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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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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북만에서의 조선의용군 3지대
2016년 03월 23일 14시 47분  조회:2483  추천:0  작성자: 김성룡
 

중앙인민방송국을 찾은 흑룡강의 사학자 서명훈
 
 조선의용군 심양 군인대회가 있은후 조선의용군과 조선독립동맹은 새로운 투쟁방략을 확정하고 중국내에서 중국공산당과 함께 민주주의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기로 확정하였다. 그리고 중국내 동북에 거주하고있는 광범한 조선인민을 단합시켜 새로운 민주정권을 수립하기 위한 투쟁을 진행하기로 결정지었다.

 조선의용군 군인대회의 포치에 따라 주덕해, 리덕산(李德山), 김연(金延), 리근산(李根山), 관건(关键), 리욱성(李旭成), 류등(刘登), 김학룡(金学龙) 등 19명 간부가 북만으로 파견되였다. 남만에 천여명 조선의용군이 남아있고 동만에 천여명 조선의용군을 파견한것과는 달리 북만에는 19명 간부만 파견한것은 그곳에 일찍부터 조선의용군 지하일군이 활동하여 이미 확고한 토대를 닦아놓았기 때문이였다.

 조선독립동맹에서 파견한 조선의용군 지하일군인 김택명(金泽明)은 북만의 조선인을 동원해 반일투쟁을 진행할 임무를 맡고 일찍부터 흑룡강성에서 활동하여 튼튼한 군중토대를 닦아놓았다. 그는 조선독립동맹 북만특별위원회를 조직하고 군중을 발동했으며 뜻있는 청년들을 모아 군대를 편성할 준비를 하고있었다.

 김택명의 원명은 리상조(李相朝)이다.

 1915년 조선 경상남도 동래에서 태여난 그는 일찍부터 반일에 뜻을 품고 중국에서 활동했다. 그는 광주 중산대학에서 공부했고 남경의 중앙군관학교를 졸업했으며 1938년 무한에서 조선청년전위동맹 요원으로 활약하다가 이듬해 연안의 항일군정대학 제5기를 졸업했다. 1940년 그는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고 이듬해부터 조선의용군 화북지대에서 활동하였다. 1942년 9월부터 그는 조직의 파견을 받고 동북에서 활동하게 되였다. 조직에서는 그에게 5가지 중요한 임무를 주었다.

 첫째, 동북과 조선의 반일단체들을 찾아 이들과 화북 조선독립동맹간의 련계를 건립하는것이다.

 둘째, 진보적인 조선인 민족주의자들을 모아 혁명단체를 조직하며 통일전선사업을 전개하는것이다.

 셋째, 조선의 공산주의자들과 련계하여 사업을 전개하는것이다.

 넷째, 동북의 항일무장부대와 련계하고 동북지방의 조선청년들을 묶어세워 무장력량을 강화하는것이다.

 다섯째, 조직된 혁명단체나 항일부대가 없을 경우 자체로 조선민족반일 통일전선을 결성하여 조선민족의 힘을 키우는것이다.

 김택명은 우선 농민으로 위장하고 파언현(巴彦县) 동성농장에 자리 잡았다. 마을상황을 료해한후 진보적인 청년 조경형을 조선독립동맹의 첫 맹원으로 받아들였고 1943년 5월에는 원용주, 김용덕, 한탁주 등 10여명을 받아들여 조선독립동맹 제12지부를 결성하였다. 그후 할빈 동과수의 반일활동가 정경호, 수화현의 김용진, 할빈의 현정민 등을 쟁취해 이해 10월 6일에 할빈에서 조선독립동맹 북만특별위원회를 설립하였다. 설립대회가 있은후 이들은 각지에 파견되여 활발히 활동을 전개하면서 우수한 조선청년들을 규합시키기 시작했다.

 김택명은 또 그동안의 사업상황을 북경시 서직문외 교장호동 12호에 설치한 중국공산당 북평지하련락소를 통해 조선독립동맹총부에 보고했다. 북만특별위원회는 흑룡강 각지에 농민강습소나 협화청년단과 같은 조직을 리용해 선전사업을 진행했으며 국내외 상황을 자상히 소개하는 한편 중국공산당의 지시정신을 전달하였다. 1945년에 쏘련군의 동북출병 소식을 접수한 이들은 미리부터 적의 무기를 탈취하여 최후승리를 이룩할 준비를 다그쳤다. 파언현 당안관에 보존되여있는 당시 제12지부의 선전삐라를 보면 다음과 같다.

 

 “천백만의 생명을 잔혹하게 학살하며 전쟁을 일삼는 흉악한 마귀 일본제국주의는 지금 붕괴되여가고있다. 때는 왔다. 그 독사의 유린을 당하고있는 민족들은 다 같이 궐기하라! 광명은 우리의 앞길을 비춰주고있다!

