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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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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영원한 기념비》

제4장 오가황 조선의용군군인대회
2016년 03월 17일 19시 34분  조회:2272  추천:0  작성자: 김성룡
일제의 패망과 더불어 광복을 맞이했지만 가난한 조선족 농민의 살길은 여전히 험악하기만 하였다. 비록 쏘련군이 대도시를 점령하고 치안을 유지한다지만 기타 소도시와 농촌은 토비들의 성화가 극심했다. 게다가 국민당 특파원이 동북에 들어와 일본군 포로, 괴뢰만주국 군인과 헌병, 경찰을 보안부대로 편성하고 민족리간정책을 쓰면서 조선인마을을 습격하고 재물을 략탈했다. 그리하여 많은 조선인이 란세를 피해 반도로 떠났다. 1947년의 통계를 보면 중국 동북경내의 조선족 인구는 216만명으로부터 110만명으로 급감했다.
자기의 터전이 아까워 자리를 뜨지 않은 사람들은 불안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지내야했다. 광복이라고는 하지만 가난한 조선족농민에게 있어서 진정한 해방과 자유는 아득히 멀어만 보였다. 그들은 중국의 광활한 대지를 누비며 일제와 싸웠던 자기의 군인이 오기를 바랐으며 자기를 지켜줄 믿음직한 군대와 민주정부가 있기를 희망했다. 그리고 더욱 많은 열혈청년은 단연히 무기를 들고 자발적으로 마을과 터전을 지켜 나섰다.

 

오가황소학교에 세워진 조선의용군 군인대회 기념비

 심양시 우홍구(于洪区) 대흥향(大兴乡)의 오가황(吴家荒)조선족중심소학교는 최근들어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고있다. 한것은 조선의용군 군인대회 사적지 기념비가 드디어 2007년 11월 10일 이곳에 세워졌기때문이다. 중국의 광활한 대지를 주름잡으며 일제와 싸웠던 조선의용군은 60여년전, 바로 이곳에서 군인대회를 열고 중국내 조선인을 단합시켜 중국해방전쟁에 참여할 결의를 선포했던것이다.하지만 여러가지 원인으로 이곳에 기념비를 세우는 문제가 비준되지 않았다. 조선의용군 출신의 간부와 로전사들은 기념비를 세우기 위해 십여년간 노력해왔다.

심양의 조선의용군으로 편성된 리홍광지대 3퇀 중기반장으로 있었던 최창수 로인은 이렇게 소개했다.

“조선의용군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해 기념비를 세우려했는데 처음에는 자리가 없어서 그냥 그러다가 장례신이요 등 로간부들이 다 세상뜨고 우리가 드디어 하게 되였는데, 어떻게 했는가면 로전사들이 돈을 내고 오가황소학교의 자리를 빌어 기념비를 세우게 되였습니다. 사실 우리는 살아있으니 얼마나 행복합니까? 철령에서만도 우리동무들이 많이 희생되였습니다. 이것을 해 놓음으로써 희생된 동무들에게 떳떳히 말할수있습니다. ‘자 너네는 갔지만 우리도 이렇게 해 놓았다’고, 그래 집에 가도 마음이 아주 편안합니다. …이걸 못보고 간 동무들을 생각하면 정말 눈물이 나지요. 산성진, 류하, 통화, 림강, 무송, 휘남 그리고 여기 와서 우린 심양까지 해방하고 항미원조에 나갔습니다.”

해방전쟁시기 동북대지를 휩쓸며 무장투쟁을 진행했던 조선의용군의 불후의 업적을 세상에 남기려고 십여년간 애써 온 우리 로전사분들이시다. 자기의 리직금을 한푼두푼 모아서 희생된 전우에게 미안하지 않게 우리민족의 력사 공적을 남기려는데 꼬박 십여년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항일간부 장례신(张礼信)을 비롯한 분들은 기념비가 세워지는걸 보지 못하고 세상을 뜨고말았다 한다.

기념기 축성과정을 설명하는 리홍광지대 출신인 최창수로인

심양시 서탑구의 한 주민구 부근에는 조선족 제6중학교가 있었다. 주민구여서 교문은 크지 않았고 그곳으로 들어가면 몇개 교수청사로 둘러있는 큰 운동장이 하나 있었다. 이 자리는 원 서탑조선학교 자리였는데 지금은 제6중학교로 변했다고한다. 이곳은 1945년 8월 15일, 심양시 조선인 민회가 “8.15” 경축대회를 열었던 유서깊은 곳이다. 당시 심양시 조선인 “8.15”경축대회에는 약 500여명이 모였다고 한다.

80세 고령인 심양의 조선의용군 리홍광지대 선전대 출신인 서영화로인은 당시 경축대회의 견증자이다.

“이곳은 지금 심양시 조선족제6중학교인데 당시는 서탑조선소학교였습니다. 저앞 건물자리가 옛날 강당자리인데 거기서 경축대회가 열렸습니다. 대회에서 한청이 동원하여 참군하게 했으며 많은 조선청년이 따라 나섰습니다.”

