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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향기‍/ 림순자
2017년 05월 16일 16시 18분  조회:1968  추천:0  작성자: 단비
지금은   하늘나라에   계시고   나의   곁을   떠난지  오래된   시부모님이지만   나는   아직도   시부모님의   사랑을   지척에서    느낄수   있다.  그것은   시부모님이   남기고   간   사랑의   향기가   아직도   따뜻한   차   한잔처럼   나의   마음을  데우고도   남음이   있으니   말이다.    
   
        리씨   가문에   시집와서   시부모님의    사랑을   독차지하다싶이   한   나는   둘째   며느리기는   하지만  내가  시부모님의   제사상을   책임지고  차려드린다. 

        시어머님이  돌아가신지   7년,    시아버님의   3년제사까지   그리고  해마다    돌아오는   청명,    추석에   한번도  빼놓지않고   정성드려   차례를   지내게   되는데는   며느리로서의   의무도   있지만   그보다   시부모님이   나에게    주고간   사랑에   조금이나마   보답하기  위하여서이다. 
 
       시부모님은   당신  아들이   복이  있어   나같은   안해를   맞았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내가   복이있어   좋은   남편과  시부모님을   만났다고   생각한다.  
 
       어려서부터  아버지없이   자랐던  나는   시집가면서부터   시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를수   있는것만으로도  얼마나   황홀했는지   모른다.  내가  처음   남편과   함께   시집어른들을   만나러  갔을때   시아버님의   면상에는   웃음이  떠나지를   않았다.   하도   궁금하여   어른들이    주의하지않는   틈을  타   남편한테   물으려고   하던차   시어머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당신은   왜   벙글써해서   입을   다물줄   모르는가?"고   하니깐   시아버님이   하는   말씀이 "우리  둘째   복이  많은것   같아!   어디에서   저렇게   함박꽃같은   아가씨를   데려왔는지   모르겠어!   그래서   그냥  좋아!"라고   하는   것이였다.  시부모님은   나를   마음에   쏙   들어하는   눈치였다.
 
      그때만해도   군인은    일등   남편감이였는데   현혁군인인  남편의   집에서   나한테   엄청   호감을   갖는데야  나로  말하면   호박이   넝굴채로   굴러  들어온   셈이였다.  비에  씻긴듯이   가난했던   우리집   형편을   손금보듯이  잘   알고   있었던   남편은   가정조건을   보고   색시를   데려올   생각은   꼬물만치도   없다면서   우리  두   사람은   선   후배  사이로   소학교   중학교.  고중까지   같이   다녀서   서로를   잘   아는데다가   두   사람이  마음이   맞고   이제   량가집   부모님의   허락만   받으면   얼마든지   결혼할수   있다고   하였다. 
 
