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룡정은 오랜 혁명 근거지(革命老区)
2018년 07월 14일 18시 52분  조회:854  추천:0  작성자: 김병활
      룡정은 오랜 혁명 근거지(革命老区)
 
       김병활
 
 당 창건 97주년에 즈음하여 연변대학 관공위(关心下一代工作委员会 략칭)에서는 유구한 혁명 력사를 자랑하는 혁명근거지 - 룡정시 현지에서 홍색유전자를 계승하는 행사를 마련하였다. 행사의 주제는 “공산당원의 사명감을 잃지 말고 홍색유전자를 계승하는 모범이 되자(牢记使命,争做传承红色基因楷模-纪念建党97周年主题党日活动)”이다.
 룡정은 내가 나서 자란 고향이다 연길에서 퇴직한 후 외지에서 10여년 일하는 사이 룡정은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고 하는데 그중 중국 동북지역 공산주의운동의 발상지 중의 하나로, 오랜 전쟁 년대의 혁명 근거지로 공인받게 된것이 가장 마음에 와 닿는다. 이런 룡정에서 혁명 교육을 받는 행사에 참가하게 된다니 나의 마음은 저으기 설레였다. 그날따라 수일간 흐리고 비오던 날씨가 활짝 개여 우리 일행은 모두 밝은 표정이였다.
 
 

  7월3일 아침 연길에서 출발하여 처음 도착한 곳은 룡정시 교사연수학교이다. 예전에 내가 보았던 이 학교는 단층집이였는데 지금은 4층으로 된 큰 건물로 변하였다. 여기가 바로 1928년2월에 연변지역에서 처음으로 설립된 중국공산당 지부이고 동북지역에서 가장 일찍 설립된 당지부 중의 하나인 중공룡정촌당지부  구지이다. 물론 당시엔 회색 벽돌벽에 회색 기와로 된 중국식 건물이였는데 당조직의 련락지점인 “민성보” 편집부 구지라고 한다. 학교 운동장 서쪽에 룡정촌당지부 설립 기념비와 이 지역에서 활동한 항일련군 고급장령 반신상, 그리고 입당선서문 비석이 나란히 줄지어 서 있다. 기념비마다 꽃다발이 많이 놓여 있는것을 보아 우리가 오기전에 여러 단체들에서 이미 혁명렬사들을 추모하고 입당선서를 하는 행사를 진행한것 같았다. 우리 일행은 먼저 기념비에 꽃다발을 정중히 드리고 나서 인문학원 관공위 주임 강선자 교수가 소개한 연변지역 당조직 창건 력사와 혁명렬사들의 추쟁 사적을 청취하였다. 그리고 입당선서문 비석앞에서 주먹을 들고 함께 장엄한 입당선서를 진행하였다.
 

