지 부여하여 읊을 수 있었다. 그러자 조박초도 한껏 기분이 도도하여 길에서 이야기꽃을 피우며 무척 즐거워하였다.
어느날, 장지붕은 텔레비죤뉴스를 보다가 무심결에 리덕수가 판첸라마와 조박초와 함께 앉아있는 화면을 보고 무릎을 탁 치게 되였다. 아이고, 내가 어찌하여 리덕수를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가? 이 일을 리덕수한테 부탁하면 도움받을 확률이 커보였다. 장지붕은 곧 펜을 들어 리덕수한테 편지를 써보냈다. 그 시절에는 편지가 주요한 통신수단으로 많이 쓰이였다.
    리덕수는 공무가 아니면 다른 사람한테 청을 들기 싫어하는 성격이였다. 리덕수는 조박초를 특별히 공경하였으므로 조박초 앞에서 쉬이 입을 열기 저어되였다. 그런데 또 친구와의 우정을 각별히 소중히 여기는 리덕수로서는 장지붕의 청을 외면하기도 어려웠다 그래서 기회를 타서 조박초를 찾아가 이 일을 회보했다. 조박초는 쾌히  수락하였다. 그런데 조박초가 장지붕한테 써 보낸 것은 외글자 “불(佛)”이 아니라 “불심(佛心)”이란 두 글자였다. 이것은 장지붕한테  “불심”이 있어야 한다는 메시지가 아니였는지도 모른다.
    1985년초, 주정치협상회의에서는 임기완료에 따른 지도부 교체가 있었다. 조봉명이 주정치협상회의 주석으로 임명되고 그 전에도 주정치협상회의 2인자였던 리덕수의 오랜 지도자 김승옥은 계속 그 자리에 남게 되였다.
    여기엔 이런 에피소드가 있었다. 리덕수가 성에서 연변에 돌아와 연길현에서 현당위 서기로 있을 때 김승옥은 주당위 부서기 직무에서 주정치협상회의로 자리를 옮겨 주정치협상회의 부주석을 맡게 되였다. 그 때 주정치협상회의 주석은 전인영이였다. 리덕수가 주당위 서기로 된 후 전인영은 년령관계로 물러나게 되였다. 자격이나 급별을 놓고 보아도 김승옥은 에누리없는 주정치협상회의 주석 인선중의 한 사람으로 될 수 있었다. 그 당시 주 다섯개 지도부의 민족구도를 보면 주당위 서기가 조선족이고 주장 황재림도 조선족이고 주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주임 조룡호도 조선족이고 주규률검사위원회 서기 신창순 (申昌淳) 도 조선족이고 오로지 주정치협상회의 주석  전인영만이 한족이였다. 전인영이 물러난 후 만약 김승옥이 전인영의 직위를 잇게 되면 주 다섯개 지도부의 제1책임자직을 몽땅 조선족이 담당하는 구도가 나타날 수 있었다. 리덕수는 이같은 배치가 합당하지 않다고 판단해 조봉명을 주정치협상회의 주석으로 추천하였다. 조봉명 본인은 주동적으로 리덕수한테 이렇게 말했다.
“응당 김승옥동지를 주석이 되게 하고 저는 그 아래서 부주석으로 있으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러더라도 김승옥은 조직의 결정에 복종하여 아무런 원망도 없이 달갑게 계속 2인자 직위에 남게 되였다. 이 일에서 리덕수는 마음속으로부터 김승옥 주석이 보여준 흉금에 더구나 감격하고 탄복하게 되였다. 나중에 리덕수는 여러번 성당위 서기와 성당위 조직부 부장 등 지도자들을 찾아가 김승옥의 급별과 대우문제를 제기하였다. 리덕수의 적극적인 협조와 성당위의 배려하에 김승옥은 드디어 정청급 간부 대우를 향수하게 되였다.
    조봉명한테는 또 다른 에피소드도 있었다. 라창진은 원래 주당위 부서기였는데 사업의 수요에 의해 조직에서는 그를 주정치협상회의에 배치하게 되였다. 이 일 때문에 리덕수는 특별히 조봉명을 세번이나 찾아가 상의한 적이 있었다.
    첫번째로 찾아갔을 때 리덕수가 조봉명한테 이렇게 물었다. 
“라창진동지를 주정치협상회의에 보내려고 하는데 동의하십니까?” 
조봉명은 이렇게 대답했다. 
“리서기, 이것은 주당위의 결정이므로 저는 큰 국면에 복종하겠습니다. 게다가 라창진동지는 매우 수준이 있는 분이잖습니까?.”
    이 말을 듣고 리덕수는 이렇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봉명 주석이 동의하므로 우린 라창진동지를 정치협상회의에 배치하여 사업하도록 하겠습니다.”
