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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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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빈③
2017년 04월 09일 18시 51분  조회:3050  추천:0  작성자: 김성룡
1928년, 주문빈 일가는 북평시 해정구(海淀区)에 이사하였다. 주문빈의 막내 녀동생 김신정 로인이 남긴 회억에 의하면 체육에 남다른 재능을 가진 주문빈은 학교 운동경기뿐만 아니라 하북운동대회, 전국대회에까지 출전했다. 당시 “헝털”이라고 부르는 한 서양인이 주문빈의 뛰여난 체육실력을 좋아해 그에게 손수 운동기술을 가르쳐주었다한다. 그리고 주문빈의 가정이 펴이지 못한것을 보고 양 5마리를 사주며 양젖을 파는 장사를 해보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주문빈 일가가 양젖 장사를 시작하였는데 북평의 유족한 사람들이 양젖을 많이 사주었기에 장사가 퍽 잘 되였다. 하지만 통현에서 양젖을 북평 시내로 날라다 팔자니 여간 힘들지 않았다. 그리하여 북평시내로 집을 이사하기로했던것이다. 김씨 일가는 해정구 선연교(仙缘桥)부근에 집을 잡고 계속 양젖 장사를 하면서 살았다. 집은 귀신집으로 불리우는, 누구도 들려하지 않는 집을 헐값으로 들었다. 그때 집근처에 교회당 하나가 있었다고한다.  
 당시 주문빈의 동생 김상호는 북경대학에 입학하였고 함께 혁명활동을 하던 장진은 보인대학(輔仁大學)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주문빈은 반동적인 학교 교장과 경찰의 눈에 났기 때문에 로하중학교의 졸업증마저 가지지 못해 승학기회를 잃게 되었다. 학교에서 주문빈은 늘 진보적인 학생들을 동원해 국민당이 혁명을 배반한 죄장을 이야기했고 공산당의 혁명주장을 선전했으며 야학을 조직하고 또 교내의 반동적인 사생과 투쟁하였다. 그는 학생들의 앞장에 서서 제국주의에 아부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교장과 지주, 군벌가족의 학생들과 정면으로 싸웠던것이다.
  승학기회를 잃었지만 주문빈은 락심하지 않고 북경 해정구에 자리잡은 새집에서 당의 지시를 기다리며 새로운 투쟁을 준비하였다. 북평에서 3년간 주문빈은 늘 북경대학이나 보인대학에 가서 진보적인 대학생들과 접촉하였다. 그는 중앙쏘베트구역에서 싸우고있는 중국로농홍군의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전국인민의 항일투쟁을 이야기하면서 학생들을 고무격려했다. 그의 격려를 받아 보인대학 교원으로 학교에 남아있던 장진은 진보적인 “과학사(科學社)”라는 사회단체를 만들었다. 장진은 학생들과 함께 비밀리에 폭탄제조와 독가스방지설비 제조, 무전기 제조실험을 진행하였다.
  20세기 30년대 중반에 이르러 중국에 대한 일제의 침략야심이 날로 심각해졌다. 중국공산당은 광범한 피압박 로동자들을 동원해 일본제국주의자들과 투쟁할것을 강조하였다. 전민의 항일정서가 고조되고있는 가운데 일본자본가들의 착취를 받고있던 로동자들의 투쟁이 더욱더 치렬하였다.
 1936년 여름, 주문빈은 하북성 당위원회의 지시를 받고 당산(唐山) 공작위원회 서기로 당산에 파견 되였다. 그의 주요임무는 개란탄광의 로동운동을 전개하는것이였다.
 주문빈은 당산화동전기설비소(唐山华东电料行)에서 반도체를 수리하는 일을 하면서 비밀리에 당사업을 전개하였다. 그는 늘 개란탄광에 찾아가서 로동자들과 친하게 지내면서 로동자들에게 혁명의 도리를 설명해주었다. 그는 선후로 당산과 조각장(赵各庄)을 다니면서 당조직을 설립하였다. 당조직은 로동자들속에서 날로 더 큰 영향력을 과시하게 되었다.

