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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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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소설

대하소설 진달래 소야곡(3)
2017년 11월 23일 09시 13분  조회:1454  추천:0  작성자: 김장혁



                     4. 체육머리 처녀
       성호는 요즘 시내에 와서 대학가의 처녀 은영이나 시내 처녀애 선화를 여겨보면서 자기 마음에 미묘한 변화가 생기는 것을 느꼈다.
       (왜 이래?순희와의 순박한 첫사랑을 절대 배반해선 안되는데.)
예쁜 대학생처녀나 시내물에 전 섹시한 처녀애들이 자기 사랑의 방파제를 충격할 때마다 그는 흔들리는 마음을 질책하면서 도리머리를 흔들군 했다.
       (아니야, 난 벌써 사랑에 빠져서는 안돼. 공부를 해야 해. 순희고 은영이고 선화고 다~)
성호는 침실에서 침대에 누워 착잡한 생각에 빠졌다가도 도리머리질하며 삼검불 같은 번민에서 벗어나려고 모지름을 썼다.
며칠 전 일요일 점심, 성호는 시내 이모네 집에 놀러 갔다. 그런데 아무리 노크해도 아무런 인기척도 없었다.
성호가 한참 서성거리다가 몸을 돌려 층층계를 내려가려는데 파란 세다를 입은 웬 예쁜 처녀가 나타나 리상한 눈길로 성호를 훑어보다가 놀라했다.
“아니, 성호 아니요?”
성호도 놀랐다. 집체호의 선화였다.
그는 짐짓 “우리 이모네 어델 갔지?” 하고 중얼거리면서 뒤머리를 긁적였다.
“오, 우리 아래집 분이 이모 돼요?”
그녀는 성호의 왼쪽가슴에 단 대학 마크에 눈길을 멈추더니 활기 넘쳐났다.
“잠시 기다리세요. 이제 조금 있으면 올 거예요.”
그녀는 말을 마치고 집 문을 열고 들어가면서 잠간 우리 집에 들어가 기다리오.” 라고 하는 것이였다.
“아니, 난 여기서 이모를 기다리겠소.”
눈치 빠른 선화는 어색해하는 성호의 손을 잡아끌었다.
“어마나, 줄나긴, 면목 모를 집이오?”
그때 이모가 나타나 어색한 장면을 타개해줄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성호야, 우리 옆집 선화야.”
선화를 보고는 성호를 가리키면서 “내 외조카야. YB대학에 다닌다. 서로 알고 지내라."라고 했다.
“저 선화는 우리 생산대 집체호에 내려왔댔습니다.”
성호는 선화와 어색하게 눈길을 마주쳤다.
이모의 말에 의하면 선화는 마음이 어찌나 착한지 자기 딸처럼 가깝게 지낸다고 했다. 그런데 대학 입학시험을 3년 채 쳤는데 계속 몇 점씩 모자라 입학하지 못해 애나한다고 했다.
"정말 넌 글을 잘 쓰지 않느냐? 쟤 글짓기를 좀 지도해주면 안 되겠니?"
선화는 그 말에 새침한 표정을 지으면서 콕콕 찌르는 눈길로 성호를 여겨보는  것이였다. 그 표정에는 네가 내 선생을 할 수  있겠는가는 심리상태가 환히 드러났다.
성호는 입을 헤 벌리고 웃는 것보다 새침한 표정을 짓는 선화가 오히려 그렇게 이쁜 것이 이상할 지경이였다. 순간 성호와 선화의 눈길이 반공중에서 조용히 마주쳤다. 선화는 쌍까풀눈을 살며시 내리깔더니 자기 집으로 들어가는 것이였다.
(이러면 안되는데. 순희를 가수로 가르쳐달라고 이모부한테 부탁하러 왔다가 선화한테 반하면 안되는데. 선화는 인정미가 있긴 하지.)
그제야 성호는 순희가 똑똑한 녀자애라는 것을 새삼스레 느꼈다. 예쁜 처녀애들을 보기만 하면 마음이 흔들리는 자기를 어떻게 첫사랑이란 말끄댕기를 하나 잡고 믿고 시집오겠는가.
성호는 허구픈 웃음을 피씩 웃었다.
이날도 그는 금방 선화의 글짓기를 좀 지도해주고 돌아왔다. 그는 침실에 누워서도 선화의 퍽 인상 깊은 쌍까풀눈과 어깨 너머 물결치던 머리카락이 떠올랐다.
선화의 오빠도 퍽 인상 깊었다. 이모의 말에 의하면 선화의 번대머리 오빠는  30대 초반의 로총각이라고 했다.
“시간이 있으면 저 선화를 도와주오. 저는 대학생이 아니고 뭐요. 저 애도 올해 시험을 쳤댔는데 내 말을 통 듣지 않더니 락제했소…”
“오빠! 별 말을 다해요. 창피하게.”
“야, 쓸데없는 성악공부를 그만두고 이 대학생한테서 많이 배워라. 저 애는 통 내 말을 듣지 않소. 되지도 않는 노래나 자연과학을 공부해서 잘못됐소. 사회과학이 상대적으로 쉽지 않고 뭐요?”
“오빠! 그만두래도!”
선화는 앵두입술을 뾰족이 내밀면서 콕콕 찌르는 눈길로 오빠와 성호를 번갈아 쏘아보더니 책을 와락와락 걷어치웠다. 그녀는 훌 일어나더니 침실로 들어가면서 문을 쾅 닫아버렸다.
오빠는 너부죽한 얼굴에 실망에 찬 표정을 꽉 싣더니 도리머리질을 홰홰 저었다.
“안되오. 쟤는 오빠가 무식하다면서 통 말을 듣지 않소? 그래도 사회과학을 배워야 사무실에 엉덩이를 척 붙이고 들어앉아서 철 밥통을 끌어안고 편안히 살 수 있겠는데. 쳇.”
선화의 오빠는 한숨을 후~ 내쉬였다.
“아차, 깜빡 잊었군.  대학교에 복습재료랑 좋은 거 있으면 가져다주오.”
그는 초면강산에도 스스럼없이 성호에게 부탁했다.
시간도 퍽 간 것 같아 성호는 엉거주춤 일어났다.
“점심을 자시고 가오.”
선화의 아버지마저 대학교 교수라는 틀을 차리지 않고 아주 친절하고 스스럼없이 대했다.
성호는 선화가 들어간 침실 쪽을 힐끔 곁눈질해보았다. 빠금히 열린 침실문  안에서 파란 세다가 바람결처럼 사라지는 것을 훔쳐볼 수 있었다.
성호는 지금도 보조개를 옴폭 파면서 방실방실 웃던 선화의 우유빛 얼굴이 삼삼거렸다.
성호는 돌아오기 전에 뒤를 달려고 선화의 집 서재에서 파금의 “집”이란 소설책을 쑥 뽑아들고 밥상에 마주 앉아 공부하는 영애 쪽으로 다가갔다.
“선화, 이 책을 가져다 보고 가져올게.”
선화는 새침한 얼굴을 거두고 생글 웃으면서 일어나더니 떠나가는 성호에게 손까지 흔들었다.
“빠이-빠이!”
(아, 내 마음이 왜 저 오뉴월 하늘처럼 변덕스럽게 파도칠가? 순희를 보면 순희를 좋아하고 대학가에선 아래학급 은영이 예뻐보이고 시내에선 선화가 절세미녀 같고, 에참, 세상의 예쁜 처녀들을 다 사랑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가.)
성호 스스로도 산들산들 불어치는 미풍에도 흔들리는 갈대 같은 자기 마음으로 해 심란했다. 허나 무슨 수로 파도치는 마음을 달랜단 말인가?
성호가 선화네 집에서 돌아올 때까지만 해도 맑게 개였던 하늘이 갑자기 먹장구름이 몰려왔다. 불 뱀이 대지에 뻘건 불혀를 번쩍 뻗치더니 먹장구름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진짜 짐작하기 어려운 변덕스러운 오뉴월의 하늘이였다.
성호는 아무리 마음을 순희에 대한 첫사랑, 그 한 곬으로 몰아가려고 해도 잘 되지 않았다. 예쁜 처녀들만 보면 수시로 가을바람을 맞은 늪 가의 갈대처럼 흔들리는 것이 아니겠는가.
원래 한 학급의 누나들은 여겨보지도 않았다. 보통 대학가에는 공부를 잘하는 처녀애들이 적었다. 중학교 때부터 인물자랑이나 할만큼 예쁜 처녀애들은 대부분 일찍 련애나 하면서 공부를 잘 하지 않아 그런지 대학에 오지 못하고 일찍이 시집이나 가버린 것 같았다. 그런데 아래 학급의 어린 대학생처녀들 가운데는 꽃같이 예쁜 처녀애들도 드문드문 눈에 뜨이였다.
특별히 옆 교실을 드나드는 체육머리를 한 처녀애가 성호의 눈에 쑥 들어왔다. 걀쭉한 우유빛얼굴에 버들잎같이 꼬리가 살짝 쳐들린 짙은 눈썹, 어글어글한 깜장눈, 오똑한 코, 작고 빨간 앵두입, 진짜 "홍루몽"의 미녀 주인공 림대옥이 울고 갈 미녀가 아니겠는가. 더구나 칠칠한 체격에 탄력 있어보이는 그녀의 몸매는 성호의 가슴을 억누를 지경으로 압박을 가해왔다. 저도 몰래 한번 꽉 껴안고 키스벼락을 뻑뻑 안겨주었으면 속이 시원할 것 같은 강한 충격을 받았다.
(안돼. 괜히 학교 기률을 어겨서 퇴학이나 맞으면 어쩔라고? 어떻게 힘들게 입학했다고 경거망동한단 말인가?)
천지꽃산 기슭에서 소방목을 하다가 입학한 목동 출신 대학생 성호는 이성으로 인해 강한 성적인 충동을 받을 때마다 대학교 기률로 자기 꿈틀거리는 용암 같은 사랑의 화마를 지지누르면서 억제하군 하였다.
개혁개방 초기라는 것도 있었지만 대학교당위 기률검사위원회 허철만 서기는 제대군간부출신인데 학생기률을 군부대 기률처럼 엄하게 다스렸다.
그는 대학생들은 "재학 중에 련애를 해서는 절대 안 된다."는 대학생수칙을 내놓고 련애를 하는 대학생만 잡아내면 호되게 처분했다.
한번은 이런 기괴한 사건도 있었다.