       그렇게   나는   두집  부모님의   축복속에   달랑  50원   팔아   장농  하나를  마련하고  그  안에   이불  두채를   얹어  가지고   리씨가문에   시집왔다.  여기에서  잠간   에피소드   하나  짚고   넘어가자.  아무리   30 년전이라고   하지만   장농을   50원에  살수는  없었다.   남편이   보내준   목재로   목수  솜씨좋은  친구가  장농을   짜  주었는데   억지로   50원   수공전을  준것이   그나마   돈을  좀  썼다.  장농문   유리의  그림은   그림  잘   그리는  동창이   그려   주었고  도색은   나절로   하였다.  그러니  례단은  모두  생략이란  단어로  대체  하였다.  작은   소매점이라도   챙길만큼   없는것이  없이  한  트럭   꽉  박아   싣고온   맏  동서하고는  하늘과   땅   차이  대조가   되였다.  그럼에도   내가   시부모님의   사랑을    더   차지할수   있었던것은   가난이란   생활환경이   나에게  너무  많은것을   가르쳐준덕에    얼굴은   탱탱한  새  색시였지만   마음은   초로의   늙은이가   다   되여  척하면   삼천리라고   시부모님의   억양이나   말투를  들어도  시부모님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할수  있었고   그러다   보니   시부모님의   생각과   나의  보조가  잘   맞았던것  같다.   
       성정이 쾌활  한데다가 워낙 자랑을 잘 하는 편이였던 시어머니는 동네분들에게 "자랑애"로 통했다. 시어머니는   밖에만  나가면  둘째   며느리   자랑을  하였는데   결과적으로는 "우리  둘째며느리   모든면이  나를   닮았다니깐"하면서  둘째   며느리를   빌어   당신  자랑을   하고   싶었던것  같다.  물론   우리   시어머니의   빛나는   력사는  자랑할   정도가   아니다.  13살에   참군하여   사선을   넘나들며   전방에서   부상병들을  구하는  간호사로  뛰였고   젊어서는   도문  의약공사   경리로  맹   활약   하기도   하였으며   나중에는   남편따라   연길에   오게되니   조동하는 곳  마다에서   당위서기   공장장등   령도직위에서   솔선수범하였다.  내가  그런   시어머니   마음에  들었으니  나의   시집살이는  순풍에   돛  단듯   불보듯  뻔한  일이   아니였겠는가?!     
 
       첫애를  임신하고  입덧이  너무   심했던   나는   음식냄새만  맡아도   구역질하며   토하군  하였다.  그러다보니  아침  일찍  일어나   시어머니와   함께하는   부엌일을   도저히   할수가   없었다.  원래   군인성격이였던 시  어머니는  아침에   일어났다하면   우당탕하고   내는   솥  뚜껑소리,   그릇소리에   집식구들이   늦잠을   잘래야  잘수가없어   시어머니가   기상나팔이였다.  그런데   내가  임신하고는  얼마나   소신성있게  그릇을   다루었는지   어떤때는  내가  밥상을   다   차릴때까지도  꿈나라에서   헤매다가   남편이   깨워서야   일어난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깨여나서  너무   민망한   나머지   몸  둘바를   모르면   시어머니는  "밥도  잘  먹지   못하는데   잠이라도   실컷   자라고   내가   일부러   깰가봐  조심  조심   일하다   보니   나만   빼고  온집  식구가   모두   늦잠자고   금방  일어   났으니   민망해   할것   없다"면서   위안해  주었다.    시아버님께서도"  홀몸도  아닌데   내가   조금씩  도우면  되니깐  며느리는  걱정말고   아침  잠이라도   푹  자  두오!"라고   하고는   " 당신  혼자   아침밥   지었소?   불은   내가   때지않고   귀신이   와서   땐는가?!"고   하면서   어색해하며   궁지에   몰려있는  나를  적시적으로   구해    주군  하였다.  덕분에   나는   한결  마음이   가벼웠고 "가는것이  있으면   오는것이  있다"고  하지만   나는   오는것이  있으니  가는것이  있어   내가  시부모님한테  더  잘  할수  있었던것  같다. 
 
      시부모님은  퇴근   할때마다  서로  시합이나   하듯이   시아버님은   과일들을  이것  저것  한구럭씩  사들고  들어오고  시어머니는  채소  육류들을  사들고  들어와서는  나의  구미를  맟우느라  엄청  신경을   썼다.   지금처럼   유족한  때도   아닌   시절에   마음이   앞서지   않는다면   절대로   할수없는  일이였다.  그렇게   나는   시부모님들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첫애를   출산하게   되였고   둘째딸은   계획도   없었는데   완전히   시아버님   "지시"에   따라   낳았다. 
        "계획생육"   "독신자녀"를   극구   제창하던때에    우리   부부도   큰딸   하나로만   만족하고   시부모님  몰래   가만히   "독신자녀증"을   발급받았다.  

