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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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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장 화전군정대학과 길동군정대학
2018년 05월 17일 20시 09분  조회:444  추천:1  작성자: 김성룡

1946년 국민당군이 장춘과 길림시를 점령하자 길림성 당위원회와 성정부는 돈화를 거쳐 연길에 도착하였다. 따라서 길림성 군구와 정부기관, 군정학교가 모두 연길로 옮겨졌고 연길은 동만해방구의 정치,군사 중심지로 되였다. 그리고 연변지역은 동북에서 우리군의 가장 확고한 근거지의 하나로 되였다.

국민당군이 수시로 공격해올수있는 위급한 상황에서 동만근거지를 더욱 공고히하기 위해 길림성 당위원회와 성정부는 군사, 정치 자질이 높은 대량의 기층간부를 양성해 정권을 공고히하고 토지개혁을 실시하며 생산을 발전시켜 전선을 지원하도로 하였다.

동북에 온 공산당과 조선의용군은 처음부터 간부양성에 중시를 돌리고 심혈을 기울렸기때문에 각지에 여러 군정대학교들이 있었다. 아군이 동만과 북만으로 철수함에 따라 각지 군정학교들도 북만과 동만에 집중되기 시작했는데 1946년 5월에 연길에만 하여도 4개 군정학교가 모이게 되였다.

화전으로부터 철수하여 온 화전군정대학, 동북군정대학 동만분교 그리고 조선의용군이 건립한 조양천교도대, 연길에서 꾸린 길동군정대학이였다.

 

조선의용군 7지대 주요 간부와 장병들

화전군정대학을 설립한 의용군 7지대 주요 간부들

 

화전군정대학은 1946년 1월 14일 조선의용군 제7지대가 화전에서 설립한 군정학교로서 300여명 학원이 있었다. 주요 책임자는 교장에 최명, 부교장에 량환준이였다. 1946년 음력설기간 동북국의 명령에 따라 산성진에서 동북군정대학 동만분교가 설립되였는데 도석도가 교장 겸 서기를 맡았다. 동만분교의 백여명 학원들은 화전에서 강의를 받다가 화전이 점령되자 화전군정대학과 함께 연변으로 철수해왔다.

 

화전군정대학 출신의 서계영(82세, 연길)

 

화전군정대학에 있었던 서계영 로인은 당시 상황과 혁명에 참가하게 되였던 경위를 답사팀에 이야기해 주었다.

“광복후 각지에 토비가 많았습니다. 특히 조선사람들을 많이 괴롭혔는데 우리집도 토비들에 의해 불에 타버렸습니다. 그대 이웃한 한족이 저와 의형제처럼 지냈는데 우리를 많이 도와주었습니다. ”

 

광복후 연변처럼 조선족이 비교적 집중된 곳과는 달리 북만, 남만, 길림지역을 비롯한 산재지역의 조선족 농민의 피해는 더욱 막대하였다. 선량한 백성들은 비록 민족이 다르지만 서로 믿고 도와주면서 지냈지만 국민당과 결탁한 토비들은 조선사람을 미워하면서 더 극심하게 괴롭혔던것이다.

서계영 로인의 회억에 의하면 당시 팔로군 한분이 말을 타고 지나가다고 자기집에서 하루밤 머물고 갔는데 화전에 조선사람들의 군정학교가 있다며 그리고 가라며 쪽지를 써주었다. 그리하여 이웃한 한족 형과 함께 가려했지만 그 한족 형은 그래도 국민당군이 정통이라고 생각하면서 따라 주지 않았다고했다. 그냥 앉아서 당할수는 없었다. 자기가 가꾼 터전을 지키고 조선사람도 이 땅에서 주인되여 살수있는 길은 혁명의 길 뿐이였다. 그리하여 서계영 로인은 혼자 화전으로 떠났다고했다.

당시 화전군정대학은 시험을 쳐서 학원을 받아들여 정치대와 군사대로 나누었는데 학원은 40여명 녀성학원을 포함해 250명이였다. 그후 서란부대로부터 한개 교도중대가 조동되여 와서 전교 학원들은 3개 중대로 편성되였는데 그 수는 350명이였다.

 

원 연변조선족자치주 주장이였던 조룡호 로인은 화전군정학교 생활과 학습상황을 이렇게 소개해 주었다.

