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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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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장 장춘쟁탈전 하편
2016년 09월 18일 20시 33분  조회:2754  추천:0  작성자: 김성룡

1946년 봄, 동북에서의 국공량당간의 겨룸은 무력투쟁과 담판의 형식으로 진행되고있었다. 미국제 무기로 무장한 국민당 10여만 주력군이 심양으로부터 본계, 사평으로 공격태세를 취했고 동북민주련군 총사령인 림표는 손에 장악한 팔로군, 신사군 주력부대를 사평부근에 포진했다. 이로써 동북에서의 대결전 태세가 이루어졌지만 동북에서의 정화를 실현하기 위한 국공량당의 담판도 치렬하게 진행되고있었다.

쌍방은 동북에서의 군사분단선을 어디로하여야하는가에 신경을 쓰고있었다. 하지만 무력으로 얻지 못한것은 담판으로서도 얻지 못하는 법이다. 국민당은 동북중부의 중요한 대도시인 장춘을 장악해 동북에서의 주도권을 차지하려했고 공산당에서도 장춘을 차지함으로써 국민당군의 공격을 막으려했다. 사람들의 시선은 치렬한 격전이 벌어지고있는 장춘에 집중되였다.

 

장춘공격전에 동원된 조선족퇀은 동남종대에 배속되여 장춘시 동남부로부터 돌진해 들어갔다. 조선의용군 제5지대 부분적 장병과 연변경비 1퇀 주력으로 편성된 조선족퇀은 박락권 퇀장을 잃는 큰 손실을 보면서고도 전투를 계속 견지해 싸웠다. 조선족퇀 1영과 2영 전사들은 장춘의 동식물원 부근에 당도했다.

답사팀을 안내한 김응삼 로인은 동물원 전적지를 알려주었다.

“지금 여기 보이는 이게 그전엔 뭐라했는가면 제1차 장춘공격전에서 이곳은 동물원이라고했는데. 이곳이 조선족퇀으로는 의미 깊은 곳입니다. 지금 보이는것은 돌로하고 철로 이렇게 해놓았는데 그때 이 동물원은 벽돌로 쌓았습니다… 16일날. 그렇게 하고서 고생호 부퇀장이 대리로 부대를 지휘했는데 그날 저녁으로 ‘부대를 다 모이시요.’했습니다. 전룡화 영장이 우리 련에 왔습니다. 우리 련은 원래 퇀을 보호하는 임무를 맡았는데 동물원방향으로 공격하기로 했습니다. 동물원방향이 바로 이곳입니다. 벽돌담이였고 하는데 많이 500~600명이 모였습니다.”

아군이 담을 넘자 많은 적이 반격해왔다. 적을 물리치기 위해 남먼저 사격위치에 당도한 기포련의 김룡환(金龙焕) 패장은 기관총 받침대가 도착하지 못한것을 발견했다. 적은 당금 눈앞에 닥쳐올 위급한 상황이였다. 어찌할것인가? 김룡환 패장은 땅에 엎디면서 자기 잔등을 받침대로하고 사격할것을 기관총 사수에게 명령했다. 사수는 명령을 어길수없어 52킬로그람이나 되는 총신을 김패장의 등에 놓고 적을 향해 사격했다. 적 몇놈이 이리저리 쓰러지자 다른 놈들은 땅에 납짝 엎뎌 머리를 들지 못했다. 사수는 사격을 멈추고 김패장의 오장륙부가 터지지나 않았나 살펴보았다. 그런데 김패장이 머리를 돌리며 “이 사람이 왜 사격하지 않소? 명령이요. 빨리 사격!”하고 소리쳤다. 사격수는 이를 악물고 다시 사격하기 시작했다.

박락권 퇀장이 희생된후 전투지휘를 맡은 고생호 부퇀장과 몇몇 간부가 의논한 끝에 새로운 전술을 구사하였다. 정면으로만 공격하지 말고 야간습격, 배후습격, 측면공격을 결부해 령활하게 적을 타격하자는것이였다. 아군은 새로운 전술에 따라 슬기롭게 적을 타격했으며 최소한의 손실로 동물원 적의 방어선을 돌파했을뿐만 아니라 270여명을 포로하였다.