        몇해가   지나도   둘째를   출산하려는   기미가   보이지않자   시부모님은   은근히   손자를   기다리는   눈치였다.  우리는   그냥   모르는척   하고   둘째출산  말만   나오면   말머리를   다른데로  돌리군   하였다.  그런데   하루는   시아버님의   호출로     시집에   갔었는데   온집   식구가   저녁상에   마주앉기는   했어도   웬지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시아버님이  엄청  노여운  기색으로  저녁진지를   드시는데   나는   밥이  코구멍으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후딱  먹고   일어  나려고  했다. 그런데   시아버님께서   나를  제지   시키기에   추측에   십상팔구는   나한테   무엇을    따지려고   한다는것을   눈치챘다.   속이   두근닷근이   되여서   내가   시부모님한테   무슨  잘못을   저질렀나   한참   생각하고  있는데   시아버님은   단도직입적으로  "둘째를   어느때   출산할건가"고   물으셨다.   나는  "갑자기   물어보니   뭐라   대답할지   모르겠습니다.   생각해보고  나중에  대답하겠습니다." 라고   했다.   하지만  시아버지는  여전히  굳어진   얼굴로 "  알고 있네. 자네들이 독신자녀증을   발급받았고   둘째는   계획도  없다는것을   말이네" 라고  하였다.   시아버님이   손자만   기다리는줄로   착각하고  있었던   나는   잔머리를   굴리며 "  형님네도   아들   낳는다고   둘째를   낳았어도   딸만  낳는것을   보고   저는  아들낳을   자신이   없어서   아예  포기하고   말았습니다."라고  말씀드렸다.   그러자  시아버님은   노기가  충천해서   "  딸이라도   자매간에  서로   의지하며   살아야지   왜   애들   커서  제   형제가   없으면   얼마나   외로울지를   생각하지   않소?  그리고   지금   젊은이들   자기   편할건만   생각하고   우리   조선족인구가   얼마나   줄어들고   있는지를   통  생각하지   않는다니깐!" 라고   말씀하는데   말문이   막힌   나는  한마디   대꾸도   할수가  없었다.
 
      결과적으로   시아버님의   의사에  따라   "독신자녀증"을   물리고   둘째를   낳았는데   딸을  낳았다.   시아버님이   우리   조선족   인구  증장률까지   념두에   두고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못했던   나는   지금도   그때일을   생각하면   나   자신이  부끄러워지게   된다.   시아버님의  예견대로   나의   두딸은   서로   의지하고   서로   도우면서   잘   살고   있을   뿐더러   부모한테도   너무나   지극정성이다. 
 
      시장경제의   충격속에  일찍   직장을   그만두고  장사의  길에   나섰던  나는   지방에서   10여년간   장사하다가   절강성   이우에   가서   또   10여년간    신발  무역을   하게  되였다.   그러다보니   해마다   설   명절때만  겨우  고향에   돌아와서   시부모님을   만날수  있었다.   그때마다    시부모님은   얼마나   기뻐하고   즐거워  하시던지.    명절   음식을   장만하고    부엌을   정리하다보면   내가   맨   나중에   음식상에   다가가게   되는데   그때마다  시부모님은 수저도   들지않고   나를   기다려   주었고   식사   끝나면 "상다리  부러지게   차려   잘   먹었다"고  치하   하시면서   "가족이   다   모이니   이제야   사람사는   집  갔다."고   하면서   엄청   외로움을   호소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   외로움을   마음으로   받아   드리기까지는   엄청   큰   대가를   지불하였다.
 
      세월을    이기는   장사가  없다고   시보모님의   년세가   고령으로  치달으자   두분의   자립이   어렵게   되여   나는  남편을    시부모님한테   보내여   돌보아  드리도록   하였다.   남편이   당신   부모님곁에서   수발을   들며   지극정성으로  모셨지만  시 부모님의   건강은   날에   날마다   못해갔다.   아무리   용맹한  수리개라해도    날개가   꺽이면  더는   하늘을   날수없듯이   한쪽   다리를   잘   쓰지못해   밖같    출입을   하지   못하게   되자   시어머님은   점  점  기력이   떨어지고   기억력도   나빠지면서   뇌졸증으로  인한   치매증세를   보이기   시작하였다.  
 