 피압박민족은 단결하자!

 제국주의를 철저히 타도하자!

 중국은 중화민족의 중국이다!

 조선민족해방 만세!

            조선반일독립동맹 12지부”

 

 선전삐라는 중국과 조선 인민을 최후의 결전에로 부르는 격문으로 되여 적의 숨통을 찔렀다. 삐라를 발견한 일본군과 괴뢰만주국 경찰들은 출처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되였지만 결국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다고한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되자 조선독립동맹 북만특별위원회는 할빈에 정식 간판을 걸고 본격적인 사업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흑룡강성의 사학자 서명훈 선생은 당시 할빈의 상황과 김택명의 활동에 대해 소개했다.

 “1945년도 일본놈들이 무조건 투항한 다음 그 당시 우리 할빈은 아주 란잡했습니다. 할빈에는 그때 쏘련 홍군이 들어와 군사관리를 하고 국민당도 할빈을 차지하려 들어왔고 공산당도 들어왔습니다. 공산당쪽에 8월 20일 쏘련홍군과 함께 리조린이 들어왔습니다. 할빈은 여러 세력이 쟁탈하는 그런 큰 도시였습니다. 조선민족으로 일찍 나와 활동한게 김택명입니다. 이 분은 1943년도 연안에서 두가지 신분, 조선독립동맹 맹원과 중국공산당 당원 신분이였습니다. 북만에 파견되여 빠언현(파언현) 동성촌에 있으면서 지하에서 독립동맹 북만사업위원회를 조직했습니다.…1943년 10월에 할빈에 들어와 조선독립동맹 북만특별위원회를 조직하면서 사업을 추진했습니다. 광복후 리조린과 손잡고 조선독립대대, 할빈보안총대에 조선독립대대를 건립하게 되였습니다. 8월 20일 남만 확대회의에서 정경호, 조경현을 모아서 지하에 있던 조선독립동맹이 지상에서 마음대로 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우리민족을 보호할려면 무장이 필요했습니다. 그는 리조린을 찾아가 두 자동차의 무기를 가졌습니다. 8월 22일, 오상과 빠언에서 군대를 모집했는데 40일간에 300명이 모였습니다. 조경형이 선동한 동선촌만 하여도 80명이 참가했습니다. 그때 사꾸라학교 지금의 60중인데 거기에 모여 훈련하였습니다. 9월에 사꾸라학교에서 훈련받고 9월 20일에는 할빈보안총대 조선독립대대를 정식으로 선포했습니다. 초기 병력이 300명인데 11월중순에는 6개 중대에 한 900명으로 확대되였습니다. 조선독립대대는 중국공산당의 령도를 받았으며 주로 할빈에서 송강군구 빈강위원회를 지키며 현지 질서를 유지했습니다.”

 

 1945년 8월 20일 할빈시 도리구 만몽호텔에서 열린 조선독립동맹 북만특별위원회 대회는 조직성원과 간부명단을 정식 공포했다. 특별위원회 서기로는 김택명이고 김용진, 정경호, 현정민, 조경형이 각기 조직, 사회, 선전, 농민사업을 맡았다. 한편 북만특별위원회는 각지 조선인 보호사업을 제기하면서 자체 무장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리하여 조선청년들을 모집하기 시작하였는데 소식이 전해지자 각지 조선청년들이 구름처럼 모여들기 시작했다.

 1945년 8월 22일에 김택명은 며칠사이 모인 300여명 조선청년을 도리구 사꾸라소학교, 지금의 할빈시 60중에서 훈련시켰으며 9월 25일에는 600명 규모의 할빈보안총대 조선독립대대를 편성하였다. 동북항일련군 출신인 리조린이 쏘련군과 협상하여 일본군 무기고를 털어 이 독립대대를 무장시켰다. 이 시기 김택명의 노력하에 할빈지역 각현에는 조선독립동맹 조직이 있게 되고 자체의 무장이 있어 조선사람의 생명재산을 보호할수있었다.

 


할빈보안총대 조선독립대대 대부옛터, 지금의 할빈시 제3중학교(김영훈 촬영)

 

 서명훈 선생은 당시 조선의용군 제3지대가 설립될때의 경위를 이렇게 이야기했다.