일제패망후 심양조선인들이 모여 경축대회를 했던 곳을 설명해주는 서영화로인

리홍광지대의 정찰병이였던 최학만로인은 당시 심양과 심양부근 조선인의 상황을 이렇게 회억하였다.

“일본놈이 투항했습니다. 그래가지고 나는 심양으로 왔는데 심양에 와 가지고 8월 18일날 한청이라고 해방후 료녕성 민족사무위원회 주임했던 분인데, 이 량반이 연안에서 나온 사람입니다. 그는 심방자 학교마당에다 책상을 놓고 래일 조선사람들 회의한다해서 갔습니다. 그래 가보니 한청이란 량반이 ‘청년들, 나라 잃고 36년동안 압박을 받던 우리가 해방됐는데 우리 이제는 총을 들고 싸워야한다. 입대하라!’ 이겁니다. 그래 18일날 정식 군복을 입고 그때 군복이라 행방없지뭐, 총 하나를 받았습니다.”

최학만로인은 83세 고령이였지만 조선의용군 간부 한청의 호소에 따라 입대하던 일을 잘 기억하고있었다.

“8.15”경축대회가 있은후 심양에서 지하투쟁을 하던 기열료군구 조선의용군의 한청이 8월 18일 조선청년을 조직해 조선의용군 독립지대를 창건하고 지대부를 황고구(皇姑区) 주강가 조선족소학교에 설치했다는 기록이 있다. 한청은 이곳에서 지하공작을 하다가 조선의용군 주력부대가 오기전에 벌써 뜻있는 청년들을 모아 부대를 조직하기 시작했던것이다.

한청(韩青)은 1912년 12월 조선 경상남도에서 태여났다. 1931년 중국 심양시 서탑지역에 이주해온 그는 신문을 통해 남경중앙군관학교에서 조선인학생을 모집한다는 소식을 알게 되였다. 반일에 뜻을 둔 한청은 행장을 꾸리고 배를 리용해 상해에 갔으며 거기서 조선청년전위동맹에 참가하면서 혁명의 길에 들어서게 되였다. 1938년 10월, 무한에서 조선의용대가 결성되자 한청은 제2구대에 소속되였다가 태항산항일근거지로 갔다. 후에 한청은 당의 파견을 받고 연안에 가서 리상조(김택명), 김웅, 리근산, 홍림 등 조선혁명가들과 함께 항일군정학교 제5기를 졸업하였다. 이 시기 중국공산당에 가입한 한청은 졸업후 팔로군 제129사 정치부에서 사업했다. 그러다가 1943년부터 기열료군구 적공부(대적공작부) 간사로 지하공작을 했으며 1945년 8월에 조직의 파견을 받고 심양에 오게 되였던 것이다. 우리민족의 항일로간부인 한청은 해방후 1996년 심양에서 서거했다.

 

조선의용군 선견대를 조직했던 혁명가 한청(리직후 심양에서 별세)

 

심양조선인 “8.15”경축대회가 있은후 한청은 주강가 조선족소학교에 조선의용군등록소를 설치했는데 사흘만에 백여명 조선청년이 찾아와 등록하였다. 서탑뿐만 아니라 심양주변에서도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조선청년이 구름처럼 모였는데 한달사이 1000여명 규모를 갖추게 되였다. 이때 팔로군이 심양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접한 한청은 팔로군 선견대의 정위 당개(唐凯)를 찾아가 무기를 공급받았고 청년들을 조선의용군 독립지대로 편성하였으며 학교운동장에서 군사훈련을 했다. 

60여년의 변천으로 주강가조선족소학교는 언녕 사라지고 남은 그 자리마저 찾기 힘들었다. 어렴풋이 나마 운동장 하나가 있어 이곳이 옛날 학교자리였다는것을 짐작할수있었다.

9월에 관내로부터 주연(朱然)이 거느린 조선의용군 선견대 100여명이 심양에 도착했다. 진찰기변구 기동에서 활동하던 이들은 연안과 태항산에서 출발한 의용군 주력보다 썩 먼저 심양에 왔던 것이다. 이 대오는 부근 조선청년들을 규합시켜 신속히 400명 규모로 확대되였고 다시 한청이 조직한 조선의용군 독립지대와 합쳐 1,400여명 규모의 선견종대로 편성되였다. 한청이 선견종대 대장을 맡고 주연이 정치부 주임을 맡았으며 산하에 12개 중대를 두었다.

어디로 갈것인가? 중국공산당과 조선독립동맹의 명확한 지시가 없었기 때문에 한청과 주연은 선견대를 거느리고 우선 해방된 조국으로 가려했다.

무순의 리홍광지대 출신의 항일간부 최강 로인의 증언이다.