     두번째로 조봉명을 찾아가 이야기할 때 리덕수는 라창진을 2인자로 배치하여 서렬상 김영만 앞에 놓으면 어떻겠느냐고 건의했다. 이에 대해 조봉명은 부동한 의견을 내놓았다. 
    “라창진동지가 정치협상회의에 와서 사업하는 데 대해서는 저는 전적으로 동의하며 아무런 이의가 없습니다.  다만 라창진동지를  2인자로 배치하는 건 합당하지 않다고 봅니다. 김영만동지는 해방전에 혁명에 참가한 오랜 간부로서 자격으로 보아도 라창진보다는 더 두터운 분이고 정치협상회의에서 사업한 시간도 퍽 오래 되였습니다. 정치협상회의에서는 리직휴양 간부와 정년퇴직 간부를 배치할 때 모순이 생기면 우선 리직휴양할 간부를 고려하는 게 관행으로 굳어져있는 만큼 이 순위를 뒤바꾸지 않는 게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리덕수는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면 좋겠는가고 조봉명의 의견을 청취했다. 조봉명은 이렇게 말했다. 
    “라창진동지가 주정치형상회의로 오게 되면 김영만동지 뒤에 배치하는 게 비교적 합당하다고 생각됩니다.”
    리덕수는 겸허한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조주석의 뜻을 잘 알게 되였습니다. 그럼 돌아가서 다른 상무위원들과 다시 검토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며칠 뒤 리덕수는 몸소 조봉명의 집무실로 찾아와 이렇게 말했다. 
    “조주석동지, 주당위에서는 조주석의 의견에 동의하여 라창진을 김영만 뒤에 배치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행정직무는 이렇게 배치하기로 하고 당내직무는 라창진동지한테 당조 부서기직을 맡기는 게 어떻겠습니까?”
    조봉명은 이렇게 배치하면 김영만의 당조 부서기 직무를 해임해야 하므로 여전히  합당하지 않다는 견해를 내놓았다.
    조봉명의 의견을 듣고 리덕수는 잠간 진지하게 생각을 더듬다가 이렇게 말했다. 
    “조주석동지, 정치협상회의에 당조 부서기 명액 1명을 더 늘이면 어떻겠습니까?”
    이 말에 조봉명은 시원히 받아들였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야 누이 좋고 매부 좋고 다 좋은 거 아니겠습니까.”
     리덕수가 이렇게 세번이나 주정치협상회의에 찾아와 인사배치문제를 상의하는 것을 보고 조봉명 주석은 주당위 서기의 민주적인 사업작풍에서 잔잔한 감동을 받게 되였다. 기실 이것은 리덕수가 사업과 생활에서 보여준 일관적인 스타일이였다.
    부주장 전평선은 1978년에 흑룡강에서 연변으로 전근하여 선후로 돈화현 량곡가공공장 공장장, 량식국 과장, 현당위 정책연구실 주임 등을 력임하였다. 1983년도에 나라에서 기구개혁을 진행하면서 젊은 간부들을 선발하게 되였는데 중앙에서 처음으로 지도부 건설에서의 ‘3화(년소화, 지식화, 전업화)’ 표준을 제기하면서 전평선은 40세에 돈화현당위 부서기로 임명되게 되였다. 1985년 기구개혁이후 전평선은 돈화에서 화룡으로 전근되여 현장을 맡게 되였다.
전평선이 화룡현에 와서 현장이 된 후 일을 본때 있게 해내여 간부와 대중들로부터 긍정을 받았고 선후로 화룡현당위 서기, 룡정현당위 서기, 주정부 부주장을 력임하게 되였다.
전평선은 이렇게 회고했다.
“어디까지나 공적인 립장에서 출발하여 열심히 일을 하다가 혹시 사업중에서 이러저런 실수가 나타난다 하더라도 리덕수 서기는 언제나 걱정해주고 그를 대신해 말해주면서 공적과 과실을 분명히 갈라놓고 객관적이고도 공정하게 평가해주었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무형의 에너지로 되여 대담하게 사업하고 좋은 성과를 따내도록 밀어주었습니다.”
