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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기록》제1집 -> 박규식 편

1. 겪어온 지난 세월
2020년 10월 08일 21시 56분  조회:389  추천:0  작성자: 기록
격어온 지난 세월

박규식



박규식
전 길림시계획위원회 당조서기 주임
전 길림시인대 부주임, 당조성원
전 길림시새일대관심사업위원회 주임


2008년12월 

     최근 나는 허리 병이 재발하여 병원에 입원하고 치료를 받았다. 퇴원후 병은 좋아졌으나 다리와 발의 움직임이 불편하고 걷는 것이 좋지 않아 실외활동도 할 수 없어 실내에서 조용히 쉬어야 했다. 책도 보고 텔레비전도 보나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지루하여 소파에 앉아서 눈을 감고 쉬었다. 인간이란 일단 일이 없으면 생각하는 일들이 많아지고 세상의 온갖 고초를 격은 지난 일들이 생각되는 것을 금할 길이 없었다. 아직도 펜을 들 수 있을 때 이런 것들을 기록하여 두뇌도 단련시키고 할 일이 없어 나타나는 공허함도 보충하며 자손들에게 선조들의 지나간 이야기들을 료해하는데 도움이 되여 이로서 쉽게 오지 않은 오늘의 행복을 더 소중히 여길 수 있다고 생각을 했다. 내가 이 글을 쓰자 하니 어디로부터 펜을 대야 할지 모르겠고 생각하고 생각한 끝에 력사의 순서 따라 자서전 형식으로 쓰는 것이 순리로울 것 같아 쓰기 시작했다. 생각이 나는 대로 쓰다 보니 인상이 비교적 깊은 것만 쓸 수밖에 없어 빠뜨린 것은 피면할 수 없고 어떤 것은 생각했지만 여러가지 사안으로 쓸 수 없기에 내용이 완전하지 않아 자서전이라고도 할 수 없다.

    지난 일들을 잘 서술하자면 일정한 문자수준이 있어야 한다. 내가 인식하기에는 문자실력은 고중졸업을 하면 기본적으로 정해진다. 나의 모어는 조선어이고 소학교부터 고중졸업까지 모두다 조선어로 수업을 받아서 한어문자로 배운 것은 없다. 대학교에서 경제학을 배우다 보니 무미건조한 경제학어휘만 배워 한어문자수준을 제고하는 데 큰 도움이 못 되었다. 마침 내가 쓰는 것은 문학 작품도 아니고 지난 일들을 회억하고 사실대로 쓰는 것이며 내가 겪었던 일과 사건을 진실 그대로 쓰면 되니 아주 높은 문자 실력이 크게 필요 없다.

나의 경력이 나와 비슷한 년령층에서 대동소이(大同小异)하여 별로 온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는 일은 없어 기록할 필요가 없지만 이런 경력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특히 나의 자손들에게는 신선한 일들이라 믿으며 여기에서 어떠한 개발을 받으리라 믿는다. 이는 바로 내가 ‘나의 지나간 이야기’를 쓰게 되는 초심이었다.


    1. 나의 가정사와 동년시기 

    자녀들을 많이 둔 가정

   1936년 7월 6일(음력 5월 18일) 나는 한국 경상북도(성) 의성군(현) 안평면(향) 창길 3리(촌)의 한 빈곤한 농민의 집에서 태어났다. 조부 박천수(朴天寿)는 5대 독자였지만 조모 리월금(李月琴)과 4남 3녀를 낳았으며 아버지는 셋째였다. 아버지대에 와서 아버지 박재성(朴在诚,另叫焕诚, 1892년-1970년), 어머니 리화로(李花露, 1893- 1961)는 도합 열두 자녀를 낳았다. 셋째 딸과 열둘째 아들은 일찍 숨지어 실제로는 여덟 아들과 두 딸을 두었는데 나는 열째 막내였다. 자손들이 성하니 박씨 선조들에게는 크게 좋은 일이였고 대대손손 이어가는 일은 좋은 일이었으나 빈곤한 사람에게는 근심걱정만 더해지는 걱정스런 일이었다. 이상하게도 나의 부모는 아주 빈곤했고, 빈곤할수록 자식들을 많이 낳으니 자식들이 많을수록 생활이 더욱 어려워졌다.