 

동물원부근에 모인 조선족퇀 지휘부 요원들은 새로운 작전을 연구하였다. 김응삼 로인은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소개했다.

“여기서 한 500여명이 모여 대리퇀장 고생호, 리방남 창모장, 최동광 주임 세분이 조용조용 얘기했습니다. ‘지금 복수해야한다. 이번의 전투는 어떻게 하는가?’ ‘적의 배후공격, 측면공격하구’ 그때 날은 컴컴했으니까 지휘원들의 명령에 따라 각 부대 위치로 돌아갔습니다. 우리는 병력을 집중해 측면공격, 배후공격을 해 적을 격퇴시켰습니다…”

 

2일간의 격전을 거쳐 조선족퇀은 건국대학, 정수공장, 의과대학, 대륙과학원, 동물원을 비롯한 적의 거점을 하나하나 점령하고 흥인광장(兴仁)에 도착했다. 지금 해방광장으로 불리우고있는 괴뢰만주국시기의 흥인광장은 동서 흥인로와 남북 쓰딸린거리가 합치는 주요한 길목이다. 당시 광장서북쪽에 만자회(万字会)청사가 있었는데 지금은 새로운 은행건물로 변했다. 기재에 의하면 만자회청사는 3층으로 된 철근과 콩크리트 축조물이였고 청사둘레에 담이 둘러있었다.

 

 

원 만자회청사가 있었던 낡은 건물

괴뢰만주국협회협회(만자회) 중앙본부 옛터 표지판

 

아군은 먼저 흥인광장의 기타 건물을 점령하고 반월형으로 만자회 청사를 포위했다. 조선족퇀 전사들은 연막과 은페물을 교묘하게 리용하면서 담에 접근하여 담을 폭파하였다. 길이 열리자 돌격대원이 앞장서서 들어가 1층으로부터 공격했다. 급해난 적 지휘관은 책상과 걸상, 나무궤 따위를 주어다 계단을 막았다. 한편으로는 부하들이 도주하지 못하게 하고 다른한편으로는 아군의 공격을 차단하려는 수단이였다. 그러자 조선족퇀 전사들은 건물밖의 두더러진 부분을 잡고 2층으로 기여 올라갔다. 창문가에 이르러 먼저 수류탄을 던진후 연기속을 헤치며 벼락같이 들어가면서 사격했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아군을 보자 적은 계단이 막혀 도주하지도 못하고 그자리에서 전부 손을 들었다. 그리하여 만자회 청사에서 조선족퇀은 또 백여명 적을 포로하였다.

이날 적정을 살피러 나왔던 동남종대 부사령원인 오형부가 흥인광장 전투에서 총을 맞고 희생되였다.

 

조선족퇀 장병들은 치렬한 시가전을 치르면서 계속 시 중심부로 공격해 들어갔다. 삼도만 토비숙청때 4련 련장이였던 전룡화는 이때 2영 영장직무를 맡고있었다. 그는 제2영을 거느리고 훈춘가로부터 공격해 가장 먼저 시중심부인 대동광장, 지금의 인민광장에 접근하였다. 당황한 철석부대 지휘관은 한발자국도 퇴각하지 말것을 엄명하고 예비부대를 투입해 2영의 량측을 공격하였다. 아군의 상황은 아주 불리하였다. 통신원을 퇀지휘부에 보냈지만 종무소식이였다. 위기의 시각 전룡화 영장은 과단하고도 비장한 결심을 내렸다. 그는 량측의 적을 관계치 말며 4련과 5련으로 돌격조를 묶어 앞으로 공격하고 6련은 화력엄호를 할것을 명령하였다. 전투가 시작되자 그는 앞장서 탄우속을 헤치며 공격해 들어갔다. 죽음을 각오하고 무섭게 공격해오는 아군을 보자 적은 더럭 겁부터 앞썼다. 량측 공격부대도 제풀에 물러가 버렸고 적진지에서는 백기가 흔들렸다. 아군의 과감한 행동으로 장춘시 중심부로 통하는 길이 트이게 되였다. 하지만 이번 전투에서 아군은 20여명 사상자가 나타났고 영장 전룡화가 장렬히 희생되는 큰 대가를 치렀다.



