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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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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4회 지하투쟁의 별, 조선혁명가 김산④
2007년 12월 31일 16시 14분  조회:8422  추천:63  작성자: 김성룡

1930년대 후반기에 들어서서 중국의 공산주의운동은 큰 시련을 겪게 되었다. 중앙쏘베트구역은 적들에게 강점되고 당중앙과 홍군은 수배에 달하는 적의 포위를 뚫고 간고한 장정을 진행하고있었다. 국민당 통치구의 당조직도 적의 엄밀한 감시를 받았고 많이 파괴되였다. 게다가 당내 극단적인 좌적사상으로하여 더욱 큰 곤경을 겪게 되었다. 그러나 진정한 공산주의자들은 곤난 앞에서 굴하지 않았다. 그들은 진리를 믿었으며 굳은 의지로 항쟁을 멈추지 않았다.

얼마간 체력을 회복한 김산은 다시 북평시 당조직을 찾아왔다. 당조직에서 잘 믿어주지 않자 그는 정신적인 고통을 참으며 새로운 투쟁을 준비하였다. 이때 장가구에 있던 조아평이 김산의 서한을 받고 북경에 찾아왔다. 혁명에 몸담은 이들 련인은 북평시 삼안정호동(三眼井胡同) 26번지에 간소하나마 행복한 살림을 차렸다.

이들 혁명부부가 살았던 삼안정호동은 지금의 북경시 동성구 경산동가(景山东街) 89번으로 되어있다. 좁은 골목길과 단층집들이 촘촘히 들어앉아 번지수를 확인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다. 낡은 단층집 문에 붙어있는 89번지라는 주소를 확인하였다. 옛터에는 새로운 건물이 일어섰지만 세월이 하도 많이 흘렀기 때문에 역시 찌그러진 낡은 집이였다. 이곳에서 김산은 《정치경제지리》, 《제3차 문화위기》를 비롯한 저서를 편찬해냈다.

 

 

북경시 경산동가 삼안정호동, 김산과 조아평 부부는 이곳에서 가정을 이루었다.

 

권립 교수)“1935년 9월에 김산은 석가장으로 갔습니다. 그는 철도로동자들속에 들어가 일어학습반을 꾸린다는 이름을 내걸고 국민당의 백색테로를 반대하고 착취자들에게 대항할데 관한 혁명 교양사업을 벌이고 당조직을 건립하고 당원을 발전시켰습니다.”

1935년 가을, 김산은 북평시 당조직관계를 회복할수 없게 되자 석가장으로 향했다. 그는 류한평(刘汉平)이라는 이름으로 중국인 송광아(宋匡我)를 도와 《상보(商报)》를 꾸리면서 항일선전활동에 종사하였고 또 중국인 친구 집에서 일본어훈련반을 꾸리면서 맑스주의를 선전하였다.

김산은 또 주효성(朱效成), 주가화(周家华)를 비롯한 공산당원과 련계를 갖고 평한(平汉)철도 부륜학교(扶轮学校) 당지부를 설립하였다. 그의 노력으로 당지부는 왕서량(王书良), 강서화(康瑞华), 도희진(陶希晋), 주련(朱璉), 곽수동(郭树栋), 륙청렴(陆清廉), 전진(田珍)을 비롯한 7명 당원을 발전시켰다. 이들은 해방후 전국인대 법률위원회 고문, 중앙조사부 부부장, 석가장시 시장, 국가감찰부 전원, 운남성 부성장을 비롯한 중국공산당의 요직을 맡았다. 김산은 늘 석가장 철도로동자들과 접촉하면서 공회 정치훈련반에서 강의하기도 하였다. 그는 안해 조아평과 함께 적극적인사업을 진행하여 평한철도 부륜학교 당지부를 토대로 하북성 당위원회 직속으로 중국공산당 석가장 사업위원회를 설립하였다.

(권립 교수) “북경에서 12.9학생운동이 터지자 석가장에서는 김산동지가 조직한 지하당조직이 핵심적 역할을 일으켜서 수천명 로동자, 학생, 지식인들이 떨쳐나섰습니다.” 

김산과 당지부는 석가장의 학생, 로동자들을 동원해 북평 학생들의 “12.9”애국운동을 성원하기로 결정하였다. 수많은 학생과 로동자들의 호소를 받들고 거리에 떨쳐나와 일본제국주의를 반대하자는 구호를 웨치면서 성세호대한 시위를 진행하였다. 시위가 끝난후 김산은 지부회의를 열고 적시적으로 경험을 총화하고 금후의 투쟁방향을 명확히 하였다. 이때 조아평도 석가장에 와서 김산과 함께 생활하고 투쟁하였다.

“12.9”성원행사가 끝난후 김산은 상해에 있는 조선혁명자들의 부름을 받고 상해로 갔다.