아버지는 일자무식이고 큰 키에 몸이 튼튼하고 특별히 고통과 어려움을 잘 견디었다. 매일 일찍 일어나 해가 저물 때까지 밭에서 일하고, 산에 올라가 화목을 지어오고 소나무 껍질이나 도토리를 주어왔다. 전 가족들의 밥을 굶기지 않기 위해 어떤 때는 20리 산간 오솔길을 오고 가며 돌아올 때 작은 자루에 좁쌀을 집에 가져 왔을 때는 이미 이튿날 새벽이었다. 



부모님 사진

어머니도 무식자였고 키 크고 곰보였으며 근면하고 재질이 총명하며 다른 사람들을 돕기 좋아했다. 가정이 곤난하고 의사나 약이 극히 없는 상태에서 열명의 자녀들을 키우고 풍부한 아동병을 치료하는 경험을 가지었다. 촌의 아이들이 병이 생기면 린근의 촌민들은 어머니를 불러 병을 보고, 어머니는 어려움을 무릅쓰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도와주어서 촌민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으셨다. 나의 어머니는 이 많은 아이들을 키우는 데 특유의 발명과 비결이 있었다. 아이가 배고파서 울 때 쌀겨술을 먹였다. 나의 형제자매들은 년년생이어서 먼저 난 애가 젖이 떨어지기 전에 또 하나의 아기를 낳아서 먼저 낳은 애가 손해를 보았다. 애가 젖을 달라고 할 때 어머니는 쌀겨술을 먹이니 애는 술에 취하여 잠이 드니 더 이상 시끄럽게 하지 않았다. 그런 다음 어머니는 손을 놓고 일하러 갔다. 그래선지 우리 형제자매들은 술령이 아주 길고 술령이 거의 자기의 년령과 비슷하였다. 우리 형제자매들의 위장은 다 좋지 못한데 어릴 적부터 술을 마신 것이 중요한 원인일 것이다. 나의 어머니는 손재간이 좋아 삼베와 솜베를 짜고 비단도 짰으며 이로 하여 온 가족의 입는 문제를 해결했다.

  우리 집 열 형제자매 중 큰누님 박달식은 출가후 20세기 20년대 말에 중국 영길현 오리하자향 백마부촌으로 이민했고 큰형님 박해식은 20세기 30년대에 목단강의 벌목장으로 가 로동자가 되였으나 1946년 여름 일본 관동군 “731”부대의 세균에 감염되여 상한병에 걸려 비명으로 죽었다(듣는 바에 의하면 한국의 독립운동에 가담했으나 고증된 바 없음). 둘째형님 박삼식은 막걸리공장에서 일하다가 1942년 일본놈들로 인해 사할린탄광으로 잡혀 가서 석탄을 캐는 힘든 일을 하였다. 셋째형님 박경만은 석탄을 캐는 일과 벌목을 하는 일을 하였으며 29세때 중국인민지원군에 입대하여 조선으로 가 전쟁에 참가하였다. 넷째형님 박종식은 석탄을 캐다가 1947년 민주련군에 가담하여 기관총수가 되였고 국민당군대와 포격전에서 불행하게 부상을 입고 장애자가 되여 귀가 먹었다. 둘째누님 박귀순은 한국 경기도 성남시에 있으며 다섯째형님 박춘식은 1946년 동북민주련군에 가담하여 장춘과 사평전역에 참가했고 항미원조에도 참가했다. 여섯째형님 박유식은 1951년 초 초중 2학년때 사업에 종사하여 시공안국에서 일생을 다 보내었다. 일곱째형님 박태식은 1950년 12월 열여섯의 나이로 중국인민지원군에 가담하여 항미원조에 참가했다.

   나의 시조는 아주 이름난 력사적인 인물로 박혁거세(朴赫居世)로서 그는 조선반도가 신라, 백제, 고구려 삼국이 병립되었을 때 신라왕조를 건립한 임금으로 박씨가족의 시조이며 나는 박혁거세의 31세 적손이다.

