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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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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장 광복후 길림지역
2016년 03월 29일 15시 50분  조회:2564  추천:1  작성자: 김성룡

아름다운 송화강 기슭에 자리잡은 길림성 길림시는 성 소재지인 장춘과 더불어 남만과 북만, 동만을 이어주는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이다. 그리고 토질이 놓아서 일찍부터 많은 조선인이 길림시주변에서 송화강의 물을 리용해 농사를 짓으며 살아왔다. 
 일제가 패망하자 국민당은 동북을 독점하기 위해 미리부터 장춘과 길림시에 접수대원을 파견했으며 괴뢰만주국 경찰과 군인, 지주무장을 모아 부대를 편성하였다. 한편 군사통제를 실시하고있는 쏘련군은 민생에는 별 관심을 돌리지 않았고 대중도시의 기본 치안상황에만 신경을 썼다. 그리고 협정에 따라 행정권을 국민당에게 넘겨주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동북의 기타 지방과 마찬가지로 길림지역 상황도 아주 혼잡하였다. 이러한 혼잡한 시국에 동북에 도착한 공산당 동북국 간부들은 쏘련군에 있던 항일간부들과 련계를 가지고 군중을 발동하고 길림시를 쟁취하기 위해 힘썼다.

제9기 전국정협 부주석인 조남기 장군은 광복후의 길림지역 상황을 이렇게 소개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투항할대 조선족은 길림지역에 많이 산재해있었습니다. 한 반달동안은 괜찮게 보냈지만 9월총에 이르러 사회는 무정부 상태에 들어갔고 사회가 아주 혼잡해졌습니다. 국민당의 사촉하에 괴뢰만주국 헌병, 경찰이였던 사람들이 지주세력과 결탁해 사람들을 괴롭혔습니다. 특히 조선족의 상황이 아주 어려웠습니다. 자주 강탈을 당했는데 소, 돼지 다 빼앗기고 릉욕까지 당하군했습니다. 당시 쏘련홍군은 내정에 대해서는 관심하지 않았기에 곤난을 많았습니다. 9월 중순에 조선족을 보호하기 위해 나는 마을의 80여명 조선족 청년들을 규합시켜 부대를 조직했습니다. 총은 많지 않았는데 80여명이 십여자루의 보총밖에 없었습니다. 일본군이 도주할때 버려진 칼이나 창 다 합쳐 20개 안되였는데 하지만 이것으로 우리는 당시 조선족 7개 자연촌, 40평방킬로메터 범위를 지켰습니다.”

 

 


9기 전국정협 부주석인 조남기 장군

 

길림시 주변 조선족청년들은 시국이 혼잡해지고 토비가 많아지자 스스로 무장을 마련해 마을을 지켜 싸우기 시작했다. 길림시 영길현 차로하의 조선족청년들은 조남기를 따라 일제가 버리고 간 총이나 칼을 가지고 자기 마을을 지켰다. 하지만 국민당의 사촉하에 토비가 더욱 창궐해지는 상황에서 진정 자기를 지키고 마을을 지킬려면 보다 믿음직한 조직을 찾아야했다.

 

(조남기장군)“우리는 출로를 찾아야했고 뒷심이 될 곳을 찾아야했습니다. 의지할곳을 찾기 위해 나는 길림시의 조직, 사실 조선독립동맹을 찾아갔습니다. 나는 이 동맹에 참가할것을 요구하고 량환준 동지의 소개로 참가했습니다. 이후 세가지 요구를 제기했습니다. 하나는 쏘련홍군을 옹호하는것이고 그때는 팔로군이 오지 않았습니다. 다음은 조선족을 보호하기 위해 힘쓰는것이며 세번째로 팔로군을 맞이할 준비를 하라는것이였습니다.”

 

일본이 투항한후 리진국, 량환준, 황범식, 황재동을 비롯한 조선인 유지인사들이 길림조선인해방동맹을 결성하였다. 리진국을 위원장으로 한 길림조선인해방동맹은 “일본제국주의 잔여세력을 철저히 숙청하자!”, “조선의 통일과 완전 독립을 견결히 지지하자!”, “중조 민족의 단결을 강화하고 공동의 적을 반대하자!”등 구호를 제기했다.

1945년 9월 1일, 길림시조선족소학교에서 길림지역 조선인대회가 소집되였는데 무려 500여명이 참가하였다. 대회에서 중국의 조선인의 전도와 미래를 두고 치렬한 론쟁이 있었지만 길림시조선인해방동맹이 자기의 역할을 잘 발휘해 대다수 조선인의 지지를 받게 되였다. 그리하여 최중렬, 최필현, 최경자, 황병훈, 배극, 황귀현, 남춘후, 장사백, 장인덕, 리찬해, 반병하, 안창수 등 50여명 성원을 더 받아들였다.