    연변대학 전임 교장 김병민은 이렇게 회고했다. 연변대학의 김성걸이란 선생님이 담관암에 걸렸는데 리덕수가 이 소식을 듣고 여기저기에 수소문하여 동충하초를 구해서 인편으로 김성걸한테 보내주었다. 그 때 리덕수동지는 이미 국가민족사무위원회 주임이였는데 그렇게 높은 직위에 있는 간부가 모교의 한 평범한 선생님하테 쏟는 관심에 깊은 감동을 받게 되였다. 리덕수동지가 북경으로 전근되여간 이후에 연변대학에서 병에 걸린 교직원들이 끊임없이 그를 찾아가도 그는 조금도 시끄러워하는 기색이 없이 언제나 사처에 전화를 걸어 인맥을 찾아 그들이 입원하고 병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연변대학 전임 부교장 정판룡(郑判龙)교수가 암에 걸려 301병원에 입원하고 있을 때 리덕수는 자주 찾아가 문병을 하고 위문을 하였기에 나중에 301병원 간호사나 의사들도 모두 리덕수의 신분에 대해 익숙하게 되였다. 한번은 한 간호사가 리덕수를 보고 “당신은 환자의 가속이지요?” 라고 묻기까지 하였다는 후문이다.  김병민은 고향사람들과 모교 선생님들에 대한 리덕수의 이같은 일편단심은 생각만해도 가슴이 뭉클해난다고 감격을 터놓았다. 
리덕수는 항상 상냥하고 친절하여 가까이하기 매우 쉬운 사람이였지만 자기 자신에 대한 기준은 지극히 엄격하였다. 다른 사람들 보기에 하찮은 일도 리덕수는 그저  가볍게 넘기지 않았다. 손동식의 회억에 따르면 그가 연변대학 교장으로 있을 때 리덕수가 큰 수술을 받은 적이 있었다. 이 소식을 듣고 손동식과 많은 교우들은 무척 마음을 조이였다. 학교에서 북경에 사람을 보내 자그마한 성의라도 전하려고 하자 리덕수는 손동식한테 전화를 걸어 애초에 밀막아 버렸다. 
“손교장선생님! 저는 저에 대한 모교의 배려를 더없이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교장선생님이나 저 모두 공산당원이 아닙니까? 액수가 적든지 많든지를 떠나서 저는 절대 그 돈을 받을 수 없습니다.”
    조현인은 리덕수가 연변에서 주당위 서기로 있을 때부터 시작하여 장춘에 가서 부성장, 나중에 중앙통전부 부부장 겸 국가민족사무위원회 주임을 담당할 때까지 줄곧 리덕수의 비서로 있었다. 나중에 국가민족사무위원회 경제사 사장으로 있다가 전국공급판매합작총사에 전근되여 부주임을 담임하게 되였다. 그의 회고이다. 
    “리덕수동지가 주당위 서기로 있을 때나 부성장, 국가민족사무위원회 주임으로 있을 때나를 막론하고 그의 집으로는 누구나 다 찾아갈 수 있었습니다. 문제를 해결하려고 찾아다니는 군중들도 그의 집으로 찾아오군 하였습니다. 그의 집에서는 제때에 저녁을 먹을 때가 거의 없었습니다. 리덕수동지의 집이 장춘에 있을 때 그의 부인 박춘자는 늘 찾아오는 사람들을 접대해야 했습니다. 기차표, 비행기표를 사고 주숙을 배치하고 큰 병원에 가서 의사를 찾고 등록하는 등등 자질구레한 일에 다 리덕수동지를 찾아오군 하였습니다. 어떤 이들은 리덕수한테 그렇게 높은 벼슬자리에 계시는 간부가 이런 시시껄렁한 일들에 아예 참견하지 말라고 권고하면 리덕수는 관여 안해서는 안되거니와 관여할 수 있는 일은 관여해야 한다고 딱 잘라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찾아오는 것은 그들이 나를 생각하고 있으며 또 나를 믿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데 어찌 나 몰라라 하겠는가. 리덕수동지의 말씀이 의미심장하게 들렸습니다. 리덕수동지가 북경에 전근된 다음 국가민족사무위원회 동료들이 ‘우리 리주임은 정말 정이 많은 분인가 봅니다.’ 라고 말하자 리덕수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아닙니다. 이것은 진정 저의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거야말로 고상한 품덕’이라고 말하지면‘아닙니다. 이것은 저의 성격에서 비롯된 것입니다.’하고 일축했습니다. ”
          