로동자들을 조직하고있는 주문빈
 
 개란탄광은 당시 중국에서 가장 큰 탄광중 하나였다. 개란광무국은 비록 일본, 중국, 영국이 함께 운영한다고는 하지만 실권은 영국인이 장악하고있었다. 영국자본가들은 높은 리익을 추구해야했고 일본은 중국을 침략하기 위한 더욱 많은 선탄자원이 필요했다. 그리하여 이들은 이중삼중으로 중국 로동자들을 착취하고있었다.
 전면적인 항일전쟁이 폭발한뒤 1938년 3월, 개란탄광 조각장 광주인 자본가 진갑삼(陈甲三)이 새로운 작업기록을 실시하면서 로동자들의 로동시간을 늘이고 보수를 줄이는 조치를 취했다. 이는 로동자들의 큰 불만을 자아냈다. 당시 조각장에서 활동하던 주문빈은 파업시기가 성숙되였다고 판단하였다. 그는 지하 공산당원인 호지발(胡志发), 왕가의(王家毅)등과 함께 구체적인 파업실시방법을 연구하였다. 그들은 먼저 서림(西林)과 당가장(唐家庄), 마가구(马家沟)의 당원들과 련계를 가진후 전반 당산지구 광산로동자들이 함께 행동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로동자와 업주간의 첫 담판은 업주인 진갑삼의 배신으로 파탄되고말았다. 진갑삼은 부근의 반동경찰들을 동원해 로동자들을 탄압하려하였다.
 3월 21일 저녁, 주문빈은 호지발, 왕가의, 절진국(节振国), 장진원(蒋振元)을 비롯한 20여명 로동자 대표들과 함게 대책회의를 열었다. 이들은 모두 공산당에 가입할것을 신청한 열성자들이였다.
  회의에서 주문빈은 영국자본가들을 주요 목표로하고 일본측의 파괴와 간섭을 방지할 구상을 내놓았다. 그리고 파업위원회와 로동자규찰대(纠察队)를 설립하기로 하고 22일부터 총파업을 시작하기로 결정하였다.
  22일 오후 1시가 되자 만여명 로동자들이 모여왔다. 이들은 조각장광산의 사무청사를 포위하고 구호를 웨치면서 로동자들의 요구를 들어줄 것을 요구하였다. 업주인 진갑산은 할수없이 로동자대표를 만나주었지만 로동자들의 요구를 들어주려면 당산에 있는 상급의 지시를 받아야한다는 핑계를 대였다.
이때 조각장광산의 영향을 받아 서림에서도 25일 파업위원회를 설립했고 26일에는 당가장에서도 로동자사무처를 설립하였다. 이들은 3백여명으로 된 로동자규찰대까지 조직하여 파업을 선포하였다. 4월에 들어서서 당산광산과 마가구광산도 선후로 파업에 들어갔다. 그리하여 당산의 5개 광산의 수만명 로동자들의 대파업이 시작되였다.
  파업을 더욱 치밀하게 전개하기 위해 주문빈은 다섯개 광산의 로동자대표 련합회의를 설립하고 통일적인 투쟁강령을 작성하고 제국주의자들에게 18가지 요구를 제기했다.
  영국과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로동자들과 담판하는 한편 갖은 방법으로 파업을 파괴하고 로동자들의 단합을 무산시키려했다. 그러나 지하당조직의 두리에 굳게 뭉친 로동자들은 한치의 양보도 하지 않고 끝까지 투쟁을 견지해나갔다.
 파업투쟁은 5월까지 계속 전개되였다.
 광산로동자들의 지속적인 파업으로하여 제국주의자들은 감당하기 어려운 거대한 손실을 보았다. 당황해난 제국주의자들은 로동자 대표들과 담판을 진행하지 않을수없었다. 영국자본가는 5월 4일에 할수없이 로동자들의 요구를 들어주는 16가지 로자협약을 체결하였다.