 

 


석가장에서의 김산활동을 회억한 라청의 글(자료사진)

 


김산이 석가장에서 당원들을 발전시킨 상황에 대한 라청의 회억자료

 

상해에서 김산은 광주봉기를 함께 겪었던 전우들인 김규광, 박건웅 등과 재회하였다. 그들은 서로 투쟁경력을 이야기하였고 금후의 투쟁방략을 토의하였다. 이때 승리적으로 2만 5천리 장정을 마치고 섬북에 도착한 중국공산당은 《항일구국을 위해 전체 동포들에게 보내는 글》을 발표하였다. “8.1”선언이라고 하는 공산당의 이 정신에 따라 조선혁명가들도 통일전선조직을 만들어야했다. 그리하여 김산은 김규광, 박건웅을 비롯한 조선혁명가들과 함께 조선민족해방동맹을 결성할 준비에 들어갔으며 중조 항일단체의 공동항일의 길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1936년 4월, 김산은 상해로부터 남경에 갔다. 그는 중국의 유명한 민주인사인 라청(罗青)의 집에 머물렀다. 그는 아름다운 현무호(玄武湖)를 구경하면서 유지인사들과 투쟁방략을 적극 담론하였다. 그는 이시기 남경의 《5월문예사》에서 활약하던 조선청년 정률성을 만나 보기도 하였다. 김산의 친밀한 전우 박건웅이 정률성의 누이와 혼인하였던것이다.

상해, 남경지역에서 활발히 활동하던 김산은 이해 여름 상해에서 창립된 조선민족해방동맹에 가입하였고 조아평과 함께 상해에서 생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들 부부는 얼마 함께 있지 못하였다. 김산은 조선혁명가들의 파견을 받고 중국공산당 중앙을 찾아 연안으로 가게 되었던 것이다.

라청과 정률성이 포구에서 김산을 전송해 주었다.

(권립 교수)“우리민족의 탁월한 지하일군인 김산은 6년동안 당조직의 승인을받지 못하고 어려운 나날을 보내다가 끝내 중공중앙 북방국의 도움으로 1936년 가을에 연안에 도착했고 연안 항일군정대학에서 교편을 잡게 되였습니다.”

중국공산당 북방국의 소개신을 소지한 김산은 1936년 10월 서안 팔로군 판사처를 거쳐 섬북의 보안(保安)에 도착하였고 12월부터 와요보에 있는 홍군항일군정대학에서 일본경제에 관한 강의를 하였다.

연안에서 김산은 비교적 오랜 시간을 보냈다. 1937년 1월 그는 홍군대학을 따라 연안에 와서 항일군정대학에서 교편을 잡았다. 4월 12일부터 19일까지 기간 그는 서북청년 구국회 제1차 대표대회에 참석해 연설하였다. 회의기간 그는 장학량의 동북군 교도대에 있었던 중국공산당 지하당원이며 조선혁명가인 서휘를 만나 보았다.

4월 20일 김산과 조아평의 아들이 하북성 안국현 농촌에서 태여났다. 안해의 서한을 받은 김산은 격동된 심정을 금할수없었다. 그는 답장에서, 아들이 크면 꼭 그에게 백의동포의 후손임을 알려주고 군대에 보내 민족해방을 위해 투쟁하게 하라고 당부하였다.

6월 중순 김산은 연안에서 미국의 녀기자 헬렌(님.웨일즈)을 만나게 되었다. 그녀는 남편인 에드가.스노를 따라 첩첩한 봉쇄를 뚫고 연안에 도착했던 것이다. 스노는 모택동을 만나 여러차례 취재를 하고 유명한 저서 《중국의 붉은 별》을 세상에 내놓았다. 그리고 헬렌은 도서관을 전전하면서 열심히 외국문 도서를 빌려가는 김산에게 주의를 돌리기 시작하였다. 외국문에 숙달하고 높은 문화수준을 갖춘 김산은 연안에서 특별한 인물이 아닐수 없었다. 그녀는 강한 호기심을 가지고 김산에게 접근하였으며 드디어 김산의 파란만장한 전투적 생애를 듣게 되었다.

이 시기 김산은 더 없는 고통에 시달리고있었다. 1937년 중국의 항일전쟁이 전면 개시되였지만 전선에 나가 총을 들고 적과 싸우지 못하는 몸이 한스러웠다. 그렇다고 당조직 활동을 하려하여도 누구도 그를 믿어주지 않았다. 그는 자기의 억울함을 어디에 하소연 할 곳도 없었다. 당시 섬감녕변구 보안처에서는 김산을 의심대상으로 짚고있었다.

