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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기록》제1집 -> 박규식 편

2. 학생시대
2020년 10월 08일 21시 59분  조회:427  추천:0  작성자: 기록
2. 학생시대
 
학생시대는 지식이 증가되고 능력을 키우는 시대이다. 나는 비교적 좋은 학교에서 비교적 좋은 교육을 받았다.  
 
길림시조선족중학교에서 
 
길림시조선족중학교는 길림시가 해방후 얼마 안되어 일부 조선족 저명인사들이 돈을 모아 건립된 민반학교였고 건국이후 공반학교로 되었다. 길림조중은 1949년 4월 1일에 건립되였고 지금 길림5중 자리였다. 당시 전 시에서 한개 조선족중학교였기에 모집하는 학생수는 적고 입학하려는 학생은 많아 시험을 치르고 입학했다. 1951년 1월 나와 기타 학생들은 20킬로미터를 걸어서 구전에서 기차를 타고 길림조중에 와 시험을 치렀다. 입학하는 데는 별 문제가 아니었다. 나의 학습성적은 반에서 늘 1등을 했으며 1950년도 전 현의 통일시험에서 성적이 앞자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성적을 공포하는 날에 학생들은 길림조중에 가서 입학되었는지를 확인했으나 나는 우리 집에서 나를 공부시킬 지가 걱정되었다. 입학상황을 보고 온 애들이 내가 입학되었다고 알려주어도 기쁘지도 않았다. 부모님도 걱정스런 모습이었다. 해방후 우리 집은 생활수준이 좀 높아지기는 했지만 형님들이 모두 참군하여 농사일은 늙으신 부모님이 하다 보니 생활이 넉넉하지 못하고 어려웠다. 거기에다 여섯째형님이 길림조중에서 공부를 하기에 한 집에서 두 학생의 공부를 책임진다는 것은 너무나 벅찬 일이었다. 
 
개학이 가까워오자 어느 날 늦은 저녁에 여섯째형님이 길림에서 집으로 와 아버지를 설득하고 자기는 퇴학하고 나를 공부시키는 조건으로 아버지가 동의하였다. 이로하여 나는 중학교 문을 두드렸다. 학교 기숙사에 가보니 기숙사조건은 너무나도 한심하고 40-50명의 학생들이 한 침실을 써야 했다. 잠자리는 두층인데 벼짚으로 만든 짚방석이었고 석탄난로를 지피고 저녁에 난로가 꺼지면 온도가 급강하여 추위에 잠에서 깨어나기도 했다. 
 
당시 항미원조 시기라 저녁에 경보소리가 나면 잠결에 깨어나 방공동굴에 가서 추위에 떨어야 했다. 어머니가 손수 만든 광목이불을 덮었는데 이불 하나로 나와 형님이 같이 사용하니 늘상 발이 이불 밖에 나왔다. 이때는 나의 손과 발이 얼어들었고 엄중할 때는 마치 잘 익은 도마도 같이 부었으며 가려워 부주의로 긁으면 누런 물이 나기도 했다. 형님은 나를 계속 공부시키기 위해 퇴학하고 사업에 종사했다. 이로부터 나 혼자 쓸 수 있는 이불이 생겼다. 평시 먹는 것은 수수밥에 붉은 콩이었고 채는 무우, 배추국이었다. 화식을 개선할 때는 수수쌀에 입쌀을 섞어지은 밥이며 돼지비계를 좀 넣어 끓인 배추국이었는데 한달 화식비는 7.50원이었다.
 
우리 집 생활이 곤난하여 학교에서는 매달 3원치의 조학금을 주었는데 이 돈이 바로 나의 한달 화식비와 생활비였다. 1952년 모내기를 하는 계절에 나는 반의 곤난한 학생 몇사람과 연통하여 청가도 하지 않고 교구 이도향 어느 농가 집에서 일을 해주었다. 한무의 벼모를 꽂으면 3원을 벌었다. 우리는 농가집에서 먹고 자고 하며 매일 해가 뜨기 전에 일어나서 해가 질 때까지 일하다 보니 하루에 네댓시간 밖에 자지 못했다. 내가 어릴 때 늘상 수전에서 일하다 보니 경험이 있고 일할 줄도 알아 40여원을 벌었다. 비록 힘들고 곤한 일이지만 돈을 탈 때 그 기쁨은 말할 때가 없었다. 학비문제가 해결되니 실학하지 않았다. 학교에 돌아오니 큰 일이 났다. 학교의 흑판보에 뚜렷하게 통고가 붙어있었다. 일하러간 학생들에게 엄중경고처분을 내렸는데 내 이름이 제일 앞에 있었다. 중국공청단 단원이고, 학생회 초중분회 간사이고 소선대 대대장인 내가 학생을 조직한 고수였기에 수악자를 처분하는 것은 당연한 처사였다.
 
