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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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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장 북만과 남만에서
2016년 07월 23일 06시 42분  조회:2978  추천:0  작성자: 김성룡
일제가 패망한후 동북에는 토비가 많았다. 이 가운데서도 흑룡강성의 토비가 특히 살벌했다. 리화당(李华堂), 사문동(谢文东), 마희산을 두목으로하는 크고작은 비적떼는 한때 북만 3분의 2지역을 장악하기도 했다. 비적들은 공산당 간부를 살해하고 백성의 재물을 략탈했으며 함부로 사람을 죽이고 마을에 불을 지르군했다. 특히 조선족과 조선족마을에 대해 더욱 극심하게 괴롭혔다. 그리하여 논의 벼가 익어가는것마저도 버리고 살길을 찾아 자리를 뜨는 사람이 많아졌다. 많은 조선족 마을이 비게 되였고 도처에 조선족 피난민 대렬이 줄지어 다녔다. 도중에 비적들에게 재물을 빼앗기고 살해된 사람도 얼마인지 모른다.

간악한 비적들과는 무장으로 싸워야 했다. 북만에서는 조선의용군 제3지대를 중심으로 조선족 청년들이 무기를 들고 비적과 싸웠다. 송화강기슭의 목란현을 해방하는 싸움은 제3지대의 첫 토비숙청 전투였다.

 

방송국을 방문한 사학자 서명훈 선생(오른쪽)

 

흑룡강 사학자 서명훈 선생은 북만의 토비숙청 상황을 이렇게 개괄했다.

“3지대는 토비숙청 제일선에 많이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때 진운이 조선의용군 3지대는 퇀 편제지만 려단급 대우를 하라고 지시하면서 조선의용군은 국제부대이기 때문에 간고한 전투에는 참가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수요에 따라 연수전투 다음 상지전투 등 싸움을 겪었습니다. 목단강 조선족부대의 토비숙청은 조선의용군 3지대의 토비숙청과 달랐습니다. 목단강의 14퇀, 영안의 조선족부대는 토비숙청의 주력으로서 영안현의 마린하전투, 그때는 신안진도 영안에 속했습니다. 세린하전투 가장 크게 마교하전투, 동안사건 그리고 목단강시내 ‘5.15’사건 다 제1선에서 토비들과 싸웠습니다. 내가 전투에 직접 참가하지 않았지만 들은데 의하면 동안전투가 비교적 간고했습니다. 동안전투에서 우리부대는 흑산이란곳에 주둔했었는데 토비 700명이 동안에 들어와 조선사람은 무조건 막 죽이는 판이였습니다. 조선사람들은 갈데 없어 국경에 가까운 쏘련쪽으로 갔습니다. 동안학살에서 생존한 분을 만나 보았는데 그분은 한족옷을 입고 위장해서야 겨우 살아날수있었다고했습니다. 특히 마을의 한족분들이 도와주어서 살수있었다고합니다. 조선의용군이 비적들과 많이 싸웠기에 비적들은 조선사람을 마구 학살했던것입니다. 당시 소식을 듣고 조선부대 두개 퇀이 들어가 토비들을 소멸했습니다. 그후 목릉전투와 마계화전투에서 많은 조선족 전사들이 희생되였습니다.”

 

1946년 2월 당시, 근 2000명에 달하는 토비가 목란(木兰)현성을 차지하고 주변 마을을 략탈하고있었다. 북만에 도착한 팔로군 359려단과 조선의용군 제3지대는 공동으로 목란현성을 공격하기로 했다. 토비들은 목란현성 주변에 흙으로 담을 쌓고 많은 또치까를 설치해놓았다. 그리고 담에 물을 부어 얼구어 난공불락의 얼음산을 만들었다.

조선의용군 제3지대는 송강군구의 통일적인 포치에 따라 참전했다. 제2대대 2중대와 제3대대는 김택명 지대장의 인솔하에 목란으로 통하는 길목을 통제하고 적의 퇴로를 차단하거나 지원병이 오는것을 막는 임무를 수행하게 되였다. 그리고 제1대대는 팔로군 주력인 359려단과 함께 현성공격에 참가하였다.