성호의 한 동창생이 벽돌공장에 가서 한 녀대생과 어깨에 손을 얹고 련애를 한창 할 때였다. 불시에 전지불이 쭉 비치더니 "꼼짝 말라!" 하고 돼지 멱따는  듯한 고함소리가 울렸다.
깜짝 놀란 처녀총각은 선불 맞은 노루처럼 화닥닥 도망쳤다. 어지러운 전지불이 뒤따르면서 계속 고함소리 들렸다.
"꼼짝 말라! 계속 도망치면 총을 쏜다!"
그 고함소리에 처녀총각은 꼼짝달싹 못하고 그 자리에 못 박힌듯 멈춰서  “체포”됐다.
그들은 학교 무장부에 끌려가서야 기률검사위원회 허서기라는 것을 발견했다.
한참 심문을 받고 둘 다 신분이 밝혀진 후에야 겨우 풀려나와 숙사로 돌아왔다.
하지만 이튿날에 벌써 그들의 이른바 학생기률위반사건은 전 교에 통보되였고 입당지원서까지 당조직에 바치기까지 한 그 남학생은 엄중경고처분에 입당자격을 취소당했다. 녀대생도 경고처분을 받는 비극을 겪게 됐다.
당시 대학교 학생기률수칙은 성인으로 성숙된 20대 초반의 학생들 실제에 맞지 않는 인성화되지 못한 극좌적인 것이였다. 허나 별 수 없었다. 학생들은 처분을 두려워 지하련애를 하지 않으면 안됐다. 재수 없는 놈은 뒤로 자빠져도 코등을 깬다고 들키면 된통을 치러야 했다. 그러므로 성호는 근신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 날 이른 아침, 성호는 며칠 후면 열리게 될 학교 륙상대회를 준비하려고 학교 운동장에 뛰여가서 아침달리기를 했다.
앞에서 달리는 한 처녀애를 보고 저도 몰래 깜짝 놀라 발걸음을 멈출 번했다.
(아니, 저게 그 처녀 아니야?)
 앞에서 파란 운동복을 입은 체육머리 처녀애가 탄력 있는 젖가슴을 탈랑거리면서 달리고 있지 않겠는가?
1메터 60도 넘게 쭉 빠진 훤칠한 키, 대나무처럼 칠칠한 체격을 가진 그녀는 탄력 있는 긴 다리로 아주 가볍게 성큼성큼 달려나가고 있었다.
성호는 뒤에서 슬며시 뒤따라 달리면서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을 훔쳐보았다. 그런데 한참 달리던 그녀가 눈치를 채기나 한듯 불시에 스피드를 내 달려나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다고 눈치코치 없이 무작정 그녀를 따라 스피드를 낼 수도 없어 아쉬웠다.
성호는 날이 갈 수록 그녀한테 끌려들어가는 것을 가슴깊이 느꼈다. 학교 식당에 가서도 그녀가 있나 해 눈빗질을 하다가 그녀가 나타나면 가슴이 설레이다못해 심장박동이 쿵쾅쿵쾅 드세지는 것을 온몸으로 느꼈다. 교실 현관에서 그녀를 마주쳐도, 아니, 눈길이 조금 마주쳐도 어쩐지 가슴이 뭉클해났다. 어찌 하여 심지어 그녀가 사뿐사뿐 걸어가는 모습만 보아도 그렇게 예뻐 보일가?
"제길, 이거 어디 공부를 하겠어? 사춘기도 아닌데 왜 이래?"
성호는 교실이나 침실에서 책을 들어도 그녀의 모습이 떠올라 혼자 중얼거렸다. 어떤 때에는 보름달 같은 얼굴이 겹치어 떠오를 때도 있어 머리가 꽤나 복잡해났다. 심지어 이모네 옆집의 선화의 쌍까풀눈까지 아른거려 그를 심란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머리 복잡하고서야 어찌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있단 말인가?)
만물이 춘흥을 못이기는 초여름의 어느 날, 청춘의 꿈도 많은 대학교 운동장에서 전교 륙상대회가 성황리에 열렸다. 확성기에서 경쾌한 민족음악이 흐르고 운동장을 돌아가면서 학부마다 북소리를 둥둥 울리면서 응원하느라고 떠들썩했다.
성호는 학부 수류탄선수로 뽑히였다. 수류탄뿌리기 차례가 돼 성호가 나가보니 한뼘씩이나 더 큰 한족애들이 우르르 쓸어나왔다. 키다리들  속에 들어선 성호는 딱 마치 거위무리 속의 닭 같다고나 할가. 설상가상으로 키다리 한족애들이 뿌린 수류탄이 축구장 중간선 전후에 날아가 퉁퉁 떨어졌다.
한 학급의 누나들은 벌써 승부가 갈린 것 같아 부산을 떨었다.
"에이고, 우리 학부 졌어."
"작달막한 성호 질 건 빤하다, 빤해!"
허나 반전이 일어날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와야!"
"저게 뭐야?!"
숱한 학생들 눈길이 일제히 성호가 뿌린 수류탄이 날아가는 포물선을 따라 날아갔다.
퉁!
축구장 중간선을 날아넘어갔다. 두번째로 멀리 날아갔던 것이 아니겠는가.
"57메터!"
재판이 자로 재더니 흰 기를 들면서 소리쳤다.
"와~ 기적이야!"
"대박이야!"
성호가 글쎄 그렇게 멀리 뿌릴줄은 누구도 몰랐다. 성호는 은근히 옆에 앉은 정치학부 녀학생들을 흘끔흘끔 곁눈질했다. 그 속에서 그 파란 운동복의 처녀애가 걸 봤겠는가 하는 것이 궁금했던 것이다.
성호는 뭔가 그 처녀애  앞에서 본때를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저게 뭐야? 그녀는 진짜 선수, 아니, 에이스, 스타였다. 백메터 달리기에서 시작을 알리는 총소리가 울리자마자 그녀는 체육머리를 흩날리며 어찌나 빨리 달리는지 다른 선수들을 한 서너메터 뒤떨궈놓고 흰 선을 풍만한 가슴에 걸었다. 체육머리가 어찌나 빨리 닫는지 운동장 확성기에서는 누군가 그녀를 두고 읊는 즉흥시 소리가 울렸다.
“와~ 화살같이 내달리는 체육머리선수, 구름속을 달리는 보름달 같은 녀신이여라!”
이때 남녀 혼합릴레이달리기가 시작됐다. 뚱뚱한 성호는 장거리달리기에서 발목을 풀친 승호 대신 선수로 나섰다.
파랑새라고 불리는 정희는 얼굴이 파래 성호를 흘겨보더니 뒤에서 녀학생들  속에 가서 “에이고, 우리 학급 졌어. 저 뚱뚱보를 승호 대신 넣다니?” 하고 뒤공론을 했다.
다른 녀학생들도 머리를 끄덕였다.
        “성호야, 힘이 세서 수류탄이나 표창 같은 건 잘 뿌려도 뚱뚱해서 잘 닫겠니?”
승호는 정희를 보고 “쓸데 없는 헛소리 말아. 성호는 나보다 더 잘 달릴 거야!”
오가는 소리를 들으면서 성호는 녀학생들의 쓸데 없는 근심을 산산이 부셔버리고 자기 존재를 과시하고 싶었다.
혼합릴레이가 시작됐다. 앞선 세 선수들이 잘 달리지 못해 성호네 학급은 9개 학급에서 그만 여섯번째로 됐다. 이제 성호까지 제대로 닫지 못하는 날에는 한 륜이나 떨어질 수도 있었다. 실로 무언의 압력이 성호의 어깨를 지지눌렀다. 성호 차례가 되자 정희랑 벌써 도리머리부터 흔들었다. 여기저기 성호네 학부 얼굴들에는 실망의 그림자가 파도치고 있었다. 반발심이 난 성호는 계주봉을 받아 쥐자마자 처음에는 천천히 달리면서 호흡과 심장박동, 발폭을 조절하고나서 점점 속도를 가했다.
승호는 관중석에서 일어나 앞으로 달려지나가는 성호에게 “빨리! 성호! 빨리!” 하고 고함소리를 날렸다.
성호는 눈길 하나 팔지 않고 발끝에 힘을 주며 발폭을 점점 넓게 내밟으면서 속도를 점점 더 가하였다. 5천 메터 장거리를 한 절반 달리면서 벌써 한 300메터나 앞선 선수 둘을 따라 잡았다.
그제야 정희랑 녀성들 속에서 군소리가 잦아들었다. 성호는 정치학부의 체육머리한테 한눈을 팔 여유도 있었다. 이상하게 정치학부 응원단 속에는 체육머리가 보이지 않았다.
정희랑 녀동창생들의 응원까지 받았다고 생각한 성호는 더욱 속도를 가해 50메터 앞선 정치학부의 선수도 따돌린 후 계주봉을 다음 선수에게 넘겨주었다.
이게 뭐야?
다음 계주봉을 받아쥘 선수는 그 체육머리 처녀가 아니겠는가! 그녀는 박수갈채를 보냈다. 정치학부 앞선수의 계주봉을 받게 돼 박수를 보냈는가!
성호는 제 좋은 생각을 하면서 체육머리한테 계주봉을 넘겨줬다.
(내가 놀란 솜씨로 달렸다고 박수를 쳤겠지. 잘 달리지도 못한 자기네 선수에게 박수를 보낼 수 있어. 내게 져서 분해 죽는 선수에게 박수를 보내는 건 말도 안돼!)
좌석에 돌아가자 정희는 달려나와 수건까지 주면서 “어쩜 그렇게 잘 닫소?”라고 했다.
성호는 수건을 받아 땀을 닦았는데 숨이 차하는 눈치가 전혀 보이지도 않았다. 재잘거리던 참새 아가씨들은 너무나도 뜻밖이여서 입까지 함박만큼 벌렸다가 손으로 가리였다.
경기 결과 성호네 학부가 일등을 따냈다. 성호와 체육머리 등 선수들은 영웅처럼 떠받들렸다.
물론 축하파티에서 승리의 희열은 하늘을 찌를 지경이였다.
승호는 체육위원이노라고 술잔을 높이 들고 “오늘 기분 좋게 이긴 걸 축하한다.  그래도 인재를 제대로 발견하고 제때에 교체해 써준 내 눈이 밝다는 것을 다시한번 증명했어. 자, 마음껏 마시자!”라고 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파란 운동복을 입은 파랑새 정희는 입을 삐쭉하며 성호를 치켜 올렸다.
“이번 운동대회에서 우리 정치학부가 총 성적 1등을 따낸데는 성호와 아래학급 은영의 공훈이 아주 컸어! 자, 성호, 술잔을 받아요. 축하해요.”