1953년 7월 학제개혁이 되며 2년반 만에 조중을 졸업했다. 승학시험을 치던 날 끝이 보이지 않는 비가 내릴수록 더 크게 내려 큰물이 났는데 이것이 바로 1953년의 대홍수였다. 기차도 멎고 많은 길과 다리는 물에 쓸려갔다. 학교는 방학기간이라 식당문이 닫히고 돈도 얼마 남지 않았다. 그렇다고 기다리고만 있을 수 없어 나는 촌에서 온 두 학생과 걸어 집으로 가려했다. 학교에서부터 백마부까지 45킬로미터였는데 우리 셋은 일찍 일어나 행장을 메고 길을 떠났다. 
 
여름의 땡볕 아래 온 몸은 땀으로 젖었고 행장은 갈수록 무거워 혼탁한 도랑물을 마시고 굶으며 한 발자국 한 발자국 걸어 집에 도착하니 저녁이었다. 집에 가보니 두 발에는 물집이 나고 두 어깨는 행장끈에 깊게 파여서 몹시 아팠다. 이렇게 나는 초중생활을 마치고 고중시험에 합격했다. 1953년 9월 개학은 했지만 집이 너무 곤난해 제때에 학교를 가지 못하고 한달 이상 집에 머물렀다. 우리 촌의 고3학생인 허진해가 우리 반주임 김창수 선생님의 부탁을 받고 우리 집에 와서 아버지를 설득하여 비로소 고중공부를 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나는 김선생님과 허선배에 대해 감지덕지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나 김선생님은 조선으로 가고 허진해는 외지에 계셔 감사의 정을 표달할 기회가 없었다.
 
내가 고중을 다닐 때 길림조중은 규모가 크고 학생숫자도 1700명에 달했다. 길림시 뿐만 아니라 성내, 성외에서도 학생들도 오는 바람에 기숙하는 학생이 1500명에 달했다. 학생들의 교내외 생활을 잘 관리하기 위해 학교에서는 두개 학생조직을 설립했다. 하나는 학생회이고 다른 하나는 기숙사 사감실이다. 학생회는 학생들의 공부할 시간인 낮일을 책임지고 사감실은 하학후 기숙사를 관리하는 일이었다. 어떻게 보면 사감실의 일들이 학생회보다 더 번중하고 구체적이었다. 학교 령도는 덕망이 높은 김성묵 선생님을 사감으로 모셨다. 고중학생들 중 5-6명 학생을 선발해 사감실을 구성하고 사감선생님의 령도하에 기숙생들의 저녁 자습, 아침 체조, 위생, 화식과 안전 및 규률을 책임지고 관리했다. 내가 고중 1학년때 학교는 나를 지명하여 사감실에 가서 위생을 책임지고 저녁자습 후 출석부를 부르는 일을 고중 졸업할 때까지 했다. 기숙사는 전문 한 침실을 비워 사감실로 만들고 우리 몇 학생 간부들이 함께 먹고 자며 다른 기숙생보다 생활이 좋았다. 사감실은 단독으로 밥을 타오고 주방 아저씨들도 잘 대해 주어서 다른 기숙생들보다 먹는 것이 좋았다.
 
           
고중 2학년때 모습을 담은 사진                 


고중 졸업 사진
 
나는 학교에서 장기 놀기를 좋아했지만 체육과 문예활동은 좋아하지 않았다. 장기를 두는 것은 아버지로부터 배웠는데 처음 놀 때는 아버지에게 늘 졌으나 오래 놀다보니 익숙해져 나의 기술은 급속도로 성장하며 아버지를 이길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어른들과도 겨루게 되면서 장기수가 늘어 오리하에서는 명성이 꽤나 높은 편이였다.
 