      나는   옆에서   돌보아  드릴수없으니  전화로   매일  시어머님한테   말  동무도  하여주고   치매방지   차원에서   손  놀림을   많이   하여야   하였기에  그냥   작품은   기대하지   말고   심심할때면   뜨개를   뜨라고   권유했다.  그런데   그  이듬해   음력설에   설   쇠러   시집에   갔다가   시어머님이    내놓은   선물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시어머님께서  손수  뜬   작품이였는데   나의   외손자   양말이였다.  물론   두짝의   색상이   제멋대로이고    크기도   엄청    크게   뜨셨지만   분명히    두쪽   양말의   크기가    똑   같았고  그  양말을   나의   외   손자한테   선물한다는   것이였다.   이제   겨우   유치원에   입학한  애   양말을  학교   갈   나이에  신겨도  빙글  빙글  돌아가게   크게   뜨셨지만   나는   외손자를   안아다   시어머니   무릅에    앉히고는   시어머님이   직접   증손자한테  양말을   신겨   보이게하였다.   너무   커서   장화처럼   무릅까지   올라온   양말을   보고   웃으운   나머지   애들처럼   손벽치며   좋아하는   시어머니를   보고   나는   속으로    눈물을    삼켰다.  생의  의욕에   나의   말대로   뜨개를   뜬것도   그렇지만   당신   생전에   증손자를   보게   해서   너무   기뻐하시며   증  손자한테까지   당신사랑을   쏟아  붓는   그  모습이   너무나도   나의  가슴을   뭉클하게  하였다.   금방  같이   밥상에   마주앉아   밥을   먹었는데도   기억을   못하시고   수시로   나에게   밥을   먹으라고   권하던   시어머니.  치매에   걸렸어도   마음에   항상   자식들이    있고   수시로   자식들을   챙기던   시어머님이였는데    자식들이   걱정되여   어떻게   우리곁을   떠났는지   모르겠다.
 
       돌아가시던  날    저녁    8시경에   내가  시어머님한테    전화하여   건강  상태도   체크하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보니    40분   정도   통화했다.    여전히   전화기를   놓기   아쉬워하는   시어머니를   겨우   달래서   "편히   주무시라"고   인사하고는  끊으려고   하는데   느닷없이   시어머님이  "  경옥이  에미  지금까지   수고했소!"라고   하시고는   수화기를  놓으셨다.  나는   어안이  벙  벙하여   큰   딸애보고   "얘!   경옥아  너의  할머니  아래  우  말이   맞지않게   편히   쉬라는데   나한데   경옥이   에미   지금까지   수고했소!   라고   말씀하시는걸  보니   아마도   치매가   더   심해진것  같다.   래일   아침  너의    아버지한테  전화해서   할머니를   병원에   모시고   가서   다시   한번   에마라이를   찍어보라고   해야겠다. " 라고  하고는   외손자를   잠   재우고  나도  샤워하고는   자리에   누웠다    밤   11시경에   갑자기   전화별이   울리고    컴퓨터에   마주앉아있던  큰  딸애가  거의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지르며   전화를   받는데   "아!  시   어머님이   돌아   가셨구나!" 하는  느낌이  오면서   야구   방망이에    뒤통수를  한대   호되게   얻어맞은것처럼   나는   앞이   캄캄해나고   온   몸의   기운이   쏙   빠지는것만   같았다.  
 
      그날   나하고   전화   통화를   끝낸   시어머니는   기분좋게   바로   주무셨다는데   밤   11시경에   화장실   가려고   일어나다가   쓰러지곤   그   자리에서   생을   마감했다. 
 