정희는 술잔을 들고 와서 성호의 잔을 쟁그랑 마주쳤다.
“승리의 축배를 들어요. 진심으로 축하해요.”
성호는 기분이 좋아 술을 쭉 들었다.
사내들이란 우스워. 처녀애들 앞에서 항상 뭔가 본때를 보이고 싶어하는 거야. 처녀애들 앞에서 뭐나 잘하려고 최선을 다 하는 사내애들이 눈물겹도록 불쌍하지 않은가!
성호는 그녀와 말을 걸고 가까이 할 틈을 노리고 또 노렸다.
그날은 끝내 기적같이 다가왔다. 성호는 그번 운동대회에서 솜씨를 보였기에 대학교 륙상선수로 선발돼 성 대학생륙상경기에 참가하게 됐다. 그런데 운동장에 연습하러 갔다가 자기 눈을 의심했다. 체육머리, 그녀도 선수로 뽑혀 대기하고 있지 않겠는가.
선수들이 줄을 쭉 섰다. 감독이  출석을 장악할 때였다.
"성호!"
"옛!"
성호는 가슴을 쭉 내밀고 손을 들며 앞에 나섰다. 그녀의 눈길이 자기 몸에 와닿는 감각을 느꼈다.
"은영!"
"옛!"
체육머리 그녀가  앞에 나서면서 손을 쳐들었다.
"은영? 쟤가 은영인가?"
성호는 하마트면 소리 지를 번했다.
일이 되자니 그랬을가. 은영은 성호와 함께 혼합릴레이를 하게 됐다.
"잘됐어. 이건 다 하늘의 뜻이야."
성호는 은영과 릴레이를 주고 받는 연습을 하면서도 미끈하고 탄력 있는 체육머리의 몸을 아래위로 훑어보며 제 좋은 생각을 굴렸다.
(인물체격이 물 찬 제비 같지. 나어린 대학생이지. 얼마나 좋아.)
순간 천지꽃산에서 순희와 맹세한 말이 떠올라 성호를 괴롭혔다.
"넌 내 첫사랑이야!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첫사랑이야!"
"넌 첫사랑이 몇이야? 이제 또 몇을 사랑하겠니?"
순희가 하던 말이 뇌리를 쳐서 순희에게 죄송한 감이 났다.
(진짜 사랑이란 수시로 변하는 건가?)
성호는 코웃음쳤다.
(뭐 은영이 사랑이나 하는 걸 제 좋은 생각을 해? 천천히 지내봐야지.)
그런데 성 대학생륙상경기에서 운이 따라가지 못했다.
그날 푸른 잔디가 깔린 륙상운동대회에서 앞선 선수들은 아주 잘 달려 다른 대학교 선수보다 앞섰다. 그런데 관건적인 시각에 글쎄 은영이 넘겨주는 릴레이 대를 성호가 받다가 그만 땅바닥에 뚝 떨어뜨렸던 것이다.
성호가 황급히 땅바닥에서 릴레이 대를 주어 들고 죽기내기로 뛰였지만 허사였다. 꼴찌를 하고 말았던 것이다.
다행히 성호가 수류탄던지기 시합에서 2등을 해 좀 미봉했다.
성호는 그번 성 대학생륙상경기는 회억하기조차 싫었다. 은영을 마주 바라보기조차 창피했다.
며칠 후에 성 대학생륙상경기에 갔던 운동원들은 쉬는 날에 뻐스를 타고 산으로 봄철 들놀이를 가게 됐다.
소나무가 푸르청청한 산기슭에 이르자 먼저 보배찾기를 하게 됐다.
성호와 은영은 푸른 소나무밭에서 보배를 찾으면서 산으로 올라가다나니 어떻게 돼 다른 동무들과 멀리 떨어진 외딴 곳으로 가게 됐다. 그런데 나무숲이 우중충하게 솟은 웬 깊은 골짜기에 들어서서 점점 오르기 힘들어졌다. 성호는 그래도 남자느라고  앞에서 가시덤불을 헤치면서 나가며 혹간 은영의 손을 쥐여 끌어당겨주었다. 그때 따뜻하고 보동보동한 은영의 손을 놓기 싫었다. 하지만 다른 선수들의 눈치가 보여 아쉬운대로 올리막을 다 올라가면 은영의 손을 놓아주어야만 했다.
"성호, 어쩜 그렇게 힘도 세고 잘 닫소. 수류탄을 박격포처럼 멀리 던지고 전번에 릴레이 때도 넷이나 따라 잡는 걸 보았단 말이오."
"허허허."
성호는 놀라움과 기쁨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은근 슬쩍 말을 돌렸다.
"은영을 모두 빨리 닫는다고 '화살같이 달리는 보름달 녀신'이라고 했는데."
"오빠, '보름달 녀신'? 어째 비유가 적절하지 않은 거 같아요. 화살과 보름달, 류사성이 있는가요?"
성호는 그저 "좌우간 즉흥시에 오른 은영이 얼마나 녀신 같은 존재오?"라고 했다.
"어머! 내가 이젠 보름달로부터 녀신까지 됐네."
성호는 "그래, 그대는 숱한 남학생들 마음 속의 녀신이오." 하고 말하려다가 꿀꺽 삼켜버렸다.
“은영이, 어쩜 그렇게 빨리 달릴 수 있소?”
은영은 걀쭉한 얼굴에 얇은 미소를 찰랑거리면서 되물었다.
“내야 정말 묻고 싶어요. 오빤 어쩜 그렇게 빨리 달릴 수 있어요?”
“내야 애들에게 덜 맞고 살자고 가만가만 지하에서 력기나 장거리달리기 같은 걸 좀 한 과외운동원일뿐이오. 은영은 진짜 수준급이더란 말이오.”
성호는 정색해서 소나무숲  속에 선 은영을 바라보며 감탄했다.
(어쩜 숲  속에 피여난 빨간 장미꽃 같아. 너무 예뻐!)
은영은 눈자리 나게 바라보는 성호의 따가운 눈길에 반쯤 외면하면서 귀밑을 살짝 붉혔다.
성호도 스스로 어색해 한마디 더 물었다.
“중학교때 륙상전문팀 운동원이 아니였소?”
은영은 숲  속에서 쑥대 몇가지 꺾어 냄새를 맡으면서 나직이 “원래 전교  스피드스케이트팀 선수였죠.”라고 했다.
“오- 글쎄 일반선수들보다 다르더라니까. 그런데 왜 체육학부엔 입학하지 않았소?”
은영은 자꾸 묻는 성호에게 솔직히 말했다.
“녀성들의 선수생애는 하루살이처럼 아주 가련하게 짧지요. 불타는 청춘을 영원히 간직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사회학과에 지망하게 됐어요. 지금 보면 정치학부보다 문학학부나 예술학부에 갔더라면 더 좋았을 걸.”
“왜? 련애소설을 실컷 읽자고?”
“전 련애소설을 읽기도 좋아해요. 그보다 정치를 싫어하고 정객을 좋아하지 않아요. 그런데 시험성적이 차해서 3지망인 정치학부에 입학했어요. 그만도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성호는 머리를 끄덕이며 화제를 돌렸다.
"야- 덥다야. 은영이, 오늘 들놀이 재미있지?"
"그래요. 나무숲 속의 공기도 좋지. 보배 찾기도 재미있지."
은영은 버릇처럼 체육머리를 뒤로 쓸어 넘기면서 손부채질 하면서 이마에 송골송골 내밴 땀을 들이였다. 그러다가 하얀 손수건을 내밀며 땀을 닦으라고 했다. 성호는 은영의 분내인지 체취인지 풍기는 손수건을 받아 땀을 닦았다.
이때 저쪽에서 승호가 이쪽에 대고 소리쳤다.
"어이, 성호, 그쪽에는 보배가 없어! 여기로 오라!"
승호는 운동은 성호보다 잘하지 못했지만 이번 운동대회에서 학교 선수단 단장으로 돼서 이번에도 들놀이 령솔자로 왔던 것이다.
성호는 승호네 그쪽으로 스적스적 걸어가면서 복잡한 궁리를 했다. 그때 은영이 돌 밑에 삐죽이 내민 종이쪽지를 주어 들었다.
"성호 오빠, 보배요, 보배, 난 보배를 주었단 말이요."
은영은 어린애처럼 퐁퐁 뛰었다. 그녀는 성호의 빈 손을 보더니 보배를 내밀었다.
"오빠, 이걸 가지오."
"아니요. 제 가지요. 혹시 무슨 기념품이라도 타겠는지."
이윽고 성호도 소나무 껍데기에 끼워놓은 누런 종이쪽지를 발견했다. 빼보니 그 것도 보배였다. 그런데 은영의 번호와 똑같은 번호였다.
"잘 됐소. 번호가 똑 같군 그래. 자기 건 날 주고 내 건 자기를 주고."
"호호호. 누가 자기네 자기야? 응? 호호호."
"자기도 날 자기라 하고서도. 허허허."
성호는 자기 보배를 은영에게 건네주었다.
"이게 바로 오고 가는 정이 아니고 뭐요?"
은영은 자기 보배를 성호에게 주면서 별 생각없이 말했다.
"자기면 어떻고 저기면 어떻소? 이게 바로 주고 받는 정이지. 호호호."
그때 성호는 자기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 요 꽉 깨물어놓고 싶은 처녀야, 날 사랑해?)
성호는 가슴이 부풀어 오르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성호는 앞으로 걷다가 여린 풀숲에 곱게 핀 날씬한 참나리꽃을 꺾어 작은 꽃다발을 만들어 은영의 머리에 씌워주고 향기로운 백일향꽃을 꺾어주었다. 은영은 머리에 꽃다발을 손수 다시 바로잡아 쓰고 백일향 꽃향기를 맡더니 그윽한 깜장눈으로 성호를 바라보면서 생글방글 웃었다. 꽃다발을 쓰고 푸른 나무 숲 속을 배경으로 함박꽃처럼 웃으면서 성호를 바라보는 은영은 참말로 수림 속의 어여쁜 선녀 같고 그리스 신화속의 용맹하고 예쁜 녀신 헤라 같아 보였다.
성호는 가슴이 뭉클 해나 그녀를 꽉 끌어안고 키스벼락이라도 한바탕 안기고 싶었다. 그러나 성호는 용케도 충동을 억제하면서 리지를 잃지 않았다.
성호는 카메라를 가지고 가지 못해 그 아름다운 모습을 찍어두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보배를 다 찾았으면 이젠 여기 모엿!"