중학교에서도 이런 애호가 있어 선생님들과 장기를 두었고 인이 박혀 학기 중간시험은 물론 지어 기말시험 전에도 기회가 있으면 시험준비를 하지 않을망정 장기만은 몇판 두었다. 체육운동은 나의 약한 종목으로 초중때는 키가 너무 작아 늘상 첫줄에 앉았고 몸도 너무나 야위어 체육시험은 겨우 합격이었다. 이상하게도 고중 3학년이 되니 키가 커지고 운동세포도 급성장했다. 전교 운동대회에서 높이뛰기와 멀리뛰기에서 1등을 했다. 높이뛰기에는 1.60미터, 멀리뛰기는 5.80미터였다.
 
1956년 상반년에는 대학시험 전이었다. 본기졸업생들은 대학시험 전에 총복습을 하였지만 나는 학교 체육대표대에 선발되어 시 중학생 운동대회에 참가해야 했다.
 
오전에는 복습을 하고 오후에는 집체로 운동훈련을 했다. 비가 내려 5월에 하기로 한 운동대회는 6월 중순으로 미루었다. 이번 운동대회는 나에게 큰 손실을 주었고 운동대회에서의 성적도 평시 훈련 성적에 미달했다. 더욱이 복습에 영향을 주었으며 대학시험성적에 직접 영향을 주었다. 
 
나는 예술세포가 없어서인지 노래, 춤 등에는 흥취가 없었다. 고중 3학년에 올라가니 생각 밖에도 학교에서 문예회연을 하게 되였는데 매 반에서 문예종목을 내놓으라고 했다. 내가 있는 고중 3학년 6반은 화극종목(话剧节目)을 내었는데 어문선생인 김서량(金曙良) 선생님이 편극하고 인물을 물색하고 감독까지 맡았다. 극의 주제는 어느 중학교 졸업생이 당의 호소를 받들어 농촌에 뿌리 박고 빈하중농과 잘 어울리는 길을 선택한 이야기이였다. 생각 밖에 김선생님은 나를 졸업생 아버지 역을 하라고 했다. 내가 성숙되어 보이고 늙은이 역할을 하는데 맞춤하다고 생각했다. 김선생님의 지도하에 한달 넘게 무대련습을 하여 회보공연에서 우리의 화극이 출연되었고 일등상을 탔다. 우리가 이런 영예를 가지게 된 것은 우리들의 연기수준이 높다기 보다 정치사상을 강조하는 그 시대의 정신에 초점을 맞춰 정치성과 사상성을 돌출히 한 결과였다.
 

중국인민대학에서
 
중국인민대학은 1937년 섬북공학(公学)의 기초에 화북련합대학과 합병되여 세워진 학교이고 우리 당이 건립한 첫번째 대학이며 우리 나라 문과류 종합대학 중 최고 학부이다. 교장은 모주석께서 존칭하는 “5로”중의 한분으로 저명한 교육가인 오옥장(吴玉章)이었다. 교원으로는 하천지(何千之), 상성(尚鋮) 등 당사 권위들과 쏘련 전문가들이 양성한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였다. 
 
1955년 전에 반수 이상의 학생들은 조직에서 배치한 사람들이다. 그중에 적지 않은 사람은 현(퇀)급 직무의 령도간부들이며 전국인민대표, 전국정협위원 그리고 각종 전선에서 온 영웅 모범들도 있었다. 례하면 학건수(郝建秀), 고옥보(高玉宝), 고아도(顾阿桃)등도 있었다. 학교는 주요하게 당의 리론간부와 사회주의건설 관리인재 양성에 초점을 맞췄다. 졸업생이 제일 많이 취직하는 곳은 중앙직속기관이었다. 인민대학의 졸업생이 사(司,局)급 간부는 상당한 비중을 차지했고 적지 않은 사람들은 성(省,部)급 령도직무를 맡았으며 개별적인 사람은 국무원 령도직에 오르기도 했다.
 
1956년 학생 모집 때 조직에서 배치한 사람외에 본기졸업생도 모집했다. 우수학생을 모집하기 위해 1956년 7월 1일, 중국인민대학은 전국 범위에서 사전에 단독으로 학생 모집을 했다. 7월 10일 각 성 신문에 합격자 명단을 공포하고 합격되지 못한 학생은 7월 15일에 전국통일시험을 보아야 했다. 이 때문에 중국인민대학에 지원하는 학생이 아주 많았는데 문과생들은 한번 시험해 보자는 마음으로 인민대학에 입학지원을 했다. 길림조중를 보아도 졸업생과 재직교원들까지 합하여 신청자가 수십명이나 되였으며 문과생들은 거의 다 신청했다. 인민대학은 길림성에 두개 시험장를 설치했는 바 하나는 장춘이고 다른 하나는 길림이다. 길림시험장에는 길림시외에 통화와 연변지구에서 온 수험생을 대상으로 했다. 기타 지역의 시험생은 장춘에서 시험을 보았다. 
 