  한국 “삼국사기(三国史记)”에 의하면 여러 백성들이 여섯개 마을에서 살았는데 고헌촌장 소벌공이 양산기슭 나정 옆의 수풀 사이에서 말이 엎드려 울고 있음을 수상히 여겨 그 말이 우는 곳으로 달려가 보니 말은 어디론가 달아나 보이지 않고 그 자리에 커다란 알이 하나 놓여있었다. 그 알을 깨 보니 그 속에 어린아이가 들어있는지라 기쁨을 이기지 못하고 집에 데려다 길렀다. 나이 10살이 되자 기골이 장대하고 숙성하여 비범한 재질이 있으므로 여섯개 촌사람들이 신기하게 여겨 오던 중 이때에 이러러 그를 임금으로 추대했다. 진한 사람들은 호(瓢)를 박이라 하였는데 그 알의 크기가 박만한 크기였다 하여 성을 박이라 하였고 이름을 혁거세라 하였다. 아버지는 늘쌍 자기는 “량반(문 무 량반(两班), 고귀한 신분을 가진 자를 말함)”이라 하면서 향촌 촌민들도 아버지를 존칭하여 “양도어른(阳道大人)”이라 불렀는데 아마 이런 연유로 그런 것 같다.

   이름난 가세의 우리 집이지만 풍자적인 사실로 이미 아주 가난한 집으로 전락했다. 내가 태어난 집은 세칸짜리 초가집으로 편벽한 산골짜기에 자리 잡고 있었다. 산비탈에 지은 집으로 뒤는 산이고 소나무가 가득 자랐고 집 앞에는 면(향)으로 가는 작은 길이 있으며 좀 더 앞으로 가면 작은 냇가가 흐른다. 

   2007년 5월, 내가 한국려행을 가는 기회에 처음으로 출생지를 찾아갔다. 초가집은 그대로인데 너무 낡고 볼품이 없으며 서쪽의 감나무는 모두 베여버리고 동쪽의 우물도 메꾸어서 처량하고 가엾는 꼴이었다. 집에는 3-4무의 밭이 있었는데 척박한 땅이라 일년 고생을 하여도 공량을 바치고 나면 얼마 남지도 않았다. 살아가기가 무척 힘들어 해마다 좁쌀과 나물죽을 먹었다. 1942년-1943년에 한국에서는 큰 흉년이 들었다. 마침 대동아전쟁시기여서 전쟁의 수요로 일본인은 농민들의 손에서 전부의 량식을 략탈하고 집들마다  굴뚝 연기가 거의 나지 않았다.



아버지의 회갑연

   그들은 어떤 집에서 굴뚝 연기가 나는 것을 발견하면 달려와서 솥에다 재를 뿌리거나 아예 솥을 부셔버렸다. 그리고 솥과 동그릇, 동수저들을 빼앗아갔다. 우리 집은 좁쌀 야채죽도 먹지 못하게 되자 겨와 나물로 만든 떡이나 상수리나무 가루로 만든 음식, 소나무 껍질이나 풀뿌리, 그리고 야채들을 먹었다. 하여 거러지가 욱실거렸고 굶어 죽은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학교로 가는 길가 보리밭에 적지 않은 굶어죽은 사람을 나는 직접 보았다. 손에는 금방 싹이 튼 보리를 움켜쥐고 입에는 아직 넘기지 못한 푸른 보리대가 보였다.

   1943년 봄, 위만주국 황제 강덕(康德)이 이미 곰팡이 낀 두병을 한국에 구재한 일이 있었다. 소식을 듣고 두병을 나누어주는 그 날에 나는 3킬로미터나 되는 촌공소까지 뛰어가서 사람들이 주의하지 않는 틈을 타 곰팡이 낀 두병 한줌을 훔쳐 먹었다. 생각밖에 촌간부에게 발각되어 욕질을 당하고 손과 발로 때리고 차던 일들이 오늘까지도 눈앞에 생생히 기억된다.