저쪽에서 승호가 고함쳤다.
보배찾기가 끝나자 오락판을 벌이게 되였다. 보배번호에 따라 한쌍의 남녀가 나가 사회자 승호의 요구에 따라 한가지 표현을 해야 했다.
"37번!"
이번에는 성호와 은영의 차례 됐다. 그런데 승호란 자식이 괴상한 표현을 시키지 않겠는가. 그는 은영과 몇몇 녀선수들을 쭉 세워놓고 성호의 눈을 싸매면서 성호를 보고 보지 말고 손더듬이를 해서 숱한 녀학생들  속에서 은영을 찾아내라는 것이였다.
"제길할, 번마다 날 애먹이거든."
성호는 볼이 부어 두덜거렸다.
"안돼요!"
이때 은영이 소리치며 달려오더니 성호의 눈을 잘 싸맸는가 얼굴이 닿을 정도로 살폈다.
승호랑 주의하지 않는 새에 그녀는 성호의 귀에 대고 "내 손가락으로 살짝 간지를 게." 하고 귀속말을 슬쩍 해놓았다.
성호는 은영의 수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은영과 녀선수들은 두 손을 쳐들고 서 있었다. 성호가 다가가자 승호는 고의로 녀선수들의 위치를 슬쩍 뒤바꿔놓았다.
"에라, 모르겠다. 아무 녀성 손이나 줴본들 뭐라냐?"
성호는 중얼거리면서 눈을 싸맨 채 녀선수들 쪽으로 걸어나갔다.
그때 승호가 익살을 피웠다.
"꽃 같은 선녀들이 손을 쳐들고 쭉 서 있네. 됐어. 손을 한나한나 만져보고 은영을 찾아 손을 들게나."
성호는 소나무 숲 속에서 쥐여보았던 그 따뜻하고 보동보동한 은영의 손을 찾느라고 이 손 저 손 쥐고 만져보았다. 가늘지 않으면 길고 차지 않으면 땀이 흥건한 것이 다 아니였다.
"제길할, ‘손을 간지를게.’ 해놓고 왜 아무런 동정도 없지?"
제일 마지막에 쥐우는 손이 별로 보동보동한 것이 은영의 손과 비슷했다. 그런데 성호의 손을 간지르지 않는 것이 이상했다.
"은영이 맞소?"
"호호호."
은영의 웃음소리가 맞았다. 그런데 킥킥거리기만 하고 간지르지 않는 것이였다. 코웃음소리도 별로 딱  앞에서 나는 것 같지 않았다. 성호는 손을 들어 키를 재려고 숫구멍을 만진다는 것이 그만 걀죽한 얼굴을 만졌다. 그 바람에 여기 저기에서 허허허, 깔깔깔, 키득키득 웃음보를 터뜨렸다. 그때 그 보동보동한 손이 성호의 손을 살짝 간지르는 것이 아니겠는가.
"은영 맞다!"
성호는 그 손을 꽉 쥐고 한발 끌고 나와 쳐들더니 눈을 싸맨 수건을 풀어 내리고 보았다. 허나 그녀는 "괴짜", "멋쟁이", "파랑새"로 소문난 정희가 아니겠는가!
"이게 웬 일이야?"
또 승호란 자식이 꾸민 짓이 아니겠는가. 글쎄 은영을 정희 뒤에 떡 세워놓았는데 은영마저 성호를 골려주려고 은영을 보고 성호의 손을 간지르라고 했던 것이다.
"기념사진을 찍어주지."
싱거운 꺽다리 승호가 왜가리 목을 잔뜩 빼들고 떠들어대며 카메라를 가지고 다가왔다.
"내 사진 한 장 찍어주지."
승호는 성호와 은영을 나란히 세워놓고 샷터를 누르려고 했다.
"나도!"
파랑새 정희도 성호 옆에 달려와 섰다. 성호는 좌우간 어여쁜 미녀 둘과 함께 정답게 사진을 찍는 기분만은 좋았다.
"이건 영원한 기념이야!"
"그래!"
은영과 정희가 감탄하며 식지와 중지를 성호 머리 위에 대고 깔깔 웃어댔다.
오락 판은 계속 흘렀다.
그런데 뜻밖에도 저쪽 수림  속에서 왁작 떠드는 소리가 났다.
성호랑 머리를 돌려 보니 웬걸, 은영과 정희가 손풍금을 치는데 웬 건달들이 서넛이 와서 지껄이더니 마구 목이랑 끌어안는 것이 아니겠는가!
열이 후끈 오른 성호와 승호 그리고 숱한 남자선수들이 우르르 뛰여갔다. 건달들은 돌멩이를 주어들고 달려들어 승호의 머리를 내리깠다. 승호의 머리에선 선지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격분한 나머지 성호는 공중잡이로 씽 날아나가며 양발차기로 두 놈 자식을 보기 좋게 차 넘겼다. 나머지 세 놈 자식은 돌멩이를 주어 뿌리면서 성호에게 덮쳐들었다. 그때 승호도 나무 뒤로 피했다가 씽 덮쳐나가면서 무쇠주먹으로 면상을 갈겼다. 그 찰나 성호도 날아드는 돌멩이를 피하면서 덮쳐나가 헤딩으로 한 놈 자식을 받아 넘겼다. 그런데 다른 자식이 돌멩이로 성호의 머리를 겨눠 뿌렸다. 성호가 옆으로 피했으나 돌멩이는 턱에 날아와 맞았다. 뒤로 벌렁 넘어졌던 성호는 벌떡 일어나면서 발로 홱 돌려 차 그자를 차넘겼다. 다른 남자 선수들이 왁 모여들어 건달 다섯에게 도리깨로 타작하듯 물매를 안겼다.
그 놈 자식들은 은영이랑 정희랑 녀선수들을 지껄였다가 피투성이 된채 수림 속으로 꼬리 빳빳해 도망쳤다.
"아이고, 이 머리를 어떻게 해?"
은영은 승호의 피투성이 된 머리를 보고 자기 수건을 꺼내 매달리다시피 하면서 얼굴의 피를 닦아주었다.
"턱에 피를 봐라!"
정희는 새된 소리를 지르면서 성호의 턱에 내밴 피를 닦아주었다. 그제야 성호는 턱이 아픈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날 오락판은 건달 때문에 스산하게 깨졌다. 하지만 성호와 승호는 은영과 정희를 건달들의 폭행에서 구해준 영웅으로, 은인으로 돋보였다.
 
 
 
 
 
 
 
 
                       5.쌍쌍이 나래치는 은제비
성호는 은영과 친해진 후 청춘의 푸른 꿈과 환상으로 둥둥 떠서 하늘의 별이라도 딴 듯한 기분이였다. 그는 늘 은영의 환심을 사려고 신사처럼 차려입고 머리기름을 뚝뚝 떨어지게 바르고 두툼한 련애소설책이나 끼고 다니면서 교실에서 읽었다. 어떤 때에는 은영과 정희를 불러 노래방에 가지 않으면 사교무장에 가서 안고 빙글빙글 돌아가면서 한바탕 놀았다.
초겨울이 되자 성호는 책보기도 싫어 스케트타기에 눈이 아홉이 돼 돌아갔다.
배꽃같이 하얀 눈꽃을 떠인 나무들이 삑 둘러선 얼음판에서는 파랗고 노란 갖가지 운동복을 입은 스케트애호가들이 유리판 같이 판들판들한 빙장에서 잔잔한 호수를 스치는 은제비들처럼 나래치고 있었다.
성호는 스케트를 타다가 불같이 빨간 운동복을 입고 노란 털실 모자를 쓴 한 처녀가 마치 수림 속을 스쳐 나래치는 솔개처럼 날렵하게 뭇운동원들 속을 이리저리 스쳐지나 미끄러져나가는 것을 보았다. 몸에 착 들어붙은 빨간 운동복, 균형 잡히고 탄력 있는 몸매, 활개치며 미끄러져나가는 그녀는 섹시한 몸매를 뽐내고 있지 않는가. 일시에 숱한 남학생들의 눈길이 그 불새 같은 녀스케트선수한테 쏠렸다.
성호는 누군지 알아 볼 양으로 그녀가 다가오기를 기다리면서 스적스적 미끄러져나갔다.
쾅!
성호는 다른데 눈을 팔다가 그만 탁 밀쳐 뒤로 쿵 자빠져 대여섯메터나 쭈르륵 미끄러져나갔다. 숱한 눈길에 뒤잔등이 바늘에 쏙쏙 찔리는 듯해 급급히 일어서려고 했다.
그때 불새 같은 처녀가 한쪽 스케트날로 흰 얼음가루를 물보라처럼 날리면서 반원을 쪽 긋더니 앞에 척 멈춰섰다.
"미안해요.”
그녀는 사과하려다가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어마나! 성호 오빠!"
성호가 쳐다보니 뜻밖에도 은영이 아니겠는가!
"어디 상하진 않았어요? 어서 일어나세요."
은영은 성호의 손을 잡아 일으켜주었다.
"괜찮소."
성호는 그렇게 말해놓고서도 상을 조금 찌푸렸다.
은영은 얼굴을 살짝 붉히면서 노란 털실 모자를 벗어쥐고 버릇처럼 파도치는 체육머리를 뒤로 쓸어넘겼다.
"왜 번졌어? 속 시원히 욕이라도 하세요."
성호는 엉덩이에 묻은 얼음가루를 툭툭 털며 중얼거렸다.
"그런다고 아프잖겠소?"
은영은 따라 미끄러오면서 "참말 다행이에요. 모를 남자를 번져놓았더라면 큰일 날 번했는데요."라고 했다.
성호는 짐짓 아픈 상하면서 넌지시 "내 절름발이 되면 은영이 책임져야 하오." 하고 능청을 떨었다.
"호호호. 한뉘 책임지라고?"
"그래, 그럼 안되오?"
"호호호. 단단히 걸고 드는구먼."
"이런 기회에 걸고 들지 않으면 언제 걸고 들겠소?"
은영은 혀를 홀랑 내밀더니 "진짜 언덕이 없어 비비지 못하는 량반이구먼." 하고 종알거렸다.
성호는 밀착한 빨간 운동복을 입은 은영의 몸을 흘끔흘끔 곁눈질해 훔쳐보았다. 짙은 눈썹까지 가릴락말락 타래치듯 넘긴 곱슬곱슬한 체육머리, 빛뿌리는 깜짱눈, 예리하게 솟은 코아래 웃음을 함뿍 머금은 빨간 입술, 얇게 생긴 얼굴선에 걀쭉한 얼굴, 탄력있는 호리호리한 몸매, 풍만한 가슴…
아, 은빛 스케트를 척 신고 빙장에 나선 이 빨간 체육머리 처녀 은영은 빙산에서 내려온 빨간 선녀가 아닌가.