전룡화 렬사, 룡정중학교 시절의 모습

 

전적지에서 설명하던 김응삼 로인은 의미심장하게 이렇게 말했다.

 “이 가운데 다시 강조할것은 우리 제2영 영장 전룡화 동지입니다. 그는 태항산에서 나온 사람입니다. 원래 룡정중학교를 졸업하고 항일하기 위해 관내에 들어가 조선의용군에 참가했는데 이 분이 저기 훈련소인데 앞장서서 돌격했습니다. 그는 옆에서 적이 나오는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막 뚫고 들어갔기 때문에 길을 열어놓을수있었습니다.”

 

“조선의 독립과 만주의 200만 동포를 위해 투쟁하고 앞으로 목숨까지 바치겠다!”고 비장한 맹세를 했던 우리의 영웅 전룡화 렬사! 그는 말 그대로 해방과 자유를 위한 성스런 혁명에 마지막 피 한방울까지 다 바쳐 싸웠던것이다.

전룡화 영장이 거느린 2영이 격전을 진행할때 1영과 3영도 부근에서 치렬한 시가전을 진행하고있었다. 평양(平阳)식당부근에서 싸우던 1영은 결사대를 조직해 앞길을 헤쳤다.

1련 련장 허철과 지도원 한용은 다투어 자진하는 우수한 전사들 가운데서 하룡만(河龙满), 정길룡(郑吉龙), 박덕실(朴得实), 강일순(姜日顺), 박창환(朴昌焕), 차경철(车京哲), 박정호(朴正虎), 신만송(申满松), 조복수(赵福秀), 리종덕(李钟德) 등 10명을 결사대로 선정했다. 결사대는 수류탄을 터쳐 철조망과 장애물을 제거하면서 두려움 없이 공격했고 그 뒤로 1련 장병들이 신속하게 돌진해 들어갔다. 그리하여 1련은 50여명 적을 격살하고 500여명을 포로하면서 장춘시 중심부에 접근했다. 아군은 정길룡, 강일순, 박창환, 차경철, 신만송, 박정호 등 6명 결사대 대원을 비롯해 20여명이 희생되였다.

한편 김명주(金明柱) 영장이 거느린 제3영도 적 길림경찰총대와 3개 대대를 기본상 소멸했다.

 

장춘시 중심부인 인민광장은 당시 동인광장이라고 불렀는데 주변에 괴뢰만주국 시정부청사, 경찰국, 방송국, 은행청사가 있었다. 모두 전쟁년대에 지은 건물이기때문에 아주 견고하였다. 이 가운데 은행청사와 시정부청사는 지금도 비교적 완벽하게 보존되여있다.

4일간의 혈전을 거쳐 장춘을 공격하던 아군 3개 종대가 모두 이 광장주변까지 도착하였다. 아군은 먼저 주변의 거점을 제거하고 마지막에 집중적으로 중앙은행 건물을 공격하기로 했다.

 

괴뢰만주국 중앙은행청사(지금의 장춘시 중국인민은행 청사)

 

4월 18일 새벽, 최후의 공격이 개시되였다. 서남종대는 경찰국과 방송국 청사를 공격하였고 동북종대는 은행청사 부근의 작은 거점을 공격했다. 동남종대는 쓰딸린거리, 민강로(民康路), 장춘대가(长春大街)를 따라 적 시정부청사를 공격했다. 동남종대의 주요 공격부대인 조선족퇀이 시정부청사를 공격하는 임무를 맡았다.

지금 길림성정부 사무청사로 사용되고있는 건물이 바로 괴뢰만주국 시정부청사였다. 건물자체도 기본상 원모습을 보존하고있었다.