인민대학은 길림시험장에서 20명을 모집하였고 나의 시험번호는 600번호가 되었으니 얼마나 치렬했는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희망이 아주 희박한 것을 뻔히 알면서도 뛰어든 것은 두렵지 않았다. 한것은 합격되지 못한다 하더라도 전국통일시험에 참가할 수 있었기 때문이였다.
7월 1일 오전, 제때에 시험장에 도착해 오전에 어문시험을 치르게 되였는데 시험지를 보는 순간 눈이 휘둥그레졌다. 거의 한 문제도 알 수 없었는데 지금까지도 두개 문제만은 인상 속에 뚜렷히 남아있다. 하나는 고문(古文)을 백화문(白话文)으로 번역하고 표점부호도 써야 했다. 고문을 백화문으로 하는 번역은 아예 하지도 못했고 표점부호는 매 구절의 고문 뒤에 빈자리가 있는 곳에 모두 쉼표(逗号)를 쓰고 한구절이 끝나면 마침표를 찍었다. 다른 하나는 "고무되는 한가지의 일(一件令人鼓舞的事)"이란 제목으로 작문을 쓰는 것이었다. 나는 당시 공사합영의 배경을 두고 작문을 지었다. 정치, 사상성을 강조하는 당시의 년대에 이렇게 쓰면 제목 주제를 리탈하지 않으리라 생각했고 시대의 요구에 순응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어떤 글자는 몰라 병음자모로 글자를 대신했다. 내가 인민대학에 입학하여 우리 학부의 비서인 형로(邢路) 선생님이 나의 어문 대학 입학성적은 24점이라 했다. 소학교부터 고중졸업할 때까지 조선족학교를 다닌 나로서는 쉽지 않은 일이였다. 이번 대학입시시험은 내가 공부를 하기 시작한 후로 제일 나쁜 시험이어서 나는 실망하고 입학을 하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7월 10일 길림일보에 입학 소식을 발표하는 그 때 나는 신문을 보지도 않았다. 어떤 학생들이 신문에서 내가 입학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기뻐 나를 찾아 왔을 때 나는 롱담으로 들으며 믿지 않았다. 내가 내 눈으로 신문을 보고서야 비로소 믿었다. 후에 안 일이지만 내가 입학할 수 있었던 주요 원인은 수학성적이였다. 내가 신청한 학과는 농업경제여서 경제류는 일반 문과와 달리 수학시험을 치러야 했다. 총점은 120점이였는데 나는 대학시험에서 아주 높은 성적을 따내였다. 높은 점수를 맞았기에 각 과목 평균점수가 68점이였다. 입학되였다는 소식을 접하고 이튿날 학생모집 책임자 송덕민(宋德敏,길림성 유수(榆树)사람으로 일찍 직업에 종사하고 농업경제학부 학부 부주임이며 후에 전국정치협상회 부비서장, 비서장을 담임했다)을 찾았다. 송 선생님은 열정적으로 나를 대해주면서 나에게 축하하고 입학통지서와 북경으로 가는 차비를 주었다. 그 기쁨은 말로는 이루 다 표현할 수 없었다. 
 
대학에 가게 되니 부모님은 더 말리지 않았다. 1956년 8월 말, 나는 길림에서 기차의 일반석에 올라 32시간 동안 부대끼며 북경의 영정문(永定门)역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려 신입생을 영접하는 선배 동학들의 인솔을 받아 장자충로 철사자호동 1호에서 입학등록을 했다. 인민대학은 철사자호동, 해운창과 서교 3개의 캠퍼스를 갖고 있었다. 수속을 끝내고 교구캠퍼스로 가보았다. 이 캠퍼스는 제일 큰 캠퍼스로 토지 점유 면적이 100헥타르에 달했으며 해전구(海淀区)에 속했다. 북측은 북경대학과 청화대학이고 남측은 북경공업학원, 중앙민족학원과 린접한, 환경이 우아하고 학습하기 좋은 곳이였다.
 