 이로써 50여일간 지속된 개란탄광 로동자대파업은 승리적으로 끝났다. 개란탄광 로동자 대파업의 승리는 중국공산당이 령도한 로동운동사에서 한차례 성공적인 파업투쟁 사례였다.
  당시 당산시 공작위원회 서기를 맡았던 주문빈은 이 투쟁에서 뛰여난 재능과 탁월한 조직력을 보여주었으며 당조직과 광범한 로동자들의 깊은 신뢰를 받았다. 대파업의 승리는 기동인민의 항쟁을 크게 고무해 주었고 일본제국주의를 반대하는 기동인민의 더욱 큰 무장투쟁의 튼튼한 대중적 기반을 마련해주었다.
 주문빈이 령도한 당산의 개란탄광로동자 대파업이 계속 되고있는 동안 홍군대장정을 마치고 섬북에 자리잡은 당중앙은 1937년 8월에 섬서성 락천현에서 락천회의를 소집했다. 일본침략군이 대거 침략전쟁을 발동한 상황에서 열린 락천회의는 광범위한 항일근거지를 창설하고 대중에 의지한 항일유격전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이 가운데 기동항일근거지를 개척할데 관한 지시도 있었다.
  당의 지시에 따라 기동인민은 10개 현 항일인민대표회의를 열고 기동인민 항일봉기를 일으키기로 결정하였다. 회의정신을 실행하기 위해 주문빈은 개란탄광로동자 파업과 로동자봉기 지도사업을 맡게 되였다.
  당중앙의 지시에 따라 주문빈은 당산지구의 로동운동을 적극 지도하였다. 그의 뛰여난 조직력과 지도력으로하여 1938년 5월에 개란탄광 로동자들의 대파업이 승리적으로 끝났다. 하지만 실패를 달가와하지 않는 제국주의자들은 얼마후 일제의 지원을 받아 로동자들을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이해 6월에는 20여명 열성자들이 일본군과 광산의 경찰들에게 체포되고 광산파업위원회의 총대표인 장진원과 대표 절정수(节廷秀)가 비밀리에 살해 되였다. 뿐만 아니라 일본 경찰은 로동자 규찰대 대장인 절진국을 체포하려 하였다.
  무예에 뛰여난 절진국은 집에 쳐들어온 일본병사 한명을 칼로 찔러 죽이고 탈출하는데 성공하였다.
  일제의 피비린 탄압은 개란탄광 로동자들의 적개심을 불러일으켰다. 주문빈은 로동자들을 모아놓고 새로운 반일무장봉기를 일으키기로 결정하였다.
 1938년 7월까지 전국의 항일투쟁은 이미 일년간 지속되고있었다. 기동인민의 항일투쟁을 돕기 위해 팔로군 제4종대가 기동으로 진출하였다. 이에 호응하여 리운창(李运昌), 홍린각(洪麟阁), 고지원(高志远) 등 기동의 주요간부들은 란현, 천안, 풍윤, 준화 등현에서 항일대폭동을 일으켰다. 무장된 항일군중들은 모두 항일련군으로 개편되였다.
기타 지역에서 모두 항일폭동이 일어나고 또 항일련군을 조직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개란탄광 로동자들은 더 앉아 있을수 없었다. 1938년 7월 18일 밤 주문빈은 2,000여명 광산 로동자들을 조직하여 무장폭동을 일으켰다. 그는 싸움에 능한 절진국을 로동자규찰대 대장으로 임명하였다.

로동자들을 항일무장대오로 이끈 주문빈

  절진국은 주문빈의 지시에 따라 규찰대를 이끌고 적의 경찰서를 까부신후 무기를 탈취하였다. 그리고 조각장 경찰서와 탄광, 기차역을 점령하였다.