길목을 통제하던 제3대대와 제2대대 2중대는 적을 가득 싣고 오는 적 지원군 트럭을 만나 전투가 벌어졌다. 매복했던 전사들이 일제히 사격하였다. 전투는 한동안 지속되였고 중무기를 갖춘 아군의 공격에 토비들은 황급히 오던길로 도주해 버렸다. 전투에서 2중대장 류창렬과 1소대장 리영구가 중상을 입었다.

아군은 수차 현성을 공격했지만 적의 완고한 저항과 얼음으로 된 담을 돌파할수없었다. 방법을 고안하던 끝에 조짚을 묶어 방패로 만들고 공격하자는 묘계가 나왔다. 전사들은 소대별로 나누어 새벽 추위를 무릅쓰고 조짚을 묶어 너비 2~3메터, 높이가 근 2메터에 달하는 커다란 조짚 은페물 4개를 만들었다. 공격이 개시되자 십여명 전사들이 은페물 하나씩 밀고 나갔다. 신기하게도 적탄은 조짚을 뚫지 못했고 아군은 4개의 조짚 은페물을 굴려 담에 접근했다가 담을 넘어 공격해 들어갔다. 당황한 적은 손을 들고 투항하거나 북쪽으로 도주해 버렸다.

 

흑룡강성 오상(五常)시는 일찍부터 조선사람이 비교적 많이 모여 사는 고장이다. 산 좋고 물 맑아 벼농사가 잘되여 이곳 입쌀은 지금까지도 널리 알려져있다. 일제가 패망한후 많은 토비들이 오상의 조선족 마을을 공격해 입쌀을 빼앗으려했다. 그리하여 벌써부터 많은 조선청년들이 자발적으로 무장대를 조직해 일제가 버린 무기를 들고 오상을 지키고있었다.

1946년 1월 29일, 음력설을 앞두고 산하툰의 2000여명 토비가 오상을 돌연 습격했다. 오상 무장대의 600여명 조선족청년은 수중의 수십자루의 보총에 칼이나 창을 들고 적과 싸우기 시작했다. 그들은 현 민주정부를 보위하는 한편 거리마다 골목마다 싸움터로 만들어 우세한 적과 두려움 없이 싸웠다. 전투가 백열화로 되고있을때 마침 무기와 음력설 물자를 싣고 길림쪽으로 달리던 팔로군 359려단의 자동차 몇대가 오상을 지나게 되였다. 전투장면을 목격한 그들은 중기관총과 경기관총으로 일제히 사격하였다. 혼비백산한 토비들은 많은 시신을 남기고 급급히 도주해 버렸다.

전투가 끝난후 싸움에 능한 오상 조선족 청년들이 마음에 든 359려단 책임자는 300여명 조선족청년을 접수해 359려단 5퇀에 편입시켰다. 이들 가운데는 후에 흑산대호산전투에서 소문난 “강철8련”으로 불리운 영웅적 부대도 있었다. 

 

동북야전군 10종대 28사 83퇀 3영 8련의 지도원 김교진이 남긴 회억록

 

강철 8련의 지도원 김교진은 해방후 오상 조선족청년을 위주로 편성된 8련의 상황을 자상히 적은 자료를 남겼다. 자료를 보면 “1946년 2월, 우리 동북민주련군 359려단이 군중을 발동해 공고한 근거지를 창설하기 위해 료녕으로부터 북상하는 길에 오상현을 지날때였다. 지방정부와 협상하여 현지의 4개 련 가운데서 2개 련은 현지에 지방무장으로 남기고 다른 2개 련을 5퇀에 편입시켰다. 5퇀은 이 전사들을 3영에 편입시켜 기포련과 8련을 구성했다. 우리 8련은 이렇게 조직되였다”고 쓰고있다.

1946년 봄 쏘련군이 철군할때까지 북만에서는 토비숙청을 끝내지 못했다. 각지 농촌과 심산밀림에 계속 많은 비적들이 잠복해있었다.