4년이라는 학습이 시작되였다. 우리 학년에서는 100여명의 신입생을 모집했다. 4개반으로 나누었고 나는 2반에 속했다. 우리 반에는 조국의 각 지역 방방곡곡에서 모여온 재직간부, 본기졸업생에다 쏘련과 윁남에서 온 3명 류학생도 있었다. 조건은 좋지 못했고 우리 숙소는 북측에 있는 4호 기숙사 2층 회색 벽돌집이였다. 6명이 한 침실에서 지내며 두층으로 된 침대가 마련되여있었으며 겨울에는 석탄난로불을 지펴야 했다. 화식은 아주 좋았다. 입쌀과 밀가루를 위주로 매끼마다 2-3개 주식에 부식도 좋았으며 매일 고기료리가 있었다. 화식을 개선하는 때는 밥과 채가 더욱 풍성했다. 중학시절과는 비할 수 없이 훨씬 좋았고 수수쌀 밥, 배추, 무우국을 먹을 우려가 없어졌다. 곤난한 학생에게 매달 16원 50전의 보조금을 주었으며 화식비 12.5원을 삭감하고 나서도 4원이 남았다. 그 돈을 학용품과 영화표, 목욕과 리발 등에 사용했다. 매 학생들에게 휴대용 접이식 의자가 주어졌으며 이는 광장에서 영화를 보거나 보고를 청취하는 데 사용되였다. 
 
 

중국인민대학에서             



졸업사진
 
    대학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언어관이였다. 처음 대학에 와서 이런 웃음꺼리가 있었다. 한반의 장지견(张志坚)을 윁남 류학생으로 보았다(장지견, 초웅(楚雄)인이고 생김새가 광동사람 같았으며 말투가 우스꽝스러웠다. 학교때는 반급단지부 서기였고 졸업후에는 선후로 인사부 상무부부장, 중편판공실 주임과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내사위 부주임위원<内司委副主任委员>). 1956년 국경절이 되어서야 반에서 문예오락이 있을 때 비로소 그가 한족임을 알았다. 처음으로 식당에 가서 밥을 먹을 때 학생들이 밥그릇을 들고 식당으로 가는 것을 보고나서야 나는 비로소 그들을 따라 식당으로 갔다. 그렇지 않고는 나는 식당으로 갈 수 없었다. 제일 곤난한 일은 수업을 듣고 필기를 하는 일이였다. 대학수업은 많은 학생들이 한꺼번에 수업을 했다. 전 학년의 100여명 학생들을 큰 교실에 집중해 수업을 듣고 필기를 했다. 우리들에게 정치경제학과 맑스-레닌주의 기초과는 모두 남방 에서 온, 표준어를 구사할 수없는 선생님이여서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었고 필기도 불가했다. 학교에는 강의책도 주지 않았고 필기를 못하니 복습도 할 수 없었다. 학부 령도들이 이 일을 발견하고 특수한 조치를 내렸다. 하학후 3명 류학생과 나를 학부판공실에 불러다가 표준어를 할 줄 아는 선생님이 우리 네 학생에게 다시 한번 수업을 반복했다. 잘 알아듣지 못한 것은 선생님께 물어보며 학습 곤난을 해결했다. 따라서 내가 류학생의 대우를 받은 셈이다. 초기에 어떤 학생들은 내가 조선 류학생으로 착각했다. 기말시험에서 정치경제학과 맑스-레닌주의 기초과는 시험을 답변 형식으로 치렀다. 학생들이 시험장에 들어간 후 높이 쌓은 시험지에서 임의로 한장을 뽑아서(시험문제는 학과의 모든 내용이 포함되었으며 보통 한개의 큰 문제, 한 개의 작은 문제로 되여있었다) 지정한 곳에서 20분간 기다렸다가 시험관에게 답변을 하고 점수를 주었다. 시험관은 학부 주임이나 교수, 수업을 맡았던 선생들로서 학생이 답변할 때 답이 완전하지 못하거나 틀린 것이 있을 때는 시험관이 문제를 제출해 학생이 답하게 하거나 변론을 하였다. 
 