 

 


길림지역 조선인대회가 소집되였던 곳(원 길림시조선소학교 자리)

 

길림조선인해방동맹은 쏘련군에 있는 조선인 대위 박진섭(朴镇燮)을 통해 쏘련군 정치부의 지지를 받게 되였고 길림시 대마로의 원 괴뢰만주국 은행청사에 자체의 사무기구를 설치하게 되였다. 그리고 박진섭 대위를 통해 쏘련군 길림시 위수부사령원인 왕효명(王效明)을 알게 되고 또 중국공산당 길림특별지부의 서기 리유민(李维民)과 련계를 가지게 되였다. 왕효명과 리유민의 소개로 량환준을 비롯한 조선인해방동맹 간부들이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리유민은 1945년 10월 18일, 통천가의 김정혁의 집에서 조선인해방동맹 주요간부를 모아놓고 중국공산당 길림특별지부산하의 길림조선인 분지부를 설립하였다. 량환준이 분지부 서기를 맡고 최중렬이 조직위원, 리진국이 선전위원, 황재동이 로동위원, 배극이 청년녀성위원을 맡았다. 이때로부터 길림조선인해방동맹은 중국공산당의 령도하에 선전사업을 활발히 진행하였다. 중국공산당 길림조선인 분지부가 설립된후 길림조선인해방동맹은 주동적으로 분지부의 령도를 받으면서 선전여론사업을 적극 전개했다. 황범식이 주필을 맡은 우리글 간행물 “해방”잡지는 당의 정책과 주장을 적극 선전하였다. 청년녀성위원인 배극은 이때 허윤도와 김순호 등과 함께 조선인청년동맹을 조직하였다. 수백명 맹원을 가진 조선인청년동맹은 중국공산당의 령도하에서 일제와 괴뢰만주국 잔여세력을 청산하고 중조 민족의 단결을 추진하며 민족문화교육을 발전시키는것을 취지로했다. 배극이 청년동맹의 위원장을 맡고 우리글 간행물 “종”을 출간하였다. 허윤도는 이 잡지의 주필을 맡고 “계급과 계급투쟁”, “대중철학”, “련합정부를 론함”등 주요한 글을 번역해 실었다. 청년동맹은 또 3기에 거쳐 청년강습반을 꾸리기도했다.

중국공산당 길림시특별지부 조선인분지부 산하에는 또 황병훈이 맡은 길림 조선인 농민협회, 김찬해가 위원장을 맡은 길림 조선인 녀성동맹이 있었다.

량환준이 조직한 조선인해방동맹에 참가한 조남기는 마을주변에서 자위대 조선청년들을 훈련시키고 조선족마을을 순라하였다. 11월이 되여 팔로군 선견대가 길림주변에 나타났다. 략탈을 일삼는 국민당의 선견대, 치안군과는 달리 팔로군은 민족단결을 주장하면서 여러민족 인민을 평등하게 대하고 백성을 추호도 범하지 않았을뿐만 아니라 여러가지로 백성들을 도와주었다.

조남기 장군은 팔로군에 대한 인상을 이야기했고 팔로군에 입쌀을 지원하던 일을 회억했다.



“11월쯤에 팔로군 선견대가 나타났습니다. 내가 직접 본데 의하면 동북의 방을 보면 량쪽이 구들이고 가운데가 바닥으로 되여있습니다. 팔로군에 부분적 조선족 전사가 있었는데 이들은 구들에서 자고 한족 전사들은 그냥 바닥에 짚을 깔고 잤습니다. 이것이 평등이라고했습니다. 팔로군에 대해 들은적이 있지만 팔로군이 나쁘다는걸 많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직접 보니 그렇지 않았습니다. 사실을 알게 되니 더욱 팔로군에 호감을 가지게 되였습니다. 그때 팔로군의 가장 어려운 문제는 먹는 문제였습니다. 공작대를 농촌에 보내 량식을 징수했지만 국민당처럼 사처로 다니며 빼앗지 못하기에 참 어려웠습니다. 동북의 한족들은 팔로군에 대해 잘 몰랐고 국민당만 정통으로 생각했기에 량식을 내놓지 않고 나쁜 쌀만 조금 내놓군했습니다. 팔로군이 조선족에 대해 이렇게 좋은데 우리도 뭔가를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조선족을 동원해 쌀을 거두었습니다.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일제통치할때 쌀을 얼마 바치고 지주에게 얼마 뜯기우고나면 얼마 남지 않았지만 지금은 이곳저곳 쌀을 바치지 않아서 많이 남을것이니 남은 량식을 팔로군에게 바치자고 설득했습니다. 그리고 팔로군의 지지가 없으면 우리의 힘으로 마을을 지켜내기 힘들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래 20여만근을 바치게 되였습니다.”