 
 다음 목적지는 룡정중학이다. 대략 95년전에 대성중학이라는 교명으로 설립된 이 학교는 당시 조선족 문화 중심지였던 룡정의 명문 중학교였다. 따라서 항일구국의 신념을 안고 룡정시에 모여온 유지인사들과 사생들이 각종 방식으로 반일 투쟁을 진행했다. 또한 10월혁명의 영향하에 공산주의자들도 룡정의 여러 학교들에서 혁명 사상을 활발히 선전하고 반제반봉건투쟁을 진행하였다. 이런 시대적 분위기에서 시인 윤동주가 성장하였고 나중에 친일파문학이 성행하던 시기에도 친일파와는 달리 우리민족의 정서를 훌륭히 반영한 수작들을 창작하였다.
 나의 아버님은 1930년 경에 대성중학에서 공부했는데 학창시절에 아버님이 학교에서 수상한 각종 상장과 항전 승리 후에 대성중학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남긴 기념사진들을  나는 지금도 소중히 보관하고 있다. 우리 형제자매들도 다수가 대성중학(우리가 공부할 때엔 교명을 룡정1중, 연길현 1중이라고 했음)에서 공부했었다. 나는 모교의 사무청사가 예전처럼 잘 보전되여 있고 또 서쪽과 복쪽에 있었던 단층집 교실 두채가 있던 자리에 새로운 교수 청사가 버젓하게 세워진 것을 보고 감회가 깊어졌다.
 우리 일행은 앞선 행사처럼 윤동주 석상에 꽃다발을 드린 후 과기학원 관공위 부주임 최후택 교수의 혁명력사 강의를 청취하고 기념 사진을 다투어 찍었다. 이때 누군가 윤동주의 국적에 대해 국외에서 론란이 있다고 하자 최교수는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다. 윤동주의 부친이 명동촌에 와서 땅을 사서 학교를 세우고 밭농사를 하면서 활동경비를 마련하려고 하니 당시에는 중국 국적에 가입해야 땅을 살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대의를 위해 중국 국적에 가입하여 무난히 필요한 면적의 토지를 충분히 매입하였으며 따라서 명동학교 등 건물들을 축조하면서 떳떳이 당국과 각종 교섭을  할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부친이 중국 국적이니 아들 윤동주도 자연스럽게 중국 국적으로 된게 아니냐는 것이다. 나는 윤동주 연구전문가가 아니기에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국적이 여하하든 그 시기의 민족정서를 잘 반영한 윤동주의 시들은 모든 사람들의 문화유산이 될거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윤동주는 은진중학 출신인데 왜 대성중학에 석상과 기념비를 세웠느냐고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에 룡정출신인 내가 나서서 설명하였다. 윤동주가 은진중학 출신인것은 사실인데 항전승리 후에 은진중학을 포함한 룡정 6대중학교가 룡정중학으로 합병되였고 후일에 이른바 신 도시 건설이라는 명의하에 유서깊은 옛 건물들을 마구 철거하는 바람에 “영국덕이(영국 조계지)”에 위치한 은진중학도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지금 룡정 6대 중학 중 옛 교수청사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학교는 대성중학 구지 뿐이여서 여기에 윤동주 반신상을 세운 것이라고 한다.
 
 

  다음 행선지는 해란강과 륙도하 합수목에 자리잡은 “락연공원(乐然公园)”이다. 락연공원은 부지면적이 크진 않지만 한락연 동상과 3층 정자가 주변의 아름다운 경치와 잘 어우려져 유달리 품위가 있어 보였다.
 1998년에 룡정 륙도하 남쪽에 자리잡은 토성포(지금의 공농촌)에서 나서 자랐고 또한 1919년 룡정에서 일어난 “3.13”빈일운동에서 혁명가의 첫 발자국을 내디딘 한락연은 여러가지 “제1인자”라는 명망을 가지고 있다. 중공 통전부 전 부장이며 국가민족사무위원회 전 주임 리덕수의 평가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한락연 동지는 중국 20세기 걸출한 정치활동가이며 인민예술가이다. 그는 중국 조선족의 첫 공산당원으로서 동북지역 첫 당조직을 창건하는 사업에 참여하였다. 그는 중국 조선족 중에서 처음으로 국제 반파쇼 전사로 되여 프랑스 공산당의 반파쇼 투쟁에 참가하였으며 국제 우호 인사와 함께 중국의 항일투쟁사업을 세계각지에 선전하였다. 그는 국민당 소장 신분으로 공산당의 통일전선공작을 진행한 선행자로서 산서성 동남지역의 항일전선에서 항일통일전선 련락사업을 전개하였다. 국공합작이 파렬된후 그는 국민당 감옥에서 3년이란 긴 시간을 보내면서도 신앙을 포기하지 않고 투쟁을 견지하였다. 그는 미술계에서 처음으로 동서 미술 기법을 결합시킨  선행자로서 중국전통문화와 서양문화를 융합시켜 후세에 많은 예술 걸작들을 남겨 놓았다. 그는 처음으로 키질 벽화를 연구한 중국 화가로서 과학과 예술, 회화와 고고학을 하나로 융합시켰고 신강 남부지역과 돈황 고대문물을 보존하기 위해 많은  개척성 사업을 진행하였다.  그는 처음으로 서북지역 각족인민들의 생활을 소재로 창작을 진행한 예술가로서 회화예술로 서북 각족인민들의 로동 생활을 반영하여 서북 지역 인민들과 두터운 우의를 맺고 민족단결을 추진한 모범으로 되였다. 한락연 동지의 혁명정신과 예술 품격은 소중한 유산과 재부로 되고 있는 바 우리들은 이를 계승하고 발전시켜야 할것이다.”
 이처럼 위대한 학명가, 예술가이며 조선족의 자랑인 한락연이 어째서 남들보다 뒤늦게 알려지게 되였을가? 이것은 아마 한락연의 혁명적 일생이 대부분 지하비밀공작을 한 것과 관련이 있다고 본다. 그가 생명 위험을 감수하며 진행한 투쟁은 지하비밀공작의 성격으로 인해 직계상사가 아니면 누구도 알수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건국 후 끊임없이 진행된 정치투쟁과 “문화대혁명”으로 하여 많은 지인들이 비밀리에 진행된 한락연의 빛나는 투쟁업적을 알리지 못하고 가슴에 묻어둔채 세상을 하직하였을 것이다. 다행히 요행 살아남은 전우, 지인들과 한락연의 자녀들이 사명감을 지니고 끈질기게 노력한 결과 오늘과 같이 한락연의 혁명가, 예술가의 빛나는 일생이 해빛을 보게 된 것이다. 
  우리는 한락연 동상에 꽃다발을 드리고 미술학원 관공위 최국남 주임이 한 한락연 혁명생애 소개를 청취한후 기념 사진을 찍었다.   
 오늘 유람객들이 줄지어 찾아오는 “락연공원” 자리는 원래 채소농사를 하던 채마전이였고 해란강과 륙도하 합수목엔 부드러운 모래가 깔린 넓다란 백사장이 있었다. 어렸을 때 나는 아버님의 뒤를 따라 여기에 와서 목욕을 하고 일광욕도 즐기곤 하였다. 그 시절에 우리는 철교 동쪽에 위치한 토성포(공농촌)에서 한락연이라는 위대한 인물이 나서 자랐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 이 합수목에서 낚시질을 즐기면서 로후생활을 보내고 있는 낚시꾼들은 아마 오늘의 이 행복이 어떻게 온것인지를 잘 알고 있으리라.
 