저쪽에서 파랑새 정희가 미끄러져오더니 얼굴이 새파래서 은영을 보고 새침한 표정을 지었다.
"얘, 남을 넘어뜨리고도 재미나 웃고 떠드니?"
은영도 맞받아쳤다.
"별 일에 다 끼여드오."
이때 승호란 자식도 슬슬 미끄러져 와 왜가리 목을 빼들고 끼여들었다.
"스케트를 타다나면 넘어질 때도 있지 뭐."
성호는 쩍 하면 끼어드는 승호를 속으로 욕했다.
(자식, 언제 봐도 맨 물의 거시처럼 싱겁게 노는 놈이야! 흥!)
"우리 몇바퀴 돌가요?"
은영이 체육머리를 뒤로 쓰러넘기며 하는 말에 성호랑 승호랑 정희까지 따라나섰다.
은영은 노란 털실 모자를 꼭 눌러쓰더니  앞에서 활개 치며 쌩- 쌩- 미끄러져나갔다. 진짜 은제비를 방불케 했다.
허나 승호는 로반의  앞에서 도끼를 휘두르는 격이라는 걸 눈치 챘던지 힐끔 곁눈질하더니 테 밖으로 쭉 미끄러져나가 스케트 끈을 조이는 척하다가 빙장 저쪽에 사라졌다. 성호와 정희는 그래도 억지로 은영을 따라 미끄러져나갔다. 그러나 슬쩍슬쩍 옮기는 체육머리를 따라가자니 기교는 고사하고 되는대로 짧고도 빨리 발을 옮겨놓아야 했다. 그래도 체육머리 눈에 드이지 않으니 얼굴은 덜 뜨거웠다.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숨소리도 헐레벌떡. 드바삐 체육머리를 뒤따라가던 성호는  졸지에 무릎으로 얼음을 꽝 쪼으며 푹 꼬꾸라져 쓱 미끄러져갔다. 재수 없이 끈을 밟았던  것이다.
급급히 되돌아온 은영은 "아니, 상하진 않았어요?" 하고 놀라하며 성호를 부축해 일으켜주었다.
성호는 창피한 나머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드디여 따라 잡은 정희도 성호의 바짓가랑이에 묻은 얼음가루를 털어주었다. 성호는 항상 범송과 붙어 다니던 정희가 살갑게 구는 순간 눈에 거슬렸다. 까슬까슬한 체육머리와 파도치는 긴 노랑 머리카락이 성호의 얼굴을 간지럽히고 처녀들의 뜨거운 입김이 호호 풍겨왔다. 순간 성호는 온몸이 찡- 해나고 가슴이 울렁이며 무언의 심한 충격을 받았다. 진짜 꽃향기에 취해 몸을 가누기 힘들었다.
(은영은 정말 매력적인 처녀애야! 탄력 있고 날씬한 몸매는 또 얼마나 곡선미가 있는가!)
그후 성호는 빙장에서 체육머리 은영에게 본때를 보이려고 승호와 은영, 정희, 범송이 누구도 몰래 금싸라기를 뿌린듯이 총총한 뭇별들이 반짝이는 밤이면 밤 가는 줄도 모르고 남몰래 스케트타기를 연습하였다. 넘어지면 일어나면서 바지가랑이에 얼음가루가 하얗고 반지르르하게 묻으면 툭툭 털고 일어나면서 끈질기게 련습했다.
공든 탑이 무너지랴. 그 보람으로 성호는 숱한 학생들의 놀라움과 흠모의 눈길  속에서 체육머리 처녀와 함께 한쌍의 은제비처럼 유리장처럼 반들반들한 빙장 우에서 자유롭게 훨훨 나래칠 수 있게 됐다. 오, 그때 성호는 종래로 느껴보지 못한 쾌감으로 해 막 미칠 것만 같았다. 그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 그대로 영원히 멈춰 서 있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진짜 은영을 사랑하고 있는가!)
순간 성호는 순희가 천지꽃산에서 하던 말이 귀전을 아프게 때리는 것이였다.
"너한텐 첫사랑이 몇이나 되냐? 은숙이, 미옥이, 이제도 첫사랑이 몇이 될지 어떻게 아느냐?"
성호는 허무맹랑한 웃음을 지었다.
"이래서 사랑은 변한다는 말이 있는가?"
순간 성호는 평소에 승호가 하던 말이 떠올랐다.
"사내란 열집 사위가 돼야 진짜 사내란 말이야."
(너무 한 거 아니야? 그럼 열집 귀공주들을 잡아먹겠다는 것이 아닌가? 사람이 어찌 그럴 수 있어? 아버지 말씀처럼 난 절대 한평생 데리고 살 처녀가 아니면 걸버무리지 않겠어.)
성호는 순희를 사랑한다고 고백해놓고 저도 몰래 은영에 대한 사랑이 자기 가슴  속에서 싹트고 얼기설기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는 것을 가슴깊이 감지했다. 그는 어쩌는 수 없어 도리머리를 절레절레 가로 흔들었다.
진짜 저도 모르게 싹 트지만 또 한뉘 잊어지지 않고 쓰디 쓴 것이 사랑이란 말인가?
엄동설한이 다가온데다 난방시설이 미비해 아무리 랭수욕을 견지하는 성호라고 해도 침실에서 이불이 얇아 추웠다. 그는 이불거죽을 뜯어가지고 집에 돌아가서 어머니한테 두툼한 이불을 꾸며달라고 했다. 그러나 불시에 무슨 돈이 있어 새 이불을 꾸미겠는가. 어머니는 고육지책으로 집에 있던 헌 이불을 뜯어 이불솜을 꺼냈다.
"얘야, 미안하구나. 가난한 엄마를 만난게 죄다. 이 이불솜을 더 펴고 꾸며서 임시 덮으렴."
"괜찮습니다. 어머니."
성호는 별수 없이 어머니가 씻어 방치 돌에 두드려 하얗게 바랜 이불거죽과 낡은 솜을 꿍져 메고 대학교로 돌아가려고 했다.
그때 뜻밖에도 순희의 조카 월순이 찾아왔다.
“오, 때마침 성호 있구나.”
월순이 어색하게 웃으며 문고리를 잡고 들어서자 성호는 잔등에 소름이 끼쳐 본체만체 하면서 문 밖으로 나가려고 서둘렀다.
“아니, 가버리면 다야?”
월순은 따라 나오면서 “성호” 하고 불러 세웠다.
“난 너와 싸울 시간이 없어. 대학교에 가서 이불을 꾸며야 하니까.”
월순은 따라 오면서 “이전에 네 집에 와서 해낸 건 잘못했어. 이제라도 빌면 안 되니?” 하고 뜻밖의 소리를 했다.
그러나 성호는 월순의 말에 쉽게 넘어갈 위인이 아니였다.
“그래 오늘 빌고드는 저의가 뭐냐?”
월순은 뒤에서 손을 젓는 영옥을 힐끔 곁눈질하고나서 떨어지지 않는 입을 겨우 뗐다.
“우리 순희 북경에 가서 일자리를 얻은 것 같더라.”
그 뜻밖의 소리에 성호는 궁금해 “그래 대학시험은 안쳤니?” 하고 주춤 멈춰섰다.
월순은 고개를 숙이고 발끝을 보면서 쥐구멍으로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말했다.
“또 락제했단다. 이젠 시험도 치지 않고 큰오빠하구 말해서 아마 북경에 호구를 올리고 일자리를 찾은 거 같아.”
성호는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였다.
“참, 안 됐구나. 어쩜 4년이나 시험 쳐도 붙지 못하니?”
“해마다 몇점씩 모자라니 어쩌니? 대학에 갈 운이 모자라는 걸.”
성호는 은영과 정희를 떠올리자 인차 말머리를 돌렸다.
“순흰 수도에서 살게 됐으면 잘 됐구나.”
월순은 성큼성큼 걸어가는 성호를 뒤따라오면서 한술 더 떴다.
“순흰 날 보고 너한테 전하라고 하더라.”
“?”
성호는 혹시 누가 듣지나 않나 해서 주위를 돌아보았다.
월순도 주위를 한고패 살피더니 나직이 말했다.
“순희는 너를 사랑한다더라. 너보고 북경에 와서 일하면서 함께 살지 않겠는가 물어보라더라. 넌 순희를 ‘영원히 잊지 못할 첫사랑’이라고 했다면서?”
“그래, 그랬어. 건 다 지나간 얘기고.”
“그럼 지금은 사랑하지 않는단 말이냐?”
순간 월순의 언성은 거칠고 높아졌다.
성호도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너네 집식구들은 정말 이상한 사람들이야. 내 순희를 사랑하든 말든 간섭할 건 뭐야? 이렇게 강권하면 내 북경에 갈 것 갔애?”
월순은 또 본색을 들어내며 행악질했다.
“한마디로 뚝 찍어 말해라. 너 순희를 사랑하니? 안 하니? 살겠니? 안 살겠니?”
“주먹을 들이대고 강요하겠니?”
“얘, 우리 근심하지 말고 순희하고 살겠으면 살아라.”
이때 엄마까지 바자굽에서 가만히 듣다가 뛰쳐나왔다.
“엄마, 제가 알아서 처리할테니깐요.”
이번에는 상진까지 와서 성호를 말렸다.
“얘, 네 큰형이 웃마을에 있으니까. 근심하지 말고 북경에 가라. 수도에 가면 얼마나 좋니? 예로부터 충신은 효자가 아니라고 했다. 날 봐라. 부모를 모시려고 고향 마을에 돌아오는 바람에 공안국장도 그만두고 한뉘 풀밭에서 헤매고 말았어. 네까지 우리 땜에 시골에 돌아오게 하고 싶지 않다.”
성호는 그 말씀을 따를 수는 없었다.
“부모 마음이 고맙긴 하지만 불효를 저지를 수 없습니다. 수도가 좋다고는 하지만 그리 멀리 가면 부모를 몇해에 한번 보겠습둥?”
그 말에 월순도 부모도 어쩌는 수가 없었다.
성호는 아예 뒤를 맺고 끊었다.
“순희를 보고 날 잊어라고 해라. 수도에서 좋은 혼처를  얻어 잘 살라고 전해라.”
월순은 뾰로통해 발끝으로 발 밑 흙덩이를 톡톡 차버리다가
“알았다. 네 아니면 순희 북경에서 시집가지 못 할 거 같니?”