1938년 10월 8일, 중앙정보부와 사회부 부장을 맡은 강생(康生)은 김산을 일본특무로 지목하였다. 그러나 한동안 조사해 보았지만 아무런 증거도 없었다. 그렇다고 의심을 풀만한 단서도 없었다. 강생은 드디어 보안처의 보고에 동의하고 일제기관의 정보일군으로 김산을 단정하였다. 그리하여 김산은 비밀리에 처형되고 말았다.

 

 


섬북 연안의 토굴집들

 


섬북에 있을때의 김산의 모습

 

1941년 미국에 돌아간 헬렌은 님.웨일즈라는 필명으로 김산의 일대기를 다룬 저서 《아리랑의 노래》 영문판을 뉴욕에서 출판하였다. 1946년 한국에서 이를 《아리랑》으로 번역하여 출판하였고 1953년에는 일본문판이 나왔다. 그때로부터 사람들은 조선혁명자 김산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조선혁명자 김산의 아들 고영광씨는 성인이 된 후에야 자신이 조선족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김산의 명예가 회복되지 않았기 때문에 조아평은 줄곧 아버지에 대한 사연을 그에게 알려주지 않았던 것이다.

김산이 활동했던 북경시 홍루사적지를 찾은 고영광씨는 자기가 아버지에 대해 알게된 사연을 이야기하였다.

“어머니는 8살 때 나에게 아버지의 사진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다 문화대혁명시기 자기가 조선족인줄 알았습니다. 그전에 내가 태여난후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편지 한장 보내왔습니다. 문화대혁명시기 파묻어두었는데 후에 다시 찾을수 없었습니다. 주요 내용은 내가 태여 난 것을 알고 내가 참군하여 백의민족의 해방을 위해 분투하길 바란다고 했습니다. 그때부터 아버지의 일을 알게 되였습니다. 그리고 신분증의 민족도 조선족으로 고쳤습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절대 변절자가 아니라고 알려주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로동지들을 찾아 료해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중앙조직부에 편지 두통을 썼습니다. 조직에서는 다시 조사를 하고 45년만에 아버지의 억울한 루명을 벗겨주었습니다. 그사이 스노 부인(헬렌)을 알게 되었고 그가 부쳐온 책을 받았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희생소식을 듣고 크게 놀라면서 이는 력사의 가장 큰 비극이라고 하였습니다. 스노 부인의 책은 아버지에 대해 전면적으로 잘 소개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에게서 듣고 하여 지금은 아버지에 대해 많이 알게 되였습니다. 특히 조선족 연구일군들이 이면에서 많은 연구를 하고 지지를 주었습니다. 감사합니다.”

1983년 1월 중앙조직부에서는 “김산에 대한 그릇된 판결을 취소하고 그의 당적을 회복할데 관한 결정”을 지었다. 결정은 김산동지가 피살된 것은 특정된 력사조건하에서 발생한 한차례 억울한 사건으로서 시정하여야 한다고 지적하면서 김산동지는 당에 충성하고 우리나라 인민의 혁명사업에 기여하였다고 평가하였다.

 

 


김산의 아들 고영광씨와의 인터뷰장면

 


김산의 억울한 루명을 벗겨줄데 관한 당의 결정문서(사진자료)

 


《아리랑의 노래》 일본문판

 

자신의 전반 투쟁생애를 총화하면서 김산은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내 청년시절의 친구나 동지들은 거의 모두가 죽어 버렸다. 민족주의자, 기독교신자, 무정부주의자, 테러리스트, 공산주의자...수백명에 이른다. 그러나 내게는 그들이 지금도 살아있다. 그들의 무덤을 어디로 정해야하는지 따위는 전혀 마음에 두지 않았다. 전장에서 사형장에서 도시와 마을의 거리에서 그들의 뜨거운 혁명적 선혈은 조선, 만주, 시베리아, 일본, 중국의 대지속으로 자랑스럽게 흘러들어갔다. 그들은 눈앞의 승리를 보는데는 실패했지만 력사는 그들을 승리자로 만든다. 한 사람의 이름이나 짧은 꿈은 그 뼈와 함께 묻힐지도 모른다. 그러나 힘의 마지막 저울속에서는 그가 이루었거나 실패한 것이 단 한가지도 없어지지 않는다. 이것이 그의 불사성이며 그의 영광 또는 수치인 것이다. 자기자신이라 할지라도 이 객관적 사실은 바꿀수가 없다. 그는 력사이기 때문이다. 그 무엇도 사람이 력사라고 하는 운동속에서 점하는 자리를 빼앗을수가 없다. 그 무엇도 사람을 빠져나가게 할 수가 없다. 유일한 그의 개인적 결정이라면 전진할것인가 아니면 후퇴할것인가, 싸울것인가 아니면 굴복할것인가, 가치를 창조할것인가 아니면 파괴할것인가, 강해질것인가 아니면 나약해질것인가 하는 것 밖에 없는 것이다.” 님 웨일즈의 《아리랑》에서 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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