 

 
 오늘 행사의 마지막 목적지는 지신 승지촌에 위치한 주덕해 고택이다. 예전에 그 마을을 자주 지나 다니면서도 여기에 주덕해 옛집이 있다는 것은 몰랐다. 주덕해 기념비와 고택은 승지촌 촌민위원회 사무실 곁에 있는데 부지 면적은 크지 않지만 시설물들이 정갈하게 잘 정리되여 있다. 주덕해 동지의 일생에 대해서는 너무 잘 알고 있기에 우리 일행은 별다른 소개와 설명은 하지 않고 꽃다발을 드린후 기념 사진을 찍었고 기념비 주변에 전시된 주덕해 공적을 담은 사진들을 관람하였다.
 사실 나는 지금 연변대학 뒷산(와룡산)에서 거의 매일 주덕해 기념비와 묘소를 만나고 있다. 나이들어 몸이 무거워지면서 움직이기 싫을 때면 어김없이 뒷산에 올라 호요방 전 총서기가 금빛 제사를 한 주덕해 기념비 주변을 돌곤 하는데 그러고나면 한몸에 정기를 듬뿍 받아안은 듯 두 발에 힘이 솟구치는 것 같았다. 그런 느낌이 좋아서 폭우, 폭설이 있는 날과 특별한 행사가 있는 날을 제외하고는  하루도 빠짐없이 주덕해 기념비와 묘소를 모신 뒷산에 오르곤 한다.
 오늘 행사를 마무리하면서 연변대학 관공위 주임 김영춘 교수가 총화발언을 하였다. 그는 입당선서를 할 때의 초심을 잃지 말고 사명감을 지니고 습근평신시대중국특색사회주의사상을 견지하고 혁명선렬들의 발자취를 따라 홍색유전자를 계승하면서 공산당원의 선봉,모범 역할을 남김없이 발양해야 한다고 하였다.

 
 



[주: 저의 재간으로는 본문에 사진 5장밖에 삽입할 수 없기에 사진 여러 장을 합쳐서(퍼즐, 拼图) 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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