 “얄따협의에 따라 할빈은 국민당이 접수해야한다니 공산당은 물러나게 되였습니다. 마침 이때 해방직후니깐 연안의 조선의용군은 주덕의 6호명령에 따라 심양에 모였습니다. 신사군과 태항산, 연안에 있던 팔로군의 조선의용군이 다 심양에 모여 11월 7일에 군인대회를 열었습니다. 그래 무정이랑 조선에 가고 나머지는 1지대, 3지대, 5지대로 나누었습니다. 3지대만 19명을 보냈습니다. 할빈에 김택명의 보안총대 조선독립대대가 있으니까. 가장 먼저 나왔습니다. 이미 있으니깐 19명, 주덕해 리덕산 관건 그리고 가족까지 다 들어왔습니다. 할빈에서는 3지대 성원이 온다는걸 알고 원일우, 할빈의 의사인데 그를 보내 주덕해를 맞이하게 했습니다. 12월 19일 주덕해랑 석탄차를 타고 할빈에 도착했습니다. 도착하자 김택명이 가서 영접했는데 그들은 연안군정대학의 동창생이였습니다. 오랜만에 만나 같이 싸우게 되니 기뻐했습니다. 하루밤을 자고나서 철거하게 되니까 할수없이 할빈을 떠났습니다. 그날밤 성고자를 거쳐 배극도에 갔습니다. 그리고 11월 5일에 정식 3지대를 건립했습니다. 지금 그 집은 없고 터만 있습니다. 그때 마을 술공장이였는데 900명이 다 들어가지 못하고 눈이 오는데 밖에서 눈에 앉아 3지대를 설립했습니다. 지대장에 김택명, 정치위원에 주덕해, 총무처장에 관건이였고 부대를 3개 대대 9개 중대로 편성하였습니다.”

 

 1945년 11월 20일, 쏘련은 얄따협의에 따라 할빈시 행정권을 국민당정부에 넘겨주게 되였고 따라서 공산당과 팔로군은 할빈을 떠나게 되였다. 공산당이 할빈에서 조직한 보안총대에는 국민당의 정통성을 주장하면서 국민당쪽으로 귀화하는 현상도 나타났다. 하지만 보안총대 조선독립대대만은 견정하게 중국공산당과 조선독립동맹을 따라 끝까지 투쟁할 결의를 다졌다. 할빈에 도착한 주덕해는 김택명과 손잡고 조선독립대대를 이끌고 할빈을 떠나 11월 25일에 빈현(宾县)경내의 배극도(蜚克图)라는 작은 진에 가서 한 술공장 자리에서 조선의용군 제3지대를 편성했다.

 


  조선의용군 3지대 창립대회가 있었던 배극도의 옛터, 원 지주집 술공장자리(김영훈 촬영)

 

 사실 조선의용군 제3지대는 할빈보안총대 조선독립대대를 확대 재편성한 셈이다. 지대장에 김택명, 정치위원에 주덕해였고 부지대장에 리덕산, 정치처 주임에 리근산이였으며 참모장에 김연, 공급처장에 관건, 교도대 대장에 고영룡, 위생대 대장에 공효였다.

 조선의용군 제3지대는 흑룡강 각지에서 가는곳마다 조선인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고 수많은 청년들이 적극 참군할것을 신청했다.

 

 서명훈 선생은 당시 조선족의 참군열은 참 대단했다고 감탄했다.

 “그때는 대단했습니다. 지금은 리해하기 어렵지요. 3지대 조경형이, 연변대학에 있던 그분이 오상에 가서 가자마자 동원하니 심덕봉이란 사람이 4형제 모두 부부간에 다 참군했습니다. 오상에서는 한달사이에 500명이 참가했습니다. 그래서 할빈하구 오상의 기차가 직접 못오니 가깝지만 오지못하니 마차를 타고 아성을 돌아서 할빈에 왔습니다. 흑룡강성 자료를 보니 전송강성쪽으로 한족사람은 인구의 3이 좀 넘지만 조선은 7이 넘었습니다. 할빈뿐만 아니라 목단강도 다 그렇습니다. 아까 말했던 빠언현 동성촌은 한주사이에 백여명이 나오고 후에는 녀성들도 참군했습니다. 토비숙청에서 전사들이 부상하니 호사가 필요했으니깐…참군열이 대단했습니다.”

 

     조선의용군 3지대 창립지점을 안내한 흑룡강 사학자 서명훈(김영훈 촬영)

 

 조선의용군 제3지대는 전투부대이면서 공작대였다. 그들은 각지에서 토비를 숙청하고 인민을 보호했으며 한편으로는 공산당의 정책을 선전하고 각지의 정권건설을 지원하였다. 3지대 정위인 주덕해는 조선족의 생산과 생활에 깊은 관심을 돌리고 지방간부를 적극 양성했으며 조선족 출판, 문예사업을 지도하였다. 그리고 3지대는 기관지 “신민일보”를 출간했다. 이 신문은 목단강의 “인민일보”와 더불어 중국내 정착한 조선인을 상대로 조선독립동맹의 주장과 중국공산당의 민족정책을 적극 선전했다.

 조선독립동맹 북만특별위원회는 또 각지에 조선족학교를 세우고 간부와 교원양성에 진력하였다. 이로써 조선의용군 제3지대는 항일련군이 조직한 기타 조선인 부대와 함께 북만지역 조선인을 보호하고 토비를 숙청하면서 정권건설에 큰 기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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