 

민주련합정부를 수립할데 관한 공산당의 주장과 평화의지를 보여주기 위해 1946년 1월 7일부터 동북인민자치군은 동북민주련군(东北民主联军)으로 개칭하였다.

산해관을 넘어 금주, 심양을 점령한 국민당군은 잠시적인 휴전기회를 빌어 신1군, 71군, 60군, 93군을 진황도에 상륙시켰으며 계속 북진을 시도했다. 국민당군의 공격에 맞춰 동북 각지의 국민당특무들도 일본군 잔여세력과 비적들을 사촉해 공산당에 대항하게 하였다.

1945년 12월부터 료동군구의 1개 퇀과 2개 포병련, 지방부대 그리고 조선의용군 제1지대 주력이 통화지역에서 토비숙청을 시작했다. 아군은 집안을 공격해 200여명 비적을 소멸한후 림강을 공략하여 1000여명 토비를 제거했다. 그리고 계속 몽강, 장백, 무송을 해방했다.

 

옥황산에서 굽어본 안개속의 통화시

 

장백산 여맥의 뭇산들로 둘러져있는 통화시는 아름다운 산간도시이다. 옥황산기슭으로 혼강이 흘러 이 산간도시에 활력을 보태주기도 한다.

동북민주련군 통화지대 사령부는 강건너 옥황산기슭에 자리하고있고 거기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행정사무를 보는 전원공서가 있었다. 당시 통화시는 공산당과 민주련군이 장악하고있었지만 일본주민구에는 무기를 놓은 수천명 일본관동군 포로가 있었고 국민당특무도 많았다. 그리고 급급히 편성한 통화보안대에도 불순분자들이 많았다. 전반 동북정세가 국민당에게 기울어진다고 판단한 이들은 국민당특무의 획책에 따라 폭동을 일으키려고 시도했다.

통화시 신화대가(新华大街)와 광명로(光明路)가 합치는 곳은 옛날 남관가(南关街)로 불리우는 조선인 집거지였다. 남북으로 간도려관, 조선리발소, 평양려관, 동양하숙을 비롯한 가게와 술집이 있었던 곳이다. 통화에 도착한 조선의용군 제1지대는 이곳에 지대부를 두었고 원 평양려관자리에 중대부를 두었다. 일본잔여세력과 통화보안대내의 불순분자들이 폭동을 준비하고있다는 기미를 알아차린 조선의용군 1지대는 1946년 양력설을 며칠 앞두고 2000여명 규모의 무장시위를 했다. 이에 질겁한 적은 폭동기일을 음력설로 미루었다.

1946년 2월 3일 새벽, 이도강(二道江)발전소를 통제한 폭도들은 전등불을 신호로 폭동을 일으켰다. 동시에 통화 옥황산에 세무지의 화토불이 타올랐다. 수천명 일본관동군 포로, 원 괴뢰만주국 경찰, 국민당 특무가 통화지대 사령부와 전원공서, 강남비행장, 포병학교, 공안국을 목표로 공격했다. 폭도들도 통화지대와 조선의용군 제1지대 주력이 대부분 토비숙청을 나갔다는것을 탐지했던 것이다.

조선의용군 제1지대 중기반장이였던 최창수 로인은 이렇게 회억했다.

“2.3폭동은 병원에서 겪었어요. 일본포로들이 도주했다가 잠복했던 놈, 국민당 정치특무하고 합병해 폭동을 일으키려했던것이지요. 우리 팔로군 사령부는 당시 옥황산에 있었는데 하루는 제가 병원에 있는데 불이 세번 왔다가 꺼지고 했습니다. 세번 왔다갔는데 그다음부터 총성이 났어요. 놈들이 사령부를 습격하고 우리 부대를 습격했던것입니다. “

 

리홍광지대 륙군중학교 출신의 변혜옥 로인, 옥황산 렬사탑에서

 

75세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답사팀을 안내해 통화시의 여러 전적지들을 답사한 리홍광지대 륙군중학교 출신의 변혜옥 로인은 이렇게 소개했다.