전투가 시작되자 조선족퇀 장병들은 이곳에서 치렬한 전투를 진행했다. 아군은 척탄통, 박격포, 기관총을 비롯한 무기를 집중해 사격하였고 전사들은 두려움 없이 앞으로 전진하였다.

강력한 포격에 건물에 불이 달렸다. 조선족퇀 포병이였던 김주필(金周弼) 로인과 조선족퇀 3영 8련 1패 1반 전사였던 김병욱 로인은 그때의 전투상황을 이렇게 회억했다.

“우리는 시정부를 공격하던 전사들이 적의 반격에 많이 죽고 공격이 어려워지고있다는 소식을 듣고 대포 한문을 끌어다 시정부 청사를 향해 쏘았습니다. 포탄이 시정부 건물에 떨어지자 적진은 삽시에 수라장이 되였습니다. 적들은 층집에서 몰려나와 무기를 버리고 살길을 찾아 헤맸습니다.”

“거기 시정부청사까지 밀고 나가는데 적의 화력이 어찌나 센지…적들도 최후 발악을 하는것 같았습니다. 마주 서서 자꾸 총질하여 건물이나 유리창이나 성한데 없었습니다. 시가지전이란게 그렇게 간고했습니다. 어디 피할데도 없구, 그래 ‘확’ 들어가면서 ‘훅’ 날창으로 찌를래기를 하는데 나도 몇놈 찔렀는지 모릅니다. 시정부를 공격할때 날창으로 찔러 죽였는데 악을 먹고 뒤잔등을 찌르니 푹 들어가는것이였습다. 놈은 면바로 잔등에 찔려 ‘왁’하고 나가 쓰러졌습니다. 거기서 몇놈 잡구 그랬는데 마지막 그놈들도 최후발악으로 이도하즈까지 막 튀여나왔습니다.”

 

청사에 불이 달리자 적은 급급히 밖으로 도주해 나와 아군과 백병전을 치렀다. 조선족 전사들의 두려움 모르는 기세와 능란한 창격술앞에서 적병은 전의를 상실하고 모두 손을 들었기때문에 오후 2시쯤해서 시정부청사를 완전 점령하게 되였다.

 

주변 거점을 제거한후 아군 3개 종대는 병력을 집중해 가장 완고한 적 중앙은행 청사를 포위 공격하였다. 회색 화강암으로 축조된 이 방대한 건물은 지하 2층 지면 4층으로 되였고 봉페된 철창과 무거운 철문이 설치되여 더없이 견고하였다. 당시 철석부대 4천여명 적이 이 건물에 포진하고있었으며 건물 지하실에는 대량의 무기와 탄약, 식량, 약품이 저장되여있었다.

60여년만에 다시 장춘 중앙은행 전적지를 찾은 김응삼 로인은 자못 감회가 깊었다.

“…이걸 보니깐 지금으로부터 60년전의 전투 모습이 다시 떠오릅니다. 이곳은 중국인민은행입니다. 그때는 위만주국의 중앙은행이라고 그랬습니다. 이 건물은 아주 견고하다는걸 우리도 알았습니다. 당시 철석부대 지휘부가 여기에 있었습니다. 그러니 철석부대의 무장력량의 마지막 소굴입니다. 그놈들은 끝까지 저항하고있었는데 지금 보이는 이 기둥말이요…앞에는 다 마대에 흙을 넣고 전체 토치까로 만들어놓고… 뿐만 아니라 창문에 기관총, 보총을 배포해 놓았습니다. 그러니까 18일날 만주국의 시정청사를 공격하고 그다음에는 이걸 공격하기 시작했는데 18일날 오후부터 공격시작했습니다. 보다싶이 이것은 은행건물로 지은 집이여서 여간만 견고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총을 쏘아도 탄알이 튕겨나갈뿐 적을 사살하지 못했습니다. 포를 쏘아도 돌이 조금씩 떨어져 나가고 큰 효력이 없었습니다.”