월순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렸다.
성호는 한숨을 후~ 내쉬였다. 순간 그는 홀가분한 감이 나 훨훨 날 것만 같았다.
성호는 숙사로 간신히 돌아왔지만 이불을 꾸밀 재간이 없었다. 그렇다고 불시에 어머니나 누나를 불러다 침실에 와서 꾸며달라고 할 수 도 없어 서성거렸다.
그때 피뜩 은영이 떠올라 집에서 가지고 간 찰떡 꾸러미를 들고 녀대생숙사에 발길을 돌렸다.
“그래, 이런 기회에 은영 속을 떠봐야지.”
성호는 은영이네 침실문을 두드리고 들어갔다. 다른 녀학생들은 성호한테 이상한 눈길을 보냈다.
“오빠 왔구먼. 앉으세요. 이건 뭐 또 들고 왔어요?”
은영과 녀학생들은 성호 앞인 것도 잊고 찰떡을 맛있게 주어먹으면서 웃고 떠들었다.
“은영, 내 좀 보기요.”
성호는 얼굴을 붉히며 현관으로 나왔다. 뒤따라 나온 은영을 보고 찾아간 사연을 말했다.
“그러지요. 내 잘 꾸미진 못해도 오빠 이불이야 꾸미지 못하겠어요.”
은영은 두 말없이 따라나섰다.
성호는 은영을 혼자 부르기는 그래서 나머지 떡 꾸러미를 들고 정희네 침실로 가서 정희를 불러냈다. 그런데 정희는 은영을 보자 질투의 눈길을 보냈다.
“은영이 가면 되겠구먼. 왜 나까지 불렀소?”
“둘이면 말동무도 되고 좋지 않소?”
정희는 마지못해 따라나섰다.
그녀들은 성호네 침실에 가서 책상 네개를 맞붙여놓고 그 우에 이불거죽과 솜을 펴놓고 한뜸 한뜸 바느질해나갔다. 성호는 바느질 하는 은영의 그 정다운 모습을 보면서 앞날의 그 무엇을 보는 상 싶어 흐뭇했다.
아마 그때부터 성호는 은영이 자기를 사랑한다고 믿고 마음 속에서 급속도로 사랑의 뿌리가 내리기 시작한 것 같았다.
성호는 늘 은영이 책을 보는 열람실에 가서 공부했다. 그녀가 오지 않으면 허전하고 공부하기도 재미없었다. 그럴 때면 무슨 구실을 대고 그녀를 찾아갔다. 때론 도서열람카드가 모자란다면서 그녀의 열람카드를 빌기도 하고 소설책을 빌려다 보고 소설독후감을 이야기하군 하였다. 그녀 또한 식성이 좋은 성호에게 남겨둔 밥표와 채표를 줬다. 그런데 한 학급에 있는 정희도 성호에게 밥표와 채표를 주어 성호는 배고픈 근심은 덜게 되었다. 그녀들의 은정이 고마워 성호는 시골에 있는 집에 가면 늙으신 어머니 보고 찰떡을 많이 쳐달라고 해 한 보따리씩 해서 트렁크에 메다가 은영과 정희네 침실에 가져다줬다. 하여 성호가 집에 갔다가 오는 날이면 승호와 성호, 은영과 정희네 침실은 토장과 찰떡, 순두부로 상다리가 부러질 지경,  다른 침실의 애들도 맛을 보러 건너오군 하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성호의 마음  속에 차지하는 은영의 자리는 점점 커갔다. 순희와 선화 그리고 해연이 들어앉을 자리는 점점 작아지는 감이 들었다. 실로 성호의 사랑은 이렇게 랑만과 환상 속에서 싹트고 얼기설기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며칠 후 성호는 한가지 놀라운 발견을 했다.
한번은 성호는 은영의 스피드를 따라 잡으려고 밤에도 스케트를 타는 련습을 했다.
그런데 달빛이 깔린 서북쪽 얼음판 우에서 도란도란 남녀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아주 귀에 익은 소리 아닌가.
(누굴가?)
성호는 스케트를 타며 그들의 곁으로 스쳐지나가면서 슬쩍 훔쳐보았다. 달빛을 빌어 보니 정희가 스케트를 신고 있지 않겠는가. 그것도 글쎄 싱거운 키꺽다리 범송의 허리를 잡고 외발로 서서 스케이트를 신지 않겠는가!
(혹시 정희가 범송을 좋아하는가?)
어두운 밤인데다 스케트를 스피드하게 탔기에 정희와 범송은 성호를 알아보지 못했다. 성호는 서로 붙잡고 스적스적 스케트를 타는 정희와 범송의 뒤를 한 30메터 미행하면서 동정을 살폈다. 달밤에 얼음판에서 웃고 떠들며 스케트를 타는 그 애들을 보자 슬그머니 질투 났다.
(왜 이러지? 정희를 사랑하고 있는 건가?)
성호는 이상야릇한 감을 느꼈다.
(허참, 사랑은 모를 일이야. 은영을 좋아하면서도 범송을 질투해?)
성호는 저도 몰래 정희와 은영을 대비해보았다.
그는 그 애들이 웃고 떠들면서 스케트를 타는 것을 보기도 싫어 스케트를 벗어 메고 숙사로 내려갔다.
그가 눈덮인 고요한 수림 속을 걸을 때다.
"후과가 두렵지 않아요?"
"난 모든 거 두려워하지 않는단 말이요!"…
소나무숲  속에서 또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누굴가?)
성호는 소나무 뒤에 숨어 숨을 죽이고 그 쪽을 살펴보며 귀를 기울였다. 저쪽의 남녀는 계속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진짜 렴치없구먼. 대학교에 오기 전에 약혼녀가 있었다는 걸 다 아는데요. 나와 왜 이래요?"
“건 사고야."
"사고? 그래 이젠 헤어지기라도 하겠단 말인가요?"
"그럴 수도 있지. 홍희와의 사랑을 위해서라면."
"뻔뻔스럽군요. 약혼녀와 이만저만한 거 아닌 거 같은데. 무슨 렴치로…"
"이전 일을 자꾸 끄집어내 방패로 삼지 마오. 난 홍희를 사랑하오."
"그 말 녀자 몇한테 곱씹었어요? 약혼녀하고도 했겠지?"
"누가 듣겠소. 좀 나직이 말하오. 들키면 학교에 통보 날라?"
"천하의 승호도 두려운 거 있구먼요. 호호호."
(승호, 저 자식이 홍희를 건드려? 저 놈이 진짜 열집 사위노릇 할 작정인가?)
성호는 자기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승호는 이전에도 술을 마신 뒤에 성호에게 종종 약혼녀 허경옥과 처음 성생활을 해보니 어떻더라고 자랑을 늘여놓은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지금 약혼녀 경옥을 배반하고 나 어린 홍희를 얼리지 않는가!
(량심없는 자식! 멍청이 같은 계집애라고야. 쯧쯧쯧.)
순간 성호는 도리머리질하면서 불쌍한 홍희의 걀쭉한 우유빛얼굴이 떠올랐다.
홍희는 외지에서 온 녀대생인데 미끈하고 섹시한 몸매로 해 대학생총각들의 인기를 끌었다. 홍희는 공부는 수술하게 했지만 학교 문예경인대회에서 무대에 올라 섹시한 몸매를 휘날리며 춤을 출라치면 총각들의 눈뿌리를 다 뺄 지경이였다. 그런데 그녀는 산재지구에 가기 싫어 한사코 조선족이 모여 사는 yj시내에 남으려고 기를 썼다.  yj시내 공안국 수사과장의 아들인 승호는 홍희의 그 욕망에 찬 약점을 틀어쥐고 구슬리고 있지 않는가!
"전도를 위해선 부득불 그렇게 됐소. 오래잖으면 졸업하겠는데 조심하는 것도 좋지."
그때 승호와 홍희는 소나무숲  속에서 천천히 걸었다.
성호는 소나무에 붙어서서 눈이 풀풀 흩날리기 시작하는 하늘을 쳐다보았다. 어둠 속에서 소나무숲을 하얗게 덮으면서 풀풀 흩날려 내리는 눈이 서글프기만 했다.
그때 저쪽 빙판에서 범송과 정희가 희희닥닥거리며 다가오는 목소리가 들렸다.
순간 성호는 아주 고독한 감을 느꼈다. 허나 한편으로 은영을 생각하자 스스로 위안되는 감을 느꼈다.
(그래, 난 은영이만 있으면 다른 애들이 눈에 들지 않아. 은영인 나보다 서너살 어린 대학생이야. 게다가 물 찬 제비처럼 예쁘고 활발하고 인정미가 넘치는 처녀야. 우리 둘이 살면 꼭 행복하고 늙으신 부모도 잘 모실 수 있을 거야.)
성호는 눈을 빠드득빠드득 밟으면서 숙사로 내려갔다.
신선놀음에 도끼자라가 썩는줄도 모른다고 성호는 달콤한 사랑에 빠져 푸르른 꿈을 꾸다나니 자연히 학습을 게을리했다.
어느 하루 저녁에 승호는 성호를 조용히 불렀다.
(이 자식, 또 무슨 련애경험담을 하려나?)
승호를 따라가니 숙사 앞에 침대가 놓여 있었다.
"이걸 함께 들자."
"이걸 들어다 뭘 해?"
"가면 알 수 있어."
승호는 무뚝뚝하게 말하면서 성호와 함께 침대를 맞들어  6층아빠트쪽으로 올라가는  것이였다. 묵묵히 침대를 들고 낑낑 거리면서 2층 아빠트에 겨우 올라갔다.
어둠침침한 헌 집에서 매캐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둘러보니 깨진 도자기관으로, 쥐똥으로 지저분하게 널려 있었다.
"뭐 하려는 거야?"
성호는 코를 싸쥐고 궁금해 물었다.
"쉿-"
승호는 입에 식지를 대더니 나직이 귓속말을 했다.
"누가 듣겠어.”
성호는 너무나도 이상해 “여기다 침대를 놔 뭘 해?” 하고 물었다.
승호는 철색얼굴에 괴상한 빛을 띠우더니 “이 세집에 지하열람실을 차리고 조용히 우리 정치학부의 중심연구과제인 고전철학을 연구할 예산이야.”라고 하면서 침대를 바로잡아놓았다.
“지하열람실?”
성호는 너무나도 어처구니없어 입을 쫙 벌렸다.
“야, 이 자식아, 너 좋은 교실과 침실을 두고 여기서 고전철학을 연구해?”