시험생이 첫번째 뽑은 시험문제가 자신이 없으면 다시 한번 시험문제를 뽑을 기회를 주었다. 그러나 하나도 틀린 것이 없어도 점수 1점을 깎았다. 나는 불안한 마음으로 시험장에 들어갔다. 운수가 좋아 두번 뽑은 시험지가 내가 아는 문제여서 두 과목 모두 5점을 맞았다. 첫 시작이 좋아 대성황이었다. 들으니 그때 두 과목을 모두 5점을 맞은 학생은 단 둘이였는데 다른 한 학생은 상해에서 온 서문탁(徐文倬)이였다. 그 번 시험을 치르고 나는 류학생 대우가 취소되였고 다시는 특수대우를 받지 못했다.
 
1958년, 대약진시기에 "사람 담량이 얼마 만큼 크면 얼마만한 산량을 낸다"는 호언장담과 어디가나 "위성"을 올리는 황당한 일들도 더러 있었다. 
 
학부에서는 우리 학년에서 보리 “위성전(卫星田)”을 꾸리라고 했다. 학교에는 꽃 재배에 사용하던 온실이 있었는데 약 3푼지기(3分地)땅이였다. 우리는 더위를 무릅쓰고 생토가 나올 때까지 한자 깊이를 팠다. 거름이 없어 화장실의 똥을 퍼 와 풀과 섞어서 삭히지 않고 그대로 뿌리고 보리를 심었다. 많이 나라고 씨도 많이 뿌렸다. 보리싹이 빈틈 없이 자랐다. 우리는 통풍이 잘되라고 선풍기를 켰고 광선을 많이 받으라고 저녁해가 지면 탐조등을 켜 놓았다. 수확의 계절에 우리는 한 알이라도 흘릴세라 손으로 보리를 훑었다. 하지만 정성 들여 가꾼 “위성전”이였으나 무당수확은 700근도 안 되였다. 
 
1958년 가을 우리는 북경 교구 사계청공사(四季青公社)에서 밭을 깊이 파는 일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 마을 사람들은 모두 식당에서 밥을 먹지만 돈은 내지 않았다. 한번은 어떤 이가 누가 밥을 많이 먹는가는 시합을 하자고 제의했다. 나는 하나에 두냥이나 되는 찜떡을 네개 먹었으니 여덟냥을 먹은 셈이다. 일등을 한 사람은 키가 크고 몸집도 크며 일도 잘하는 생산대의 부녀주임이였다. 단꺼번에 찜떡 여덟개를 먹었으니 한근 여섯냥을 먹은 셈이다. 뿐만 아니라 큰 고구마 세개까지 덤으로 먹어치웠다.
 
학생들에게 있어서 방학을 기다리며 오래동안 보지 못했던 부모님 곁으로 가는 것은 유쾌한 일이었고 피로에 젖었던 두뇌를 쉬워주는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런 복이 없었다. 4년간 대학에서 공부하는 기간 방학에 집으로 돌아가본 적은 두번 밖에 없었다. 한번은 대학 일학년때 학기시험을 끝마친 후였고 다른 한번은 1959년 여름방학에 중병 중의 어머니를 보러 간 것이였다. 기타 방학기간에는 학교에 남아 학교를 지키면서 방학기간에 돈벌이를 했다. 학교에는 삼합토(三合土)로 닦은 롱구장이 많았는데 매년 방학기간에 손질했다. 운동장을 수리하는 것은 기술일이 아니고 순 체력일이었고 수리하는 순서도 간단했다. 흙을 파고 흙덩어리를 분쇄하며 석회가루와 모래를 넣고 물을 부어 평평하게 고른 다음 돌연자로 다지면 되였다. 운동장을 수리하는 일은 학교의 행정처에서 책임지었으며 처장은 로당원이였고 2만5천리장정에 참가했던 간부였다. 그는 로동에 참가한 학생들을 많이 관심하고 동정했다. 우리가 힘들까봐 걱정해 주고 식당에 지시하여 우리에게 좋은 음식을 공급했다. 운동장 수리는 일공(일당 3원)으로 취급했으며 행정처에서 주었다. 여름방학기간 나는 60-70원의 돈을 벌었다. 이는 적지 않은 돈으로 매월 4원의 생활보조금과 합하면 집에서 돈을 주지 않아도 2년을 지낼 수 있었다. 체력로동은 비록 힘겨웠지만 돈을 벌 수 있었고 신체단련도 되였다.   
 
따라서 이런 생활은 충실하고도 의미가 깊었으며 즐거운 추억으로 남아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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