“여기는 바로 통화 옥황산입니다. 46년도 2월 3일 새벽에 패망한후 남은 왜놈들이 두목자 텅탠(藤田实彦) 참모장이라는 이놈을 위수로해 수천명 폭도들이 이 아래에 있는 팔로군 사령부(통화지대 사령부)를 습격해 들어갔습니다. 그때 많은 희생을 가져오고 위급한 시기에 우리 조선의용군이 여기 와서 폭도들을 진압하고 육박전을 해 가지고 생명으로서 이 팔로군 사령부를 보위했습니다. 우리 통화를 지키고 해방하는데 많은 공헌을 했습니다.”

 

조선의용군 1지대의 주요간부들이 외출했기때문에 당시 통화에 남은 주연, 심청, 주홍성, 리성만을 비롯한 간부들이 비상회의를 열고 대책을 강구했다. 주홍성은 경위중대를 거느리고 사령부를 보위하기로하고 기타 간부들은 통화시 각지에 주둔하고있는 각중대와 련락하기로 했다. 얼마후 수십명 폭도가 일본군도를 휘두르며 사령부로 공격해왔다. 건물주변에 은페물을 만들고 대기하던 경위중대는 주홍성의 명령이 떨어지자 세길로 나누어 반격해 폭도를 전부 소멸했다.

강남비행장에 있던 250여명 일본인 비행원은 비행장을 통제하고 비행기와 땅크를 동원해 통화를 점령하려 시도하였다. 적의 시도를 미리 간파한 조선의용군 1중대는 비행장 주변에 매복하고 로창영 분대만 남겨 보초를 서게 했다. 적이 로창영 분대를 공격하면서 치렬한 접전이 벌어질때 매복했던 1중대는 중대장 정동화의 지휘에 따라 번개같이 적을 포위하고 사격하였다. 폭도들은 무리로 쓰러졌고 남은자들은 겁을 집어먹고 다투어 투항하였다. 강남비행장의 적을 제압한 조선의용군 1중대는 얼어붙은 혼강을 건너 포병학교와 땅크부대 대부로 달려갔다. 그곳에서도 치렬한 격전이 벌어지고있었는데 1중대는 수비하고있던 통화지대 경위부대와 함께 앞뒤로 적을 공격해 200여명 폭도 전부를 소멸했다.

한편 조선의용군 제5중대는 중대장 고응석(高应锡)의 지휘하에 적십자병원으로 달려갔다. 이때 병원의 원장으로 있던 원관동군 시바다 (柴田) 대위는 100여명 일본인을 3개 분대로 나누고 병원의 요해처를 차지하고있었다. 잔인한 일본군 의사들은 수술칼로 자고있는 아군 부상자 150여명을 살해하고있었던 것이다. 병원에 도착한 5중대는 치렬한 격전을 거쳐 폭도를 전부 제압했지만 전투에서 정종덕(郑钟德), 김창식(金昌植), 허승곤(许承坤) 세 전사가 장렬히 희생되였다. 5중대는 병원의 기타 부상자들을 보호한 다음 전투가 가장 치렬한 전원공서로 달려갔다.

 

통화지구 전원공서 옛터 지금의 통화시 당위원회

 

통화지구 최고행정기관인 전원공서는 이번 폭동의 가장 중요한 목표였다. 옥황산에서 내려온 폭도들은 전원공서를 포위하고 공격하면서 1층, 2층까지 점령한 상황이였다. 통화지구 전원인 장아천(蒋亚泉)은 사전에 경위부대내의 불순분자를 처단하고 청사 3층을 사수하고있었다. 위급한 시각에 조선의용군 5중대가 도착했고 김기주가 거느린 2중대도 도착했다. 조선의용군 전사들은 부분적 통화지대 한족전사들과 합세하여 폭도들을 포위하고 공격했다. 아군은 건물 내외로 공격해 적을 제압하였다. 전원공서 보위전투에서 아군은 폭도 100여명을 격살하고 100여명을 생포했다.

날 밝을 무렵 총성이 멎었다. 통화시는 다시 평화를 찾았다.