멀쑥한 승호는 보기와는 다른 소릴 쳤다.
“이 세집이야 말로 고전철학을 연구하기 맞춤한 신비로운 환경이지. 시끌벅적한 세속에서 어떻게 정치를 연구해?”
승호는 자못 정색해서 말했다.
"지식은 모든 사업의 에너지야. 지식이 있어야 사업에 성공하고 높이 바라오를 수 있는 거야. 지식이 있어야 부자로 될 수 있고 자기 야망을 실현할 수  있어. 이런 도릴 알기나 해?"
성호는 코웃음이 터져나왔다.
“축하한다, 지하실에서 탄생할 철학가를.”
“이 자식, 비웃긴?”
“아니, 교실이 복잡하면 왜 시내에 있는 너네 집에서 공부하지 못하느냐? 너 엄마와 아빠, 모두 출근하고 나면 조용할 거 아냐?”
승호는 계속 중얼거렸다.
“녀동생 선금이랑 경옥이랑 정말 귀찮아.”
그는 뒤늦게야 옆에 성호가 있다는 것을 의식한 듯했다.
“침대를 들어다줘 감사하다. 언제 술이나 한잔 마시자. 량산박 호한처럼 의리심이 강한 넌 입에 빗장을 단단히 지르리라 믿는다. 됐어. 이제 어둡기 전에 난 전기를 가설하고 창문에 문발도 쳐야겠어.”
성호는 승호가 항상 남을 아주 능란한 솜씨로 부려먹고 수염을 쓱 씻는데 이젠 습관이 돼버렸다.
(늘 우뢰만 울고 비는 내리지 않지.)
“전날 밤에 련애했지? 약혼녀는 어쩌고?”
성호는 이렇게 물을가 하다가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꿀꺽 삼켜버리고 그 신비한 낡은 세집 문 밖을 나왔다.
(나는 놈이야. 련애는 련애대로 하고 철학은 철학대로 연구한단 말이지. 애비 덕에 시내에 배치받겠는데 뭐가 딸려서 냄새 나는 어둠컴컴한 세집에서 철학을 연구해?)
성호는 기말에 성적이 보잘 것 없어 머리를 들기 힘들었다. 그날 승호가 철색얼굴에 가련하다는듯 쌀쌀한 비웃음을 흘리며 성호의 시험성적을 부를 때였다.  성호는 그만 얼굴에 모닥불을 뒤집어쓴 것 같아 책상 우에 두손을 얹고 얼굴을 파묻고야 말았다. 자칫하면 퇴학맞을 판이였다. 성호는 실로 발 밑은 천길 절벽이요, 밟고 선 바위돌이 움씰움씰 움직이는 격이 되고 말았다.
고민에 싸여 있을 때 그래도 체육머리가 찾아주었다. 그녀는 성호를 숙사 밖에 불러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교수청사 뒤 울부짖는 소나무숲 속으로 걸어갔다. 두 손을 맞잡고 머리를 다소곳이 숙인 채 눈 우를 빠드득빠드득 걷는 그녀의 뒤모습마저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성호는 넋을 놓고 뒤에서 바라보았다.
은영은 천천히 돌아서더니
“오빠, 앞날을 위해서라도 정신 차리고 공부해요.” 하고 단도직입으로 말했다.
(어떻게 알았지? 누가 알려줬는가?)
성호는 두 살이나 지하인 은영의 “훈계”를 듣고 시퍼런 면도칼날 같던 자존심이 단통 도끼에 맞은 감을 느꼈다.
그런 눈치를 몰랐을가. 은영은 습관처럼 파도치는 체육머리를 뒤로 쓸어 넘기면서 성호의 반응을 살폈다.
“이젠 늦었소.”
성호는 후~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면서 김빠진 공처럼 물앉았다.
“아니, 이렇게 꼴기 없는 남자일줄 진짜 몰랐어.”
은영은 어처구니없어 성호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오빠, 밤중까지 스케트를 타던 그런 완강한 의지는 어디 갔어요? 하늘을 떠인 사내대장부의 기세는 어데 갔어요? 네?”
성호는 은영을 볼 면목이 없었다.
“낙제 하면 은영과 한 학급에 다니고 좀 좋아서?”
“무능한 남자일줄 진작 알았어야 하는데.”
은영은 깜장눈까지 흘겼다.
“남들은 지하실에서 밤중까지 공부를 하는데 오빤 뭐예요? 네? 구두바닥이 닳게 춤 추지 않으면 스케트나 타면서 논단 말이죠. 그래도 자기 앞의 공부야 해야 되지 않아요?”
“그만 하오. 내 살 도리를 하지 않으리라고 훈계하려고 드오?”
성호는 불그락푸르락 하면서 두덜거렸다.
“충고예요. 오빠 공부하지 않으면 이젠 함께 스케트도 타지 않을래요.”
은영은 그 차디찬 말 한마디를 남기고 체육머리를 뒤로 휙 쓸어넘기고는 자리를 떠났다.
성호는 뒤에서 주먹으로 소나무를 탕 쳤다.
“에이!”
희망이 절망으로, 리상이 망상으로 돼버리는 시각에도 체면을 잃고 충고해준 체육머리 처녀 은영이가 고마웠다. 그녀의 마음 속에 자기가 있다는 것에 더욱 고마웠다.
이젠 성호는 좀 책을 봐야 했다. 기말에 아직도 경제학과목 시험이 남았건만 그는 그 놈의 서양과 조선의 애정소설유혹이 너무나 컸다. 그리하여 또 도서관에 가서 정치학부의 경제학공부는 걷어치우고 스탕달의 “붉은  것과 검은  것”, 천세봉의 “석개울의 새 봄”이란 소설을 빌어왔다. “석개울의 새 봄”은 짜릿한 련애이야기에 언어가 어찌나 형상적이고 생동한지 읽으면 읽을 수록 구수하고 감칠맛이 났다. “붉은  것과 검은  것”이란 서양애정소설은 머리를 탁 치는 것이 있었다.
“그래, 바로 이거야!”
그 소설의 청년주인공 줄리앙 쏘렐은 목수의 아들이였다. 18살이나 이상인 시장의 안해 레날 부인을 애인으로 사랑한 덕에 백작이란 명문귀족으로까지 되지 않았는가!
“하하하. 가시 영웅이로다. 생활을 잘 모르는 승호 같은 놈은 굴쥐처럼 헌 변소에 들어박혀 철학이나 연구해 학술가로 될 거야. 그 자식은 공안부문에서 한자리 하는 애비 덕에 상류사회에 진출하거나 대학에 남아 유명교수로 될 수도 있을 거야. 허나 난 농부 아들이기에 어떤 묘수를 쓰든지 가정배경이 그럴 듯한 규수를 붙잡아 사랑도 하고 상류사회에 바라올라가려는 푸른 꿈을 실현해야 해.”
성호는 주위에서 자기 꿈을 실현하는데 도움이 될 “레날 부인”을 눈빗질하기 시작했다. 그의 시야에 한 처녀가 나타났다. 그녀가 바로 파랑새 정희와 체육머리처녀 은영이. 여러 모로 뒤조사를 해보니 정희는 모교의 유명교수의 무남독녀, 은영은 부시장의 무남독녀, 둘다 규방의 규수라고나 할가. 성호는 마치 량 손에 떡을 쥐고 어찌 할줄 몰라 헤매는 격이 되고 말았다.
“누굴 선택해야 하는가?”
혹시 정희와 은영이 둘 다 성호를 사랑할 수도 있고 또 사랑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혹시 성호가 스스로 제 좋은 생각이나 환상을 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성호는 파랑새나 은제비나 모두 자기를 사랑한다고, 아니, 최저한도로 자기를 좋아한다고 여기고 푸른 꿈에 가슴이 설레였다.
(파랑새네 부모가 나를 좋아할가? 시골 농부의 아들인데. 봉건사회도 아닌데 아직도 반상의 차별이 이렇게 클가?)
성호는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몸서리쳤다. 아버지가 공안국장만 내놓지 않았어도 자기 처지가 이다지도 서글프지 않았겠는데 하는 막연한 생각도 머리를 쳤다.
(정희는 성격이 좀 팩하고 괴상하지. 사랑스럽긴 한데 농민 부모를 잘 모실 수 있을가? 노여움을 잘 내는 엄마와 맞을 수 있겠어?)
성호는 사랑과 효성을 모순되게 생각하지 않았다. 짜릿하고 깊은 사랑은 끊임없는 령감을 불러왔다.
그의 눈 앞에는 파랑새 대신 얼음판에서 훨훨 나래치는 은 제비가 나타났다. 체육머리 그녀를 방불히 보는 듯해 시무룩이 웃었다.
(그래, 어여쁜 녀대생이지. 가정배경도 좋고. 정부기관의 모모한 간부의 외동딸이니깐. 만약 그 집 맏사위로 되면 마음에 드는 일자리 알선해주겠지. 은영의 아버지 농부의 아들을 받아들일가?)
성호는 고민에 빠졌다가도 자기 인물체격에 기대 자신감이 생겼다.
(옛날 바보 온달은 왕가의 공주에게도 다 장가들었을나니. 요 자그마한 고을 아전의 딸이 뭐 그리 대단해. 내 인물체격이면 규수와 천생배필이야. 어디 가서 나 같은 사위를 얻어? 흥!)
어디서 생긴 용기인지 몰랐다. 성호는 그런 배심을 먹고 파랑새든 은제비든 량자간에 자기 나름대로 선택하리라 독한 마음을 먹었다.
(같은 값이면 분홍치마라고 부모를 모시는데 누가 낫다고 생각하면 누굴 택할 판이야. 누가 감히 시부모를 모시지 않고 내 색시로 될 수 있어?"
련 며칠 성호는 량손에 파랑새와 은제비를 쥐고 저울질을 했다. 나중에 그는 어쩐지 인정미 있고 사랑스러운 은제비 쪽으로 마음이 기우는 것을 어쩌는 수 없었다.
(좀 가련하긴 해. 허나 난 은영의 치마꼬리를 붙잡고서라도 은영의 애비 신세에 내 꿈을 실현해야 해. 살기 푼푼해야 부모도 시내에 모셔올 수 있지 않겠는가. 고급간부의 외동딸인 은영을 쟁취하는 거야 말로 비단에 수놓은 꽃을 따는 격이지. 이런 걸 두고 꿩 먹고 알도 먹고 둥지 털어 불을 땐다는 거야. 그렇지 줄리앙 쏘렐식으로 명문가족의 치마자락을 단단히 잡고. 으흐흐. 나의 레날부인이여~)
마음을 정했는데 웬 일인지 파랑새를 놓기도 좀 아쉬운 감이 들었다.