“1928년 4월 반석에서 출생했습니다. 그해가 바로 우리 부모들이 한국에서 중국에 들어온 해입니다. 1945년 ‘8.15’에 길림 천강이라는 곳에서 소학교 교원을 하다가 이듬해 1월에 화전군정학교에 자원해서 갔습니다. 조선의용군 선견대 세사람이 우리 천강에 와서 조선족 농민동맹을 통해 학원모집을 했던것입니다. 나는 교원이고 또 청년동맹 맹원이기도했습니다. 그래서 청년들을 모아놓고 군정학교의 취지를 들었고 혁명의 전도를 생각하기 시작하였으며 곧 청년동맹의 소개신을 가지고 마을청년들과 함께 길을 떠났습니다. 천강서 길림까지 딱 백리입니다. 백리를 이틀 걸어 길림시에 가서 다시 길림시 청년동맹의 소개를 받아가지고 길림에서 화전까지 삼일간 걸어갔습니다. 학교에 가보니까 그때는 군정학교라 했지만 학교가 아주 스산했습니다. 해방전(광복전)의 소학교 자리를 리용해서 군정학교를 했는데 걸상과 책상도 소학교애들이 쓰는것을 썼고 자는것은 콩크리트 바닥에 그냥 짚을 펴놓고 잣습니다. 그때 정말 간고했습니다. 식사는 주요하게 고량밥(수수밥)을 먹었고 소금물에 배추를 섞어서 반찬으로 먹었습니다. 거기에서 삼개월간 공부했습니다. 당시 공부는 군정학교의 령도들이 관내 연안에서 대다수 나왔습니다. 박훈일이요 최명이요… 박훈일은 조선의용군 7지대 지대장이였고 최명은 정위였습니다. 그 학교는 모두 조선족이였습니다. 그래서 거기에서 정치, 군사, 시사 이런 방면에 학습을 하다가 국민당이 들어오는 바람에 화전에서 연변에 나오게 되였습니다.”

 

조선의용군 7지대의 최명이 교장을 겸하고 윤태형이 조직교육과 과장을 맡아 학교의 수업과 행정사무를 전면 책임졌다. 정치과의 주요내용은 사회발전사와 중국공산당 당사, 정치경제학이였으며 군사과의 주요내용은 보병작전과 총, 포 사격이였다.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제9기 전국위원회 부주석인 조남기 상장도 화전군정대학에서 공부했다.

“주보중장군은 나를 보며 배양할 가치가 있으니 먼저 참군하지 말고 학습하라고했습니다. 그래서 길림군정대학에 가게 되였습니다. 보낼때는 동북군정대학 길림분교였습니다. 학교는 길림시에 있었는데 나는 한어말을 잘 못했기에 며칠 안되여 적응하지 못하고 다시 화전에 가게 되였습니다. 조선의용군 제7지대가 꾸린 조선족 군정학교였습니다. 가 보니 다 조선족이였습니다. 그때 나는 문화정도가 낮아 겨우 소학교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인식을 제고하고 사상면에서 진보하기 위해 정치과를 선택하려했는데 군사과에 배정되였습니다. 그래서 다시 길림분교에 가서 한족과 함께 공부했습니다. 큰 결심을 내리고 한어말공부부터 많이 했던것입니다. 그러다가 1946년 7월에 우리는 연길로 철퇴하게 되였는데 그때 이 두 학교가 합쳐졌습니다.”

  

1946년 5월말에 장춘, 길림의 당조직과 군대는 연길로 철수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국민당군이 화전으로 공격하자 화전군정대학 학원들도 명령에 따라 대후방인 연길로 향했던것이다. 화전군정학교 학원들은 연변에 가서 더욱 확고한 근거지를 만들고 언제가는 다시 고향땅으로 올것이라는 결의를 다지며 연길로 떠났다.

 

1945년말부터 1946년2월까지 연변에는 길동군정대학과 연변대학 학생모집을 한다는 통보가 나타났다. 소식이 전해지자 수많은 뜻있는 청년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길동군정대학 준비위원회는 1946년 3월 20일에 지금의 연길시 중앙소학교 자리에서 정치, 작문, 수학 세 과목 시험과 신체검사를 진행하여 500명 학원을 모집하였다. 여기에는 조선족 학원 380명과 조선족 녀성학원 50명이 포함되였다.

 

길동군정대학에 갈때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김금옥 로인(80세, 연길)

 

길동군정대학을 다녔던 연길시의 김금옥 로인은 당시 학교에 가던 상황을 이렇게 회억하였다.