 

4월 18일 오후부터 적의 마지막 거점인 중앙은행에 대한 총공격이 시작되였다. 아군은 엄호를 받으면서 수차 공격했지만 적의 화력이 강했기때문에 드넓은 광장을 통과할수가 없었다. 공격이 안되자 아군은 포 사격 위치를 다시 배정해 가까이에서 정밀사격을 하였다. 포탄은 적의 코앞에서 터졌고 철조망과 은페물, 장애물은 일제히 제거되였다. 뿐만 아니라 창문으로 날아들어간 포탄이 터지면서 청사에 불이 달리기 시작했다. 아군 포격에 적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틈을 타서 아군은 신속히 건물에 접근했다.

김응삼 로인은 이렇게 소개했다.

 “…먼저 포격을 가했는데 우리 대포는 구경이 큰것도 아니고 포신도 짧아 1메터 좀 남을까하는 거지요. 구경이 50미리인지 그런데, 아까 건물 벽을 보니 지금도 포탄자리가 있습니다. 포탄자리에 매질해 놓은거 아닌가 가 생각합니다. 지금은 나무가 무성하고 보기도 좋고 그런데 그때는 은행청사가 축조된지 오라지 않기에 나무가 이렇게 많지 않았습니다. 주변건물도 없었고 주위 200메터가 모두 개활지였습니다. 우리 퇀지휘부가 길 건너 2층집에 잡고있었습니다. 개활지에서 적의 중기관총 사격에 손실이 많았습니다. 악독한 철석부대는 원래 만주국의 헌병대와 마적을 끌어모아 편성했습니다. 놈들은 저녁에 몇번 반격을 시도하다가 캄캄할때 저기 ‘왁’하고 나왔지요.”

 

마지막 적 지휘부인 중앙은행 청사를 공략하던 과정을 설명하는 로간부 김응삼

 

아군이 광장을 지나 중앙은행 건물과 수십메터 거리를 두었을때 갑자기 건물의 문이 일제히 열리면서 천여명 적이 막 쓸어나왔다. 갑작스런 반격에 아군은 잠시 밀리웠고 조선족퇀도 민강로 입구까지 밀려났다.

더는 물러설수 없었다. 뒤에는 수천명 적 포로와 가득 쌓아놓은 무기들이 있었다. 놈들이 그걸 차지하면 그 후과는 상상할수 없었다. 조선족퇀 전사들은 저마다 총창을 꽂나들고 밀고나오는 적과 치렬한 육박전을 벌였다. 전투가 한창 치렬할때 아군 기타 종대가 공격해 적을 포위하자 반격하던 적은 모두 투항하고말았다. 하지만 이 전투에서 조선족퇀의 고생호 부퇀장마저 희생되였다.

고생호 부퇀장의 희생된 과정을 당사자들인 장덕만 로인과 김응삼 로인의 증언이 비슷하였다.

“퇀장경위원이 수장을 앞에 세웠습니다. 앞장서 가던 고생호 부퇀장은 옆 골목에서 튕겨나온 적의 날창에 찔렸습니다. 거기서 가슴에 찔렸는데 치료하다가 나오는 어간에 세상떴습니다. 전사들은 혈안이 되여 총창을 들고 적과 육박전을 했습니다. 1중대 중대장이 여섯이나 날창으로 찔러 죽였습니다. 그 다음 기관총 놀음하구. 무력이 약하니깐 놈들이 손을 들었습니다. ”

 

(김응삼 로인)“18일 중앙은행청사 공격전이 마무리 단계에 들어서서 대부분 적이 다 투항할때였지요. 고생호 부퇀장이 경위원을 거느리고 전장을 수습하고있는데 구석진 곳에서 완고한 적 한놈이 갑자기 날창으로 푹 찔렀지요. 뜻하지 않게 고생호 부퇀장이 복부에 찔려 쓰러졌습니다. 그분은 아마 후방으로 수송되다가 피를 너무 많이 흘려 희생되였을겁니다.”

 

이튿날 새벽녘에 중앙은행 건물 창문마다 백기가 나타났다. 완전히 고립된 적은 줄줄이 투항해 나왔는데 그 수가 4000명이나 되였다. 중앙은행청사를 점령함으로써 장춘쟁탈전은 승리적으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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