그때 입는 옷은 어머니가 베틀로 짜준 옷인데 그것마저도 깁은 옷이고 팬티와 러닝셔츠도 없어 잠을 잘 때 옷을 벗으면 알몸으로 이불에 쏙 들어갔다.

   1943년 1월 나는 면(향)에서 유일한 소학교-안평면국민우급소학교에 입학했다. 학생래원은 많고 모집학생은 적어 면접시험에 합격해야 입학할 수 있었다. 학교와 우리 집은 3킬로미터 거리인데 여름에는 맨발로 학교를 다니고 겨울에는 아버지가 만들어준 짚신을 신고 다녔으며 점심은 거의 굶었다. 선생님의 성은 이토(伊藤)인데 내가 공부를 잘했기에 나는 반장이었다. 일어로 수업하고 학교내에서 조선말을 하지 못하게 했다.

   주의 부족으로 조선말을 하는 것이 발각되면 욕질이나 벌책을 받아야 했고 중할 때는 매를 맞기까지 했다. 학교에 들어가면 일본성을 가져야 했는데 나의 이름도 아라이게이쇼크(新井奎植)였다. 매일 아침 학생들을 운동장에 모아놓고 일본이 있는 동남방을 향해 “천조대신(天照大神)”에게 제배를 하는 굴욕을 받아야 했다.

  아버지의 결정 

  1942-1943년 큰 재황으로 많은 사람들이 타지방으로 피난 갔다. 살기 위해서 고향 사람들은 고향을 등지고 일본이나 동남아나 더 많은 난민들은 만주(동북)로 피난 갔다. 이때 아버지는 과감하게 만주로 가는 중대한 결정을 했다. 아버지의 결정은 두가지 근거가 있었는데 일찍 만주로 간 큰 누님이 있어 첫 자리를 마련하는 기반이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 리유는 다섯째형님이 16세로서 병역년령이 되었기에 병역이란 무서움을 피하는 것이었다. 아버지의 이 중대한 결정은 나의 전도와 운명을 결정하고 내가 위대한 중화민족의 일원이 되게 한 큰 일이었다. 아버지의 이 결정이 없었더라면 나는 굶어죽는 귀신이 될 번 했고 설사 굶어 죽지 않아도 결코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는 없었다. 이는 나에게 큰 행운이며 큰 재난이 큰 희사로 되게 했으니 이것 역시 운명이 아닐까?



내가 출생한 집 앞에서

1944년 초봄, 대략 3월말이나 4월초쯤 되었다. 아버지는 초가집과 몇 무 안 되는 척박한 밭을 오 씨라는 옆집 사람에게 맡기고(피난 갔다가 다시 돌아올 생각을 했기에 집과 밭을 팔지는 않았다.) 전 가족을 데리고 만주로 갔다. 우리가 20킬로 산간 작은 길을 가서 안동렬차역에 도착했다. 안동역에서 렬차를 타고 서울-평양-신의주-봉천(심양)역에 도착하여 심양역에서 심길(심양-길림)기차를 타고 영길현 구전에 도착했다. 큰 누님이 있는 곳으로 가는 길은 울퉁불퉁한 마차길이고, 해동시기여서 길의 표면층이 녹았지만 밑은 아직도 얼음판이여서 질쩍하고 미끄러웠다. 그 해에 동북에는 많은 눈이 내렸고 얼음이 녹은 물도 많아 도처에 길은 봉쇄되였다. 이틀 동안 기차에서 흔들리며 지내다 보니 이미 극도로 피로하였고 설상가상이었다. 구전에서 두시간 걸으니 이미 점심시간이 되여 배고프고 목도 마르며 너무 힘겨워 발을 떼기도 힘겨웠다.