“가문에서 시집보낼 궁리들을 하고있었습니다. 이러다는 안되겠다고 생각했는데 어떻게 하다나니 길동군정대학 학생모집 광고를 보았습니다. 그래서 조금씩 돈을 모아서 차표를 끊었습니다. 그리고 보따리를 하나 꿍져 사랑칸에 감추어놓았습니다. 3월27일부터 길동군정대학에서 시험을 쳤습니다. 26일 표를 끊어 놓았습니다. 그때는 농사철이 아니여서 오빠는 놀러 나가고 엄마와 형님이 집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형님과 어머니가 있어서 밖에 나갈수 없었습니다. 나는 업고있던 조카를 엄마한테 밀어 맡기며 놀러 나가라고했습니다. 그러자 엄마는 얘가 왜 이렇게 아침에 똘구는가고 했습니다. 엄마가 밖에 나간후 형님이 물동이를 이고 나가자 사랑칸에가 보따리를 쥐고 문을 나오려고 하는데 형님이 들어왔습니다. ‘어디가오?’ ‘형님에 내 군대에 가오’ ‘군대어디에 가오?’ ‘연길에 가오.’ ‘집에 식구들이 없는데 어디에 가오…’ 나는 자동차부로 냅다 뛰였습니다. 자동차에는 사람들이 이미 꼴똑 앉았습니다. 나는 보따리를 위에 올리 던지고 그사람들이 손을 쥐였습니다. 그래서 차에 탔는데 우리 엄마가 맨발바람으로 달려나와서 내리라고 했습니다. 한창 있다가 차가 떠나자 엄마를 보니까 엄마가 그냥 손짓을 하고 계셨습니다.”

 

봉건유습이 채 가셔지지 않은 당시, 녀성으로서 남성들과 함께 학교에 다니고 함께 공부하고 생활한다는것은 상상하기도 어려운 일이였다. 하지만 뜻있는 우리민족 젊은 녀성들은 새로운 삶에 대한 욕망과 배움의 의지를 굽히지 않았던것이다.

 

(김금옥 로인)“…그래서 연길에 와서 군정대학교에 보명하니까 연길시 중앙소학교에가 시험을 쳐라했습니다. 산술시험을 쳤고 어째서 참군하는가 물었습니다. 거기에 일본 동경법대를 졸업한 녀자가 있었습니다. 태금옥이라고 그때 27살이였습니다. 그외에는 모두 일반학교를 다니던 녀자들이였습니다. 그사람들이 몽땅 시험치고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한개 녀성대를 만드는데 거기 지도원이 현옥선이라고 녀학교 선배언니가 있었습니다. 나는 참군을 그렇게 했습니다. 우리 오빠가 왕청에 갔는데 곁에서 말하다러고 했습니다. 녀자가 군대에 가면 남자들과 한방에서 잔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오빠가 이틀이나 걸어서 왔습니다. 와서 보초들과 이름을 대조하고 찾아왔던것입니다. 내가 숙소에 들어서니 오빠가 있었습니다. 오빠라는 말도 못하고 나를 잡으러 왔다고 겁에 질려있었습니다. 보초가 와서 오빠를 남성대에 배치해 사흘간 있으면서 우리의 훈련과 생활을 보게 했습니다. 떠나면서 오빠는 우리의 학습과 생활을 보고 시름놓고 떠난다구 했습니다. 군정대학에서 우리 오빠에게 참군증명을 주었습니다. 현에 주재문 현장이 참군증을 주었는데 왕청현에서 내가 제일 처음 참군했습니다.”

 

학생모집이 완수되자 1946년 4월에 길동군정대학 개교식이 성대히 열렸다.

길동군구 지도간부와 조선의용군 간부들이 참석한 자리에서 학원들은 마음속으로 한생을 혁명에 충성할것을 맹세하였다.

길동군정대학은 괴뢰만주국 학교자리였던 지금의 연길시 하남가 민족호텔자리에 세워졌다. 교장은 길동군구 사령원 강신태가 맡았고 부교장은 중국공산당 연변지방위원회 서기였던 옹문도가 맡았다. 그리고 교도원은 조선의용군의 김룡수가 맡았다. 120명 한족 학원들은 1중대에 편입되고 380명 조선족 학원들은 2중대, 3중대, 4중대 그리고 녀성중대로 편성되였다.

길동군정대학 1기생인 황인순 로인이 소개한데 의하면 당시 생활은 아주 간고하였다. 붉은 수수쌀밥에 멀건 소금국을 먹으면서 학습했고 자력갱생, 간고분투의 정신으로 스스로 콩나물을 기르고 땔나무도 하군 했다. 그리고 키가 작아 3.8식보총을 겨우 다루었지만 이악스럽게 사격, 투탄, 긴급집합 등 실전련습을 훌륭히 완수해냈다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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