 

1945년 12월 27일에 길림시 영길현 차로하에서 길림성 인민대표대회가 열리고 길림성정부를 세웠다. 대회에서는 주보중을 길림성 주석으로 선거하고 “길림성 시정강령”을 채택했다.

대회기간 조남기가 자위대 청년들을 이끌고 20여만근의 입쌀을 가지고 공산당과 팔로군을 찾아왔다. 보고를 들은 주보중은 즉각 조남기를 만나 면담했다. 18살밖에 안되는 조선족 청년이 단번에 20여만근의 입쌀을 팔로군에 가져왔다니 주보중도 크게 놀랐던것이다. 수십년간 혁명경력에서 무수한 조선혁명가들과 함께 일제에 대항해 싸워왔던 주보중은 “조선민족은 참 대단한 민족”이라고 치하했다. 그는 조남기에게 무슨 요구가 없는가고 물었다. 조남기는 선뜻이 팔로군에 참가할 의향을 밝히고 자기뿐만 아니라 자위대를 거느리고 팔로군부대에 참가하겠다고 표했다. 주보중은 조남기의 요구를 들어주고나서 조남기에게는 먼저 참군하지 말고 학교에 가 공부하라고 일깨워주었다. 대단한 조직력을 갖춘 훌륭한 젊은이였지만 한어말을 한마디도 못하는데다 문화정도가 낮은것이 안타까웠던 것이다. 그래서 주보중은 조남기더러 군정대학에 가 공부할것을 권고했다.

 

팔로군과 조선의용군이 길림에 도착하기전 항일련군 간부 왕효명과 량환준이 조직한 길림조선인해방동맹의 노력하에 공산당이 령도하는 지방부대가 편성되기 시작했다. 특히 왕효명이 길림시에서 조직한 길림보안대는 총병력은 8천여명에 달했다. 이 가운데 길림보안대 제3총대 제7대대는 길림시주변의 천여명 조선족청년들을 규합시켜 편성한 부대였다.

1945년 11월 28일, 길림보안대 제3총대 제7대대 조선족 청년들은 무장을 들고 매하구로부터 화전으로 공격하는 팔로군 부대를 도와나섰다. 그들은 화전현 부근의 동위자에서 치렬한 전투를 치렀고 백여명 국민당 선견군을 격파하고 화전을 해방했다. 화전을 해방한후 제7대대는 화전에 남아 민주정부를 보호하고 토비를 숙청하였다.

 

동북에 들어온 중국공산당 동북국 지도간부들은 일찍부터 조선인문제를 중시하기 시작했다. 11월초 동북국 북만분국 부서기를 맡았던 림풍(林枫)은 심양시 서탑부근에서 회의를 열고 조선인문제를 연구할것을 량환준에게 지시했다. 당시 료녕성 신빈과 심양에서 각기 한명, 흑룡강성에 2명, 길림시에 2명, 조선의용군 2명이 대표로 회의에 참가했다. 량환준은 림풍의 지시에 따라 소수민족 문제에 관련해 조선인 대표들과 토의하고 중국공산당의 령도하에 정권건설과 군대건설에 힘쓰며 힘을 모아 장개석을 타도하고 새중국을 세우기 위해 분투한다는 주장을 내 세웠다. 그리고 첫째 조선족농민은 계속 부치던 토지를 부치고 규정에 따라 토지세를 납부하며 둘째 조선족인민은 자녀들을 조선족학교에 보내고 학교가 없으면 새학교를 운영하도록 허용하며 셋째 조선족인민의 재산과 생명을 보호하기 위하여 조선족청년을 공산당부대에 참군하도록 동원한다는 내용의 제안을 동북조선인대표대회 제안으로 교부하였다. 국민당군이 산해관, 금주를 점령하고 심양으로 공격해오자 회의는 급급히 마무리 되였다. 하지만 중국내 조선인이 공산당이 령도하는 중국의 소수민족 일원으로 평등권과 자치권을 누리려는 대표들의 의견은 당 지도부에 전달되였고 당의 중시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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