 
 
 
 
    석별의 정을 안고  
 
 
    이제 리덕수는 곧 연변을 떠나게 되였다. 그는 연변의 산과 물, 그의 동포들이 살고 있는 고향땅, 더구나 연변의 간부와 대중, 그리고 정든 고향 사람들에게 깊은 미련을 가지고 있었다.
    1990년 11월 24일, 리덕수는 연변을 떠나기에 앞서 주직속기관 책임자회의에서 마지막으로 고향 연변에 대한 그의 석별의 정을 풀었다.
    그 때는 벌써 리덕수가 국가민족사무위원회에 전근되여 임직하게 된다는 임명장이 하달되였기 때문에 성당위에서 절차에 따라 이미 리덕수의 연변주당위 서기 직무를 해임한 뒤였다. 
    1990년 11월 23일, 리덕수는 성당위 서기 하죽강과 함께 신임 연변주당위 서기 장덕강을 배동하여 연변으로 돌아왔다. 리덕수는 이번에 연변에 돌아오면서 두가지 소망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정식으로 연변을 떠나기에 앞서 고향에 돌아와 다년간 얼굴을 맞대고 함께 지냈던 친구들과 그를 관심해온 각계 인사들과 속심의 말을 나누면서 여러 사람들과 정식으로 작별의 인사를 나누려는 것이였고 다른 하나는 중앙과 성당위의 결정에 근거하여 장덕강동지가 연변에 돌아와 사업을 주관하게 된 것을 환영하는 것이였다. 리덕수는 장덕강과 다년간 함께 일해온 오랜 전우였다. 리덕수는 여러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장덕강이 연변에 돌아와 사업하게 된 것을 진심으로 환영했다. 그래서 그는 연변에 돌아와 친히 장덕강을 환영하려고 하였다. 바꾸어말하면 고향 땅에서 친히 장덕강을 영접하고 싶은 게 리덕수의 소망이였다. 
    주직속기관 간부대회에서 리덕수는 많은 속심의 말을 털어놓았다. 
“오늘은 11월 24일, 저의 기억에 의하면 제가 작년에 성에 가서 사업하게 되여도착한 날도 바로 오늘과 같은 11월 24일이였습니다. 다시말하면, 딱 1년 전인 작년 겨울에 제가 연변을 떠나게 되였습니다. 어쩌면 력사의 우연한 일치가 아닌가 싶습니다. 어느덧 제가 성에 가서 사업한 지도 벌써 옹근 1년이 되였습니다.”
“어제 저는 성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에 가서 사직보고서를 제출하였습니다. 오늘 오후에 성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에서는 저의 길림성 부성장 직무를 해임하는 결정을 채택하게 될 겁니다. 이렇게 되면 저의 길림성 부성장의 사명과 저의 연변주당위 서기의 사명도 오늘로 끝나게 됩니다. 작년에 연변을 떠나 성으로 갈 때 저는 저의 심경을 솔직하게 밝힌 바 있습니다. 저의 개인적 감정으로 말하면 저는 정말 연변을 떠나고 싶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연변은 저의 고향이고 연변의 당조직과 인민대중들이 저를 배양하였고 저를 교육하였기 때문입니다. 더우기 제가 연변에서 사업하는 기간에 주의 오랜 지도자들과 이 자리에 계시는 여러분들과 전 주 여러 민족 간부와 대중들이 저의 사업을 전폭적으로 지지해주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저를 아끼고 배려하며 저를 지지하고 저를 도와주었기 때문에 저는 그나마 당이 저한테 맡겨준 각항 사업임무를 원만히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동지들한테서 많은 것을 배우면서 지식과 재능을 키울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연변 200여만 여러 민족 인민들에게, 나아가 연변의 산천초목에도 심후한 감정을 지니고 있습니다. 