조선의용군 경위중대와 5중대는 전보국청사를 지켜낸 복흥섭 중대장이 거느린 3중대와 함께 반격을 실시해 통화시 각곳에 널린 폭도들을 숙청하고 폭동진압의 승리를 거두었다. 조선의용군 김응석 중대장은 5중대를 이끌고 일본인 주민구를 수색하던중 한 일본인 집 천정에 숨어있는 29명 폭도를 납포했는데 그 가운데 폭동의 주요 획책자였던 후지다 미쯔히꼬(藤田实彦)도 있었다.

조선의용군 1지대 지도원이였던 최강 로인은 통화폭동을 이렇게 평가했다.

 “통화는 당시 일본놈이 거주하고있었고 또 일본군 잔여세력이 잠복해있었습니다. 비행기 땅크 대포들이 다 일본인이 장악하고있었습니다. 이때 일본군 잔여세력과 국민당 지하반동세력이 결합해 통화폭동을 일으켰습니다. 우리 조선의용군 1지대가 이들을 진압했습니다. 당시 통화지대라는 한족부대가 있었는데 그안에는 국민당의 지하당원 이런 불순분자들이 많아서 팔도하자에 가서 정돈을 하게 되였습니다. 그래서 폭동진압임무는 조선의용군 1지대에 떨어졌습니다. 우리는 근 3천명 폭도들의 폭란을 진압하고 주모자를 다 잡아서 총살하거나 포로로 가두었습니다. 이 폭동은 전국을 놀래웠습니다. 연안의 당시 신화통신사는 폭동과정을 상세히 보도했습니다. 승리한후 군중대회는 남경주재 쏘련 미국 영국 대사관에 일본군 잔여세력의 죄악을 폭로하는 전문을 보냈습니다. 이 폭동은 국내외를 물론하고 전국을 진감시킨 엄숙하고 또 아주 랭정하게 이 모든 복잡한 문제를 처리하는데 성공한 그런 전례가 되였습니다. 우리는 그후에 동북국의 명령에 따라 조선의용군을 리홍광지대로 이름을 고치기로 결정했습니다. 3지대 5지대도 마찬가지로 조선의용군, 조선독립동맹 공작위원회 등 명칭을 없애고 군대는 리홍광지대요 뭐요 바뀌여지고 지방조직은 동북조선인민민주련맹으로 명칭이 바뀌여졌습니다. 그후 우리는 리홍광지대시기 토비숙청에 몰두해 토비 500여명을 소멸했습니다.”

 

 

통화시 민주로에 있는 농업은행, 통화폭동을 진압한후 폭도들의 폭행과 진압성과를 전시하던 곳

 

“2.3”폭동을 진압한후 조선의용군 제1지대는 통화에서 리홍광지대로 재편성되고 조선독립동맹도 동북조선인민민주련맹으로 명칭을 바꾸게 되였다. 통화폭동을 진압한후 리홍광지대는 통화시조선족중학교 운동장에서 토비숙청 동원대회를 열고 세갈래로 나뉘여 본격적인 남만 토비숙청에 나섰다. 조관이 한 대대를 거느리고 집안과 림강 등 현으로 출발하고 안민이 한개 대대를 거느리고 류하현으로 출발했으며 장롱이 한개 대대를 거느리고 무송과 정우현으로 떠나갔다.

1946년 6월에 쌍양현 당정간부들이 몽강현으로 철수할때 토비들의 습격을 받았는데 부근에 있던 리홍광지대의 한 분대가 달려가 당정간부들을 구하고 토비를 숙청했다. 그리고 림강현에서는 조선족으로 구성된 현대대의 제3중대는 조세결, 정동화가 거느린 리홍광지대 제6중대와 배합해 림강의 토비를 숙청했다. 한편 리홍광지대의 안민 대대는 기병을 선두로 통화시부근의 “군지뢰(滚地雷)”라는 별호를 가진 토비두목이 이끄는 토비를 숙청했으며 조광 대대는 집안현의 손하남, 종해산이 거느린 토비무리를 소멸했다. 그리하여 1946년 11월까지 리홍광지대는 장백산 남쪽기슭에서 활동하던 크고작은 토비무리를 기본적으로 소멸하고 국민당 정규군의 공격을 유력하게 견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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