   우리는 관마산(官马山)의 한 농민 집에 들어 손짓 발짓을 해가며 물을 좀 달라 했다. 이 농호는 한족집으로 우리가 입은 옷을 보고 한국에서 피난 온 사람이라고 정확히 판단했다. 이 농호는 물을 끓이고 큰 쟁판에 따끈한 기장쌀경단을 손짓으로 배부르게 먹으라고 열성적으로 우리를 대해 주었다. 내 평생 처음으로 대민족인 한족과 대국인의 기질을 느끼였고 처음으로 한족 음식문화를 체험했다. 한국에서는 더운 물을 마시는 습관이 없고 직접 랭수를 마신다. 특히 기장쌀경단은 말똥 같은 색갈이고 발효하여 만들었기에 쉰 냄새가 코를 찌른다. 기아에 허덕이던 나였지만 경단을 입에 넣고 먹어보니 먹기 힘들어 한입도 먹지 못했다.

휴식후 계속 갈 길을 걸었는데 나는 기장쌀경단을 “말똥알”이라고 비꼬아주었다. 길에서 웃고 떠들며 저녁이 되어서야 큰누님 집에 도착했다. 이미 온다는 소식을 접한 큰누님은 저녁밥을 지어 놓고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배를 굶은 나는 게걸스럽게 먹고 밥상을 물리기 전에 그 자리에서 넘어져 자버렸다. 너무나 힘들고 피로 해 밤에 일어나지 못하고 온돌방에 오줌지도를 그려 부끄러웠는데 그때 내 나이가 여덟살이었다.

   백마부(白马夫) 촌은 모두 30여호가 살았는데 몇십헥타르의 밭이 있지만 우리 나라 동북에는 이 촌은 자그마한 촌에 불과했다. 그러나 편벽한 산골에서 온 나에게는 광활한 천지처럼 보여 눈이 번쩍 뜨이었다. 백마부에 도착하니 우리 집은 이름 그대로 집도 없고 땅도 없는 알거지였다. 돈이 없어 집도 임대할 수 없어 전 가족이 큰 누님의 북측 온돌구들에서 옹기종기 잠을 자야했고, 땅이 없어 지주의 몇무 수전을 임대하여 농사를 지었다. 가을이 되어 세금을 주고 공량을 내고나면 남은 량식이 거의 없어 생활은 아주 곤난하고 어려웠다.

   나는 오리하중심소학교에서 소학을 다녔다. 백마부와는 4킬로미터 거리이다. 학교 다닐 때 점심밥은 거의 없었고 어떤 때는 누룽지를 조금 가져갔으며 여름에는 맨발로, 겨울에는 아버지가 삼은 짚신을 신고 학교를 다녀야 했다. 한국에 있을 때나 엇비슷했다. 다르다면 동북은 기후가 너무 추워 짚신을 크게 만들어 신에다 벼짚들을 쑤셔 넣고 헌 천으로 발을 싸매어 보온효과를 보는 것이다(우라신을 신는 것과 흡사함). 하학후 집에 오면 벗은 짚신을 부뚜막에 말리워 이튿날에 신었다. 

   1944년 겨울, 춘절 때가 다가오자 마을의 아이들은 다 새 헝겊신을 신어서 너무도 부러웠다. 나는 아버지에게 헝겊신을 사달라고 졸랐다. 아버지는 아무른 내색도 내지 않았다. 속이 탄 나는 여러번 졸랐지만 아버지는 여전히 꼼짝하지 않았다. 어느 하루 아버지에게 끝장지기로 헝겊신을 안 사주면 학교를 가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큰 일을 저질렀다. 노기찬 아버지는 나의 옷을 몽땅 벗겨놓고 회초리로 때린 후 알몸둥이인 나를 창밖 눈 내린 땅에 던져버렸다. 너무 놀라고 얼어버린 나는 기절을 했다.

   3일 만에 내가 깨어났다. 아버지가 내 옆을 지키고 있다가 눈을 뜬 나를 보더니 눈물이 글썽해서 “깨여났다!”고 소리 질렀다. 이 세상에 그 어느 부모가 자기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도리가 있는가? 이 일은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받은 가장 호된 처벌이었고,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는 만악의 구사회를 공소하고 규탄하는 일이었다. 이 일은 나의 일생동안 잊을 수 없는 일이고, 너무나 아버지에게 미안하며 너무 철모르는 일이었다. 그때 내 나이는 여덟살에 불과했다.