  3일후 당산에 주둔하고있던 일제 선견부대가 조각장으로 공격해왔다. 로동자 봉기대오는 신속히 반격하여 일제와 격전을 벌였다. 그러나 막강한 일제 정규부대와 무모하게 싸울수는 없었다. 주문빈은 지원하러 온 기동항일련군과 팔로군 4종대의 엄호를 받으면서 로동자규찰대를 안전한 농촌으로 이전시켰다.
  얼마후 일본군 주력이 물러가자 주문빈은 다시 부대를 거느리고 조각장을 점령하고 당가장을 습격함으로써 영향범위를 확대해 나갔다. 이들의 적극적인 행동과 선동이 있었기때문에 로동자 무장대오는 신속히 만여명으로 확대되였고 이 가운데 7천여명이 기동항일련군에 편입되였다.
  주문빈이 령도한 개란탄광 대파업과 로동자 무장봉기는 중국의 도시 산업로동자들이 봉기를 일으켜 항일전쟁에 참가하는 훌륭한 본보기를 보여주었다.
 하북성 동부인 기동은 동북과 화북을 이어주는 요충지로서 전략적 지위가 자못 중요하였다. 그러므로 기동항일근거지는 중국대륙을 삼키려는 야망을 안고있던 일본침략자들에게 있어서 목에 걸린 가시나 다름이 없었다. 기동의 인민들은 항일유격대를 도와 적의 후방을 교란하였고 교통요로를 습격하였으며 적의 거점을 공격하면서 침략자들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1938년 10월에 기동의 팔로군 주력과 항일련군이 전략수요에 따라 서부로 이동하였다. 그리하여 기동에 남은 항일유격대는 3개 분대로 나뉜 수백명에 지나지 않았다. 주문빈은 유격대 군정위원회 지도자의 한사람으로 유격대 제1분대의 정치부 주임으로 사업하였다.
  주문빈은 적이 계속 소탕하는 가운데서도 유격대를 거느리고 기동 동부에서 투쟁을 견지하였으며 기동지구 동부의 공산당 제1책임자로 있었다.
  1939년 가을에 이르러 주문빈이 거느린 유격대도 확대되였다. 그는 기동에 남은 부분적인 팔로군을 합쳐 유격대를 항일련군 제5총대와 제9총대로 개편하였다. 8월에 그는 제5총대의 3백여명 유격대와 함께 남부로 진격했다. 부대는 현지 소규모 유격대원들의 도움을 받으며 란현의 여러 거점을 점령하였고 또 중요한 증가만(曾家湾) 거점도 제거하였다. 그 외에 주문빈은 항일련군 유격대를 거느리고 유격투쟁을 견지하고 토비를 숙청하면서 근거지를 확대해 나갔다. 그는 근거지의 군중들을 발동해 기동의 첫 련합현 당위원회와 풍란천(丰栾迁) 련합민주정부를 설립하였다. 주문빈이 련합정부의 서기를 겸했고 로계명(卢启明)이 현장을 맡았다.
  련합정부는 부근의 백여개 촌을 관할하고 농촌당원들을 크게 발전시켜며 항일대오를 장대시켰다.
  기동유격근거지를 눈에 든 가시처럼 여긴 일본침략자들은 3만여명의 괴뢰군을 끌어 모아 유격근거지에 대한 토벌과 소탕을 감행하였다.
  근거지를 확보하려면 적과 싸워야 했다. 주문빈은 전투력이 약한 적의 치안군을 선제타격해 소멸할 계획을 세웠다. 그는 1941년 11월부터 1942년 2월까지 기동의 항일부대를 집중해 적의 치안부대를 공격하였다. 유격대는 11월 15일에 준화(遵化) 40리포(四十里铺)의 첫 전투에서 400여명 적을 소멸하였고 그후 23차의 전투를 거쳐 치안군 2,700여명과 일본군 300여명을 소멸하였다.