      뭐가  그렇게   급하신지   마지막길도   당신   성격처럼   군인성격으로   가시고.   또  데면   데면한것  같으면서도    셈세했던    당신성격에   걸맞게   당신   운명까지   예측하고는   하고싶었던   마지막   인사까지   나에게   남기고간   시어머님을   생각하면   그   당시    치매라고   오산했던   내가   너무   너무   부끄럽고   돈이   뭔지?  "이제   한해만   더   하고   그만  두어야지."하면서도   돈버는  욕심에   장사를   그만두지   못하고   끝내는 시어머니를   곁에서   돌보아   드리지도   못하고   하늘나라로   보낸것이  너무 너무 가슴아프다.  
 
      당신들   생전에   일요일이나   명절이면   떡이랑   순대랑   가득  해놓고   세간난   자식들들   모두   불러들여   먹이고는   뭐가   그렇게   좋으신지  맨날   집이   떠나가라   호탕하게   웃으시던   시어머님.    설명절이나   생일때면   애   어른   할것없이   꼭  꼭  돈   봉투를  챙겨주고는   덕담을   아낌없이   하셨던   시아버님.   자식사랑이   남다르셨던   시부모님이시다.  
 
      해마다   돌아오는   설   명절이면   시부머님의   빈자리가   더   더욱   크게   다가오면서   나의    마음은   허전하기   짝이없다.  "있을때   잘해.   후회하지말고."하는   한국  노래가사의   깊은   의미를   이제야   진정  가슴으로   깨달았다.  "살아  생전에   조금만   더   잘했을걸   조금만   더   잘   했을걸" 하고   후회도   많이   해   보지만   흘러간   강물이고   차떠난  역에서   발을   동동  구르는  셈이   되였다.    
 
       하지만   천국에  계시는   시  부모님의   령혼은  아직도   우리가족의   깊은  위로를   필요로   할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해마다   돌아오는  청명  추석이면  정성을   쏟아부어    차례를   지내게  된다. 
 
       너나없이   가담한  한국행에   남편과   시형, 시동생네  가족들이  모두   한국으로  떠나  가서   작년  추석부터는  13살되는  외손자와   나만   시부모님의  산소를   찾아가게   되였다.  시집식구들이  모두   출국하고  없는데   시부모님   제사를   이젠   그만   지내도  괜찮다는  동료들의  만류에도   내가   고집을   꺽지   않는   단   한가지   리유,  그것은   이렇게  해서라도   시부모님한테  진  내   마음의   빚을   조금이나마   갚고   시부모님께   지은   불효를   진심으로   용서받기  위함이다.     
     
      세월을  거슬러  시부모님을   모시고   함께   웃고   떠들며   시끌벅적   명절을   보냈던   행복한   추억이   이제는  그리움으로  변해   나의   가슴에   아련한   아픔으로   남는다.  내  마음의   아픔을  달래고   시부모님이    남기고   간   사랑을  기리는  마음으로   나는  해마다   오는   청명    추석이면   외손자를   앞세우고   시부모님의   산소로   찾아가   예쁜  조화로   묘소를   이쁘게   꾸며드리고   봄에는   싱싱한   국화꽃   한  묶음으로  만물이   소생하는   봄을,   가을에는   풍성한   가을   열매로   오곡백과  무르익는   황금가을을   알려   드리고  올   것이다.     
      시부모님은  가셨다.  하지만   두분이   남기고   간   사랑의   향기는   나에게   어떻게  살아야   후회의  씨앗을   남기지않는   삶인지를   알게  하였고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주어진   인생을  나이에   전전하지말고  가슴에  품은  꿈을   향해  또  한번  용감히   도전해  볼것을   권유하고  있다. 
 
      만물이   소생하는   화창한  봄날에   싱그러운   풀  내음의   향기를   맡으며   나는   차   한잔의  여유로   또  다시   시부모님이   남기고   간   사랑의   향기에   도취된채   새로운   미래를   향해   사랑의   향기가   한떨기의   목련화로   피여나는   현실에   도약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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