“한청이 거느린 선경종대는 심양을 떠나 조선인이 많이 집거해있는 안동, 환인 방향으로 나가면서 압록강을 건너 신의주에서 20여일간 머물렀습니다. 그런데 쏘련군은 ‘포츠담공고’에 따라 이들의 무장을 해제하면서 조선의용군의 무장입국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한청은 쏘련측과 교섭하여 무기를 되찾은 다음 부대를 거느리고 11월초에 신의주를 떠나 다시 심양에 오게 되였습니다.”

 이처럼 당시의 국내외 상황은 아주 복잡하였다. 공산당의 10여만 군인과 3만 간부가 신속히 동북으로 진격하고있다는 소식을 접한 장개석은 더욱 불안했다. 그는 공산당의 동북진출 행정을 지체시키기 위해 이른바 평화담판을 한다는 구실로 모택동을 중경에 초청해 발목을 잡아두려고 꾀하였고 또 9월 5일에는 공공연히 미군을 청도, 천진, 진황도에 등륙시켰다. 이는 쏘련의 불만을 자아냈다. 미국이 중국내에 병력을 포진하고 동북으로 세력을 확장할가 두려웠던 쏘련은 비밀리에 팔로군과 공산당에게 더욱 많은 편리를 줄것을 동북의 쏘련주둔군에 지시했다.

8월 28일에 모택동은 공산당 대표로 중경에 도착해 10월 11일까지 중경에 머물면서 국공담판을 지도하는 한편 계속 전반 정세발전을 지켜보았다.

10월 31일, 중공중앙에서는 동북의 모든 부대를 동북인민자치군(东北人民自治军)으로 개칭하고 림표를 동북인민자치군 총사령으로, 팽진을 제1정치위원으로, 라영환(罗荣桓)을 제2정치위원으로 임명하는 명령을 하달했다. 장개석도 웅식휘(熊式辉)에게 국민당의 동북행정대권을 맡기고 군지휘를 두률명(杜聿明)에게 맡겼다. 하지만 쏘련군이 협조하지 않았기때문에 국민당은 쏘련군이 주둔하고있는 대중도시에 소수 접수관원만 보내 정부간판을 걸었을뿐 쏘련주둔군의 거부로 부대를 동북에 들여보낼수없었다.

쏘련측으로부터 랭대를 받은 두률명은 울화가 치밀어 무력으로 동북진출을 강행했다. 11월 중순에 그는 진황도에 도착한 국민당 정예부대인 13군과 52군을 동원해 산해관을 지키는 동북인민자치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945년 11월, 전쟁의 포성이 다시 동북대지에서 울렸다.

 이러한 상황에서 1945년 11월 10일, 후속으로 동북 심양에 모인 조선의용군과 조선의용군 선경종대가 합쳐 2000여명이 조선족마을인 대흥향의 오가황조선학교 운동장에 모여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 전체대회를 성대히 열었다. 산해관에서 포성이 울부짖는 가운데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은 새로운 정세에 맞춰 금후 사업방향과 방략을 확정지었던 것이다. 조선의용군 무정사령은 대회에서 조선의용군을 1지대, 3지대, 5지대로 나누어 각기 남만, 북만, 동만으로 가서 현지조선인을 보호하고 군모집을 진행함으로써 중국해방과 조선해방을 위해 준비한다고 선포했다.

조선의용군 군인대회에 관한 최강 로인의 회억이다. 그는 당시 조선의용군 1지대 9중대 정치지도원을 맡았다.

“…우리 조선의용군이 주덕총사령의 명령에 의해 동북으로 진군하게 되였습니다. 여기 도착한 시간이 45년 9월말 경에 오가황, 대석교 이 일대에 조선의용군이 주둔하게 되였고 의용군 사령부는 시내에 있었습니다. 오가황 조선소학교의 중요한 의의는 이 대회에서 조선독립동맹 간부가 70여명이 조선으로 귀국하고 조선의용군 전군은 동북에 남아있어가지고 중국인민해방전쟁에 참가하기로 되였습니다. 이것을 이 자리에서 선포한것입니다. 조선의용군 사령인 무정장군이 조선의용군 약 2천명을 모아놓고 선포하기를 조선독립동맹 간부는 귀국하고 남아있는 조선의용군은 1지대 남만, 3지대 북만, 5지대는 동만지구로 가기로 했으며 간부들 명단도 선포했습니다. 그러니 우리 조선족력사의 출발점이 이곳에서 시작되였다는것을 강조하고싶습니다.”

 

조선의용군 노래를 열창하는 심양의 리홍광지대 로전우들

조선의용군 군인대회, 사실 조선의용군의 운명과 중국내 조선민족의 운명이 결정되는 순간이였다. 그리하여 동북의 조선민족은 조선의용군과 항일련군 지사들의 호소를 받들고 피압박 중국인민과 어깨겪고 싸우면서 철저한 자유와 해방을 위해 싸우게 되였다.

심양시 우흥구 대흥향의 오가황조선족소학교에 세워진 조선의용군 기념비는 오늘도 많은 리홍광지대 로전사분들이 찾아와 기념활동을 하군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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