   다년간의 간고한 항일유격전을 거쳐 1944년까지 기동에는 2만 4천여개 항일 전투부대와 20만 민병을 가진 완정한 기열료(冀热辽) 항일근거지가 형성 되었다.
  1943년초에 주문빈은 중공중앙 북방분국과 진찰기군구에 가서 기동의 사업을 회보하였다. 3월 11일 주문빈은 회의에서 “기동사업에 관한 보충보고”를 했다. 그는 기동의 통일전선사업과 조직문제를 언급해 이야기했다. 주문빈의 회보를 자상히 들은 중공중앙 북방국에서는, 유격전쟁을 견지하고 곤난을 극복하며 힘을 모아 항일전쟁의 대반격과 전후 건국사업준비를 할 것을 지시하였다.
  기동에서 유격전쟁을 지속적으로 전개하려면 무기와 탄약이 문제가 되였다. 진찰기군구에서 회의를 하는 기회를 빌어 주문빈은 군구의 팔로군 병기공장에서 열심히 기술을 배웠다. 당시 진찰기군구 공업부에서 사업하고있던 장진은 주문빈과 함께 통현 로하중학교 당지부를 이끌었던 로전우였다.
 주문빈은 장진의 안내를 받으며 병기공장을 참관하고나서 10일간 계속 여러가지 무기 제조기술을 배웠다. 그는 무기 생산과정을 상세히 료해했을뿐만 아니라 몸소 로동자들과 함께 무기생산 작업에 참가하였다.
1943년 6월, 주문빈은 기동에 돌아와 자체로 병기를 제조하기에 힘썼다. 여러차의 실험을 거쳐 드디여 자체로 지뢰와 포탄사격설비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의 요구에 따라 섭영진(聂荣臻)사령원이 기술자들을 파견해 왔다. 그리하여 기동에 훌륭한 팔로군 병기공장이 있게 되었다. 손에 자체로 제조한 무기를 들고 충족한 탄약을 허리에 두른 유격대원들의 전투열의는 더욱 높아졌다.
  1943년에 이르러 기동항일유격근거지는 가일층 확대되였다. 이해 7월 7일에 중공중앙 북방국에서는 기동지구 당위원회를 중국공산당 기열변특별위원회로 개칭하였다. 그리고 산하에 다섯 개 지구위원회를 두었다. 주문빈은 기열변특별위원회의 조직부 부장사업을 맡은 동시에 계속 기동 동부의 항일유격투쟁을 책임졌다.
주문빈은 기동에서 항일투쟁을 활발히 전개함과 동시에 계속 조선혁명자들과의 련계를 확보하고있었다. 그는 중국의 항일전쟁승리는 곧바로 조선의 반일투쟁승리로 이어질것이며 조선의 독립을 가져올수 있다고 확신하고있었다. 그는 형들을 통해 북평과 상해에 있는 조선혁명자들과 련락을 가졌고 또한 중경에 있는 조선의 반일지사들과도 줄곧 련락을 유지하고있었다. 그는 평안도 출신였기때문에 이 시기 조선민족혁명당의 평안도 특파원의 신분도 가지고있었다.
1944년에 들어서 항일전쟁의 정세는 날로 유리해졌다. 유럽의 독일파쑈가 붕괴의 변두리에 이르렀고 동방의 일본제국주의자들도 인력과 물력의 부족으로 수세에 몰리기 시작하였다. 태평양전쟁에서 거듭되는 타격을 받은 일제는 중국 강점지에서의 략탈을 더욱 가심화했다. 이러한 정세를 파악한 주문빈은 계속 투쟁을 견지하고 중국항일전쟁의 최종 승리를 이끌어내리라 작심하였다. 그는 언녕 일제의 패망을 예견하고있었고 눈길을 산해관 넘어 중국동북과 조선으로 돌렸다. 전반 아시아 여러 민족인민의 항쟁은 꼭 최후의 승리를 이룩하리라 그는 굳게 믿고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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