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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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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조선의용군의 동북진출
2016년 03월 11일 09시 00분  조회:2762  추천:0  작성자: 김성룡

중경에 자리하고있던 국민당 통수인 장개석은 일제패망후 전국범위에서 자기의 독재통치를 실현하려는 야심을 품고 세력확장에 서둘렀다. 이를 실현하려면 중국 서남부와 서북부에 모여있는 국민당 정예군을 신속히 전국각지 특히는 전략적 요지인 동북에 보내야했다. 일본이 항복할 기미가 보이자 장개석은 8월 10일에 즉각 팔로군과 신사군에게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고 일본군 두목인 오까무라 야스지(冈村宁次)에게 비밀전보를 보내 국민당군에게만 투항하고 공산당군에게 절대 항복하지 말라고 전했다.

8월 14일, 장개석은 대표를 쏘련에 보내 “중쏘친선동맹조약(中苏友好同盟条约)”을 맺게 했다. 장개석을 통해 동북에서 세력을 뻗치려는 미국을 제어하고 전후 동북에서 실리를 챙기기 위해 쏘련은 장개석 국민정부와 동맹조약을 체결하고 공산당과 팔로군에 대해 줄곧 애매한 태도를 보였다. 그리고 미국은 전쟁시 조차법을 연장해 계속 국민당에게 막강한 후원을 제공했을뿐만 아니라 함대를 동원해 국민당군을 각지에 수송했다.

공산당이 항일군민을 이끌고 섬북과 화동, 화북의 광활한 근거지를 개척했기때문에 국민당군은 동북으로 오려면 배길과 항공로를 리용할수밖에 없었다. 미군의 적극적인 협조를 받으며 장개석은 대량의 관원과 정예군을 동북에 파견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기름진 동북대지는 국공량당의 쟁탈대상일뿐만 아니라 쏘련과 미국이 세력범위를 확장하는 초점지로 변해갔다.

1945년 봄, 연안 양가령에서 열린 중국공산당 제7차 대표대회 기간 모택동은, “우리당과 중국혁명의 최근과 미래 전도로부터 볼때 동북은 각별히 중요하다. 만약 우리가 지금의 모든 근거지를 다 잃는다해도 동북만 장악하면 중국혁명은 공고한 기반을 가지게 될것이다.”라고 재삼 강조했다.

일제패망을 앞두고 중국공산당에서는 동북근거지 창설에 선손을 썼다. 연안에 있던 팔로군 총사령 주덕은 쏘련군의 진격과 함께 련속 7개 작전명령을 내렸다. 이 가운데 8월 11일 주덕이 반포한 제6호 명령은 다음과 같다.

“쏘련홍군의 중국과 조선경내로의 진입작전을 돕고 조선인민을 해방하기 위해 나는 다음과 같이 명령한다.

지금 화북에서 대일작전에 참가하고있는 조선의용군 사령 무정, 부사령 박효삼, 박일우는 즉각 소속부대를 통솔해 팔로군과 원동북군 각부대를 따라 동북으로 진격해 적을 소멸하는 동시에 동북의 조선인민을 조직함으로써 조선해방의 과업을 달성하기 위한 준비를 하라.”

중국관내에서 활동하던 조선의용군은 주덕 총사령의 명령에 따라 신속히 동북으로의 진군길에 들어섰다. 연안 조선혁명군정학교의 300여명 학원과 태항산 항일근거지에 있던 수백명 조선의용군은 각기 팔로군 부대와 함께 동북으로 발길을 재우쳤다.

 

 선전공작을 하는 조선의용군 

 

항일전쟁시기 중국관내에는 조선인으로 구성된 특수한 국제부대인 조선의용군이 있었다. 1938년 10월 10일, 포화가 울부짖는 무한에서 창립된 반일무장인 조선의용대는 국민당군과 함께 싸우면서 중경까지 갔다가 다시 항일최전선인 팔로군의 태항산 항일근거지로 나갔다. 중국공산당과 팔로군의 령도하에서 조선의용대는 조선의용군으로 확대되여 항일근거지 군민과 함께 두려움없이 일제와 싸웠다. 조선의용군은 또 자체 조직인 조선독립동맹을 창건하고 유능한 간부를 선발해 동북을 포함한 전국 조선인 집거구에 파견함으로써 조선주민들에게 항쟁의 희망을 심어 주었고 항일에 나서도록 조선청년을 동원하였다. 그리하여 중국내 조선 열혈청년은 조선의용군을 찾아 태항산과 연안으로 왔으며 일제 강제징병에 끌려갔던 많은 조선청년도 각성하고 조선의용군에 찾아오기도 했다.

하북성 발해연안에는 지금도 논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많다. 이는 일제의 강제이주로 10여만 조선농민이 하북 발해만 연안에서 벼농사를 짓다 남겨둔 논이다. 당시 하북성 로태(芦台)농장과 란현(滦县)의 백각장(百各庄) 농장에 조선농민이 많이 집중되였고 벼 생산량이 많아 비교적 유명했다. 이곳 조선농민들을 쟁취하기 위해 조선의용군 간부들은 비밀리에 집단부락을 다니며 항일구국 사상을 선전했다. 패망을 앞둔 일제가 조선인에 대한 억압과 수탈을 더욱 가심화함에 따라 많은 조선청년이 조선의용군을 찾아나섰고 팔로군과 함께 동북으로 진격했다. 

                 


하북 발해만의 로태농장       


란현백가장에서 조선의용군을 찾아간 김응삼 로인
 

현재 길림성 반석시에 살고있는 김응삼(金应三) 로인은 하북성 로태농장부근의 백각장이라는 곳에서 어린시절을 보냈다. 당시 15살이였던 그는 동네 낚시터에 낚시대를 드리운채 친구 세명과 함께 부모몰래 조선의용군을 찾아 연안으로 갔다. 이들은 진찰기변구에 찾아가 조선의용군을 만났으며 조직의 파견을 받고 연안에 가서 연안군정대학 학원으로 되였다.

김응삼 로인은 조선의용군을 찾아갈때의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자랑스러워하는 모습이다.

“친구의 아버지를 통해 연안에 조선의용군이 있다는 이야기를 비밀리에 여러번 들었습니다. 그래서 호기심도 있고 또한 조선사람들의 부대에 참가하여 싸워야만 일본놈의 탄압에서 해방될수있다고 생각하고 갖은 고생을 다하며 연안으로 떠났습니다. 적의 또치까밑으로 기여서 사선을 넘었습니다. 집에 알리면 반대할가봐 낚시대를 팔자로 강가에 드리워 놓았습니다. 그것은 부모들이 보면 팔로군을 찾아 간줄 알라고 말입니다. 그렇게 한달만에 연안에 도착하였는데 그때의 그 기쁨은 이루다 말할수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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