(사실 정희도 놓기 아쉬운 처녀애야. 성질이 좀 괴벽해서 그렇지. 후~)
성호는 땅이 꺼지게 한숨을 내쉬였다. 그러나 그것도 한순간에 지나지 않았다.
강렬한 점유욕으로 하여 먹장구름 속에서 대지로 쫙 내리치는 번개처럼 성호의 머리 속에는 은영을 손에 넣을 묘수들이 스치고 지나갔다.
노대없이 망망한 바다에 나섰다가 세찬 파도 속에 휘말려들어 넘어질번하던 사랑과 리상의 쪽배에 사랑의 돛배를 달고 전도의 항로가 항주 서호와 같이 잔잔하고 미묘한 경지에 이르렀다. 눈앞이 환해진 성호는 미친듯이 흥분해 소설책에 키스까지 뻑 안기고 고함쳤다.
"살았다, 살았어!"
성호는 침실에서 나가 그 길로 은영을 불러냈다.
"요새 좀 책을 보는 거 같더니 밤중에 왜 영상하게 이래?"
은영은 버릇처럼 체육머리를 뒤로 쓸어넘기면서 못 마땅한 눈길을 보냈다.
"음, 소설책을 보니 배울게 많더구먼. 은영만 내 옆에 있으면 다 될 수 있어."
"그래요? 공부를 잘할 수  있지? 응?"
"그럼, 리상도 멋있게 실현할 수  있지. 오늘만 동무해줘. 다신 찾지 않을게."
"그럼 약속하자요. 오빤 뭐나 하면 짱이죠. 공부에서도 노력하면 오빤 총명해서 꼭 될 수 있어요. 그래 오늘 밤에 어디로 갈래요?"
성호는 자못 흥분돼 하는 은영을 끌고 노래방으로 갔다.
그는 맑은 유리잔에 맥주를 찰찰 넘치게 부어드리면서 정중하게 말했다.
"고맙소. 이후에도 날 믿어주오. 난 모든 걸 약속대로 할 테니까."
은영은 성호의 잔과 딩둥댕 마주치고 나서 성호의 등까지 다독여 주었다.
"나도 기뻐요. 오빠가 책을 보고 뭔가 터득하기 시작하니 말이죠. 책에는 수천년 인류가 쌓아놓은 얼마나 많은 지식들이 있는가요. 잘 해보세요."
"정치를 그만하고 오늘 밤 질탕하게 놀아보자. 자, 건배!"
댕그랑!
잔을 시원히 굽을 낸 다음 그들은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 은영이 성호의 노래에 맞춰 반짝이는 오색령롱한 레이저빛 아래에서 탄력있는 몸매를 흔들어대면서 춤을 추는데 진짜 매혹적이였다.
그날 밤, 성호와 은영은 각기 좋은 생각을 하면서 밤 깊도록 맥주를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 양산도에 사랑환상곡에 맞춰 사교무에 어깨춤까지 덩실덩실, 재즈음악에 맞춰 디스코와 댄스까지 쿵작쿵 퉁작쿵 추고 또 추었다. 흥에 겨운 춤판은 식을줄  몰랐다…
오색령롱한 불빛이 별처럼 깜빡이는 사교무청사 안에서는 파격적이고 경쾌한 원무곡에 맞춰 대학마크를 단 신사숙녀들이 우아한 무용자태로 쌍쌍이 돌아가고 있었다. 그들은 마치 맑디맑은 물 속에서 분홍색, 파란색, 노란색 지느러미를 하늘거리며 헤엄쳐 돌아가는 금붕어들을 방불케 하였다.
성호도 흥에 겨워 꽃 같은 파랑새 정희의 오른 손을 잡고 날씬한 허리를 잡은 후 소용돌이치는 꽃물결 속에 들어가 빙글빙글 돌아가기 시작했다. 한바퀴 돌면서 볼라니 은영은 외롭게 걸상에 앉아 있지 않겠는가.
성호는 고의적으로 파랑새를 안고 은영이 앞에서 왔다 갔다 하면서 보라는듯이 멋진 사교춤 동작으로 리드해나갔다. 은영은 그저 성호와 파랑새를 보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눈인사를 살짝 할뿐이였다.
두바퀴 돌아왔을 때 그 긴 걸상에서 은영이 보이지 않았다. 성호가 파랑새를 안고 스리슬쩍 춤을 추면서 사교무청 안을 참빗질할 때다. 눈 앞에는 피가 꺼꾸로 쏟아질  듯한 장면이 안겨왔다. 글쎄 은영이 싱거운 꺽다리 범송의 품에 안겨 빙글빙글 돌아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저 싱거운 새끼, 정말 기를 채워도 한두가지 아니구나. 정말 죽고 싶어   환장했어?)
"아, 미치겠다, 미쳐!"
성호는 저도 몰래 파랑새를 활 놓으며 고함쳤다. 그 바람에 춤군들의 눈길이 일제히 쏠렸다. 그제야 실수한 것을  느낀 성호는 두 손을 잡고 할딱거리는 정희를 끌어안고 머리를 숙이고 춤을 추었다. 범송과 은영이 춤을 추는 꼴을 보기도 싫었다.
(끝내 올게 왔구나. 저것들이 진짜 사랑하는 건가?)
성호는 도저히 확인하기 싫었고 눈 앞의 현실을 받아들이기도 싫었다.
물론 성호의 품에 안겨 돌아가는 정희도 파랑새라고 불릴만큼 물 찬 제비처럼  예뻤다. 영화배우처럼 해말쑥하고 걀쭉한 얼굴, 하현달같이 가늘고 살짝 꼬리 들린 눈섭 아래 파란 꿈을 꾸는 듯한 파란 눈, 뜨거운 키스를 기다리는 듯한, 빨간 혀끝까지 보일락말락하게 빠금히 열린 입술, 게다가 파랑새를 수놓은 파란 적삼에 탄력 있는 허벅다리가 드러난 짧은 치마는 영화배우 같은 그녀의 인기도를 퍽 높였다.
허나 파랑새 어깨 너머 소똥무지에 박힌 함박꽃처럼 범송에게 안겨 생글방글 웃으면서 돌아가는 은영을 보자 춤을 출 기분조차 없었다. 그 느릿하고도 은은히 들려오는 곡에도 성호는 사선을 칠 때 길게 내딛어야 할 것을 짧게 디뎌 파랑새의 발을 자꾸 밟아 미안했다.
한곡이 끝나자 성호는 파랑새의 나긋한 허리를 놓고 노기 띤 얼굴로 범송의 옆에 앉아 있는 은영한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은영은 기다렸다는듯이 손을 내밀어 잡히며 범송을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였다. 마치 성호와 춤을 춰도 괜찮지 하면서 말이다. 그것조차 성호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성호는 격렬한 곡이 시작되자 동작을 급하고도 크고 힘차게 춤추기 시작했다. 은영을 안아 팽이처럼 사교춤판을 한 바퀴나 돌아가다가도 불시에 멈처서며 손을 쥐여 마구 돌려놓기도 했다. 또 허리를 안아 뒤로 젖히기도 하고 홱 나꿔채며 손을 잡아 빙글빙글 돌리기도 했다. 은영은 이상한 감이 들어 핼끔핼끔 못마땅한 눈길을 보냈다. 그러나 운동세포가 발달한 처녀여서 성호가 아무렇게나 휘두르며 못 살게 굴어도 다 맞춰 마지막박자까지 췄다. 그새 꺽다리 범송이 글쎄 파랑새를 안고 돌아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성호는 그 장면을 보아도 가슴이 별스레 아파났다.
(대체 무슨 판인가! 내가 은영과 정희를 둘 다 사랑하고 있어? 질투심만 불타오르니 말이야. 괜히 체육머리에게 질투의 불길을 달려다가 오히려 질투심에 속이 타들어가니 말이야.)
은영과 한곡을 다 춘 성호는 은영의 체육머리 밑에 드러난 고운 귀에 대고 귀띔했다.
"끝나면 문 밖에서 기다릴게. 할 말이 있소."
은영이 머리를 가볍게 끄덕였다.
성호는 뒤이어 울리는 곡마다 체육머리와 파랑새를 바꿔가며 춤을 췄다. 그런데 싱거운 꺽다리가 끼여들어 성호가 체육머리와 추면 파랑새와 추고 성호가 파랑새와 추면 체육머리와 춤추면서 애를 먹였다.
(개자식!)
성호는 주먹을 불끈 쥐였다가 한숨을 후~ 내쉬면서 참았다.
춤판이 끝나자 성호는 파랑새를 먼저 보내고 문 밖에서 은영을 기다렸다. 제일 마지막으로 체육머리가 나타나 층계를 내려오면서 사처를 두리번거렸다. 그녀는 성호를 발견하고 어두운 나무밭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뒤따라오는 성호를 뒤돌아보며 "밤도 깊었는데 무슨 일인지 간단히 말하세요."라고 나직이 말했다.
성호는 묵묵히 걷다가 돌아서며 은영의 두팔을 잡아 마구 흔들면서 갈범처럼 으르렁거리렸다.
"그래 그 꺽다리 그렇게 좋아? 그 자식 나보다 더 좋은 거 뭔데?"
"이걸 놔요. 놔!"
은영은 팔을 빼더니 체육머리를 뒤로 쓸어 넘기면서 생각 밖으로 맞대포를 쏘는 것이였다.
"범송 오빠는 오빠처럼 간에 가 붙고 쓸개에 가 붙지 않아요. 뭐나 진심이죠. 공부도 잘하고 인물체격도 좋고 뭐나 다 좋아요. 어때요? 만족돼요?"
"그래?"
"네. 누굴 좋아하든 말든 웬 상관인데요?"
"5.1절에 흰 반팔 와이셔츠 입고 다니는 주책없는 꺽다리새끼 그리 좋아? 엉?"
"픽-"
은영은 코웃음 치며 쏘아부쳤다.
"남의 흉은 잘 보는구만요. 범송은 오빠처럼 옹졸하지 않아요. 흉금이 넓고 시원시원하고 랑만적이죠."
그녀는 체육머리를 뒤로 쓸어넘기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성호가 아무리 애타게 불러도 거미줄로 묶은 선학 같아 멈춰 세울 수 없었다.
"아- 내 그 꺽다리를 어쩌면 좋을가? 정말 기를 채워 죽인다."
성호는 주먹으로 백양나무를 피 터지도록 탕탕 치면서 통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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