   1946년 여름에 나는 아버지와 형님을 따라 논에 나가 일하고 점심은 집에 와서 먹었다. 집으로 오자면 강을 건너야 하는데 강은 깊지는 않으나 물살이 세고 물속의 조약돌은 푸른 청태가 끼여 아주 미끄러웠다. 강을 건널 때 배가 고파 다리에 힘이 없었다. 게다가 불조심으로 청태 낀 조약돌을 밟아 넘어지고 말았다. 키 작고 몸도 약해 물속에서 30메터나 떠내려갔다. 형님이 발견하고 쫓아 와 나를 구해주었으나 숨이 막히고 너무 놀라 기절해 며칠 동안 깨어나지 못했다. 그때 내 나이는 열살이었다. 두 차례나 죽음의 문턱에서 시대의 불행한 아이를 가엽게 여긴 사신(死神)은 나를 계속 아름다운 인간세상에 남겨놓았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었다.



63년 만에 모교 방문

   1945년 8월 일본제국주의가 투항을 했으니 우리의 고난은 곧 끝을 보게 되리라 여겼는데 실은 이렇지 못했다. 일본은 투항했어도 사회질서는 여전히 혼란하여 무정부상태였다. 각종 검은 세력들이 기승을 부렸고 백성들의 리익에 해를 끼치는 각종 도적무리들이 욱실거렸다. 그들은 농가의 돈과 량식을 략탈하고 부녀자들을 강간하며 사람을 죽이고 불을 질러 사람들은 공포에 빠졌다. 도적을 막기 위해 촌마다 청장년들을 집중하여 저녁에 순시하며 촌을 지켰다. 창을 만들어 자기를 보호하였지만 로인, 부녀와 아동들은 마른 도랑에 숨어 밤을 지새웠다.

   국내해방전쟁시기 우리 집 고향은 국민당군대와 민주련군이 왔다갔다하는 곳이었고 투쟁은 아주 잔혹하고 결렬하였다. 국민당군대가 오면 우리는 집과 15킬로미터 먼 조양보에 있는 작은 촌으로 피난했다. 국민당군대는 촌에 와서 못하는 짓이 없었고 1947년 초 우리 촌의 여섯명 농회간부를 잡아 옷을 몽땅 벗기고 눈길에 끌고 다녀 얼어서 다리가 굳어 걷지 못하니 모두 총살했는데 그중에 나의 친척도 한 명 있었다. 우리 군이 적을 물리치자 촌민들은 촌으로 돌아왔으며 전선을 지원하고 토지개혁을 실시했다.

   1946년 우리 촌에서는 공산당의 령도하에 농회를 건립하고 회장은 산동사람인 왕조공(王兆恭)이었다. 농회는 우리 당의 기층정권으로 전선을 지원하는 외에 군중들을 발동하여 토지개혁을 실시하고 성분을 매기고 지주와 부농을 투쟁하며 밭과 집을 분배했다. 우리 집은 빈농으로 획분되였고 열몇무의 비옥한 밭을 분배 받았으며 큰 집도 분배받아 4년에 네차례 집을 옮겨야 하는 류랑생활을 종결했다. 농회는 민병, 부녀조직과 아동단 등 많은 조직이 있었는데 나는 아동단 단장이 되였다. 그때 나이가 10세였다. 아동단원들은 손에는 붉은 숱이 달린 창을 들고 허리에는 나무로 만든 권총을 차고 촌락의 각 도로입구에 서서 보초를 섰다. 통행증을 검사하고 지주와 부농을 투쟁하며 혁명노래들을 배우고 불렀다. 그리고 게으른 자를 적발하고 부녀들을 해방시켰다(구사회 일부 다처제의 첩들을 해방하는 일). 농회는 아동단의 사업을 지지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말썰매 한대를 주었다. 자랑스런 일은 통행증을 조사하다가 국민당정탐을 잡아 농회에서 처리하게 한 일이다.

  1948년 3월, 길림시가 해방되자 우리 아동단의 사업도 결속되었다. 나는 아동단에서 2년이라는 세월을 보냈으나 안타깝게도 조직에서는 혁명사업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할 수 없는 일이다.

(다음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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