연변은 저를 낳아주고  키워준 고장입니다. 저는 장백산기슭에서 태여나고 자라난 장백산의 토배기 아들입니다. 저는 고향을 사랑하고 고향의 사업을 사랑하며 앞으로 어느때 그 어디에 있거나를 막론하고 한평생 고향에 자기의 미약한 힘이나마 보태고 싶습니다.”
   리덕수는 그의 사업을 인계받게 되는 장덕강에 대하여 열정적이면서도 성근하게  높이 평가해주였다. 그 속에는 장덕강에 대한 자신의 간절한 기대도 들어있었다. 
    “장덕강동지는 연변 정황을 매우 익숙히 알고 있으며 연변 동지들도 장덕강동지에 대해 매우 익숙히 알고 있습니다. 장덕강동지는 대학문화수준을 갖고 있는 데다가 실천경험까지 갖고 있으며 기층사업경험이 있는 데다가 중앙사업경험까지 쌓고 있기에 덕재가 겸비하고 젊고 유망한 간부입니다. 장덕강동지는 수준이 있고 능력이 있으며 패기가 있고 과감한 개척정신이 있습니다. 장덕강동지가 어디에 가면 그 곳 사업이 곧 활기를 띠게 된다는 평판을 받으리 만치 능력 있는 간부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전임 서기로서 장덕강동지가 연변에 돌아와 사업하게 된 것을 마음속으로부터 더없이 기쁘게 생각합니다. 저는 이 자리에 있는 동지들과 전 주 여러 민족 간부와 대중들도 모두 장덕강동지가 연변에 돌아와 사업하는 것을 환영할 것이며 기필코 전력을 다해 장덕강동지의 사업을 지지하리라고 확신합니다.”
“오늘 여기서 연변은 소수민족지구이자 변강지구이므로 연변에서 변강의 안정과 민족단결 이 두 가지는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점을 다시한번 말하고 싶습니다. 민족단결이란 이 문제상에서 저는 단결은 곧 각오이고 단결은 곧 수준이며 단결은 곧 힘이고 단결은 곧 안정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단결하여야 발전할 수 있고 단결하여야 번영할 수 있으며 단결하여야 더욱 아름답고 찬란한 연변의 미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저는 전 주 여러 민족 인민들이 장덕강동지를 위수로 하는 연변주당위의 령도하에서 한마음한뜻이 되여 단결분투하면 기필코 더욱 휘황찬란한 성과를 따내게 되리라고 확신합니다!”
     리덕수가 주석대 맞은켠에 앉아있는 간부들한테 허리 굽혀 인사를 드리자 장내에서는 박수소리가 오래동안 끝이지 않고 터져나왔다. 그 박수소리 속에서 많은 사람들의 눈시울에 맺힌 이슬을 볼 수 있었다.  
     리덕수의 눈시울도 축축히 젖어들었다. 
 
 
                                                           (강룡운 번역)
 
 
 
 
 
 
 
[연변문학 2018년 12월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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